무협지/실명대협

제36장 一千番 銅牌

오늘의 쉼터 2014. 6. 22. 18:56

제36장 一千番 銅牌

 

 

 

깊이를 모르는 곳. 

 

그러나 혈마잔혼애(血魔殘魂崖)에도 바닥은 있다. 

 

끝이 없어 보이는 악몽에도 끝이 있듯,

 

영원히 죽지 않을 듯 기고만장히 살아가는 제왕(帝王)에게도 결국 죽음의 순간이 닥쳐오듯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각(時刻)에는 한계가 없다. 

 

휘이이잉! 

 

황량한 곳, 바람이 불 때마다 핏빛 안개가 뿌려진다.

 

 

사람이 들어와 살지 못할 곳, 진짜 지옥보다도 더욱 쓸쓸하고 공포스러운 죽음의 장소가

 

바로 혈마잔혼애였다. 

 

혈마잔혼애의 바닥은 돌투성이었다.

 

 

그 돌투성이의 바닥 한곳에 아주 괴이한 것이 떨어져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흑삼인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그의 다리에는천잠사(天蠶絲)를 겹으로 꼬아 만든 천이 묶여 있었고,

 

그의 허리에는 가죽끈이 묶여 있었다.

 

 

그 두 가지는 또 다른 사람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노도장 하나와온화한 문사 하나, 그들은 천마삭과 천마편의 끈을 쥐고 있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만에 하나 손에서 힘이 빠져 풀릴까 두려워한 탓인지 손목에 꽁꽁 묶여져 있었다.

 

 

손목이 끊이지 않는 이상 그것도 풀리지 않을 것이다.

 

 

세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된 이유는 그 탓이었다. 

 

어둠과 고요. 모든 것이 죽어버린 듯했다.

 

 

살아 있는 것은 없는 듯, 움직이는 것은 칙칙하게 흐르는 피안개뿐이었다. 

 

그때였다. 

 

"으으음 술, 술이 그립다." 

 

묵직한 신음소리와도 같은 음성이 들리며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 노도장이 겨우겨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만신창이었다.

 

 

쓰러진 흑삼인, 바로 능설비의 몸 가까이 다가갈 때 호신강기에 당해 오장육부가 자리를 바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근골이 강하고 아직 동자신(童子身)이기에 끄떡없이 살아있는 것이었다.

 

 

그가 휘청이며 일어날 때, 

 

"으으음!" 

 

온화한 인상의문사가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그가 눈을 뜨자 앞서 깨어난 상취도장이 빙긋 웃으며 말을 던지는 것이었다. 

 

"핫핫 신품현제(神品賢弟), 이제야 이 노형의 내공이 자네보다 낫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겠지?" 

 

상취도장은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박수를 쳤다.

 

 

그는 무서운 것이 없는 사람 같았다. 

 

"하핫, 정말 그렇군요.

 

노형이 먼저 깨어나셨으니 항상 내공 자랑을 하는 제가 노형보다 내공이 약하다는 것이

 

증명이 된 것이 아닙니까?" 

 

신품소요객도 마주보며 멋적게 웃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낭인(浪人)이었다.

 

 

그는 천하에 의풍(義風)을 뿌리고 다닌 사람이었다.

 

 

그가 세력을 모으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열흘안에 일만 명의 목숨바쳐 충성할 무사가 모여들어

 

그를 주공(主公)으로 떠받들 것이다. 

 

그가 빙그레 웃자 상취도장이 웃음을 거두며 다소 침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자네가 강하다는 것을 알아. 자네는 구마령주에게 일격을 가하느라 내공이 흐트러졌지.

 

그래서 나보다 늦게 깨어난 것이야." 

 

상취도장과 신품소요객, 두 사람은 천하가 알아주는 망년지형제(忘年之兄弟)였다.

 

 

우정의 본보기랄까?

 

두 사람이 세상에 알려준 것은 아주 많았다. 

 

두 사람은 몇 마디 나눈 다음 구마령주를 바라봤다. 

 

능설비(陵雪飛). 그는 아직도 살아 있었다.

 

 

탈진되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지만 맥(脈)만은 분명히 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눈을 뜨지 못했다.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만 것이었다.

 

 

그는 이제 구마령주라 불리기에는 부족한 병색이 완연한 일개 청년에 불과했다. 

 

"우리 내기하세." 

 

상취도장이 불쑥 말을 꺼냈다. 

 

"뭘요?" 

 

신품소요객이 의아해 하자 상취도장이 들뜬 모습으로 대답했다. 

 

"누가 저 악마의 목을 자를 수 있는가를 장기 한 판으로 내기하세.

 

이기는 사람이 저놈의 목을 자르기로 말일세. 어떤가?" 

 

"좋습니다." 

 

신품소요객도 흔쾌히 대답했다. 

 

"으핫핫, 역시 자네는 나와 뜻이 맞아!" 

 

상취도장은 너털웃음을 짓다가 품을 뒤졌다.

 

 

그는 항시 장기판과 장기알을 소지하고 다녔다. 

 

두 사람은 즉석에서 장기판을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았다. 

 

술과 장기, 그리고 신품소요객.

 

그것이 바로 상취도장의 삼우(三友)였다. 

 

두 사람은 자못 심각하게 장기에 빠져들었다. 

 

딱! 딱!

 

경쾌한 소리를 내며 장기알이 두어졌다.

 

장기는 대단한 접전이 되었다. 

 

몰리는 쪽은 상취도장이었다.

 

 

그는 꼼짝 못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장기판의 형세로 보아 한 수 후면 그의 패배가 밝혀지리라. 

 

그런데 아주 갑자기 훈수두는 소리가 두 사람의 귀에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궁(宮)을 올리시오. 잘 보면 상대가 마(馬)를 옮기지 못하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오.

 

피하는 길은 그것 하나요." 

 

아주 청아한 목소리였다. 

 

"어엇?" 

 

"누, 누구지?" 

 

두 사람은 장기를 두다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능설비, 그가 모로 누워 장기를 보고 있을 줄이야. 

 

그의 눈빛은 아주 흐릿했다.

 

 

그는 코와 귀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주 엄중한 부상을 당한 듯 핏빛은 시꺼맸다.

 

 

그의 몸 안에는 스물다섯 가지의 독물(毒物)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고약한 놈, 살았으면 살았다고 진작 이야기할 것이지 능청을 떨고 있었군!" 

 

상취도장이 자리를 박차며 벌떡 일어났다. 

 

"후훗, 장기를 다 두지 않다니 장기의 광(狂)이 되기에는 틀린 것 같소." 

 

능설비는 한 마디 내뱉고는 힘에 겨운 듯 반듯이 드러누웠다. 

 

'어차피 내가 택한 길은 아니었지. 그리고 혈수광마웅이라면 나보다도 훨씬 더 잘 해나갈 것이다.' 

 

그는 이상하게도 편안한 상태였다.

 

 

그는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핏빛 안개를 바라보았다. 

 

'나는 졌으나 하여간 마도는 이긴 것이다.'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잠시 후면 싫든 좋든 죽음이 닥칠 것이다.

 

 

이 순간만큼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 세상에 태어나 그가 정(情)을 준 것이 무엇이겠는가? 

 

" ." 

 

그는 여전히 냉막하기만 했다. 

 

그런 능설비를내려다 보며 상취도장이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내가 너의 숨을 끊어주마!" 

 

그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치를 떨며 이를 가는데, 

 

"노형, 장기는 마저 둬야 되지 않습니까?" 

 

신품소요객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상취도장이 돌아보자 그도 몸을 떨고 있었다.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천하의 신품소요객이 몸을 떨다니. 

 

그러나 신품소요객이 몸을 떠는 것은 상취도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상한데?' 

 

상취도장은 신품소요객의 모습에 다소 의아해 했다. 

 

신품소요객은 능설비의 눈을 보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잊고자 하는 눈빛, 얼핏보면 능설비는 웃는 듯했다. 

 

'으으!' 

 

신품소요객은 식은땀을 흘렸다.

 

왜일까?

 

그가 왜 능설비를 바라보며 전율하는 것일까? 

 

"이, 이보게, 신품현제!" 

 

상취도장이 불러도 신품소요객은 대답을 안 했다. 아니 그는 청각신경마저 마비(痲痺)된 듯했다. 

 

'모를 일이군.' 

 

상취도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도 그 이유를 확연히 알게 되었다. 

 

'그렇군!' 

 

그의 눈빛에 번쩍 신광이 흘렀다.

 

 

능설비를 보는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번뜩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이제 보았더니 저 놈의 눈빛 때문이로군.

 

신기(神氣)를 알아보는 자네에게 충격을 주는 눈빛 과거 비조평에서도

 

저런 눈빛 덕에 혈수광마웅이란 놈을 놓친 일이 있었지." 

 

상취도장은 중얼거리듯 말하다가 신품소요객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자네는 엉뚱한 데가 있단 말이야." 

 

상취도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신품소요객을 잘알고 있었다.

 

 

그는 평판으로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천하의 악종인 구마령주를 좋게 보다니 그것은 말도 안돼!' 

 

상취도장은 느슨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주먹을 꾹 쥐었다.

 

 

그의 눈에서 다시 복수심으로 이글거리는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러다가는 저놈을 그냥 놔두자는 말이 나올지 모른다.

 

그런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내가 처리하자.

 

방랑아 신품 동생이 이상한 말을 하기 전에!' 

 

상취도장은 반보(半步) 내디뎠다. 

 

그 순간에 신품소요객은 능설비의 눈빛에 취하고 있었다.

 

 

그는 인간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세상이 혼탁해지는 것이 싫어 산과 들을 방황하며 사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능설비의 눈빛에 멍해진 상태였다. 

 

" ." 

 

능설비는 눈을뜨고 있으나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그의 망막에 비치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뇌리에 생각이라는 것이 있을까?

 

 

그의 눈빛은 한 마디로 공허했다. 

 

상취도장이 우수를 들어 힘껏 내리치며 외쳤다. 

 

"너는 내가 죽인다, 구마령주!" 

 

꽝!

 

상취도장의 손이 능설비의 목을 후려쳤다.

 

 

목 부위의 급소 천돌혈(天突穴)에 그의 우수가 떨어지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능설비의 몸이 튕겼다.

 

 

그런데도 능설비는 죽지 않았다.

 

 

그는 조금 고통스러워하다가 얼굴을 찡그리며 상취도장에게 말했다. 

 

"나는 강한 놈이오.

 

나를 죽이려면 후훗, 아주 잘드는 보검이 있어야 할 것이오.

 

그러니 귀찮게 하지 말고 내가 피를 다 흘리고 죽을 때만 기다리시오." 

 

그는 여전히 오만했다. 

 

"나는 남의 손에 죽지 않소. 아시겠소?" 

 

그말을 끝으로그는 눈을 스르르 감았다.

 

 

눈을 뜨고 있기조차 힘이 들었던 것이었다. 

 

'귀찮은 자들 나의 상념을 방해하다니.' 

 

정말 모든 것이 귀찮았다.

 

 

손가락 하나 꼼짝하는 것조차 귀찮았고,

 

오로지 달콤한 잠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가 눈을 감고 있을 때, 

 

"이, 이것은?" 

 

신품소요객이 아래턱을 덜덜 떨었다. 

 

"왜 그러는가?" 

 

상취도장이 정말 알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신품소요객은 발 아래를 보고 있었다.

 

 

작은 패(牌) 하나가 아무렇게 거기 뒹굴고 있었다.

 

작은 패에는 은사(銀絲)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동(銅)으로 된 목걸이였다. 

 

'일천번(一千番)' 

 

목걸이에는 그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으으!" 

 

신품소요객의 시선이 목걸이에 새겨진 글씨에 박힌 채 심한 떨림을 보이고 있었다. 

 

"흠, 그것이 끊어졌군." 

 

능설비가 힘겹게 눈을 떠서 그의 발 아래턱을 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내 것이오. 내게 주시오." 

 

그는 손을 쳐들 힘조차 갖고 있지 못했다.

 

 

툭!

 

그는 쳐들었던 손을 툭 떨궜다.

 

 

이상하게도 눈꺼풀이 무거웠다.

 

 

아주 깊이 잠들고 싶은 심정이 되며 참기 힘든 졸음이 덮쳤다. 

 

"다, 다른 것은 모르나 그것은 내가 아끼는 것이오. 그, 그것은 내것이라오." 

 

능설비는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비명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만 해도 신기한 일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아파 펄펄 뛰었을 것이다. 

 

그때, 상취도장의 손이 능설비의 천령개에 닿았다.

 

 

그는 술을 먹지도 않았는데도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 동패가 네, 네것이라고?" 

 

" ." 

 

능설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만사가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으으, 어서 말해라." 

 

상취도장이 꽥소리치자 그제서야 능설비가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귀찮은 늙은이 말을 하면 나를 빨리 죽여 주겠는가?

 

내가 나를 죽이는 지력(指力) 한 가지를 전수해 줄 테니." 

 

"어, 어서 말해라!" 

 

상취도장의 눈에서 당장 능설비를 한 손에 쳐죽일 듯 살광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능설비는 잠시상취도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후훗, 그것은 나의 것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의 것이었지.

 

과거 나는 일천호(一千號)라 불렸다. 지금은 구마령주이나." 

 

"어, 어렸을 때부터?" 

 

상취도장은 손을 떨었다.

 

 

그의 표정은 정말 보기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설마 이 악마가 바로 비조평에서의 그 아이?' 

 

그는 자지러지게 놀라다가 떨리는 손길을 뻗어 능설비의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렸다. 

 

능설비의 이마위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는 상처자국이 있었다. 

 

"으으음!" 

 

상취도장은 그것을 보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서 있을 수 없었다. 

 

"무량수불 이, 이것도 천지조화(天地造化)란 말인가?" 

 

그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신품소요객도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그는 능설비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며, 

 

"네, 네가 바로 그 아이란 말이냐?" 

 

"무슨 말이오?" 

 

능설비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묻자, 

 

"오오, 이럴 수가 전 무림을 피로 씻은 광마 구마령주가 바로, 바로 내 덕에 살아간

 

그 어린아이일 줄이야. 이건 운명의 장난임이 분명하다." 

 

소요신품객의 얼굴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는 지금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고 있었다. 

 

"일천번 동패가 무엇이기에 그리 놀라시오?" 

 

" !" 

 

능설비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물었으나

 

두 사람은 마치 돌부처가 된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으으, 무슨 일이오?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한 것이오?" 

 

능설비는 악을버럭 썼다.

 

 

그 순간 그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스르르 정신을 잃어야 했다. 

 

휘이이이. 

 

피안개는 무저갱에서 피어오르는 것처럼 혈마잔혼애를 스물스물 기어다녔다. 

 

얼마의 시간이흘렀을까. 

 

"으으음!" 

 

능설비는 등 뒤에서 서늘한 진기(眞氣)가 흘러듬을 느끼며 아득하나마 정신이 돌아옴을 느꼈다.

 

 

그가 겨우 정신을 차리는 찰나 명문혈을 통해 흘러들던 진기가 뚝 끊어지고 말았다. 

 

그가 눈을 뜨자, 

 

"네가 말을 할 정도의 진기만 주겠다." 

 

무뚝뚝한 목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바로 신품소요객의 목소리였다.

 

 

그는 아직도 떨리는 시선으로 능설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뭘 묻고 싶소?" 

 

능설비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무심히 말하자, 

 

"너에 대한 것 모두!" 

 

신품소요객이 간단히 잘라 말했다. 

 

"나에 대한 것은 잘알 텐데? 내가 설산(雪山) 구마루에서 나온 구마령주이고, 마도의 태상마종임을." 

 

"그 이전의 일들 말이다." 

 

신품소요객의 눈빛이 삼엄해졌다. 

 

"후훗, 신기하군. 내게도 과거라는 것이 있다니 나는 한번도 나의 과거를 생각해 본 적이 없소." 

 

"어물쩡 넘기려 하지 말고 말해라." 

 

신품소요객이 호통을 치자 능설비도 코웃음으로 응대했다. 

 

"흥! 나는 명령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오.

 

나의 말을 듣고 싶다면 먼저 그 이유를 이야기해 보시오." 

 

능설비가 의외로 완강하게 나오자 신품소요객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회한에 찬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그렇다. 나는 인간을 믿은 것이 원망스럽다.

 

과거 네놈을 위해 반 뿌리의 인형설삼(人形雪蔘)을 쓴 것이 후회스럽다. 크으으!" 

 

신품소요객은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비조평에서 차마 인정을 떨치지 못하고 어린 능설비에게 인형설삼을 물려준 것이

 

오늘의 화를 부른 것이기에 피눈물을 뿌리는 것이엇다. 

 

"나, 나를 위해 인형설삼을?" 

 

능설비가 놀라반문하자, 

 

"크으으 너를 구하지만 않았어도 오늘의 이런 비참한 꼴은 없었을 것이다!" 

 

신품소요객이 발악하며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후려치려 했다.

 

 

그러자 재빨리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상취도장이 나서며 신품소요객의 손목을 잡았다. 

 

"참게, 어차피 이곳은 살아나갈 수 없는 곳이니까." 

 

"아아, 이 죄를 어찌해야 씻을런지." 

 

신품소요객은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구며 외면했다.

 

그것은 상취도장도 마찬가지였다. 

 

"!" 

 

능설비, 그는 이 세상에 나온 이후 가장 멍한 상태가 되었다. 

 

'나의 내공이 유난히 강하고 근골이 강한 이유가 이제야 밝혀졌는데 바로 백도인들 때문이라니!' 

 

그는 정말 머리 속이 텅비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아아, 윤회의 업(業)이네 그려. 우리가 살려놓은 이 아이를 또다시 우리 손으로 벌했다는 것은." 

 

상취도장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공허하게 들렸다. 

 

지금 눈앞의 모든 것들이 꿈결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처럼 아련하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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