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실명대협

제31장 빛과 그늘

오늘의 쉼터 2014. 6. 22. 18:49

제31장 빛과 그늘

 

 

그녀는 탄지지간(彈指之間)에 죽림 안으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그녀가 사라지자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의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그는 운리신군이었다. 

 

"우라질년, 나를 배반하다니. 그것도 부족하여 나를 배반자라고?" 

 

그는 이가 갈리는 듯한 욕설을 내뱉으며 손에서 화탄을 꺼냈다. 

 

"오냐, 네년 따위는 잊겠다. 네년을 심복으로 쓰려 했던 마음은

 

나의 일생일대 착각이었음을 이제 알았다." 

 

그는 화탄을 높이 내던졌다.

 

 

한순간, 우르릉 꽝! 천기석부 전체가 뒤흔들리더니, 

 

"운리신군께서 신호를 보내셨다!" 

 

"쌍뇌천기자께서 남겨두신 최후의 기관인 무저갱(無底坑)을 열어라!" 

 

이곳저곳에서 소리가 나더니, 꽝꽝! 동시에 두 곳에서

 

폭음이 나며 화룡(火龍)이 죽림을 뒤덮었다.

 

 

너무나도 순간적으로 모든 것이 불에 휘감겼다.

 

 

어디 그뿐이랴? 엄청난 진동음과 함께 죽림이 모조리 땅 속으로 허물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흐윽, 죽림이 함정이라니!" 

 

무너져 내리는죽림 안에서 일호의 자지러지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가자!" 

 

"허공을 밟고 날아올라라!" 

 

비위들의 급박한 목소리도 함께 터졌다. 

 

그러나 허공도이미 가로막힌 상태였다.

 

 

수천 수만의 독탄(毒彈)과 화탄이 비오듯 쏟아지며 허공을 새까맣게 뒤덮고 있었다. 

 

모든 것이 허물어졌다.

 

 

천기석부가 무너져 내렸듯이 주위의 모든 것들이 붕괴되고 말았다.

 

 

천기석부가 있던 자리는 본시 거대한 지하동굴이었다. 

 

"언제고 이것을 쓸 날이 있으리라." 

 

죽은 쌍뇌천기자는 생시에 동굴 위에 흙을 뿌렸고, 그 위에 대나무를 심으며 말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그의 계산대로 유효적절하게 쓰인 것이었다. 

 

하지만 무림천하를 좌지우지할 대풍운은 이제부터인 듯했다. 

 

만화지. 

 

온옥(溫玉)으로 된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벌거벗고 있었는데 그의 배에는 천이 붙어 있었다.

 

 

 천은 피로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청년의 몸에는 백팔 개(百八個)의 금침(金針)이 꽂혀 있었다. 

 

" ." 

 

그는 죽은 듯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청년의 옆에는 세 사람이 한시도 청년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만리총관(萬里總官) 구만리(九萬里)와 만화총관 만묘선랑,

 

그리고 황금총관이 모두 얼굴을 눈물로 적시고 있었다. 

 

"아아!" 

 

그들은 간간히한숨소리만을 낼 뿐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오랜 침묵을 깨고 누군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제는 길이 없소!" 

 

"그렇소. 가능한한 모든 방법을 썼소.

 

천하의 신의들이 갖고 있는 모든 신기한 의술을 다 동원했소." 

 

"휴우 황궁비고에서 구룡내산으로 만든 영단을 훔쳐오기까지 했는데,

 

그리고 나의 아들 진옥(眞玉)이가 불사(佛寺)에 가서 기원까지 하는데." 

 

세 명의 총관들은 며칠 동안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죽은 듯 누워 있는 구마령주 능설비가 며칠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숨만 몰아쉬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그간 백 종의 영단을 먹었다.

 

 

그 중 반은 그를 위해 새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것도 부족하여 그는 온갖 대법을 시술받았다. 

 

봉황무극심법(鳳凰無極心法), 소녀진령사공, 만묘구백술(萬妙救魄術) 등등. 

 

거기다가 온갖침법도 쓰여졌다. 

 

생사(生死)의 침술(針術), 회천침법(回天針法), 헌원해독침(軒轅解毒針) 등. 

 

그러나 능설비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정녕 그는 이대로 숨을 거둘 것인지? 

 

무거운 정적만이 감도는 실내는 모든 것이 멈춰진 듯했다. 

 

얼마나 시간이흘렀을까? 

 

월동창을 타고넘어온 달빛이 부드러운 여인의 눈빛처럼 능설비의 얼굴을 핥았다. 

 

"으으 음!" 

 

한순간 언제까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할 것 같던 능설비가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직후 그의 요혈(要穴)에 박혀 있던 금침이란 금침이 모두 튕겨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갑작스런 상황에 세 총관들이 놀란 눈을 치켜뜬 채 능설비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놀람은 곧 격정으로 물들어 갔다. 

 

"아아!" 

 

"역시 불사조(不死鳥)시오.

 

무상지독(無上之毒)을 비롯한 극독이 창자를 썩혔을 정도인데도 살아나시다니!" 

 

"내가 뭐랬소. 영주께서는 꼭 사신다 하지 않았소?" 

 

세 총관들은 능설비가 깨어나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능설비는 신음소리를 내고 일어나 앉더니 두 손을 한데 합했다.

 

 

그의 표정은 엄중한 부상을 당했음에도 몹시 장엄했다. 

 

노총관들은 능설비에게 다가서다가 멈칫했다. 

 

"도울 수 없는 순간이오." 

 

"우리는 호법(護法)으로 만족해야 하오." 

 

"자아, 노부는 나가서 영주께서 깨어나시면 드실 약탕이나 마련하리다." 

 

세 총관들은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능설비의 곁을 지키느라 퍽이나 피로한 상태였다.

 

 

특히 만화총관은 고심이 지나친 나머지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능설비가 깨어남으로 해서 그들의 피로는 일시에 씻은 듯 가셔버리고만 것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능설비는 복부에 통증을 느끼며 의식을 되찾았다.

 

 

그는 운기행공(運氣行功)조차 무의식적으로 한 것이었다. 

 

"으음, 어찌된 일이오?" 

 

그는 의식을 회복하며 맨 먼저 망막에 비쳐드는 만화총관을 보고 물었다. 

 

"사교(邪敎)의 복상비탄(腹上秘彈)이었습니다." 

 

만화총관은 말을 하면서도 감격의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고통이 엄습하는지 능설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을 아는 백도인이 있다니." 

 

그는 구마루에서 읽은 책구절을 생각했다.

 

 

껍데기가 썩은 책이었던가?

 

 

그 안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던 것을 본 기억이 있었다. 

 

복상비탄은 고금 최고의 암기이다.

 

독탄을 밀랍에 싸 먹고 그것을 창자 속에 감춘다.

 

어느 때, 그것을 혼원신공(混元神功)으로 쏘아낸다.

 

금강불괴(金剛不壞), 만독불침(萬毒不侵)이 철저히 파괴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리라.

 

복상시(腹上屍)를 만드는 비탄 그것은 저주(詛呪)를 불러일으키는 수법이니

 

불공대천의 원수가 아니면 쓰지 마라. 

 

쓰이는 것조차금기(禁忌)인 수법, 그것은 의당 두 사람을 죽인다.

 

쓰는 사람과 당하는 사람 두쪽 모두 죽는 수법이 바로 복상시를 만드는 암기술이었다. 

 

"냉월은 어찌 되었는가?" 

 

능설비가 다시묻자, 

 

"혀를 깨물었습니다. 겨우 살리기는 했으나 분근착골(分筋錯骨)로도 입을 열게 하지 못했습니다." 

 

"아직 살아있나?" 

 

"예!" 

 

"끌고 나와라!" 

 

능설비의 명령이 떨어지자 만리총관이 절을 하고 물러나갔다. 

 

만리총관이 나가자 만화총관은 능설비에게 옷을 걸쳐 주었다. 

 

능설비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두려워 떨고 있었다.

 

 

능설비는 갑자기 웃었다.

 

 

소리없는 웃음이었다.

 

 

만화총관이 깜짝 놀라는데 능설비의 손이 그녀의 주름진 손을 잡았다. 

 

"나는 노총관을 밉게 여기지 않소." 

 

"정, 정말이십니까? 속하를 원망하지 않으십니까?" 

 

능설비의 따뜻한 한 마디에 만화총관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하핫, 나는 이렇게 웃고 있지 않소?

 

그러니 다시는 이번 일을 머리에 담지 마시오.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나 정말 모양이 망가졌소." 

 

"흐흑!" 

 

결국 만화총관은 눈물을 쏟고 말았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능설비가 한없이 고마웠기 때문이었다. 

 

능설비가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얼마 후 새로운 주안공을 전수하겠소. 그것을 익히도록 하시오." 

 

"영주의 은혜가 이리 깊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천만해. 나는 마도를 위해 총관을 용서할 뿐이라오." 

 

능설비는 다시냉막해졌다.

 

 

그러나그는 그의 가슴에 마성이 아닌 어떤 열류(熱流)가 흐르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마종답지 못한점, 그것이 바로 마종 능설비를 더욱 존경받게 하고 있으니 매우 신기한 일이었다.

 

 

마도도 인간의 범주는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이각(二刻)이 지났다. 

 

끼익 소리를 내며 방문이 조금 거칠게 열리며 만리총관이 검은 끈을 쥐고 들어서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끈이 아니었다.

 

그것은 여인의 머리채였다. 

 

냉월, 그녀가 만리총관에게 머리채를 잡혀 방 안으로 끌려 들어오고 있었다. 

 

능설비는 태사의에 앉아 그녀를 맞이했다.

 

냉월의 참담한 몰골을 대하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모질게 대했으리라 짐작은 했지만 너무 심하게 다뤘군.' 

 

그리도 아름답던 여인, 철골빙심의 능설비를 흔들어 놓았던 냉염하던

 

그녀는 지금 여인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일대흉물(一代凶物)이라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마치 황성 안에 숨어 살던 소로공주를 보는 듯했다.

 

 

얼굴은 짓이겨지고 곱던 피부는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태상마종 능설비를 홀렸다고 옥접(玉蝶)이 얼굴을 짖이겨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여인으로서 의당 가져야 할 풍성한 젖가슴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녀의 가슴을 그렇게 만든 사람은 만화총관이었다. 

 

그녀의 살색은희지 못했다.

 

 

칼로 북북 그어버린 듯 상처투성이었다.

 

 

칼질을 한 사람도 만화총관이었다. 

 

냉월, 그녀는 정말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수십 가지 다른 종류의 고문을 받고도 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흐릿한 초점이나마 여전히 눈을 뜨고 있었다. 

 

아쉬운 것은 그녀가 진짜 벙어리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혀를 자른 사람은 그녀 자신이었다.

 

 

비밀을 누설할까 두려운지,

 

아니면 고문이 가해질 것을 알았는지 잡히자마자 혀를 깨문 것이었다. 

 

그녀의 등장으로 인해 방 안의 공기가 다소 심각해졌다. 

 

만리총관은 다짜고짜 냉월의 가슴을 밟았다. 

 

"크으으!" 

 

냉월의 입술이벌어지며 검붉은 핏물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바로 이년입니다." 

 

만리총관이 아직도 분노가 가시지 않는 듯 씩씩거리며 말했다. 

 

"쯧쯧." 

 

그 모양을 지켜보던 능설비가 갑자기 혀를 끌끌 찼다.

 

 

그러자 만리총관과 만화총관이 능설비의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얼떨떨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능설비가 소매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만리총관이 주르르 뒤로 서너 걸음 밀려나갔다. 

 

만리총관이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능설비가 입을 열었다. 

 

"냉월은 실로 용감한 여인인데 어이해 박대하는가. 그대들이 너무 심하게 다루었어." 

 

"네에?" 

 

"속, 속하들이 너무 심하게 다루다니오? 말도 아니 됩니다.

 

저 계집은 사분오시를 해도 시원치 않을 것입니다." 

 

능설비가 자신을 해하려 했던 냉월을 오히려 편들어 주자

 

두 총관은 기가 막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냉월도 이상한듯 초점 흐린 시선으로 능설비를 바라보았다. 

 

능설비는 웃고있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냉월의 곁으로 다가갔다. 

 

"네가 오는 사이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나는 결국 너를 알게 되었다." 

 

" !" 

 

냉월은 대꾸를하지 않았다.

 

그저 풀어진 동공으로 능설비가 하는 양을 지켜볼 뿐이었다. 

 

능설비의 입술사이에서 그윽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훗훗, 그리고 너의 뒤에 대환환역체공(大幻幻易體功)의 주인공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음!" 

 

냉월의 흐린 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나직한 신음소리를 냈다. 

 

"대환환역체공은 마도 수법인데?" 

 

"그럼 이 계집의 용모는 꾸며진 것이었습니까?" 

 

"아아, 어쩐지!" 

 

세 총관은 능설비의 말에 혀를 내둘렀다.

 

그는 자신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한 냉월의 감춰진 모습을 한눈에 알아낸 것이 아닌가? 

 

"훗훗, 내 생각이 틀림없다면 너는 바로 화빙염이 맞을 것이다." 

 

능설비는 냉월을 노려보았다. 

 

" !" 

 

능설비의 입에서 화빙염이라는 말이 나오자 냉월의 눈빛이 심한 동요의 파장을 일으켰다.

 

 

과연 그녀는 신녀곡의 화빙염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운리신군에 의해 절대적인 미녀로 탈바꿈해진 것이었다.

 

 

화빙염의 눈빛이 점차 적개심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원수를 지척지간에 두고도 처단하지 못하는 그런 분노의 눈빛이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녀는 지금 원수를 갚기는 커녕 자신의 몸 하나도 돌볼 수 없는 처지인 것을 .

 

그녀는 턱을 덜덜 떨며 피눈물을 방울방울 떨구었다. 

 

능설비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자신을 망치는 계략에 몸을 던질 정도로 내게 원한이 깊은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그 중 눈빛이 너와 같은 사람은 하나뿐, 바로 신녀곡의 화빙염뿐이다." 

 

능설비는 말과함께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짓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다정한 손짓이었다.

 

 

왜일까?

 

 

비정하고 잔혹하기 그지없는 구마령주가 왜 이런 행동을 취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 누가 능설비의 마음을 알겠는가? 

 

'나는 안다. 누가 이 여인을 씻을 수 없는 업(業)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는지.

 

그런 계략을 짜낼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내가 어떤 류의 여인을 좋아하는 것까지 아는 사람 바로 그밖에는 없다.

 

그의 혈수(血手)가 드디어 나를 노리기 시작한 것이다.' 

 

능설비는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죽음의 그늘로 숨어버린 사람, 마도의 천기자로 불렸던 사람! 

 

그는 혈루대호법 혈수광마웅(血手狂魔雄)이었다. 

 

능설비는 그를 한시도 잊지 않고 머리 속에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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