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義氣는 霧散되고
뇌전신개가 대항마복룡진의 총수로서 다가설 때,
금면인이 금을 튕기기를 마치고 은면인에게 말했다.
"총관, 준비는 되었는가?"
"옛, 구백 개의 관(棺)은 모두 다 준비가 되었습니다.
거기 누워 묻힐 구백 구의 시체만 있으면 됩니다."
"한 개가 더 준비되었군. 관은 팔백구십구 개면 된다."
"예? 한 개가 더 준비되었다 하심은?"
은면인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묻자 능설비가 차갑게 냉소하며 대답했다.
"거적대기에 싸서 묻혀도 황송해 하는 늙은거지 하나가 있기 때문이다.
그를 위해 관을 쓴다면 개에게 보석으로 치장을 해주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은면인이 그제서야 능설비의 말뜻을 알아듣겠다는 듯이 넙죽 허리를 숙였다.
그 말을 듣고 난 뇌전신개가 진중에 서서 두 눈에서 불똥을 일으켰다.
'구마령주란 자는 확실히 천하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자이다.
그러나 나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두고 욕하는 구마령주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이곳에 수하 하나만을 대동하고 홀홀단신으로 나타나다니 정말 지독한 배짱이다.
그러나 이곳은 소림사가 아니고 나도 정각은 아니다.'
뇌전신개는 자신의 뒷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는 아홉 명의 고수가 소기(小旗) 하나를 들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공통점이라면 모든 사람이 상복을 걸치고 있다는 점이었는데
그 중 가장 악에 받쳐야 하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바로 화빙염(華氷艶)이었다.
"네놈을 죽여 살점을 불에 구워 먹을 작정을 하고 왔다!"
화빙염은 능설비를 노려보며 이가 갈리는 듯한 음성을 내뱉었다.
바야흐로 소림사에서의 풍운보다 더한 대풍운의 막(幕)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백도의 고수들이 한결같이, 시체같이 굳은 낯색을 하고 다가서는데 문득 능설비가
만리총관을 부르는 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총관!"
"옛, 영주님!"
만리총관은 능설비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는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능설비가 그만을 대동하고 이곳에 나타날 줄은 그도 몰랐던 일이었다.
그는 능설비가 아주 침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능설비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싹트는 것이었다.
그는 상대방의 많은 숫자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능설비의 능력을 믿기에
저으기 안심이 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신지요?"
만리총관이 묻자,
"세 자루 명검(名劍)을 준비하라 했을 텐데?"
"여기 대령했습니다."
만리총관은 품에 품고 있던 세 자루 장검을 얼른 능설비의 앞으로 내보였다.
"어떤 것들을 준비했나?"
"마종마검(魔宗魔劍)과 천외천혈검(天外天血劍), 그리고 복마신검(伏魔神劍)입니다."
"쯧쯧 복마신검이란 못된 이름을 가진 물건도 준비했다고?"
능설비가 혀를차자 만리총관이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러자 능설비가 호탕하게 웃으며 명을 내렸다.
"하핫, 모두 버리게."
"예?"
"사람을 베기에는 쓸모가 없는 것들일 뿐이야."
"알겠습니다."
그제서야 만리총관이 능설비의 의도를 눈치채고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렸다.
"만리총관은 가서 내가 즐길 술좌석이나 마련하게.
일각 후에 가서 미녀들을 데리고 술을 마실 작정이라네."
능설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모두 정파고수들을 안하무인격으로 놀리는 말이었다.
뇌전신개 이하모든 사람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결국 빨리 죽기를 재촉하는군."
뇌전신개는 이를 갈다가 위로 날아올랐다.
그가 비조처럼 훌쩍 날아오르는 순간.
"진을 발동시켜라!"
"죽음으로 놈을 벌하리라!"
동의지회에 모여들었던 백도의 고수들이 일제히 움직이며 파란이 일어났다.
진세에서 발휘되는 강한 기운으로 인해 흙바람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사방 일 리 안에 있던 모든 나무가 요동을 치며 뿌리째 뽑혀 날아올랐다.
만리총관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조심하십시오, 영주!"
그는 능설비에게 말한 다음 힘겨운 표정을 하며 그 자리에 앉았다.
"여기서 구경이나 하게. 까마귀 떼를 쫓는 데에는 나하나로 족하니까. 하핫."
능설비는 호탕하게 웃으며 진세를 구축하고 있는 백도의 고수들을 바라보았다.
'용맹하기만 할 뿐 진짜 무서운 데는 없는 자들이다.'
능설비의 손이천천히 쳐들려지며,
"허공뇌정(虛公雷霆)을 아느냐!"
그는 일갈을 터뜨리며 주먹을 뻗었다.
그 동작은 매우 느린듯이 보였으나 사실은 비쾌무비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곧 이어 강한 권풍이 휘몰아치며 소림사의 고수 세 명이 한덩어리의 피떡이 되어 날아가 버렸다.
능설비의 권법은 백도의 진세에 극성이 되는 것이었다.
대항마복룡진은 가장 무서운 진세이다.
그러나 능설비는 어렸을 때부터 그것을 격파하는 비법만을 배워온 처지였다.
그는 쌍권으로진세의 한부분을 구멍내었음에도 제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구태여 난처한 지경을 자처하는 듯했다.
진세는 몇 명이 죽었다고 느슨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힘은 시간이 갈수록 강해졌다.
진세에서 발동되는 막강한 경기로 인해 주변의 공기가 터질 듯이 팽창되고 있었다.
만리총관은 운기행공(運氣行功)으로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에 급급했다.
때를 놓칠세라뇌전신개가 불 같은 기세로 들이닥치며 타구봉을 어지럽게 흔들어 대었다.
"뇌전신봉(雷電神棒)!"
공기를 가르는예리한 파공성이 요란하게 일며 누에실같이 가는 강기가 능설비의
주위 삼십육 방위를 완전히 차단하며 조여들었다.
"좋은 수법이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그것은 그렇게 써서는 위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 것이다, 노화자."
능설비는 등을뒤로 제쳤다가 약간 굽히며 두 손을 풍차처럼 돌렸다.
순간, 우르르르릉! 금방이라도 땅을 쪼갤 듯한 천둥소리가 울리며 개방 비전
천무뇌우장(天武雷雨掌)이 뇌전신개가 쓸 때보다도 능숙히 시전되어 강한 회오리바람을 만들었다.
"어어엇? 네가 그 수법을 알다니!"
뇌전신개는 능설비의 손에서 개방의 비전수법이 시전된다는데 기겁을 하다가 펑!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몸을 휘감는 지독히 강한 강기에 휘말려 위로 훌훌 날라 올라갔다.
"크으윽!"
그의 입에서 고통스런 신음소리와 함께 핏물이 주루루 흘러 나왔다.
"으핫핫, 피비(血雨)를 내리게 하리라!"
능설비는 뇌전신개의 패배로 인해 진세가 느슨해진 틈을 이용해 미리 생각하고 있던
삼초(三招)를 거듭 쳐냈다.
"파라혈광무(破羅血光霧)!"
그의 입에서 폭갈이 터지자 사위는 온통 핏빛으로 물들고 말았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처참한 신음이 터지며 정파의 고수들이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갔다.
"천마무적금인(天魔無敵金刃)!"
연이어 능설비의 손에서 초식이 전개되고, 꽝! 하는 폭음과 함께 서쪽에서 다가서던
한 떼의 무사들이 금광에 휘말리며 피모래로 화해 날아가고 말았다.
그들의 비명소리가 메아리질 때,
"인마검수!"
능설비의 손에서 적혈무(赤血霧)가 뭉게뭉게 일어나며 남쪽으로 다가서던 무사들이
게거품을 뿜으며 벌렁벌렁 나뒹굴었다.
"지, 지독한 자!"
"구마령주는 사람이 아니다!"
남아 있던 사람들이 능설비의 인정을 두지 않는 손속에 치를 떨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능설비가 광소를 터뜨리며 외쳤다.
"으핫핫, 도망가는 자는 용서해 주겠다. 나는 관대한 태상마종이다."
"어림없는 소리 우리는 너와 더불어 동귀어진을 하겠다!"
백도의 무사들은 구마령주 능설비에 대한 두려움이 컸으나
한편으론 더욱 적개심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자신의 경고에도 백도의 무사들이 물러갈 기미를 보이지 않자
능설비는 웃음소리를 남기며 몸을 어지러이 흐트렸다.
휘휙휙!
수십수백 개의 그림자가 뿌려지는 가운데,
"태양섬전(太陽閃電)!"
능설비의 손에서 화기(火氣)를 실은 지공이 뻗어 나오며 사방 곳곳에 파고들었다.
그것은 도망을 치지 않고 버티고 있던 백도 무사들을 무차별로 뚫고 지나갔다.
심장에 구멍이나서 죽는 자, 미간에 동전만한 구멍이 뚫려 죽는 자들이 여기저기에서 속출했다.
"으핫핫!"
능설비의 웃음소리는 비명소리마저 압도해 버렸다.
마영(魔影)이 가는 곳에 혈우(血雨)가 내렸다.
백 초가 되기 전에 백도 무사들 중 이백 명이 죽었다.
그건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도륙이었다.
그런 와중에도투지를 잃지 않은 의혼(義魂)이 있었다.
"하앗! 봉무(鳳舞)!"
한쪽에서 앙칼진 외침이 터지며 흰 그림자 하나가 떠올랐다.
그 그림자는 신녀곡주의 수제자인 화빙염이었다.
그녀가 훌쩍 허공으로 치솟아오르자 또 한 번의 외침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화소곡주, 노화자는 용무(龍舞)요!"
뇌전신개가 지면을 박차고 떠오르더니 화빙염과 더불어 능설비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어리석은 자들 꺾일 줄도 모르다니!'
능설비는 화빙염과 뇌전신개가 자신을 향해 공격해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며 허공에서 멈춰섰다.
그는 숨을 크고 깊게 들이마셨다.
역겨운 피비린내가 가슴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이미 그에게는 익숙할 대로 익숙한 냄새였다.
그는 자신의 머리 위쪽을 바라보았다.
신녀곡 소곡주화빙염이 뇌전신개와 더불어 용비봉무연환구절식(龍飛鳳舞連還九絶式)을
시작하고 있었다.
"정의의 심판을 받아라, 구마령주!"
"마(魔)를 처단한다!"
두 사람이 연수합공으로 펼쳐내는 용비봉무연환구절식은 악마를 격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파의 비전 수법이었다.
능설비는 순식간에 두 사람이 만들어낸 무수한 손그림자 속으로 파묻혔다.
그런데도 그는 너무도 태연했다.
"후훗, 나는 죽지 않는다. 이제 그것을 알려주마."
능설비는 싸울마음이 없는지 손을 축 늘어뜨렸다.
혼신의 공력을 다한 화빙염과 뇌전신개의 공격이 목전에 다다른 위급한 순간인데도
그는 방어할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뇌전신개의 일장이 그의 등판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퍼엉! 벼락치는 소리가 나며 능설비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러나 그것뿐, 능설비는 표정조차 바뀌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는 그의 눈빛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반면 공격을 가한 뇌전신개의 상황은 달랐다.
"크으윽!"
그는 반탄력을이기지 못하고 묵직한 신음을 토하며 멀리 튕겨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목격한 화빙염이 보검을 빼어 신검합일(身劍合一)해 들이닥치는 가운데
공공난무신녀권을 동시에 시전했다.
"죽어라 악마!"
어지럽게 난무하는 칼그림자와 날카로운 권풍이 능설비를 휘감았다.
신녀곡주로부터 전수받은 정종절기였기에 그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위급한 상황에서도 능설비는 피하려 하지 않고 무심히 손을 그 속으로 내밀었다.
바로 소림사 비전 대금룡수(大擒龍手)였다.
순간 따앙! 예리한 금속성이 울리며 화빙염의 손에 들린 신녀검(神女劍)이
우박덩어리같이 산산이 파괴되는 것이 아닌가?
화빙염의 몸이허공에서 멈춰졌다.
"으으, 네가 이정도였더냐?"
그녀의 손목은능설비의 손아귀 안에 잡혀 있었다.
"후훗, 너는 죽기에는 너무 나이가 어리다.
자, 어디든 가서 사내의 귀여움이나 받으며 살거라."
능설비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가 순순히 놓아 주었다.
화빙염의 눈꼬리가 치켜져 올라갔다.
"에잇, 조롱받을 화빙염이 아니다!"
그녀는 악을 쓰며 다시 한 번 덤벼들었다.
구유회혼자가 가르쳐 주었던 회혼산수(廻魂散手) 칠십이식(七十二式)이 잇따라 시전되며 파팍!
능설비의 가슴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능설비는 화빙염이 시전해 낸 수십 장에 잇따라 격타당했다.
화빙염의 생각으로는 의당 능설비가 피를 뿜으며 나뒹굴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약간의 간지러움을 느낄 뿐이었다.
"악착같이 죽으려 하는군."
능설비는 조롱하듯 빙긋이 웃으며 다시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막대한 허공섭물진기(虛空攝物眞氣)가 일어나 화빙염의 몸뚱이를 빨아들였다.
화빙염은 손도 마음대로 쓸 수 없었다.
그녀는 그만 능설비의 가슴에 푹 안겨들었다.
"흐윽!"
화빙염은 참을수 없는 수치심에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능설비는 그녀를 사로잡았다가는 다시 놓아 주었다.
"가라. 계집이 있을 무림이 아니다. 그것을 잘알았을 테니 어서 가라."
그가 화빙염을멀리 내던지는 순간, 날카로운 파공성이 일며 뒷쪽에서 뇌전검강이 섬전같이 들이닥쳤다.
반탄력에 날아갔던 뇌전신개가 정신을 수습하고 난생 처음으로 남의 등판을 향해 손을 쓰는 것이었다.
무림인에게는 금기시 되어온 것이었지만 대마종 구마령주를 처단하기에는
그 방법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뇌전신개의 엄청난 착오였다.
예리한 검기가 섬전같이 흐르다가 한 곳에서 보이지 않는 장벽에 부딪혔다.
팍! 하는 조금 둔한 소리가 나더니 놀랍게도 검기가 형체도 없이 소멸되는 것이 아닌가?
"이, 이럴 수가 대체 어떤 호신강기이기에 나의 검기를 막는단 말인가?"
뇌전신개의 중얼거림 소리가 공허하게 들렸다.
그는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것이었다.
능설비는 강기로 검기를 무산시켜버린 것이었다.
그는 그제서야 뒤돌아서서 입술을 떼었다.
"이제 내가 거지굴의 수법 아래 죽지 않을 사람임을 알겠는가?"
" !"
뇌전신개는 그저 넋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바라볼 뿐 입을 열지 못했다.
"후훗, 죽이지는 않겠다. 다만 나의 수하가 되어 나를 위해 일하겠다고 말한다면."
능설비는 뇌전신개를 향해 느릿한 동작으로 다가갔다.
뇌전신개는 식은땀을 주르르 흘렸다.
'오지 않았어야 했다. 아아 하늘을 몰라보고 왔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그의 가슴만큼이나 낮게 가라앉아 검기만 했다.
그의 입술을 비집고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이해 정의를 외면하고 악을 지켜주는 게요? 야속합니다."
그는 천지신명을 원망하더니 손을 쳐들었다.
능설비는 그가그렇게 할 줄 알았는지 조금도 놀라워하지 않았다.
모두 숨을 죽이고 손을 칼날같이 세우는 뇌전신개를 바라보았다.
"나는 자결하겠다. 그러나 나의 명을 받고온 사람들은 죄가 없다. 그들을 용서해다오."
뇌전신개의 목소리가 수치와 분노로 뒤범벅되어 가늘게 떨렸다.
능설비는 뇌전신개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바란다면 그렇게 해 주겠다. 부상한 사람들을 위해 금창약과 요상영단을 마련해 주겠다.
또한 고향으로 돌아갈 자에게는 노자로 은자 천 량씩을 줄 것이다."
"정말이냐? 아무도 다치지 않겠느냐?"
"싸우지 않을 사람을 죽여 무엇하겠느냐."
능설비는 느긋한 자세로 뒷짐을 졌다.
뇌전신개는 눈물을 소리없이 흘렸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다. 아아 차라리 주설루 낭자의 말을 들을 것을!'
그는 탄식하다가 눈을 부릅떴다.
그 모습이 마치 사자를 연상케 했다.
비록 발톱이 부러지고 이가 빠진 늙은 사자의 모습이나 그의 풍모는 여전했다.
"미, 미안할 뿐이오. 그리고 오늘은 때가 아니니 돌아가 주시기를 최후의 명령으로 하겠소.
여기 오라는 명을 지켰듯 가라는 명도 지켜주기 바라오!"
뇌전신개의 비장한 최후의 명령이 떨어지자 여기저기서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총순찰!"
"우리는 모두 죽을 작정을 하고 왔습니다!"
"저희도 함께 죽겠습니다!"
그 말에 뇌전신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늘이 돕지 않는구려. 노부로서는 이제 어찌할 수가 없소.
노부를 위해서라면 무덤을 세우지 마시오.
나는 그냥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겠소!"
뇌전신개는 비통한 어조로 말을 마친 후 손을 들어 자신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팍! 그의 머리가 쪼개지며 허연 뇌수(腦髓)가 뿌려졌다.
천하를 호령하던 동의맹 총순찰 뇌전신개가 허무하게 일생을 마감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죽음 앞에 정파고수들은 통한의 피눈물을 떨굴 뿐이었다.
"으핫핫!"
뇌전신개가 자결하자 능설비는 느닷없이 통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가 장내를 울릴 때, 휘휙휙!
백도고수들 사이에서 열두 사람이 동시에 날아올랐다.
"함께 죽을 작정을 하고 왔다, 구마령주!"
"에잇, 이제 우리들에게는 죽음도 별것이 아니다!"
열두 명은 모두 같은 성씨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사천당가(四川唐家)의 십이걸(十二傑)이라 불려지는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떠오르며 손을 어지러이 흔들어대자 수백 개의 호접표가 떠올라
이십 장 반경 안을 가득 메워버렸다.
그것은 만천호접표라는 가공할 위력을 가진 백도구절기 중의 하나였다.
무수한 철나비그림자가 능설비의 모습을 순간적으로 묻어버렸다.
강기를 맞으면서 방향을 틀며 더 빨리 나는 만천호접표.
그것은 사천당가의 최후 최고의 암기술이었다.
더욱이 지금 나타난 만천호접표에는 독분(毒粉)이 발려 있었다.
암기에 독을 바른다는 것은 사천당가에서 금기(禁忌)로 삼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능설비는 태연하기만 했다.
"핫핫, 너희들 것은 너희들에게 돌려 주겠다. 나는 이정도 시시한 쇳조각 따위는 받지 않겠다!"
그의 오만한 웃음소리가 나며 핏빛의 혈무가 나비 그림자 사이에서 울컥울컥 나타나 모든 것을 가렸다.
위이이잉 섬뜩한 소리를 내며 소용돌이치는 혈무가 점점 확대되었다.
그에 따라 만천호접표는 이상하게도 위력을 잃고 원래 가려던 방향과는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원래의 속도보다 더 배가되어 쏘아졌다.
"안돼!"
"나, 나선강기마저 익히다니!"
당가십이걸은 자신들이 쏘아낸 암기가 되돌아오자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수백 개의 만천호접표가 당가십이걸이 일으켜내는 장역을 뚫고 그들 몸 속으로 파고들었다.
"으아악!"
"내, 내가 만든 암기에 죽다니 크으윽!"
당가십이걸은 고슴도치가 되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들이 맥없이 무너지자 백도의 무리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도, 도망가야 산다!"
누가 말했을까!
그 말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에서 무기를 버리는 소리가 잇달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도고수들은 피비린내를 피해 모두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능설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됐다. 후훗!'
그는 강호에 나온 이후 가장 큰 만족감을 느꼈다.
'백도의 기가 꺾인 것이다.
모든 것이 나의 예상대로 된 것이다.
이제 백도는 날개 부러진 거웅(巨應)에 지나지 않는다.
무림동의맹은 폐허가 되었고, 모두 공포스러워하며 심산유곡으로 숨어들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손을 쓰지 않았다.
우뚝 선 그의 모습이 더욱 도도함을 느끼게 했다.
능설비 그는 마도의 신이 되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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