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실명대협

제21장 하늘은 하늘, 땅은 땅

오늘의 쉼터 2014. 6. 22. 18:33

 

제2권

 

 

제21장 하늘은 하늘, 땅은 땅

 

달조차 서편 하늘로 숨어버린 새벽이다. 

 

능설비는 땀에젖은 홍포자락을 바람에 날리며 새벽의 궁정(宮庭)을 바람처럼 가로질렀다. 

 

'그가 기다리겠군.' 

 

능설비는 황궁안을 철통같이 경계하는 금위군사(禁衛軍士)들의 눈을 철저히 조롱하며 거침없이

 

궁정을 가로질렀다.

 

 

잠시 후 그는 오래 전부터 사람이 기거하지 않아 거미줄 투성이가 된 거대한 석전 뒤에 이르게 되었다.

 

 

석전 뒤에는 막 푸른 순을 내보이는 나무들이 무성하게 숲으로 펼쳐져 있었다.

 

 

능설비가 붉은 그림자를 뿌리며 떨어져 내리자, 

 

"영, 영주시오?" 

 

숲 안에서 이제껏 기다리고 있던 사람 하나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나이는 대략 사십 정도였고 관복을 걸친 모습이 매우 기품있게 보이는 사람이었다. 

 

호부상서(戶府尙書) 웅진옥(雄眞玉). 

 

그는 청렴결백하고 강직하기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그의 표정은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표정 이상으로 초췌했다. 

 

"그렇네. 귀하가 황금총관의 아들인가?" 

 

능설비는 구마령을 꺼내 보였다. 

 

"기, 기다렸습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웅진옥은 착잡한 기분으로 뒤돌아섰다. 

 

'이 자의 심장이 몹시 급히 뛰고 있다.

 

게다가 나를 상대로 살기(煞氣)를 흘리고 있다.

 

훗훗, 마도인이 아니라 마음이 바른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능설비는 웅진옥의 뒤를 따르며 고소를 지었다. 

 

"물건을 구하느라 꽤나 힘들었습니다." 

 

웅진옥은 숲 안 깊숙이 들어갔다.

 

 

한순간 그는 그늘 아래 멈춰서며 능설비를 응시했다.

 

 

능설비를 대하는 그의 눈빛은 경멸에 찬 것이었다.

 

 

그는 오른손을 품에 넣었다.

 

 

그 순간 그의 표정에는 대담한 무엇인가가 떠올랐다. 

 

"나의 손에는 영주가 원하는 것이 쥐어져 있소." 

 

"그래서?" 

 

"그것은 크기에 비해 아주 강한 것이오.

 

터지면 놀랍게도 반경 일백 장 안이 불바다로 화하오." 

 

"그 정도야 익히 알고 있지.

 

그래서 자네 부친에게 구해오라 한 것이네.

 

그 정도 위력이 아니라면 구하고자 하지도 않았을 것이네." 

 

능설비가 달라는 뜻으로 손을 내밀었다. 

 

"소, 소문을 들었소. 구마령주가 보름 안에 정각대선사를

 

마인이 보는 앞에서 처단하려 한다는 것을." 

 

웅진옥은 전신으로 땀을 흘렸으나 눈빛만은 무슨 일을 낼 것처럼 단호했다. 

 

"그래서 당신과 동귀어진(同歸於盡)할 작정을 하게 되었소.

 

구마령주인 그대를 죽여 버리기로!" 

 

웅진옥은 정말상상도 못 할 말을 토해냈다. 

 

"후훗, 그런 생각을 했단 말이지?" 

 

능설비는 놀라기는 커녕 오히려 가볍게 웃어 넘겼다. 

 

"죽음이 무섭지 않소? 아니 축융화뢰가 무섭지 않소?" 

 

웅진옥이 능설비의 대담한 태도에 몸을 한차례 떨며 물었다. 

 

능설비는 여전히 여유만만이었다. 

 

"황금총관이 아들 하나는 잘 두었군." 

 

"내가 당신과 함께 동귀어진을 결심한 것은 지난 밤이오.

 

축융화뢰는 당신에게 들어가 당신의 목적을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천하를 위해 터질 것이오. 바로 여기서 아시겠소?" 

 

웅진옥이 악을썼지만 능설비는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 

 

"웅상서(雄尙書)에게 필요한 것은 천하를 위하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뿐인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주는 것이지." 

 

능설비는 섬전지(閃電指)를 쳐서 웅진옥을 제압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무, 무서운 자!' 

 

웅진옥은 땀을비오듯 흘렸다.

 

 

그는 고개를 푹 떨구고 말았다.

 

 

자신의 부친인 황금총관의 목숨과 축융화뢰의 가치를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졌소. 영주는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위대한 마인이오.

 

그러나 다시는 나의 부친을 찾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물건을 드릴 것이오.

 

사실 나의 품에는 축융화뢰가 없소.

 

나는 영주에게 협박을 가해 그런 언약을 들은 다음 축융화뢰를 건네 줄 작정일 뿐이오." 

 

"나를 악마와 같이 여기는군.

 

그러나 나도 사람이야. 나의 목숨이 귀하듯이 다른 사람의 목숨도 귀하다는 것을 알지." 

 

능설비는 말과함께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소리나지 않는 가운데 암경이 일어났다. 

 

"어엇!" 

 

웅진옥은 능설비가 뻗어낸 암경에 의해 뒤로 세 걸음 물러나며 휘청거렸다. 

 

그 사이에 능설비는 웅진옥이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 가서 서며, 

 

"축융화뢰를 이곳에 묻어 두었다는 것 정도도 쉽게 알아내는 사람이 바로 구마령주 되는 사람이지." 

 

능설비는 허리를 구부려 땅을 조금 팠다.

 

 

그러자 놀랍게도 철갑 하나가 흙 속에서 나타났다.

 

 

철갑의 표면에는 '축융화갑(祝融火匣)'이란 글이 적혀 있었다. 

 

'내가 축융화뢰를 묻어 둔 바로 그 자리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내다니!' 

 

웅진옥은 다시한 번 능설비의 날카로운 안목에 혀를 내둘렀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이 옷을 축축이 적셨다. 

 

그는 무림계에대해서는 잘알지 못하는 문외한이었지만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능설비의 존재가 태산같이 여겨졌다. 

 

"자꾸 땅을 본 것이 잘못이었어.

 

그래서 나는 이것이 여기 묻혔다는 것을 안 것이지.

 

그러나 귀하를 원망하지는 않겠네. 내가 같은 처지였다 해도 그랬을 테니까." 

 

능설비는 부드럽게 말한 다음 위로 날아올랐다.

 

 

그는 찰나지간에 웅진옥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췄다. 

 

웅진옥은 그제서야 능설비의 진면목(眞面目)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이 저리 빨리 날다니

 

아아, 무림이라는 곳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범인들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화탄을 필요로 한단 말인가?

 

굳이 화탄을 쓰지 않아도 사람을 자유롭게 죽일 수 있을 텐데?' 

 

웅진옥은 능설비가 왜 축융화뢰를 필요로 하는지 그 진의(眞意)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만리표행 후원(後園). 

 

만리총관을 비롯한 전마도(全魔道)의 충신(忠臣)들이 예복을 갖추고

 

최초의 중원마도맹(中原魔道盟)의 회의에 참가하고 있었다.

 

상석(上席)에는 능설비가 앉아 있었다.

 

 

그는 황금색 장포를 걸치고 얼굴은 금색면구(金色面具)로 가리고 있었다.

 

 

금색면구는 바로 마도대종사(魔道大宗師)의 신분을 상징하는 신표였다. 

 

그는 장내의 여러 사람들을 돌아봤다. 

 

마도이십팔수와 십구비위(十九臂衛), 총관(總官)과 당주(堂主)들 모인 사람들의 수는 이백에 달했다.

 

 

그들 하나하나는 휘하에 일천 명 정도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능설비가 현재 쓸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수만 명에 달하고 있었다.

 

 

오늘 그 모든 괴수들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다. 

 

"나는 혼자서 소림사로 갈 것이오." 

 

좌중을 향해 던진 능설비의 첫마디가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다. 

 

"어이해 단신으로 가시단 말씀입니까?" 

 

"수천 명이 거기에 모여 있습니다. 영주 혼자 가시면 아니 됩니다." 

 

만리총관 이하모든 사람이 능설비의 소림사행을 적극 만류했다. 

 

그렇다고 해서뜻을 꺾을 능설비는 더더욱 아니었다. 

 

"이 시간 이후 그대들은 모두 바빠질 것이오. 그래서 나는 혼자 갈 수밖에 없는 것이오." 

 

그는 말과 함께 손을 품에 넣어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 위에는 '파점창(破點蒼)'이란 글씨가 붉은 먹으로 쓰여 있었다.

 

 

능설비는 그것을 일호(一號)인 혈견(血犬)에게 전했다. 

 

이어 '파개방'이라 적힌 봉투를 꺼내며, 

 

"이것은 자네가 해야 할 일이네." 

 

능설비는 나이오십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에게 그것을 전했다.

 

 

봉투를 전해 받은 사람은 이십팔수의 우두머리가 되는, 마각성(魔角星)이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계속해서 '파사천당가(破四川唐家)'라 적힌 봉투가 마정성(魔井星)에게 전해졌다. 

 

마규성(魔奎星)에게는 파신녀곡(破神女谷), 마우성(魔牛星)에게는 파전진(破全眞)이 적힌

 

봉투가 전해졌다.

 

 

만리총관에게 전해지는 것도 있었다. 

 

봉투는 모두 열 개였다.

 

 

구파일방(九派一幇) 중 소림사가 빠졌고, 무산 신녀곡이 대신 들어갔다. 

 

능설비는 봉투를 나눠 준 다음, 

 

"사흘 후 소림의 정각이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닷새 후, 천하각파는 태상마종에게 항복한다는 것을

 

자기네 소굴 앞에 석비(石碑)로 세워 놓고 그 앞에 꿇어앉아야 한다." 

 

장내의 인물들은 능설비의 광오한 말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경청하고 있었다. 

 

능설비의 눈에서는 줄기줄기 혈광(血光)이 일어났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팔일 후에는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봉투 안에는 그대들이 맡아야 할 방파를 깨는 방법이 자세히 적혀 있다.

 

그대로 해야 할런지 아니면,

 

항서(降書)를 받고 돌아와야 할런지는 팔일 후 결정될 것이다." 

 

능설비가 나눠준 봉투에는 정도무림의 각 방파를 깨는 계(計)가 적혀 있었다.

 

 

본래 그는 일거에 모든 것을 결정내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지만

 

자세한 것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꾀하고 있는 것에 대해 능숙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구마령주라는 무서운 자와 그리고 그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악마 같은 자들이 발호하기

 

시작한다면 천하는 편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때 고승(高僧)하나가 천축(天竺)에서 건너왔다.

 

 

그는 달마(達磨)라고 불렸다. 

 

그는 선종(禪宗)을 천하에 퍼뜨리다가 한 곳에 정착했다.

 

 

그곳이 바로 무림의 태산북두라 일컬어지는 소림사였다.

 

 

이후 숭산(嵩山) 소실봉(少室峰)에 많은 인재들이 와서 그의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고,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그의 문하제자가 될 수 있었다. 

 

달마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그 중 가장 탁월한 가르침은 무학(武學)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 그 소림사에 풍운이 휘몰아치고 있는 것이다. 

 

유구한 역사를자랑하는 선종의 총본산이며 불가(佛家)와 더불어 무가(武家)의 거성(巨星)인

 

소림사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미복호사(峨嵋伏虎寺)와 사천당가(四川唐家), 공래파, 사천성(四川星)에서 수백 명이 왔고,

 

화산(華山)의 화산검파(華山劍派), 태백파(太白派), 진령파(秦嶺派), 종남검파(終南劍派),

 

전진(全眞), 곤륜(崑崙), 태극검파(太極劍派), 오대산파(五臺山派), 공동산 고목사(枯木寺),

 

산동철기보(山東鐵騎堡), 막북세가(莫北勢家) 등 삼산오악(三山五嶽)과 구주팔황(九州八荒)의

 

정파명숙(正派名宿)들이 대거 모여들었다.

 

 

 남칠성북육성(南七省北六省)은 물론이거니와 머나먼 새외변황(賽外邊荒)에서도 기인들이 왔다. 

 

바로 동의지회(同義之會)에 참석하기 위해서. 

 

이 대회의는 세 가지 뜻을 갖고 있었다. 

 

첫째, 구마령주의 협박아래 풍전등화가 된 소림사를 함께 지키자는것. 

 

둘째, 이제껏 마도에 의해 죽은 사람들의 장례 문제를 해결하자는것. 

 

셋째, 죽은 사람들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들을 뽑자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천하만인에게 존경을 받고, 작은 머리에서 실로 엄청난 계략을 만들어 내곤 했던

 

동의대호법이 없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갑론을박(甲論乙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통에 초조해진 사람은 상복(喪服)을 걸친 천기부주(天機府主)인 천기미인 주설루(朱雪淚)였다.

 

 

그녀는 천기쌍뇌자의 후예로 아주 뛰어난 지략가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가 쌍뇌천기자를 대신하리라 믿지 않았다.

 

 

그만큼 백도무림에서 천기쌍뇌자가 차지했던 비중은 막중했던 것이었다.

 

 

주설루는 그 덕에 중인 앞에서 말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면 아니 되는데 마도를 일통한 구마령주란 자는 이런 식으로는 절대 처단할 수 없어.' 

 

주설루가 혼자서 벙어리 냉가슴 앓듯 초조해 하나 대세는 이미 그런 쪽으로 기울어졌다. 

 

밤이 깊어짐에따라 동의지회는 절정에 달했다. 

 

정각대선사(正覺大禪師)는 아직도 면벽굴(面壁窟) 안에 있었다.

 

 

면벽굴 안에는 제십맹주(第十盟主) 중 이미 죽은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모여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 신품소요객(神品逍遙客)은 과거보다도 훨씬 젊어보였다.

 

 

그리고 곤륜파의 상취도장은 최근 말썽을 일으켜 연금된 설옥경(雪玉卿)이라는

 

제자 때문인지 몇 년 전에 비해 백 살은 늙어 보였다. 

 

개방의 뇌전신개는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심통스런 모습으로 계속 술만 퍼마시고 있었다. 

 

한순간 딱딱! 목어(木魚) 소리가 울리며 어수선하던 실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정각대선사는 목어(木魚)를 치다가 오랜만에 입술을 열었다. 

 

"아미타불 여기 여러분이 오시기 이전에 빈승이 천기(天機)를 보았소이다." 

 

좌중을 바라보는 정각대선사의 눈에서는 진물이 흘러나왔다. 

 

"천기를 보고 장래를 짐작한다는 것은 승려답지 못한 일이나 너무도 답답해 그럴 수밖에 없었소." 

 

" ." 

 

좌중은 촉각을곤두세우고 정각대선사의 말을 경청했다. 

 

"결과 천마성의 기운이 오늘 밤 가장 강해졌음을 알게 되었소." 

 

"그, 그렇다면?" 

 

"천기자가 살아 있다면 어찌 말할지 모르나 하여간 빈승은

 

오늘 득보다는 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후우!" 

 

그가 깊이 탄식하자, 

 

"대사, 놈이 아무리 많은 부하를 끌고오건 승리할 수 없습니다.

 

놈은 나타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술만퍼마시고 있던 뇌전신개가 두 눈에서 형형한 안광을 쏟아내며 입을 열었다. 

 

"신개는 항상 패기가 있어 좋소. 그러나 하늘은 하늘, 땅은 땅일 뿐이오." 

 

"예엣?" 

 

뇌전신개가 얼떨떨해 하자 정각대선사가 조용히 미소지으며 설명을 했다. 

 

"오늘밤이 구마령주가 약속한 십오 일 중 마지막 날이오. 

 

노납이 살계를어기는 파계승이 될지,

 

아니면 구마령주가 무림의 공적이 아닌 천하제일인이 될지는

 

오늘 결정될 것이나 세상에는

 

 

오늘 하루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유구한 세월이 있는 것이오." 

 

그의 말은 대체 무슨 뜻을 지니고 있을까? 

 

오늘의 승부가있는지 없는지도 아직 모른다.

 

 

구마령주가 약속한 대로 오늘 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가 얼마나 많은 부하들을 끌고올지

 

그리고 그가 온다면 오늘 모든 것이 결정나리라.

 

 

오늘 이기는 자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다. 

 

모두들 그렇게믿고 있는데 정각대선사는 전혀 다른 식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일 뿐이라 했다. 

 

결국 그는 승부를 자신 한 사람에게만 국한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천하제일 세력의 우두머리로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소림사 장문인을 기른 사람으로, 그리고 소림사 진전무공에 도달한

 

한 명의 무림인 자격으로 싸울 작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딱딱! 정각대선사가 정심(靜心)을 얻으려는 듯 지그시 눈을 반쯤 내리감고 목어를 치고 있다. 

 

그때 돌연 뎅뎅뎅! 급박한 종소리가 나더니 승려 하나가 줄달음으로 면벽굴 쪽으로

 

서둘러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옵니다. 그가 산하(山下)의 지세를 거침없이 돌파해 이곳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소림 집법원주가 크게 소리치며 다가왔다. 

 

"구마령주가!" 

 

"그가 오고 있다고?" 

 

정각대선사를 제외한 모든 실내의 인물들이 몸을 일으켰다.

 

 

뇌전신개가 그 중 제일 빨리 나가 집법원주의 팔을 꽉잡고 물었다. 

 

"몇이나 왔소?" 

 

"듣기에는 구마령주 혼자 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럴 리가?" 

 

뇌전신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순간 팍! 하는 둔탁한 소리가 면벽굴 안에서 들려왔다. 

 

정각대선사가 목어를 부숴버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낯색은 아주 초췌했다. 

 

"다비식(茶毘式) 준비를 시켜둬야겠군. 혼자 오고 있다면 승부는 이미 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의 음성은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침중함을 느끼게 했다. 

 

다비식이란 승려의 화장의식을 말한다.

 

 

정각대선사는 죽음을 느낀 것이다.

 

 

구마령주가 혼자 오고 있다는 것은 정파에게 좋은 일이어야 하는데 정각대선사만은

 

그말을 듣자 갑자기 백 살도 더 넘어 보이는 것이었다. 

 

소실봉 기슭. 

 

"우우!" 

 

긴 장소성과도같은 군림마후가 터져 나오며 산천초목(山川草木)이 온통 들썩이고,

 

핏빛 구름 한 덩어리가 마치 비조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듯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 위를 타넘으며 소림사 쪽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가 토해내는장소성에는 엄청난 위력이 실려 있었다.

 

 

그를 저지하고자 산문을 지키고 있던 백도의 무사들이 고막을 틀어 막으며 나뒹굴었다. 

 

"고, 고막이 터졌다." 

 

"크윽 소림의 사자후(獅子吼)로는 이런 파괴력을 내지 못한다." 

 

무사들은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귀와 코에서 피를 뿜으며 속절없이 쓰러졌다.

 

 

그들은 등에 검을 진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우!" 

 

혈무로 몸을 둘러싼 자는 장소성의 여운을 끌며 거침없이 소림사 쪽으로 움직여 갔다. 

 

그때 산기슭에서 허름한 옷을 걸친 노도사(老道士) 하나가 혈무가 허공을 가로질러

 

가는 것을 보고는 피식 웃고 있었다. 

 

"무흔류마(無痕流魔)를 십이성(十二成) 익히다니." 

 

그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상상 이상이다. 혼자 저놈을 막을 사람은 단연코 이세상에 없다.

 

고집스러운 자들은 결국 쓰러지고 만다.

 

놈은 구마루가 세워질 때 생각했던 구마령주에 비해 몇 배는 강한 고수로 자라난 것이다." 

 

그가 미소짓는가운데 혈선(血線)은 소림사 쪽을 향해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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