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피의 來歷
①
바로 그때 능설비의 귓속으로 파고드는 모기 소리만한 전음이 있었다.
"영주, 일단 삼 경에 그리 간다 하십시오. 그자는 떨치기 힘든 자입니다.
꼭 승낙을 하셔야 떨칠 수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왜소해도 칠십 년 전에는 대강남북(大江南北)을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었던 절대고수입니다."
대체 누가 말하는 것일까?
전음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자는 무상인마(無常人魔)라 하는 자입니다.
무공수위가 오기조원지경(五氣朝元之境)에 올라 있어 공력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지요."
무상인마!
그 이름은 백도육지주(白道六支柱)와 동배의 이름이었다.
"속하는 황금총관입니다. 일단 무상인마를 떼어놓으신 다음 자세한 것을 들으실 것입니다."
정말 신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자상의 눈에 글을 새긴지 이각(二刻)도 안 되어 황금총관이 능설비를 찾은 것이었다.
'무상인마라는 이름은 혈수광마웅이라는 이름보다도 무서운 이름이다.'
능설비는 황금총관의 전음을 듣고 저으기 놀랐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복아라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강호고수로 보기에는 특별한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키는 작고 똥똥한 것이 도살장의 돼지 같은데, 그가 바로 전설적인 거마 무상인마라니 .
"훗, 마음이 변했는가?"
복아라는 노인, 아니 무상인마는 능설비가 멈춰서며 자신을 바라보자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던졌다.
"귀찮게 따라올 생각은 마시오. 하여간 거기 가기로 하겠으니 당신 일이나 보도록 하시오."
"거짓말은 아니겠지?"
무상인마가 다짐이라도 받겠다는 듯 다시 반문했다.
"물론이오."
능설비는 황금총관의 말대로 그자를 떼어놓을 요량으로 선선히 응낙했다.
"좋아. 그럼 이경(二更)에 여기서 기다리겠다. 그러나 몰래 도망갈 생각은 마라."
복아는 그렇게말하다가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에취! 하는 기침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꽝! 하는 벼락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오 장 밖 거석(巨石) 하나가 산산이 박살이 나버리는 것이 아닌가?
'옥룡토혼술(玉龍吐魂術)!'
능설비는 저으기 놀라며 무상인마를 다시 쳐다보았다.
"후훗, 다음에는 기침이 아니라, 더 재미있는 것을 보여주겠다."
무상인마는 은연중 능설비에게 자신의 위용을 과시한 다음 느릿느릿 걸음을 떼어 놓았다.
놀랍게도 그는 한 걸음에 오십 장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대단한데?'
능설비가 중얼거릴 때,
"이쪽으로 오십시오."
다시 그를 부르는 전음소리가 제왕릉 쪽에서 들려왔다.
얼마 후, 능설비는 능원(陵園)을 지키는 노인과 마주 서게 되었다.
제왕릉의 능원노인, 그가 바로 구마루에 충성하는 황금총관이었던 것이다.
제왕릉 안에는 석옥 한 채가 있고 주위에서 풍기는 송향(松香)이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맑았다.
"그럴 수가"
매우 놀라는 소리가 그 석옥 안에서 흘러나왔다.
방 안에는 능설비와 황금총관이 마주앉아 있었는데 그는 황금총관의 말에 입을 벌렸다.
"정말 유향루에 있던 화복의 중년인이 천자(天子)란 말인가?"
능설비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재차 물었다.
"그렇습니다."
황금총관은 나직하나 힘있는 어조로 대답했다.
능설비와 만나고자 했던 사람,
그는 바로 현재의 대륙을 통치하는 만인지상의 지위에 있는 천자였던 것이다.
그는 어지간한 일로는 바깥 출입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가 몇 년만에 처음으로 미행(微行)을 나섰다가는 능설비를 보고 남다른 점에 감탄해
그를 부른 것이 이날 일의 진상이었다.
"그는 소광태자(昭曠太子)에게 거의 모든 일을 맡기고 병약(病弱)한
소로공주(昭露公主)의 거소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는 아주 뛰어난 사람입니다.
무상인마와 선풍팔기(旋風八奇)가 무림계를 떠나
그의 충신이 된 이유는 그가 천자라는 지위 이전에 완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왜 부른 것 같소?"
"그것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꼭 가야 할지 모르겠구려?"
"가지 않으신다면 아마 무상인마가 천만대군(千萬大軍)을 이끌고 돌아다니며 영주를 찾을 것입니다."
황금총관은 본시 황금귀(黃金鬼)라 불렸었다.
그는 황금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하루에 십 냥(十兩)정도 순금(純金)을 장복(長服)한 바 있었다.
그 결과 그의 장원의 뒷간에는 항상 많은 사람이 들끓었고,
그의 대변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대변으로 평가되기도 했었다.
그의 기행(奇行)은 무림동맹의 철퇴로 인해 산산조각이 되었다.
그는 모든 부하들을 잃고 외아들 하나만을 데리고 허겁지겁 도망쳐야 했었다.
그것이 바로 사십오년 전의 일이었다.
"영주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요?"
황금총관이 본론을 이야기하자,
"축융화뢰(祝融火雷)를 구해 주었으면 하오."
능설비가 황금총관을 찾은 뜻을 분명히 밝혔다.
"아,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화기(火氣)이지요."
"구할 수 있겠소?"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목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황금총관은 말을 마치며 건너방으로 건너갔다.
그는 벽장을 열고 두툼한 책을 한 권 꺼냈다.
책 안에는 천하의 모든 기진이보(奇珍異寶)가 깨알만한 글씨로 수록이 되어 있었다.
"흠, 하나 있다고 적혀 있군요. 정말 잘 되었습니다!"
그는 웃는 낯으로 되돌아왔다.
"언제 구할 수 있겠소?"
능설비가 묻자황금총관은 흔쾌히 대답했다.
"하루면 됩니다. 사실 물건은 제가 아니고 저의 아들 녀석이 구할 것입니다."
"아들?"
"그녀석은 정말 뛰어난 아이입니다.
아비가 마도인(魔道人)임을 수치로 여기기는 하나 허헛,
아비가 구마령주의 속하된 사람임을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어
영주가 명하신다면 즉시 그것을 갖고 올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가르쳤지요."
"부자(父子)가 다른 길을 걷고 있단 말이오?"
"마도계에 대한 충성은 당대(當代)에 국한시킬 것입니다.
속하를 꾸짖으신다 해도 할 수 없습니다."
황금총관은 자신의 심중을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항상 푸른 숲을 보고 살아온 탓일까?
그는 능설비가 보아온 마도인들과는 다른 데가 많은 사람이었다.
첫째, 그는 세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둘째, 그는 야욕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그가 갖고 있는 것이라면 그의 가문을 전멸시킨 백도인들에 대한 철저한 복수심뿐이었다.
더 있다면 자신이 맹세한 구마령주에 대한 충성심일 것이다.
"총관의 아들은 어떤 사람이오?"
능설비가 묻자,
"그아이는 현재 호부상서(戶府尙書) 자리에 있습지요."
"호부의 상서라고?"
능설비는 저으기 놀라 황금총관을 바라보았다.
황금총관의 아들, 그는 온 천하의 창고를 관장하고 있는 지위에 있었다.
호부상서라는 자리는 국고(國庫)를 떡주무르듯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겠는가?
결국 능설비가 바라는 축융화뢰는 황고(皇庫)에 있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이경(二更) 무렵.
능설비는 죽립을 등판에 걸친 상태로 유향루의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는 편월(片月)을 보고 있었다.
'강호의 아름다움 때문일까? 마성이 조금은 흐려진 듯하다.'
그는 그런저런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었다.
백 장 가까이 다가선 사람 하나 때문이었다.
아무 소리없이 다가서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무상인마(無常人魔)가 이미 세상에서 실전되었다고 소문나 있는
유형표허보(流形飄虛步)로 다가서고 있었다.
'일호와 싸우면 평수 정도가 될 사람이다.
강호에서 보기힘든 고수임에는 틀림없다.'
능설비는 모르는 체하고 기다렸다.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군."
복아(福兒)라고 불리는 무상인마가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능설비는 애써 놀란 체를 한 다음 말했다.
"노인은 반 도깨비구려?"
"과거에는 도깨비라 불린 적도 있었지."
무상인마는 다짜고짜 손을 내밀어 능설비의 팔목을 나꿔챘다.
순간 무상인마는 섬찍한 기운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냉기가 이리 강하다니'
능설비의 몸 안에 얼음산(氷山)이 있는 듯,
그의 손목을 타고 차가운 기운이 흘러드는 것이었다.
'으음 내공을 숨기고 있단 말인가?'
무상인마는 나지막한 침음성을 흘리며 능설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에 비쳐진 능설비의 눈빛은 아주 담담하기만 했다.
눈빛만으로 보면 무공을 익힌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나의 마성이 너무 강한 나머지 안으로 감춰졌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노인은 벌써 피떡이 되었으리라.'
능설비는 속으로 뇌까린 다음,
"나는 할 일이 없어 여기 나와 있지는 않았소.
다만 주대인과 한 언약이 있기에 나와 있었던 것뿐이오."
그가 퉁명스레말하자,
"꽤 오래 살았지만 너같이 고집스러운 놈은 처음이다.
오래전 이곳을 떠난 난유향(蘭幽香) 옹주(翁主)도 너만은 못했다."
무상인마는 멋적은 듯 왼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
그 순간,
"뭐, 뭐라 했소?"
능설비가 경악성을 터뜨리며 두 눈에서 혈광을 폭사시켰다.
"어엇!"
무상인마는 능설비의 두 눈에서 뿜어지는 혈광을 보는 순간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아직까지 그는 능설비가 일신에 무공을 지니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런 능설비에게서 한 순간 무시무시한 혈광이 뿜어져 나왔으니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정신을 가다듬고 능설비를 다시 바라보았을 때는 이미 혈광이 사라지고 없었다.
능설비는 다시 담담한 눈빛이 되어 말했다.
"방금 뭐라 하셨소?"
'으음 내가 헛것을 보았는가? 보면 볼수록 신비한 놈이다.'
무상인마는 능설비를 다시 자세히 살피다가 말했다.
"낮에 나의 주인이 너를 부른 이유를 아느냐?"
"모르오."
"그 이유는 너의 옆얼굴이 그분의 사촌 누이셨던 난유향이란 어르신네와 흡사하기 때문이었다."
"난유향은 어떤 여인이오?"
"그분의 사촌이라 하지 않았더냐."
무상인마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능설비는 몹시굳은 표정이 되어 다그쳐 물었다.
"지금 어찌 되었느냐 하는 말이오."
"실종되셨다."
무상인마는 간단하게 잘라 말한 다음 능설비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그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이셨다.
그분은 본시 연경에서 사실 작정이셨는데 북풍(北風)이 그분을 데리고 간 것이다."
"북풍이라니 무슨 바람 말이오?"
능설비는 이상하게도 자제심을 잃고 있었다.
난유향!
그 이름은 바로 능설비 자신의 친어머니가 되는 여인의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그분을 데리고 간 바람은 능은한(陵銀漢)이라는 바람이었다."
' !'
무상인마가 들려주는 말에 능설비는 숨도 쉬지 못 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이 아닌가?
부모 중 한 사람의 이름이 다른 사람과 같을 수는 있다.
그러나 두 명의 이름이 다 같기는 아주 힘들다.
능은한(陵銀漢)과 난유향(蘭幽香)은 바로 청해쌍선(靑海雙仙)이기도 했다.
능설비가 아예 무시해 버린 그의 신분, 거기에 놀라운 배후가 있었을 줄이야.
무상인마가 어찌 이런 능설비의 내막을 알겠는가.
그는 유향루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누각은 우리 어르신네가 난유향 그분께 선물한 것이지.
이십사 년 전, 난유향 그분은 유향루의 낙성식에 참가하시고 돌아가시다가
연경 구경을 온 능은한이란 미남자(美男子)를 보고 한눈에 반해 홀연히 모습을 감추셨던 것이다."
능설비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백지보다 희었다.
그는 지난 세월 동안 애써 부모의 이름을 잊어버리려 했다.
그런데 그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을 줄이야.
'유향 그 이름이 그물이 되어 나를 사로잡다니 으으, 나는 태상마종이다.
그 어떤 사람의 아래도 아냐.'
그의 얼굴은 납덩어리같이 굳어졌다.
능설비가 좋든 싫든 그가 황실(皇室)의 일족(一族)이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는 문득 모든 것을 버리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마음을 느꼈다.
'모든 것에서 멀어지고 싶다. 혈해(血海) 속으로 들어가 버리며 나의 이성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싶다.'
갑자기 이상한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하지만 지금 당장 무상인마를 때려 죽이고 떠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내일 새벽 황금총관의 아들에게 축융화뢰를 건네 받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다.
그 장소는 바로 황성(皇城)이었다.
능설비는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에 황성으로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날의 밤은 유난히도 깊어 보였다.
달빛마저도 오늘따라 잔혹할 정도로 아름답게 출렁이며 능설비의 심란한 마음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았다.
황궁의 깊은 곳, 능설비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그는 탁자 위를 손가락질 했다.
탁자 위에는 비단으로 된 홍포(紅袍)가 놓여 있었다.
"이곳이 황궁이고 자네를 부른 어르신네가 바로 주상(主相)임을 알고도 그리 고집스러운가?"
무상인마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능설비를 나무랐다.
그러나 능설비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려 들지 않았다.
"그 사람이 주상이라는 것과 내가 이 화려한 옷을 걸쳐야 한다는 것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이오?"
"쯧쯧, 입으라면 입게."
무상인마는 혀를 한번 찬 다음 휑하니 방을 나섰다.
'황제는 대체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나답지 않은 일인데,
또다시 남의 말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가?'
능설비는 불쾌한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어찌 생각하면 나의 경험을 넓히는 일도 될 수 있다.'
그는 스스로 위안이라도 하듯 자신을 타이르며 옷을 갈아 입었다.
일식경 후에 나타난 사람은 무상인마가 아니라 아주 아리따운 시녀 두 사람이었다.
"따라 오십시오."
"저희들이 모시고 가겠습니다."
시녀들은 능설비를 보고 얼굴을 괜히 붉혔다.
능설비의 모습은 가히 인중룡(人中龍)이었다.
그의 번듯한 모습은 그림 속에도 없을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일단은 하라는 대로 해 주지.'
능설비는 순순히 시녀들을 따라 걸어갔다.
'천자(天子)가 과연 나의 외백(外伯)이 되는 사람이란 말인가? 아니다.
그의 사촌인 난유향은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이다.
나는 지독히도 잔혹한 사람이다. 나에게 피붙이가 있을 수 없다. 절대로.'
능설비는 또 한번 자신을 시험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끊도록 교육받은 사람이었다.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태상마종 구마령주로서의 임무뿐이었다.
그는 그것을 잊을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여차하면 천자를 쳐죽여 내가 태상마종임을 온 세상에 알리리라.'
그는 마음을 모질게 다잡아 먹었다.
황궁 안은 깊고 넓었다.
능설비는 시녀들을 따라 걷다가 아주 아름다운 내전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렇게 신비한 곳이 있다니 만화지(萬花池)보다 더 신비하지 않은가?
역시 황궁은 황궁이다.
나의 이목을 많이 넓힐 수 있으니 헛걸음만은 아니다.'
능설비가 그렇게 생각할 때,
"저 안입니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시녀들은 내전에 딸린 방문 하나를 가리켰다.
"들어가라면 들어가지."
능설비는 냉소를 흘리며 방 가까이 다가갔다.
'황금총관은 내가 천자를 거역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사실 나는 지극히 충성스럽고 쓸모 있는 부하를 잃고 싶지 않아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내게 귀중한 것은 천자가 아니라 마도의 충신 황금총관인 것이다.'
능설비는 속으로 뇌까리며 방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소리를 내며 방문은 안쪽으로 열렸다.
방 안은 아주 어두웠다. 천자가 있을 만한 곳은 아니었다.
방 안에는 야릇한 향연이 가득했고 한 구석에서 이상한 흐느낌 소리가 나고 있었다.
"흑흑."
아름다운 휘장이 신비하게 드리워져 있는 침상 위,
궁장여인 하나가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흐윽 아바마마, 어이해 소로(昭露)에게 이토록 불결한 일을 강요하는 것입니까."
여인의 흐느낌소리가 애잔하게 퍼져 나갈 때였다.
능설비가 밀고 들어왔던 방문이 육중한 소리와 함께 닫혀지며 방 안은 아주 어두워지고 말았다.
물론 능설비는 구마루 안에서 터득한 안력(眼力)을 이용해 방 안을 낱낱이 살필 수 있었다.
'도깨비 놀음이군. 이곳은 꼭 신방(新房)같지 않은가?'
능설비는 합환소(合歡所) 같은 실내를 보고 어처구니 없어했다.
바로 그때였다.
옷을 갈아입기 전에 만났던 무상인마의 목소리가 그의 귓속으로 천둥소리처럼 파고들었다.
"젊은이 미안하네.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네. 모두 천자를 위하는 일이니까."
"무슨 짓이오?"
능설비가 대략적인 상황을 눈치채고 크게 소리치자,
"아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아무 것도 할 말이 없다네.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그러나 자네에게 있어서는 일생일대 영광이라는 것도 사실이네."
무상인마의 전음은 거기에서 끝났다.
그리고는 돌과 돌이 가볍게 마찰을 일으키며 내는 기관음(機關音)이 나며
지독한 향풍(香風)이 흘러들었다.
분홍빛 안개가 삽시간에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으으, 이것은 바로 최음제(催淫劑)."
능설비는 기겁하여 코끝을 찡그렸다.
그 순간 침상 쪽에서 다시 흐느낌이 들려왔다.
"오오, 하늘이시어. 어이해 소로(昭露)에게 이런 처참함을 주십니까?
공주(公主)답지 못하게 흉물(兇物)로 태어난 죄로 평생 외부 출입을 못 한 것만도
괴로운 일인데 혼례마저도 이렇게 해야 하다니!"
침상 위에 있던 여인이 탄식하며 얼굴을 들어 능설비 쪽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여인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
능설비는 먹은 것들을 모두 다 토해 버리고 싶은 심한 구역질을 느꼈다.
침상 위에 있는 소로공주(昭露公主)라는 여인은 사람이 아니고 야차(夜叉)였다.
얼굴 위에 수백 개의 자잘한 피고름 주머니가 매달려 있고,
고름주머니에서 악취가 심하게 풍기고 있었다.
반쯤 썩었다고 할까?
그런 가운데에도 아름다운 것이 있기는 했다.
눈이 아주 아름다운데,
얼굴이 너무 흉해 눈빛의 아름다움은 아예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였다.
소로공주는 하늘을 보며 흐느끼다가 손을 품에 넣었다.
"차라리 처녀귀신이 되는게 낫지.
아아, 이렇게 비굴하게 살 바야엔 내 손으로 나의 숨을 끊으리라!"
그녀의 손에 비수(匕首) 하나가 들려 나왔다.
아주 섬뜩한 빛이 날끝에 감도는 비수였다.
소로공주는 비수를 자신의 목젖에 대고 그어대려 하다가는,
"으으 힘, 힘이 사라지다니, 으으음!"
그녀는 몽롱한연기에 취하며 힘없이 비수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연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최음약이었다.
비수를 떨군 뒤 소로공주는 욕정을 느끼기 시작하며 몸을 뒤틀었다.
"아아!"
그녀가 뜨거운숨소리를 토할 때,
"더러운 놈들 나, 나가서 모조리 쳐죽이리라!"
능설비의 눈에서 흉광(兇光)이 폭사되었다.
천자가 그를 부른 이유는 너무나도 뜻밖이었다.
천자는 우연히 본 능설비의 풍도(風度)에 반한 나머지,
능설비를 자신의 부마(駙馬)로 삼을 작정을 했던 것이다.
천자는 그렇듯 모든 것을 제멋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소로공주는 황제의 막내 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건만 불행히도 태어난 지 얼마되지 않아 추물(醜物)이 되었다.
이후, 그녀는 야귀(夜鬼)와도 같이 살아야 했다.
벌건 대낮에는 물론이려니와 캄캄한 밤이 되어도 그녀는 자신의 처소에서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고 틀어박혀 지냈다.
시녀들 중에서도 입이 무거운 시녀만이 그녀 곁에 갈 수 있었다.
소로공주는 이름만 알려졌을 뿐, 모습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지난 십수 년을 보낸 여인이었다.
혼례식을 치룬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천자는 그렇게살아야 하는 소로공주가 불쌍하다 여긴 나머지
우연히 자신의 마음에 들게 된 능설비를 소로공주의 짝으로 삼을 작정을 해 버리고,
무상인마로 하여금 능설비를 데리고 오라 명령했던 것이다.
능설비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손을 휘저었다.
"모두 쳐죽인다!"
그는 이를 으드득 갈고 마공을 쓰려 했으나,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내공의 힘은 강기(康氣)가 되어 나가는 대신 아주 지독한 색욕이 되어 갑자기
그의 마음을 휘감아 버리는 것이었다.
능설비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다.
하늘과 땅이 꺼꾸로 도는 듯한 가운데 피가 펄펄 끓어올랐다.
능설비는 아직 동자신(童子身)이다.
그 덕에 최음약 기운에 쉽게 취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독(毒)이 아니라 약(藥)이었다.
독이었다면 차라리 걸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능설비가 끓어오르는 욕정으로 몸을 뒤틀고 있을 때,
침상 위에서 흰 몸뚱이가 벌떡 일어났다.
"흐으윽. 어, 어서 나를 "
신음소리와 함께 찌이익! 하는 옷가지 찢겨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소로공주가 모든 옷가지를 찢어버리며 몸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녀의 속살은 얼굴과는 달리 지극히 아름다웠다.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듯한 봉긋한 두 개의 투실거리는 젖무덤과 끊어질듯 휘어진 연약한 허리,
그 아래 평퍼짐한 곡선을 긋고 있는 둔부는 완연한 여인임을 보여 주었다.
"이, 이리 와라. 어서!"
최음제에 취해이성이 마비된 소로공주는 사람이 아니라 발정한 암캐와 같았다.
상황은 능설비역시 마찬가지였다.
"여, 여자가 그립다. 으으윽 !"
그는 걸치고 있는 옷이 거추장스럽다는 듯 훌렁 벗어 버리며 침상 쪽으로 다가갔다.
방 안은 두 사람이 뿜어내는 열기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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