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비연경룡

제50장 지는 해와 떠오르는 해 <end>

오늘의 쉼터 2014. 6. 22. 15:22

 

제 50 장 지는 해와 떠오르는 해

 

 

 

  원홍대사의 말이 막 떨어지는 순간

저쪽 신원통(申元通)은 이에 구리로 된 동환(銅環)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러자 단번에 들려오는 픽 픽 하는 소리에 신원통은 아차하고 황망히

손을 놓았지만 때는 늦었다.

 

소림파의 장문인인 원홍대사는 신원통의 행동을 주의 깊게 주시 하고 있었으나

갑자기 와르르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 쪽의 바위가 움직이면서 시커먼

구름덩이 같은 것이 쏟아져 나와 일시에 달려오는 것이었다.

 

이때,

 

원홍대사의 오른 쪽에 서 있던 양몽환은 바위가 열려지면서 굴속에서 나온 것이

수 천 마리가 넘는 새까만 왕벌(王蜂) 인 것을 보고 크게 외쳤다.

 

「조심 하시오!」

 

하고는 들고 있던 장검으로 휘둘러 은빛 무지개를 그리며 달려드는 왕벌의 앞길을 막았다.

원홍대사와 일양자도 커다란 장검을 휘둘러 바람을 일으켜 후려치고

신원통 역시 장풍을 날려 보내 벌 떼들을 후려쳤다.

그리하여 주위 일대에는 장검과 장풍에 얻어맞고 떨어져 죽은 벌 떼가 산을 이루었다.

 

거의 한 시각 가량이 지나서야 수천 마리의 벌 떼들을 박멸할 수 있었다.

 

음수일판 신원통은 약간 겸연쩍은 얼굴로 옆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본인의 일시 소홀로 여러분들을 함정에 빠뜨릴 뻔 하였습니다.」

 

하고 민망해 했다.

 

그 후 일행은 다시 앞으로 달려 나갔다.

계곡은 점점 좁아지고 앞의 골짜기는 웅장한 숲으로 얼마나 긴 계곡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행이 다시 몇 리 길을 달리자 갑자기 계곡에는 썩은 냄새가 떠도는 것이

구토증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었다.

모두 기분이 이상한 듯 걸음을 빨리하여 산세를 따라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자 갑자기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표범과 호랑이 그리고 사자 등

맹수들의 죽은 시체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일양자가 이들을 굽어보더니 얼굴을 돌리고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

천용방이 우리들을 대비하여 매복시킨 흉악한 맹수들이 누군가의 손에 모두 죽었으니

도대체 누가 죽였을까요?」

 

그러자 원홍대사는 가만히 아미타불을 외웠다.

 

「조금 전 들려오던 맹수들의 부르짖음이 바로 우리를 도와 맹수들을 처치할 때인 모양인데‥‥)

 

하자 신원통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대사의 고견으로는 그 분이 누구일 것 같습니까?」

 

「어찌 이 늙은이가 알 수 있겠소?

그러나 이 않은 맹수들을 격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아

결코 이름 없는 분은 아닐 것 같소.」

 

  그러자 정현도장이 의미심장하게 한걸음 나섰다.

 

「어려운 것은 이 몇 마리의 맹수를 격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천용방에서 매복시키기 전에 기선을 제압하여 미리 복병을 없애게 한 사실입니다.

매복되었던 사람들이 비록 천용방의 고수는 아니더라도

무공이 약한 자는 아닐 것인데 두 명이 다 죽은 것으로 보아 대단한 자인 것 같습니다.」

 

  이때, 일양자는 언뜻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구대 문파의 고수들은 전부 이곳에 모여 있는 이상 무예계에서다시 누가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 혹시 그녀가 협조한 것이 아닌지?)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으나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여러 군협들은 웅성거리며 이러쿵저러쿵 추측을 하고 있으나

결국 억측에 불과한 것이었다.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연도에는 독 있는 구렁이와 맹수들이 뻗어있고 위험천만인 함정이

요소요소에 있었으나 파수 보는 사람들이 모두 혈도를 찔린 채 죽어있었다.

그리하여 군협들은 조금도 곤란을 겪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약 십리 길을 걸어갔을 때 홀연 좌우 양편의 협곡과 그들이 걸어 나온 협곡이

합쳐진 곳이 나타났다.

 

그러자 커다란 바위 뒤에서 고귀한 기풍이 있는 절세의 소녀가

입가에 미소를 띠우고 가슴에는 하얀 봉(鳳)을 수놓은 옷을 입고 걸어 나오는데

그의 아름다움에 사람을 누르는 위엄이 있어 군협들도 감히 바라볼 수 없는 듯

눈이 부시고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었다.

 

그 순간, 하림이 먼저 알아보고 달려 나갔다.

 

「란이 언니!」

 

  주약란이었다.

 

  많은 각 파의 군협들 가운데 몇 사람은 그 소녀를 알고 있지만

대부분은 괄창산 천기석부에 살고 있는 주약란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었다.

 

주약란은 달려오는 하림의 손을 힘 있게 쥐며 밝게 웃었다.

 

「림매, 축하해요. 오늘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게 되었어!」

 

  그러자 하림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누가 나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요?」

 

  갑자기 밝고 고운 아름다운 소리와 함께 등인대사(澄因大師)가

선장을 어깨에 걸머진 채 주약란이 나왔던 바위 뒤에서 나타났다.

 

「림아, 너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는 바로 천용방 오기단주(五旗壇主) 가운데 한 사람인

백보비발(百步飛?) 제원동(薺元同)이다.」

 

순간,

 

군협들은 모두 그 커다란 바위 뒤에 도대체 몇 사람이나 몸을 숨기고 있는가 하고

목을 빼고 바라보는 것이었다.

 

하림은 뜻밖에 나타난 등인대사에게로 달려가 엎어지듯 그의 품속으로 뛰어 들었다.

 

「대사님! 그럼 지금까지 부모님이 안 계시다고 하신 것은 비명에 돌아가셨기 때문이군요.」

 

「십여 년 동안 이 사실을 너에게 숨긴 것은 네가 슬퍼하고 무공에 등한시 할까 염려해서였다.

자, 이것이 네 어머님의 유물이고 유서다. 이제는 가져가거라!」

 

하며 등에 메었던 보따리를 풀어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무릎을 꿇고 보따리를 받아 풀어헤친 하림은 어머니의 유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는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흘렀다.

 

이 물건은 본래 혜진자가 등인대사로부터 맡아서 보관해 오다가 괄창산에서

조소접에게 건네어 주게 되고 조소접은 이를 주약란에게 전해 주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주약란은 다시 등인대사에게 돌려주어 드디어 지금 하림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었다.

 

번개 같은 눈초리로 모든 군협들을 훑어보던 주약란은 모두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천용방의 이창란은 이미 오기단주와 방내의 고수들을 이끌고 저 쪽 골짜기에서

여러 구대 문파의 고수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고는 몸을 돌이켜 울고 있는 하림에게로 다가갔다.

 

「결전을 앞에 두고 슬퍼한다면 어떻게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 부모님의 영혼을 위로하겠어?

속히 진정하고 정신을 차려요.」

 

위로하는 말에 하림은 보따리를 정리하고 눈물을 닦았다.

 

「언니의 말씀이 옳아요.

저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게 한 원수를 꼭 죽이겠어요.」

 

그러자 주약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림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듯한 그녀의 행동이었다.

 

이때,

군협들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 이 절세의 소녀가 맹수 들을 죽이고 천용방이

요소요소에 매복시킨 매복병을 죽여 자기들 을 구해낸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주약란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자

그들도 조용히 뒤따를 뿐 아무도 그녀를 앞질러 나가 는 사람이 없었다.

 

다시 조그만 계곡을 지나 전망이 갑자기 변하면서 그들의 앞에는 널따란 빈 터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빈터에는 천용방의 고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서 있는 것이었다.

이창란은 용두(龍頭)지팡이를 짚고 한복판에 떡 버티고 서서는 주약란이

뭇 구대 문파의 고수들을 이끌고 나타나자 수염을 쓰다듬으며 크게 웃었다.

 

「이 늙은이는 벌써 소저와 이 천지간에 병립(?立)할 수 없음을 직감하고 있었소!

오늘 소저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 날이오.」

 

그러자 주약란도 지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미 몇 번을 권고했는데 어째 또 나타났죠?」

 

「뭐라고? 요망한 계집이 누구를 훈계해?」

 

  순간, 주약란의 초생달 같은 눈썹이 곤두서며 얼굴은 한층 싸늘해 졌다.

 

  이때, 원홍대사가 앞질러 나셨다.

 

「이방주가 노리고 있는 것은 우리 구대 문파인데 어찌 타인에게 천노(遷怒)하시오.

이 늙은이가 나이는 들었지만 이방주와 생명을 걸고 한 수 겨누겠소.」

 

「흥! 당신은 나의 적수가 못되오. 역시 저 주소저와 싸우는 것이 좋겠소!」

 

  이창란의 말을 들은 원홍대사의 얼굴이 홱 변했다.

 

「팔십이 다 된 나이로 이제 죽어도 한이 없소.

당신을 두려워 할 내가 아니오.

적수가 되는지 안 되는지 해봅시다.」

 

하는데 주약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졌다.

 

「이방주! 고개를 돌려서 뒤를 보세요.

여전히 정신 차리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겠다면 나의 수단이 얼마나 악랄한지 보여 주겠어요.

원망 마세요.」

 

못 군협들이 일제히 주약란의 말대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산 건너편에는 시커먼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부근의 유곡(幽谷)에서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중 한 계곡에서 네 명의 백의 시녀가 비파를 들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를 옹위한 채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어 허공에서 큰 백학이 길게 울며 기운차게 내려와 땅에 사뿐히 앉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학의 등에는 두 명의 여인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 여인들은 바로 삼수나찰 팽수위와 퉁소의 명수 옥소선자였다.

 

많은 군협들 가운데 응수일판 신원통은 오매불망으로 찾아 헤매던 옥소선자가

나타나는 바람에 크게 충격을 받은 듯

 

「옥소선자!」

 

외치고 군협들을 헤치며 달려 나왔다.

 

그는 일파의 장문인 신분으로 이와 같은 추태를 보이자 모든 군협들이 수군거렸다.

 

옥소선자는 옆 눈으로 그를 한 번 바라보고는 얼굴에 가득히 엄숙한 빛을 띄우고

삼수나찰 팽수위와 주약란 앞으로 일제히 나아가 허리를 굽히며

 

「비녀(婢女)들은 분부대로 명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하자 주약란이 미소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돌연, 왼 손을 쳐들고 비스듬히 장풍을 후려갈기며

 

「물러가요!」

 

하는데 그녀가 일으킨 장풍은 아무 소리도 없이 부딪쳐 나갔다.

 

그러자 신원통이

 

「윽!」

 

하고 뒤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원래 신원통은 옥소선자가 자기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으므로 쫓아 나가다가 당한 것이다.

 

옥소선자가 강호에 종횡한지 십여 년 동안,

대단한 명성을 떨쳤으며 많은 구대 문파의 인사들이 그녀를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딴 사람인양 반쯤 눈을 감고 팽수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모양이

마냥 정숙하기만 했다.

 

주약란은 일장으로 신원통을 물러나게 하고서는 이창란을 향하여 엄숙한 어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피땀을 흘려 이룬 함정과 매복병은 모두 제가사람을 시켜 불태워 버렸습니다.

부인이 거처하시는 세심암(洗心庵) 이외에는 기와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을 거예요.」

 

하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신응과 진보가

질풍 같이 달려오더니 주약란의 일장 거리 밖에서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굽히는 것이었다.

 

「천용방이 감금한 무예계의 동료들을 구출하라는 공주님의 분부는 이미 이룩하였습니다.

그중에는 아미파 장문인 초범 대사도‥‥」

 

  주약란은 그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주라는 말을 하는 것이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말을 막았다.

 

「됐어요. 물러가세요.」

 

하며 손짓했다.

 

  그러자 그들은 다시 허리를 굽혀 공손한 태도로 절하고는 물러갔다.

 

  구대 문파의 군협들은 주약란이 천용방의 계략을 완전히 파괴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놀라고도 기뿐 나머지 어쩔 줄을 모르는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주약란은 이창란에게 몇 걸음 다가가며

 

「지자 천려일실(智者千慮一失)이라고 당신은 당신들의 총단의 방비가 엄하고

은밀하다고만 생각하여 모든 방의 고수들을 데리고 나온 것이 잘못이에요‥‥‥」

 

조롱하듯 미소를 띠우며 하는 말에 이창란은 노기가 충천했다.

 

「너 죽기 아니면 나 죽기다.」

 

  벽력같이 외치고는 지팡이를 번개같이 휘둘러 주약란의 가슴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지팡이가 쇳소리를 내며 가슴을 찔러 왔으나 주약란은 바위라도 가루로 만들

천근의 지팡이를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버터고선 채 눈도 깜짝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녀의 태도에 발은 고수들은 혀를 내두르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말았다.

 

그 순간,

 

이창란은 상대방이 너무나 고귀하다는 것을 느끼는 동시 소녀의 앞가슴을 겨누는

실례의 행동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방향을 바꾸어 어깨를 찌르려고 했다.

 

그제야 주약란은 몸을 슬쩍 비키면서 나직이

 

「아직 광명정대한 기풍은 잃지 않았군!」

 

하고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지팡이의 일격이 실패로 끝난 이창란은 다시 지팡이를 맹렬히 휘두르며 공격하자

옆에 있던 오기단의 단주들도 주약란을 에워 싸며 달려 들었다.

 

이때,

 

옥소선자의 격노한 외침이 터졌다.

 

「이방주! 부끄럽지도 않아요!」

 

  그녀는 본래 야성적인 여인으로 생각한바 있어 주약란에게 귀의하였지만

여전히 옛 습성대로 고함을 지르고는 퉁소를 휘둘러 주약란을 보호하고 나섰다.

 

그러자 홀연 사람의 심신을 어지럽히는 비파 소리가 가냘프게 퍼지며 조소접이

큰 소리로 날카롭게 외쳤다.

 

「손을 멈추세요!」

 

  그러자 군협들은 모두 그 비파 소리가 마치 철추로 그들의 가슴을 때린 듯

몸을 부르르 떨며 얼굴빛이 돌변하고 말았다.

 

순간,

 

이창란과 오기단의 단주들도 동시에 손을 멈추었다.

 

이때,

 

천용방의 고수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려보던 주약란은 하림이 들고 있는

장검을 손짓해서 받아 쥐었다.

 

「천중사추(川中四醜)는 그 동안 가장 많은 죄악을 저질렀으니 나는 그들을 먼저 죽이겠어.」

 

하고는 몸과 검이 한 덩어리가 되어 번개같이 앞으로 내닫는데 바로 검술 가운데

가장 높은 경지의 어검지술(御劍之術)이었다.

  천중사추는 평시 이창란의 좌우를 호위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이창란과 오기단주 뒤에 서 있었다.

주약란이 그들을 처치하려면 반드시 이창란과 오기단의 단주들의 저지를  뚫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주약란은 싸늘한 검광을 길게 뻗치며 마치 번개같이 내닫는데 보는 사람은

바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이창란이 지팡이로 막았으나 주약란은 검과 한 덩어리가 되어 지나간 뒤였다.

그리고 눈부신 검광을 번쩍이고 내달리자 오기단의 단주들은 모두 놀라 뒤로 물러섰다.

  이어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들려오는 가운데 네 사람의 머리가 날고 머리 없는

시체들이 피를 뿜으며 나둥그러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다음 순간 검광이 되돌아가면서 검의 장막에 싸였던 주약란의 자태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 한 수의 어검술에 모든 군협들은 입을 벌리고 한동안 다물지 못했다.

  주약란이 장검을 한번 휘두르고 냉랭한 어조로

 

「이방주! 당신이 만일 나의 충고를 받아들여 즉시 천용방을 해산하고

풍경이 아름다운 곳에 은거하면 남은 여생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겠지만

여전히 고집을 부리면 오늘이 바로 당신의‥‥‥」

하는데 이창란이 대갈일성하며 머리털과 수염을 곤두세우고는

건원지신공을 발휘하여 질풍 같은 지풍을 날려 보내는 것이었다.

 

「노부를 무시하지 말고 이 건원지나 받아라!」

 

하고 호령했다.

 

  그 순간,

 

주약란도 날카롭게 오른 손에 검을 왼 손에는 천강지(天?指)를 운용하여

검과 천강지를 일시에 운행하며 이창란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홀연, 일진의 광풍을 일으키며 조소접이 주약란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언니! 잠깐만 저에게 맡기세요.

건원지가 대단하다지만 나의 반선장(般禪掌)과 현문일원강기(玄門一元?氣)를

먼저 보여 주겠어요.」

 

하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연 이창란이 윽! 하고 신음소리를 내고

일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이 찰나적인 변화는 가히 번갯불이 번쩍하듯 빠른 것이어서 군협들은

한결같이 이창란이 어떻게 공격  당했는가를 분명히 보지도 못하고 알 길도 없었다.

 

원래 조소접은 이창란의 머리털과 수염이 모두 일어나는 것을 보고

전신의 공력을 중하여 주약란과 생사의 판가름을 내려는 결심임을 즉시 짐작했다.

그러나 주약란은 아직 임, 독(任, 督)의 기혈이 유통되지 않아 기력에 한정이 있는데다가

가장 진기를 소모시키는 어검술을 사용했기 때문에 혹시 원기를 회복하지 못했을까 하는

염려에서 몸을 날려 주약란의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그리고 왼 손으로는 반선장력을 발휘하고 오른 손에는 현문일원강기를 운집시켜

대적하게 이른 것이었다.

 

이 수법은 바로 불가(佛家)의 무상심법(無上心法)으로 강렬한 장품에 부딪치면 부드러워 지고

부드러운 장풍에 부딪치면 강렬하게 되는 것이 특징으로 어떠한 고수라도 쓰러뜨리게 하는

위력이 있었다.

 

이창란은 자기의 건원지 지풍이 반선장의 장풍과 맞부딪치자 마치 쇳덩이에 부딪친 듯

반응이 이상하여 조금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이창란은 즉시 잘못 되었음을 알고 몸을 돌려 물러서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반선장력이 부딪쳐 오고 있을 때였다.

다행히 그는 견문이 넓은데다가 공력이 심후하여 침착하게 건원지의 지풍을 날리는 동시에

오른손의 지팡이를 휘둘러 강경하게 변화되는 조소접의 반선장의 반격을 은근히

막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다시 조소접이 휘둘러 보낸 현문일원강기에 진기를 소모한 이창란은

가슴을 얻어맞고 나가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조소접은 일격에 이창란을 쓰러뜨리자

곧이어 오기단의 단주들에게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백옥 같은 손을 들어 철썩 철썩 다섯 사람에게 두 대씩 뺨을 때렸다.

 

그리고는 번개같이 돌아서는 조소접이었다.

그러한 그녀의 행동이 너무나 빠르고 때리는 수법이 괴이하여 피할래야 피할 수도 없었다.

 

오기단의 단주들이 무기를 들고 막으려고 했을 때에는

이미 제 자리로 돌아온 조소접이었다.

 

뺨이 벌겋게 부어 오른 이들이 모두 공격하려고 몸을 앞으로 움직이는데

갑자기 이창란의 나직한 호령이 들려왔다.

 

「잠깐!」

 

  돌아보니 이창란은 겨우 몸을 일으킨 듯 지팡이에 의지하고 몇 걸음 다가오며

주약란과 조소접을 천천히 훑어보고는 비통하게 외쳤다.

 

「이 노부의 한 평생에 오늘과 같은 참패는 처음이다‥‥」

 

  그러자 주약란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냉랭하게 그러나 조리 있게 꾸짖듯 말하는 것이었다.

 

「천용방은 본래 구대 문과와 더불어 강호에 병존할 수 있는 것을 당신이 망령되게

무예계를 당신 앞에 무릎을 뚫게 할 야심으로 각 문파의 고수들을 이곳에 초청하여

그들을 일망타진하려고 음흉한 계략과 비겁한 수단을 사용했으니 천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더구나 무예계를 제패하기 위하여 양수(良秀)를 불문하고 사람들을 끌어 들여 천용방으로 하여금 강호에서 가장 더러운 곳이 되게 했으니‥‥‥」

 

하고는 잠시 말을 중단했다.

그리고는 하림을 불러 세웠다.

 

「림매, 이리와요.」

 

  하림은 주약란에게 달려와서는 제원동을 바라보며

 

「언니! 저 등에 동발을 메고 손에 강륜(鋼輪)을 든 사람이 바로 나의 아버지의 원수인가요?」

 

「맞았어. 림매가 저 사람을 죽여 아버지와 어머니의 원수를 갚도록 해요.」

 

하며 장검을 내어 주었다.

 

  하림은 장검을 받아 들고는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이때, 양몽환은 혹시 하림이 실수라도 할까 염려하여 긴장하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조소접은 양몽환을 쳐다보고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그만두고 손짓하여

네 시녀를 불러 비파를 받아드는 것이었다.

 

하림은 검을 들고 조심히 나아가는데 한발 한발이 천근의 쇠뭉치가 발에 달린 듯 무거워 보였다.

드디어 쌍방이 서 있는 중간 지점에 이르러 검을 들어 제원동을 가리키며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나와요!」

 

  그러자 제원동은 이창란을 쳐다보고는 애원하는 듯

 

「옛날 나의 손에 죽은 사람의 딸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는군요.」

 

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모든 사태를 파악하고 비통에 젖어있던 이창란은 체념한 듯이

눈을 감으며 길게 탄식했다.

 

「나가시오.」

 

  방주의 말이 처량하게 떨어지자

제원동은 주먹을 쥐고 허리를 굽히고는 뚜벅 뚜벅 걸어 나와

하림과 석자의 간격을 두고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네 가 심사랑(沈士郎)의 딸이냐?」

 

「그래요. 당신은 나의 아버지를 죽이고 나의 어머니도 죽였으니 그 원수를 갚고자 해요!」

 

「강호에서 피차간에 충돌은 면할 수 없는 일!

만일 당시 그때 모친이 죽지 않고 내가 죽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어!」

 

「저의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쓰여 진 유서에 자세히 저의 아버지를 죽인 원인을 설명하고 있어요. 나 때문이라고!」

 

하고는 두 줄기의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제원동은 큰 소리로 조롱하듯 외쳤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면서 패 울기만 해!」

 

  그는 하림이 자기와 심사랑과의 원한 관계를 여러 사람 앞에 폭로시킬까 두려워

먼저 선수를 쓴 것이었다.

 

하림 역시 여러 사람이 듣고 있는 이 자리에서 지나간 은원 관계는 폭로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했다. 즉각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러한 그녀의 수법이 얼마나 느린지 힘이 하나도 없는 듯 했다.

 

제원동은 그녀의 검이 너무나 느릿하게 찔러 오는데 이상하게 생각하며 강륜(鋼輪)을 들어 막았다.

 

그러나 하림은 제원동의 강륜에 검이 닿을 듯하자 갑자기 검을 아래로 내려

제원동의 아랫도리를 비스듬히 후려쳤다.

그러자 검풍이 획! 하고 일어나는 것이 굉장히 맹렬한 것이었다.

 

그 바람에 섬뜩해진 제원동은 몸을 뒤로 다섯 걸음을 물러났다.

 

그 순간,

 

하림은 즉각 검을 휘두르며 기묘한 검법으로 연이어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한 제원동은 황급히 좌우로 강륜을 휘둘러 간신히 막아냈다.

 

한편,

 

등인대사는 선장을 들고 한 쪽에서 하림의 공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비록 주약란으로부터 하림의 무술이 크게 진보하여 충분히 제원동을

죽일 수 있으리라는 말을 들었지만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천용방의 다른 오기단의 단주들도 역시 무기를 들고 호시탐탐 노리는 것이

어느 때라도 제원동이 불리하면 나설 태세였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하림이 제원동을 이길 수 없으리라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하림을 도울까 염려스러워 대비할 뿐이었다.

 

주약란은 싸움이 점점 열을 띠기 시작하여 고조에 달하는 것을 보고

또 하림이 종종 귀원비급에 있는 검술로 공격해서 승산이 확실해지자

즉시 큰 소리로 천용방 단주들에게 위협했다.

 

「지금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은 피차에 깊은 원한으로 생사를 가리지 않으면

손을 멈출 수 없는 단계에 있으니 어느 누구라도 나서서 도우려고 한다면

즉각 보복을 당할 것이오.」

하고는 조소접에게 엄중히 분부했다.

 

「접매가 책임지고 감시하여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일방을 도우려고 나선다면

즉시 격살하도록 해요.」

 

「언니는 염려마세요.

누구든지 언니의 뜻을 거역한다면 당장에 처치하겠어요.」

하고 여유 있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비파를 왼손에 옮겨 쥐고 오른손에 운기하여 대비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주약란과 조서접이 말하는 동안 싸움의 형세는 최고조에 달한 듯

하림은 각수의 기이한 수법으로 날카로운 공세를 펼치고 제원동은

한 쌍의 강륜을 역시 갖가지의 수법으로 공세를 막는데 검에서 내뽑는

싸늘한 광채와 강륜에서 발하는 푸른빛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이 부시게 했다.

 

이때,

 

하림이 허공으로 뛰어 오르면서 기세 있게 보검을 휘둘렀다.

그러한 하림의 보검에서는 무수한 별꽃을 일시에 뿌리는 듯 하늘 가득히 검광으로 싸여

제원동에게로 덮쳐 내려갔다.

이는 바로 천기진인이 저술한 검경(劍經) 가운데의 기묘한 수법인

천하도괘(天河倒掛)인 것이었다.

제원동은 무수히 뿌려지는 검의 섬광에 순간적으로 위압된 듯 멈칫했다.

그러나 그 순간 제원동은 외마디 신음 소리와 함께 가슴에서 선혈을 낭자하게 흘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하림의 검에 가슴을 깊숙이 찔렸던 것이다.

  그러자 개비수(開碑手) 최문기가 이를 보고 몸을 날려 달려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조서접이 날카롭게

 

「비키지 못해요!」

 

하고 외치며 멀찍이 서서 손을 들어 앞으로 밀어 일장을 후려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금도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없었다.

그러자 최문기는 대뜸 강렬한 장풍을 느꼈는지 몸을 바로 잡고 손으로 받았다.

 

그러자 부딪쳐 오던 그 장풍은 그의 장풍에 부딪치고 그 여세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홀연 자기의 장풍에 부딪쳤던 바람이 다시 급격히 부딪쳐 깜짝 놀라

두 손에 공력을 운집시키고 앞으로 밀어 제 쳤다.

 

그러나 그 순간 부딪쳐 오는 잠력(潛力)이 급격히 팽창되면서

전신이 절벽에 부딪치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러자 그의 몸은 붕 떠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 다음 오장육부가 모두 갈기갈기 찢어졌는지

오관에서 피를 낭자하게 흘리며 신음소리 하나 없이 숨을 거두고 마는 것이었다.

 

조소접이 멀리 있는 강호의 일류 고수를 일격에 쓰러뜨리는 것을 보고

천용방 고수들뿐 아니라 구대 문파의 군협들도 얼굴빛이 변하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나는 것이었다.

  이때, 왕한상의 쇠부채가 느닷없이 치켜 올라갔다.

그러자 천용방의 고수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고

왕한상의 쇠부채가 하림을 내려칠 것을 기다렸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원홍대사도 크게 아미타불을 외치고는

십팔 명의 제자를 이끌고 달려 나갔다.

 

「왕한상! 그대는 많은 사람의 수를 믿고 떼싸움을 일으키려고 하는가!」

 

하며 질풍같이 달려 나갔다.

 

  이때, 방주 이창란의 비통한 음성이 터졌다.

그리고는 왕한상을 제지하며 손을 들었다.

 

「빨리 물러나시오. 그리고 여러분들도 무기를 거두시오!」

 

  무기를 뽑아 들고 신호만 기다리던 천용방의 고수들은

이창란이 외치는 말에 모두 무기를 내렸다.

그러자 조소접은 네 백의 시녀를 거느리고 앞으로 천천히 나오면서 손을 들었다.

 

「제원동은 비록 중상을 입었지만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으니

이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에요 모두 잠시 물러들 서세요.」

 

  그녀의 예리한 눈은 비록 제원동이 가슴에 검을 맞고 쓰러져 꼼짝도 못하지만

아직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녀도 제원동이 죽은 것으로 알았으나 제원동이 쓰러져서는 꿈적도 하지 않는 것을

주의 깊게 바란 보던 중 그가 아직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러는 한편,

 

하림은 멍하니 하늘을 주시한 채 넋을 잃고 있었다.

그러한 그녀는 조금도 제원동이 죽은 듯 쓰러져 있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조소접이 다급한 나머지 앞으로 나서며 쌍방을 큰 소리로 물러가라고 외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림에게 제원동의 암기인 동발을 주의하라고 경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림은 여전히 어머님의 유서에 적힌 글을 되새겨 보면서 감회에 젖어있던 때라

조소접의 암시에도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홀연,

 

장검을 맞고 쓰러져 있던 제원동이 벌떡 몸을 일으키면서 두 손으로 등에 메고 있던

비발을 계속해서 날리는 것이었다.

그중 하나는 일직선을 긋고 하림에게 부딪쳐 오고 하나는 허공으로 날으는 것이

누구를 노리고 날으는 것인지 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제원동의 비발이 허공에 날으는 소리에 깜짝 놀란 하림은 곧 정신을 차렸다.

순간 자기에게로 날으는 비발을 피하기에는 때가 늦었으나 일직선을 긋고 달려오는

비발을 장검으로 재빨리 후려 쳤다. 그러나 맴을 돌고 날아오는

그 구리의 비발은 허공으로 세치 정도 오르더니 여전한 기세로 하림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와 같이 기묘한 암기를 던지는 수법은 백보비발이란 별명을 가진

제원동만의 묘기이며 자랑이었다.

 

그러자 제원동은 껄껄 웃다가 다시 피를 뿜으며 쓰러져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후의 숨을 몰아쉬면서 내뿜은 피는 일곱 자 정도나 앞으로 날면서

땅을 발갛게 물들이는 것이었다.

 

원래 그는 하림의 일격과 또 섬광을 뿌리며 들어오는 장검의 광막에 진짜의 장검이

어디서 어디를 노리는지 짐작도 못하고 그만 뒤로 몸을 빼려는 찰나 하림의 검이

그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던 것이었다.

그러나 내공이 강하고 강호를 질타하던 인물이라 즉각 단전에 남은 한 가닥의

진기를 흩어지지 않게 하고 노리던 중, 하림이 정신을 잃고 있음을 발견했을 때

왕한상이 뛰어 나오려 하고 조소접이 경고를 발하는 순간에 마지막 기운을 다하여

두 손으로 비발을 날려 보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비발을 던지고 났을 때에는 그의 마지막 남았던 진기도 다하여

피를 뿜으며 쓰러져 갖던 것이다.

 

하림이 아차하며 고개를 움츠렸을 때에는 검에 맞은 비발이 하림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날아갔던 것이다.

 

한편,

 

조소접은 손을 들어 장풍으로 비발을 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주약란의 다른 사람이 나서서는 안 된다는 말과 자기가 그에 대한

감시인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손을 멈추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맴을 돌며 허공으로 날던 다른 하나의 비발이 홀연 아래로

전광석화같이 내려오는 것이었다.

하림은 겨우 먼젓번의 비발을 피하고 제이의 비발이 허공에 떠 있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아름답고 순진한 그녀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찰나였다.

그때 양몽환의 고함이 터졌다.

 

「사매!」

 

하고 외치면서 쏜살같이 내달아 오른 손으로 하림의 몸을 밀쳐 버렸다.

  이와 같이 사람을 구하는 것을 처음 보는 군협들은 모두 깜짝 놀라며 등골이 오싹 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하림을 떠미는 순간 허공에서 달려 내려온 비발은 양몽환의 앞가슴을

쩍! 하고 때렸던 것이다.

이어 양몽환은 그때 채 땅에 내려서지 않은 때이라

위에서 두어 번 재주를 넘으면서 일장 너머로 밀려가 겨우 땅에 내려서는데

가슴의 옷자락이 찢어졌을 뿐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하림은 양몽환이 떠미는 바람에 옆으로 밀려 나가다 비틀거리며 멈추어 섰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볼 때 마침 비발이 양몽환의 가슴에 부딪치는 순간이었다.

하림은 깜작 놀라 외마디 소리를 부르짖으며 질풍같이 양몽환에게로 달려왔다.

그러자 양몽환이 끄덕 없는 것을 보고는 마음을 놓은 듯 방긋 웃으며

 

「오빠! 괜찮아요?」

 

하는데 조소접이 크고도 날카로운 음성으로

 

「림매는 비키세요!」

 

하고 외치는 것이었다.

 

  하림이 그녀의 말대로 옆으로 세 걸음을 비키면서 눈을 둥그렇게 뜨며 의아한 듯이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 생겼어요?」

 

하고 물었다.

 

그리고는 조소접의 얼굴이 잔뜩 흐려진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자 조소접은 냉랭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림매가 관여할 바는 아니에요,」

 

하고서는 양몽환에게 냉랭한 어조로

 

「누가 간섭하라고 그랬죠?」

 

하는 것이었다.

 

순간 양몽환은 멈칫하고는 곧이어 담담하게 웃으며 씁쓸히 대답했다.

 

「나도 모르게 일이 이렇게 되었소.」

 

했다.

 

  일이 매우 난처하게 된 조소접은 모든 군협들이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채고 만일 이 일을 그냥 넘긴다면 자기를 비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 얼굴빛을 굳히면서

 

「란이 언니가 나보고 하림 언니와 계원동이 싸우는 일에 아무도 나서지 못하게

감시하라고 말했는데 당신이 함부로 나서서 남의 비발을 부딪쳐 떨어뜨렸으니

도대체 무엇 때문이에요?」

 

「그들이 무공에 의하여 생사를 판가름하는데 뛰어드는 것은 잘못이지만

이 암기를 사용하는 의미는 조금 다르지 않습니까?」

 

조소접은 그것도 퍽 조리가 서는 말이라고 생각하고는 약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 입장이 곤란하게 된 조소접은 주약란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눈치를 보이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주약란은 먼 하늘을 쳐다본 채 모르는 척 하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동안 생각에 잠겨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조소접은 주약란에게로 다가가

판결을 구하고자 했다.

 

「언니, 그가 말한 것이 옳아요?」

 

  그러나 주약란은 그래도 모르는 척하고 고개도 돌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양몽환이 담담하게 웃으며

 

「조소저가 규칙을 다스리는 집행인이라면 주소저에게 물어 볼 것 없이

스스로 처단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일장으로 벌을 주겠어요.」

 

  조소접의 일장이면 양몽환을 족히 죽음으로 몰 수 있는 것이다.

 

「죽고 사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이겠소? 벌을 주시오!」

 

  조소접이 천천히 오른 손을 들고는 매서운 눈으로 한 번 못 군협들을 휘둘러보았다.

그러자 하림은 커다란 눈에 눈물을 머금고 똑바로 조소접을 바라보고 있고

뭇 군협들은 한결같이 숨을 죽이고 다음의 변화를 기다리는 듯

조용히 주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 양몽환은 태연히 서서 아무렇지 않은 듯 침착한 표정으로 있는 것이었고

그 표정엔 흡사 죽음을 초개같이 여기는 기개마저 엿보였다.

 

손을 쳐들고 한동안 머뭇거리던 조소접은 끝내 일장을 후려치고 말았다.

 

양몽환은 그녀의 공격이 심후하여 그녀가 후려친 장력을 자기는

조금도 맞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만 암암리에 진기만 돋우어 중원(中元)에

운집시키고는 그가 입고 있는 묵인철갑사피 (墨燐鐵甲蛇皮)가

혹시 자기를 보호하여 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그대로일장을 맞받았다.

  순간, 날카롭고 맹렬한 기세로 달려온 장풍은 양몽환의 임 ?독(任, 督) 두 맥이

서로 교접(交接)하는 곳을 맹타했다.

그러자 양몽환은 부웅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가는 그대로 나뒹굴고 말았다.

 

하림이 달려가 보니 양몽환은 비스듬히 쓰러져서 눈을 꼭 감고 얼굴이 새파래져

한 가닥의 미약한 숨이 붙어있긴 하지만 살아있다고는 볼 수 없는 처지였다.

 

순진하고 다정다감한 하림 이였건만 이번에는 눈물 한방을 흘리지 않고

양몽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갑자기 땅에 떨어져 있는 장검을 집어 들고

조소접에게로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녀의 얼굴에는 비분과 애수와 그리고 복잡다단한 감정이 얽혀 있었다.

그러자 조소접은 하림의 거동에 약간 섬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그녀가 하림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고

불안과 당혹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조소접은 주약란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하림에게 고개를 돌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림 언니, 왜 그러시죠?」

 

「그는 다 죽어가고 있어요. 알아요?」

 

「숨이 끊어졌나요?」

 

「완전히 숨이 넘어간 것은 아니지만 살아날 것 같지는 않아요?」

 

「그가 란이 언니의 말을 듣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니겠어요?

나를 탓할 수는 없어요.」

 

  순간, 하림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일년 전에 그의 목숨을 구해준 것은 나도 퍽 감사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건 지나간 일인 걸요, 뭐‥‥‥」

 

「그러나 지금 일장으로 그가 죽는다면 나는 조소저를 미워하겠어요!」

 

  조소접은 주위의 군협들을 한번 휘둘러보고는 다시 하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미워하려면 미워하세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조소저를 죽여 그의 원수를 갚아야겠어요.」

 

  순간, 조소접의 얼굴빛이 흐려지며 하림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는

명확하게 그러나 자신 있는 어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나를 이길 수 없을 거예요.」

 

「이기지 못하고 내가 죽어도 좋아요

또 누구의 손에 죽던 그건 관계없어요.

아무래도 우리 둘 중에 누구든지 한 사람은 죽어 없어져야 해요.」

 

「정말 나와 싸우시려는 거예요?」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죽기의 내기에요.」

 

「좋아요. 그러나 조금 기다리면 어떻겠어요?」

 

「왜요?」

 

「나는 내 평생에 사람을 죽여 본 예가 없어요.

그런데 오늘은 두 사람을 죽였으니 이왕이면 몇 사람 더 죽여야 속이 시원하겠어요.」

 

하고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또 다시 계속했다.

 

「지금까지 내 마음에 거슬렸던 자들을 다 죽여 없애 버린 다음에 우리 둘이서 싸워요. 죽도록!」

 

  하림의 검을 잡고 있는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히 내배이고 생전 느껴보지 못하던

긴장과 초조에 싸여 검도 제대로 잡고 서 있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조소접은 천천히 주위에 있는 군협들을 하나하나 훑어보고는

왕한상과 얼굴이 마주치자 갑자기 차가운 웃음을 띠우고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이때, 왕한상은 이미 최문기가 그녀의 일장에 쓰러진 것을 본 바로는

만일 그녀가 자기를 해치려고 한다면 자기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조소접은 이미 그에게로 다가가서

차가운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네들 천용방에는 몇 사람의 단주가 있어요?」

 

  그러자 왕한상은 도도한 자세로 그녀에게 맞섰다.

 

「모두 홍?남?백?황?흑 다섯 사람이 있소.」

 

「당신네들 다섯 단주 가운데 전부 몇 사람 남았어요?」

 

  왕한상은 그녀가 말하는 뜻을 짐작치 못한들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세 사람이 남았소!」

 

「그럼 두 사람이 죽은 거예요?」

 

「그렇지. 그런데 그건 왜 묻소?」

 

  그러나 조소접은 왕한상이 되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여전히 명령조로 호령하는 것이었다.

 

「남은 단주들을 모두 불러 와요!」

 

  왕한상은 조소접이 그들에게 싸움을 걸려고 한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러나 비록 당해내지는 못하더라도 여러 군협들 앞에서 벌벌 떨고

기세를 죽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왕한상은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당할 수 없으나 막윤과 승일청

그리고 자기 세 사람이 힘을 합하여 싸운다면 혹시 이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쇠부채를 들어 막윤과 승일청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이 다가오자 나직한 음성으로 소곤거렸다.

 

「저 계집애가 우리에게 도전할 모양이오.

나 혼자 힘으로는 당하지 못하리라 염려했는데 다행히 우리 세 사람을 같이 부르는구려.」

 

막윤은 단혼애의 시합장에서 중상을 입고 쓰러졌지만

그의 내공이 심후한데다가 묘수어은(妙手漁隱) 소천의(蕭天儀)의 놀라운 의술과 약효에

곧 회복하고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창란이 부중(部衆)을 이끌고 구대 문파 군협들의 공격을 격퇴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따라 나왔던 것이다.

  승일청은 대간도(大杆刀)를 비껴들고 왕한상의 왼쪽에 서고 막윤 역시 오른 쪽에 섰다.

그러자 세 사람의 지각지세(地角之勢)는 조소접을 에워싸듯 하고 둘러섰다.

 

한편, 천용방의 세 단주가 자기의 명령대로 나타나는 것을 지그시바라 보고 있던

조서접은 다시 이창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왜 안 나서지요?」

 

  해천일수 이창란은 그녀와 일장을 겨루어 보았기에 세 단주들이 힘을 합쳐도

그녀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이때 조소접이 그를 보고 나서라고 하니 이 기회에 무공이 가장 강한 조소접을

처치하기로 결심하고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이 늙은이를 그렇게 무시하니 너무 지나치시군!」

 

하고 지팡이를 들고 나셨다.

 

  이때,

 

좀 이상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염불을 외우던 원홍대사는

앞에 서있는 곤륜 삼자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이창란의 의도가 불순한데요.

저 소저를 연합하여 처치하려고 하는데 우리도 나서야 되지 않겠습니까?」

 

  일양자는 옆에 늘어 서있는 그의 제자들을 한참 보고는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상당한 무공의 소유자요.

가만히 두고 보는 것이 좋겠군요.

잘못하면 살덩어리가 도리어 우리 머리로 떨어질는지 모르니까요.」

 

  그러는 한편, 주약란은 옥소선자와 팽수위의 호위를 받고 엄숙한 얼굴로

사태를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조소접은 뒤로 하림을 한 번 바라보고는 훌쩍 몸을 날려 왕한상의 뺨을 노리고 후려쳤다.

왕한상이 부채를 비스듬히 내밀어 막으면서 재빨리 두 걸음을 물러섰다.

그는 이미 괄창산에서 호되게 당한 바 있는지라 조소접이 달려들자

즉시 몸을 뒤로 뺀 것이다.

 

조소접이 냉랭하게 외쳤다.

 

「도망가지 말고 달려들어요!」

 

하고 손을 확 밀어 제치자 단 번에 한줄기의 잠력이 달려가 왕한상의 쇠부채를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쇠부채가 꼼짝 못하자 왕한상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알맞게 뛰어든 조소접은 손바닥과 손등으로 철썩 철썩 왕한상의

좌우 두 볼을 갈기는 것이었다.

그러자 금방 벌겋게 부어올랐다.

 

  이때,

 

승일청이 옆에서 달려들며 칼을 휘두르면서 기세 있게

 

「칼 받아라!」

 

하고 호통 쳤다.

 

그는 강호에서 상당한 신분의 소지자로 몇 사람이 소저를 상대로 싸우는 것도

떳떳치 못한 노릇인데 옆에서 아무 소리도 없이 습격하듯 칼을 휘두를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호령을 한 것이었다.

 

조소접은 살짝 몸을 움츠려 칼을 피하고는 어느덧 승일청의 바로 옆에 다가서는데

그 몸짓은 별로 빠른 것이 아니었지만 빈틈을 정확히 포착하고 교묘히 달려드는 데는

아무리 막을래야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주위에서 보고 있던 원홍대사와 이창란은 조소접의 신법을 보자

홀연 모든 무공이 보기에 완전한 것 같아도 어던가 모르게 한결같이

약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어 조소접이 철씩 하고 승일청의 뺨을 때리고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그래도 기품을 잃지 않았으니 한대만 때리고 그만 두죠.」

 

  승일청은 퉤! 하면서 피로 엉킨 침과 부러진 두 개의 이를 뱉어 내며

왼쪽으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조소접은 몸을 돌려 막윤에게로 방향을 바꾸었다.

  막윤은 왕한상과 승일청이 모두 뺨을 맞는 것을 보고 미리 단단히 준비하고 있다가

조소접이 달려들자 즉시 몸을 날려 왕한상이 서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동시에

오독장력을 조소접에게 후려쳤다.

 

그 순간,

 

조소접은 갑자기 몸을 세우고는 흰 손의 비파를 비스듬히 내밀어 밀려오는 장력을

향해 비파를 뿌리치듯 홱 돌렸다.

순간 비파가 쨍 쨍 하고 울리는 가운데 한 줄기의 장력이 거세게 비파의 줄을 스치고는

방향을 바꾸어 이창란에게로 밀려가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조소접의 몸은 막윤의 뒤를 따라 날았다.

 

문자 그대로 좌충우돌이었다.

 

조소접의 공력은 이미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여

하나하나의 행동이 마음과 곧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날렵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몸은 막윤이 발을 땅에 디디기도 전에

먼저 막윤의 앞에 달려가 철썩 철썩 두 대의 뺨을 갈기는 것이었다.

 

이 두 대의 따귀는 매우 세찬 듯 막윤의 몸이 뒤뚱거렸다.

 

순간적으로 조소접이 강호에서 명성을 날리는 세 사람의 따귀를 갈겼으니

그곳에 모여 있던 모든 군협들은 도리어 가슴이 써늘할 지경이었다.

 

이창란은 조소접이 비파로 밀어 보낸 장력을 소맷자락으로 후려쳐 물리치고는

그 자리에 서서 나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난처한 형편에 놓여 있었다.

왜냐하면 세 사람의 고수들이 조소접의 손을 피하지 못하고 따귀를 얻어맞는 것을 보자

그만 두려운 마음이 앞섰던 것이다.

만일 이름도 없는 소저에게 따귀를 맞는다면 다시 씻지 못할 치욕이 될 것이고

그렇다고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도망칠 수는 더욱 없는 일이었다.

이러니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고 이래저래 가만히 서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조소접은 세 단주들의 따귀를 후려치고는 고개를 돌려 주약란을 바라보며

낭랑한 목소리로 묻는 것이었다.

 

「란이 언니, 뒤에 화근을 남기는 것보다 모조리 죽여 버렸으면 해요!」

 

하고는 얼굴에 살기를 띠웠다.

 

  그 순간,

 

주약란은 깊이 생각했다.

 

이창란 이하 단주들이 모두 일대기재(一大奇才)인데 남겨 두었다가 후에 다시 일어나

보복을 한다면 많은 인명의 피해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차라리 이 기회에 전멸시키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시 주약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요. 백 사람을 죽여서 수 천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주저할 것 없겠지!」

 

하고 손을 휘저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옥소선자와 팽수위도 여전히 주약란의 양 쪽에 서서 태세를 갖추고 전진했다.

 

  이때,

 

조소접은 하림을 건너다보며 빙긋이 웃었다.

 

「하림 언니, 오늘 내가 크게 살계(殺戒)를 일으키는 것을 보세요.

천용방의 인물들을 모조리 처치하겠어요.」

 

하고는 비파를 흔드니 살벌한 소리가 퍼지고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는 살기가 감도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창란의 앞으로 다가섰다.

  이창란은 조소접과 주약란이 일제히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사태가 결코 이롭게 끝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앙천장소(仰天長笑) 하며

지팡이를 들어 한번 휘둘렀다.

 

천용방의 고수들은 이미 무기를 들고 있는 중이라

이창란의 지팡이가 휘둘러지자 즉각 다섯줄로 나누어

질풍같이 돌진하여 오는 것이었다.

 

조소접이 날카롭게 큰 소리를 외치고는 몸을 훌쩍 날리며

오른 손으로 일장을 후려 갈겼다.

그리고 장풍이 스치는 곳에는 앞서 달려오던 천용방의

두 고수가 일제히 허공으로 붕 떠서 떨어지고

오관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왕한상이 이를 보고 부채를 흔들며

 

「빨리 오방진식(五方陣式)을 펼치고 적을 맞아 싸우시오.」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에 천용방의 고수들은 모두 품속에서 비단 수건을 꺼내어

머리에 질끈 매는 것이었다.

  주약란의 샛별 같은 눈동자는 천용방의 머리 위에 매어진 수건으로 향했다.

그들의 수건은 모두 홍 ?황 ?남 ?백 ?흑 다섯 가지 색으로 나누어지고

그것은 오기단과 일치되는 색채였다.

한편, 이창란은 암암리에 건원지의 공력을 운집하고는 옥소선자와 팽수위를

번갈아 노려보고 있었다.

  이창란은 자기의 건원지신공으로 조소접과 주약란은 해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옥소선자나 삼수나찰 팽수위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처치하고

기세를 올리자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주약란은 이창란의 그러한 계산을 눈치 채고 나직이 조소접에게 속삭였다.

 

「접매, 조금 기다려서 그들이 오방진식을 다 펼치거든 다시 싸우기로 해요.」

 

하는 말에 조소접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 자리에 서서는 섬섬옥수로

떵 떵 비파를 뜯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고즈넉한 가락이 계곡에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무슨 슬픈 일이라도 생각하는 것인지 비파의 가락은 너무나 처량하여

마치 슬피 울며 애원하는 듯 모든 사람들이 애달픈 그 곡조에 도취되어 멍하니

서있게 되고 천용방의 고수들도 모두 오방진식을 펼 것을 잊고 슬픔을 얼굴에

가득히 띄운 채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그러자 그 비파의 청아한 가락은 점점 처량해서 마치 남편을 잃은 여인이

단장의 슬픔에 애끊는 울음을 애써 참는 듯 간장을 울리는 소리로 변하여

모든 군협들의 눈에 눈물까지 머금게 하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서 원홍대사는 나직이 아미타불을 외우며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다.

 

「매우 처량한 음조로군!」

 

하면서도 가장 공력이 깊고 참선(參禪)의 공이 높은 그도 점차

그 슬픈 가락에 몰입되는 모양이었다.

 

이때,

 

모든 사람을 휘둘러 본 주약란은 조소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접매, 그만해요! 더 했다가는 모든 사람들이 내상을 입겠어요. 

그제야 조소접도 손을 멈추며 주약란을 마주 바라보았다.

 

「나는 이진미혼곡(離眞迷魂油)으로 여기 모인 사람들을 처치하고 싶어요.

지금 여기 모인 사람들이 무예계의 고수들인데 여기서 전부 쓰러지면

이제 무예계에서는 다시 시비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자 주약란은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각 문파에는 많은 제자들이 있는데 그 수뇌 인물들이 모두 여기에서

죽는다고 하면 더욱 혼란한 사태가 벌어질 걸!」

 

하고는 숨을 돌려 다시 말을 계속했다.

 

「구대 문파에서는 이번 무술시합을 치룬 후 피차간의 알력과 시기심이

은연중에 많이 소멸된 것 같아 천용방만 소탕시키면 목전의 화근은 없어질 것 같아!」

 

「언니의 말씀이 맞을지도 모르겠군요.」

 

하고는 갑자기 비파 줄을 크게 튕기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살기가 크게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돌연 고개를 든 이창란은 우렁찬 휘파람 소리를 길게 뽑았다.

그 소리는 마치 용이 울부짖는 듯, 모든 사람들의 귀를 윙윙하게 했다.

멍하니 서있던 천용방의 고수들은 모두 이 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황급히 각자의 방위를 찾아 삽시간에 오방진식을 차려 놓았다.

 

이와 같이 삽시간에 천용방의 오방진식이 이룩되자 주약란은

가만히 옥소선자와 팽수위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신들은 조소저를 따라 진을 격파하시오. 나는 이창란을 맡겠어요.」

 

하고는 몸을 획 날려 이창란에게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천용방의 이 오방진식은 오기단의 각 단주들이 자기의 부하들을 이끌고

이창란은 천중사추와 도옥 그리고 이요홍이 중앙에서 접응키로 되어 있었다.

왕한상이 오행생극의 변화에 의거하여 만든 것으로 모든 천용방의 고수들이

이 진에 참가하여 적을 무찌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있어서 홍기단 단주 제원동과 흑기단 단주 최문기 두 수령이 없어지고

중앙에는 도옥과 이요홍 그리고 천중사추 여섯 명이 없어짐으로서

이 진의 위력이 크게 삭감되고 말았다.

 

  오행기술에 정통한 주약란은 상대방의 진을 보자마자 오행생극의 변화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귀원비급에 오행변화의 묘리가 상세히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조소접에게

진을 파괴하도록 하고 자기는 전 진의 주축이 되는 이창란으로 하여금

오방진식에 전념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이창란을 자기가 맡겠다고 나선 것이다.

 

더구나 만일 이창란을 죽이게 된다면 나중에 이요홍에게 할 말이 없어지고

볼 낯도 없기 때문에 오방진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자기가 먼저 나선 것이기도 한 것이다.

 

조소접은 주약란이 중앙에 뛰어드는 것을 보고 일단 물러서서 뒤를 따르는

네 명의 시녀와 팽수위 그리고 옥소선자와 신응 등 일곱 사람에게 천강(天?)

일곱별의 모양으로 서게 한 뒤 낭랑한 어조로 지시 했다.

 

「당신들이 모두 자기 방위만 지키고 상호 호응에 따라 움직이면 되는 거예요.

이 진의 정묘한 변화는 결코 단시간에 터득하여 운용할 수 없어요.

모든 것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세요.」

 

하고는 천용방의 오방진이 천천히 움직여 오는 것을 보고 다시

 

「이 천강칠성(天?七星)의 진을 얕볼지 모르지만 당신들이 방위를 고수하기만 하여

적의 오방진에 뛰어 든다면 오방진의 심장에 비수를 찌르는 것같이 그들 전 진의

변화를 억제할 수 있을 거예요.」

 

하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흩어지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삼수나찰 팽수위가 두 손을 모으며 공손히 말했다.

 

「조소저는 안심하세요,」

 

  조소접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고는 천천히 맨 앞에 가서 섰다.

그리고는 태세를 갖추며 적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주약란은 이미 이창란과 싸우고 있었다.

이창란은 지팡이를 맹렬히 휘둘러 빗발치듯 주약란에게 공세를 가하는 것이었고

그의 지팡이에서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일어나 주위 일장을 다른 사람이 얼씬하지도

못하게 지팡이 바람으로 덮치듯 했다.

 

그와 반면에 주약란은 여전히 적수공권으로 뒷등에 걸치고 있는 바람마기도 벗지 않은 채

침착하게 장풍과 지풍을 날려 공격하여 무시무시하게 휘두르는 지팡이 사이로

빙글 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구대 문파 쪽에서도 모두 무기를 뽑아들고 원홍대사의 일성 호령만 내리면

즉각 오방진 안으로 쳐들어갈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천용방의 오방진 안에 주약란과 조소접이 겹겹이 에워싸인 것처럼

보여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원홍대사는 뭇 군협들을 돌아보며 힘차게 고함쳤다.

 

「여러분들은 너무 염려하시지 말고 가만히 정세만 살피고 있으시오.

지금 오방진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면 도리어 아가씨들의 이목만 번거롭게 할 것이오.」

 

구대 문파의 군협들은 모두 이 무공이 심후하고 자비스러운 고승(高僧)에

일말의 존경심과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는 무기를 내려뜨리고 전세만 살폈다.

 

천용방의 오방진에서는 공격을 발휘하여 겹겹이 줄을 서서 파도가 밀려오듯

질풍같이 조소접에게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었고 일진이 무너지면

다시 제 이진이 달려오고 이진이 무너지면 다시 제 삼진이‥‥‥

 연이어 돌진하여 공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조소접은 천강 칠성진이 천용방의 첩첩이 에워싼 공세에 말려들어 흩어질까

염려하여 손을 쓰지는 않고 수시로 손을 뻗쳐 구원할 뿐이었다.

 

처음에는 옥소선자가 진에 어둡고 피차간의 호흡이 맞지 않아 사방팔방으로

적의 공세에 몇 번이나 진이 흩어질 위기를 당하였지만 조소접이 수시로

장풍을 날려 호응하여 겨우 방위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한동안이 지나고 서로간의 위치와 손발이 맞아 들어가자 천용방의

파상적인 맹렬한 공격을 모두 물리칠 수 있었다.

 

이 일곱 사람의 무공은 모두 무예계의 일류 고수들과 맞겨룰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고 옥소선자와 팽수위 그리고 신음과 진보 네 사람은 비단 무공만 강할 뿐 아니라

대적 경험도 풍부하였기 때문에 진에 익숙하여지자 퉁소를 휘두르고 장풍을 크게 일으켜

단번에 공격하여 오는 적을 무찌르는 것이었다.

 

조소접은 그들 일곱 사람이 적의 공격을 완전히 막을 수 있음을 보자 마음을 놓으며

섬섬옥수로 떵 떵 하고 비파를 세 번 튕겼다.

 

이 세 번의 비파 소리는 비록 짤막한 것이었으나 살기가 가득했다.

이때 왕한상은 손에 든 쇠부채를 접으며 사람들 틈을 비집고 막윤에게

달려가서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저 소저의 무공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하고 각종 진(陣)의 파괴에 정통하고 있는 듯하니

막형(莫兄)은 독침을 날리시오.

혹시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오.」

 

하고서는 즉각 몸을 돌려 자기가 이끌고 있는 대오로 돌아가

오방진의 연쇄 공격을 지휘하는 한편,

황기단 아래에 배속되어 있는 암기에 정통한 고수들을 가만히 집합시켰다.

 

왕한상은 조소접이 무공이 심오하여 일반 암기로서는 절대로 조소접을 해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암기의 능수들을 불러 모은 것은 조소접의 이목을 가리게 하자는 것이고

그 틈에 막윤이 독침을 뿌리게끔 하기 위한 암호작전인 것이었다.

  왕한상이 다시 한번 부채를 쫙 펴서 흔들자 그의 옆에 모여 있던 암기의 능수들은

일제히 손을 치켜들고 암기를 내던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삽시간에 비도(飛刀), 수전(袖箭)등의 갖가지 암기들이 우박처럼 조소접에게로

쏟아지는 것이었다.

 

이때,

 

막윤이 손을 품속에 넣어 한 움큼의 독침을 집어서는 던지려는 찰나

홀연 조소접이 날카롭게 한 번 부르짖으며 옥수를 휘둘렀다.

그녀가 전력으로 후려친 장풍은 광풍이 휘몰아치듯 쇳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암기들을 사방으로 튀어 달아나게 했다.

그 바람에 많은 암기들은 조소접의 장력에 부딪쳐서 암기끼리 충돌하여

허공에서 이리 날고 저리 뛰어 일시에 요란한 소리들이 뒤범벅이 되어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소접을 향하여 날던 암기들은 방향을 바꾸어 나는 것이었다.

그러자 일시에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를 본 막윤은 독침을 쥐고 있으면서도 감히 던질 수 없었다.

그가 사용하는 독침은 극독이 묻어 있을 뿐 아니라

한 번 뿌리면 수백 개의 독침이 일시에 날으는 동시에 그 독침에 맞은 사람은

생명을 보존한다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다.

그런데다가 돌연 독침이 조소접의 장풍에 날려 애꿎은 자기편만 상하게 되는 데는

더 독침을 뿌릴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조소접은 모든 암기들을 떨어뜨리고는 홀연 몸을 날려 곧장 오방진 속에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에 걸친 남사가 펄럭이고 그녀의 섬섬옥수가 휘둘리는 가운데

삽시간에 이십 여명이 쓰러지며 오방진의 기세가 크게 흩어지고 말았다.

 

왕한상과 승일청 그리고 막윤은 조소접이 손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자기편 고수들이 쓰러지고 따라서 순식간에 오방진세가 완전히 파괴될 상태에 놓이게 되자

다시 진세를 가다듬으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오방진 가운데 뛰어든 천강 칠성진식에 얽혀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창란은 주약란과 싸우느라고 그들을 돌볼 여지도 없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정세 하에서의 왕한상은 조소접이 두려웠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한 번 부딪쳐 볼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다.

그리고는 부채로 막윤과 승일청에게 신호를 보내어 세 사람이 세 방향에서

일시에 조소접에게로 접근하여 갔다.

 

조소접은 그들이 달려 나오자 조롱 섞인 말로 빈정거렸다.

 

「잘 됐어! 나는 당신네들이 뒤에만 숨어서 나오지 않을 줄 알았지!」

 

하고는 돌연 몸을 날려 곧장 왕한상에게 달려들었다.

 

  왕한상은 얼마나 이 아가씨가 무서운가를 알기 때문에 즉각 공력을 운집시키고

재빨리 풍요벽오(風搖碧梧)의 한 수로 부채를 휘두르며 자기 자신의 몸을 감쌌다.

 

그러나 조소접은 웃음을 터뜨리며 허리를 쫙 펴면서 곧장 부채의 장막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러자 왕한상은 길게 휘파람을 불면서 오른팔을 쭉 뻗었다.

그와 함께 그곳에 퍼져 있던 부채를 싹 집어 들며 조소접의 현기요혈을 노리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 일격은 왕한상의 필생의 공력을 집중한 것으로 그 기세는 금석(金石)이라도 뚫을 것 같이

놀라운 것이고 날카로웠다.

더구나 조소접이 맞받아 들어가는 때라 마치 전광석화와 같이

조소접의 현기요혈을 찌르려는 순간,

조소접이 몸을 비틀자 왕한상의 부채는 허공을 찌르는 동시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의 옷자락에 닿을 듯한 상태로 스치면서 지나갔다.

그러나 그 순간 조소접은 가볍게 왕한상의 뒷등을 후려쳤다.

 

왕한상은 조소접이 그와 같은 찰나적인 순간에 자기의 공격을 피하고 뒤로 돌아

일장을 가하리라고는 예측하지도 못하고 있다가 아차! 하는 순간

이미 등 뒤에 내려치는 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한 줄기의 찬 기운이 몸 안으로 스며들며 전신의 기혈이

 꽉 치민다는 것만 느꼈을 뿐, 아찔하는 순간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

전신에 크게 혼절을 일으켜 절로 앞으로 달려 나가고 말았다.

  자모신담 승일청과 오독수 막윤은 조소접이 왕한상에게 공격하여 들어갈 때

역시 함께 달려들면서 왕한상의 부채가 조소접에게 적중되지 않을 때에

자기들이 손을 쓰려고 하였다.

 

그러나 창졸간의 변화는 조소접이 왕한상의 전광석화 같은 일격을 비키는 동시에

뒤로 돌아가 왕한상의 등을 때리자 왕한상은 앞으로만 달려가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다른 세 곳에서 같은 목표로 달려온 것이며 모두 전력으로 뛰어드는 판이라

세 사람은 동시에 부딪치고 말았다.

 

막윤과 승일청은 공력이 모두 상당한 경지에 도달하여 갑작스런 사태에 앞으로 달리던

몸을 억지로 세우며 바로 잡을 수 있었으나 질풍같이 돌진하며 오던 왕한상은

그대로 두 사람에게 부딪쳐 오고 말았다.

 

  승일청이 왼 손으로 장풍을 일으켜 후려치면서

 

「왕단주!」

 

하고 외쳤다.

그는 왕한상이 조소접의 내공력에 튕기어 멈추지 못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장풍으로 그의 달리는 몸을 막으려고 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왕한상은 부채를 쫙 펴면서 선확양인(仙確亮引)의 수로 질풍같이 승일청에게로

공격하여 들어오지 않는가!

 

너무나 돌변한 사태에 왕한상이 아무렇게 갈긴 한 수였지만 승일청은 대경실색하고

진기를 돋우며 몇 자를 물러섰다.

 

그의 공력이 신속하였으나 그래도 왕한상의 부채에 왼 팔이 세치정도의 깊이로 찢겼다.

그 바람에 용솟음치는 선혈이 분수처럼 뻗쳤다.

그러자 오독수 막윤이 황급한 어조로 외쳤다.

 

「승단주! 빨리 왕단주의 요혈을‥‥‥」

 

  승일청은 상처가 매우 아팠으나 혈도를 눌러 피를 멈추게 하고는

몸을 날려 왕한상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승일청이 순간적으로 시간을 놓친 사이에 왕한상은 이미 오방진 속에 뛰어들어

좌충우돌 부채를 휘둘러 순식간에 다섯 사람의 자기 부하를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그는 일단 단주의 신분이기에 천용방의 제자들은 감히 앞서서 싸우지 못하고

피하기만 하니 오방진식은 즉시 혼란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왕한상은 미치고 있었다.

 

 이때,

몸을 훌쩍 날린 조소접은 사람이 가장 많은 곳으로 뛰어 들어 손가락으로 찌르고

검으로 후려쳐 삽시간에 다시 십여 명, 천용방의 고수들을 쓰러뜨렸다.

 

그녀의 수법은 갈수록 악랄하여지는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 때문에 살기를 일으켰는지 그녀의 손가락이나 수장(手掌)에 맞은 사람은

당장에 심맥(心脈)이 끊어지든가 아니면 급소나 요혈이 찔려 입과 코에서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 너무나 도살적인 기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던 천용방의 고수들도 분분히 도망가고

오방진은 자동적으로 와해되고 말았다.

 

그러자 옥소선자가 먼저 옥퉁소를 휘두르며 천강칠성의 진을 떠나

천용방 고수들의 뒤를 쫓자 조소접이

 

「돌아와요!」

 

하고 외치고는 땅에 떨어진 한 자루의 단검을 집어 들고 힘을 주어 던졌다.

그러자 곧이어 한 줄기의 하얀 광선이 번개같이 사람들 속으로 달려들었고

그 곳에 핏방울이 사방으로 뒤며 일곱 여명이나 쓰러지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놀라운 수법에 비단 천용방의 고수들만이 아니라

구대문파의 인사들도 간담이 서늘해지며 놀라운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자 단검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조소접은 다시 다른 단검을 하나 집어 들어 힘껏 던졌다.

 

돌연,

 

바람을 가르는 쇳소리와 함께 자모담(子母膽) 두 알이 옆에서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그 순간,

 

하나는 단검에 부딪쳐 가고 하나는 조소접에게로 날아오는 것이었다.

 

펑!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자모담은 조각이 나서 땅에 떨어지고 조소접이 던진 단검은

조금 방향을 바꾸었을 뿐 여전한 기세로 천용방의 고수들이 있는 곳으로 쏜살같이 날아 떨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천용방의 고수들도 준비가 있었던지 날아오는 단검을 무기로 쳐서

떨어뜨리려고 후려쳤다.

 

그 순간,

 

단검은 무기들과 부딪치자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다시 몇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소접은 자기에게로 던져진 자모담을 여유 있게 받아 쥐고는

잠시의 여유도 없이 그대로 막윤에게 던졌다.

그리고는 발끝으로 다시 하나의 단검을 주워들었다.

 

이때,

 

염불을 소리 높이 읊은 원홍대사는 조소접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아가씨! 이제 그만 하십시오.」

 

  그 말에 조소접은 고개를 돌리고 원홍대사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아니 왜요? 나쁜 사람들을 죽여 보았자 죄 될 건 없잖아요?」

 

「위로는 호생지덕(好生之德)을 베풀고 세상에는 용서 못할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지금 도처에 시체가 즐비한데 죽이는 것은 그만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아가씨는 위로 천심을 살피시고 창생에 자비를 베푸사와 뭇 사람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십쇼.」

 

  조소접은 땅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그 수가 이미 칠팔십 명에 달하여 도리어 어리벙벙한 듯 옥소선자에게 나직이 물었다.

 

「이 사람을 모두 내가 죽였나요?」

 

「모두 아가씨가 죽였습니다.」

 

옥소선자가 웃으며 대답하자

조소접은 들었던 단검을 가만히 내던지고

몸을 돌려서는 하림에게 걸어갔다.

 

그러자 삼수나찰 팽수위가 앞으로 한걸음 나서면서 허리를 굽혔다.

 

「조소저 ‥‥‥」 

 

  조소접이 가볍게 미소를 띠우며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림언니를 해치지는 않겠어요. 걱정 마세요.」

 

 

그때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갑자기 이창란이 대갈일성하며 지팡이를 내려뜨리면서

뒷걸음 치고는 털썩 땅바닥에 주저앉는 것이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주약란은 땅에 주저앉은 이창란을 흘깃 보고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며 조식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전력으로 대결하여 본 결과 이창란은 주약란의 무공이나 수법에 있어

그녀에게 따르지 못할 뿐, 공력이나 대적 경험에 있어서는 그녀보다 훨씬 월등했다.

만일 일전에 괄창산에서 조소접이 양몽환에게 무공을 전수할 때 귀원비급의

정묘한 수법을 터득하지 않았더라면 이창란에게 이긴다 하더라도

그녀 역시 지쳐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주약란은 더욱 난처한 것이 상대방의 타고난 소질에 다시 세월이 흐른다면

그 무공은 가일층의 성취가 있을 뿐 아니라

웅지를 품은 이창란이 결코 남의 밑에 있기를 거부하고 강호에 일대 풍파를

다시 일으키게 될 것을 생각하면 죽이지 않을 수 없고 만일 죽인다면

이요홍을 대하기 어렵고 ‥‥‥

평소 과단성이 있던 주약란이었지만 이 상태에서는 약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모든 사람들은 혈투를 중지하고 있었다.

조소접의 도살적인 수법과 주약란이 이창란을 격파시킨 기세에 눌려

모두 손을 멈추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만,

 

왕한상과 막윤이 싸움을 벌이고 있을 뿐이었다.

 

원래 왕한상은 조소접의 반선장에 맞고 전신의 기혈이 치밀어 오르는 순간

진기가 경맥으로 잘못 유입되고 두뇌가 울려 정신착란을 일으켜 미치고 말았다.

그래서 오방진에 뛰어들어 자기편을 해치는 것을 막윤이 제지 하려는 것이었다.

막윤은 정신을 잃은 그로 하여금 활동력을 잃게 하자는 것이었고 왕한상은 정신없이

손질을 하게 된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은 기세에 눌려 손을 멈추었지만 정신에 착란을 일으킨

왕한상은 아랑곳없이 부채를 휘둘러 치명적인 요소만 공격을 가하고 막윤은

전력을 다하여 막고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싸우고 있을 때 조소접은 승일청의 자모담으로 막윤에게 던졌지만

승일청이 전력으로 요격한 자모담에 빗나가고 말았다.

 

이창란은 땅에 주저앉자 즉각 눈을 감고 운기 조식했다.

그는 비록 주약란의 현문일원강기(玄門一元?氣)를 그의 건원지 일격으로 막고

천강지력에 내상을 입었지만 주약란의 현문일원강기가 완전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창란의 건원지력에 맞았기 때문에 주약란의

진기가 약간 흩어지면서 경력(勁力)이 감소되고 또 이창란의 공력이 심후한 까닭에

깊은 상처는 입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하림은 검을 비켜들고 땅에 마구 뒹구는 시체들과 시뻘건 피에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싸운다는 것이 과연 잔인하고 참혹한 것이구나!

조금 전 까지도 살아있던 사람이 불과 짧은 시간에 죽어 넘어져 싸늘하게

시체로 변하고 마는구나.

지금 나는 부모님의 원수를 갚겠다고 나섰는데 이들 또한 부모가 있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는 눈을 뜨고 양몽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양몽환은 단지 피만 흘리지 않았을 뿐

조소접에게 맞아 죽은 사람같이 꼼짝 못하고 늘어져 있는 것이었다.

 

이때,

 

하림에게로 다가오던 조소접은 하림과 몇 걸음 남기고 마주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림언니, 정말 나를 죽이려고 결심했어요?」

 

  그러자 하림은 검을 든 채 생각에 잠기는 듯 역시 대답하지 못했다.

  이와 같이 하림이 결단을 못 내리고 있을 때 조소접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속으로 양몽환을 생각하며 그녀의 눈초리를 따라 뒤를 돌아보던 하림은 흠칫 놀랐다.

언제 깨어났는지 단정히 앉은 양몽환이 운기조식 하고 있었다.

 

하림은 천천히 검을 내려뜨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내가 너무 조급했어요.」

 

하고는 몸을 돌려 양몽환에게로 달려갔다.

 

 

이곳에 모인 모든 군협들은 조소접의 놀라운 무공과 주약란이

이창란을 때려눕힌 결투에 정신이 빠져 양몽환의 거동을 주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조소접과 일양자만이 몰래 주의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중에 한 사람은 옛날의 사제였던 정의에 의한 관심이요.

한 사람은 자기가 잘못하였지 않나 하는 마음에서 자주 눈여겨 보아왔던 것이다.

과연 양몽환은 스스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앉아 운기 조식을 취하는 것이었다.

 

조소접은 그가 깨어나는 것을 보고 속으로 걱정하던 근심과 불안이 확 풀어져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띠우게 된 것이었다.

 

참혹한 결투가 정지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모든 군협들은 결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천용방에서는 비록 살상자가 많이 났으나 다시 정비하여 싸울 수 있는

인원이 남았고 또 천용방에 가담한 강호의 유명한 고수들이

아직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천용방이 실력을 아끼려고 한 것이 아니면

필연 계곡 어디에 매복시켜 놓고 때가 오면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한동안의 조식에 갑자기 자기 몸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기혈이 맥혈에 창통할 뿐만 아니라 피곤함은 일시에 사라지고 진기가 전신 상하에

도달하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진기를 돋우면 몸이 날아갈듯이 가벼워지는 것이었다.

 

그는 역시 총명한 사람이라 잠깐 생각하고는 창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다.

 

  (나의 임 ?독 두 맥이 유통된 것이 아닐까! )

 

  이렇게 짐작하며 살짝 고개를 돌리자

조소접이 약간 아미를 찌푸린 채 웃는 듯 마는 듯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미소를 띠운 기쁜 표정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 슬픈 표정 같기도 한

모습으로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바라보던 양몽환의 시선과 조소접의 시선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재빨리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그 짧고도 짧은 시각에 무한한 애정과 애수가 깃들어 있음을 서로가 느낄 수 있었다.

 

그러자 조소접은 천천히 몸을 돌려 주약란에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깨에 걸친 남사는 바람에 살랑 살랑 나부끼고 있으나

그녀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워만 보였다.

 

이때,

 

하림은 나직한 음성으로 양몽환을 불렀다.

 

「오빠! 다치지는 않았어요?」

 

  다정한 물음에 양몽환은 고개를 흔들고 웃으면서

 

「아니?」

 

하고는 벌떡 몸을 일으켜 주약란에 서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일부러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고 하는 것인지 발에 힘을 주어

땅을 쿵 쿵 울리며 걷는 것이었다. 하림은 검을 들고 곧 그의 뒤를 따랐다.

 

 이때, 주약란은 고개를 돌려 양몽환을 바라보고는 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곧 담담하게 웃으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마침 잘 왔어요, 이 이방주를 맡으세요.」

 

  그러자 이창란은 돌연 흥! 코웃음을 치며 지팡이를 잡고 일어났다.

  그와 함께 양몽환은 주위에 뒹굴고 있는 많은 시체들을 보고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토록 잔인하게 많은 사람을 죽였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한편,

 

주약란은 양몽환이 이창란을 이겨내지 못할까 싶어 획 몸을 다시 돌이켰다.

그때 하림을 두여 걸음 앞으로 나아가 양몽환을 막아서고는 검을 비껴 잡고

이창란을 향하여 눈썹을 걷어 붙였다.

 

「어찌 시겠어요?」

 

  양몽환 대신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는 행동이었다.

 

이창란은 한동안 정좌하고 조식하여 심신 양면에 모든 피로가 풀리고

경미한 내상도 조식으로 치유할 수 있었다.

그는 방중의 제자들이 곳곳에 죽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억울하게 여기는

동시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겠다는 결의를 굳혔다.

즉각, 용두지팡이로 땅을 탁 때리며 냉랭한 어조로 고함쳤다.

 

「너는 나의 적수가 아니다! 빨리 비켜서라!」

 

하고 하림에게 호령하고는 잽싸게 지팡이로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순간,

 

하림이 검을 들어 재빨리 막았으나 검과 하림은 일시에 후려친 지팡이에 밀려

옆으로 세 걸음이나 물러서야 했다.

 

이때,

 

양몽환이 검을 빼어들고 이창란의 앞을 재빨리 막으면서 하림에게 나직이 소리쳤다.

 

「사매, 빨리 물러서요.」

 

하자 이창란이 박장대소하며 역시 지팡이를 들었다.

 

「너 역시 이 늙은이의 적수가 아니다! 물러가라!」

 

하면서 지팡이로 양몽환의 앞가슴을 찌르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그의 지팡이가 굉장히 침중(沈重)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감히 검으로 막을 생각을 못하고 단전에 진기를 돋우며 뒤로 몸을 빼려고 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전신에 진기가 유통하며 미처 발로 땅을 차기도 전에

몸이 뒤로 쭉 물러나는데 단번에 일곱 여덟 자를 물러나고 말았다.

 

이창란은 다시 지팡이를 휘둘러 재빨리 몸을 앞으로 움직이며 양몽환을 후려쳤다.

그러자 양몽환도 살짝 몸을 비틀어 지팡이를 피하고는 검을 들어 두 번 공격했다.

양몽환은 이창란의 공력이 심후하여 일단 지팡이를 휘두르기 시작하면

기세가 놀랍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도 모든 진력을 공격에 돋우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검을 휘두르자

이번에는 검에서 씩! 씩! 소리가 나며 이창란이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자기의 진력이 장검을 타고 발휘되어 적을 물러나게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때라 순간  멈칫해졌다.

 

이창란 역시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몽환이 가해 온 두 번의 반격에 검에서 한 가닥의 매서운 검풍이 휘몰아쳐

검이 닿기도 전에 먼저 밀려와 압박해 오는 바람에 크게 놀라 물러섰던 것이다.

 

이때,

 

천용방의 제자들과 방도들은 다시 몰려오고 승일청은 양 손에 자모신담을 쥐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창란은 자기 뒤로 몰려오는 방도들을 한번 쳐다보고는 돌연 우렁찬 음성으로

땅이 흔들리도록 외쳤다.

 

「본인이 우리 천용방을 조직하게 된 것은 어느 문파에도 속하지 않는 강호의 야인들이

일체가 되어 구대 문파의 조롱감이 되지 않고자 하는데 있었소.

그러나 오늘 이 늙은이가 무능하여 일패도지(一敗塗地)에 이르게 되었으며

많은 제자들의 목숨을 헛되이 버리게 하였소.」

 

하고 한번 쉬었다가는 다시 계속했다.

 

「이에 본인은 방주의 신분으로 여러분에게 선포하노니

이제부터 천용방은 강호에서 없어지는 바이오.

여러분들은 모쪼록 갈 길을 가주시오!」

 

했다.

 

그러자 천용방 쪽에서는 벌집을 쑤셔 놓은들 소란해지고 미친 듯한 웃음소리와 더불어

왕한상이 부채를 거꾸로 쥐고 마친 듯 쫓아 나왔다.

그리고 뒤에는 막윤이 바짝 따라 나오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이창란의 선언과는 달리 두 사람이 한참 싸우다가 왕한상이

돌연 손을 멈추고 눈을 감고 조식하다가 갑자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이에 황망히 뒤를 쫓는 막윤이었다.

 

얼마를 달리던 왕한상은 부채를 함부로 휘둘렀다.

그 바람에 다시 두 명의 천용방 방도들이 쓰러졌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적아(敵我)를 분간하지 못하고 마구 치고 때리는 바람에 홱 비켜섰다.

 

그러나 미친 듯이 웃으며 계속 언덕 위로 달음질치는 왕한상을 허겁지겁 쫓아가는 막윤이었다.

 

「왕단주, 어디로 가는 거야!」

 

  천용방의 제자들과 방도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고는 돌연 일제히 두 손을 쥐고

허리를 굽히며 이창란에게 호소하는 것이었다.

 

「저희들은 방주의 은혜를 받고 있는데 기꺼이 방주를 따라

결사의 일념으로 뼈를 이 황산에 묻고자 합니다.」

 

  침통한 낯빛에 번쩍이는 안광으로 방도들을 휘둘러보던 이창란은 서서히 고개를 흔들었다.

 

「너희들 재간으로는 이곳에 있어봤자 헛되이 죽음만을 당할 것이다.

어찌 이 늙은이의 도움이 될 수 있겠느냐? 빨리 돌아들 가거라!」

 

  이창란의 굳은 결의에 찬 언사와 태도에 천용방의 방도들은 일제히

자모신담 승일청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천용방의 오기단 단주 가운데 홍기단 단주 제원동, 흑기단 단주 최문기는

하림의 검과 조소접의 일장에 죽어버렸고 황기단 단주 왕한상은 미쳐 버렸으며

남기단 단주 막윤도 그를 잡는다고 쫓아다니니 이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백기단의 단주 승일청 한 사람밖에 없는 것이었다.

  승일청은 이러한 정세 하에 천용방이 구대 문파를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고

그들을 남겨 보았자 헛되이 살생자만 더 생길 뿐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승일청도 머뭇거릴 수없는 처지였다.

 

「방주의 유시가 내렸는데 너희들은 왜 우물거리느냐?」

 

  그가 이렇게 외치자 천용방의 방도들은 할 수 없다는 듯이

눈물을 흘리며 일제히 무릎을 꿇고 이창란에게 절을 하는 것이었다.

하직을 고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일어나는 그 길로 각기 흩어져 가는 것이었다.

 

이창란은 자기가 심혈을 기울여 모은 천용방의 고수들이

이제 사방으로 흩어져 가는 것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호기로운 그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 이 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천용방의 방도들이 모두 뿔뿔이 헤어져 완전히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몸을 돌린 이창란은 묵직한 용두 지팡이로 땅을 굴리며 우렁찬 음성으로 고함쳤다.

악에 받친 고함이었다.

 

「구대 문파 가운데 어느 분이 이 늙은이와 생사를 겨룰 흥미가 있소?」

 

  이창란이 그들 방도들에게 해산 명령을 내리는 것을 보고 물러나서 기다렸던

양몽환은 즉시 앞으로 나셨다.

그리고 일양자를 한번 돌아보고는 이창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곤륜파의 제자 양몽환이 방주의 절학에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그러자 이창란은 크게 웃으며

 

「좋아!」

 

하고는 지팡이를 날려 번개같이 양몽환의 가슴을 찌르는 것이었다.

 

  이에 일단 비켜섰던 양몽환은 검을 휘두르며 반격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지팡이와 검은 한 덩어리가 되어 광막을 뿌리며 이리 날고 저리 날았다.

보기 드문 격렬한 결투였다.

뭇 구대 문파의 군협들은 모두 입을 벌린 채 다물지를 못했다.

 

일개 무명의 양몽환이 일대의 호걸 중의 호걸인 이창란과 맞서 싸우는 데

조금도 뒤지지 않는 것을 보고 더욱 혀를 내두르는 군협들이었다.

 

지팡이가 쇳소리를 내고 날고 검은 더욱 허공에 불꽃을 튀며 번뜩이었고

두 사람의 형체는 이미 지팡이와 검의 광막에 가려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삽시간에 치고 찌르기를 백여 합! 양몽환은 조소접에 의해

임 ?독 두 맥을 유통시키게 되자 내공력이 크게 불어나 싸우면

싸울수록 민첩해지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이렇듯 격전을 벌리고 있을 때 서쪽 산모퉁이에서

전신을 회색으로 감싼 중년의 부인과 역시 회색 수건을 쓰고

회색 도포를 입은 소녀가 나타났다.

그리고 소녀의 오른 손에는 두꺼운 몇 권의 경전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 마땅히 있어야 할 왼손은 보이지 않고 소맷자락만

바람이 부는 대로 덜렁거리고 있었다.

 

이때,

 

양몽환과 이창란의 결투는 점점 극렬하여져 검은 씽! 씽! 검풍을 일으키고

지팡이는 새파란 광막을 이루어 서로 치고 찌르는 것이었고

그들 두 사람의 일장 둘레에는 지팡이와 검의 위력에 덮여

모래와 흙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홀연 양몽환이 연이어 다섯 수의 절묘한 검식으로 일격 또 일격의 공격을 가했다.

그러한 그의 날카로운 기세는 마치 우뢰가 울고 번개가 치는 듯 했고

이창란은 질풍같이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이에 기선을 제압한 양몽환은 검식을 연이어 전개하며 귀원비급에 기재된

무궁무진한 변화로 후려치는 것이었다.

가히 간담을 써늘하게 하는 신기한 수법들이었다.

 

다시 연이어 찌르고 치기를 십여 번에 그토록 호탕하고 노련하며 절기를 지닌

이창란도 우왕좌왕하였다.

그때 여유를 주지 않은 양몽환이 다시 두 번 만 찌른다면 이창란은

여지없이 쓰러질 형세였다.

 

이때까지 이들의 싸움을 줄곧 보고 있던 혜진자는 일양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몽환의 무공이 매우 신속하군요.

이제 대승의 경지에 도달하였는데 장래 곤륜파의 문호를 이어 받게 되면

우리 곤륜파를 크게 떨치겠어요.」

 

「내가 보는 바로는 이창란과 대적함에 있어 중간 중간에 우리 곤륜파의 분광검법을

삽입시켜 공세를 취하는데 결코 본(本)을 잊지 않는‥‥‥」

 

하다가 힐 끝 옥영자가 자기들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옥영자는 일파의 장문지존(掌門之尊)으로 강호규칙에 따라 장문인에 의하여

문호에서 축출된 양몽환은 반드시 옥영자의 허가가 있어야만 사문으로 되돌아 올 수 있는 것이다.

 

양몽환이 연이어 십여 수를 공격하여 이창란을 당황하게 하고 재차 공격하여

이창란을 쓰러뜨리려고 할 때였다.

돌연 청아하고도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양상공, 잠깐 손을 멈추세요.」

 

너무나 귀에 익은 음성이긴 하였으나 갑자기 누구인지 생각이 나지 않는 양몽환은

즉각 검을 거두고 돌아보았다.

 

그러자 저만치 회색 도포에 회색 수건으로 머리를 싸고 짚신을 신은 이요홍이

왼 손의 소맷자락을 바람에 나부끼면서 푸른 가을의 하늘과 같은 맑은 눈동자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철추로 가슴을 얻어맞은 듯한 아픔을 느끼며 연이어 세 걸음을 물러섰다.

한편, 이창란은 자기 딸인 이요홍을 바라보고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너는 여기에 왜 왔느냐?」

 

  그 말에 이요홍은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은 무공과 지모에 있어 남보다 뛰어난 바가 있사온데

만일 명리(名利)를 탐하다가 오유산천(傲遊山川)하면‥‥‥」

 

하는데 이창란은 지팡이로 탁 땅을 치면서 이요홍의 말을 가로 막았다.

 

「잔소리 마라! 네가 나를 가르치겠다는 거냐?」

 

  그러던 이창란은 승일청이 좌우 양 손에 자모담을 한 알씩 들고

경계하며 서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불현듯 탄식했다.

 

「승단주는 어째 아직 안 가셨소?」

 

「방주님! 방주께서 이 몸에게 베푼 은혜가 막중하온데

어찌 방주만을 남겨 두고 떠나겠습니까?」

 

「내가 여러분들에게 돌아가라고 하였는데 어찌 그대들이 무정하다 하겠소?

빨리 떠나도록 하시오?」

 

승일청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천용방의 방도들이 모두 흩어져 간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완강히 흔들었다.

 

「승일청은 이미 방주를 따라 뼈를 묻힐 결심을 하였습니다.

 방주께서는 더 말리지 마십시오.」

 

그러자 이번에는 이요홍이 앞으로 몇 걸음 나서면서 양몽환에게 얼굴을 돌렸다.

 

「이 몸이 아버님을 대신하여 죽겠어요.」

 

  이에 당황한 양몽환은 몇 걸음 물러서며 애원했다.

 

「이소저께서는 아버님을 모시고 돌아가십시오.」

 

  그러자 이창란은 분통을 터뜨리고 지팡이를 들어 땅을 치면서 대갈하는 것이었다.

 

「이 늙은이가 죽음을 두려워 할 줄 아느냐? 우리들의 승부는 아직 끝이 안 났어!」

 

하고는 다시 양몽환의 가슴을 노리고 지팡이로 달려들었다.

 

순간,

 

양몽환은 자기의 검을 이창란의 지팡이에 붙이고는 지팡이를 따라 밑으로 내려뜨렸다.

 

이창란은 지팡이에 붙여 내려쳐 오는 검을 떨쳐버리려고 힘을 주어 튕겼으나

양몽환의 장검은 매우 강하고 자제력이 있는지 이창란이 지팡이로 튕겨오는 힘을

교묘하게 해소시키면서 여전히 착 붙어 이창란의 손을 내려치는 것이었다.

이는 바로 귀원비급에 기재되어 있는 오묘한 검법의 한 수인 만루주사(萬樓朱絲)라는

수법으로서 아무리 상대방의 무기가 육중하고 강한 힘으로 튕겨 와도 일단 붙인 검은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극히 순간적으로 덮쳐 오는 싸늘한 검의 촉감에 이창란은 어쩔 수없이 손에 든

지팡이를 내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극히 자연적인 반응에 불과한 것으로 이창란이 지팡이를 놓칠 때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놓치고 나서는 번개 같이 떠오르는 즉 무엇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고는

멍하니 서고 말았다.

 

이것이야 말로 평생에 다시없는 치욕이었다.

그러나 이창란은 넋이 빠진 모습으로 수염만 나부끼며 서 있는 것이었다.

 

그러자 승일청이 쥐고 있던 자모신담 두 알을 힘을 다해 던지려고 하는 찰나

홀연 만감에 서린 듯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승단주, 그러시면 안 되옵니다.」

 

  멈칫 손을 멈추고 돌아보는 승일청의 눈에는 사십 세쯤 된 중년부인이 보였다.

옷은 단출하나 그녀의 태도에서 나는 청아한 기상에 한참 보고서야 승일청은

그 부인이 바로 이창란의 부인인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즉각 머리를 숙이며 두 손을 모았다.

 

「부인은 세심암(洗心庵)에 계시지 않고 어찌 이 흉악한‥‥‥」

 

하다가 갑자기 천용방의 건물이 주약란에 의해 이미 모두 파괴 되었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일찍이 이창란이 비범한 재간과 커다란 웅지를 품고 강호의 고수들을 망라하여

천용방을 조직한 것은 애초에 강호 구대 문파와 어깨를 나란히 하자는데

그 뜻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뒤에 점점 실력이 방대하여지고 조직이 강하여지자

강호를 제패하고 무예계의 방주가 될 마음을 품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사방의 고수와 이사(異士)들을 초청하여 방에 가입시키는 동시에

세력을 확장하고 방도들을 크게 모았던 것이다.

 

이창란의 부인은 비록 여인이었으나 앞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어 이창란이

방의 도당을 모으고 실력을 확장하는 것을 보고는 호의로 알아듣게끔 이창란을 말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방주의 야심은 굳어지고 오기단의 단주들도 모두 절기를 지닌 인사들로서

그에 대하여 정말 충의지심으로 받들자 이창란은 부인의 간언에 도리어 냉소하고

여인들의 좁은 소견으로는 대장부의 뜻을 모른다고 일소에 붙였다.

그리하여 수십 년 동안 부처간의 반목을 일으키게 된 것이었다.

 

그러자 이창란의 부인은 슬퍼하던 끝에 끝내 천용방을 뒤로 하고 표연히 떠나버렸던 것이고

이에 대노한 이창란은 방주로서 명령을 내려 전 방의 방도들에게 부인의 행방을 탐지시켜

당장 죽음을 내리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왕한상과 승일청 등의 오기단 고수들이 간곡히 말리는 바람에

이창란은 명령을 취소하게 되었고 점점 날이 가고 화가 가라앉을수록

첫정이 되살아나 도리어 지덕을 겸비한 부인을 그리워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부인은 홀연 다시 되돌아와 천용방의 총단 부근에 집을 짓고 스스로

세심암이라는 이름을 달아 부처님을 모시고 불문에 몰입하여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딸 이요홍만 한 달에 한 번씩 오게 하고

그 이외에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그 집에는 한 걸음도 들어서지 못 하게 하였던 것이었다.

이창란이 그리운 정을 참지 못하고 밤에 몇 번 찾아갔으나 거절당하자

어쩔 수 없이 명령을 내려 어느 누구도 세심암 부근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금족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리하여 십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러던 부인이 오늘에야 세심암 밖을 나왔으니 십여  년 만에 만난 부인을 승일청이

언뜻 알아보지 못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더욱 부인은 십여 년 전보다 젊어진 것 같은 데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부인은 승일청을 제지한 후 천천히 이창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고운 얼굴을 들었다.

 

「이십 년 속세의 악몽에서 헤매며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어요.

 이제 당신을 위하여 세심암에 참회당을 세웠으니 저와 함께 가십시다.」

 

하고 이창란의 표정을 살피고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인과웅보는 정해진 이치이며 은원간의 시비는 언제나 청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항상 선(善)을 염두에 두면 모든 악은 저절로 소멸되는 것입니다.

이미 당신을 대신하여 부처님께 참회한지 십여 년,이제는 저를 따라 가십시다.」

 

하고는 천천히 몸을 돌이켜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참회에 잠긴 듯 눈을 감고 있던 이창란은 눈을 떠 뭇 사람을

한 번 휘둘러보고는 천천히 부인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홀연 구대 문파의 군협 가운데서 한 사람이 튀어 나왔다.

 

「풀을 뽑되 뿌리까지 뽑지 않으면 춘풍에 다시 살아나는 법!」

 

  외치는 가운데 아미파(峨嵋派)의 초원(超元)과 초혜(超慧)대사와 청성파(靑城派)의

장문인 송목도장(松木道長)그리고 무당파의 정현도장 등 십여 명이 무기를 들고

몰려나오는 것이었다.

 

이 순간,

 

양몽환은 이요홍을 바라보고는 돌연 몸을 돌려 구대 문파에서 쫓아 나온

사람들 앞을 가로 막았다.

 

「여러분! 잠깐 걸음을 멈추시고 이 양모(楊某)의 일언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소리에 달려 나오던 사람들은 이창란을 격파시킨 양몽환의 무공에

어느 정도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양몽환은 뭇 고수들을 바라보았다.

 

「만일 이방주 스스로 철색교(鐵索橋)를 비키지 않고 단혼애를 무너뜨렸다면

여러분은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했다.

그리고는 아무 대답이 없는 고수들을 지그시 바라보던 양몽환은 길게 탄식했다.

 

「여러분이 오늘 이방주를 죽인다고 금후 강호에 풍파가 없어지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천용방의 많은 고수들이 이번 무술 대회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만일 여러분들이

그들을 저지하려고 한다면 그들은 역시 보복심을 일으키게 될 것이고

구대 문파의 실력이 강하다 하더라도 항상 모여 있지 못하는 이상

이방주를 죽인다면 이후 무궁한 풍파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자 정현도장이 검을 크게 휘둘렀다.

 

「본파의 사대 제자가 모두 목숨을 잃었는데 그만 두라는 거요?」

 

「천용방에서도 백 명이나 살상자를 내었는데 그건 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신원통(申元通)이 나섰다.

 

「그것은 그들 스스로 취한 것인데 다른 사람을 탓할 수 있소?」

 

하고 구용방을 들고 달려 나왔다.

 

  양몽환은 비스듬히 장검을 휘둘러 획지위계(劃地圍界)의 수로 은꽃(銀花)을 뿌리면서

신원통의 앞길을 막았다.

 

「천용방에 비해 구대 문파가 더 강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인데

당신 자신의 무공이 이방주의 무공에 비해 어떻다고 생각하시오?」

 

  신원통은 양몽환의 장검에서 은연 중 쏟아져 나오는 잠력(潛力)에 크게 놀라며

더 이상 나가지 못했다.

  사태가 이렇게 돌변하자

정현도장은 곤륜 삼자를 힐끔 돌아보고는 검을 들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를 보고 양몽환은 언뜻 느끼는 바가 있었다.

 

  (오늘 몇 수의 절기를 더 보여주지 않으면 사태가 시끄럽게 되겠는 걸! )

 

  생각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방안을 강구하던 양몽환은 귀원비급의

이화접목(移花接木)의 한 수를 생각했다.

그리고는 즉각 진기를 돋운 다음 두 손을 바로잡고 허리를 굽혔다.

 

「도장께서는 강호에서 덕망이 높으신 분인데 어찌 그토록 가혹하십니까?」

 

하고는 가만히 한 가닥 잠력을 밀쳐 보냈다.

 

  그러자 정현도장은 오른 팔을 들어 밀려오는 잠력을 막으며

 

「원, 별말씀을‥‥‥」

 

하면서 부딪쳐 오는 잠력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층가일층 압박하여 오는 것이 상상 밖으로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강력한 것임을 알고는 크게 놀라며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몽환은 조소접의 교묘한 방법에 의해 임 ?독 두 맥을 유통시켰기 때문에

전신의 공력을 모으고 흩어지게 하는 것은 자유자재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정현도장이 감당치 못하는 모양을 보고 돌연 잠력을 거두어 들였다.

 

잠력이 확 가셔지자 정현도장은 자세를 바로잡지 못하고

앞으로 엎어지려는 몸을 겨우 가누었다.

 

양몽환은 다시 정현도장에게서 얼마 되지 않는 곳에 서있는

아미파의 세 장로에게 거두어들인 잠력을 즉각 밀쳐 보냈다.

 

일단 거두어 들였다가 다시 밀쳐 보내는 잠력에는 비단 양몽환자신의 잠력이

잠재하여 있을 뿐 아니라 정현도장이 밀쳐 보냈던 부분적인 잠력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다.

 

초원대사와 초혜 대사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기 때문에

곧 한 가닥의 잠력이 밀어닥치는 것을 느끼고 동시에 손을 들어 막았다.

그러나 상대방의 잠력은 마치 바다의 파도와 같이 도도히 밀어닥치며

일층 가일층 강렬해지는 것이었다.

 

더 이상 견디어 내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돌연 잠력이 크게 약화되고 양몽환은 이미 잠력을 거두어들인 모양으로

손을 늦추는 것이었다.

 

「여러 선배님들께서는 후배를 보아서라도 이방주가 가게 내버려두었으면 합니다.」

 

  그러자 정현도장과 초원 그리고 초혜 대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물러가 버렸다.

 

  이 세 사람이 물러서자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쫓기를 단념한 듯 물러섰다.

 

이때, 이요홍은 나직한 음성으로

 

「아버님을 구하여 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어요.)

 

하고 몸을 돌이켜서는 이창란이 가는 곳으로 역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그녀의 처량한 뒷모습을 보자

심중에 만감이 서렸지만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지금의 처지였다.

 

그러자 빈 소맷자락을 바람에 펄렁거리는 이요홍의 뒤를 하림이 급히 좇아갔다.

 

「요홍 언니!」

 

  이요홍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림매! 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구먼!」

 

  하림이 달려가 이요홍의 소맷자락을 움켜쥐고

 

「언니가 이 보다 더 변한다 한들 어찌 기억하지 못하겠어요,」

 

하는데 돌연 퉁소 소리가 애절한 곡조를 뽑아 올리자

비파 소리도 떵 떵 하며 허공으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림파의 원홍대사는 뭇 구대 문파의 군협들을 보며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 천용방이 우리 구대 문파를 초청하여 무술 대회를 가진데 있어서

이 늙은 노부는 무예계의 시시비비가 대부분 오해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만일 각파가 명리(名利)를 위한 싸움과 문호에 대한 편견을 버리기만 하면

사해개동포(四海皆同胞)하고 모두 한 집안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잠시 말을 멈추고는 주위를 돌아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가 여러분들의 주인이 되어 우리 숭산(嵩山) 소림사에 모시고 싶습니다.

이 늙은이가 불초하나마 주인 노릇을 하여 볼까 합니다.

금후 오년마다 한번씩 각 파의 장문인이 집회를 갖는다면

각 파의 모든 시비를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는 말에 각 파의 군협들은 저마다 환성을 지르며 호응했다.

 

이윽고 원홍대사는 모든 장문인과 군협들을 이끌고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

 

한편,

 

곤륜파의 혜진자는 나직한 음성으로 옥영자와 일양자에게 양몽환의 거취에 대해 입을 열었다.

 

「몽환의 일은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그러자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옥영자는 입을 비쭉했다.

 

「자기 갈 길로 가라죠!」

 

내뱉듯이 말하고는 발걸음을 옮기자 일양자는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양몽환은 심지가 중추하고 의리가 있기 때문에 틀림없이

곤륜산의 금정봉(金頂峰) 삼청궁(三淸官)으로 우리들을 찾아올 것이오.

지금은 그냥 둡시다.」

 

그러는 한편에서 주위를 돌아보던 양몽환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괴로운 심정이었다.

 

주약란과 조소접이 자기의 주위를 지키고 있고 구대 문파의 군협들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요홍의 삭막하고 애수를 띄운 얼굴은 약간 격동하는 듯 했고

하림의 손을 잡은 채 주약란에게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주약란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언니, 그동안 별고 없었나요?」

 

「덕택에 별고 없어요.

그런데 림매는 순진하기만 하고 양상공은 곤륜파에서 축출 당했으니

홍매(紅妹)가 도와주세요.」

 

「내 이미 병신 된 몸이고 또 불문에 귀의하여 속세의 인연을 끊었는데‥‥‥」

 

하는 그녀의 말을 주약란이 가로막았다.

 

「백모님이 불법에 도리를 깊이 몰두하셨는데 다른 꾸지람이야 있겠어요?‥‥‥

제 행동을 용서해요.

그리고 홍매의 결혼건은 백모님에게 청하여 허락을 받아두었어요!」

 

하는 때였다.

 

지금까지 한편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양몽환의 얼굴이 홱 변하며 성큼 달려왔다.

 

「아니 뭐라고요?」

 

  그러자 주약란도 얼굴을 들며 양몽환을 마주 바라보았다.

 

「더 말할 것 없어요. 이것이나 보세요!」

 

하며 몸에서 서찰(書札)을 꺼내어 양몽환에게 건네어 주었다. 

주약란에게서 서찰을 받아 든 양몽환은 급히 읽었다.

 

  <환아에게 알리노라. 나의 아들 환아야.

근래의 너의 모든 사정은 주소저로부터 모두 직접 들었다.

심씨 댁과 이씨 댁 두 아가씨는 모두 재덕을 겸비한 훌륭한 배필로서

서신을 보는 즉시 두 아가씨를 데리고 수월산장 (水月山莊)으로 오도록 하여라.

너의 어머니는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계신다.     

부서 (父書)>

 

  양몽환이 서찰에서 눈을 떼기를 기다려 주약란은 양몽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부모님의 필적을 아시죠?」

 

「어찌 모르겠습니까?」

 

「필적이 틀림없다면 백부님의 지시에 따르도록 하세요.」

 

하고 다시 품에서 옥패(玉佩)를 꺼내어 이요홍에게 주었다.

 

「어머님이 홍매가 믿지 않을까봐 이 옥패를 증거로 주셨어요.」

 

  그 옥패는 과연 자기 어머님의 물건인지라

그만 목이 메는 듯 눈물을 가득히 머금으며 아무 말도 못했다.

 

 

이때,

 

양몽환은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역시 주약란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군.

우선 수월산장으로 가서 부모님을 뵈옵고 결정하자‥‥‥)

 

그러는 동안 조소접이 홀연 양몽환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가슴에서 한 송이의 주화(珠花)를 뽑아 양몽환의 몸에 꽃아 주었다.

 

「저는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진기를 돋우어 당신의 임,독 두 맥이

교접하고 있는 곳을 쳤던 거예요.

이는 임,독 두 맥을 유통시키는 가장 간편한 방법이면서도 가장 위험한 방법이에요.

조금만 빛나가도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되죠.

그러나 하늘이 무심치 않아 제가 실수하지 않았어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하림 언니는 나를 죽이게 되었을 거예요.」

 

  그러다가 갑자기 코끝이 시큰하여지는 동시에 가슴에서 질투의 불길이 확 타올랐다.

  조소접은 황망히 고개를 돌려 주약란에게로 향했다.

 

「란이 언니! 양상공과 하림언니, 그리고 이소저를 위하여 떠나는 길에

여인행곡(麗人行曲)을 들려 드리겠어요.」

 

  주약란은 가만히 웃었다.

 

「홍매와 림매! 양상공의 임,독 두 맥이 유통되어 무예계에서

그에게 대적할만한 사람은 이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요.

그러니 두 분 동생님들은 그를 도와 십년 후에는 일대의 무학종사 (武學宗師)가 되게

무공을 열심히 닦도록 도와주세요.」

 

  홀연 떵! 떵! 하며 비파의 소리가 울리자

곧이어 퉁소 소리가 화합하여 여인행곡(麗人行曲)이 점차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양몽환은 두 손을 마주잡고 주약란에게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당신의 두터운 정은 영원히 폐부에 새겨두고 언제든지 보답할 날이 있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조소접이 웃으며

 

「저와 란이 언니는 여러 소녀들을 데리고 깊은 산중에서 은거하게 될 거에요.

이제는 영원히 속세에 발을 들여놓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어요.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기약할 수 없으니 몸이나 보중하세요.」

 

하고 물끄러미 쳐다보는 조소접의 시선을 피한 양몽환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와 함께 이요홍과 하림이 주약란과 조소접에게 눈물을 뿌리며 이별을 고했다.

 

이윽고 양몽환과 하림 그리고 이요홍은

유양(悠場)한 비파 소리와 퉁소 소리가 전송하는 가운데 산모퉁이를 돌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산길 가에 서 있는 소나무 그늘 아래서 맑고 고즈넉한 음성이 들려 왔다.

 

「요홍 언니, 내내 행복하시길 빌겠습니다.」

 

  양몽환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거대한 소나무 아래 녹색의 의상으로 전신을 감싼 어여쁜 소녀가 서 있고

그녀 옆에는 푸른 장삼에 기다란 수염의 노인이 서 있었다.

그들은 바로 묘수어은(妙手漁隱)소천의(滯天儀)와 노인의 무남독녀 소설군(蕭雪君) 아가씨였다.

 

이요홍은 노인에게 허리를 굽히고

 

「군매(君妹)가 어떻게 여기까지 전송을!」

 

하며 마주 걸어갔다.

 

그러자 소설군 아가씨는 노란 비단으로 싼 보따리를 내밀었다.

 

「백모님이 이 몇 권의 불경을 언니에게 전해 달라 하시기에 가져 왔어요.」

 

  이요홍이 막 손을 내밀어 받으려 하자 하림이 먼저 받았다.

 

「홍 언니, 제가 대신 가져가겠어요.」

 

  이요홍은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림매에게 수고를 끼쳐 어떻게 해?」

 

하면서도 하림에게 맡겼다.

 

  이때, 소천의는 한걸음 나서면서 양몽환의 두 손을 쥐며 정중히 인사했다.

 

「이 늙은이가 가슴 속에 있는 한마디를 토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소.

잘못이 있더라도 양상공은 너그럽게 생각하여 주시오.」

 

「선배님께서는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떠한 가르침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구대 문파의 장문인들과 인사들은 모두 양상공의 인협지심(仁俠之心)으로

일대의 액운을 면한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후배는 우둔하여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주위 오리(五里) 이내에는 동백기름을 삼천동이나 묻어 놓았소이다.

한 번 불을 지르면 불길이 번지게 되는 줄이 연결되어 이 주위 오리 이내의 나는

새들이나 거미 같은 벌레, 비록 절세의 경신법의 자신을 지닌 사람도 불길 속을

일시에 뚫고 나가지 못하게 되어 있소이다.

양상공이 의로서 이방주를 놓아 주시기에 이 늙은이가 연결된 줄을 끓어 버렸습니다.

금후 이 늙은이는 도리를 다하여 이방주로 하여금 속세를 떠나 편안한 생활을

보내도록 권고하겠소이다.

아무쪼록 양상공은 구대 문파의 인사에게 천용방의 실력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일패도지(一敗塗地)한 것이 아니니 어떠한 박해가

없도록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후배가 기회 있는 대로 선배님의 말씀을 전하여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두 손을 흔들어 보이고 딸인 소설군을 데리고 표연히 떠나가는 것이었다.

 

한편,

 

여태껏 들려오던 비파와 퉁소 소리가 일변하여 처량하고도 애끓는 가락으로 변했다.

그 소리는 마치 하소연 하듯 단장의 슬픔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었다.

 

 허공에서 가라앉듯 들려오는 가락에 세 사람은 떼어 놓으려는 발걸음을

일제히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멀리 산봉우리 위로 줄을 지어가는 한 떼의 어여쁜 소녀들이 옷자락을 휘날리고

 애끊는 가락을 간간이 허공에 뿌리며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가만히 주약란과 조소접의 이름을 입 속으로 불러 보았다.

 

일말의 사양(斜陽)과 찬란한 노을이 어두워지는 하늘에 수놓고 있었다.

다만 애끊는 곡조만이 바람에 실려 멀리 멀리 하늘 높이 퍼져가는 가운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