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 장 막이 오른 영웅 대희 <英雄大會>
황지영이 하림을 힐끔 쳐다보는 것이 그도 무척 미안한 듯한 눈치였다.
「지금의 상태로 보아 사제는 우선 이 방에 머물러 있어야겠소.
그동안 소형이 다시 기회를 보아 틈나는 대로 간곡히 말씀드릴 테니까 말이오.
그렇다고 급히 서두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오?
심사매는 먼저 가서 세 분 어른의 반응이 어떤가 슬쩍 보고 오면 더 좋겠고 ‥‥‥」
양몽환은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 보다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좋겠지만 앞으로 이틀 후면 무술 대회가 열린단 말입니다.
만일, 세 분 어른께서 이 이틀간에 여전히 소제를 접견하시지 않으시면 ‥‥‥」
「하여튼 백부님과 셋째 사숙님은 사제의 일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말씀하시기 곤란한 눈치시더군요.
이 일의 관건은 오직 장문사부님의 손에 쥐어진 것 같습니다.
사부님은 사제를 접견할 마음이 없는 것 같기도 하였지만
그렇다고 막상 사제를 사문에서 쫓아 보낼 마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는 양사제가 기다려 보는 수밖에 도리 없을 것 같소.」
「여하간 다시 사문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참고 기다리겠습니다.
오직 모든 것을 사형에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의 힘이 자라는 대로 사제가 사문에 돌아오도록 전력을 다해보겠소.
다만 장문 스승의 비위를 건드렸다가는 그르치기 쉬우니
사제는 다만 경건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형의 말씀이라면 소제는 무조건 받들고 이행하겠습니다.」
이야기를 끝낸 후 황지영은 곧 하직하고 물러갔다.
그러나 하림은 양몽환의 근심스러운 표정을 보고는
못내 안타까운 듯 조바심 쳤다.
「제가 가서 장문 사백부님에게 말씀드려 보겠어요.」
양몽환은 손을 들어 말했다.
「황사형의 말을 들어야 해.
정성을 다하는 곳에 금석(金石)도 쪼갤 수 있잖아.
세 분 어른께서 내가 온 것을 아시면서도 나를 쫓아내지 않는 것은
불쌍히 여기고 관대히 보아 주려는 속마음이 있어서인지도 모르지.
공연히 사매가 나를 위해 말씀드리다가 사부님의
비위나 거슬리게 되면 오히려 이롭지 못할 걸.」
하림은 평소부터 양몽환의 의견을 쫓아왔기 때문에
양몽환이 그렇게 말하자 더 이상 고집하지도 않았다.
「그럼, 나는 사부님을 뵈옵지 않겠어요.
나도 언제까지나 오빠와 같이 여기 있겠어요.」
「그러면 안돼. 사매는 축출당한 것도 아니니까
사부님들을 안 뵈올 수 있나?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까 빨리 갔다 와요.
그러나 내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
그러나 사부님들을 찾아갔던 하림은 얼마 안 있어 곧 되돌아 왔다.
「세 분 어른들께서는 이야기만 하시며 저를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나와 황사형이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무공에만 정신이 팔려
이야기에 열중 하시기에 저는 오빠가 심심할까봐
그냥 돌아와 버리고 말았어요.」
양몽환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 이번 무술 대회는 단순하게 천용방과
구대 문파와의 투쟁만으로는 끝나지 않겠지.
모르긴 하지만 구대 문파 간에도 어떤 계략이 있는 모양이군.
그렇게 되면 일은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텐데 세 분 어른이
중시(重視) 않을 리야 없겠지,)
하루의 해는 서서히 서산에 기울어 가고
황혼 때쯤 황지영이 황망히 되돌아 왔다.
「세 분 어른들께서는 무슨 신기한 재간을 새로 발견하신 모양입니다.
온 종일 연구에만 골몰하시다가 이제야 겨우 휴식을 취하시었소.
심신이 극도로 피로한 듯해서 사제의 일을 말씀드리지 못했소.
견디기 어렵겠지만 사제는 하루만 더 참으시오.」
양몽환은 오히려 미안해했다.
「사형은 염려 마십시오.
십년이라도 참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사제가 이렇듯 참을성이 있으니
사형이 먼저 사제가 다시 사문으로 돌아올 날이 있을 것을 믿고 축하하는 바이오.」
그는 양몽환을 안심하도록 위로한 후 다시 되돌아갔다.
또 다시 하루의 밤과 낮이 지나갔다.
그러나 황지영은 두 번 다시 나타나주지 않았다.
사흘 째 되는 날은 바로 팔월 보름, 무술 대회의 날이었다.
날이 밝자 천용방의 홍기단주(紅旗壇主)인 제원동(齋元同)이 경장을
한 여덟 명의 장정들을 이끌고 나타나 사부들에게 면회를 요청했다.
그러자 옥영자는 일양자와 혜진자 그리고 황지영을 데리고 대문까지 마중 나갔다.
그러나 양몽환은 세 분의 어른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고 일장여 밖에서 주시할 뿐이었다.
제원동은 남색 장삼에 기다란 수염을 휘날리면서 곤륜 삼자에게 정중히 일례(一禮)를
드리고 말문을 열었다.
「본인은 방주의 유시를 받들어 특별히 귀파의 세 분 도사님들과 제자 분들을 모시고
단혼애(斷魂涯)의 무술 시합 장소까지 안내코자 왔습니다.
제방의 방주는 이미 대회장에 임하여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자 옥영자도 정중하게 대했다.
「부하 제자들을 보내셔도 되실 것을 단주께서 친히 오셨군요! 죄송합니다.」
「원 별말씀을‥‥‥ 곤륜 삼자라면 전 무술계의 인사들이 모두 경앙하는바 아닙니까?
창졸간의 준비로 불편을 끼쳐드린 점은 세 분이 널리 양해해 주십시오.」
「도리어 환대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밖에 이미 빠른 말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세 분 도사께서는 지금 곧 떠나도록 준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빈도들은 보시다시피 야인들이라 뭐 별로 준비할 것은 없습니다.」
「겸손하신 말쯤에 저절로 머리가 수그러집니다.
단혼애(斷魂涯)는 여기서 약 십리쯤 되는 곳이기에 말을 준비했습니다.
그럼 말에 오르시죠.」
「고맙습니다. 그러나 빈도들은 걷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뜻은 고맙지만 걸어가겠습니다.」
「그러시다면 이 몸도 보행으로 모시했습니다.
그럼, 제가 앞에서 인도하겠습니다.」
제원동은 더 권하지 않고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읍하고는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곤륜 삼자도 그 뒤를 따랐다.
양몽환은 사부님과 사숙들 옆에는 가까이 가지 못하고
얼마쯤 처져서 하림과 함께 그 뒤를 따라갔다.
문밖에 나선 제원동은 곧 나는 듯이 걸음을 빨리 했다.
그 바람에 곤륜 삼자도 부득이 경신법 무공을 발휘하여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이 사람들은 경주라도 하는 듯이 달려가고 보니
연도의 풍경마저 제대로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이때, 일양자는 불현듯 수상한 생각이 들어 혜진자에게 말을 건네었다.
「저 사람들이 이렇게 빨리 달려가는 것을 보면 필시 수상한 계략이 있는 것 같소.
아마도 우리들로 하여금 지나온 길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 같으오.
여하튼 신중을 기해서 제각기 좌우 양 쪽을 살펴 무슨 의심나는 것이 없는지
조심스럽게 주의 하며 갑시다.」
하는 말에 옥영자는 두 말 없이 찬성했다.
「대사형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럼 사매와 나는 좌우 양 쪽을 맡겠으니 사형은 앞을 주의하도록 하십시오.」
세 사람은 제각기 맡은 길 좌우를 살피며 달렸다.
그러자 과연 의심스러운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제원동이 이들을 이끌고 가는 길은 보기에는 단지 험한 산길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지만,
요소요소에 은밀하게 보지 못하도록 위장해 놓고 있었다. 더욱 의심스러운 것은
그들이 가고 있는 길에 다른 사람이 지나가거나 오는 것을 전혀 못 보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따지고 보면 자기들 외의 다른 파 사람들은 모두 이 길을 지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일양자는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발걸음을 달리하여 제원동을 앞섰다.
「제형, 단혼애는 아직 멀었소?」
제원동은 스스러움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기 보이는 산모퉁이를 돌면 도달합니다.」
그때, 마침 한참 달려가는 그들 앞에 동굴이 보였다.
그리고 제원동은 서슴없이 굴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그의 오른손에는 횃불이 들려 있었고
따라오는 사람에게 비추어 주고 있었다.
「이 굴은 이백 여장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굴입니다.
이 종이 횃불을 이렇게 높이 들고 앞장을 설 테니
도사들은 아무 염려마시고 따라 오십시오.」
제원동의 손에 들린 횃불은 특별히 만든 것인 양 불꽃이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옥영자는 그 불빛을 통해서 굴속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양쪽의 벽은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었고 바닥도 평탄한 것으로 보아 인공으로 뚫은 것이
역력하였다.
그것도 정성을 들여서 곱게 다듬은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어디를 봐도 의심할 만한 곳은 눈에 띄지 않았다.
굴을 벗어나고 다시 산굽이를 두 번 돌자 제원동은 갑자기 발걸음을 늦추면서
웃는 얼굴로 뒤돌아보았다.
「저 앞이 바로 단혼애입니다.」
곤륜 삼자가 그곳을 바라보니 우뚝 솟은 봉우리가 백장 밖에 서있었다.
그 봉우리 안의 공지(空地)는 푸른 잔디가 정교하게 가꾸어져 있었다.
게다가 여기 저기 탐스러운 들꽃들이 만발하고 있어서
어느 모로 보나 위험스러운 곳이라기보다
평화롭고 아늑한 풍경이 깃들만한 곳이기도 했다.
옥영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제원동을 쳐다봤다.
「단혼애라 하니 그 이름의 뜻은 매우 이상한 의미를 풍기는데
뜻밖에도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군요.」
「그릴까요? 핫하하‥‥‥‥
우뚝 솟아있는 저 봉우리를 지나야만 단혼애의 진면목을 볼 수 있습니다.
미리 짐작으로 그렇게 단정하시기는 아직 이릅니다.」
그러자 혜진자는 비웃는 듯 말했다.
「단혼애가 얼마나 대단할라고. 용담호혈(龍潭虎穴)이라도
아마우리를 놀라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제원동도 수염을 날리면서 혜진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야 무술계에 이름을 떨치는 곤륜 삼자들이신데 뭐 보잘것없는
단혼애쯤 염두에 두겠습니까?」
한마디 빈정거린 제원동은 다시 걸음을 빨리하여 쏜살같이
잔디밭을 가로 질러 산봉우리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일양자는 옥영자와 혜진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음성을 낮추었다.
「이토록 매끈한 잔디밭과 곱게 가꾼 들꽃들은 분명히
사람의 손으로 일부러 다듬어진 것이 틀림없소.
그러고 보면 우리들은 여러모로 조심해야 되겠소.
사제와 사매는 이 노도의 뒤를 따르시오.」
일양자는 주의를 준 후 먼저 달려간 제원동의 발자국만
조심스럽게 되밟으며 걸어갔다.
얼마 높지 않은 산봉우리를 단숨에 올라서자
주위의 풍경은 상상 밖으로 판이하게 달랐다.
우선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수천길이나 되는 절벽이었다.
다만 실오라기 같은 철색교(鐵索橋) 한줄기가 간신히
건너편 봉우리에 걸려 양쪽을 연결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낮은 쪽의 평탄한 산봉우리에는 이미 여러 파의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또 사람들의 그림자도 서성대는 것이 상당한 사람이 모인 듯 했다.
제원동은 보라는 듯이 일부러 수염을 쓰다듬으며 의젓하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 철색교만 건너면 바로 그곳이 단혼애가 됩니다.
이제 가 보시면 왜 단혼애라 이름 지었는지 수긍이 갈 것입니다.
폐방의 방주께서도 이미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건너가시죠.」
옥영자는 발아래 수 천 길의 절벽을 굽어보며
「이 깊은 계곡에는 아마 벌써 매복수(埋伏手)가 있겠습니다.
만일 귀방에서 이 철색교만 끓어 버린다면 구대 문파의 인사들은
날개가 있다 해도 이 수 천 길의 절벽을 건널 수는 없겠습니다 그려.」
그러면서도 태연하게 철색교 위로 발을 옮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제원동은 황급하게 당황하며 변명했다.
「부질없는 억측을 하지 마십시오.
폐방의 방주와 오기단의 단주들 그리고 방도들 대부분이
이 다리 건너에 있는 단혼애에 머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천용방이 철색교를 끊는 그런 비열하고
흉측스러운 행동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쇠줄로 이어진 이 다리는 족히 이백 여장이나 되리라 싶었다.
보기와는 달리 굉장히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흔히 있는
조교(弔橋)라든가 철색교와는 달리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평온하기까지 하였다.
이 다리를 건너고 나면 바로 앞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가 있었다.
이 산은 깊은 계곡으로 둘러 싸여서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다.
그 형태는 마치 연대(連臺)처럼 생겨 맨 위는 평탄하고
그 둘레의 넓이는 수백 명이 들어설 만 하였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좁아져서 밑은
계곡의 엷은 안개로 덮여 보이지 않았다.
물론 계곡의 풍경도 볼 수 없었다.
일양자는 속으로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이 봉우리는 천연적인 형태를 갖추고는 있지만
분명히 사람의 손으로 다듬어진 흔적이 있군.
바로 이 철색교 하나만 보더라도 얼마나 많은
인력이 소모되었는지 짐작하기 조차 어려운 일이 아닌가?)
평탄한 봉우리에는 벌써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게 장식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구대 문파의 석위(席位)마저도 세심하게 배정되어 있었다.
옥영자가 선뜻 다리에서 내려서자 즉시 네 명의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수놓은 깃발을 들고 정중하게 맞으며 왼쪽의 준비된 좌석으로 안내 했다.
옥영자는 재빨리 좌우를 눈여겨 훑어보았다.
그곳에는 간소한 음식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다른 파의 좌석은 그대로 비어 있었다.
모든 것은 하나 빈틈없이 질서 정연하게 차려져 있었다.
또한 묘하게도 천용방은 구대 문파의 좌석을 말발굽 형으로
배치하여 놓았는데 거의 봉우리의 반을 차지하게끔 되어 있었다.
제원동도 그들과 같이 다리를 건너선 후 그들 좌석까지 따라와서
그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 앉는 것을 보고 나서야
정면의 천용방 좌석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았다.
잠시 후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자
곧 제각기 수를 놓은 깃발을 펄럭이면서 연달아
각 문파의 고수들이 의기양양한 기세로 다리를 건너왔다.
그리고는 그들도 자기들의 지정된 좌석에 앉아서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는 것이었다.
일양자는 옥영자에게 나직이 말을 건네었다.
「천용방은 왜 우리들을 하필 제일 먼저 데리고 왔을까요?
그들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군.」
옥영자도 저윽이 의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글쎄요. 생각해 볼 수륵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 아닙니다.」
그러자 일양자가 무엇을 깨달은 듯 무릎을 가볍게 쳤다.
「그렇군. 이창란은 우리가 수차 그의 딸을 구해준 은혜를 생각하여 우리들을‥‥‥」
하다가 갑자기 말을 뚝 그치면서 옆 좌석에 앉은 문공태에게 문안을 드렸다.
「문형(文兄)! 오랜만이오.」
갑작스러운 인사에 문공태는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곧 웃음으로 얼버무리면서도 의심하는 빛을 숨기지는 않았다.
「반갑습니다. 반가와. 하하.
우리 화산파와 곤륜파가 이웃하여 앉게 되어 본인은 영광스럽습니다.」
옥영자도 따라 웃었다.
「문형의 겸손하신 말씀에 빈도가 부끄럽습니다.」
문공태는 급히 손을 저었다.
「원,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러고 보니 세 분 도형들은 특별히 천용방의 환영을 받는 것 같습니다.
우리 보다 한걸음 앞서 왔으니 말이오.」
문공태는 역시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곤륜 삼자가 다른 문파의 인물보다 먼저 온 것에 대해서도
속으로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 했다.
「문형은 공연한 일에 의심할 것은 없습니다.
이제 곧 무술시합이 열릴 터인데 다른 일은 가장(假裝)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생사문제만은 가장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문공태도 그 말에는 수긍이 가는 모양이었다.
「매우 옳은 말씀입니다.
그렇다면야 본인도 눈을 크게 뜨고 세 분 도형이 신검(神劍)으로
적을 물리치고 우리 구대문파가 승리를 거두는 것을 지켜보겠습니다.」
문공태는 사뭇 호들갑스럽게 허풍을 떨면서 화산파의 좌석에 의젓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편,
양몽환도 하림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곤륜파의 제일 말석에 앉아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장내의 구석구석을 세밀히 살펴보고 있었다.
이번 무술대회는 수백 년간에 걸쳐 가장 강호를 떠들썩하게 할 대회임은 틀림없었다.
각 파에서는 그 점을 유의해서 제각기 무예의 고수들을 보내올 것은 틀림없었지만
그래서인지 그 수는 무척 적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원을 거느린 파가 소림파였다.
그렇지만 그들도 불과 십구 명에 불과하고 다른 파들은 오륙 명 아니면 칠팔 명이었다.
그중 가장 수가 적은 파는 점창(點蒼)파로서
오직 장문인 번천안(飜天雁) 마가홍(馬家宏) 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준비해 놓은 각 문파의 좌석은 많이 비어 있었다.
구대 문파의 인사들이 좌정한지 얼마 안 있어서 어디선가
「둥! 둥!」
하는 북소리가 울려왔다.
그것을 신호로 그 동안 군협들에게 차를 따라 주며 심부름과 안내역을 맡은
청의 동자들이 재빨리 천용방의 좌석 뒤로 가서는 손에 수놓은 깃발을
높이 들고 기러기 형으로 대오를 정연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북소리가 멈추었다.
동시에 천용방의 좌석 뒤로부터 해천일수 (海天一襲) 이창란(李滄瀾)이
백발의 수염을 휘날리면서 손에 용두 지팡이를 들고
천중사추(川中四醜)의 호위로 나타났다.
그 뒤에는 오기 단주들이 삼엄하게 옹위하고 있었다.
이창란은 정면에 나서자 왼 손을 한 번 흔들었다.
그러자 즉시 앞을 인도하던 천중사추와 오기 단주들은 양편으로 갈라섰다.
이때,
천천히 정면 중앙으로 나선 이창란은 들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푹 꽂았다.
그러자 흙과 모래가 풀썩!
일어나면서 지팡이는 땅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꽂혔다.
그리고 이창란은 두 손을 마주 잡고 원을 그리면서 읍하였다.
그 풍채는 늠름하였고 위엄은 모든 고수들을 누를만하였다.
「폐방은 강호 초야의 이름 없는 인물들이 잡다하게 모여서 이루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문파에서는 강호의 한 자리를 내주어 오늘날까지 폐방을 아껴주신 여러 고수님들의
아량에 우선 무한히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하고 말머리를 꺼낸 후 잠시 장내를 훑어보았다.
「삼백년 전 무술계에 구대 문파에서 세력을 다투기 위해 숭산(嵩山) 소실봉(少室峰)에서의
무술 경합은 천하에 드문 영웅대회로 오늘날까지 우리 무예인들의 입에 끓임 없이
오르내리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천기진인이 나타나 강제로 제지시킨 탓으로
무예계의 질서를 잡을 수 있는 결과를 이루지 못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그 결과로 무술계 각 파의 정예(精銳) 인물들이
살아남아서 무예를 후세에 전하게 되었다고 칭찬들을 하는 모양입니다마는
이 늙은이가 생각하는 바로는 오히려 그것이 오늘날 무예계의
암이 되었다고 여기는 바입니다.
만일 그 당시 천기진인이 강제로 무술 대회를 해산시키지만 않았던들
오늘날 무술계는 좀 더 질서가 있었을 것은 물론이오.
선후배의 분명한 서열도 자리가 잡혀 더 이상 쓸데없는 분쟁이나
시비곡절은 없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였기 때문에 불행스럽게도 오늘까지 수백 년간
우리 무예계는 제각기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 수많은 무예계 인사들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는 천기진인의 혼령이 살아 있어서 이것을 안다면 구천지하에서도 유감으로 여기고
후회하리라 생각합니다.」
이창란의 말은 매우 논리가 정연하고 옳은 것같이 들렸지만 어딘지 모르게
음흉한 계교가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연설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구대 문파의 군협들도 역시 그 점을 느꼈는지
한결같이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이창란은 다시 한번 장내의 고수들의 표정을 눈여겨본 후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폐방에서는 이번에 특별히 구대 문파의 귀하신 분들과 강호 무예계의
어느 문파에도 속하지 않은 인물들을 초청한 것입니다.
다행히 이번 모임으로 피차간에 정의(情義)를 두텁게 하게 되길 원하는 바입니다.
또한 구대 문파가 수백 년간 해결하지 못한 서열도 이번 기회에 정하게 되면 큰 영광이겠습니다.
그래서 이 늙은이가 한 가지 제의하고 싶은 것은 우리 천용방도 여러 문파와 어울려
하나의 문파로 서열을 정하는데 참가시켜 줄 것을 바랍니다.
여러분이 불원천리하고 수고스럽게 이 이창란을 찾아 주시니 이 늙은이는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말을 마친 이창란은 다시 몸을 빙 돌려 길게 읍하고는 웃으면서 천천히 제자리에 가서 않았다.
이창란이 좌석에 앉자 그 뒤에 시립하고 있던 두 명의 청의 동자가 손에 든 붉은 깃발을 흔들었다. 곧이어 양편에서 악기를 불며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에 음악이 그치자 이창란은 다시 취옥(翠玉)의 찻잔을 들고 일어섰다.
「여러분이 이렇듯 폐방을 믿고 성의를 다하여 찾아 주셨지만 막상 초청한 장소가
이런 황폐한 산골이라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또한, 이 늙은이와 각 단주들은 일시 여러분 각파 고수들께 예의를 다하지 못했고
소홀한 대접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미안한 마음을 솔직히 사과드립니다.
바라옵건대 다행히 여러분들은 모두 의분의 인사들이라 평소의 대범한
아량을 믿는 바라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더욱 미비한 점이 있더라도 널리 이해하여 주실 것을 진심으로 믿습니다.
이제 약소하나마 이 차로서 소홀했던 점을 사과드릴 겸 여러분에게 올리는 바입니다.」
하고 단숨에 마셨다.
이때, 팔비신옹(八臂神翁) 문공태가 정중히 대답했다.
「원 별 말씀을‥‥‥‥ 이 방주께서는 그렇게 겸허하실 것까지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명망이 드높은 무술계 고인들에게 드리는 것이라면 옳다고 생각하나
이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면 나 같은 사람은 오히려 송구하여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면서 곤륜 삼자에게 잠시 눈을 돌렸다가는 다시 계속했다.
「우리 화산파를 나 스스로 헐뜯는 것은 아니지만 저로서는
이방주의 그런 말씀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장내를 휘둘러보며 천천히 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창란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문형이 이 늙은이를 나무라시는데 이 늙은이도 천용방을 창립한지는
어언간 수십 년이 지났소이다.
오늘 구대 문파와 천하 영웅들을 초청하여 이와 같이 큰일을 감히 치르게 되고
또 초청에 덕망이 높은 구대 문파에서 응해 주시어 이렇게 와 주시니
오늘은 실로 이 늙은이의 평생에 가장 즐거운 날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저로서는 오늘 이 대회에 참석하여 주신 각파의 인사들을 똑 같이
고맙게 여길 따름입니다.
어느 파인들 소홀히 대하겠습니까? 문형이이 늙은이를 꾸짖는다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만 옳게 말씀드리면 문형의 아량이
너무 좁다고 여길 수밖에 없군요.」
뼈 있는 한 마디에 문공태는 할 말이 없어졌는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것을 지켜본 마가홍은 천용방으로 하여금 싸우기 전부터
우월감을 갖게 하여서는 불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창란에게 머리를 숙이면서 예를 올렸다.
「빈도가 한마디 드릴 말씀이 있는데 들어 주시겠소?」
이창란은 서슴없이 받아 들였다.
「마형께서 무슨 좋은 고견이 있으시다면 어서 말씀 하시오.」
그러자 마가홍은 의젓하게 어깨를 펴며 말문을 열었다.
「이 방주께서 웅재대략(雄才大略) 하시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귀방의 제자들도 절기를 지닌 분들이라 천용방이 강호에 알려지자
바로 그들이 따르게 되어서 구대 문파와 더불어 무술재의 존경을 받는
처지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훌륭한 성공도 쉽게 얻기는 매우 어려운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주께서는 그 정도에서 만족하지 않으시고
이제 또다시 무술계를 제패하고 유아독존 격이 되고자 하시니
제 분수에 맞지 않은 욕심인가 생각됩니다.
더욱이 천하 영웅을 초청하여 감히 무술 경합으로 제압하려고 까지 하니
구대 문파를 전혀 안중에 두지 않는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문형이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것도 나로서는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창란은 수염을 쓰윽 쓰다듬으면서 크게 웃었다.
그 소리는 마치 용이 우는 듯 쩌렁 쩌렁 울리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웃음을 뚝 그쳤다.
「마도형은 구설지재(口舌之才)로 이간하시는 말씀은 그만 두시오!
이 이창란이 각파 장문인을 편히 이곳으로 모시게 할 때는
분명히 여러 문파의 무학을 일견(一見)코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소!」
이때, 난데없이 염불 소리가 들다.
「나무아미타불 ‥‥‥」
순간, 이창란은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끝나지 않은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불경을 외우는 소리는 그다지 높지는 않았으나 매우 힘차서 한마디 한마디가
똑똑히 귀를 찌르며 들려왔다.
이 외마디 불경만으로 그 사람의 내공의 깊이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만 했다.
이창란은 물론 전 장내의 무술계 인사들도 일제히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고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곳은 바로 소림파의 좌석이었다.
바로 그때 황색 가사를 걸친 노승이 합장하던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두 눈을 반쯤 감은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소승은 출가한 몸으로서 강호의 시비를 사전에 막지는 못할망정
이곳에 참석하려고는 하지 않았소이다.
그러나 간곡한 이방주의 초청으로 마지못해 이 검북땅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창란은 감사하게 대답했다.
「대사가 그토록 이 이창란의 체면을 세워 주시니 실로 감격하는 바입니다.」
그 순간, 황의의 노승은 번쩍 두 눈을 똑바로 떴다.
그 눈에서는 마치 번갯불이 번쩍이는 듯 했다.
그대로 한참 이창란을 노려보다가 다시 말문을 여는 것이었다.
「노승은 소림파의 장문인 신분으로 부득이 이 강대한 대회에 참석하기는 하였으나
소승은 추호도 여러분과 싸우고 싶지는 않는 바입니다.
자비하신 부처님의 덕으로 이 시비를 해소시키고자 온 것입니다.」
이창란은 여전히 호걸스럽게 웃었다.
「대사께서 자비를 베푸시겠다는 뜻에는 이 늙은이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그러나 대사께서 무술 시합으로 정정 당당히 서열을 가리자는 이 투쟁을
어떻게 무슨 수로 해소시키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황의 노승은 나직이 탄식했다.
「삼백년 전 소실봉에서의 참사는 지금 생각만 하여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이 오늘 귀방에서 초청한 무술시합의 인재들은 그때보다 더 많은 수를 헤아립니다.
지금 여기에는 정예고수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만일이 사람들이 서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싸움을 벌이게 되면
그 결과는 틀림없이 비참하고 처절함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잠시 말을 중단하고 좌중을 날카롭게 쏘아 보았다.
「그래서 소승은 이 방주에게 무술 시합이 시작되기 전에 한 가지 의견을 제의코자
하는데 들어 주시겠소?」
「대사께서 말씀이 계시다면 서슴지 마시고 좋은 의견을 주십시오.
이 몸의 힘이 닿는 대로 쫓겠습니다.」
「이방주는 웅재대략의 영도자임을 들은 지 오랩니다.
소승이 이방주에게 아첨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수백 년 동안에 걸친 무술계의 처참한 과거와 앞날을 염려해서 하는 말입니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 몸이 보잘 것 없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인데 대사님이 그렇게 칭찬하시니
도리어 송구합니다.」
「천하 각 파의 무공은 비록 제각기 기묘한 비법과 특이한 술법을 지니고 있다 하여도
근본을 깊이 캐어볼 것 같으면 전부 하나의 근원에서 연유한 것임을 여러분도 잘 알 것입니다.
무공이란 결국 내외지분 (內外之分)이 있어서 강유지설(剛柔之設)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에 있어서 지극히 강하면 부드러워지고 극히 부드러워지면 강렬(强烈)해지는 법입니다.
소승은 불초하나마 소림파의 장문인으로서 다행히 구대 문파 종사(宗師) 분들과 이방주 등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는 실로 수백 년 동안 우리 강호 무술계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 방주께서 이번 무술시합을 서열을 가리는 처참한 투쟁 대신 상호간의 우의를
두텁게 하고 연구하는 것으로 그 목적을 바꾼다면 다행히 피비린내 풍기는 처참한
혈투도 일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무술계의 후배들에게 좋은 모범까지 보여줄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이것도 결국 내공력을 쌓는 수양이 될 것입니다.
이방주께서는 소승의 의견을 생각하시어 적절히 처리하여 주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그러나 이창란은 여전히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대사께서 이렇듯 자비심을 베푸시니 이 몸은 오직 존경하여 마지않는 바입니다.
그러나 구대 문파의 고인들은 불원천리하고 오셨는데 그냥 모였다가
이렇게 헤어지게 되면 대단히 실망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이 느닷없이 소리쳤다.
「그렇다면 이방주는 기어코 우리 구대 문파와 승부를 가릴 작정이 십니까?」
뭇 군협고수들은 또 다시 고개를 그 쪽으로 돌려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무당파의 좌석 제일 첫머리에 앉아 있는
자색빛 얼굴에 검을 멘 도사 차림의 무당파 장문인 정현도장(靜玄道長)이었다.
무술계에 있어서 이 사람의 명성과 지위는 바로 소림파 장문인 다음가는 사람이었다.
이는 무당파의 실력이 거의 소림파와 백중지간(伯仲之間)에 있으나 기타 문파 보다는
단연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었다.
이 정현도장이 말하자 여러 고수들도 그 즉각 호응하고 일어섰다.
첫 번째로 화산파의 장문인 문공태가 일어났다.
「천용방이 강호에 방을 수립한 이후 어느 곳에서나 구대 문파의 제자들을 괴롭혀 왔습니다.
또한, 이십여 년 동안 줄곧 구대 문파와 적대간의 상태를 지속하여 온 것도 사실입니다.
이 우여곡절은 언제든지 한 번은 가려야 될 형편이었습니다.
때마침 오늘 모두 이렇게 한 자리에 모였으니 이후로 미루는 것보다 차라리
오늘 이 자리에서 해결지우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말에 마가홍이 맞장구치면서 일어났다.
「빈도 역시 이 일을 미를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차라리 오늘 이 대회를 이용하여 피차간의 은원을 청산하는 것이 통쾌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황의 노승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미타불. 원한이란 맺기 쉬워도 풀기는 어렵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소림파는 각 무술계 동료들의 관대한 아량으로 구대 문파의 하나로 손꼽히고는 있습니다.
또, 이 소승이 조사(視師)님들의 자비로 장문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어 구대 문파의
종사들과 자리를 같이 하게 되어 영광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능으로 보나 덕행으로 보나 여러분들에게 미치지 못함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소림파는 무술계에 아무 공헌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무술 시합만큼은 소승이 재삼 생각하여 본바 만일 여러분들이
감정적으로 처리한다면 그 비참한 결과는 어느 투쟁보다도 더한 비극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나부아미타불을 외우는 소리가 아미파의 좌석에서 들려왔다.
그곳에서 아미파의 초원대사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초원대사는 합장하며 황의 노승에게 약간 허리를 굽혔다 폈다.
「대사님의 자비심을 베푸시고 창생을 불쌍히 여기심은 마치 부처님이
온 세상에 빛을 발하심과 같사옵니다.
소승 역시 불문중의제자로서 본래 육근(六根)을 정(淨)하게 하여
살계(殺戒)를 범하지 말아야 옳은 처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용방은 우리 구대 문파를 너무나 멸시합니다.」
잠시 말을 끊었다가는 다시 계속했다.
「본파의 장문인은 천용방에 잡혀간 지 벌써 일년이 넘고 있습니다만
아직 생사마저 알 길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치욕적인 처사를 그 누가 참고만 있겠습니까?」
이 말이 한 번 나오자 장내는 물 끓듯 소란해 지고 수군수군 귓속말을 주고받느라고
장내는 소란해졌다.
무당파의 장문인 정현도장과 청성파의 장문인 송목도장이 동시에 일어나 황의 노승에게 따졌다.
「이 일은 이미 물불과 같은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더 미루어도 사태만 더 악화될 뿐
무익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대사는 덕망이 높으신 분으로 자비심으로 해결 지으려고 하심은 당연하오나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자비만 가지고는 해결되지 않는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때, 마가홍과 문공태도 일어나 싸워서 결판을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역설하자
삽시간에 구대 문파에서는 일제히 몸을 일으키고 장내가 떠들썩했다.
다만 곤륜파와 소림파의 제자들만 여전히 않아 꼼짝하지 않을 뿐이었다.
황의 노승은 군웅들의 감정이 뒤끓는 것을 보고는 더 설득할 수없다고 여겼다.
급기야 장탄식하면서 조용히 자리에 앉고 말았다.
이창란은 도도하게 수염을 쓱 쓰다듬으면서 보란 듯이 크게 너털웃음을 웃으며 일어났다.
「여러분들은 잠시 조용하여 주시기 바라오. 이 늙은이가 감히 여러분들을 이곳까지
청한 이상 이미 여러분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한 바요. 단지 여러분들이 시합 규칙을
말씀해 주시기 바랄 뿐이오.
어떠한 규칙이나 방법이라도 천용방은 받아들일 용의가 있으니까 말이오.」
그 말을 듣던 무당파의 장문인인 정현도장은 재빨리 이창란의 말을 받았다.
「이방주가 우리들을 이곳까지 청하였으면
반드시 시합 규칙과 방법도 준비되었을 것이 아니겠소?
어찌 이제 단혼애에 이르러 우리들 보고 방법을 내세우라 하십니까?
어떠한 속셈이 있어 하는 말인지 빈도는 짐작하지 못하겠군요.」
「여러분들은 우리 천용방이 강호에 방을 세운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을 아실 겁니다.
또한, 무술계의 후진으로 명망으로나 세력으로나 구대 문파의 유구한 전통과 겨루지
못할 것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에 이 늙은이가 감히 천하 영웅들을 이곳 폐방의 총단까지 오셔서
무술 시합으로 서열을 가리자고 청한 것은 사실이나 여전히 무예계의
후진(後進)으로서 정통 무예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마음일 뿐
추호라도 앞장 설 마음은 없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들이 방법과 규칙을 세워 주시면 우리 천용방은 그에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등뢰(澄雷)가 커다란 입을 벌리고 헛기침을 하면서 일어났다.
「이방주는 꾸며서 까지 겸손하실 것은 없습니다.
본인이 생각한 바로는 아무래도 이방주의 말씀은 완연히 겉과 속이 다른
허울 좋은 말씀만 같습니다.」
하고는 한동안 건성으로 허허 웃었다.
이창란의 얼굴빛이 약간 붉어졌으나 곧 안색을 숨기고 차디차게 코웃음 쳤다.
「등형이 현명하신 분인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째서 이 이창란의 말이 마음에도 없는 거짓인가를 천하 영웅들과
이 늙은이가 탄복할 수 있게끔 즉각 지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사양치 않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만일 귀에 거슬리는 말씀이 있더라도 이방주께서 노하지나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다시 한번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한 후 목청을 가다듬었다.
「만일, 이방주가 진실로 천용방의 전통이 오래 되지 못하고
또한 세력이 약하다고 생각해서 부득이 구대 문파로부터
정통의 무예를 구경하고 연구하겠다면 이는 인지상정으로 별반 희귀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요란스럽게 깃발과 북을 울리는 등 크게 일을 벌일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로 미루어 보아 천용방의 작위(作爲)는 순전히 무술계를 제패하려는
것이 아니고 뭡니까?
구대 문파에 대하여 신복(臣服)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매사에 적대시하고 자기뿐이라는
것을 은근히 시사하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지 않습니까?
하물며 천하 영웅들에게 서한을 보내어 이곳에서 무술 시합을 갖자고 한 것을 보면
틀림없이 무예계의 맹주(盟主)가 될 야심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뜻을 품은 지 이십여 년, 오늘날에 와서 만반의 준비를 이루어 놓고는
도리어 무예계의 후진이니 구대 문파의 가르침을 받겠다느니
흐흐‥‥‥ 그러니 이방주의 말씀은 세살 먹은 어린애라도
곧이 듣지 않을 것입니다.」
천용방의 오기단주 가운데 가장 성질이 급한 오독수(五毒手) 막윤(莫倫)은
등뢰가 천하 영웅들 앞에서 이방주를 헐뜯자
그만 울화통이 터져 참지 못하고 말았다. 예의도 돌보지 않고 땅을 박차고
일어서서는 대갈일성하며 마구 등뢰에게 삿대질을 하는 것이었다.
「입 닥쳐! 이 단혼애가 네 마음대로 소란을 피워도 되는 곳인 줄 알아?
그래, 천용방이 천하 영웅들을 이 검북땅까지 초청한 것은 그만한 책임을 질 수 있고
방책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무술시합으로 명차(名次)를 정하자는 것은 그 따위 잔소리나 들으려고
한 것이 아니야!
너 등가가 정말 입이 있으면 얼마든지 방법만 제시하고 나서라.
군말 없이 상대해 주겠다.」
이 일촉즉발의 순간, 곤륜파의 좌석에서 일양자가 몸을 일으켰다.
「막형과 등형 두 분은 잠시 언쟁을 멈추시오.
빈도가 불민하나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고는 이창란을 바라보았다.
「빈도가 아는 바는 없지만 이 방주에게 한 가지 묻겠습니다.
천용방에서 무술시합으로 서열을 정하자고 제의한 이상 어떤 비안(秘案)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방금 이방주의 말씀은 겸손으로 주인의 도리를 차리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에 천용방에서는 예정된 방법을 천하 영웅들 앞에 공개하도록 하여
우리 다같이 연구하여 보고서 다시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좌석에서는 서로 분분히 의논하는 말이 오고 갔으나 이의(異議)는 없었다.
이창란은 웃음을 띠우고 두 손으로 예를 갖춘 뒤 힘찬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시다면 이 늙은이가 여러분의 의사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늙은이는 이 무술 대회를 기회로 여러분 구대 문파의 서열지쟁(序列之爭)도
해결코자 하였으나 여러분들은 이 늙은이가 이간질을 한다고만 생각하시니
여러분의 의심을 해소시키기 위해서는 방법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군요.
여러분 구대 문파가 함께 나서십시오.
우리 천용방은 단독으로 여러분의 연합한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단 한 가지 여러분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서로 의논하여 임시 국면(局面)을
이끌 책임자를 뽑아 이 무술 대회가 혼란의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쪽에서 한 사람을 내보내시면 폐방에서도 상대할 사람을
한사람 내보내겠습니다. 싸움의 규칙에 있어서는 서로 목숨을 걸고 하든지
혹은 손을 상대방에게 들게 함으로서 승부를 가리든지
이것은 이 늙은이가 주장하기 어려운바 여러분의 결의에 따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늙은이의 방법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말이 나오자 구대 문파의 고수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무당파의 장문인 정현도장이 일어나 호탕하게 웃으며 받아 들였다.
「이방주의 그 방법은 빈도도 기꺼이 지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일방웅주(-幇雄主)로서의 풍채와 태도를 엿볼 수 있어 기쁩니다.
그럼, 여러분들이 찬성하는 것으로 믿어도 되겠습니까?」
하고 가만히 구대 문파의 좌석을 휘둘러보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정현도장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여러분들이 이방주의 무술 시합 방법에 찬성한다면 빈도는
무당파의 장문인 신분으로서 소림파의 원홍(元鴻) 대사님을
우리 구대문파를 이끌 대표자로 뽑을 것을 제의하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하신지요?」
청성파의 송목도장이 먼저 일어났다.
「원홍대사님은 지덕(智德)이 높은 분으로 대표로서 가장 적당한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우리 청성파는 먼저 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러자 옥영자도 이어 일어났다.
「우리 곤륜파에서도 원홍대사님이 가장 적당한 인물이라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때, 소림파의 첫째 좌석에 앉아 있던 먼저 번의 그 황의 노승이
천천히 일어나 나무아미타불을 크게 외웠다.
「이 늙은 몸은 박덕으로 여러분들을 이끌 수 없습니다.
대국(大局)을 이끄는 중대한 책임을 어찌 담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사양하자 아미파의 초원대사가 벌떡 일어났다.
「대사님은 너무 겸손하실 것 없습니다.
여러분의 의사가 그러하오니 거절치 마시고 응낙 하십시오.」
화산파의 장문인 팔비신옹 문공태와 설산파의 장문인 백의신군(白衣神君) 등뢰도
동시에 일어났다.
「소림파는 우리 구대 문파에서 평소 영도자의 평판이 있는 만큼 대사님이
국면을 이끄신다면 실로 영광이겠습니다.」
곧 이어 각 파에서도 이구동성으로 소리도 요란하게 찬의를 표했다.
원홍대사는 군협들이 이와 같이 그를 추대하자 더 거절하면
위선적인 인간이라고 오해 받을 것이 싫었다. 즉시 합장했다.
「여러 도형들께서 추대하여 주시니 불초하나마 맡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창란도 만족하게 여겼다.
「소림파가 현채 무술계에서 실력이 가장 강하다는 평판을 듣고 있는데
대사께서 국면을 이끌어 주시면 제일 합당할 것입니다.
우선 이 몸이 대사에게 축하를 드립니다.」
하고 읍했다.
원홍대사 역시 합장하고 반례했다.
「각 문파의 종사들이 분에 넘치게 대우해 주어 이 늙은이를 대표로 추대하여 주시나
사실 이 늙은이가 그러한 힘이 있을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미비한 점이 있으면 이 방주께서 지정(指正)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대사님의 덕망은 높으시고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현기(眩氣)를 암시하고
계시지만 여러 파에서는 깨우치지 못하고 고집만 피우는 사람이 많아
대사님의 자비심을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일이 이 지경에 이른 이상 대사님은 더 사양하지 마시오.」
원홍대사는 자애로운 두 눈을 반쯤 감으면서 합장하고 나무아미타불을 외웠다.
「이방주의 그 일념이야 말로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소승이 비록 이 국면을 이끌 대표자로 추대되었지만 쌍방에서 나가 싸울 때
호생지덕(好生之德)으로 상대방의 몸에 손이 닿는 것으로 승부를
판가름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러자 이창란이 입을 열었다.
「옳은 말씀입니다. 대사님의 부처님과 같은 마음씨와 대삼 고계(古誠) 하시는
말씀은 정말 지당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깨우치지 못한 사람이 많으니
빈도 역시 삼보(三寶)의 법어(法語) 중에서 불(佛)은 인연 있는 자로 하여금
물을 건너게 하리라 하는 말씀을 할 수밖에 없군요.」
원홍대사가 자애로운 얼굴로 이창란을 바라보았다.
「아미타불! 불은 인연이 닿는 자로 하여금 물을 건너게 한다. 참 좋은 말씀이지요.
기연(機緣)이란 때를 만나야 하며 천수(天數) 또한 이와 같으니
이 방주께서도 따로 명령을 내리시어 여기에 계신 영웅호걸들이
다시금 각자 좋은 인연을 맺도록 하십시오.」
이창란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안광이 번쩍이는 눈동자로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그런 연후에 한 번 고개를 끄덕이자 뒤에 섰던 두 명의 동자가 붉은 기를 흔들고
이어 북소리가 요란하게 천지를 진동시켰다.
'무협지 > 비연경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49 장 함정에 빠진 구대 문파 <殺手凶謨> (0) | 2014.06.22 |
---|---|
제 48 장 구대 문파와 천용방(天龍幇) <英雄大會> (0) | 2014.06.22 |
제 46 장 기나 긴 여정(旅程) <單騎如紅> (0) | 2014.06.22 |
제 45 장 이별 그리고 만남! <燕情無恨> (0) | 2014.06.22 |
제 44 장 사랑의 함정 <絶退群雄> (0) | 2014.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