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 장 기나 긴 여정(旅程) <單騎如紅>
양몽환은 주위를 면밀히 살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곳을 빠져 나가는 방법은
손이 뻗쳐지는 범위 안에서 잡아당길 수 있는 나무 아니면 바위 하다못해
한 포기의 풀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바로 손이 닿을 수 있는 위치에 잔디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 잔디는 자연적으로 그곳에서 자라난 풀이 아니라
인위적인 교묘한 방법으로 옮겨 심어진 것 같은 인상이 들었다.
아무래도 무엇인가 석연치 못하고 이상한 느낌을 주는 풀들이었다.
양몽환은 가만히 풀포기를 당겨 보았다.
그리고는 힘없이 놓고 말았다.
그것은 양몽환의 생각대로 옮겨 심어진 풀이었고
무엇인가를 감추기 위한 눈가림의 풀이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줄 수 있는 풀이라면 어느 정도의 희망이라도 갖겠지만
맥없이 빠져 나오는 풀포기에 더욱 실망하는 양몽환이었다.
한편, 몸에 진기를 모으며 빠져 나갈 궁리에 골몰하던 옥소선자는
양몽환의 실망하는 표정을 저윽이 바라보다
어떠한 방안이 섰는지 낮은 목소리로 양몽환을 불렀다.
그리고는 옥퉁소를 높이 들어 올렸다.
「동생!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
이제 이 옥퉁소로 동생을 치면 곧 빠져 나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진기를 이용해서 저 앞에 보이는 바위까지 단숨에 날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다시 빠지고 말아요.」
「?‥‥‥‥‥」
어리둥절해 하는 양몽환을 바라보며 옥소선자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내 생각으로는 이 육칠 장(六七丈) 안팎은 모두 이런 늪지대 같아요.
저기 바위가 한 팔 장(八丈) 되겠는데 동생이 진기만 모으면 갈수 있을 거예요.
자, 준비해요!」
말을 마친 옥소선자는 높이 들었던 옥퉁소를 휘둘러 강하게 일어나는
바람을 일시에 양몽환의 가슴에 안겨 주었다.
순간, 양몽환은 그 바람을 이용하여 힘껏 뛰어 올랐다.
그러자 과연 옥소선자의 말대로 허공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일단 허공에 오른 양몽환은 진기를 모아 호상비행(虎上飛行)의 수법으로
단숨에 칠팔 장을 날아 목적한 바위 위에 내려설 수 있었다.
그러나 옥소선자는 양몽환을 구출하는 대신 몸이 점점 더 빠져 들어가
가슴까지 빠지는 것이었다. 그때, 양몽환은 발을 구르며 옥소선자를
구하려고 생각은 하면서도 별 묘책이 없어 초조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자기를 구해주듯 그녀도 자기의 진기로 속히 빠져 나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처럼 초조하고 안타깝게 빠져 나오기를 기다리는 양몽환의 마음과는 반대로
아름다운 얼굴에 기쁨이 가득차있는 옥소선자는 잠시 후에 목까지 빠진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듯 양몽환을 바라보며 즐거운 듯이 웃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옥퉁소를 불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옥퉁소의 곡조는 밝고 청아하게 울려 퍼지며
나비가 춤을 추며 날아다니듯 늪지대 일대를 휩쓸며 즐겁고
기쁨이 충만한 웃음소리 같은 곡조가 잔잔한 호수 위를 백조같이 떠가는 것이었다.
또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슬프고 처량한 곡조로 가슴을 에이는 듯한 곡조로 변하며
양몽환의 가슴을 쾅쾅 치는 것이었고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오는 애절한 곡조였다.
순간 양몽환은 이상하고도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나를 구해주고 죽지만, 죽을 때까지도 내 앞에서 후회하지 않으려는 마음이구나.
내가 슬퍼할까 염려하여 퉁소로 나를 위로해 주는 모양인가,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죽으려는 것일까?‥‥‥)
이러한 생각이 들자 옥소선자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누님! 속히 나오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도 같이 죽겠어요.」
하며 다시 늪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러자 옥소선자는 급히 옥퉁소를 휘두르며 외치는 것이었다.
「안돼! 들어오지 말아요.」
「그럼, 빨리 나오시오!」
「하여간 들어오진 말아요.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
하는 옥소선자는 자기에 대한 양몽환의 진심을 알아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말은 동생이라고 하지만 동생 이상으로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도 나를 좋아하는 모양이야.
그렇지 않으면 같이 죽겠다고 뛰어들 리 없어 ‥‥)
옥소선자가 이렇게 혼자 기뻐하는 동안 늪 속으로 다시 뛰어 들려던 양몽환은
옥소선자의 말대로 주춤 물러섰다.
사실 자기가 뛰어든다 해도 구할 길은 없다.
구한다기 보다 다시 늪으로 빠져 들어갈 뿐 아니라
옥소선자에게 더욱 짐을 지워 주는 것밖에 안된다.
그렇게 되면 양몽환을 구하기 위해 진기를 또 새로 운행해야 하고
만일 그것이 여의치 못하면 살아났던 양몽환까지 죽게 될 뿐이었다.
옥소선자의 외치는 소리에 뛰어 들지는 못하고 갈팡질팡 초조해하는
양몽환의 얼굴을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옥소선자의 맑은 음성이 다시 퍼졌다.
「동생! 서두르지 말고 저쪽 절벽에 가서 등(藤)나무 줄기를 끊어 와요.」
그제야 양몽환은 자기가 얼마나 당황하기만 했던가를 알게 되었다.
옥소선자처럼 등나무 줄기를 생각하지 못하고 초조해 하며 다시 뛰어 들려고
서둘렀던 행동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등나무 줄기는 얼마든지 있었다.
될 수 있는 대로 빠른 시간에 많은 등나무 줄기를 길게 엮은 양몽환은
그 한 쪽 끝에 돌을 묶고 힘껏 던졌다.
등나무 줄기의 한 끝에 매달린 돌을 여유 있게 잡은 옥소선자는
유쾌한 소리로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천천히 잡아 당겨요.」
조심히 잡아당기는 양몽환의 힘에 의해 옥소선자는
죽음의 수렁 속에서 빠져 양몽환과 옥소선자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지고 있었다.
그러나 상상 밖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돌연, 와르르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절벽 위에서부터 굴러 떨어지는 바위가
양몽환과 옥소선자의 머리 위를 향하여 위세 있게 구르는 순간이 있다.
「앗!」
「동생! 피해요!」
두 입에서는 동시에 놀라는 부르짖음이 허공을 찢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는 도저히 피할래야 피할 수 없었다.
엉겁결에 왼손에 진기를 운집하여 한줄기의 장풍을 위로 쳐 보내는 동시
오른 손으로 재빨리 검을 빼어 진기를 칼(劍) 끝에 모으고 왼손의 장풍으로
약간 미는 듯 바위를 겨누고 장검으로 뿌리치자 수백 근이 넘을 듯한 큰 바위는
양몽환의 교묘한 기력에 이끌려 옆으로 떨어져나갔다.
그때,
옆으로 달려온 옥소선자는 몸을 날려 절벽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위가 굴러 내린 절벽 위에는 경장의 두 장정이 서 있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속으로 그 두 사람이 조금만 일찍 왔더라도 자기는
그들이 굴린 바위에 영락없이 깔려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등에서는 식은땀이 주르륵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이때, 옥소선자는 그녀의 특기인 마운십팔수(魔雲十八手)의 신법을 전개하여
뛰고 몸을 솟구치는 등 수법을 써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녀의 수법은 동쪽에서 또 서쪽에서 방향을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방향을 종잡을 수 없게 하면서 순식간에
이십여 장을 뛰어 오르는 것이었다.
그러자 양몽환도 곧 진기를 돋우고 뛰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그의 경신법은 옥소선자의 경신법에 뒤지지 않는 것으로
한 번 몸을 솟구치자 그림자도 없이 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절벽 위에 서있는 경장의 두 장정은 지극히 침착한 듯
양몽환과 옥소선자가 가까이 접근해 가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공격태세나 방비태세도 취하지 않고 서있는 것이었다.
먼저 절벽 위에 올라온 옥소선자는
곧 뒤따라 온 양몽환의 앞을 가로 막으면서 전략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동생은 뒤에서 접응(接應)해요.
두 사람이 꼭 죽은 것처럼 꼼짝 않는 것이 수상한데, 내가 먼저 가보겠어요.」
양몽환의 대답도 듣지 않고 퉁소를 휘두르며 순식간에 두장 다섯 자나 뛰어 올랐다.
그리고 곧이어 재주를 한 번 넘고는 바로 절벽위에 가볍게 내려섰다.
이 신법이야 말로 그녀의 특기로서 마운십팔수 가운데 가장 기묘한 수법인데
저공에서 적을 공격하는 신법인 것이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그녀가 혼자 적진 속에 뛰어드는 것이 안심이 되지가 않았다.
그녀가 퉁소를 휘두르며 뛰어 오를 때 역시 질풍같이 몸을 솟구쳐 따라올라
옥소선자가 막 절벽 위에 내려설 때에는 그 역시 이어 절벽 위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절벽 위에 다다른 옥소선자와 양몽환은 잠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은 그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던 대로 두 장정은 절벽 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세로
꼼짝도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누구의 손엔가 혈도가 짚여 시체로 변해버린 채였다.
더욱이 두 사람의 뒤에는 나무토막과 커다란 바위들이 쌓여 있었다.
만일 두 장정이 계속해서 바위와 나무들을 굴렸더라면 옥소선자와 양몽환은
상당한 고난을 겪었을 것이었다.
잠시 주위를 살펴보던 옥소선자는 갑자기 퉁소를 들어 그들이 올라온 반대방향의
아래쪽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무슨 사람들일까?」
눈을 날카롭게 뜨며 퉁소로 가리키는 곳에는 도사복 차림을 한두 명의 장정이
수많은 한 떼의 괴한들과 길목을 막고 서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두 명의 검술은 비상하고도 날카롭고 신랄하기 그지없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지만 조금도 당황하거나
두려운 기색이 없이 늠름하게 대항하고 있는 것이었다.
얼마동안 그들의 검술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던 양몽환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검을 뽑아 들고 옥소선자를 불렀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들을 도와주려는 사람 같소.
그렇다면 이대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하고 급히 뛰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옥소선자도 함께 호응하는 것이었다.
「좋아요. 동생의 마음이 그렇다면 나도 도와주겠어요.」
하고는 양몽환과 나란히 달려 나갔다.
한편, 의외로 옥소선자와 양몽환이 나타나자 흠칫 놀라던 두 명의 도사는
달려온 사람이 양몽환임을 알아보고는 기쁜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많은 무리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몸으로서는 목례와 미소로
아는 척을 하고는 손을 멈추지 않고 대적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자 양몽환의 입에서는 경탄의 외마디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앗! 동사매! 동사매가 아니시오?」
그제야 도사복의 동숙정도 검을 여전히 휘두르며 양몽환의 말에
기쁜 듯이 응답하는 것이었다.
「웬일이세요?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지요?」
입으로는 물으며 말하는 것이었지만 오른손의 검은 더욱 맹렬하게 휘둘러졌고
그와 함께 검광이 번쩍이는 곳에는 비명이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동숙정과 나란히 서서 검을 휘두르던 다른 한 명의 도사 하림이 양몽환을 찾으며
바쁘게 입을 놀리는 것이었다.
「오빠! 숙정 언니의 말대로 여기서 오빠를 만나게 되는군요.」
하는 것은 분명히 하림의 목소리였다.
그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는 양몽환의 귀에 너무나 익은 소리였다.
다시 돌아볼 필요도 없이 양몽환은 검을 휘두르며 하림에게로 달려갔다.
그러자 하림 역시 달려오는 양몽환을 마주보며 달려 양몽환의 품에 쓰러지듯 안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기쁨과 감격에 벅찬 하림이 자기가 여러 사람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달려오는 바람에 절호의 기회를 얻은 장정들은 하림과 양몽환을 향하여
일시에 달려드는 것이었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러자 위기를 직감한 양몽환은 쓰러지듯 자기 품에 안기는 하림을 재빨리 왼 팔로 감아
안으면서 한 쪽 옆구리로 돌리는 동시에 달려드는 적을 향하며 소지천남(笑指天甫)의 수를
전개하여 맨 앞으로 달려드는 장정을 무우토막 자르듯 후려갈기며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뜻밖에 역습을 당한 장정들은 일시에 달려들던 기세 그대로 획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자 이때 양몽환의 뒤에 서있던 옥소선자는 잠시의 여유도 주지 않고 퉁소를 번개같이
휘둘러 정신없이 지쳐 나갔다.
그러자 양몽환의 일격에 놀라 뒤로 물러났던 장정들은 더욱 당황하여 제각기 뿔뿔이 뛰어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러자 잠시의 여유를 가진 옥소선자는 하림을 껴안고 있는 양몽환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동생 안심해요. 내가 맡아 싸우겠어. 그동안 천천히 이야기나해요.」
하림과의 해후를 즐겁게 지내도록 안심시키고는 곧 뛰어 도망가는 장정들을
뒤쫓아 가며 높이 들었던 퉁소를 이리 치고 저리 돌리며 적의 머리를
썩은 풀 베듯 하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두 명의 장정이 풀썩 풀썩 쓰러졌다.
한편,
양몽환의 품에 안긴 하림은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사르르 감았다 뜨며
양몽환의 품속을 더듬는 것이었다.
「오빠! 보고 싶었어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
이제는 가라고 하지 마세요.
네? 저는 오빠가 하라는 대로 하겠어요.
가라는 것만 빼놓고.」
양몽환의 품속에서 흐느끼듯 말하는 그녀의 눈에서는 주르륵 눈물이 흘러
양몽환의 옷자락을 흥건히 적시는 것이었다.
순간,
양몽환은 자기가 하림에게 취한 행동을 뉘우치고 더욱 가슴 아파했다.
하림의 온순한 성품이 응당 이렇게 눈물로 하소연할 것을 예감치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품속을 더듬으며 흐느끼는 하림을 대 하자
그 마음은 더욱 민망하고 애처로움은 금할 길이 없었다.
「사매! 내가 잘못했어.
그러나 나는 너무나 사매에게 큰 죄를 져서 말하지도 못하고 괴로워했어.」
「알아요. 오빠의 마음을 다 알아요.
이제 그 얘긴 그만해요. 오빠가 그렇게만 생각해 준다면 저는 기뻐요.」
양몽환은 하림의 가는 허리를 힘껏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천만 마디의 말보다 더 많은 사연을 내포한 양몽환의 포옹은 하림을 더욱 흐느끼게 했다.
말이 필요 없었다.
또 말을 한다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더욱 어색해 질지도 모르는 양몽환과 하림의 사이였다.
하림은 다시 스르르 눈을 감으며 양몽환이 끄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자기도 힘껏 양몽환을 끌어안았다.
이때,
멀리서 노기가 둥둥한 옥소선자의 날카로운 부르짖음이 적들을 뒤쫓으며
쉼 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비겁한 놈들. 도망간다면 살아날 것 같은가!」
옥소선자의 여유 만만한 소리는 차츰 멀어져 갔다.
그와 함께 여기 저기 쓰러져 있는 시체들이 하나 둘 늘어만 가는 것이었다.
한편, 조금 전까지 수 명의 적들을 상대로 도포 자락을 펄렁거리던 .
동숙정은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경황없이 서있는 것이었다.
자기 대신 옥소선자가 적을 가로 막고 나서서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동숙정이였다.
그러나 양몽환과 하림이 다정스럽게 껴안고 있는 곳으로 접근해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옥소선자와 함께 적을 추격할 마음도 없는 동숙정은 검을 뽑아든 채
양몽환과 하림의 격정 된 순간이 지나 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자세로 망연히 서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양몽환의 품에서 꿈을 깬 듯 고개를 든 하림은 널려 있는 시체들을 돌아보다
경황없이 서있는 동숙정을 발견하고는 급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언니! 무슨 일이에요? 어디 다치기라도 했어요?」
그제야 제 정신으로 돌아온 듯 하림에게 몸을 돌리며 생긋이 웃는 동숙정이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시체들을 보고 있었어.」
「그렇다면 안심이에요.
나는 또 언니가 어디 다치기라도 했나했어요」
「다치기는 내가 왜 다치겠어.」
「그러면 그렇겠지. 그런데 언니, 우리 저 시체들이나 묻어 주어요.」
「글쎄 ‥‥‥」
남달리 순진한 하림은 비록 적의 시체라도 그대로 버려두기에는 마음이 걸렸다.
그래서 동숙정과 양몽환에게 조르다시피 하여 시체를 묻어 주기로 했다.
즉시 그들은 땅을 파고 시체들을 합장해 묻어 주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시체들을 다 묻고 났을 때 까지도 적을 쫓아 달려간
옥소선자는 돌아올 줄을 몰랐다.
궁금히 생각하며 옥소선자가 사라진 방향을 두리번거리는 양몽환의 표정을
눈여겨보고 있던 동숙정은 낯빛을 흐리며 양몽환에게로 다가갔다.
「양사 제는 참 복도 많군요.
옥소선자와 같은 여자와 동행하여 어디를 가던 길이죠?
우리들은 양사제를 만나려고 한 달 전부터 검북 땅을 헤매고 다녔는데‥‥‥」
놀리는 말인지,
원망하는 말인지 아리송한 말을 하는 동숙정의 표정은 확실히 양몽환에게
여자가 많이 따른다는 뜻으로 하는 이야기 같았다.
동숙정의 뼈 있는 말에 얼굴을 붉히고 당황하던 양몽환은
급히 하림의 얼굴을 살피고는 정색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아요. 나는‥‥‥」
하는 양몽환을 제지한 동숙정은 약간 날카로운 어조로 준엄히 말하는 것이었다.
「변명할 것 없어요.
오늘 림매를 양사제에게 돌려보내겠어요.
그러나 만일 다시 림매를 버린다면 용서하지 않겠어요.
나도 한 번 사랑에 속은 사람이에요.」
하고는 이번에는 음성을 낮추며 양몽환에게 묻는 것이었다.
「도옥은 어떻게 됐어요?」
양몽환은 훈계를 듣는 어린이처럼 동숙정의 말을 조용히 들으며 고개를 숙였다.
사실 자기는 하림에게 너무나 큰 죄를 진 것만 같았다.
동숙정의 말이 백 번 옳은 말이었다.
잠시 그녀의 말에 가책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나마 하림에게 용서를 빌고 있던 양몽환은
동숙정의 입에서 금환이랑 도옥의 말이 나오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글쎄요. 절벽 위에서 떨어졌는데 그 이후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소.
기적이 없다면 분명히 죽었을 것이오.」
순간,
동숙정의 얼굴은 금방 흙빛으로 변했다.
그러나 양몽환과 하림 앞에서 자기의 괴로운 심정을 감추려는 듯
태연을 꾸미는 그녀의 표정은 더욱 처량하기만 했다.
이와 같은 동숙정의 표정을 본양몽환은 안할 말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쏟아 놓은 말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하림도 역시 양몽환과 같은 생각이었던지 동숙정을 위로하며
양몽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빠! 도옥 오빠 때문에 숙정 언니가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정말 절벽에서 떨어졌어요?」
「절벽에선 떨어진 즉시 주소저가 내려가 보았지만 시체는 발견하지 못했어.
그러나 꼭 죽었다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아.」
그러자 동숙정은 깊은 신음 소리를 내면서 먼 하늘을 바라다보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녀의 얼굴에는 잠시 실낱같은 희망이 스쳐갔다.
사실 하림의 말만 듣고 도옥이 죽었다고 알고 있던 동숙정에게는
양몽환의 말이 깊은 절망 속에서 새로운 힘을 북돋아 주는 것이 되기도 했다.
양몽환의 말대로 수천 길이나 되는 절벽 위에서 떨어졌다면
그 바닥에는 틀림없이 도옥의 시체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양몽환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분명히 도옥의 시체는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면 죽지는 않았다는 말인가요?」
「글쎄 그것을 알 수 없다는 말이오.
분명히 죽었다면 시체라도 있어야 확인을 하죠.」
하면서도 속으로는 도옥의 안부가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도옥과 동숙정과의 관계는 정이야 있든 없든 깊은 속까지 들어갔던 그들의 사이였다.
그러나 도옥은 항상 동숙정을 냉대해 왔다.
그뿐만 아니라 동숙정이 진심으로 접근해 오면 올수록 도옥은 냉정해 지는 것이었고
나중에는 이요홍과의 사이도 미묘한 관계에까지 들어갈 만큼 동숙정은
안중에도 없었던 도옥이었다.
그렇지만 동숙정은 그렇지 못했다.
지금도 도옥의 안부를 애타게 염려하는 것이었다.
자기에 대한 도옥의 마음이 어떠하다는 것도 모르고 애태워하는
동숙정을 바라보는 양몽환은 그녀가 가엾기도 하고 그런 반면
그 애정에 탄복도 하는 것이었다.
한편,
양몽환에게서 확실한 도옥의 생사를 듣지 못한 동숙정은 낙심천만이었다.
다행히 시체가 없다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뿐이었다.
그러자 그녀의 실망하는 표정을 지켜보던 양몽환은
그녀의 걱정을 잊어버리도록 하느라고 화제를 돌려 버렸다.
「소제(小弟)도 곤륜파의 장문사숙으로부터 축출선고를 받았소.」
그제야 표정을 바꾼 동숙정은 쓸쓸히 웃으며 양몽환에게 고개를 돌렸다.
「알고 있어요.
림매에게서 들었어요.
나는 내 발로 도망쳐 나오고 사제는 축출당하고‥‥‥
우리들은 사람 구실도 못하게 되는군요.」
「그렇다고 사람 구실까지 못할 것은 없소.
그런데 사매는 어디로 가시겠소. 우리와 함께 가시죠.」
「고마워요. 그러나 염려마세요. 이 넓은 천지에 갈 곳이 없겠어요?」
「그렇지만 어느 한 곳을 정하고 살아야죠.
이 소제하고 같이 무술이라도 더 닦았으면 좋겠는데‥‥‥」
「일정한 거처도 필요 없고 무술도 귀찮아졌어요.」
「그건 자포자기하는 말입니다. 힘을 내야 합니다.
사매와 나는 다 같이 곤륜파에서 쫓긴 몸이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
「나도 역시 마찬가지로 후회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나는 이번에 구대문파 검술대회 때
치욕적인 나의 과거를 씻고 사문을 위해서 분전할 작정이오.
사매도 검술 대회에서 과거를 씻도록 하시죠?」
「흥! 사제나 나나 쫓겨난 몸인데 사문을 위해서 분전한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사실 그렇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같이 스승의 은혜를 입은 몸들입니다.
비록 쫓겨났다 할지라도 스승님의 은혜는 갚아야죠.」
「사제나 마음껏 은혜를 갚으세요. 나는 나대로 할 일이 있어요.」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멀리 사라져 가는 동숙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양몽환은
머리가 아프도록 여러 가지의 일들이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동숙정과 함께 곤륜파에서 제자로 무공을 닦던 일로부터 애정관계에 번민하는
요사이 까지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것이었다.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양몽환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하림도
역시 사라져 가는 동숙정에게는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기만 했다.
확실히 동숙정은 변했다.
곤륜파가 그렇고 애정이 그렇고 또한 자기의 장래도 그러한 듯 서글퍼지기만 하는
동숙정에게 어떠한 말로도 위로할 수 없는 하림이었다.
(동사매도 많이 변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하림이었고 양몽환이었다.
얼마 동안 서로 사라져 가버린 동숙정의 생각으로
아무 말 없이 무거운 침묵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양몽환은 무슨 괴로운 생각이라도 털어버리듯 고개를 흔들며 돌아섰다.
「우리도 가야지!」
「그래요. 오빠!」
무거운 침묵 속에서 벗어난 양몽환과 하림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것은 그때까지 돌아오지 않던 옥소선자의 그림자가 멀리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언덕 위에 한 떼의 무리와 옥소선자가
어울려 싸우는 것이 보였다.
퉁소를 비껴든 옥소선자는 장정들이 휘두르는 시퍼런 칼날을 이리 저리 피하며
몸을 날려 허공을 훌 훌 날면서 좌충우돌 정신없이 싸우고 있었다.
퉁소가 한번 올라가면 몇 개의 칼날이 검광을 번쩍이며 떨어지는 것이었고
칼날이 번쩍 올라가면 썩은 풀 베듯 옥소선자의 퉁소는 검광을 가르며 허공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옥소선자를 상대로 싸우는 장정들도 만만치 않았다.
이미 오륙 명의 장정이 옥소선자의 등소에 싸늘하게 시체로 변해 버렸지만
그래도 굴하지 않고 사생결단하고 악착같이 달려드는 것이었다.
옥소선자의 분노와 개미 때같이 달려드는 장정을 바라보는 순간 양몽환은
검을 빼어들기가 무섭게 달려 나갔다.
그리고는 인정사정 보지 않고 앞에 있는 장정부터 후려치며 들어갔다.
그러자 세 자루의 장검이 양몽환의 장검에 맞아 이장(二丈) 밖으로 나가떨어지고
장정은 장정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벌벌 기어 달아나는 것이었다.
이때,
옥소선자는 양몽환의 출현을 보고는 희색이 만면해서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양몽환에게 손짓 했다.
「동생! 잘 왔어요. 네 이놈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쓸어 버려 야겠어.
강호의 도의도 모르는 놈들이야.
한 여자에게 이렇게 떼거리로 덤비는 놈들은 처음 보겠어.」
하고는 또 한번 생긋 웃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퉁소를 고쳐 잡고 단 번에 두 명을 때려눕히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양몽환도 장검을 휘두르며 옥소선지의 뒤를 따랐다.
사실 양몽환은 늪 속에 빠져 고생하던 생각에 불쪽 분통이 터져 화풀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사정없이 휘두르며 이놈 치고 저 놈 치며 닥치는 대로 후려쳤다.
그러자 퉁소와 장검이 지나간 곳에는 팔, 다리, 허리, 가슴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장정들이었다.
양몽환은 그래도 생명을 빼앗는다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것 같아 힘을 약간 늦추어
상처를 내는 것으로 그쳤다.
그러나 옥소선자는 그렇지가 않았다.
퉁소를 한번 겨누고 내려쳤다 하면 영락없이 혈도나 관절 아니면 급소가
치명타를 당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정없이 내려치는 옥소선자의 퉁소에 또 다시 두 명의 장정이 피를 쏟으며
싸늘한 시체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지금 옥소선자와 양몽환이 상대하여 싸우는 장정들은 천용방의 향주(香主)들과
타주(舵主)들이었다.
이들은 원래 잔인한 수법과 인정 없는 사나운 성질로 그 이름을 떨치는 자들이었다.
이러한 자들과 싸우는 옥소선자나 양몽환이 조금만 실수라도 한다면 그들의 날카로운
장검에 목숨이 붙어 있지는 못 할 것이다.
그러나 양몽환은 정말 관대한 아량으로 상처만을 내게 하는 것이었다.
이때, 하림도 역시 장검을 뽑아들고 양몽환을 도와 싸우려고 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양몽환의 장검에 피를 뿌리고 쓰러진 채 신음소리를 내는
장정들을 보는 순간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곧 싸우기를 단념하고 고통에 울부짖고 신음하는 장정들에게 달려가서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천용방의 장정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하림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적이라도 버려두지 않고 상처를 살펴주는 그녀의 참다운 마음씨에 감동하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다 하림의 어여쁜 얼굴과 백옥같은 횐 손이 상처에 당고 알뜰히 보살펴주는 데에는
놀라움과 감탄함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아름다운 여자의 체취와 손길을 조금이라도 더 맡고 당기를 바라는 듯
하림이 돌아서기만 하면 더욱 큰 소리로 신음하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난데없는 호령소리가 신음소리를 쓸듯이 요란하게 들려 왔다.
「꼼짝 말아라!」
벽력같은 소리에 일제히 검을 거두고 물러섰다.
그러자 질풍같이 달려온 사나이는 천용방의 흑기단주(黑旗壇主)인
개비수(開碑手) 최문기(崔文奇)였다.
최문기는 땅에 뒹굴고 있는 제자들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는
옥소선자와 양몽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두 분께서는 잠시 내말을 들으시오.
원래 이곳은 천용방의 지역입니다.
그런데 두 분이 허락 없이 들어오기로 본방 제자들이 소란을 피운 것 같소이다.
분노를 참으시고 거두시기 바라오.」
정중한 사과와 싸움을 만류하는 말에 옥소선자는 퉁소를 소매 속으로 넣으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렇다면 좋아요. 그러나 구대 문파를 초청해서 무술대회까지 벌린다는 당신들의
천용방이 이렇게까지 무술의 도의를 모르는 줄은 몰랐어요.
부끄러운 일이군요.」
「본방 제자들이 잘못한 일이 있다면 단호히 처단하겠습니다.」
「잘못도 이만하면 아주 훌륭해요.
여자 한 사람을 수십 명씩 달려들어 싸움을 벌인다는 것은 천용방의 위신 문제예요.」
옥소선자의 말은 다분히 상대방의 얼굴을 붉히게끔 대의명분이 서는 말이었다.
원래 무술계에서는 여러 명이 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금기(禁忌)로 되어 있었다.
그러한 금기를 무술계에서 최대로 강하다는 천용방에서 저질렀다면 좋은 소문은 아니었다.
최문기는 입장이 난처했다.
사실 최문기는 성질이 이렇게 출중하고 예의바른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반대로 점잖고 예의바른 말로 대하는 것이었다.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본방의 법규대로 적절한 징계를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실례의 말씀입니다마는 아가씨는 어느 파에 속해 있습니까?」
「그것은 왜 묻죠?
이 옥소선자를 몰라서 묻는다면 모르겠거니와 장난으로 묻는다면
이 퉁소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요.」
하면서 옥소선자는 소매 속에 넣었던 퉁소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말했다.
「만일 내가 천용방에 가입했더라면 당신 같은 흑기단주는
그 지위도 유지하지 못했을 거예요.
공연한 시비로 시끄럽게 군다면 당신의 무술이나 시험해 보겠어요.」
「무슨 말씀을‥‥‥ 아가씨께서 이 최문기의 지위를 탐내고
나의 무술을 시험해 보겠다면 얼마든지 응해 드리겠소.
그러나 며칠만 기다려 주시오.
천하 영웅들이 모여 무술 대회를 열 때 아가씨에게 보여 주겠소.」
「그럼 기다리겠어요. 두려워서 도망가지나 마세요.」
「하‥‥‥ 하‥‥‥ 아가씨께서나 도망가지 마시오.
이제 무술 대회도 며칠 아니, 꼭 나흘 남았군요.
그때 만나서 아가씨의 무공이나 구경할까 합니다.」
「얼마든지 보여 주겠어요. 안심하시고 기다리세요.」
「여부 있습니까.
그러나 오늘은 모처럼 이곳까지 오셨는데 본방에 가셔서 좀 쉬시지요.
그리고 저기 양상공께서도.」
그러자 양몽환은 잠시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만일 옥소선자와 천용방에 간다면 무술계에 이상한 소문이 날것이다.
그리고 또 곤륜파의 스승님이라도 만난다면 더욱 의심하겠지‥‥)
그러나 옥소선자는 자기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자기의 일신상의 문제로 생명의 은인을 저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최문기의 권유대로 천용방에 들어갈 수도 없는
그로서는 잠시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양몽환의 난처한 표정이 무엇 때문이라는 것을 즉각 알아챈
옥소선자는 뜻 밖에도 양몽환의 마음을 꼭 찌르는 것이었다.
「동생! 나 때문에 걱정할 것 없어요.
나는 동생을 여기까지 바래다주는 것이 할 일이었어.
동생은 사매와 함께 최단주를 따라 가요.
나는 갔다가 무술대회 날 오겠어요. 그럼 나는 돌아가겠어.」
하고 양몽환에게 다정한 눈빛으로 생긋이 웃고는 허공으로 몸을 날려
멀리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자 양몽환은 옥소선자가 예전과는 달리 조금도 미련 없이
사라져 가는 것에 이상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엇갈려 정신없이
그녀가 사라진 곳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외로운 심정이었다.
그 만큼 옥소선자는 양몽환의 일거일동을 보살펴 주고
정을 쏟으려고 애썼던 것이었다.
양몽환이 멍청히 서 있는 동안에 최문기는 뒤편 언덕을 향하여 손을 높이 들어 흔들었다.
그러자 그 언덕에서는 갑자기 붉은 색의 깃발이 나타나 좌우로 흔들리다가는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것이 무슨 신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양몽환은 미처 보지 못했다.
잠시 후, 재촉하는 최문기의 뒤를 따라 양몽환은 하림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앞서 달려가던 최문기는 뒤에 따라오는 양몽환과 하림을 돌아보며
「해 떨어지기 전에 빨리 가야 하오.」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살같이 달려가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최문기가 그들의 경신술을 시험하기 위한 계략이라는 것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러자 양몽환은 즉시 냉소를 터뜨리며 책문기의 뒤를 바짝 따랐다.
(얼마든지 나의 경신술을 보여 주마!)
은근히 속으로 벼르면서 어렵지 않게 최문기의 뒤를 따라가던 양몽환은 혹시 하림이
따라 올 수 있을까 걱정하며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양몽환의 걱정과는 반대로 하림은 양몽환보다 더 잘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힘들어하지도 않고 가볍게 걸음을 옮기는 데에는 도리어 양몽환이 뒤떨어질까
염려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뒤를 바짝 따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하림을 돌아보는 양몽환은 저윽이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반년 동안 사매의 무공이 상당히 진전했는데.」
자못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하림에게 하는 말이었다.
사실 반년 동안 헤어져 있는 사이에 몰라보도록 하림의 무공은 진전해 있었다.
그 반년 동안 양몽환도 역시 주약란과 조소접의 도움으로 무공의 진전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만큼 하림과 양몽환은 헤어져 있던 반년 동안에 제각기 무공에 눈부실 만큼
진전을 가져온 것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연유로 하림이 무공을 닦았는지는 알 길이 없는 양몽환이었다.
그래서 다만 경탄하는데 그칠 뿐이었다.
「진전한 것은 없어요.
숙정 언니가 갖고 있는 책을 보고 그 안에 적혀 있는 여러 가지의 장법과 내공
그리고 경신술을 배웠을 뿐인걸요. 뭐.」
「잘 했어. 배울 수 있는 데까지 배워야 돼.」
「그래도 오빠 때문에 배웠어요.
제가 무공을 배워서 오빠를 도와주려고 열심히 배웠어요.
숙정 언니는 나보고 십년 동안만 배우라고 하던걸요.」
「사매는 워낙 영리하니까 꼭 십년씩이나 배우지 않아도 될 걸.」
그제야 양몽환은 동숙정 때문에 하림의 무공이 진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는 사이에 최문기와 양몽환 그리고 하림과의 거리는 이삼장(二三丈)이나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곧 경신술을 발휘하여 앞서가는 최문기의 뒤를 바짝 따르고 있었다.
한편,
있는 재간을 다하여 앞서 달리던 최문기는 이만하면 따라올 엄두도 못 내고 허우적거리겠지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최문기는 머리가 홱 돌아갔다.
아직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려니 했던 양몽환과 하림은 바로 자기 뒤 꼭지에 바싹 붙어
따라오지 않는가. 놀라운 일이었다.
양몽환과 하림을 우습게보았다가는 큰 코 다칠 판이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문기는 자기 뒤에 바싹 붙어 있는 양몽환을 돌아보며 맞은편의 대궐 같은 큰 집을 손으로
가리키는 것이었다.
「저기 보이는 것이 천용방의 총단이오.
각파의 무술인들이 모두 저 곳에 모여 있소
그럼 나는 여기서 실례하겠소.
조금만 더 가면 안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오.」
「수고하셨소. 안녕히 가시오.」
양몽환도 최문기에게 인사하고는 최문기가 가리키는 곳으로 향하여 돌아섰다.
그러자 최문기는 오던 길로 되돌아서 멀리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양몽환과 하림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맞은편의 대궐 같은 집을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과연 최문기의 말대로 십 오륙 세의 동자가 마주 나오며 허리를 굽히는 것이었다.
「공자(公子)와 소저께서도 무술 대회에 오시는 분이신가요?」
공손히 읍하며 묻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동자의 물음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최문기가 하던 말을 생각하고는 마음을 놓았다.
「그렇소.」
「그러시다면 어느 문파에 속하십니까?」
「우리들은 곤륜파의 제자들이오,」
「잘 알겠습니다. 그러시면 저를 따라 오십시오.」
하고는 앞서 걸어가는 것이었다.
양몽환과 하림은 즉시 동자의 뒤를 천천히 따랐다.
울창한 소나무 숲을 지나 어느 깨끗한 집으로 안내 되었다.
「곤륜파의 어른들은 모두 이곳에 계십니다.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하고 돌아서서 가는 것이었다.
동자가 소나무 사이를 지나고 보이지 않게 되자
양몽환과 하림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양몽환의 뇌리에는 여러 가지의 이상한 생각이
번개같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구대 문과의 고수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의논하지 못하도록 여기저기로
각 파마다 별거시켜 서로의 내왕을 간접적으로 막아내려는 의도와 각처마다
감시인을 배치하고 동정을 살피는 듯한 그들의 눈이 천용방의 간사한 계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치밀한 계획 아래 착착 진행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양몽환과 하림이 문으로 들어서자 경장에 검을 멘 이십 오륙 세의 젊은이가
하림을 보고 웃으며 다가오는 것이었다.
「사형!」
「안녕하셨소?」
「예, 사형도?」
정다운 사람들처럼 인사를 나누자
양몽환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그들의 대화만을 듣고 있었다.
이때, 젊은이가 양몽환을 바라보고는 다시 하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심사매! 이분이 바로 사백부님의 제자이신 양사제가 아니시오?」
하는 말에 양몽환은 황급히 자세를 고치며
「예, 소제(小第)가 바로 양몽환입니다. 형장은 누구십니까?」
「저는 황지영(黃志英)이라고 합니다. 저도 장문인의 제자입니다.」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었다.
사실,
양몽환은 곤륜산에 있는 금정봉의 삼청궁에는 아직 가 본 일이 없기 때문에
같은 파의 제자인 황지영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때,
하림이 양몽환에게 황지영을 소개시켜 주었다.
「황사형은 우리 곤륜파의 수제자에요.」
「아! 그러시군. 미처 몰라보아 죄송합니다.
같은 파의 제자들끼리도 서로 모르고 지낼 줄이야‥‥‥
용서하시오.
그러나 이 몸은 장문사숙으로부터 축출당한 사람입니다.」
하고 조금 추연한 빛을 띄웠다.
그러자 황지영 역시 마음이 괴로운 듯 가볍게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저도 사백부님과 심사매에게서 말은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양형을 벌써부터 만나 보려고 했습니다만 오늘에야 만나게 되었군요.」
「그렇게 까지 말씀해 주시니 도리어 부끄럽습니다.」
「겸손의 말씀이오.
사실 양형을 축출한 사백부님께서도 요사이 퍽 울적해 하고 계십니다.
양형이 저를 믿어 주신다면 제가 어떻게 하든지 다시 곤륜산으로 돌아오게 하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곧 되돌아오게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한 말씀이오.
덕택에 소제가 다시 사문(師門)에 들어간다면 사형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읍을 하고 고개를 들던 양몽환은 바로 눈앞에 옥영자와 혜진자가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양몽환은 즉시 땅에 꿇어 엎드렸다.
「버림 받은 불효제자 양몽환이 삼가 사숙님께 인사드립니다.」
그러자 옥영자는 본척만척 하고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혜진자도
하림만을 부르는 것이었다.
「림아! 이리 오너라.」
이때,
하림도 양몽환의 뒤에 꿇어 엎드려 있었다.
그런 때에 혜진자의 부르는 소리에 급히 일어나 달려갔다.
「사숙님!」
「그래, 그동안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숙정 언니와 함께 있었습니다. 사숙님!」
「뭐라고? 그럼 동숙정과 같이 지냈다는 말이냐?」
얼굴빛이 변하면서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네 ‥‥‥‥‥」
「그럼 동숙정이 아직 살아 있느냐?」
「‥‥‥‥‥‥」
「흥! 지금 어디에 있느냐?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왜 나를 찾지 않느냐?」
「저하고 같이 있었어요.
그러다 몽환 오빠를 만나고는 어디론지 가버렸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고?」
혜진자는 동숙정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에 심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하림보다 더 사랑해 주던 동숙정이 사문을 배반하고 종적을 감추자 혜진자의 마음은
더 없이 비탄에 빠지고 죄야 어떻든지 간에 그녀가 돌아오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오면 모든 것을 용서해 주리라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돌아오지 않고 도리어 자기를 피하는 듯한 동숙정이 이제는 어디 멀리 가서
죽었으리라고 또 그렇게 죽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너무나 사랑하고 아껴주던 제자였다.
그러한 동숙정의 소식을 접하자 온몸이 노곤하고 머리까지 어질어질 하는 것 같았다.
잠시 눈을 감고 격정을 가라앉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던 혜진자는 힘없이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마는 것 이었다.
한편,
하림은 혜진자가 실망한 빛으로 사라져 버린 문을 바라보며 망연히 서 있었다.
그것은 동숙정의 비밀에 속하는 일을 모두 혜진자에게 말했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동숙정은 자기의 일신상의 일을 절대 비밀로 해달라는 것을 어기고 혜진자에게
모두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받고 정신없이 망연히 서 있었다.
그때,
정신없이 서있는 하림의 팔을 가만히 쥐는 차가운 손이 있었다.
하림은 돌아보지도 않고 양몽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림은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나직이 속삭였다.
「오빠! 왜 손이 이렇게 차요? 어디 아파요?」
그러자 하림의 팔을 쥐고 있던 손이 스르르 풀리며 양몽환이 아닌
황지영의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심사매!」
뜻밖의 소리에 깜짝 놀란 하림은 급히 황지영의 품에서 물러 나왔다.
「아! 황사형 이었군요. 나는 몽환 오빠인줄 알고‥‥ 잘못했어요.」
당황해 하는 하림을 바라보며 황지영도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잠시 후 냉정을 되찾으며 정색하는 것이었다.
「아니, 도리어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미안해하는 황지영의 얼굴빛은 금방 흙빛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의 표정은 무슨 말인가를 할 듯 하다가는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사형! 무슨 일이라도?」
하림이 먼저 묻자 그제야 황지영은 숙였던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사매! 한 가지 물어 볼 말이 있는데 대답해 주겠어요?」
「무슨 일인데요? 제가 아는 일이라면 대답해 드리죠.」
그러자 황지영은 마당의 한 구석으로 하림을 데리고 갔다.
한편,
두 분의 사숙에게서 냉대를 받은 양몽환은 낙심천만으로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한 양몽환으로서는 황지영과 하림의 대화나 거동은 모르고 있었다.
이때,
한쪽 구석에까지 하림을 데리고 온 황지영은 몇 번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혹시 동사매를 본 일이 있는지요?」
「왜요?」
「아니, 그저 물어보는 말입니다.」
순간, 황지영은 약간 당황하는 듯 했다.
그러나 하림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지금까지 같이 있었는데요.」
「정말입니까? 나를 속이는 것은 아니겠지요?」
급히 한걸음 다가서며 묻는 말이었다.
상당히 조급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무슨 일 때문에 황지영이 동숙정의 소식을 묻는지 모르는 하림은 태연했다.
「제가 어찌 곤륜파의 대사형인 분에게 거짓말을 하겠어요.
방금 사숙님께서도 저에게 묻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대답해 드렸는데‥‥‥ 믿지 않으시는군요.」
반신반의 했던 황지영은 하림이 자기 말을 믿지 않는 것을 원망하듯 하자 황급히 뉘우쳤다.
그리고 또한 하림이 자기에게 거짓말할 이유가 없음을 직감했다.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의외의 말에 내가 놀랐던 모양입니다.
그럼 지금 동사매는 어디 있습니까?」
「그건 모르겠어요. 제가 떠나올 때 어디로 가버렸어요.」
「얼마 동안이나 같이 지냈습니까?」
「반년 가량 돼요.
우리는 무공을 닦느라고 세월 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죠.」
「그럼 반년 동안이나 같이 있었군요.」
「네, 그래요.」
「그러면, 음‥‥‥ 동사매가 아무 말도 없었습니까?」
그러자 하림은 황지영의 묻는 태도가 이상한 모양이었다.
눈을 둥그렇게 뜨고 의아해하던 하림은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음을 눈치 챘다.
그 곡절이 어떠한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면
이토록 조급하게 황지영이 묻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하림은 자기가 알고 있는 대로
동숙정의 근황을 말해 주었다.
「숙정 언니는 조금 변한 것 같아요.
어떤 때는 기뻐하다가도 괴로워하고 어떤 때는 웃는가 하면 눈물을 흘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왜 우느냐고 물어 보았지만 말은 안 해줘요.
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죄악이 있다고도 하고 어떤 때는 말로 안 하고
며칠씩 지내기도하고‥‥‥」
하는 것이었다.
사실 황지영은 동숙정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만나면 자기 마음속에 있는 말을 다 하고 싶었다.
그러나 동숙정을 만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행방조차 묘연한 동숙정을 어디에서 찾는다는 말인가. 할 수 없이 하림으로부터
동숙정의 근황을 듣는 것으로 참아야 했다.
그러나 하림에게서는 별로 신통한 말이 나올 리 없었다.
황지영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은 자기 황지영에 대한 동숙정의 심정이나
사랑에 대한 말을 들으려는 것이었다.
그러한 황지영이 하림에게서 들은 소식은 더욱 마음만 답답하게 할 뿐 듣지 않음만 못했다.
더 듣기를 단념한 황지영은 쓸쓸히 웃으며
「사매! 감사합니다.」
하고는 천천히 몸을 돌리고 말았다.
황지영의 거동과 추연한 빛으로써 동숙정에 대한 황지영의 속마음을 대강 눈치 챈 하림은
멀어져 가는 황지영의 뒷모습에서 측은하고 쓸쓸함을 발견했다.
하림은 자기가 양몽환을 생각하듯 황지영이 동숙정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얼마나 안타까울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든지 숙정 언니를 만나게 해줘야지‥‥‥)
이렇게 결심한 하림은 멀리 걸어가는 황지영을 급히 불렀다.
「황사형! 잠깐만 기다리세요!」
외치고는 황지영에게로 달려갔다.
「사형은 숙정 언니를 만나보고 싶으세요?」
그러자 황지영은 고개를 가로 흔드는 것이었다.
「아니, 잘 있기만 하다면 그만이지, 만나볼 것 까지는 없어요.」
「거짓말, 저는 지금 알았어요.
숙정 언니를 보고 싶으시죠? 제가 만나게 해드릴게요.」
그러나 황지영은 아무 말 없이 조금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화제를 바꾸는 것이었다.
「사매! 우선 양사형을 데리고 저 서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러면 제가 사숙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하고는 몸을 돌려 천천히 가버리는 것이었다.
할 일 없이 돌아선 하림은 황지영에 대한 측은한 마음을 지닌 채
양몽환이 서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까지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양몽환의 손을 가만히 편 하림은
서쪽 방으로 양몽환을 데리고 들어갔다.
이때,
양몽환은 어떻게 하면 사부님과 사숙들의 오해를 풀 수 있을까 하고 골몰하던 중에
하림이 이끄는 대로 서쪽 방까지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 정신이 든 양몽환은 펄쩍 놀랐다.
「아니, 여기가 어디지?」
「황사형이 이 방으로 들어가라고 했어요. 그러면 사숙님을 모시고 오겠대요.」
「그러면?」
「사숙님이 오시면 양해를 구하도록 하라더군요.」
「음‥‥‥‥‥」
양몽환은 하림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겨 두었다.
그러는 그의 마음은 괴롭기만 했다.
한편, 천용방은 무술 대회에 참가할 고수들을 위하여
이 영빈관(迎賓館)이라는 곳을 새로 지었다.
모두 십여 채의 독립된 집을 지어 그 중 아홉 채를 구대 문파에서
각각 한 채씩 사용하도록 하고 나머지 한 채는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은
강호의 이인(異人)들을 위하여 지은 것이었다.
방으로 들어온 양몽환은 즉시 주약란이 준 묵인철갑사피(?燐鐵甲蛇皮)로 만든 조끼를 입었다.
이 묵인철갑사피로 만든 옷은 극히 부드럽고 하지만 칼이나 어떠한 암기(暗器)에도 뚫리지
않는 기묘한 옷이었다.
만일 이 옷을 줄때 주약란이 어떠한 무기에도 뚫리지 않는 옷이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부드러운 촉감을 만지던 양몽환으로서는 입을 생각도 안 했을 만치
가볍고 부드러운 옷이었다.
그러자 황지영이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러나 황지영의 얼굴은 몹시 엄숙하고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양몽환은 그의 얼굴 표정에서 사숙을 만나게 하려던
그의 계획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양사형! 정말 뜻밖입니다. 세 분 어른의 뜻이 어떤지 도저히 모르겠군요.」
양몽환은 깊은 구렁텅이로 끝없이 빠져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황지영에게 걸었던 일말의 희망도 산산이 부서지고 마는 것이었다.
「세 분 어른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요?」
「소형이 몇 번 찾아가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세 분 어른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이 침묵만 지키고 있습니다.」
기대 이상으로 곤륜 삼자는 양몽환을 부르지 않는 것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연거푸 한숨만 쉬던 양몽환은 옆에 서 있는
하림의 하얀 옷만 내려다 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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