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비연경룡

제 44 장 사랑의 함정 <絶退群雄>

오늘의 쉼터 2014. 6. 22. 15:05

제 44 장 사랑의 함정 <絶退群雄>
 

 

  그러나 양몽환은 어떻게 된 일인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아마 혈도를 짚인 모양이었다.

눈알만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하였다.

갑자기 왕한상의 비웃음 소리와 함께 호령이 터졌다.

 

「빨리 다섯 걸음을 물러나랏! 만일 망령되이 구하려고 행동한다면

즉각 이 칼로 피 흘리며 쓰러지게 하겠다!」

 

  왕한상은 지모와 계략이 뛰어나고 교활한 무예가였다.

처음 조소접을 대했을 때만 해도 그녀 역시 주약란 모양으로 양몽환을 중하게 여기고

관심을 가지는지 알 수 없어서 여간 근심하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호랑이 꼬리를 밟게 되는 형국으로 상대방의 살기(殺氣)만을

유발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조소접의 반응만을 살폈던 것이다.

그러던 그는 자신이 섰다.

조소접은 양몽환의 생사에 꼼짝없이 매달리고 마는 눈치였다.

이대로 양몽환만 붙잡고 위협한다면 조소접을 쉽게 굴복시킬 것 같았다.

과연, 조소접은 그의 말대로 세 걸음이나 뒷걸음쳤다.

  조소접인들 귀신이 아닌 다음에야 별수 없었다.

모험적으로 양몽환을 구출하는 방법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해치지는 마세요. 상호간에 좋게 상의하도록 하세요.」

 

그러나 왕한상은 양몽환에게 뻗친 손만은 늦추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은 조소접이 갑작스럽게 공격을 가해오지 않을까 하고 오히려 더 겁을 내고 있었다.

만일 그녀가 격분한 나머지 전격적으로 일격을 가해 온다면 자기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간신히 위협적인 말로 그녀를 물러서게는 하였지만

그는 더욱 공력을 집중하여 대비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그 즉시 양몽환을 부채로 타살해 버리고 귀원비급을 얻으면 다행이고

못 얻으면 그만이라고 결심했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 공격을 받게 되면 싸울 수 있는 한,

힘껏 싸워보고 자신이 위태로워지면 도망을 가면 그만이라고 여겼다.

여하간 기회를 보고 움직이려고 조소접의 일거일동을 세심히 살폈다.

사실왕한상은 자기 자신이 결코 조소접의 적수가 못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잡히기만 하면 요혈(要穴)이나 혈맥을 짚여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곤욕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쯤 미리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마침내 자기의 계략대로 조소접이 자기 위협에 완전히 넘어가는 것을 확인하자

속으로 쾌재를 부르짖었다.

천만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자기가 뜻하는 대로 일이 진행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음침한 사람이기도 했다.

속으로는 매우 기뻐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조금도 그런 기색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얼굴을 여전히 냉혹하게 가다듬고 눈은 더욱 사납게 치켜떴다.

그리고는 거만하게 조소접을 쏘아보며 비웃었다.

 

「이 자를 해치게 하지 않으려면 말이지‥‥‥ 흥! ‥‥」

 

  왕한상의 말은 조소접의 성질만 돋우었다. 

천용방에서 가장 계략에 뛰어난 인물인 만큼 매사에 교활했다.

 

그는 혹시 그가 제출할 조건이 너무 가혹하여 조소접이 받아들이지 않을까

미리 조심한 것이었다.

하여간 일단 말을 뚝 그치고 조소접의 반응을 세세히 살폈다.

 

조소접도 물론 영리한 소녀이긴 하였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왕한상의 노련한 책략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초조해진 조소접은 앞뒤를 분간할 겨를도 없이 황급하게 다그쳐 물었다.

 

「어떤 조건인지 말씀해 보세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거절하지 않겠어요.

어떠한 일이든지 그이만 해치지 않는다면 무조건 응해 드리겠어요.」

 

  왕한상은 그래도 못 미더운지 조소접의 표정을 훑어보고야

그녀의 말이 진정임을 알아차렸다.

속으로는 무척 기뻐하면서도 겉으로는 여전히 험악한 표정으로

느릿느릿하게 조건을 제시했다.

 

「이 사람을 놓아 주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지만 귀원비급으로 그의 생명과 바꾸어야 돼!」

 

  조소접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의 귀원비급은 이미 당신네들 천용방의 도씨라는 젊은이가 갖고

이 계곡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지 않아요.

당신도 그것을 직접 보셨지 않아요?

그런데 어떻게 나보고 귀원비급을 내놓으라는 말씀이신가요?」

 

왕한상은 더욱 오만하게 입을 놀렸다.

 

「귀원비급이 없다면 이 자를 구할 생각은 마시지.」

 

「정말이에요. 믿지 못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우리가 이 계곡으로 내려왔을 때에는

도씨라는 젊은이의 시체는 보이지도 않았어요.」

 

  왕한상은 일부러 생각하여 보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귀원비급에 기재된 무공과 이 자의 목숨과 바꾸면 어때?」

 

  순간, 조소접은 어리둥절해졌다.

 

「어떻게 바꾸죠?」

 

「지금 무술계에서 몇 사람이나 귀원비급의 무공을 터득하고 있소?」

 

  조소접이 입을 열어 대답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돌연 왕한상이 부채를 양몽환의 얼굴 앞에다 들이대고 흔들며 위협하는 것이었다.

 

「만일 한마디라도 거짓이 있다면 용서치 않을 것이니 곧이곧대로 말해!」

 

  조소접은 왕한상이 부채를 양몽환의 얼굴에 대고 흔드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거짓 없이 말하겠어요. 빨리 부채를 떼세요.」

 

  그제야 왕한상은 만족한 듯이 부채를 양몽환의 얼굴에서 떼었다.

 

「그럼, 말해봐! 거짓말 하지 말고 몇 사람이 있어?」

 

  조소접은 고개를 들고 쏘아보며 말해 주었다.

 

「내가 알고 있기는 모두 세 사람이 귀원비급에 기재된 무공을 연마했을 거예요.

그 외에는 몰라요.」

 

  왕한상은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비웃었다.

 

「세 사람만이 아닐 걸?」

 

  조소접은 황급히 다시 말문을 열었다.

 

「본래는 네 사람이었지만 그 중에서 우리 어머님은 돌아가셨으니

지금은 세 사람밖에 남지 않았어요,」

 

  왕한상은 눈도 한 번 깜짝이지 않고 조소접의 표정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오랜 강호의 생활에서 경험이 풍부한 그는 조소접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에는 힘들지 않았다.

그는 다소 만족한 얼굴로 재차 질문했다.

 

「누구 누구해서 세 사람인지 자세히 말해봐!」

 

「한 사람은 저의 아버님이고 또 한 사람은 란이 언니 그리고 나예요.」

 

  왕한상은 눈썹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너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어디 있기에 아직 내가 보지 못했단 말이냐?」

 

「저도 어디로 가셨는지,

또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당신이 어떻게 만나볼 수 있었겠어요.」

 

  왕한상은 또다시 쇠부채로 양몽환의 머리에 쓴 수건을 조금 찢으며 음침하게 웃었다.

 

「귀원비급에 기재된 무공과 이 자의 목숨을 바꾸자는 방법을 알겠어?」

 

  순간, 조소접은 왕한상이 양몽환의 머리 위의 수건을 찢을 때 놀라 몸까지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왕한상의 말에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지만 천천히 상의해요.

그렇게 그를 대한다면 나는‥‥‥」

 

  왕한상은 조소접의 애원을 비웃으며 다시 한 번 거만하게 배짱을 튕기었다.

 

「내 생각에는 이 자를 죽이든 살리든 관계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왜냐하면 귀원비급의 무공으로 이 자의 생명과 바꾸자는 나의 조건은

매우 가혹한 것이니까 말이야.」

 

  조소접은 더욱 더 그의 함정에 빠져 들어갔다.

 

「말씀해 보세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틀림없이 당신의 말을 쫓겠어요.」

 

  그러자 왕한상은 한결 더 기고만장해서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물론 할 수 있는 일이긴 하지. 그러나 하지 않으려고 할 걸.

첫째, 귀원비급에 기재된 무공을 한 자도 빼지 않고 적어 주어야 하고

둘째, 지금 이미 귀원비급의 무공을 알고 있는 다른 두 사람을 죽여 버릴 것.」

 

조소접이 놀라 부르짖었다.

 

「뭐요? 나를 보고 나의 아버님과 나의 언니를 죽이라는 거예요?」

 

  그녀가 그토록 놀라는 것을 보고 왕한상은 속으로 뜨끔했다.

 

  동시에 행여나 격분을 참지 못하고 공격해 올까봐 위협적으로 부채를 흔들어 보였다.

그 위협은 또다시 적절한 효과를 거두었다.

 

  조소접은 그만 모든 것을 단념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 말할 것 없어요.

내가 눈을 감을 터이니 나부터 죽이고 그도 죽이세요.」 .

 

  조소접은 다소곳이 눈을 감고 말았다.

 

  그러자 왕한상은 발을 굴렀다.

 

「교활한 계집 같으니라고, 내가 너의 꾀에 넘어갈 줄 아니?」

 

  조소접은 뜻하지 않은 욕설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화가 치밀어 왕한상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왕한상이 자기의 말을 오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는 자기를 죽이라고 하고는 막상 죽이려고 할 때에

역습으로 공격하려는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조소접은 그만 웃고 말았다.

 

「나에게 손을 쓰려고 하는 틈을 타서 반격할까봐 그러세요?

흥! 당신의 뺨쯤 때리려면 얼마든지 때릴 수 있어요.

그러나 차마 양상공이 죽는 참혹한 꼴을 보기 싫어서 그러지 않을 뿐이에요.」

 

왕한상은 조소접이 마가홍의 향을 때리는 것을 보았던 터라

그 말에 가슴이 섬뜩하였다.

 

그러나 조소접은 여전히 태연한 자세였다.

 

「나를 먼저 죽이라고 한 것은 당신의 조건을 이행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가 비참하게 죽는 것을 보지 않으려면 내가 먼저 죽어야 되지 않겠어요? 어서 죽이세요?」

 

  왕한상은 그녀가 태연히 하는 말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정말 애정이란 것은 저토록 마력이 있는 것일까?

애석하게도이 왕한상은 무공에만 정신을 빼앗겨

인생에 가장 귀중한 청춘 시절을 헛되게 보내고 말았구나.

모든 정열을 무공의 연마와 오행기술(五行奇術)의 연구에만 쏟아 버렸으니

애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가여운 인생이 되었구나!)

 

자신의 초라한 인생을 생각하자 불현듯 질투인지 치정(癡情)인지 모를 화가 치솟았다.

갑자기 손에 든 부채를 치켜들고 노기를 띤 음성으로 소리쳤다.

 

「네 멋대로 먼저 죽어, 이 자가 고형(苦刑)에 허덕이는 것을 안보겠다는 거야?

천만에 말씀, 그렇게는 안 될걸.

그렇다면 더 천천히 쓰라린 맛을 보여 주고야 말겠어. 어떻게 할까?

이 자의 요혈(要穴)을 짚어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과 괴로움을 주어

너에게 보여 주도록 할까?

흥! 응낙하든저 안하든지 한마디만 해! 빨리!」

 

  순간, 조소접은 두 눈을 매섭게 치뜨고 노려보았다.

번쩍이는 안광은 마치 날카로운 비수처럼 왕한상의 가슴을 서늘하게 꿰뚫었고

그녀의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귀원비급에 기재되어 있는 무공을 써 달라는 것은 응낙하겠어요.

그러나 저의 아버지와 란이 언니를 죽이라는 것은 절대로 못하겠어요.

나를 위협하지만, 흥! 솔직히 말해서 당신은 그의 혈도를 짚어서

고통을 줄만한 재간이 없을걸요,

당신이 손톱 끝만치라도 그를 건드리기만 하면 나는 당장에

당신의 오음절혈(五陰絶穴)을 짚고 말겠어요.

그렇게 되면 당신의 온 몸에 있는 삼백 육십 다섯 곳 의 관절을

으스러뜨려서 마디마디를 쪼개고 가루로 만들어 버리겠어요.

그 고통이 어떤 것인가를 당신은 확실하게 느낄 거예요.」

 

  왕한상은 한때 자기의 위협 앞에 굴복했던 조소접이 갑자기

굳세어지고 날카롭게 반격하여 올 줄은 정녕 몰랐다. 속으로 경악했다.

 

  (우선 그녀의 기염을 꺾지 않고는 도리어 내가 당하겠는걸!)

 

  왕한상은 최후의 수단을 써 보려고 하였다.

어떻게 하든지 그녀를 굴복시켜야만 했다.

 

「좋아, 그렇다면 어디 해보자!」

 

  왕한상은 쇠부채를 쳐들고 막 양몽환의 목을 치려고 하였다.

 

 

그 순간!

 

느닷없이 오른 손의 뼈마디가 저려 오면서 금방 맥을 쓸 수 없었다.

그 뿐 아니라 한 줄기의 날카로운 지풍(指風)이

그의 현기(玄氣)요혈을 노리고 질풍같이 들어왔다.

 

그와 함께 오른 팔을 쓸 수 없게 되고 더욱 영문도 알 수 없는 매서운 지풍이 날아오자

방어할 겨를도 없이 뒤로 급히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왕한상 역시 무공이 강한 자이고 지모가 뛰어난 자인만큼

그대로 물러서지는 않았다.

  양몽환을 놓치면 조소접을 위협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기의 생명마저 위태로울 것을 아는 그는 필사적으로 양몽환을 자기 쪽으로 이끌어 갔다.

 

바로 그때! 차가우면서도 청아한 음성이 들려왔다.

 

「귀원비급의 무공이 그토록 탐이 난다면 우선 나의 이성전두(移星轉斗)의 수법부터 맛보시지!」

 

하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양몽환을 움켜잡았던 왕한상은 왼쪽 손목이 잘려 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왕한상은 극도로 혼란에 빠져 버려 양몽환을 잡고 있던 손을 놓치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오른 팔의 팔꿈치가 으스러지는 듯 저리고 아파 들고 있던 쇠부채마저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양몽환을 놓치자 그토록 아프고 저려 꼼짝할 수없던 왼 팔을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자 고삐가 풀린 황소처럼 왼쪽 발굽으로 상대방을 힘껏 걷어차며 왼손으로

신뢰하격(神雷下擊)법으로 비스듬히 상대방을 위로부터 내려쳤다.

미련한 만용을 발휘한 왕한상은 찰나적인 순간을 이용하여 손과 발을 같이 사용해서

반격을 시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의 목적은 양몽환을 구하는 데만 있는 듯 하였다.

  왕한상의 현기 요혈을 노리고 찔러오던 손은 왕한상의 현기요혈에 닿을 듯 하는 찰나

갑자기 수법을 변화시켰다.

그 순간 오른쪽 손목을 움켜쥐는 동시 양몽환을 빼앗아 가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왕한상은 벌써 중상을 입고 죽어 넘어졌을 것이었다.

  왕한상은 몸부림치면서 필사적으로 왼손과 왼발을 함께 써서 상대방을 공격했다.

그 바람에 상대방은 스스로 왕한상의 오른 팔꿈치를 놓아주고는 표연히 물러나고 말았다

  왕한상은 정신이 아찔했다.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다가 겨우 몸을 바로잡고 섰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바로 눈앞에 주약란이 양몽환을 안고 서있지 않는가!

  그 틈을 노린 조소접은 버들 같은 몸을 허공으로 솟구치면서

비호같이 왕한상에게로 달려들었다.

당황한 왕한상은 황망히 왼손을 들어 강렬한 장풍을 일으키면서 반원을 그려

자기 몸을 보호하는 한편 오른손으로 최대의 비결이라는 이산점해(移山點海)법으로

자신의 온갖 공력을 한 곳에 모아 곧장 위에서 덮쳐오는 조소접에게 후려쳐 보냈다.

  이 일격이야 말로 그의 수십 년의 공력을 모은 심후한 것이었다.

그 기세는 태산이라도 무너뜨릴 것 같고 날카롭기는 철판이라도 뚫을 것만 같았다.

  조소접은 왕한상의 필사적인 맹렬한 장풍을 보자 약간 두려움을 느꼈다.

갑작스러운 돌풍과 같은 그 위력을 막아낼 자신이 서지 않았다.

그녀는 재빨리 단전에 운집시켰던 진기를 흐트러 버리고는 급히 몸을 낮추어

땅에 내려서려고 하였다.

순간 강렬한 장풍이 사정없이 불어 닥치면서 그녀의 앞가슴을 치는 바람에

그녀는 눈을 꼭 감아버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윽!」

 

  처절한 비명을 지른 사람은 조소접이 아닌 왕한상이었다.

금방 숨이 넘어가는 것 같은 비명을 지르면서 왕한상은 공중에 높이

떠 일장여 밖으로 날아가 떨어지고 말았다.

  어처구니없이 떨어지고만 그의 얼굴은 핼쑥하니

핏기를 잃고 이마에서는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사실 왕한상이 혼신의 공력을 다하여 가한 일격은 반대로

조소접의 내가반탄력(內家反彈力)에 의해 되돌아왔던 것이었다.

즉 그는 그 스스로가 내쏜 장풍이 반대로 되돌아오는 바람에

그 스스로가 당하고 만 것이었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에 내장의 기혈은 뒤집힐 듯 뒤끓고 두 팔은 부러져 나가는 듯 아프고 저려왔다.

공력이 강하다고 자부하던 그는 더 참지 못하고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제야 조소접은 감았던 눈을 뜨고 주약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화사하게 웃었다.

 

「언니, 이자를 죽여 버릴까요?」

 

  이때, 주약란은 양몽환의 짚인 혈도를 주무르고 있었다.

 

「그의 쇠부채로 죽여 버려!」

 

  간단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조소접은 왕한상의 쇠부채를 집어 들고는 천천히 왕한상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쇠부채를 왕한상의 코앞에 내밀었다.

 

「조금 전만 해도 당신은 이 부채를 마구 흔들면서 나의 간을 콩알만 하게 하였죠?

그런데 지금은 나에게 이 부채로 죽게 되었군요.」

 

  왕한상은 조소접의 상승내공(上乘內功) 반탄력에 튕긴 몸이라 진기가 흩어지고 있었다.

  조용히 몇 시간동안 정양하지 않으면 대적은 고사하고 운기(運氣) 할 수 조차 없는 처지였다.

그는 감히 항거도 못하고 앉아 죽을 수박에 없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그러나 그 역시 자부심이 강하고 냉혹한 인물이었다.

조소접의 비웃는 말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세상에 학문의 길이란 넓고도 복잡한 것이지.

성복역리 (星卜易理), 시사가부(詩詞歌賊)와 유가(懦家)의 육예(六藝)등

모든 풍류를 골고루 갖추어야 비로소 완성된 인물이라고 나설 수 있는 거야.

그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수련하지 못했다면 별로 자랑할 인물은 못되지.

네가 비록 무술의 재간이 나보다 탁월할는지 모르지만

그것 하나만 가지고 득의할 것은 없어!」

 

  조소접은 아니꼽게 여겼다.

 

「흥! 그렇다면 당신은 무공 이외의 다른 것은 모두 우리보다 월등하다고 자부하시는 건가요?」

 

왕한상의 꽉 다문 입술에 비로소 생기가 돌며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고 내가 내 입으로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내가 쓴 정력 중에 무공을 닦는데

쓴 것은 겨우 십 분지 일이나 될까? 이정도의 정력 밖에 소모시키지 않았지.

오직 나는 오행기술(五行奇術)과 팔괘하락(八卦河洛)등 신산지학(神山之學)이야 말로

나의 필생의 정력을 소모시킨 것이?지.

하! 하! 만일 믿을 수 없다면 명년 팔월천하 영웅대회때

내가 만든 오행기문진도(五行奇門陣圖)를 한번 구경해 봐.

불과 몇 그루의 푸른 대나무들과 꽃나무 그리고 돌과 황토로 이룩된 것이지만

구대 문과의 고수들이 뼈를 묻을 곳이지.

이왕한상이 비록 살아서 구대 문파의 고수들이 기진(奇障) 속에 갇혀죽는 장관을

못 보게 되었지만 구천지하에서 그들이 죽을 때 울부짖는 처절한 비명과 애원의

소리는 들을 수 있겠지!」

 

  왕한상은 고개를 치켜들고 미친 듯이 웃어 제쳤다.

득의양양한 왕한상의 얼굴에는 천하가 넓다 해도 오행신산(五行神算)에 있어서

그 누가 감히 나를 따를 수 있으랴! 하는 기개가 넘치고 있었다.

  이때, 주약란은 양몽환의 혈도를 풀고 왕한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바라보는 주약란은 미간을 찌푸리고 바라보다가 쓰디쓴 웃음을 풍겼다.

 

「오행기술(五行奇術)과 팔괘하락(八卦河洛) 등 신산지학 (神山之學)이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러죠? 지금 이 무예계에서도 그 일도(一道)에 정통한 사람이

수천 수백을 넘고 있어요.

무엇이 그렇게도 자랑스러워 미친 듯 웃고 있어요.

자랑할 것도 못되는 것을.」

  그러자 왕한상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노기를 띠웠다.

 

「누가 오행기술에 정통하단 말이야? 어디 말‥‥‥」

 

하다가 심한 내상을 입은 그는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이때, 조소접은 부채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내려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평생 동안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었다.

만일 들고 있는 부채로 내려친다면 피는 땅에 넘쳐흐를 것이었다.

그 비참한 장면을 상상만 해도 그녀로서는 가슴이 떨리는 일이었다.

아무리 독한 마음으로 눈을 감는다 해도 도저히 내려칠 수가 없었다.

 

「접매, 뭘 해!」

 

  주약란이 소리쳤다.

그 바람에 눈을 꽉 감은 조소접은 들고 있던 부채를 왕한상의 앞가슴을 겨냥한 채 높이 들었다.

 

이제 일대의 괴걸이 자기의 부채에 의하여 목숨을 잃으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때, 의식을 회복한 양몽환이 소리쳤다.

 

「죽이지 말아요!」

 

조소접은 얼른 눈을 뜨고 양몽환을 쳐다보았다.

 

조소접은 높이 들었던 쇠부채를 내렸다.

그리고는 양몽환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니? 이 사람을 살려주려는 거예요?

조금 전까지 그토록 흉악한 꼴을 당하고도 벌써 잊으셨단 말예요?

만일, 란이 언니가 때마침 오셔서 구해 주지 않았다면 나까지 죽었을 거예요.」

 

양몽환은 망연한 눈초리로 조소접을 쳐다보았다.

 

「아니, 조소저가 저 사람을 이기지 못했던가요?」

 

  반문하는 양몽환의 말에 조소접은 얼굴을 붉히면서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주약란이 다가오며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

 

「당신은 모르는 일이에요,

당신을 인질로 해서 귀원비급의 무공을 써 달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접매는

정말 당신이 그에게 해를 입을까봐 손을 미처 쓰지 못했어요,」

 

하는 말에 조소접이 급히 손을 흔들었다.

 

「언니, 그만 두세요.」

 

그래도 주약란의 이야기 소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사실 접매의 무공으로 당신을 구하려고 하였다면 틀림없이 구할 수 있었어요.

더욱이 저 왕한상은 정말 사람을 해치려고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듣고 있던 왕한상은 비웃으면서 그 말을 받아 말했다.

 

「누가 정말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해?

흥! 그녀가 일격에 성공치 못하는 순간에는 양몽환은

 내 부채에 틀림없이 죽게 되어 있었단 말이야.」

 

「사람을 죽이고도 무사히 도망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여기 계곡에 귀원비급을 찾으러 올 때에는 목숨 같은 것은 버릴 각오를 했지!」

 

  그러자 양몽환은 한걸음 나서며 주약란에게 고개를 들었다.

 

「이 분은 아미산 만불정(萬佛頂)에서 나의 목숨을 살려준 일이 있습니다.

그때 일을 생각해서라도 살려 주십시오.」

 

  그 말에 주약란은 잠깐 생각한 후에 생긋이 웃었다.

 

「오늘 귀원비급을 찾으러 계곡으로 내려온 사람은 모두 생명을 부지하고 돌아갔어요.

일률적으로 죽여 버리지 않은 이상 이 사람도 살려주지 .」

 

  조소접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럼, 우리 이제 귀원비급이나 찾을까요?」

 

  주약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벌써 와서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저기 핏자국 외에는 아무 흔적도 찾을 수 없었어.」

 

  그러자 조소접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 이 깊은 계곡에는 호랑이 같은 맹수들이 많을 거예요.

아마 도옥이라는 사람의 시체도 틀림없이 맹수들이 와서 물고 갔을 거예요.」

  

주약란은 조소접의 어이없는 말에 공감하는 듯 했다.

 

「나도 접매의 말이 맞기를 원해.

그 귀원비급 마저도 호랑이가 삼켜 버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이후에라도 귀원비급을 찾고자하는 사람들은 호랑이를 찾아가게 될 것 아니냐?

호호‥‥‥」

 

  조소접도 따라 웃으며 들고 있던 부채를 왕한상에게 던져 주었다.

 

「들었어요? 이후 귀원비급을 갖고 싶거든 호랑이를 찾아 가세요.」

 

  사실 조소접이나 주약란의 말대로 귀원비급을 가진 도옥이 절벽 밑으로 떨어져서

호랑이에게 먹혀 버렸는지, 어쨌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절벽 밑에 득실거리는 호랑이에게 먹혀 버리지 않았다면

도옥은 사람이 아닌 귀신이랄 수박에 없다.

그런데다 현옥을 타고 절벽 밑까지 내려갔다 올라온 주약란은

검붉은 피가 사방에 뿌려진 것 밖에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음도 사실이었다.

그러고 귀원비급은 사람의 뱃속이 아닌 호랑이의 뱃속에서 매장되어?

버리기를 바라는 주약란이었다.

  그리고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귀원비급을 잊어버리기나 하려는 듯이 눈을 감았다.

그러던 그녀는 공중을 향해 맑고 긴 휘파람을 불었다.

그 휘파람 소리는 계곡을 울리는 한편 하늘 멀리 바람을 타고 사라져갔다.

그러자 삽시간에 조그만 흰점이 유성과 같이 일직선을 그으며 높은 허공에서부터

그들의 머리 위로 내려왔다.

현옥이었다.

충실한 현옥은 푸드덕 날개를 치며 그들 옆에 내려 앉아 길게 고개를 빼고

주약란의 다음 지시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주약란은현옥의 목을 쓰다듬으며 조소접과 양몽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먼저 이 현옥을 타고 가세요.

귀원비급을 찾는다는 것은 단념해요.

아주 영원히 찾을 수도 없어요.

그럼 천기석부에서 만나기로해요.」

 

「알겠어요. 저도 단념하겠어요.

그럼 언니가 양상공과 함께 학을 타고 가세요.

저는 이 절벽을 오를 수 있는가 시험해 보겠어요.」

 

  이와 같이 무술계의 귀보(貴寶)인 귀원비급을

아무 미련 없이 홀가분하게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이 절벽은 미끄럽고 또 너무 높아요.

접매의 경신법 재간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오르기 힘들어요.

생사 문제를 함부로 시험하고 장난삼아 할 수는 없는 거예요.

역시 현옥을 타고 가요.」

 

「그럼 이렇게 해요.

진기만 돋우면 마치 나뭇잎처럼 몸이 가벼워요.

우리 세 사람이 같이 학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 어떻겠어요?」

 

「세 사람을 다 태우고 날을 수 있을까?

만약 공중에서 지쳐버리면 우리 세 사람은 모두 떨어져 죽을 걸‥‥‥」

 

조소접은 양몽환에게 고개를 돌리며 방긋 웃었다.

 

「현옥의 기운이 다해서 떨어진다면 그때 두 분은 나를 꼭 잡으세요.

혹시 나는 떨어지지 않을지도 몰라요,」

 

  양몽환은 두 소녀가 장난하듯 웃으면서 생사문제를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하자

자기도 불현듯 호기(豪氣)가 치솟았다. 먼저 현옥의 잔 등에 올라타면서 웃었다.

 

「어쨌든 떨어져 죽는지 죽지 않는지 시험이나 해봅시다.」

 

  주약란도 환하게 웃었다.

 

「죽음을 초개같이 여기는 호기가 있었구먼요.

그러나 당신만 떨어져 죽는다면 우리 둘은 큰 손해인데.」

 

  그러면서 학의 등에 올랐다.

 

  조소접도 뒤따라 올라탔다.

두 사람 가운데 들어앉은 조소접은 왼손으로는 주약란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양몽환의 손을 잡았다.

 

「만일 현옥이 우리 셋을 태우고 날지 못하고 떨어진다면

나는 두 분을 꼭 붙잡고 있겠어요.

그럼 세 사람이 같이 떨어져 죽을 거예요.」

 

  주약란은 조소접을 놀리듯이 빈정거렸다.

 

「나는 떨어져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으면 두 분이나 같이 죽어요.」

 

  양몽환은 두 소녀가 죽는 일에 재미있게 말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불현듯 흥취가 솟아 끌려 들어갔다

 

「아니, 주소저께서는 우리와 같이 죽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요.」

 

「호‥‥‥」

 

 

그러는 동안 현옥은 바람을 일으키며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조소접이 밑을 내려다보니 왕한상의 모습은 겨우 주먹만 하게 보이며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산과 들이 휙 휙 지나가고 바람은 상쾌했다.

세 사람을 등에 태운 거대한 백학은 천년 이상이나 묵은 영물이었다.

그러나 좁은 학의 잔등에 세 사람이 올라탔으니 제아무리 큰 백학이라 해도

서로의 몸은 꼭 끼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조소접은 재미있다는 듯이 몸을 흔들며 좋아하는 것이었다.

주약란은 내공이 정순하기도 하였거니와 마음도 굳건해서 그런대로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조소접이 흔드는 몸짓에 따라 제대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밀리는 대로 비틀거리다 보니 끄트머리까지 밀려 나가고 자칫하면 떨어질 염려마저 있었다.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 깡충거리는 조소접을 저지시킬 수도 없는 양몽환은

잔뜩 눈살만 찌푸리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모르겠네. 더 웃었다가는 내가 떨어져 박살이 나겠다. )

 

  양몽환의 난처한 입장을 눈치 챈 주약란은 거북하기는 했으나 살그머니

오른팔을 뻗쳐 양몽환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제야 양몽환은 자세를 바로 잡을 수 있었다.

  평소의 주약란은 가까이 하기가 어려웠다.

 항상 엄숙하고 단정한 몸가짐에는 쉽사리 근접하기 어려운 위엄이 풍겼을 뿐만 아니라

얼음과 같이 차고 준엄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에게서는 전혀 그런 딱딱하고 어려운 기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얼굴에는 이른 봄의 따스한 햇살과 같은 웃음이 상글거렸고 따뜻한 체온을

몸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돌변한 행동에 양몽환은 스스로도 놀랄 만치 주약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상글거리는 눈매에는 아련한 수줍음이 깃들였고 토실토실한 향에는 발그스름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꽃과 같이 아름다운 그 자태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고 그 매력은 완전히 사람의 넋을

빼앗고도 남을 만 하였다.

  양몽환도 그만 야릇한 매력에 꿈결마냥 끌려 들어가서 왼손으로 자기의 허리를 감싸 안은

주약란의 오른 손을 살며시 잡았다.

참으로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양몽환은 끓어오르는 충동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자기도 모르게 그의 손은 부드럽게 매끄러운 그녀의 탄력 있는 손을 꼭 쥐고 말았다.

  그러자 주약란은 더욱 얼굴을 붉히는 것이었다.

 

「음‥‥‥」

 

  그녀의 입에서도 어느덧 가벼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면서 사뿐히 고개를 돌리며 양몽환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 눈길은 한없이 다정했고 따스했다.

 

그러자 양몽환은 가슴이 선뜻했다.

즉시 둥실 둥실 허공에서 헤매던 정신을 붙잡아 왔다.

속으로는 무척 계면쩍었고 또 한편 자기 의 무례한 짓을 후회하기도 하였다.

그는 황망히 손을 뽑았다.

스스로도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여 얼굴을 붉히고는 묵묵히 발끝만 쳐다볼 뿐

다시 고개를 들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래도 주약란의 손길은 여전히 양몽환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그의 무례한 행동을 탓하려는 눈치는 없었다.

 

오리려 한결 더 그 손에 힘을 주어 더 편안히 감싸주는 것이었다.

 

이때,

 

영문도 모르는 조소접은 청아한 음성으로 말했다.

 

「왜 고개를 푹 수그리고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어요?

저것 좀 보세요.

우리는 곧 저 구름 속으로 들어가게 돼요.」

 

과연, 눈앞이 어두워지면서 서늘한 촉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어두운 밤의 장막이 덮어씌우듯 바로 앞에 있는 조소접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점점 뺨에 스치는 서늘한 한기와 습기가 더 짙어졌다.

그리고 삽시간에 그들의 의복은 촉촉이 젖고 말았다.

이들을 태운 현옥도 영물이어서 그런지 그들의 야릇한 심정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순박한 사랑을 감싸주기나 하려는지

짙은 구름 속만 골라서 날아가고 있는 것 같기만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제는 좀 구름 속을 헤치고 빠져 나갔으면

해도 세 사람을 태운 현옥은 구름 속에서 빠져 나갈 줄을 몰랐고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매끈한 목과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촉촉이 젖어있는 조소접은 한결 더 재미가 있는지

손뼉까지 치며 상쾌한 바람에 마음이 부푸는 듯 몸과 마음이 모두 허공에 뜬 것이

마냥 기쁜 모양이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스스로도 참을 수 없는 야릇한 흥분에 싸여 비록 구름 속이었지만

여전히 머리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약란은 그의 공력으로 어둠 속이라도 사물을 분별하는

눈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영리함이 있었다.

 희미하게나마 양몽환이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의 마음속을 짐작할 수 있었다.

  주약란은 조용히 말을 붙였다.

 

「림사매를 생각하는 모양이죠? 줄곧 고개만 숙이고 있으니‥‥」

 

  주약란은 얼토당토않은 하림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양몽환도 곧 그녀의 마음속을 짐작할 수 있었다.

조금 전의 자기의 무례한 행동에 너무 마음 쓰지 말라는 암시 같았다.

양몽환은 부끄러운 마음이 더욱 치솟았지만 한편,

그토록 자기의 심정을 알아주는 것이 고맙기도 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주약란에게 돌렸다.

희미하나마 주약란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양몽환도 스스럼없이 조용히 대답했다.

 

「만일, 림사매가 있다면 조소저와 같이 무척 기뻐할 겁니다.」

 

  조소접은 그때까지도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떠가는 구름을 잡을 듯이

팔을 벌리고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양몽환의 말을 들었는지 그녀는 휘젓던 팔을 멈추고

어른스럽게 말하는 것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떠한 방법과 수단을 써서라도 심소저가 돌아오도록 하겠어요.

란이 언니의 이 현옥은 천리 길도 한나절이면 나니까 문제없어요.

그녀가 이 세상에만 있다면 땅 끝까지라도 가서 찾아 드리겠어요.」

 

  양몽환은 순간 하림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 몹시 후회되었다.

자기로서는 어색한 그 순간을 메우느라고 아무 뜻 없이 불쪽 끄집어 낸 말이었으나

결국은 서로의 명랑하던 기분을 깨뜨리고 말았다.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조소접의 즐거운 웃음소리는 간 곳 없고

침울한 표정만이 쓸쓸히 감돌았다.

자연 세 사람은 무거운 침묵에 싸여 제각기서로의 생각에 파묻혀 침울했다.

 

이윽고 습기 차고 어둠침침하던 주위가 햇빛에 눈이 부시도록 밝아졌다.

백학인 현옥은 안개 속 같던 구름을 벗어나 창공을 시원히 날아가고 있었다.

눈 아래 펼쳐지는 지상의 모든 것을 한 눈으로 바라보는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상쾌했다.

 

한편, 조소접도 우울한 생각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가 시원한 푸른 하늘을 바라보자

서서히 마음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번지고 찌푸렸던 양 미간도 곱게 풀려 있었다.

 

그러자 현옥은 고개를 빼며 마치 환성이라도 지르듯 길게 울었다.

곧이어 허공에서 쏜살같이 내려가는 가 했을 때는 어느새 땅에 사뿐히 내려앉는 것이었다.

 

그곳은 바로 천기석부 근처에 있는 종운암(聳雲巖) 아래였다.

 

 먼저 주약란이 학의 등에서 뛰어 내리며 소리쳤다.

 

「내려와요」

 

잠시 쉬었다가 할 일을 생각해요.」

 

하고 말하는 주약란도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 뒤를 조소접이 가볍게 뛰어 내렸다.

 

「학의 등에서 정말 떨어졌으면 아마 지금쯤 모두 귀신이 되고 말았겠죠?‥‥‥

차라리. 그렇게라도 되었으면 좋을 뻔 했어요.」

 

주약란은 어처구니없는 듯이 ?바라보았다.

 

「원일이야? 죽을 생각만 하고?」

 

그러자 조소접은 외면하는 것이었고 그러한 그녀의 고운 뺨에는

두 줄기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나는군요.

만일 내가 죽어 귀신이 되었더라면 당장 어머님과 같이 있게 될 것인데‥‥‥」

 

  주약란은 그녀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주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아. 이 언니가 부족하지만 춰(翠) 이모님 대신이 되어 줄께.

그리고 언제든지 내가 살아있는 한, 영원히 너의 옆을 떠나지 않으마.」

 

  조소접을 위로하는 주약란도 웬일인지 쓸쓸한 비감이 들어 마음이 무거워지고

까닭 없는 슬픔이 밀물처럼 그녀를 휩싸는 것이었다.

 

조소접을 위로하려던 주약란도 그만 눈물을 글썽거리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양몽환도 침울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 깔고 우뚝 서있었다.

괴로운 것인지 쓸쓸한 것인지 뭐라고 선뜻 말하기 어려운 착잡한 심정이었다.

그러던 그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향해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서로 손을 잡고 설음을 옮기던 주약란과 조소접은 양몽환의

한숨쉬는 소리를 듣고 곧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양몽환은 여전히 우뚝 서서 허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조소접과 주약란은 말없이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윽고 양몽환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거려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조소접은 가만히 주약란의 손을 놓고 천천히 양몽환에게 되돌아갔다.

 

「란이 언니와 저의 이야기에 왜 양상공이 한숨을 쉬세요?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공연히 쓸데없는 말을 한 제가 양상공의

비위를 거슬렸다면 용서해 주세요.」

 

그러자 정신을 퍼뜩 차린 양몽환은 조소접의 말뜻을 미처 이해하지 못하고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저‥‥‥ 실은 그런게 아니라‥‥‥저‥‥‥」

 

막상 대답하자니 막연한 일이었다.

 

그는 스스로의 지나간 일들을 무심히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최근에 사문(師門)에서 쫓겨난 일이라든가,

하림과 이요홍을 곰곰이 생각하던 중이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굳이 말해 달라는 것은 아녜요.

여하튼 란이 언니와 저는 결코 양상공을 괴롭게 해드리지는 않겠어요.

걱정 말고 편히 쉬어요.」

 

양몽환은 무슨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말하면 할수록 더 복잡하여 질것을 생각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양몽환은 쓸쓸히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세 사람이 천기석부에 도달하자 팽수위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주약란은 양몽환과 조소접을 안내하여 곧장 자기 거실로 들어갔다.

 

조소접은 양몽환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다정한 웃음을 보였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양몽환은 그녀의 감정이 쉴 사이 없이 자주 변하는 것에 은근히 놀라고 있었다.

민강(泯江) 배 속에서 만날 때와는 전연 딴 사람 같았다.

이제는 나이도 들고 경험도 풍부한 탓인지 때로는 깜짝 놀라도록 어른스러운 것이

많이 성숙한 것 같았다.

 

그렇게 되자 서로 행동이 어려워졌고 몸가짐에도 신경이 쓰여 지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말씀이시오?」

 

「아니, 그저 하는 말이에요.

불쾌한 빛을 띄우지 마시고 화도내지 마세요.

제가 특별히 두 분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드리겠어요.」

 

하고는 그길로 몸을 돌려 밖으로 뛰어 나갔다.

조소접이 사라지자 주약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 대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접매가 여러모로 많이 변했어요.

이제 그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어요.」

 

「그렇군요. 하기야 오늘만 하더라도

그녀는 성격이 예전에 비해서 판이하게 달라졌더군요.」

 

주약란도 가볍게 한숨을 쉬며 끄덕이었다.

 

「너무 빨리 변하는 것이 저도 상상 밖이에요.

될 수 있으면 이후부터는 그녀에게 좀 다정하게 대해 주세요.

그녀에게 좀 마음을 주어야‥‥‥」

 

  양몽환은 놀라면서 미처 주약란의 다음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가로 막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게‥‥‥」

 

「너무 놀랄 것은 없어요. 아직 제 이야기도 끝나지 않았는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겠어요.

그러나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미안합니다. 제가 잘못 생각한 모양이군요.

주소저와는 너무도 가깝게 지낸 탓인지 그만‥‥‥

이제 저도 버릇이 된 모양 ‥‥‥」

 

양몽환은 얼굴을 붉히면서 말을 맺지 못했다.

 

그러자 주약란도 얼굴을 붉혔다.

 

「조금 전 학의 등에 탔을 때 말이군요. 그래서 미안하다는 뜻인가요?」

 

「널리 용서하십시오.

무슨 심사로 감히 그런 실례를 저질렀는지 지금 생각해도 모를 일입니다.」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마음에 두지 말아요.

사실 우리들은 이미 살과 살을 맞댄 사이에요.

여자로서 부덕(婦德)을 따진다면 이제 나는 오로지 당신 아니면 시집도 가지 못할 몸이에요.

그렇다고 내가 꼭 당신과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에요.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꼭 결혼해야만 행복하리라고는 믿지 않아요.

앞으로도 저는 지금처럼 오직 순수한 애정만으로 만족하고 조용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할 거예요.

물론 앞으로의 일은 두고 봐야 알겠지만‥‥‥」

 

주약란의 차분한 고백을 듣는 양몽환의 심정은 편안할 수가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당신의 고마운 마음씨에 탄복할 뿐입니다.

그토록 저를 도와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당신의‥‥‥」

 

하는데 주약란은 손을 저으며 그의 말을 막았다.

 

「그만, 그만 하세요.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실제로 행할 수 있는지 더 두고 봐야 할 거예요.

그러나 저는 힘껏 해 보는 수박에 없어요. 더 말하지 말아요.

그런데 접매의 일은 퍽 걱정되는군요.

어릴 때부터 깊은 산 속에서 자랐고 그때까지 취이모님과 네

시녀 이외에는 거의 접촉하며 본 사람이 없지 않아요?

때문에 맨 처음은 나도 림매와 같이 천진난만하고 순진 하다고만 생각했어요.

그러나 한동안 같이 지내보니 접매의 성격은 림매와는 전혀 다르더군요.

림매의 성격은 타고 날 때부터 선량하고 단순한 거예요.

당신에게 대한 애정만 하더라도 깊고 두터운 것이더군요.

당신과 함께라면 무슨 일이라도 만족해하고 한 평생을 불평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양몽환은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사실, 그녀는 너무 숭고하고 천사 같아서 나 같은 사람은 자격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여러 가지 과실을 범했지만 그것이 당신의 과오만은 아니에요.

제가 말씀드린 것과 같이 도옥이만 하더라도 교활하고 간사한 인물이에요.

그런 사람과 친히 지내면 부득불 끌려 들어가서 화를 당하고 마는 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고집을 피우고 듣지 않았죠?

그렇다고 바로 말씀드리면 오해를 살 것 같고 해서 옆에서

그의 본색을 드러내도록 할 수밖에 없었어요.

오늘 비로소 말하지만 림매는 하마터면 순결성을 그 도옥에게 짓밟힐 뻔 했어요.」

 

양몽환은 펄쩍 뛰다시피 놀랐다.

 

「아니? 정말인가요?」

 

「당황할 것 없어요. 지금 림매는 여전히 순결한 몸이에요.

그녀와 같이 선량한 사람이 만일 평생에 씻지 못할 유감지사를 당하게 되면

그것은 정말 하늘도 무심치 않을 거예요.

그러나 마침 도옥이 음흉한 행동을 하려고 할 때 제가 달려가

투골타맥(透骨打脈)의 수법으로 도옥의 경맥(經脈)을 상하게 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어요.

그 수법은 매우 잔인한 것이에요. 틀림없이 죽게 될 것이라고 나도 생각하였어요.

그러나 뜻밖에도 몸을 회복하고 오히려 무공까지 정진되어 있더군요.

그 수법은 놀랍도록 기이하였어요,

제 생각으로는 아미태산(阿彌泰山)의 삼음신니 일파의 무공과 비슷했어요.

그간에 그의 행동은 잘 몰라도 틀림없이 어떤 기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음침한데다가 수단이 악독하여 만일 아직 살아 있다면

장래 커다란 화를 무술계에 끼치고 말 인물이에요.」

 

「천길 절벽 아래로 떨어져 갔는데 모르긴 해도 결코 살아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확신해요. 절벽으로 떨어진 것도 스스로 뛰어든 것이에요,

무공에 극히 조예가 깊은 사람은 운기(運氣)하여 떨어지는 속도를 늦출 수 있어요.

그때 그는 이미 내가 꼭 죽이고 말겠다는 결의를 눈치 채고

스스로 절벽 아래로 뛰어든 것이죠.

그래야만 백의 하나라도 다시 살아날 희망이 있었을 거예요.

또 다행히 절벽에 소나무 뿌리 같은 것에 매달릴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것만 잡으면 죽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나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계곡에 있는 핏자국이 어떻게 되어

그 곳에 얼룩져 있었는가 하는 점이에요.」

 

  그녀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는 다시 이었다.

「이런 일은 더 말해 봐도 별 수 없어요.

아직도 그의 생사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 조사해 볼 시간은 많으니까,

그보다 지금 당장 긴요한 것은 역시 접매의 일이에요.

만일 당신이 접매를 소홀히 대해서 비참한 결과라도 초래 한다면

 아마 당신이 상상할 수 없는 결과가 오고 말거에요.

더욱 당신과 림매가 액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생이별 할지도 모르며

현재의 무술계에서도 천지가 뒤끓는 소동이 일어날 거예요.」

 

「그럼 어떻게 처신해야 되겠습니까?

지금으로는 그녀의 무공에 견줄만한 자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당신 이외는 조소저를 다룰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당신이잘 타이르는 수밖에 더 있겠어요?」

 

「사실 우습지만 여자들이 어떤지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무슨 일이든지 타이르면 듣지만 일이 애정에 관한 것이라면 절대로 양보하려고 하지 않아요.

총명한 여인일수록 더욱 다루기가 힘들어요.

그들은 쉽게 아무나 사랑하지도 않지만 일단 애정을 품기 시작하면

쉽사리 단념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충고도 듣지 않아요.

접매와 심소저는 극단적으로 판이한 성격의 소유자 입니다.

심소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은 못하는 성미예요.

만일 당신이 심소저를 버린다면 상사병으로 혼자 않다가 세상을 하직하고 말 여자예요.

누구를 원망하며 저주한다거나 보복하려고 이를 악무는 여자는 되지 못해요.

다만 자기의 서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죽어갈 거예요.

그러나 접매는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선한 여자가 될 수도 있고 악한 여자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이에요.

만일당신에게 정말 참된 애정을 품기 시작하였다면

나의 사부님이나 취이모님이 살아서 말린다 해도 듣지 않을 거예요.

내가 정면으로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면 도리어 그녀의 시기심만을 기르게 될 거에요.

그나마 나를 오해하게 되면 나로서는 그 오해를 풀어 줄 재간도 없고요.

그만큼 접매는 성미가 강해요.

그녀는 총명한데 총명한 사람은 흔히 자기의 총명에 넘어가게 마련입니다.

자칫해서 발걸음 한 번 잘못 디디게 되면 반드시 큰 화를 일으키고야 말거에요.

비록 도옥이는 간사하기 비할 바 없고 교활하고 흉악한 자이긴 하지만

수단이나 지모 혹은 임기웅변으로 대처하는 지략이라도 접매에게는 당하지 못해요.

더구나 근래에 접매는 무척 변했어요.

새장에 갇혀서만 살던 새가 밖에 놓여  나와 자유분방하게 날아다니는 것과 같아요.

물론 그 심정을 깊이 이해는 해주어야 하지만서도.」

 

「그렇다면 제가 지금 이곳을 떠나 다시 그녀와 만나지 않으면

그러한 시시비비는 없을 것이 아닙니까?」

 

「하늘과 땅 끝이 닿는 곳이라도 당신이 숨을 곳은 없어요.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상 그녀는 당신을 찾아내고야 말거에요.」

 

양몽환은 그만 처량하게 웃고 말았다.

 

「그렇다면 별 방법이 없는 첫 같군요.

오직 마지막 남은 한 가지 수단이 있지만‥‥‥‥

그 방법이라도 취하는 수밖엔 없군요.」

 

「무슨 방법인데요? 그것이 어떠한 방법인지 말씀해 보세요.」

 

「정말 그녀가 나에게 애정을 갖고 있다면 죽음으로 해결하는 수박에 없는 거죠.

이미 과오는 범한 몸이라 죽어도 미련이라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약란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좋군요. 겨우 생각한 것이 그것뿐이에요?

정녕 이를 데 없이 희한한 방법이네요. 감복했어요.」

 

양몽환은 머리를 긁적대며 쑥스러워 했다.

 

「사실입니다.

죽어서 해결될 수 있다면 죽어 버리겠습니다.」

 

그러자 주약란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사내대장부가 어찌 그렇게도 자기 자신을 가볍게 여기시죠?

말끝마다 죽는다니 구천지하에 있는 양씨 가문의 조상들에게 부끄럽지 않으세요?」

 

이 말은 실로 엄중한 꾸지람이었다.

 

양몽환은 그만 얼굴이 붉어지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주약란은 자기의 말이 너무 지나쳤다고 곧 뉘우쳤다.

그리고는 양몽환에게로 다가갔다.

 

「당신만 죽어 버리면 모든 일이 당신 뜻대로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하세요?

하기야 당신이 죽는다면 당장 눈앞의 괴로움은 안 보게 될 수는 있겠죠.

그러나 더없는 고통을 천진난만한 림매와 팔 병신이 된 이요홍이

겪어야 될 것을 생각해 보셨나요?

자신도 두 여인의 가슴에 상처를 입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 여자들은 어떻게 하겠어요?

앞으로 당신은 반드시 따뜻한 애정으로

그녀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기껏 한다는 말이 죽겠다는 것이니

그렇게 심지가 약하면 되겠어요?

저는 저의 온 .재간을 다해서라도 이 일이 성사되도록 당신을 도와 드리겠어 요!」

  

양몽환은 멍한 눈초리로 주약란을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하자 주약란은 다시 양몽환의 말문을 앞질러 막았다.

 

「내가 어쨌다는 거예요?

나도 사람이지 목석은 아니에요.

따라서 감정이 없을 리가 있어요?

단지 저는 당신을 지성껏 도와서 당신의 이름을 온 천하에 알려주고 싶을 따름이에요.

또한 일대의 무학종사(武學宗師)가 되어 수천만의 강호 고수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도록 해주고 싶어요.

당신이 그렇게만 되어 준다면 나로서는 아무 여한도 없이 평생을 만족하고 살겠어요.

제 뜻을 알겠죠?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반드시 저의 말을 들어야만 그렇게 될 수 있어요.」

 

「그렇게까지 아껴 주시는데 분부를 듣지 않는다면 정말‥‥‥」

 

「맹세까지 할 것은 없어요.

제가 당신에게 요구하려는 조건은 우선 접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거예요.

그녀는 지금 겨우 애정에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말하자면 막 피어나려는 꽃봉오리 같은 시기에요.

이때는 가장 예민하고 반응이 빠를 때에요.

더욱이 십여 년 간 깊은 산속에서만 살았고

사람과의 내왕이 없는 생활을 한 그녀로서는 더 할 거예요.

그녀는 이상하도록 온갖 사물에 호기심을 강하게 갖기 시작했어요.

고삐가 풀린 송아지처럼 자유분방하고 그늘을 싫어하는 해바라기와 같아서

그녀의 감정을 스스로도 억제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그녀에게 자극을 줄 수밖에 없어요.

자그마한 자극이라도 그녀에게는 말할 수 없이 강렬한 반응을 일으키게 할 거예요.

그녀를 상대할 때에는 반드시 차근차근하게 세심한 주의를 갖고 대해 주어야 해요.

그래야만 여성으로서의 온화하고 고요한 성격을 길러 줄 수 있어요.

어린 아기 다루듯 해야겠죠.

앞으로 당신과 그녀는 상당한 기간 동안 같이 이곳에 기거하게 될 거예요.

이 기간 중에 그녀는 당신에게 무공을 가르치게 돼요.

그렇게 매일같이 접촉하게 되면 자연 그녀는 당신에게 정이 들게 될 것은 분명해요.

이때 당신이 조금이라도 부당하게 그녀를 대하면 당신은

즉각 비참한 재앙의 불씨를 심게 되는 거예요.

그녀로 하여금 혼자 함부로 강호에 날뛰며 자위(雌威)를 발휘하게 해서

평지풍파를 일으키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애정의 실로서

그녀를 꽁꽁 묶어 두는 것이 나을 거예요.

단지 당신만 세 여자를 거느리는 것을 원하기만 한다면

그녀는 천리(天理)에 어긋난 행동은 안할 거예요.」

 

양몽환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놀랐다.

 

「아니, 그것은 무슨 말씀인가요?」

 

주약란은 또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의 당신은 평분춘색(平分春色)이라 벌써 두 여자가 따르고 있지 않아요?

림매는 앞으로 당신 없이 살지 못할 여자에요,

그만큼 당신만을 깊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에게 버림을 받는다면 그녀의 앞날은 생각할 수도 없이 처참하게 될 거예요.

그래도 당신은 그 여자를 버릴 수 있겠어요?

천만에 말씀이겠죠.

또 한편 이요홍은 당신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 몸까지 버렸지 않아요?

여인으로서 목숨보다 더 중한 순결도 돌보지 않았어요.

심지어 오대 문파의 고수들이 모인 가운데서 당신의 누명까지 벗겨 주었지 않아요?

그 애정이야 말로 얼마나 헌신적이며 고결한 것이에요?

지금은 그나마 불구자가 되었으니 도의로 보나 감정으로 보나

그녀를 버릴 수 없는 것이 아니겠어요?」

 

양몽환도 그 말에는 솔직히 시인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따지고 생각하면 양몽환으로서도 막막한 일이었다.

 

「그럼 어떻게 처리하라는 말씀이죠?」

 

「저는 벌써부터 당신의 천성이 심후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두 여자를 거느린다는 것은 다른 남자들은 영광으로 생각할지 몰라요.

그러나 당신은 오히려 그러기를 두려워하고 수치로 여기면서

진실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사태가 이렇게 되었으니

당신은 부득이 양자택일을 할 수 없는 막다른 처지에 놓였어요.

림매만 해도 흉금이 활달해서 옹졸한 여자처럼 질투를 한다거나

사랑싸움은 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처첩을 넷 다섯 거느린다 해도 기뻐했으면

기뻐했지 불만스럽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란 말예요.

모르죠.‥‥‥

혹시 제가 어릴 때 대궐 내에서 남녀간의 불공평한 처사를 보아 와서

잘못 판단한 것인지도. 저는 남녀간의 애정 문제에 비교적 아둔하니까요.

어쩌면 저는 항상 남자들을 동정하고 두둔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양몽환은 그만 자기 자신의 처지에 환멸을 느꼈다.

 

「이야기가 이상한 곳으로 흘러가는군요.

이제 그만 둡시다.

결국 당신은 모든 것을 초월하고 외면하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당신이 오직 고결한 우정만으로 저를 상대하신다면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도 어느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오직 변함없는 우정으로만 살겠습니다.」

 

주약란은 고개를 가로 흔들며 쓸쓸히 웃었다.

 

「당신이 무슨 말씀을 하시던 이 주약란만은 당신의 고귀한 뜻을 받을 수가 없군요.

원하건대 당신은 소녀의 뜻을 저버리지 마소서‥‥‥ 호호‥‥‥」

 

갑자기 화사하게 웃는 바람에 양몽환도 미소를 띠웠다.

 

「오늘은 참으로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군요.」

 

「근심할 것 없어요. 접매의 문제에 관해서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어요.

그 방법대로만 한다면 이분(二分)의 천하로 귀착되고 복잡한 삼국정립(三國鼎立)의

숙연은 되지 않을 거예요.」

 

양몽환은 잠시 심각해졌다.

 

「나로서도 이요홍이나 심사매는 어떻게 처리할 수 있겠습니다만

조소저에 대해서는 심히 난처하기도 하려니와 서로 상면하기조차 거북합니다.

그런데 좋은 방도를 가르쳐 준다니 우선 감사의 인사부터 드리겠습니다.」

 

양몽환은 일어나서 정말 주약란에게 허리들 구부리고 읍했다.

 

그러자 주약란도 마주 허리를 굽히며 절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는 그녀는 더욱 정이 쏠리는 눈빛이었다.

 

「과연 당신은 예의바른 사람이군요.

군자와 같이 당당한 풍채에 풍류도 있구요.

그래서 더욱 사량을 끄는 보양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녀들이 모두 당신에게 마음을

홀랑 빼앗긴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군요.

그러나 그러한 태도를 고치지 않으면 이후에도

여난은 그칠 새가 없을 거예요.

근신해야겠어요. 호호‥‥‥」

 

그러자 양몽환은 이상스럽게도 자기를 위하여 위협을 무릅쓰고

설삼과(雪參菓)를 구해주던 옥소선자(玉蕭仙子)가 생각나는 것이었다.

 

주약란은 다소곳하게 생각에 파묻혀 있는 양몽환의 옆얼굴을 바라보자

자기도 모르게 황홀해지고 잔잔했던 가슴이 설레기까지 했다.

그녀는 스스로도 놀라면서 가슴을 파고드는 환상을 털어 버리기라도 하듯이 활짝 웃었다.

 

「뭘 생각하고 계세요?」

 

양몽환은 황망히 정신을 가다듬고는 주약란을 어색하게 쳐다보았다.

 

그러자 주약란은 엄숙한 얼굴을 지었다.

 

「-당신이 접매와 함께 있을 때는 첫째, 자상하고 따뜻하게 그녀를 대하여 주어야 해요.

그녀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라고

생각하도록 이끌어야 해요.」

 

양몽환은 펄쩍 뛰었다.

 

「제가 그렇게 한다면 오히려 더 복잡해지지 않을까요?」

 

「저도 곰곰이 생각해 보고 말하는 거예요.

그녀의 두뇌는 보통사람과는 아주 달라요.

총명과 재지(才智)도 다른 사람과 비할 수없이 출중해요.

그렇기 때문에 더욱 다루기가 힘이 들 거예요.

그녀는 자기가 결심한 일이면 못하는 일이 이 세상에 없어요.

단지 하지 않거나 혹은 단념할 뿐이죠.

당신은 접매의 이 모든 점을 충분히 알아야 해요.

이런 점을 명심해서 당신이 그녀를 감싸주고 자상하게 돌보아 주면

오히려 그녀는 당신의 진의(眞意)를 깨닫고 진심으로 따를 거예요.

그래야만 애정은 순환되고 서로 믿음으로서 숭고한 우정으로 발전된다는 말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무척 신경을 써야 해요.

애정과 우정은 극히 미묘한 것이어서 불과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해요.

손톱만한 실수가 있어도 그 결과는 뒤집히고 말아요.

당신의 몸가짐은 항상 그녀의 심정을 살펴야 하고 자상하게 위로해 주면서도

 쉽사리 범하지 못할 품위를 지켜야 해요.

어떤 경우 아닌 사사로운 감정을 밖으로 나타내지 말아야 할 것은 물론,

실수했어도 선정적인 태도는 절대 보여서는 큰 일이예요.

과연 양상공이 이 어려운 일들을 감히 할 수 있을는지 의심스럽군요.

양상공자신이 꽃과 같이 어여쁘고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자색에다

당신에게 은근한 정을 붙는 처녀와 매일 같이 함께 있으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양몽환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자신 있습니다. 물론 상당한 고통이 따르겠죠.

그러나 철석같이 굳은 각오를 하고 일을 처리 한다면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겠죠!」

 

「그토록 굳은 결심만 있으면 돼요. 당신이 한 번 각오하면 못 할일이 있겠어요?

그 결심 변하지 마세요. 기회 있는 대로 도우면 일은 성공될 희망이 있어요.」

 

주약란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접매가 곧 올 것이에요.

우리가 먼저 가서 그녀의 음식 솜씨를 구경해요.」

 

양몽환도 주약란을 따라 일어났다.

조소접은 어깨에 걸치고 다니면 남사로 허리를 동이고는

한 손에 냄비를 들고 한참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네 백의의 시녀는 옆에서 구경하고 있었고 팽수위는 불을 피우고 있었다.

 

주약란이 가만가만 다가갔다.

 

「뭘 이다지 분주하게 수고를 하시나? 이제 그만하고 좀 쉬지, 나도 좀 할까?」

 

「환영이에요. 언니가 맛있는 음식을 좀 만들어요.

맛있게 만들어서 술도 좀 마셔 보게요.」

 

「어머나? 술까지? 백화곡(百花谷)에 있을 때 술을 마셔 보았어?」

 

  조소접은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며 예쁘게 웃었다.

 

「아직까지 술을 마셔본 일은 없어요.

도대체 단 것인지 쓴 것인지 맛도 모르는데요.

그래서 한 번 마셔 보려고요.」

 

  그러자 양몽환이 선뜻 조소접의 말을 이어 받았다.

 

「술맛이란 달지 않고 조금 씁니다.

그러나 한번 맛을 들이면 끊지 못하니 처음부터 마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술이 들어가면 모든 괴로움이 눈물이 되어 흐른다는군요.

오늘 술 좀 마시고 실컷 울기나 했으면 좋겠어요.」

 

  양몽환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무슨 괴로움이 있어서 술로 달래려고 하시오?

술로 수심을 달랜다지만 마시면 마실수록 괴로워지는 것이 또 술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아예 마시지 않는 것이 좋겠는데‥‥‥」

 

조소접은 여느 때와 달리 양몽환이 자기에게 친절히 대하여 주는 것에 은근히 놀라워하였다.

갑자기 달라진 양몽환의 태도에 그녀는 미처 어떻게 대답했으면 좋을지

갈피도 잡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더욱 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섰다.

그리고는 화제를 돌렸다.

 

「저에게 귀원비급의 무공을 전수하여 준다고 하였는데

지금도 그것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제가 한 말은 항상 책임지고 있어요.

오히려 양상공이 전심전력으로 배우지 않을까 걱정이에요.」

 

「모처럼 하늘이 내려준 좋은?기회를 놓치지는 않겠습니다.

귀원비급의 무공은 절세의 무공인데 전심전력으로 배우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조소접은 주약란을 잠시 바라보고는 뜻있게 웃어 보였다.

 

「상승내공(上乘內功)의 수련에 있어서 가장 주의할 것은 정신을 통일하는 일이에요.

만일 진심으로 전념하지 않으면 수련에 성공하기 전에 마(廳)가 들 위험마저 있어요.

입으로는 전념한다지만 막상 수련하는 도중에 다른 여자를 생각하게 된다면

정신이 흐트러지고 말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진기는 생각지도 못했던 곳으로 흘러들어가 응고되어 상처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마가 들면 큰 화를 입게 되는데 그래도 좋아요?」

 

  양몽환은 얼굴을 붉혔으나 곧 침착하게 대답했다.

 

「조소저께서 지키고 있다면 마가 드는 위험이 있어도 겁나지 않습니다.」

 

   조소접은 양몽환의 표정에 얼굴을 붉혔다.

천만 뜻밖에도 양몽환의 태도는 이상하리만큼 자기를 아껴주는 따뜻함이 깃들어 있었다.

예전의 쌀쌀하고 냉정하던 그림자는 씻은 듯이 없어지고 어디까지나

예의를 지키고 경건하면서도 따스한 표정이었다. 그것은 뿌듯한 사랑이었다.

 

조소접은 기쁘면서도 한편 당황한 듯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럼 됐어요.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해서 힘껏 가르쳐 드리겠어요.

그 대신 고집피우시면 안돼요.」

 

  양몽환은 더욱 정중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저에게 무공을 전수할 때에는 스승과 같이 받들겠습니다.

 어떠한 분부라도 복종‥‥‥」

 

  양몽환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것은 네 명의 시녀와 팽수위의 눈동자가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기 때 문이었다.

속으로 당황한 양몽환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표정을 굳혔다.

  평소에는 한낱 여자로만 알고 지내던 조소접을 스승 대우로

깍듯이 예를 갖춘다는 것이 쑥스럽고 어색하기만 했다.

  이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주약란도 그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양몽환의 어색한 기미를 알아채고는 화제를 돌렸다.

 

「그만하고 맛있는 음식이 준비 되었으니 음식 솜씨가 어떤가 봐요.」

 

하고는 조소접을 앞장세우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양몽환이 따르고 네 명의 시녀와 팽수위가 따랐다.

그리하여 진수성찬을 마주하고 둘러앉았다.

  이튿날부터 양몽환은 조소접에게서 무공을 전수 받으며

조소접에 대한 관심과 정을 보여 주었다.

또한 하림에 대하여서는 절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시일이 흘러감에 따라 양몽환은 조소접의 상세한 지도를 받는 대로

귀원비급에 기재된 각종 무공의 요결을 외울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온 종일 함께 있으면서 가르치고 배우며 한결같이 세심한 주의와 노력을 다하였다.

그 결과 삼개월이라는 세월에 양몽환은 귀원비급의 전문(全文)을 외울 수 있었던 것이었다.

 

주약란은 가금 그들 두 사람이 있는 방에 들어와 조소접이

원문을 해석하는 것을 듣기도 하고 본래 그녀가 간직한 내공에 부합시켜

무공을 닦기도 하였다.

그 결과로 얻은 수확은 양몽환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양몽환이 내공의 수련을 끝내자 조소접이 눈살을 찌푸리고

우울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이었다.

 

순간,

 

양몽환은 전에 없이 우울한 표정에 저억이 놀랐다.

 

「왜, 무슨 근심이라도?」

 

  그러나 조소접은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부터 정식으로 갖가지 수법을 배워야 하겠어요.

그러자면 많은 정묘한 수법이 반드시

경순된 내공을 바탕으로 배합하여 응용되어야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제 남은 시일이라고는 기껏해야 육칠 개월뿐이에요.

각종 수법의 요결은 이미 터득하였지만

이 짧은 시일로는 내공의 진도로 보아 제대로 배합하여 사용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비록 기묘한 수법을 지닌다 해도 그 바탕이 알아서 크게 발휘할 수 없을 것 같군요.

만일 공력이 심후한 사람과 대적하게 되면 적을 제압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어쩌면 상대방의 강경한 내가반탄력에 상처입기가 쉬워요.

그래서 불현듯 생각이 여기에 미치게 되면 걱정이 돼요.

제가 무공을 전수코자 하는 것은 당신을 도우려고 하는 것인데

도리어 해를 끼치게 되면 더없이 커다란 죄인이 되지 않겠어요?」

 

그러나 양몽환은 별로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내공이란 것은 반드시 정신적으로 일정한 순서에 따라 진행시켜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일시에 이를 수 없는 것이 아니라면 걱정해도 소용없는 일이죠.」

 

조소접은 살며시 양몽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왜 제 몸이 허공에 둥둥 떠서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는지 이유를 아세요?」

 

「그것은 대반약현공(大般若玄功)이라는 묘기를 단련하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렇지 않은가요?」

 

  조소접은 가만히 얼굴을 들며 생긋이 웃었다.

 

「절반 밖에 맞추지 못했군요.

대반약현공을 단련하여 숙련된 경지에까지 도달하면 그럴 수도 있긴 하겠죠.

그러나 실제로는 삼십년이란 긴 세월을 두고 단련해야 되는 거예요.

그렇지만 저는 아직 스무 살도 안 되었거든요.」

 

양몽환은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짚으며 이상하다는 듯이 눈을 껌벅거렸다.

 

「그럼 조소저께서 이십세가 넘으면 굉장하겠군요.

그러나 이십세도 안 되었는데 어떻게 배웠습니까?」

 

조소접은 곱게 눈을 흘겼다.

 

「놀랄 것은 못돼요. 천천히 가르쳐 드릴게요. 신비한 이야기예요.」

 

  양몽환은 더욱 눈을 크게 떴다.

 

「들려주십시오. 그리고 저에게도 가르쳐 주십시오.」

 

  이 몇 개월 동안 서로 함께 지내면서 조소접은 양몽환에 대한

애정이 쇠라도 녹일 듯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양몽환은 시종 일정한 한계선을 그었다.

 단지 오빠와 같은 태도로 그녀를 자상하게 대하여 주고

귀여워 해주는 태도를 견지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