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비연경룡

제 43 장 견물생심(見物生心) <鶴來天外>

오늘의 쉼터 2014. 6. 22. 14:55

제 43 장 견물생심(見物生心) <鶴來天外>

 

 

양몽환은 자기가 축출 당한 것이 오히려 잘 되었다는 말에 잠시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주소저는 고의로 소생의 장문사숙(掌門師叔)과 언쟁을 벌려 저에게 화를 입게

한 것입니까?」

 

설마 그러랴 싶었지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양몽환은 순간, 그녀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는 양몽환의 얼굴도 잠시 굳어졌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곧 평상시의 웃는 얼굴로 되돌아가 담담하게 말하는 것 이 있다.

 

「그런 것은 아니에요.

당신의 사숙과의 언쟁은 아주 우연하게 일어난 것이에요.

무슨 별다른 원한이나 악의가 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결국 그 언쟁으로 서로 감정이 사나와진 것은 사실이었어요.

그때 저의 생각으로는 당신이 문하에서 꼭 축출당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더군요.」

 

  그러면서 주약란은 아무 거리낌 없이 밝은 웃음을 띠우는 것이었다.

 

「사문(師門)에서 계율을 범하고 축출 당한다는 것은 무술계에서는 가장 커다란 치욕이 아닙니까? 그런 것을 잘 아시는 주소저께서는 좀 참았더라면 좋았을 걸‥‥‥」

 

주약란은 그의 침울한 하소연에 측은한 마음이 우러났다.

 

「참으려고도 했지요.

그러나 사실은 곤륜파를 위해 참지 못했어요.

사실 명년 팔월 보름의 영웅대회는 결단코 평범하고 순탄한 대회가 아닐 거예요.

천용방이 이 대회를 위해 은밀하게 적극적으로 준비한지가 이십 년이에요.

구대 문파를 한날한시에 초청하여 무술대회를 연다는 것은 큰 모험이에요.

그렇다면 천용방은 그 동안 구대문파를 초청한 후의 대책과 만약의 사태가 일어나면

어떻게 다루느냐하는 모든 방법을 강구했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 대회는 비참하기 그지없는 불행한 대회가 될 것이에요.

그렇다면 구대 문파에서는 이기든 지든 간에 온전히 살아서 그곳을 떠나지는 못할 거예요.

이창란만 하더라도 일대의 영웅으로서 지모와 무공이 출중한 분이에요.

보통 사람들로서는 감히 맞서기 어려운 상대예요.

그런데 당신을 곤륜파에서 축출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군요.」

 

  양몽환은 주약란이 한낱 아름다운 여자인데도 강호의 형세를 정확히 판단하고

논리와 이론이 정연한 것을 깨닫고는 마음속으로 더욱더 존경하는 마음이 우러났다.

주약란은 자기의 이야기에 양몽환이심각하게 귀를 기울이고 듣자 만족해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천용방의 다섯 단주(壇主)들만 해도 모두 절기를 지닌 사람들이에요.

족히 구대 문파 중의 고수들과 자웅을 겨룬다 해도 쉽사리 승부를 가릴 수는 없을 거예요.

이창란은 그들의 우두머리예요 그런만큼 그가 더 놀라운 재간을 지니고 있을 것은 분명하죠.

그의 건원지(乾元指)라는 절묘한 재간은 구대 문파 가운데 어느 누구도 당하지 못할 거예요.

이러한 때 당신을 축출 하다니‥‥‥」

 

「그렇다면 명년의 팔월 보름 대회는 구대 문파가 틀림없이 패하고 만다는 결론이 아닙니까?」

 

「미래의 일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요.

현재 내가 아는 바로서는 일대 일로 싸워 이창란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구대 문파 안에는 없을 것 같아요.

이창란은 아까 말한 대로 천부의 재질을 타고난 사람이에요.

천생(天生)의 신력(神力)이 놀라울 뿐만 아니라 수백 년 만에 한 두 사람 태어날까 싶도록

얻기 힘든 인재지요. 그

러나 천용방의 무공을 누를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어쩌면 그보다 더 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을는지 모르죠. 다름 아닌 소림, 무당 두 파에요.

그 두 파는 천용방과의 대결을 준비하여 온지 어언 십여 년이 넘을 거예요.

무공은 심오광활(深奧廣闊)해요. 소림사에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천하의 귀서인

달마역근경(達摩易筋理)이란 책자에 기록되어 있는 무학(武學)은 심오광활 하기가

귀원비급에 뒤지지 않는 바에요. 단지 그 책을 기술할 때 사용한 문자(文字)가

천축문(天竺文)이어서 문자에 조예가 깊은 자가 아니면 해독하기 어려워 문제죠.

그 때문에 아깝게도 수백 년 동안 제대로 해독하는 소림사의 승려가 없어서

천고의 기서(奇書)가 장경각(藏經閣)에 썩고 있었지요.

만일 그 이십 년 동안 소림사에서 천축(天竺) 문자를 해독하는 자가 나와 달마역근경의

무공을 터득하였다면 문제는 달라지겠죠.」

 

그녀가 각 문파의 비밀 내막까지 소상히 뒤져가며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판단하는 데에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없었다. 양몽환으로서 다만 신기한 말들이었다.

 

겨우 이십 세의 처녀가 어떻게 이런 많은 내막들을 알고 있을까 하고 새삼스럽게 주약란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주약란은 더욱 자신 만만한 어조로 신비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천용방의 제자들과 단주들은 대강남북(大江南北)에 걸쳐 각 처에 흩어져 있어요.

가지각색의 인물이 혼합하여 있기 때문에 구대문파의 일거일동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그들의 눈을 속이지 못하고 발각되고 말지요.

명년의 대회는 단순한 무술의 우열과 승부를 가리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이에요.

만일 천용방이 이긴다면 별일 없이 순조롭게 끝나겠지만 구대 문파에게 천용방이지는

날이면 다른 음모가 반드시 준비되어 있을 거예요.

단지 미련한 나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나로서는 전혀 근거도 없이 무작정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말을 마치자 주약란은 뜻있는 눈으로 양몽환을 쏘아보았다.

양몽환은 그 눈빛이 두려운 듯 슬며시 고개를 숙이고 외면했다.

 

「그래도 아직 곤륜파의 문하생으로 돌아갈 것을 염원하나요?」

 

  양몽환은 깊은 한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아무 의욕도 없는 몸입니다.

오지 그리운 고향에나 돌아가서 모처럼 부모님들이나 한가롭게 찾아뵙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 후에는 인적이 드문 산 속을 찾아가 백해무익한 나 자신의 온갖 무학의 미숙한 재간을

집어 던져버리고 지금까지 저질러온 죄과를 마음속으로부터 참회하며 여생을 조용히

지내고 싶을 뿐입니다.」

 

  주약란은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글쎄‥‥‥ 당신은 그 생각이 꼭 옳다고 생각하세요?

그렇지만 막상 당신은 오래전부터 강호 은원간의 소용돌이에 깊이 빠져버린 사람이에요.

마음대로 빠져나가기가 그리 쉽지 않을 거예요.

여하튼 삭발하고 중이 되어서 심산에 파묻혀 모든 과거를 잊고 싶은 거죠?」

 

「만일 파의 규율대로 나를 놓아주지 않고 죽이든지 살리든지 하는 것은 별문제이지만

생과 사는 이미 초월하고 있습니다.」

 

「십여 년에 걸친 태산 같은 사은(師恩)을 보답하지 않을 작정이군요.

그리고 하림 사매의 순진하고도 깊은 정은 어떻게 하시려고 그런 말씀을 하시죠?

더구나 천용방의 이요홍도 당신에게 진심으로 참된 애정을 보여 준 여자예요.

화골소원산(化骨消元散)이라는 무서운 독을 풀어주면서 까지 자기를 희생하고

일편단심으로 당신을 위하여준 이요홍을 돌보지 않을 마음이에요?

더구나 이요홍이 자기 생명의 위험도 무릅쓰면서 까지 귀원비급을 찾아 준 일이라든지

또는 자기 자신의 명예(名轝)는 초개같이 버리고 한결같이 당신의 명예만을 지켜준

두 가지 일만 하더라도 그 은혜는 일생동안 갚아도 갚지 못할 것이에요‥‥‥‥

그나마 그녀는 지금 한 많은 불구의 몸이 되고 말았어요. 까마득한 세월만이 첩첩하게 그녀의 앞에 가로 놓여 캄캄할 거예요.

이제 그녀는 아무런 희망도 삶의 보람도 없이 길고 긴 고통의 세월을 눈물로만 보낼 거예요.

당신은 그것이 가엾지도 않나요?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 부친에게 머리카락을 잘라 달라고

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한 거예요.

이요홍은 사리에는 강하나 정에는 상당히 연약한 여자로 보였어요.

다정다감하다고 할까요?‥‥ 어쨌든 그 여자는 자기의 나머지 팔을 마저 잘리는 고통은

참을 용기가 있어도 애정의 실마리를 자를 용기는 없는 여자예요.

그녀는 일단 자기의 애절한 미련을 비관하고 절망에 빠지거나 또 외로운 세월을

끝내 이겨내지 못할 때에는 틀림없이 자살하고 말 거예요.

그녀는 충분히 그럴 위험이 있는 여자이니까요.

만일 그런 슬픈 사태가 일어난다면 이창란은 틀림없이 슬픔과 노기를 당신에게 쏟을 것이고

참혹한 수단으로 보복하고야 말거예요.

그렇게 되면 당신의 부모님들에게 해가 미치게 될는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그래도 당신의 생각이 옳다고 하겠어요?」

 

양몽환은 신랄하고도 놀라운 이야기에 얼굴빛이 굳어졌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달리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요.

무슨 좋은 방법도 없는 것이고‥‥‥‥」

 

주약란이 그 말을 가로 막았다.

 

「방법은 내가 벌써부터 생각한 것이 있어요.

다만 양상공이 저의 말을 들을까 그것이 걱정이지요.」

 

  뜻있게 웃으며 쳐다보았다.

  그러자 양몽환의 눈은 금방 생기가 돌았다.

 

「정말 좋은 방법이 있다면 왜 제가 당신의 충고를 듣지 않겠소?」

 

  주약란은 조소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마 서로 간에는 통하는 것이 있는 눈치들이었다.

 

「이 접매와 몇 번 이야기를 나눈바가 있어요.

양상공의 골격은 천품의 재질을 타고났습니다.

그래서 접매가 자기의 모든 심오한 재간을 전수 하겠다는 거예요.

명년 팔월까지는 아직도 일년이란 긴 시일이 남아 있어요.

저의 충고만 받아들인다면, 양상공은 그때 가서 족히 지금의 고수들과 승부를

겨룰 수 있게 될 거예요.

접매의 임, 독 (任 ,督) 두 맥은 벌써 유통되어서 무궁무진한 내공력을 발휘할 수 있어요.

이 접매가 종종 당신의 경맥을 주물러 주어 유통시키기만 하면 세수역근(洗髓易筋)의

효과를 가져 올 수 있게 돼요.

따라서 당신의 내공력은 정상적인 단련에서 오는 것보다

수배나 큰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될 거예요.

모든 번민과 인연을 잊고 오로지 무공에만 전념함으로서 모든 죄도 씻고

영웅대회에서 명성을 떨치셔야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의 무공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해져서 천하 영웅들이

모두 당신을 영웅시하게 될 것이며 또 한편, 사문에 보답하는 길도 될 거예요.

그렇게 된다면 곤륜파의 문하로 되돌아가게 될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 아니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이 강호에 독립된 일파를 형성하는 창시자가 될 수도 있는 일이고요.

림매도 천성이 순진하여 심신을 가장 쉬이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지도만 잘해주면 장래의 성취가 당신보다도 빠를는지 몰라요.

그러나 그도 여자예요.

지금의 형세를 보면 당신 한 몸에 천하 무술계의 안위 문제가 직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당신이 전심전력을 다하여 노력에 매진하지 않으면 그 결과가 당신 한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예요.」

 

주약란은 말을 그치고 깊은 애정의 시선으로 양몽환을 바라보았다.

 

「‥‥‥‥‥‥‥‥」

 

「잘 생각해 보세요. 다른 도리가 있나 없나.」

 

  양몽환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곧이어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당신의 말씀은 미약한 저에게 너무 과분한 기대를 거시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두 분에게 고심(苦心)을 끼쳐드리게 될까 두려울 뿐입니다.」

 

그 말에 조소접이 생긋 웃으며 나섰다.

 

「그건 염려 마세요. 제가 양상공의 유음삼맥(維陰三脈)과 십이중루(十二重樓)를

유통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십년간의 고된 수련을 쌓은 것보다 나은 성과를 올리게 할 수 있을 거예요.

란언니는 저와 달리 총명예지 하니까

양상공에게 검술과 권장(拳掌)등의 온갖 무술을 가르치겠지요.

저는 저대로 전 귀원비급의 모든 요결을 외우고 있어요.

우리 세 사람이 꾸준하게 상호 연구하면 자연히 귀원비급의 무공을 수련하게 될 거예요.」

 

그녀는 갑자기 자기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 한 유언이 생각났다.

그러자 곧 눈을 감고 합장하여 기도문을 읊듯이 중얼거렸다.

 

(어머님, 양상공의 사람됨이 출중 성실하여 소녀가 무공을 전수코자 하나이다.

다만 그로 하여금 비참한 무술제의 비극을 막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는 이미 심씨 아가씨와 서로 사랑하는 몸인바 결코 이 소녀가 사랑해서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주약란은 그녀가 입 속으로만 중얼중얼 기도드리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막상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자기 어머님의 유언으로 그렇다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주약란은 그녀의 기도가 끝나자 곧 말을 붙였다.

 

「접매, 양상공은 내 충고대로 이번 영웅대회에서 무예계를 구하겠다고 응낙한 바와 다름없어.

이번 일의 성패는 이제부터 접매의 행동에 크게 좌우되는 거야.

앞으로 시일도 얼마 남지 않고 하였으니 늦지 않도록 오늘부터 바로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

 

조소접도 찬성했다.

 

「그래요! 그게 좋겠어요.」

 

  주약란은 갑자기 생각난 듯이 양몽환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장 요긴한 일을 잊어버릴 뻔 했어요.

양상공을 장문사숙이 축출할 때 림사매의 태도는 어떻든가요?」

 

  양몽환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는 나를 위해 남았습니다.」

 

「남다니? 당신과 이 괄창산에 같이 남았단 말예요?

그래, 지금어디 갔지요?」

 

놀라 묻는 주약란의 말에 양몽환의 가슴은 비수로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그러나 곧 냉정해졌다.

 

주약란은 긴장해서 양몽환을 쳐다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녀처럼 천진난만하기만 하고 천사와 같은 사람과 함께 있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주약란의 얼굴빛은 금방 흐려지는 것이었다.

 

「아니? 헤어졌군요! 림매가 당신과 헤어진 후 잘못되어 비참한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죠?」

 

양몽환 자신도 무척 괴로운 눈치였다.

한참을 망설이고 나서야 하림과 헤어진 상세한 자초지종을 주약란에게 들려주었다.

 

주약란도 깊이 탄식했다.

 

「림매는 살아있는 천사예요.

어디가든 신의 가호가 있을 거예요 일이 그렇게 되었다면 더 그 일에 마음을 쓰지 말아요.

오직 마음을 편안히 안정하고 나의 천기석부(天機石府)에서 접매로부터

토납타좌지법(吐納打坐之法)을 배우도록 노력해 보세요.

다른 생각은 일체 말고 평소에 진기가 이르지 않던 경맥과 혈도

그리고 유음삼맥과 십이중루를 유통시키도록 노력 하세요.

그동안 저는 림매를 찾아보겠어요. 신의 가호가 있으면 그녀를 찾게 될 것이에요.

고달프겠지만 그녀에게도 접매로 하여금 그녀의 상승의 내공을 수련케 하여야겠어요.

그렇게 되면 명년 팔월 영웅대회에 당신의 협조자가 한 사람 더 늘게 될 것 아니에요?」

 

양몽환은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깊은 애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조금도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라 고마운 마음씨에 절로 눈물이 샘솟았다.

 

「이토록 미련한 저를 보살펴 주시는 정의는 제가 평생토록 갚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 양몽환이 어느 전생에 얻은 복으로 당신과 같은 사람과 만나게 된 것인지‥‥」

 

 황급하게 주약란은 양몽환의 입을 막으면서 더 말하지 못하게 했다.

「그만, 제 말만 들어 주시면 저는 더없이 만족해요.」

「당신의 탁월한 견해는 마치 신(神)과 같습니다. 이후‥‥‥」

 

하다가 조소접이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붉히고 더 말을 계속하지 못했다.

 

주약란은 양몽환의 얼굴빛이 붉어지고 어색해하는 태도가 더없이 믿음직스러운지 생긋 웃었다.

 

「이후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어서 이야기 하세요.」

 

  양몽환은 더욱 얼굴빛을 붉히고 고개만 숙였다.

조소접이 민망스러워 얼른 대신 대답해 주었다.

 

「언니, 재촉하지 마세요.

제가 대신 말씀드리겠어요.

이후 언니의 지시를 받들어 절대 복종하겠다고 맹세하려던 참이었을 거예요」

그러자 주약란은 고개를 흔들었다.

 

「천만에!」

 

  답답해진 조소접이 당황하여 양몽환을 쳐다보며 동의를 구했다.

 

「말씀해 보세요. 저의 말이 옳은지 틀렸는지?」

 

  양몽환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소저의 말씀이 옳습니다.」

 

  조소접이 방긋 웃으며 주약란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봐요. 내 말이 맞지 않은가?」

 

  주약란도 웃으며 은근히 양몽환을 쳐다보았다.

 

「아닐 거예요. 얼결에 대답한 것이지 설마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닐걸.」

 

  양몽환이 황급히 변명하였다.

 

「이 몸이 잘못한 것을 이미 알았으니 당신은 그만 공격하시고 숨쉴 틈이나 좀 주십시오.」

 

  어설프게 농을 섞으면서 말하는 겸연쩍은 태도에 그나마 눈만은 진정으로 빛났다.

 

  주약란은 의외로 정열에 빛나는 양몽환의 시선과 마주치자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재빨리 얼굴을 돌려 딴 곳을 바라보며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오랫동안 식사를 못하였을 터이니 이제 그만 돌아가요.

빨리 천기석부로 돌아가 특별히 접매가 친히 만든 맛좋은 식사를 드셔 보세요.」

 

  그러자 조소접은 갑자기 근심을 띄우며 주약란을 쳐다보았다.

 

「제가 만든 음식은 맛이 없어요. 아마 양상공께서는 잡수지 않을 거예요.」

 

  주약란은 웃으며 말했다.

 

「접매는 너무 겸손할 것까지는 없어. 이미 이 언니가 맛볼 기회를 가졌었으니까.」

 

  그리고 조소접의 손을 잡고 천천히 석실을 나갔다.

 

  가을 하늘은 밝게 개어 눈부시도록 빛났다.

절세의 미녀인 두 여인의 뒤를 따르는 네 백의의 시녀들도 환하게 미소 짓는 것이

밝은 표정들이었다.

 

양몽환은 두 소녀의 뒤를 따르며 걷고 있었다.

네 사람의 순진한 시녀들은 그의 주위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수시로 양몽환에게

이것저것을 가리키며 물었다.

 

막상 그들이 묻는 말에는 모두 대단찮은 것들뿐이었다.

저것이 무슨 꽃이냐?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무슨 이름의 나무냐? 하는 하잘것없는 질문들이었다.

워낙 깊은 심산 속이라 많은 꽃나무들이 있었고 사람들이 미처 이름을 모르는

야초들도 허다하였다.

양몽환은 그나마 적잖은 서적을 읽고 야초에 대하여서는 아는 바가 꽤 많았지만

막상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많았다.

네 백의의 시녀들은 양몽환이 미처 대답을 못하면 그들 멋대로 그냥 아무렇게나

이름을 마음대로 지어 불렀다.

그러다 너무나 이상한 이름이 나오면 양몽환은 저절로 웃음이 나오곤 하였다.

  이들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제각기 모두 기분이 유쾌한지 연방 웃고 떠들었다.

양몽환도 천진한 시녀들의 장난에 잠시 동안이나마 근심걱정을 잊고

근래에 보기 드문 통쾌한 웃음마저 터뜨리곤 하였다.

곁으로 보기에는 오랜만에 즐거움을 맛보는 듯 흠뻑 취해 있었다.

 

주약란과 조소접은 손을 마주잡고 앞서서 걸어갔다.

그들도 수시로 고개를 돌려서는 뒤의 다섯 사람을 돌아보며 웃곤 하였다.

 

조소접토 매우 즐거워하며 지금까지 볼 수 없던 활짝 핀 웃음을 자주 띠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양을 본 주약란은 속으로 은근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요홍과 하림만 하더라도 양몽환을 사이에 두고 얽히고 설킨 정이 매우 복잡다단한데

조소접마저 관여한다면 큰일이지‥‥ 이요홍이나 하림 두 소녀도 서로 불행 없이

한 남편을 섬기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하는 것만도 힘든 이 때에‥‥‥‥

그런데 조소접마저 뛰어 든다면 큰 일일거야‥‥‥‥

어쨌든 사전에 조심하고 별일 없도록 주의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구나.

아무리 내가 염려한다 해도 결국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면?)

 

  주약란은 이러한 근심이 들자 웃던 웃음이 간 곳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우울한 근심과 가벼우나마 유원(幽遠)한 기색이 감돌았다.

 

이때, 조소접이 몸을 돌려 주약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웃는 얼굴로 말을 하려다가 주약란의 쓸쓸하고 수심이 가득 찬 열굴 을

발견하고는 약간 멈칫하는 표정이 되었다.

 

「란 언니, 왜! 갑자기 언짢은 일이라도 생겼나요?」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주약란은 황망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러나 조소접의 총명한 눈은 주약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기나 하는 것처럼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언니, 언니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저는 알아요.」 

 

주약란은 속으로 멈칫 놀랐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히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래? 그렇다면 말해 봐요.」

 

  조소점도 잠시 동안 어색하게 망설이었다.

 

「언니의 그 기분은 모두 나 때문에‥‥‥」

 

하는 것을 주약란이 급히 가로막았다.

 

「무슨 소리야? 접매 때문에 내가 언짢아 할 것이 있어야지?」

 

「거짓말 마세요.

그러나 걱정할 것도 없어요.

 결코 저는 언니를 곤란하게 하지는 않겠어요.‥‥‥‥」

 

때마침 양몽환과 네 명의 백의의 시녀가 일제히 좇아왔다.

그 바람에 조소접은 약간 웃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잠시 후! 일행은 천기석부에 도착했다.

삼수나찰(三手羅刹) 팽수위 (膨秀韋)가 웃으면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아가씨는 정말 바로 알아 맞추었군요. 양상공이 이렇게 돌아오셨으니.」

 

하는 그때였다.

 

  홀연, 맑은 하늘에서

 

  <까옥!>

 

하는 학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횐점 하나가 유성과 같이 내려와 순식간에 주약란의 옆에 다가 앉았다.

백학은 긴 목을 쳐들고 연이어 크게 울었다.

주약란은 가만히 학의 울어대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갑자기 버들과 같은 눈썹을

곤두세우고 살기를 띄웠다.

 

「접매, 같이 가요!」

 

  주약란은 급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양몽환이 불쑥 나섰다.

 

「저도 같이 갔으면 하는데 어떻습니까?」

 

  주약란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조소접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요. 우리 셋이 같이 가요.」

 

  양몽환은 주약란을 바라보고 생긋 웃었다.

 

「주소저께서는 귀원비급을 찾으려고 계곡으로 내려간 사람들을 잡으러 가려는 것이죠?」

 

「맞아요. 현옥이 방금 나에게 알려 주었어요.

아마 여러 사람이 내려간 모양이에요.

 내가 그토록 엄중하게 경고하였는데도 내려간 사람들은 죽어도 할 수 없는 거예요.

접매의 힘을 빌려서라도 계곡으로 내려간 사람은 일체 살려 보내지 않겠어요.」

 

  양몽환은 잠시 침울해졌다.

 

「나의 무공이 시원치 않아 두 분과 같이 가더라도 도움은 되지 않을 거 에요.」

 

  조소접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건 관계없어요. 제가 옆에서 도와 드리겠어요.」

 

  주약란도 가볍게 웃었다.

 

「좋아요. 두 사람은 현옥을 타고 곧장 계곡으로 내려가요.

그리고 천용방의 인물이든 구대 문파의 인물이든 책을 찾으러 내려간 사람이라면

용서치 말고 처치해 버려요. 난 지름길로 달려가 그들이 달아나는 것을 막겠어요.」

 

  조소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느덧 학의 등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양몽환에게 손짓했다.

 

  주약란이 한 번 손을 흔들고는 팽수위에게 주의를 주었다.

 

「우리가 가고 나서 혹시 이곳에 와 소란을 피우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문을 꼭 닫고 응전하지 말아요.

단지 그들이 들어오지만 못하게 문만 꼭 지키고 있으세요.」

 

「네, 알겠어요.」

 

  팽수위가 대합하자 주약란은 몸을 획! 돌리며 조소접에게 크게 소리쳤다.

 

「자, 가요!」

 

  그리고는 즉시 몸을 날렸다.

 

  그 커다란 현옥은 더욱 크게 울면서 두 날개를 휘저었다.

그 즉시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 모양으로 하늘로 치솟았다.

 

  처음으로 학을 타보는 조소접은 될 듯이 기뻤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백의의 시녀 네 명은 모두 고개를 치켜들고

학을 탄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부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갑자기 양몽환의 몸이 비틀거렸다.

조소접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얼결에 손을 내밀어 양몽환의 오른 손목을 꽉 잡으며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무서우세요?」

 

  그러면서 웃었다.

 

  양몽환은 자기의 오른 손목을 꼭 잡은 그녀의 매끄럽고 따뜻한 손길에

불현듯 이상한 감동을 느꼈다.

가만히 손을 때내면서 담담히 웃었다.

 

「무섭지 않습니다.」

 

「무섭지 않은데 왜 움직였어요?」

 

  양몽환은 싱긋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은 조소접이 아래를 내려다 볼 때 우연히 그녀의 몸이 양몽환에게 쓸리는 것이었다.

바람결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양몽환의 얼굴을 스치면서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바람에 몸을 비킨다는 것이 그만 허공이어서 비틀거렸을 따름이었다.

 

양몽환을 한동안 바라보고만 있던 조소접은 갑자기 깨닫기라도 한듯 방긋 웃었다.

 

「그렇군요. 제가 무의식중에 양상공을 밀었나 보죠?」

 

  양몽환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하려고 하였으나 불시에 무어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미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입만 달싹거리고 말았다.

 

그들은 서로 미묘한 기분에 들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며 차가운 한기가 얼굴을 때리는 것이었다.

 

「어머나!」

 

 조소접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가늘게 부르짖으며 양몽환의 품으로 기대는 것이었다.

현옥은 비록 거대한 백학(白鶴)이지만 역시 날짐승에 불과하였다.

잔등의 폭은 겨우 한자에 길이는 두 석자였다.

그때 양몽환이 뒤로 한걸음 물러났기 때문에 더 뒤로 물러날 여지가 있을 리 없었다.

뒤로 물러나려야 더 물러날 수 없었다.

그런데 조소접이 양몽환의 품을 파고드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할 수 없이 가슴을 내밀어 저지시킬 수밖에 없었다.

자욱한 안개와 습기가 얼굴엔 부딪치며 싸늘한 한기가 휩싸고 있었다.

주위는 어스름하여 사물마저 분별할 수 없었다.

아마도 현옥이 두터운 구름 속을 날고 있는 모양이었다.

조소접은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양몽환에게 기대고 싶은 충격을 억제할 수 없었다.

온 몸이 달아오르고 가슴은 울렁거렸다.

양몽환의 몸에서 풍겨오는 농후한 남자의 체취는 더욱 그녀를 취하게 하였고

황홀경으로 몰아넣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두 팔로 양몽환의 허리를 껴안으며 눈을 꼭 감고

얼굴을 양몽환의 가슴에 기대기까지 했다.

잠시 후, 눈앞이 밝아지면서 현옥이 구름 속에서 나왔다.

양몽환은 가만히 조소접을 밀어 내며 나직이 속삭여 주었다.

 

「조소저, 구름에서 이제 나왔습니다.」

 

조소접은 양몽환의 품에서 조용히 몸을 빼며 눈을 했다.

꿈에 취한 듯한 아련한 눈매에는 수줍음이 감돌고 있었다.

 

조소접도 스스로도 놀랐는지 차마 정면으로 양몽환을 쳐다보지 못하였다.

발그스레 상기된 그녀의 얼굴은 더욱 예뻐 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곧 쓸쓸한 빛을 띄우기 시작하고 어느덧 두 눈에는 반짝이는

눈물마저 감돌고 있었다.

 

양몽환은 눈 아래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내려다보며 천진하고 순결한

하림을 생각하고 있었다.

 

  (심사매도 이 백학을 얼마나 타보고 싶어 했는지.

만일 하림이 지금 조소접처럼 나와 같이 나란히 학을 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늘에 뜬 이 변화 많은 꽃구름을 구경하고 눈 아래 펼쳐지는 저 산수의 경치를

함께 감상하면 지금쯤 하림은 또 얼마나 좋아 할까?)

 

생각만 해도 행복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는 부지중 달콤한 감회에 젖어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쉬었다.

 

조소접은 얼굴에 묻은 물방울을 닦으면서 서글프게 웃었다.

 

「왜 한숨을 쉬지요?」

 

양몽환은 조소접을 쳐다보고는 가슴이 뜨끔했다.

그만큼 양몽환을 바라보는 조소접의 눈에는 뜨거운 애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양몽환은 오히려 마음이 괴로웠고 한편 불안했다.

 

(지나온 일년간만 해도 여러 가지 애정의 풍파에 휩쓸렸는데

이제 또다시 휩쓸리게 되면 큰일이구나.

여하들 앞으로는 내가 다정한 척하지 말아야 이런 일이 없을 거야.)

 

양몽환은 자기 생각이 옳고 그릇됨을 더 생각해 보지도 않고 얼굴을 굳히면서

냉정한 어조로 가장했다.

 

「아! 하림사매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만일 하림 사매가 지금 이와 같이 학을 타고 날면 얼마나 기뻐할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갑작스러운 엉뚱한 대답에 조소접은 약간 어리등절 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상냥한 웃음을 되찾았다.

 

「정말 심소저는 꽃과 같이 어여쁘기만 해요.

또 마음씨도 비단결같이 고와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녀를 좋아하게 되고요.

 란이 언니도 좋아하지만 저도 무척 그녀를 좋아 하거든요.」

 

  양몽환은 건성으로

 

「그래요?」

 

할 뿐 여전히 하늘에 둥실 떠도는 구름만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조소접은 매우 가냘프고 나직한 어조로 부끄러운 듯 물었다.

 

「심소저를 사랑하시죠?」

 

「우리는 사남매(사男妹) 지간이라 골육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니 자연 내가 그녀를 보호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조소접은 다시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란이 언니는 사랑하세요?」

 

「주소저는 무공이 심오하면서도 정숙합니다.

몸가짐은 고결하면서도 사람을 무시하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심지가 밝으니 무릇 인간이라면 그녀를 경애해야겠죠.」

 

  그러자 조소접은 불쑥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저는요?」

 

  양몽환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오히려 과거에는 아가씨가 저를 미워하였죠.

그때 무척 적의에 가득 찬 싸늘한 태도로 대하여서 사실은 나도 좀 미워했었죠.

그러나 알고 보니 모두가 오해한 탓이었더군요.

그동안 귀한 약을 주는 둥 여러 가지로 구원을 받고 보니

고마워하기도 부족한 판에 어찌 미워하기 까지 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양몽환은 조소접의 물음에 대답하면서도 시종 얼굴을 돌려

조소접을 한번도 바라보지 않았다.

 

때마침 현옥이 크게 부르짖으며 날개를 두어 번 퍼덕거렸다.

그들은 급히 주위를 돌아 봤다.

현옥은 쏜살같이 아래로 일직선을 그으며 내려가고 있었다.

내려가는 속도는 굉장히 빠른 것 같았다.

그렇건만 위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흔들림이 없이 편안하기만 했다.

양몽환이 유심히 살펴보니 바로 도옥(陶玉)이 떨어져 간 그 절벽이었다.

현옥은 계속해서 유성과 같이 내려가고만 있었다. 

순식간에 모든 산의 풍경은 뒤로 물러가고 말았다.

오직 깎은 듯한 절벽만이 그들의 눈앞을 스쳐 하늘로 치솟아 거꾸로 올라가는 것과 같았다.

조소접은 하얀 옷에 남사(藍紗)를 걸치고 있었다.

현옥이 손살같이 내려가자 바람은 귀를 울리고 머리카락을 날렸다.

또한 조소접의 옷자락과 남사를 마구 치켜 올려 그녀의 얼굴을 치감았다.

양몽환은 아무 생각 없이 조소접의 모습을 두어 번 바라보았다.

그러자 백학의 등 에 의젓이 타고 앉아있는 조소접의 버들같이 가는 허리와

옥과 같은 부드러운 손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런데다 표표히 나부끼는 옷자락과 머리카락은 조소접이 하늘에서 하강하는

선녀와 같은 감을 느끼게 하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선녀(仙女)와 동석한 양몽환은

불현 듯 자기 자신이 송구해짐을 금할 수가 없었다.

조소접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옷자락과 남사를 내려뜨리고는 방긋 웃으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

 

「만일 우리들이 계곡에서 양상공의 사부님과 사숙님들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하죠?

란이 언니의 말대로 그들을 죽여야 해요?」

양몽환은 별안간 얼굴빛을 굳혔다.

 

「사부님과 사숙님들은 모두 공명 경대한 분들로 결코 계곡으로 내려가

귀원비급을 찾으려 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안 오시면 다행이지만 만일 오신다면?」

 

「그것 ‥‥‥」

 

   양몽환은 어찌 대답해야할 바를 몰랐다.

마침 현옥이 두 날개를 쫙 펼치며 어느 커다란 청석(靑石)위에 내려앉았다.

조소접은 그 즉시 사뿐히 일어나 가볍게 뛰어 내렸다.

그러는 그녀의 행동은 낙엽과 같이 서서히 밑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언뜻 보아 학의 위치와 계곡의 바닥과는 약 일장 반의 거리가 되는 듯 했다.

자기의 경신법 재간으로서도 별문제 없이 쉽게 뛰어 내릴 수 있는 높이였다.

 

그는 즉각 진기를 돋우어 뛰어 내렸다.

 

양몽환은 조소접보다 나중에 뛰어 내렸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떨어지기는

조소점보다 먼저 떨어졌다. 땅에 내려 선 양몽환은 고개를 쳐들어 바라보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조소접은 웃음을 함박 띠운 얼굴로 가벼운 솜뭉치처럼

천천히 흔들거리면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빛이 사라지고 금방 얼굴을 찌푸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내려오는 속도가 갑자기 빨라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양 몽환의 옆에 내려서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는 두 눈을 꼭 감으며 음성을 낮추어 말하는 것이었다.

 

「빨리 눈을 감아요. 그들을 보지 못한 것처럼.」

 

  양몽환은 그 이유를 몰라 어리벙벙한 모양이었다.

 

「아니, 무슨 일인데요?」

 

  조소점이 나직한 어조로 일러 주었다.

 

「당신의 사부님과 사숙님들도 내려 오셨어요!」

 

 양몽환은 뜻밖의 일이라 급히 고개를 돌려 앞을 살펴보았다.

과연 저 쪽에 세 사람이 내려오고 있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얼굴 모양은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히 세 사람 모두 도포를 입었다는 것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순간 그의 가슴은 두근거려 지고 전신이 떨려왔다.

자기 자신도 지나친 긴장감에서 오는 것인지

겁이 나서 떨리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때, 조소접은 눈을 약간 뜨고 양몽환을 처다 보았다.

 

「이 바위 뒤로 숨으면 어때요?」

 

양몽환은 설마 이런 환경에서 사부와 사숙들을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양몽환은 더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합시다.」

 

  그는 생각할 여유도 없이 먼저 바위 뒤로 달려가 숨었다.

조소접은 바위 뒤로 달려오자 곧 몸을 가볍게 날려 바위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아직 거기 서있는 현옥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나직이 속삭였다.

 

「나와 양상공은 여기 숨어 있겠어. 너는 너 할 일을 해.」

 

  양몽환은 그때 조소접의 자상하고 귀여운 모습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어딘지 하림과 주약란하고는 비길 수 없는 또 다른 매력이 풍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현옥은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날개를 펼치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러면서 목을 쑥 내밀고 커다란 입을 벌려 막 부르짖으려고 하였다.

다급해진 조소접이

 

「소리 내지 말아요.」

 

하고는 즉시 오른손으로 현옥의 왼쪽 다리를 잡고 몸을 치솟더니

왼손으로 현옥의 기다란 입을 꽉 막아버렸다.

 

간신히 학의 울부짖음을 막기는 하였으나 조소접의 몸은 현옥을 따라

일곱 장이나 허공 높이 솟았다.

밑에서 바라보는 양몽환은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아무리 경신법의 재간이 놀랍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성하지 못할 걸.)

 

하고 생각하는 찰나!

조소접은 두 손을 놓으며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그와 반대로 현옥은 하늘로 치솟아 올라갔다.

양몽환은 갑작스럽게 당하는 일이라 몸을 날려 그녀를 받으려고 팔을 벌렸다.

조소접이 떨어지는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순식간에 양몽환의 머리 위 다섯 자 정도 되는 곳까지 이르렀다.

양몽환은 번쩍 두 팔을 내밀어 떨어지는 조소접의 탄력 있는 몸을 받아 안았다.

 그러나 상상 밖으로 그 몸은 가벼워 힘들이지 않고 받을 수 있었다.

양몽환은 하도 신기한 나머지 조소접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양몽환의 두 팔에 안기어서는 부드러운 두 뺨에 스스럼없는 홍조를 띄우고

싱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숨도 가빠 보이지 않고 태연한 것이 조금도 놀란 빛이라고는 찾아 볼길 없었다.

양몽환은 손을 놓으면 떨어질 것이고 해서 그냥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사뭇 기분이 좋은 듯 눈마저 사르르 감았다.

양몽환은 조금 전 그녀가 학의 등에서 뛰어내릴 때만 해도 아주 완만하고

가벼워 보이던 자세를 생각해 봤다.

그런 절묘한 경신법의 재간이란 아무에게서나 쉽게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주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 하여도 다칠 염려는 조금도 없을 것이었다.

  양몽환은 그제야 생각되는 것이었다.

 

  (분명히 이 조소저가 나를 놀리는 모양이구나.

어디 이번에는 어떻게 하는지 좀 보자.)

 

그는 느닷없이 안고 있던 그녀의 몸을 머리 위에서 일장이나 높게 던져 버렸다.

그러자 조소접의 몸은 일단 위로 솟구쳤다가 나무토막처럼 떨어져 내려왔다.

그녀는 조금도 진기를 돋우지 않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몸은 수평이 되어

곧장 떨어져 내려왔다.

그대로 떨어진다면 팔이나 다리 중의 하나라도 상할 것은 분명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그것도 그녀가 장난으로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떨어져서 다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라는 염려에서 다시 팔을 벌려

그녀의 몸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이나 양몽환의 품에 안긴 조소접은 눈을 번쩍 뜨고 부끄러운 듯 웃었다.

 

「이번에는 정말 진기를 돋우어 몸을 보호하지 않았어요.

 받아주지 않았으면 정말 땅에 떨어져 죽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난 후 양몽환의 두 팔에서 스스로 빠져 나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곱게 쓰다듬어 올렸다.

 

「그러나 당신이 꼭 붙잡아 주실 줄은 알았어요.

그래서 진기를 돋우어 몸을 보호하지 않았던 거예요.」

 

  양몽환도 두 번째로 그녀를 받을 때는 첫 번째 받을 때와는 달리

훨씬 무거웠던 것을 느꼈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양몽환은 그녀의 순진한 장난이 어처구니가 없기는 하였지만 미워할 수는 없었다.

 

「귀중한 생명을 쓸데없는 장난에 잃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할 참이었소.

미련한 장난은 삼가 하시오. 만일 내가‥‥‥‥」

 

  양몽환의 지금 심정 같아서는 만일 자기가 붙잡지 않고 또 한번 떨어져 쓴맛을 보아야

옳았을 것이라고 말해 주려다가 꿀꺽 참았다.

섣불리 쏘아 붙였다가는 아마도 오해하기가 십상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양몽환은 말을 중단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눈치 빠른 조소접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쓸쓸히 웃었다.

 

「만일 제가 정말 떨어져 죽어 버렸더라면

란이 언니의 많은 고뇌도 덜어줄 수 있었을 것을?」

 

그녀는 방긋 웃고는 바위 뒤로 돌아가 서는 것이었다.

 

조소접은 될 수 있는 한,

자기의 속마음을 감추려고 애쓰는 눈치였다.

일부러 마음속에 움튼 서글픔을 방긋 웃는 웃음으로 감추려 고하였으나

그것이 더 그녀의 속마음을 드러내 놓고 말았다.

 

양몽환도 근래에 눈치가 무척 빨라진 터라 꾸민 듯한 조소접의 눈웃음 속에

무한한 애수가 스며 있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측은한 생각이 들면서 웬일인지 가슴마저 두근거렸다.

 

어색한 감정을 돌리려고 양몽환은 조금 전에 저 쪽에서 자태를 나타낸

세 사람에게 눈길을 돌렸다.

과연 천천히 이 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은 확실히 곤륜 삼자였다.

그들 세 사람은 어떤 일을 열심히 토론을 하는 모양이었다.

열렬히 말을 주고받느라고 그들은 아직 양몽환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양몽환은 더 이상 몸을 드러내고 바라볼 수가 없었다.

재빨리 바위 뒤로 뛰어들어 숨었다.

계곡에 우뚝 서있는 이 커다란 청석(靑石)은 바로 절벽을 의지하고 서 있었다.

더욱이 양 쪽에 기다란 잡초들이 우거져 있기 때문에 몸을 숨기기에는 아주 적격이었다.

다만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이 있다면 그 암석과 절벽과의 사이가

너무 좁아서 한 사람이 숨기에는 충분하였지만 두 사람이 숨기에는 약간 비좁았다.

그렇다고 머리만 숨기고 꼬리를 내미는 격이라 부득불 몸을 조이고 파고들었다.

그러다 보니 양몽환은 조소접과 또다시 꼭 붙어서 살과 살을 맞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시 한번 양몽환의 품에 바싹 안기게 된 조소접은 살며시 고개를 그에게로 돌려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괴로운 듯이 두 눈을 감고 말았다.

 

양몽환도 할 수 없이 고개를 돌리고 하늘의 뜬 구름만을 쳐다보면서

조소접의 행동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살결을 찰싹 붙이고 앉아 있기는 하였으나

별달리 말을 나누지도 않은 채 서로의 생각에만 잠겨 있었다.

 

그때, 마침 낮고 굵직한 음성이 바위 저 쪽에서 들려왔다.

 

「이 바위 뒤에 몸을 숨길 수 있겠는데‥‥‥‥」

 

  양몽환은 새삼스럽게 그 사람을 바라볼 필요가 없었다.

귀에 익은 음성의 주인공은 자기를 십이 년 간 가르치고 길러준

은사 일양자임이 분명 하였다.

 

  순간, 양몽환은 깜작 놀라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사부님이 지금 나의 이 모양을 보았다가는 입이 몇 개 있어도

변명할 여지가 없으리라. 차라리 내가 나서는 것이 낫겠다. )

 

  스스로 먼저 뛰어 나가려고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였다.

돌연, 커다란 웃음소리와 함께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 분 도형이 본인보다 한걸음 빠를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는걸,

하하‥‥‥ 도사 같은 곤륜파의 장문인도 별 것 아니군, 하하!」

 

양몽환은 즉각 그 음성의 주인공이 바로 팔비신옹(八臂神翁) 문공태(聞公泰)임을 알 수 있었다.

곧이어 옥영자의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비록 한걸음 빨랐지만 문형의 발걸음도 무척 빨랐군요.

우리가 미처 이 근방을 살펴볼 여유도 주지 않고 쫓아 왔으니 말입니다.」

 

  다시 문공태의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천만에요. 어쨌든 화산파와 곤륜 두 파는 본래부터 정의가 돈독한 바입니다.

그러지 마시고 지금 세 분 형이 손에 넣은 기서(奇書)를 본인에게 한 번 보여주기만 하면

세 분 도형의 일을 절대로 입 밖에 내지도 않겠소이다.‥‥‥」

 

그 다음 웃음소리가 한참 들리고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와 더불어 또 한 사람이 달려왔다.

그 사람은 바위 옆으로 달려오면서 크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이 사람도 한몫 끼어야 하겠소이다.

여러분들은 설마 이 사람을 도외시(度外視) 하시지는 않으시겠죠?」

 

양몽환은 이번에도 즉각 새로 나타난 자가 바로 번천안(飜天雁) 마가홍(馬家宏)임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양몽환은 속으로 생각했다.

 

  (야단났군, 사부님과 사숙님들이 벌써 귀원비급을 차지한 것으로 오해받고 있으니‥‥‥

문공태와 마가홍은 쉽사리 물러날 눈치가 아니고‥‥‥‥

필시 서로 피를 보는 싸움이 벌어지고 말겠는 걸!)

혼자 생각에 잠겨있는 양몽환의 어깨를 조소접이 가만히 두들겼다.

그러자 양몽환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조소접은 무척 난처한 기색을 띄우고 양몽환을 바라보다가 손끝으로 흙바닥에 글을 썼다.

 

「어떻게 하였으면 좋겠어요?」

 

  조소접은 다시 양몽환을 쳐다보았다.

  양몽환도 잠시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한 후 역시 흙바닥에 대답을 썼다.

 

「잠시 이대로 두고 봅시다. 다음의 변화를 보고 그때 가서 결정합시다.」

 

  양몽환도 조소접을 쳐다보았다.

조소접이 끄덕이었다.

그들은 다시 바위 뒤에서 눈만 내밀고 동정을 살폈다.

 

이때, 문공태는 그 근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본인이 살펴 보건대 이 위치가 바로 도옥이란 젊은 친구가 떨어진 곳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세 분 도형은 물론 그 젊은 사람의 시체를 보았겠죠?」

 

  혜진자가 조용히 머리를 가로 저었다.

 

「천만에요. 우리가 막 여기 도착하자마자 바로 당신도 그때 나타나더군요.

우리와는 겨우 한걸음의 차이밖에 없었지요.」

 

  이때, 갑자기 마가홍이 소리쳤다.

 

「저것 보시오!」

 

  무엇을 뜻밖에 발견한 모양이었다.

여러 사람들은 서로들 떠들며 그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것 같았다.

양몽환과 조소접은 잡초를 헤치고 바라보았다.

그들은 어느 한 곳에서 서로 원을 치고 서서 땅바닥을 유심히 살펴보고들 있었다.

아마도 무슨 흔적이 나마 찾은 모양이었다.

 

  몸을 구부리고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던 문공태가 자신 있게 말린다.

 

「틀림없는 사람의 피요.」

 

  들러보던 사람들도 제각기 끄덕거렸다.

마가홍은 의기양양해서 선뜻 두 걸음 물러나며 곤륜 삼자를 노려보았다.

 

「이 피로서 확실한 증명이 된 셈이오.

자, 이래도 세 분 도형께서 귀원비급을 손에 넣었다고 자인하지 않겠소?

만약 부인한다면 체면이 서지 않을 것이오.」

 

  그 말에 옥영자는 사뭇 딱한 표정을 지었다.

 

「마도형은 우리 세 사람을 어떻게 보시고 하는 말이오?

솔직히 모른다고 말하였으면 그런 줄 아시지 않고.」

 

  문공태는 쓴 입맛을 다시며 마가홍을 쳐다보고 수염을 쓰다듬었다.

 

「마도형의 고견은 어떠시오?」

 

  마가홍은 한참 동안 곤륜 삼자를 쏘아본 후 점잖게 앞으로 나섰다.

 

「빈도의 의견으로는 곤륜파의 세 분 도형께서

그 귀원비급 세 권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서로 의논해서 불평이 없도록 고루 나누어 가져야 마땅하오이다.

즉, 화산(火山), 곤륜(崑崙), 점창(點蒼) 세 파에서 각각 한 권씩 갖게 하였으면

.불평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 책은 곤륜파의 세 분께서 먼저 얻으신 것이니 만큼 곤륜파의 세 분에게

마땅히 우선권을 주어서 우선 한 권을 마음대로 선택 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 연후에 빈도와 문형은 제각기 제비를 뽑아 남은 책을 나누어 가지기로 합시다.

그리고 삼년 후에는 문형과 빈도가 각각 얻은 책을 가지고 같이 곤륜산 금정봉(金頂峯)

삼청궁(三淸宮)으로 가서 세 권의 비급을 다시 상호 교환하는 겁니다.

세 권의 책자를 우리 세 파에서 다보고 났을 때에는 고스란히 곤륜파의

 세 분 도형에게 반납하여 보관키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문공태는 펄쩍 뛰며 좋아했다.

 

「마형의 고안은 확실히 탁월하시오.

그런데 세 분 곤륜파의 도형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때, 옥영자는 자기 사형과 사매를 쳐다보고 있었다.

차디찬 살기(殺氣)가 감도는 눈빛이었다.

사형과 사매도 그 의중(意中)을 짐작하였는지 무언중 끄덕거렸다.

  그 즉시 옥영자는 장검을 빼어 들었다.

「두 분이 이토록 우리 곤륜 삼자가 책을 얻었다고만 우기신다면

우리로서는 구구하게 더 변명할 여지가 없소이다.

또 사실에 있어서 우리가 얻지는 못했지만 설사 우리가 얻었다고 하더라도

두 분에게 나누어 주지는 않을 것이요.」

 

  마가홍은 알겠다는 듯이 방긋 웃었다.

 

「좋소, 도형이 무공으로서 귀원비급의 주인을 정하자는 것 같은데 그것도 좋은 방법이외다.

그런데 세 분이 같이 나서서 싸우시겠소?

아니면 일대 일로서 쌍방에 한 사람씩 나와 싸우시겠소?

그것도 아니면 빈도와 문형이 한 패가 되어 세 분과 생사를 겨루시겠소?」

 

  옥영자는 그의 말을 일축해 버렸다.

 

「마도형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마시오.

빈도가 우선 마도형의 검술이 어느 정도인가 알아보겠소이다.」

 

하자 마가홍도 그 즉시 등 뒤의 검을 빼어 들고 정면으로 겨누었다.

 

「나의 칼끝에는 보시다시피 눈이 없소이다.

그러나 피를 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도 후회가 없으시다면 어디 공격하여 보시오.

내가 유감없이 상대하여 주겠소이다. 하하하!」

 

  마가홍의 말은 상대방의 비위를 긁으려는 가시 같은 것이었다.

일양자는 즉각 상대방의 말속에 담겨진 흉측한 속셈을 눈치 챘다.

이번싸움은 피차간에 목숨을 거는 치열한 싸움이 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일양자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가홍의 검술은 확실히 비상한데가 있었다.

옥영자는 곤륜파의 장문인의 신분이었다.

따라서 만일 실수나 상처를 입게 되면 곤륜파의 명예에 크게

누가 끼칠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없었다.

일양자는 선뜻 한걸음 나서며 장검을 빼어 들고는 옥영자를 막아섰다.

 

「사제는 본 파의 장문인이란 신분이오.

처음부터 장문인이 나서는 것은 곤륜파의 체면에 관계됩니다.

이 자리는 두말 마시고 소형에게 양보하시오.」

 

하고는 장검을 휘둘러 은빛 무지개를 그으며 옥영자의 대답도 듣지 않고 소리쳤다.

 

「마도형, 받아 보시오!」

 

  장검은 빛을 가르며 매섭게 찌르고 들어갔다.

  마가홍이 옥영자에게 비위를 긁는 말로 노하게 한 것은 한시 바삐

승부를 가리고 말자는 심사에서였다.

왜냐하면 이대로 시간을 끌기에는 그가 처한 입장이 매우 위태로운 형편이었다.

언제 어느 때 천용방 오기 단주(五旗壇主)가 달려올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주약란과 조소접도 불시에 나타날 위험성이 있는 것을 마가홍은 잘 알고 있었다.

만일 이 판국에 어느 한 쪽이든 뛰어 들기만 한다면 형세는 불리하고 불행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지금까지의 고심은 헛수고로 돌아가고 눈앞에 있는 꿈이 산산 조각이 날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었다.

이래서 마가홍은 속전속결(速戰速決)을 마음속에 다짐하고 암암리에 필살의 진기를 돋우어

곤륜파의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때, 일양자가 장검을 휘두르며 공격해 오자 마가홍은 성난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며

들었던 장검을 맹렬하게 후려치며 반격하였다.

그러자 장검과 장검에서는 불꽃이 튀었고 그 소리는 골짜기를 울렸다.

 

한편,

 

옥영자와 혜진자는 마가홍이 무섭게 칼과 한 몸이 되어 달려드는 것을 보고

속으로 무척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가홍과 일양자의 무기는 서로 가벼운 무기인 검이었다.

응당 날렵하고 가벼운 수법으로서 싸우는 것이 무예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마가홍은 검술의 명인인데도 불구하고 원칙을 무시하여 검과 검을

서로 맞부딪치며 달려들기만 하였다.

결국 그는 검술보다 내공력으로 맞부딪쳐 승부를 결하려는 태도였다.

극히 드문 전법으로 맞서기 시작하였던 것이었다.

 

그들의 장검은 다시 한번 공중에서 번뜩이는 가 했는데 요란한 불꽃이 튀었다.

 

귀를 찢는 듯한 금속성이 날카롭게 울렸다.

 

그 순간!

 

일양자의 장검은 두 조각이 나고 칼끝은 공중으로 날아 떨어지고 말았다.

 

일양자는 마가홍의 이상스러운 검법에 미리부터 준비하고 겨누기는 하였다.

그러나 막상 마가홍의 공력이 자기의 장검마저 토막 낼 줄은 몰랐다.

일양자는 그 즉시 뒤로 서너 걸음이나 뛰어서 물러났다.

 

마가홍은 더욱 기고만장 하여졌다.

잔인한 웃음을 만면에 풍기면서달려 들었다.

장홍경천(長紅經天)의 비법은 찌르는 듯 베는 듯 일양자의 가슴을 노리고 공격하여 왔다.

 

바로 그 순간!

 

싸늘한 광채가 번쩍이면서 눈을 찌르며 차가운 기운이 내달았다.

그러자 마가홍은 멈칫하며 공격을 멈추었다.

어느덧 일양자의 손에는 새파란 광채가 영롱히 빛나는 옛날 장검이 살기를 풍기면서

 마가홍의 가슴을 겨누고 있었다.

마가홍은 즉각 상대방의 손에 드리워진 검이 보검인 것을 알아챘다.

마가홍은 그만 기가 질려서 뒤로 피하려고 하였다.

일양자는 자기의 장검이 무참하게도 두 동강이 되어 치욕을 당한 끝이라

마가홍이 그대로 곱게 피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추혼십이검법 중에서 으뜸가는 묘법인 획분경위(劃分經緯)법으로

재빨리 보검을 내밀었다가 비스듬히 후려쳤다.

보검과 장검은 다시 불꽃을 튕기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이번에는 마가홍의 장검이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이때까지 싸움을 지켜보고 섰던 문공태가 허겁지겁 소리 질렀다

 

「잠깐!」

 

  그 소리에 두 사람은 잠시 싸움을 중단했다.

이 틈에 마가홍은 두 동강이 난 검을 들고 질풍같이 다섯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일양자는 영문을 몰라 보검을 비스듬히 들고는 문공태를 바라보았다.

 

문공태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명년 팔월 보름에 우리 구대 문파는 검북(黔北) 땅에서 천용방과 생사존망의

결투를 해야 할 몸들이오.

그때까지 자중해야할 처지 임에도 하잘것없는 일에 이처럼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면

대사를 앞둔 구대 문파꺼리 해를 볼 것은 정한 이치요.

또 그렇지 않고 상호 승부를 끝내 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일이 소문이 나 보시오.

기타 육대 문파에서 알게 되면 그 얼마나 실망할 것이며 우리를 비방할 것은 뻔한 일이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우리 구대 문파에서는 서로 단결하여 천용방에 대비할 방법을

강구하자고 철석같이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이렇듯 원수지간 같이 싸워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마가홍은 문공태가 틀림없이 자기편에 서서 곤륜파와 싸울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그가 하는 말은 천만 뜻밖에도 중도에서 태도를 돌변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자기 혼자 힘으로는 곤륜 삼자의 적이 될 수 없었다.

그만 문공태의 간교한 태도에 울컥 화가 치밀어 일그러진 소리로 고함을 냅다 지르고 말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차라리 문형은 빈도가 못마땅하면 서슴지 말고 나서시오!

유감없이 상대하여 주겠소!」

 

  그러나 문공태는 웃음으로 얼버무리려고 하였다.

 

「마도형은 본인의 말을 오해한 것 같소 나의 말은 모든 사실을 먼저 규명한 뒤에

우리 모두 체면을 잃지 않는 방향으로 이 시비를 해결하자는 것뿐이오.

즉, 싸우더라도 서로간의 화기(和氣)를 깨뜨리지 말자는 것뿐인데 뭘 그러시오.」

 

라고 말하면서 연방 뜻있는 눈으로 암시하듯이 양몽환과 조소접이

숨어 있는 바위를 쳐다보았다.

마가홍도 그제야 문공태가 던지는 눈치를 채었다.

그러고 보니 과연 문공태의 의견에도 일리는 있고 싶어

그제야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달랬다.

 

일양자도 눈치는 빨랐다.

문공태와 마가홍의 속셈을 뚫어보듯이 한바탕 웃음소라를 터뜨렸다.

 

「마도형과 문형은 공연히 허망한 오해를 하는 것 같소이다.

우리 곤륜 삼자가 그 젊은이의 시체를 저 바위 뒤에 숨기고

귀원비급 책자를 가로챈 것으로 아는 모양이 오만 그건 천만에 말씀이외다.

우리는 그럴 시간도 없었거니와 또 그렇게 비열하지도 않습니다.

정 의심이 나신다면 두 분께서 직접 그 바위 뒤를 샅샅이 뒤져 보시면 될 것이 아니겠소?

그래서 오해를 푸실 수 있다면 정말 다행한 일이겠소이다.」

 

  문공태는 자기가 의심하고 있는 사실을 오히려 일양자가 꿰뚫어 보고 털어놓는 바람에

쑥스럽고 겸연쩍어서 얼굴빛이 은연중 붉어지기까지 하였다.

어색한 빛을 감추다 못해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딴전을 피웠다.

 

「본인이 어찌 그런 고견을 지닐 수야 있겠습니까?

하나 도형이 그렇게 분부하시는 이상 이 사람이 오해받지 않기 위해서도

한번 살펴보기로 하죠.

 

문공태는 마지못해 하는 듯이 몸을 날려 바위 옆으로 달려 나갔다

 

때마침!

 

그 바위 위쪽에서 우거진 잡초가 갈라지면서 남사를 걸친

백의의 소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의외의 일에 모든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문공태는 자기의 눈을 의심하는지 몇 번이고 눈을 깜박거렸다.

분명히 조소접이었다.

순간 그는 조소접이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무공의 조예가 깊다는 것을 생각했다.

 

문공태는 깜짝 놀라 다섯 걸음이나 뒷걸음질 쳤다.

 

바위 위에서 의외로 조소접이 나타나자 비단 문공태만이 놀란 것은 아니었다.

떨어져 있던 마가홍과 곤륜 삼자도 놀란 나머지 망연하게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싸늘하게 노려만 보던 조소접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면서 싸늘하게 쏘아 붙였다.

 

「오지 말라는 곳에 기어코 왔군요. 그 벌로 따귀 두 대색 때려 주어야겠네요.」 .

 

  선뜻 왼 발을 움직이는 것 같았는데 어느덧 문공태의 바로 옆에 와서 있었다.

 

  그때, 문공태는 이미 경계하고 있던 터였다.

 

조소접이 몸을 날리는 순간, 그도 오른손의 청죽장(靑竹杖)을 들어

음운폐월(陰雲廢月)의 수법으로 몸을 보호하느라고 결사적으로 휘둘렀다.

 

조소접은 상대방이 청죽장을 휘둘러 물샐틈없이 막는 것을 보자 생긋이 웃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진기를 돋우어 달려들었다.

 

조소접은 마치 철없는 소녀가 장난을 치듯이 두려움이나 겁도 없어 보였다.

그렇건만 그녀의 몸에서 발산하는 무형의 강력(?力)은 어마어마하여서

그녀의 몸 주위를 철석같은 성벽으로 에워싼 듯 하였다.

문공태의 청죽장은 단번에 그 강력에 눌려 꼼짝 달싹할 수 없었다.

그 바람에 문공태는 그만 기가 죽고 몸은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매, 조소접은 문공태가 청죽장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도 우스운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그 틈을 놓칠 수도 없는 노릇 이었다.

즉각 섬섬옥수를 치켜들면서 문공태의 뺨을 후려쳐 때렸다.

 

「철씩! 철씩!」

 

문공태의 얼굴에는 단번에 끓은 손자국이 나고 말았다.

 

막상 두 대의 따귀를 얻어맞은 문공태는 꼭 여우에게 홀린 것만 같았다.

이건 어떻게 된 것이 상대방이 후려쳐 오는 손을 똑똑히 보면서도 피할 수조차 없었으니

매 맞고 나서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또한 매 맞는 것은 문공태이건만 놀란 것은 옆에 서서 바라보고 있는 곤륜 삼자와 마가홍이었다.

그들은 기절초풍해서 뒤로 뛰어 물러나고야 말았다.

여하간 여기 모인 사람들은 그나마 강호 무예계에서는 명망을 날리면서 뽐내는 무사들이었다.

그런데 만약 하잘 것 없는 십칠 팔세에 불과한 소녀에게 뺨을 얻어맞았다면 평생에 얼굴을

들지 못할 크나큰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문공태가 피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얻어맞고 말았으니

그들로서도 아연하고 기막히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문공태는 고개를 쳐들고 미친 듯이 웃어 제쳤다.

그 소리가 어찌나 처절한지 귀신이 울부짖는 것만 같았다.

그는 더 처절하게 웃고는 갑자기 손을 번쩍 올리었다.

동시에 한 알의 금환(金丸)이 총알같이 조소접에게로 날아들었다.

그 다음 순간 금환을 던진 문공태는 어느새 곧 몸을 돌이켜 쏜살같이 달아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처절한 웃음소리는 계곡에 메아리치며 오랫동안 들려왔다.

  조소접은 총알같이 날아오는 금환을 오른손을 가볍게 들어 슬쩍 비틀어 주었다.

그 순간 금환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번천안 마가홍에게로 날아갔다.

 

이 수법은 주약란이 종종 쓰던 것이었다.

바로 도음접양(導陰接陽)으로 즉, 남의 힘을 빌려 또 다른 한 쪽의 상대방을 공격하는

천고 에 희귀한 묘기였고 더욱 조소접은 완전히 임, 독(任 ,督)두 맥이 유통되었기 때문에

내인력(內引力)과 격출(擊出)되는 힘이 더한층 강대하였다.

때문에 일반 상대방의 장풍은 물론 적어서 조종하기 힘든 암기까지도 강력한 내공력으로

이끌어 다른 쪽의 적에게로 보낼 수 있는 처지였다.

 

마가홍도 무공에 심후한 공력이 있을 뿐 아니라 경험도 풍부한 노장이라서.

눈치가 보통 빠른 것이 아니었다.

그도 즉각 자기의 진기로서는 이 금환을 막을 수 없다고 결단을 내렸다.

조소접이 손을 씀으로써 문공태의 힘에다 조소접의 힘까지 겹쳐서 쏜살 같이 날아오는

금환의 기세는 보통 날카로운 것이 아니었다.

 섣불리 자기가 움켜 잡으려다가는 즉사하고 말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약삭빠른 마가홍은 재빨리 왼 쪽으로 다섯 걸음이나 비켜나고 말았다.

  이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금환은 저 쪽 암석에 박히고 말았다.

  조소접은 또 싱긋이 웃었다.

 

「문공태는 어느새 도망치고 말았군요.

이번엔 우비자(牛鼻子)도 사의 뺨도 벌로 두 번 때려야겠어요, 섭섭히 생각마세요.」

 

  그녀는 얼김에 생각되는 것이 있어서 얼른 곤륜 삼자를 뒤돌아 봤다.

곤륜 삼자도 마가홍과 마찬가지로 점잖은 도사의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소접은 사뭇 안 되었다는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조소접은 곤륜 삼자에게 상긋이 웃어 보였다.

 

조소접이 한 번 웃자 마치 백화가 만발한양 사람을 취하게 하고 말았다.

그러나 곤륜 삼자는 그 웃음에 도리어 가슴이 서늘하게 얼어붙고 말았다.

다음 차례는 자기들이구나 하고 지레 짐작하고 마음을 졸였다.

 

조소접이 가볍게 한 발을 움직이자 그녀의 몸은 제비처럼 날렵하게 뛰어 날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장이나 뒤에 있는 마가홍 옆에 바싹 붙어서고 말았다.

 

마가홍은 눈을 똑바로 뜨고 보면서도 꼼짝 못하고 서 있기만 하였다.

 

그리고 조소접이 도대체 무슨 수로 어떻게 이다지도 쉽게 자기 옆에 올 수 있었는지

신기하기만 하였다. 단지 발을 한 번 움직이는 것만 같았었다.

그랬는데 어느새 자기 옆에 외서 있으니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린 마가홍은 반 동강이 난 칼을 황망하게 휘둘렀다.

 

그러자 조소접은 귀찮은 듯이 왼손을 한 번 가볍게 뿌리쳤다.

그러자 강출한 잠력(潛力)이 검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고 말았다.

조소접은 그 틈에 오른손을 올려서 뺨을 때리려고 하는 것이었다.

  마가홍은 대경실색했다.

재빨리 몸을 뒤로 벌렁 젖히면서 힘껏 발뒤꿈치로 땅을 차고 일 장여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조소접도 마치 그림자처럼 마가홍의 몸을 따라 달려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가홍이 막 일어서는 때였다.

 

「철썩!」

 

  오른 쪽 뺨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았다.

  마가홍은 도시 영문을 알 수 없어 급기야 정신마저 흐려졌다.

 

「아직 왼 쪽 뺨이 남았어요.」

 

  조소접은 다시 손등으로 왼쪽 뺨을 후려갈겼다.

 

  마가홍은 오른쪽 뺨을 치고 지나갔다가 되돌아오는

조소접의 손등을 피하려고 해 보았으나 피할 래야 피할 수가 없었다.

 

「철썩!」

 

  다시 왼쪽 뺨에서 불꽃이 튕기는 것만 같았다.

 

  손등으로 후려친 한대는 무척 매서운 것이었다.

마가홍은 비록 그자신의 강기(?氣)가 몸을 보호하고 있었으나

손등으로 한대 맞자 눈에서 불이 튕기어 앞이 캄캄했고 입안은 선혈로 가득 차고 말았다.

  곤륜 삼자는 조소접이 때린다고 선언하면 꼭 때리고 마는 것에 그만 기가 팍 질렸다.

실로 평생에 보지도 듣지도 못한 해괴한 일이라 그만 얼이 빠져 멍하니 서 있기만 하였다.

그러다 보니 다섯 사람 중에서 두 사람이 얻어맞은 꼴이었다.

다음은 틀림없이 자기들의 차례일 것이라 여긴 곤륜 삼자들의 가슴은 뜨끔하여졌다.

불현듯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 자리를 피해야 할런지 혹은 이대로 당해야 할 것인지

진퇴유곡에 빠진 그들로서는 일생일대의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잠시 후,정신을 차린 마가홍의 안색은 처참하도록 창백하였다.

마가홍은 동강난 칼을 땅에 집어 던졌다.

 

「그만 두자, 그만 둬!」

 

반미치광이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며 마가홍은 도망치고 말았다.

 

그러자 옥영자는 별 수 없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었다.

 

「각기 이대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우리는 죽기를 각오하고 힘을 합해 막아 봅시다.

만일 우리 세 사람이 합해서도 막지 못한다면 그때는 깨끗이 자결이라도 하는 편이 옳을 것 같소.」

 

일양자는 손에 들고 있던 보검을 조소접에게 겨누었다.

 

「장문인과 사백은 우선 물러서시오. 소형이 이 보검으로 막아 보겠소.」

 

조소접은 그들 세 사람이 긴장하여 있는 모양을 보고 방긋 웃었다.

 

「돌아가세요. 당신들은 내가 차마 때려 주지 못하겠어요.」

 

세 사람은 의외의 말에 어리둥절하였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곧이어 옥영자는 다시 더 힘 있게 칼을 겨누어 들었다.

 

「소저에게 용서를 바라는 것보다는 뺨을 두 대 맞는 것이 낫겠소이다.

쓸데없는 선심을 쓸 것 없이 때릴 수 있으면 어서 때려 보시오.」

 

  옥영자는 자기의 성미를 참지 못하고 즉각적으로 조소접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러자 조소접은 몸을 슬쩍 비틀어 옥영자의 칼을 피한 후 야무지게 소리쳤다.

 

「언제 당신들이 나에게 용서해 달라고 하셨어요?

다만 내가 때리고 싶지 않다고 했을 뿐이잖아요!」

 

  옥영자는 그래도 보검을 휘둘러 횡단무산(橫斷無山)법으로

조소접의 허리를 겨누고 비스듬히 후려친 후에 소리 질렀다.

 

「누가 너 보고 때리지 말아 달라고 했어?」

 

  옥영자는 흥분한 나머지 사리를 따지려고 하지 않았다.

 

  조소접은 싸울 수 없는 처지라 무척 안타까워했다.

별수 없이 진기를 돋우어서는 홀연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리고는 이장 높이의 허공에서 두 팔을 연방 움직여 둥실둥실 떠 있었다.

  곤륜 삼자는 고개를 들고 그녀가 내려오기 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았다.

  일양자는 급기야 탄복하고 말았다.

 

「이런 절세의 경신법 재간은 정말 육십 평생에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소.

이것만으로도 여기 온 보람을 찾은 듯하니 우리들의 길이 결코 허행은 아니었소이다.

이만하고 우리들도 돌아갑시다.」

 

조소접은 진기를 돋우어 허공에 떠 있기 때문에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곤륜 삼자가 몸을 돌려 가는 것을 보고야 진기를 풀어 땅 위에 내려섰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그들에게 소리쳤다.

 

「세 분은 저의 충고를 한마디 들으십시오.

만일 도중에서 란이 언니를 만나시면 바로 양상공이

책을 찾는데 도와 달라고 하여서 왔다가 가는 길이라고만 말씀하십시오.

그럼 별 일은 없을 겁니다.」

  바위 뒤에 숨어 있던 양몽환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했다.

 

  (야단났군, 왜 쓸데없는 말을 할까?)

 

  과연, 곤륜 삼자는 조소접의 말을 듣자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일양자가 준엄한 어조로 되물었다.

 

「양몽환은 지금 어디 있소?」

 

  숨어있는 양몽환으로서는 진땀이 날 지경이었다.

 

  조소접은 혹시나 세 사람이 계곡을 벗어나기 전에

주약란을 만나면 애꿎은 유혈 사태가 일어날까 싶어 염려한 나머지

꾀를 내어 방법을 강구하여 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잠자는 호랑이를 건드리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일양자는 여전히 준엄한 얼굴로 날카롭게 따지고 들었다.

조소접은 난처하기도 하였거니와 은근히 화까지 치밀었다.

 

「저의 충고를 듣고 싶지 않다면 그만두시면 될 것 아녜요?

공연히 야단이시네, 흥! 그나마 양상공의 체면을 봐서 베푼 호의예요.

그렇지 않다면 오늘 이곳을 무사히 떠나지도 못했을 거예요.」

 

  일양자는 슬쩍 옥영자의 기색을 살펴보았다.

이때 옥영자의 얼굴은 노기로 창백해져 있었고 조소접을 노려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지만 그래도 무척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도 분명히 조소접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 소녀의 무공을 가볍게 보았다가는 큰일 나지,

비록 우리 세 사람이 힘을 합친다 해도 당해내지 못할 것은 뻔한 일.

작은 일에 참지 못하면 큰일을 그르치겠군.)

 

  그만 옥영자는 침을 꿀꺽 삼키고 치솟는 노여움을 억제하여 조용히 웃음마저 풍겼다.

 

「여하간 양몽환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요? 나와 잠시 만나 이야기할 수 없을까요?」

 

  그러나 조소접은 한동안 싸늘하게 흘겨보고만 있었다.

 

「양상공처럼 좋은 분을 문파에서 강제로 쫓아낸다는 것은 정말한심한 일이에요.

까딱했으면 황량한 산중에서 목숨까지 잃어버릴 뻔했어요.」

 

  조소접의 말은 일양자의 가슴을 송곳 끝처럼 찔러 주었다.

하기야 일양자로서는 추호도 양몽환을 문파에서 쫓아내고 싶지 않았다.

다만 장문민인 옥영자가 결정하는 일에 마지못해 동의했을 뿐이었다. 

십이 년 동안 자기의 가르침을 받은 양몽환을 무척 아꼈고

또 누구보다도 그가 성실하고 명석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처지였다.

설사 어떠한 잘못이 있더라도 거기에는 그럴만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으리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막상 문파에서 쫓아냈다고는 하나

여전히 관심과 사제지간의 정을 못 잊어 안타까워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한 때에 조소접의 입으로 양몽환이 황산에서 목숨까지 잃을 뻔 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그만 가슴이 섬뜩하지 많을 수 없었다.

일양자는 그만 황급하게 되물었다.

 

「도대체 그는 지금 어디에 있소?」

 

「란이 언니에게 도움을 받고 천기석부로 갔어요.」

 

  일양자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백의의 소녀가 양몽환과 같이 있었는데 그 소저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오?」

 

「심소저 말씀인가요?」

 

「그렇소.」

 

「글쎄요‥‥‥‥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신상에 위험한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심소저와 같이 아름답고 순결한 천사에게는 백영(百靈)이 보호할 거예요.」

 

  일양자는 그녀가 장황히 늘어놓는 이야기에 그만 실망하고 말았다.

더욱이 하림에 대한 확실한 행방에 대하여서는 일언반구도 없지 않는가?

하림의 소식을 전혀 모른다면 친구인 등인대사(澄因大師)를 대할 면목이 없는 처지였다.

등인대사를 만나게 되면 그는 틀림없이 하림의 행방을 묻게 될 것이었다.

그때 만일 자기가 하림의 행방을 모른다고 한다면 등인대사가 화를 내고

자기와는 절교까지 할 것이었다.

심지어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길게 한숨을 내쉰 일양자는 혜진자를 돌아보았다.

 

「사매, 하림의 부모가 남긴 유물(遺物)을 지금 갖고 계시오?」

 

  혜진자는 아연해진 얼굴로 쳐다보았다.

 

「아니, 하림까지도 우리 곤륜파에서 쫓아내시겠다는 거예요?」

 

「구대 문파와 천용방의 무술시합은 승부의 예측을 불허하고 있소

등인대사가 하림을 우리 곤륜파에 맡긴 것은 우리 곤륜 삼자의 힘을 빌려

그녀의 원한을 씻자는데 있었던 것이오.

그러나 현재로서는 우리가 그러한 능력이 있을지 의문이요.

그렇다면 차라리 그의 부모의 유물을 이 조소저에게 부탁하여 전하게 해서

우리들에게 이후의 유감지사가 없게 하자는 것이오.」

 

듣기에는 매우 평범한 이야기였지만 그 말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혜진자는 평소 자기의 대사형의 판단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처지였다.

더욱이 장소와 때를 가려서 일양자로서도 심각하게 이야기하자 매우 조심해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혜진자는 일양자의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리고 곧 일양자의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두말없이 품에서 보에 싼 자그마한 물건을 일양자에게 건네어 주었다.

그것은 하림이 자기를 스승으로 삼고 곤륜파에 입문할 때

스스로 자기에게 맡겼던 물건이었다.

 

「모두 여기 있어요.」

 

  일양자는 그 보따리를 받아 들고 조소접에게로 다가갔다.

 

「빈도가 조소저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 주시겠소?」

 

「우선 무슨 부탁인지 말씀하세요.

들어보고 나서야 받아들일 수 있는 건지 알 수 있잖아요?」

 

  일양자는 보따리를 내밀었다.

 

「이 소중한 물건을 우리 곤륜파의 제자인 하림에게 전해달라는 것이오.」

 

  조소접은 약간 주저했다.

 

「전 정말 그녀를 만나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 물건을 어떻게 전하죠?」

 

「이 물건은 비록 중요한 것이긴 하나 그렇게 급한 것은 아니외다.

만일 소저가 그를 찾지 못할 때에는 주소저에게 전해 주어서 전하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물건을 양상공에게 전해도 되겠네요?」

 

  일양자는 잠시 생각한 후 곧 승낙했다.

 

「그것도 좋소.」

 

  조소접은 미소를 지으며 그 보따리를 받아 품에 간직했다.

 

  사실 일양자는 주약란과 조소접의 무공의 힘을 빌려 하림의 원수를 갚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한 일이었다. 혜진자도 그 뜻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유물 속에는 하림의 부모가 죽게 된 한 많은 사연이 기록되어 있는 서찰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옥영자는 그때까지도 노여움을 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사형과 사매가 조소접에게 적의를 품지 않고 있으니 간섭할 수도 없었다.

 

곤륜 삼자에게 조소접은 공손히 절했다.

 

「그럼, 전송하지는 않겠습니다.」

 

  말은 부드럽고 몸가짐은 공손했으나 그 말은 곧 이 자리를 떠나주십시오

하는 말보다 더욱 단호했다.

 

곤륜 삼자도 더 이상 할 말도 없었거니와 망설이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곤륜 삼자는 손을 흔들고 떠나갔다.

 

세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조소접은 가만히 바위로 걸음을 옮겼다.

 

「양상공! 이제 나와요. 세 분은 모두 떠났어요.」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언뜻 그녀는 불안을 느꼈다.

재차 불러 보았다.

그래도 대답은 없었다.

 바위 뒤는 죽은 듯 고요했고 인적이라고는 없었다.

속으로 괴이하게 생각한 조소접은 재빨리 몸을 날려 바위 뒤로 달려갔다.

 

 

그 순간!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뚝 멈추고 말았다.

 그곳에는 장삼을 입은 괴한이 오른손의 부채를 양몽환의 목에 대고 왼손으로는

양몽환의 왼손 맥문요혈(脈門要穴)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 괴한의 얼굴에는 등등한 살기가 떠돌았고 찢어진 눈초리에는 매섭고

차가운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조소접은 곧 정신을 차리고 그 괴한을 쏘아 보았다.

 

그리고 그 괴한이 천용방의 황기 단주(黃旗壇主)인 왕한상(王寒湘)임을 즉시 알아보았다.

의외의 일에 격분한 그녀는 어떻게 하면 일격에 상대방을 물리치고 양몽환을 구할 것인지

머릿속은 번개처럼 돌아갔다.

 

갖가지 무술의 비법들이 엇갈리며 떠올랐다.

어떻게 하든지 양몽환을 구하자면 비상수단을 써야만 했다.

막상 여러 수법들이 떠오르기는 해도 진작 사용하자면 지나친 모험이 뒤 따르는 것이었다.

조소접은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여 만에 하나라도 실수 한다면 양몽환의 목숨은 아주 깨끗이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

초조해지기 시작한 조소접은 그만 온 몸에 진땀까지 흘렸다.

머릿속은 더 어지러워지고 좋은 방도는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조소접은 거의 실망하고 말았다.

아마 자기 평생에 이같이 안타깝고 초조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입술이 바짝 바짝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