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비연경룡

제 42 장 그들이 가야할 길은

오늘의 쉼터 2014. 6. 22. 14:53

 

제 42 장 그들이 가야할 길은

 

 

 

그러한 그녀의 얼굴에는 굳은 결의가 빛나며 찌푸려졌던 눈썹도 풀어졌다.

 

「그러면 장문 사백부님께서 저도 축출시켜 주십시오.

몽환 오빠 혼자 여기 남겨두면 어떻게 제가 마음을 놓을 수 있겠어요?」

 

  혜진자는 놀랐다.

 

「림아, 정말 안 가겠니?」

 

  하림은 고개를 힘 있게 끄덕거렸다.

 

「네! 사실 전 사부님을 떠나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나 몽환 오빠와 함께 가지 않으면 제가 돌아간다 해도 저는 곧 자리에 눕게 될 거에요.」

 

혜진자는 가슴이 섬뜩했다.

양몽환을 생각한 나머지 그녀의 말대로 병이라도 나면 큰일이었다.

억지로 그녀를 끌고 간다면 그녀를 도리어 해치게 될 것을 짐작하였다.

동숙정(童叔貞)도 사문을 배반하고 떠나간 후 지금까지 소식이 전혀 없는 중이었다.

이제 하림마저 떠나고 양몽환이 다시 곤륜파 문하로 돌아오기까지는

자기를 찾아 올 것 같지 않았다.

혜진자는 섭섭하기 끝이 없었다.

혜진자는 천진난만하고 보는 사람마다 사랑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하림에 대하여

사도정분(師徒情分) 이상의 것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혜진자는 깊이 탄식하며 신음하듯이 입을 열었다.

 

「그럼 네가 생각날 때 곤륜산 삼청궁(三淸官)으로 찾아오려무나.」

 

  그러자 하림은 천진하게 방긋 웃었다.

 

「저는 항상 사부님을 그리워하게 될 거에요._」

 

  석양빛 아래 그녀의 얼굴에 맺힌 눈물자국이 번쩍이었다.

그녀의 표정은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그런 착잡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굳은 결의만은 여전했다.

 

  혜진자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앞서가는 옥영자를 불렀다.

 

「장문 사형께서는 하림이 축출된 그의 사형 양몽환을 돌보게끔

며칠간의 여유를 주실 것을 앙망하나이다.

하림은 아직 천진하여 결코 본 파를 배반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순간, 옥영자는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하림은 사매가 제자로 삼기는 하였으나 아직 조사신상(祖師神像)에 정식으로

예를 올리지 않았으니 솔직한 말로 곤륜파의 문하라고는 할 수 없소.

그러니 모든 것은 사매가 알아서 처리 하시오. 자 우리는 갑시다.」

 

일양자와 혜진자는 곧 옥영자의 뒤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세 사람은 모두 무거운 심사에 잠기어 그 발걸음이 무척 무거워 보였다.

뒤돌아보지는 않았지만 미련이 남는지 느릿느릿 걸음을 떼어 놓았다.

 

하림은 넋을 잃은 사람처럼 그들의 사라져 가는 뒷모습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태양은 어느덧 서산으로 기울어 붉은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들과 산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았고 장엄하기까지 했다.

그것도 순간적인 것이었다. 곧이어 어둠이 닥쳐와 장막을 가렸다.

신(神)은 고의로 아름다움을 아끼는 듯이 모든 것을 어둠으로 가리고

처량하고 답답한 밤으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양몽환은 여전히 땅 위에 쓰러져 있었다.

하림은 백옥 같은 두 손으로 연신 그의 가슴을 쓸어 주고 있었다.

지난 수일간에 겪은 여러 가지 일들은 그녀에게 있어서 마치 한 자루의 비수와 같았다.

그녀의 순결한 심령(心靈)을 가슴 아프게 찔렀고 갈기갈기 찢어 놓았던 것이다.

그녀는 비로소 슬픔과 번뇌가 무엇인지 맛보았고 심지어는 인생이라는 것이

이토록 괴롭고 슬픈 것이라는 것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 흔하던 눈물도 메말라 버려 울지도 않았다.

 

하림도 이제는 아마 그만큼 어른다와졌다고나 할까!

 

이때, 나직하고도 힘찬 음성이 그녀의 뒤에서 불쑥 들려 왔다.

 

「그와 같이 온종일 주물러도 그를 깨어나게 할 수는 없다.

빨리 그를 일으켜 앉히고 명문혈을 주물러라.」

 

그런데 하림은 놀라지도 않고 목소리의 임자가 누구인지도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도 들지 않고 다만 양몽환의 몸을 부축하여 등 뒤에 있는 명문혈을 주물렀다.

 

과연, 즉각 효과가 있었다.

양몽환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사부님!」

 

하고 부르짖었다.

 

「사백부님과 사부님은 가셨어요.

다만 나 혼자 여기 남았을 뿐이에요.」

 

그때서야 하림은 등 뒤에 다른 사람이 와 있다는 것을 생각하였는지

얼핏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장검을 메고 도포를 입은 도사가 우뚝 서서 그녀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또 한분 도장이 여기 있어요._」

 

그 말에 양몽환은 벌떡 몸을 일으켜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 아닌 점창파의 장문인 번천안 마가홍이었다.

양몽환은 멈칫 몇 걸음 물러서며 경계를 하였다.

 

「왜 돌아 오셨습니까?」

 

  마가홍은 오만하게 웃었다.

 

「빈도가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흥! 자네는 아마 이 산중에 뼈를 묻히게 되었을걸.」

 

양몽환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하림에게 물었다.

 

「아니, 마도장이 나를 구했는가?」

 

「내가 추궁과혈(推官過穴)수법으로 오빠의 가슴을 문질러도 깨어나지 않더군요.

마침 이분 도장이 명문혈을 주무르라고 하시기에 오빠의 명문혈을 주물렀더니 겨우 깨어났어요.」

 

양몽환은 약간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마가홍에게 일읍(一揖) 하였다.

 

「저의 사매에게 저를 구할 방법을 가르쳐 주어서 감사합니다.

다음 기회가 있으면 꼭 은혜는 갚겠습니다.」

 

그 말만 하고는 마가홍의 대담도 기다리지 않고 하림의 왼손을 잡고 끌었다.

 

「가자.」

 

  그러자 마가홍은 오른쪽으로 두어 걸음 나오면서 그들의 길을 막아섰다.

 

「그냥 가려고? 천만에, 하하‥‥‥‥ 그리 쉽게 갈 수는 없을 걸.」

 

  양몽환의 눈썹이 날카롭게 치솟았다.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자네는 이미 곤륜파로부터 축출 당한 이상 새삼스럽게 곤륜파의 계율을

지킬 필요가 없지 않은가?」

 

엉뚱한 말에 화가 바짝 난 양몽환은 하림의 손을 놓고는 장검을 빼어 들었다.

 

「제가 곤륜파의 제자이든 제자가 아니든 도장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인데

부질없는 심려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길을 비키시지 않으면 억지로 뚫고 가겠습니다.」

 

「자네의 성질도 꽤나 거치른 것 같군.

그러나 자네의 그 검술 재간으로 과연 뚫고 나갈 수 있을까?」

 

  양몽환은 그 즉시 검을 번쩍 휘둘렀다.

행화춘우(杏花春雨)의 법이라 온 하늘에 검광이 퍼져 가득해 지면서 마가홍에게로 덮쳐 갔다.

 

이 검식(劍式)은 바로 추혼십이검 가운데의 삼대절수(三大絶手)의 하나인 비결이라

그 위력은 대단했다.

마가홍은 약간 놀랐다.

속으로는 과연 어지간히 재간이 있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외면으로는 태연한 채 싱긋 웃기까지 하였다.

그러면서 진기를 돋우어 우뚝  서 있는 자세 그대로 손이나 어깨도 한 번 들썩이지 않고

눈 깜짝할 새에 획! 하고 다섯 자나 물러나 양몽환의 검빛을 피했다.

 

양몽환은 상대방의 신법이 기묘절륜한 것을 그 즉시 깨닫고 속으로 무척 감탄했다.

재차 천운적월(穿雲摘月)의 수법으로 검과 한 덩어리가 되어 덮쳐갔다.

 

마가홍은 더 피하지 않았다.

그제야 오른손으로 장검을 쪽 빼어들고 공력을 검에 집중하였다.

장검에서는 삽시간에 은빛 무지개를 내뿜으며 양몽환의 칼끝을 막았다.

 

  <쨍!>

 

  뼈속에 스며들듯 금속성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양몽환은 단번에 여섯 일곱자를 튕기어 나갔다. 비록 장검을 놓치지는 않았으나 오른팔과 손바닥이 찌르르 저려 와서 검을 휘두를 수 없을 정도

였다.

 

「자네는 젊은 나이에 비해 무척 칼 쓰는 솜씨가 비범하군 그래 그만한 재간이 있다면 상대해

볼만 하군.

이제 빈도가 공격할 터이니 어디 받아 보실까?」

 

미처 얼굴에서 웃음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양몽환 앞으로 달려왔다.

오른손의 장검을 비스듬히 내밀어 양몽환의 장검을 막는 한편 왼손으로 양몽환의 손목을

재빨리 움켜쥐려고 하였다.

 

양몽환은 오른 팔이 몹시 저려 와서 마음대로 칼을 휘둘러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별수 없이 오행미종보(五行迷踐步)의 신법을 이용해서 몸을 슬쩍 비틀어 뒤로 돌아갔다.

 

마가홍은 장검으로 오른쪽을 막고 왼손으로 공격을 가하노라면 양몽환이 기껏해야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림자가 번쩍 하면서 뛰었는가 했을 때 자기의 왼손은 허공을 쥐었고 사람은

간 곳이 없지 않은가?

생각 이외의 절묘한 신법이라 마가홍은 간담이 서늘해 졌다.

그는 황망히 진기를 돋우어 앞으로 뛰었다.

등과 허리가 허전하고 불안하여서였다.

급히 돌아보니 과연 양몽환은 어느 틈에 자기의 등 뒤로 돌아가 서있지 않은가!

 

이때에 하림도 장검을 빼어 들고 일장 밖에서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양몽환을 도우려는 일념에서였다.

그러던 그녀가 뛰어들려 하다가 양몽환이 기기묘묘한 신법으로 상대방의 공세를

벗어나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녀는 신바람이 나서 웃음을 띠고 마가홍이 놀라는 모양을 유쾌히 보고 있었다.

 

마가홍은 천만뜻밖으로 갑자기 하림에게 덮치며 공격하였다

양몽환을 잡자면 무척 힘들 것같았다.

그 대신 하림을 느닷없이 공격하여 사로잡기는 쉬운 노릇이었다.

그렇게 되면 양몽환은 꼼짝 없이 자기의 지시대로 귀원비급을 찾는 일에

앞장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이와 같이 자기 뜻대로만 된다면 무공이 강한 주약란과 조소접들을 만난다 해도

그들이 쉽사리 공격해 오지 못할 것은 장담할 노릇이었다.

 

마가홍은 신기가 뛰어난 자였다.

주약란과 조소접의 언행으로 보아 그들이 필시 절벽 아래로 내려가 귀원비급을

찾을 것을 추측하고도 남았다.

 

만일 자기가 무턱대고 내려갔다가는 그녀들과 틀림없이 만나게 될 것이고

충돌을 면치 못할 것도 충분히 짐작하였다.

주약란은 재삼재사 경고한바 있었다.

어느 누구든 함부로 귀원비급을 탐내어 절벽 아래로 내려간다면 발견하는 즉시로

그 당장 격살(擊殺) 한다고 경고했던 것이다.

그러니 무작정 내려가 귀원비급을 찾는다는 것은 극히 위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만일 양몽환만 사로잡아서 앞장 세워 가게 되면 그녀들도 그때는 별 수 없이

자기에게 손을 대지 못할 것이었다.

이 같은 약은 계략을 생각하자 그는 곧 되돌아 와서 속으로 은근히 회심의 미소를 띠며

숨어서 살펴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좀처럼 쉬운 노릇은 아니었다.

우선 곤륜삼자가 속히 떠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몸을 숨긴 채 꼼짝하지 않고 행여나 하는 심사에서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자 예상한 대로 일은 들어맞아 갔다.

 

공교롭게도 옥영자가 주약란의 언사에 그만 비위를 상하고 만 것이다.

그의 장문인 신분을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장문인의 신분으로 양몽환을 추방시켜 버리고 말았다.

 마가홍은 그 광경을 숨어서 엿보다가 뛸 듯이 기뻐하였다.

얼마 후에 곤륜삼자가 양몽환과 하림을 놔두고 떠나버리자 일이 성사 된 거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귀원비급은 이미 자기의 수중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다고 까지 여겼다.

 

그러나 그는 혹시 곤륜 삼자가 정에 못 이겨 되돌아 올까봐 즉각 나오지는 않았다.

한참 후에야 별 이상이 없자 마음 놓고 나타났다.

그리고 하림에게 충고 하였던 것이다.

양몽환이 의식을 되찾아야만하겠기에 선심을 썼던 것이다.

  양몽환은 벌써 수개월 동안 세상 풍파를 여러 번 겪었고 연이은 사건에

갖가지 경험을 쌓다 보니 강호의 간사하고 험난한 인심을 몸소 터득하고 있었다.

마가홍이 하림에게 은근히 눈독을 들이는 것을 보고 즉시 이상한 눈치를 챘다.

그는 곧장 하림의 앞을 막아서며 야무지게 노려보았다.

 

「도장은 일파의 장문인의 신분임에도 강호의 무예계에서 지탄을 받을 잔재주를

부리려고 하는군요.

일개 연약한 소녀를 강제로 납치해서 인질로 삼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고수 체면으로

얼굴을 들고 어찌 천하 무예계 인사들을 대할 것입니까?」

 

마가홍은 자기의 비굴한 계략이 속속들이 양몽환에 의해 폭로되자

삽시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장검을 헛 휘두르며 딴 소리를 지껄였다.

 

「이 마가홍이 그렇게 비굴하지는 않아! 그건 오해야!

설마 너희들 후배를 간사스럽게 납치하려고 하겠니?

그러지 말고 너희들 둘이 힘을 합해서 덤벼 봐!

십 합 이내에 빈도가 이기지 못하면 두 말없이 그냥 돌아가겠다.

만일 빈도가 십 합에 너희들 둘을 이긴다면 자네들은 빈도의 명에 절대 따라야 한다.

어때? 그렇다고 자네들에게 상처는 주지 않을 터이니 안심해.」

 

양몽환은 코웃음 쳤다.

 

「싸운다면 일대 일로 정정 당당히 싸우시죠.

저의 사매까지 끌어 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흥! 저는 이미 도장의 엉큼한 마음을 충분히 짐작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니 도장은 혼자 속으로 너무 좋아 하지는 마십시오.

미안하지만 도장의 그 검은 속셈은 허망한 욕심에 불과하니까요.

지금들 벌써 사람이 내려가 귀원비급을 찾고 있을 겁니다.

사람은 떨어져 가루가 되었겠지만 책자는 가루가 될 염려가 없는 물건이 되어서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 하더라도 훼손되지 않을 터이니까요.」

 

  마가홍도 넉살좋게 맞받아 웃었다.

 

「실로 탄복할 고견이시군,

하하. 어찌됐던 빈도는 그것을 손에 넣고야 말겠어!

그렇다고 그 책자를 혼자서 독점하려는 것은 아니지.

자네가 나를 충심으로 도와 그 책자를 찾게 된다면‥‥‥」

 

  양몽환은 그 말을 가로 막으며 손을 흔들었다

 

「고마우신 말씀이나 본인은 그 귀원비급에 아무런 흥미도 없습니다.

수백 년 동안 그 귀원비급 때문에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쓰러져 갔다는

사실을 상기 하십시오.

또한 도장께서도 두 눈으로 분명히 보셨겠지만 그 책자를 지닌 사람은

수천 길 절벽 아래로 떨어져갔습니다.

아마 아직도 그 시체의 온기가 채 사라지지 않고 있을 겁니다.

 본인은 도장께서 나를 도와준 것이 고마워 그나마 충고하는 말씀이니

아예 단념하십시오.」

 

「자네의 그 충고는 고마우나 모든 일을 일률적으로 논할 수는 없는 것이야.

귀원비급이 누구의 소유가 되느냐에 따라서 한두 사람의 생사 문제가 아닌

전체 무예제의 흥망이 결정되는 것이야.

우리가 그 귀중한 비급을 찾으러 내려가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이 내려가고 말겠지.

만일 그 비급이 갖지 못할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면 이십년 내에

강호에는 비참한 일대 재난이 일어나게 될 것이네.

빈도가 그 비급을 찾자는 것은 실로 무예계의 정의를 위하자는 것이야.」

 

  마가홍은 입술에 침을 바르고는 다시 계속했다.

 

「빈도는 벌써 이십년 동안이나 은거하였던 몸이기도 해.

강호의 시비에는 일체 관여하지도 않았으며 그 동안의 수양으로

터럭 끝만큼도 더러운 야심이란 것을 가진바 없고 말이야.

만일 자네가 나를 도와 비급을 찾게만 된다면 자네 앞에서

서슴없이 찢어 버리거나 태워 없애겠네.

이는 대자대비의 선행인바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양몽환이 잠깐 생각해 보는 눈치였다.

 

「도장의 말씀도 퍽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몸은 곤륜파의 제자로서 도장을 도울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합니다.

만일 도장께서 굳이 그 비급을 찾으시겠다면 마음대로 혼자 하십시오.」

 

  마가홍의 얼굴빛이 사납게 변하여 갖다.

 

「자네가 곤륜파의 장문인으로부터 축출 당한 것을 빈도가 친히 본 바야.

곤륜파의 계율은 이미 자네의 행동을 구속할 수 없잖은가?

그리고 빈도는 솔직히 비급을 찾을 일을 탁 털어 놓았는데

자네들이 가버린다면 빈도의 계획도 누설되고 말 것이 아닌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대로 돌려보낼 수야 없지.

공연히 늙은이가 어린 사람들을 보고 핍박한다고 원망하지 말라.」 .

 

그는 은연중에 공력을 집중하고 있다가 말이 끝나자마자

대뜸 장검을 휘둘러 양몽환에게 맹렬한 기세로 찌르며 달려들었다.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가하는 공세인 만큼 번개와 같이

빠르고 폭풍같이 매서웠다.

 

양몽환은 여러 번 이 같은 불의의 공격을 당해본 경험이 풍부해서

그만큼 눈치도 빨라지고 경계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다.

양몽환도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던 중이었다.

마가홍이 달려들자 즉각 하림을 붙잡고 다섯 걸음이나 물러섰다.

그리고는 장검으로 운무금광(雲霧金光)을 써서 맹렬히 휘두르며

장막을 이루고는 그들 자신을 보호했다.

  그러나 마가홍은 싸늘한 코웃음을 치며 더욱 힘을 주고

맹렬히 양몽환의 장검을 후려치는 것이었다.

  칼과 칼이 불꽃을 튕기었다.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리면서 공력의심한 차이로 양몽환의 장검이

튕기듯이 한쪽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빈틈이 드러나자 마가홍은 놓치지 않고 즉시 오른 팔을 휘둘러 대었다.

순간에 천간풍뢰(天千風雷) 검법의 한 수인 삼성축월(三星逐月)을 전개하였다.

칼끝으로 세 개의 별꽃을 그리며 노리다가 양몽환의 앞가슴 세 곳의 요혈을

찌르며 달려들었다.

 

양몽환은 자기의 장검이 맞부딪치며 다시 날아갈듯 튕기자 당할 수 없음을 알고

재빨리 몸을 돌렸다.

급한 김에 오행미종보법의 신법으로 마가홍의 공세를 피하고

그 즉시 그의 등 뒤로 돌아서 왼손으로 마가홍의 왼쪽 어깨를 노리고 손을 번쩍 쳐들었다.

  마가홍 역시 이름난 무예가였다.

대뜸 그 눈치를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오른손의 검을 휘둘러서 몸을 보호하고는 왼손으로 질풍같이

하림의 손목을 노리고 뻗쳤다.

 

하림은 이때 양몽환의 장검이 마가홍의 일격에 맥을 추지 못하고 튕기어

한 쪽으로 달아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가홍과 같은 대가(大家)가 이 순간을 놓칠 리가 없었다.

 

아차! 하는 순간,

 

하림의 손목은 마가홍에게 움켜잡히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마가홍은 하림의 손을 쥔 채 한 쪽으로 비켜섰다.

 

마가홍으로서는 양몽환의 공격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옆으로 비켜선 것이었다.

그러나 양몽환의 오행미종보 신법이 얼마나 오묘한 것인지를

그로서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하림의 손목을 움켜쥐고 한옆으로 비켜섰지만

어느새 그림자같이 따라온 양몽환의 왼손에 그의 어깨는 붙잡히고 말았다.

양몽환은 노기를 띠고 고함쳤다.

 

「빨리 사매의 손을 놓으시오!」

 

  마가홍은 자기가 재빨리 피했는데도 어느새 그림자 같이 따라 붙어서

공격하는 양몽환의 신법에 깜짝 놀랐다.

듣도 보도 못한 신법을 가진 양몽환이 애초부터 그 신법으로

지구전을 벌렸다면 승부는 예측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감탄까지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림의 오른 손목을 잡은 왼손에 더욱 힘을 주는 한 편,

왼쪽 어깨를 감아쥔 양몽환의 왼손에 대항하려고 진기를 돋우었다.

그는 강기(?氣)로 몸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몸은 상처입지 않을 것이라고

단단히 믿고 있기도 했다.

 

「아야야!」

 

  눈썹을 모으고 신음 소리를 내지르는 하림의 이마에서는 땀이 솟았다.

양몽환은 상대방이 전혀 자기가 경고한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보자 화가 바짝 났다.

손바닥에서 아직 내뿜지 않고 모아두었던 잠력(潛力)을 써서 사정없이

마가홍의 어깨를 힘껏 내려쳤다

 

「윽!」

 

  순간, 마가홍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터지면서 양몽환의 내공잠력(內功潛力)에

앞으로 비틀대며 밀려나갔다.

마가홍은 그나마 정순한 내공강기(內功?氣)의 호신으로 내장에 별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어깨가 내려앉는 듯한 아픔을 느꼈던 것이었다.

 

그 반면, 양몽환도 비록 상대방을 뒤로 밀어내기는 하였지만

마가홍이 튕겨내는 반탄력(反彈力)에 여섯 일곱 걸음을 뒤로 물러나야 했으며

전신의 기혈이 솟구침을 느꼈다.

  마가홍이 고개를 돌려 양몽환을 쳐다보며 흉악스럽게 으르렁댔다.

 

「다시 빈도에게 공격했다가는 흥! 자네 사매에 대한 빈도의 처사를 원망하진 마라.」

 

「도장은 적어도 일파 장문인의 신분입니다.

연약하고 나이 어린소녀에게 손을 댄다니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마가홍은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흥! 귀원비급을 찾는다는 것은 무예계의 흥망성쇠에 관한 중대한 일이야.

예사 일반 은원간의 시비와는 그 성질이 다르단 말이야.

그러니 빈도로서도 부득이 편법(便法)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거지.

어쩌다 다른 인사들이 안다 해도 양해할 것이니

빈도의 양심에 비추어 봐도 부끄러워 할 이유는 없는 거야.」 

 

마가홍은 한층 더 하림을 움켜잡은 왼손에다 힘을 주었다.

하림의 얼굴빛은 핼쑥하니 핏기를 잃었다.

그렇건만 그녀는 독한 마음을 먹고 눈을 감은 채 입술을 꼭 깨물며 힘껏 참고 있었다.

 

양몽환은 애처로운 그 모습에 창자가 뒤집히는 마음의 고통을 느꼈다.

은연중에 운기조식하여 빈틈을 엿보아 전력을 기울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가홍의 생각에는 하림이 이제 곧 극도의 아픔을 참지 못하고 끝내는 양몽환에게

자기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라고 애원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 순진하고 연약하게만 보이는 아가씨가 일단 위협과 고통에 임하자

강한 인내력을 발휘하는데 놀랐다.

 뼈가 부서지는 듯한 아픔도 참고 신음소리 한마디 내지 않으니 우습게 여겼던

그에게는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마가홍은 하림이 더 이상 자기의 힘을 받으면 견디지 못하고

손목의 뼈가 으스러질 것을 염려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더욱 하림의 인내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하림은 두 눈을 번쩍 떴다.

 

두 줄기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웃기까지 하였다.

 

「오빠, 혼자 가세요.

이 도사님은 재간이 강대하여서 오빠로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에요.

귀원비급은 조소접 아가씨의 물건이니 우리가 그의 지시를 받으며

골짜기 밑으로 내려갈 수는 없는 거예요.

지난 이개월 동안에 저는 예전 십년 동안 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해 보았어요.

그러나 아직까지 오빠에게 그것을 말할 기회가 없었어요.」

양몽환은 더 이상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장검을 휘두르며 크게 소리쳤다.

 

「죽어도 같이 죽자!」

 

양몽환의 몸은 검과 한 덩어리가 되어 비호같이 마가홍에게 달려들었다.

마가홍은 장검을 들어 막고는 다급하게 세 걸음 물러나면서 장검으로

하림의 앞가슴을 겨누고 들어갔다.

 

「가만있어! 다시 덤볐다간 자네 사매의 생명은 부지 못할 걸.」

 

그 협박은 치명적이었다.

양몽환은 그만 가슴이 섬뜩하였다.

완전히 투지를 잃고만 양몽환은 장검을 내 버리려고까지 하였다.

그러자 하림이 소리쳤다.

 

「이 도사분은 절대로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만일 귀원비급을 이도사가 얻는다면 더 무서운 재간을 배워 나쁜 일을 많이 하게 될 거예요.」

 

하림은 마가홍을 노려보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오빠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또 내가 죽게 되면 그

대로 내 버려두지 않을 것도 알아 그 약점을 잡고 일부러 나를 죽인다고 협박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귀원비급을 찾는데 우리를 이용할까 하고 그 약속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에요.」

 

마가홍은 눈을 부릅뜨고 화를 냈다.

 

「누가 고의로 너를 죽인다고 그랬어!」

 

화를 못 참아 장검을 앞으로 조금 들이 밀자

싸늘한 칼날이 하림의 흰옷을 뚫고 들어가 살결이 베어지고 선혈이 흘러 나왔다.

 

양품환은 기겁하며 소리 질렀다.

 

「도장어른! 잠깐 손을 멈추시오.」

 

  그와 때를 같이해서 하림이 눈물겹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양몽환의 다음 말을 막았다.

 

「오빠, 여태껏  전 오빠의 어떤 말이든 잘 들어 왔지 않아요?

그 대신 오늘 만은 꼭 제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양몽환은 그녀의 표정이 예전과는 판이한 것을 보고 가슴이 뜨끔 했다.

 

「? ‥‥‥」

 

「이 도사님은 귀원비급을 찾고 싶긴 하지만 골짜기에서 혹시 대언니와

소접 아가씨를 만날 것을 겁내는 거예요.

그래서 오빠와 같이 가기 위해서 이토록 나를 죽인다고 오빠를 협박하는 거예요.

만일 대언니를 만나게 되면 그는 다시 오빠를 죽인다고 대언니를 위협할 거 아녜요?

대언니는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결코 오빠가 죽는 것을 내버려 두지 못하고

이 도사님의 명령에 복종하게 되고 말 것이에요.

그렇게 됨으로서 귀원비급을 소원대로 손에 넣게 되겠죠.

대언니는 우리들에게 수없는 은혜를 베풀어준 분이에요.

막상 우리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 언니를 괴롭게 하여 줄 수는 없어요.

그러니 오빠는 저의 말을 평생 한 번만 들어주시는 것으로 아시고 여기를 떠나 주세요.」

말을 마치고 웃기까지 하였다. 그 얼굴에는 마치 매우 기쁜 일이라도 해치운 듯이

만족한 빛마저 감돌았다

양몽환은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죽음을 겁내지 않고 오히려 기쁜 빛마저 띄우니

양몽환은 간절하게 말하는 그녀의 말을 거역할 수도 없어 어쩔 줄을 몰랐다.

마가홍은 양몽환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불과 같은 화가 솟구쳤다.

 

「빈도는 오랫동안 살계(殺戒)를 범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자네 앞에서 살계를 범하여 보겠어.

흥, 자네 사매가 제 아무리 순진하다 해도 무쇠로 이루어진 사람은 아니겠지?」

 

암암리에 공력을 집중하여 참혹하기 비할 데 없는 분근착골수법(分筋錯骨手法)을 사용하여

하림의 관절을 빠지게 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하림의 입가에는 함박웃음을 띠우고 있었고 아름다운 눈매에는 숭고한 광채마저

고요히 떠돌고 있었다.

의를 위해서는 기꺼이 몸을 버릴 수 있는 기개(氣槪)가 기품도 당당히 어리어 있었다.

도리어 마가홍의 가슴이 섬뜩하여 부지중 하림의 손목을 놓아주고 세 걸음이나 물러서고 말았다. 심지어는 손에 든 장검을 거두어들이기 까지 했다.

 

「자네들은 가게나! 나 마가홍도 당당한 대장부인데 정말로 연약한 여자를 핍박할 수는 없지.」

 

양몽환은 즉시 몸을 날려 하림의 옆에 붙어 서서 공손히 읍했다.

 

「도장께서 오늘 너그럽게 처분을 하여 주시니 후일에 꼭 보답하여 드리겠습니다.」

 

  하림도 알 수 없다는 듯이 마가홍을 쳐다보고 감격해 했다.

 

「아니, 저를 죽이지 않는 거예요?」

 

하다가 갑자기 깨닫기라도 한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아, 도사님도 좋은 분이었군요!」

 

  마가홍은 하림의 이 몇 마디가 마치 비수인양 그의 마음을 찔러 오는 것을 느꼈다.

속으로 극히 부끄러워진 그는 홱 몸을 돌이키고는 그길로 달려가고 말았다.

  하림은 달려가는 그의 등 뒤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왜 그냥 가세요?

우리 몽환 오빠를 구해 주신데 대하여 감사한 말씀도 드리지 못했는데?」

 

  그러나 마가홍은 질풍같이 사라져 가고 말았다.

하림의 외침을 바람결에 들었으리라. 양몽환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아무리 교활하고 간특한 사람이라도 너에게는 이상하게 손을 대지 못하는구나.」

 

  점점 어두워 오는 노을 속에 흰 옷자락을 펄럭이며

하림은 마가홍이 사라져간 곳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양몽환은 문득 눈앞의 이 소녀가 천사와 같이 성스럽고 고결하게 느껴 겼다.

자기 자신은 그녀와는 도저히 백수해로(白首偕老)의 자격이 없는 듯한 자격지심마저 느껴졌다.

그는 더 그녀를 쳐다볼 수가 없어 황망히 고개를 돌렸다.

  하림은 다소곳이 한숨을 내 쉬었다.

 

「사백부님들과 사부님이 떠나실 때에는 그렇게도 천천히 가셨는데

저 도장은 저렇게도 빨리 가시는군요.」

  비록 단순한 한마디였지만 극히 심오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 한마디였다.

  이에 양몽환은 즉각 자기가 문과에서 축출당한 사실 등을 상기하고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그러자 갑자기 양몽환은 산 속 깊숙한 굴속에 혼자 남아있던 동숙정을 생각하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때, 향긋한 향기가 스며들면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동체가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하림이 그의 가슴을 파고들어와 생긋이 웃었다

 

「오빠, 무슨 일을 생각했어요?」

 

  양몽환도 슬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동사매(童師妹)가 생각났어. 우리 가보자.」

 

  하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어디 있어요? 빨리 가요._」

 

  양몽환은 이 천사와 같은 사매에 대하여 미안하기 끝이 없었다.

 불현듯 치미는 자격지심에 그는 가만히 그녀를 떠밀어내고는 몸을 돌려 앞으로 달려갖다.

그러나 하림의 달콤한 음성이 곧 들려왔다.

 

「오빠!」

 

  양몽환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하림이 재빨리 달려와 옆에서면서 백옥같은 손을 내밀었다.

 

「나를 붙잡고 가요. 네?」 

 

  양몽환은 자격지심으로 그의 살을 하림의 살결에 닿게 하고 싶지 않았다.

몰래 탄식하고 그녀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그러자 오히려 하림이가 방긋 웃으면서 양몽환의 손목을 잡았다.

 

「가요!」

 

  두 사람은 손을 마주잡고 달려가면서 서로 기분이 달랐다.

하림은 활짝 개인 얼굴에 웃음을 담뿍 머금고 있는 것이 한껏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온통 얼굴 가득히 불안한 빛으로 물들어서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

쩔쩔매는 것이었다.

  밤의 장막은 어느덧 짙어오고 불어오는 산바람이 차가왔다.

초생달이 밤하늘에 비스듬히 떠 있었다.

하림은 때때로 얼굴을 돌려 양몽환의 얼굴을 훔쳐보기도 하였다.

양몽환의 표정은 여전히 침울하고 딱딱하기만 했다.

그때마다 몇 번이나 말을 걸려다가는 그만 두었다.

따라서 하림의 천진난만한 얼굴에도 웃을 빛은 사라지고 우수와 곤혹의 빛이 짙어갔다.

  두 사람이 달린지 한 식경. 이윽고 낯익은 동굴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양몽환이 먼저 손을 빼었다.

 

「사매는 나의 뒤를 따라 와.」

 

  오는 길에 그는 하림과 단 한 마디의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양몽환은 하림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굴 안은 한치 앞을 가릴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사물을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양몽환은 두 번이나 왔던 곳이라서 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여전히 빠른 속도로 들어갔다.

  하림은 양몽환의 뒤를 바짝 쫓아갔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이 태산 같았으나 말이 잘 나오지 않을 뿐더러 양몽환이

앞으로만 내달리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얼마동안 달리자 굴속도 넓어지고 어둠에도 익숙해졌다.

하림은 양몽환과 나란히 서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그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양몽환은 멍하니 공허한 얼굴에 눈물을 비 오듯 흘리지 않는가?

  하림도 순간적으로 멈칫했다가 즉각 양몽환의 품에 뛰어 들면서 격한 어조로 물었다.

 

「오빠! 왜 이래요?」

 

 그녀는 양몽환의 표정이 아미산(蛾嵋山) 속에서 크게 병을 얻었을 때와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때는 주약란이 옆에서 같이 양몽환을 지키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녀 혼자였기 때문에

당황하고 놀란 것이다.

 

양몽환은 두 손으로 뛰어드는 하림의 몸을 붙잡으며 처량하게 웃었다.

 

「하림사매, 나는 굉장히 말하기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어.

사매가 들으면 사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몽환이 결코 사매가 생각하고 있듯

깨끗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야. 그리고 다시는 나를 더 보려고도 하지 않을 거야.」

 

하고 말하는 것을 듣던 하림은 혹시 정신에 무슨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이 되었다.

 

「오빠는 이상한 말을 하시네, 저의 마음을 모르시지 않으면서 ‥‥

오빠만 옆에 있으면 저는 아무래도 좋아요‥‥‥」

 

하고는 다시 말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빠는 저를 모르는 척 하지 마세요.」

 

  그녀는 갑자기 어젯저녁 양몽환과 이 굴 밖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당한 무안을 상기하고 그만 마음이 섬뜩하였던 것이다.

  양몽환은 손을 들어 앞에 석실을 가리켰다.

 

「저 석실이 보이지?」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과연 석실이 있고 석실의 문이 열려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참 좋은 곳이네요.」

 

  양몽환은 하림을 이끌고 석실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한 그의 거동은 마치 큰 병을 않고 난 사람처럼 전신을 와들와들 떨며 두 다리가

자기의 몸을 지탱할 수 있는 듯 휘청거리는 것이었다.

  하림은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었으나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라

잠자코 양몽환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양몽환은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는지 하림에게 고개를 반쯤 돌리고는

 

「아니, 우선 동사매를 만나본 후에 이야기 하지.」

 

  그러자 하림은 양몽환의 태도가 다시 본래대로 돌아가는 것에 활짝 웃으며

 

「나는 언제든지 오빠의 말을 듣겠어요.」

 

  그들은 걸음을 빨리하여 석실로 뛰어 들어갔다.

 

  양몽환은 품에서 준비해온 화통(火筒)을 꺼내어 불을 켰다.

그러자 석실이 환히 밝아졌다.

  석실 한 쪽에는 여전히 부드러운 풀들이 깔려 있었고

또 찢어진 옷자락도 눈에 띄었다.

꿈과 같은 지난밤의 기억이 양몽환의 안막에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양몽환은 하림을 쳐다보며 말을 할 듯 하다가는 그만 두고 재빨리 뒤쪽 벽으로 달려가

손으로 땅바닥을 더듬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석환(石環)을 잡고 끄집어내니 퍽 하는 음향과 함께 돌문이 열리고

그 벽 밑으로는 두자 정도의 네모난 땅굴이 나타났다.

 

「오빠! 어떻게 여기 돌문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자 양몽환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하림을 돌아보며 부드럽게 말하는 것이었다.

 

「동사매를 만나면 모든 것을 사매에게 말해 주겠어.」

 

하고는 땅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뒤를 하림도 따라 들어갔다.

 

그러나 땅굴 안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하림이 바짝 따라 뛰어 내렸기 때문에

양몽환에게 부딪치고 말았다.

 

양몽환은 그녀가 여전히 자기를 예전과 같이 신임하고 마치 자기와 같이 라면

지옥 끝까지라도 주저하지 않고 따라 가겠다는 태도에 죄악감 외에도

미안한 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오른손의 화통을 왼 손으로 옮기고 오른손으로 그녀를 붙들었다.

한 손으로만 붙잡았기 때문에 하림은 완전히 양몽환에게 안기고 말았다. 

하림은 방긋 웃으면서

 

「오빠 무겁죠?」

 

  부드러운 소리에 양몽환은 황망히 그녀를 놓고 몸을 돌려 앞으로 달려갔다.

얼마 안가 다시 돌문을 열자 나타난 것은 바로 양몽환과 동숙정이 만났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텅 비어 동숙정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양몽환은 화통을 높이 들고 아무리 살펴보았지만 동숙정이

어떻게 실종되었는가를 알만한 단서나 흔적은 없었다.

 

하림은 줄곧 석실의 한 옆에서 양몽환이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을 보자

 

「오빠! 무엇을 생각하세요?」

 

하고 묻는데 양몽환은 갑자기 발로 땅 바닥을 쾅 치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그가 동사매를 죽이고 시체를 다른 곳에 옮겼을 거야.」

 

「그라니요? 누군데?」

 

「도옥(陶玉)이 말이지.

그는 동사매의 혈도를 짚고서 이 석실 속에 감추어 두고는 나에게

화골소원산(化骨消元散)을 강제로 먹‥‥」

 

하다가 뚝 그치며 쓸쓸히 웃고는 하림에게

 

「그만 나가자, 우선 이곳을 떠나야지.」

 

「나는 오빠와 도옥과는 친한 친구인줄로만 생각했어요.

그래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에도 그런 악한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

 

「아마 곧 나도 나쁜 사람임을 알게 될 거야!」

 

하고는 하림의 왼손을 붙잡고 그들이 왔던 길로 되돌아섰다.

그리고 얼마 후에 맨 먼젓번의 그 석실에 도달했다.

 

양몽환은 하림을 어느 구석에 앉혔다.

그리고 자기도 옆에 앉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하림 사매, 오늘 저녁에 내가 가슴속에만 간직하고 있는 괴로운 일을 말하겠어,

그 이야기를 들은 후 이 사형(師兄)의 마지막 부탁이니 대(黛)언니에게

너를 현옥에 태워 곤륜산까지 데려다 달라고 해줘.」

 

  하림이 웃으며

 

「사부님은 저에게 언제든지 오고 싶으면 곤륜산으로 돌아오라고 하였지만

나는 오빠를 떠나기 싫어요.」

 

「나는 비록 장문사숙님으로부터 축출선고를 받았지만 아직 곤륜파의 제자인 것 같아.」

 

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원래 순결한 사매에게 이와 같이 불결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지 않았지만

이 못난 사형(師兄)을 여전히 아름답고 착한 인간으로만 생각하고 기대를 가질까봐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말하는 거야.」

 

「오빠!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자꾸 이상한 말씀만 하시네요.

나는 오빠가 하는 이야기는 다 이해할 수 있어요.

무슨 말이든지 주저 말고 이야기 해 주세요.」

 

하고는 애정 어린 눈으로 양몽환을 쳐다보며 가만히 그에게 몸을 기대는 것이었다.

 

그러자 양몽환이 약간 물러나 앉으며

 

「어제 나와 만났을 때에 나는 사매를 실수하여 땅바닥에 쓰러지게 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비굴하고 마음이 괴로웠지?」

 

「아이, 그때에는 오빠가 다시는 나와 상대하지 않을 줄 알고 무척  괴로웠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벌써 잊고 있었는걸요. 뭐.」

 

하고는 생긋 웃으며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자는 듯이 일어나

양몽환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굴 밖을 나서자 초생달을 쳐다보며 하림은 행복한 듯이 웃었다.

그리고 다시 달을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은 무한한 애정과 부드러움이 넘쳐흘렀다.

 

이와 같은 하림을 바라보던 양몽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순결한 사람에게 나의 부끄러운 죄과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실로

그녀의 순결성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면 너무나 내 마음이 괴롭고‥‥‥)

 

  생각하는 양몽환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사실 이요홍과의 관계를 말하려는 것이었다.

생각하고 다시 생각한 끝에 모든 일을 솔직하게 말하기로 결심했다.

솔직하게 모든 이야기를 하는 것만이 그녀의 마음속에 남겨진 아름다운

인상이 파괴될 것이고 또 연모하는 마음에서 멸시로 바뀌어질 것이기에

비록 그녀의 순결을 모독하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을 결정하고 하림을 돌아보니

하림은 입가에 웃음을 띠우고 초생달을 바라보고 있었고

달빛은 교교히 그녀의 하얀 옷과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비쳐주고 있었다.

 

그때 하림은 양몽환에게 매달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달도 둥글 때와 이지러질 때가 있는 것과 같이

인생에 있어서도 행복할 때와 불행하고 번뇌가 있을 때가 있군요.」

 

양몽환은 그녀의 기다란 머리카락에 마른 잡초가 붙어있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그 풀을 떼어 주었다.

 

 이때 하림이 고개를 돌리고 방긋 웃었다.

 

「오빠, 하늘의 달도 항상 둥글지 못하는데 나는 항상 오빠 옆에 있을 수 있으니

달보다도 더 행복해요.」

 

양몽환은 가슴 속에 뜨거운 것이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전신을 부르르 떨며 뒤로 두어 걸음 불현듯 물러서는 것이었다.

 

하림이 아! 하고 놀라 외치며 달려와서 양몽환을 붙잡고는 매우 안타까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며 호소하듯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대 언니 같은 재간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오빠가 병이 날 때마다 고칠 수도 있고‥‥‥‥」

 

그러자 양몽환은 자책감에서 더 이상 하림과 함께 있을 수 없다고 결심했다.

그리고는 태도가 돌변하고 말았다.

 

「사매는 내가 좋아?」

 

「아니, 오빠는 정말 몰라서 물어요?」

 

「그러나 나는 너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아, 하! 하! 자, 빨리 이곳에서 떠나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좋겠어.」

 

하고 미친 듯이 소리치며 웃는 것이었다.

 

  하림은 너무나도 놀라고 당황하여 수정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몸부림치는 것이었다.

 

「오빠! 진정이세요. 정말 제가 보기 싫어요?

그렇다면 저는 오빠의 말대로 떠나겠어요.」

 

하고는 가만히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침착한 것이 조금도 충격을 받은 사람 같지 않았다.

 

양몽환은 점점 사라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마치 가슴을 칼로 에는 듯 하고 그녀의 한발자국 한발자국이

천근 무게 의 쇠망치가 되어 가슴을 치는 듯하였다.

 

그는 가슴 속에 치밀어 오르는 고통과 괴로움을 누르려고 하였으나

끝내 가벼운 기침과 함께 붉은 선혈을 토하고 말았다.

 

그의 기침 소리를 들은 하림은 고개를 돌려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계속해서 걸어갔다.

 

양몽환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그녀를 불러 세우려고 하였으나

목이 꽉 막혀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는 과오를 저지른 자기의 불결한 몸이 순결한 소녀와 같이 있다는 것에

그녀의 순결성을 모독 하는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녀 혼자 이 깊은 산중에

내버려 둔다는 것이 불안하기 끝이 없었던 것이다.

 

점점 하림의 모습은 멀어지고 그나마 나무와 어둠에 가리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한 양몽환은 한동안 숙고한 끝에 그녀의 뒤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그는 하림의 뒤를 따라 그녀가 주약란이 있는 처소로 혹은 안전한 곳에 이르기까지

몰래 보호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렇게 작정하자 격동했던 심정도 약간 진정되었다.

땅에 앉아 잠깐 동안 눈을 감고 조식한 뒤 하림이 간 길을 쫓아갔다.

 

그는 혹시 하림이 멀리 갔을까 하여 재빨리 달려갔다.

그러나 곧 앞에서 천천히 걸어가는 하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천천히 걸어가는 하림의 하얀 옷자락과 검고 기다란 머리카락이 가볍게 바람에 날리는

그녀의 뒷모습이 무척 쓸쓸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림이 걸어가고 있는 방향은 주약란이 살고 있는 천기석부(天機石府)와는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양몽환은

 

(아니? 어떻게 방향도 분별 못하나? 어디로 가는 길일까?‥‥)

 

하고 혼자 중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알 수가 없어 그녀의 뒤를 따르기만 했다.

 

하림은 여전히 한발 한발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었고

그녀의 모습은 밝은 달빛 아래 더욱 처량해 보였다.

두 사람은 서로 무거운 심정이 되어 앞으로만 걸어가고 있었다.

하림은 발길 가는대로 걷는 모양으로 어디를 가겠다는 목적이 없는 것 같았다.

 양몽환은 비록 무거운 심사에 머리가 혼란되어 있으나 암암리에

하림을 보호한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 하림의 하얀 옷자락을 목표로

따라 가고 있었다.

얼마만의 시간이 흘렀는지 어느 절벽 아래 몇 그루의 커다란 소나무가 서 있고

푸른 잔디가 깔려 있는 곳에 이르자 하림이 우뚝 발길을 멈추고는

가만히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그리고 커다란 소나무에 기대고 앉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두어 장 밖에서 그녀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림이 황량한 산 속에서 소나무에 등을 반쯤 기대고 몸을 누이는 것을 보자

갑자기 불안해졌다.

양몽환은 급히 진기를 돋우어 소나무 밑으로 달러갔다.

하림은 눈을 감고 코를 고는 것이 그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홀연, 하림이 몸을 뒤척이면서

 

「오빠, 정말 다시 저와 만나지 않으려고 하세요?」

 

하고 중얼거리는 그녀의 눈에서는 수정과 같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순간, 양몽환은 하림이 자기를 발견한 것이나 아닌가 하고 황망히 소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하림은 꿈을 꾼 것인지 그 다음에 아무 기척이 없었다.

  양몽환은 고개를 들고 나무 위에 몸을 숨길만한 곳을 발견하고 단번에 몸을 솟구치어

뛰어 올라 그곳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그는 속으로

 

  (어떻게 하면 하림이 알지 못하게 천기석부가 있는 곳으로 가게 할 수 있을까?

주약란과 만나기만 하면 나의 일은 끝나 마음 놓고 떠날 수 있겠는데 ‥‥‥)

 

하고 궁리해 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렀다.

 

깜짝 놀란 양몽환은 총총한 별빛 아래 한 사람의 그림자가 질풍같이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밝은 초생달은 이미 서산 너머로 지고 별빛 밖에 없어 달려오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기는

극히 어려웠다.

그 사람이 소나무 있는 곳까지 달려와서야 양몽환은 바로 조금 전에 자기가 찾았던

동숙정인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가만 가만 하림의 옆으로 다가가서 한동안 내려다보고는 허리를 굽히고

하림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면서

 

「림사매, 림사매!」

 

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천천히 눈을 뜬 하림은 한동안 동숙정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아! 정아 언니! 언니는 옷을 바꿔 입었군요. 얼른 알아보지 못 하겠네요.」

 

  동숙정은 하림의 옆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으면서 하림의 왼손을 잡고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나는 원래 내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서 도포를 벗었어.

그런데 넌 어떻게 이런 황량한 산 속에 혼자 잠자고 있니?

양사제(楊師弟)는 어디 갔지?」

 

「몽환 오빠 말이에요? 나를 다시 안 보겠다고 하기에 말 듣지 않으면

화낼 것 같고 해서 오빠 말대로 헤어졌어요.」

 

하는 말에 동숙정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사매를 안 보겠다는 걸까?」

 

「저도 모르겠어요. 다만 가라고 하더군요.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말을 어떻게 듣지 않을 수 있어요?

말을 듣지 않으면 화를 낼 거예요.」

 

  그러자 동숙정은 비웃는 듯한 어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흥! 남자들이란 결코 믿을 수 없어,

틀림없이 그는 그 주(朱)가라는 여자에게 반해서 너를 버렸을 거야.」

 

  나무 위에 숨어서 듣고 있던 양몽환은 동숙정의 말에 천근의 철추로

가슴을 얻어맞은 듯 아찔했다. 그러나 하림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언니 말이에요? 언니가 모르는 말씀이에요. 그런 말씀은 마세요.」

 

  동숙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 멍하니 하림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너는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다.

사랑을 빼앗아간 사람에게도 그렇듯 관대하게 용서해 주니‥‥‥」

 

  그 말에 하림은 동숙정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으며 흐느끼는 것이었다.

 

「몽환 오빠는 나와 다시 만나지 않으려고 하지만 나는 영영 잊지 못할 거예요.」

 

「양사제는 지금 어디 있지? 나하고 같이 가. 가서 따져봐야겠어.」

 

  그러다가 동숙정은 얼핏 저녁 양몽환이 술에 크게 취한 듯한

기이한 표정과 태도를 생각하며 음성을 낮추었다.

 

「양사제에게 무슨 별다른 이상한 점은 없어?」

 

  하림은 고개를 흔들며 눈물을 닦았다.

 

「아니, 아무렇지도 않아요.」

 

하고는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군요. 장문 사백부님에게 축출선고를 받았어요.」

 

  그 말에 동숙정은 펄쩍 놀랐다.

 

「아니, 왜?」

 

「대언니와 장문 사숙님과 크게 논쟁을 하고 화가 난 장문사숙님께서

오빠에게 축출선고를 내렸어요.」

 

「사매는 그럼 양사제를 찾으러 가지 않겠어?」

 

「다시 만나지 말자고 하는 걸 내가 찾아가면 오빠는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책망할거에요.」

 

「그럼 나하고 같이 가, 산 좋고 물 맑은 곳을 찾아가 살면서

내가 얻은 천기진인(天機眞人)이 남긴 권보(拳譜)를 연구하여 같이 무예의 재간을 닦기로 해,

그리고 사매의 무공이 이룩되거든 양사제를 찾아가 화풀이나 하자.」

 

  하림은 당장 눈이 둥그레졌다.

 

「아니, 재간을 배워서 오빠에게 화풀이를 하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저는 배우지 않겠어요.」

 

하고는 천천히 등을 다시 나무에 기대는 것이었다.

  동숙정은 하림이 놀라는 표정을 보고 가볍게 탄식했다.

 

「그렇다면 무술을 익혀서 그를 도와주기로 하지.」

 

  그래도 하림은 여전히 고개를 흔들었다.

 

「오빠는 나와 다시 만나지 않으려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도와요?

역시 언니 혼자 가세요. 나는 무술도 배우고 싶지 않아요.」

 

동숙정은 하림이 말하는 가운데 은연중 피곤한 빛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는

불현듯 걱정스럽게 물었다.

 

「림사매, 누구와 싸우기 라도 했어?」

 

「아녜요. 내가 누구하고 싸우겠어요?」

 

「그런데 채 피곤해 보이지?」

 

「내가 잠을 자면 몽환 오빠와 같이 있을 수 있거든요.」

 

 그녀는 양몽환과 헤어진 이후 줄곧 양몽환이 어째서 자기와 헤어지기를 바랐던가를

생각해 보았으나 순진하고 단순한 그녀로서는 시종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동안이 비록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마치 많은 세월이 흘러간 듯

아득하니 정신력을 소모시켰던 것이다.

갑자기 하림은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 낸 듯 눈을 번쩍 뜨며 동숙정을 불렀다.

 

「숙정 언니,

오빠가 저 쪽 동굴에서 언니를 찾고 있었는데 빨리 가보도록 하세요.」

하는 말에 동숙정은 대단치도 않은 듯 하늘을 바라보고는

「지금 시각이 사경이 넘었는데 아직 찾고 있을라고? 벌써 갔을 거야.

 흥! 그와 같이 무정하고 의리 없는 사람은 보고 싶지도 않아!」 

 소나무 위에서 이 두 사람의 말을 하나도 때놓지 않고 듣고 있는 양몽환은 끓어오르는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뛰어내려 하림을 부둥켜안고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과오를 저지른 몸,

천사와 같은 소녀를 속인다는 것이 양심에 걸려 그 충동을 억눌러 버리고 말았다.

 

이때, 가볍게 코고는 소리가 나더니 하림은 곤히 잠들어 버렸다.

 

동숙정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쳐다보며 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이 일을 내가 목격한 이상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지.」

 

하고 하림에게 얼굴을 돌리며 말하는 것이었다.

 

「림사매, 잠시 동안만 참아 줘.」

 

하는데 갑자기 하림이 잠꼬대를 하는 모양이었다.

 

「오빠, 오빠가 잡은 하얀 학(鶴)을 좀 보세요. 대언니의 학만큼 크네요.‥‥‥」

 

동숙정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하림의 혼수혈을 짚었다.

그리고는 하림을 어깨에 메고는 질풍같이 달려가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양몽환은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무 위에서 뛰어 내렸다.

 이때는 하늘의 별빛도 하나 둘 사라져 가는 새벽녘이었다.

 

양몽환은 착잡한 심정이 되어 무작정 걸었다.

 

불어오는 새벽의 찬 바람은 그의 뺨을 스치고 또 그의 옷자락을 휘 날리는데

과도한 피곤으로 엄습하여 오는 졸음에 차가움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걷고 또 걸어서 다시 그 동굴로 돌아왔다.

 지금 그의 마음속은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져 있었다.

그리고 하림의 처량한 뒷모습만이 그의 뇌리에 꽉 찼을 뿐,

점점 그는 배고픔과 피곤 그리고 가슴을 찢는 듯한 아픔에 의식이 몽롱해져 갔다.

모든 것이 귀찮고 희미하게 안막에 스칠 뿐 그에게는 생소하여 낯설게만 느껴졌다.

 굴속을 들어가 석실에 다다른 그는 마른 풀에 몸을 던지고는 멍하니

천정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깊은 잠 속에 빠져 들고 말았다.

 얼마동안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전천의 경맥과 혈도에 스며들며 기분이 개운하여짐과 동시에

어렴풋이 의식을 되찾고 있었다.

그러자 코에 스며드는 향긋하고도 청아한 냄새가 있었다.

순간, 황급히 눈을 뜬 양몽환의 앞에는 백의(白衣)의 네 시녀가 앉아 있고

부드러운 손이 그의 등혈을 짚고 있었다.

  네 백의의 시녀로 그는 조소접이 달려온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얼굴을 돌리려고 하자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조소접의 음성이 들려 왔다.

 

「깨어났어요? 속히 운기(運氣)를 행하여 전신의 진기로 혈맥을 통하게 하세요.

그럼 평소에 진기가 이르지 못한 열 곳의 혈맥에도 진기가 통하게 되고 내공에 도움이 될 거에요.」

 

양몽환은 하림과 헤어진 이래 줄곧 슬픔 속에 빠져있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와 같이 양몽환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하림의 생각으로 꽉 차있어 조소접이 무슨

말을 했는지 조차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자 방울을 굴리는 듯 조소접의 음성이 들려 왔다.

 

「아니, 저의 말을 못 들었어요? 만일 이번에 전신의 진기를 전신경맥과 혈도로

순환시키면 크게 도움이 돼요. 빨리 운기하세요.」

말이 끝나자 즉각 등혈에 대고 있는 조소접의 손바닥에서 더욱 뜨겁고

기운찬 열기가 곧장 스며들어 전신의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이러한 상태에서 양몽환은 불현듯 단전(丹屬)의 진기를 돋우어 스며드는

 열기와 호응하여 가세시키는 반면 곧 전신에 운행시킬 수밖에 없었다.

 점점 물밀듯 밀려들어오는 뜨거운 열기가 강렬해지고 경맥과 혈도가 순환됨에 따라

 양몽환은 기분이 상쾌하여져 갔다.

 

일순의 운기행공(運氣行功)이 끝나 양몽환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눈을 뜨자 언제 왔는지 주약란이 조소접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양몽환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조소접에게 읍했다.

 

「조소저께서 이렇듯 도와주시니 무슨 말로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소접은 방긋 웃음으로서 대답을 대신하는 듯 정이 담뿍 어린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이어 주약란이 미소를 띠웠다.

 

「어떻게 여기 혼자 계시지요? 림사매는 어떻게 하고?」

 

양몽환은 침통한 심정이 되어 장문사숙에게 축출당한 이야기와

하림과 헤어진 이야기를 간단히 알렸다.

 

이야기를 다 들은 주약란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양몽환에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러나 오히려 잘 됐어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제 5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