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 장 이요홍(李瑤紅) 그녀가! <雨濕飛紅>
순간,
이창란(李蒼瀾)은 가슴이 서늘했다.
재빨리 용두 지팡이를 쥔 채 한 옆으로 비켜섰다
그와 동시에 왼손으로 귀원비급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이요홍(李瑞紅)은 허공에서 맴돌다 한 쪽으로 몸이 쓸리며 그만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다행이었다.
만일 이요홍이 그대로 이창란의 지팡이를 받았더라면
그대로 머리가 깨져 생명이 끊어졌을 것이었다.
그러자 도옥이 튀어나왔다.
「사부님!」
외치며 이형환위(移刑換位)의 신법을 전개하는 듯하다가 번개같이 이요홍 옆으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오른손으로 귀원비급을 가로 채면서 왼손의 금환검(金環劍)이
번쩍 이였다.
순간 선혈이 두자 높이 치솟으며 이요홍의 한쪽 팔이 떨어졌다.
그러자 양몽환은 피로 물들여진 이요홍을 향하여 몸을 날렸다.
동시에 대갈일성 하면서 오른손에 들었던 장검을 도옥에게 힘껏 내던지며
땅에 쓰러진 이요홍을 끌어안았다.
제비가 물을 차고 난다 해도 이처럼 빨랐으랴!
그때 마침 양몽환은 정신을 쓸고 있던 중이라 비교적 행동이 빨랐다.
다른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처다 보았을 때
도옥은 이미 이요홍의 왼 팔을 자르고 귀원비급을 빼앗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양몽환이 던진 장검을 쳐서 떨어뜨리고는 몸을 돌려 질풍같이 달아나고 있었다.
주약란은 이를 갈았다.
「정 말 악독하기가 사갈(蛇蝎)같은‥‥‥」
하얀 그림자가 번뜩이고 옷이 펄럭이며 하림과 조소접 그리고
네 명의 백의 시녀들이 주약란에게로 몰려왔다.
주약란은 급히 소리쳤다.
「접매, 이소저와 양상공을 지켜요. 나는 도옥이란 자를 잡아 죽이고 오겠어.」
어느새 그녀의 그림자는 일장 앞으로 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그제야 모든 호걸들도 꿈에서 깨어난 듯이 웅성거렸다 이창란과 마가홍
그리고 왕한상 등이 황망하게 옷자락을 펄럭이며 달려갔다.
도옥은 누런 옷을 펄럭이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삼사 장(三四丈) 앞을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기를 쓰고 들고 있는 뭇 호걸들은 한발자국도 그 거리를 단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홀연,
주약란은 서릿발 같은 외마디 기합(氣合) 소리를 터뜨리면서 몸을 일단 굽혔다가 땅을 찼다.
순간!
그 몸은 하늘로 치솟아 앞으로 날아갔다.
주약란은 전혀 숨을 쉬지 않고 허공을 밟고 가는 듯 단숨에 도옥의 등 뒤에 도달했다.
식견이 높은 마가홍도 어처구니없이 바라보았다.
땅에 발을 디디지 않고 허공에서 단숨에 먼 거리를 번개같이 날으는 것을 보고는
부지중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실전(失傳)된 신공(神功), 능공허도법(凌室虛渡法)을 오늘에야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구나!」
마가홍의 탄성이 터지자
그 뒤를 부지런히 들던 다른 호걸들도 모두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았다.
그때는 벌써 도옥과 주약란이 뭇 호걸들의 앞을 오장이나 앞서고 있었다.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도옥의 등 뒤로 달려간 주약란은 손을 들어 곧 일장을 갈겼다.
도옥은 태음기공(太陰氣功)에 상당한 기공을 밖은 터였다.
그는 지금이 바로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위급한 순간인 것을 직감했다.
그도 진기를 돋우고 달려가던 중이었다. 때마침 주약란이 일장을 그의 등에 갈기자
몸을 홱 돌이키며 오른손은 검으로 왼손은 장력으로 반격하는 것이었다.
주약란은 재빨리 땅에 내려서면서 오른손의 내공을 거두어 들였다.
도옥이 후려쳐 오는 금환검과 장풍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섬섬옥수가 도옥의 금환검에 막 잘려 나가는가 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탄지신통(彈指神通)의 수법을 써서 두 손가락으로 금환검을 힘껏 튕기지 않는가!
동시에 왼손으로는 운봉무쇄(雲封霧鎖)의 수법으로 도옥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그녀의 탄지신통(彈指神通)의 신묘한 재간은 비록 쌓은 공력이 약간 부족한 것이기는 했으나
도옥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무공이 아닐 수 없었다.
도옥의 오른쪽 손목이 찌르르하고 마비되면서 금환검을 놓치고 말았다.
그와 함께 금환검은 나무토막처럼 공중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또한 도옥이 후려친 왼손의 장풍도 주약란의 교묘한 수법에 빗나가고 말았다.
그 바람에 날카로운 장풍은 맞은편의 소나무를 쳐 허리를 뚝 부러뜨리고 지나갔다.
그토록 도옥의 일장(一掌)과 일검(一劍)의 반격은 전력으로 시도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모두 허탕을 치자 대경실색 하였다.
당황한 도옥은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틈에 재차 주약란의 오른손이 공격해 들어갔다.
도옥은 허겁지겁 주약란의 장세(掌勢)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밀려나가
썩은 나무토막처럼 넘어지는가 하더니
그의 몸은 땅에서 약 한자의 거리를 두면서 뜻 밖에도
원 자세로 재차 몸을 가다듬는 것이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몸을 돌려 주약란의 후측(後側) 면으로 돌아가는 듯하면서 몸을 벌떡 일으켜
오른손을 내 뻗어 주약란의 오른 팔의 관절을 날카롭게 거머쥐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약란은 그보다 빨리 오른 팔을 가볍게 움츠렸다가 도리어
도옥의 맥문(脈門)을 찌르는 것이었고 왼손으로는 별로 강하지 않은 듯한
일장을 도옥의 왼쪽 옆구리에 퍼붓는 것이었다.
「으윽!」
도옥은 외마디의 신음소리를 터뜨리면서 땅에 쓰러졌다.
그러면서도 도옥은 최후의 기력을 다해 쥐었던 손을 뿌리치며 주약란의 앞가슴을 찔렀다.
주약란은 재빨리 두어 걸음 물러서면서 노기 어린 음성으로 호령했다.
「죽음을 앞두고도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불손한 짓을 서슴지 않다니!」
눈을 치켜 뜬 주약란은 진기를 돋우고는 친강지(天?指)의 수법을 썼다.
간격을 두고 날아가는 지풍(指風)은 화살처럼 도옥의 천영(天靈)과 중부(中府)
두 요혈을 찌르고 들어갔다.
그 지풍의 맹렬함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이와 같이 교환한 몇 수는 모두 강호에서 드물게 보는 수법이었다.
보기에는 순식간에 지나간 것 같으나 그 순간순간이야
말로 생사를 결정하는 절기들이었다.
주약란의 강하지 않은 듯한 일장에 도옥의 갈비뼈 두 개가 부러졌다.
만일 그가 미리부터 태음기공(太陰氣功)으로 몸을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그 일장에 죽고 말았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도옥이 위험에 빠지면서까지 무작정 주약란의 앞가슴을
찌르려고 한 것은 엉뚱한 속셈이 있어서였다.
주약란의 강기(?氣)는 몸을 철통같이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따라서 자기의 공력으로는 적중한다 하더라도 주약란에게 어떤 타격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약란도 여자인 만큼 반드시 수치심으로 물러갈 것을 짐작하고
가했던 공격이었다.
과연 그가 예측한 대로 주약란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그 기회에 그는 갈비뼈가 부러진 고통을 참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화가 치민 주약란은 재차 지풍을 날렸다.
그러자 도옥은 이를 깨물고 전신의 힘을 다해 앞으로 뛰는 것이었다.
그렇게 달려간 도옥은 이미 절벽에서 불과 일장 남짓한 위태로운 곳에 서 있었다.
이때 두 사람이 싸운 곳은 절벽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불과 사오(四五)장의 거리였다.
절벽가로 달려가는 도옥을 보고 주약란은 놀라며 설마 아래로 내려 뛰지는
못하겠지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주약란은 몸을 날려 도옥의 등 뒤로 달려갔다.
한 걸음에 사오장의 거리를 달려가는 주약란을 보고 뭇 호걸들은 놀란 나머지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도옥이 절벽에서 불과 너댓자의 거리를 남겨 두었을 때 주약란은
이미 도옥의 머리 위로 덮쳐들고 있었다.
주약란은 채 내려서기도 전에 다시 일장을 도옥에게 갈겼다.
도옥은 두 개의 갈비뼈가 부러졌지만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즉시 운기조식(運氣調息)을 하지 못하여서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주약란이 머리 위에서 후려친 장력은 보통 강렬한 것이 아니었다.
도옥은 주약란의 장풍을 맞받는다면 즉사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 순간,
비참하게 여기서 죽느니 차라리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보자는 생각이 번개같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몸을 솟구치며 앞으로 뛰려고 하였다.
그러나 급히 부딪쳐 오는 주약란의 장풍은 뛰어 오른 도옥의 왼쪽무릎에 적중하여
관절을 부러뜨리고 말았다.
그 바람에 도옥은 앞으로 엎어지는 자세로 나둥그러지고 말았다.
주약란은 땅에 내려서면서 노려보았다.
「어떠한 간계가 또 있는지 어디 마음대로 부려 보시지.」
그제야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이창란과 마가홍이 번개같이 도옥에게 덮쳐 왔다.
주약란은 눈썹을 곤두세우며 오른손으로 조법남해(朝法南海)의 강렬한 장풍을 휘몰아
이창란을 향해 직격(直擊)하였다.
동시에 왼손의 손가락으로 천강지(天墨指) 수법을 전개하여 한 가닥의 매서운 지풍을
마가홍에게 날려 보냈다.
이창란은 대갈 일성하면서 손을 쳐들어 주약란의 일장을 간신히 받았고 마가홍은
다급하게 진기를 돋우며 몸을 두자 가량 빼올리면서 아슬아슬하게 천강지의 지풍을
피하여 버렸다.
주약란의 현문일원강기(玄門一元選氣)는 아직 완숙한 경지에 까지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수로 비록 이창란의 달려오던 자세를 멈추게는 하였지만 그녀 역시 두어 걸음 밀려나고 말았다. 주약란은 속으로 과연 듣던 소문대로 공력이 심후하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이었다.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귀원비급을 움켜 쥔 도옥이 천길 만길 깊은 절벽 밑을 향하여 몸을 던지는 순간이었다.
「앗!」
수백 년간 전설로 내려 온 무술계의 귀원비급이 도옥과 함께 절벽 밑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만사는 끝났다.
마가홍은 장검을 휘두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애석하구나! 애석 해!」
무척 애석한 모양이었다.
이창란은 주약란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한번 노려보고는 급히 절벽으로 달려가 내려다보았다.
수천 길 되는 절벽은 깎아지른 듯한 바위로 되어 있었다. 찬바람이 솟구치고 어둠침침한
그 밑바닥은 끝이 보이지도 않았다.
도옥은 주먹만한 그림자가 되어 어둠침침한 절벽 밑으로 사라져 보이지도 않았다.
이창란도 그만 고개를 흔들며 탄식하고 말았다.
주약란은 도옥이 수천 길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지금쯤은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음흉하고 잔혹한 도옥이 죽는 것쯤은 주약란에게는 하나 애석할 바 없었다.
단지 귀원비급을 되찾지 못한 것을 조소접에게 어떻게 설명하나하고 망연자실한 채
멍청히 서 있었다.
이때, 천용방의 오기란(五旗壇) 단주와 곤륜삼자 그리고 아미파의 세 장로들도 모두 달려 왔다.
팽수위는 한 팔이 잘린 채 피투성이가 되어 정신을 잃은 이요홍을 안고 조소접과 하림의 뒤를
따라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네 백의의 시녀는 두 사람씩 양 쪽에 갈라서서 호위 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이들은 생전 처음 겪게 되는 비참한 광경에 모두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양몽환은 이요홍의 떨어져 나간 팔을 그대로 든 채 비통한 표정으로 팽수위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때, 조소접은 주약란의 옆으로 쫓아왔다.
「언니, 이소저는 중상을 입은 데다 가 한 팔을 잘려서 아무래도 살지 못할 것 같군요.」
「그녀는 비록 그녀의 사형 손에 해를 입었지만 우리들이 방관하고만 있을 수야 없지‥‥‥」
하면서 천천히 삼수나찰 팽수위 앞으로 다가갔다.
이요홍을 안고 있던 팽수위는 황급한 빛을 띄웠다.
「이소저가 정신을 차리고 갑자기 품을 빠져나갈 때 비녀(婢女)는 제지하려고 하였으나
다시 부친에게로 달려가기에 아가씨의 말씀도 없고 하여 막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양몽환이 일그러진 얼굴로 주약란을 바라보았다.
「주소저, 그녀를 살릴 수 있겠습니까?」
나직이 묻는 그 말에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감을 느끼게 했다.
주약란은 뒤를 돌아다보며 쓸쓸히 웃었다.
「중상을 입은데다 팔을 잘린 고통은 대단할 거예요.
잠시나마 혈도를 짚어서 피의 흐름을 막아 놓았지만 생명을 구할 수 있을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어요.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진단을 해보아야만‥‥‥)
그러면서 조소접을 바라보았다.
「조소저가 기사회생(起死回生)의 영약을 가졌는데
그녀가 도와준다면 곧 정신을 차리게는 할 수 있을 거예요.」
이들 두 사람의 주고받은 이야기는 듣기에 따라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본인들은 피차에 그들 사이가 서먹서먹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양몽환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운명이죠.」
그 순간, 주약란의 눈동자에는 이상한 광채가 번쩍하고는 사라졌다.
뭇 영웅호걸들은 귀원비급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애석하게도 도옥이 귀원비급을 갖고 천길 만길 절벽 밑으로 떨어져 갔지만
여전히 단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귀원비급은 유명한 물건이어서 쉽사리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천길 만길 절벽 아래로 떨어져 갔지만 별 손상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어떻게 이 절벽 아래로 내려가 귀원비급을 찾을까 하는 궁리에 골몰했다.
그러면서도 서로 간에 눈치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과의 충돌을 피하고 교묘히 내려갈 수 없을까 하는 엉큼한 속셈이 있어서였다.
그리고는 일부러 태연을 가장했다.
이번 결투를 겪어본 그들은 모두 제각기 특기를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때문이었고
쉽사리 상대방을 제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한편, 그들과 동떨어져 있던 양몽환은 천천히 조소접에게 다가갔다
그는 본래 이요홍의 상처를 치료할 영약한 알을 부탁하고 싶어 다가갔으나
막상 말이 나오지 않아 머뭇거리고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하림은 양몽환의 우울한 표정을 보고 총총이 다가갔다. "
「오빠!」
그러나 뭔가 위로의 말을 하려고 양몽환을 불렀으나 뭐라 위로할 말이 얼핏 생각나지 않아
가만히 눈치만 보며 양몽환의 옆에 섰을 뿐이었다.
이창란도 멍하니 이요홍의 얼굴만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착잡한 두 갈래의 감정에 휩싸여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하나는 딸이 자기를 배반했다는 사실이었고 둘째는 무남독녀인 이요홍이
병신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애정과 증오가 뒤범벅이 되어 엇갈렸다.
어떻게 하면 안타까운 사건을 적절히 처리할 수 있을까?
하고 이리저리 망설이고 있는 눈치였다.
오기단 단주들도 역시 방주가 애지중지 하는 딸을 해친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방주의 직계 제자인 도옥이기 때문에 무척 난감해 했다.
여러 가지로 위로의 말을 진언하고는 싶었지만 함부로 입을 열수도 없는 처지여서
한결 같이 입들을 다물고만 있었다.
주약란은 이요홍의 상처를 이리 저리 살피고 나서 조소접에게 고개를 돌렸다.
「접매, 접매의 귀중한 귀원비급은 애석하게도
도옥이 가지고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어!
내가 도로 찾아 접매에게 돌려주지 못하게 되어서 무어라고 미안한 말을 다 할 수 없군.」
그러나 조소접은 담담하게 웃기만 했다.
「언니, 너무 걱정 마세요.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귀원비급을 세상에 남겨두는 것은 무익하니
제가 완전히 암기하고 나면 미련 없이 태워 버리라고 하셨어요.
마침 그 절벽 아래로 떨어져 영원히 찾지 못하게 되었으니 근심하실 것 없어요.」
이때, 문공태(聞公泰)가 불쑥 나서며 대나무 지팡이를 한번 휘젓고는 이창란에게 빈정거렸다.
「이형의 건원지(乾元指)신공은 과연 명불 허전이외다.
나의 사제가 이형의 손에 죽어간 부채(負債)는 일년 이내에 화산(華山)파의 정예를 이끌고
귀파의 총단(總壇)이 있는 곳으로 직접 방문하여 부채를 받기로 하겠소.」
그러자 마가홍도 비웃었다.
「빈도가 이번에 점창산(點蒼山)을 내려 올 때에 이형과의 부채 관계를 청산하려고
하였소만 생각지도 않은 이 괄창산에서 우연히 만나게 될 줄이야‥‥‥」
이창란은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마가홍의 말을 가로 막았다
「본인이 천용방을 세운 뒤에 강호의 구대 문파라고 자부하던 당신들이 줄곧
우리들을 눈에 박힌 가시처럼 보아야만 시원하겠다고 여기는 것은 짐작하고 있소이다.
소림(少林), 무당(武當) 두 파는 벌써부터 우리 천용방을 치려고 삼년 동안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소. 생각하건데 굉장한 예로서 찾아올 것이오.
그는 잠시 말을 중단하고 모든 사람을 한번 훑어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 모이신 분들 가운데 다섯 분은 아마 장문인의 신분일 것이요.
이 늙은이가 좀 외람된 말을 한다고 노여워는 마시오.
우리들은 벌써부터 구대 문파를 초대하려고 주식(酒食)과 객실을 마련해놓고 있소이다.
구대 문파에서는 어느 때든 염려 마시고 일제히 왕림하여 주시면 오히려 영광이겠소.」
그러자 옥영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크게 웃으며 나섰다.
「안하무인격인 말씀이시군.
그러시다면 우리 곤륜파는 틀림없이 이방주의 초대에 응하겠소.」
이창란도 지지 않고 맞섰다.
「매우 지당한 말씀이시오.
구대 문과의 사람이라면 우리는 일률적으로 환영하겠소.
그러면 명년 팔월 보름에 이 늙은이가 우리 천용방의 총탄에서
영접할 것으로 결정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문공태와 등뢰 그리고 마가홍등 장문인들이 일제히 응하였다.
「좋소, 그렇게 정합시다.
명년 팔월 십오일에 귀방의 총단에 우리들이 달려가기로 하죠.」
이창란은 크게 웃으면서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때 가면 자연히 우리 방과 그대들 구대 문파 간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골치 아픈 문제도 해결할 수 있겠지요.
그뿐만 아니라 그대들 구대 문파 간에 수백 년간 해결을 못 본
서열도 해결되리라 믿습니다.」
문공태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우리 구대 문파가 서열을 정하는데 있어서는 결코 귀방의 심려를 끼치지 않을 작정이오.」
주약란이 참지 못하고 눈썹을 곤두세우며 화를 냈다.
「당신들이 명년에 만나자는 약속을 이젠 하셨으니 당신들 간의 은원(恩怨)은
그때 모두 해결할 수 있을 것이오.
이젠 더 이상 이 종운암에서 얼쩡대지 말고 속히 물러가 주십시오.
그리고 오늘밤 안으로 이 종운암에서 백리 밖으로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누구든지 망령되게 귀원비급을 탐내서 절벽 밑으로 내려간다면 발견되는
즉시 용서치 않을 것이요.」
뭇 영웅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절벽 아래로 내려가 최대의 기서를 찾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주약란의 말에 불응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소접은 주약란이 천하 영웅들을 위엄으로 제압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기분이 매우 좋았다.
조소접은 싱글거리면서 슬쩍 양몽환을 쳐다보았다.
양몽환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이요홍의 팔을 들고 장승처럼 우뚝 서 있었다.
조소접은 그제야 생각난 듯이 단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영약을 꺼내어 들었다.
그리고는 왼손으로 가볍게 이요홍의 입을 벌리게 하고는 붉은 알약을 가만히 먹여 주었다.
이창란은 장승처럼 우뚝 서서 이요홍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벌써부터 이요홍의 상처가 몹시 중하여 약으로서는 쉽사리 구할 수 없으리라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다 묘수어은(妙手漁隱) 소천의(蕭天儀)는 검북(黔北) 땅 총단에서 이곳으로 따라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요홍을 그곳까지 데리고 가야 했다.
그때까지 과연 생명이 붙어 있을는지 매우 의문이었다. 일대의 효웅(梟雄) 이창란도
곤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한편, 조소접은 하나 밖에 남지 않은 귀한 영약을 서슴없이 이요홍의 입에 넣어 주고는
다시 양몽환을 쳐다보았다.
양몽환은 얼굴 가득히 감사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조소접은 방긋 웃었다.
그때지 일양자는 줄곧 양몽환의 일거일동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는 양몽환이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이요홍을 구한 행동에 저윽이 당혹(當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으로 인해 주약란과 사이가 멀어진 듯한 그들의 말투와 조소접이 은연중 양몽환에게
보이는 다정한 눈길을 살펴보는 일양자는 더욱 마음이 어지러워 겼다.
젊은 사람들의 심사는 변화가 많아 언뜻 판단하기 힘들었다.
더구나 그들 세대(世代)가 자기들의 세대보다 여러 가지로 복잡하고도
단정하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이때, 죽은 듯이 쓰러져있던 이요홍이 불시에 가느다란 숨을 내쉬며 눈을 번쩍였다.
과연 조소접의 영약은 불가사의한 효과를 나타내었다. 중상을 입은 이요홍으로 하여금
삽시간에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창란은 딸이 의식을 되찾자 희색이 만면해졌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턱 밑의 수염까지 떨며 간신히 딸에게로 다가왔다.
「얘야! 정신이 좀 드느냐?」
이요홍은 대답대신 가만히 웃어 보였다.
힘없이 뜬 두 눈에서 눈물이 뺨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아빠, 저‥‥‥ 아빠에게 두 가지 부탁이 있어요.」
이창란은 귀여운 딸이 전신에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는 크게 가여운 마음이 일어났다.
그는 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이 애비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들어 주마」
이요홍은 억지로 몸을 일으키느라고 입술을 깨물며 팽수위의 품에서 빠져나와 땅에 엎드렸다.
「첫 번째 부탁은 아버님께서 귀원비급을 주인에게 돌려주시라는 거예요.」
이창란은 암담해 졌다.
「귀원비급은 너의 한 팔을 자른 사형이 갖고 그만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고 말았어.)
이요홍은 일순 멈칫하고는 양몽환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자 주약란이 상냥하게 대신 말했다.
「이소저가 이미 귀원비급을 우리들에게 돌려주었는데도
우리가 잘못해서 다시 빼앗기고만 거예요.
그러니 이소저가 귀원비급을 돌려준다는 약속은 이행된 샘이야.」
이요홍이 비로소 안심되는지 서글퍼 웃었다.
「둘째 번 부탁은 아버님이 친히 저의 머리카락을 잘라 달라는 것입니다.」
이창란은 그 말뜻을 얼른 짐작하기 어려웠다.
「아니? 네가 출가(出家)‥‥‥」
그러면서도 이요홍의 얼굴 전체에 풍기는 굳은 결심을 보고는 마음이 선뜩했다.
그는 이요홍의 성격이 야무진 것을 잘 아는 터라 섣불리 반대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크게 중상을 입은 이때에 책망만을 하였다가는 도리어 그녀로 하여금
자결하게 할런지 모른다는 생각에 재빨리 응낙한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응낙하마.」
그 즉시 왼손으로 이요홍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오른손 식, 중(食, 中) 두 손가락에
공력을 돋우고 가위 대신으로 싹둑싹둑 이요홍의 머리카락을 전부 잘라 버렸다.
이요홍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주약란으로부터 조소접, 하림 등을 차근차근히 둘러본 후에야
차분하게 양몽환에게 눈길을 고정한 채 웃었다.
「양상공, 그리고 림매, 가까이 오세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양몽환은 자기 사부인 일양자를 한번 쳐다보고는 가만히 이요홍에게로 다가갔다.
심사매도 다소곳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하림은 이요홍에게 다가서자 다정히 속삭였다.
「언니, 우리들에게 무슨 할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이요홍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때 그녀의 까만 눈에서 기이한 빛이 일어나고 있다.
「림매, 떠나는 마당에 림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어.」
하림은 흐느끼며 대답했다.
「한 가지 부탁이 아니라 수백 수천가지 부탁이라도 듣겠어요.
그런데 언니는 어디로 가시려고 그러시죠?」
양몽환의 얼굴은 긴장되고 눈에는 가득히 이요홍에 대한 연민과 애정으로 차 있었다.
그리고 할 말이 많은 것 같기도 한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양몽환을 쳐다보는 이요홍의 얼굴에는 만족한 듯한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그녀는 하림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걱정할 것은 없어. 난 우리 어머니와 함께 부처님을 모시고 내 반생의 죄악을 참회하겠어.」
「알았어요. 언니는 속세를 떠나 절의 중이 되려고 하는군요.」
「그래요. 나는 보다시피 이렇게 병신 된 몸이라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어.
애당초 나는 죽어서 세상을 벗어나고자 하였으나 내가 죽으면
그나마 다른 사람에게 커다란 괴로움을 안겨 주게 될까 염려스러워 죽지는 못했어.」
「지나온 일년 동안 나도 많은 일들을 겪고 알게 되었어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많은 번뇌와 괴로움을 지니게 된다는 것을 ‥‥‥」
그녀는 양몽환을 쳐다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만일 나도 우리 오빠와 같이 있을 몸이 아니라면 언니를 따라가서 중이 되고 싶어요.」
여러 사람이 보고 있는 앞에서도 그녀는 조금도 부끄러움이나 어색한 태도도 없이
진실한 표정으로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요홍은 쓸쓸히 웃으면서 못 영웅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새겨보듯이 하다가
자기 아버지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버님, 마지막으로 소녀가 매우 외람된 말씀을 드리고자합니다.
이 말씀을 드리게 되면 혹시 아버님의 명예를 훼손케 될는지 몰라서
막상 해야 옳을지 그만 두어야 옳을지 모르겠군요.」
이창란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겨 묵묵부답이었다.
「말해 보아라. 이 세상에 네가 나의 딸인 것을 누가 모르겠니?
나의 체면을 상하게 된다 해도 그것은 뜻대로 할 수 없는 팔자소관이겠지.
대장부라고 반드시 현처효자(賢妻孝子)만 두라는 법도 없고‥‥‥
나, 이창란의 재간으로는 하늘을 가릴 수 없으며 천하 영웅들의 이목을
가릴 수도 없는 노릇이야.
내 비록 천용방의 수천 호걸을 거느리고 있으나 자기 딸을 올바르게
못 가르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다.
이제 새삼스럽게 무엇을 꺼리겠느냐? 염려 말고 말하여라.
이 늙은이 체면은‥‥‥」
그러자 왕한상은 방주가 충격을 받은 태도에 마음이 불안하여 졌다.
지금 이곳에 모인 사람은 무예계에서 가장 명망이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만일 이요홍의 말이 체면을 손상하게 되는 말을 하게 되면
그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은 뻔하였다.
만약 그렇게 되면 천용방의 유감지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망설일 틈도 없이 즉각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
「방주께서는 잠깐 제 말을 들으십시오.
이향주(李香主)는 어릴 때부터 가르침을 받아 결코 우리 천용방의 계율을
어기게 되는 말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선 여러 영웅호걸들이 있는 데서 말이나 한번 들어보기로 하죠.」
왕한상의 이 몇 마디 말은 듣기에는 매우 당연하고 그럴듯한 말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이요홍으로 하여금 이창란의 체면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는 말임이 분명했다.
그러자 은근히 부아가 난 문공태가 퉁명스럽게 쏘아 붙였다.
「남의 부녀간의 일에 왕형은 좀 나서지 마시오._」
순간,
막윤이 느닷없이 손바람을 일으켜 문공태를 갈겼다.
「문형은 잠자코 있는 것이 신상에. 가장 좋을 것이오.
사제의 뼈다귀도 찾기 전에 전철을 밟을까 무섭소.」
문공태는 막윤의 오독신장(五毒神掌)이 악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지라
감히 맞받을 엄두도 못 내고 몸을 날려 피하고 말았다.
이때, 이요홍이 음성을 높여 말했다.
「아버님, 소녀가 불효하여 연이어 소란을 일으키게 되니
아버님과 여러 숙부님들에게 뵈올 낯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방의 규율을 어기면서까지 곤륜파의 문하를 암암리에 도왔으니‥‥‥」
왕한상이 담담하게 웃으며 나섰다.
「곤륜파도 이향주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았습니까?
마땅히 은혜를 참는 것이 옳은 도리요.
강호에서는 은원(恩怨)을 분명히 해야 하거늘,
그것이 방의 규율을 어겼다고는 할 수 없소.」
「우리 천용방의 계율이 지엄하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어요.
나의 아버지가 비록 우두머리인 방주라고 하여서 저의 신분의 특수한 이유로
받아야 할 방의 제재(制裁)를 받지 않을 수야 없죠.」
이창란은 그제야 마음을 놓으며 밝은 웃음을 띠웠다.
「좋아. 네가 중상을 입더니 도리어 철이 드는구나.」
막윤이 냉정한 어조로 다음을 이었다.
「이향주는 이미 머리카락을 잘라 목을 대신한 것입니다.
비록 방의 규율을 어겼다 하더라도 소저는 이미 벌을 받은 것으로
자백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창란의 수염은 여전히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눈에는
애처로운 슬픔이 물결치고 입술에는 애틋한 연민의 정이 읽혀 있었다.
이요홍은 그러한 이창란을 보고는 더욱 가슴이 아팠다.
분명히 자기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과연 방주의 신분이 신분 인 만큼 남이 보는 앞에서 딸인
자기에게 너무 과분한 총애의 태도를 보이게 되는 것이
두려워 괴로운 심정을 억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속셈으로는 자기가 세인(世人)의 비난을 듣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양몽환이 더러운 누명을 벗을 수 있도록 모든 과오를 말하고
자기가 뒤집어쓰려고 하였었다.
그런 후에 자기는 죽던지 혹은 불가(佛家)에 몸을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막상 자기 아버지의 표정 을 보고는 더 말할 수 없었다.
이요홍은 쓸쓸히 탄식하며 말했다.
「여러 숙부님들께서 이렇게 아껴 주시니 오히려 저의 마음이 더욱 불안해요.」
하고 다시 이창란을 바라보았다.
「아버님, 다시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
「말해보렴.」
「여러 숙부님의 애호로 벌을 받지 않게 된 것은 고맙습니다.
그러나 연이어서 방의 규율을 범한 저로서는 더 이상 법을 행하는
총단의 향주(香主) 직을 맡을 수가 없어요.
바라옵건대 향주의 직함도 거두어 주십시오.
앞으로는 다만 어머님을 모시고 조용히 살아갔으면 원이 없겠습니다.」
「좋아. 네가 출가하여 여승이 된다면 나도 딸 하나 없는 양 생각하면 되니까.」
이요홍은 잘린 팔의 고통을 참고 조용히 허리를 굽혔다.
「소녀, 아버님의 응낙에 감사드립니다.」
그러자 옆에 섰던 왕한상이 위로했다.
「이향주는 청백(淸白)한 여자의 몸이라 부질없이 강호에 돌아다니지 않는 것도
역시 기꺼운 일이요.
방주께서도 이제 이향주의 모든 소원을 서슴없이 응낙하시었으니
더 이상 간섭이 없을 것이오.
지금은 심한 상처로 더 이상 이곳에 지체할 수 없는 몸이오.
우선 한시 바삐 총탄으로 돌아가 묘수어은 소천의에게 상처를 치료 받도록 하시오.」
하고 왕한상은 곧 천중사추(川中四醜)에게 고개를 돌렸다.
「본 당주가 방주를 대신하여 분부를 내리겠소.
지금 곧 천중사추(川中四醜)는 이향주를 총단까지 모시도록 방법을 강구하여 주시오.」
천중 사추의 둘째 백무상(白無常) 진응(陳應)은 비록 옥영자(玉靈子)의 장검에
왼 팔을 상한 바 있지만 공력이 심중하여서 아무렇지 않은 듯 했다.
네 사람은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응답했다.
「알아 모시겠습니다.」
그 즉시 절벽가에 서있는 소나무로 달려갔다.
소나무를 자르고 또 등나무 줄기를 걷어 삽시간에 들것을 만들어 이요홍의 옆에 갖다 놓았다.
차마 이요홍에게 손을 댈 수는 없는 처지들이라 이창란의 분부를 기다리는 듯 돌아보았다.
그러자 주약란이 즉시 달려와 이요홍을 안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이소저가 방금 복용한 영약 한 알은 신기한 공효를 지닌 것이에요.
더 이상 당신의 상처는 악화되지 않을 거예요.
마음 놓고 총단에 들어가 치료를 받고 있으면 후에라도 나와 림매가 같이 찾아가 보겠어요.」
이요홍은 감격에 벅차 눈물을 흘렸다.
「언니의 고마우신 정은 깊이 새겨 두겠어요.
그러나 저 때문에 수고를 마시고 림매를 돌봐주시면 제가 받는 것과 같이 기쁘겠어요.」
주약란은 각별하게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염려 말고 몸이나 보중하도록 해요.
모든 일은 내가 잘 처리할 테니까요.
양상공은 너무 다정다감한 사람이 되어서 만일 홍매(紅妹)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결코 그도 무사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면 림매도 따라서 무사하지 못 할 테니 명심해서 절대로 생명을 가볍게 다루지 말아요.」
주약란의 이 몇 마디 말은 전음입밀(傳音入密)의 재간으로 속삭였기 때문에
오직 이요홍만 똑똑히 들을 수 있을 뿐 옆에 서있는 고수들은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주약란은 그 다음 말엔 일부러 음성을 높였다.
「림매는 선량하고 순결하고 천진무구하여 마치 어린 천사와 다름없지 않아요?
우리들은 절대로 그녀에게 고통을 느끼게 하여서는 안돼요.」
이요홍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언니의 태산 같은 은혜와 끼친 폐는 잊지 못할 거예요
이 생에서 보답할 수 없음이 한스러워요‥‥‥」
주약란도 애절하게 탄식했다.
「내가 급히 구해주지 못해서 이소저의 한 팔을 잃게 한 것만도
가슴 아프고 송구한 마음 금할 길 없는데 다시 그렇게 말하면 나는 더 미안해요.」
하고는 하림이 들것을 잡고 주약란은 이요홍을 살며시 안아 들것에 눕혔다.
이미 천중사추의 셋째 유혼(游魂) 마기(馬起)와 넷째 악백(惡魄) 주방(周邦)이 들것을 들고
첫째 흑령관(黑靈官) 장흠(張欽)과 둘째 백무상 진응이 하나는 앞에 서고 하나는 뒤에
서서 보호하듯이 둘러쌌다.
이창란이 명령만 내리면 뭇 고수들을 헤치고 떠나려는 태세가 완비되었다.
이때, 주약란은 문공태와 마가홍 그리고 등뢰를 노려보고는 이창란에게로 돌아섰다.
「이방주께서는 구대 문파와의 결산을 내년 팔월로 약속을 하셨으니
이제 더 괄창산에 있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빨리 영애를 호위하고 떠나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이창란은 문공태 등이 딸을 빼앗으려 할까
염려해서 주약란이 하는 말임을 짐작하였다.
「하기야 내년 팔월에는 약속대로 모든 천하 무인의 고수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될 것입니다.
주소저께서도 검북(黔北) 본방의 총단에 한번 왕림하여 구경이나 하십시오.」
「그때 시간이 있으면 꼭 참석하여 구경하겠습니다.」
주약란의 대답이 끝나자 이창란은 용두 지팡이로 땅을 탁 쳤다.
「자, 가자.」
의젓한 자세로 이창란이 앞장을 서서 걸음을 옮기자
뒤따라 오기단의 단주들은 이요홍의 들것을 호위하면서 그 뒤를 따랐다.
일이 이쯤 되자 오파(五派)의 연합은 자동적으로 와해된 형편이었다.
그들의 연합목적인 귀원비급의 쟁탈은 도옥과 함께 아득한 절벽 아래로
사라져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보는 격으로 허탕만 친 셈이었다.
더욱이 격렬한 고전을 면치 못했던 그들인지라
오파의 힘을 합해서 새삼스럽게 대처한다 해도 천용방의 인물들을 완전히
섬멸할 수 없음을 잘 알았던 것이다.
결국은 천용방의 인물들이 몰려 나가자 순순히 앞길을 비켜주는 도리 밖에 없었다.
왕한상이 가장 끝머리에서 달려갔다.
그리고는 뭇 호걸들을 바라보다 갑자기 뒤돌아서서 한마디 던지는 것이었다.
「문형과 마도형(馬道兄)! 귀원비급을 망령되게 찾으려고 하지는 마시오.
만장의 절벽 아래로 내려가기는 쉬워도 올라오기는 힘들다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마가홍이 코웃음 치며 쏘아 붙였다.
「왕형, 그 말씀은 오히려 내가 왕형에게 던지고 싶은 말이외다.
흥! 만일 빈도(貧道)가 정말 그 절벽 아래로 내려간다면 아마도
내년 까지 갈 것 없이 바로 그곳에서 왕형을 만나게 될까 걱정이외다. 하하‥‥‥」
왕한상도 넉살좋게 맞받았다.
「정말 그렇게 되면 도형의 검술을 다시 한번 구경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는 마가홍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려 달려갔다.
천용방의 고수들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자 문공태는 뭇 호걸들을 사뭇 걱정스러운
얼굴로 휘둘러보았다.
「천용방 오기단의 단주들은 과연 듣던 바와 같군요.
만일 구대 문과의 우리들이 합심 협력하여 이 강적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강호 무술계는 여지없이 천용방의 천하가 될 것 같습니다.」
마가홍도 그 말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빈도는 이십 년 동안 점창산에서 한발자국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새 강호에 이와 같이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지요.
지금 하신 문형의 말씀이 매우 지당한 말씀이요.
구대 문파인 우리가 합심 협력하여 일격에 천용방 고수들을 섬멸시키지 못한다면
멀지 않아서 구대 문파의 명망은 점차 강호에서 빛을 잃고 말 것이오.
뿐만 아니라 최후에는 천용방에 의해서 거의가 격파당하여 소멸되고 말 위험마저 있소이다.」
그러자 잠잠하게 듣고만 있던 아미파의 초원 대사가 합장하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며 한발 나섰다.
「마도형과 문시주의 말씀은 지당하오이다.
소승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바이오.
명년 중추대회(仲秋大會)는 바로 구대 문과의 존망(存亡)을 좌우하는 대회입니다.
여러 도형과 시주님들은 강호 문파지간의 편견을 일소하고 굳게 연합하여
천용방의 수뇌들을 일망타진하였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우리 구대 문파의 서열을 정하는 집안싸움은 그만두어야 할 것입니다.
삼백년전의 대결에서 극렬한 결투 때 각 파의 장문인들이 대부분 소실봉(少室峯)에서
쓰러져 버린 참담한 기억이 새롭습니다.
또 그때 구대 문파의 많은 절기들은 그 대결로 인해 영원히 실전(失傳)되고 말기도 했습니다.
이같이 쓰라린 과거의 그 고통이 아직 생생히 남아 있는 이 마당에 다시 그 참극을
재연해야 되겠습니까?
소승은 불가의 제자이기에 친히 소림사를 방문하겠습니다.
소림파 장문 주지에게 두 번 다시 서열지쟁(序列之爭)은 하지 말고 이후부터 구대 문파에서
상호간에 화목을 도모하고 화친할 것을 권해 보겠습니다.」
하고는 엄숙히 주위를 둘러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만일 어느 분이든지 무당산에 가셔서 무당파 장문인에게 서열을 다투는 분쟁은
일으키지 말자고 권고하면 일은 원만하게 해결될 것입니다.
또한 천용방에 대해서도 우리 아미파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만큼 도승이
책임지고 권고하겠습니다.
단 하나 남은 공동파는 결코 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기는 하나
만일을 위해 어느 분이든지 한번 가신다면 더욱 좋겠소.
소승의 우견(愚見)은 이와 같은데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하신지?」
마가홍이 두말없이 찬성하고 나섰다.
「노선사님의 고견은 정말 앞을 내다보시는 명견이십니다.
빈도와 무당파의 장문인과는 수차 대면하여 친숙한 처지입니다.
그러니 빈도가 무당파를 한번 찾아 가기로 하죠.
그러나 이십년 동안 만나지 못한 바로서 설득할 수 있을는지
그것은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빈도는 노력해 보는 것으로 성패는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등뢰가 큰 기침을 하고는 한마디 하는 것이었다.
「공동과의 장문인 음수일관(陰手一判) 신원통(申元通)은 본인과 내왕이 있는
사이로 공동 파에 대한 것은 본인이 책임져 보겠습니다.」
하는 뒤를 이어 문공태가 점잖게 수염을 쓰다듬으며 나섰다.
「천용방은 강호에 일어난 지 이십년, 불과 이 짧은 이십년이란 세월에
그들은 목하 강호에서 가장 방대한 세력을 가진 악방(惡幇)이 되고 말았소이다.
만일 우리 구대 문파에서 일찍이 손을 쓰지 않으면 그 결과는 뻔할 것입니다.
그런 만큼 대사님들과 도형들께서 상호간의 사소한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고
장문인이나 장문인의 신분으로 친히 각 파에 가서 권고한다는 사실에 본인은
극히 탄복하고 또 바라는 바입니다.
내년 중추가절을 기하여 이 문공태도 틀림없이 화산문파의 고수들을 이끌고
검북 땅에 가서 먼저 천용방을 무찌르고자 합니다. 그럼 본인은 먼저 떠나겠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 두 손을 맞잡아 흔들고는 몸을 돌려 달려갔다.
등뢰 역시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본인도 가 봐야겠습니다.」
그도 곧 문공태의 뒤를 따라 떠났다.
이어서 마가홍과 아미파 세 장로들도 고별하고 떠났다.
남은 사람은 곤륜파의 삼자(三子)와 주약란, 조소접, 하림, 양몽환, 팽수위
그리고 네 사람의 백의 시녀였다.
이들은 서로 한참 쳐다보다가 주약란이 먼저 가볍게 웃었다.
「세분 선배님께서는 별일 없으시면 저의 처소에 가셔서 며칠 쉬었다가 가시면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옥영자는 정중히 사양했다.
「주소저는 벌써부터 우리 곤륜파에 은혜를 베푼 것이 태산 같고 빈도들이
보답할 길이 없어 불안한데 어찌 또 폐를 끼치겠습니까?」
주약란은 가만히 오른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만져 쓰다듬은 후에 겸손하게 말했다.
「저의 행동이 거칠어 세세한 곳까지 자상하게 보살펴 드리지 못하여서 오히려
세 분의 체면을 상하는바 많았을 것인데 어찌 은혜라고 말씀 하시나요?
제가 송구합니다.
세 분이 저의 처소에 오시지 않으시겠다면 할 수 없지만 세 분 선배님에게
그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옥영자가 잠깐 생각하더니 되물었다.
「주소저의 청이란 분파의 문도(門徒) 양몽환에 대하여 관대한 처분을 베풀라는 것이 아닌지요?」
주약란은 안타깝기는 했으나 양몽환에 대한 한 가닥 애정을 냉정하게 자르기로 결심한 직후였다. 예전과 달리 부끄러워하는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태연히 고개를 끄덕이고 웃었다.
「제가 귀파의 양몽환과 수개월 같이 기거하기도 했지만
그는 착실하고 성실한 분이었습니다.
성격도 중후할 뿐 아니라 호방하여 존경하는 처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종종 타인의 모략에 빠지는 수도 있기는 하였습니다.
오늘 일어난 일만 하여도 세 분이 직접 보셔서 잘 아시리라 여깁니다.
그러나 의심도 많으시겠죠.
그는 아미파의 제자들을 상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이번에는 설산파의 사람까지 상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이요홍 때문에 저지른 일이었지만 문공태 등 다른 사람이 보았을 때는
의심을 받을 만 하였습니다
그러니 일양자 노선배님께서도 아마 스스로 길러 내신 제자에 의심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일양자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 그동안에 읽힌 은원간의 시비는 직접 보지 않아 뭐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빈도가 여태껏 그를 십이 년 동안 가르쳐 그의 성품을 찰 알고 있어
어느 정도 안심은 됩니다만 그렇다고 그를 용서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소?」
양몽환은 비장한 각오를 한 듯 눈썹을 세우고 말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주약란은 그 눈치를 알아차리고 자기가 먼저 말을 함으로서 양몽환을 제지하고 말았다.
「그 원인을 따지자면 응당 일년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애초에 혜진자 선배님이 뱀독으로 인하여 요주(饒州)에서 누워계실 때 도장(道長)께서
묘수어은 소천의에게 치료를 부탁하려고 할 때부터입니다.
당시 이요홍이 의부의 은거 처인 취석오(翠石塢)에 대한 비밀을 누설한 이유는
바로 귀파의 양상공에 대한 호감을 사려고한 것에 불과한 거예요.
그러나 강호에서는 은원을 분명하게 가리는 만큼 이요홍의 그와 같은 행동은
귀파에 은혜를 베푼 것으로 보아도 되겠죠?」
옥영자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야 그렇죠.」
주약란은 다시 가벼운 웃음을 머금고 계속해서 말했다.
「물론 이요홍이 은혜를 베풀었다 해도 그것은 자기의 감정을 억제할 수 없어서
한 것일 뿐 보답을 받고자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연히도 이요홍이 천서(川西) 땅에서 아미파의 제자들에게 봉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귀파의 양상공이 우연히 그곳으로 지나가게 되어 그것이 또 다시 화근이 되었죠.
저는 나이가 어려 무예제의 도의를 잘 모릅니다만 만일 세 분 선배님들 가운데서
어느 한 분이라도 그런 일에 부딪치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옥영자는 그 말에 끌려들고 말았다.
「이요홍이 우리 곤륜파에 은해를 베푼 예가 있으니 무예제의 도의로 보더라도
곤륜파의 사람들은 그냥 보고만 지나칠 수야 없죠.」
「그렇다면 귀파의 양상공이 이요홍을 도와 아미파와 싸우게 된 것도 무예재의
도의로 보아 잘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 자체에 잘못은 없어요.」
「그렇죠. 잘못이 있다면 이요홍이 자기 멋대로 양상공에 대한 누를 수 없었던
애정에 잘못이 있는 거죠.
그 때문에 그녀는 방의 계율도 어겨가면서 양상공의 위난을 구하게 된 거구요.
심지어 해독약을 주어 양상공이 먹은 화골소원산(化骨消元散)이라는 독을 풀어
목숨을 구하여 준 일도 있어요.
아무리 자기의 사랑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양상공 개인으로서는 너무나 큰 은혜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옥영자는 양몽환을 힐끔 쳐다보았다.
「구명대은(救命大恩)은 물론 가장 큰 은혜죠.」
「제가 드릴 말씀은 이로서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는 세 분 선배님께서도 왜 이요홍이 상처를 입은 후 그렇게 격분했는가를 잘 아시겠죠?」
옥영자도 그제야 노여움을 풀었다.
「주소저의 해명에 깊이 감사합니다.
빈도는 양몽환을 처벌하는 문제에 있어서 정(情)과 리(理)에 쏠리지 않고
관대히 처분하겠습니다.」
그러자 삼수나찰 팽수위도 끼어들었다.
「양상공이 비록 아미파의 한 승려를 해쳤지만 그도 극한 내상에 조소저와
우리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그를 살릴 사람은 이 세상에 없었을 것입니다.」
주약란은 황급히 그 말을 막으며 얼굴을 붉혔다.
「나도 속수무책이었어, 전적으로 접매의 대반약현공(大般若玄功)이 아니었더라면
그의 생명을 구하지 못했을 거야」
그래도 팽수위는 불만인양 다시 입을 열었다.
「만일 양상공이 아미파 승려들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면 세분은
사장(師長)의 신분으로 복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일양자는 그 즉시 대답했다.
「몽환의 심한 중상은 내가 친히 목격한 바입니다.
죽지 않고 살아난 것만으로도 정말 기적이었습니다.
주소저가 우리 곤륜파에 베푼 은혜는 빈도들이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주약란은 고개를 흔들며 거듭 사양했다.
「은혜를 베풀었다는 말은 더 이상 말씀하지 마십시오.
세분 선배님께서 그토록 저의 체면을 세워 주시고 칭찬해 주시니
그것만으로도 감격할 뿐입니다.」
옥영자는 잠깐 생각하다가 불현듯 말했다.
「주소저께서는 여러 가지로 우리 곤륜파에 은혜를 베풀었지만 빈도들에게
본 파 역대사조(歷代師祖)들께서 정하신 계율을 어기면서까지 용서하라 하신다면
우리는 결코 따를 수 없습니다.
단지 정상을 참작하여 관대히 처벌하겠으나 본파의 계율을 어긴 사실이 있을 때에는
계율에 따라 처벌하는 수밖에 없지요.」
이 말에 주약란의 얼굴빛이 약간 변하고 눈썹을 곤두세우며 불쾌함을 표했다.
「곤륜파의 계율이라 하더라도 귀파의 문하제자들을 억울하게 구속해서야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볼 때 우스운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후배로서 외람된 말씀이지만 계율이니 율법이니 해도 그것은 엄연히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처리하는 것입니다.
도장도 제 아무리 일파의 장문지존(掌門之尊)이라고 해도 도장 역시 대명조(大明朝)의
백성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국가의 왕법은 귀파의 계율과 비교하면 월등 앞서는 것입니다.
만일 도장이 문하 제자를 처벌하신다면 살상대권을 지닌 대명조 황제의 윤허라도
맡으셨단 말씀이십니까?
죄를 뒤집어 씌우자면 얼마든지 이유는 갖다 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계율 역시 인정과 천리에 어긋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법이란 정리(情理)를 돌보지 않으면 폭행의 계율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도장의 말씀 중에는 제가 조그만 은혜로 귀파의 내부 일을 간섭한다는 뜻이
비치는 것 같습니다.
만일 그러한 뜻이라면 저는 좀더 솔직하게 제가 베푼 은혜의 댓가로서 양상공이
귀파의 계율을 어긴 사실을 눈감아 달라고 노골적으로 부탁하겠어요.
세분 선배님은 물론 응낙하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조리 있게 따지는 주약란의 말에 옥영자의 얼굴은 금방 붉으락푸르락 했다.
그리고 일양자와 혜진자는 서로 얼굴만 처다 볼뿐이었다.
뭐라고 적당히 대답해야 할 줄을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조소접도 어느덧 주약란이 한 말에서 대략의 사정을 짐작한 눈치였다.
칠흑 같은 눈썹을 약간 치켜세우고 얼굴에는 은근히 노기를 띠고 옥영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첫 순정을 알게 된 조소접도 양몽환에 대한 관심과 정이 주약란보다 더해
가는 모양이었다.
양몽환은 장문사숙(掌門師叔)의 화가 난 표정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괴로워했다.
또한 그로서는 자기를 아껴주고 애써서 자기의 죄를 감싸주는 주약란의 따뜻한 마음씨를
상하게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사숙님들이 자기 일로 인해서 곤경에 빠져 어색하게 서 있는 것도 괴로운 노릇 이었다.
끝내 그는 더 참지 못하고 앞으로 걸어 나와 주약란과 마주 섰다.
「근 일년 동안 음으로나 양으로 이 목숨을 구해준 은혜는 저의 마음속 깊이 새겨서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 양몽환은 은사에게 십이 년 동안 가르침을 받은 몸이고 또 곤륜파 문하의 제자로서
본 파의 계율을 어길 수 없는 몸이기도 합니다.
주소저의 따뜻한 정은 고마우나 더 이상 이 문제에는 말씀을 말아 주십시오.」
주약란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여러 우연으로 결코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하였다 하여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꼭 계율로 벌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닐까요?
물론 사문의 계율에 의하여 벌을 받아야만 마음이 편안할는지는 몰라요.
그래도 모든 사정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에요.
만일 당신이 한을 품고 죽게 된다면 내년 팔월 한가위 때 천용방 총단에서 열리는
대회에서 어떻게 될는지 알아요? 틀림없이 피비린내 나는 수라장이 되고 말 것이며
무예계에 일대 액운이 겹치게 될 거예요.」
그녀는 조소접을 한번 뜻있게 바라보고 다시 양몽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의 생사는 비단 곤륜파의 존망을 결정지을 정도로 끝나는 것은 아니에요.
금후 수십 년간 무예계의 형세를 일변시키고 말 것이에요.
접매가 나에게 이야기한 바도 있습니다.
당신의 성품은 청기(淸奇) 하면서도 영특한 오성(悟性)이 남달리 뛰어나 만일
뛰어난 도사가 그대에게 상수급의 무공을 가르치기만 하면 수년 내로 대성할 수 있다는 거예요.
나와 접매는 모두 여자의 몸이라 더 이상 강호에 떠돌아다닐 수도 없어서 아마도 한 일년 후에는
심산에 깊이 파묻혀 영영 속세를 등지게 될 거예요.
사실 이 홍진십장(紅塵十丈)에는 많은 번뇌가 있는 곳이에요.
접매 같이 세상에 무방한 무공을 지녔으면서도 황산에 파묻히게 되는 것은 아까운 노릇이지만
그 결과는 또 그래도 좋을 거예요.
만일 그녀가 일시적인 충동으로 편견된길로 들어서게 되면‥‥‥」
홀연,
조소접이 눈을 깜빡이며 살기를 발하는 동시 얼굴 가득히 은연중 띠는 야심을 본 주약란은
속이 섬뜩하여 얼른 말을 끊었다.
주약란은 태도를 일변하여 곤륜 삼자를 한번 휘둘러 본 뒤에 냉랭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양상공은 곤륜파의 제자이니 세 분 선배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시든지
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 시각도 늦었고 해서 이만 인사를 드리고 돌아가겠어요.」
말을 마치기가 바쁘게 두 손을 모아 목례하고는 조소접을 이끌고 떠나갔다.
그 뒤를 따라 삼수나찰 팽수위와 네 명의 백의 시녀가 일제히 뒤를 따랐다.
그러자 하림이 크게 불렸다.
「언니!」
주약란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왜?」
하림은 숨을 할딱거리며 뛰어와 주약란 앞에 다가섰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슬픔이 가득했다.
그녀는 주약란의 두 손을 꼭 잡아 쥐었다.
「언니는 정말 우리에게서 떠나시는 거예요?」
그러자 주약란도 서글프게 웃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너는 사부님을 따라 곤륜산으로 돌아가야 해,
그래야 너의 오빠를 돌봐줄 수 있을 것 아니야.
네가 생각날 때는 언제든지 현옥을 보낼께.
그때는 이곳으로 와서 놀다 가도록 해요. 응?」
「이 며칠간 많은 일들을 생각해 본 것을 언니에게 이야기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언니는 또 우리를 버리고 떠나다니!」
하림이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에 주약란도 서글퍼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가볍게 하림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타일렀다.
「잠깐 동안의 이별이야. 다시 만날 기회가 많을 걸‥‥‥」
그래도 울먹이기만 하는 하림이 딱하여 다시 위로해 주었다.
「삼개월 이후 저 팽소저를 현옥과 함께 곤륜파로 보내 림매를 보살펴 주도록 할께.」
그제야 하림은 고개를 돌려 혜진자를 돌아보고는 천천히 주약란의 손을 놓았다.
파르르 떨리던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무어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는 양 말을 대신하여
두 줄기의 눈물은 소리 없이 그녀의 볼을 따라 흐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힘없이 되돌아갔다.
항상 웃음꽃을 피우고 있던 하림도 예전과는 달리 종전에 볼 수 없었던 슬픔에 잠겨 있었다.
삽시간에 많은 세월의 풍상을 겪게 되자 천진난만하기만 하였던 그녀도 성숙해진 듯
어른스럽기만 했다.
유난히 하얀 옷자락과 기다란 머리카락을 나부끼는 그녀의 발걸음은 무거워 보였고
뒷모습은 한없이 애처로워 보이기만 하였다.
주약란은 저도 모르게 콧등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만 같았다.
주약란은 눈물을 보이기가 싫었다.
눈물을 감출 양으로 얼른 몸을 돌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접매, 가자.」
한마디 하고는 몸을 날려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러자 조소접은 그때까지도 미련이 많은 듯이 양몽환을 돌아보고는
백의의 시녀를 거느리고 주약란을 따라 달려갔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팽수위가 곤륜삼자에게 허리를 굽히는 것이었다.
「세분은 모두 무예계에서 존경 받는 분들이십니다.
아무쪼록 대국을 살피시어 일을 처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인아씨의 말씀도 모두 폐부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목전의 무예계 분쟁은 대단히 치열하여서 명년의 중추대회가
전체 무예계의 국면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것은 사실이옵니다.
삼백년 전 구대 문파 검술대회에서의 참극은 아직도 생생한 상흔(傷痕)을
남기고 있습니다만 내년의 대회도 그 보다 더한 참극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앞으로 양상공의 일거일동이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저도 여자이지만 여자들이란 결국 하늘과 땅을 주름잡는 신통한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아량이 남자만큼 넓지 못합니다.
따라서 선악에 대한 판단도 항상 순간의 감정에 결정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세분 도장께서는 저의 부질없는 말씀을 깊이 고려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는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그녀도 몸을 날려 달려갔다.
옥영자는 서리가 내린 듯한 차가운 얼굴로 떠나가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고개를 돌려 양몽환을 차디찬 눈으로 쏘아보고는
일양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대사형! 이 제자는 아무래도 우리 곤륜파에서는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소제(小弟)의 의견으로는 그에게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어 제멋대로 행동하게
내 버려두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양몽환은 온 몸에 식은땀이 쫙 흘렀다.
그는 황망하게 옥영자 앞에 꿇어 엎드렸다.
「제가 계율을 어겼으니 응당 제 죄를 받아야 마땅하오나 아무쪼록
장문 사숙께서는 은총을 베푸시어 제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하림은 양몽환이 꿇어 엎드리자 자기도 재빨리 엎드렸다.
「몽환 오빠가 나쁘지는 않았어요.」
그러면서 양몽환의 용서를 빌고 싶었으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순간, 일양자는 한 때 자기의 제자였던 묵수금강(墨手金剛) 채방웅(蔡邦雄)이
문호에서 축출 당했던 지난날의 일이 떠올랐다.
채방웅은 축출당한 이후로 세 번이나 애걸하여 다시 사문(師門)에 돌아올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자기에게 거절당하고 그 대신 자기가 장난삼아 던진 말로 인해서
그로 하여금 수년이란 세월을 허비해 가면서 장진도(藏眞圖)를 찾게 하지 않았던가?
결국 장진도는 그의 피눈물 겨운 노력으로 입수하기는 하였으나‥‥‥
그는 애석하게도 현도관(玄都觀) 문밖에서 추적해온 천남쌍오(天南?熬)에게
무참히 격살(擊殺) 당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비극이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지금,
다시 제자를 축출시켜야 하는 비극을 되풀이해야 하는가,
생각하면서 서글퍼지는 감회를 누를 길이 없었다.
의지가 굳은 그도 어느새 두 눈에 빙그르 눈물이 고이는 것이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합장하고서는 옥영자에게 간신히 대답했다.
「장문 사제에게 맡기는 바입니다.」
옥영자도 대사형이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심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일파의 장문인인 신분으로서 한번 발설했던 말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더욱이 주약란의 날카로운 말들이 그의 마음을 너무나 상하게 한 뒤끝이라
얼굴빛을 엄숙히 가다듬고는 냉정하게 받아 들였다.
「그렇다면 소제가 소제의 마음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일양자는 가슴이 선뜩하였으나 하는 수 없었다.
「장문사제의 판단은 소형이 평소 탄복하는 바라 틀림없는 것으로 믿습니다.」
이때, 뒤에 섰던 혜진자가 나서서 말하려고 하는 것을 일양자가 얼른 눈짓으로 제지시켰다.
양몽환은 속이 타서 장문 사숙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금도'호전될 여지가 없이 차갑기만 하였다.
양몽환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떨기만 했다.
그러자 이때까지 쏘아 보고만 있던 옥영자는 등에 메고 있던 장검을 빼들고
한번 휘두른 후에 삼엄한 어조로 잘라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너는 이미 곤륜파의 제자가 아니다.
계율에 의하여 너의 무공을 폐하여야 하겠지만 아직 큰 죄가 없으니 관대히 처벌하여 준다.
그리 알고 지금부터 네 갈 길을 가거라.」
순간, 양몽환은 벌떡 일어났다.
「사부님, 사부님‥‥‥」
앞이 캄캄해진 양몽환은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한편, 일양자는 딱딱한 얼굴로 하늘만 쳐다볼 뿐 양몽환이 부르는데도 못들은 척 하고 있었다.
양몽환은 일양자에게 달려가 매달렸다.
그리고는 일양자의 팔소매를 잡고 울며 호소했다.
「사부님, 정말 이 제자를 버리십니까? 사부님!」
그러나 일양자는 냉정했다.
「넌 이미 장문인으로부터 축출 당하였으니 우리들 사제(師弟)간의 정분은 끊어진 셈이다.」
양몽환은 끓어오르는 혈기를 참지 못하고 한 번 크게 신음 소리를 터뜨리고는
혼절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 하림이 급히 달려왔다.
양몽환의 옆에 엎어지듯 앉은 그녀는 급히 양몽환의 가슴을 주물렀다.
이 광경을 보자 일양자는 다시 지난 날 현도관 앞에서 벌어졌던 과거의 일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그때 양몽환은 축출된 사형 채방웅을 구하고자 천남쌍오(天南?熬)의 힘을 다한 일격을 받고
공중에 떴다가 떨어지는 것을 하림이 받아 역시 그의 가슴을 주물러 주었던 것이다.
일양자는 가슴속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괴로움을 참다못하고 돌아섰다.
「가십시다!」
옥영자가 검을 꽂으며 무정하게 돌아섰다.
「음‥‥‥ 림아, 가자!」
하림은 조용히 얼굴을 들었다.
그러한 그녀?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고개를 살랑 살랑 흔들었다.
「사백부님과 사부님들께서 먼저 가십시오.
저는 오빠가 깨어나거든 같이 가겠어요.」
옥영자가 눈썹을 곤두세우고 차갑게 쏘아보면서 아주 못 마땅해했다.
혜진자도 눈썹을 찌푸리고 나무랐다.
「너의 양사형은 이젠 장문 사백부님으로부터 축출당한 사람이다.
깨어나도 곤륜산으로는 돌아오지 못한다. 너나 빨리 가자.」
그러나 하림은 정중히 혜진자에게 절 한 후 똑바로 마주섰다.
「사부님, 저도 곤륜산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까요?」
혜진자는 하림이 양몽환에 대한 애정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너는 곤륜파의 제자야, 어떠한 일이든 장문사백과 사부의 분부를 받들어야 하는
몸이란 말이야. 그러니 곤륜산으로 돌아가야 된다.」
하림은 허전하게 고개를 들고는 하늘에 둥실 둥실 떠가는 구름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여전히 평평 쏟아져 앞가슴의 옷깃을 흠뻑 적시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주 중대한 문제를 결정하려는 듯이 심각한 얼굴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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