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 장 생사(生死)의 갈림 길에서 <洞窟情事>
그러자 도옥은 품속에서 가루약을 꺼내 들고는 양몽환의 어깨를 흔들었다.
「눈을 뜨고 이 약을 드시오.」
「필요 없소. 금환검으로 목을 치시오. 그래도 나는 아무 소리 안하겠소!」
「그건 너무 가혹한 짓이오. 그래도 나는 양형과 친구지 간인데 어찌 장검을 쓰겠소.
그렇게 한다면 내 마음이 괴롭소.」
「그 우정에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소!」
「고집을 부리지 말고 드시오.
이 약은 괴로움도 없이 칠일 후면 배가 연해지고 무공도 배울 수 없게 되는 신기한 약이오.」
「도형은 나보고 친구, 친구 하는데 친구지 간에 이렇게 악랄할 수가 있소!」
「천만에, 천만에!」
하는 틈을 이용하여 양몽환은 있는 힘을 다해 도옥의 약을 들고 있는 손을 힘껏 후려쳤다.
그러나 양몽환의 반격을 미리 예감하고 있던 도옥은 양몽환의 왼손을 밖아 채며 발길질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칠 대로 지친 양몽환이 죽기를 결심하고 있는 힘을 다했던 것이나
그 힘이라는 것은 미약하기 그지없는 힘이었다.
그런데다가 연거푸 들어오는 도옥의 발길에 맥없이 쓰러진 양몽환은 계속해서
공격해 오는 도옥의 손길에 장태(將台), 기문(期門),장문(掌門)
그리고 백해(白海) 등 네 곳의 혈도가 찔려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도옥은 힘을 주지 않고 기절할 만큼만 찔렀기 때문에 혼수상태에 빠진 양몽환은
죽지는 않았지만 반송장이나 다름없었다.
도옥은 혼미 상태에 빠져 쓰러진 양몽환을 편편한 바위 위에 눕히고 돌을 주어다가
베개를 삼아 매워 주고는 두 손을 마주 잡고 경건히 섰다.
「양형! 친구를 사귀어도 이 도옥이 같은 사람을 친구로 삼은 양형은 참으로 행복하오.
이 황량한 계곡에서 혼자 죽었더라면 어찌할 뻔 하였소?
이불도 없고 돌로 베개를 삼았을지라도 이 도옥을 잊지 말고 감사히 생각하시오.
우정이 이렇다는 것을 나는 보여 주었소.」
하고는 잠시 숙연해 지는 듯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리고 양형! 여기 이 약으로 말한다면 냄새만 맡아도 몸에 있는
욕정(慾情)이 끓어오르고 전신에 기력이 점차 빠져 급히 음양(陰陽)을
조절하지 못하면 생명이 위독하게 되오.
이 약은 아주 음탕한 독약이 오.」
지금까지 기절하여 혼미 상태에 빠졌던 양몽환은 조금씩 의식이 되돌아오고
중얼거리는 도옥의 말도 극히 미약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양형, 마음을 놓으시오.
이 약은 화골소원산이라는 약으로 세상에 가진 사람이 몇 사람 안 되오.
나는 우정을 생각해서이 약을 양형에게 먹이겠소.」
하는 소리에 양몽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나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기운이 없었다.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은 입술뿐이었다.
「도, 도형! 화골소원산을 나에게 먹이겠다는 말이오?」
그제야 도옥도 마주 잡았던 두 손을 풀며 한걸음 다가섰다.
「나는 아주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났구려. 그런데 왜 무섭소?」
양몽환의 핏기 없는 얼굴이 보기 흥하게 일그러졌다.
「도형! 제발 그것만은 먹이지 마시오. 다른 방법으로 죽여주시오.」
「왜 그러시오? 이것도 다 양형과의 우정을 생각해서 특별히 먹이고자 하는데!」
「도형! 우정도 감사하지만 도형은 성질도 선한 사람인데 어찌 음탕한 독약을 먹이려고 하시오?」
「양형 말이 옳소. 양형은 나를 착하다고 하는데 동사매는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이 도옥이라고 그러오.
그래서 나는 약을 양형에게 먹여 동사매에게 데려다 주겠소.
그러면 양형도 나처럼 나쁜 사람이 될 것이오.」
「에이! 이 짐승보다 못한‥‥‥」
하는 양몽환의 입을 손으로 벌린 도옥은 화골소원산을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희희낙락하며 크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히‥‥‥ 히‥‥‥ 됐소, 됐소.
이제 잠시 후 양형은 동사매와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오.
그것은 인생에서 제일 즐기는 즐거움이오.
그리고 칠일이 지나면 모든 인생의 번뇌를 잊고 기억상실증에 걸려 편안한 생활을 할 것이오.
그렇게 삼년만 하면 양형의 뼈는 물처럼 녹아 죽게 될 것이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양몽환의 입은 도옥의 손에 벌려진 채
한 봉지의 약을 다 삼키고 말았다.
흰 가루약의 화골소원산이 다 삼켜진 것을 확인한 도옥은 천천히 양몽환의 입에서 손을 뗐다.
그제야 양몽환은 침을 뱉으며 목구멍으로 넘어간 약을 조금이라도 뱉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허사였다.
「마음 놓고 죽이시오.
오늘 도형이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어느 때라도 나는 도형에게 원수를 갚을 것이오.」
「하하‥‥‥ 복수할 생각은 안하는 것이 좋을 걸‥‥‥‥
해독약이라고는 우리 천용방에 몇 알이 있을 뿐이오.
양형을 좋아하는 주소저라도 별 수 없소.」
하고는 양몽환을 안고 바위를 넘어 앞으로 달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지금 도옥이 양몽환에게 먹인 화골소원산은 무술계에서도
그 지독한 독성에 몸서리를 칠 정도로 무서운 독약이었다.
한번 먹기만 하면 그 독성이 수년 동안 몸속에 들어서
슬금슬금 뼈를 녹이고살을 썩게 하는 독성이 있을 뿐 아니라
죽기 전까지도 모든 기억을 상실케 하여 반병신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 화골소원산의 위력을 전에 스승에게서 잠깐 들은 바 있는
양몽환은 자기가 도옥에 의하여 먹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양몽환은 살아나기를 단념하고 도옥이 하는 대로 몸을 내 맡길 수밖에 없었다.
사실 반항할 어떠한 기획도 없는 양몽환은 반항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었다.
양몽환의 몸을 안은 도옥은 큰 바위를 돌아 우거진 수풀을 헤치기 시작했다.
그 수풀 속에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만큼 교묘히 동굴의 입구(入口)가 바위에 가려져 있었다. 이때까지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양몽환이지만 도옥에게 안겨
지금 어느 동굴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만은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꺼져가는 듯 희미한 의식을 차리고 주위의 정세에 시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윽고 동굴 끝까지 다다르자 그곳에는 사람이 기거할 수 있을만한 석실(石室)이 있고
소나무 가지에 불이 붙어 있었다.
그 불빛으로 주위를 어렴풋이나마 비쳐주고 있었고 송진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한 구석에는 머리를 산발한 여자가 누워 있다가 도옥이양몽환을 안고 들어오자
벌떡 일어나며 도옥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왜 또 왔죠? 어서 나가세요. 죽어도 보기 싫어요.」
하다가 도옥이 안고 있는 사람에게로 시선이 멈추어 졌다.
「하‥‥‥ 하‥‥‥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항상 보고 싶어 하던 양사제를 모시고 왔소.
하‥‥‥ 하‥‥‥ 기쁘겠지 이만하면!」
하고는 양몽환을 여자의 앞으로 획 던지는 것이었다.
그러자 놀란 여자는 급한 김에 벌떡 일어나려다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지고 마는 것이었다.
「하‥‥‥ 하‥‥‥ 양사제가 와서 기쁜 모양이군.
그러나 당신의 다리 경맥도 이미 다 끊어졌는데 일어나지는 못할 걸‥‥‥‥
앞으로 삼일 내에 고치지 못하면 영원히 이 굴 속에서 귀신이 되고 말겠지.
하‥‥‥ 하‥‥‥ 미안하지만 사흘 후에 한 번 더 오겠소.
그동안 양사제와 재미나 보시오! )
하고는 굴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쓰러졌던 동숙정은 몸을 뒹굴며 양몽환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는 것이었다.
「양사제! 이게 웬 일이야?」
희미하게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동숙정임을 알아본 양몽환은
있는 기력을 다해 간신히 대답했다.
「그런데 동사매는 웬 일이십니까? 도형과는 친한 사이가 아니시오?」
그러는 양몽환이나 동숙정은 얼마 동안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이리하여 기구한 운명의 곤륜파 제자는 죽음을 앞에 두고 캄캄한 굴속에서 만나게 되었다.
「나는 그렇다 해도 양사제는 어째서 이런 변을 당했어?」
그러자 양몽환은 아랫배에 갑자기 진통이 오고 전신의 혈맥이
급격히 요동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동사매! 추궁과혈수법(推宮過穴手法)을 아시오?」
「왜? 어디가 마취됐어?」
「예. 전신이 지금 마악 쑤시고 아픕니다.」
「추궁과혈수법을 배우긴 했지만 나도 하체가 마비되어서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는데.」
「그래도 뚫어 보시오.」
「그래!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볼게!」
동숙정은 상반신을 일으켜 기력을 운행한 다음
양몽환의 장태(將台), 기문(期門), 장문(掌門) 그리고 백해(白海)의
네 요혈(要穴)을 차례로 뚫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악 발작하기 시작하던 양몽환의 요혈은 동숙정의 극진한 수법으로
한 군데씩 뚫리고 얼마 후에는 네 군데의 요혈이 완전히 뚫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양몽환은 이상야릇한 욕정이 일어나며
자기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흥분이 온 몸을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도옥의 말대로 약효가 뻗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곧이어 얼굴이 달아오르고 아랫배가 뻣뻣해지며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욕정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이에 당황한 양몽환은 급히 일어나 껑충 껑충 뛰며 혀를 힘껏 깨물었다.
일어나는 욕정을 아픔으로 참아 보자는 것이었다.
있는 힘을 다해 사정없이 혀를 깨물자 아찔한 아픔에 퍼지던 욕정은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때 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때, 양몽환은 여기에 동숙정과 같이 있게 된다면 정말 해괴한 일이 벌어질 것을
예감하고는 그 길로 굴 밖으로 뛰어 달리고 말았다.
그러자 동숙정의 다급한 목소리가 달려가는 양몽환의 뒷등에 달려드는 것이었다.
「양사제! 할 말이 있어요. 잠깐만! 빨리 돌아와요.」
그러나 강한 의지력과 자제심으로 욕정을 억제하는 양몽환은
동숙정의 부르는 소리에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뛰기만 했다.
헐레벌떡 있는 힘을 다해 굴 입구까지 다다른 양몽환은
큰 바위로 가로 막힌 입구 앞에서 다시 한 번 욕정을 참아야 했다.
굴 입구는 도옥의 손에 의하여 육중한 바위가 가로 막고 있었다.
아무리 진기를 모아 바위를 밀어도 끄떡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욕정으로 정신을 못 차릴 만큼 분별성이 없어진
그의 정신과 기력이라는 기력은 모두 욕정으로 변했는지 발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한 힘으로 육중한 바위를 밀어 낸다는 것은 그야 말로
한 마리의 개미가 바위를 굴리는 격이었다.
도대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자 굴 밖에서 도옥의 웃음소리가 터지는 것이었다.
「하‥‥‥ 하‥‥‥ 과연 양형은 군자이시군! 감탄하오.
그러나 같은 파의 제자끼리 며칠 재미있게 인생을 즐기는 것도 좋을 것이오.
부족한 것도 많고 비단 이불도 없지만 그런 대로 신혼 생활을 하시오.
그럼 나는 이만 실례 하겠소 미안, 미안‥‥‥」
도옥의 웃음소리는 드디어 멀리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양몽환은 있는 자제력을 다해 끓어오르는 욕정을 참으며 바위를 더 밀어보았다
그러나 요지부동이었다.
얼마를 더 버티던 양몽환은 하는 수 없이 동숙정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렇게 불러도 대답 없이 뛰어 나가던 양몽환이 되돌아오자
아무 영문도 모르는 동숙정은
「양사제!」
하고 크게 불렀다.
그러자 눈까지 붉게 욕정으로 충혈된 양몽환은 동숙정이 부르는 소리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다급하게 소리부터 질렀다
「없습니까? 없어요?」
「아니, 양사제. 무엇이 없다고 그러세요?」
「문 말입니다, 문 다른 문은 없습니까?」
이제는 몸까지 비틀거리고 말도 두서없이 나오는 대로 소리쳤다.
「이 석실엔 문이 또 없느냐 말입니다. 밖으로 나가는 문 말입니다.」
하고는 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아무데나 머리를 쾅 쾅 받으며 괴로워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대강을 짐작한 동숙정은 양사제가 도옥의 마수에 걸려
정신 착란을 일으킨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리고는 더 생각하지 않고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외쳤다.
「양사제! 저기 저 구석에 가면 통로가 있어요!」
동숙정이 가리키는 곳으로 비틀거리며 달려간 양몽환은 벽을 힘껏 밀었다.
그러자 돌문이 갑자기 열리며 양몽환의 몸은 앞으로 나가 떨어졌다.
동숙정이 가리킨 곳에는 교묘하게 만든 비밀 문이 있었다.
보통 사람이 조금 힘을 주어 밀면 바위 같은 벽의 한 구석이 열리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그 문을 뛰어 가며 몸으로 떠미니 비록 힘은 없다 해도
양몽환의 체구에 밀려 문이 열리고 그 바람에 앞으로 쓰러진 것이었다.
그러나 끓어오르는 욕정과 동숙정이 있는 곳에서 빨리 나가야한다는 생각 밖에 없는
양몽환은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엎어지고 기고하여 뛸 수 있는 데까지 뛰는 것이었다.
과연 동숙정의 말대로 통로가 있었다.
그러나 그 통로도 육중한 바위로 굳게 막혀 있었다.
발길로 차고 멀리서 뛰어오다 몸으로 밀어도 꼼짝 달싹은 고사하고
양몽환의 몸 만 뒤로 벌렁 벌렁 나가떨어지는 것이었다.
얼마를 더 계속해서 몸으로 밀던 양몽환은 기진맥진하여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욕정을 억제하며 두리번거렸다.
그러던 그의 눈에는 바로 머리 위에도 통로가 있다는 것을 발견 했다.
그 곳 역시 바위에 막혀 있으나 한 번 밀어 볼 의욕이 불현 듯 났다.
양몽환은 눈을 감고 잠시 조식을 취한 다음 앉았던
그 자리에서 일어나며 머리로 그 바위를 받았다.
한 번, 두 번‥‥‥ 드디어 그 바위는 덜커덩 소리를 내며 물러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바로 머리 위에서는 여자의 놀라는 소리가 들렀다.
「앗! 누구야!」
양몽환은 있는 힘을 다하여 뛰어 올랐다
그러자 그곳에는 희미한 불이 켜 있고 아름다운 청의소녀(靑衣少女)가 놀란 듯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욕정을 참지 못하고 뛰어 나오는 그의 눈에는 청의를 입고 있는
소녀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절세의 미인으로 보였다.
그 순간,
양몽환은 지금까지 억제해 오던 욕정과 이성(理性)을 잃고 말았다.
아무 것도 의식할 수 없는 양몽환은 성난 사자처럼 달려들어 소녀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이 어찌된 일인가. 응당 반항하고 고함을 쳐야할 소녀는 양몽환이 껴안아 주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소녀도 양몽환을 껴안으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욕정이 끓어올라 몸 둘 바를 모르던 양몽환이었는데
소녀의 따스한 체온과 향긋한 머리 냄새에 양몽환의 불같은 정욕은
타오를 대로 타오르고 성난 야수같이 소녀의 입술을 더듬는 것이었다.
그러자 소녀도 팔에 힘을 주며 양몽환이 하는 대로 몸을 맡기는 것이었다.
얼마를 그렇게 불길 같은 욕정에 몸을 맡기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소녀의 두 손까지 양몽환의 품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제야 소녀는 조금 당황하며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한 소녀의 얼굴도 정욕으로 활활 타오르는 듯 했다.
그러나 말은 냉정했다.
「왜 이러시죠? 언제는 이요홍이 싫다고 하고 이제는 좋아졌어요?」
하고 날카롭게 쏘아 붙인 이요홍은 양몽환을 힘껏 밀었다.
그 바람에 욕정에만 온 기력이 운집된 양몽환은 맥없이
뒤로 몇 걸음 비틀거리다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가쁜 숨만 몰아쉬는 것이었다.
자기가 조금 미는 힘에 양몽환이 쓰러져 일어나지도 못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이요홍은 얼마가 지나도 일어나지 못하는 양몽환을
내려다 보다 와락 겁이 났다.
당황한 이요홍은 급히 양몽환의 인중(人中)과 영향(迎香)의
두 혈도를 부드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 동안을 주무르자 그제야 길게 숨을 몰아쉬며 양몽환은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어릴 때부터 강호 무술계의 고수들 사이에서 자라난 이요홍은 양몽환의
붉은 얼굴과 충혈 된 눈 그리고 미친 듯이 행동하는 것을 보는 순간,
그녀의 넓은 견식으로 양몽환이 어떤 고수의 독수(毒手)에 걸려 정신이
마취됐음을 즉각 눈치 챘다.
그러자 자기에게 도에 벗어나는 행동을 한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몽환을 마음속으로 사모하고 있는 이요홍으로서는 양몽환의 포옹과
뜨거운 입술은 꿈에도 생각 못한 황홀한 시간이었고 또 기다리고 원하던 것이었다.
그것이 비록 마취된 정신으로 한 것이지만 이요홍으로서는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양몽환에게 독수를 뻗친 고수를 증오하게 되고 양몽환이 가엾고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얼마 만에 조금이나마 제 정신으로 돌아온 양몽환은 앞에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이요홍이라는 것을 직감하자 지금까지 자기가 취한행동도 행동이려니와
다시 끓어오르는 욕정을 참을 길이 없어 그 길로 다시 몸을 날려 뛰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이요홍은 양몽환의 왼 팔을 잡고 늘어 졌다.
그 바람에 양몽환은 또 한번 뒹굴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과연 화골소원산은 그 약효가 굉장했다.
이때까지도 양몽환은 욕정이 없어지기는 고사하고 더 더욱 번져가고 있었다.
그러한 양몽환이 뛰어나가는 것을 갑자기 잡고 늘어지자 휘청하며
쓰러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양몽환이 쓰러지자 급히 달려가 일으켜 앉힌 이요홍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양몽환을 흔들었다.
속히 정신을 차리라는 듯이
「도대체 무슨 독약을 먹었는지 말씀이나 해요?」
그러나 이요홍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양몽환은
희미하게 보이는 이요홍의 얼굴이 아름다운 소녀라는 것과 옥을 굴리는 듯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린다는 것만 의식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욕정이 불타고 있는 양몽환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요홍의 부축을 받고 간신히 일어섰던 양몽환은 이요홍의 앞가슴에
손이 닿는다고 느끼는 순간 이요홍의 몸을 팽팽히 싸고 있는 옷을 힘껏
아래로 내려 찢었다.
그리하여 옷은 두 쪽으로 찢어지고 말았다.
대경실색한 이요홍은 급히 몸을 움츠리며 그 자리에 도사리고 앉았다.
그러자 양몽환도 따라 앉으며 연거푸 이요홍의 옷을 잡히는 대로 찢기 시작했다.
그러자 몇 번 가냘프게 고함을 치며 반항하던 이요홍은 양몽환이하는
대로 몸을 내 맡기는 것이었다.
그녀의 공력으로나 맑은 정신으로 제 정신이 아닌 양몽환을 피해 달아나지 못할 리는 만무했다.
그러나 이요홍은 옷이 하나씩 찢겨 나갈 때 마다 이상한 흥분에 도취되어 커다란 폭풍 앞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이 기쁠까, 슬플까, 옳은 일인가,
또는 나쁜 일인가 조차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이요홍은 기꺼이 양몽환에게 몸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양몽환의 전신에 퍼지고 있는 독성이 욕정을 일으키는 독약이라면
그래서 욕정을 발산하지 못하고 끝내 죽어버린다면 자기가 그 욕정의 대상이 되어
양몽환의 욕정을 풀어주고 아울러 죽음에서 그를 구하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섰던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결심도 따지고 보면 어떠한 인과가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것은 도옥이 양몽환에게 화골소원산을 먹이고 그 욕정의 대상이 도옥이 사랑하고 있는
이요홍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드디어 이요홍의 옷은 양몽환에 의해 실오라기 하나 거침없이 깨끗이 벗겨지고
이요홍의 풍만하고 옥 같은 나체가 나타났다.
이윽고 인간의 가장 아름답고 또 고통스러운 시간이 숨 가쁘게 지나갔다.
신비스러운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이요홍에게는 눈물과 고통 그리고 사랑이 남았고
양몽환에게는 그렇게도 타오르던 욕정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기력이 차차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몽환에게서 욕정이 없어진 대신, 이요홍과의 숨 가쁜 시간을 보내고 피로하여
깊이 잠이 든 때 화골소원산의 독성은 골수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것은 원래 골수에 까지 들어가는 것이지만 적어도 칠일 이전에는 퍼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것이 욕정을 발산하고 피로한 틈을 타서 골수로 스며들어 수명을 감소시키는
작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는 한편, 이요홍은 한 잠도 잘 수가 없었다.
그녀의 머리 속에는 여러 가지의 복잡한 생각과 자기 같은 여자의 얼굴이 지나갔다.
처음에는 하림이, 그 다음에는 주약란, 그리고 동숙정의 얼굴이 떠오르는가 하면
무술계의 여마귀로 불리는 옥소선자의 얼굴도 떠올랐다.
만일 양몽환과의 소문이 퍼진다면 한 사람도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 이창란의 노한 모습도 떠올랐다.
그러나 이십여 년을 지켜온 순결을 사랑하는 양몽환에게 바친 것은 조금도 후회되지 않았다.
얼마동안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에 빠졌던 이요홍은 모든 것을 떨쳐 버리기나 하듯이
고개를 살랑 살랑 저으며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양몽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후회하기보다 오히려 죽어가는 생명을 구했다는 자위에 보람 같은 것을 느끼고
양몽환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입술을 포개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후회하지 않아요. 오히려 기뻐요.
그러나 당신은 마취된 정신이었지만 저는 맑은 정신이었어요.
차후에라도 이 일을 알면 변명하셔도 좋아요.
그리고 아침이 되면 당신은 후회하시겠죠.
그렇지만 당신이 깨어 일어나기 전에 저는 이곳을 빠져 나가겠어요,
생각하면 저에게는 괴로운 고통이지만 한편으로는 기뻐요.
하늘이 주신 인연으로 알겠어요. 당신의 하림 사매나 주소저가 안다 해도
이해해 줄 것이라 믿어요.」
두 볼에 눈물을 흘리던 이요홍은 자기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피로하고 고단한 모양이었다.
얼마나 잤는지 이요홍이 눈을 떴을 때는 훤히 동이 트는 무렵이었다.
황급히 일어난 이요홍은 아직도 자고 있는 양몽환을 정이 담뿍 어린 눈으로 바라본 다음
곧 떠나기로 결심하고 옷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옷은 조각조각 찢어지고 그 중의 어느 하나라도 그녀의 나체를 가릴 만한 것은 없었다.
나체로 두리번거리던 이요홍은 양몽환이 끙 하며 잠에서 깨는 듯하자
부끄러운 나체를 감추려는 듯 외면하고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눈을 뜬 양몽환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로 옆에는 나체의 이요홍이 앉아 있고 자기 자신도 나체의 몸으로 있는 것이 아닌가.
「응? 이게 어찌된 일이오?」
펄쩍 놀라는 양몽환을 바라보는 이요홍의 표정은 그지없이 밝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요홍은 나체의 몸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미소를 머금은 채
눈만 깜박 깜박 하고 있는 것이었다.
얼마동안 이요홍과 주위를 번갈아 살피고 있던 양몽환은 주위에 흩어져 있는
이요홍의 옷을 보고서야 어렴풋이 생각이 나는 듯 펄쩍 뛰며 일어나 앉았다.
「아니! 내가‥‥‥ 내가‥‥‥」
당황해 하던 양몽환은 지난밤의 모든 일이 한 가지 한 가지씩 생각났다.
도옥이 약을 강제로 먹이던 일,
그리고 욕정에 불타 동숙정에게 서 뛰쳐나온 일,
그리고 지난밤에 청의 소녀의 옷을 찢던 일‥‥‥
여기까지 생각하던 양몽환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이 달려가
아무 곳이나 머리로 받아 넘기는 것이었다.
발광한 듯 고함을 치며 정신없이 흙벽을 박는 행동에 더욱 놀란 이요홍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양몽환의 몸을 끌어안았다.
「왜 이러시죠? 남자답게 떳떳이 저를 보세요.
그렇게 미친 듯이 아무데나 박고 죽는다면 되겠어요?」
서로 나체의 몸으로 부끄러움도 잊어버린 이요홍은 신랄하게 나무랐다.
그것은 자기의 잘못을 죽음으로 사죄하려는 듯한 양몽환에게 아무 죄도 아니라는
인식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가 제 정신으로 돌아오면 사실대로 자기가 희생되어 양몽환을 살리려고
결심한 이야기를 해서 어떠한 충격도 갖지 않도록 하려고 했다.
그러자 양몽환은 고개를 수그리며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어느 정도 냉정을 찾은 모양이었다.
「이소저! 나를 죽여주시오. 아무래도 죽을 몸입니다.
이렇게 무례하고도 큰 죄를 진 몸이 살면 무엇 하겠습니까?」
「잠깐, 제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아니 필요 없습니다. 내가 먹은 화골소원산은 아무래도 나를 죽일 것입니다.
이소저께서 깨끗이 죽여주십시오.」
「네? 당신이, 당신이 화골소원산을? 누가 먹였어요?」
「죽는 것은 서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사형인 도옥에게 원수를 갚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이 됩니다.」
「그럼 도사형이?」
이요홍의 놀라움은 켰다. 더구나 다름 아닌 사형 도옥이 자기가 사랑하는
양몽환에게 그런 악독한 수법으로 독약을 먹일 줄은 생각도 못해본 일이었다.
「그렇습니다.
귀원비급을 뺏을 목적으로 나의 요혈을 폐쇄시키고 독을 먹였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아무 정신도 없었군요.」
「깨꽃이 저를 죽여주시오.
그리고 이소저께서 용서해 주신다면우리 사문에 말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다.」
「저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요.
그리고 당신은 정신이 없는 몸이었고 저는 당신을 위해서 희생했는데
이 일을 사문에게 알린다면 제가 무슨 면목으로 조선(祖先)을 대하겠어요?」
「그럼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소저께서 저의 무례한 행동을 용서해 주신다면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진정이세요
「양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그럼 스스로 자결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세요.」
「배가 녹아 죽어도 자살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제 옷을 집어 주세요! )
순간, 양몽환은 부끄러움과 수치감으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속히 갖다 주세요!」
재차 하는 소리에 얼굴이 상기된 양몽환은 갈기갈기 찢어진 채
흩어져 있는 이요홍의 옷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이요홍은 하나도 부끄러움 없이 양몽환의 앞으로 나서며 옷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찢어진 옷을 하나하나 들치며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는 것이었다.
「? ‥‥‥‥‥‥」
무엇을 찾는지 알길 없는 양몽환의 둥그레진 눈 끝에는 빨간 알약을 끄집어내는
이요홍의 손이 보였다.
순간, 이요홍은 생글 생글 웃으며 양몽환에게로 다가 왔다.
「이 약을 즉시 잡수세요.」
양몽환은 이요홍이 주는 대로 받아 들고, 시키는 대로 입에 넣었다 이왕 죽을 몸이었다.
여자를 강탈하고 이제 무슨 면목으로 목숨을 부지할 것인가,
이요홍이 시키는 대로 해서 이요홍의 노여움부터 풀어 주어 죄의 만분의 일이라도
용서함을 받으려는 것이었다.
또한 지금 이요홍이 먹으라고 준 알약이 화골소원산보다 더 독한독약이라도
이왕 죽을 몸, 두려움이 없었다.
그러자 이요홍은 계속해서 생글 생글 웃으며 양몽환의 손을 잡았다.
「이젠 됐어요. 조용히 눈을 감고 기력을 운행 조절 하세요.」
그러나 양몽환은 고개를 저었다.
「이왕 죽을 몸입니다.
그보다 지금 내가 맑은 정신을 지니고 있을 때 이소저의 옷을 가져오도록 하시오.
그래서 이소저께서는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그러자 이요홍의 대답은 의외였다.
「저는 이미 당신의 것이에요.
영원히 당신과 함께 있겠어요, 한발도 떠나지 않고.」
「그것은 안 되오.
나는 이제 곧 죽을 사람인데 같이 있다면 더욱 괴로움만 당할 것입니다.」
「저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시겠지만 당신은 무슨 일이든지
제가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았어요?」
하는 말에 양몽환은 할 수 없이 입을 다물고 이요홍이 시키는 대로
눈을 감고 기력을 운행 조절하기 시작했다.
양몽환이 기력을 운행한지 얼마 안가서 아랫배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전신으로 퍼지며 온 몸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피의 순환이 활발해지는 것이었다. 참으로 놀랍고 희한한 일이었다.
그때까지 양몽환과 마주 앉아 지켜보고 있던 이요홍은 양몽환이
땀을 흘리고 얼굴에 화색이 돌자 긴장했던 마음을 풀면서
양몽환의 요혈을 정성껏 주무르기 시작했다.
드디어 양몽환은 모든 요혈이 창통하고 맥박도 고르게 뛰었다.
그와 함께 기력은 물론 욕정으로 혼미했던 정신도 맑게 걷히고 새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러한 양몽환을 바라보며 요혈을 지성으로 주무르던 이요홍은 손을 멈추며
양몽환의 턱 밑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다정한 사람끼리 행동하는 것 같았다.
「어때요? 다른 곳에 이상은 없으세요?」
「아니 별로 없습니다. 정신도 맑아지고.」
하고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벌써 독약이 골수에까지 스며들었지만 발작을 못하는 모양입니다.」
「그럼 안심하세요.」
하고는 느닷없이 양몽환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돌변한 이요홍의 울음에 당황한 양몽환은
급히 이요홍의 어깨를 흔들며
「이소저! 왜 그러시죠?」
하고 황급히 묻자 이요홍은 그대로 얼굴을 묻은 채 더욱 크게 흐느끼는 것 이었다.
「당신‥‥‥ 당신에게 알약을 먹인 것이 후회돼요.」
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길 없는 양몽환은 다만 그 알약이 독약이어서
자기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것인 줄만 알고 길게 한숨을 쉰 후 이요홍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소저 울지 마시요 나는 아무래도 죽을 사람이요
그까짓 독약쯤 더 먹었다고 죽는 몸이 무엇을 알겠소.
나는 죽어도 당신을 원망하지는 않겠소. 울지 마시오.」
그러자 이요홍은 고개를 흔들며 더욱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양몽환의 가슴을 팡팡 때리는 것이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당신을 빨리 죽으라고 드린 독약이 아니에요.」
「그럼 무슨 약이란 말이오?」
「그 약만 드리지 않았더라면 며칠 더 당신과 함께 있을 것을‥‥」
하는 때였다.
갑자기 석실 입구에 이상한 미풍이 부는 듯 했다.
순간! 급히 돌아보던 양몽환은 이요홍을 가볍게 떼어 놓으며 달려갔다.
그러자 이요홍도 역시 놀라 나체인 자기 몸을 웅크리며 주위를 훑어보았다.
석실 입구로 달려간 양몽환은 그곳에 걸려 있는 한 벌의 옷을 발견하고는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는 주약란이 입고 다니던 옷이 얌전히 걸려 있었다.
어느 틈에 갖다 놓았는지 주약란의 자취는 간 곳이 없고 옷만 걸려 있을 뿐이었다.
얼마 동안 넋을 잃고 서 있던 양몽환은 옷을 벗겨들고 이요홍에게 건네어 주었다.
「이것을 입으시오. 주소저의 옷인데 언제 다녀간 모양입니다.」
태연히 하는 말이었지만 천 가지 만 가지의 생각이 그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렇다면 주소저는 나와 이요홍과의 관계를 알고 있구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만일 주약란이 나와 이요홍의 행동을 보았다면 얼마나 경멸하고 또 멸시했을까?)
생각하는 동안 아무 말 없이 주약란의 옷을 입은 이요홍은 보검까지 허리에 차고
간단한 차림으로 양몽환 앞에 섰다.
그러한 그녀의표정은 담담하고 한편 차가운 빛이 돌았다.
「주소저를 뵈옵거든 저 대신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하고 몸을 돌려 입구로 향하던 이요홍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저를 생각하지 말고 하림 사매를 잘 돌봐 주세요.
지난밤의 일은 우리끼리만 고이 간직하고 있도록 해 주세요.」
「이 소저!」
「이제는 영원히 당신 옆을 떠나겠어요.
당신이 죽는다면 한발도 떠나지 않겠지만 알약의 효과로 죽지는 않아요.
그래서 저는 떠나기로 결심 했어요.」
「이소저! 떠나지 마시고 함께 지내도록 하면 될 것인데 어찌 떠난다 하시오
「천만에 말씀이에요.
당신이 저 같은 여자를 생각이나 하겠어요.
다만 저를 위로하느라고 하시는 말씀인 줄도 알아요.
그러나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아요.」
양몽환은 깊은 한숨을 쉬고 이요홍의 손목을 힘 있게 쥐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입구를 벗어 나왔다.
그때 이요홍은 울고 있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몸까지 바친 다음
이제 영원히 떠나버리는 이요홍의 심정을 양몽환인들 무슨 말로 위로해 줄 것인가?
암담하고 답답한 심정에 말할 수 없는 사연을
그녀의 손을 쥐어 줌으로서 대신하는 양몽환이었다.
양몽환의 손에 끌려 이요홍은 천천히 굴 밖으로 나왔다.
그때였다.
바로 맞은 편 바위 위에서 낭랑한 하림의 부르는 소리 가 들렸다.
「오빠!」
소리치며 달려오던 하림은 양몽환의 뒤에 따라 나오는 이요홍을 보고는
멈칫 놀라며 그 자리에 서는 것이었다.
「아! 홍 언니도 계셨군요. 전 몰랐어요.」
하고 얼굴을 붉히는 하림의 손을 꼭 쥔 이요홍은 쓸쓸히 웃으며
「어떻게 이곳에 오빠가 있는 줄 알았지?」
「대 언니가 데리고 왔어요. 여기 있으면 오빠를 만나게 된다고 하면서요.」
이때,
양몽환은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면서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괴로운 시간이었다. 얼굴이 뜨뜻이 달아오를 지경의 난처한 시간이었다.
모든 번뇌가 수없이 밀려와 양몽환의 머리를 두들기는 것 같은 괴로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자 이러한 양몽환의 기색을 살핀 하림은 양몽환의 품속으로 들어가 안기며
걱정스러운 듯이 묻는 것이었다.
「오빠! 왜 그러고 있어요?」
여러 가지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던 양몽환은 하림이 품속으로 기어들며 안기자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며 하림을 밀어 버렸다.
그것은 자기의 자책 때문에 무의식중에 취해진 행동이었다.
그 바람에 하림은 몇 걸음 밀려나다 쓰러지고 말았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뜻밖에 양몽환의 손길에 밀려나 쓰러진 하림은
금방 눈물이 주르륵 쏟아져 흐르는 것이었다.
그래도 양몽환은 까딱하지 않고 먼 허공만 바라보는 것이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하림을 버려야 한다는 결심이 굳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하림을 사랑할 수 없는 몸이다. 깨끗이 나를 잊게 하여
괴로움을 덜어 주는 길만이 내가 취할 행동이다‥‥‥)
그때까지 쓰러진 채 눈물을 흘리던 하림은 양몽환이 다가와 부축해 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냉담한 태도로 바라보지도 않았다.
순간,
하림은 간장을 에는 듯 가슴 아픈 슬픔을 맛보았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뜬 채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듯 작은 소리로 흐느끼며 말하는 것이었다.
「오빠! 무슨 일이에요‥‥‥ 오빠가 하라는 대로‥‥‥ 할게요!」
그러나 양몽환은 마음을 더 굳게 다졌다.
(나는 살아도 앞으로 칠일 밖에 못 산다.
아무래도 헤어져야 할 하림인데 이 기회에 나를 생각지도 않게끔
냉정하게 대해주지 않으면 내가 죽어서도 하림은 나를 잊지 못할 것이다.
아무쪼록 냉정하고 의리 없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증오하도록 해야지‥‥‥)
이렇게까지 극단으로 생각한 양몽환은 쓰러진 하림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기다리던 하림은 양몽환이 그 길로 돌아서 버리자
「오빠!」
외치고는 피를 토하며 기절하고 말았다
그때 만일 양몽환이 본래의 착한 천성대로 돌아보았다면
그대로 가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돌아보기는 고사하고 하림의 외침도 듣지 않으려는 듯 머리까지 흔들었다.
이때, 양몽환을 가로 막는 사람이 있었다.
「발을 멈추시오. 만일 한 걸음이라도 발을 땐다면 저의 칠보추혼사 맛을 보여 드리겠소.」
벽력같이 고함을 지르며 길을 막은 사람은 삼수나찰 팽수위였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장갑을 끼고 한줌의 독사(毒砂)가 쥐어져 있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대로 가던 길을 걸어갔다.
죽음도 독사도 또 그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양몽환이었다.
양몽환의 대담하고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에 놀란 팽수위는 다시 위협조로 소리쳤다.
「그래도 가겠소! 나중에 원망 마시오.」
그러자 양몽환은 더 속도를 빨리해서 삼수나찰 팽수위가 서 있는 곳을
질풍같이 달려가는 것이었다.
팽수위에게로 질풍같이 달려오는 양몽환의 비장하고도 심각한 표정을 본 팽수위는
즉각 그의 표정에서 무슨 큰 고민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는 한갖 위협에만 그쳤던 독사를 다시 주머니에 쏟아 넣고는 어떻게 하든지
양몽환이 더 가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다.
팽수위가 주저하고 있을 때 다른 한편에서는 네 명의 시녀를 거느린 조소접이
양몽환의 앞길을 막았다.
그러자 팽수위가 크게 소리쳤다.
「주소저의 분부로 양상공을 천기석부까지 데리고 가야 합니다. 놓치지 마십시오.」
하는 말에 조소접도 역시 소리쳐 대답했다.
「염려 마시요!」
양몽환을 조소접에게 인계한 팽수위는 곧장 하림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때, 이요홍은 하림을 부축하고 그녀의 혈도를 풀어주고 있었다.
한편, 조소접에게 길을 막힌 양몽환은 순간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모든 사건이 오늘까지 귀원비급을 찾아 조소접에게 바치겠다고 약속하였기 때문에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동분서주 하다가 뜻밖의 일을 당하고 또 저지른 셈이었다.
(만일 조소저와 약속을 하지 않았더라면 한 많은 사건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
이렇게 생각하자 양몽환은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왕 죽을 몸이 복수한들 무슨 소용이라!)
이런 생각이 들자 이상스럽게도 마음은 편안해지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태연히 조소접의 앞에 까지 갈 수 있었다.
이때,
조소접은 너무나도 태연한 양몽환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며 손을 들었다.
「발을 멈추시오!」
그러나 양몽환은 여전히 걸어 나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조금 더 크게 소리쳤다.
「멈추세요! 귀원비급은 찾았어요?」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비장한 모습으로 앞만 보며 걸어가는 것이었다.
몇 번 물어도 아무 대답이 없는 양몽환을 노려보던 조소접은 조금 더 날카롭게 외쳤다.
「귀가 먹었소? 왜 대답도 안하세요?」
그제야 양몽환은 방향을 바꾸어 조소접에게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그러자 한 시녀가 맞받아 나오며 양몽환의 뺨을 후려쳤다.
순간, 뺨에는 시뻘건 손자국이 나며 입가에서는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이만하면 고개를 들고 반항이나, 하다못해 무슨 말이라도 있음직했다.
그러나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정신이 나가도 이렇게 나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네 명의 시녀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러자 분통이 터진 조소접은 아무 말 없이 자기에게로 돌진해 오는 양몽환을 향해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려 일격을 가하고 말았다.
그 순간 양몽환은 한 쪽 다리가 끊어져 나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그 자리에 섰다.
그리고는 잠시 주위를 둘러본 양몽환은 아프지 않은 한 쪽 다리로 몸을 지탱하며
다시 걷는 것이었다. 참으로 끈질긴 인내와 무서운 집념이었다.
그렇게 얼마를 더 걸어온 양몽환은 조소접의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냉정하고도 위엄 있는 목소리로 꾸짖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어찌 여자가 대장부 앞에서 큰 소리를 치시오?
귀원비급은 천용방의 도옥이 가지고 있소. 가서 찾겠으면 찾으시오!」
이때 조소접의 눈썹이 치켜 오르고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
「여자가 어쨌다고요?
말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란 언니가 저를 원망해도 당신의 입을 봉해 버리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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