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비연경룡

제 33 장 태풍에 휩싸인 백운협(白雲峽) <龍爭虎鬪>

오늘의 쉼터 2014. 6. 22. 14:26

제 33 장 태풍에 휩싸인 백운협(白雲峽) <龍爭虎鬪>
 

 

  이요홍과 금환이랑 도옥이 방중지례(幇中之禮)로 정중히 인사를 했다.

  절름발이 외팔 노인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당신들이 나보다 먼저 이 곳에 왔으니 이 백운협 골짜기에 모여든

적세(敵勢)에 대하여 자세히 알겠군?」

 

「소생은 뜻밖에도 화산(華山)과와 설산(雪山)파 그리고 점창(點蒼)의

삼 파가 손을 잡고 본방을 기습하려고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입니다.」

 

  도옥의 대답이었다.

 

  절름발이 외팔 노인은 흥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구대문파(九大門派)가 서로 싸운다면 말도 안 되네!

내가 오늘 이곳에 온 김에 그들을 좀 만나봐야겠어.」

 

  양몽환은 이 말을 듣고 안색이 약간 달라졌다.

그러나 도옥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빙긋이 웃는 것이었다.

 

「화산파와 점창 그리고 설산이 연합한 모양인데 그렇다면

그 힘이 몹시 강대할 것입니다.

막(莫) 어른 한 분의 힘으로는 상대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노인은 갑자기 올빼미의 울음소리 같이 괴상하게 웃었다.

 

「히‥‥‥ 히‥‥‥‥ 그렇겠지 이 늙은이가 천용방에 가맹한 후로부터

거의 십 년 간을 은거한 까닭에 현존 무예계 사람들은 이 늙은이를 잊어버렸을 걸‥‥‥‥」

 

하고는 갑자기 수 장 밖에 있는 큰 바위 위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꾸짖는 것이었다.

 

「어떤 놈이냐! 썩 나오지 않으려면 이 늙은이를 원망하지 마라!」

 

하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러자 그 큰 바위 뒤에서 긴 웃음소리가 들려오고는 바람 소리를 내면서

팔비신옹 문공태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그 절름발이 외팔 노인의 촉각과 시각이 비할 데 없이

예민한데 감탄해 마지않았다.

  손에 청죽장(靑竹杖)을 짚고 큰 바위에 올라 선 문공태는

노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는 갑자기 웃음을 거두었다.

그러한 그의 태도는 더욱 엄숙해졌다.

  그때, 별안간 노인은 오른 손을 흔들면서 몸을 공중으로 날렸다.

팔이 없는 왼쪽 소매가 바람에 날렸다.

양몽환은 노인의 빈 소매를 바라보자 연민의 정이 솟았다.

혼자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이 노인이 불구의 몸이 되었어도 성질은 여전히 성한 사람과 같구나.‥‥‥‥

만일 문공태가 수를 쓰면 이 불구의 노인은 형편없이 되겠지 ‥‥‥)

 

하고 생각하는데 노인은 벌써 문공태가 서 있는 그 큰 바위로 뛰어 올랐다.

이때 두 사람의 사이는 삼 사척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문공태는 태연히 섰다.

그 뿐 아니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양몽환의 눈에는 더욱 이상한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문공태가 갑자기 위치를 바꾸며 서 있던 바위에서 삼장이나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그러자 우렁찬 노인의 음성이 터졌다.

 

「이 문공태야! 아직도 이 늙은이를 기억하겠지?」

 

  순간, 양몽환은 그 노인이 문공태의 이름을 어떻게 알까 의아해했다.

 

  (이상한 일이군, 그래도 일파의 종사(宗師)의 신분인데 문형! 도 아니고 문공태야! 하다니‥‥‥ 그렇다면 과연 이 노인의 신분은 도대체 얼마나 높은 지위에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문공태는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서 있는 것이었다.

그러자 재차 노인의 커다란 목청이 터졌다.

 

「내 비록 한 팔, 한 다리가 없지만 아직 너 문공태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_1

 

  말도 채 끝내지 못하고 별안간 한 다리로 껑충 뛰어 나오며 외팔을 들어

문공태를 향하여 일장(一杖)을 내려쳤다.

 

  그러나 그의 일장은 옆에서 보는 양몽환의 눈에도 미약하기 이를 데 없는 장풍이었다.

그러나 이 미약한 장풍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 것인가 하고 눈을 둥그렇게 뜨는 양몽환이기도 했다.

  사실 이 몇 해 동안 양몽환은 여러 가지의 사건을 겪었고 또 강적도 만나 싸웠으므로

안목도 늘었고 경험과 경력도 많이 늘었다.

 

처음 노인의 말투에서 이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일장은 아무 것도 아닌 평범한 일장같이 보였으나 반드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힘이 숨어 있으리라고 느껴졌다.

  과연, 짐작했던 대로 노인의 일장이 허공을 날자 문공태는 막으려고도 하지 않고

오히려 번개 같이 몸을 돌려 오 척이나 뒤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유유히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는 것이었다.

 

「잠깐! 이십여 년 간이나 헤어졌다가 만났는데 만나자 마자

싸운다면 도리가 아닌 것 같은데‥‥‥」

 

  여유 있는 문공태의 말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냉담했다.

 

「허허 ‥‥‥‥」

 

하고 한바탕 웃고는

 

「이 늙은이가 이번에 강호를 다시 밟은 것은 너희 구대문파의 고수들을

일일이 만나 보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깨를 한 번 흔들었다.

그러자 어느새 노인은 문공태의 옆에 가 우뚝 서는 것이었다.

  비록 팔 하나와 다리 하나밖에 없는 몸이지만 동작은 비할 데 없이 신속하고도 빨랐다.

빈 소매가 날리는 것만 보일뿐 그가 무슨 신법(神法)을 쓰는지 조차 알길 없는 행동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이 하늘을 날아 외팔을 휘두르며

연속으로 삼장을 후려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노인이 다가가면 갈수록 문공태는 슬슬 뒤로 물러나며

그의 공격권에서 벗어나기만 하는 것이었고 여전히 수염만 내려 쓰다듬는 것이

얼마든지 덤빌 테면 덤벼라 나는 도망간다는 식이었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이 제법 노인을 추켜세우는 것이었다.

「막형, 비록 몸은 불편하나 무공은 도리어 더욱 정진하였습니다그려.

그러나 소제는 당신과 싸울 생각이 없어 그만 물러갑니다. 용서 하시요!」

  말을 마치고는 몸을 돌려 바람과 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노인은 문공태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껄껄 웃고는 문공태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자 비로소 몸을 돌려 양몽환과 하림에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살기가 도는 눈을 부라리며 소리치는 것이다.

 

「도대체 너희들은 누구의 제자냐?」

 

  얼떨결에 양몽환은 하림을 자기의 몸으로 막으면서 여차하면 공격은 못하더라도

불의의 공격을 방비할 양으로 암암리에 공력을 운행했다.

그리고는 두 손을 마주 잡으며 노인 앞으로 나갔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선들 하는 미풍이 분다고 느꼈다.

그러자 뒤에서부터 이요홍의 낭랑한 음성이 양몽환의 고막을 울리는 것이었다.

 

「막 아저씨! 잠깐만 참으세요.

그 사람들은 모두 저의 친구들이에요.」

 

  그 말에 노인은 가볍게 웃었다.

 

「그래? 네 친구라면 이번만은 용서하지!」

 

하고는 외팔을 휘둘러 휘익 소리를 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세 사람의 머리 위를 지나서 가마 옆으로 가버렸다.

  그의 성질이 비록 포악하고 냉정하나 이요홍에게 대해서만은 몹시 자애로웠다.

얼마를 가던 노인은 뒤돌아보며 이요홍에게 소리쳤다.

 

「내가 다른 일이 있어 먼저 간다. 강적이 많이 있으니 행동에 조심해라!」

 

  그러자 이요홍은 손을 흔들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막 아저씨, 걱정 마십시오! 강적을 만나면 화포(火?)를 놓아 구원을 청하겠습니다.」

 

  노인은 미소를 지으면서 죽교(竹轎)에 올라탔다. 

그때, 한편에 서 있던 도옥이 가마를 가로막으면서

「막 단주님! 잠시 멈추어 제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하고는 계속해서

 

「문공태는 일파장문(一派掌門)의 종사로 그 위인은 말할 수 없이 음흉합니다.

방금도 그냥 갔지만 무슨 음모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가 점창파와 설산 양 파의 고수급들을 모아 막 단주님께 공격해 오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허락하신다면 이 후배가 선배님을 모시고 동행하여 미력이나마 도울까 하옵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손을 저으며 웃었다.

 

「감사하오, 그러나 이 늙은 몸은 평생 동안 한 번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은 일이, 없소.

도향주의 진심은 이 늙은이가 마음속에 새겨 두겠소.」

 

할 뿐 정중히 사절했다.

 

  사실 도옥은 천용방의 용두?방주(龍頭?방主)가 관할하는 직속 향주(香主)로

그의 지위는 홍, 황, 남, 백, 흑 오기단주(五旗壇主)와는 직접적인 예속 관계가 없었다.

그러한 도옥의 말이 노인에게는 달갑지 않았으나 그 어감이 약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선배님! 그 문공태라는 사람이 지나치게 교활함은 물론이지만

어떠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이에 대한 방비가 필요합니다.

더구나 본방의 각기 단주가 모두 도착하지 않아 모든 것을 막노단주님(莫老壇主任)의

의견을 따라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늙은이도 더 이상 도향주의 호의를 거절하지는 않겠소. 기억하고 있겠소.」

 

하고는 손을 흔들어 두 거한에게 가마를 메게 하여 떠나가 버렸다.

 

  노인이 떠나자 도옥은 웃는 얼굴로 양몽환을 불렀다.

 

「양형! 그럼 저의 사매와 천천히 이야기라도 하십시오!

소제는 귀원비급을 훔쳐간 놈을 찾으러 가겠소. 만일 잡는다면 곧 알려 드리겠소.」

 

하고는 말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몸은 삼장 멀리로 달려가고 있었다.

 

  양몽환은 도옥의 신법이 처음 만나던 일년 전에 비하여 더욱 절묘해 지고

신속하여진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옥의 마음은 측정할 수 없구나,

우리가 알게 된지도 짧다고 는 할 수 없는 기간인데 그 사이에 몇 번이나

결투를 하는 것을 보았지만 이런 기량은 감추어 두고 발휘하지 않았구나.‥‥)

 

라고  생각하는데 이요홍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일년 동 만나지 못한 사이에 저렇게 무술이 정진할 줄이야?」 

 

  놀라운 표정으로 양몽환을 바라보았다.

 

「이소저께서도 놀랐습니까? 도형이 가진 비법은 이 장인검봉(藏引劍鋒)에

그치는 게 아닌 것 같소‥‥‥‥」

 

「예, 놀랐어요.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서 무술을 배워

그에 대하여서는 퍽 자세히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한 일년 동안 보지 못한 사이에 저렇게 무공이 진보했을 줄은 몰랐어요.

참 이상한일이죠?」

  아무래도 도옥의 무공에 의심이 가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함께 자란 이요홍에게는 도옥의 진보가 새롭기만 하였기 때문이었다.

  양몽환은 도옥의 무술에 경탄하는 이요홍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왜 저렇게 놀라워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듯 했다.

그러나 이렇게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귀방의 인사들이 많이 모인 모양인데 이소저께서도 가보셔야죠?

저희들은 그만 가보겠습니다.」

 

  작별을 고하며 하림을 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쌀쌀한 태도로 양몽환을 바라보던 이요홍은 쓰라린 마음과 시큰거리는

콧등을 누르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 얼굴을 드는 이요홍의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게 부질없이 눈물을 흘리게 하는 마술이 있는 모양이었다.

 

「잠깐! 당신은‥‥‥ 당신은 아직 그 귀원비급을 잊지 못하세요?」

 

하는 것이었다.

뚱딴지같은 소리였지만 잃어버린 귀원비급을 찾기에 골몰 중인 양몽환으로서는

귀원비급의 귀자만 들어도 귀가 번쩍할 노릇이었다.

급히 걸음을 멈춘 양몽환은

 

「그 귀원비급은 저의 생사에 관계될 뿐 아니라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도 관계되는 일인데 어찌 잊어버리겠소?」

 

「그러실 줄 알았어요.」

 

  양몽환은 그녀의 엄숙한 태도에 반신반의하면서 천천히 이요홍에게 다가왔다.

 

「무슨 뜻이죠? 그 귀원비급이 있는 곳이라도 알고 계신다는 말씀인가요?」

 

  그러자 이요홍은 냉정한 태도로 돌변하며 입술을 파르르 떠는 것이었다.

 

「그런 것은 몰라요!

그러나 제가 필요할 때는 다가오고 일이 끝나면 만년 얼음장 같이 차갑게 대하는군요.」

 

  양몽환은 금방 얼굴이 붉어졌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이소저와는 파도 다르고 더구나 남녀의 사이어서

혹시 이소저에게 어떤 영향이라도 끼칠까 걱정해서 취해지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이요홍은 여전히 차가운 얼음장이었다.

 

「흥! 당신은 남이 무서워서 쩔쩔 매는군요.

그렇게 소문이 두려운데 하림과 친한 것은 두렵지 않은가요?

남의 말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

 

  원한이 얽히고설켜 가시와 뼈가 모두 합쳐진 말이었다.

 

  실로 무서운 말이었다.

 

  양몽환은 무거운 철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이 되어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변명이라도 해야지 않겠는가?

 

「우리는 같은 곤륜파의 문하생으로 형제 같은 사이라 문제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좋아요.

그러나 주소저는 어떤 관계죠? 같은 파도 아니고 더구나 사매지간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당신은 이 백운협 골짜기까지 들어 왔죠?」

 

  갈수록 태산이었다. 날카로운 질문에 양몽환은 자연히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것은‥‥‥ 주소저는 저를 살려준 생명의 은인‥‥‥」

 

  점점 돌변하는 이요홍의 차가운 표정에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는다.

런데다 주소저가 생명의 은인이라고 했지만 사실 이요홍도 주소저 못지않게

음으로 양으로 양몽환을 도와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양몽환은 더 말을 하지 못하고 식은땀만 흘렸다.

 

「그래요? 생명의 은인? 호‥‥‥ 호‥‥‥

그래서 은인을 찾아 여기까지 몸소 오셨군요! 흥!)

 

「아니‥‥‥‥‥그렇지는 않지만 사실 주소저와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영락없이 죄수가 끌려와 문책을 당하는 꼴이었다.

 

  그러자 드디어 이요홍은 주르륵 눈물을 흘리며 울음 섞인 말로 말하는 것이 있다.

 

「알겠어요. 그렇지만 너무 하시는군요!」

 

  어찌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하고 싶다고 다하라,

더 말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려 스스로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는 이요홍이었다.

 

  사태가 이상하게 벌어지자 하림은 미간을 찌푸리며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이요홍에게 다가갔다.

 

「언니! 오빠를 오해하진 말아요, 잘못된 일이 있더라도 언니가 널리 이해해 주세요.」

 

  눈물을 홀리는 이요홍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사실 얼마나 마음속으로 원하고 바라던 양몽환의 사랑이었던가,

이제 사랑을 하소연하려 해도 얼음같이 차가운 양몽환에게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쓰리고 아픈 가슴을 눈물로 씻어 내리는 이요홍의 가슴 속에는 천만가지의

감회가 뒤섞여 더 참지 못하고 다가온 하림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얼마를 울어도 시원할 길 없는 마음을 진정하며 얼굴을 든 이요홍은 한편에서

고개를 숙이고 담담하게 서 있는 양몽환을 잠시 바라보고는 하림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미안해 동생! 내가 나쁜 탓이야‥‥‥

 

「아니에요. 언니! 언니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고마워, 그럼 다음에 또 만나요. 나도 귀원비급이나 찾으러 가겠어!」

 

  쓸쓸히 웃는 이요홍의 얼굴에는 연민의 정이 우수처럼 싸여 있는듯했다.

  두 뺨에 흘러내린 눈물을 깨끗이 밖은 이요홍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그 자리를 물러나 도옥과 노인이 사라진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천천히 사라져 가는 이요홍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양몽환의 마음은 말할 수 없는

번민 속에 빠져 방황하고 있었다.

 

  (어찌 이소저의 마음을 내 모르랴마는 하림,

주소저 그리고 이소저의 사이에서 나는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답답한 노릇이었다.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번민 속에 빠져 암담하게 섰던 양몽환은 멀어져 가는

이요홍의 뒷모습에서 사랑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떠나가면서도 자기가 찾고 있는 귀원비급을 찾아 주겠다고

끝까지 도와주는 호의에 새삼 머리가 숙여졌다.

  그러던 양몽환은 급히 이요홍의 뒤를 따라가 불러 세웠다.


「이소저! 진심으로 감사하오. 더구나 비급까지 찾아 주시겠다는 말씀 감사합니다.」

 

  머리를 숙여 보였다. 그러자 이요홍은 입술을 깨물며 되돌아섰다.

 

「고마울 것 없어요. 그러나 한 가지 부탁해 두겠어요.」

 

「무슨 부탁이신지?」

 

「지금 이 백운협에는 우리 천용방의 오기단주(五旗壇主)가 다 모여 있어요.

물론 목적은 귀원비급을 찾으려는데 있지만,

그 중에도 황(黃) 남(藍) 단주의 무공이 상당해요.

공연한 시비로 그들과 다투지 마세요.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사랑이라는 것은 이토록 무서운 힘을 가졌다.

비록 그 사랑을 이루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신변을 염려하여

자중하길 바라는 이요홍의 마음은 양몽환보다 몇 십 배 높고 넓은 자리에 있는지도 몰랐다.

절로 숙여지는 양몽환의 머리였다. 어찌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뜻을 전할 수 있을 것인가,

다만 머리를 숙여 이요홍에게 고마움을 표할 뿐이었다.

  잠시 후, 양몽환은 어색한 분위기에서 빠지려는 듯 밀리 허공을 바라보고는

천천히 이요홍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그 외팔 절름발이 노인도 귀방(貴幇) 사람인가요?」

 

   「그 분은 우리 남기단(藍旗壇)의 단주 되시는 분이에요.

비록 몸은 불구이시지만 무공은 절학을 넘습니다.

더구나 나 이외에 누구도 그분이 우리방의 남기단주인지는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만큼 우리 아버지께서는 비밀로 지키고 있어요.」

 

하고 양몽환과 하림을 번갈아 본 다음 다시 말을 계속했다.

 

「어느 때인가 불의의 습격을 받고 중상을 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한 쪽 다리와 팔을 잘랐대요.

그런데도 아직 그분의 무예는 쟁쟁하다고 아버지가 말씀 하셨어요.

그러니 당신은 그분과 싸우지 마세요.」

 

  그제야 양몽환은 문공태가 노인의 공격을 피하고 달아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대단한 분이군요. 병신 노인인 줄만 알았는데 큰일 나겠군요.조심하겠습니다.」

 

「그럼 오늘밤 두식 경에 다시 오겠어요.」

 

  이요홍이 등을 들리고 사라져 가자 양몽환도 하림을 재촉하여

백운협을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왔을까.

 

  거의 백운협 골짜기에 다다랐을 때였다.

멀지 않은 길가에 회색도포를 입은 젊은 장정이 우두커니 서 있다가

양몽환과 하림을 보고는 아는 척 하며 다가오는 것이었다.

  마음이 섬뜩한 양몽환은 그 사람이 바로 요주(蟯州) 근방에서 한수 겨루었던

젊은이라는 것을 생각해 내고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부드러운 웃음을 띠면서 다가오는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젊은이의 얼굴을 다시 한번 유심히 바라보며 암암리에

진기를 운행하던 양몽환은 언젠가 주약란이 들려주던 말을 되새겼다.

그것은 조해평의 제자 한 사람을 주약란이 맡아 무술을 가르치는 중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은 상당한 고수급의 무술인이 되었다는 말을 상기하며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과연, 양몽환의 생각은 적중했다.

양몽환 가까이 다가온 젊은이는 약간 허리를 굽히며 예를 하는 것이었고

자기는 주약란 밑에서 무술을 배우고 있다고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주인의 분부로 두 분을 모시려고 왔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종운암의 석동(石洞)으로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석동은 원래 삼백년 전의 천기진인(天機眞人)이 기거하던

석실로서 이름조차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처음 주약란이 이곳에 기거하면서부터 천기진인을 추모한다는 뜻으로

천기석부(天機石府)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는 곳이었다.

  그들이 석실 입구에 다다랐을 때 주위를 경비하던 삼수나찰(三手羅刹) 팽수위(彭秀葦)가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었다.

 

「어서 오세요. 지금 주인께서는 조소저와 강적을 방비할 의논을 하고 계십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세요.」

 

  팽수위의 안내로 일행은 석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청아한 향내가 가득한 방 안에는 담록나삼(淡綠羅衫)으로 산뜻하게 단장한 주약란과

하얀 도포를 이름 그대로 날아갈듯이 산뜻하게 입은 조소접(趙小蝶)이 마주 앉았다가

양몽환을 보고 홍조(紅湖)를 띄우며 맞이하는 것이었다.

 

  세 사람이 석실로 들어가자 석실 안은 향내가 가득했다.

몸에 담록나삼(淡綠羅衫)을 걸치고 같은 색의 긴바지를 입고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주약란의 날씬한 몸매에 비하면 조금 살이 찐 듯한 조소접의 살결이 더욱 흰 것 같았지만

조소접이 입은 하얀 옷 때문에 더욱 청초하게 보였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두 소저의 아름다움이나 몸매는 어디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을 만큼 비슷했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늘 양몽환의 마음속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주약란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는 양몽환의 시선이 절로 밑으로 떨어지는 반면에

양몽환을 바라보는 조소접의 두 뺨이 주약란보다 더 붉어졌다는 것이 특별히

다르다면 다른 것 같기도 했다.

  또한 양몽환의 눈에 비치는 두 소저의 검은 머리는 방금 목욕을 하고 나온 듯

물기에 젖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약란과 조소접의 아름다운 자태에서 시선을 돌린 양몽환은 조소접의 뒤편으로

호위를 하듯 늘어서 있는 네 명의 시녀에게로 시선이 멎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조소접의 시녀인 네 명의 어여쁜 시녀들이 한 결같이

양몽환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문을 막고

포위하듯 둘러서는 것이었다.

순간 양몽환은 저윽이 놀라며 이상스러운 분위기에 경계태세를 갖추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지금까지 얼굴을 붉히고 있던 조소접의 야무진 명령소리가 자기 네 명의

시녀에게 떨어졌다.

 

「도망가지 못하게 해요!」

 

  갑자기 돌변한 조소접의 태도에 양몽환과 하림이 급히 주위를 돌아보며

긴장하자 주약란 역시 긴장해지며 다급히 조소접을 부르는 것이었다.

 

「동생! 웬일이야, 양상공과 무슨 원수진 일이라도 있었나?」

 

  부드러운 음성으로 묻는 것이었다.

 

  그러자 출입구와 사방을 지키고 있는 네 명의 시녀들을 둘러본 조소접은

주약란의 물음에 고개를 숙이며

 

「저하고 약속했어요, 사흘 안으로 귀원비급을 찾아오겠다고요.」

 

「그럼 오늘이 그 사흘인가?」

 

「아니 그렇지는 않아요.

그러나 귀원비급도 못 찾고 이 백운협에서 도망이라도 간다면

넓은 천지 어디에서 찾는다는 말씀이에요.」 

 

  주약란은 조소접에게로 돌렸던 시선을 양몽환에게로 옮겼다.

 

「당신이 비급을 훔쳐가지 않았다면서 어떻게 사흘 안에 찾아온다고 말을 했어요?」

 

  어디까지나 양몽환을 위해서 하는 이야기였다.

난처해진 양몽환은 속으로 깊이 후회하였지만 조소접에게서부터

도둑의 누명을 벗 는 길은 이 길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결을 하려고 했는데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던 양몽환이었다.

주약란의 물음을 천만번 들어도 지당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서 있을 수만도 없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홀 안으로 잃어버린 비급을 찾아오겠다고 한 것은

그 자리를 모면하려고 한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당신이 가져갔다는 말씀인가요?」

 

  주약란의 다급한 물음이었다.

그러자 양몽환은 미소를 띠우며 고개를 흔드는 것이었다.

 

「제가 가져갔다면 어찌 하늘이 무심하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한 말입니다.」

 

「무슨 뜻이죠?」

 

  「그날 조소저의 방에 있었던 사람이 저와 주소저 말고

또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생각해 냈습니다.」

 

  양몽환의 말을 듣고 있던 주약란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그 이상한 복장의 도옥?」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가 들어왔다가 나갔다는 것만으로

비급을 가져갔으리라고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가져갔다 하더라도 지금은 아무 증거도 없습니다.」

 

  그제야 주약란도 도옥의 소행이 틀림없으리라는 의심이 부쩍 생기는 것이 있다.

 

「맞아요.

그 괴상한 차림의 건방진 도옥은 능히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주약란의 말에 맞장구를 칠 만한 증거가 없는 양몽환으로서는

증거가 없는 이상 도옥이라는 친구를 의심한다는 것이

무슨 죄나 짓는 것처럼 개운치가 못했다.

 

「다만 추측이 그렇다는 것이지 확실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비밀리에 증거를 잡으려고 애초에 사흘 동안만 여유를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아니 사흘 동안씩 기다릴 필요 없어요. 곧장 도옥을 찾아가요.」

 

  양몽환의 말을 제지하며 다급해 하는 주약란을 돌아보며

양몽환은 중단되었던 말을 계속했다.

 

「그보다도 오늘 밤 두식 경에 이요홍이 귀원비급의 소재를

알아 가지고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기다려 보고 도옥에게 찾아가 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요홍을 믿어요?

얼마나 영리한 여자인데 그렇게 순순히 말하지는 않을 거예요.」

 

  양몽환과 주관의 대화를 듣고 있던 조소접은

그들의 대화로서 대강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기가 의심했던 양몽환에게서 의혹을 풀 수 있었다는 것이

그 하나이고 이요홍도 어느 정도로 귀원비급 사건에 가담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양몽환을 의심했던 조소접은 양몽환의 얼굴을

다시 대할 면목이 없는 듯 했다.

자리가 불안하고 미안함을 금할 수 없는 조소접은 가만히 일어나면서

 

「이요홍도 한패군요.」

 

하고는 네 명의 시녀에게 손짓하며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더 앉아 있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네 명의 시녀도 조소접의 뒤를 따라 소리 없이 물러가는 것이었다.

 

조소접이 들어가고 네 명의 시녀가 따라 들어간 다음

양몽환은 주약란의 시선을 피하며 낮은 목소리로 한탄하듯 주약란을 불렸다.

「주소저‥‥‥‥ 지금 조소저가 저를 상당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귀원비급을 찾는 대로 저는 곤륜산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그러자 주약란은 다정한 시선을 그대로 쏟으며 입가에 웃음을 띠웠다.

 

「당신의 마음도 이해하겠어요.

그러나 가셔도 며칠 더 계셨다가세요.

지금 이 백운협에 얼마나 많은 고수가 숨어 있는지 아세요?

그런 가운데를 들고 간다는 것은 무리에요.」

 

「‥‥‥‥‥‥」

 

「그리고 조소저가 당신을 오해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풀릴 거예요.

아무 걱정 마시고 들어가 쉬세요.

방도 깨끗이 치워 놨어요.」

 

  양몽환은 더 고집을 피우지 못했다.

그것은 귀원비급을 찾아야 하고 백운협 골짜기에 잠복한 고수들이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것보다 주약란의 다정하고도 알뜰히 살펴주는

그 마음씨에 묶이고만 셈이었다.

  반짝거리는 주약란의 시선과 마주친 양몽환은 노을이 지는

서쪽 창으로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더 바라볼 수 없는 강렬한 주약란의 눈빛이었다.

  고개를 돌리는 양몽환의 행동을 자기의 말을 듣겠다는 뜻으로

간주한 주약란은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진보(陳보)를 불러 들였다.

「속히 송예(松藝)와 팽수위를 불러 그들과 함께 이곳을 지키도록 해요,

그리고 적이 몰려온다 하더라도 먼저 손을 대지 말도록 해요.」

 

  진보가 급히 밖으로 나가고 석실은 잠시 조용해졌다.

간간이 멀리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가 적막을 깨칠 뿐 조용히 밤이 저물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느덧 밤 두식 경!

  이요홍을 만나기 위해 밖으로 나온 양몽환은 잔뜩 흐린 하늘에 소슬한 바람이 불고

칠흑 같이 어두운 사방이 어딘지 모르게 을씨년스러움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보통 일장 이내의 사물을 식별할 수 있는 양몽환이었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칠흑 같이 캄캄할 뿐 이요홍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때, 양몽환이 두리번거리고 서 있는 바로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렇지 않아도 을씨년스럽던 차에 갑자기 들린 인기척은 양몽환의 가슴을

활딱 놀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이요홍의 웃는 얼굴이었다.

 

「나오셨군요. 저는 당신이 나오지 않으면 어찌나 했는데‥‥‥‥」

 

  반가운 표정으로 말하는 이요홍을 돌아본 양몽환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나는 이소저가 나오지 않는 줄 알았는데‥‥‥

귀원비급은 찾았습니까?」

 

「찾지는 못했어요.

내일 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그럼 왜 나오라고 했소!_1

 

  사실 이요홍의 마음과 양몽환의 마음은 서로 생각하는 것이 천양지차였다.

귀원비급을 찾아 준다는 구실로 양몽환과 단 둘이 만날 수 있다는

그래서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하든지

그의 마음이 이요홍 자기에게 돌아서기를 바라는 것과는 반대로

다만 귀원비급에만 정신이 쓸려 있는 양몽환에게는 이요홍의 애정 같은 것은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그러한 양몽환에게 귀원비급을 구실로 접근하려는 속셈을 알아 챈

양몽환은 귀원비급을 못 찾았다는 말에 그만 역정이 와락 났던 것이다.

퉁명스럽게 쏘아 붙이는 양몽환의 냉정한 반문에 저윽이 실망한 이요홍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 왜 이렇게 내 마음속에 있는 진정을 몰라줄까, 이 목석(木石) 같은 사내야?)

 

  이렇게 생각한 이요홍은 양몽환의 무뚝뚝한 말에 모욕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그리고는 내리 깔았던 눈을 들어 양몽환을 쏘아 보았다.

 

  (‥‥‥이렇게 나의 마음을 몰라주고‥‥

 

「왜 그렇게 도도하시죠? 제가 어떻다고 너무 업신여기지 마세요.」

 

「무슨 말씀이오? 내가 언제 이소저를 업신여겼소?」

 

  어디까지나 냉정하고 쌀쌀한 말이었다.

이요홍의 가슴을 콕 콕 찌르며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분함을 참느라고 입술을 파르르 떠는 이요홍은

다시 입을 열 마음마저 없어지고 말았다.

  (흥! 언제 업신여겼냐고? 그것을 어떻게 말하라고 한다는 말인가,

지금 자기의 행동이 바로 그 행동인데‥‥‥)

 

  쌕쌕 속으로 가슴만 태우고 있는 이요홍을 내려다보던 양몽환은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무엇인가 잠시 동안 생각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소저의 뜻은 충분히 알고도 남습니다.

더구나 제가 이소저와 무슨 원수진 일도 없는데

왜 제가 이소저를 멀리 하려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다만 파가 다르다는 이유입니다.

이 점을 이해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이소저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는

평생 동안 두고두고 만분의 일이라도 갚겠습니다.」

 

  기어이 이요홍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감사하군요. 그렇게 까지 말씀해 주신다면

오히려 제가 당신에게 은혜를 입고 있군요.

저 천서(川西)에서 당신이 저를 구해준 일이나‥‥‥

제가 두고두고 은혜를 갚아야겠군요.」

 

  이요홍의 흐느끼는 듯한 울음 섞인 말소리는

원망과 비정(非情)에 사무친 사랑의 애소(哀訴)였다.

처음에는 흐느끼듯 울던 울음도 차차 커지며 어깨를 들먹이면서

어느덧 통곡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조용하고 고요한 밤하늘의 정적을 깨뜨리며

이요홍의 울음소리가 가만히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가을밤에 풀벌레 울음소리를 어찌 이에 비기랴,

사랑을 얻지 못한 여자의 곡성은 처량하기만 했다.

  얼마 동안을 그렇게 흐느끼며 복받쳐 오르는 슬픔에 어깨를 들먹이던

이요홍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지 못하고 마침내 오던 길을 되돌아

도포자락을 땅에 끌며 사라지고 말았다.

 

  그와 함께 날카로운 바람이 휘몰아치며 모래와 돌을 날리고

번개가 번쩍 하고 뇌성이 지축을 울렸다. 그리고 뇌성벽력 소리에 뒤섞여

간간이 사람들의 고함 소리와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이요홍이 사라지자 괴상하게 벌어진 주위의 사태를 두리번거리던 양몽환은

갑자기 눈앞이 밝아짐을 느꼈다. 불빛이 번쩍하는 그 순간,

양몽환의 눈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비쳤다.

  불빛이 번쩍거리는 그 곳에는 한 발과 한 팔이 없는 노인이

가마에 앉아 있으며 그 옆으로 문공태와 흰 도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염소수염을 기른 난쟁이 같은 사람이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바로 설산(雪山)파의 장문인 백의신군(白衣神君」등뢰였다.

 

  사실 양몽환은 도옥과 함께 석실에 숨어서 문공태와 번천안 그리고 등뢰가 합세하여

천용방을 공격하자는 그들의 밀담을 들으면서도 그들이 화산(華山), 설산(雪山), 점창(點蒼)의

세 파라는 것은 짐작했지만 키가 작은 사람이 설산파의 등뢰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환한 불이 번쩍하는 순간에 한 눈으로 그들 세 명의 동태와 주위를 살펴본 양몽환은

잠시 후 다시 암흑으로 변해버린 밤하늘 밑에서 절로 마음이 긴장되었다.

 

바로 그때,

 

긴장한 채 주위를 살피는 양몽환의 손을 잡는 부드러운 손이 있었다.

 

「?‥‥‥‥‥‥」

 

  흠칫 놀라는 양몽환의 귓가에 여자의 따스한 입김이 불어오는 것이었다.

 

「소리 내지 말아요.」

 

  주약란이 있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여기에 서 계시죠?」

 

「주소저!」

 

「가만 소리 내지 말라니까요!」

 

  부드러운 손으로 양몽환의 입을 가리며 가만 가만히 속삭이는 주약란이었다.

 

「우리 주위에 각 파의 고수들이 숨어 있어요. 곧 싸움이 벌어질 모양이에요.

그동안 숨어서 싸우는 것을 봐둬요.」

 

  주약란은 발소리를 죽이며 양몽환의 손을 잡은 채 어느 큰 소나무 밑에까지 왔다.

그리고는 자기 몸에 있는 내공의 힘으로 양몽환을 먼저 나무 위로 올리고

뒤이어 올라오는 것이었다.

나무 위로 올라온 주약란은 잎이 많은 가지 위에 몸을 숨기고 양몽환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행동에 불과하지만 그런 이유만도 아닌 것 같았다.

양몽환도 역시 주약란이 시키는 대로 숨을 죽이고 주약란에게 몸을 맡긴 채 앞으로

일어날 사태에 온 정신을 모았다.

  이윽고 두런거리던 말소리는 고함 소리로 변하고

그 고함소리는 차차 높아지며 절규로 변해갔다.

그리고 누가 중상이라도 당하는지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이때까지 양몽환을 껴안은 채 캄캄한 어둠 속만 주시하던 주약란의 왼쪽 손이

약 일장 앞에 있는 소나무를 향하여 살짝 올려 졌다가는 곧 내려갔다.

그와 함께 도옥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아! 두 분께서도 나오셨군! 우리는 천천히 구경이나 합시다. 들키지 마시오.」

 

  도옥도 역시 소나무 위에 몸을 숨기고 싸움을 관망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으로 숨는다.

그러자 문공태의 우렁찬 웃음소리가 터지는 것이었다.

「하‥‥‥ 하‥‥‥ 막형! 아무래도 오늘이 죽는 날인가 싶소!

여기서 살아 돌아간다는 것은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 같구려!

하‥‥하, 내가 시체는 잘 묻어 주겠소, 마음 놓고 자결이라도 하시오!」

 

  한 쪽 팔과 한 쪽 다리만 있는 병신 노인에게 하는 말이었다.

 

「뭐라고? 내 걱정은 말고 너부터 들어갈 무덤이나 파 놓아라.

제사상은 내가 차려주마, 네 놈의 함정에 빠질 내가 아니다.」

 

「하‥‥‥ 하, 그만 웃기시오. 내가 막형 무덤에 향이라도 피워 주지 않을까

걱정하는 모양인데 그것도 염려 마시오.」

 

「말은 잘 한다마는 네 놈이 먼저 죽으면 무슨 소용이냐,

어서 죽을 준비나 해둬라. 하‥‥‥ 하‥‥」

 

  이렇게 문공태와 병신 노인이 으르렁대는 사이에 주약란은

다시 왼 손을 들어 맞은편 소나무를 가볍게 내리치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우수수 소나무 잎이 떨어지고 도옥의 비웃음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아마 암암리에 주약란은 도옥을 해치울 심산인 모양이었다.

 

「아가씨! 좀 참으시지 차후에 한판 어울리기로 하고.」

 

하는 도옥의 빈정거리는 소리에 뒤이어 주약란의 낮고도 싸늘한 음성이

곧장 도옥에게로 달려갔다.

 

「흥! 오늘밤 안으로 귀원비급을 내놓지 않으면 살려두지 않겠어요!」

 

  날카롭게 쏘아 붙이며 천강지신(天?指神)의 수법으로 내리쳤다.

 

  그러나 나무 위를 원숭이처럼 살살 뛰어넘는 도옥은 의외로 행동이 민첩했다.

 

  어느 사이에 살짝 피하면 도옥이 숨었던 나뭇가지가 그제야 흔들리며

잎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아가씨! 조금 참으시라는 데도 말을 안 듣는군요.

지금 아가씨의 일장은 다행히 천둥소리에 섞여 발각되지 않았습니다만

공연히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가는 이 아까운 싸움 구경도 못할 판입니다.」

 

  어디까지나 주약란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오만한 언동이 아닐 수 없었다.

  순간, 주약란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듣고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주약란의 분노에 찬 행동과는 반대로 여유만만한 도옥의 태도였다.

단번에 명문혈이라도 찔러버릴 만큼 주약란은 화가 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도옥의 말도 수긍되는 점이 있는 것이었다.

만일 지금 그들에게 발각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귀원비급에 혈안이 되어

으르렁거리는 고수들에게 잡혀 목숨은 잃지 않는다 하더라도 중상이나

당하게 된다면 일이 시끄럽게 될 것이었다.

도옥의 말대로 그들에게 발각되지 말고 자기들끼리 싸우다

지치는 꼴이나 보고 있다가 나중에 도옥과 담판을 내도 늦지 않는다는

 계산이 주약란의 머리 속으로지 나갔다.

  그리하여 주약란은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 이들의 동태를 관망하기로 했다

그 사이에 도옥은 또 어디로 몸을 숨겼는지 보이지 않았다.

  얼마동안 사방을 쏘아 보던 주약란은 두 그루의 소나무가 포개어진 사이에

몸을 끼우고 숨어 있는 도옥을 발견하고는 또 한번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도옥이 주약란을 바라보는 순간먼저 입을 열었다.

 

「하여간 이 백운협 골짜기에서 한 걸음이라도 도망은 못 간다는 것을 알아요.」

 

「안심 하시지요. 아가씨가 가라고 쫓아도 지금은 안 가겠소.」

 

하고는 도망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라도 하려는 듯이 도옥은 몸을 날려 양몽환이 앉아 있는

맞은편 소나무 위로 선원이지(仙遠移枝)의 재주를 피우며 옮겨 오는 것이었다.

 

  주약란과 도옥은 양몽환을 사이에 두고 숨게 되는 위치가 되어,

만일주약란의 공격이나 도옥의 역습이라도 벌어진 다면 영락없이 중간에 끼인

양몽환의 위치는 오는 공격 가는 역습에 만신창이가 될 위치였다.

  그러는 한편, 도옥과 주약란의 대화 소리는 수 장 밖에서도 들을 수 있는

각 파의 고수들이 불과 일 이장(一二丈) 가까이서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워낙 천둥소리가 요란하여 그 소리에 섞여 듣지 못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드디어 뇌성벽력이 끊임없이 천지를 진동하던 얼마 후에는 댓줄기 같은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금방 쥐어짤 만큼 흠뻑 비에 젖은 옷은 말할 것도 없고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을 만큼

쏟아지는 비였다. 그리고 바람까지 사납게 몰아치는 것이었다.

  양몽환을 껴안고 있던 주약란은 자기의 내공을 손바닥에 운행 조절하여

양몽환의 어깨를 가만히 눌렀다. 그러자 비바람에 추워 떨던 양몽환의 몸은

차차 더워지는 것이었다.

  그 때 주약란이 속삭이듯 양몽환의 귀에 입을 대었다.

 

「아직 회복되지 못한 당신의 몸이 염려스러워요.

가만히 운기를 조식해보세요.」

 

  정답고 부드러운 소리였다.

양몽환은 주약란의 말에 또 한번 감동하며 그녀의 말대로 운기를 조식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추위도 가시고 대신 뜨거운 열이 주약란의 손바닥을 통하여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는  것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댓줄기 같이 쏟아져 내리던 비는 그치고 검은 먹구름이 흩어지면서 후드득후드득

나뭇잎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그리고 작은 분지 같은 협곡에는 쏟아져 내린 비로 호수처럼 물이고였다.

그동안 으르렁거리던 고수들도 어디로 갔는지 조용할 뿐 사방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리는 것이었다.

이윽고 구름이 걷히고 밝은 달이 나타났다-

  정신을 가다듬고 밝은 달빛이 쏟아져 비치는 계곡을 보던 주약란과

양몽환 그리고 도옥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 ‥‥‥ 저 사람들‥‥‥)

 

  양몽환이 놀라듯 외치지 않아도 가히 놀랄만한 광경이었다.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아니면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달빛이 환하게 비치는 계곡에는 수많은 고수들이 각자 날카로운 무기를 든 채

여기 저기 한 무더기씩 모여 서 있는 것이었다.

옷은 물론이고 머리칼도 비에 젖어 귀신처럼 산발한 무리들이었다.

이때, 문공태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마 지금까지도 그들은 말다툼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하‥‥‥ 막형! 지금 내린 비야말로 하늘이 당신에게 준

도망갈 기회였는데 기회를 놓쳤구려, 하하‥‥‥

이제는 달도, 뜨고 고수들도 많이 모였는데 병신이 무슨 재주로 목숨을 건지겠소!

아! 슬프도다. 막형!」

 

하고는 이번에는 청죽장을 휘두르며 등뢰에게로 향하는 것이었다.

 

「등형! 당신도 좀 보시오. 여기 이 병신 늙은이가 그래도 한 때는

 이름을 날리던 막윤(莫倫)이란 놈이오.

한 이십여 년 전에 소림파의 고수에게 얻어터지고는 삼십육계로 줄행랑을 친 놈이오.

제 놈 말로는 홧김에 한 팔과 다리를 잘린다고 하지만 그거 다 허튼 수작일거요.

그런데 저 병신 영감이 갈미침(揭尾針)을 잘 쓴다는 소문이요.

독이 굉장하다지만 오늘 여기에 죽으려고 나왔구려! 하‥‥‥하」

 

  막윤은 울화통이 터질 대로 터졌다.

 

「이놈! 잘도 떠들어 댄다마는 잠깐만 기다려라.

내 너에게만 특별히 갈미침의 맛을 한 번 보여 주마.」

 

「하‥‥‥ 하‥‥ 감사하고 또 감사한 말씀이오. 어디 맛 좀 보겠소.」 

 

  너털웃음을 웃는 문공태는 그 길로 등뢰를 불렀다.

 

「등형! 저 늙은 놈이 필시 천용방과 한패일거요.

우선 저 늙은 놈부터 쓰러뜨려 버립시다.」

 

「거 좋습니다. 나도 대강 듣기는 했소만 오늘 문형에게 잘 들었소.

우선 문형부터 한 수 놓으시오. 그러면 내가 다음 한 수를 놓겠소.」

 

  조금 떨리는지 뒤로 몸을 사리는 말이었다.

그러자 문공태는 응당 내가먼저 한 수 쳐야 옳으리라 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음흉하게 웃었다.

 

「암 그래야지. 그럼 내가 한 수 놓으면 등형은 다음을 맡으시오.

저 따위 병신 영감에게는 무예계의 규칙도 필요 없소!」

 

  청죽장을 꼬나 잡고 한걸음 나서는 문공태였다.

 

  이때 막윤은 듣다듣다 창자가 뒤집히는지 아니면 구역질이 나는지

문공태의 얼굴에 퉤! 가래침을 뱉었다.

  그리고는 잠시의 여유도 없이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껑충 외발로 가마를 뛰어 내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외팔이 번쩍 허공으로 들린다고 했을 때는

벌써 문공태의 어깨를 내려치는 순간이었다.

 

  <퍽!>

 

  둔탁한 소리가 터지고 뒤이어 외발을 들어 문공태의 가슴을 걷어찼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였다.

 

  큰 소리만 치던 문공태는 돌연한 막윤의 서릿발 같은 공격에 주춤 물러서서는

얼떨떨한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리고 달려드는 막윤의 공격을 우왕좌왕 피하고는 정신이 번쩍 든 모양이었다.

 

  주춤했던 문공태는 옆에 서 있는 등뢰를 힐끗 쳐다보고는

청죽장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횡소오악(橫掃五嶽)의 한 수를 막윤의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리고 뻐근한 한 방을 힘 있게 내려쳤다.

  그와 함께 무섭고도 강한 칼바람이 막윤을 향하여 달려 나갔다.

 

  그러자 막윤은 유유히 몸을 피하며 손바닥을 발딱 뒤집어엎었다.

 미리 예상했던 대로 행동하는 막윤의 방비였다.

 

  다음 순간, 문공태는 자기가 내려친 내가장력(內家杖力)이 부드러 운 힘에

한쪽으로 발려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는 깜짝 놀랐다.

급히 있는 힘을 다하여 앞으로 기울어지는 몸을 간신히 바로 잡으며

옆으로  기우뚱 비켜서지 않을 수 없었다.

 

  허둥지둥 대는 문공태의 모양이 우스웠던지 막윤은 앙천대소하며

 

「어떠냐! 요 문공태야! 한 번만 더 이 늙은이의 손맛을 볼까?」

 

하고는 좀 전과 같이 손바닥을 발딱 뒤집어엎는 것이었다.

 

 

  그러자 어떻게 된 노릇인지 소리도 없는 장풍이 슬슬 문공태에게 굴러가는 것이었다.

그러자 문공태는 청죽장을 높이 쳐들고 노려보는 것이 있다.

 

   그러나 막윤을 노려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눈 앞 몇 치의 앞 만 노려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문공태는 갑자기 몸을 피하여 자기 앞의 허공을 향하여 정신없이

청죽장을 흔드는 것이었다.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던 등뢰는 기가 막혔다.

막윤을 후려쳐야할 문공태의 청죽장이 자기 앞의 허공만 정신없이 후려치는 것에 분통이 터졌다.

 

  (저런 병신 같은 것이 다 있나?‥‥‥ 내 참‥‥)

 

  그러나 문공태의 행동을 모르는 등뢰로서는 능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막윤의 장풍이 소리도 없이 산돌바람처럼 흘러오지만 그것이 얼마나 날카롭고

무서운가를 그의 경험으로 알고 있는 문공태로서는 우선 당장 흘러오는 막윤의 장품부터

막고 볼 일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이면 막윤처럼 언제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갈지 모르는 문공태는

장풍을 막는 것이 시급한 문제였다.

  청죽장을 정신없이 휘둘러 막윤의 공격인 장풍을 떨어뜨린 문공태의 이마에는

땀이 줄줄 흘렀다.

그러나 이런 것을 알 길 없는 백의신군 등뢰는 속이 뒤집혔다.

 

  (그래도 화산파의 장문인인 신분으로 저렇게 겁을 먹고 정신없이 피하고

 막기만 할까, 정말 한심한 친구군. 말만 잘하고‥‥‥ 병신 같이 ‥)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때, 문공태의 태도가 돌변하며

팔십이수(八十二手)의 복마장(伏魔杖)법을 휘둘러 막윤을 향하여 지쳐나가는 것이었다.

  그러자 주위 사방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듯 하더니

모래와 돌이 훌훌 날으는 것이었단.

무섭고도 날카로운 장법이었다.

  문공태를 병신이라고 중얼거리던 등뢰는 가슴을 치며 뉘우쳤다.

 

  (아! 과연 문형의 복마장법은 기가 막히군‥‥‥훌륭한 솜씨야‥‥)

 

하고는 처음 문공태와의 약속대로 막윤의 뒤로 살금살금 돌아가서

일장에 총력을 기울여 한방 기세 있게 후려 갈겼다.

  등뢰가 합세해 오자 어깨를 절로 들썩거리는 것은 역시 문공태였다.

막윤의 앞에서 기운이 백배한 문공태의 청죽장이 춤을 추고 뒤에서는

난쟁이 같은 등뢰가 주먹을 치켜들며 제법 발길질까지

사양하지 않고 들썩거리며 덤벼들었다.

  사태가 이 모양으로 문공태와 등뢰의 사이에서 밥상에

간장그릇처럼 되어버린 외다리 외팔의 막윤은 몸을 돌리며

그들의 공격을 재빨리 막아낼 재주가 없었다.

  쓸 수 없이 막윤은 앞뒤로 달려드는 문공태의 청죽장과 등뢰의

주먹을 막아 내기에만 힘을 썼다. 그러던 막윤은 도저히 막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운데 버티고 서서 앞뒤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공격도, 그렇다고 막아낼 생각도 못하고 있는 막윤을 본 문공태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한 수 갈기자는 눈짓을 등뢰에게 보낸 다음 거의 동시에

문공태의 청죽장이 허공에서 충을 추며 떨어지고 등뢰의 주먹과 발길이 일시에 달려들었다.

  문공태의 청죽장은 금침정리(金針定裡)로 막윤의 요혈(要穴)을 겨눈 일격이라면

그 장세(杖勢)가 어떠하겠는가! 무시무시한 장세로 내려친 것이었다.

  그 순간, 막윤은 그들이 동시에 공격을 노리기나 했던 것처럼 외다리를 풀썩 꺾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 가 했다. 그러나 어느 사이에 일장이나 옆으로 비켜서며

허공으로 부웅 떠버리고 말았다.

  그 바람에 막윤을 겨누었던 문공태의 청죽장은 등뢰의 요혈을 강타하고

등뢰는 등뢰대로 주먹과 발길로 문공태의 가슴을 보기 좋게 후려갈기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둘 다 비틀거리다 엉덩방아를 찌며 주저앉고 말았다.

 

「으윽!」

 

「헉?」

 

  거의 같은 시각에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리던 문공태와 등뢰는 어이가 없었다.

그 중에도 등뢰가 더 당한 모양이었다.

 

「문형! 정말 이러기요? 무슨 억하심정으로 그러시오?」

 

  문공태는 한심했다.

분명히 막윤을 노렸는데 나가떨어진 사람은 백의신군 등뢰인 데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그러나 등뢰의 일격을 얻어맞은 문공태인들 성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아프고 숨이 캑캑 막혔다.

 

「등형! 이거 어떻게 된 거요. 이 병신 놈은 어디로 가고?」

 

  그제야 등뢰도 막윤을 향하여 힘껏 한 방을 겨누었던 일이 생각나는지

가슴을 치며 분해 하는 것이었다.

  그때, 막윤의 통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 하‥‥‥ 두 분께서 아주 잘 노시는군,

그러지 말고 나하고 싸웁시다 그려.」

 

  환장할 노릇이다.

 

  자기들끼리 호되게 얻어터진 것도 분통이 터지고 남을 일인데

일장 밖에서 통쾌하게 웃는 막윤의 웃음소리에

그만 내장이 뒤집힐 지경으로 울화가 치밀었다.

  일어나는 길로 청죽장을 꼬나 잡은 문공태도 거꾸로 선 여덟팔자처럼

눈썹을 곤두세우고 땅을 박찼다.

그와 동시에 한줌의 금환(金丸)을 단단히 쥐고 달려들었다.

  등뢰는 두 자루의 단검을 모아 쥐고 문공태의 뒤를 질풍같이 따랐다.

  그러나 막윤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청죽장을 휘두르며 금환을 던지고 뒤이어 등뢰의 단검이 허공을 가르며

막윤에게로 새파란 검광이 날아갔지만 손 한 번 흔들어서 금환과 단검을

 떨어뜨린 막윤은 도리어 떨어진 금환과 단검을 집어 들고

이번에는 달려드는 문공태와 등뢰에게 던지는 것이었다.

  질풍같이 달려가던 문공태와 등뢰는 찰싹 땅에 몸을 붙이고

간신히 금환과 단검을 머리 위로 날려 보냈다.

  문공태와 등뢰의 합동작전은 이와 같이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실패로 끝나는 그들이기도 했지만 역습해 오는 막윤의 공격을

한파의 장문인의 고수급인 실력으로 잘 피해 나가기도 했다.

  신중을 기해서 일격을 감행하는 것이었지만 그 뒤가 급한 문공태와 등뢰는

자기들이 공격한 장풍과 단검이 꼭 되돌아와서 자기들을 위협하는 데는 질색이 아닐 수 없었다.

  홧김에 쫓아갔다 쫓겨 오고 쫓겨 왔다가는 또 쫓겨 가는 격전이 사방 십장(十丈)의

둘레를 무대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바람에 애꿎은 돌과 모래만

하늘 높이 날았다가는 아무데나 후드득 떨어지는 것이었고

그 떨어지는 돌에 나무와 풀들이 꺾어지고 찢어지기만 했다.

 

  이 때였다.

 

  산 계곡이 떠들썩하면서 발자국 소리가 어지럽게 나는가 하더니

천용방의 방주 이창란이 부하 단주들을 이끌고 달려오는 것이었다.

홍기단주(紅旗壇主) 백보비발 제원동(百步飛鉢 齋元同)과 백기단주(白旗壇主)의

자모신담 승일청(子母神膽 勝一淸) 그리고 천중사추(川中四醜)가 줄레줄레

이창란의 뒤에 바싹 붙어서 달려오는 것이었다.

 

  순간,

 

  문공태와 등뢰는 갑자기 나타난 천용방의 고수들을 발견하고는 막윤과의

전의(戰意)를 잃고 멈칫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모두 막윤이 소속되어 있는 천용방의 쟁쟁한 단주들임에야 문공태 아니라

문공태보다 더한 고수라도 가슴이 덜컥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문공태도 쟁쟁한 고수, 한 파의 장문인 신분으로 몸을 사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백의신군 등뢰 역시 꼭 같은 위치며 입장이었다.

  이윽고 달려온 이창란은 각 문파 중에서도 최강인 천용방 방주로서의

기품을 여유 있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 하, 가는 곳마다 두 분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오.」

 

  정중히 예의를 갖추며 문공태와 등뢰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문공태도 기세 있게 웃어 제쳤다.

 

「허허‥‥‥ 그렇소이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원수지간인가 하오.」

 

「원수지간? 거 참 좋은 말씀이오. 그렇다면 원수를 갚아야겠소.」  

 

「그렇게 하십시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한 판 어울리던 중이오,」

 

「하‥‥‥ 하‥‥‥ 그럼 잘 됐소. 우선 우리가 먼저 문형과 등형을 오늘 처치해 주겠소.」

 

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면서 어떤 사람이 달려오는 것이었다.

 

「소승이 이방주님의 대명을 오래 전부터 듣고 도량이 넓은 군자인줄 알았는데 실망하였소,

 

하‥‥‥ 하‥‥」

 

이창란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