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 장 귀원비급의 향방(向方) <殘肢靑燈>
주약란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무술제의 진귀한 귀원비급에 대해서 사실대로 말한다면
도옥이 가지고 있는 귀원비급을 더 내놓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주약란은 고개를 들었다.
「별 것은 아니에요.
저의 구슬함을 훔쳐 갔는데 돌려준다고 하면서도 돌려주지 않아요.」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다만 구슬함이라고만 말했다.
그러자 왕한상은 도옥을 돌아보며 빙긋이 웃었다.
「그까짓 구슬함을 무엇에 쓴다고 그러시오?
도향주께서 가졌으면 돌려드리지요?」
어디까지나 도옥을 위해서 하는 말에 도옥은 조금 생기가 났다.
「내가 돌려준다고 약속은 했지만 소저와 한 약속은 아니오.」
도옥의 꼬리를 빼는 말에 주약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뭐라고요? 어됐든 좋아요.
그러나 오늘 구슬함을 내놓지 않으면 대신 목숨을 받겠어요.」
그러자 양몽환이 뛰어 들었다.
「도형! 그렇다면 나하고 약속한 모양이구려. 그럼 약속을 지키시오!」
하며 선뜻 나섰다.
그제야 도옥은 할 수 없다는 듯이 품속에서 문제의 구슬함을 꺼내 양몽환에게 던져 주며
「여기 있소! 나도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오. 바로 그 함인가 아닌지 살펴 보시요.」
엉겁결에 던져주는 함을 받은 양몽환은 얼핏 보아도 문제의 구슬함과 같다는 것을 알아챘다.
도옥의 표독한 성질과 교활한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설마 구슬함을 돌려주랴 했는데
막상 구슬함을 받는 순간,
그에 대한 인식이 조금 달라지는 것이었다.
도옥에 비하여 정직하고 선량한 양몽환은 사매인 하림의 위기를 구해준 도옥에게
내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한 양몽환은 도옥의 지금과 같은 행동을 정말 친구 이상의 우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믿고
어떠한 의심이나 경계 없이 마음 놓고 구슬함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너무나도 어긋난 구슬함이었다.
함은 빈 껍질 뿐, 응당 들어있어야 할 귀원비급은 눈을 비집고 봐도 없었다.
순간 도옥의 얼굴이 이상야릇하게 변하는 것과 함께 양몽환의 얼굴에는 경련이 일었다.
「도형! 이게 웬 일이오? 나는 지금껏 도형을 믿었는데 이렇게 우정을 저버리기요?」
「양형! 그 무슨 말이오? 나도 양형과는 아무 속임 없이 지내는 사이인데?」
「그럼 이 함 안에 있던 물건은 어찌 했소?
그리고 빈함만 내 놓는다면 우정을 우롱하는 것이 아니요?」
「나는 모르겠소. 함 속에 무엇이 있었는지 나도 모르는 일이오.
그런데 무슨 우정을 우롱했다는 말이오?」
시치밀 뚝 떼고 딴 청을 부리는 도옥의 얼굴을 환히 바라보던
양 몽환은 비참한 표정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형! 그래도 나는 진심으로 믿는 처지이기에 하는 말이오.
그 러시지 마시고 순순히 내 놓으시오.」
「도대체 무슨 물건이기에 보지도 못한 나에게 내 놓으라고만 하오?」
「몰라서 묻는 것도 아닐 것이오.
도형의 생명이 없어진다 해서 해결 될 수 있는 일은 아니오.」
심각한 양몽환의 말에 도옥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 보통 생각할 수 있는
귀한 것이 아님을 직감한 천용방 네 명의 단주들은 잠시 긴장했다.
도대체 어떠한 물건이기에 이렇듯 심각할까,
의아해 하던 왕한상은 나직이 도옥을 불렀다.
「도향주! 무슨 물건인지는 모르지만 가졌으면 돌려주는 것이 도리요.」
「하‥‥‥ 하‥‥‥ 왕단주께서도 이 도옥을 믿지 못한다는 말씀입니까?」
오히려 노기를 띠는 듯한 그의 말에 어이가 없어진 양몽환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도형은 어찌 일구이언을 하시오?
친구지 간의 신의를 배반하고 끝까지 부인한다면 참 한심한 일이오.」 '
「한심하기로 말한다면 이 도옥이 더 한심스럽소.
애초의 약속도 주운 함을 돌려준다고 하지 않았소?」
「물론 훔쳐간 구슬함이오.」
「훔쳐 가지는 않았소. 분명히 나는 주웠소.
그래서 주운 구슬함을 돌려주었으니 약속대로 했는데 무슨 신의를 배반했다는 말이오.
정말 내가 한심하오.」
사실 옳은 말이다.
구슬함을 돌려 달라고 했지 구슬함 속에 들어 있는 귀원비급을 돌려 달라고는 하지 않았다.
구슬함을 돌려준다면 그 속에 들어 있는 물건도 필히 반환될 줄 알았던 양몽환은
도옥의 조리 있게 따지는 말에 오죽 답답하기만 했다.
일시에 말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자 도옥은 싱긋이 웃으며 능청을 떨었다.
「양형! 그 구슬함 속에는 대관절 무슨 물건이 들어 있었는데
이 야단이오? 무슨 물건인지 말씀이나 해 보구려!」
「도형! 나는 정말 도형을 믿었소.
그러나 이렇게 까지 시치미를 뗄 줄은 몰랐소.
아무러면 그 속에 들어 있던 물건을 도형이 못 보았을 리는 없을 것이오.
무슨 물건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이오.
정직하게 돌려주심이 친구간의 도리요.」
어디까지나 도옥을 믿고 순순히 돌려주기만을 바라는 양몽환에 비해
도옥은 갈수록 냉담해지고 딴청이었다.
「하여튼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소.
양형이 내 말을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면 낸들 어떻게 하겠소.」
그러자 주약란도 더 참지 못하고 발칵 성을 냈다.
「이 여우같이 교활한 도옥이! 속히 내 놓지 못하고 무슨 변명이에요?
변명이 목숨을 버리겠다면 마음대로 해요!」
하고 날카롭게 쏘아 붙이기는 하면서도 주약란은 물론 도옥이나 양몽환도
없어진 물건이 귀원비급이라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이때까지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네 명의 단주들은 도대체 무슨 물건인가 하고
눈을 굴리며 머리를 짰다.
그러나 그러한 그들에게는 다만 귀중한 물건이라는 것 밖에는 더 알 길이 없었다.
그러자 도옥은 주약란의 다부진 말에 어깨를 들썩거리며 더욱 딴청만 부리는 것이었다.
「목숨이 아까운 것을 내가 왜 모르겠소.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내 놓으라면 대관절 무엇을 내 놓으라는 말이오?
없어진 물건이 무엇인지 말씀이나 해 보시오.
그러면 힘껏 찾아보겠소.」
「여러 말 듣고 싶지 않아요.
훔쳐 갔으면 순순히 내 놓지 못하고 도리어 무슨 물건이냐는 말이 나와요?」
그러자 개비수 최문기가 선뜻 나서며 눈을 깜박거렸다.
「구슬함에 들어 있는 물건이 혹시 귀원비급이 아니오?」
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것은 그가 일찍이 일양자가 찾았던 가짜 귀원비급이 들어 있던 구슬함을 생각하고
지금의 구슬함과 일맥상통함을 느끼어 말한 것이었다.
그러자 주위의 시선들이 일제히 양몽환이 들고 있는 구슬함으로 집중되었다.
귀원비급이라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지고 귀가 번쩍 올라간 제원동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맞았소. 맞았소.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최단주도 벌써 알고 있었구려.」
「분명히 귀원비급일 것이오. 가짜 귀원비급도 구슬함 속에 있었지 않았소?」
「그렇지요, 왜 곤륜파의 일양자가 찾았다던 가짜 말이죠?」
「예. 그렇소. 그때도 구슬함에 들어 있었소.」
제원동과 최문기가 서로 침을 튀기며 신바람을 내자 막윤도 끼어들었다.
「옳게들 보셨소. 원래 귀원비급은 구슬함 속에 들어 있다는 소문이오.」
이와 같이 맞장구를 치는 세 명의 단주를 바라보던 왕한상은
아무 말 없이 도옥에게로 날카로운 시선을 돌리고 노려볼 뿐이었다.
그러자 왕한상의 날카로운 시선을 의식한 도옥은 낯을 붉히며
왕한상의 시선을 피해 외면하고 돌아섰다. 순식간에 사태는 이상한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는 당황해 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여 막윤도 눈치 채고 다가갔다.
서서히 도옥에게로 다가간 막윤도 차갑게 쏘아 보며 도옥을 부르는 것이었다.
「도향주!, 사실 대로 말하시오. 이 구슬함은 어디에서 주웠소?
그리고 방주님께도 말씀 드렸소?」
순간, 도옥은 붉어졌던 얼굴에 핏기가 싸악 가시며 입술에 침을 묻혔다.
만일 구슬함 속에 들어 있는 것이 귀원비급이 아니라도 제자의 신분으로서는
응당 방주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물며 그것이 귀원비급이라면 그래서 아직 방주 이창란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면 천용방의 엄한 계율로 문책을 면치 못하는 중대한 과오를 저지른 셈이었다.
도옥으로서는 아직 보고도 안하고 극비에 붙이고 있는 일이라 큰 근심이 되어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무슨 변명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도옥은 고개를 들었다.
「사실 그것이 귀중한 귀원비급이라면 어찌 방주님 이하 여러 단주님께
보고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구슬함인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일부러 태연한척 하면서 하는 말이지만
그의 망설이단 태도와 지금까지의 사태로 미루어 보아 도옥의 말이 거짓말임을
누구나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러나 도옥의 말을 믿지 못한다 해도 일단 도옥에게서 아무 것도 모른다는 말을 들은
왕한상은 날카로운 눈초리를 양몽환에게로 돌렸다.
「지금 도향주의 말대로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람에게 무엇을 내 놓으라 그러시오.
만일 그것이 귀원비급이라면 그렇지 않아도 무술계 고수들이 노리고 있는
귀중한 물건인데 당신이 도향주를 모함하려고 거짓말을 한다면
생명이 온전치 못할 것이오.」
사뭇 위협조로 양몽환에게 말하자 양몽환은 선뜻 두려움을 느꼈다
지금의 사태로 본다면 단연 천용방의 세력이 강한 것은 물론이다.
또한 귀원비급이라는 말만 떨어진다면 생명을 걸고 일전을 불사할 듯한
단주들의 날카로운 표정을 훑어본 양몽환은 왕한상의 위협조에 가만히 있을 수도
그렇다고 같이 위협적인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한번 더 도옥에게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도형! 지금까지의 우의를 생각해서라도 사실 대로 말씀 하시오
최후로 하는 말이오.」
「양형!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소?
모르는 일은 입이 백 개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법이 아니오?
어떠한 사태가 일어난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오.」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끝까지 우겨 보자는 심통이었다.
그뿐 아니라 도옥의 성질로서 순순히 내 놓지도 않겠지만
만일 내 놓고 싶어도 네 명의 단주들에게 분명히 말한 이상
사생결단을 내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도옥은 짐짓 결심하는 것이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양몽환을 일격에 넘어뜨릴 계산까지 세웠다.
이렇게 다부진 결심을 하는 도옥은 사실 무술로나 공력으로나 양몽환 하나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옆에 까딱없이 서있는 주약란의 존재가 아무래도 눈에 걸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양몽환과 직접 상대하려는 도옥이었다.
그러는 한편, 양몽환도 그의 무공이 도옥 보다 못하다 해도
그의 성질이 워낙 깨끗하고 자기가 정당하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 있었다.
약한 자를 도와주고 불의(不義)를 싫어하는 그의 성격으로서는 도옥의 교활하고
위선과 허위투성이의 말에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과연, 양몽환은 분통을 터뜨리며 도옥에게로 성큼 다가가 눈을 부릅뜨고야 말았다.
그것은 도옥이 원하던 바였다.
「도형이 끝까지 허위만을 말한다면 할 수 없소.」
하고는 보검을 뽑아 쥐는 것이었다.
그러자 도옥은 자기의 계획대로 일이 순조롭게 벌어지는 것에 은근히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태연히 한 걸음 물러서며 방비 태세를 취하는 것이 있다.
「얼마든지 상대해 드리겠소.
그러나 싸우더라도 그냥 싸우지 말고 조건을 걸고 싸웁시다.
만약에 우리 둘 중에 양형이 이 싸움에서 진다면 어떻게 하겠소?」
「만일 내가 진다면 귀원비급을 찾아 드리겠소.」
그러자 주약란이 양몽환을 가로 막으며 도옥에게 맞섰다.
「우선 나하고 싸워요. 내가 대신 싸우겠어요.」
「하‥‥‥ 하‥‥‥ 대단하시군.
그렇지만 저는 이미 양형과 싸우기로 했소.
소저가 정말 싸우고 싶다면 양형이 쓰러진 다음에 달려드시오.」
자신 만만하게 큰 소리로 떠드는 도옥의 말을 듣고 있던 양몽환은 슬그머니 분통이 터졌다.
그래서 그는 주약란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리며 속삭였다.
「염려 마시오. 도형이 원하는 대로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하는 바람에 주약란은 할 수 없이 막아섰던 양몽환의 앞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여전히 도옥을 노려보며 양몽환에게만 들리도록 주의를 주었다.
「조심하세요. 수법이 아주 악랄해요.」
「알겠습니다. 사매를 곤륜산으로 데려다 주시오.
어떻게 하든지 귀원비급을 찾고 말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어요. 그러나 경솔히 싸우지도 마세요.
될 수 있는 대로 오행미종보법으로 대항하세요.」
세심한 주의에 양몽환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옥을 향하여 몸을 돌렸다.
「내가 만일 진다면 스스로 자결해서 목을 바치겠소.」
하는 순간 양몽환은 굳은 의지와 분노에 눈이 이글거렸고 주약란과 네 명의 단주들은
일시 간담이 서늘했다.
그러나 도옥은 오히려 큰소리로 웃어 제치는 것이었다.
「하‥‥‥ 하‥‥‥ 양형! 그것 좋소. 그러나 너무 지나친 조건 같으오.」
하고는 서서히 금환검을 뽑아 들었다.
이리하여 귀원비급을 찾아 조소접에게 돌려주고 누명을 벗으려는
양몽환과 훔친 귀원비급을 끝까지 사수하려는 금환이랑 도옥과의 결투는
도옥의 이형환위(移形換位) 수법의 선수로 드디어 검광을 사방으로 퍼뜨려 놓기 시작했다.
도옥의 일격을 제대로 피할 사이도 없이 휘두르던 보검에 명중하자 양몽환은
즉시 몸을 돌려 역습으로 나왔다.
그러나 날카롭고 신랄한 도옥의 금환검은 잠시 숨을 돌려 쉴 사이도 없이
허공에서 번쩍 하고는 달려들어 장풍을 일으키고 검풍과 검광을 발산시키는데
그 날카로움이 가히 성난 사자와 같았다.
몇 수를 연거푸 공격방해 수세에 몰렸던 양몽환은 사태가 위급함을 직감하고
곧 주약란이 가르쳐 준 오행미종보법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수세에 몰렸던 양몽환의 전법이 돌변하여 허공을 날고
그림자 같이 달려들어서는 도옥의 몸을 이리 치고 저리 치고 정신없이 후려치자
도옥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 자리에 선채 어리둥절했다
양몽환의 몸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는 않고 이리 저리 정신없이 후려치는 데는
도옥도 별 재간 없이 선 자리에서 뺑 뺑 돌며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양형! 양형! 도대체 어디 있소? 정정당당히 눈앞에서 싸웁시다!」
그러다 땅 위에 내려선 양몽환은 보검을 휘두르면서
「여기 있소! 왜 찾으시오.」
벽력같이 소리 지르고는 보검을 휘둘러 내려쳤다.
이 바람에 뒤로 자빠질 듯 물러선 도옥은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지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눈에 보인다 하면 없어지고 없어졌다 하면 난데없이 나타나 한수를 공격하는
신출귀몰한 양몽환의 전법에 영락없이 고전을 거듭하는 도옥이었다.
삼음신니의 권보로도 보이지 않는 양몽환을 칠 수 없는 도옥은 차차로 교활한 태도가
없어지고 금환검을 휘두르는 팔에도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상대도 보이지 않는 허공을 미친 듯이 금환검을 휘둘러봤자
아무 소용도 없고 연이은 헛손질에 숨이 차고 기운만 빠진다는 것은 너무나 한한 사실이었다.
애초에 자기의 무공만 과신하고 기고만장했던 도옥은 허수아비처럼 서서 이따금 생각이나
난 것처럼 금환검을 들었다 놓을 뿐 전의를 상실한 모양이었다.
도저히 적수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될 수가 없었다.
되는 대로 금환검을 휘두르는 도옥을 본 양몽환은 이윽고 오행미종보법을 풀고
도옥의 눈앞에 자태를 나타냈다.
그리고는 번개같이 달려들며 행화춘우(杏花春雨)의 한 수로 내려쳤다.
이때까지 허수아비처럼 했다가 눈앞에 나타난 양몽환을 본 도옥은
눈을 번쩍 뜨며 조금 생기가 도는 듯 금환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뒤에서 내려친 양몽환의 행화춘우 한 수에 필사의 힘을 다해 맞받아 쳤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에 차차 사라졌던 전의가 되살아나고 눈이 번쩍 빛나는 것이었다.
양몽환이 자태를 드러내므로 서 정신을 차린 도옥은 그래도 연마한 무공과
예민한 판단으로 자기가 불리하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다.
이러한 수치를 생각한 도옥은 지금까지의 방비태세를 공격태세로 돌변시키고
역세를 만회시키기 위한 맹렬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먼저 빙봉장하(氷封長河)의 한 수로 금환검을 날린 도옥은 뒤로 돌아 서면서
신용출운(神龍出雲)의 수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와 함께 금환(金丸)이 맞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카로운 검풍은
바위를 부술 듯 무시무시한 속도로 양몽환의 가슴으로 불어 닥치는 것이었다.
도옥의 공격은 정확하고 날카로웠다.
더구나 도옥이 이러한 공격 을 가하지 않는다면 양몽환의 전법이 언제
또 오행미종보로 바뀔지 예상을 불허하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보일 때 단단히 벼른 일격으로 공격치 못하고 우물거리다
오행미종보법으로 양몽환의 몸이 사라져버리면 만사는 나무아미타불이 된다는 것을
도옥은 알아챘다.
그러한 도옥의 공격인 만큼 양몽환이 조금만 소홀하다면 일장 밖으로
나가떨어진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었다.
순간, 도옥의 공격이 신랄하고 매섭다는 것을 그의 동작으로 눈치 챈
양몽환은 다시 오행미종보법으로 몸을 감추며 그의 공격을 피했다.
필사의 일격으로 쓰러뜨리려던 도옥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양몽환의 신묘한 무공에 그만 어안이 벙벙해 지고 말았다.
자기의 공격에 응당 쓰러져 있어야 할 양몽환은 보이지도 않고
주위에 둘러 서 있는 천용방의 단주들만 이상한 눈빛으로 자기를 맥 빠진 듯
보고 있는 데는 있던 용기도 사라져 버릴 형편이었다.
분통이 터지다 못해 땅을 치며 통곡하고 싶은 도옥은 금환검을 단단히 쥔 채
선 자리에서 빙 빙 돌며 어디에선가 양몽환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얼마 후, 자취를 감추었던 양몽환은 도옥이 서 있는 뒤로 유유히 내려와서
추혼십이검법을 전개하여 도옥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그것은 흡사 어디를 찾고 있느냐, 나는 여기 있다는 식이었다.
조롱도 이만하면 싸우기를 그만 두고 스스로 목을 잘라야 할 도옥이었다.
그러나 도옥은 획! 돌아서면서 운무금광(雲霧金光)의 한수로 내려치는 것이었다.
이때 벌써부터 만전을 기한 양몽환은 지금까지의 공격 수법을 바꾸어 방비만 하기 시작했다.
치면 막고 달려오면 피하는 그의 재빠른 동작은 공격해 오는 도옥의 동작 보다 더 빠른 것 같았다. 그러나 공격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도 그냥 넘겨 버리고 도옥이 공격해 오기만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여유 있는 태도를 본 주약란은 그제야 양몽환을 걱정하던 불안한 마음이 없어지고
안도의 숨을 몰아쉬는 것이었고 그러한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감도는 것이었다.
지금 양몽환이 전개한 오행미종보법은 원래 주약란이 자기의 발자국을 따라
양몽환이 배우도록 한 절묘한 무공으로서 한 걸음 한걸음을 옮길 때 마다 무궁무진하게
무공이 변화되어 몸이 허공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도 되고 한 발자국만 움직여도
상대방이 분별하지 못하도록 자태가 그 반대 방향으로 사라져 버리는 신출귀몰한 수법이었다.
이 무공을 주약란에게서 배운 양몽환은 자유자재로 그 오묘한 무공을 구사할 수 있을 만큼
통달하여 어떠한 공격이라도 가볍게 막고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도옥의 공격을 오행미종보법으로 간단히 피하며 기력을 운행시켰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진기가 조식되면 재차 공격을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다시 공격해 오는 도옥의 공격을 근 열수나 가볍게 피한 양몽환은 몸에 운집된
진기를 일시에 내쏟으며 단봉요운(丹鳳搖雲)의 수를 전개하고 비호같이 달려들어다.
순식간에 돌변한 양몽환의 공격에 당황한 도옥은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가
뒤로 몇 걸음을 엎드린 채 물러서서는 우뚝 일어섰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자기 앞에서 공격해 오던 양몽환의 모습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어제된 영문인지 몰라 두리번거리던 도옥은 갑자기 등 뒤에서 고함치는 양몽환의
소리에 하마터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것 같은 것을 간신히 억제하며 고개를 돌렸다.
과연, 그곳에는 장검을 겨눈 양몽환이 엄숙한 얼굴에 약간 미소를 띤 채 서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의 위세는 가히 도옥을 누를 수 있는 만큼 위엄이 풍기는 얼굴이었다.
이윽고 양몽환은 손을 들어 잠시 싸움을 중지한다는 뜻을 표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형은 잠시 내 이야기를 들으시오.
원래 도형과 나는 막역한 친구 사이였소.
뿐만 아니라 나에게 적지 않은 도움도 베풀어 주었소.
그래서 나는 항상 그 은혜를 보답하려고 하던 중이었소.
그런데 오늘 이렇게 싸움을 하게 된 것은 천만번 유감 된 일이 아닐 수 없는 일이오.」
그러자 도옥은 태도를 바꾸며 허리를 폈다.
「옳은 말이오. 내가 양형을 구해준 것은 정말 우정에서 우러나온 일이오,
그것을 은혜라고 생각한다면 감사한 일이오.
그러나 오늘 이 싸움은 어디까지나 양형이 나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소.」
사실 양몽환의 오행미종보법만 아니어도 도옥은 한 칼에 양몽환을 처치하고
주약란의 눈을 피해 도망가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단주들이 보는 앞에서 무참히 패배해 버린 도옥은 계획을 변경시킬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만일 양몽환이 계속해서 오행미종보법으로 공격해 온다면 틀림없이 패하게 될 것이고
패하게 된다면 도리 없이 약속대로 귀원비급을 내 놓아야 할 판이었다.
이러한 처지에 선수를 걸어온 양몽환의 말에 위기를 면한 도옥은 속으로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한 결투의 결과는 누구에게나 도옥이 패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때, 양몽환은 더 싸우지 않고 이만큼의 위협으로서 귀원비급을 스스로 내 놓도록 하려는
목적이었다.
「도형! 사실 우리같이 우정이 깊은 처지로서 서로 싸운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오.
그런즉 도형만 구슬함 속에 들었던 물건을 돌려주시면 나는 예전과 똑 같은 우정으로 대하겠소.」
「물론 우리는 양형의 말대로 예전같이 좋은 친구가 돼야 할 것이오.
그러나 그 구슬함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는 모르는 일이오.」
「도형이 그것을 모른다면 누가 알겠소?」
「사실이오. 나는 그 구슬함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소.
만일 그 속에 물건이 없어 졌다면 그 사람이 꺼냈을지도 모르는 일이오.
우리 함께 가서 물어 봅시다.」
「도대체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요. 대관절 구슬함을 누구에게 주었소?」
「가 보면 알 것이오. 그 사람이 양형을 만나줄지 안 만나줄지 그것은 모르지만.」
「거짓말 마시오. 도형이 무슨 음침한 계획을 짜고 있는 것이 아니요?」
「절대로‥‥‥」
하고 말하는 도옥을 제지시키며 막윤이 끼어들었다.
「도향주! 그 사람이 어디 있소? 우리 다 함께 가 봅시다.」
하는 말에 왕한상도 손뼉을 치며 찬성했다.
「좋습니다. 우리 다 같이 가서 구경이라도 합시다.」
그때였다. 지금까지 양몽환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주약란의 손이
가볍게 허공으로 올라갔다.
그와 함께 주약란의 손에서 허공을 날은 은환(銀丸)은 잠시 후 두 사람을 쓰러뜨리고
처절한 신음 소리가 되돌아 왔다.
그러자 그곳에는 천용방의 총단으로 달려가던 두 명의 제자가 쓰러졌다.
그것은 진짜 귀원비급이 미구에 나타날 것을 예감한 왕한상이 다른 파의 고수들이
밀려오기 전에 방주 이창란 이하 모든 제자들에게 통지하여 양몽환과 주약란을
쓰러뜨리고 귀원비급을 차지하려는 의도에서 도옥이 구슬함을 주었다는
사람에게 다 함께 가자는 막윤의 말에 찬성하는 듯 손뼉을 치면서 신호로
방주에게 제자를 보냈던 것이었다. 이렇게 박수를 침으로서 암암리의 신호로 제자가 달려가자
지금까지 주위의 변화에만 신경을 쏟고 있던 주약란의 날카로운 주의력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왕한상의 지시로 몇 걸음 떼어 놓자마자 주약란의 무니주(牟尼珠)를 한 알씩 뒷등에
꽃은 제자들은 길길이 뛰다가 그 자리에 뒹굴었다.
이 바람에 단주들은 물론 도옥도 입이 벌어졌다. 그 중에서도 제일 놀라고 핏기가 사라진
사람은 바로 왕한상이었다.
무술계에서 명성을 떨치는 미립타혈신공(米粒他穴神功)의 위력을 모르는 왕한상이
아니었지만 이토록 날카로운 암기라는 것은 미처 몰랐다.
다만 어안이 벙벙할 따름 주약란의 얼굴도 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이 사태가 침중한 때 갑자기 도옥은 커다랗게 기침을 했다.
그러자 주약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큰 소리로 신호하자는 계획인가요? 이창란이 온다 해도 겁낼 것 없어요!」
하는 말을 마치자마자 주약란은 도옥의 가슴을 겨누고 날카로운 일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뜻밖의 공격에 황급히 몸을 피한 도옥은 주약란의 백옥 같은 손끝에서 튕겨 나는 듯한
한줄기의 지풍(指風)에 다시 한 번 몸을 굽혀 피하는 도리 밖에 없었다.
황망히 주약란의 지풍을 피한 도옥은 반격할 태세로 이형환위(移形換位)의 수로 진기를 모으려고 하다 재차 공격해 들어오는 주약란의 격공타혈(隔空他穴)에 식은땀을 흘리며 엎어지듯 피했다. 창피막심한 일이었다. 이때 양몽환이 주약란을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사태는 더 위중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양몽환은 주약란의 앞을 막아서며 애원하듯 소리쳤다.
「잠깐 참으시오. 이렇게 싸우지 말고 속히 도형이 말한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급한 일이오.」
그제야 주약란은 손을 멈추고 물었다.
「손을 더 쓰기 전에 속히 찾아내요!」
쨍쨍 울리는 쇳소리였다.
그러자 도옥은 방비 태세를 늦추며 어깨를 들썩했다.
「주소저가 손쓰는 것은 무섭지 않소.
얼마든지 상대해 주고 싶지만 양형과의 약속도 있고 해서‥‥‥」
「그만 두겠다는 말인가요.」
「왜 그만 두겠소? 우선 그 사람을 만난 다음에 상대해 드리죠.」
말로는 짐짓 허세를 떨었지만 양몽환을 처치하는 데는 주약란의 존재가
눈에 가시처럼 걸릴 뿐 아니라 그녀의 무공이라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처지의 도옥이었다.
「좋아요. 그럼 어서 안내해요. 어느 곳에 있는지.」
주약란의 말이 떨어지자 도옥은 순간 당황했다.
(주소저도 간다면 곤란하겠는데‥‥‥
지금까지 양몽환의 무공이 형편없는 줄 알았는데,
나는 오늘 그에게 참패를 당하지 않았는가.‥‥‥)
도옥이 혼자서도 양몽환을 당할 수 없는데 주약란까지 따라 온다 면
도옥의 계획은 또 한번 달라져야 했다.
비록 자기 옆에 네 명의 단주들이 있다 해도,
그래서 그들도 함께 따라간다면, 네 명의 단주들이 주약란 한 사람을 당해내지 못할 것 같았다.
주약란이 따라가겠다면 네 명의 단주들도 따라가겠다고 할 것은 귀원비급의 호기심에서도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따라오지 말라고 한다면 그들의.
의심은 더욱 굳어져 도옥의 처지가 매우?곤란하게 되었다.
얼마를 망설이고 생각했으나 좋은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 입을 다문 채 서 있기만 했다.
답답한 시간이 흐르기만 했다.
한편, 양몽환은 도옥이 말하는 그 문제의 사람이 누구인지 대강짐작은 갔지만
도옥이 어떠한 행동으로 나올 것인가 주시하기만 했다.
지금까지의 양몽환은 도옥의 무공이 자기를 능가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오행미종보법에서 운신을 못하는 도옥을 보고서는
어느 정도 자신이 붙어 그의 존재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도 도옥을 해치우지 않은 것은 귀원비급부터 찾아야겠다는 것과
지금까지의 우정을 생각해서 상대하여 싸우기를 피하는 것이기도 했다.
한동안이 지나도 도옥에게서 아무 말이 없자 왕한상은 답답하다는 듯이 도옥을 불렀다.
「도향주! 속히 결정을 하시오.
우리들도 가고 싶지만 도향주의의견이 다르다면 따라가지 않겠소.」
하는 말에 막윤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왕한상을 바라보다 왕한상의 끔벅 끔벅하는 눈 암시에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음‥‥‥ 저 왕단주는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다.
저렇게 눈을 끔벅이는 것은 필시 무슨 계략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모르는 척 해야지 ‥‥‥)
이러한 생각이 든 막윤은 따라간다는 것을 깨끗이 기권했다.
「도향주! 그럼 나도 그만 두겠소. 혼자 수고 하시오.」
그제야 도옥은 무슨 말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단주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주약란을 한번 쳐다보고는
양몽환에 게 고개를 돌렸다.
「자, 그럼 곧 떠납시다. 우리끼리 가서 찾아봅시다.」
「좋소! 나는 도형을 믿겠소.」
천용방의 단주들도 따라가지 않겠다는데 굳이 자기는 따라가야겠다는 것이
쑥스러워진 주약란은 역시 자기도 따라 가기를 단념하고 양몽환에게 극히 조심하라는 듯이
한 쪽 눈썹을 올렸다가는 곧 내렸다.
그것을 본 양몽환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여유 있는 웃음을 웃어 주었다.
그리고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다 들을 만큼 큰 소리로 외쳤다.
「나를 해치지는 못할 것이오!」
하고는 도옥을 재촉하여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동안 아무 말 없이 달리던 도옥은 천천히 걸음을 늦추며 옆에 바싹 붙어 따라오는
양몽환을 힐끔 돌아보았다.
「양형! 지금 누구를 찾아 가는지 짐작하겠소?」
도옥의 거동에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은 양몽환은 비록 무공이 도옥보다도 강하다 해도
그의 교활한 계략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묻는 말에 까지 신경을 쓸 필요는 없는 듯 했다.
「글쎄‥‥‥ 내 추측에는 동사매 같은데‥‥‥」
「하‥‥‥ 하‥‥‥ 놀랐는데‥‥‥ 어떻게 아셨소?」
「그저 추측이 그렇군요. 하‥‥‥ 하‥‥」
「그런데 귀원비급이 동사매에게 있을 것이라고 믿소?」
순간, 양몽환은 도옥의 무슨 계략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여 긴장했다.
「그럼, 아니란 말이오? 나는 어디까지나 도형을 믿겠소!」
그러나 도옥은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고는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사경이 넘은 밤하늘에는 무수한 별빛만 찬란하고 인적이 없어 밝은 시냇물 흐르는
소리만 들리는 깊은 산 속에 이르러 어느 절벽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힘든 길이었다.
무공은 비록 양몽환에게 참패를 당했지만 도옥의 경공법은 양몽환을 능가하고도 남았다.
도옥의 이마에 땀이 송송 맺힐 때 양몽환은 등덜미까지 땀이 흐르고 있었다.
잠시 쉬며 지친 몸을 푸는 동안 도옥은 옆에서 씩씩거리며 숨 가빠 하는 양몽환을
재미있는 것이라도 구경하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양형!」
「? ‥‥‥」
말없이 돌아다보는 양몽환에게
「양형은 주소저와 어떠한 관계시오?」
「아무 관계도 아니오.」
「하‥‥‥ 하‥‥‥ 보통 사이가 아닌가본데?‥‥‥」
「쓸데없는 말은 우리 하지 맙시다.」
「하‥‥‥ 하‥‥‥ 미안하오. 자 그럼 ‥‥‥」
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옥이 어떻게나 빨리 달리는지 지친 양몽환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진기를 운집해도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한 도옥과의 거리는 삽시간에 사오장이나 떨어졌다. 그리고는 계곡을 돌아서면서 도옥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양몽환은 저윽이 당황했다.
아무리 따라가려고 해도 힘은 미치지 못하고 그와의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도옥이 도망가리라는 예감은 양몽환의 발을 구르게 했다.
(‥‥‥이러다 귀원비급은 고사하고 도옥마저 잃겠구나.‥‥‥)
다급해진 양몽환은 할 수 없이 고함을 질러 도옥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도형! 도형! 할 말이 있소!」
그러나 여음과 산울림만 되돌아 올 뿐 도옥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낙심천만한 양몽환은 할 수 없이 청정점수(??點水)의 경공을 발휘하여
도옥이 사라져간 계곡에 까지 다다랐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울창한 나무와 바위 뿐 도옥의 모습은 없었다.
양몽환은 울창한 나무숲과 기괴하게 생긴 바위를 보며
혹시 도옥이 어디에 숨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곳에 숨었다가 갑자기 등 뒤에서 친다면‥‥‥)
등골이 오싹 했다. 급히 등에 메었던 보검을 뽑아든 양몽환은
조심히 주위를 살피며 한 걸음,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근 백여 장이나 될 듯한 계곡을 조심히 빠져 나온 양몽환은 수천 길이 넘을 듯한
절벽 앞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이끼가 수 없이 앉은 바위는 발도 및지 못할 만큼 미끄러웠다.
도저히 올라갈 엄두도 낼 수 없는 절벽이었다. 어디를 밟고 올라갈까 하고
얼마를 망설이던 양몽환은 들리는 듯 마는 듯 이상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순간, 그것은 여자의 신음 소리였다. 귀를 바싹 세우고 장검을 힘 있게 쥔
양몽환은 더 의심할 것 없이 여자의 날카로운 외침 소리와 신음 소리라는 것에 긴장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어디서 들리는지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그림자도 없었다.
잠시 더 숨을 죽이고 귀를 세웠던 양몽환은 그 소리가 다시 한 번 더 들리기를 기다렸다.
숨을 죽이고 아무리 기다려도 그 소리는 다시 들려오지 않아 긴장을 푸는 양몽환에게는
그 대신 더 큰 절망이 한 아름 안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를 기다려 보았으나 끝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말았다.
소리가 다시 나기만을 기다리다 실망한 양몽환은 그 자리에 보검을 짚고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어떻게 한다? 이 깊은 산중에서 어떻게 도옥을 찾을까,
앞에는 수천 길의 절벽이요 뒤는 수풀과 나무 그리고 바위뿐인데‥‥‥)
생각하는 바로 그때였다.
거의 일장(一丈)이나 떨어진 중에서 요란한 웃음소리가 터지는 것이었다.
「하‥‥‥ 하‥‥」
그것은 분명히 도옥의 웃음 소리였다.
정신이 번쩍 든 양몽환은 급히 소리 나는 곳으로 달려가려다가 우뚝 섰다.
그것은 도옥의 불의의 습격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뛰어 가려던 양몽환은 그 자리에 우뚝 선채 손에 힘을 주어 장검을 잡고는 크게 외쳤다.
「도형! 어디에 있소?」
외치는 소리에 도옥은 웃음을 거두며 소나무 뒤에서부터 서서히 자태를 나타내며
양몽환에게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의 손에는 아무 것도 쥐여 있지 않는 맨 손이었다.
「하‥‥‥ 하‥‥‥ 나를 찾았소? 그동안 동사매에게 다녀왔소.
양형이 말한 대로 귀원비급은 구슬함 속에 있었소. 그래서 가지고 오는 길이오.」
순간, 양몽환은 좀 전에 들린 여자의 외침 소리가 동숙정의 소리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동숙정의 신변이 안심되지 않았다.
「귀원비급이 있다고요? 동사매는 어디 계시오?」
「궁금한 모양이군. 그렇지만 동사매가 양형을 만나지 않겠다고 해서 혼자 다녀왔소.」
「무슨 말이오?」
「그녀는 원래 당신네 곤륜파에서 도망해 나오지 않았소?」
「그렇지요 그래서 나를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오?」
「그런지도 모르오. 양형을 만나면 여러 가지 말이 많게 되고
그녀에게 양형이 곤륜파로 돌아가자고 한다면 그것 또한 곤란한 일이 아니겠소?」
양몽환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옥의 생각도 옳았다.
도옥의 말대로 동숙정을 만나면 한 파의 제자였던 양몽환을 보는 순간
동숙정은 괴로워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천천히 만나도 좋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양몽환이 급한 것은 동숙정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귀원비급을 찾아 조소접에게 전해 주고 주약란에게 달려가는 일이었다.
그것은 천용방의 단주들과 대치하고 있을 주약란의 신변이 안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도형의 생각도 옳은 생각이오. 내가 동사매를 만나면 피로와 할 것이오.
차후에 만나 보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
「그렇다면 다음에 만나시겠소?」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으오.
오늘은 우선 귀원비급을 주인에게 돌려준 후 도형과 함께 사매를 만나보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그러자 도옥은 품속에서 귀원비급을 꺼내 들었다.
「마음대로 하시오. 그럼 이 귀원비급을 돌려 드리겠소.」
하고는 던져주는 것이었다.
과연 글자도 선명하게
「歸元秘?(귀원비급)」
네 글자가 또렷한 귀원비급이었다.
수백 년 동안 무술계를 광풍으로 몰아넣은 귀원비급이 이렇게 도옥의 손에서
양몽환의 손으로 옮겨지자 책을 꼭 쥔 양몽환은 일순감개가 무량했다.
(아? 이 책 때문에 수많은 무술인이 죽고 또 죽어야 하는가?‥‥‥
도대체 어떠한 무학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인가?‥‥‥)
절로 나오는 한숨과 앞으로 일어날 일에 잠시 허탈해진 양몽환에 비해
도옥은 시종 답답한 표정이었다.
「양형! 나는 이제 양형과 약속한 귀원비급을 틀림없이 돌려 드렸소!」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바요. 우리 무술인들은 신의가 제일 아니오?」
「옮은 말씀이요 그러나 이제부터 그 귀원비급이 양형 손에서 없어진다면
약속을 행한 이상 나는 책임을 지지 않겠소이다. 조심히 간직하시오.」
어딘가 모르게 뼈 있는 말이었다.
「하‥‥‥ 하‥‥‥ 염려 마십시오.
나는 이 귀원비급을 주인에게 돌려줄 마음이오. 나는 조금도 욕심이 없소.」
하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양몽환의 손을 덮친 도옥은 귀원비급을 뺏어 들고
뒤로 획 물러서는 것이었다.
너무나 삽시간의 일이어서양몽환도 어리벙벙하여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하‥‥‥ 하‥‥‥
이렇게 진귀한 귀원비급이 필요 없는 양형은 이 도옥에게 인심이나 쓰시오!」
그제야 제 정신으로 돌아온 양몽환은 도옥의 계략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크게 냉소를 터뜨리며 눈썹을 치켜 올리고 달려들어.
「도형이 내놓지 않겠다면 나도 생각이 있소!」
외치며 천강장(天?掌) 중에서 적수박용(赤手縛龍)을 전개하여 도옥의 왼팔을 잡으려는 순간,
발이 삐끗하며 돌 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양몽환의 손가락을 도옥은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움켜잡았다.
「양형! 이러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이 도옥에게 선사하시오.」
하고는 쥐고 있는 양몽환의 손가락을 힘껏 비틀었다.
그러자 팔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뒹굴고 말았다.
이때 유유히 귀원비급을 품속에 넣은 도옥은
「이제는 당당히 양형에게서 무공에 이겨 얻었소.
그래도 이 도옥이 신의(信義)가 없다하겠소?」
정신이 몽롱해졌던 양몽환은 온 기력을 다해 팔을 움직이려고 했으나
도옥의 손이 닿는 순간부터 기력은 점차로 쇠퇴하여 진기도운행할 수 없게끔 되어 버리고 말았다.
「남을 속이고 습격으로 강탈해 간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오!」
「속인 것은 내가 아니오. 양형이 나를 속였소.
귀원비급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단 말이오?
그래도 양형은 욕심이 없다고 하면서 왜 이 도옥에게는 주지 않소?
정정 당당히 승부를 겨루어 가지는 이상 나보다 더 신의 있는 사람이 있지는 않을 것이오.」
「목숨이 아까우면 깨끗이 사나이답게 돌려주시오. 후회하지 말고!」
「흥분하지 마시오. 무슨 부탁이나 유언 같은 것이 있으면 속히 하시오.
힘껏 도와주겠소. 그래도 없다면 이 계곡에 잘 묻어 주겠소!」
「하‥‥‥ 하‥‥‥ 이 몽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소. 마음 놓고 나를 죽여 보시요」
「그럼 유언은 없다는 말씀이오? 그것이 유언이라면 너무 간단한데 ‥‥‥」
「유언? 한 가지 있소.」
「그러면 그렇겠지. 빨리 말하시오. 내가 손을 쓰면 죽지는 않는 다해도
기억 상실증에 걸릴 것이오.
그래서 바보가 된다는 것을 미리 알려 주는 것도 우정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고,
고맙다고 하시오.」
「흥! 도형이 내 농아요혈(聾啞要穴)을 공격한다 해도 두려울 것 없소.」
「두려울 것 없다면 빨리 하실까?」
「그럼 동사매를 꾀어 사문을 배반시킨 것은 바로 도형이오?」
「묻고 싶다는 것이 그거였소? 바른 대로 말하지. 그렇소.」
「그래서 동사매의 정조를 뺏고 도망했소?」
「그것은 그녀가 원한 일이오.」
「알았소. 할말은 다 했소. 어서 처치하시오.」
하고는 눈을 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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