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비연경룡

제 32 장 도둑으로 몰린 양몽환 <秘?失踪>

오늘의 쉼터 2014. 6. 22. 14:24

제 32 장 도둑으로 몰린 양몽환 <秘?失踪> 

 

  순간,

위험을 느낀 양몽환은 암암리에 운행했던 기력을 일시에 내뿜으며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양몽환을 향하여 닥쳐오던 장풍은 멀리 산봉우리를 넘어 멋대로 달아나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위험을 모면한 양몽환은 있는 힘을 다하여 발을 움츠렸다가 됐다.

그제야 양몽환의 몸은 도옥의 옆에 떨어질 수 있었다.

양몽환이 날아오기만 기다리던 도옥은 단숨에 달려오지 못하고 허공에서 멈칫거리는

양몽환을 발견하고 사태가 위중함을 느꼈다.

 

「양형! 웬 일이오.」

 

「장풍이‥‥‥ 장풍이 달려들었소.

아무래도 우리를 노리는 놈들이 있는 모양이오.」

 

길게 숨을 몰아쉬며 대답하는 양몽환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솟아있었다.

상당히 당황했던 모양이었다.

사방을 세밀히 관찰하던 도옥은 아무 말 없이 양몽환의 손목을 잡아 이끌며

걸음을 재촉하여 큰 바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양몽환의 손을 놓고 먼저 바위를 기어오르던 도옥은 뒤돌아보며 따라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는 바위를 넘어가는 것이었다.

기력을 새로 운행시키느라고 잠깐 지체했던 양몽환도 도옥의 뒤를 따라 큰 바위를 넘었다.

 

「?‥‥‥」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먼저 넘어온 도옥의 행방이 묘연하였기 때문이다.

둘러보아야 큰 바위뿐 온데 간데도 없이 도옥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두리번거리던 양몽환은 바로 맞은편에 있는 굴을 발견하고는

필시 동굴 속에 숨이 있으리라 여겼다.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어디 숨을 만한 곳이 없었다.

만일을 염려한 양몽환은 주먹만한 돌을 집어 들고 잠잠한 동굴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캄캄한 동굴 속을 조심히 더듬어 상당한 거리를 지나오자 앞이 환하게 밝아오는 것이었다.

생각대로 높은 산을 뚫은 동굴이었다.

동굴을 빠져나온 양몽환은 바로 눈앞에 금환검을 쥔 채 석집(石家)앞에 서 있는

도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깊이 하는지 양몽환의 출현도 모르는 듯 했다.

그러는 한편 양몽환은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기화요초는 물론이지만 넓고 아름다운 별천지가 동굴 속을 지나서 펼쳐져 있을 줄은 몰랐다.

만일 동굴의 입구만 막는다면 문자 그대로 별천지라는 느낌이 들었다.

경치에 도취되어 얼마를 더 두리번거리던 양몽환은 도옥에게 다가가

 

「도형! 어떻게 된 일이오?」 ,

 

조용히 물었다.

그러나 도옥은 실성한 사람처럼 눈만 깜박거릴 뿐 말이 없다.

 

「웬일이오. 도형!」

 

  재차 묻는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숙이는 도옥이었다.

 

「양형! 없어졌구려.」

 

「뭐라고? 동사매가 없어졌다는 말이오?」

 

「양형을 찾으러 간 사이에‥‥‥」

 

「그럼 여기에 동사매가 있었다는 말이오?」

 

「그렇소. 기다리다 지친 모양이오.」

 

  과연 석실 안에는 동숙정의 그림자도 없었다.

 

  숙연한 빛으로 양몽환을 뒤따라 석실로 들어온 도옥은

 양몽환이 실망한 듯 한숨을 길게 쉬자 도옥도 한숨을 쉬었다.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찾으려고 나간지도 모르오.

양형, 함께 찾아봅시다.」

 

  순간, 양몽환은 여기까지 오는 길에 본 몇 명의 시체를 생각하고 등골이 오싹 했다.

 

「혹시 다른 파의 고수들이 납치해 간 것은 아닐까요?」

 

「아니, 여길 아는 사람은 없소.

그런 걱정은 없는데 혹시 우리를 기다리다 지치고 배도 고파 더 참지 못하고 나간 모양이오.」

 

「어디로?」

 

「이 부근에 없으면 백운협으로 갔을지도 모르오.」

 

  그러나 양몽환은 동숙정의 신변이 불안한 예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오는 길에 시체를 보지 않았다 해도 이토록 불길한 예감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중에서 우리를 만났을 텐데‥‥‥ 나는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드는군.」

 

「그런 걱정은 양형이 몰라서 하는 걱정이오. 그녀의 무공이 그렇게 약하지는 않소.」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 해도 많은 고수들이 달려들었다면?」

 

「하여튼 나가 봅시다.

그랬다면 싸운 흔적이라도 있지 않겠소?」

 

  석실을 나온 양몽환과 도옥은 집 주위를 면밀히 훑었다.

그러나 아무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양몽환은 심각한 얼굴로 도옥을 불렀다.

 

「제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용서해 주겠소?」

 

  도옥은 의아한 표정으로 양몽환을 저윽이 바라보며

 

「?‥‥‥ 무슨 말이오?」

 

  양몽환은 눈을 감았다 뜨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자리에 동사매가 없다고 해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우리 곤륜파 셋째 사숙의 사랑을 받던 동사매가 우리 파의 규율을 깨뜨리면서 까지

도형을 따라 나을 수 있었던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이오.

저의 생각으로는 동사매가 도형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데 그것이 사실일까요?」

 

  그러자 도옥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양형의 말을 들으면 뭐 내가 그녀를 유혹이라도 한 것 같구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동사매가 사문을 배반하게 된 원인을 알고자 해서 하는 말이오.」

 

「그럼 그녀의 사문 배반이 내 책임이라 이거요?

그래서 나에게 추궁하오?」

 

  치켜 올라가던 눈썹이 곤두섰다.

 

「어찌 도형에게 추궁을 하겠소?

도형도 동사매와 얼마 동안 지냈으니

동사매가 도형에게 무슨 말이라도 없었나 하는 것이오.」

 

「아무 말도 없었소.」

 

「그렇다면 도형! 오해하지 마시고 내 말을 들으시오.

나는 동사매가 우리 곤륜파에서 용서 못할 중한 죄를 졌다면 모르지만

일시적인 충격으로 스승과 우리 파를 배반한 것이라면 내가 다시 잘 권유해서

우리 문파로 되돌아오도록 하려는 것이 나의 뜻이오.」

 

  그제야 도옥은 조금 누그러지며 표정을 바꾸는 것이었다.

 

「양형의 마음을 알겠소.

그러나 당신의 힘으로 곤륜파에서 그녀를 받아 줄까 하는 것이오.」

 

「옳은 말씀이오.

같은 사람이 무슨 힘이 있겠소. 다만 주소저에게 부탁하면.」

 

「주소저?」

 

「예, 주소저에게 부탁해서 셋째 사숙에게 간청하면 혹시 잘 될지도 모르오.」

 

「내가?‥‥‥」

 

「그래도 도형은 동사매와 함께 지낸 처지인데 도형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소?」

 

  그러나 도옥은 담담히 웃을 뿐 아무 말도 없다. 참다못한 양몽환은

 

「두 분의 사이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도형이 동사매에게 잘 말씀해주시오.」

 

  그제야 도옥은 웃음을 거두며 정색했다.

 

「저는 모르겠소. 양형이 그녀를 만나서 잘 설득해 보시오.

다행히 그녀가 듣는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할 수 없는 일이오.」

 

  도옥의 말하는 표정에는 추호도 동숙정에 대한 관심이 없는 듯한 것이

양몽환은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서로 사랑하지는 않는 다는 얘긴가?‥‥‥ )

 

  불쑥 그들의 관계가 의심스러웠다.

 

「물론 내가 그녀와 동행하여 여기까지 온 이상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요.

그러나 그녀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하는 바로 그때였다.

 

  캄캄한 동굴 속에서부터 저벅 저벅 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도옥은 긴장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다가 양몽환을 끌고 급히 석실로 몸을 숨겼다.

  이윽고 발자국 소리가 커지며 동굴을 벗어 나오는 사나이가 있었다.

 

  긴 두루마기를 무릎 밑까지 내려뜨리고 죽장(竹杖)을 쥐고 다가오는 사나이는

 바로 화산(華山)파의 장문인(掌門人)인 팔비신옹 문공태였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도사(道士) 차림의 회색 도포를 입고 앞가슴까지 검은 수염이 늘어진

오십세 정도의 노인이 장검을 메고 나타나는 것이었다.

 

도옥과 양몽환이 숨어 있는 석실 앞에 와서 발을 멈춘 문공태는 뒤따라오는

도사 차림의 노인을 뒤돌아보며 유쾌하게 웃는 것이었다.

 

「하‥‥‥ 하‥‥‥정말 잘 만났소.

설산(雪山)파의 장문인과도 말했소만 지금 우리 파의 실력이

천용방을 능가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 못되오.」

 

  문공태의 거드름에 도사 차림의 노인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부 있겠소. 사실이 그러하오.」

 

「하‥‥‥ 하‥‥‥ 그래서 그까짓 귀원비급이야 둘째로 쳐 놓고

우선 천용방에서 파견한 고수들을 이 백운협에서 싹 쓸어버리자는 것이오.」

 

「좋은 말씀이오. 나는 근 이십 년간 무술계를 떠나 있어서 잘 모르는 일도 많소만

요즈음 천용방의 이창란이라는 놈이 구대문파를 초청하며 무술 대회를 연다는 소식이 들리오.

참 기가 막힌 일이 아니겠소?」

 

  자못 개탄하는 말투였다.

 

「그건 사실이오. 천용방이 무슨 실력이 있다고 무술 대회를 연다는 것인지 한심한 이야기요.

그뿐 아니라 이창란 수하에 있는 오기단주(五旗壇主)들의 망동(妄動)은 대강남북(大江南北)에

자자하오.」

 

  문공태와 도사차림의 노인은 서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석실 앞까지 와서는

양몽환과 도옥이 숨어 있는 문을 벌컥 열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문을 열던 문공태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던지 갑자기 긴장하며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누구냐?」

 

  이때 양몽환은 도옥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러자 도옥은 아무 소리 없이 기력을 운행하는 중이었다.

 양몽환도 눈앞의 사태를 주시하며 암암리에 기력을 운행 조절했다.

그것은 불의의 역습을 방비하자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석실 안에서 아무 기척이 없자 마음을 놓고 몇 걸음 옮기는데

갑자기 석실 밖에서

 

「하‥‥‥ 하‥‥‥ 하‥‥‥」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문공태와 노인이 뛰어 나가는 듯 잠시 소란했다가 조용해지고

이어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등형! 정말 잘 오셨소. 아주 훌륭한 친구를 소개하겠소.」

 

하는 것은 분명히 문공태의 소리였다.

 

  그리고 곧이어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당신은 점창삼안(點蒼三雁)의 첫째인 번천안이 아니시오?」

 

하는 물음에 도사 차림의 노인은

 

「과분한 말씀이오. 노도(老道)는 속명(俗名)을 마가홍(馬家宏)이라 하고

무술계에서 번천안이라 부르오,

그런데 당신은 설산(雪山)파의 장문인 등뢰가 아니시오?」

 

하고 번천안이 아는 체를 했다.

 

그러자 등뢰는 또 한번 너털웃음을 웃고는

 

「피차간 이름이야 어떻든 이렇게 만난 것이 기쁘오.」

 

하며 여전히 너털웃음을 웃는 것이었다. 

 

  그러자 문공태가 두 사람 가운데로 나서며 유쾌하게 웃었다.

 

「하‥‥‥ 하‥‥‥ 두 분이 다 겸손하시군,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이런 산중에서 만나게 되어 기쁘기는 하오만

성대하게 대접할 음식이 아무것도 없구려.」

 

  호들갑을 떨자 번천안이 앞으로 나섰다

 

「말씀이라도 고맙소.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귀원비급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나 좀 보고자 함이고

이창란을 만나 두 제자의 원수를 갚으려고 불원천리 찾아 왔소.」

 

  눈알을 굴리며 찾아온 이유를 말하는 것이었다.

번천안의 굳은 결심을 그의 표정에서 읽은 문공태는 손을 휘저으며 고개까지 가로젓는 것이었다.

 

「안 될 말씀, 번형의 말씀을 듣고 내가 뭐 천용방을 추키는 것은 아니나 번형이

이창란을 만난다는 것은 힘들 것이오.」

 

  그러자 번천안의 얼굴이 돌변했다.

 

「문형! 거 어떻게 하시는 말씀이오.」

 

「내 말을 잘 들어 보시고 화를 내시요 요사이 천용방 제자들의 무술도

 놀라울 만 하지만 그보다도 이창란 수하의 오기 단주(五旗壇主)들의 명수들이

실력도 쟁쟁하여 대단하오. 그런데 번형이 혼자당할 수 있겠소?

그러나 그건 그렇다 해 두고라도 천용방에서는 구대문파(九大門派)를 상대로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만일 번형이 도전한다면 무술계의 강적 하나를 손쉽게 해치웠다고

천용방에서는 좋아할 것이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소? 이 마가홍은 천용방의 상대가 못된다는 말씀이 아니오?」

 

「물론 소용없는 노릇이오. 그러나 단 한 가지 방법이 있지요.」

 

  번천안은 금방 생기가 솟으며 눈에는 광채가 났다.

그것은 문공태의 심중에 어떤 계략이 있음을 알아  챘기 때문이었다.

 

「문형의 고견을 들어 봅시다.」

 

  막상 번천안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자 문공태는 어깨를 들썩했다.

 

「하‥‥‥ 하‥‥‥ 내 그럴 줄 알았소.

 여기 등형과는 이미 합의가 되었지마는 우리 힘을 합해서 천용방을 무찌르면 어떻겠소?」

 

「우리들이?」

 

「그렇소, 우리들이 힘을 합하면 친용방 하나쯤은 썩은 기둥이오.」

 

「하‥‥‥ 하‥‥‥ 정말 훌륭한 고견이구려.」

 

「그래서 우선 이 백운협에 와 있는 천용방의 고수들을 여기서 깨끗이 해치웁시다.」

 

  어떠냐는 듯이 고개를 씩 드는 문공태에게서 시선을 옮긴 번천안은 등뢰에게 고개를 돌렸다.

 

「등형 생각은 어떠시오? 이 노도(老道)가 듣고 싶소.」

 

  그러나 둥뢰는 속셈이 따로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고약한 놈! 정말 교활한 놈이군.‥‥‥ )

 

  속으로 욕을 퍼붓고 있었지만 태연한척 하며 고개를 들었다.

 

「글쎄‥‥‥ 나는 오랫동안 서역(西域)에서만 있어서 무수계의 내 막을 잘 모르지 마는

문형의 말대로 사실이 그렇다면 나도 별로 다른 의견은 없소이다. 번형은 어떠신지?」

 

「노도(老道 )야 말로 무술계의 일은 아무 것도 모르오.

그러나 두 분께서 뜻이 그러하시다면 노도의 작은 힘이나마 함께 하겠소.」

 

  가만히 등뢰와 변천안의 말을 듣고 있던 문공태로서는 심사가 사나웠다

  (흥! 이놈들이 나는 모르지만 나는 모르지만 하면서 모든 책임을 나에게만 미는구나,

고약한 놈들 같은‥‥‥)

 

하면서도 자기의 계획대로 일이 순조롭게 되어 가는 것이 기쁘기도 했다

 

「그렇다면 등형과 번형께서는 이 문공태의 말을 믿는다는 말씀이오?」

 

  그러자 번천안과 등뢰는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무술계에서 쟁쟁한 문형을 믿지 않는다면 누굴 믿겠소?」

 

「과연 옳은 말씀이오. 지금 변형의 말씀과 동감이오.」

 

  등뢰가 번천안과 동조했다.

 

  문공태도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번천안과 등뢰를 번갈아 보며

 

「그렇다면 두 형께서는 나의 의견인 천용방에 대응하는 의견에 찬성 하시오?」

 

「어찌 여부 있겠소, 등형! 안 그렇소?」 

 

  변천안의 물음에 등뢰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공태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 알겠소. 천용방에서는 벌써 며칠 전에 고수들을 백운협으로 파견하여 잠복시키고 있소.

그러나 아직 그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방주(幇主) 이창란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소.

그래서 나는 이 기회에 선수(先手)를 쓰려는 계획이오.」

 

  그러나 등뢰는 고개를 흔들었다.

 

「천용방의 고수가 얼마나 많은데,

그까짓 한두 놈쯤 없앤다고 무슨 도움이 되겠소?」

 

  그러자 그 말도 일리 있는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문공태였다.

 

「그러나 등형! 잘 생각해 보시오. 비록 한두 놈이라고는 하지만

그 놈들이 여기 백운협에 숨어서 갖가지 사태를 천용방의 이창란에게 보고하는 것이오.

그러니까 이 놈들을 먼저 해치우면 그 다음 이창란이 올 때에도

 일은 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오.」

 

  번천안은 대 찬성이었다.

 

「과연, 문형다운 생각이오.」

 

  번천안의 호응에 사기가 으쓱해진 문공태는 의기가 양양했다.

 

  그러나 항상 몸을 움츠리는 것은 등뢰였다.

만사를 다 조심하자는 것이 그의 뜻인 모양이었다.

 

「문형의 생각도 좋기는 하오 마는 천용방의 고수들은 무술이 비범한데

어떻게 해치우려는지 계획은 되어 있소?

하나하나 격파해 나가지 않으면 큰일을 그르치는 수도 있소.」

 

「아, 그 말씀 참 좋은 의견이오. 나도 실패하면 일대 큰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오. 그러나 미리 생각해 둔 것이 있소.」

 

  번천안은 초조한 모양이었다.

 

「어떠한 생각인지 속히 말씀이나 해 보시오.」

 

「 번형! 서두르지 마시요. 내가 생각하는 것은 번형의 힘을 좀 빌리자는 것이오.」

 

「문제없소. 얼마든지 전력을 다해 도와 드리죠.」

 

  이와 같이 이들의 흉계는 착착 진행되어 갔다.

문공태는 절로 어깨가 올라갈 일이었다.

 

「그럼 두 분은 잘 보시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어떤지 보시오.」

 

  먼저 등뢰가 주위를 돌아보고 입을 열었다.

 

「형세가 험악해서 은밀한 행동을 하기에는 좋군!」

 

「예 그것이오. 등형이 바로 보았소.

우리 세파(三派)는 이 석실을 근거로 삼고 일을 벌여야겠소.

그리고 번형과 내가 먼저 귀원비급을 놓고 서로 거짓 싸움을 하면 천용방에서

몰려 올 것이란 말이요」

 

  그러자 번천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귀원비급? 어디 있어야 싸우죠?」

 

  문공태는 번천인의 표정이 우스운지 빙긋이 웃으며

품속에서 구슬함(函)을 꺼내 놓았다.

 

「? ‥‥‥‥‥」

 

  눈이 둥그레진 번천안과 등뢰를 번갈아 보며 문공태도 호탕하게 웃었다

 

「하‥‥‥ 하‥‥‥ 여기 귀원비급이 있소.

이만하면 천용방 놈들이 유인되겠소?」

 

하며 함의 뚜껑을 여는 것이었다.

 

  과연 그곳에는 글자도 또릿하게

 

  <歸元秘?(귀원비급)>

 

  네 글자가 금빛을 뿜는 것이었다.

 

  비록 위조한 귀윈비급일 망정 수백 년 동안 전설로 내려오는

신비한 무술의 중보(重寶)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닐 수는 없었다.

눈알이 휘둥그레진 번천안과 등뢰는 다투듯 문공태가 내놓은

가짜 귀원비급에 경탄을 금하지 못하고 열심히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가히 속을 만큼 정교한 솜씨로 만들어진 귀원비급이었다.

그러나 번천안과 등뢰가 노는 꼴이 또한 가관이었다.

서로 먼저 만져 보려고 어깨를 밀치며 달려들자

이건 또 큰 재산이나 되는 것처럼 문공태는 으시대는 것이었다.

「아하! 왜들 그러시오. 한 분씩 차례차례 보시오.」

 

  그러자 번천안이 먼저 양보했다.

 

「등형이 먼저 보시오. 나는 나중에‥‥‥」

 

  그러자 등뢰도 질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완강히 내저으며 지금까지

서로 보려던 다툼은 언제 그랬느냐는 표정이었다.

 

「아니, 내가 나중에 보겠소. 번형이 먼저 보시오.」

 

  한편에서 주인의 입장으로 굉장한 선심이나 쓰는 듯 거드름을 피우던

문공태는 변천안과 둥뢰가 비록 양보를 하지만 암암리에 기력을 운행하는 것을

눈치 채고는 땅을 치고 통곡하리만치 후회했다.

  (아하!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힘을 합치자는 말을 꺼내지 않는 걸‥‥‥

잘못 했군‥‥‥ 그랬으면 이 두 놈이 죽어 자빠지도록 서로 싸울 걸‥‥‥

그러면 나는 앉아서 강적 하나를 깨끗이 처리할 수 있었는데 ‥‥‥ )

 

  그러나 늦었다.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편, 서로 양보하느라고 아옹다옹하던 번천안과 등뢰를 지그시 바라보던 문공태는

 

「두 분이 다 겸손해서 양보만 하시는군. 그럼 내가 펴 보이겠소.」 

 

  두 사람 가운데로 들어가 가짜 귀원비급의 책장을 펼쳤다.

 

「그런데 말씀이오. 비록 이것이 가짜이기는 하지만 기록된 무술은

그래도 제법 신중을 기해서 쓴 것이오. 아마 졸장부들에겐 무술을 연마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오.」

 

  친절하게 주석까지 달았다.

 

  과연 번천안이나 등뢰가 보아도 알 수 있는 여러 가지의 무술이 기록되어 있기는 했다.

그러나 무술이라는 것이 무술계에 나서면 누구나 눈 감고도 배울 수 있는 유치한 무술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자못 심각했다.

 

「그러나 문형! 이것도 수십 년이 지나면 무술계에 또 하나의 비급이 될지도 모르오.」

 

  변천안의 의미심장한 말에 등뢰가 맞장구를 쳤다.

 

「옳은 말이요 지금 번형의 말처럼 귀원비급 이상으로 유명한 책이 될 것이오.」

 

  문공태는 흐뭇했다.

비록 자기의 솜씨로 만들어진 가짜 비급이지만 이구동성으로 경탄하는 데는

절로 어깨춤이 나올 판이었다.

 

「부끄럽소. 재주 없는 손으로 쓰느라고 고생도 했지요.」

 

  겸손의 말도 할 줄 아는 능구렁이 문공태였다.

그러자 등뢰가 다시 심각해졌다.

 

「과연 가히 속을 만 하오.

그러나 천용방을 유혹하여 여기서 우리가 싸우다 다른 파에게 진짜 비급을 뺏기지는 않을까

걱정이오.」

 

  그러나 문공태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걱정 없소. 지금 천용방의 실력이 제일 강하오.

그런데 우리 세 파가 합동으로 천용방을 물리치면 그 외에 다른 자는 얼씬도 못할 것이오.

그러면 진짜 비급이 어느 파의 누구 손에 있다한들 겁낼 것이 무엇이 있겠소.

우리 세 파를 당해내지 못할 다른 파에서는 비급을 가질 엄두도 못 낼 것이오.」

 

  등뢰는 여전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문형! 우리 세 파가 천용방과 일대 사투를 벌려 우리가 이긴다 해도

그때는 이미 우리들도 부상을 당하거나 아니면 지칠 대로 지칠 것이오.

만일 비급이 다른 파에 들어갔다면 무슨 힘으로 또 싸움을 하겠소?」

 

  그러자 문공태는 어이없다는 듯이 크게 소리쳐 웃는 것이었다.

 

「하‥‥‥ 하‥‥‥ 등형! 걱정 마오.

만일 천용방에서 개별적으로 달려든다면 숨어서 협공할 수 있고

또 떼를 지어 일제히 몰려온다면 화공(火攻)법으로 불을 지르면 깨끗하오.

부상이나 지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간단한 대답이고 계획이었다.

 

  이때 번천안이 나섰다.

 

「 화공이라?」

 

「그렇소. 불을 지르면 간단하오.」

 

「어떻게?」

 

  문공태는 동굴의 입구를 가리키며

 

「자, 보시오. 입구는 저렇게 작소.

우리가 천용방을 여기까지 유인한 다음 굴 입구를 막고 불을 지르면 제 놈들이 어디로 나가겠소?」

 

문공태의 묘책에 번천안과 등뢰는 다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굴 입구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었다.그러자 문공태의 말이 다시 계속되었다.

 

「말은 쉬울 것 같지만 우리들의 행동이 기민하지 않으면 안 되오.

  즉 천용방 놈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여기까지 말한 문공태는 갑자기 번천안과 등뢰의 귀 하나씩을 잡아당겨

입 가까이 대고는 속삭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번천안과 등뢰

그리고 문공태는 일제히 음흉스럽게 웃는 것이었다.

 

「히 ‥‥‥ 히 ‥‥‥」

 

「그럼 그렇게 결정합시다. 등형께서 너무 수고가 많소.」

 

「천만에, 천만에, 힘껏 하겠소.」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모든 계획을 끝낸 세 명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석실 앞에서 굴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겨가는 것이었다.

 

  한편, 지금까지 석실 안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의 흉계를 듣고 있던

양몽환과 도옥은 그들의 말소리가 그치고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자 숨소리를 죽이며

밖의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어디로 갔는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게 되자

조심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마 그들은 굴속으로 들어가 동굴을 벗어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방을 휘둘러보던 양몽환은 도옥을 가만히 불렀다.

 

「도형! 문공태가 작당하여 귀방을 해칠 모양이오.」

 

  그러나 도옥은 태연했다.

 

「흥! 얼마든지, 겁낼 것 없소.」

 

  자신이 만만한 언성으로 일소에 붙이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 문공태의 말은 귀방에서 이곳에 첩자들을 잠복시켰다는데 사실이오?」

 

「왜요? 나도 첩자 같소?」

 

「아니,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지만 하여튼 많은 첩자가 온 것은 사실인 것 같구려.」

 

「그런지도 모르지 .」

 

「도형은 모르는 일이오?」

 

하고 묻는 양몽환의 말 속에는 여러 가지의 의미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애초 도옥이 이곳에 나타났을 때부터 무슨 일로 왔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고 그의 행동이 어딘가 모르게 불안정하고

허풍을 떠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옥의 대답은 엉뚱했다.

 

「그런 것은 내 알바 없소 다만 양형을 문병(問病)하려고 천리를 달려 왔을 뿐이요.」

 

  순간, 양몽환은 무거운 철퇴로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입안이 씁쓸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말로는 감사함을 사례했다.

 

「도형의 깊은 우정에 감복할 따름이오.

그런데 어떻게 저의 거처를 아셨는지?‥‥‥」

 

「하‥‥‥ 하‥‥‥ 정말 예민하시군,

그러나 양형!

우리 천용방에서 모르고 지내는 일이 있는 줄 아시오?

양형의 거처뿐 아니라 각 파의 고수급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천용방의 감시를 벗어나지는 못하오.」

  양몽환은 어느 정도 도옥의 말이 수긍되기도 했다.

사실이 그렇다면 도옥이 자기를 찾아 문병 차 온 것은 감사해야할 일이지

추호라도 의심할 것이 아니었다.

의심하는 양몽환 스스로가 도옥에게 죄를 범하고 있다는 자책감도 드는 것이었다.

  이러는 동안 양몽환의 심각한 얼굴을 바라보던 도옥은 양몽환을 불렀다

 

「양형! 지금 그들의 말을 들으면 그냥 들어 넘길 수 있는 말이 아닌 것 같소.

필시 무슨 비상한 사태가 벌어질듯 하오.

양형께서는 곧 돌아가시오.

공연히 여기서 화를 당하지 마시고.」

 

  친절한척 하는 도옥은 양몽환의 신변을 걱정하여 먼저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위험이 닥쳤다 하더라도 그냥 돌아설 수 없는 양몽환이기도 했다.

 

「무슨 말씀을‥‥‥‥ 도형은 저를 위해 수 천리 길을 문병 차 왔는데

어찌 내가 돌아갈 수 있겠소. 귀방을 위해 작은 힘이라도 바치겠소.」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우정의 말이었다.

 

「감사하오. 그러나 양형 에게까지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소.

그러 나 양형! 지금 문공태의 말대로 정말 귀원비급이 이곳 백운협에 있을까요?」

 

「글쎄 저도 언젠가 한번 보기는 보았으나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 인지도 알 수 없고 또 이 넓은 백운협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소」

 

「음‥‥‥ 하여튼 이상한 일이군.

문공태 같은 장문인이 거짓을 말 하지는 않을 것이고‥‥‥

필시 위급한 사태가 벌어질 것 같소.」

 

「이 백운협에 각 파의 고수들이 얼마나 잠복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사태가 심상치 않을 것 같소.」

「사실이오. 양형! 양형이 우리 천용방을 위해서 나와 함께 싸워주겠다는 것은 고맙소.

그러나 양형은 아직 건강도 회복되지 못한 몸으로 싸움에 섞인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오.

내 생각 같아서는 먼저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그러자 양몽환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보고 들은 대로 주약란에게 말하여 그때 가서

속수무책으로 당황하지 않도록 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무공은 거의 다 쟁쟁하여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하다는 것을 계산하고는 도옥을 불렀다.

 

「내가 먼저 가겠소이다.」

 

하고는 도옥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 길로 몸을 돌렸다.

 

  금환이랑 도옥은 양몽환의 뒷모습을 멀리 바라보며 야릇한 웃음을 띠웠다.

그의 머리 속에는 한가지의 묘안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음‥‥‥ 굴속은 매우 어둡고 캄캄할 것이다.

곧 뒤따라가서 그를 죽이자.

그리고 시체를 깊은 계곡에 처넣으면 아무 흔적도 없겠지‥‥‥

더구나 지금 강적이 모여 살기등등한 이때 하림이 의심을 하더라도 변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음흉스러운 생각이 떠오르자

도옥은 즉시 경공신법을 발휘하여 양몽환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한편, 뛰어 달리던 양몽환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려다 이상하고

불길한 예감이 뛰던 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자기도 모르게 뛰던 걸음을 멈추고 흘깃 뒤를 돌아보자

비호(飛虎)처럼 뛰어 쫓아오는 도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때 도옥은 이미 양몽환의 뒤를 거의 따라가다 양몽환이 갑자기서서 돌아서자

뛰어가던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하마터면 양몽환과 정면으로 부닥칠 뻔 하였다.

 이 의외의 일로 도옥의 음모는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역시 세밀하고 사려가 깊은 사람이라

양몽환의 옆을 용하게 스치면서 다급한 어조로 변명 아닌 변명을 던지는 것이었다.

 

「양형! 내가 한 발 먼저 가서 우리 방(幇)에 통지해야겠소!」

 

하는 말을 남기고는 그대로 굴속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이상하고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리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어찌된 영문인지 알길 없는 도옥의 행동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황급하게 달려가는 도옥을 제지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이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의 시간은 매우 긴급하여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천용방 제자들의 생명이

더욱 많이 희생될 것이 확실했다.

양몽환은 백운협 사방에 잠복하고 있는 적을 생각하고는 급하고 초조한 마음을 진정할 길 없어

재빨리 기력을 아랫배에 집중하고는 도옥의 뒤를 따라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옥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종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숨차게 앞으로 뛰어 달리는 양몽환의 머리 속은 어지럽기만 했다.

지금까지 일어난 사사건건을 주약란에게 알려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으로

꽉 차 있었다.

그는 병을 않고 난 허약한 몸도 가리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하여 달려 백운협 입구에 다다랐다.

비 오듯 땀이 흐르는 양몽환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뛰던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양몽환이

어디서인가 코끝을 간질이는 향긋한 냄새에 도취되어 스르르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내쉬던

바로 그때 부드럽고 얇은 손수건으로 양몽환의 이마를 씻어 주는 손길이 있었다.

 그리고는 나직하고 다정스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소곤거리는 것이었다.

 

「아직 몸도 회복되지 못한 당신이 웬 일이어요?

이렇게 무리해서달리면 큰일 나요.

당신은 정말 몸도 아끼질 않는군요!」

 

주약란이 있었다.

 

  양몽환은 주약란이 씻어주는 대로 얼굴을 맡기고 그녀의 다정스러운 마음에는

새삼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몽환은 감았던 눈을 떠 주약란에게 눈웃음을 보냈다.

고맙고 또 감사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양몽환의 유일한 감사의 표시였다.

주약란은 부드러운 손길로 양몽환의 이마와 목덜미의 땀을 씻어주며 어린애를 달래듯,

아니 나무라듯 조용조용히 양몽환의 귀에 입을 대는 것이었다.

 

「왜 이런 무리한 행동을 하세요?

저는 당신이 걱정되어 숨도 제 대로 못 쉬던 중이에요.

걱정하는 것도 몰라주고‥‥‥」

 

「제가 무슨 위험한 일이라도 당할 뻔 하였소?

저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양몽환의 의아해하는 물음에 주약란은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흘겨보는 것이 없다.

 

「당신이 알고 계셨다면 왜 제가 걱정하겠어요?」

 

  주약란의 말뜻을 알길 없는 양몽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금까지 도옥과 함께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줄곧 도옥과 같이 있었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과는 만난 일도 없는데‥‥‥

그렇다면 도옥을 말하는 것일까‥‥‥)

 

  좀 전의 이상하고 불길하던 예감을 아울러 생각하고 주약란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며

정말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때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나직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바로 이곳이야, 이곳에 있었군!」

 

  그리고는 옷자락을 스치는 소리가 나며 맨발의 백의시녀(白衣恃女)네 명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양몽환과 주약란을 에워싸는 것이었다.

 

  시녀들이 기력을 운행하여 싸울 기세로 에워싸는 것을 바라보던 주약란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돌아섰다.

 

「너희들은 무슨 일로 포위하느냐?」

 

  그들 중 나이가 가장 많은 듯한 한 시녀가 몸을 굽히며 공손히 말했다.

 

「시녀들은 소저의 분부를 받들어 이 나쁜 남자를 찾던 중입니다.

그런데 소저와 같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너희들의 소저가 이 분을 찾아서 어떻게 하겠다더냐? 소저는 어디 있지?」

 

  앞서 말한 백의 시녀는 양몽환을 가리키며

 

「이 나쁜 남자가 우리 소저의 귀원비급을 훔쳤어요.」

 

  그러자 양몽환은 황급히 나서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뭐라고? 언제 소저의 귀원비급을 훔쳤다는 말이요?」

 

  네 명의 시녀도 양몽환의 서슬이 시퍼런 반문에 똑같이 냉소를 터뜨리며

양몽환을 노려보는 시선엔 증오가 가득했다.

 

  양몽환이 그녀들의 차가운 시선을 외면하며 돌아서자

주약란이 시녀들을 가로 막고 나섰다.

 

「소저는 어디 있느냐? 나하고 가보자!」

 

  시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저희들의 소저는 그의 오행미종보를 뚫을 수 있는 신법을 가르쳐 주신 후

어디로인가 가버렸어요.」

 

「그럼 빨리 찾아오라. 내가 찾는다고 전해요!」

 

  그러나 그녀들은 여전히 한 곳에 서서 꼼짝하지 않았다. 

주약란은 눈썹을 치키면서 성난 어조로 재촉했다.

 

「빨리 소저를 찾아오라는데 못 들었어!」

 

  그제야 시녀들은 일제히 입을 여는 것이었다.

 

「귀원비급을 훔친 사람을 찾아 잡아 오라는 소저의 분부였어요.」

 

  주약란은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대합하는 시녀들을 노려보다

손을 들어 한 수 내려치려는데 양몽환이 급히 막고 나섰다.

 

「잠깐! 소저의 분부라면 이들을 나무랄 수는 없을 것 같소. 이들이야 무엇을 알겠소!」

 

  네 시녀들을 위하여 양몽환이 변명했다.

그러자 시녀들은 서로 쳐다보며 생긋 웃었다.

  주약란은 양몽환의 제지에 주춤 물러서며 눈을 내려 깔았다.

 

「동생이 당신을 의심하고 있는 모양이죠?

그러나 저는 당신이 귀원비급을 훔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고 또 확신해요.」

 

  양몽환은 낭패한 표정으로 주약란의 말을 받았다.

 

「분명히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오.」

 

「그렇다면 그녀가 거짓말을 할리도 없잖아요?

지금 어느 파를 막론하고 귀원비급에 혈안이 되어 있는데

누구의 손에 들어 있든 간에 그것을 찾기 전에는 당신이 의심받을 것은 틀림없어요.」

 

  양몽환은 머리를 숙인 채 심각한 표정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만일 우리가 그녀를 찾아가 해명하지 않는다면 그녀의 의심을 풀 수는 없을 것이오.」

 

「이상한 일이군, 왜 당신이 의심을 받게 됐죠?」

 

  주약란의 의아해하는 표정에 양몽환 역시 의아해하고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얼마 동안 잠잠히 서 있던 양몽환은 화제를 바꾸어 자기가 여기까지 달려온 사유를 말했다.

 

「무술계의 각 파 고수들이 이 백운협으로 모여 여러 곳에 잠복해있는 모양 같소.

속히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위험할 것 같소.」

 

  주약란은 입술을 깨물고 양몽환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다 고개를 끄덕 거렸다.

 

「알고 있어요. 다만 이렇게 빨리 일이 벌어질 줄을 몰랐다 뿐이에요.

또한 소접 동생이 행방불명되었을 때 이미 귀원비급이 누설됐어요.

그런데다 그녀는 그 몇 권의 책이 귀중하다거나 무수계의 보물이라는 것을 모르고

소홀히 간직하다 도적맞았음이 확실해요!」

 

「그렇다면 빨리 대책을!」

 

「음‥‥‥ 여기 있는 네 명의 시녀들도 무공은 쟁쟁하지만 경험이 없어서 ‥‥‥

그러나 이제 없어진 귀원비급이 남의 손에 들어간 이상 신중을 기해서 찾아야 해요.

누가 훔쳐갔는지 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찾아야겠는데‥‥‥」

 

  그러자 네 명의 시녀는 주약란에게 다가오며 재촉했다.

 

「그러시면 속히 가셔야해요! 저의 소저를 만나서 일을 해결하세요!」

 

  주약란은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던 그녀는 갑자기 생기 있는 얼굴로 양몽환을 바라보며 힘차게 말했다.

 

「같이 가요!」

 

  그러나 양몽환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것보다 먼저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쟁쟁한 강적들을

물리칠 대책을 세우는 것이 급해요.」

 

  양몽환의 갑작스러운 제의에 주약란이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양몽환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제가 혼자 가면 조소저가 저를 해칠까 염려하시지만

같이 간다면 더욱 의심할지 몰라요.

더구나 그녀의 무공으로 저를 저지하려면 힘들이지 않고

저를 사지(死地)에 몰아넣을 수 있을 것이오.」

 

「정말 동생의 무공은 당신보다 강해요.」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저와 당신이 평생을 같이 있을 수 없는 이상

조소저가 당신의 얼굴을 봐서 저를 처벌하지 못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어요.

다만 저는 내 양심대로 귀원비급을 훔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만 하면 될 거요.」

 

  주약란은 서글프게 웃으며 양몽환을 바라보았다.

 

「평생토록? 글쎄 ‥‥‥」

 

「뜻대로 안 되는 세상사 너무 깊이 생각할 것은 없어요.

당신은우선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백운협에 잠복해 있는 고수들을 처치할 준비를 해야 해요.」

 

  이러는 동안 주약란의 행동만 지켜보던 네 명의 시녀는

초조한 기색으로 주약란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주약란은 가만히 한숨을 내어 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 말씀이 옳아요.

지금 당신을 처치하지 않는 것도 저 때문이에요.

그러나 그녀가 내말에 순종하는 것은 뜻이 다른데 있기 때문이에요.

저도 동생의 무공을 당하기는 힘들어요.」

 

「그럼 저 혼자 가겠소. 당신은 여기서 대책을 세우시오.」

 

  주약란은 마지못해 허락은 하는 것이지만 사지(死地)로 보내는 애인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재삼 당부하는 것이었다.

 

「너무 과격하게 행동을 하지 말아요. 조심해요.」

 

  양몽환은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었다.

 

「그분은 저의 구명은인(救命恩人)입니다.

참고 또 참겠습니다. 양보도 하구요.」

 

  주약란은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 듯 양몽환의 앞으로 다가갔다.

 

「비록 그녀에게서 모욕을 당해도 그녀와 다투지는 말아요.」

 

  그러자 양몽환은 약간 언성을 높이며 이의(異意)를 표했다.

 

「주소저! 그래도 사나이인데 너무 지나치게 모욕하면 어찌 참겠소?」

 

  주약란은 착하고 어진 여자의 본성으로 돌아가 양몽환에게 호소했다.

 

「당신이 남자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에요.

여자의 모욕이라고 참지 못한다면 종내 어떠한 사태가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에요.

만일 실수라도 한다면 누구보다 하림 사매가 슬퍼할 거예요. 참고 다투지 말아줘요. 네?」

 

「너무 염려하진 말아요. 소저 말씀대로 따르겠소.

조소저도 역시 사리가 있는 사람인데 별다른 일이야 있겠소?」

 

  주약란의 애원에 양몽환은 불끈했던 자기의 성질을 죽였다.

사실 양몽환의 무공도 무공이지만 조소접 소저와는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실력을 잘 아는 양몽환 자신이었고 주약란이었다.

  주약란은 약간 마음을 놓았다.

말로는 하림 사매를 위해서 양몽환이 죽지 않기를 원하는 것이었지만

양몽환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하림에게 지지 않는 주약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림을 빙자해서 한말에 불과했다.

 

「당신이 자신을 아낀다면 저도 마음을 놓아요.

비록 동생이 당신에게 불만이 있다 해도 모욕적인 행동은 안할 거예요.

다만 당신의 냉정한 태도가 불안해요.」

 

하고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여는 주약란의 음성은 떨리고 차분히 가라앉은 낮은 목소리였다.

 

「당신이 상처를 입은 후 이십여 일 동안 혼미상태에 빠져 있을 때에도

하림 동생은 밤낮 당신만 걱정하고 있었어요.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고‥‥‥

하림 동생의 당신에 대한 사랑은 정말 얼마나 깊은지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그런데 저는‥‥‥」

 

  말끝을 흐리는 주약란의 입술은 꼭 다물어?져 있었다.

 

  양몽환은 주약란의 애절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다 하림과 주약란 사이에서

 

  (나는 어떻게 처신하면 좋을 것인가‥‥‥)

 

  번민 속에 빠져 깊은 침묵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때, 어디선가 멀리서 가늘게 들려오는 처참한 비명 소리가

무거운 침묵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 ‥‥‥‥‥」

 

  양몽환과 주약란은 동시에 서로 바라보며 귀를 세웠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 같소.

속히 방비 태세를 갖추어야 할 것 같소!」

 

  양몽환의 다급하고도 엄숙한 말에 주약란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정한 시선으로 양몽환을 바라보았다.

 

「당신도 조소저를 만나거든 속히 이곳으로 오라고 전해 줘요.」

 

하고는 일약 몸을 날려 수장(數丈 ) 밖으로 사라져 갔다. 

 

  양몽환은 사라져 가는 주약란의 뒷모습에서 강렬한 사랑을 느끼며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옆에 서 있는 네 명의 시녀들에게로 몸을 돌렸다.

 

「미안합니다. 조소저가 어디에 계신지, 함께 가실까요?」

 

  시녀들은 서로 눈짓을 한 후 양몽환을 앞뒤로 둘러쌌다.

그리고는 왼쪽 산봉우리로 향했다.

  산봉우리를 가볍게 넘은 일행은 푸른 잔디가 깔려 있는 곳을 지나

몇 그루의 소나무가 서 있는 곳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에는 구슬 비파(琵琶)를 안고 소나무에 등을 기댄 채 둥실 둥실 떠가는

하늘의 횐 구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백의(白의) 조소저가 앉아 있는 것이었다.

네 명의 시녀와 양몽환이 조소저 앞에 다가섰어도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던 조소저는

시녀의 가늘고 조용한 기침 소리에 힐끔 바라 볼뿐 다시 하늘의 구름으로 시선을 옮기고 말았다.

그러한 그녀의 태도는 고즈넉이 들에 핀 한 송이의 횐 국화꽃처럼 고고하고 청아했다. 

얼마동안 조소저의 처분 아닌 분부를 기다리다 못한 시녀중의 한 소녀가 허리를 굽히며

한 걸음 나셨다.

 

「소저를 뵙겠다고 자청하기에 결박(結縛)하지 않고 데려 왔습니다.」

 

  그제야 조소접은 서서히 시선을 옮겨 양몽환을 노려보고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내 생각대로 과연 나쁜 사람임을 나타내었군!」

 

  양몽환은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담담한 어조로 조소접의 말을 곧 이어 받았다.

 

「저의 구명은인(救命恩人)인 조소저께서는 무슨 일로 저를 오해하고 계신지 알 길이 없소이다.

부디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순간, 조소접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오해라고요? 천만에!

저의 귀원비급을 훔치고도 그런 뻔뻔스러운 말이 나와요?」

 

  그러나 양몽환은 이미 이러한 일을 각오한 것처럼 놀라거나 흥분하지 않고 조용조용히 따졌다.

 

「어떠한 이유로 제가 그런 오해를 받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민강(泯江) 배 위에서 소저의 귀원비급을 한 번 보았을 뿐인 제가

언제 또 볼 기회가 있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훔친다는 것에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는 양모인(楊某人)입니다.」

 

  조소접은 기어이 분통이 터지는 듯 몸을 가늘게 떨며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

 

「그럼, 란(蘭)언니 방에 우리 세 사람 이외에 또 누가 있었다는 말이에요?

당신이 아니라면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말인가요.」 

 

  순간, 양몽환의 뇌리에는 번개 같이 지나가는 도옥의 그림자를 붙잡았다.

 

  (그렇다. 그때 주약란의 방에서 나올 바로 그때,

손수건을 놓고 나왔다고 다시 들어갔던 도옥‥‥‥ )

 

  양몽환은 어느 정도 짐작되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럼 그 귀원비급은 소저가 저를 치료하던 석실에 있었다는 말씀이오?」

 

  조소접은 양몽환을 치료하던 석실이라는 말을 듣자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며 그때 나체의 몸으로 흥분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자 조소접은 부끄러움과 수줍음을 감추지 못하고 대답대신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러한 그녀의 태도는 더 이상 양몽환 앞에서 큰 소리로 묻는다는 것이 쑥스러운 것

같아 끄덕거리던 고개를 더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대 답했다

 

「그래요‥‥‥」

 

  만일 주약란의 다급한 제지가 없었으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양몽환과 조소접 자기는 서로 남남이 아닌 밀접한 관계가 되었을 것이었다.

그것이 일보(一步) 직전에 무너져 버렸지만.

조소접은 생각할수록 부끄럽기만 하여 얼굴을 바로 들 수조차 없었다.

 

양몽환은 자기의 생각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분명히 도옥의 소행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양몽환은 한 쪽 손바닥을 주먹으로 탁 치며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다.

 

「분명히 그의 짓이군!」

 

  순간, 조소접은 눈을 크게 뜨며 다그쳐 물었다.

 

「누구? 란언니라는 말이에요?」

 

  양몽환은 잠시 주저하다가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려다 주춤하고 번민 속에 빠졌다.

 

  (도옥의 짓이 틀림없다.

그러나 증거를 확실히 잡기 전에는 단언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어찌 섣불리 이야기를 해서 오해하고 도적놈 취급을 할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 조소접은 양몽환의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 사람이란 주약란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왜 대답을 하지 않는가? )

 

  이렇게 생각하자 의심은 더욱 굳어져 양몽환을 한 번 바라본 후 외면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란(蘭 )언니의 출신성분(出身成分)이 얼마나 존귀 하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에요.

아무러면 란언니가 귀원비급을 훔치겠어요.」

 

  양몽환은 어리둥절했다.

 

  자기가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주약란이라고 단정한 조소접의 오해를 풀어주지 못하고

망설였던 것을 뉘우쳤다.

양몽환은 손을 들어 흔들며

 

「아니! 조소저께서는 오해를‥‥‥」

 

했으나 조소접은 자기의 생각을 굽히지 않는다.

 

「다 알고 있어요.

란언니를 의심케 하여 란언니와 나의 사이를 이간시켜 싸움을 붙이려는

당신의 꾀에는 넘어가지 않아요. 란언니는 귀원비급을 훔칠 사람이 아니에요.」

 

  낭패한 표정으로 조소접의 말을 듣고 있던 양몽환은 쇠방망이로 머리를

호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입 안이 썼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제가 언제 누구라고 말을 했습니까? 제 말을 들은 다음에 말씀하십시오.」

 

「무슨 말인지 하세요. 그렇지만 란언니는 아니에요.」

 

「저는 아직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조소저께서 란언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더 이상합니다.

저는 저대로 한 가지 생각이 있어서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 그럼 누구죠?」

 

「누구라고는 지금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앞으로 사흘간만 여유를 주시면 귀원비급을 훔친 범인을 잡아 오겠습니다.」

 

  그러자 조소접은 당치도 않다는 듯이 냉소하는 것이었다.

 

「흥! 내 앞에서까지 당신은 꾀를 쓰려고 하는군요.

재간은 피우지 마세요.

사흘 동안의 여유를 주면 범인을 찾아내겠다지만 사흘 동안에

당신이 유유히 달아나 종적을 감춘다면 이 넓은 천지 어디를 가서 당신을 찾죠?」

 

  양몽환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어이없다는 듯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l허‥‥‥ 허‥‥‥ 그렇다면 소저께서는

제가 귀원비급을 훔친 놈으로 인정하는 모양이군요.」

 

하는 말에 조소접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태도다.

 

「물론이지요. 란언니가 훔치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믿는 사실이고

그렇다고 내가 거짓말을 꾸며 내지도 않은 다음에야 세 사람 밖에 없던

석실에서 당신이 아니면 누구겠어요?」

 

「허‥‥‥ 허‥‥‥ 천만에, 천만에!」

 

「웃음으로 모면하려고 하지 마세요.

제가 귀원비급이 없어진 것을 알고 찾을 때 당신은 벌써 없어졌어요.

대체 어디에 가졌었죠?」

 

하고?는 대답은 들으나마나 뻔하다는 듯이 양몽환을 흘기고는 다시 계속했다.

 

「틀림없어요. 당신은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귀원비급을 훔쳐 은밀한 곳에 숨기느라고 나갔죠?」

 

  할 말이 없는 양몽환이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서서 누명을 함빡 뒤집어쓰고 있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한 시녀가 나서며

 

「우리가 이 분을 발견했을 때 주소저와 같이 이야기 하고 있었어요.」

 

했다

 

조소접은 시녀의 말을 곧 받았다.

 

「란 언니는 아직 이 사람이 나쁜 줄 모르고 말했겠지만 장차 아시면 그와 말도 안할 것이다.」

 

  양몽환은 쓰디 쓴 웃음을 웃었다.

 

「제가 귀원비급을 훔쳤다면 입이 백 개라도 변명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저의 목숨은 소저께서 구해준 목숨 할 수 없이 도로 소저에게 돌려 드려야겠군요.」

 

  조소접은 양몽환의 장난기 어린 말에 미소를 흘리며

 

「비록 제가 구해준 목숨이지만 란언니의 얼굴을 봐서 더구나 저는 란언니와 친구,

당신도 란언니와 친구, 이런 관계로 목숨을 붙여 두는 거예요.」

 

하고는 양몽환을 맞바로 바라보며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 귀원비급은 저의 어머님의 유물(遺物)이에요.

그 책 속에 기록된 무공은 매우 오묘한 절학으로 만일 좋은 분이 가져갔다면 모르지만

당신 같이 나쁜 사람이 가져갔다면 이 세상에 해가 막심할 뿐 아니라 살상(殺傷)이

그치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꼭 귀원비급을 찾아야 하겠어요.」

 

  양몽환은 갈수록 답답하고 화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당신은 제가 귀원비급을 훔친 사람이라 단정하고 무술계에 해를 끼칠까

두려워하는 모양입니다마는 정말 이해할 수 없군요.

이왕 없어진 귀원비급을 제가 훔치지 않은 이상 별로 걱정은 없습니다.」

 

「흥! 그래도 변명하시는군요. 훔쳤으면 내 놓으세요.」

 

「저는 정말입니다. 제 손에 없다는 것은 하늘에 맹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가졌던 간에 살상을 미연에 방지해야 하겠습니다.」

 

「잘도 아시는군요. 어됐든 그 방지책이라는 것은 무엇이죠?」

 

  양몽환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말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조소저께서는 저를 범인으로 단정하고

살상을 염려하고 계신데 당신의 무공은 일장(一掌)으로 저의목숨을 앗아갈 수 있습니다.

만일 조소저께서 저를 죽이기만 하면 살상에 대한 걱정은 안하셔도 되겠군요.」

 

  조소접은 냉담한 표정으로 양몽환을 바라보았다.

 

「그런 방법은 저도 생각했어요.

그러나 당신을 죽이면 란언니가 슬퍼할까 걱정되어서 그만 두겠어요.」

 

  양몽환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눈을 감았다.

그러는 그의 얼굴은 점차로 붉어지며 비장한 각오를 하는 듯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까지 의심을 받고 사느니 보다 조소접에게서 모욕을 당하기 전에 차라리

깨끗하게 자결해 버리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주약란의 얼굴을 봐서 나를 살려 둔다면 이보다 더 심한 모욕이 또 있을까?

깨끗이 자결하여 귀원비급을 훔치지 않았다는 표시를 보이자‥‥‥ )

 

  여인들에게 모욕을 당하느니 의젓이 내 손으로 자결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도 몰랐다.

  이렇게 생각하고 또 굳게 각오하자 죽음이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양몽환은 감았던 눈을 뜨고 조소접에게로 한걸음 다가섰다.

 

「조소저께서 란언니의 책망을 두려워하여 저를 죽이지 않겠다면 할 수 없이

저 스스로 자결하여 도적의 누명을 벗고 저의 깨끗함을 천하에 알리겠소이다.」

 

하고는 몸을 돌려 서서히 걸어 나갔다.

그러자 이와 반대로 양몽환이 이곳을 도망하려는 줄로 생각한 네 명의 시녀는

일시에 사방으로 흩어져 양몽환을 에워싸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초연한 자세로 거의 오십여보(五十餘步)를 걸어 자리를 정한 다음 돌아했다.

그리고는 자기를 감시하며 에워싼 시녀들에게 싸늘한 시선을 차례차례로 옮겼다.

  그 시선은 다시 푸른 하늘로 옮겨졌다가 서서히 거두어졌다.

 

「네 분의 시녀께서는 멀리 서 주시오. 피가 사방으로 튀면 옷을 버릴 것이오!」

 

  비장한 말에 시녀들은 정말 몇 걸음씩 물러섰다.

  양몽환은 하늘을 우러러 보고 부모님의 은혜와 스승님을 생각했다.

잔뼈를 길러주신 부모님과 온갖 무공을 가르쳐 주신 스승님을 생각 하니

이제 억울한 도적의 누명을 쓴 채 죽어야 한다는 자신이 더없이 가련하고 불쌍한 것 같았다.

어느덧 양몽환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그러자? 다음 순간,

마음이 진정되며 넉넉히 모든 것을 잊고 죽을 수 있는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는

자신에 스스로 놀랐다.

 

  (그렇다. 비록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지만 나 양몽환은 당당한 남자 대장부가 아닌가.

어찌 여자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겠는가, 한 번 결심한 이상! )

 

하고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 다음 슬픔과 분노를 억제하며 암암리에 기력을 운행한 양몽환은 있는 힘을 다하여

힘차게 자신의 천영혈(天靈穴)을 내리치려고 두 손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막 내리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오빠! 잠깐만!」

 

  비단을 찢는 듯 날카로운 여자의 외마디 소리가 그의 손목을 꽉 정지시키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지금까지 운행했던 진기가 쑤욱 빠져나가고 말았다.

 

  애원하듯 날카로운 외침 소리에 주춤했던 양몽환은 의외로 벌어진 사태에 손을 내리고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과연, 그곳에는 산봉우리를 넘어 달려오는 하림의 하얀 옷과 치렁치렁 흑단같이

검은 머리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양몽환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듯 절벽과 바위를 훨훨 넘어 달려오는 하림의

경공법은 가히 비호(飛虎) 그것이었다.

  순식간에 달려온 하림은 양몽환에게 달려들어 엎어지듯 껴안으며

 

「오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매달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양몽환의 바로 뒤에서 어디서 많이 듣던 낯익은 음성이 은방울을 굴리듯

들려오는 것이었다.

 

「무슨 사유로 자결하려는지요?

하림 동생을 이 모양으로 만들면서 까지!」

 

  양몽환은 마음이 섬뜩하여 소리 나는 곳으로 돌아서다 이요홍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요홍이었다.

 

  이요홍은 하얀 비단으로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휘감은 옷차림이었다.

 

  머리에는 횐 수건을 쓰고 역시 흰 비단으로 도포처럼 몸을 감고

하얀 부채를 들고 있는 모습이 백설인(白雪人)같았다. 

 

  삽시간에 주위가 변해 버리자 양몽환은 자기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감에 실망을 금할 길이 없었다.

 

  (꼭 죽어서 누명을 벗어야 했을 것을‥‥‥

런데 이요홍은 누가 죽었는데 상복(喪服)차림을 했을까?‥‥‥)

 

하는 동안 그때까지 양몽환의 몸에 매달리듯 끼고 있던 하림은 갑자기 나타난

이요홍을 발견하고는 급히 이요홍에게로 달려가 손을 잡으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홍 언니! 언제 이 괄창산으로 오셨죠? 정말 오랜만에 만났군요.」

 

  이요홍 역시 하림의 두 손을 꼭 쥐어 주었다.

 

「동생! 반가워요. 그런데 오빠는 무슨 일로 자결을 하려 했지.」

 

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림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모르겠어요. 저도 무슨 일인지.」

 

하고는 조소접을 눈여겨보았다.

 

  그러나 조소접은 태연하게 아무 표정 없이 주위를 거닐고 있을 뿐이었다.

 

  또한 양몽환을 감시하고 있던 네 명의 시녀들도 갑자기 사태가 돌변해지자

조소접의 눈치만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지금까지 주위를 서서히 거닐고 있던 조소접은

어느 사이엔가 계곡을 돌아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늦게야 조소접이 없어진 것을 눈치 챈 네 명의 시녀는

저윽이 당황하고 초조해 하는 것이었다.

자기들의 주인인 조소접이 아무 분부도 없이 사라지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만 양몽환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어디로 갔는지 자취도 없이 사라진 조소접의 행방에 당황하던 네 명의 시녀들은

그때 마침 어디선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비파 소리가 나자 일제히 몸을 날려 계곡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 시녀가 다시 나타나 양몽환을 불렀다.

 

「저희 소저께서는 심소저의 얼굴을 봐서 사흘 동안 여유를 주겠다는 분부입니다.

마음대로 가셔도 좋아요.」

 

하고는 계곡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한 네 명의 시녀들의 동작은 양몽환이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더욱 신법이 빠르고

민첩한 것에 놀라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원래 조해평(趙海?)은 딸 조소접에게 거북을 먹일 때 네 명의 시녀에게도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그리하여 이 천재난봉(千載難逢)의 신물(神物)은 경신비약술(輕身飛躍術)에 주효(主?)함은

물론이요 조소접이 귀원비급을 연마할 때 네 명의 시녀에게도 지도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시녀들의 권(拳 ), 장(掌), 경공(輕功), 공방신법(功防身法)은 몇 달이 못 되어

놀랍도록 진전됐다.

그것은 보통 무술가에게 배운 것과는 질(質)이 다른 절학(絶學)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그들의 빠르고 민첩한 경공술을 알리 없는 양몽환은 연신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이요홍은 머리에 쓰고 있던 하얀 헝겊을 벗어 짝, 짝 찢었다.

그 소리에 양몽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자 하림도 이상함을 금치 못하여 급히 물었다.

 

「홍 언니! 왜 그러시죠?」

 

  그러나 이요홍은 태연하게 웃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죽은 줄만 알고 상복(喪服)을 입고 있었어.

그런데 그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을 확인했는데 상복을 입고 있을 수도 없잖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하림은 눈을 크게 뜨고 이요홍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머리를 숙여 이요홍에게 목례(目禮)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처참했던 아미산에서의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이 각기 서로 알 듯 모를 듯 의미심장한 순간을 침묵으로 지키며 서 있을 바로 그때

홀연 한 줄기의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며 금환이랑 도옥의 냉소 소리가 침묵을 가르며 들려왔다.

 

「하‥‥‥ 하‥‥‥ 다들 모이셨군!」

 

  비웃듯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높은 소나무 위에서 가볍게 내려서는 도옥은

언제나 그렇듯이 방약무인의 거만한 자세였다. 

눈이 둥그레졌던 양몽환 일행은 도옥의 출현에 침묵이 깨졌다.

 

「도형이셨군. 난 또 누군가 했는데‥‥‥」

 

하는 양몽환의 뒤를 따라 이요홍의 낭랑한 음성이 들렸다.

 

「깜짝 놀랐어요. 그 동안 어디를 갔었어요?」

 

「발길 닿는 대로죠. 그런데 아버님은 안녕하시오?」

 

「별고는 없으시지만‥‥‥」

 

하고는 말끝을 흐렸다.

그것은 근 일년 동안이나 만나보지 못했던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그 보다는 그의 생사가 궁금했던 까닭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별고 없지만 사형인 도옥은 평안했느냐는 물음이 뒤엔 따라야 했던 것이었다.

기련산에서 그는 주약란의 일격인 투골타맥수법(透骨打脈手法)에 맞아 체내의 경맥에

상처를 입어 굴속에서 죽을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다행히도 일양자가 경맥을 뚫어 목숨을 건져 주었으나 아무 말 없이 말을 타고

사라져 버렸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요홍은 기련산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다가 홀연히 나타난 도옥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양몽환 앞에서만은 도옥에게 자세한 안부를 물을 수 없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도옥은 이요홍이 말끝을 흐리고 주저하자

 

「별 일은 없지만 천용방에 무슨 일이라도 발생했단 말이오?」

 

「기련산의 대각사 중들이 귀주 북부에 있는 근거지에 와서 소란을 피웠어요.」

 

「그럼 어머니는?」

 

「역시 별일 없으셔요. 세심암(洗心庵)에서 염불만 하실뿐.」

 

「아버님과 어머님이 모두 안녕하시다면 그 상복은 어째 입었소?」

 

「누가 상복을 입어요? 제가 입은 것이 상복으로 보이는 모양이죠?」

 

  말로는 태연하게 말하는 이요홍이었지만 차마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도옥은 비웃듯 싸늘하게 웃으며 양몽환에게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경솔한 행동을 나무라는 것이었다.

 

「양형은 너무 목숨을 등한시 하는군요.

방금 그 일장으로 천영혈을 쳤더라면 영락없이 죽어 버리는걸.‥‥‥」

 

「도형!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소!

오해와 모욕을 받는 것 보다 차라리 자결해서 깨끗함을 보이는 것이 대장부요!」

 

「하‥‥‥ 하‥‥‥ 훌륭한 말씀이군!」

 

  크게 비웃으며 지껄이는 도옥의 뇌리 속에는 이요홍과 하림을 증오하는 마음으로 꽉 차 있었다.

 

  (‥‥‥내가 그렇게 처치하려고 애쓰는데 저절로 죽게 버려둘 일이지 무엇 때문에 달려 왔담!)

 

  분하고 애석한 일이었다.

만일 하림과 이요홍이 조금만 늦게 나타났어도 양몽환은 스스로 천영혈을 쳐 죽었을 것이었다.

도옥은 좋은 기회를 잃었다고 통탄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양몽환은 도옥의 말이 그래도 자기를 생각해 줘서 하는 말인 줄 알고 사실대로

지금까지의 사유를 말하는 것이었다.

 

「 ‥‥‥ 그래서 소저와 다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귀원비금을 훔치지도 않은 것을

내 놓을 수도 없어서 죽으려던 참이오.」

 

  그러나 벌써부터 높은 나무 위에서 조소접과 양몽환의 대화를 다 들은 도옥으로서는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훔쳐낸 귀원비급은 이미 은밀한 곳에 비밀히 숨겨둔 그로서는 태연하기만 했다

뿐만 아니라 이 기회에 도옥으로서는 계략을 꾸며야 한다는 생각이 궁리되어 있었다.

 

「귀원비급이라면 절세의 기서(奇書)인데 그녀가 아무 곳에나 방치하겠소?

틀림없이 양형을 무고할 생각일 거요.」

 

  양몽환은 도옥의 말에 고개를 강경히 흔들었다.

 

「천만에! 그녀는 선량하고도 착한 분이요.

거짓말로 남을 무고할리는 만무요.」

 

「하‥‥‥ 하‥‥‥ 그럼 양형이 정말 훔쳤다는 말씀이군!」

 

  어이가 없었다. 실은 도옥을 만나는 순간 귀원비급에 대해서 물으려던 양몽환은

도옥이 먼저 뒤집어 좌우며 선수를 쓰는 데는 말문이 막혀 입이 벌어지지도 않았다.

 

  금환이랑 도옥의 간사한 계략은 비록 양몽환과 하림을 움직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이요홍만은 예외였다. 도옥의 성품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요홍으로서는

도옥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눈치였다.

 

「사형은 양상공이 얼마나 성실한 분이라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에요.

귀원비급을 훔쳤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이요홍이 양몽환을 두둔하고 나서자 도옥은 차갑게 냉소하며 한걸음 나섰다.

「사매는 어떻게 그런 것을 잘 아는지? 생각해 봐요.

그가 훔치지 않았다면 조소저가 왜 무고하겠소?」

 

「증거도 없이 사람을 의심하면 벌 받아요.」

 

「벌을? 그러면 조소저가 벌을 받겠군.‥‥‥

하하‥‥‥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혹시‥‥‥

혹시 말이오. 지금 백운협에 모인 고수들 중에 어떤 고수가 훔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오.

비록 조소저의 무공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몰래 훔치는 것은 무공으로 당할 수 없는 일이오.」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도옥의 표정은 정말 그럴듯한 의견이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수풀을 헤치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두 명의 거한이 가마를 멘 채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양몽환 일행이 시선을 집중하여 보고 있는 동안 가마는 천천히 다가왔다.

  그 가마 위에는 팔과 다리가 모두 팔린 노인이 푸른 두루마기를 입고 앉아 있었다.

 

  그들의 동정을 살피고 있던 이요홍은

 

「아! 막단주(莫壇主)님이!」

 

  나직이 외쳤다. 

 

  그러나 노인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양몽환 일행을 적의에 가득 찬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제 4 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