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비연경룡

제 29 장 그때 그 사연들! <貞女得救>

오늘의 쉼터 2014. 6. 22. 14:08

제 29 장 그때 그 사연들! <貞女得救>  
 


대궐 내원(內苑)은 비록 넓고 깊은 곳이었지만 지난날에 비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이 기억에 생생하였다. 아무 거리낌 없이 내원 안으로 들어갔다.

새삼스럽게 무엇을 주저하거나 둘러보거나 알아보려고도 않고 마치

자기 집 안방 찾아가듯이 들어갔다.

워낙 그는 일생 동안 무예계에서만 살다보니 摸?일에는 무관심하였다.

십여 년 동안 세월이 흘렀으면 혹시 무슨 변화가 없나 하고 둘러 볼만도 하였건만

도대체 그런 일에는 조금도 염두에 없는 모양 같았다.

무작정하고 예전에 자기가 하던 식 그대로 아무 거리낌도 없이 안으로 똑 들어갔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호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게 누구냐? 네 놈은 누구기에 무엄하게도 함부로 이 깊은 밤중에 내원으로 침입하느냐?」

 

 미처 고함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한 개의 물체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며 날아왔다.

 조해평은 즉각 손을 들어 잡았다. 암기로 사용되는 은사(銀砂)였다.

 

「이놈! 네 놈이 나를 누구로 알고 함부로 나에게 암기를 던진단 말이냐?

네 놈의 눈에는 거죽을 씌웠느냐?」

 

그는 그 때까지도 여전히 자기의 신분이 옛날 그대로인 황제의

근신시위(近身侍衛)인 것으로 착각하고 호령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바람 소리가 들리며 어둠 속에서 경장을 한 두 금의위사(錦衣衛士)가 나타났다.

그들은 조해평의 앞을 가로 막고 한동안 조해평의 아래 위를 훑어보고는 그만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저희들끼리 서로 쳐다보는 폼이 하도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없다는 눈치였다.

조해평도 심사가 벌컥 사나워 졌지만 어떻든 그대로 참고 그들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 실은 조해평의 옷차림이나 얼굴은 금의위사가 아니라 딴 사람이 보아도 그것은 영락없는

거지 차림이었다.

원래 조해평은 백운협 산중에 틀어 박혀 살기를 십여 년을 넘기면서도 무공만 단련할 줄 알았지

옷 같은 것에 정신을 써 본 예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그가 입고 있는 옷이란 것도 해어질 대로 해어져 그나마 간신히 부끄러운 곳만 가릴 뿐이었다. 또 그 얼굴은 제멋대로 자란 지저분한 수염들이 온통 뒤덮고 있어서

두 눈만 빠끔히 반짝일 정도였다. 

왼쪽의 칼을 든 위사가 참다못하여 다시 호령하였다.

 

「어디서 이따위 미친 영감장이가 나타나 함부로 지껄여?」

 

하고는 칼을 후려쳤다.

 

  조해평의 심사도 무척 아니꼬웠던 참이라 그 서슬에 화통을 터뜨렸다.

 

「뭐? 미친 영감이라고! 이 녀석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모양이군, 그래.」

 

  어느 틈에 왼손으로 재빨리 칼 등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일장을 갈겨 버리고 말았다.

 

「윽!」

 

신음 한마디로 그 시위는 벌렁 나가 떨어졌다.

그 바람에 오른쪽의 그의 동료가 깜짝 놀랐다.

조해평의 단 한 번 손질에 그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보자 얼떨결에 그도 칼을 뽑아 휘둘렀다.

 

조해평은 그 칼을 피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해평이 어깨를 움직이며 도리어 한 발 한 발 그 자에게 다가가 오른손으로

얼굴을 후려쳐 버렸다.

 

조해평의 생각으로서는 그저 가볍게 뺨을 후려치려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공력은 스스로도 알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그 위력이 대단하였다.

 

  <퍽!>

 

  독이 깨지는 것 같은 둔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자의 두개골이 박살나 있었다.

 

신음 소리고 몸부림이고 없었다.

 

조해평도 너무 끔직하여 외면할 지경이었다.

그도 미처 자기 주먹이 이렇듯 엄청난 힘을 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삽시간에 두 사람의 위사가 조해평의 손에 죽고 말았다.

먼저 쓰러진 자도 끔찍한 모양을 하고 죽어 있었다.

 

조해평의 일장에 그만 오장육부가 터졌는지 온통 피를 토해놓고는

두 눈을 까뒤집은 채 벌렁 죽어 있었다.

막상 두 사람이 죽어버리자 조해평은 와락 두려운 생각이 났다. 

그의 얼굴은 금시에 흐려지고 당황함을 감출 수 없었다.

죽은 놈들은 소위 황제의 명을 받고 내원을 호위하는 금의 위사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들을 죽인 죄는 황제에 대한 반역의 죄와 마찬가지다

만약에 이 일이 발각된다면 구족이 멸문지화를 당할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무섭고 소름끼치는 벌인가 하는 것은 조해평이 아무리 세상일에

무관심하다고 해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그는 효종(孝宗)황제의 근신 시위로서 황제를 받들고

죄를 진 가족을 몰살시키는 일에 참여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는 변경을 지키다가 반역을 꾀한 장군도 있었고 황제의신임을 얻고

나라 일에 몰두하던 내각의 요원도 있었다.

심지어는 황제 다음가는 재상의 자리에 있던 고관 현작들도 있었다.

그 가족들을 죽이던 참혹한 광경은 지금껏 잊을 수가 없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무참한 형벌이었다.

조해평은 그만 생각하다 말고 몸을 떨었다.

그때 느닷없이 그의 손을 움켜잡는 사람들이 있었다.

두 사람의 위사가 양 쪽에서 그의 팔을 한쪽씩 움켜잡고 있고

또 한 사람은 등 뒤에서 조해평의 등에 칼끝을 대고 있었다.

등에 칼을 갖다 대고 있는 사람이 가장 나이가 많은 연장자인가 보았다.

 

「저 두 사람은 네가 죽인 거냐?」

 

「네‥‥‥ 그것이 글쎄 손을 한번 휘두른 것뿐인데 우습게도 두 사람 다 죽어 버렸군요.

 그 참‥‥‥」

 

  조해평을 잡은 위사들도 어처구니없는지 서로들 그의 길게 자란 수염과 머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조해평도 그대로 태연자약해서 마주 쳐다보았다.

 

그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새삼스럽게 조해평의 아래 위를 유심히 훑어보았다.

아무리 훑어보아야 그의 모습은 길게 자란 머리와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고 옷이라고는

거지보다도 못했다.

그렇다고 손에 무슨 무기를 든 것도 아니었다.

그들도 조해평을 영락없이 미친놈으로 여긴 모양이었는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면서 호령했다.

 

「네 이놈! 사람 같지도 않은 놈이 건방지게 무슨 큰 소리냐?

 이놈! 여기가 어딘 줄 알기나 하느냐!」

 

「여기가 어디긴 어디겠소. 바로 황궁 내원이죠.」

 

「이놈아! 황궁 내원이라는 것을 알고도 무엄하게 들어왔단 말이냐?

도대체 너 같은 놈이 들어 올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더란 말이냐?」

 

「황제를 뵈옵기 위해서는 이곳으로 와야지 어디로 갈 거요?」

 

「이런 무엄한 놈 같으니! 너 죽고 싶으냐?」

 

  호령하면서 칼을 손에 힘껏 쥐고 쭉 앞으로 찔렀다.

 

이때 조해평의 현문일원강기(玄門一元?氣)는 이미 통달해서 몸에 지니고 있던 터라

그 정도로서는 아무 효과가 없었다.

 

비록 방비를 안 해도 이 지고한 내가기공(內家氣功)은 불의의 습격을 방어하는

탄력을 손으로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자가 단한 칼에 절러 죽이려던 행동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자기 딴에는 힘껏 내찔렀었다. 그런데도 이건 어떻게 된 영문인지 허망한 것이

그저 한 무더기 솜뭉치를 찌른 것만 같았다.

 

  (엉! 어떻게 된 거야?)

 

  잘못 되었구나 하고 생각할 때는 이미 늦었다.

  반탄(反彈), 잠력(潛力)의 한 줄기가 억세게 뻗치면서 그의 손목을 후려친 후였다.

  그리고 칼은 공중으로 내던져 졌다가 멀리 일 장 밖에 떨어져 버렸다.

  조해평을 양 쪽에서 움켜잡고 있던 두 위사들도 기겁을 하고 물러서고 말았다.

  그들이 잡고 있던 조해평의 손에서 느닷없이 뜨거운 열기를 느꼈던 것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뜨거운지 마치 불에 달군 쇳덩이 같았다.

 

그러나 조해평은 여전히 태연자약하게 껄껄 웃고만 있었다.

할 일이 없어 무척 심심한 모양인지 소맷자락을 툭툭 털었다.

남이보기에는 아주 예사롭고 사소한 몸짓에 불과했다.

 

그런데 또 이것은 어떻게 된 영문인가?

한 번 가볍게 소맷자락을 털고 나자 좌우에 섰던 두 위사가 그만 몇 장 밖으로 떨어져 나갔다.

뒤에 섰던 나이가 많은 위사는 그만 간이 콩알만 해지고 무서움에 몸서리 쳤다.

더 이상 그곳에서 앞뒤를 훑어볼 겨를이 없었다.

 

무작정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숨이 턱에 차도록 도망치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쫓아오는 기색이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 있어야 할 조해평은 어디로 갔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조해평은 그 늙은 위사가 허겁지겁 도망치자

자기도 곧 그 자리를 피해서 도망치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대로 여기서 우물거리다가는 구족이 멸문지화를 당할 것은

불을 보기보다 뻔한 노릇이었다.

 

한시인들 그곳에서 우물거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곳을 피하는 것만이 상책 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자 백학을 불러 타고 한시바삐 남으로 돌아가기가 조급했다.

그러나 궁궐 내원은 넓었다.

어두운 밤이라 더욱 넓은 것 같이 보였다 울창한 숲 속에는 여기저기

커다란 누각이 솟아 있어서 오히려 음산한 기운마저 들었다.

도망치기에만 정신이 팔린 조해평은 마구 뛰었다.

한참을 무턱대고 뛰고 나니 어디가 어느 곳인지 도시 분간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동 쪽은 어느 쪽이고 서쪽은 어느 방향인지 방위마저 가려 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마침 어두운 밤하늘에 그나마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별을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조해평은 첫날의 기억을 다시 더듬기 시작했다.

눈을 잔뜩 크게 뜨고 여기 저기 유심히 보며 예전의 기억과 비교해 보았지만

그래도 알 수가 없었다.

다시 어두컴컴한 내원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조해평은 아무리 어두운 곳이라 해도 공력만 들이면 주위 수십 장 둘레는 대낮처럼 볼 수 있었다.

그 이유는 그가 십여 년간 귀원비급에 실려 있는 현문토납지술로서 일원강기(一元?氣)를

철저하게 단련하였기에 그의 내공이 크게 진보 되었던 까닭이었다.

조해평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지금 자기의 위치가 내원 어느 곳인지 알 수 없었다.

 

바로 앞에는 누각이 우뚝 솟아 있고 그 너머에는 울창한 숲이 보였지만

옛날에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그리고 내원은 상상 밖으로 넓었다.

예전에 비록 효종황제의 근신시위로 뽑혀 심궁(深宮)을 출입할 수 있었다 하여도

그것은 넓고 넓은 내원의 한 모퉁이에 불과한 것이었다.

조해평도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지금에야 그것을 깨달았고 자기의 기억력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연!

 

요란한 징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고요히 잠든 내원에 때 아닌 징소리의 여음이 구석구석까지 파고들며 퍼져갔다.

그것이 신호인양 여기저기에서 대나무 피리소리가 귀가 따갑도록 들려 왔다.

고요하던 내원이 갑작스럽게 잠을 깬 듯 소란스러워 지면서 여기저기에서

불빛이 엇갈리고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뒤범벅이 되어 들려왔다.

조해평은 그 소리가 무엇인지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다름 아닌 금의대(錦衣隊)의 비상 신호였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아까 도망친 늙은 위사의 신고로 자기를 쫓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금의대가 일단 비상망을 치고 자기를 찾기 시작한다면

그 비상망을 뚫고 도망가기는 퍽 힘든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된다 하여도 고스란히 잡힐 수도 없는 몸이고 보면 필경

또 무수한 사람들이 다치고 죽을 것이고 자기도 아마 무사하지 못할 것이었다.

어떻게 하든지 금의대가 모든 준비를 갖추기 전에 속히 이곳을 떠나야 했다.

조해평은 황급히 앞에 보이는 거무스름한 숲 속으로 몸을 숨기려고 했다.

그 곳은 황제의 총애를 받는 비빈들의 처소 같았으나

지금처럼 위급함을 피하기에는 오히려 안전할 것 같았다.

조해평은 단숨에 뛰어 넘으려고 몸을 날렸다.

그때 바로 등 뒤 어두운 곳에서 금의대의 두 대원이 옥신각신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이제 여기까지 뒤져 보았으니 그만하고 돌아가지?」

 

「돌아가다니요? 그 놈이 여기 숨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렇다고 더 앞으로 나갈 수는 없단 말이야.

여기는 바로 황제께서 은밀하게 노시는 표방(豹房)이거든.

감히 누구도 얼씬 못하는 곳인데 그 책임을 누가 지느냐 말이야.

공연히 그 놈을 잡으려다가 우리만 경을 치게.」

 

「그린 걱정은 안 해도 좋아요. 더 찾아보기나 합시다.

모든 책임은 유공(酉公)께서 잘 처리할 것이오.

우리 서장(西藏) 사람들은 무조건하고 유공의 명령만 들으면 그만 이란 말이오.

유공은 우리들보고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궁에 침입한 놈을 찾아내라고

엄한명령을 내렸는데 우리가 만약 여기까지 왔으면서 그 놈을 놓쳐 보시오.

오히려 그때는 더 무서운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오.」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고 듣고 있던 조해평은 그들이 옥신각신 하면서도

이곳을 수색할 모양으로 점점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만약 그들이 계속 이곳을 수색하면 틀림없이 발각되고야 말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들과 싸우는 동안 궁중의 모든 고수가 삽시간에 달려올 것도 분명하였다.

그렇게 되면 도저히 자기 홀몸으로서는 당할 수가 없었다.

조해평은 다급한 김에 깊이 생각하여 보지도 않고 즉각 몸을 날리면서

숲이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아뿔싸!

 

「앗! 저기!」

 

「이놈아! 게 섯거라.」

 

어둠을 찢는 호령과 함께 세 줄기의 섬광이 조해평의 등 뒤로 날아왔다.

이곳을 수색 나온 금의대의 무사들은 모두가 환관(宦官) 유공(酉公)이 신임하고

아끼는 무사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무예계의 고수이기도 했다.

이들을 초빙해오는 데만도 유공은 막중한 비용을 들였던 것이었다.

그러니만큼 조해평이 제아무리 무공의 힘으로 은밀히 몸을 날렸다 하여도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는 감출 수 없었고 그들은 또 그 소리를 재빨리 들었던 것이었다.

조해평은 오히려 숨어있는 것 보다 못한 결과가 되었다.

다급해진 조해평은 두 자루의 비수를 손으로 휘저어 떨어뜨리고,

또 한 자루의 비수는 몸을 비틀어 피했다.

그러자 비수는 불과 한 치 남짓하게 옆으로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

한 그루의 팔목만한 소나무에 적중하였다.

그 소나무는 단번에 툭! 하며 두 동강으로 부러졌다

간신히 두 자루의 비수를 떨어뜨리고 또 한 자루의 비수를 피하고 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두 사람이 그를 가운데로 포위한 채 조해평의 앞을 가로 막고 지켜 서있었다.

두 명 중의 한 사람은 나이가 육십 쯤 되는 사람이었다.

빼빼 마른 몸집에 굵직한 눈썹이 꿈틀거렸고 쥐새끼 눈 같은 눈동자를 굴리며 입가에는

가느다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은 건장한 사십세  정도의 장정으로 양 손에 한방의 호치강륜(虎齒鋼輸)을 들고 있었다.

명태같이 빼빼 마른 노인이 조해평을 두어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가했는데 느닷없이 오른손을 펴들어

조해평의 어깨를 후려치며 달려들었다.

그 수법은 인정사정도 돌보지 않는다는 응조(鷹爪)의 수법으로서 빠르기가 번개 같았다.

그와 동시에 또 한 사람의 장정도 양 손에 호치강륜을 쳐들며 기세 있게 달려들었다.

 

조해평은 귀원비급의 무공을 십여 년간 연마하기는 하였어도 여태껏 다른 사람들과의

싸움에서 실제로 사용해 보지 못했었다.

따라서 늘 자기 실력을 한번 실제로 시험해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던 참이었다.

조금 전에 있었던 두 금의 위사와의 싸움은 무의식중에 행동한 장난 같은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 궁궐의 고수들과 맞붙게 되자 가슴이 뛰기까지 하였다.

조금 전에 황제의 어명을 받은 금의 위사를 죽였다는 대역의 살인죄쯤은 안중에도 없었다.

어찌나 신이 나는지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환호성마저 질렀다.

 

「좋아, 좋아! 얼마든지 상대해 주마 기다리고 있었다.」

 

조해평의 오른손은 삽시간에 바람을 가르며 장정의 쌍륜을 후려치는 한편,

왼손을 질풍같이 날려 깡마른 늙은이의 오른손목을 움켜잡으려고 하였다.

이 두 수법은 얼핏 보기에는 동시에 쓰여 진 평범한 것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두 수법이 서로 쓰여 진 힘이 엄청나게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아주 빠르고도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수법이었다.

오른손은 분명히 단순한 힘으로 내려친 것이었다.

그러나 왼손의 수법은 손목을 잡으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실은 두 수법이 모두 기가 막힌 공격 수법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수법이었다.

드디어 명태같이 마른 노인은 황급히 비명을 질렀다.

 

「어엇?」

 

일시에 온 몸의 진기를 이용하여 공격하려다가 그만 몸가짐을 흩트리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조해평은 신바람이 났다.

 

「핫하하‥‥‥ 이 피라미 같은 놈들?」

 

그러면서 조해평은 큰 소리로 유쾌히 웃어 제쳤다.

그리고는 재빨리 후려친 오른손을 눈 깜짝할 사이에 거두어들이면서

눈앞이 어지럽도록 몸을 뱅그르르 한바퀴 돌리었다.

그것은 곧 다음의 공격을 준비하는 동작으로서 변화가 빠를 뿐 아니라

그 기간마저 단축하는 수법이었던 것이다.

조해평은 완전히 원기를 누르고 있었다.

 

그는 깡마른 노인의 손목을 잡던 손으로 장정의 등을 후려치면서

오른손으로는 노인의 맥문을 움켜잡고 앞으로 힘껏 당기는 것이었다.

눈부신 묘기라 아니할 수 없었다.

 

쌍륜을 든 장정은 벌써 조해평의 날렵한 일장을 등에 맞은 채

일장밖에 쓰러져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런데다 깡마른 노인이 그 위에 덮치며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은 조해평이 맥문을 잡고 힘껏 앞으로 끌어 당겼다가 공을 집어던지듯이

내굴렸으니 어떻게 맥을 쓸 수도 없이 옆으로 날아가듯이 겹치며 쓰러졌던 것이었다.

막 버둥거리며 일어나려던 장정은 또 다시 자기 몸에 깡마른 노인이 덮쳐오자

어이없이 다시 쓰러졌다.

장정은 그것이 조해평인 줄만 여기고 그때까지 놓지 않고 있던 호치강륜의 한 자루를

놀랜 김에 마구 휘둘러 깡마른 노인을 후려쳤다

깡마른 노인은 깜짝 놀랐다.

뭐라고 어떻게 말할 여유도 없었다.

엉겁결에 가까스로 맥문이 풀려지자 간신히 손을 들어 오른쪽 팔꿈치를 치켜들어

장정의 곡지혈(曲池穴)을 치고 말았다.

자칫 잘못하면 같은 동료들끼리 서로의 목숨을 죽일 뻔 하였던 것이었다.

장정의 호치강륜이 아슬아슬하게 빗나가 떨어지자 깡마른 노인은

그제야 긴 숨을 몰아쉬며 그 장정을 부추겨 세우고는 짚었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이와 같은 묘수는 모두가 귀원비금에 실린 수법이었다.

조해평 자신도 처음 써보는 묘법이었던 것이었다.

하기야 두 궁중 위사의 무공도 대단하지 못하였기에 다행한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일어나 조해평을 찾았으나 조해평의 모습은 그림자도 없었다.

두 사람은서로 상대방의 얼굴만 쳐다볼 뿐 말도 못하고 서 있었다.

그들로서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모를 일이었다.

상대방은 무슨 수로 단 한수에 두 사람을 쓰러뜨리고 도망을 갔는지

그저 쓴 입맛만 다실뿐이었다.

 

호치강륜을 사용하던 장정이 떨어진 무기를 집어 들고 옷에 뭍은 흙을 털었다.

 

「제기랄! 몇 십 년을 강호에 날뛰어 다였지만 이런 일은 처음 당해 보는군.

대관절 어떻게 된 거요? 이건 영문도 모르고 일장을 맞았으니.」

 

  깡마른 노인은 표독스럽게 이를 갈면서 억울한 듯 투덜거렸다.

 

「어쨌든 이 황궁 주위를 철저히 봉쇄하였으니 꼼짝없이 독안에든 쥐지 별 수 있나?

어디 깊이 숨어 있을지는 모르지만 도망가지 못할 거야‥‥‥」

 

말로는 큰 소리를 치면서도 뒤가 켕기는지 슬금슬금 되돌아갔다.

조해평은 두 사람을 쓰러뜨린 후 가까운 소나무 숲에 숨어 그들의 동정을 엿보고 있었다.

사실 그들의 말대로 금의대 위사들이 황궁 주위를 물샐틈없이 둘러싸고 있다면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소름이 오싹 끼치는 섬뜩한 마음마저 들었다.

 

조해평이 효종 황제의 근신 시위로 있을 때만 해도 그들은 독약을 바른 화살촉이

 연속적으로 날아가는 연주갑나(連珠甲拏)라는 악독한 무기로 야간 방비에 크게

이용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은 더욱 조급하였고 몸은 달아올랐다.

밤은 여전히 어두웠다.

금시라도 비가 쏟아질듯이 구름이 낀 하늘에는 달빛이 비칠리 만무하였다

오히려 섣불리 움직이려다가 아까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느니 보다

차라리 이대로 나무 숲 속에 숨어 쉰 후에 구름이 걷힐 때를 기다려

 확실한 방향을 잡고 도망치는 것이 안전하리라 여겨졌다.

막상 그렇게 생각하자 오히려 마음은 편하였다.

조해평은 그 근방을 살펴본 후 아주 으슥한 곳을 골라 깊숙이 몸을 숨기고 말았다.

그렇다고 그대로 할일 없이 숨어만 있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진기를 모으고 기력을 가다듬어야했다.

조해평은 자리를 정하고 지그시 눈을 감고는 현문토납 지술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그의 육체나 정신은 무아무념의 경지에 들어가 자신마저 잃은 듯 했다.

단전에서는 서서히 뜨거운 기운이 올라와 온몸과 사지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동안 조식에 열중하고 있을 때 다시 소란스러운 소리들이 들려왔다.

조해평이 숨어있는 숲 속에서 불과 얼마 안 되는 거리였다.

그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는 것이 아무래도 발각될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조해평인들 그대로 마음 놓고 숨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하였다.

온 몸과 사지에 퍼져 흐르던 진기를 다시 거두어 들여 단전으로 집중시켰다.

이같이 진기를 갑자기 역전시키면 무척 힘들고 위험한 것이다

특히 고수급의 내공을 수련하는 사람으로는 아주 꺼리는 비상한 수법인 것이었다.

만약 자칫 잘못하여 사소한 실수라도 한다면 역전하던 열기가 핏줄기에서 굳어져

가벼우면 큰 해가 없으나 중하면 병신이 되고 마는 수도 있는 것이었다.

조해평도 그런 줄은 잘 알고 있었으나 지금의 형편으로서는 그나마 비상수단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여 전신의 혈맥도 역전하는 열기에 휩쓸려 내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조해평의 온 몸에서는 구슬 같은 땀이 흘러내렸다.

동시에 숨소리마저 거칠어져 무척 고통스러워 보였다.

이때 근방을 뒤지며 지나가려던 금의대 위사들의 발길이 일시에 멈추어졌다.

그들도 역시 무예계의 출중한 고수들이 어서 무공에 단련된 그들의 이목이

조해평의 거칠어진 숨소리를 놓칠 리 만무하였던 것이다.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숲 속을 헤치고 달려오자

강한 등불 빛이 번쩍이면서 금의대 위사들이 둘러싸고 말았다.

그 순간에도 조해평은 꼼짝하지 않고 앉아 바라볼 뿐이었다.

막상 조해평을 발견하고 둘러싼 금의대 위사들도 조해평이 단정히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는 선뜻 달려들지 못했다.

조해평으로서는 그때까지 역전시킨 진기를 전부 단전에 끌어들이지 못하여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자칫 잘못 움직이다간 그들의 손에 죽기 전에 자기 몸의 진기가 혈맥에서

굳어 죽어버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조해평을 둘러싼 금의 위사들은 더 이상 보고만 있지 않았다.

 

  (획!)

 

눈 깜짝할 사이에 밤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어둠을 뚫는 섬광이 번쩍하면서

한 자루의 비수가 곧장 날아 왔다.

손발을 쓸 수 없는 조해평으로서는 꼼짝없이 당할 것만 같았다.

 

  순간!

 

「얏!」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그 비수는 놀랍게도 조해평의 입 속에서 떨고 있었다.

  입으로 받아 물었던 것이었다.

  이로서 당장의 위기는 무사히 모면했지만 그 반면에 가장 우려하던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날아오는 비수를 받아 무느라고 호흡이 흐트러져 역전하던 진기가 갑자기 혈맥에서

굳어지고 말았다.

미처 어떻게 호흡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오른쪽 다리와 왼팔이 저려오면서 쓸 수가 없었다.

밤은 칠흑같이 캄캄하다.

그 틈을 노려서 금의대 위사들은 재차 공격하여 왔다.

날카로운 호령 소리와 함께 한 줄기의 선풍이 불어오면서 선장이 내려쳐 왔고

그와 겹쳐서 한 쌍의 호치강륜이 그의 가슴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위기일발!

 

조해평의 몸이 여지없이 부서지고 박살나는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야앗!」

 

비수같이 날카로운 기합 소리가 울리면서 조해평의 몸은 제비처럼 공중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왼손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의 공격을 보기 좋게 물리치고 오른손으로는

직고천문(直叩天門)법으로 호치강륜을 쓰던 건장한 위사의 앞가슴을 내지르지 않은가?

 

「으악!」

 

처절한 비명이 울려왔을 뿐이었다.

 

일곱 자 밖으로 밀려 나가며 쓰러진 그 위사의 입과 코 그리고 귀에서 피가 넘쳐흐르며

잠시 버둥거린 후 죽고 말았다.

조해평으로서는 꼼짝 없이 죽을 위험한 고비였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때는

어느 정도 단전에 역전시킨 진기가 있었던 때여서 그 진기를 모아 역습을 시도하여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장을 휘두르던 또 한 사람의 위사는 자기 동료의 비참한 최후를 직접 보고 나서는

감히 다시 더 공격하여 오지 못했다.

잔뜩 겁을 먹은 눈을 굴리며 몸을 돌렸다.

기선을 잡은 조해평도 그들을 놓치지 않았다.

비록 오른쪽 다리와 왼팔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처지였지만

왼발과 오른손을 써서 뒷덜미를 후려쳤다.

오른손을 뻗치면서 왼발로 땅을 힘껏 차자 몸은 가볍게 날아가

그의 선장을 움켜잡고 끌어당기면서 왼발로 질풍같이 걷어차고 말았다.

 

「어이쿠!」

 

허공을 후비며 땅에서 헤엄치는 꼴로 헤매다가 네 활개를 펼치면서 쓰러져 갔다.

그리고 조해평의 왼발이 또 한 번 땅을 차는 가 했는데

그 위사의 머리는 박살나서 쪼개지고 말았다.

 

조해평의 수법은 사실 신출귀몰이었다.

한편 그의 몸도 역전시키던 진기로 말미암아 심상치 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울화가 터진 그는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사납고 무서웠다.

선장을 뺏어든 조해평은 계속해서 등불을 들고 저만치 서 있는 자에게 번개 같이 내 던졌다.

등불이 꺼지면서 거기서도 숨넘어가는 비명이 울렸다.

주위는 전보다 더 캄캄하였다.

어둠 속에서 서로 부딪치고 헤매며 부르짖는 비명 소리가 요란히 울려왔다.

그러나 조해평의 몸도 그 이상 지탱하기 어려울 지경으로 숨이 차오고 팔다리는 저려왔다.

아마도 왼 팔과 오른쪽 다리의 마비된 곳이 더욱 퍼져나가는가 보았다.

숨은 더 차오르고 가래가 끓어  오르며 기침까지 터져 나왔다.

조해평은 이대로 더 여기서 지체하다간 자기 힘으로서는 끝내 당하지 못하고

죽을 것을 직감하였다.

차라리 한줄기의 진기가 남아 있는 지금 재빨리 이곳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조해평은 그 즉시 몸을 날려 어둠을 뚫고 울창한 숲 속으로 급히 도망쳤다.

무작정 뛰다보니 그곳이 어떠한 곳이며 방향은 어떻게 되는지 조차 생각하여 볼 여유가 없었다.

그때까지 조해평이 숨어 있던 숲 밖에는 일곱 명의 서장(西藏) 금의대 위사들이 남아 있긴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동료 세 사람이 눈 깜짝할 사이에 처참하도록 박살이 나는 것을 보고는

감히 누구하나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더욱이 등불마저 박살이 나면서 주위는 바로 눈앞에서 코를 베어도 모를 지경이었고

등불을 들었던 무사마저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으니 더욱 겁에 질릴 뿐이었다.

조해평이 그곳에서 사라진 후 한참만에야 겨우 암기로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것도 숲 속에 들어가 뒤지며 암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숲 밖에서 멀리 둘러싼 채 비수며 단검 또는 수검(袖劍), 금표(金標) 등을 함부로 던지고

고함만 지를 뿐이었다.

그렇게 맥없는 헛 공격을 얼마동안 하다 아무런 기척이 없자

그제야 우 하고 숲 속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온 숲 속에 널려 있는 것은 그들이 던진 암기와 그것에 맞아 부러진 나뭇가지와

화초들뿐이었다.

 

  조해평의 모습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잠깐 의논한 뒤 일부분은 계속 그곳에서 수색하기로 하고 일부분은 죽은

세 사람의 시체를 둘러메고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 떠나갔다.

 

그러자 조해평을 잡기는 틀린 것 같았다.

이들은 계속해서 수색 하였지만 그것은 실없는 허장성세에 지나지 않은 것은 뻔하였다.

그 들의 전부인 동서(東西)창 두 곳의 시위들을 전부 동원한다 하여도 아마 힘들 것이었다.

더구나 종적조차 없는 그였다.

그때까지도 조해평은 정신없이 앞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왼쪽 다리의 맥이 빠지면서 주저앉고 말았다.

이때까지는 겨우 오른 팔과 왼 다리로 지탱할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왼다리의 발끝 요결마저 점차 마비되어 가니

더 앞으로 나갈 수 없었던 것이었다.

속으로 이젠 틀렸다고 한숨을 내 쉴 뿐이었다.

절망에 찬 눈을 들어 앞을 살폈다.

그러자 수장(數丈) 앞에 소나무와 대나무로 주위를 둘러싼 한 채의 누각이 보였다.

누각의 지붕에는 소주궁등(蘇州宮燈) 하나가 걸려 있었다.

높이 걸려 있는 궁등을 보자 그는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렇지‥‥‥ 이 틈에 백학 현옥을 불러 타고 이곳을 피해야겠다.

백학은 영물이라 반드시 내가 휘파람을 불면 오겠지‥‥‥

마지막 진기가 남아있을 때에 속히 돌아가자!)

 

  이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그의 경맥에 체류된 진기로서는 그나마 현옥을 부르기 위해서

휘파람마저 불 수 없었다.

조해평의 체류(滯留)된 진기는 벌써 엉켜들면서 몸에서는 열을 내고 있었다.

이는 무예를 닦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주화입마(走火入魔)라고 일컫는 것이었다.

공력이 심후할수록 상처가 심해지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 대부분의 경맥과 철도가 폐쇄되어 진기를 운행시킬 수 없을 뿐 아니라

피도 통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는 간신히 한줄기의 진기를 단전에 모으고 고개를 들어 휘파람을 불려고 하여

보았으나 갑자기 내장의 피가 끓어오르며 휘파람 소리는 조금 비치고 뚝 끊어졌다.

그는 눈을 감고 품에서 귀원비급의 책자를 꺼내 들었다.

 

 (사태가 이렇게 된 바에야 대궐을 벗어나기는 틀렸지.

만일에 이 책자를 없애지 않고 있다가 악인의 손에 굴러들어 간다면?

무예계의 앞날에 커다란 불씨를 안기는 꼴이 되겠지‥‥‥‥

그렇다고 이대로 없앤다면 그건 너무 애석한 노릇이구‥‥‥‥

천기진인과 삼음신니가 이 기서(奇書)를 함께 기록할 때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을 것인가?

그런데 내가 이 황궁에서 죽고 이 기서도 없어진다면 다시는

이 세상에서 귀원비금에 실려 있는 출중한 무공은 전하여 지지도 못하고

소멸되고 말 것이 아닌가?)

 

  조해평은 여러 갈래로 깊이 생각해 보았지만 막상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다.

끝내 안타까워 이리 저리 망설이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온 길로부터

소란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즉각 그가 내려다 못한 휘파람 소리의 기척에 금의대 위사들이 달려온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입장은 지금 한시라도 마음 놓고 쉬고 있을 처지가 되지 못하였다.

귀원비급을 다급하게 품에 넣었다.

금의대 위사들이 웅성대는 말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올 지경이었다.

그러자 간신히 움직일 수 있는 오른손과 왼발을 움직여 누각을 둘러싸고 있는

죽림(竹林)으로 뛰어 들었다.

그러자 누각 앞까지 뛰어 온 그는 곧이어 누각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말았다.

인기척이 없었다.

조해평은 숨과 발자국 소리를 죽여서 어느 방의 탁자 밑에 몸을 숨겼다.

다행하게도 금의대 위사들은 곧바로 죽림 쪽으로 달려가고 발자국 소리는 멀어져 갔다.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 탁자 밑에 숨어서 끝내 결정하지 못한 귀원비급을 무의식적으로

꺼내어 펼쳐들었다.

그러자 마침 귀원비급의 요상편(療傷篇)이라는 대목이 펼쳐졌다.

그는 시력이 본래 범인과 다른데다가 마침 실내에 촛불이 있어서 글귀를 환히 볼 수 있었다.

 

 (무술을 배움에 있어서 먼저 꼭 알아야 할 것은 자구지법(自救之法) ‥‥‥)

하는 글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조해평은 계속해서 읽어 보려고 책장을 넘기려는 때였다.

 

밖에서 인기척이 나면서 남자 목소리도 여자 목소리도 아닌 간사스러운 말이 들려왔다.

 

「황제께서 납시오.」

 

조해평은 깜짝 놀라 귀원비급의 책자를 얼른 품에 집어넣고 한쪽 벽 구석에 세워둔

서가(書架) 뒤로 몸을 숨겼다.

 

그가 막 몸을 숨기고 났을 때였다.

등(燈)을 든 두 내시가 인도하는 대로 노란 곤룡포에 편모(便帽)를 머리에 쓴

거의 이십이 넘을까 하는 위품이 넘쳐흐르는 젊은이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 뒤에는 백의(白衣)의 환관이 들어오는데 나이는 약 삼십세 정도로서

청색 내시복을 입고 있었다.

 

곤룡포를 입은 젊은이가 음탕하게 웃으며 내시에게 속삭였다.

 

「얼마 전에 표방(豹房) 중에 새로 들어온 미녀는 틀렸더군.

 여색은 나쁘지 않으나 막상 방사(房事)를 통 몰라 영 재미가 없더군.」

 

  청의의 환관이 사뭇 황송한양 허리를 굽혔다.

 

「소신도 그런 줄 아옵고 다시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어

더 예쁜 미녀를 구하도록 하였습니다.

불일간에 표방으로 보내와 황제 폐하를 즐겁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따위 시큰둥한 미녀들은 반갑지가 않아.

취접(準蝶)을 성각하면 밤잠도 못잘 지경이지.

그래 요즈음 그녀를 어느 정도 구슬려 보았느냐?」

 

그때 밖에서 옷 스치는 소리가 나면서 조용한 발자국 소리와 더불어

건강한 남의(藍衣)의 궁녀 두 사람이 녹의(綠衣)의 미녀를 가운데 부축하고 들어왔다.

서가 뒤에서 엿보던 조해평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그녀는 분명히 취접이었다.

몇 번이고 뜯어보아도 분명히 취접임에 틀림없었다.

바로 효종 황제가 자기에게 내려준 궁녀 취접이었다.

그 순간의 조해평의 심정은 그저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 뿐

어떻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십여 년 전 취접이 자기에게 그토록 은은한 정을 주던 일을 생각하면 오직 미안할 뿐이었다.

녹의의 미인은 황제 앞에 엎드렸다.

 

「신첩(臣妾)이 문안드립니다.」

 

 곤룡포의 젊은이가 만족하게 웃으며 내려다보았다.

 

「짐은 바로 천자란 지존의 몸인데 하잘 것 없는 일개 금의 시위보다 못하단 말이냐?

두 번 다시 짐의 말을 거역한다면 짐이 용서치 않을 터이니 야속하다 말렸다.」

 

「그러하오나 선황께서 벌써 이미 천한 몸을 조시위에게 내리신바있습니다.

이미 조시위를 받든 몸으로 군신지륜(君臣之倫)을 어찌 어기겠나이까?」

 

「그래도 무관하다. 짐은 일국의 군주이거늘

감히 누가 나의 뜻을 왈가왈부 할 수 있다더냐?」

 

「설사 이 몸이 죽는다 하여도 그 어명은 받들 수 없습니다.

신첩은 이미 선황의 뜻을 받들어 조시위에게 몸을 맡긴 더러운 몸이옵나이다.

어찌 이런 몸으로 용체를 대접할 수 있사옵니까?」

 

  곤룡포의 젊은이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선장을 꺼내어

그만 박살을 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나 곧 화를 누르더니 오히려 능글스럽게 웃었다.

 

「후궁의 미녀나 표방의 여인들은 모두 짐의 총애를 받고자

애쓰는데 유독 너만이 짐의 따뜻한 뜻을 거역하니 그 어찌된 일이냐!」

 

  그러자 취접이 말하기 전에 앞서 섰던 남의의 환관이 한걸음 나섰다

 

「황상께서는 어찌 그와 입씨름을 하고 계십니까?

이 일은 소신에게 맡겨 주십시오.

삼일 안으로 그녀로 하여금 황상의 뜻을 순종도록 하겠습니다.」

 

  곤룡포의, 젊은이는 그 말에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짐은 아직껏 이런 의지가 굳센 여인은 처음 본다.

가상타 여기니 너무 괴롭히지 말아라.」

 

하고는 방을 나섰다.

 

  곤룡포의 젊은이를 전송하고 난 남의의 환관이 취접을 돌아보고 엉큼하게 웃었다.

 

「간이 크구나. 어디 황상의 뜻을 끝까지 거역하는가 보자‥‥‥」

 

하더니 등을 들고 있는 한 내시에게 명령하였다.

 

「빨리 가서 나의 교피편(蛟皮鞭)을 가져오너라.

어디 이 년이 얼마나 악독한지 두고 보자.」

 

  내시가 물러가더니 얼마 안 있어 한 개의 채찍을 가지고 달려왔다.

  남의의 환관은 채찍을 받아 들고는 두 건장한 궁녀에게

손수건으로 취접의 입을 막게 하였다.

그 즉시 가죽 채찍을 들고 취접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살은 터지고 피가 튀었다.

옷은 찢겨나가고 머리는 산발하여 흩어졌다.

조해평은 옛날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이 지독한 곤욕을 당하자

갑자기 측은한 마음과 함께 애정이 불붙어 올랐다.

바람을 가르는 채찍이 마치 자기 몸에 와 닿는 듯한 아픔을 느낀

그는 끝내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러자 가슴의 피가 끓어오르면서 자기도 모르게 혼절하고 말았다.

 


  청포 노인은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자 잠시 중단했다.

이때 갑자기 남사(藍紗)로 몸을 감은 백의 소녀가 아! 하고 놀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건 바로 나의 어머니죠? 그렇죠?

가엾은 우리 어머니는 조금도 후회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나 얼마나 고통을 당하였겠어요.‥‥‥」

 

하림 역시 벌써 울음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를 부드득! 가는 것이었다.

 

「남의의 환관은 굉장히 나쁜 사람이군요.

이 다음 만나게 되면 버릇을 가르쳐 주어야겠네요.」

 

주약란 역시 눈동자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입술을 깨물고

청포 노인의 입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다.

옛날의 기억을 더듬는 듯한 눈초리였다.

청포 노인이 길게 탄식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 나는 중상을 입어 대부분의 진기가 전신의 혈맥에 정체하고 있던 때였지.

그런 중에 옛 애인이 채찍아래 고형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그만 몸의 중상도 잊고

진기를 갑자기 돋운 나머지 기혈이 치솟아 혼절하고 말았던 거야.

내가 깨어났을 때에는 그 환관 녀석의 손은 멈추고 있더란 말이야.

속으로는 겁이 덜컥! 나더군. 혹시 취접이 채찍에 맞아 죽은 거나 아닌가 하고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 살며시 내다보니 두 갈래로 머리를 땋고 노란 비단 옷을 입은

소녀가 취접의 몸 위에 엎치고 있더군.

그 환관 녀석은 채찍을 높이 쳐들고 있었지만 혹시 그 소녀를 다칠까봐

감히 내려칠 수 없는 모양이었어.

나는 오랫동안 대절에 살았기 때문에 그 소녀의 복장을 보고도 단번에

그의 신분이 존귀한 줄 알았지.

그런 까닭에 그 환관 녀석은 끝내 채찍을 내려치지 못했지.」

 

  남사를 걸친 소녀가 탄식하며 울먹이었다.

 

「그 소녀가 누구였어요? 참 착한 소녀였군요.

후일에 혹시 만나면 어머님에게 베푼 은혜를 엎드려 감사해야겠어요.」

 

조해평은 주약란을 쳐다봤다.

남사의 소녀도 그를 따라 주약란을  쳐다보았다.

 

「나비(蝶)야, 그 여자는 바로 선황의 골육이신 란대(蘭黛) 공주로서 바로 너의 옆에 서 있다.」

 

  남사의 소녀의 눈은 금시에 눈물이 가득히 피어올랐다.

너무나 감격하고 고마움에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얼마 전 언니를 처음 볼 때에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았어요.

하도 이상해서 저의 어머님이 남기신 흰 손수건을 펼쳐보고 나서야

그 손수건 위에 그려진 인물인 것을 알았어요.

저의 어머님이 살았을 때에는 매일같이 그 비단 수건에 그려진 인물을 보고는

묵묵히 기도를 드렸답니다.

또 저에게 늘 타이르기를 만일 네가 그 그림의 인물을 만날 때에는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 해도 분부만 내리면 목숨을 걸고 받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아! 그런데도 그 그림의 얼굴이 어릴 때에 그린 것이라 지금까지 언니가‥‥‥」

 

하다가 재빨리 말을 바꾸어

 

「그분이 지금 이렇게 바로 앞에 계시는 공주마마이신 줄이야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실은 주약란도 그제야 자기의 기구한 옛 일들을 하나하나 기억해 낼 수가 있었다.

  그러자 자연히 자기의 과거며 현재의 신분이라던가 위치를 깨달을 수가 있었다.

  주약란은 쓸쓸히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란대 공주는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졌어.

지금 나는 한낮 주약란이라는 여자에 지나지 않아.

그러니 너도 역시 나를 란이 언니라고만 불러 줘‥‥」

 

  그러자 갑자기 조해평은 심한 기침을 했다.

그는 무척 힘들여 공력을 운행시켜 내상을 누르면서 가까스로 말문을 열었다.

 

「나는 그 비참한 광경을 보고는 갑자기 살고 싶은 욕망이 불같이 일어났지.

내가 살아야 만이 취접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즉각 정신을 가다듬고 귀원비급을 펼쳐 들었어.

그리고는 요상편(療傷篇)에 기재된 도기귀원(導氣歸元)의 법으로 자가 치료를 하기 시작했지.

한 번 전신에 진기를 일주시키자 상처가 많이 나아지더군.

눈을 떠 보니까 창문에 햇빛이 가득한 것이 대낮이야 하기야

이 자가 치료(自家治療)를 하는 시각은 적어도 서너 식경은 걸리는 데도

다행히 그때까지 나의 행적은 발각당하지 않았었지 ‥‥‥」

 

  그제야 주약란도 기억이 나는지 앞질러 말했다.

 

「그때 사부께서 운공에 성공하시고 맥혈에 잠겨 응결된 진기를 단전에 도입시킨 뒤

바로 이층에 올라가 취 이모님을 보러 갔었지요?」

 

「그렇지. 나는 가만히 팔과 다리를 뻗고 진기를 운행하여 보았어.

그러자 왼 팔과 오른 다리의 저림이 완전히 가시더군.

비록 경맥은 유통되지 않았으나 거의 나은 거지.

그래서 취접의 행방과 생명이 걱정이 되어 대궐 안에 있다는 것도 잊고

곧바로 이층으로 뛰어 올라간 거지.

그때 선황 무종과 공주님도 방 안에 있기에 그만 천정에 몸을 숨겼어‥‥‥」

 

「맞았어요. 이제 생각나요, 부황(父皇)이 가시자 웬 사람이 뛰어내리기에

저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아마 놀라서 기절하였던가?」

 

「기절한 것이 아니라 내가 뛰어 내리자마자 우선 공주의 혼혈을 짚어 버리고 만 거야

그때 나는 수염이 자라서 얼굴을 덮었거니와 옷도 거지꼴이라 공주가 보고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르면 걱정이다 싶어 혈도를 짚은 거야.

심지어 취접도 나를 보고 놀라 소리 지르려고 하기에 그녀의 마혈(麻穴)을 짚고서야

내가 누구인가를 말했어.」

 

  주약란이 가볍게 탄식하며 끄덕이었다.

 

「사부님은 앞으로 저를 란이라고 불러 주세요.

공주 두자는 듣기에 실로 거북합니다.」

 

「취접이 그때까지 나를 잊지 못하는 정의는 여전하더군.

자신의 상처도 돌보지 않고 즉각 나를 데리고 대궐을 빠져 나가는 거야.

또한 이 늦은 노복이 비록 법을 모르긴 해도 공주까지 황궁에서 데리고

나을 마음은 전혀 없었던 거야.

그런데 취접은 공주를 데리고 가자는 거야.

그녀의 말은 너의 신분이 비록 고귀한 분이기는 하나

생모가 벌써 돌아가셨기에 젖먹일 때부터 자기가 친 엄마처럼 길러 정이 들어서

그대로 두고 갈 수 없다는 거지.

또 선황 무종은 환관 녀석인 유공(酉公)의 농간으로 놀기만 할 줄 알았지

정사를 돌보지 않아 후궁에는 발그림자도 안 비친다는 거였어.

그렇기 때문에 너 혼자 남겨두면 돌볼 사람도 없거니와 비빈들의 시기로

오히려 해를 입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기에‥‥‥)

 

「취 이모님 말씀이 옳아요. 심궁에 갇혀 사는 것이 무엇이 좋아요? ‥‥‥」

 

「나는 그 궁에서 사흘 동안 숨어 나의 내상을 완치 시켰지.

취접의 채찍에 받은 상처도 대부분이 나왔기에 나흘째 되는 밤에

그녀를 데리고 대궐을 벗어나 현옥을 타고 이 백운협에 돌아 왔는데

공주도 그 때 내가 함께 데리고 온 거야‥‥‥)

 

  그러면서 말을 뚝 끊고는 허공에 뜬 둥근달을 쳐다보았다.

 

  새삼스럽게 옛 일을 회상하자 감회가 깊은 모양이었다.

 

  어느덧 그의 무표정한 눈에서는 눈물이 달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주약란도 그가 옛 기억을 더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러나 남사를 걸친 소녀는 궁금한 듯 물었다.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어요?」

 

  청포 노인은 꿈에서 깨어난 듯 다시 말문을 열었다.

 

「취접은 이곳에 온 것이 매우 즐거운 모양이더군.

그녀는 매일같이 꽃에 물을 준다, 꽃가지를 다듬는다,

밥을 하고 옷을 깁는다하며 바쁘게 돌아갔지.

그리고 나는 혹시 그녀가 쓸쓸할까봐 산에서 노루새끼, 흰 토끼 등을 잡아 주었고‥‥‥」

 

  갑자기 하림이 감탄한 소리로 참견했다.

 

「그런 생활은 정말 즐거울 거예요.

만일 몽환 오빠의 상처가 낫는다면 나도 그런 생활을 할 거예요‥‥‥」

 

「어느 달 밝은 밤에 나와 취접 그리고 란대공주 우리 세 사람은

종운암(聳雲岩) 꼭대기에서 달구경을 하였었어.

그날 밤의 달빛도 오늘 밤과 같이 무척 아름다웠지.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고 이십 년이란 세월에 산천은 유구한데 사람은 간곳이 없어.

똑 같은 달밤이건만 심사는 판이하군.」

  남사를 걸친 소녀가 그 이야기에 무척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버님과 어머님 사이는 그렇게 정다웠다면서 어머니는 어떻게 되어서 떠나셨어요?」

 

  조해평은 그 물음에 깊은 참회의 얼굴빛을 굳혔다.

 

「다 너의 이 아버지가 바보 같은 탓 이었어‥‥

따지면 모두 귀원비급 때문이었지.

너의 어머님이 그 일로 노하여 나를 안 보겠다고 떠나가고 말았지.」

 

  주약란도 그 당시의 모습이 기억나는 모양이었다.

 

「네! 그?생각이 나요. 아주 생생해요.

취 이모가 백운협을 떠나갈 때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이 부어 있었어요.

그런 것도 모르고 나는 슬픈 일이 있어 밖으로 잠시 나가시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한번 가시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은 것도 모르고.」

 

  그날 밤 산 위에서 그녀는 매우 유쾌해 하였어.

그런데 굴로 돌아와서 갑자기 울적해 하더란 말이야.

왜 그러나 싶어 물었더니 자기가 아끼는 옥비파(玉琵琶)를 잊고

궁중에 남겨두고 왔기에 언짢아한다더군.

그렇지만 곧 풀어져 웃는 거야.

그러면서 자기는 그 비파를 무척 좋아하지만 나를 좋아하는 만큼의

천분지 일도 못된다고 하더란 말이지.

그리고 이 풍경이 절묘한 곳에서 평생을 산다면 아무 바랄 것도 없다고 하더군.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듣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란 말이야

그날 밤으로 대궐 안에 숨어 들어가 옥비파를 가져오는 동시에 절묘하게 만든

옥금(玉琴)도 가져 왔었지.

허나 그 옥비파의 놓아둔 곳을 몰라 찾느라고 이틀이 걸렸어.

이틀 만에 취접이 틀림없이 기뻐하리라고 생각하며 돌아 왔지만

그녀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나무라더군.

즉 위험한 곳을 왜 가서 자기를 며칠씩이나 잠 못 이루고 걱정하게 했냐하는 것이었지.

그러다보니 나도 그녀의 그와 같은 꾸지람을 듣고 매우 기분이 상해 버렸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고생 끝에 갖다 주었는데도 도리어 그녀가 불쾌해하니

여자의 마음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지금생각하면 그러한 그녀의 성실한 애정은 사람을 감격케 하는 것이었지만

그때는 몰랐지‥‥‥」

 

  남사의 소녀가 다시 조해평에게 물었다.

 

「그 후에는? 설마 그 일 때문에 어머님이 떠나신 건 아니겠죠?」

 

  잠시 동안 주저하던 조해평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이후 그는 나에게 더욱 알뜰한 정으로 대해 주었지.

여가 있을 때는 비파를 타고 노래도 불러주고 하면서.

그러던 어느 폭풍우가 일어나던 밤이야.

그녀는 갑자기 내가 거처하는 석실로 달려오잖아.

뇌성과 번개가 무섭다고 같이 있자는 거야.

그날 밤‥‥‥ 그날 밤 처음 우리들은 성혼하게 되었어.

그리고 난 후에야 비로소 나는 귀원비급의 몇 가지 심오한 무공은 애정을 얻음으로서

단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후회하기 시작했지.

그때부터 취접에 대하여 혐오하기 시작했던 거야.

아무리 그가 달래어도 나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나의 혐오감을 더 차게 만들었지.

그때만 해도 나는 완전히 무공에만 미쳤던 때라

후회 끝에 커다란 바위를 나의 석실에 운반하여 문을 막아 버리고 만 거야.

취접이 문밖에서 몇 번이고 애걸하는 것도 들은 척도 안하고.

그녀는 그 바위를 움직일 힘이 없기 때문에 순전히 밖에서 울며 애걸하곤 하였던 거야.

이런 가운데 몇 달이 흘러가도 그녀에게 나는 이야기도 안 했지.

최후로 한번 그가 애걸할 때 임신했다고 말하는 것 마저 나는

여전히 깨우치지 못하고 상대를 안 하고 말았어.

지금 생각하면 그가 나를 그토록 증오했다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주약란과 하림도 그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더욱이 남사의 소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석실을 나와 장법을 수련하러 갔지.

석실을 떠날 때 바위를 열고 닫지 않았기 때문에 취접이 뛰어 들어가

귀원비급세 권을 전부 가지고 떠나 버리고 말았어.

내가 돌아와 보니까 란대 공주 혼자서 울고 있고 백학인 현옥도 없겠지.

나는 그때 백학을 타고 어디 바람 쐬러 간 줄로만 알고 곧 돌아올 줄 알았지.

그러나 그날 밤에도 돌아오지 않았어.

나는 그제야 불안을 느끼고 그녀에게 어떤 나쁜 일이라도 생기지 않았나.

걱정하기 시작했어.

특히 란대 공주가 울며 취접을 찾아 달라고 어찌나 떼를 쓰는지

 더욱 불안한 가운데 열흘이 지났지. 삼일 후 현옥은 석굴로 돌아 왔지만

취접의 행방은 전연 묘연했어.

그제야 나는 무예에 대한 열광으로부터 깨어나서 취접을 그리워하기 시작한 거야.

그때부터 귀원비급 같은 것은 버려도 좋다는 마음이 들었지.

그리고 그에 대한 그리움이 날로 더해가고‥‥‥

나는 지나간 날 취접에 대한 행동을 후회하며 매일 같이 공주를 데리고

백학을 타고 심산으로 취접을 찾으러 다녔어.

즉 반년 동안 계속하였으나 조그마한 단서도 얻지 못하고 말았지.

나는 회한과 그리움으로 정말 살고 싶지 않았어.

그러나 공주를 생각할 때에, 금지옥엽의 몸을 무단히 이곳으로 데려온 내가

죽으면 누가 돌보나 하는 생각에 비통함을 참고 공주에게 무공을

전수하기 시작하였던 거야.

그때 심정으로는 공주가 자라고 또 무공이 어느 정도 자기 자신을 방어할 수 있게 되면

공주의 신세를 이야기 하여준 후 대궐로 돌려보내려고 하였지.

그리고 나는 일생의 세월을 걸고 하늘 끝까지 취접을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은 거 야.

그러나 공주의 천부재질이 총명하고 영특해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바람에

나는 그만 공주의 재질을 썩히기 아까워 나의 모든 무공을 전수하게 되었고

또 공주의 이름을 주약란, 별호를 소대(小黛)로 지어 암암리에

란대공주의 존귀한 신분을 나타내게 하였지‥」

 

  거기까지 말하고 조용히 한숨을 쉬면서 주약란을 차분하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아마 내가 너의 재질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까지 살아있지도 않았을 걸‥‥‥」

 

  주약란도 눈물을 글썽이면서 애달프게 조해평을 쳐다봤다.

 

「그 당시 저의 나이가 너무 어려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 한스럽군요.

 만일 열 살만 더 먹었어도 취 이모가 떠나지 못하도록 말렸을 것을‥‥‥‥」

 

「내가 그렇게 매정하게 대했으니

그녀가 그토록 슬퍼하고 나를 버리고 떠난 것도 무리는 아냐.

가냘픈 여자의 몸으로 더구나 무거운 몸으로 떠나가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내 평생에 최대의 유감지사야!」

 

  남사의 소녀도 울며 원망하듯 말했다.

 

「어머님이 그토록 매정하게 원망하는 것도 무리가 아녜요. 나 ‥‥같으면 ‥‥‥」

 

하다가 상대방이 자기 아버지인 것을 상기한 듯 말을 더 못하고 소리를 내며 울었다.

 

조해평도 은근히 이슬 맺힌 눈시울을 닦으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얘, 아가야 울지 마라.

이 애비도 이 일로 반생 동안을 줄곧 회한의 고통 속에서 살아왔느니라.

지금은 란대공주도 나의 전 무공을 전수받았고 또 나의 귀여운 딸자식과 상면 하였으니

세속의 은원은 모두 끝나고 만 거야.

나도 이제 안심하고 너의 어머니를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녀를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이장(移葬)해야겠다.

그리고 그녀 옆에서 나의 남은 생애를 보내겠다.

옛날 내가 그에게 준 고통을 내가 이번에는 받을 것이다.

난 그의 울며 애걸하던 목소리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

지금 바로 그녀의 혼령 앞에 달려가 너의 어머니가 나에게 한 것과 똑 같이 참회하겠다.」

 

  주약란도 가만히 입을 열고 원망하듯 말했다.

 

「사부님의 무공과 현옥의 비행력으로 취 이모님이 하늘 끝닿는데 있어도

끝까지 찾았어야 할 것 아녜요?」

 

「내가 그녀를 찾지 못했더라면 그녀로 하여금 마(魔)가 들게도 안 했을 거다‥‥‥‥」

 

  그리고는 조해평도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원래 효종 황제가 취접을 조해평에게 하사하였지만 두 사람은

이년 동안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조해평은 무공에 미쳐 동정을 잃기를 꺼려했다.

취접은 비록 그를 극진히 사랑했으나

여인의 몸으로 감히 동침을 요구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조해평이 장진도(藏眞圖)를 얻어 몰래 대궐을 빠져 나가

귀원비급을 찾으러 간지 십년 동안 취접은 비록 사모의 정이 열렬했으나

여인의 몸으로는 삼청궁에서 밤마다 그를 위하여 기도를 드리는 것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이윽고 효종이 승하하고 무종이 즉위하였다.

무종은 매일 같이 주색에 빠지며 환관 유공이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만든

표방(豹房)에 들락거리면서 정사는 돌보지 않고 유공과 같이 희희낙락한 세월만 보내게 되었다.

 

취접의 자색은 본래부터 아름다워 별로 이렇다하게 눈 뜨이게 단장을 하지는 않지만

그녀의 미모와 요염한 자색은 감출 수 없었다.

더욱이 한 사람을 그리워하는 정으로 더욱 청초한 미태를 풍기게 되어 후궁 가운데서도

그녀를 따를 자가 없었던 것이다.

 

평소 그녀는 어화원(御花園) 가운데의 어느 조그마한 누각에 기거하면서

도통 바깥세상을 모르고 살아 왔었다.

그 누각은 효종이 그녀를 조해평에게 내릴 때 특별히 그들이 기거하라고 기증한 곳이었다.

이는 당시 조해평이 효종으로부터 가장 신임을 받고 매일 그가 옆에서 보호해 주는

충성에 보답코자 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조해평이 몰래 대궐에서 사라지자

효종은 크게 진노하여 형부에 어명을 내려 천하에 공문을 띄워

조해평을 붙잡아 오도록 하였던 것이었다.

다행히 취접에게 죄를 가하지 않은 것은 바쁜 정무에 취접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태자 무종이 즉위하여 연호를 정덕(正德)이라 바꾸었다.

명나라 황제 가운데 가장 풍류의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환관인 유공, 마영성(馬永咸), 곡대용(谷大用), 위빈(魏彬), 장영(張永), 구취(邱聚), 고봉(高鳳)과

라상(羅祥) 팔당(八黨) 또는 팔호(八虎)라고 일컫는 이 여덟 간신에게 충동질 당하여

주색잡기에만 골몰하고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색이 고운 여인은 눈에 띄기만 하면 표방에 끌려가 황제의 노리개가 되는 것이었다.

 

당시 취접의 친한 벗으로 옥대(玉黛)라는 궁녀가 있었다.

자색이 고와 무종의 눈에 들게 되어 대비(黛妃)라는 칭호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수개월 후에는 다른 궁녀에게로 옮아간 무종에게 냉대를 받기 시 작하였다.

 

그 후, 대비가 잉태하게 되고 양춘(陽春) 삼월에 딸아이를 분만하였다.

무종도 애를 낳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달려 왔으나 낳은 애가 딸임을 보고는 실망하였다.

단지 아기를 란대 공주라고 이름 짓게 하고는 표방으로 되돌아 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대비(黛妃)는 아기만 낳으면 다시 무종의 총애를 받을 줄 생각했으나

그렇지 못하자 화병에다 산후 부조리로 병세가 급전하여 죽고 말았던 것이다

그가 죽을 당시에 취접을 불러 아직 돐도 되지 않은 란대 공주를 맡기는 동시에

무종에게 총애를 받을 때에 하사받은 금은 패물도 모두 취접에게 증여하고 죽었던 것이었다.

눈물을 머금고 유언을 받은 취접은 진심으로 아기를 키웠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인 이년 후, 무종은 어느 날 새삼스럽게도 란대 공주가 생각나

하문하여 보았다 알아 본 결과 대비(黛妃)는 이미 죽고 란대 공주는 어느 궁녀에게

키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었다.

무종은 갑자기 아버지된 책임감을 느꼈던지 즉시 어화원으로 거동하였다.

취접이 살고 있는 누각에 딸을 보러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처음 취접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 그만 군침을 흘리게 되었다.

마음이 동하고 탐이 났다.

 

그 당장에 취접의 환심을 사려고 비빈(妃)의 칭호마저 내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취접은 그것을 완곡히 거절하고 말았다.

이미 타인에게 허락한 몸이었기 때문이었다.

새삼스럽게 황제를 모실 수 없다고 딱 잘라 거절하였다.

그래도 무종은 쉽사리 단념하지 많았다.

오히려 취접이 그럴수록 더욱 접근하여 왔다.

취접이 어떠한 여자라는 것은 따지지도 아니했다.

오직 자색만 곱고 마음에 들면 그만이었다.

선황의 유명(遺命)을 받들어 딴 사람을 모신 이상 그럴 수 없노라고 군신지륜을 견지하였다.

그래도 무종은 막무가내였다.

이때 란대 공주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이 어린 란대 공주는 취접이 잠시라도 옆을 떠나기만 하면 울고 마구 보채었다. 

무종도 그것을 보고는 딸을 생각해서 취접을 함부로 다루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취접은 처녀의 몸이었다.

순진무구한 몸이었다.

그러니 아직까지 남자를 알 까닭이 없었다.

오직 황제의 요구를 물리치고 깨끗한 몸을 보존하려니

거짓말을 꾸몄고 군신지륜을 쳐들어 함부로 범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래도 무종은 취접의 아름다운 자태를 못 잊어 때때로 찾아와 끈덕지게 그 몸을 탐내었다.

그럴수록 취접도 더욱 다부지게 몸을 도사리며 황제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러던 중 마침내 환관 유공에게 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환관유공은 악명이 높은 간신이었다.

간신은 취접의 몸에 사정없이 채찍으로 매질을 하였다.

온 몸은 찢어지고 피투성이가 되고‥‥‥‥

 

그때 마침 조해평이 달려와 그녀를 구출하였던 것이다.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자 조해평은 하늘을 쳐다보며 가슴을 쳤다.

 

「전부 내가 바보였던 탓이었어.

그녀는 나 때문에 온갖 고통을 다 겪어왔어.

그럼에도 나는 이렇다하게 그녀를 잘 돌보지 못하고 고통 속에 죽게 하였으니‥‥‥‥」

 

조해평은 후회에 입술을 물고 억울함에 몸을 떨었다.

차마 옆에서 보기만 해도 민망스러울 정도였다.

 

주약란도 같인 이를 갈며 울었다.

 

「고약하게도 몇몇 환관이 부황을 충돌 질하여 얼마나 많은 양가집 부녀자를

해치게 하였는지 모르겠군요.」

 

조해평이 그 말을 듣자 금방 얼굴을 굳혔다.

그런 후 조용히 타이르듯이 말하였다.

 

「너의 부황은 천자의 지존이 되신다.

우린 신하된 도리로 그 같이 비난하면 못쓰는 거야.」

 

주약란은 그래도 분함을 참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만일 부황이 아직 살아 계시다면 죽음을 무릅쓰고 라도 충고를 드려

유공 등의 간신들을 한칼에 참하게 하겠어요.」

 

  남사를 걸친 소녀가 갑자기 탄식하며 말했다.

 

「아버님은 어떻게 하여 어머니로 하여금 마가 들게 하였어요?

그리고 왜 구하려고도 하지 않았죠?」

 

조해평의 얼굴은 침울해지더니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치 지나간 옛일들을 회상이나 하려는 듯이 ‥‥‥

사실 조해평의마음 속은 몹시도 암담하고 우울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나는 란대 공주에게 무술을 전수하느라고 전심전력하였었지.

그러다 보니 너의 어머니를 찾아갈 수 없었어.

공주의 무공이 이루어질 때는 벌써 팔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말았어.

그제야 나는 종운암(聳雲岩) 봉우리 위에서 남은 반평생을 취접을 찾기 위하여

보내기로 마음먹었어, 만약 그녀를 찾지 못하면

다시 백운협(白雲峽)으로 돌아오지 않기로 맹세하였지.

 그리고 곧장 현옥을 타고 떠났었단 말이야.

그러나 얼마 안가서 란대 공주 일이 무척 궁금했어.

겨우 열서너 살 소녀에 불과한데 혼자 이런 황산에 남겨두면

비단 선황에 대하여 죄송할 뿐 아니라

취접을 생각해서라도 미안하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단 말이야.

한동안 생각하다가 나는 북경으로 달려갔었지.

몸집이 크고 무예가 강한 궁중 시위와 나이가 좀 많은 궁녀

이렇게 둘을 사로잡아서 이곳으로 데려왔지.

그런 후에 란대공주의 내력을 들려주고는

그들로 하여금 공주를 모시겠다는 맹세를 굳게 다짐받고

공주의 시중을 들게 하였지.

한편, 공주로 하여금 그들에게 무예를 가르치게 하는데

그 궁중 시위인 신응(神鷹)과 진보(陳溱)라는 인물은

비단 무예가 출중할 뿐 아니라 충성심도 놀라웠었어.

그래도 선뜻 마음 놓고 떠나지는 못했었지.

나는 몰래 그들이 시중드는 것을 근 한 달간 살펴보았지.

그들이 진심으로 공주를 위하기에 마음을 놓고 취접을 찾아 떠나기로 했지.

처음에는 현옥을 타고 떠나려고 했으나 나 때문에 취접이 겪은 고생을 생각하고

걸어서 이곳을 떠났어.

떠난 지 오년 만에 천하에 발자국이 나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끝내 민산(岷山)에 백화곡(白花谷)이란 깊은 골짜기에 있음을 찾게 되었지‥‥‥‥」

 

  조해평은 말을 끊고 새삼스럽게 남사 소녀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뭇 귀여운 듯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아가야! 그때 아마 너는 열서너 살 되었을까?

나는 첫 눈에 너를 알아보았지.

 무척 귀엽고 총명해 보였어.

 너 나이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서 놀고 있었지만

너는 꼭 너의 어미를 닮았더란 말이야.

반가운 김에 단박에 뛰어가 너를 껴안고 내가 누구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어서 간신히 조급한 마음을 달래면서 숨어 보고 있기만 했었어!

왜냐하면 너의 어미가 나를 무척 미워하고 있을 테니

선뜻 만나줄 지가 의문이고 겁이 났던 거야.

그래서 할 수 없이 너희들이 집에 돌아갈 때까지 몸을 숨기고 있다가

너의 뒤를 몰래 뒤쫓아 갔었지.

너는 그것도 모르고 너의 집으로 갔었지?

얼마 안가서 너는 어떤 석실로 들어가더라.

이 속에 내가 그렇게도 그리워한 취접이 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더라.

내가 뛰어들기만 하면 그녀는 싫던 좋던 나를 만나 주겠지 싶어 무작정 뛰어 들었지‥‥‥‥

그런데 그것이 그만‥‥‥‥

내 평생의 한이 될 일을 저지르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어.

글쎄 내가 너무 갑작스럽게 뛰어들어 그녀가 놀랬던 가봐.

그 충격을 받은 그녀는 그 길로 마가 들어서 죽게 되었으니‥‥‥)

 

가슴쓰린 추억을 더듬자 더욱 그 한이 되살아나는 모양이었다.

입술을 깨물며 참회하는 그 모습은 처참하기까지 하였다.

 

주약란도 가슴이 답답했다.

 

「그러나 취 이모님도 어떤 내공을 수련하고 있었다면서요?

그런데 아무리 놀랐다 하기로서 마까지 들다니오?

설사 마가 들었다 해도 사부님의 정순하고 절묘한 내공과 귀원비급의 치료법으로서도

치료할 수 없었어요?」

 

  과연 주약란의 물음에는 일리가 있었다.

 

  조해평이 탄식하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나도 그 즉시 손이야 썼지.

그러나 귀원비급에 기재된 치료법으로도 도저히 기사회생시키지 못하고 말았어.

 내 얘기를 더 들어보면 이해가 가겠지.

그 당시 취접은 물론 열심히 내공을 수련하고 있었어.

그 내공은 천기진인의 현문일원강기(玄門一元雲氣)와 삼음신니의 반약현공을 합해서

이루어지는 대반약현공(大般若玄功)이라는 공력이었어.

그것은 귀원비급 중에도 가장 심오한 내공이란 말이야.

그것을 제대로 수도하자면 갖은 고초를 겪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지!

그러나 일단 그 무공을 완전히 수련하여 완전히 성공만 한다면

그 위력은 예측할 수도 없을 만큼 대단하고 그 공효(功效)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것이지,

그런데 취접이 그 무공을 수련하게 된 동기는 바로 나에게 있었던 것 같단 말이야.

취접이 생각하기를 내가 이미 귀원비급의 세 책 중에서

상, 중 두 권의 무학을 터득한 것으로 여겼던 모양이야.

그렇다면 그녀가 나를 무척 미워하던 처지라 나를 이기려면 대반약현공의 술법을

익히지 않으면 안 되리라 싶었던 모양이야.

하기야 그녀는 조금도 무예의 기초도 없는 섬섬약질의 아녀자에 불과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거야.

단지 조금 총명하다 해서 또 억지로 높은 내공을 수련하는 비결을 기억하고는 갖은

고생을 다해 가면서 수련을 쌓고 있었지.

그동안 많은 위험도 겪었을 거야.

그러한 때에 마침 내가 취접의 석실로 뛰어들었더란 말이야.

수련을 쌓던 중 가장 어려운 고비에 들어선 중이었어.

온 몸에 공력을 집중하고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내공을 다듬는 아주 긴요한 고비였었어.

그럴 때는 누구도 옆에 얼씬거려도 안 되거니와 심지어 놀라는 일이 있어도 안 되는 법이 야.

그런데 나는 나대로 십여 년 만에 만난다는 반가움에 앞뒤를 살필 겨를이 없었던 거야.

나는 나대로 너무 들뜬 나머지 무작정하고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갑작스럽게 뛰어들었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미련한 노릇이었어.

그러자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갑작스럽게 마가 들어 쓰러질 수밖에‥‥‥‥

그녀는 놀란 나머지 눈을 치뜨고 잠시 나를 보더니

입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지며 정신을 잃고 말더군.

너무나 갑작스러운 변고에 나는 나대로 놀라 한동안 넋을 잃고 말았어.

잠시 후에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모든 것을 짐작하고 깨달을 수 있었지.

눈앞이 캄캄해 오고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더군.

지금도 그때 그 순간을 생각하면 온 몸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니까‥‥‥

어쨌든 나는 급한 대로 그녀를 부축하고 우선 숨부터 돌려놓으려고 무진 애를 쓴 것은 사실이야.

얼마나 애를 썼는지 ‥‥‥

나는 그전에 대궐에 있을 때에 상처를 입은 일이 있었거든.

그때 익혀두었던 귀원비급의 요상편(療傷篇)을 생각하고는

그 즉시 치료를 다하여 보았으나 백방이 무효로 그만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어.

기가 막히더군.

하다못해 야속한 마음까지 들더구나.

그러던 차에 놀랍게도 취접이 정신을 차리고 나를 쳐다보지 않아?

그 순간 나는 어찌나 반가운지 그녀를 껴안고 연방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

그랬더니 잠시 후에 가까스로 입을 열더니 이렇게 말하잖아.

 

  (내가 대반약현공을 익히게 되면 천하제일의 자리를 빼앗길까봐

나를 불의에 습격해서 이 모양으로 만드는군요.)

 

  그리고는 또 그만 혼절하고 마는 거야.

어처구니없는 오해가 빚어낸 소리에 내 가슴은 찢어지는 것만 같았어.

어쨌든 그녀를 살려놓고 볼 일이라고 생각했었지.

그러고 보니 그제야 그녀가 수련하고 있던 귀원비급의 비법을 적은 책이

머리맡에 있기에 그걸 뒤져보았어.

그랬더니 그 책 끝장에 대반약현공을 수련하다 불의의 일로 마가 들면

일 년 이내에 온 몸의 경맥이 경화하여 죽는다고 쓰여 있더란 말이야.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다음 장에 치료법도 써 있더란 말이야.

거기에 써 있는 유일한 치료법이란

오직 만 년 묵은 거북의 배 속에 있는 알(卵)을 꺼내 먹어야 한다는 거야.

그런데 그 짐승은 아미산이라는 곳에‥‥‥

하고는 거기서부터 글이 끊겨 있을 줄이야.

글쎄 하필이면 가장 필요한 대목에서 뚝 끊겼으니

애석하고 분통하던 마음이란 말로 다 할 수 없을 지경이었지.

아마 천기진인과 삼음신니가 거기까지 쓰고는 쓰러졌던가 싶어‥‥‥

그만 나는 극도로 비통하여져서 귀원비급 책자를 마구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천기진인과 삼음신니가 이 책들을 만들 때의 그 노고와 정성을 생각해서 찢지 않고 놔두었지.

그나마 그 정도라도 치료법을 알고 나니 마음이 놓이더군.

그때 형편으로서는 그 이상 더 머무를 수가 없었고

곧 떠나야 할 것은 물론이었지만 막상 떠나지 못하고 우물거리고 말았어.

왜냐하면 그녀가 깨어나면 솔직한 내 심중을 말하고 오해도 풀고 떠나려고 망설인 거지.

다음 순간,

그녀의 무척 원망에 찬 증오가 그런다고 쉽사리 풀릴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자극만 더해 가리라 생각하고는 그냥 떠나고 말았어.

우선 만년 묵은 거북을 구하여 목숨을 살린 후에도 늦지 않을 거다 싶어서

곧장 아미산으로 향한 거야.

그러나 말이 아미산이지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재주가 있어야지 생각해봐?

높고 험한 봉우리도 수천수만이겠다,

길고 깊은 골짜기도 수천수만이 얽혀 있으니 말이지.

도대체 어느 산 어느 골짜기에 가야만 그 놈을 잡을 것인지 답답하기만 했어.

그러다 보니 아미산 속을 헤매다 반년이 훌쩍 지나지 않아!

그렇다고 그 놈의 그림자도 못 봤으니 초조하기는 말할 수조차 없지.

한편 취접의 병세는 걱정이 되지.

생각하다 못해 잠시 만년 묵은 거북 따위는 집어 던지고 다시 민산(岷山)으로 돌아간 거야.

단숨에 백화곡으로 달려갔지.

여하튼 그나마 그 사이 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는지가 더 궁금했으니까.

막상 돌아와서도 감히 들어가지는 못하고 단지 살고 있는지

안부만 알고는 돌아갈 심산으로 몸을 숨긴 거야.

그녀가 살고 있는 석실 앞에 나무 위에 올라가서 근 일주일이 지나도록 살폈지.

그런데 그동안 누구 한 사람도 얼씬거리지 않고 도시 사람이 사는 기척마저 없더군.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길은 없고 그만 불안하고 답답한 생각에 그제야 석실 안으로 뛰어든 거야.

그런데 이런 변고가 또 있나!

정말 어처구니가 없더군.

석실은 텅 비고 취접은 그림자도 볼 수 없었어!

너무나 허망해서 나는 정말 기가 차더군.

혹시 이미 죽은 것이나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딴 곳으로 이사를 갔을까? 안절부절 못했지‥‥‥」

 

  이같이 긴 이야기를 하느라고 조해평은 숨이 차는 모양이었다.

 

잠시 이야기를 끊고 주위를 둘러보며 길게 숨을 쉬었다. 

그 틈에 남사를 걸친 소녀가 그 말을 해명이나 하듯 대신 말했다.

 

「우리는 그 때 백화곡 뒤의 숲 속으로 이사를 갔어요.

이사를 갈 때 어머님이 하시는 말씀이 자기가 무척 미워하는 사람이

우리들의 거처를 알고 갔으니 다시 와서 소란을 피울 거라고 하면서 이사를 간 다구 했어요.

그러니 나보고는 절대 밖으로 나다니지 말라고 다짐하더군요.

그런데 이제 이야기를 듣고 보니 어머님이 가장 증오한 분이 바로 아버님이 되실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래 이럴 수 가 있어 요?」

 

  소녀는 안타까워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조해평도 가볍게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당시 나는 거의 미치다시피 된 심정이었지만 가까스로 참고 석실을 살펴보았지.

혹시 무슨 흔적이라도 없을까 싶어 둘러보노라니

살림에 필요한 기물들은 하나도 없더란 말이야.

아주 말끔하게 비워 있더군.

그걸 보고나서야 죽지 않고 이사를 갔다는 걸 짐작하게 되었지.

비록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지만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짐작이 가니

비로소 마음이 좀 가라않더군.

그래서 그 석실에서 이틀 밤을 자고 다시 아미산으로 달려가

계곡에서 만년 묵은 거북의 종적을 찾았지.

그리고 또 반년이 유수처럼 지난 거야.

그동안 그 넓은 아미산의 나무뿌리 돌 뿌리 할 것 없이 전부 뒤져 보았지.

결국 허탕치고 말았지.

아주 절망하고 만거야.

귀원비급이 알려준 지 일년이 지났으나 만 년 묵은 거북은커녕

조그마한 단서도 못 찾았으니 나의 심정이 어떻겠나?‥‥‥」

 

  남사의 소녀가 울며 그 말을 받았다.

 

「어머니는 숲 속으로 이사하신지 구 개월 만에 돌아 가셨어요.

마지막 돌아가실 때 나를 불러 놓고 유언하셨어요.

어머님이 가르친 대반약현공을 열심히 수련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임, 독(任, 督) 두 혈맥이 통하게 되고

그 때에는 대반약현공의 기초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계속 무단히 수련만 쌓으면

일익(日益) 정순하게 된다는 말씀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귀원비급을 자자구구(字字句句) 완전히 외우게 되거든

귀원비급을 반드시 불에 태워 없애라고 하였어요.

그런 연후에 나보고 괄창산 백운협에 찾아가서 복수해 달라고

손목을 쥐며 몇 번이고 부탁하며 돌아가신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어쩌면 좋아요!」

 

  남사를 걸친 소녀는 목이 메어 더 말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 , 이제 모든 것을 알고 보니 저의 아버진데 제가 어떻게 아버지를 죽일 수 있어요.

그렇다고 어머니의 유언을 저버릴 수도 없고‥‥‥ 저는 어쩌면 좋아요 ‥‥‥」

 

하고 다시 애처롭게 울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서쪽을 바라보고 꿇어 앉았다.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는 여전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입 속으로 가만히 기도하듯이 중얼거렸다.

 

그 모양이 매우 수상스러워 보였다.

주약란은 은근히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두 뺨은 연신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너무 엄청난 충격을 못 이겨 몸은 떨리고 가슴은 뛰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였다.

주약란은 급히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이때 조해평도 힘에 겨운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운기 조식하는 모양이었다.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도 아주 심한 고통에 잠겨 자기 딸의 행동을 통 모르는 모양이었다.

또 하림은 너무나 슬픈 이야기에 연신 흐르는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남사의 소녀는 장탄식을 하더니 울면서 소리쳤다.

 

「어머니,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지 못하는 소녀를 용서하시옵소서!」

 

그러자 어느 틈에 품에서 재빨리 한 자루의 비수를 꺼내어 자기가슴으로 가져갔다.

주약란은 깜짝 놀라면서 소리쳤다.

 

「무슨 일이야?」

 

그렇지 않아도 소녀의 수상한 행동에 잔뜩 긴장해서 살피고 있던 주약란이었다.

즉각 오른손을 뻗쳐 비수를 뺏으려던 그 순간!

뜻밖에도 남사소녀의 오른손이 무엇에 밀려나기나 한 것처럼 ?반자 남짓 밀려나고 말았다.

그러자 남사 소녀의 비수를 뺏으려고 내밀었던 주약란의 손은 엉거주춤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누가 잡아챈 것도 아니었다.

남사를 걸친 소녀 자신도 얼떨떨해서 주약란만 쳐다보았다.

주약란도 무심히 생각했으나 우연이겠지 하고는 급한 김에 황급히 외쳤다.

 

「빨리 비수를 놓아요!」

 

주약란의 꾸짖는 듯한 외침에 남사의 소녀는 순간 멈칫하고 주약란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순순히 비수를 주약란 앞에 놓고 말했다.

 

「어머님은 언제나 언니가 나보고 무어라고 말하던 그것이 명령이라면

무조건 따르라고 훈계하였어요.」

 

그런 후에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주약란은 비수를 집어 들고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고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취 이모가 나를 어릴 때부터 키워준 은혜는 친어머니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

물론 사부님께서 취 이모님에게 잘못하신 점은 많았어.

그러나 이미 이 수 십 년 동안 사부님께서 받은 참회의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거야.

취 이모님도 그렇다는 걸 아셨으면 벌써 사부님을 용서하시고 이곳으로 찾아 오셨을 거야.」

 

남사를 걸친 소녀는 갑자기 조해평이 깊은 내상을 입은 것을 생각했다.

급히 뒤를 돌아봤다.

 

「음?」

 

소녀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주약란도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그곳에 있던 조해평의 모습은 간 곳이 없었다.

 

「아니 아버님은 어디로 가셨어?」

 

소녀는 오히려 주약란을 쳐다보며 물었다.

 

원래 조해평은 자기가 받은 내상이 아주 중태인 것을 깨닫고 있었다.

비록 수십 년 동안 쌓아온 정순한 내공으로 상처의 발작을 억제하고 있지만

억제하면 억제할수록 발작할 때의 고통이 심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공력에도 한도가 있었다.

마침내 억제하고 있던 내상이 내부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하더니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조해평의 얼굴은 아픔에 일그러져 갔다.

금시라도 손끝으로 땅을 후비고 몸을 뒤틀 것만 같았다.

차마 비참하고 비참한 꼴을 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마침 여러 사람의 눈길이 남사 소녀에게 쏠리어 있었다.

그 틈을 노려 소리 없이 떠나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의 재간은 이미 신선의 경지에 도달해 있어서 신출귀몰(神出鬼沒)하였다.

바로 지척에 있던 사람도 눈치 챌 수 없었다.

금방 있던 조해평은 흔적도 없이 가버렸고 그나마 행방마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평시에 그토록 침착하던 주약란도 이 일에는 무척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부지중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울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약란은 곧 뛰어나가 가까운 언덕 위에 올라가서 불러봤다.

 

「사부님! 사부님!」

 

그러나 아무 대답도 있었다.

주약란의 애절한 부름은 허무한 메아리가 되어 쓸쓸히 울려 퍼질 따름이었다.

그때 학의 울음소리가 울려왔다.

현옥이었다.

사부를 찾는 애절한 부름은 사부를 불러오지 못하고 현옥을 불러오게 하였다.

현옥이 사뿐히 내리면서 주약란 앞에 앉았다.

주약란은 극도의 슬픔에서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하림은 너무 순진하여 대임(大任)을 맡길 수 없을 거야.

사부님의 딸은 백화곡에서만 자랐기 때문에 일처리를 못할 것이고

팽수위는 경험이 많으나 아직 믿을 수가 없는 처지인데

나마저 슬픔에 정신을 못 차린다면 지금의 사태가

 더욱 비참한 결말을 가져올 것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즉각 그녀 스스로의 슬픔을 억제하고 언덕을 내려와 남사소녀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손을 잡으며 말했다.

 

「사부님의 내공이 정순하셔서 비록 몸에 중상을 입었더라도 염려할 것은 없을 거야.

어쩌면 내상을 고치려고 가신지도 모르지. 사부님의 탁월한 재간으로는 상처가

더 깊더라도 문제없이 회복할 수 있을 거야.

이렇게 슬퍼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돌아가신 춰 이모의 자식이라고는 너 하나 뿐이야.

부디 마음을 굳게 먹고 사부님도 찾아야지. 그런데 너 참 이름이 뭐지?」

 

  남사의 소녀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소접(小蝶)이라고 해요.」

 

  주약란은 가볍게 탄식하며 소접을 껴안았다.

 

「취 이모님은 나를 어려서부터 키워 주시였고

또 사부님은 자기의 친 딸과 같이 나를 아껴 주시니

소접도 이젠 나를 친언니라고 생각하고 같이 지내요!」

 

  조소접(趙小蝶)은 무척 기쁜 모양이었다.

 

「언니는 공주님의 신분이신데도 이렇듯 저를 대해 주시니‥‥‥‥」

 

  주약란이 그 말을 가로챘다.

 

「한 때 공주는 이미 대궐에서 죽고 없어요.

지금의 나는 단지 주약란이라는 한 여자일 뿐이야.」

 

  딱 잘라 말하고는 그녀를 끌고 양몽환에게로 다가갔다.

무척 수심에 찬 얼굴로 들여다보더니 양몽환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어느덧 주약란의 고운 눈매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 내렸다.

 

  조소접이 양몽환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언니, 나 이 사람 알아요. 양몽환이란 사람 아녜요?」

 

  깜짝 놀라며 주약란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주약란도 약간 놀라며 물었다.

 

「네가 어떻게 아니?」

 

  조소접은 그 즉시 양몽환을 알게 된 연유를 말했다.

 

「백화곡(白花谷)을 떠나 이곳으로 올 때 배에서 만났어요.‥‥‥‥」

 

하고는 민강(泯江)의 배 속에서 만났던 사실을 일일이 이야기하여주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주약란은 새삼스럽게 물었다.

 

「그럼 네가 귀원비급의 내용을 자자구구 모두 외울 수 있다면 남의 상처도 치료할 수 있겠지?」

 

  조소접이 잠깐 생각하여 보고는 대답했다.

 

「그 요상편(療傷篇)에 많은 치료법을 기재하고 있긴 하여도 나는 치료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내공의 수련을 닦은 사람만이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데

나는 조금도 무공이란 것을 모르니 경맥이나 혈도(穴道)를

어떻게 주무르고 유통시킬 수 있겠어요?」

 

주약란이 이상한 듯이 다시 물었다.

 

「아니? 무공을 배우지 못하였다니 정말이냐?」

 

주약란으로서는 취 이모의 무공을 봐서도 그의 딸인 소접이 무공을 배우지 못한 것이

적 의심스러웠다.

 

「내가 철이 들고부터 어머님이 타좌조식(打坐調息)법 한가지만을

가르쳐 주기에 지금까지 그 법만을 계속해 온 이외에는 비파나 탔을까,

다른 무공은 조금도 배우지 못했어요.」

 

「그것이 어떠한 내공이지?」

 

「당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어머님이 가르친 대로만 하였을 뿐이었어요.

그런데 얼마 후에 귀원비급을 외우고 났을 때에야

비로소 내가 닦고 있는 내공이 대반약현공인 것을 알았죠.」

 

주약란은 이미 사부님의 모든 무공을 전수받은 바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 귀원비급을 본 일은 없었다.

그러니 대반약현공이 귀원비급 중에서도 가장 익히기 어렵고 정묘한 ?내공인 것을 몰랐다.

그러니 자기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귀원비급을 닦고 있으면서도 무공을 모른다니

주약란은 의심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접매(蝶妹)는 어릴 때부터 취 이모 옆에서 귀원비급을 외운 몸이잖아!

그런데도 무공을 모른다니 어떻게 하지?

조금 전에도 너의 비수를 빼앗으려는 금나수법을 피하는 것만 보아도

내가 반도 못 따라 가겠던걸.」

 

「내가 어찌 언니를 속이겠어요?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의 일이에요.

 내가 네 명의 시녀들에게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무척 졸라 댄 일이 있었어요.

그때 어머니가 들으시고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못하게 하잖아요?

그러면서 그따위 재간 따위로는 어머니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고 야단하시었어요.

그 후부터는 매일 네 식경씩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버릇을 키우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아홉 살 되는 해부터는 시간을 차츰 연장시키더니

조식(調息)법을 가르치지 뭐예요.

단지 그것만으로 십여 년이란 세월을 앉아서 보내게 되었어요.

그 동안 네 시녀의 무공은 날로 높아져 갔어요.

절벽도 나는 듯이 뛰어 오르고 날으는 새들과 나비들을 잡는 것을 보고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다시 어머님에게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어요.

너무도 졸랐던 가 봐요. 어머니는 꾸짖다가 안 되니까 그만 우시고 말더군요.

그 후부터는 두 번 다시는 어머니에게 무공을 가르쳐 달라는 소리를 못했어요.

매일과 같이 동굴 속에서 조식으로만 세월을 보냈죠.

그리고 나서부터 어머님은 나에게 귀원비급을 읽게 하였어요.

동시에 비파 타는 것을 가르쳐 주셨지만 결코 귀원비급의 무공을 직접 배우게 하지는 않았어요.

단지 그 책을 자자구구(字字句句) 빠짐없이 외우라고만 하셨지요.」

 

주약란은 눈을 크게 뜨고 더욱 미심쩍은 듯이 말했다.

 

「왜 그랬을까? 무공 요결(要訣)을 외우게는 하면서도 막상 재간을 못 배우게 하였으니 말이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래요. 하지만 어머님이 나에게 말씀하실 때에는 한없이 슬퍼 보이고

또 준엄하시기에 어머님의 말을 쫓아 귀원비급 세 책자의 내용을 모두 외웠죠.

나도 책에 적혀 있는 재간을 배우고 싶은 호기심은 대단했어요.

어머니도 그 눈치를 알았는지 하루는 지금 네가 수련하고 있는 임, 독(任 ?督)

두 혈맥이 통달하게 되면 무공을 배우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것이 그만 아버님의 실수로 어머님은 마가 들어 중상을 입은 지

일 년도 못되어서 돌아가셨으니‥‥‥‥

어머님이 중상을 입고서는 더욱 나의 내공 수련을 엄히 독촉하셨어요.

아마도 돌아가시기 전에 나의 임, 독 두 혈맥이 유통되는 것을 보고 싶었는가 봐요.

그러나 결국 저는 어머님을 만족시켜 드리지 못하고 말았죠.

이때 나도 비로소 내가 수련하고 있는 내공이 무엇인지 알았어요.

그것은 귀원비급 중에서도 현문일원강기(玄門一元?氣)와 불문 반약선공(佛門般若禪功)을

합하여 이루어진 대반약현공이란 내공법이였어요.

그러니 만큼 귀원비급에도 대반약현공을 제압할 수법은 없었어요.

그러자 또 내가 수련하던 임, 독 두 혈맥도 막 통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제 더 무공을 배울 것 없이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어 복 수를 하려고 했지요.

그리고 곧 백화곡을 떠나 백운협에 아버님을 찾아오게 된 거죠.

그러자 길에서 나쁜 사람을 만나게 되었어요.

나의 귀원비급의 책자를 빼앗으려고 하며 시녀들과 싸우게 되었지 뭐예요.

나는 무공을 모르기 때문에 앞에서 방관할 수밖에 없었죠.

그때 마침 아버지가 지나다가 강도들을 물리치고 어디 가느냐고 묻겠죠.

그때 비록 어머님이 그린 표상은 있었지만 아버지가 가면을 쓰셨기에 몰라보고

사실대로 말씀드렸죠.」

 

   듣고 있던 주약란은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랬었군. 틀림없이 사부님은 와호령에서 빼앗은 만년 묵은 거북을 가지고

백화곡으로 너를 찾아 갔을 거야 죽었을 것을 짐작하였겠지만 혹시나 하는 희망을 안고 말이지.

혹시 귀원비급에 어떤 방법이 있어 생명을 연장할 수 있지 않았나 하셨을 거야

그러나 백화곡에 당도했을 때에는 벌써 취 이모님은 돌아가셨을 뿐 아니라

너도 떠난 뒤였을 거야 그러니 상심 끝에 이리로 돌아오시다가 너희들을 만나게 되었을 거야」

 

「언니는 참으로 머리가 좋으시네. 조금도 틀림없어요.

아버님은 강도들을 물리치시고는 자기도 괄창산의 백운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고

하시면서 같이 가자고 하시겠죠.

그러면서 오는 도중에 나에게 얼마나 알뜰히 대해 주었다고요.

어릴 때부터 나는 어머님과 시녀들 외엔 다른 사람이라고는 통 접촉이 없었거든요.

그러니 아버님의 그 알뜰한 애호를 조금도 이상히 생각하지 않고 좋은 사람인 것으로만 알았죠.

아버님은 백운협에 가서도 여전히 그 가면을 벗지 아니하셨어요.

내가 그 날로 백운협에 가야 한다고 우기니까 백운협은 근처에 있다고 속이시면서

이튿날 데리고 가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러고 나서 만년 묵은 거북을 삶아서는 배 속에서 나온 알을 먹으라고 하시더군요.

그 알을 먹고 나자 갑자기 전신에 열이 나면서 괴롭기 한이 없더군요.

시녀들은 아버님이 나에게 나쁜 수단을 쓴 것으로 오해하고 크게 싸웠지 뭐예요.

시녀들은 단번에 아버님의 솜씨에 혈도를 짚여 쓰러지고 나도 분한 마음에 정신을 잃어버렸죠.

얼마나 잤을까? 내가 깨어났을 때 아버님은 옆에 계시더군요.

겁내지 말라고 하시면서 네가 먹은 만년 묵은 거북의 알은 세상에서 다시 구하지 못하는

신물(神物)이라고 하시고는 가버리더군요.

그러다가 밤이 새자 가시고, 밤이 깊어야 다시 오시어서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글쎄 우리 어머니를 죽인 원수를 내가 복수하러 왔다는 것을 알고는 그날 저녁

이경에 이곳에 온다지 뭐예요.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원수는 바로 백화곡에서부터 줄곧 우리와 함께 왔었다고 그러더군요.

도대체 아버님의 말씀이 어떻게 된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더군요.

바깥일에 어두운 나는 그때까지도 아버님이 바로 어머니가 말씀하시던

원수인 줄은 꿈에도 몰랐죠.‥‥‥‥어떻게 알겠어요?」

 

  조소접은 주르륵 눈물을 흘리며 어깨를 들썩 거렸다.

 

  주약란은 길게 탄식했다.

 

「사부님은 그때 취 이모님의 뜻을 따라 죽을 결심으로 신분도 행선도 밝히지 않은 것이야.」

 

  조소접이 계속하여 말했다.

 

「그래서 약 이경쯤 되어 시녀들을 데리고 약속한 이 장소로 왔었죠.

과연! 그곳에는 장포(長袍)의 노인이 있었어요.

그 즉시 어머님이 준 초상화와 대조해 보니 틀림없었어요.

곧 비파로 현음모심(弦音耗心)이라는 곡을 타서 아버님에게 내상을 입히게 되었죠.

언니가 마침 안 왔으면 친 아버님을 살해할 불효막심한 자식이 되었을 거예요.」

 

  주약란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방금 네가 말한 그 비파곡은 정말 사람의 혼백을 빼어 흔들더구나.

그 곡조 역시 귀원비급에 기재된 것이냐?」

 

「현음모심이라는 곡과 미혼이진곡(迷魂離眞曲)이라는 곡은

모두 귀원비급의 대반약현공과 같이 수록되어 있죠.」

 

  주약란은 새삼스럽게 소접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소접의 신비스러운 재간이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또 다른 것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참! 사부님이 만년 묵은 거북의 알을 꺼낸 뛰 거북은 어떻게 하였지?」

 

  조소접이 약간 어리둥절하다가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나는 만년 묵은 거북의 내단(內丹)을 복용하고 나서

곧 기절하였기 때문에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군요.」

 

  주약란은 몹시 낙담하였다.

 

  힘없이 양몽환을 바라보는 주약란의 얼굴은 암담하였다.

 

「접매(蝶妹),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 주겠어?」

 

「언니의 분부라 하면 제가 무엇을 거절하겠어요.」

 

「그렇다면 네가 갖고 있는 귀원비급을 좀 보여줘.

혹시 저 사람 을 구할 방법이 요상편에 적혀 있는지 봐야겠어!」

 

  조소접은 방긋 웃고 네 시녀에게로 갔다.

그 중 나이가 많은 시녀에게서 정교하게 만든 옥함을 받아 주약란에게 내주었다.

 

「이 속에 있으니 언니가 친히 보세요.」

 

  주약란은 급히 옥함을 열고 보았다.

 

귀원비급이라고 쓴 책자가 들어 있었다.

 

  아름다운 달필인 것이 여인의 필체였다.

 

무예계의 인사들이 목숨을 걸고 빼앗으려는 비급!

 

그러나 주약란은 자세히 볼 여유가 없었다.

 

곧 요상편을 폈다.

 

요상편의 서술은 각양각색의 치료법을 망라하고 있었다.

 

팔혈접골(八穴接骨)법, 폐혈봉맥(閉血封脈)법, 해독속근(解毒續筋)법,

기경순기(氣經順氣)라는 법 등등.  참으로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하나같이 귀중한 비법들이었다. 

 

무예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탐을 낼만한 자가요법(自家療法)이었다.

 

 그러나 아주 내공이 깊은 자만이 그 묘리를 터득할 수 있는 법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