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비연경룡

제 27 장 백운협 (白雲峽)으로 돌아가다 <寶劍震群>

오늘의 쉼터 2014. 6. 22. 14:02

제 27 장 백운협 (白雲峽)으로 돌아가다 <寶劍震群>
 

 

주약란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속임 없는 진실 된 말인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때마침 주약란으로서도 양몽환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좋은 협력자가 필요한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와 같은 재간꾼이 옆에서 도울 것 같으면 여러 가지 어려운 일에 무척

든든할 것은 틀림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당신이 그와 같이 진심으로 대한다면 내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일단 내가 허락만 한다면 모든 것은 나의 명령에 따라야 하고 조금도

나의 뜻을 어겨서는 안 될 것이에요. 아시겠어요?」

 

  팽수위(彭秀葦)는 주약란이 응낙하자

양 볼에 금방 기쁜 빛을 띄우면서 땅에 무릎을 꿇어앉는 것이었다.

 

「아가씨께서 이제 이 몸을 거두어 주신다면 차후 모든 것을 아가씨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추호의 어김이 있으면 하늘로부터 천벌을 받으오리다.」

 

「일어나세요. 이미 응낙하였는데 맹세까지 할 필요가 있어요?」

 

주약란은 팽수위를 데리고 천천히 석실로 들어갔다.

이때 시각은 겨우 사경이 조금 지날 때였다.

그때까지도 석실에는 여전히 소나무 기름등을 켜놓고 있었다.

오랫동안 심지를 자르지 않았기 때문에 불빛이 어두워 있었다.

하림은 등잔 옆의 침대 가에서 한손으로 턱을 받치고 앉은 채 꼼짝 못하고 있는

양몽환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별달리 슬픈 기색에 깊이 잠겨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비몽사몽간을 더듬듯이 정신을 놓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주약란이 그녀 옆으로 바싹 접어들어도 그녀는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주약란은 한참 동안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다가 하림이 놀라지 않도록

어깨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올려 주면서 조용히 불러 보았다.

 

「림매(琳妹)‥‥‥」

 

하림은 잠에서 깨어난 듯 얼굴을 쳐든 채 눈을 깜박이면서 한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서야 주약란인 것을 알아보았는지 벌떡 일어나면서 주약란의 품을 파고들었다.

 

「언니, 그래 그 만년 묵은 거북을 잡았어요?」

 

  주약란은 그 말에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이었다.

 

「‥‥‥ 잡기는 하였었는데‥‥‥‥ 남에게 빼앗기고 말았어.」

 

  한 아름 기대를 품고 구슬같이 반짝이던 하림의 눈은 곧 슬픈 빛으로 변하여 갔다.

 

「나쁜 사람이네요.

언니가 그 만년 묵은 거북을 잡아서 오빠의 회생에 쓸 것이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죠?」

 

「그 만년 묵은 거북을 빼앗아 간 사람은 바로 나의 스승이었어.

난 그를 잡을 수도 쫓아갈 수도 없었어.」

 

  하림은 한동안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며 생각하다가 죽은 듯 누워있는

양몽환을 슬픈 듯이 눈여겨보았다.

 

「그러면 오빠는 얼마 동안 이대로나마 더 살 수 있어요?」

 

  주약란의 입에서는 한숨 같은 대답이 흘렀다.

 

「글쎄‥‥‥ 한 이틀‥‥‥ 그럭저럭 살 수 있을는지?‥‥‥」

 

하림의 슬픈 얼굴에는 그 이상 더 비통스러운 빛은 띄우지 않았다.

오히려 창백한 얼굴에 차분히 서러운 웃음마저 띄우고 있었다.

하림은 천천히 몸을 들이켜서 등불의 심지를 환하게 올린 후에 양몽환의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언니, 언니도 이 옆에 와 앉으세요. 어서요.

언니에게 할 말이 있으니 여기 앉아서 들어 주세요.」

 

하림이 평소와는 달리 슬픔을 참으면서 오히려 싸늘한 웃음마저 띄우고

침착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자 웬일인지 오히려 마음속이 섬뜩하고 불안하였다.

하여튼 주약란은 하림이 시키는 대로 양몽환을 가운데에 놓고 하림과 마주 앉았다.

잠시 동안 서로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보다 하림은 슬픈 중에도 사람을 따르는 그리운 눈빛을 함빡 풍기면서

주약란을 쳐다보고 있었다.

주약란도 측은한 마음을 못 이겨 은연중 그 눈빛은 슬픔으로 반짝였다.

하림은 또 한번 주약란을 쳐다보고서 조용히 말했다.

 

「언니, 날 좋아 하지요?」

 

주약란은 그 순진한 물음에 그만 가벼운 웃음을 풍기며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 이었다.

 

「오빠도 매우 좋아하지요?」

 

하림은 채차 물었다.

그리고 그 대답을 독촉이라도 하듯 주약란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주약란은 뜻밖의 질문이라 잠시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림의 빛나는 눈초리를 보고 나서는 더 이상 망설일 수도 없고 하여

다소곳하게 고개만을 끄덕 했다.

 

그제야 하림도 적이나 기쁜 듯이 방긋하고 웃는 것이었다.

 

「그러시다면 환이 오빠가 죽으면 언니도 나처럼 무척 슬프겠지요?

그렇다고 오빠를 이대로 살려 놓을 방법은 없을 거구요.

그렇게 되면 오빠는 할 일이 많은데 우리가 대신 해 주어야겠죠?」

 

  주약란도 그제야 입을 열었다.

 

「하긴 그게 그렇지만 왜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지?」

 

「언니가 가고 난 후 가만히 생각하니 많은 일들이 떠올랐어요.

만약에 몽환 오빠가 죽고 나면 우리들은 꼭 그의 부모님에게

소식을 전해 드려야 할 것 아니겠어요?

오빠의 고향은 악양(岳陽) 동무령(東茂嶺)에 있는 커다란 장원(莊院),

수월산장이란 곳이 그의 집이에요.」

 

「림매, 너는‥‥‥?」

 

주약란이 하도 이상스러운 말을 하자 그 영문을 물어 보려고 하였으나

하림은 그냥 쓸쓸히 웃으며 하던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큰 사백부님에게 알려드려야 할 거예요.

그들이 알면 얼마나 슬퍼하실까?」

 

  주약란도 그제야 하림이 왜 그런 말을 자기에게 하는가 하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나보고 그들에게 소식을 전해 달라는 말인가?」

 

  하림은 단지 머리만을 끄덕이었다.

 

「응, 언니는 가서 그 대신 일을 해 주어야 하고 나는 여기 남겠어요.」

 

  옆에서 듣고 있던 팽수위(彭秀葦)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아니? 너 혼자 이 동굴에서 그와 함께 있겠다는 거야?」

 

「네! 그를 혼자 여기 놔두고 내가 어떻게 마음을 놓겠어요?」

 

  팽수위는 어처구니 없는 듯 하림을 다시 쳐다보았다.

 

「얼마 동안이나 지키고 있겠다는 거야?

그가 정말 죽어버린다면 시체를 영원히 이곳에 가둘 수는 없지 않아?

놓아둔 다해도 동굴 입구를 막고 공기가 못 들어오게 해야

시체가 썩지 않을 텐데 너도 같이 생매장 당하겠다는 거냐?」

 

  그렇게 말해도 하림의 얼굴에는 쓸쓸한 웃음만 감돌뿐 조금도 공포의 빛이라고는 없었다.

 

「오빠의 사촌 누님의 무덤을 보고나서야 나도 사람이 죽으면 파묻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렇게 되면 해도 달도 못 본다는 것도 알았지만‥‥‥‥

어제 저녁 저 혼자 많이 생각해 보았어요.

언니가 오빠의 부음을 전하러 가신 다음에 난 바로 돌을 주워서 석실을 막아 버리겠어요.

그리고는 그의 곁에 가만히 앉아 있겠어요.

본래 난 귀신을 겁내었지만 오빠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귀신이 온 다해도 조금도 겁나지 않을 것 같아요.」

 

  처절한 이야기를 조금도 두려움 없이 조용한 어조로 가만가만 이야기 해오는 데는

팽수위도 잔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팽수위도 첫날에 강호에서 활약할 때만 해도 악랄한 여인으로 유명하였었다.

그녀에게 죽음을 당한 사람만도 열 손가락으로 헤일 수도 없을 만큼 많았다.

그러한 팽수위이건만 하림의 몇 마디 말에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아무 말도 못하고 말 지경이었다.

한 사람이 충격을 받을 때에는 그 당장에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목숨을 바치는 행동은 허다하지만 오랫동안의 고형(苦刑)을 참고 견디는 것은

더 어려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하림은 친히 자기 자신을 동굴 속에 가두고는 시체를 벗 삼아

죽어 가겠다니 실로 놀라운 소리였다.

팽수위도 세상에 이름을 날린 악독한 여자였기도 하였지만 하림의 심중을 알고서는

식은땀을 흘리며 머리를 숙이고 말았다.

주약란도 하림의 아름다운 지고지순한 애정에 감동되어 그만 눈물을 흘렀다.

 

그러나 하림은 조금도 격동하는 빛이 없이 얼굴에는 여전히 쓸쓸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하림은 주약란의 두 어깨를 껴안으며 자기의 옷자락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는 오히려 주약란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언니 울지 말아요.

처음엔 몽환 오빠의 중상을 보고 나도 슬펐지만

언니가 꼭 고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울기만 했죠.

그러나 언니와 같은 높은 재간을 지니고서도

그를 살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어요.

언니도 최선의 노력을 다 했으니 비록 몽환 오빠를 구하지 못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어요?」

  하림의 부드러운 말은 더욱 주약란을 괴롭혀 주었다.

하림은 주약란이 무슨 수를 쓰던 양몽환을 반드시 고쳐 주리라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하림은 천진난만하기만 하지 도통 세상물정에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주약란만을 믿고 슬픔을 참고 견디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막상 그녀가 양몽환을 구할 수 없는 것을 알고 난 지금에도 오히려

자기의 슬픔을 누르고 주약란을 위로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주약란은 이와 같은 하림의 마음을 짐작하고는 더욱 괴로워하고 슬퍼했다.

 

그동안 하림이 밤새도록 괴로워하고 슬퍼하면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였을까?

생각하니 더욱 애처롭고 괴로웠다.

그러나 하림의 얼굴에는 그 이상의 슬픔이나 애처로움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난 담담한 얼굴이었다.

어떻게 보면 장엄하도록 청초하기까지 하였다.

하림은 조용히 눈을 감으며 옛 일을 회상하는 모양이었다.

 

「예전엔 많은 일을 정말 몰랐어요.

요 며칠 곰곰이 생각해 보고나서야 비로소 많은 일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더군요.

오빠가 수월 산장의 개울가에 있는 그의 사촌 누나의 무덤 앞에서 울던 일과

우리들이 파양호(?湯湖)에서 달구경하며 술 마시던 일,

그리고 언니가 비파를 뜯어 우리에게 들려주며 내가 오빠의 품속에서 자던 일과

언니가 비파의 선을 모두 끊어버리던 일들을 생각해 봤어요.

그때엔 내가 참 바보였나 봐요.

언니가 남장한 것을 줄곧 모르다가 기련산 속에서 옷을 벗었다는 것을

오빠에게서 듣고서야 겨우 알게 되었어요.

언니는 무엇이나 나보다 나아요.

만일 오빠와 함께 있었다면 그를 즐겁게 했을 거고

또 나도 언니한테 많은 재간을 배웠을 거예요.

지금쯤은 아마 우리 다같이 수월 산장으로 돌아가

그의 사촌 누나의 무덤을 둘러보고 즐겁게 나날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지나간 및 일을 회상해 보니 새삼스러운 설움이 치솟는가 보았다.

살포시 감은 두 눈에서는 어느덧 수정 같은 두 줄기의 눈물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이윽고 눈을 뜬 하림은 잠시 동안 양몽환을 바라본 후 주약란의 손을 꼭 감싸 쥐는 것이었다.

 

「저도 설마하니 오빠의 생명을 구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은 못했어요.

이제 어쩔 수 없이 이대로 돌아가신다면 저토 이 동굴 속에 남아 언제까지고

오빠의 시체라도 영원히 지켜 드리고 싶어요.

그래야 오빠도 외롭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막상 또 언니하고도 헤어지기 싫어요.

 언니도 우리하고 헤어지기 싫을 테죠?

네? 만약에 언니도 우리하고 헤어져 혼자 있게 되면 무척 외롭고 괴로워하실 테죠?

언니! 난 정말 언니하고도 헤어지기 싫어요.」

 

  하림의 애절한 하소연은 마디마디 주약란의 간장을 쥐어짰다.

 

 주약란은 하림을 부둥켜안고 실컷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대로는 어떻게 안타까운 자기의 심정을 찾을 길이 없었다.

주약란은 갑자기 자기가 입고 있는 남자의 푸른 장삼을 갈기갈기 찢었다.

또 머리에 쓰고 있는 남자의 두건도 찢어서 땅 바닥에 집어 던졌다.

 

「오늘부터 다시는 남장을 안 하겠어.

본래의 나대로 나는 예전과 같이 여자로 되돌아가 내 힘껏 그의 수명을 연장시켜 보겠어!

단 며칠간이라도 우리들은 무슨 수단이든 가리지 말고 그이의 생명을 연장시켜서

한도 미련도 없게끔 즐거이 지내보도록 하자 응?

그런 후에 너희들이 다 죽고 나면 나는 너희들을 편안한 곳에 묻어 주어 지하에서나마

편안히 살게 해주겠어.

그런 후 나는 땅 끝까지 그를 죽게 한 사람을 찾아 원수를 갚고 말테야.

그 모든 것을 끝낸 다음에는 나도 미련 없이 너희들이 묻혀 있는 곳으로 달려와서

영원히 함께 살 테야.」

 

  옆에서 듣고만 있던 팽수위가 크게 놀랐다.

 

「아니? 아가씨도 심소저와 저 사람과 같이 순사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래요. 이 두 사람이 죽고 나면 나 혼자 살아선 무엇 하겠어요?

그이의 억울한 설원이나 풀면 나도 마음 놓고 죽을 수 있을 거예요.」

 

  이와 같은 비장한 말을 하면서도 오히려 그 표정은 시름없는

사람처럼 부드럽고 밝아 보이기만 했다.

  팽수위는 너무 어처구니없는 말에 기가 막혀서인지 한동안은 말도 못했다.

 

「물론 두 분의 이와 같이 순결무구한 지고의 애정에는 산천초목도 감동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하여도 사람이란 한 번 죽고 나면 시체는 결국 썩고 마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죽은 혼을 진심으로 위로하시기 원한다면 그의 무덤가에

초막이나 한 칸 짓고 두 분이 평생토록 그의 무덤을 지키시는 게 옳은 도리라고 생각됩니다.

구태여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까지 순사한다면 지하의 양상공이 더욱 괴로워 할 겁니다.」

 

  그러자 울고 있던 하림이 눈물을 닦으며 그 즉시 반대했다.

 

「그렇다 하여도 저는 오빠를 떠나서는 살 수 없어요.

죽거나 살아도 함께 한자리에 같이 있으면서 오빠와 같이 지내겠어요.」

 

  주약란도 같이 미소 지으며 하림의 말에 찬성을 표했다.

 

「그렇지. 우리들은 네 말과 같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살면서 매일 얼굴을 볼 수 있어야지.」

 

  그제야 하림도 저윽이 기쁜지 한결 가벼운 웃음마저 풍기며 수선을 피웠다.

 

「그렇게 되면 난 아주 바쁘겠어요.

매일 같이 밥 차리고 꽃에 물도 주고 오빠의 새 옷도 지어 주고

그리고 그의 방도 청소해 주고-.」

 

「그럼 네가 원하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질 거야

비록 죽어서 일망정 우리는 무척 행복할거야.」

 

하림과 주약란은 죽음을 앞두고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괴로워하는 빛도 없이

사후의 즐거운 생활을 마치 꿈이나 꾸듯이 서로 아주 재미나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듣고만 있는 팽수위의 가슴은 오히려 서늘하여 지기까지 하였다.

정말이지 팽수위로서는 그들의 심중을 헤아릴 길이 없었다.

속으로는 멀쩡한 사람들이 어처구니없는 잠꼬대를 하거니 하고도 생각해 보았다.

그나마 하림에 대해서는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천진난만하기만 한 나이가 어린 하림으로서는 오빠를 그리워하는

일편단심을 버릴 길 없어 환상의 세계에 잠길 수도 있었으니 말이었다.

그러나 절세의 무예를 지니고 또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주약란마저 무슨 심정으로

잠꼬대 같은 넋두리를 하는지 추측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어쩌면 한결같이 서로 사랑하던 양몽환을 구할 수가 없게 되자

모두가 정신 이상을 일으키지 않았나?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물론 서러움과 안타까움에 어쩔 수 없이 하소연 하며 한때나마마음의 위로를 찾아서

하는 이야기라면 또 몰랐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히 죽기를 결심하고 서로 다짐하는 데야 팽수위인들 마음속이

서늘하여 질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정말 죽을 거냐고 다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한동안 웃음꽃을 피우며 그런 이야기를 하더니

갑자기 주약란이 고개를 돌려 팽수위를 정색하며 바라보았다.

 

「지금 몇 식경이나 되었는지 나가서 알아봐줘요.」

 

  팽수위가 입구 근처로 가서 하늘을 쳐다보고 들어와서 알렸다.

 

「오경이 가까웠어요.

 아가씨도 어제 저녁 싸우느라고 피로하였을 터이니 조금 쉬시지요.」

 

주약란은 급히 일어나서 팽수위에게 몸을 돌려 아주 엄한 소리로 말했다.

 

「아직 피곤하지 않아요.

그리고 지금부터 할 일이 있어요.

그동안은 누구도 이 근방에 얼씬거리면 안돼요.

지금 곧 굴 밖으로 나가서 내가 부를 때까지 꼼짝 말고 지켜 주세요.

누구를 막론하고 들어오게 하지 말 것과 만일 누가 억지로 뛰어 들려고 한다면

누구든 당신의 칠보 추혼사(七步追魂砂)로 물리치도록 하시오.」

 

  팽수위가 두말없이 고무장갑을 손에 끼면서 밖으로 나갔다.

주약란은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하림에게도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림매! 림매도 검을 들고 지키고 있어요.

그리고 내가 그의 상처를 치료할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말 것! 알았지요?」

 

「알았어요! 언니는 나도 굴 입구에서 남이 못 들어오게 지키라는 것 아녜요?」

 

하고는 검을 들고 가만히 나갔다.

 

주약란은 마지막 무슨 수를 쓰던 양몽환을 단 며칠이라도 더 살리고 싶었다.

그렇다면 꼭 한 가지 방법이 남아 있었다.

그 방법을 취하자면 더 이상 남녀간의 수줍은 도덕에 구애받을 수 없었다.

주약란은 그제야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칠 결심을 하였던 것이었다.

우선 침대 위에 올라가 양몽환의 온 몸을 주무르기 시작하였다.

숨길마저 막혀버린 삼십 육혈(三十六穴)을 주물러 혈맥을 유통시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에 양몽환의 윗몸을 꼭 끌어안고 고개를 숙여서는 자기의 입술을

양몽환의 입술 위에 포개었다.

그리고 자기의 혀로 꽉 다문양몽환의 입술을 여는 한편 단전 있는 자기의

온갖 진원지기(眞元之氣)를 가만히 그 입을 통해 양몽환의 오장육부 깊숙이 유입시켰다.

얼마동안 그러고 있었을까?

주약란이 그 스스로의 진원지기(眞元之氣)로 양몽환의 내부기능을 회복시켰을 때에는

그녀는 지쳐서 안색이 말이 안 되게끔 흐려있었다.

주약란이 사용한 방법은 바로 도가(道家)의 토납지술(吐納之術)이었다.

양몽환의 입으로 주입시킨 진기는 그녀가 수 십년간 수집하여 얻은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양몽환에게는 생명수와 같이 크게 도움이 되었지만

그녀에게는 자기의 목숨을 분할해 준 것과 같은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던 것이다.

이로서 양몽환의 거의 정지하다시피 된 오장육부는 즉시 기능이 되살아났다.

따라서 심장도 그 고동이 회복됨으로서 전신의 경맥과 기혈도 움직이게 되고

싸늘하게 내려갔던 체온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피로해진 주약란은 잠시 동안 다시 조식하여 기운을 가다듬고는 재차 마지막 있는

공력을 운집하여 양몽환의 기경팔맥을 유통시켰다.

그러자 양몽환은 한숨을 가늘게 내쉬며 번쩍 눈을 뜨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니 주약란은 지친 나머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숨이 벅차도록 가슴을 치밀며 가쁘게 몰아쉬었다.

땀은 물처럼 흘러서 속옷이 흠뻑 젖어 온 몸에서는 김이 났다.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어깨와 가슴으로 내려왔으며 이마에 흐르는 땀은

양몽환의 얼굴에 까지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와 같은 자기의 고통도 잊고 양몽환이 되살아난 것만이 기뻐서

꽃같이 활짝 개인 얼굴에 웃음을 띠고는 연신 숨을 헐떡이며 나직이 속삭였다.

 

「빨리 눈을 감아요. 말도 하지 말고 조용히 운기 해봐요.

 속히 경맥을 유통시켜야 해요.」

 

그 몇 마디의 말도 매우 힘든 듯 간신히 말하고는 다시 양몽환을

팔에 힘을 주어 꼭 껴안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양몽환의 의식은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부드러운 살결이 그의 몸을 꼭 품어 안고 향긋한 향기를 내뿜고 있지 않는가?

그러고 보니 몸이 공중에 뜬 것처럼 가뿐하고 황홀한 것이 기분이 좋았다.

 

갑자기 매끄러운 뺨이 그의 이마를 가볍게 스치는 가운데 주약란의 청아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와 림매는 당신이 살아나기 만을 비는 거예요.」

 

그러나 숨이 가쁘게 하는 소리라 뒤의 말은 흐려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양몽환의 가슴은 갑자기 울렁거리고 입에는 가득히 뭉클한 것이 솟아올랐다.

양몽환은 그것을 정신없이 토했다.

붉은 선혈이었다.

막상 아무렇게나 토해 놓고 보니 주약란의 얼굴과 옷에 튀었다.

그래도 주약란은 그것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급히 손을 써서는

명문(命門)과 현기(玄氣) 두 요혈을 가볍게 한 번씩 두드려 주는 것이었다.

가슴 속에 엉켜 있던 피를 토하고 나자 양몽환의 몸은 더욱 산뜻하여지고

정신도 더욱 뚜렷해 왔다.

양몽환은 그때서야 확실하게 주약란을 바라볼 수 있었다.

주약란의 얼굴과 옷에는 자기가 뿜어낸 피가 얼룩져 있었다.

양몽환은 속으로 미안한 나머지 송구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면서

간신히 오른 손을 내밀어 닦으려고 버둥거렸다.

주약란이 황급하게 그 손을 잡으면서 가볍게 웃으며 다시 속삭였다.

 

「가슴 속에 맺혔던 응혈(疑血)을 뿜고 나니 몸이 한결 나아진 것 같죠?」

 

  양몽환은 싱긋이 웃었다.

정신은 비교적 맑고 분명했으나 몸은손발하나 꼼짝할 수도 없었고

심지어 말할 기운마저 없었다.

지금 자기의 상반신을 주약란이 꼭 품고 있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수줍고 어색하기는 했으나 자기 마음대로 몸을 뺄 수도 없었다.

아니 그보다 솜과 같이 부드럽고 꽃과 같이 향기로운 따뜻한 그녀의 품속에서

몸을 빼고 싶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이대로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는 애써 말을 하려고 하였다.

그 눈치를 재빨리 알아챈 주약란은 조용히 말렸다.

 

「말을 하지 말고 내 말이 맞거든 고개를 끄덕이고 틀리면 흔들어요?」

 

그녀가 보여주는 깊은 애정은 마치 봄날의 훈풍과 같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도 남음이 있었다.

양몽환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어스름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었다.

주약란도 수줍은 웃음을 띠며 손수건을 꺼내더니 먼저 양몽환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

그런 후에야 그녀의 몸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양몽환은 이토록 자기를 알뜰하게 보살펴 주는 주약란의 애정에 새삼스럽게 감격하고 목이 메었다.

주약란은 평소에 이렇게까지 애정을 베푸는 다정다감한 여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평상시에는 무뚝뚝하고 냉랭하여 쉽게 친숙해 질 수 없는 위엄이 풍기는 여인이었다.

그녀 자신이 스스로 이와 같이 따사로운 애정을 솔직히 밖으로 들어내 보이기는 양몽환은

처음 보는 노릇이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의 마음이란 여간 기쁜 것이 아니었다.

주약란의 진심을 처음 안 것만 같았다.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애정을 받고 있는

지금의 양몽환은 마치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자기 처지로서는 주약란의 애정에 보답할 수 없는 몸이었다.

양몽환은 그만 자기도 모르게 긴 한숨을 토했다.

주약란은 그 한숨소리를 듣고는 매우 놀란 눈으로 양몽환을 쳐다보았다.

양몽환이 한숨을 쉬는 것이 무척 마음에 걸린 표정이었다.

주약란은 더욱 안타까운 듯이 양몽환을 껴안으며 자기의 얼굴을 양몽환의 향에 갖다 대면서

애절한 어조로 말했다.

마치 자기가 어떤 죄를 짓고 그것을 해명해 주는듯한 말투였다.

 

「왜 탄식을 하는 거예요?

나는 결코 림매와 사랑다툼을 하는 건 아니에요.

또 나를 사랑해 달라는 것도 아니에요.

나는 다만 당신이 살아나길 염원하고 있을 뿐이에요.

정말 당신이 죽으면 림매도살 수 없을 뿐더러 나도 편안히 살아남지는 못할 거예요.

이 마음만은 알아주세요.」

 

  양몽환은 그 말을 듣고 나자 오히려 더 감격에 벅차 가슴은 메고 눈물이 치솟아 올랐다.

 

「보잘 것 없는 나 같은 사람의 어디가 좋아서 이렇게 위해 주시요

정말 어느 세상에서 얻게 된 복인지 모르겠소.

나는 당신의 마음을 잘 알아요.

평소에도 일부러 남장을 차리고 마음을 독하게 먹으면서 무뚝뚝하고 냉정하게 보이려고

애쓰지만 속으로는 따뜻한 정이 넘쳐흐르는 것을 ‥‥‥」

 

  주약란은 급히 손으로 양몽환의 입을 막았다.

그 이상 듣지 않아도 좋았다.

아니 오히려 두려웠다.

주약란은 흥분해서 말했다.

 

「그것도 당신 한 사람에게‥‥‥」

 

  그 순간에 눈앞이 아찔하고 가물거리면서 머리 속이 몹시 어지러웠다.

 

  그러자 곧 주약란은 깜빡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주약란의 몸은 아주 자연스럽게 앞으로 수그러졌다.

그러자 주약란의 얼굴이 미끄러지면서 그녀의 입술과 양몽환의 입술이 절로 포개지고 말았다.

양몽환은 예기치 못한 입맞춤에 얼떨떨하기는 하였어도 짜릿하고 감미로우면서도

부드러운 것에 황홀해져서 그대로 눈을 감고 말았다.

양몽환은 비록 두 번이나 입술을 통하여 주약란의 진기를 주입받았지만

그때는 혼미한 중이라 별다른 감촉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정신이 맑은 때였고 그나마 주약란의 애정을 마음속 깊이 느끼고 있을 때인 만큼

그 감촉이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황홀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딘지 이상하다는 느낌이 부쩍 들기도 하였다.

 

  첫째, 그 입술은 따사롭고 향기롭기는 했지만 어딘지 기운이 없었다.

마치 이른 봄에 갓 피어난 꽃봉오리 마냥 그대로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몸은 오히려 가늘게 떨고 있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또다시 그의 어깨를 받치고 있던 손이 힘없이 미끄러져 내려가기 까지 하였다.

결국 주약란은 무척 피로한 나머지 기절하였던 것이었다.

그녀가십 수년간이나 애써서 모아 온 모든 진원지기를 양몽환에게 주입시키고

기진맥진 하였던 탓이었다.

그녀의 헌신적인 자기희생으로 양몽환의 기경팔맥(奇經八脈)은 유통시켰지만

그녀 자신은 죽음의 직전에서 헤매게 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양몽환은 섬뜩한 마음이 들자 곧 눈을 뜨고는 주약란을 내려 보았다.

그는 주약란을 껴안고 조용히 입술을 떼고는 가만히 흔들어 보았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양몽환은 깜짝 놀라며 다급하게 불러 보았다.

 

「주소저! 주소저!」

 

  그래도 주약란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 대신 뜻 밖에도 동굴 밖에서 느닷없는 호령 소리와 함께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

비명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다.

양몽환은 급한 위험이 닥친 줄 알고 급히 일어나려고 하였다.

그러다 보니 양몽환은 자기도 모르게 주약란의 명문혈을 가볍게 건드리는 결과가 되었다.

워낙에 상수급의 내공 기초를 닦은 주약란이라서인지 금방 정신을 차리고 양몽환을 쳐다보았다.

양몽환은 어찌나 반가운지 그녀를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이제 정신이 나오?」

 

  주약란도 자기가 잠시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렇게 염려할 건 없어요. 조금만 휴식하면 곧 회복될‥‥‥」

 

그러다가 그녀는 자기가 양몽환의 품에 꼭 껴안긴 것과

얼굴과 얼굴이 맞대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부끄러움이 와락 치솟아 얼결에 양몽환을 뿌리쳤다.

 

「남이 보면 어쩌려고!」

 

양몽환도 그제야 깜짝 놀라면서 주약란의 허리에 둘렀던 손을 급히 풀었다.

잠시 동안 서로 얼굴을 붉힌 채 말없이 외면하고 있었다.

양몽환이 잠시 머뭇거리다 송구스러운 낯빛을 감추지 못하면서 조용히 사과했다.

 

「당신이 혼절하는 바람에‥‥‥ 그만 나도 모르게 ‥‥」

 

주약란도 사실 그를 정면으로 보지는 못하고 흐트러진 머리를 은근히 쓰다듬으며

쑥스러운 웃음을 띠며 사과했다.

 

「당신을 탓하는 게 아니에요,

지나치게 마음 쓰지 마세요.

부끄러운 김에 그만‥‥‥」

 

  그러자 밖에서 팽수위의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무기와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한 것으로 미루어 싸움은 무척 격렬한 모양이었다.

양몽환은 긴장해서 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싸움 소리는 여전히 치열하였다.

양몽환은 어찌된 거냐고 주약란에게 눈으로 물었다.

주약란도 잠시 귀를 기울이더니 곧 웃음을 띠며 양몽환을 안심시켰다.

「팽수위의 칠보추혼사와 음린뇌화전(陰燐雷火箭) 두 암기는 충분히 적을 막을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은 놀라지 말고 심신을 가다듬어 빨리 조식이나 하세요.」

 

  밝은 등불에 비치는 주약란의 얼굴은 피곤해서인지 극도로 창백해보였다.

언제나 밝고 날카롭게 반짝이던 눈빛은 정기를 잃고 흐려있었다.

탄탄해 보이고 간드러진 맵시를 보이던 자태는 간곳없고 팔과 다리는

기운 없이 흐느적거려 흐트러지는 몸을 가다듬기에도 무척 힘에 겨운 눈치였다.

양몽환의 가슴은 아프고 저렸다 그대로 보고만 있기에는 너무나 애처로웠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 원인이 궁금했다.

 

「혹시 중상을 입은 것 아니오?」

 

「아니. 중상 입은 것이 아니니 걱정 말아요.」

 

  주약란은 예사롭게 대답할 뿐이지 그 원인을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기야 양몽환이 보기에도 싸우다가 다친 몸 같지는 않았다.

그때 얼핏 생각되는 것이 있었다.

 

지난날, 요주의 여인숙에서 혜진자의 뱀독을 치료하고 난 후에 주약란의 모습이 되새겨졌다.

「아! 알겠어요. 나 때문에 그랬군요.

 나의 목숨을 구해 주시느라고 당신의 진원 진기를 전부 소모하셨군요.

당신이 이렇게 지치고 피로한 것을 보는 제가 오히려 더 안타깝습니다.」

 

양몽환은 오직 감격할 뿐이었다.

뭐라고 말할 수 없이 가슴은 뻐근하여져 오고 고마움에 흐느꼈다.

 

「조금만 정양하면 회복돼요.

당신은 중상을 입은 몸이니 너무 정신을 쓰지 말아요.

오히려 나의 수고를 고맙게 생각한다면 나와 림매를 위하여 빨리 운기나 하여 주세요.

밖의 일에도 정신을 쓰지 말고 오직 나와 림매만을 생각해‥‥‥‥」

 

말을 하다보니 웬일인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차마 끝말을 맺을 수가 없었다.

속마음 같아서는 열 번 백 번 다짐하고 싶은 말들이었지만 그 말은 마음속에서만

맴돌 뿐이지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주약란은 그만 두 줄기의 구슬 같은 눈물로 그 말을 대신하고 말았다.

양몽환은 주약란의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 때문에 너무 상심치 말아요. 당신의 분부대로 할 테니‥‥‥」

 

  양몽환은 조용히 눈을 감고 마음의 평정을 가다듬었다.

주약란의 말대로 운기조식에 힘써 보는 것이었다.

주약란도 자기의 말을 순순히 듣고 운기조식에 힘쓰는

양몽환의 모습을 보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양몽환이 스스로 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적극적으로 행동하여 주니

마음이 든든하기도 하였다.

주약란도 그제야 안심하고 운기조식을 하려고 몸을 바로 잡았다.

단정하게 앉은 후 곧 눈을 감고 호흡을 조절하였다.

잠시 후에는 돌부처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취하는 운기조식법은 현문토납지술이었다.

그러니 일반적인 타좌 조식법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특수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정신을 집중하여 주위의 온갖 소란을 잊고

조용한 조식세계에 몰입할 수 있는 특징이 있었다.

양몽환은 그렇지 못하였다. 눈을 감고 운기조식에 힘써 보았으나

굴 밖의 소란한 싸움소리에 정신이 흐트러져서 운공(運功)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끝내 운기조식에 실패하여 눈을 뜨고 주약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합장한 모습으로 단정히 앉은 채 운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놀랍게도 어느덧 그녀의 뺨에는 발그스름한 홍조가 제법 피어나고 있었다.

비록 머리는 흐트러진 채이건만 그녀의 평시의 모습대로 장엄하고

고귀한 기질은 여실히 풍기고 있었다.

한편, 굴 밖에서의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오히려 전 보다도 그 싸우는 소리가 더욱 가까워진 것 같았다.

아마 굴 입구까지 밀려들어온 모양인지 싸우는 소리는 굴 안에까지 울렸다.

양몽환은 운기 조식할 것을 잊어버리고 싸움소리에 정신이 팔렸다.

서로가 요란하게 호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중에 하림의 숨 가쁜 호령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고야 말았다.

눈앞에 불꽃이 번쩍이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하늘과 땅이 거꾸로 뒤집혔다.

자기 몸이 공중에서 내굴린 것 같았다.

결국 양몽환은 또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은 밝고 또렷하였으나 몸은 그렇지 못하였다.

죽어 가던 몸에 주약란의 진원 지기로 간신히 오장육부의 기능만이 움직이는 몸이었다.

아직도 그 심한 중상을 근본부터 치료해서 소생한 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사람처럼 조급하게 버둥거리니

기혈이 부동하여 기절하고 말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요행으로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하림과 팽수위는 굴 안까지

밀려와 열전을 벌리고 있었다.

팽수위는 오른 손에 독모래(毒砂)를 잔뜩 움켜쥐고 굴 입구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림은 장검을 뽑아 들고 침대 옆에서 자기와 주약란을 지켜주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들의 옷은 비 오듯 한 땀에 흠뻑 젖어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머리는 흐트러지고 눈에서는 살기가 번쩍 거렸다.

이 모든 것을 보아 그들의 싸움이 무척 격렬하였던 것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가냘픈 여자의 몸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나 의지만은 살아 있었다.

굴 밖에서는 또다시 우락부락한 호령 소리가 울려왔다.

 

「만일 너희들이 끝내 독모래로 굴 앞에서 망동한다면

굴 앞에다 불을 지를 터이니 원망하지 마라.」

 

무지막지한 자들이 이젠 굴속에 든 곰을 잡듯이 불로 싸울 모양이었다.

양몽환은 그 소리를 자세히 들어 보았으나 결코 알만한 사람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어쨌든 양몽환으로서는 더 이상 충격을 받으면 아니 될 몸이었다.

그 자신도 그 점을 충분히 아는지라 아무리 사태가 급하고

또 화가 치밀어도 애써 참고 오직 진정하느라고 노력할 따름이었다.

오히려 섣불리 움직이다가 하림의 정신마저 흩트려 버릴 염려도 있었다.

차라리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냉정한 마음으로 싸움의 경과를 보고 있기로 마음먹었다.

굴 밖에서는 여전히 화염공세를 취하겠다고 호령이 대단하였다.

굴 입구를 지키고 있던 삼수나찰(三手羅刹) 팽수위도 지지 않고 맞받아 호령 하였다.

「비열하게 많은 인원수를 믿고 이기려고 하는 녀석들아!

감히 굴 안으로 한발자국만 들여 놓아 봐라!

그 당장 나의 독모래 맛을 보여 줄 테다.」

 

  삼수나찰 팽수위의 호령 소리도 굴속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순간 굴 입구가 번쩍 하였다.

 

미련하게도 죽음을 무릅쓰고 한 놈이 뛰어든 모양이었다.

동시에 팽수위의 독모래를 든 손도 번쩍 하였다.

한 줌의 독모래는 안개를 뿜어내듯 앞으로 퍼져갔다.

 

「으악!」

 

  외마디 비명이 처절하게 꼬리를 끌며 굴속에 울려 퍼졌다.

다행스럽게도 굴 입구는 매우 좁아서 불과 몇 자 넓이 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러니 일시에 여러 사람이 달려들지 못할 뿐더러 삼수나찰이 독모래를 한 번 뿌리게 되면

동굴 입구를 완전히 막을 수가 있었다.

그러니 제아무리 몸짓이 날랜 놈이라 하더라도 굴 입구를 뚫고 들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팽수위는 다시 한 주먹의 독모래를 움켜쥐고는 몸을 날려 동굴입구로 달려갔다.

조심스럽게 약간 고개를 굴 밖으로 내밀어 살피고는 다시 독모래를 홱 뿌렸다.

이어서 또 다른 비명 소러가 들려왔다.

분명히 또 다른 한 사람이 독모래를 맞고 쓰러진 모양이었다.

그녀는 아주 신바람이 나서 다시 독모래를 한 움큼 쥐고는 입구에서서 코웃음을 치며 고함을 쳤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자는 얼마든지 들어오라!

독모래는 얼마든지 있으니깐 맛을 보여 주겠단 말이다.」

 

그러더니 굴 입구를 막을 듯이 서 있는 바위 위에서는 고함 소리만 들려올 뿐

두 번 다시는 아무도 굴 안으로 뛰어 들지 못했다.

그들이 감히 굴 입구에 뛰어들지 못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팽수위의 독모래도 피하기 어려운 점도 있지만

우선 굴 앞에 발붙일 틈이 없었던 것이었다.

굴 입구 바로 앞은 곧장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이었다.

굴과 절벽까지의 사이는 극히 좁은 길로 되어 있었다.

그들이 굴 입구로 오려면 어차피 그 길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되다.

 비록 그 거리는 얼마 안 되는 것이었지만 일시에 여러 사람이 달려올 수도 없었고

설사 한 두 사람이 민첩하게 달려왔다 해도 그 좁은 길에서는 팽수위의 독모래를

피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연요새(天然要塞)가 아니고 무엇이랴!

 

  양몽환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보니 어떤 못생긴 여인이

독모래로 적을 무찌르는 것이 이상히 여겨졌다.

하도 궁금해서 나직하게 하림을 불렀다.

 

「심사매, 나 좀 봐!」

 

  하림은 죽은 듯 꼼짝 않던 양몽환이 자기를 찾자 몹시 놀라는 한편무척 기뻐했다.

 

「오빠! 나았어요?」

 

「그래, 간신히‥‥‥ 그런데 저 분은 누구시지?」

 

  하림은 기쁜 나머지 단숨에 달려와 매달렸다.

 

「저 분은 대 언니의 친구에요.」

 

  양몽환은 고개를 끄덕이었다.

주약란이 팽수위의 철보추혼사와 음린뇌화전으로서 적을 막을 수 있다고 하던 말이

그제야 생각났던 것이었다.

 

「아! 그래, 저 분이 바로 팽수위라는 분이지?」

 

  하림은 천진난만한 소녀인 만큼 단순하고 어렸다.

저희들이 활약하는 모습을 오빠가 알아주는 것이 기쁘고 또 한편,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자 팽수위를 크게 불렀다.

 

「언니, 빨리 와요. 오빠가 불러요.」

 

  양몽환이 낮을 찌푸리며 급히 저지하려고 하였을 때엔 이미 늦었었다.

팽수위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돌렸다.

할 수 없이 양몽환은 그녀를 향하여 단지 인사로만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그러나 팽수위는 이것을 자기를 부르는 것으로 오해하고는 그에게로 다가왔다.

하림으로서는 양몽환의 심중을 알 바 없었다.

단지 죽을 것으로만 알았던 오빠가 말을 하고 자기를 찾는 것이

무작정 반갑고 기뻤을 따름이었다.

지금의 양몽환은 정신만 밝았지 몸은 한 치도 기동하지 못하는 형편이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지금껏 싸우던 것마저 아니 한시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마저 잊고

양몽환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 뿐이었다.

팽수위가 급히 다가와 무슨 볼 일이냐고 물으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등 뒤에서 살기가 번쩍이는 바람이 몰아쳐 왔다.

깜짝 놀라 돌아서는 즉시 팽수위 손에서 한 자루의 음린뇌화전이 날카롭게 날아갔다.

화전과 바람이 엇갈렸다!

얼음장 같은 살기가 굴 속 가득히 번졌다.

그러나 그 짧은 틈에 벌써 뛰어든 사람은 그 즉각 벽에 몸을 숨졌다.

음린뇌화전은 아무런 효력도 없이 굴 앞 바위에 맞아 터지면서 불길을 뿜었을 뿐이었다.

그 틈에 또 다른 두 사람이 굴속으로 뛰어들었다.

잠깐 자리를 비운 틀을 노려서 그들은 이미 안으로 들어오고만 것이었다.

팽수위는 한 움큼의 독모래를 쥐었으나 행여 자기편이 다칠까 뿌릴 수가 없었다.

팽수위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자

두 사람은 대담하게 양몽환이 누워 있는 침대로 달려들려고 하였다.

팽수위는 생각할 여유도 없이 몸을 날리며 오른 편의 사람을 후려쳤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일장이라 그 위력은 굉장하였다.

상대방도 무공이 강한 자였으나 맞받아 싸울 수가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손을 들어 간신히 막은 후 부라부라 뒤로 물러나 위험한고비를 피하고 말았다.

하림도 그때는 양몽환의 품에서 떨어져 다른 한 사람과 맹렬히 싸우고 있었다.

자기의 목숨을 걸고라도 양몽환을 지켜야겠다는 일념이 불타는 공격이라 그 기세는 엄청났다.

끝내 그 사람도 벽까지 밀려 나고 말았다.

팽수위는 왼쪽의 사람과 싸우면서도 되도록 오른 손만을 쓰고 있었다.

오른 손에 쥐고 있는 독모래를 기회 있는 대로 뿌릴 작정인 모양이었다.

상대방도 그 눈치를 알아차리고 독모래를 쥐고 있는 오른손은 극력 피하면서

팽수위의 왼 쪽만 공격해 왔다.

그러고 보니 그 싸움은 다람쥐가 쳇바퀴에서 돌듯이 뱅글뱅글 돌아가기만 하였다.

그나마 동굴 속이 좁다보니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할 수도 없었다.

오직 몸과 몸을 부딪치며 주먹만으로 치고 때릴 뿐이었다.

마치 어린 애들의 싸움 같았다.

그러나 사실 그 싸움은 넓은 평지에서의 싸움보다 몇 갑절의 공력이 들고 불편한 싸움이었다.

결국은 공력과 공력의 싸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불행하게도 팽수위의 공력은 상대방 보다 약하였다.

이 같은 싸움을 계속하는 한, 팽수위는 이기기는커녕 고작 방어하기만 하여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참 동안 정신을 가다듬고 그 싸움을 보고 있던 양몽환은 비로소

팽수위의 상대가 누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천용방의 흑기단주(黑旗壇主) 최문기(崔文奇)였다.

양몽환은 크게 놀랐다. 팽수위의 공력으로서는 어림없는 강한 적이었다.

더 이상 내버려 두면 팽수위가 패할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으로서는 도울 길이 없었다.

오죽 답답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그쪽은 그렇다 치고 하림과 싸우고 있는 상대도 무공이 아주 대단한 노인이었다.

그 노인은 언뜻 보아서 약 오십 여세가 된 중늙은이였다.

장삼을 길게 입고 있었다.

그는 하림의 맹렬한 공격을 가볍게 뿌리치며 이따금 음침하게 슬금슬금 훔쳐보고 있었다.

양몽환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움직일 수 없었으나 정신은 상당히 맑아서

이들의 싸우는 상태를 잘 파악할 수 있었다.

최문기는 어느 정도 팽수위보다 공력이 웅후한 자이긴 하나 팽수위도 만만치 않아서

한동안 지탱할 수 있는 반면 하림은 형세가 달랐다.

하림과 싸우고 있는 자는 얼핏 한 눈으로만 보아도 단연코 하림 보다는

 공력이 몇 배 더 심후하였다. 만약에 그가 전력으로 공격하여 온다면

하림은 십 합도 지탱하지 못하고 지고 말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 노인은 공격을 하다가도 하림의 몸에

손이 닿을 듯 하면 스스로 손을 거두어들이었다.

웬일인지 냉정하게 공격하지 않고 약간 간격을 두었다.

하림은 그것을 모르는 듯 줄곧 이리 치고 저리 치며 공격하였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조그만 석실에 두 쌍의 남녀들이 맞붙어 싸우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석실 안은 온통 장풍과 검광이 가득히 차 있게 되었다.

그 장풍의 여력은 동굴 안을 휘돌아 가면서 일심불란(一心不亂) 운기 조식하고 있는

주약란의 머리와 옷자락을 휘날렸다.

그렇건만 주약란은 굳어버린 부처마냥 눈을 감고 단정히 그 자세 그대로 꼼짝도 안했다.

주약란에게는 싸움조차 없는 것 같았다.

양몽환은 몇 번이나 그녀를 부르려고 하였으나 끝내 참았다.

양몽환은 하림의 검이 점점 늦추어지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나머지 몇 번이나

일어나서 도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몸은 뜻과 같이 움직여 주지 않으니 이 일을 어쩌라!

오히려 지금에 그의 몸은 누구를 도와주기보다 자기 자신의 기혈이 부동하지 않도록

진정하고 운기조식 해야 할 형편이 아닌가!

싸움이 시작한지 한 시각이 지난 뒤였다.

최문기는 팽수위를 처치할 수법을 새로이 쓰기 시작했다.

왼 손의 다섯 손가락을 세워서는 혈맥을 짚는 수법을 사용하였다.

팽수위의 오른쪽 손목의 맥문(脈門)을 짚으려는 눈치였다.

그 자의 자세를 취하는 폼이 그녀의 오른쪽 손의 공격을 저지시키는 한편,

그 자의 오른손에 공력을 집중하고는 휙휙! 두 장(二掌)을 연속으로 맹타했다.

이 두 장의 위력은 굉장히 맹렬하였다.

팽수위는 맞받을 엄두도 못 내고 몸을 옆으로 급히 뒤틀고 두 걸음을 물러섰다.

간신히 정면의 장풍을 비키고 나자 식은땀이 흘렀다.

여기에 기운을 돋운 최문기는 더욱 앞으로 바짝 다가 들어오며 두 손으로 연신 후려쳤다.

그나마 위력이 있는 장풍 속에 금나수법(擒拏手法)을 섞어 번개같이 공격을 가하니

팽수위는 계속해서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팽수위도 한 때는 강호의 무예계를 넘나들면서 활약하던 여걸이었다.

그동안 수없는 무술시합과 여러 번의 혈전을 치룬 노장이기도 하였다.

그런 후에도 이십년간이나 산 속에 파묻혀 단련한 결과 팽수위의 공력도

엄청나게 정진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여도 역시 팽수위는 일개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해도 장력에는 남자를 따를 수 있는 공력을 쌓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최문기는 그나마 장력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자였다.

그러니 팽수위로서는 도저히 당할 수 없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만일 널찍한 밖에서 싸우는 것이라면 또 별 문제였다. 

 

그런 경우라면 팽수위는 독모래를 사용할 것도 없이 경신법 등의 날렵한 수단으로

장력의 부족을 보충하여 최문기를 이기지는 못할망정 백합 이상을 끌고 나갈 수는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한 팽수위로서는 이 동굴처럼 협소한 자리에서는 날렵하게 대항하여 싸울 수 없으니

크게 불리한 것을 면하기 어려웠다.

또 한편, 마음속으로 주약란과 양몽환에 대한 염려에 전심전력하여 싸울 수도 없는

처지이기도하였다.

오른 손에 노루 장갑을 끼고 독모래를 잔뜩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근신상박(近身相搏)의 싸움은 기선을 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제 일격을 실수하여 열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점점 최문기에 의해

양몽환의 옆에 가까이 밀려오고 말았으니 위급은 목전에 다다르고 있었다.

하림과 싸우고 있는 장삼을 입은 노인이 줄곧 사정을 두고 공격한 동기는 주약란이

행여 화를 내고 일어나 싸울까 두려웠던 탓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주약란의 눈치를 살펴봐도 기척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최문기가 팽수위를 줄곧 공박하고 위기에 몰아넣어도

주약란은 꼼짝 않고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제야 간이 커진 그가 마음 놓고 즉각 맹렬히 두 번을 공격하여왔다.

하림의 공격은 그 당장에 꺾이고 말았다.

 그 노인은 더욱 기세를 높이며 한걸음 바싹 조여들어 왔다.

연달아 후려치는 손은 그림자마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간신히 저항하던 하림은 금방 궁지에 몰려 꼼짝 못하고

양몽환과 주약란이 있는 곳으로 밀려 왔다.

싸움을 지켜보고만 있던 양몽환은 점차 전세가 불리하여 짐을 보고 더 참을 수 없었다.

손을 내밀어 주약란의 옷깃을 끌어당기려고 하였다.

자기의 손끝이 주약란에게 막 닿는 순간 흠칫 놀라면서 급히 손을 움츠리고 말았다.

주약란의 머리에서는 그때 한참 뜨거운 열기를 뿜고 있었다.

이것은 지금 한창 운기 조식하는 징조로서 바야흐로 그 절정에 이르고 있음을 뜻하였다.

이같이 지고지순한 내공을 조식하고 있을 때는 무아지경의 경지에 잠기고 있는 때라

주위에서 벼락이 떨어져 바위가 쪼개진다 하더라도 의식할 수가 없는 법이었다.

또 이 같은 순간에 잘못 건드리면 그대로 기혈이 부동하여 생명을 잃게 할 위험마저 있었다.

양몽환도 그 점이 두려워 선뜻 손을 움츠렸던 것이다.

이젠 별 도리가 없었다.

운명을 하늘에 맡기기로 작정하였다.

그와 같이 생각하자 그의 마음은 오히려 차분히 가라앉아서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고

극심한 초조와 불안도 사라져 갔다.

그리고 난 후 양몽환은 자기가 근 일년 동안 겪어 온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했다.

지난날에는 매번 위험에 부딪쳤을 때마다 다른 사람의 구함을 받곤 하였었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도 그를 구하여 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시 생각에 잠겼다.

지난날 옥소선자가 자기를 구하려고 아미파 승려들에게 상처를 입고 동굴 속에서

도옥과 싸웠는데 지금은 죽었을까? 아니면 살았을까?

그 후의 소식이 무척 궁금하였다.

 

그날 그는 도옥의 손에 의해 절벽 위에서 던져졌고 그로 인해서 그는 곧 혼절하고 말았었다.

때문에 그는 옥소선자와 도옥과의 싸움의 결과와 제반 경과를 자세히 모르고 말았다.

그는 어처구니없게도 지난 일을 생각하느라고 잠시나마 옆에서 싸우는 것도 완전히 잊고 있었다.

 

돌연!

 

귓가를 찢는 싸늘한 바람이 달려들며 스쳐갔다.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린 양몽환은 급히 머리를 쳐들고 돌아보았다.

 

 <쨍그랑!>

 

 한 자루의 장검이 날아가더니 맞은편 벽에 부딪치며 불꽃을 튕겼다.

하림이 들고 싸우던 장검이었다.

아마 장삼 노인의 강력한 일장에 말려 들어가 하림이 칼을 날려버린 모양이었다.

자칫 잘못하였으면 양몽환의 목이 날아갈 뻔 하였다.

칼을 놓친 하림의 얼굴은 창백하였다.

장삼을 입은 노인은 마치 쥐를 앞에 놓은 고양이처럼 엉큼스럽게 노려보며

한 발자국씩 좁혀 들었다.

하림은 비지땀을 흘리면서 밀리고 밀렸다.

 

절대 절명!

 

장삼을 입은 노인이 몸을 솟구쳤다.

 

순간!

 

「으악!」

 

하림의 비명이 들리자

그녀의 손목은 노인의 손아귀에 움켜잡힌 뒤였다.

금나의 수법으로 하림을 사로잡고만 것이었다.

장삼을 입은 노인은 사뭇 유쾌하게 빈정거렸다.

 

「다치지 않을 터이니 염려는 말라고, 핫하하.」

 

하림은 눈에 독기를 품고 노려보면서 느닷없이 왼 손을 쳐들어 노인의 뺨을 후려쳤다.

장삼을 입은 노인은 어처구니없는 모양이었다.

가냘픈 여자가 온몸에 땀을 흠뻑 흘리고 할딱이는 모습이 제 딴에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인정을 베푼 것인데 그 틈을 노린 하림에게 뺨을 얻어맞으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었다.

노인의 뺨은 단번에 붉어지면서 손자국이 역력하였다.

양몽환은 그 모양을 보고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는 싸움에는 전혀 무관한 사람처럼 웃어 제쳤다.

그는 어차피 자기가 싸울 수 없는 몸일 바에야 완전히 구경꾼으로 속 편하게

있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보니 웃을 수 있는 여유도 생겼던 것이었다.

대담하다 기엔 그의 처지가 너무 위급한 때라서인지 어처구니없기도 하였다.

장삼을 입은 노인도 그만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괘씸한 노여움이 치밀어 하림을 잡고 있는 왼 손에 힘을 주면서

오른 손으로는 그녀의 왼 쪽 어깨에 있는 견정혈을 쳤다.

 

「악!」

 

하림의 다문 입술에서 신음 소리가 모질게 새어 나왔다

그녀는 양몽환과 주약란의 안전을 위해서 사력을 다하여 싸우느라고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노인의 은근한 압박에 더 이상 반항할 기력이 없었다.

이대로 왼쪽 어깨의 견정혈을 짚인다면 그녀는 당장에 몸을 쓰지 못하고 기절할 것이었다.

침대에 몸을 의지하고 순간을 지켜보던 양몽환은 벌떡 일어나며 다급한 소리를 질렀다.

 

「심사매!」

 

한마디 부르짖은 양몽환은 도로 침대에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갑작스럽게 놀라면서 몸을 움직이다보니

기혈이 치밀어 올라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이었다.

그 바람에 반은 정신을 잃고 있던 하림이 급히 몸을 돌려 간신히 견정혈을 짚이는

것만은 모면하였다.

하림은 자기의 위급함을 피한 기쁨 보다는 양몽환이 다시 기절한 것을 보고는

 더욱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일이 이렇게 되자 장삼을 입은 노인은 더욱 유쾌하게 웃어했다.

그러면서 하림을 움켜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손목의 맥문(脈門)은 인신의 주요철로 그 중에서 가장 예민한 곳이었다.

상대방에게 그 혈맥을 잡히면 전신의 혈도(穴道)가 단번에 영향을 입고

피가 순행하지 못하는 곳이다.

하물며 공력이 심후한 노인이 손에 더욱 힘을 주니 오죽하랴!

하림의 내부의 혈기는 거꾸로 쓸리며 몰리었다.

그 바람에 눈앞이 캄캄해지며 뒤로 넘어졌다.

노인은 이미 예측하고 있었던지 오른 팔로 넘어지려는 하림을 안았다.

노인은 하림을 어린애 다루듯이 갖고 즐기는 모양이었다.

하림의 얼굴은 피가 거꾸로 솟아 흐르기 때문인지 벌겋게 상기되어 갔다.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렀고 숨은 금방 넘어갈 듯이 헐떡이면서

몸은 가냘프게 떨리기까지 하였다.

노인은 하림을 한동안 잔인하게 바라보다가 불현듯 측은한 생각이 들었는지

왼 손의 힘을 풀어 주었다.

하림은 그제야 다시 정상적으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노인은 하림을 그대로 놓아 주지는 않았다.

양몽환을 처치하기 위하여 하림의 혈도를 짚어서 곱게 잠재워 주려고 하였다.

노인이 오른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하림은 오싹하여 눈을 찔끔 감았다

그러자 눈앞이 번쩍했다.

동시에 우뢰와 같은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가!

 

「이놈! 꼼짝 말렸다!」

 

  또다시 싸늘한 검광이 석실의 불빛을 갈랐다.

노인은 예기치 못한 놀라움에 급히 몸을 돌리면서 무작정 검광이 번쩍이는 곳을 향해

하림을 던지며 피했다

하림의 몸은 공중에 떠서 날아갔다.

그러자 느닷없이 뛰어든 사람은 가볍게 하림의 몸을 받아 안았다.

수염을 길게 기른 위풍이 당당한 도사였다.

한번 소리 지르면 그 소리는 마치 벼락 치는 소리와 같았고 싸늘한 검광은

그 도사가 들고 있는 보검에서 번쩍 거렸다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장삼을 입은 노인도 갑자기 나타난 도사의정체가 궁금하였지만

하림도 그가 누구인지 선뜻 분간하지 못했다.

하림은 맥문이 완전히 풀리자 숨길부터 돌릴 수 있었고

싸늘한 검광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림은 그제야 그가 누구인가를 알아 볼 수 있었다.

 

「아니? 대사백부님 아니세요?」

 

하림은 너무나 놀랍고 반가운 김에 대사백부의 품속으로 미친 듯이 파고들었다.

그는 여전히 장삼을 입은 노인을 쏘아 보면서도 하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그녀의 흥분한 마음을 진정시켜 주고 있었다.

하림도 그제야 생기를 되찾고 노인을 돌아보며 호소했다.

 

「대사백부님! 저 사람들은 아주 악독한 사람들이에요.

몽환 오빠와 대 언니를 아무 이유도 없이 해치려고 한단 말예요.

하도 억울해서 나와 팽언니가 반나절을 싸워 보았지만 결국은 지고 말았어요.」

 

갑작스럽게 나타난 도사는 바로 곤륜삼자 중에서도 가장 연장자인 일양자였다.

그는 하림의 울먹이며 호소하는 얘기를 미처 다 듣기도 전에 재빨리 왼 손으로

하림을 안은 채 오른 손의 보검으로 노인을 찌르려고 달려들었다.

동굴 속을 가르면서 칼바람은 미친 듯이 싸늘한 검광이 바람을 일으키면서 휩쓸고 몰아쳐갔다.

그 바람에 장삼의 노인은 땅바닥에 굴러 한쪽 모퉁이로 굴러갔다.

원래 그 노인은 하림과 일양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틈을 타서 침대에 누워 있는

양몽환을 노리고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양자도 즉각 그 눈치를 알아채고 사전에 보검을 휘둘러 막았던 것이다.

그 보검은 무예계에서도 탐을 내는 천하에 둘도 없는 기보(奇寶)였다.

한 번 휘두르면 번쩍이는 검광이 눈을 찌르고 바람은 귀를 때리는 것이었다.

그 노인도 단지 한번 칼을 휘둘렀을 뿐인 데도 검광과 검풍에 질겁해서

황망히 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일양자는 다시 위엄을 돋우어 호령했다.

 

「주공량(周公亮), 당신과 사천경의 약은 간계는 헛되고 말았소.

당신들 뜻대로 빈도를 죽이지도 못하였을 뿐 아니라 빈도는 오히려

그 덕분에 고맙게도 무예계의 진귀한 보검을 한 자루 얻게 되었소.」

 

  그러자 하림은 또다시 일양자에게 매달리며 울부짖었다.

 

「사백부님! 빨리 팽언니를 구해요! 아주 위험해요.」

 

일양자가 급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과연 얼굴이 못생긴 여인이 천용방 흑기단주인 최문기와 생사를 걸고

막바지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연신 위험한 공격을 당하면서도 한 발자국도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불을 뿜는 듯 치열한 싸움이라 그들은 온갖 공력과 정신을 다하여

싸우기에만 몰두한 나머지 일양자가 나타난 사실도 전연 의식치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일양자가 재빨리 보검을 휘둘러 신용은현(神龍隱現) 법으로 달려들면서 최문기를 찔렀다.

과연! 무예제의 기보인 만큼 보검의 위력은 대단했다.

한 번 휘두르자 온 석실에 검광이 가득 차는 듯 하였다.

최문기는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던 때라 더욱 신바람이 나서 두 손의 공력을 집중시켜

후려칠 참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한 가닥 서릿발 같은 검광이 들이 닥치자

깜짝 놀라 두 손을 재빨리 거두고 황망히 옆으로 다섯 걸음이나 물러섰다.

일양자는 일격으로 최문기를 물리치고는 그 즉시 다시 한 번 보검을 휘둘러

서릿발 같은 검광 검풍을 일으켜 침대 위에 주약란과 양몽환을 보호했다.

간사하기 그지없는 주공량이 아까처럼 다시 빈틈을 노리고

그들 두 사람에게 습격을 시도할까 염려스러워 미리 예방으로 보검을 휘두른 것이었다.

일양자는 역시 침착하고 용의주도(用意周到)한 노련한 무예가다웠다.

삼수나찰 팽수위로서도 그 순간 무척 위급한 고비로서 스스로도 불안을 느끼던 때였다.

이러한 때에 설한풍 같은 섬광이 싸늘하게 허공을 가르며 자기 옆을 번개같이 노리고 지나가자

최문기가 급히 피하는 것을 보았다.

어떤 영문인지를 몰라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았다.

천만 뜻밖에도 자기 옆에는 기다란 수염을 드리운 도사가 서 있지 않는가?

그 도사는 등불을 받아 번쩍거리는 눈부신 한 자루의 보검을 들고 고매한 품위를 풍기며

자기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때서야 최문기도 그가 '누구인가를 알아보았는지 허풍을 떨며 말했다.

 

「난 누구라고. 그러고 보니 당신은 현도관주(玄都觀主)이시군!_」

 

그러면서도 눈은 일양자의 보검에만 쏠리고 있었다.

일양자도 허탈하게 웃으며 맞장구쳤다.

 

「최형은 그새 무고하시오?

그러고 보니 괄창산에서 이별한지 벌써 일 년이 가까워옵니다, 그려.」

 

  그러나 최문기는 대답할 생각도 않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던 일양자가 이곳에 나타난 이상 필경은 곤륜삼자 전부가

이곳에 나타났을 것이 아닌가?)

 

  최문기는 일양자만 보고 지레 짐작하자 속이 섬뜩 하였다.

 

  (그렇다면 지금의 세력으로는 도저히 맞싸울 순 없겠지.

더욱 저렇게 번쩍이는 보검은 심상치 않은데‥‥‥)

 

최문기는 이같이 대뜸 자기의 형세를 판단하고 은근히 일양자가 들고 있는

보검을 보고 겁을 먹고 말았다.

사실 여태껏 자기와 혈전을 벌린 추녀 팽수위의 무공도 무척 강하여 벅차던 판이기도 하였다.

그 보다 더욱 그녀의 독모래가 얼마나 무서운 암기인가 하는 것을 잘 아는 최문기는

두말없이 이곳에서 피하는 것이 상책이겠다고 느꼈다

최문기가 열심히 이 같은 생각을 하느라고 대답이 없자 일양자가 빈정거리며

다시 한 말을 던졌다.

 

「최형은 지금도 날 없애 볼 생각을 하고 있는 거요?」

 

  최문기는 그제야 비굴한 웃음을 띠며 급히 그 말을 막았다.

 

「별 말씀을, 강호에서 곤륜삼자의 재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소?

저와 같은 재간으로 도형을 죽일 생각을 하다니.

천만에‥‥ 아니 우리로서야 불가능한 일이지요.」

 

하고는 몸을 돌이켜 황망히 굴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주공량도 풀이 죽어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일양자가 그 뒤를 은근히 쫓아 나가며 그들을 불러 세웠다.

 

「주공량, 나 좀 봅시다. 빈도가 주형에게 잠깐 할 말이 있소.」

 

  주공량이 겁에 질려 몸을 획 돌이키면서 혹시나 불의에 공격을 가해오지 않을까 싶어

잔뜩 몸을 가다듬었다.

 

「복수를 하시겠다는 거요?」

 

  일양자는 가볍게 코웃음치고 또 빈정거렸다.

 

「빈도는 몇 마디 물어볼 것이 있을 뿐이니 그토록 긴장해서 겁낼 필요는 없을 것이오.

내가 보기에 여간 딱해 보이지 않으니 안심하고 몸을 푸시오, 핫하하‥‥‥」

 

  주공량은 그 말에 얼굴을 붉히고 비로소 자세를 고치며 또 허풍을 떨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도형께서 말씀이 있으면 얼마든지 분부만 하십시오.」

 

「빈도와 주형 그리고 철검서생(鐵劍書生) 사천경과는 과거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원한도 없을 것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분이 이 빈도를 해치려는 것은 대관절 무엇 때문이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빈도로서는 아직도 분명 한 이 유를 모르겠소.‥‥‥」

 

  일단 말을 끊은 일양자는 매섭게 그들을 돌아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허나 두 분의 계략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 덕분에 빈도는 기보(奇寶)인

이 보검을 얻었으니 고맙기는 하오만.」

 

하고는 보검을 한번 획 휘두르자 즉각 음산한 검광이 석실에 가득 찼다.

그들은 질겁해서 놀라 한 걸음 물러서고는 몸을 떨었다.

일양자는 그들을 한바탕 골려 주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주형께서 사천경에게 분명히 전해 주시오.

빈도는 비록 보복할 뜻은 없으나 꼭 그 원인을 묻겠다고.」

 

남천일붕 주공량은 일양자의 손에서 번쩍이는 보검을 다시 보고 기가 질렀는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바삐 동굴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그 걸음은 어찌나 빠른지 꼭 도망치는 사람 그대로였다.

일양자는 더 이상 물지 않고 놓아 보냈다.

천천히 보검을 칼집에 꽂으며 침대 앞으로 왔다.

한편, 주약란은 이때까지도 운기 조식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은 꼭 깎아 세운 돌부처 같았다.

양몽환은 하림이 애써서 주물러 주는 덕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양몽환은 아직 혼미한 중에도 일양자를 즉시 알아보았다.

그는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다시 눈을 떠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래도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일양자가 웃음을 만면에 띠고 양몽환의 바로 앞에 와 섰다.

그제야 양몽환도 크게 놀라는 한편 기쁜 마음이 치솟았다.

 

「사부님!」

 

  양몽환은 급히 침대에서 내려와 예를 갖추려고 했다.

  그러자 일양자는 손을 들어 조용히 말렸다.

 

「보아하니 네 상처가 무척 중한가 보구나. 예(禮)는 그만두고 조용히 누워 있어라.」

 

양몽환도 더 이상 일어나려고 하지 않고 눈물을 글썽거릴 뿐이었다.

일양자는 다시 운기 조식에 몰두하고 있는 주약란을 돌아봤다.

 

  그녀의 머리는 여전히 흐트러져 있었고 앞가슴에는 피로서 더럽혀져 있었다.

  일양자는 모든 것이 무척 궁금하여 양몽환에게 물었다.

 

「너희들 모습만을 보고서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짐작할 수조차 없구나.

어디 말할 수 있으면 모든 경과를 대강 말해 보아라. 궁금하구나.」

 

양몽환은 쓸쓸히 입맛을 다시고 조용히 지나온 경과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처음 주약란을 괄창산까지 바래다준 후 편지를 남기고 떠나온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계속해서 거기서 혀나 오던 도중에 이요홍과 아미파의 승려들 간에 충돌이 일어난 것을

보게 되어 참견하다가 아미산까지 붙잡혀 갔던 일과 그곳에서 다시 탈출하여 오던 길에

옥소선자를 만나서 사부의 행방을 찾아 다시 아미산으로 달려갔던 이야기도 했다.

다시 그곳에서 천용방 단주들과 만불사의 승려들 간에 있었던 일 등 자초지종(自初至終)의

모든 이야기를 대충 요약해서 말했다.

그 뒤를 하림과 팽수위가 보충했다.

 

주약란이 양몽환을 구하게 된 연유며 만년 묵은 거북을 잡으려다 실패한 경과를 설명하였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아 있었다.

일양자는 침통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양몽환을 바라보았다.

듣고 보니 탄식하지 않을 수없었다.

일양자로서는 양몽환이 지나온 과거에 많은 여자들이 얽혀있는 것이 무척 걱정스러웠다.

더욱이 그 여자들은 하나같이 평범하지 않은 여자들이고 보니

이토록 얽히고설킨 애정 관계를 장차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도 무척 걱정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양자는 공연히 역정마저 솟아올랐다.

그렇다고 창백한 모습을 한 양몽환의 측은한 모습을 보고는 차마 역정 낼 수도 없는 처지였었다.

하림은 얼마 동안 충분히 휴식하고 나자 도로 제 천성대로 천진난만하고 순박한

소녀로 되돌아가 있었다.

 

  하림은 다시 즐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큰 사백부님, 대(黛) 언니가 말예요.

네? 나와 몽환 오빠를 참 좋은 곳으로 보내준다고 약속했어요.

우리는 그 곳에서 모두 함께 영원히 살기로 했지 뭐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시 이 세상에 발을 들여 놓지 않을 거예요. 멋진 생각이죠?」

 

  일양자는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선뜻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하림은 안타깝다는 듯이 다시 설명했다.

 

「대 언니가 분명히 말한 것은 아니지만

몽환 오빠의 상처는 치료하기가 매우 힘들다고 말했어요.

그러니 몽환 오빠를 구할 수 없고 결국은 죽고 말 것이라고 했거든요.」

일양자는 속으로 대단히 놀랐다.

그러나 여전히 침착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너의 대(黛) 언니가 도저히 구할 수 없다던?」

 

  그러자 양몽환이 웃으며 하림의 대담을 앞질렀다.

 

「제자가 근래 한 일을 생각하면 매우 반성되는 점이 많습니다.

이제는 생사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사부님의 십여 년 동안 베푸신 가르침을 저버리게 된 것만이 가슴 아플 뿐입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일양자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묵묵부답이었다.

하림은 여전히 생글거리며 순진하게 말했다.

 

「오빠! 오빠가 죽는다고 해도 나는 영원히 오빠를 모시고 있을 터이니 아무 걱정 마세요.

대(黛) 언니도 오빠의 여러 원수를 갚은 뒤에 우리들과 같이 한평생 지내겠다고 했어요.」

 

  하림은 인간 세상의 최대의 비극인 죽음이라는 것을 그나마 생사람이 따라 죽는

합장(合葬)이라는 것을 마치 즐거운 곳으로 소풍이나 가기나 하는 것처럼 순박하게

얘기하는 것이다.

오히려 생글거리며 얘기하는 것이 그렇게 되기를 즐겁게 기다리기까지 하는 말투였다.

일양자는 어처구니없는 얘기와 하림의 너무 천진무구한 태도에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선뜩한 마음이 없지도 않았다.

 

  (그렇지‥‥‥ 이 애는 비록 철딱서니 없는 얘기를 거리낌 없이 하고 있지만

오직 저토록 아름다운 애정에는 진심으로 감격치 않을 수 없는 노릇이지.

어쩌면 그런 일을 해치울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양몽환이 죽게 된다면 이런 비참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무척 주의해야겠구나. )

 

  일양자는 속으로 은근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주약란이 옆에 있기 때문에 하림의 말을 완전히 믿지 못하였다.

단지주약란이 하림을 위로하기 위해서 한 말인지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

양몽환도 하림의 이야기에는 대단히 놀라운 모양이었다.

 

「아니, 너는?」

 

「응, 오빠가 죽게 되면 우리들도 오빠 옆에서 떠나지 않기로 했어요.

그래야 오빠도 외롭지 않고 또 우리들도 매일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아요?

이제 오빠가 죽는 다해도 나는 겁나지 않아요.」

 

  이에 양몽환은 기가 탁 막히는 동시에 내장의 기혈이 울컥 치솟았다.

 

  (쓸데없는 짓들을‥‥‥)

 

  정신없이 흥분하다 보니 급기야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고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하림은 손수건을 꺼내어 양몽환의 입에 묻은 핏자국을 정성껏 닦아주었다.

그런 후에 곧 양몽환의 앞가슴을 헤치고 곧 요혈을 주무르기 시작하였다

  일양자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도 즉시 공력을 운집하여 하림을 도왔다.

  양몽환은 잠시 후에 다시 정신이 들었다.

 

「넌 이런 중상을 입고도 몸을 보중할 줄 모르느냐?

만일 네가 죽어 버리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괴로워할는지 생각해 보려무나.

너의 아버지만 생각해 보더라도 평생에 아들이라고는 너 하나 밖에 더 있느냐?

나도 평생에 제자라고는 너 하나밖에 더 두지 않았어!

너와 같이 자신을 아낄 줄 모르는 사람은 그것이 스승이 된 내 마음이나

너의 아버지의 마음을 얼마나 괴롭게 하는 것인지는 모를 거다.」

 

  일양자는 양몽환의 순박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하림의 말을 듣고는 충격을 받았을 것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린 지금 또 다시 하림에게 꼬치꼬치 캐어물을 것이고

또 다시 충격을 받으면 큰일이라 싶어서 미리 꾸짖어놓아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일부러 엄히 훈계하였던 것이었다.

 

과연, 양몽환은 스승의 엄한 훈계를 듣자 즉시 마음과 몸을 단정히 가다듬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말았던 양몽환은 새삼스럽게 살아야겠다는 의욕을 느꼈다.

그는 곧 스승의 말대로 체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조용히 눈을 감고

운기조식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일양자는 나직하게 하림에게 주의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림아! 그 애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우리는 바람이나 쏘이고 오자.」

 

하림은 일양자를 따라서 가만히 동굴 밖으로 나갔다.

태양은 벌써 산 높이 떠올라 그 찬란한 빛을 아낌없이 온 누리에 비치고 있었다.

새들은 쉼 없이 지저귀고 밝은 하늘에는 흰 구름이 뭉게뭉게 떠있어서 한없이 시원스러웠다.

일양자는 세밀히 그 계곡의 형세를 살피면서 가까운 산봉우리 위로 올라갔다.

동굴 주위를 돌아보니 앞에는 웅장한 한 폭의 선경이 펼쳐져 있었다.

일양자는 정신이 쇠약하여짐을 느꼈다

그리고 근일에 겪었던 일들이 꿈만 같이 느껴졌다.

한동안 맑은 공기에 취해 있던 하림이 불쪽 손을 내밀었다.

 

「큰 사백부님, 저기 웬 사람이 와요.」

 

일양자는 하림이 가리키는 곳을 얼핏 돌아보았다.

과연 어떤 사람이 산 아래에서 비틀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일양자는 공력을 돋우어 한참을 내려 보다가 가볍게 놀랐다.

일양자가 놀라는 것을 보니 그 사람을 알아본 것이 틀림없었고

또 그 사람은 예사 사람이 아닌 것도 분명하였다.

그러나 하림은 공력에 차이가 있고 보니

그의 시력으로서는 거리가 멀어 미처 누구인지는 분별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어렴풋이 보이는 것은 검은 옷이었다는 것뿐이었다.

산 밑을 돌아 산으로 올라오는 사람은 발길이 불완전하여 몸이 휘청거렸다.

그 사람은 비틀거리는 몸을 오른 손에 들고 있는 한 자루의 옥피리로 의지하고 있었다.

옥피리를 지팡이 대신으로 바위나 나무에 짚으며 간신히 몸을 지탱할 수 있는 모양인데

알고 보니 여인의 몸이었다.

그러고 보니 비록 0걸음은 휘청거리고 몸은 힘없이 비틀거렸으나 그 걸음걸이는

결코 범상하지 않았다.

일양자는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처지인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는

하림을 이끌고는 마주 내려갔다.

그들이 단숨에 뛰어 내려가 그곳에 다다랐을 때에는

그 흑의의 여인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지 바위 위에서 쉬고 있었다.

두 눈은 살포시 감고 있었고 하얀 목에는 한 치 정도의 상처가 나 있었으며

옷은 더럽혀져 있었다.

 

애처롭게도 삭막한 얼굴로 가냘프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잠시 그 여인을 바라보고 난 일양자는 하림에게 일러주었다.

 

「림아, 네가 저 여자의 기문(奇文)과 현기(玄機) 두 혈맥을 주물러 주어라.」

 

 하림이 몸을 꾸부리고 막 손을 움직이려는 차에 그녀는 오른 손에 들었던

옥퉁소를 번쩍 들어 비스듬히 내려치는 것이었다.

일양자가 왼 손으로 재빨리 옥퉁소를 움켜잡더니 무작정 빼앗아들었다.

 

「옥소선자! 우리는 호의를 베풀어 그대를 구해 주려고 하는데

어찌하여 이렇듯 무례하게 대하오?」

 

  옥소선자는 그 말을 들었는지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일양자를 오랫동안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간신히 일양자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기쁜 빛은 없었다.

 

「너무 늦게 왔습니다.

그는 이미 절벽아래 연못 속에 던져지고 말았어요.

그 길가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지만 시체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마 소용돌이치는 물결에 싸여 깊숙이 가라앉았는지 모르지요.

내가 몸에 중상만 입지 않았던들 당장에 물속에 뛰어 들어가 건지고 말았을 거예요.

그러나 언제든지 나는 그의 시체를 건지고 말겠어요.」

 

그리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하림을 의식하고 쳐다보았다.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얼굴에 이렇다 할 변화는 보여주지 않았다.

 

「아미파의 승려에게 중상을 입은 그는 자세히는 모르나 누런 저고리를 입고

오른 손에 금환을 낀 비상한 차림의 소년에게 죽음을 당했어요.

그가 그 사람의 성을 부르는 것을 얼핏 듣기는 하였어도 지금은 기억할 수 없군요‥‥‥‥」

 

말을 끝마치기 도 전에 다시 퉁소에 몸을 의지하고는 그 자리를 급히 피해서 가고 말았다.

얼마 후에는 벌써 산모퉁이를 돌아갔는지 그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하림은 그 여자의 정체가 궁금하여 일양자에게 물었다.

 

「큰 사백부님, 저 검은 복장의 여인은 누군데 몽환 오빠를 잘 알죠?」

 

「그녀의 진짜 성명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어.

대개 그녀를 옥소선자라고 부르지.

당초 강호에서는 상당한 명성을 날리는 여인이야.」

 

  하림은 그 이름을 다시 한 번 입속에 뇌까려 보았다.

 

「옥소선자?」

 

  알쏭달쏭한 이름이었다.

잠시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나 극히 귀에 익은 이름인데도 어디서 들은 것인지 기억이 잘 안 났다.

두 사람이 동굴로 돌아왔을 때에는 팽수위는 나가고 없었다.

주약란은 이미 조식을 끝내고 양몽환과 마주 앉아 조용히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하림은 주약란에게로 한달음에 달려가서 호들갑을 떨었다.

 

「조금 전에 우리들은 크게 싸웠어요.

큰 사백부님이 그때 마침 오시지 않았더라면 팽언니와 난 참패당하고 말았을 거예요!」

 

  주약란은 그제야 일양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하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럼 대단히 욕을 보았겠군!」

 

「응, 지금까지 여러 번 싸워도 보았지만 어제 저녁만큼 무섭게 싸워보긴 처음이에요.

그들이 침대 옆으로 다가와 몽환 오빠와 언니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지 않아요.

급하긴 하고 어떻게 해요. 이를 악물고 싸웠지‥‥‥

그랬더니 글쎄 나도 모르게 기운이 평소보다 마구 솟구치잖아요.」

 

  두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팽수위는 한 주전자의 물을 길어왔다.

주약란은 그 물로 얼굴과 머리에 묻은 핏자국을 및고는 일양자를 쳐다보았다.

 

「선배님께서 때마침 잘 오셔서 저희들의 위급함을 구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뿐만 아니라 저희들이 찾아갈 수고도 덜어 주시니 매우 반갑습니다.」

 

주약란은 아주 예절바르게 깍듯이 인사를 마친 후에 침대에 누워있는 양몽환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차고 슬픈 빛이 역력하여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의 마음마저도

암담하게 하였다.

 

「이 사람은 대단히 중태여서 저로서는 구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괄창산의 백운협(白雲峽)에 계신 저의 사부님을 찾아가서 사부님이 갖고 가신

만년 묵은 거북으로 그의 상처를 치료 할까 합니다.」

「주소저께서 이렇듯 몽환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빈도로서는 끝이 없이 고마울 뿐이외다. 그러나 몽환은 빈도를 떠난 지 채 일년도 못 되어서 이렇듯 갖가지 풍파만 저지르고 다니니 괘씸한 마음도 없지 않소이다.」

  주약란은 급히 그 말을 가로 막았다.

「선배님께서는 너무 그를 나무라지 마십시오. 사실에 있어서 많은 일들이 그를 나무랄 수 없도록 만들었던 거예요. 지금 그의 상처가 깊어 이대로 더 지체하면 안 될 것 같군요. 그가 관련되어 일어난 풍파에 대해서는 비록 어떤 후환이 나에게 닥친다 해도 결코 혼자 당하게 내버려두지는 않겠어요!」

「언제 떠나시겠소? 빈도가 조금이라도 호송해 드리리까?」

「노선배께서 일이 있으시다면 서슴지 마시고 가서 보도록 하십시오. 림매와 팽소저가 옆에서 도와주니 굳이 선배님이 계시지 않더라도 충분합니다.」

 

일양자는 그녀의 말투에서 자기가 따라오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렇다면 빈도가 먼저 떠나지요‥‥‥」

 

  막상 떠나 갈듯이 몸을 돌리던 일양자는 다시 주약란을 바라보더니

허리에 차고 있던 보검을 풀어서 내밀었다.

「곤륜산의 얼음이 쌓인 벼랑에서 옥소선자와 싸우고 있을 때였소.

 갑자기 천용방 방주의 따님인 이요홍이 달려와서 우리 환이가 아미파에게 사로 잡혀

만불사로 이끌려갔다고 전해 주더군요.

그 길로 나는 곧장 이 아미산으로 총총히 달려왔던 거요.

이 와호령에 도달하였을 때에는 깊은 밤중이었소.

우연히 남천일붕 주공량과 철검서생사천경이 어느 절벽가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빈도는 잠시 동안 호기심으로 그들의 말을 엿들었습니다.

한참 듣고 보니 그들이 의논하고 있는 것이 바로 만년 묵은

거북을 잡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더군요.」

일양자는 잠시 이야기를 중단하고 주약란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빈도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들은 것은 지나가는 호기심에 불과했던 것인데 그만

그 일로 생각지 못하게 철검서생의 노여움을 사서 그에게 살의를 일으키게 되었던가 보오.」

 

주약란도 호기심에 잠겨 듣고만 있다가 궁금한 듯이 불쪽 물었다.

 

「사천경은 굉장히 음흉한 사람이랍니다.

그래 그 놈들은 선배님을 어떤 수단으로 대하시던가요?」

 

「빈도는 예전에 여러 번 강호를 드나들다 보니

그들과 몇 번 만나본 인연이 있던 터라 철검서생 사천경이 나를 알아보고는

자기들과 함께 만년 묵은 거북을 잡자고 권하는 것이었소

너무도 간곡하게 부탁하는 바람에 결국은 응낙하고 말았지요.

그러자 사천경은 고의로 빈도를 크게 환영하느라고 수선을 떨더군요.

 잠시 후에 만년 거북이 숨어있는 절벽으로 가자면서 빈도를 데리고 가더니

마음을 놓고 있는 틈을 타서 주공량과 사천경 두 사람이 일제히 빈도를

절벽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지 않겠소?

빈도는 별 수 없이 꼼짝 못하고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지요.

그런데 빈도는 불행 중 다행으로 몸을 다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천고에 드문 보물인 이 보검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려.

그러나 이런 보검은 절세의 무공을 지니지 않은 사람이 아니고는 가질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빈도는 주소저가 몇 번이나 구원의 손길을 뻗쳐준 데 보답하고자 이 보검을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난 일양자는 보검을 건네어 주었다.

주약란은 그 보검을 두어 번 보더니 고개를 흔들며 도로 건네주었다.

 

「그러한 보검을 제가 어찌 함부로 받겠습니까?

역시 이 보검은 선배님께서 그냥 써 주십시오.

더욱이 저는 무예가로서 강호에 이름을 날리고 싶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은 더욱 이 길에는 아무 의욕이 없습니다.

귀하의 분광(分光) 검법은 무예계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

그 위에 이 보검을 갖게 되면 더욱 위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선배님께서 그냥 써 보시지요.」

 

그녀가 받을 의사가 없는 것을 안 일양자는 더 권하지 않고 도로 보검을 메고는

두 손을 흔들어 보이고 표연히 떠나갔다.

 

주약란들도 그 즉시 석실을 떠나 동쪽으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그 후 여행하는 중에도 주약란은 그녀가 말한 대로 다시는 남장을 하지 않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줄곧 하림과 다정스럽게 양몽환의 옆을 지키며 항시 웃는 얼굴로

다정히 위로해 주곤 하였다.

그녀는 몹시도 양몽환의 상처가 악화되어 괄창산까지 지탱하지 못하면 어찌나 하고

깊이 염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양몽환은 수차 혼절하기는 하였어도 끈질기게 끝내 한 가닥 남은

숨은 붙어 있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진기를 돋우어 양몽환의 정신을 차리게 하느라갖은 애를 다 썼다.

또 아주 정이 넘치는 위로의 말로 양몽환의 생에 대한 의욕을 돋우어 양몽환으로 하여금

절동(淅東)까지 한 가닥 숨길만은 붙이고 있게 끔 하였다.

그러나 그녀로서는 양몽환이 지난날 민강(泯江) 배 속에서 백의소녀로부터 얻어먹은

영단의 신기한 효과가 작용하는 덕으로 그나마 한 가닥 숨길을 지탱하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와 더불어 그녀의 진원지기로 양몽환의 혈맥이 유통되게끔 유지함으로서

양몽환의 생명이 이어져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소녀로부터 얻어먹은 약효와 주약란의 지극한 간호 덕분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들은 끝내 절동(漸東) 괄창산에 도착하여 가마를 버리고 산으로 오르기 시작하였다.

양몽환은 하림과 주약란 그리고 팽수위가 교대로 업어가면서 피곤함도 불구하고 계속 강행하였다.

다행히도 주약란이 그 지리에 익숙한 곳이라 편한 길을 골라서 갈수 있었다.

고개를 넘고 산등성이를 몇 번씩이나 지나 야밤이 되었을 때는 백운협(白雲峽)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이 때는 밤 자시(子時)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둥근 달이 떠올라온 산야를 은빛으로 비쳐주고 있었다.

밤바람은 싸늘하게 소나무 가지에 맺혀 소슬하게 울고 있었다.

주약란은 양몽환을 가만히 내려놓고는 멀리 보이는 우뚝 솟은 앞의 산봉우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 산봉우리만 넘어서면 바로 거기가 백운협이지.

이제다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하림은 은근히 걱정이 되어 가만히 자기 얼굴을 양몽환의 코 가까이 갖다대고

숨결을 들어 보았다.

 

「몽환 오빠의 숨은 아직 조금씩 쉬고 있어요.」

 

「그런데 사부님이 돌아 오셨는지 모르겠어.‥‥‥」

 

주약란은 백운협에 들어가면 단번에 그녀의 사부님이 계시고 안 계신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백운협이 가까워 올수록 겁이 났다.

급히 달려오는 마당에서는 막연하나마 꼭 있으리라는 절대적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가까이 오면 올수록 그 신념은 사라지고 계시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만이

가득 차 더 앞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하림도 오른 손의 소매로 얼굴의 땀을 닦으며 안타깝게 물었다.

 

「언니, 백운협이 여기서 거리가 얼마나 돼요?」

 

「바로 저 산봉우리 너머야. 아마도 오리정도 더 가야 될 거야.」

 

  하림은 아득한 듯 그 산봉우리를 눈여겨보았다.

그녀는 조바심이 나는지 주약란에게 독촉하였다.

 

「대(黛) 언니! 쉬지 말고 빨리 언니의 사부님을 찾아가

몽환 오빠의 상처를 치료해 달라고 하세요.

숨을 쉬는 것으로 보아 몽환 오빠는 어쩌면 죽지 않을 것도 같아요.」

 

  그녀는 양몽환이 삼일 이상을 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주약란이 한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천성(關川省) 아미산에서 절동 괄창산까지 그 갑절인

이십 여일이란 시일이 흐르고 있었다.

양몽환은 그런대로 그때까지 한 가닥 숨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하림은 비록 주약란이 못하는 일이 없는 것으로 믿어마지 않으나

이번 일만은 완전하게 결말을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사실 하림뿐 아니라 주약란 역시 예상외로 이십 여일을 양몽환이 생명을 부지한 사실에는

신기한 생각마저 들었던 것이었다.

그녀가 진기를 소모하여 가면서까지 양몽환의 기경팔맥을 유통시키게 한 것은

단지 양몽환에게 최후의 도움이나 될까 싶어 마지못해서 그나마 별 효력은

없으리라 여기고 한 것이지 결코 이 같은 기적을 기대해서 한 노릇은 아니었던 것이었다.

주약란이나 하림은 양몽환이 민강(泯江) 배속에서 백의의 소녀로부터 얻어먹은

신기한 영단의 힘으로 한 가닥내장의 진기가 흩어지지 않고 그의 생명의 불길을

이어올 줄이야 꿈엔들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평소에 주약란은 의지가 강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이런 처지에서는 별 수 없이 그녀도 역시 여인다운 우유부단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한동안 생각하여 보더니 겨우 하림을 바라보고 그녀도 불안을 감추지 못하였다.

 

「만일 나의 사부님이 돌아오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지? 지금나의 마음은 마구 떨려.」

 

  하림도 잠시 생각하더니 오히려 주약란을 위로했다.

 

「걱정 마세요. 우리가 백운협에 가서 기다리죠.」

 

「하지만 사부님의 생활은 정말로 항상 표연하시거든,

때로는 몇 개월이고 혹은 반년 넘게까지 백운협에 한 번도 돌아오시지 않을 때가 있어.」

 

  갑자기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또 다른 불길한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그녀의 얼굴은 자기도 모르게 암담하게 변하여 갔다.

 

  (사부님은 항상 나의 청이라면 들어 주셨는데 그 날은 예전과 판이하게

한 마디 말씀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아주 급한 일이 아니면 결코 그와 같이 나를 대하지 않을 건데‥‥‥‥

더욱이 이미 상승의 내공을 터득한 사부님은 그 만년 묵은 거북을 빌려

공력을 증진할 필요도 없을 것이 아닌가? )

 

  그녀가 미처 생각을 돌이키지 못했을 때 뜻 밖에도 허공에서 학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곧바로 쳐다보니 달빛 아래 거대한 한 마리의학이 유성과 같이 내려와 그녀의 옆에 앉는 것이었다.

 

현옥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현옥에 주약란은 뛸 듯이 기뻤다.

그녀는 이제 그녀의 사부가 백운협으로 돌아와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영물인 현옥은 단지 그녀의 사부와 그녀만이 구사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날 저녁 현옥이 갑자기 사라진데 대하여 주약란은 매우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곧이어 그녀의 사부님이 나타난 것을 보고는 그때의 사부님이 데리고 간 것을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양몽환을 안으며 하림을 향해 소리쳤다.

 

「사부님은 이제 돌아오실 거야! 빨리 가자!」

 

  즉각 그들은 힘껏 달려갔다.

 

  얼마 후,그 높은 봉우리를 막 넘을 때였다.

 

「뚱! 뚱!」

 

  홀연 아래서 가냘프나마 몇 번 비파(琵琶)를 튕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비록 크지는 않았으나 뚜렷하였다.

은근히 사람의 심금을 휘어잡는 소리였다.

세 사람은 한결같이 이상한 마음을 느끼고 발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그때 그들의 머리 위에서 낮게 날던 백학 현옥이 갑자기 한소리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밤하늘에 치솟더니 삽시간에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

주약란은 현옥이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놀란 소리를 질렀다.

 

「림매, 빨리 가‥‥‥‥」

 

하림이 돌아봤을 때에는 주약란의 몸은 벌써 비호처럼 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거동에 하림과 팽수위도 영문은 알 수 없었으나

그 뒤를 급히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코에 스미는 들꽃의 향기, 아름답게 지저귀는 산새들도 않았건만

그들의 급한 마음은 그것들을 감상할 여지도 없었다.

무작정 주약란의 뒤만 따라 내달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앞으로만 곧장 달려가던 주약란이 우뚝 걸음을 멈추면서 몸에 안았던

양몽환을 뒤에 따라오는 하림에게 넘겨주었다.

그런 후 또다시 몸을 날려 비호같이 앞으로 달려갔다.

하림과 팽수위가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니 앞에는 널따란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 잔디밭의 서 쪽에는 청포(靑袍)에 수염이 기다란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 노인의 일장(一丈) 넘어 떨어진 곳에는 남사(藍紗)를 걸친 백의 소녀가

품에 비파를 들고 단정하게 정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사를 걸친 소녀의 뒤에는 한결같이 맨발의 백의 소녀들이

네 사람 나란히 서 있었다.

보아하니 남사를 걸친 백의 소녀의 시녀인 듯 하나 모두 소녀들이었다.

자세히 보니 남사를 걸친 소녀의 어여쁜 얼굴에는 두 줄기의 눈물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녀는 몸에 든 비파를 만지작거리며 한결같이 잔디밭에 앉아있는

노인만을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비파를 탈까 말까하고 망설이는 모양이었다.

주약란은 그 노인의 앞으로 달려갔다.

 

「사부님!」

 

주약란은 울음에 젖은 슬픈 소리로 사부님을 불렀다.

그러자 노인은 멈칫해서 놀라며 소리쳤다.

 

「네가 무슨 일로 돌아왔니? 빨리 떠나라! 당장에 빨리 떠나!」

 

손마저 들어 휘두르면서 불문곡직하고 빨리 떠나라고만 성화같이 소리 쳤다.

이때, 남사를 걸친 백의 소녀는 마음을 진정했는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품에 들고 있는 비파를 연이어 세 번 퉁기었다.

 

「뚱! 뚱? 뚱!」

 

비파 소리는 기묘하게 울려 퍼져갔다.

 

웬일인지 하림의 온 몸은 스르르 맥이 빠지면서 안고 있던 양몽환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팽수위는 그 비파 소리를 듣자 자기도 모르게 비파 소리에 따라 세 번을 껑충 껑충 뛰었다.

주약란은 별달리 반응이 없었지만 그 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가슴이 울렁거려오고

불안과 초조에 조바심이 일어났다.

무척 신기하고 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행히도 소녀는 세 번을 퉁기고 그치고 말았다.

세 사람은 곧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림은 땅에 떨어진 양몽환을 급히 살펴보았다.

아직 약하나마 숨이 붙어 있었다.

마음을 놓은 하림은 주약란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저 비파소리가 귀에 거슬리는 군요‥‥‥」

 

그러자 청포의 노인은 큰 소리로 주약란에게 소리쳤다.

 

「빨리 떠나거라. 더 지체하였다가는 오도가도 못 할 것이다.

난 이미 중상을 입은 몸이니 너나 어서 떠나 가거라.」

 

과여 사부의 얼굴은 예전과는 달리 창백하여 핏기라고는 없었다.

주약란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남사를 걸친 백의 소녀에게 비호처럼 덮쳐들었다.

그것은 그 소녀가 사부님을 비파 소리로 정신을 잃게 하고 상처를 주려는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