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비연경룡

제 28 장 드디어 발견된 기서(奇書) <宮女情如>

오늘의 쉼터 2014. 6. 22. 14:05

제 28 장 드디어 발견된 기서(奇書) <宮女情如>
 


그러나 그 소녀는 주약란이 덮쳐오던 말던 조금도 개의치 않고 그 대로 정좌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 서있던 맨발의 백의 시비(侍婢)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주약란을 가로막았다

주약란은 끓어오르는 분함을 참지 못해 애쓰던 참이었다.

서슴지 않고 왼손으로 이산진해(移山鎭海)의 장풍을 일으켜 밀어 붙이는 동시에 오른손으로

신용패미(神龍擺尾)의 장법으로 비스듬히 칼날 같은 장풍을 갈겨 보냈다.

네 백의의 시비는 주약란의 매서운 공격에 재빨리 뛰어서 피했다.

그러나 곧 다시 한데 모이면서 공세를 취하고보니

한꺼번에 여裂개에 손이 주약란의 요혈 여덟 곳을 사방팔방에서 노리고 들어왔다. 

주약란이 네 사람의 공격을 받자 팽수위도 화가 치밀어 보고만 있지 못하였다.

한소리 크게 기합을 터뜨리며 가죽 장갑을 끼고 독모래를 한 움큼 움켜쥐었다.

그러자 잔디밭에 앉아있던 노인이 큰 소리로 또다시 소리쳤다.

 

「란아, 빨리 손을 멈추어라.

그는 너의 동생인 소접(小蝶)이다. 넌 결코 그의 적수가 아니야.」

 

주약란은 그 소리에 멈칫하였다.

재빨리 손을 휘둘러 공세를 가하던 네 백의의 시비를 물리치고는 뒤로 다섯 자나 물러섰다.

네 시비도 더 달려들지 않고 남사를 걸친 소녀를 나란히 막아섰다

팽수위는 독모래를 움켜쥐었으나 청포의 노인이 그와 같이 소리치고

또 주약란이 물러나는 것을 보고는 그녀 역시 독모래를 뿌리지 못하고 물러서고 말았다.

이때 남사를 걸친 소녀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네 시비 옆을 지나 청포 노인에게 다가갔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주약란의 옆을 지나야만 했는데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득히 수심 을 띄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고는 쓸쓸히 웃음까지 보였다.

주약란은 그녀가 자기 앞을 지나갈 때 일장에 격살(擊殺) 하려고 하였었다.

그러나 쓸쓸히 웃는 그녀의 얼굴 전체가 어딘지 모르게 무척 많이 보아온 듯 한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 바람에 주약란은 주저하고 미처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소녀는 청포의 노인 옆으로 다가가서 마주 앉으며 들고 있던 비파도 가만히 내려놓고는

나직하게 말하였다.

 

「할아버지, 저의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 저에게 유언을 하더군요.

이곳 백운협으로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현음모심(弦音耗心)의 비파 재간으로 할아버지를

죽이라고 하셨어요.

그러나 저는 지금 할아버지를 조금도 해치고 싶지 않아요.

더욱이 만년 묵은 거북의 내단(內丹)까지 저에게 먹여 주신 은인이니 말예요.

저의 어머님도 말씀하신 일이 있어요.

 만일 만년 묵은 거북의 내단만 있으면 그는 죽지 않는다고 말옌요.

그럼에도 그 내단을 할아버지가 저에게 먹여 주시였어요.

또 어머니의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그 만년 묵은 거북의 내단은 여간 진기한 물건이 아니란 것도 짐작할 수 있어요.」

청포의 노인이 전신을 한동안 부르르 떨더니 장탄식하며 대꾸하였다

 

「너의 어머니 말이 맞아. 그녀가 일생 동안 받은 괴로움은 모두 내 잘못으로 그렇게 된 거야.

말하자면 내 죄지.

나를 찢어 죽인다 해도 나는 그가 겪은 괴로움의 만분지일도 당할 수 없는 거야.

애석하게도 그녀는 너무 일찍 죽었어!

친히 자기 손으로 정의(情誼)를 저버린 이 사람을 죽여야 했을 것인데‥‥‥

그래야 내 마음도 편할 것을 말이야‥‥‥‥」

 

  그 소녀는 눈이 둥그레지고 두 눈에서는 이상한 광채가 빛났다.

 

「그럼? 저의 어머님을 잘 아세요?」

 

노인은 애절한 얼굴빛을 숨기지 못하고 허공에 떠서 밝게 온 누리를 비쳐주고 있는

달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우리는 단지 몇 번 상면했을 뿐이야‥‥‥‥」

 

주약란은 남사의 소녀가 청포의 노인 앞에 앉을 때 역시 노인의 옆에 와 앉았었다.

이때 주약란이 입을 열었다.

 

「사부님은 이 아가씨의 어머님을 꼭 알고 계신 것만 같으신데 왜 속 시원히

말씀하시지 않으려고 하세요.‥‥‥‥」

 

그러고 나서 갑자기 중대한 일이라도 생각난 듯 입을 벌리고 놀라 소리 질렀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놀란 외침에 청포 노인과 남사의 소녀도 깜짝 놀라

주약란을 일제히 바라보았다.

주약란의 얼굴은 어떤 충격에 백지장 같이 창백해지고 두 눈에서는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청포 노인과 그 소녀도 주약란을 계속 주시하였다.

주약란은 입술을 꼭 깨물며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며 억지로 웃어보였다.

다름 아니었다.

그녀는 만년 묵은 거북의 내단을 이미 남사의 소녀가 먹어 버렸다는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양몽환의 상처는 영영 구하지 못하고 말 것이 아닌가?

갑작스럽게 그 생각을 하고 소리 질렀던 것이었다.

청포 노인이 느닷없이 일어서면서 기침을 몹시 심하게 하였다.

그런 후 잔디밭에서 두 손을 들고 두어 바퀴 재빨리 돌고는 다시 그 자리에 가서 앉았다.

주약란은 그렇게 재빨리 도는 것이 바로 평소 자기의 사부인 청포 노인이 내공을 수련할 때의

버릇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부의 내상은 대단한 것이구나 하고 다시 걱정이 치솟아 올랐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녀 사부의 내공은 이미 상승 경지에 도달함과 동시 비상한

무공을 겪은 몸이라 쉽사리 누구에게 상처를 입을 몸이 아닌 것 같기도 하였다.

한동안 말문이 막혔던 남사의 소녀가 한숨을 터뜨리며 다시 말했다

 

「할아버지를 어머님이 죽이라고 하실 때에 저는 굉장히 나쁜 사람일거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러나 막상 대하고 보니 더 없이 인자하신 분이었어요. 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어머님은 무슨 원한으로 꼭 할아버지 같은 좋은 분을 죽이라고 하셨을까요?」

 

「이 세상에서 감히 나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너의 어머니와 너뿐이야.

이제 너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보니 나를 죽일 수 있는 자는 오직 너 하나 뿐이야.

그런데 만약 네가 너의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지 않고 나를 죽이지 못하겠다면

나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할 몸이란 말이야.

그러니 너는 너의 어머님의 유언대로 어서 나를 죽여주어야 해.」

주약란이 재빨리 손을 뻗쳐서 소녀가 땅에 놓아둔 비파를 집어 들었다.

남사의 소녀가 주약란을 쳐다보았다.

 

「그래요! 그 비파를 부숴버리는 게 좋겠군요!

두 번 다시 내가 타지 못하도록 말예요.」

 

청포 노인이 질겁해서 말리며 탄식했다.

 

「아니? 마음이 변했냐?

응? 부모님의 말을 안 듣는 사람은 크게 불효된 자식임을 알아야지.」

 

  그 말에 남사의 소녀는 소리 내어 울며 말했다.

 

「아무리 불효라 해도 이렇게 저를 친딸과 같이 아껴주신 할아버지를

내가 어떻게 죽일 수 있단 말예요.

또 설사 죽이고 나면 나는 평생토록 죄악감을 느껴서 한평생 슬퍼 지낼 것이 아니겠어요.」

 

「너의 어머님은 근 이십년 동안 참지 못할 고통을 견디며 너를 이렇듯 키웠지 않느냐?

네가 만일 너의 어머니의 원수를 갚지 않는다면 구천에 계신 너의 어머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시겠니?」

 

  남사의 소녀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손을 내밀어 주약란의 손에 있는 비파를 빼앗으려고 하였다.

  주약란이 진기를 돋우어 비파를 안은 채 그대로 번개같이 다섯 자나 물러서고 호령하였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정말 이 비파를 부숴버리고 말데요.」

 

  이렇게 되자 네 맨발의 시비가 일제히 주약란에게 덮쳐왔다.

 

  팽수위와 하림도 쌍방이 뛰어 나가며 그들을 막아섰다.

 

  그것을 보자 청포의 노인이 또다시 호령하였다.

 

「싸우지들 말아!」

 

하고는 빨리 오른손으로 허공을 후려치고 있었다.

삽시간에 강렬한 장풍이 일어나 하림과 팽수위,

그리고 네 시비의 가운데를 가르고 지나갔다.

그들은 모두 일시에 그 잠력(潛力)에 밀리어 물러섰다.

그러자 주약란은 손에 들고 있던 비파를 수장(數丈) 밖에 있는 바위를 향해 힘껏 내던졌다.

순간, 청포 노인은 재차 왼손을 휘두르면서 그보다 몸을 급히 날렸다.

동시에 손을 내밀어 비파를 손쉽게 움켜잡고는 본래의 자리에 돌아가

남사의 소녀에게 건네어 주는 것이었다.

주약란이 그렇게 힘껏 내던진 비파였다.

그것을 청포 노인이 찰나적인 순간에 몸을 날려 가로챈 것이었다.

이것을 보자 비단 팽수위 등뿐만 아니라 주약란도 놀라 눈이 둥그레졌다.

그러면서도 주약란은 그 비파가 남사의 소녀에게로 건너가 비파를 타게 되면

그녀와 하림 등이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그녀의 사부가 꼭 그녀의 손에 죽으려고 하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남사의 소녀가 비파를 타기 전에 다시 빼앗아 버리면 별문제라고 생각했다.

기회는 찰나적인 순간뿐이었다.

주약란은 새삼스럽게 그녀에게 설명하고 어쩌고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 당장 몸을 앞으로 날려서 나아가 오른손으로 번개 같이 비파의 한 모퉁이를 잡았다.

이때 남사의 소녀는 비파를 받으려고 왼손으로 한 쪽을 잡았을 때이고 청포의 노인은

아직 손을 떼지 않은 때였다.

결국 세 사람은 각기 비파의 한쪽씩 서로 잡게 된 형국이 되었다. 

청포 노인은 눈을 부릅뜨고 화를 냈다.

 

「란아, 못 놓겠니?」

 

  주약란은 만년 묵은 거북의 내단을 벌써 남사의 소녀가 먹어버렸다는 사실을 듣고부터

마음이 허전해져 슬픔에 잠겼던 중이었다.

이제 자기가 믿는 사부마저 자기를 힐책까지 하니 더 없이 서운했다.

입술을 꼭 깨물며 반항을 했다.

 

「죽어도 못 놓겠어요.‥‥‥‥」

 

  청포 노인은 정말 노기를 띠고 소리쳤다.

 

「정말 내가 너를 때리지 못할 줄 아느냐?」

 

그만 화를 터뜨리며 대뜸 왼손을 쳐들어 후려쳤다.

주약란은 평소에는 무척 사부의 총애를 받던 몸이었다.

여태껏 그녀의 청을 한번도 거절하여 본 예가 없던 사부가 지금은 손을 들어 후려쳐봤다.

주약란은 피할 생각도 안하고 눈을 꼭 감으며 한대 맞을 각오를 했다.

청포 노인은 성이 나서 후려치는 순간,

갑자기 주약란이 금지옥체(金枝玉體)의 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는 결국 그녀의 일개시위(侍衛)의 신분에 지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백운협에 숨어 살면서 궁중의 예를 찾지 않고 주약란이 말을 배울 때부터

자기 옆에서 자라며 무공을 배우기 시작하니 어느덧 자기를 사부라고 부르지만

결코 자기의 신분으로는 그녀의 몸에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을 즉시 깨달았다.

그것을 깨닫고 곧 손을 멈추려고 하였다.

그러나 때는 늦어서 찰싹하고 주약란의 뺨을 갈기고 말았다.

몸을 비틀거리는 주약란의 오른뺨은 대뜸 손자국이 나며 붉게 부풀어 올랐다. 

이미 주약란이 각오하고 있었기가 다행이었다.

또 청포노인이 중도에서 손을 멈추려고 하였기 때문에 힘이 약화되어 그 정도로 끝났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당장에 주약란은 기절이라도 했을 것이었다.

청포 노인은 주약란을 때리고 나자 죄송스럽고 민망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안타까운 나머지 왼손으로 땅을 내려치니 손이 반자나 파묻혀 들어갔다.

눈물을 흘리는 주약란은 아픔을 참는 듯 입술을 꼭 깨물었다.

 

「사부님의 뜻이 그러시더라도 이 난(蘭)이에게만은 이유라도 말씀해주셔야죠.」

 

하면서 와락 당기어 비파를 빼앗았다.

 

남사를 걸친 소녀는 갑자기 그 비파가 그녀의 어머님이 남긴 유물로서 부서지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황급히 쫓아가 매달리며 애원했다.

 

「언니, 제발 나의 비파는 부수지 말아줘요.

그것은 어머님의 유물이에요.

어머님이 생각날 때마다 어머님 무덤가에서 튕겨 보는 거예요.」

 

청포 노인은 일시 주약란을 때린 회한(悔恨)으로 모든 것을 잠시 잊고 있음으로서

비파를 주약란이 빼앗아 가는 것도 몰랐다.

그러나 남사의 소녀가 주약란에게 애원하는 소리를 듣고는 재빨리 손을 내밀어

다시 비파의 한 쪽을 잡으면서 달래었다.

 

「란아! 좋게 이야기하자. 절대 이 비파를 부셔서는 안돼.」

 

  주약란이 약간 마음이 움직인 듯 하였다.

 

「좋아요. 하지만 사부님께서 은밀한 사연을 이야기 해주셔야겠어요!」

 

  주약란의 제의에 청포 노인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었다.

그리고 곧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좀 생각해 보고 결정하지.」

 

남사를 걸친 소녀는 주약란이 연신 사연을 알고 싶어 하는 말에 얼핏 생각되는 점이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철이 들고부터 어머님이 백화곡 밖에 나가시는 것을 한 번도 못 보지 않았는가?

그러면 언제 이 할아버지와 원한을 맺게 되었을까? )

 

그녀는 의심이 일어나자 갑자기 지나간 일들이 일일이 떠올랐다.

얼굴을 돌리고 주약란을 바라보고는 재빨리 품속에서 하얀 비단을 한 조각 꺼내어 땅 위에 펼쳤다.

그 비단 위에는 약 서너 살 되어 보이는 계집아이가 그려져 있었다.

계집아이의 뒤에는 이십 여세 되어 보이는 궁녀복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담뿍 웃음을 머금고

서 있는 그림이었다.

또 그 그림의 배경은 어딘지 알 수는 없으나 큰 궁궐의 내원인 듯 우뚝 솟은 누각이 그려져 있었다.

주약란도 어깨 너머로 그 그림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어쩐지 그 서너 살 된 비단 옷을 입은 계집아이가 지금의 자기와 꼭 닮았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청포의 기다란 수염의 노인은 그 그림을 보고는 왈칵 눈물을 쏟으면서 전신을 떨었다.

남사의 소녀가 한동안 멍하니 주약란을 바라보다가 느닷없이 소리쳤다.

 

「란대 공주님, 그렇죠? 란대 공주님이시죠?」

 

그 소녀는 느닷없이 주약란을 공주님이라고 불렀다.

주약란은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그 소녀의 부르짖음을 들으면서 생각해 보았다.

분명히 자기의 규명(閨名)과 아명(兒名)이 합치된 점이 있었다.

단지 다르다면 공주님이라는 세 글자가 더 붙었을 뿐이었다.

스스로도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청포 노인이 홀연 하늘을 바라보고 탄식하였다.

그런 후 벌떡 일어서면서 주약란 앞에 깊이 머리를 숙였다.

 

주약란은 영문도 모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막았다.

 

「이 늙은 놈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십여 년 동안 줄곧‥‥‥」

 

「사부님! 사부님! 왜 이러세요?」

 

주약란은 황망히 맞절을 하고 말았다.

 

청포 노인은 오른손으로 가슴을 안고 왼손을 황망히 내저으며 황송하게 말하였다.

 

「아니, 아니, 이러시면‥‥‥」

 

그러자 붉은 선혈을 한 덩어리 토하면서 말을 맺지 못하였다.

그 노인은 곧장 몸을 바로 잡은 후 아까 모양으로 잔디밭 위를 원을 그리며

세 바퀴 돌고 나서야 제자리에 돌아왔다.

 

노인의 이마에서는 구슬 같은 땀이 솟아 흘렀다.

휘황한 달빛은 그 땀을 알알이 보석처럼 비추어 주었다.

그 노인은 여전히 두 손으로 앞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입술은 고통을 참느라고 악물고 있었다.

약 일각이나 흘렀을까?

사부의 이마에 솟아서 반짝이던 구슬땀은 점차로 사라지고 얼굴도 평온하니

아픔도 가신 모양이었다.

그는 지친 몸을 가볍게 추스르고 나서 아까 모양으로 자리에 앉았다.

 

「내상이 여간 깊지 않아서 이대로는 아마 오래 살지 못하겠는걸. ‥‥‥」

 

청포 노인은 쓸쓸한 웃음으로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남사를 걸친 소녀는 울먹이면서 청포 노인 앞으로 다가가 낮은 어조로 물었다

 

「할아버지, 그토록 많이 다치셨어요?」

 

  그 소녀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청포 노인은 얼굴에 가득히 자애로운 미소를 풍기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상처가 중하긴 하지만 갑작스럽게 죽지는 않을 거야.

 

「그건 그렇다하고 내가 근 이십여 년 동안 주야로 생각하여 보았지만

여태껏 깨닫지 못한 점이 있어서.」

 

그러면서 양몽환에게 시선을 던지더니

곧 깊은 한숨을 몰아쉬고 다시 소녀를 쳐다봤다.

 

「그러다가 이제야 깨닫게 되었어.

참 너의 어머님이 죽기 전에 남긴 말씀은 없느냐?」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 저에게 꼭 한 가지 말씀하신 것이 있어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독사나 맹수가 아니고 자기의 마음속으로

좋아하게 되는 남자라고 하였어요.

나 보고도 만일 좋아하는 남자가 있을 때는 서슴지 말고 죽이라고 하셨어요.」

 

「너의 어머님 말씀이 옳아.

만일 그가 날 좋아하지 않았다면 이런 황량한 산 속에서

이십년 동안을 고생할 필요도 없었을 거야.

그는 금침옥식(錦枕玉食)을 마다하고 멸문지화(滅門之禍)도 불구하고

이 괄창산까지 나를 따라서 도망쳐 왔던 거야.

그리고는 동굴 속에 숨어서 일년 내내 사람 한번 볼 수 없는

생활을 갖게 된 것도 따지면 모두 나를 좋아한 탓이었어.

그는 나 때문에 황제의 총애도 마다하고

그 대신 채찍에 살갗이 헤지는 고통을 당하였더란 말이지.

그 정은 얼마나 깊은 것이었을까? 하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메어지지.

그런데도 나는 그녀를 조금도 행복하게 하여 주지 못 했었어.

단 하루도 말이야‥‥‥‥ 왜 그랬을까?

하고 이런 일들을 두고두고 십여 년간 줄곧 가슴에 깊이 간직한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하여 보았지만 지금껏 명백히 깨달을 수 없었던 거야.

그런데 이제 저 젊은이를 바라보니 십여 년간이나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었어.

비록 나는 그를 때리거나 욕 한번 안했지만 그녀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었던 거야.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참기 힘든 고통 이었어‥‥‥‥」

 

주약란은 말을 듣는 중에 차츰 지나간 일들이 한 토막 한 토막씩 아련히 떠올랐다.

그러나 너무 어렸을 때 일들이라 다만 어렴풋하여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즉시 청포 노인에게 물었다.

 

「사부님, 누구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애초의 생각 같아서는 이 일은 너희들에게 이야기 하지 않으려고 작정하였던 거야.

그러나 내가 죽고 나면 모든 사연은 완전히 파묻히고 말 것이란 생각이 띠 올랐기에

다시 마음을 고쳐먹은 거야. 만약 내가 모든 것을 숨긴 채 죽어 버린다면 우선 너희들이

출신 내력을 모를 것이 아니냐?

그러면 내가 어찌 죽어도 눈을 감을 수가 있겠니.」

 

  남사의 소녀가 다시 궁금한 듯 물었다.

 

「저의 어머니의 지나간 일들을 아시고 계시면

어머님 하고도 많은 세월동안 접촉이 있었겠네요!」

 

「너의 어머님은 너의 아버지에 대하여 이야기 하시지 않던?」

 

「아니요. 저에게 한 번도 이야기 한 일이 없어요.

단지 어느 날 제가 우리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단 한 번 물어본 일이 있어요.」

 

「말해 주더냐?」

 

「아니요. 어머님은 나의 말을 듣자마자 역정을 벌컥 내시면서 얼굴색이 변하셨어요.

평소에 저를 나무라지 않던 어머니가 막 꾸지람을 하셨어요.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니 두 번 다시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옳아! 옳아! 너의 아버진 확실히 좋은 사람은 아냐.」

 

  총명한 주약란은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자기의 사부와 남사의 소녀 간에는

미묘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또 한편, 소녀가 땅에 펼쳐 놓은 그림을 자세히 걸고 나서도 얼마간의 옛 일을 되새길 수 있었다.

그녀는 사부의 얼굴에 눈을 던진 채 어릴 때 기억을 더듬어 보기 시작했다.

  이때 청포 노인은 다시 몸을 가다듬고 합장하면서 하늘을 쳐다보고

뭔가 혼자 중얼거리며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는 주약란에게 얼굴을 돌리고 말하였다.

「우선 공주께서 이 늙은 놈의 대역무도한 죄를 용서하여야 편히

곧 바로 진언(進言)할 수 있겠습니다!」

 

  주약란이 황급히 또 말렸다.

 

「사부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얼마든지 하세요.

 새삼스럽게 공주님이라고 하시니 무슨 뜻이죠?」

 

「세상 사람들은 모두 선왕 무종(武宗) 황제에게는 골육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선왕의 지친 골육(至親骨肉)을 나와 취접(翠蝶)이 이런 심산유곡에 데리고 온

것입니다.」

 

  주약란은 쓰러져 있는 양몽환에게서 눈길을 돌려 청포 노인에게로 향했다.

 

「대궐에 있는 것도 좋지는 않지만 지나간 일을 이제 와서 시비를 가릴 것도 없어요.」

 

  청포 노인은 주약란의 말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너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를 너의 내력에 대해서 아직까지

한 번도 나에게 묻지 않은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이 잘한 일인지

아니면 못한 일인지 나도 분간할 수 없구나!」

 

「사부님이 하신 일이 옳아요.」

 

  청포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며  회상에 잠긴 듯 했다.

그리고는 주약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옳은 일일까‥‥‥ 음!」

 

하고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음‥‥‥ 나는 어려서부터 무예에 미쳐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명사(名師)를 만나 무술을 닦았어.

그 후 어느 정도 무술을 배운 다음 사형(師兄)의 소개로

황제(皇帝) 시위대의 하나인 동랑(東廊)에 들어가게 되고

삼년 후에는 당시 효종(孝宗)황제의 근신시위(近身侍街)로

발탁 되었어‥‥‥‥.」

 

  추연한 빛까지 서린 노인은 옆에 있는 남사의 소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바로 그 해에 소접(小蝶)의 어머니를 알게 되었는데 그때가 열다섯의 소녀로서

막 궁녀로 뽑혀 왔었지‥‥‥‥」

 

「그럼 저의 어머니를 아셨군요?」

 

  소녀는 눈을 반짝이며 노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청포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알다 뿐인가, 바로 내가 너의 생부(生父)인걸. 너의 어머니는 나를 미워했어.

그러나 지금에 와서 누구를 탓할 마음도 없고‥‥‥

음! 너에게도 내가 아비라는 것을 알려 주지도 않았지만 이야기를 하자면

기구한 팔자소관이야‥‥‥‥」

 

노인의 이야기로 삽시간에 주위는 조용해지고 노인의 눈 그리고 소녀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소녀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아! 아!」

 

  가늘게 흐느끼기만 했다.

 

노인은 길게 한숨을 쉬고 흐느껴 우는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청포의 노인 조해평(趙海萍)은 명(明)나라 효종의 근신 시위로 무공이 강하여

효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 뿐만 아니라 효종이 신임하는 조해평은 궁전 어디나 마음대로

무상출입할 수 있게끔 그의 위치도 높았다.

효종은 그의 충성과 노고를 가상히 여겨 후궁 중에서

취접(翠蝶)이라는 궁녀를 아내로 맞게 해주었다.

하나 무예 한 가지만 알고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음을 신조로 삼고 있었던

조해평에게는 비록 절세의 미녀라도 마음에 없었다.

말로는 한 지붕 밑에 사는 부부이지만 애정이랄 것도 없는 생활을

근 이년간이나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궁궐에 침입한 대도(大盜)를 잡은 조해평이 대도의 품속에서

나온 장진도(藏眞圖)를 발견하고 무릎을 쳤다.

 

  (아! 이것이 내가 어려서부터 듣기만 하던 귀원비급(歸元秘?)의 장진도가 아닌가!)

 

  조해평은 금은보화보다 더 귀중한 장진도를 얻은 순간,

 

  (내가 귀원비급을 찾으리라‥‥‥)

 

  결심하고 그날 밤으로 궁궐을 나와 장진도의 그림을 따라 길을 떠났다.

아무 기별도 없이 하룻밤 사이에 황제의 신임과 총애까지 받고 있던

조해평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자 궁궐은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황제도 낙심천만 하여 방방곡곡에 방을 붙이고 포졸을 명하여

조해평을 찾아오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러나 나라 안에 고수라는 고수들과 포졸들이 그의 행방을

사방팔방으로 찾아 헤매었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시일만 흘러갔다.

그리하여 그의 실종 사건도 어느덧 잊어버릴 만큼 세월이 흘렀다.

 

한편!

 

장진도를 얻고 귀원비급을 찾기 위하여 황제의 총애도 버리고

하룻밤 사이에 궁궐을 떠나온 조해평은 자기 자신은 비록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있으나 황제의 측근 시위대의 한 사람으로서

지내왔을 뿐 강호 무술계와는 인연이 멀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해평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그 덕택에 사방에 나붙은 방이나 수많은 고수들의 눈에 띄지 않고

반년 동안을 헤매던 끝에 장진도가 가리키는 곳을 무사히 찾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장진도에 적혀있는 글이 너무나 간단하고 난해한 글이었기 때문에 그 뜻을

해독치 못하고 괄창산의 삼봉(三峰)폭포 부근에서 배회하며 며칠을 헤매게 되었다.

조해평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글의 뜻을 풀길 없어 허송하면서도

낙심하지 않고 삼봉 폭포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귀원비급이 감추어져 있는 곳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진도에 표시되어 있는 그림과 비슷한 백운협이라는 곳을 발견하게 되었다.

주위의 풍경이 절묘하고 은은한 빛이 감도는 이 백운협은 본래 천기진인(天機眞人)이 은거하던

곳으로서 천연적인 환경과 인공적인 솜씨로 다듬어 우아하기가 이를 데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백운협 입구는 바로 수천 길이 넘는 절벽으로 종운암(聳雲巖)이란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었다.

이곳이 바로 삼백년 전 삼음신니(三音神尼)와 천기진인이 삼 일간을 싸웠던 곳이었다.

천기진인과 삼음신니는 사흘째 되는 날 서로 절묘한 내공으로 싸움을 계속하다가 피차간

중상을 입고 대오(大悟)한 나머지 화해하고 자기들의 무공을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귀원비급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감추어 두고 그 귀원비급이 감추어진 곳을 표시하여

 장진도라 부르게 되었던 바로 그곳이었다.

 

백운협을 발견한 조해평은 은밀하게 뚫려진 굴속까지 찾아 들어가 천기진인이

살았을 때 쓰던 생활도구와 약간의 유물들을 발견하고 무술계에서 떠도는

전설 같은 장진도의 내력을 확증할 수 있게 되었다

조해평은 더 이상 장진도를 의심할 수 없었다.

더욱 분발하여 희망에 부푼 가슴을 달래가며 귀원비급이 숨겨진 장소를 찾아 헤매었다. 

그날도 조해평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삼봉폭포 주변을 두루 돌아다니며

귀원비급을 찾아다니다 뜻밖에 무예계의 인물과 만나게 되었다.

오랫동안 사람과 접촉이 없던 조해평은 그들과 곧 친해지게 되었고

그들 역시 귀원비급을 찾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장진도에 그려진 그림을 본 일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다만 이곳 백운협 골짜기가 그 천연적인 우아하고 신비스러운 것만 보고

괄창산과 비슷하다는 것 하나만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들이 괄창산에 들어오기는 조해정과 거의 같은 육 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곳저곳 정처 없이 두루 다니다가 이제 겨우 삼봉폭포까지 찾아든 것이었다.

 

(세상에 나처럼 미친놈도 있구나.‥‥)

 

  라고 생각하며 혼자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러던 조해평은 다시 혼자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이 사람들과 합세해서 귀원비급을 찾을까?‥‥‥

비록 나는 그들과는 달리 장진도가 있지만 그 속에 쓰여 있는 글의 뜻을 모르니

나에게 장진도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궁궐에서 오랫동안 지낸 조해평이 강호 무술계의 흉악하고 음흉한 실정을 모르고

이러한 생각을 갖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더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혼자 단정을 내린 조해평은 그들을 손짓해서 불렀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품속에 깊이 감추고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거나 보여 주지도 않았던

장진도를 꺼내 보였다.

  그런데 지금 조해평의 앞에 나타난 두 명의 사나이는 녹림계의 대도(大盜)로서

그 이름이 흉악하기로 이름난 주기(周奇)와 강전(康全) 바로 그들이었다.

강남땅에서는 그들이 금능이호(金陵二虎)로 널리 알려져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근 십여 년 동안 그들이 일으킨 사건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결국 관청에서는 포졸과 고수들에게 명하여 그들을 잡아들이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렇게까지 사건이 확대되어 자신들의 생존에 위험을 느낀

이들 금능이호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 산 속에 잠입하는데 까지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도망치는 몸이지만 무공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어

풍문으로 듣기만 하던 귀원비급을 찾아 무술을 더 연마하려는 마음으로

이곳 괄창산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장진도조차 구경하지 못한 그들에게는 귀원비급이 어디에 있는지 알리가 만무했다.

거의 반년 동안이나 헤매다가 귀원비급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숨을 곳을 찾아

내려가다가 조해평을 만나게 되었고 호박 같은 금덩이가 제 발로 굴러 떨어지게끔 되고 말았다.

 

이러한 내력을 알리 없는 조해평은 산 속에서 좋은 무술인들을 만나 그들의 도움으로

귀원비급을 찾으려는 벅찬 포부와 희망에 들떠 몇 겹으로 싸고 싼 장진도를 풀어 놓은 것이다.

 

순간!

 

주기와 강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 장진도!」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아! 이것이 웬 떡이냐, 아니 어찌된 금은보화냐! )

 

  감탄해 마지않는 그들의 표정을 보자 조해평은 어깨가 으쓱해지고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놀랐겠지? 내가 장진도를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지?‥‥‥)

 

하는 우월감에 마냥 즐겁기만 했다.

 

그러나 장진도를 펴는 순간,

주기와 강전은 이미 눈짓으로 자기들끼리만 알고 통하는 의사표시로 어떠한 일이 결정되고 있었다.

그들 주기와 강진은 십수 년을 둘이서 붙어 다니는 동안 보통의 의사 표시는 눈짓으로 통했다.

그런 것을 알길 없는 조해평은 장진도를 펴 놓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떠슈? 같이 찾아봅시다.」

 

  주기와 강전은 입이 딱 벌어질 만큼 기뻐하며

 

「그럼은요!」

 

장진도를 가운데로 세 명의 머리가 모였다.

얼마 동안 머리를 숙이고 이마를 맞댄 채 글과 그림을 풀이한 결과 귀원비급이

숨겨져 있는 곳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들은 장진도를 걷어 조해평에게 돌려 준 다음 나는 듯이 일약 목적지로 달려갔다.

그곳은 얼마나 깊은지 밑이 캄캄하여 알 길도 없는 깊고 깊은 굴이었다.

그 굴속에서는 음산한 바람이 암암리에 불어오고 있을 뿐 캄캄 절벽이었다.

그들 세 명은 곧 내려갈 준비로 급히 등나무 줄기를 길게 이었다.

등나무 줄기가 길게 이어져 거의 이백장(丈) 정도가 되자

조해평에게 먼저 내려갈 것을 권했다.

 

「좋소!」

 

  주기의 마음속이 어떻다는 것도 모르고 다만 귀원비급만 먼저 얻으려는 욕심에서

조해평은 쾌히 응낙하고 등나무 줄기로 몸을 칭칭 감은 다음 그 한 끝을 주기와 강전에

붙잡게 하고는 굴속으로 내려갔다.

 

끈의 한 끝을 주기와 강전에게 맡긴 조해평은 그들이 조심조심 풀어 주는 대로 거의

이백여장(丈)의 등줄기가 다 풀리도록 내려갔다.

그러나 얼마나 내려왔는지 깊이를 알길 없는 조해평은 발끝에 무엇인가

닿는 듯한 감촉을 느끼며

 

  (다 내려왔구나.)

 

할 때.

 

위에서 등나무 줄기를 풀어주던 주기가 강전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이 바보 같은 녀석은 속이기도 쉽군.

밑바닥에는 틀림없이 독물(毒物)이 있을 거야.

저놈이 먼저 깨끗하게 청소한 다음에 우리는 천천히 내려가자.」

 

  그러나 강전은 주기의 말이 당치도 않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는 소리! 내려가긴 어딜 내려간다는 말이오?

 공연히 고생할 것이 무엇이오.」

 

「그럼?」

 

「여기 가만히 있으면 저 놈이 귀원비급을 찾아 가지고 올라올 거요.

그러면 귀원비급만 뺏고 다시 이 굴 속으로 밀어 넣으면 깨끗하지 않겠소?」

 

주기와 강전은 마주 바라보고 싱긋이 웃었다.

귀원비급은 틀림없이 주기나 강전의 소유로 되게끔 모든 계획이 착착 진행되었고

더구나 그렇게 반년 동안 고생하며 찾아 헤매던 귀원비급이 이렇게 쉽게 누워서 떡 먹듯

손에 넣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주기와 강전은 생각할수록 좋고 기뻐 정말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들 뜻대로만 되겠는가?

등나무 줄기를 타고 조해평이 굴속으로 내려간 지도 만 이틀.

죽었는지 살았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결국 만 사흘이 지났다.

등나무 줄기의 한 끝을 붙잡은 채 꼼짝 못하고 서서 이제나 저제나 하고 귀와 눈을

굴속으로 집중시키고 있던 주기는 더 참지 못하고 강전을 불렀다.

 

「이거 미칠 노릇이군, 안 되겠다. 우리가 내려가자.

이놈이 아무래도 딴 마음을 먹고 올라오지 않는 모양이야

내려가서 한칼에 처치하고 말아야지.」

 

  그러나 강전은 또 고개를 흔들며 망설였다.

 

「틀림없이 독물이 있을 거요.

귀원비급을 얻기보다 독물에 물려죽는다면 정말 허사요.」

 

그도 그럴 듯 했다.

사실 이백장이 넘는 깊고 깊은 굴속에 과연 독물이 없다고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귀원비급보다 무서움이 앞서 주기도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다른 묘안이라는 것도 없었다.

주기와 강전은 이마를 맞대고 심각히 생각하고 연구했으나 귀원비급을 얻는 길은 굴속으로

 내려가는 길밖에 없었다.

독물에 물려 죽는 두려움보다는 귀원비급에 더 욕심이 불쑥 생겨나

그들은 더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강전에게 등줄기의 한끝을 맡기고 주기가

굴속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주기가 내려가자 강전은 눈알이 튀어 나오도록 캄캄한 굴속만 들여다보며

주기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밤이 오고 다시 날이 밝은 아침까지도 조해평은

물론 주기마저 소식이 캄캄 이었다.

강전은 할 수 없이 잡고 있던 등나무 줄기를 큰 소나무에 붙잡아맨 후 자기도 굴속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만일 자기가 내려가는 동안 등줄기가 풀어지지 않도록 몇 번 더 단단히 맨 다음

굴속으로 들어  가려던 강전은 갑자기 멈칫했다.

 

  (만일 내가 굴 밑까지 내려간 다음,

지나가던 산 짐승이나 어떤 사람이 나타나 등줄기를 끊어 버린다면?

나는 영원히 굴속 귀신이 되겠구나! )

이렇게 생각한 주기는 내려가기를 단념하고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 그의 머리 속은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음‥‥‥‥ 혹시 조해평과 주기가 귀원비급을 찾아가지고

다른 출구(出口)를 통해 저희들끼리만 도망쳐 버렸다면‥‥‥‥

나는 백날을 여기서 기다려도 소용없구나.‥‥‥)

 

생각하면 할수록 조해평과 주기가 작당하여 달아난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주기마저 하루가 지나도록 아무 신호도 없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조해평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잘 아는

주기의 무공으로는 웬만한 독물쯤 걱정할 것도 못되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강전은 그럴수록 주기가 의심스럽고

귀원비급의 욕망이 자기를 못 견디게 보채는 것이었다.

 

 (나 혼자만 속는 것이 아닌가. 벌써 몇 백리 길이나 도망 간지도 모르는

그들을 굴속에서 나오기만 기다리는 내 꼴이 뭐람‥‥‥)

 

  강전은 더 돌아볼 여지도 없이 등나무 줄기를 타고 조심조심 굴속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굴속으로 조금씩 내려가던 강전은 또 다시 번민 속에 빠졌다.

 

  (도로 올라갈까? 아니 내려가자‥‥‥‥

누가 줄을 끊는다면‥‥‥

영영 죽는구나.‥‥‥‥

그래도 귀원비급을 저희들끼리만‥‥ 안 되지‥‥)

 

  결국 내려가기로 결심하고 더 이상 아무 생각도 안 하려는 듯 도리질을 했다.

  어느 정도 내려오자 땅 속에 떨어지던 물이 머리며 목덜미로 수없이 떨어지고

내려가면 내려 갈수록 찬 바람이 불어와 턱이 덜덜 떨릴 만큼 추웠다.

강전은 운기를 조절하여 추위를 막으며 내려갔다

얼마를 더 내려가자 굴의 폭은 조금씩 좁아져 겨우 몸이 빠져나갈 정도의

좁은 구멍에 이르러 몸을 비틀어 겨우 빠져 나왔다.

그 좁은 구멍을 빠져나온 강전은 갑자기 폭이 넓어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

발끝이 바닥에 닿는 것을 알았다.

밑바닥에 내려선 강전은 잠시 주위를 살핀 다음 동남쪽으로 석문(石門)이

반쯤 열린 곳으로 들어갔다.

석문을 지나면서부터 길은 또 좁아져 몸 하나 빠져 나가기도 힘들었고

어둡기가 이를 데 없는 캄캄 절벽이었다.

강전은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얼마를 더 들어갔다.

그러자 길은 다시 넓어지고 양 쪽에 매끈한 벽은 파란 광채를 내고 있었다. 

얼마를 더 더듬어 이윽고 모퉁이를 돌아서자 굴은 끝나고 앞이 환하게 비쳤다.

그곳에는 약 사오백 평(坪)의 푸른 잔디밭이 나타나고 무수한 나무와 꽃이 꽉 들어차

별천지를 이루고 있었다.

별천지에 도취되어 두리번거리던 강전은 꽃나무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조해평과 주기를 발견하고 입을 딱 벌렸다.

 

(음‥‥‥ 여기들 와 있군. 그러면 그렇지 어디 갈라고?‥‥‥)

 

이렇게 생각하며 조해평과 주기를 바라보던 강전은 저윽이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조해평과 주기는 서로의 거리가 일장(一丈)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인데도

서로 알아보지 못하고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서로가 거의 마주치는가 하면 용하게 스치면서 까지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 어찌된 일일까?‥‥‥)

 

  원래 오행기문지술(五行奇門之術)을 모르는 강전이었지만

그 꽃밭이 하나의 기문진(奇門陣)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얼마 동안 두 사람이 눈먼 장님처럼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 둘레에서 빙빙 도는 것을 보고는 들어갈 마음이 조금도 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길 없는 강전은 멍청히 서서 어떻게 할까하고

망설이고 있는 바로 그때였다.

등 뒤에서 별안간 한줄기의 강한 바람이 밀어닥쳐 옴을 느낀

강전은 번개같이 돌아서며 칼을 뽑아 내리쳤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내려치려고 하던 강전은 들었던 칼을 그냥 내려놓고 말았다.

그곳에는 생각지도 못한 한 마리의 큰 학이 서 있는 것이었다.

학은 애초부터 강전을 해치려는 마음이 없었던지 강전이 내려치는 칼날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약간의 상처를 입은 채 서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강전의 칼을 맞은 학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예리한 발톱으로

강전의 가슴을 할퀴는 동시에 강전이 들고 있는 칼 을 날개로 쳐서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바람에 깜짝 놀라며 학의 발들을 피하여 뒤로 물러서던 강전은

바로 그 곳이 조해평과 주기가 왔다 갔다 하는 잔디밭이라는 것 을 깨닫는 순간,

몸을 급히 피하려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 어느 사이에

잔디밭 속으로 스르르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강진의 눈에는 또 다른 하나의 별천지가 전개되며

조해평과 주기의 모습도 볼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강전이 처음 조해평과 주기를 이상하게 여겼던 그대로

그들과 같이 서로 알아보지도 못하고 썰썰거리며 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 꽃밭으로 말하면 원래 천기진인과 삼음신니가 사흘 밤낮을 싸우고

나흘째에 서로 화해한 뒤 귀원비급을 기록하고자 동굴로 들어오면서

만일을 위해 가꾸어 놓은 꽃밭이었다.

더구나 이 꽃밭은 반오행(反五行)의 무술로 꽃밭진(花樹陣)을 만들어 놓았다.

이 꽃밭에 처음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깊은 안개 속에 갇힌 것처럼

방향을 잃고 눈과 귀의 기능마저 마비되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게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오묘한 꽃밭 속에 갇힌 세 사람은 결국 이곳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굶어 죽거나 아니면 기진맥진해서 죽는 것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

귀원비급이 무엇인지 조차 모를 지경으로 온 몸이 마비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목숨이 긴 사람은 며칠을 더 연명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하고 배고픔이나

피로에 이기지 못하면 그만큼 죽음에 빨리 도달할 수 있는 무서운 특전이 남았을 뿐이었다.

죽기로 말하면 어느 누가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마는 다행히 조해평은

떠나올 때부터 몸에 지니고 다닌 비상용 건량을 며칠 전에 두둑이 먹어 두었고

또 평생에 여색과는 거리가 벌어 황제의 성은으로 내린 아내마저

가까이 하지 않았던 관계로 원양(元陽)이 충분했다.

그와 반대로 방탕으로 세월을 보낸 주기와 강전은 너무도 여색을 가까이 하여

원양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주기와 강전이 배고픔과 양기의 부족으로 쓰러졌을 때에도

조해평만은 그대로 이리 저리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그도 체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금능이호가 죽은지도 칠일. 조해평도 차차 기진맥진하여

더 돌아다니지 못하고 쓰러지듯 그 자리에 앉아 버렸다.

  쓰러지듯 앉은 조해평은 아무 생각이나 정신이 있을 수 없었고

더구나 이 잔디밭에 들어오기 전에도 생활이 단순했듯이

머리 속에도 복잡한 것이라곤 하나도 있을 수 없었다.

다만 자기가 이렇게 기진맥진하여 쓰러진 것은 자기 몸속에 있는

양기가 이미 소모된 것인 줄 짐작하고 운기를 조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잔디밭은 원래 갇힌 사람의 환각(幻覺) 작용을 일으켜 속세에 있을 때

생활하던 모든 것이 모두 환각으로 일어나 정신을 마비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금능이호의 속세에서의 생활과 조해평의 생활이라는 것은 천양지차였다.

온갖 도둑질과 음탕으로 생활하던 금능이호들에게는 조해평의 단순한 생활에 비하여

너무나 많은 환각이 일어났을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이 잔디밭은 오묘한 꽃향기와 더불어 꽃에서 나오는 진과 오행의 변화

그리고 꽃나무 잎에서까지 어떤 신비한 작용을 일으키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환각 속에서 헤매게 만들어 버리는 마술 같은 위력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중에서도 제일 무서운 것은 바로 천 가지 만 가지의 아름다운 꽃 그것이었다.

그것은 이 잔디밭에 들어온 사람들이 환각 속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의 눈에는 수없는

꽃의 색깔이 모두 아름다운 여자로 변하게 되고 자기가 속세에선 대했던

모든 여자의 얼굴이 그 꽃 속에 다시 떠오르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환각 속에서까지 음욕을 버리지 못하고 발광하는 여색에만 쫓아 썰썰거리며

돌아다니다 결국 제풀에 양기가 쑥 빠지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었다.

지나간 생활 속에서 조금이라도 음탕한 유희가 다시금 떠오르고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무수한 미녀들을 따라 잠시도 쉬지 않고 허우적거린다는 것은 보통의 정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금방 지쳐 쓰러지게 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색을 탐내는 사람들의 갈 길은 이미 마련되어 있는

 셈인데도 죽기 직전까지 색욕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이 얼마나 불쌍하고 비참한가를

이 꽃은 암암리에 제시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천기진인과 삼음신니는 이 오행진을 만들면서 다른 물건은 사용치 않고 단지

각양각색의 꽃나무만 이용한 것은 그들이 가장 음란한 자를 증오했기 때문이었다.

무예계에서는 첫째 음욕지심을 품지 못하도록 계율을 정하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인사나 무술인과 기인들이 한번 색욕에 빠지면 끝내 빠져 나오지 못하고

음탕한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에 천기진인과 삼음신니는 음욕한 인간들을 증오한 나머지 환각으로 죽어버리게 하는

잔디밭에 무수한 꽃을 만들어 놓게끔 하고 말았다.

  한편, 칠일 째까지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조해평이 어찌 꽃 진에 도취되지 않았겠는

가마는 그의 나이 비록 삼십을 바라보는 청년이었지만 아직 까지 여자라고는

가까이 하지 않은 덕택으로 색욕이라는 것을 일으키지 않음으로서

우선 반오행(反五行) 진속에서 가장 무서운 일관(一關)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잔디밭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지금까지 며칠 동안을 계속하여 헤매고 돌아다니는 동안

처음에는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한가지의 단순한 생각이 점점 흐려져 모든 잡념이

환각으로 변하고 더욱 꽃밭 속을 헤맨 것뿐인 그로서는 수천만 리를 뛰고 달려온 것처럼

지칠 대로 지쳐 버리고 말았다.

 

얼마 동안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복잡한 환각 속에 빠져 있던 조해평은 어떻게 된 일인지

차차로 환각이 사라지며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에는

왜 여기까지 들어 왔는가를 생각할 수 있도록 정신이 맑아지는 것이었다.

 

  그 순간-,

 

  조해평은 불현듯 장진도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조해평은 급히 품속을 뒤져 장진도를 꺼내 들고 한 번 봐야겠다는

욕망이 불쑥 일어나는 동시에 지금까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그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수천만 가지의 아름다운 꽃이 꽉 들어찬 잔디밭뿐 아무 것도 없었다.

 

  (이 어찌된 일인가? 여기는 어디며 나는 왜 여기에 주저앉고 있을까?‥‥‥

장진도! 그렇지! 귀원비급을 찾으려고‥‥‥)

 

  여기까지 생각한 조해평은 화닥닥 놀라며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지금까지 꽉 들어찼던 수천만가지의 아름다운 꽃들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조차 없어져 버림과 동시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앗!」

 

  조해평은 한 걸음 앞으로 나가려던 발을 떼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서며 두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러는 그의 뇌리에. 한가지의 기억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그것은 처음 이곳 잔디밭에 발을 들여놓던 그 순간부터 어찌된 일인지

자기는 걸음을 옮기고 싶지 않은 데도 한 발만 옮기면

다른 한 발이 저절로 옮겨지는 것이었다.

일단 한발이라도 땅에서 발바닥을 떼기만 하면 연속적으로 앞으로 나가게 되어

그래서 걷지 않으면 안 되도록 움직여지던 발을 생각하고 발바닥을

땅에서 떼지 않은 채 서 버렸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저절로 발이 움직여져서 가는 걸음이 앞으로 나갈 때

더 나가면 막다른 골목 같은 데도 끝에까지 오면

또 다른 골목이 나타나곤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눈을 비벼도 여전히 앞은 캄캄한 절벽,

어디로 어떻게 빠져 나가야 할지 분간할 수조차 없는

어둠이 앞을 가로 막고 있을 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다 발을 떼기만 하면 저절로 앞으로 나가게 되는 발길이 이 캄캄한 곳으로

그냥 걸어 나가게 된다면 정말 큰일이라는 생각이 그를 더욱 꼼짝 못하게 했다.

눈앞이 캄캄해진 조해평은 발바닥이 땅에서 떨어지지 많도록 조심하며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무엇 하나 보일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다.

천기진인과 삼음신니가 귀원비급을 감추어 두고 장진도를

그려 후세에 전하려는 의도였다면 이토록 오묘하고 기이한 곳에

귀원비급을 숨겨 두고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을 리는 만무하다.

어떠한 길이든 빠져나갈 길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면

귀원비급을 숨겨둔 의의가 어디 있으며 장진도가 무슨 필요인가‥‥‥‥

어디고 빠져 나가는 길을 찾아보자‥‥‥‥

나가는 길도 장진도에 틀림없이 그려져 있거나 글로 쓰여 져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조해평은 절망에서 한 가닥의 희망을 안고 장진도를 보려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캄캄 절벽, 지척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 눈앞을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 전까지 희망에 벅찼던 조해평은 다시 절망 속으로 빠져 들어 갔다.

 

  (아! 나는 여기서 죽고 말겠구나!

이 꽃밭을 빠져 나갈 수는 정말 없다는 말인가‥‥)

 

  머리 속이 윙하며 가슴이 답답해진 조해평은 답답하고 안타까움을

견딜 수 없어 두 주먹으로 자기의 가슴을 쾅쾅 두들겼다.

 

  그때-,

 

  가슴을 두들기던 조해평은 자기 품속에 무엇인가

딱딱한 물건이 만져지는 것을 느끼고 무엇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딱딱한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 순간-,

 

  그 딱딱한 물건은 갑자기 환한 빛을 내어 주위가 밝아졌다.

 

「이게 웬일이냐!」

 

  고함치듯 중얼거리며 빛을 내는 물건을 들여다보았다.

바로 그것은 달걀만한 크기의 구슬이었다.

이 구슬은 본래 궁결 효종 황제의 서실(書室)에 진열된

진귀한 보물의 하나로서 야명주(夜明珠)라는 구슬이었다.

 

  어느 날 밤-.

 

효종 황제가 상주문(上奏文)을 읽고 있을 때였다.

촛불을 밝혀 놓고 한참 상주문을 읽고 있는 데 갑자기 촛불이 꺼지고 말았다.

효종 황제는 옆에 있는 당직 내시들의 부주의로 촛불이 꺼진 줄 알고

 

「어느 놈이 조심치 않고 불을 꺼뜨렸느냐?」

 

  꾸짖었다.

 

  그 순간-,

 

  옆에서 코웃음소리와 함께 번쩍! 보기에도 날카롭고 새파란 비수가 황제의 탁자에

 

「탁!」

 

하고 꽂히는 것이었다.

 

  기절할 듯 놀란 황제는 급히 의자에서 일어나며 몸을 돌려 비수가 날아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흑의(黑衣)의 괴한이 복면을 하고 장검을 든 채 황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으윽!」

 

   비명을 지르며 효종은 사시나무 떨듯했다.

 

  그러자 복면의 괴한은 효종 황제의 탁자 앞으로 천천히 다가와 빛을 내고 있는

 야명주를 집어 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뒷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뒷벽에는 당대(唐代)의 화성(晝聖)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송자 천왕도(送子天王圖)가

한 폭 걸려 있었다.

뒷벽을 바라보던 괴한은 그림을 떼려고 검을 쥔 채 황제를 노려보며

바싹 그림으로 붙어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지위와 명예가 높다 해도 탁자 위에 꽂힌 비수와 괴한의 손에

들린 장검 앞에서는 유명무실 촛불 꺼지듯 황제의 목이 언제 달아날는지

다만 공포에 떨고 있을 뿐 괴한이 하는 대로 버려둘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바로 이 때였다.

 

「꼼짝 말아라! 어느 상제님 앞이라고!」

 

벽력같은 소리를 내며 복면의 사나이를 향하여 나는 듯이 달려드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조해평이었다.

 

복면의 사나이는 재빨리 장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조해평을 향하여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조해평은 여유 있는 솜씨로 복면의 장검을 가볍게 피하며 황제를 옹위하여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는 한편, 한 쪽 구석으로 복면의 괴한을 몰아넣고

절기(絶氣)의 하나인 살수(殺手)로 대적하기 거의 이십 여수,

조해평의 날카로운 공격으로 괴한이 들고 휘두르던 장검이 두 동강이 나며 바닥에 쓰러졌다.

효종황제는 위기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자기를 구해줌과 동시에 값진 보배도 찾을 수 있게

해준데 대한 보답과 상금으로 그의 용맹을 치하한 다음 흑의의 괴한이 뺏었던

야명주(夜明珠)를 조해평에게 하사하였던 것이었다.

이때 조해평은 그 구슬이 탐난 것도 황제의 치하가 듣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다만 효종황제의 신변이 위태함을 깨닫고 위기에서 구해낸 것뿐이었다.

그런데 효종황제는 궁궐의 보물인 구슬까지 하사하시는 것이었다.

몇 번이나.사양하던 조해평은 황제의 어명을 어길 수 없어 구슬을 받아 품에 넣고

그대로 잊어버린 채 지내오던 차였다.

그것이 뜻밖에도 지금 가슴을 치다가 구슬을 찾아내고 빛까지 밝혀 준다는 것은

효종 황제의 은덕이 아닐 수 없었다.

 

조해평은 새삼 효종 황제의 은덕을 감사하며 야명주의 환한 빛으로 장진도를 비쳐 보았다.

야명주의 빛으로 완연하게 보이는 장진도는 그림 맨 위에 있는 세 글자가 이미 퇴색하여

바라볼 수 없었고 그 아래 보이는 사구절언(四句絶言)의 글자가 보이기는 하였지만

조해평으로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글이었다.

 

        만공귀비원(萬功歸秘元)

        일검신주한(一劍神州寒)

        창송사명월(蒼松篩明月)

        석산유청천(石山流淸泉)

 

  아무리 읽어 보아도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는 조해평은

그 옆에 그려져 있는 그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몇 개의 높은 산봉우리가 겹쳐져 있는 가운데로 계곡이 나 있고

그 계곡에도 무수한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 무수한 소나무 중에도 특별히 눈에 띄는 큰 소나무가 있었다.

그 소나무는 많은 가지가 흡사 우산을 펼쳐 놓은 것 같은 형상이었고 밝은 달빛이

그 소나무에만 비추고 있었다.

 

밝은 달빛을 담뿍 받고 있는 소나무 가지의 조금씩 벌어진 틈으로 달빛이

새어 비추고 그 달빛으로 해서 소나무 아래로 흐르는 맑은 시냇물도 볼 수 있었다.

그 시냇물은 바위를 끼고 얼마를 더 아래로 내려 흐르다가 삼봉 폭포와 합류되고 있었다.

뚫어지게 장진도를 펼쳐놓고 보던, 조해평은 뚜렷하게 그려져 있는 삼봉 폭포만

발견했을 뿐 자기가 갇혀 있는 꽃밭 모양의 잔디밭은 끝내 찾아내지 못하였다.

 

(이상한 일이다. 천기진인과 삼음신니도 괴상한 사람이군.‥‥‥‥

삼봉 폭포는 찾기 쉽게 그려놓고 왜 꽃밭은 그려 넣지 않았을까?)

 

실망한 조해평은 장진도에서 눈을 떼고 잠시 생각해 보았으나

자기의 능력으로는 장진도를 풀이할 수 없다고 단념하며 장진도의 가운데를 한번 접었다.

다시 품속에 넣기 위함이었다.

그때 중간을 접은 장진도는 산봉우리가 품자형(品字型)으로 나타나 보이고

제일 높은 산봉우리에서부터 폭포가 쏟아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원래 이 지도를 한 번 접으면 귀원비급의 숨겨져 있는 소재지의배경이 나타나고

다시 그 안에 귀원비급에 대한 글이 쓰여 져 있었다.

장진도를 접어 넣으려던 조해평은 갑자기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그것은 폭포가 쏟아져 내려 바위에 부딪치며 사방으로 튀기는 물방울의 그림이었다.

천지 사방으로 흩어지는 물방울은 어느 방향이나 똑 같이 퍼져 떨어지는 것이었다.

만일 물방울이 어느 한 곳으로만 몰려 떨어지는 것이었다면 조해평의 머리로서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았으나 어디랄 것 없이 똑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에

다시 조해평은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동안 멍청히 장진도에 나타난 물방울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는 조해평은

자기도 모르는 무의식중에 물방울이 몇 개나 되는지 세고 있었다.

 

  (‥‥‥‥七九, 八十, 八一!)

 

  세고 또 다시 세고 하던 조해평의 머리 속에는 그 물방울이 모두 여든

 한 개의 물방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든 하나!」

 

  입속으로 중얼거린 조해평은 이 여든 하나의 물방울에 무슨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생겼다.

조해평은 무의식중이기는 했지만 연거푸 몇 번을 세는 동안 차차로 정신이 들며

유심히 관찰할 수 있게끔 되었다.

  모두 아홉 줄기로 뻗친 물방울과 물방울의 떨어지는 거리가 같지는 않지만

 물방울의 크기만은 꼭 같다는 것을 알아냈다.

 

  (음‥‥‥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붓으로 그린 그림이지만

이렇게까지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꼭 같을 수 있을까?‥‥‥ )

 

오행지술이나 오묘한 절기를 알리 없는 조해평이지만 우연하게도 발견한

물방울의 크기에 신경을 쏟고 더 연구해 보려는 마음이 생겼다.

 

조해평은 그림을 가까이 끌어 놓고 심사숙고하기 시작했다.

 

  (‥‥‥여든 한 개의 물방울은 모두 아홉 줄기에 포함되어 있다.

서로 교차되어 있는 것이 아무래도 무슨 방향을 지시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오른쪽으로 구부러지며 교차된 물줄기가 다섯, 그 반대로 교차된 물줄기가 넷‥‥‥

하여튼‥‥‥ 그림대로 실험해 보자‥‥‥)

 

이렇게 생각한 조해평은 야명주로 장진도와 주위를 비추며 걸음을 옮겼다.

우면 오른쪽으로 다섯 걸음을 나간 후 왼쪽으로 네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다시 물줄기가 기울어진 방향으로 몸을 반쯤 돌려 거기서부터

아홉 개의 물줄기를 따라 아홉 걸음을 옮겨 걸었다.

아홉 걸음을 걸어 나온 조해평은 아홉 개의 선이 서로 교차되는 위치에서

오른쪽으로 다섯 걸음을 왼쪽으로 네 걸음을 왔다 갔다 하기만 했다

그러면서 무슨 지혜나 요행이 나타나기를 은근히 기다리는 셈이었다.

사실 조해평이 발견한 물줄기가 바로 귀원비급을 찾을 수 있는 암시였고 길이었다.

이를테면 찾기는 바로 찾았는데 해독할 수 없는 조해평은 왔다 갔다만 하는 것이었다.

즉 물방울의 아홉 줄기와 다섯 줄기 그리고 네 줄기는 서로 경사지며 교차된 것이

바로 오행(五行)의  술(術)로서 방위(方位)를 표시한 것이었다.

꽃밭이 반오행(反五行)으로 한 것을 안다면 몇 번의 실험으로도

곧 오행(五行)의 방위라는 것을 직감했으련만 그것을 알리 없는 조해평이었다.

그러나 조해평은 단념하지 않고 되풀이하여 물방울의 줄기를 따라 꾸준히 실험하고

또 실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행으로 깨닫는 바가 없지도 않은 일이 세상사가 아닌가 하는 것이 조해평의

마음이었고 계산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되풀이해서 걸음을 옮기던 조해평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앞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잔디밭이 나타나고 드디어 꽃밭 속을 빠져 나오는데 성공했다.

 

  (?‥‥ 이 어찌된 일인가?‥‥‥)

 

  눈이 둥그레진 조해평은 입을 딱 벌리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조해평이 꽃밭을 빠져 나을 수 있었던 것은 물줄기대로 수없이 걸음을 옮기며

반복하는 동안 어떻게 오행법(五行法)에 걸음이 적중되어 자기도 모르게 나오게 된 것이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조차 알 길 없는 조해평은 눈만 둥그레지고 귀신에 홀린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그러나 꽃밭 속에서 빠져 나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살았구나!」

 

하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조해평은 너무나 기쁘고 감격하여 눈물을 펑펑 쏟으며 자기가 갇혀 있던 꽃밭을 뒤돌아보았다.

  수천만 가지 아름다운 꽃은 미풍에 한들한들 날리고 향기가 진동했다.

그러나 뒤돌아보고 있는 조해평의 눈에는 아직까지 발견하진 못했던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수천수만 가지의 아름다운 꽃이 단 여든 한 나무에 피어 있다는 것과

그 여든 하나의 꽃나무도 물방울의 수와 하나도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뿐이 아니었다. 어느 꽃나무 밑에는 사람의 시체가 하나 있었다.

조해평은 놀라움과 무서움에 떨면서도 그 시체를 자세히 보았다.

그리고는 그 시체가 주기의 시체라는 것도 확인했다.

 

「여보 주형! 언제 내려왔소!」

 

소리치며 몇 걸음 옮기던 조해평은 주기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쓰러져 있는

강전을 발견하고 기절할 듯 놀랐다.

 

「으응? 강전도 내려 오구! 야, 이거 다 내려왔구나! 강형!」 

 

  소리치며 꽃밭 속으로 달려가려던 조해평은

 

「아차!」

 

  외치며 뒤로 물러섰다.

 

  순간!

 

  그의 뇌리에는 지금까지 꽃밭 속에서 헤매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직감한 조해평은

 

「언제들 내려왔소? 이리 나오라고!」

 

  외치고 또 한 번

 

「아차!」

 

했다

 

  (내 정신 봐라.

여기가 어디라고 이때껏 저 꽃밭 속에서 고생하고 있었는데 또 들어간다고?‥‥‥)

 

꽃밭 속에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소리도 들을 수 없었음을 그제야 알았다.

그리고 그들이 이미 죽은 것도 알 수 있었다.

조해평은 금능이호의 시체를 보며 숙연히 머리를 숙이고는 그 자리에서 돌아섰다.

  ( ‥‥‥ 할 수 없지 어떻게 구한담?‥‥‥)

 

  고개를 흔들고 환하게 비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금잔디를 깔아 놓은 듯 매끈하고도 황금색으로 다듬어진 풀밭을 옆으로 끼고

협도(峽道)를 따라 차차 경사가 높아졌다.

 

그리고 그 협도 끝의 하얀 벽에 두 개의 석문(石門)이 있었다.

조해평이 그 중의 돌문 하나를 가만히 밀자 육중한 돌문은 스르르 열리는 것이었다.

열린 돌문 안으로 들어선 조해평은 잠시 주위를 살폈다.

약 세 칸 정도의 넓이인 굴속의 양쪽에는 크고 매끈하게 다듬은

흡사 불가(佛家)에 있는 연대(蓮臺)처럼 생긴 청석(靑石)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그 연대(蓮臺)처럼 생긴 청석(靑石) 위에는 돌로 만든 비구니(比丘尼)와 도사(道士)가

정좌(正座)하고 있었다.

 

그 다음 굴 중앙에는 네모반듯하게 다듬은 청석이 탁자처럼 놓여있는 위에는

역시 같은 청석으로 연대처럼 다듬은 돌이 놓이고 그 위에 다섯 치 정도의

옥함(玉函)이 놓여 있는 것이었다.

 

조해평은 조심조심 탁자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은은한 향기가 어디서인지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그 은은한 향기는 조해평이 아직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신비한 향기였다.

눈을 두리번거리며 이곳저곳을 휘둘러보던 조해평은

그 향기가 비구니와 도사가 정좌하고 있는 연대(蓮臺) 바로 앞에 놓여 있는

 향로(香爐)안에서 난다는 것을 알아내고 방향을 돌려 비구니와 도사 앞에 서서

향로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 향로 속에는 무엇인가 완전히 타고 남은 하얀 재(灰)가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다 타버린 재에서 은은한 향기가 난다는 것을 알고서야

그의 뇌리 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렇구나, 분명 이 비구니와 도사는 천기진인과 삼음신니의 화석(化石)임에 틀림없다‥‥)

 

하고 느끼는 순간 조해평은 그 자리에 엎디어 무학종사(武學宗師)에 대하여 경건한 절을 했다.

절을 하고 일어난 조해평은 천기진인(天機眞人)과 삼음신니(三音神尼)의 화석화 된

법체(法體)를 우러러 보며 새삼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 정좌하고 앉아 있는 비구니와 도사를 돌로 깎아 만든

불상(佛像)으로 알았다.

그러나 의외에도 살아 있는 사람의 몸 그대로였고 더구나 씩은 곳도 없는 생생한 그대로였다.

천기진인과 삼음신니는 지금으로부터 삼백년 전의 사람인데 아직까지 그대로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그들의 눈을 감고 자는 듯한 평온한 얼굴을 보고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해평은 더 한 번 경건한 마음으로 읍을 하고 그 자리를 물러섰다.

삼음신니와 천기진인의 법체에서 물러나온 조해평은 곧장 중앙의 탁자로 다가갔다.

사실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중앙에 있는 청석 탁자의 옥함(玉函)이 궁금했으나

천기진인과 삼음신니의 법체에 자기도 모르게 엄숙해지고 저절로 끌려가듯 갔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곳을 물러나온 조해평은 더 주저할 것이 없었다.

탁자로 다가온 조해평은 옥함의 뚜껑을 열었다.

두 눈이 둥그레지고 말았다.

그것은 옥함의 뚜껑에 다음과 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秘?重寶(비급중보)

       珍惜縛損(진석박손)

 

  순간!

 

조해평은 눈을 감고 말았다.

그렇게 고생하며 찾으려던 귀원비급을 발견한 기쁨을 어떻게 표현하고,

끓어오르는 감정을 어떻게 억제해야 할 지

다만 가슴의 고동이 마구 방망이질을 하는 것이었다.

잠시 동안 마음을 진정한 조해평은 떨리는 손을 들어 옥함의 뚜껑을 열었다.

옥함의 뚜껑을 열자 그 속에서는 훈훈한 바람과 이상한 향냄새가 코를 찔렀다.

조해평은 조심조심히 뚜껑을 옮겨 놓고 다시 마음을 진정시키며

맨 위에 놓여진 비단보를 들었다.

 

그러자 그 밑에도 역시 비단으로 싸여진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그 책을 들어내자 또 하얀 색깔의 알약인 단약(丹藥)이 있고

그 단약 밑에 있는 또 한 조각의 비단 헝겊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入食有緣(입식유연)

        特贈靈丹(특증영단)

 

  글을 읽은 조해평은 즉시 단약을 삼켰다.

그러자 어떻게 된 일인지 청아한 향기가 그의 단전(丹田)으로 들어가는 가 했는데

어느 사이에 한줄기의 뜨거운 기운이 온 몸에 골고루 퍼져 나가는 것이었다. 

 

그 다음 순간-,

 

근 반달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던 조해평은 진수성찬을 먹은 듯 배가 부르고 정신이 맑아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피곤함은 어디로 갔는지 새로운 힘이 온 몸에 뻗치는 것이었다.

 

신기하고도 신기한 일이었다.

단약(丹藥)의 효과는 무서운 것으로서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까지 일신시켜 종전까지의

조해평을 완전히 다른 조해평으로 만들어 놓았다.

귀원비급 한 가지만이라도 기운이 백배(百倍)할 조해평으로서는 새로운 힘이

천만배(千萬倍)나 더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는 곧 처음 비단 보자기에 싸였던 책자를 집어 들었다.

거기에는 보기만 해도 감격스러운

 

「歸元秘?(귀원비급)」

 

이라는 네 글자가 뚜렷이 쓰여 있는 귀원비급 바로 그 책이었다.

깊은 숨을 몰아쉰 조해평은 우선 그 책의 첫 장을 열었다.

거기에는 무술의 초보적인 기초 동작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고

여러 가지의 내외공(內外功)의 수련법(修練法) 그리고 현문토납 지술(玄門吐納之術),

불가좌선 지법(佛家座禪之法)을 세목별(細目別)로 논술하고 속성법(速咸法),

후진법(後進法)등의 구십(九十)여 가지의 기초가 총 삼십육편(三十六編)으로 구분하여

논술되어 있었다. 

 

그 다음 둘째 장을 폈다.

 

  여기서는 전(前), 상(上), 병기(兵器), 암기(暗器), 요상(腰傷),점령(點靈), 불령(佛靈),

진령(塵靈), 금나(擒拏) 둥의 수법이 공격법과 파괴법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첫 장과 둘께 장을 넘기며 읽어 가던 조해평은 불현듯 기록대로 실험하고 싶은 생각이

불쑥 나고 마음이 조급하여 견딜 수 없었으나 꾹 참고 다음 셋께 장을 넘겼다.

 

여기서는 상(上), 중(中), 하(下)의 세 가지로 구분된 내공의 요결(要訣)이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여기까지 읽어온 조해평은 기록된 문장의 글자 하나하나가 얼마나 심오하고

절묘한 뜻을 품고 있는지 글자 한자만 연구해도 상당한 무술을 연마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다음 장을 넘긴 조해평은 단숨에 서너 줄을 읽고

그 다음‥‥‥ 그다음‥‥‥ 몇 장을 더 넘겨 맨 끝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기서부터는 글자가 비뚤 비뚤 획이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하고 글씨도

거의 알아볼 수 없게끔 흐려져 있었다.

여기서 조해평은 귀원비급을 기록하던 삼음신니와 천기진인의 임종(臨終)이

가까워졌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끝을 맺지 못한 부분에서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절세의 무공임을

짐작할 수 있는 조해평이지만 사실 그 뜻을 완전히 알기는 힘들었다.

더구나 요결(要訣)에 대해서는 전연 이해부득(理解不得)이었고 인신혈도(人身穴道)의

운기행공(運氣行功)은 더더욱 난해(難解)한 것이었다.

 

 원래 이 귀원비급을 기록한 다음 여담(餘談)으로 각자가 수련한 내공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 하다가 천기진인이 수련한 현문일원강기(玄門一元?氣)와 삼음신니의

불문반약선공(佛門般若禪功)을 합하여 귀원비급에 첨가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하여 이것을 대반약현공(大般若玄功)이라 명명(命名)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천기진인의 일원강기(一元墨氣)는 양생(養生)을 주목적(主目的)으로 창작한 무공으로서

이 내공을 연구하여 수련하면 몸은 더욱 젊어져 놀라운 체력과 무공으로 어떠한

강적(强敵)이라도 일시에 제압할 수 있으며 삼음신니의 반약선공(船若禪功)은

수명(修命)을 주목적으로 하여 체내(體內)의 정기(精氣)를 갱생(更生)운행시켜

적을 무찌를 수 있도록 창작한 특별한 내공이었다.

 

이와 같이 오묘한 두 내공을 합친 대반약현공(大般若玄功)은

실로 그의 위력과 신기(神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처음 친기진인과 삼음신니가 서로의 내공으로 사흘 동안을 싸워

심한 내상(內상)을 입게 되어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둘이 다 죽었지만

만일 내상을 받은 즉시 이 대반약현공의 묘미를 깨닫고 분석하여

근본적인 치료를 받았더라면 완치될 수 있었을 것이 라고 천기진인이

죽을 임시에 한탄하기도 하였던 것이었다.

 

이 대반약현공을 거의 완성할 때 두 사람의 심지(心智)도 모두 소모되어

더 이상의 악화를 억제하지 못하게 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때 삼음신니는

최후까지 대반약현공의 요결을 기록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천기진인은

최후의 원기로 석문(石門)을 닫고 미리 준비 했던 향초(香草)를 피우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삼음신니는 대반약현공의 요결을 완성할 몇 자를 더 부기(附記)하려다

자기의 최후가 가까워 옴을 깨닫고 각자의 청석연대(靑石蓮臺)위에 올라갔다

그 다음 향초의 향기가 가득하고 흰 연기가 싸인 굴속에서 두손을 합장한 채

승천(昇天)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이때 천기진인이 피운 향초는 천 시간(千時間)동안의 영기(靈氣)로 이루어진

기이한 향초로서 어떠한 시체라도 썩지 않게 하는 효능이 있는 것이었다.

 

이 향초는 천기진인이 어렸을 때 백운협 골짜기에서 구한 것으로 자기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 피우기로 하고 언제나 품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천기진인과 삼음신니의 시체가 썩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과 똑같은 육체로 있음도

이 향초의 효능임은 두말 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한편, 조해평은 절세지학(絶世之學)으로 읽어진 귀원비급을 품에 안고 눈물을 좔좔 흘렸다.

그것은 너무 기쁘고 어떤 큰일을 이루었을 때 누구나 느끼는 통쾌감과 허탈감에서 오는

감격에 벅찬 눈물 그것 이었다.

 

얼마 동안 감격에 벅차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던 조해평은

한 번 더 귀원비급을 펼쳤다.

 

조해평이 펼친 곳은 바로 반오행(反五行)의 출입법(出入法)과 성복지학(星卜之學)이

간단명료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비록 많은 학문을 배우지 못한 조해평이지만 어찌된 셈인지 반오행(反五行)의

출입방법과 성복지학(星卜之學)에 쓰여 져 있는 글자는 대강

그 뜻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궁즉통(窮則通)일까? ‥‥‥)

 

  머리를 갸웃거리는 조해평은 천하를 다 얻은 듯 기쁨이 충만했다.

조해평은 그날부터 구일(九일) 동안을 더 굴속에 머무르면서 귀원비급의 연구로 날을 보냈다.

그러나 배고픔이나 피로함이 과연 어떤 것인지 조차 모를 만큼 만사가 편하고 기운도

갈수록 더 하기만 했다.

 

조해평이 굴속에 들어 온지도 어언 일개월이 지난 어느 날 천기진인과 삼음신니의 법체에

읍하여 하직을 고하고 귀원비급이 담겨진 옥함을 들고 굴의 석문(石門)을 열고 나왔다.

 

그때는 이미 귀원비급에 기록된 반오행법(反五行法)을 완전히 익힌 다음인 조해평은

수천만 가지의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는 꽃밭의 꽃진에 마취되지 않고 쉽게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가 꽃밭을 거의 지나올 무렵. 이제는 썩을 대로 썩은 주기와 강전의 시체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회상에 잠겼다.

 

 (‥‥‥나도 이 장진도가 아니었다면 이와 같이 죽어서 썩었을 것을‥‥‥‥

그런데 왜 이 주기와 강전이 여기까지 왔을까?

처음에 나보고 내려가라고 했지 않은가?‥‥‥ 그런데?‥‥‥ 음 이상하군.

틀림없이 나를 믿지 못해서 쫓아 내려왔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괘씸하군!)

 

이렇게 생각한 조해평은 이마를 찌푸리며 지나와 버리고 말았다.

처음 들어올 때 천신만고하며 지나온 길이 나갈 때는 별로 어려움 없이

굴 밑바닥까지 나올 수 있었다.

굴 밑에는 천행으로 자기가 타고 내려온 등나무 줄기가 그대로 늘어져 있었다.

등나무 줄기의 한 끝을 잡고 당겨 보아도 끊어진 곳 없이 팽팽히 당겨지자

조해평은 등나무 줄기를 타고 지상(地上) 으로 올라왔다.

 

오랜만에 보는 햇빛에 약간 눈이 부셨으나 능히 참을 수 있었고

잠시 후에는 햇빛에도 익숙해진 조해평은 그 길로 천기진인이 도를 닦던

백운협 골짜기의 동굴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날부터 조해평은 이 굴 속을 자기의 처소로 정하고 귀원비급의 기록대로

무술을 연마하는 데에 심혈(心血)을 기울였다.

이 동굴 안에는 다섯 개의 방이 있었고 천기진인이 거처하던 방에는

언제나 불이 붙고 있는 단로(丹爐)가 놓여 있어서 추위와 어둠을 모르고 지낼 수 있었다.

어느 덧 세월은 흘러 조해평의 무공은 종전의 몇 배가 정진하게 되었다.

비단 검(劍)과 장법(掌法)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병기(兵器)에 있어서도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무술인으로 변하였다.

더구나 천기진인의 현문일윈강기(玄門一元?氣)와 내공에 더욱 통달하였다.

 

그러나 귀원비급에 기재된 천하의 무술정화(武術精華)는 조해평이 비록 십여 년간의

기간이 길다 하지만 귀원비금에 기재된 무공의 절반도 채 익히지 못한 것이었다.

십여 년의 길고 긴 세월이 흘러가던 어느 날 조해평은 기발한 착상을 했다.

즉, 가짜 귀원비급을 만들어 석함 속에 넣고 천기진인과 삼음신니가

사흘 동안 밤낮으로 싸우다 승천(昇天)한 곳에 석탑(石塔)을 쌓고 그 위에 놓아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기인(奇人)이 맹렬히 싸우던 종운암(聳雲岩) 상봉(上峰)에 가짜 장진도(藏眞圖)를

놓아둔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는 조해평의 마음속에는 무예계의 기서(奇書)인 귀원비급 때문에

수백 년 동안  많은 무예계 고수들이 죽 어간 것을 상기했다.

그래서 만일 다른 사람이 장진도를 발견하고 귀원비급을 얻게 된다면 일시적이나마

무술계의 풍파가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조해평은 자기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는 돌아볼 여유도 없이 장난기 섞인

가짜 귀원비급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붓과 종이를 들고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얼마 동안 머리를 짜며 곰곰이 생각하던 조해평은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몇 줄의 글을

쓰고 재주 있는 대로 솜씨를 내어 아무 그림을 그렸다.

새, 물고기, 호랑이‥‥‥등.  자기는 새, 물고기, 호랑이를 그린다고 그렸지만

남달리 손재간이 없는 그의 그림은 정말 이상야릇한 그림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런데 막상 자기가 그린 그림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던 조해평은 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그런대로 무슨 뜻 깊은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여 마음속으로 저윽이 기뻐했다.

이와 같이 하여 가짜의 귀원비급을 완성한 조해평은 자기의 계획대로 두 기인(奇人)이

승천한 곳으로 달려갔다.

동굴 속으로 들어가려던 조해평은 석문(石門)을 바라보는 순간! 

저윽이 놀라며 급히 뛰던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동굴로 들어가는 석문 앞에 한 마리의 거대한 백학(白鶴)이 버티고 서 있는 것이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백학에 잠시 주춤했던 조해평은 이때껏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거대한 백학에 마음이 끌려 잡고 싶은 생각이 불쑥 났다.

그래서 조해평은 살살 다가가 손을 뻗쳐 잡으려는 찰나!

 

  <획! 획!>

 

날카로운 날개로 강렬한 바람을 일으키며 백학은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는 번개같이 빠른 속도로 왼쪽의 날개를 벌려 후려치는 것이었다.

상상도 못했던 백학의 역습에 멈칫 놀란 조해평은 손에 약간 힘을 주며 재차 잡으려고 달려들었다. 이때 조해평이 쓴 수법은 금나(擒拏)의 한 수였으나 백학의 날렵한 동작은 마치 무공의 절학

(絶學)을 터득한 것처럼 가볍게 피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어이없이 자기의 공격이 허사로 돌아간 조해평은 조금 화가 치밀었다.

다시 기회를 노리고 손에 운기를 조절하며 번개같이 달려들어 팔을 휘둘렀으나

이번에는 언제 빠져 나갔는지 도리어 조해평의 등 뒤에서 백학의 공격이 쉴 새 없이

퍼부어지는 것이었다.

그제야 당황한 조해평은 금나 수법을 조금 강하게 변화시켜 달려드는 학의 날개를 내려쳤다.

그러나 그것도 허사였다.

 

  (흥! 요놈의 학이! 이래봬도 십년 동안 귀원비급을 연마한 내가 네까짓 학 한 마리쯤!)

 

하고 주먹을 단단히 쥔 채 공격을 가했으나 모두 학의 가볍게 피하는 행동에는

무위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공격을 계속하던 조해평은 아무리 공격해도 승부가

 나지 않음은 고사하고 자기가 학에게 조롱당하는 듯한 감을 느꼈다.

  퍼뜩! 조해평의 머리 속에 귀원비급에 기재된 무공이 생각났다.

  그러나 마음이 초조해진 조해평의 머리 속에는 쉽게 그 무공이

어떠한 수법이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조해평은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강력한 공력을 운행하여 백학의 접근을 막으며

한 손으로는 진짜 귀원비급을 펼쳤다.

무공법을 찾아보자는 심산이었다.

십여 년 동안 귀원비급을 펼쳐놓고 열심히 탐독하여 연구한 조해평으로서는

 어떠한 수법이 어디에 기재되어 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곧 금나(擒拏)편에서 자기가 찾으려던 항용복봉(降龍伏鳳) 한 수의 수법을 찾아냈다.

그리고는 요결을 암기한 후 귀원비급의 책자를 품속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백학을 노려보면서 암암리에 공력을 운집시키고 있었다.

 

  그때였다.

 

  홀연!

 

  백학은 큰 날개를 벌리고 무서운 속도로 조해평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었다.

그러자 조해평은 몸을 일으켜 재빨리 피하면서 나한비추(羅漢飛推)의 한 수로 달려오는

거학(巨鶴)의 앞으로 장풍을 날려 덮쳐 오는 거학의 공격을 막았다.

그제야 거대한 백학은 조해평의 장풍이 맹렬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아니면 싸울 의욕이 없는지

길게 부르짖고는 두 날개를 쫙 펼치면서 허공으로 높이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순간!

 

조해평은 급히 왼손의 장풍을 회수(回收)한 후 번개같이 거학의 뒤를 따라 허공으로 날았다.

이때 거학은 조해평이 회수하는 강렬한 장풍의 흡인력(吸引力)에 허공에서 더 날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몸이 뒤로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그때 뒤미처 달려간 조해평은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은 빠른 솜씨로 거학의 두 발을 거머쥐었다.

  그와 동시에 거학의 긴 목을 움켜잡고 말았다.

 

  드디어 거학은 조해평의 손에 붙잡혀 땅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거학의 가운이 얼마나 강한지 땅에 떨어지면서 날개를 휘젓는 바람에

주위 일대가 먼지로 눈을 뜰 수 없었다.

  땅에 떨어진 거학은 더 저항하지 못하고 기진맥진한 듯 하였다.

  이때 마음을 놓고 쥐고 있던 두 다리와 목을 놓아주자 거학은 태도가 돌변하며

날개를 펄럭이면서 역습해 들어왔다.

  안심하고 있던 조해평은 돌변한 거학의 공격에 감탄을 연발하며

나한비추(羅漢飛推)의 수법을 다시 이용하여 쉽게 거학의 두발과 목을 움켜쥐었다.

  거학은 더 저항하지 못하고 날개를 축 늘어뜨리고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그러자 조해평은 잡았던 발과 목을 놓아 주었다.

그러면 거학은 얼마간의 휴식을 취하고는 다시 달려들고 조해평은 다시 또 잡고‥‥

이렇게 반복하기를 오륙 회(五六回).

드디어 거학은 긴 목을 내려뜨리며 슬프게 한번 울고 눈을 감는 것이었다.

조해평은 거학이 눈을 감자

 

  (이제는 더 덤비지 못하겠지‥‥‥)

 

  안심하고 석문을 열고 굴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계획대로 가짜의 귀원비급을 탁자 위에 놓고 급히 꽃밭을 지나 굴 밑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그곳에 응당 있어야 할 등나무 줄기가 끊어져 있지 않은가?

이백장(二百丈)이나 되는 우물인 이 땅굴(地穴)은 주위의 벽이 미끄러워

도저히 올라갈 재주가 없었다.

 조해평이 낙심천만 하여 정신을 잃고 망연히 서 있을 때 갑자기 조해평의 왼쪽 팔을 툭!

건드리는 것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낙심하여 망연히 서 있던 찰나에 얼마나 놀랐겠는가?

기절초풍하여 급히 몸을 돌렸다.

그때 그의 눈에는 언제 왔는지 좀 전의 거학이 서 있는 것이었다.

 

 (음‥‥ 이상한 일이다. 이 거학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하는 한편,

 

  (혹시 이 거학의 등에 올라타면 이 굴 속에서 빠져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자 거학의 등에 급히 올라탔다.

 

  그러자 정말 거학은 조해평이 올라타기를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조해평을 태우고 가볍게 우물 속을 날아 빠져 나오는 것이었다.

삽시간에 굴속에서 빠져 나온 거학은 조해평을 등에 태운 채 거의 백장(百丈)되는

높이의 하늘 위로 훨훨 날고 있는 것이었다.

조해평은 정신이 번쩍 들며 당황했다.

그러나 거학의 편안한 등과 상쾌한 바람이 얼굴에 시원하게 부딪치자 안심하고

거학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거학의 등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경치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산, 들, 그리고 바위와 초목이 지나가고 구름 사이를 뚫고 어렴풋이 내려다보이는 경치는

선경(仙境) 그것이었다.

 

백학의 등에서 조해평은 아래를 굽어보며 상쾌한 여행을 얼마나 했을까?

갑자기 방향을 바꾼 거학은 쏜살같이 아래로, 아래로 일직선을 그으며 곧장 내려가는 것이었다.

얼마나 빠른 속도이며 얼마나 곧장 내려가는지 조해평은 학의 목을 끌어안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썼다

 

(아이고, 이러다‥‥‥ 이러다‥‥‥ 떨어져 죽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다음 순간!

 

거학은 천천히 속도를 늦추며 자세를 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어느 이름모를 산봉우리에 가뿐히 내려 않았다.

 거학의 목을 꼭 잡고 있던 조해평은 등에서 내려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는 이곳이 바로 백운협의 종운암(聳雲岩)으로서 두 기인(奇人)인

천기진인과 삼음신니가 싸웠다는 바로 그곳임을 알았다.

조해평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싱글 벙글 웃으며 급히 큰 바위 밑에 장진도를 숨겨 놓고

거학에게로 되돌아 왔다.

거학은 밝은 햇빛을 담뿍 쐬며 의젓하게 서 있었다.

그 모습이 정말 의젓하고 웅장하였다.

가까이 다가간 조해평은 거학의 목을 껴안고 등을 쓸어 주었다.

그러자 거학은 조해평의 몸에 몸을 기대어 길게 슬픈 음성으로 우는 것이었다.

거학의 우는 모습은 마치 주인으로 섬기겠다는 뜻처럼 들려 조해평은 측은하고

또 믿음직스러웠다.

서로 말은 통하지 못하지만 목을 안고 쓸어주고 또 기대고 하는 것으로서

거학과 조해평은 완전히 의사가 통하게끔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조해평은 거학의 등을 들어 주고 또 목을 쓸어주다 무엇인가 딱딱한 물건이 만져졌다.

급히 거학의 목에 걸려있는 물건을 찾았다.

그것은 거학의 목 아래에 대나무 통이 한 토막 달려 있는 것이었다.

약 두 치 정도의 길이와 손가락만큼의 굵기인 대나무 토막은 조해평의 두 손가락으로

가볍게 쪼갤 수 있었다.

 

그러자 쪼개진 대나무 토막 속에서는 한 조각의 비단 헝겊이 나왔다.

조해평이 급히 비단 헝겊을 펼치자 다음과 같은 글이 가지런히 쓰여 있었다.

 

「거학 현옥은 천년 신물(神物)로서 이미 사람의 뜻을 알 뿐 아니라

그의 힘은 용호(龍虎)도 물리칠 수 있다.

이제 새 주인에게 넘긴다. 잘 보살피라.」

그리고는 다음 줄을 바꾸어 조금 작은 글씨로 아래와 같이 쓰여 져 있었다.

 

「귀원비급을 취득한 인연이 있는 자에게 거학을 다루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여좌(如左)하다.」

 

하고는 세목별로 자세하게 쓰여 져 있고 끝으로 친기진인의 서명(署名)이

날인(捺印)되어 있었다.

조해평은 그날부터 무술을 연마하는 한편,

백학과 함께 높은 산봉우리와 하늘을 날며 소일(逍日)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던 어느 하루-.

 

조해평은 갑자기 옛날의 지나간 일이 생각났다.

 

 (내가 고향을 떠난 지도 어언 십여 년-,

강산도 변한다는 십여 년 동안 고향 산천은 얼마나 변했으며

예전 친구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 백학을 타고 한 번 다녀올까?‥‥‥)

이렇게 생각한 조해평은 그 즉시로 현옥(玄玉)인 백학을 타고 일로(-路) 북경(北京)을 향하여

북(北)으로 날았다. 

과연 현옥은 영물(靈物)이었다.

더구나 천년 이상이나 산 신물(神物)인 백학은 속도와 힘이 얼마나 빠르고 센지

구만리(九萬里) 길을 그 다음날 새벽에 도착하였다.

북경(北京에 도착한 조해평은 찾기 쉬운 산봉우리에서 백학을 기다리게 하고

그 길로 곧장 옛집을 찾아 대궐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