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비연경룡

제 23 장 끊어질 수 없는 생명 <遠山逢士>

오늘의 쉼터 2014. 6. 22. 13:35

제 23 장 끊어질 수 없는 생명 <遠山逢士>
 

 

그때였다.

도옥이 양몽환을 절벽 아래로 내던지려고 할 때

갑자기둥 뒤에서 바람 소리와 함께 옥소선자가 공격해 왔다.

 

순간,

재빨리 두 팔을 번쩍 쳐들어 아래로 던졌으나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절벽 아래의 괴석들이 서 있는 곳으로 던졌는데 너무 힘을 준 탓으로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연못으로 던지고 말았다.

그 순간 옥소선자의 퉁소가 바람을 일으키며 등 뒤를 찔렀다.

 

금환이랑 도옥이 비록 각우 대사로부터 많은 무예를 배우긴 했지만 너무 시일이 짧아

겨우 열수를 사용하여 적에게 대항하여 왔을 뿐. 대부분의 무술에는 익숙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옥소선자가 전력을 다하여 절러오는 그 일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위기일발의 순간,

 

그도 몸을 껑충 날려서 양몽환의 뒤를 이어 연못으로 내려뛰고 말았다.

옥소선자는 그가 연못으로 뛰어 내릴 줄은 몰랐으므로 자신이 달리던 여세로 '인해

앞으로 몸이 솟구쳤다.

 

이때 도옥은 동굴을 뛰어 내리면서 몸을 홱 들이키고는 왼 손을 휙 내밀었다.

그러자 한 개의 금환이 그의 손목으로부터 번개같이 날아왔다.

 

거리가 가까운 데다가 옥소선자 역시 몸이 앞으로 솟구쳐 자세를 바로 잡지 못하고 있던 때인 만큼 그녀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금환이 바로 눈앞에 와 있을 때였다.

순간 얼굴을 옆으로 비키자 금환은 살짝 그 앞을 스치고 어느새 금환은

그녀의 희디 흰 얼굴을 한 치 가량이나 찢어 놓고 말았다.

그녀는 원래 중상을 입은 몸이었지만 양몽환이 준 영단의 효과로 버티어 왔었다.

이제 양몽환이 도옥에 의해 연못에 던져지고 또 몇 번이나 좌절을 당한 끝에

금환에 의해 상처를 입게 되자

 

「동생! 윽……」

 

하고 외마디를 외치고는 곧 쓰러지고 말았다.

 

도옥은 허공에서 몸을 돌이켜 금환으로 옥소선자에게 상처를 입히긴 했지만 그

도 역시 정신을 잃고 그만 양몽환의 뒤를 이어 연못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양몽환은 이미 혼미해 있었으나 차가운 연못물에 자극을 받자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마치 현도관에 있을 때 원강(沅江)을 헤엄치던 것처럼 온 힘을 다해 손을 허우적거리며

밑으로 빠져 들어가지 않으려고 애썼다.

다행히 급히 내려 쏟아지는 폭포수는 평평한 큰 암석에 부딪침으로서 연못에 내려오는

물이 여러 갈래의 가느다란 줄기가 되어 흘러들어 오는 것이 멀리서 보기에는 마치

안개가 핀 것 같았다.

 

물위로 떨어진 도옥은 물 속에서 버둥거리는 양몽환을 보고는 속으로 자기가 만일

옥소선자에 의해 물속으로 정신없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그는 여자처럼 깔깔 웃으며 말했다.

 

「양형! 이 연못 주위의 풍경이 좋은데 물속에 몸이 빠져도 한은 없겠군.」

 

양몽환은 가라앉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느라고 도옥이 무어라고 지껄였는지 조차 몰랐다.

도옥은 두 손으로 물을 헤치고 양몽환의 옆으로 다가 가더니

그의 오른 팔을 붙잡고 냉소하며 말했다.

 

「양형, 그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모습이 보기가 매우 딱하구려.」

 

하며 양몽환을 이끌고 연못가로 나왔다.

얕은 곳에 이르자 오른 손에 공력을 집중하고 양몽환의 천영혈(天靈穴)을 치려고 하자

갑자기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그리 꾸물거리세요. 빨리 양사제를 끌고 나오세요.」

 

도옥이 돌아다보니 동숙정이 장검을 비스듬히 들고는 온 몸이 물에 젖은 채

노기어린 눈초리로 내려보고 있었다.

도옥은 들었던 오른 손을 천천히 내려 양몽환의 천영혈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몸을 날려 땅 위로 뛰어 올랐다.

 

「그가 옥소선자에 의해 저 암석 위에서 연못으로 던져졌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가 구한 거야. 그러나 워낙 중태여서 살리기가 좀 어려울 걸.」

 

  그러자 동숙정은 코웃음을 쳤다.

 

「흥! 누가 당신의 말을 믿어요?」

 

  방금 도옥이 양몽환의 천영혈을 가볍게 두드린 것은 이미 태음기공(太陰氣功)을 운집하여

독수를 내린 것이므로 다 죽어가는 양몽환은 고사하고 성한 사람이라도

그 일장을 견딜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태음기공은 워낙 음독(陰毒)한 것이어서 그 발작이 극히 평범할 뿐 아니라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다.

 

동숙정은 도옥의 품으로부터 양몽환을 빼앗아 그 곳을 떠나 어느 바람이 불지 않는

조용한 산모퉁이에 이르러 양몽환을 땅 위에 누이고는 공력을 모아

그의 각처 요혈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옥은 싸늘한 미소를 띠고 옆에서 바라볼 뿐 아무 소리도 안하는 것이었다.

 

동숙정의 두 손이 양몽환의 전신 열두 대혈을 거처건만 양몽환은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동숙정은 땀만 뻘뻘 흘리었다.

구원할 길이 없음을 안 그녀는 갑자기 손을 멈추고 몸을 일으켜 도옥을 바라보면서

 

「왜 도와주지 않고 보기만 하세요? 나의 사제를 어서 깨어나도록 하세요.」

 

  도옥은 고개를 흔들며 담담히 웃었다.

 

「이미 늦었어. 이 세상엔 아마 다시 그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요.」

 

  동숙정은 애원하듯 음성을 낮추었다.

 

「아무튼 가능한 대로의 노력은 해보아야 할 게 아녜요?」

 

「흥! 퍽 관심이 많군?」

 

「나와 사형제간인데 관심을 가지는 것이 무슨 잘못이에요?」

 

도옥이 몸을 구부려 오른 손으로 양몽환의 가슴을 만지더니

일부러 눈살을 찌푸렸다.

 

「이젠 틀렸어. 땅이나 골라 붙어 주자.

황산에 시체를 버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정성은 다 한 셈이야.」

 

동숙정이 놀란 손으로 가슴을 만져 보았지만 심장에서는 가느다란 고동이 계속칠 뿐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도옥은 양미간을 찌푸렸다.

 

「울긴? 운다고 살아나나?」

 

  동숙정은 너무나 슬픈 나머지 도옥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더욱 소리 내어 우는 것이었다.

  도옥은 이미 양몽환이 살아날 수 없게 되자 동숙정이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동숙정이 우는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만일 하림이 이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슬퍼할까?」

 

하고는 갑자기 소리 내어 웃는 것이었다.

 

그러자 울음을 뚝 고친 동숙정은

 

「흥, 당신은 그토록 심사매를 생각하고 있지만 양사제가 정말 죽는다 하더라도

심사매는 결코 당신을 좋아하진 않을 거예요.」

 

하고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

 

「죽지도 않았는데 죽은 체 하고 있는 줄 알아?

숨이 넘어 갔는데 울긴 왜 울어? 안가겠으면 나 혼자 가겠어.」

 

하고는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동숙정은 평소에 도옥과 말다툼을 여러 번 했지만 도옥이 정말 화가 난 듯한 태도를 보자

도리어 기가 죽으며 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_

 

「어디로 가요?」

 

하고 물자 도옥은 퉁명스레 대답했다.

 

「이 넓은 천지에 어딘들 못 갈까?」

 

  얼굴에 노기를 가득 띤 도옥의 모습을 보자 동숙정은 절로 고개가 수그러졌다.

 

「양사제를 묻고 같이 가요. 네?」

 

  순간,

도옥은 과거 양몽환과 같이 지내던 일을 생각하자 약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 당신을 도와 특이한 돌무덤을 만들어 주지.」

 

하고는 양몽환의 몸을 안았다.

 

  두 사람은 어느 산기슭에 양몽환을 내려놓고 자갈을 모아서

높이 대 여섯 자 길이 여덟 자 정도의 돌담을 쌓았다.

  도옥이 양몽환을 돌담으로 생긴 구덩이에 눕히며

 

「양형, 내가 양형의 무덤을 만들어 주게 될 줄은 정말 몰랐소.」

 

하면서 탄식하듯 말했다. 그가 그 돌 구덩이에서 나와 다시 돌로 그 언저리를 막으려 할 때였다.

갑자기 동숙정이 그 구덩이 안으로 뛰어 들어가 양몽환의 가슴을 만져보았다.

그러자 극히 가늘기 그지없었으나 아직 심장은 뛰고 있음을 알았다.

그때 도옥은 두 손에다 돌을 집어 들고 동숙정이 나오기를 재촉하는 것 이었다.

 

「빨리 나와서 돌을 채우도록 해! 그리고 빨리 떠나야 할게 아냐?」

 

  그러자 동숙정은 펄펄 뛰었다.

 

「완전히 숨도 넘어가지 않은 사람을 산채로 매장한단 말예요?

조금만 더 기다려 봐요.

살아날지도 모르겠어요.

 

「이미 살기는 다 틀린 사람, 약간 일찍 묻어버리면 어떤가?」

 

「그래도 나는 그렇게 못하겠어요.」

 

하는 말에 도옥은 두 손을 한번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손에 들려있던 돌이 근처의 커다란 바위에 부딪쳐 부서졌다.

그리고 그는 구덩이 안으로 뛰어 들어가 동숙정의 한 팔을 힘껏 붙잡고는 뛰어 밖으로 나왔다.

 

「음, 안 나오려는 걸 보니 그를 따라 죽고 싶은 모양이군.」

 

「말 같지 않은 소리 말아요. 양사제는 아직 숨도 넘어가지 않았는데 어찌……」

 

하자 도옥은 갑자기 크게 웃었다.

 

「그가 죽었던 안 죽었던 간에 우리가 힘 들여 만든

이 무덤을 빈 그대로 남겨 둘 수는 없지 않아?」

 

「비어 있으면 어때요?

양사제의 숨이 넘어 가기 전에 당신도……」

 

하고 노려보자 도옥은 냉소하며

 

「네가 과연 내가 하는 일을 막을 수 있을까?」

 

하고 다시 돌 한 개를 집어 드는 것이었다.

 

동숙정은 그의 팔 힘이 강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만일 그가 돌을 던지게 되면

양몽환은 그 돌에 맞아도 죽을 것이라 생각하자

곧 주먹을 들어 그의 앞가슴을 내질렀다.

그러자 도옥은 몸을 비틀어 비키면서 발로 동숙정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동숙정은 비록 한 대 갈기긴 했지만 결국 그를 해치려고 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주먹을

곧 뒤로 거두었다.

그러나 도옥은 살기를 띄우고 발길로 차고는 느닷없이 구덩이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도옥과 함께 있게 된 것은 며칠 안 되지만 그녀는 이미 도옥의 잔인한 성격을 알고 있는 터라

곧 장검을 빼어 들었다.

그녀가 장검을 빼어 들자마자 과연 두 개의 돌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양몽환의

앞머리 쪽으로 날아갔다.

동숙정은 재빨리 검을 들어 양몽환의 머리로 향한 그 돌을 쳐 날려 보내는 동시에

왼 손을 번개같이 내밀어 다른 하나의 돌을 받았다.

곧이어 도옥이 구덩이 안으로 뛰어 들어 오더니

미소를 띠운 부드러운 얼굴로 고치며 말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나는 가겠어.

 

  동숙정은 왼 손으로 돌을 받긴 하였으나 손바닥이 몹시 아팠다.

 

「가세요! 난 양사제의 숨이 넘어갈 때까진 여길 떠날 수 없어요

 

도옥이 하늘을 쳐다보며

 

「홍, 그렇다면 차라리 이 돌 구덩이 속에 같이 묻히는 것이 낫지 않을까?」

 

  왼손을 들어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이 동숙정의 오른 쪽 팔꿈치를 쥐고는 힘을 주자

동숙정은 그만 단번에 팔이 저려 보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도옥이 깔깔 웃더니 오른 손으로 땅에 떨어진 그 검을 주워 들고는 동숙정의 앞을 겨누며

 

「음, 너희들 둘이 비록 살아있는 동안엔 한 이불 속에 들진 못하였지만

죽은 다음에나 한 구덩이에 묻히게 해 줄까?」

 

하고 흉악한 빛을 띄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누워있는 양몽환을 보면서 다시 말했다.

 

「양형! 내가 하는 짓이 고맙지 않소?

생전에는 동사매와 조석으로 상면하고 이제 죽어 같이 묻히게 될 여자도 구해 왔으니……

하하하!

양형의 혼이 있다면 이 아우의 정성에 감격할 것이오.」

 

  동숙정은 팔꿈치를 잡혀 반신이 마비되어 싸울래야 싸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다 놀리 듯 하는 도옥의 그런 말을 듣자 분노와 부끄러움이 엉켜 이를 가는 것이었다.

 

「만일 양사제의 혼이 있다면 아마 당신의 살을 씹어 뜯을 거예요.」

 

  그러자 도옥은 동숙정이 가슴에 겨눈 검을 앞으로 약간 밀었다.

순간, 칼끝이 그녀의 옷과 살을 뚫으며 피가 검을 타고 흘러 나왔다.

그러나 동숙정은 꼼짝도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다.

 

「흥! 나를 죽여 보세요. 당신을 따라 가는가……」

 

하고 쏘아보는 것이었다.

 

  그러자 도옥은 돌연 검을 거두며

 

「흥! 모든 일이 네 마음대로는 안 될걸.」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죠?」

 

「오래 오래 동안 욕을 보여 줘야겠어.

우선 너의 전신 음혈(陰穴)을 짚어 너를 꼼짝 못하게 한 뒤 옷을 모두 벗기고는

 너의 양사제 옆에 가지런히 눕혀놓지, 하하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죽어간 무예계 인사들에게 보여 주어야겠어.

너희들 남매가 얼마나 풍류를 좋아했는가를 말이야.」

 

  동숙정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와 양사제 간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당신이 아무리 음흉한 계략을 꾸민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의 이목을 속이지는 못해요.」

 

「양몽환이 자나 깨나 심하림과 찰떡 같이 붙어 다녔으니

그가 아직 동남(童男)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안단 말이야.」

 

「흥! 소인의 검은 심보로 군자의 마음을 억측하진 말아요.

양사제는 사람됨이 충후하여 금수만도 못한 당신과는 달라요

도옥이 냉랭한 어조로 대꾸했다

 

「뭐라고 하던 너는 처녀의 몸이 아냐.

너희 사남매가 가지런히 이황산에 누워 있다면

이 천하에서 누가 그걸 믿지 않겠느냐 말이야.

게다가 내가 약간의 소문을 퍼뜨리면……)

 

  동숙정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사람은 말을 한 번 입 밖에 내면 꼭 실천할 사람이다

그렇게 되면 양사제에게 씻을 수 없는 누명을 씌우게 된다.

또한 곤륜파의 명예는 어떻게 되며 그리고 심하림은 나를 얼마나 증오 할 것인가?

하늘이여! 이제 저는 어쩌면 좋겠습니까?」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도옥이

 

「너희 사남매가 누명을 쓰는 것은 고사하고 너의 음혈을 짚이게 되는 날엔

그 고통도 이만저만이 아닐 걸.」

 

하고는 오른 손을 번개같이 올려 동숙정의 음혈 세 곳을 찔렀다.

이 수법은 원래 삼음신니의 권보에 실린 열 세 가지 중의 하나로서

인신요혈의 위치를 기술하여 목숨을 구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 음혈 세 곳을 짚이게 되면 기운이 곧 역전하여 독이 인체 내에 침입하였을 경우

그 독을 밖으로 배제시킬 수 있는 것인데 그러기 전에 먼저 독의 침입을 받은

사람의 요혈 몇 곳을 폐쇄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역전된 기운이 내부에 들어가 요혈을 짚인 사람은

곧 심장이 터지는 듯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며 제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이것만은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동숙정이 요혈을 짚인 처음 얼마 동안은 조금도 괴롭지 않고 도리어 노곤하니

잠이 오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차차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갑자기 내부의 기운이 끓어오르는 동시에

심장으로 침입하여 마치 가슴 속에 수백 마리의 뱀이 뒹굴고 있는 듯

간지럽고 아파 머리를 부딪쳐 죽어 버리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오른손 팔꿈치의 관절을 잡혀 꼼짝 못하고 그냥 땀만 뻘뻘 흘릴 뿐이었다.

  아무리 입술을 꼭 깨물며 참아 보려고 했지만 견딜 수가 없었다.

 

「정말 이렇게 혹독하게 다루긴 가요?」

 

하고 그를 쏘아보자 도옥은 냉소하며

 

「이 수법은 원래 독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서 비단 너 만이 아니라

그 누구라 하더라도 견딜 수 없을 걸.」

 

  동숙정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연거푸 외쳤다.

 

「이젠 알았어요.…… 자 빨리 풀어주세요. 못 견디겠어요.」

 

  그러나 도옥은 태연했다.

 

「풀어주는 건 별로 어렵지 않지

그러나 그 대신 너의 손으로 이구덩이를 메우겠다는 약속을 해라!」

 

  고통이 너무나 극심했던 만큼 동숙정은 드디어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 하겠어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야 도옥은 다시 동숙정의 몸의 세 곳을 손바닥으로 쳐서 요혈을 풀어 주었다

그러나 오른 팔꿈치의 관절을 친 왼손은 여전히 놓지 않고 있었다.

  동숙정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땀방울을 닦았다.

 

「팔꿈치를 빨리 놓아 줘요.

지금 전신의 맥이 빠졌는데 어떻게 이구덩이를 돌로 메우겠어요?」

 

하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나 도옥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구덩이를 메운 뒤에 쉬어도 늦진 않아!

괜히 시간만 끌면 더 큰 고통을 맛볼 줄 알아!」

 

동숙정은 방금 당한 고통을 생각하자 몸이 오싹해졌다.

어쩔 수 없이 몸을 굽히고 천천히 양몽환의 몸 위에 돌을 쌓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매우 느린 동작으로 양몽환의 발끝에서부터 돌을 쌓기 시작하였다.

점점 돌은 양몽환의 발끝에서 다리로 다리에서 다시 허벅다리로 그리고 마침내 아랫배까지

쌓여져 갔다.

동숙정의 심정은 쌓이는 돌과 함께 점점 더 무거워졌다.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 내려 돌과 그녀의 손등 그리고 양몽환의 몸 위에 수없이 떨어졌다.

  그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장탄식과 함께 청아한 음성이 들려왔다.

 

「대 언니! 저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게 참 멋있네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몽환 오빠가 여기 없어서 안됐군요.

저 광경을 보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아! 정말 오빠는 언제나 다시 만나게 될는지……」

 

  동숙정은 가슴이 덜컥 하면서 정신이 바짝 차려졌다.

슬며시 왼 손에다 힘을 준 그녀는 갑자기 옆에 서 있는 도옥을 후려치는 동시

큰소리 로

 

「하림아! 하림사매! 네 오빠는……」

 

하자 순간 도옥이 그녀의 일격을 피하면서 오른 쪽 관절을 으스러지도록 잡으려는 찰나

별안간 일장의 바람이 머리 위에서 일어났다.

도옥이 동숙정을 잡은 채 두어 걸음 비켜 상대방의 일격을 피하고 나서 바라보니

앞에서 있는 사람은 바로 백의소녀 주약란이었다.

주약란은 동숙정의 외침을 듣자 즉각 팔보등공(八步登空)의 경신법을 전개하여

수장이나 되는 곳에서 쏜살같이 뛰어내렸던 것이다.

주약란은 동숙정을 보고 눈살을 약간 찌푸리더니 다시 도옥을 바라보며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흥! 난 또 누구라고? 바로 너였구나!」

 

도옥은 그녀의 무공이 높아 그가 공세를 취하게 되면 당해내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왼 손으로 동숙정의 앞을 가로막는 한편 오른손으로 금환검을 빼어 들어 날쌔게 찔렀다.

그러자 주약란은 슬쩍 피하면서 왼 손으로 도옥의 손목을 후려쳤다.

도옥이 갑자기 몸을 홱 돌리자 동숙정이 그를 따라 돌기 때문에

주약란과 그를 가로막는 꼴이 되었다.

주약란은 냉소하며 갑자기 공세를 집중하여 천강지(天?指)의 수법중에서

타혈법(打穴法)으로 도옥에게 달려들려고 할 때였다.

문득 눈에 뜨인 것은 반쯤 돌에 묻힌 양몽환의 모습이었다.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머리에 구멍이라도 뚫어진 듯 아찔하였다.

그는 눈앞의 강적도 잊고 뛰어 들어가 몸 위에 쌓인 돌들을 한꺼번에 발로 쓸어버리고는

양몽환을 안고 그 구덩이에서 뛰어 나왔다.

이때 하림이 쏜살같이 달려오면서 언니하고 부르다가

그녀의 몸에 안긴 양몽환을 보고는 눈이 둥그레졌다.

한편 도옥은 주약란이 구덩이 안으로 뛰어 들어갈 때

동숙정을 데리고 황급히 도망치고 말았다.

동숙정은 실은 살려 달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도옥이

또다시 요혈을 짚을까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도옥이 그녀의 팔꿈치를 조금도 놓지 않고 달려가는 데는 어쩔 수가 없었다.

주약란은 양몽환을 땅 위엔 조용히 눕히고는 귀를 그의 가슴에 대고 한참 동안 듣더니

그만 얼굴색이 창백해지며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었다.

하림은 양몽환을 보고 나서는 한 마디도 않고 그 커다란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주약란이 양몽환의 병을 알아보는 거동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비록 양몽환의 위급한 상태를 안타까이 여기기는 하지만

주약란의 능력으로 능히 그를 완치시킬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주약란이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언니, 무슨 일이에요? 오빠가 아주 위독한가요.」

 

  그러자 주약란은

 

「응!」

 

하고 대답하고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중상을 입었어, 더구나 그 중상 끝에 어떤 사람의 암격(暗擊)을 당했으니

이젠 구하기 힘들겠어.」

 

  그 말에 하림은 기절할 듯 큰 소리로 외쳤다.

 

「네? 몽환 오빠가 살아나기 힘들겠다고요?」

 

「글에, 아직은 뭐라고 단정할 수 없어.

우선 조용한 곳으로 가서 방법을 강구해 보기로 해야지.」

 

  그러자 하림은 길게 탄식하는 것이었다.

 

「만일 몽환 오빠가 살아나지 못한다면 저도 살아 갈 수 없어요.」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녀의 대답이었다. 

 

  주약란은 하림을 주시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림아, 그가 죽는데 왜 네가 살아갈 수 없다는 거냐?」

 

  하림은 고개를 들어 하늘로 떠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며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오빠가 죽으면 영원히 그를 볼 수 없으니까요.

그 수많은 시간을 오빠 생각으로 보낼 것이며 무예도 배우지 않고 검술을 익히지도 않을 거예요.

정말 고통스러운 나날일 거예요.」

 

하고는 쓸쓸히 웃는 것이었다.

 

「대 언니도 몽환 오빠가 죽으면 역시 저처럼 슬프시겠죠?」 

 

  주약란이 탄식하며

 

「그야 물론 슬프고말고.」

 

「그래도 살아나가긴 할거에요. 저처럼 죽지 않고 말이에요.」

 

「응, 살아야겠어. 살아서 그의 원수를 갚아 줘야지.

그리고 그를 위하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무덤을 만들어 주겠어.

조용하고 편안한 곳에서 잘 수 있도록.」

 


「그래요. 그 곳엔 아름다운 꽃도 있고 많은 새들이 노래를 불러주고……」

 

하더니 갑자기 탄식하며

 

「하지만 오빠가 죽어버리면 아무 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것이 아녜요?

꽃이 피면 무엇하고 새가 울면 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주약란도 쓸쓸히 웃으며 양몽환을 안은 채 걸어 나갔다.

하림은 그녀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그러한 그녀의 표정은 정신이 나간 듯한 표정 이었다.

그때 갑자기 학의 울음소리와 함께 현옥이 백장 이상 되는 곳에서 질풍같이 내려오더니

주약란의 머리 위 다섯 자 가량 되는 곳에서 날개를 퍼덕였다.

그러자 그 날개바람에 두 소녀의 옷자락도 펄럭였다.

주약란은 현옥을 한 번 쳐다보고는 그대로 여전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하림 역시 아무 말 없이 따라 가다가 문득 혼자서 중얼거리듯

 

「몽환 오빠가 정말 죽으면 난 다시 너를 타고 놀 수 없을 거야._」

 

하는 것 이 있다.

 

그러자 명물인 현옥은 주인의 슬픈 마음을 짐작한 듯 서서히 날개를 치면서

그들을 따라 미행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몇 개의 산모퉁이를 돌아 어느 산골파기 입구에 당도해 주약란은

양몽환을 내려놓고 현옥에게 손짓하며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 휘파람 소리는 마치 호소하는 듯한 가락으로 퍼져나T다.

그때 그 소리를 듣자마자 현옥은 갑자기 하늘로 치솟더니

백장이상 되는 곳에서 망을 보듯 빙빙 도는 것이었다.

이 산골 입구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조용하고 아늑한 곳이다.

주약란은 뒤에 따라오는 하림을 돌아보았다.

 

「하림아, 너의 몽환 오빠를 구하기 위해선 수단을 가리지 않겠어. 나를 비웃지는 말아.」

 

  하림이 대 답했다.

 

「몽환 오빠를 구하는 일인데 제가 왜 웃겠어요?」

 

  주약란이 가볍게 탄식하며 양몽환을 품에 안고는 암암리에 진기 집중하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자기 입술을 양몽환의 입술로 가져다.

그러나 갑자기 부끄러운 듯 얼굴이 붉어지더니 안고 있는

양몽환을 놓치려 다가 다시 끌어안았다.

 

하림이 주약란을 자세히 보니 뺨은 불과 같이 빨갛고 두 눈을 감은 채

숨을 가쁜 듯 몰아쉬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녀의 표정은 피곤 한 듯이 보였고 괴로운 듯한 표정이었다.

 

「너무 피곤해요?」

 

하고 하림은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언제나 남자 같이 굳건하던 주약란도 갑자기 수줍은 태도를 여히 나타내며

나직한 음성으로

 

「피곤한 게 아니라 무서워서」

 

「무서워요」

 

하다가 하림은 갑자기 깨달은 듯 가볍게 웃는 것이었다.

 

「아, 몽환 오빠의 입을 맞추는 것을 내가 볼까봐 그러는군요.

그럼 내가 얼굴을 돌려서 보지 않을게요.」

 

하고는 고개를 돌려 턱을 고이고는 먼 곳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러자 주약란은 갑자기 나직한 음성으로 하림을 불렀다.

 

「하림아, 나를 쳐다봐! 할 말이 있어.」

 

  하림은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무슨 말?」

 

  주약란이 부끄러운 듯한 표정으로

 

「하림 사매, 우리 여자가 남자의 살갗에 닿는 것도 옳지 못한 노릇인데

더군다나 입을 맞추다니……

만일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큰일이야.

하지만 내가 이렇게라도 해서 그를 구해내지 않으면 아마 두 식경밖엔 더 살지 못할 거야.」

 

하림이 양몽환의 얼굴을 보니 백합처럼 창백했으므로 그만 다급한 나머지 눈물만을 흘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나직이 애걸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언니, 몽환 오빠가 죽으면 나도 못살아요.

언니가 구해 주지 않으면 나도?」

 

「내가 구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좀 겁이 날 뿐이야.」

 

  하림은 먼 하늘을 바라보며 애원하듯 말했다.

 

「오빠는 언니가 나중에 살려준 것을 아신다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할 거예요.

그리고 우리 세 사람이 매일 같이 함께 살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자 주약란은 양몽환을 바라보고는 결심한 듯 와락 입술을 양몽환의 입술에 대고는

혀로 양몽환의 입을 벌렸다.

그리고는 자기의 뜨거운 진기를 가만히 양몽환의 입으로 주입시키는 것이었다.

과연 양몽환은 주약란의 진기로 도움을 받아 얼마 후에 깨어날 수 있었다.

양몽환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기가 주약란의 품속에 안겨 있지 않는가?

벌떡 몸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기운이 없어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주약란은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 두 팔에 힘을 주어 더욱 바짝 안으면서 부끄러운 듯이 웃었다.

 

「가만히 누워 말도 하지 말고 움직이지도 마세요.

내가 기경팔맥을 유통시키고 난 다음에 이야기해요.」

 

양몽환은 감격한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하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하림은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 고개를 흔들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몽환 오빠! 할 말이 많은 줄은 알지만 언니가 말하지 말래요.」

 

  양몽환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주약란은 양몽환이 자기의 원기에 힘입어 한 가닥 남은 숨을 돌리고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보자 다시 암암리에 공력을 운행하였다.

그녀는 지금 그의 기경팔맥을 유통시키지 않으면 잠시 후

그가 다시 혼수상태에 빠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하림에게 설명해 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재빨리 양몽환을 눕히고는 지풍(指風)을 일으켜 양몽환의 기경팔맥을

가볍게 주무르자 양몽환은 그녀의 손의 움직임에 따라 숨을 쉬었다

그러나 횟수가 더해짐에 따라 주약란의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 쏟아지며

숨소리도 점차 높아졌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는 이윽고 손을 멈추고는 눈을 감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주약란이 그의 기경을 유통시키고 나자

곧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벌떡 일어나 앉아 주약란을 바라보니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져 있으며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하림이 수건을 꺼내어 천천히 주약란에게 다가가 땀을 밖아 주었다.

양몽환은 멍하니 옆에서 꽃과 같은 두 소녀를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미안한 생각과 슬픈 생각 그리고 애정 같은 것이 뒤얽힌 야릇한 심정이

그의 가슴을 흔들어 놓는 것이었다.

그는 갑자기 주약란이 만일 여자가 아니고 남자였다면

하림 사매와 얼마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와 같은 재간이라면 하림을 능히 보호 할 수 있고

또 즐겁게 하여줄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이윽고 그는 무슨 생각에서였던지 갑자기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자 하림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오빠! 왜 웃어요?」

 

  양몽환이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다시 또 한번 놀란 하림은

 

「오빠! 나와 언니를 몰라보세요?」

 

하고 황급히 몸을 날려 그를 가로 막았다.

그리고 눈물을 가득히 띄우고 애처로운 어조로 말했다.

 

「몽환 오빠! 왜 우리를 못 본 척 하시죠?」

 

  그러나 양몽환은 눈을 두어 번 껌벅이고 냉랭히 그녀를 쏘아 보고는

여전히 앞으로 걸어 나가는 것이었다.

 

하림은 당황한 나머지 두 팔로 양몽환을 얼싸안고 머리를 양몽환의

가슴에 파묻으며 흐느꼈다.

 

「오빠! 그토록 오빠를 보고 싶어 했는데 왜 본체만체 하세요?」

 

  그러자 갑자기 주약란이 탄식하듯 말했다.

 

「하림아, 울지 마라. 그이는 지금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있는 거야.」

 

「네? 그럼 미쳤어요?」

 

「아니 어떤 사람의 음흉한 수법으로 내장과 천영혈이 상하여 착란을 일으킨 거야.

우선 우리들이 쉴만한 곳을 찾아서 조용히 정양하도록 하면 돼지.

그리고 어떤 수법에 의해 해를 입었는지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양몽환은 민첩한 주약란에 의해 기경팔맥이 유통되기는 했지만

그의 내부의 상처가 너무나 심하여 조금도 호전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신의 기운이 다해 하림에 안긴 채 꼼짝도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주약란은 손을 들어 양몽환의 혈도를 가볍게 짚으며 하림을 돌아보았다.

 

「하림아, 빨리 바람이라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자.」

 

하고는 앞서 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산을 넘고 또 넘어 석양빛이 붉게 물들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갑자기 하림이 걸음을 멈추며

 

「언니, 이젠 더 갈 필요가 없어요.」

 

  주약란은 고개를 돌려 하림을 바라보았다.

 

  산들바람이 불어와? 하림의 흰 옷자락과 흐트러진 머리를 휘날렸다.

  그리고 그녀는 평화로운 웃음을 띤 채 저물어가는 노을빛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머지않아 해가 질 거예요.

저 해는 서산을 넘어갈 때 언제나 아름다운 노을을 수놓고 있을 거예요.」

 

  순간, 주약란의 가슴이 선뜩했다.

 

「아니, 하림아! 너는……」

 

  하림은 웃음을 담뿍 머금고 자신 있게

 

「하지만 몽환 오빠는 결코 죽지 않을 거예요.」

 

  주약란은 내심으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하루 종일 걸어오는 동안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치료법을

자세히 되씹어 보았으나 이제 어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사흘을 넘기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었기 때문이다.

중상을 입은 몸에다 악랄한 수법으로 체내의 맥혈을 상하였으니

거의 가망이 없는 것이라고 단정했던 것이다.

아무리 그녀가 원기의 소모를 각오하고 열두 식경마다

그의 기경팔맥을 주물러 준다 하더라도 상처 입은 맥혈의 악화를 저지 시킬 수는 없다.

겨우 며칠 간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을 뿐이었다.

 

주약란이 잠자코 있는 것을 보자 하림은 쓸쓸하게 웃으며

 

「몽환 오빠가 정말 죽는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남길 말이 있을 거예요.

마치 저 넘어가는 해와 같이 한동안은 평화롭고 밝은 정신을 되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러자 주약란이 울먹이며 말했다.

 

「하림아, 하지만 그이는 아마 살아나지 못할 거야.」

 

  그러자 갑자기 하림의 천진난만한 얼굴에 기이한 표정이 일어났다.

 

「대(黛) 언니,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 주시겠어요?」

 

하는 것이었다.

 

「말해 봐. 이 언니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결코 너에게 실망은 주지 않겠어.」

 

「만일 몽환 오빠가 죽으면 훌륭한 무덤을 만들어 주시겠지요?」

 

「그럼 훌륭한 무덤 뿐 아니라 하늘 땅 끝까지 그를 죽인 자를 찾아내서 복수할 거야.」

 

  그러자 하림은 다시 쓸쓸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내가 들어가 살 수 있도록 그 무덤을 커다랗게 만들어 주실래요?」

 

「아니, 너…… 너도 같이 그 무덤에 들어가겠다는 거냐?」

 

하고 주약란이 놀라 묻는 말에 하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빠와 같이 있으면서 보살펴 주려고요.」

 

  주약란은 한숨을 가볍게 쉬었다.

 

「하림아, 쓸데없는 생각일랑 말고 빨리 가자!

날이 어둡기 전에 조용한 곳을 찾아야지.」

 

하고는 하림을 이끌고 앞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이 다시 몇 개의 모퉁이를 돌아가자 날은 어두워 졌다.

주약란이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살펴보니

서 쪽 산기슭에 몇 채의 초가 같은 것이 보였다.

주약란은 하림의 손을 잡고 달려갔다.

가서보니 과연 산을 등에 지고 한 채의 초가집이 있었다.

그것은 초가이긴 했지만 규모 있게 세운 집으로서

본 채와 아래채가 ㄷ자 모양으로 꾸며져 칠팔 개의 방이 있었다.

문 앞에는 대나무를 심고 마당에는 수양버들이 서 있다.

사립문이 반쯤 열려 있는데 가운데의 본채에서 등불 빛이 새어 나오고 있을 뿐

다른 방은 캄캄했다.

주약란이 자세히 주위를 살펴보니

그 초가집의 뒷산이 반원형으로 그 집을 둘러싸고 있는데 가운데는 평활(平闊)하고

그 양단은 툭 튀어 나온 것이 마치 한 마리의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주약란은 속으로 와호지지(臥虎之地)라고 감탄하는 한편

그 집주인이 보통 인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중년의 선비 한 사람이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그 선비는 삼십 세 가량 되어 보였고 머리에는 유건(儒巾)을 쓰고

몸에는 남색 도포를 걸치고 점잖게 웃음을 띠면서 나왔다.

그는 주약란을 한번 보더니 약간 놀란 얼굴을 지었으나

곧 냉정을 되찾고 하림을 쳐다본다.

그리고 허공에서 날고 있는 현옥을 한 번 쳐다보더니

그제야 두 손을 모아 허리를 굽히며

 

「두 분은 숙소를 찾는 길입니까?」

 

하고 물었다.

 

주약란은 급히 반례하며

 

「예, 우리들은 풍경에 몰두되어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하자 중년 선비가 빙긋 웃으며

 

「그 백의 소저의 몸에 안기신 분은 상처를 입으셨나요?」

 

  주약란은 약간 얼굴이 뜨거워져 무어라고 대답을 못하자 하림이 입을 열었다.

 

「그래요, 저의 오빠는 많이 다쳤어요.」

 

  그러자 주약란이 그 말을 가로막듯

 

「옛날에 원한을 맺은 사람들과 부딪치게 되어 상처를 입었는데

상처가 너무 중해 밤길을 가지 못하고……」

 

하자,

 

중년 선비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두 분이 나의 초려(草廬)에 머물러 사형의 상처를 치료하시겠다면 어서 들어 오십시요.

다만 빈한한 산중이라 대접할 것이 없어 안됐습니다.」

 

  그러나 주약란은 슬며시 그를 경계했다.

왜냐하면 그 선비의 풍채가 심상치 않으며 분명히 내공에 깊은 수련을 밖은 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번이나 그녀의 얼굴에 그의 눈초리가 머무는 것으로 보아 이미 자기의 본색을

 알아본 모양이지만 언사에는 조금도 그런 내색을 비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림은 그런 눈치를 모르고 태연히 초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중년 선비는 왼쪽 객실에 그들을 안내하고 나서 웃으며

 

「두 분께서는 들어가져서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가서 등불을 갖고 오겠습니다.」

 

하고 물러갔다.

이때 주약란이 하림에게

 

「하림아, 이 사람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놓아서는 안 돼.

절대로 사실대로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거야.」

 

하고 일러 주었다.

 

얼마 후,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고 그 선비가 들어오면서 방 한 구석에 있는 탁자 위에 등불을 놓았다.

그러자 세 칸 정도의 방안이 환히 밝아졌다.

창가에는 소나무 탁자 말고도 네 개의 대나무 의자와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고

그 침대 위에는 이불이 정연하게 개어져 있는데 커다란 방에 장서(藏書)라고는 전혀 없어

썰렁한 느낌마저 주었다.

그러나 방안은 깨끗이 청소되어있었다.

 

하림은 침대에 양몽환을 눕히더니 신발을 벗기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러나 선비는 주약란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를 맡았는지

차출 그녀의 옆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주약란은 그것을 눈치 채고 재빨리 두 걸음 물러나자

그 선비는 씩 웃고는 몸을 돌이켜 침대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자세히 양몽환을 살펴보고는 고개를 흔들며

 

「음, 이 분의 상처는 너무 깊어서 살릴 수가 없겠습니다.」

 

하고는 하림을 바라보다가 다시 주약란의 몸으로 눈길을 던지는 것이었다.

주약란은 비록 총명한 여인이었지만 이때 양몽환의 병세가 새삼스럽게 근심스러워

가늘게 한숨을 쉬며 눈물을 흘렸다.

그때 중년 선비가 담담하게 웃으며

 

「이 분의 상처가 비록 길긴 하지만 전혀 영약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고는 입을 꼭 다무는데 그것은 아니 할 말을 했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하림이 그 말을 듣자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럼 그게 어떤 약이에요?」

 

  그러나 중년 선비는 하림을 주시할 뿐 아무 대답도 않는다.

 

  주약란이 침대 옆으로 다가가 하림과 나란히 서서 말했다.

 

「귀공께서 이제 말씀하신 것은 혹시 기련산 대각사의 설삼과(雪參菓)가 아닙니까?」

 

  중년 선비는 한참 주저하더니 갑자기 낭랑히 웃었다.

 

「약은 죽지 않을 병을 고치고 부처님은 인연 있는 사람을 인도하는 법,

이 분의 목숨이 다 했는데 어찌 인력으로 만회할 수 있겠소?」

 

  갑자기 말꼬리를 돌리자 주약란은 슬며시 화가 났으나

문득 느껴진 바가 있어 가볍게 웃으며 응대했다.

 

「그렇다고만 말할 순 없죠.

우리 사형의 상처가 위중하긴 하지만 전혀 가망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그러자 중년 선비는 가만히 웃으며 대답하지 않고 방을 나가버리고 말았다.

  주약란이 문을 꼭 잡고 가만히 방안을 둘러보니

어쩐지 어떤 이상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고사(高士)가 은거하는 곳도 아니요,

그렇다고 보통 녹림(綠林)인물들이 모이는 곳도 아니다.

또 그 중년 선비는 강호의 좀도둑 같지도 않지만 그 태도와 표정이 수시로 변하니

좀 체로 짐작할 수가 없었다.

때로는 낭랑한 웃음으로 선량한 인사의 모습을 나타내는가 하면

때로는 눈빛이 흐려지며 말꼬리를 감추니 더욱 괴이하기만 했다.

그녀는 한참동안 생각해 보았으나 여전히 의심이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하림에게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초가집의 풍경이 아무래도 이상하군.

방의 꾸민 모양으로 보아서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중년 선비 이외는 아무도 보이지 않으니 실로 알쏭달쏭하단 말이야.

평소와 같으면 샅샅이 뒤져 보기라도 하겠는데 몽환 사형이 중상을 입고 누워 있으니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를 돌볼 수가 없어 그것도 안 되겠고……

여하간 이 집에서 주는 물과 음식은 절대로 대지 말고 있다가

사형의 병세가 호전되는 대로 다시 행동을 취하기로 하자.」

 

  하림은 주약란이 이처럼 엄숙하게 말하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그래서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언니 말대로 하겠어요.」

 

  주약란은 방긋 웃으며 등불을 끄고는 하림과 같이 침대 위에 누웠다.

  두 사람은 모두 처음으로 남자와 한 침대에 눕는 것이었으나 저마다 그 심정이 달랐다.

하림은 조금도 부끄러운 감이 없이 옷을 입은 채로 양몽환의 옆에 누울 수 있었다.

그리고 어두운 천정만 쏘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주약란은 웬 일인지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의 청백한 몸이 이렇듯 남자와 한 침대에 들게 되었으니

비록 하림이 옆에 있고 양몽환이 중태에 빠져 정신을 잃고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결국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 했다.

그러나 그때 그녀의 뇌리에 번개같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즉 그것은 양몽환이 며칠이 지나면 죽어버릴 몸이라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경우 그 무엇을 꺼리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양몽환의 몸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몸을 꼭 양몽환의 몸에 갖다 대면서 거의 앞에 있는 하림의 존재마저 잊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문밖에서 다급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가만히, 가만히……」

 

하는 중년 선비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다음 말은 너무 작아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달콤한 꿈에 잠겨 있던 주약란이 깜짝 놀라 일어나자 하림도 일어났다.

그리고 무어라고 입을 열려는 것을 주약란이 막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수상한 사람들이 온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사형을 지키고 있어.

내가 나가보고 곧 돌아오겠어.」

 

하고 소곤거리자 하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장검을 뽑아 들고 살며시

침대 밑으로 내려가 신발을 찾아 신었다.

 

그러자 주약란은 다시 말을 이었다.

 

「하림 사매, 밖에서 아무리 싸우더라도 내가 사매를 부르기 전에는 절대로 나오지 말아야 돼.」

 

하고는 조용히 창가로 다가가서는 소리 없이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창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수십 년 묵은 소나무가 있었다.

높이가 약 이장(二丈)이나 되는데 밤하늘에서 시꺼먼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주약란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곧 그 소나무 위로 몸을 날렸다.

그녀는 그 증년 선비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내외 공력이 만만찮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만큼

조심스럽게 나무 위로 달려간 것이다.

그 나무의 뿌리로부터 가지가 뻗은 곳까지는 약 오장(五丈)쯤 되었다.

절묘한 경신술에 대한 조예가 없다면 결코 단번에 뛰어 오를 높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두어 번 쳐다보고 나서 자신의 재간이면 능히 뛰어오를 수 있다고 단정하고

곧 단전(丹田)에 진기를 돋우어 힘껏 뛰어 올라 왼손으로 가지를 붙잡고는 가볍게 올라섰다.

그러자 갑자기 일장 이상이나 되는 거리의 나물가지 사이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비록 작은 소리였지만 그것은 매우 음침한 소리였다.

순간 주약란은 소스라치듯 놀랐다.

분명히 사람의 소리였다.

그러나 숨을 죽인 채 암암리에 공력을 집중하고 경계했다.

그러나 그 기괴한 웃음소리는 다시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상당히 오랜 시간을 기다려 보았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에 도리어

궁금하게 여긴 주약란은 그 웃음소리가 나던 곳으로 가보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경거망동은 말아.

너는 이미 나의 음린뇌화전(陰燐雷火箭)과 칠보추혼사(七步追魂砂)란

두 종류 암기의 목표가 되어 있으니 고분고분 이리로 오너라. 물어볼 말이 있다.」

 

그 어조는 아이를 달래듯 하는 것이었고 음성은 싸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주약란은 이미 경계를 하고 있던 만큼 소리 나는 곳을 정화하게 포착하고

일격을 가하려고 했다.

그러나 양몽환이 다죽어가는 때다.

그리고 초가집에 대한 궁금증도 있어,

상대방이 아까 그 선비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인지나 알아 두고 싶어 일격을 멈추었다.

그녀는 나직한 음성으로

 

「누구요? 나를 만나고 싶다면서 왜 그렇게 숨고만 계시오?」

 

하고 소리치는 한편 눈을 똑바로 뜨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곳은 너무나 나뭇잎이 우거진데다 밤중이라

사람의 그림자만 어렴풋이 보일 뿐 어떤 사람인지 분간할 수도 없었다.

 

잠시 후 그 쪽에서 다시 냉랭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이 소나무 위에 뛰어 오르는 재간이 볼만하기에 특별히 생각해서 만나자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넌 이미 나의 칠보추혼사에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상대방의 어조가 점차 더욱 불손하여 지자 그녀는 화가 났다.

그러나 초가집의 중년 선비에게 알려지면 하림을 보호할 수 없으므로 억지로 화를 억제하며

 

「굳이 그렇다면 한 번 만나보죠.」

 

하고는 오른 손으로 나뭇가지를 헤치며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과연 상대방은 다가오지는 않았다.

우거진 잎들과 석자 가량의 거리를 남겨 두고는 두 손으로 나뭇잎과 가지를 헤치고 있던

그녀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그 나뭇가지 위에 흰 머리카락을 흐트러진 채 어떤 한 여인이 앉아 있는데

그 얼굴 생김이 너무나 추괴(醜怪)하여 벌렸던 입이 다물어지지도 않았다.

입술은 특 뒤집어지듯 생긴데다가 코는 말 안장코, 눈은 사팔뜨기인데다

눈썹은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그리고 두 뺨에는 아주 보기 흉한 흉터가 있었다.

더구나 그녀의 손에는 피륙 장갑을 끼고 모래를 잔뜩 움켜쥐고 있으며

왼손 세 손가락에는 다섯 치 정도의 화살이 끼워져 있는 것이었다.

잠시 후 그녀는 주약란을 두어 번 쳐다보더니

갑자기 장탄식을 하며 오른 손의 모래를 뒤에 차고 있는 가죽 주머니 안에다 넣고

다시 왼손의 화살 모양의 것도 역시 다른 가죽주머니에 넣는 것이었다.

주약란이 겨우 제 정신으로 돌아오자 그 괴여인은 옆의 나뭇가지를 가리키며

 

「자, 여기 앉아라, 물어볼 말이 있으니.」

 

하였다.

 

주약란은 어쩔 수 없이 그가 가리키는 곳에 앉았다.

그러자 그녀는 오른 손의 가죽장갑을 벗었다.

그 손은 매끈하고 옥과 같이 희였다.

무서운 얼굴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손이었다.

괴여인은 몸을 돌려 앉으면서 나뭇잎을 헤치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주약란도 따라 고개를 내밀었다가 흠칫하고 놀랐다.

실은 이 괴여인이 선택한 곳은 바로 그 아래 초가집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곳인데

그곳 사람들의 일거일동을 모조리 포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이 초가집에 투숙하던 일,

그녀가 창문으로 빠져나오던 광경이 모두 이 괴여인에 포착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괴여인은 한동안 내려다보다가 손을 놓고 고개를 돌려 다시 주약란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입을 벌리고 실쭉 웃었다.

 

「아까 경신법 재간을 보니 만만찮은 솜씨더군.

어린 나이에 그런 재간을 배우다니, 퍽 어려운 일이지.

도대체 아가씨 스승은 누구냐?」

 

  그 말을 듣자 주약란은 멈칫하여 다시 자기 복장을 살폈다.

그러자 그 괴여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는 네가 남복을 하였다고 다른 사람이 여인인줄 몰라 볼 것이라 생각하지만,

흥! 사실 조금만 주의하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거야.

더구나 너의 그 밝고 청아한 목소리는 조금도 남자와 같지 않거든.

아마 강호에 경험이 없는 젖내 나는 사내 녀석에겐 통할지 모르지만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어.

더구나 철검서생(鐵劍書生)의 눈을 속일 수는 없을 거야.」

 

  그 말에 주약란은 약간 놀라긴 하였으나 곧 진정하고 물었다.

 

「철검서생이라니? 그 분이 누구에요?」

 

  괴여인은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건 바로 저 초가집 주인이지.

너희들을 맞아들인 백면서생 말이야.

점잖고 솔직하여 철검서생이란 넉자가 합당하다고 생각지 않아?

그 역시 무공이 강할 뿐 아니라 정말 밝은 학문을 밖은 건 사실이지……」

 

  주약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하자 갑자기 그 괴여인이 눈을 번들거리며 말을 이었다.

 

「뭐가 그래?

흥! 얼핏 보기에는 점잖고 공부 많이 한 사람 같다고 해서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선 안 될걸.

사실은 그는 그 누구보다도 악독하단 말이야.

그리고 남보다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그만큼 계교도 뛰어 나거든.」

 

하고 말을 뚝 그치더니 입술을 깨무는 것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표정이었다.

  주약란이 강호에 발을 들여 놓은 지는 겨우 이년 정도이다.

또 그 무대는 대개 산수가 수려한 강남 지역이었기 때문에 철검서생과 이 괴여인 간의

은원 관계를 모르는 주약란은 무슨 원한 관계가 있구나하는 생각만이 들뿐이었다.

 

  그때 다시 괴여인이 흉물스럽게 웃었다.

 

「그러니까 이미 이십년 전의 일이다.

철검서생이 강호에 이름을 날릴 때엔 너는 아마 갓난아기였을 거야.

그 사람을 모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하더니 휴우 한숨을 내 쉬고 밤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이었다.

아마도 매우 괴로운 생각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주약란이었지만 지금의 경우에는

누가 적이고 누가 자기편 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괴여인의 말에는 분명히 철검서생에 대한 원한이 나타나 있지만

그러나 그들 간에 어떠한 깊은 관계가 있었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주약란은 그런 것을 세심하게생각해 볼 여유조차도 없었다.

 

그녀가 지금 염려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양몽환의 병세이고

그 다음에는 이 괴여인과 한편이 되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철점서생의 편에 서야

하는지의 결정인 것이다.

그때 문득 그녀에게 적당히 대답할 말이 생각났다.

 

「선배님이 저를 부르신 것은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자는 것뿐인가요?」 

 

  그 흉물스런 여인은 그때까지 지난날의 일에 잠겨 있다가 주약란의 말에

고개를 돌리고 섬섬옥수로 자기 얼굴의 흉터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철검서생이란 자가 마음이 악독한 자일뿐 아니라

여색을 밥 먹듯 좋아한다는 거야.」 

 

  최후에 한마디는 주약란의 마음을 대번에 뒤흔들어 놓았다.

 

「뭐라고요?」

 

괴여인은 싸늘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는 여색을 굉장히 좋아하는 색마야. 흥! 나도 바로 그의 손에 이 꼴이 되었거든」

 

  주약란은 문득 다시 한번 나뭇가지와 잎들을 헤치고 초가집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아무 이상이 없는 듯하자 마음을 놓으며 그 괴여인을 향해 물었다.

 

「그럼, 여기서 숨어 있는 것은 기회를 엿보아 원한을 갚자는 건가요?」

 

「흥! 내 원한을 풀기 위해 그를 해치우기만 할 바엔 여기 이렇게 숨어서

밤이슬을 맞아가며 있을 필요도 없지.」

 

「그럼?」

 

  괴여인은 주약란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바라보며 엄숙한 어조로

 

「내가 무엇을 하겠느냐고 묻기 전에 네가 나를 도와주겠느냐 하는 문제부터 듣고 싶은데.」

 

  순간 주약란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어떤 일인지 알아야 대답을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괴여인은 약간 노기를 띠웠다.

 

「이 와호령(臥虎嶺)에는 무예계에서 진기하게 여기는 두 가지 무술이 있기 때문에

철점서생이 초가를 짓고 십오 년이나 살아 왔지.

그 목적은 두 가지 진기한 물건을 남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감시하자는 거야.」

 

  주약란의 마음이 약간 움직였으나 일부러 담담한 태도로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어떤 진기한 물건이기에 철검서생이 십오 년이란 세월을 지키도록 했을까요?

그리고 선배님은 무슨 일로 밤이슬을 맞아가며 이소나무에 숨어 있게 한 걸까요?」

 

  그러나 괴여인은 주약란의 물음을 묵살했다.

 

「두 가지 물건은 모두 희세의 보물인데 이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만일 네가 응낙한다면 그 상세한 내용을 가르쳐 주지.

그러나 돕고 싶지 않다면 강요하지는 않겠어.」

 

「우선 무슨 물건인지 그 두 가지 진기한 물건의 이름부터 얘기해주세요.

그래야만 내가 생각해보고 응낙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잖아요?」

 

  괴여인은 웃으며

 

「돕든지 말든지 그건 마음대로 해!

흥! 이 삼수나찰(三手羅刹)은 남에게 도움을 청할 사람은 아니야!」

 

  주약란의 얼굴빛이 약간 변했다.

 

「청하지 않은 것은 내가 꼭 도와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하고는 몸을 홱 돌이켜 삼수나찰이라고 자칭하는 괴여인과 일장 이상이나

거리를 둔 자세로 건너갔다.

 

두 여인은 서로 멀리에서 바라보며 서로가 말을 건네려 하지 않았다.

그때 돌연 냉랭한 웃음소리가 초가집에서 들려왔다.

주약란은 갑자기 삼수나찰이라는 괴여인이 그 철검서생이라는

자가 미색을 탐한다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하림은 꽃과 같이 아름답지만 조금도 속세의 홍진을 모르는데

혹시 철검서생이 하림에게 마수를 뻗친다면 결코 그녀는

그것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곧 무성한 잎과 나뭇가지를 헤치고는 선학희수(仙鶴戱手)의 수법으로

직선을 그으며 땅 위로 내려 뛰었다.

거의 땅에 닿으려 할 무렵 재주를 한번 발휘하여 가볍게 땅 위에 내려섰다가

다시 몸을 날려 자기가 나오던 창가에 이르렀다.

그녀는 근심스러운 나머지 생각해볼 여유도 없이 갑자기 창문을 열고는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순간, 번쩍! 하며 탁자 위의 등잔에 불이 꺼졌다.

그리고 중년 선비가 그 탁자 옆에 서서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손에는 불씨(火擢子)를 든 채 주약란이 침대로 눈을 돌리자

이불이 흩어져 있을 뿐 양몽환과 하림의 종적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그때 중년 선비는 불씨를 천천히 끄면서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의 신법이 굉장하시던데 실례지만 어느 스승의 문하시오?」

 

주약란이 양몽환과 하림이 실종된 것을 발견했을 때에는 사실 크게 놀랐지만

정신을 가다듬자 도리어 치솟는 화를 억제할 수 있었다.

 

「당신이 바로 철검서생이요?」

 

  중년의 선비는 약간 놀라는 듯 하더니

 

「그렇소, 당신! 당신은 누구요?」

「내가 누구인지는 알 필요가 없소.

그 보다 먼저 나의 사형과 사매를 어떻게 하였는지 대답하시오.」

 

하고는 공력을 운집하여 만일의 경우에는 손을 쓰려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자 철검서생은 냉정을 되찾았는지 냉랭히 웃으며

 

「그들은 안전한 처소에 옮겨졌소. 조금도 염려할 것은 없어요!

이 사천경(史天敬)은 결코 중태에 빠진 사람과 젊은 처녀에게는 손대지 않소.

못 믿으시겠다면 나를 따라가 보시지요.」

 

  주약란은 그의 말이 거짓말 같지 않아 잠깐 주저했다.

그러나 조금 전에 소나무 위에서 들은 말이 있으므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만일 삼수나찰에게 들은 말이 없었다면 역시 그의 음모에 넘어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철검서생은 주약란이 믿지 않는 듯한 태도를 알아채자

 

「만일 오늘 저녁에 사고가 발생할 줄 알았다면 결코 세 분을 유숙시키지는 않았을 것이오.」

 

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에게 한 분의 의형(義兄)이 있소.

그런데 그 분이 조금 전에 달려와 말하기를 예전에 나와 원한 관계를 가졌던 자들이

우리가 은거하고 있는 이곳을 탐지해 내어 오늘 저녁이 아니면

내일 정오까지 습격해 올 것이라고 전하더군요.

그렇게 되면 어차피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게 될 것 같아서 당신의 사형이라는

그 분과 아가씨를 보호하기위해 은밀한 곳으로 모셔 둔거요.

그 자들은 워낙 유명한 고수들로서 무공이 강할 뿐 아니라 악랄하기 이를 데 없는

암기를 지니고 있다 하오.

 아무래도 안심할 수 없어 보호조치를 한 것이니 결코 오해는 하지 말아 주시오.」

 

  정말 그럴듯하고 빈틈이 없는 말이다.

주약란은 차츰 반신반의하기 시작했다.

만일 들은 말이 없었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그를 따라나설 것이었으나 이미 삼수나찰의 한마디에 선입관이

꽉 박혀 있으므로 좀 체로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

 

「원수가 보복하러 온다고요?

그건 모두 거짓말이에요.

당신네들이 여기 와호령(臥虎嶺)에 은거하고 있는 것은

무예계에서 진기하게 여기는 보물 때문이오. 그렇죠?」

  그 말을 듣자 철검서생의 얼굴은 단번에 홱 변했다.

그리고 갑자기 날카롭게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빨리 말해!」

 

하고 외쳤다.

그 모양을 보고 주약란은 더욱 삼수나찰의 말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눈썹을 곤두세웠다.

 

「당신은 내 성명을 물을 자격도 없소.」

 

하자 그때 갑자기 멀리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미풍이 산들거리며 등잔불이 어두워져 꺼질듯이 깜박깜박 하더니 밝아졌다.

그리고는 장삼을 걸친 노인이 천천히 들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기절할 듯 놀란 주약란은

 

「흥! 몇 사람이나 되는지 한꺼번에 나타나시지!」

 

  그때 또 휘파람 소리가 바로 초가 옆에서 들려왔다.

철검서생이 훅하고 입김으로 불을 끄자 방안은 갑자기 어두워졌다.

주약란은 그가 어둠 속을 틈타 도망칠까봐

곧 앞으로 달려 나가며 왼손으로 장풍을 일으켜 후려 갈겼다.

바로 그때 밖에서 기합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싸늘한 빛을 발하는 물체가

창문을 뚫고 날아 들어왔다.

철검서생은 마침 그 창문에 등을 돌리고 있다가 주약란이 일장을 갈기자

그는 재빨리 그것을 피했었는데,

그때 철검서생의 등을 노리고 날아온 암기가 곧장 주약란의 앞으로 날아들었던 것이다.

그 순간, 주약란은 철검서생을 후려치던 손을 뻗어 날아드는 물체를 잡았다.

그러자 철검서생이 낭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멋진 수법이오. 멋진 수법……」

 

하고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그의 몸은 밖에 나가 있었다.

그러자 주약란도 몸을 날려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막 문턱에 이르렀을 때 또 다시 한 자루의 금빛 물체가 번쩍하고 날아왔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도 던진 사람의 경고도 없었다.

만일 주약란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틀림없이

그것에 맞아 상처를 입게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본래 철검서생을 쫓을 생각이었던 만큼 상대방이 목적을 가리지 않고

연거푸 악랄한 수법으로 대적해 오자 그만 그녀도 화가 났다.

첫 번째는 철검서생을 노리고 던진 것이 분명하니까 양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두 번째만은 분명히 자기를 향하여 던진 것인데 다가

또한 그 암기가 악독한 부용금침(芙容金針)이기에 화가 났던 것이다.

만일 호신(護身)의 강기(?氣)를 발동하여 먼저 방비하지 않았더라면

소리 없는 그 암기에 틀림없이 변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녀는 날아오는 금침을 떨어뜨리고는 곧 철검서생을 쫓지 않고

마치 방관자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그때 약 육칠 척 앞에 경장한 세장정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는

손에 모두 무기를 든 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철검서생과 조금 전에 방안에 나타났던 노인은

적수공권으로 여전히 그들을 대하고 서 있었다.

상대방은 모두 사십이 넘는 사람들로서

그 중 가운데의 한 사람은 한 쌍의 지네 갈고리를 들었는데

별빛 아래 파란 광채가 도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독을 묻혀둔 것이었다.

쌍방은 서로 태세를 갖추고 마주 볼 뿐 말도 않고 먼저 싸우려고 하지도 않았다.

주약란은 그것을 보자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저토록 서로 대치한 채 꼼짝도 않고 있으니 참을성도 많구나 하고 생각하며

곧 몸을 날려 철검서생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녀의 동작은 재빠름이 질풍과 같았다.

철검서생이 그것을 알고 얼굴을 돌렸을 때에는 이미 주약란이

그에게 달려가 손목을 움켜쥐려고 하는 찰나였다.

그러나 철검서생도 암암리에 진기를 모으고 있었으므로 주약란이 질풍같이 달려갔지만

솜씨 있게 빠져나갔다.

그리고 왼 손으로 주약란의 일격을 막고서

 

「빨리 손을 멈추시오.

눈앞의 적을 물리친 후에 그들에게로 안내하리다.」

 

하고 외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약란은

 

「가려거든 지금 갑시다. 당신의 말을 어떻게 믿겠소!」

 

하면서 두 손으로 네 번이나 공격을 가했다.

이 네 수의 공격은 맹렬하기 그지없는 것으로서 철검서생이 비록

그녀의 내공이 깊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듯 기이할 줄은 몰랐었다.

네 수의 공격은 마치 일제히 가한 것 같아 도저히 막아낼 수 없음을 깨달은

철검서생은 뒤로 황망히 피할1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주약란은 눈썹을 올리고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며 왼손으로 휙 하고

낭타초암(浪打礁岩)의 한 수를 발휘하여 철검서생의 퇴로를 막는 한편

오른 손으로 운소오악(雲笑五嶽)법으로 머리를 내려쳤다.

  철검서생은 강호에 종횡한지 이미 수십 년이나 되어

수많은 고수들과 싸워본 일이 있었지만 주약란과 같은 적수는 처음이었다.

그녀의 일격은 날카로워 막아낼 수 없을 뿐 아니라 몇 가지 아주 다른 기운이

일제히 뻗쳐 나와 전후 상하(前後上下)를 압박해 들어오므로 마치 잠력(潛力)에 갇힌 듯

위에서 내려치는 일장을 곧바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장삼을 걸친 노인은 처음 주약란이 철검서생에게 달려들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였으나 그녀가 잠깐 사이에 철검서생을 물리치는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이렇게 놀라고 있는 순간에 철검서생은 마침 주약란의 운소오악이란

한수의 장풍에 휩싸이고 있었다.

다행히 그는 공격을 운집하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철검서생이 위험 속에 빠지자

곧 휘파람을 불며 몸을 훌쩍 날려 주약란의 등 뒤로 달려가면서 두 손으로

산이라도 무너뜨릴 듯한 손바람을 일으켜 주약란의 뒷등을 후려쳤다.

그는 이 일격에 혼신의 공력을 집중시켰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주약란의 무공이 비상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 눈앞에는 강적이 도사리고 있으니 우선 한 사람이라도

먼저 제거해 버려야 하겠기 때문에 혼신의 공격으로 주약란이

방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 단 일격으로 없애버릴 작정이었다.

이 노인이 장풍을 갈기는 순간,

철검서생 역시 전신의 공격을 집중하여 주약란의 일장을 막아 보려고 앞으로 나갔다.

그러나 주약란이 운소오악으로 후려치는 순간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다.

만일 그녀의 일장으로 철검서생을 죽이게 된다면 양몽환과 하림의 행방을

알 수 없으므로 그녀는 돌연 후려친 내공력을 거두어 들였다.

이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그 노인의 장풍이 이미 등 뒤로 맹렬히 부딪쳐 왔을 때

철검서생의 반격으로 후려친 장풍은 앞으로 달려갔으니

억센 두 장풍이 앞뒤로 한꺼번에 공격해온 셈이었다.

그러자 주약란은 거두어 들였던 두 손을 갑자기 전후로 벌려 두 고수의 공격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 노인은 이것을 보자 코웃음을 치며 두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의 장풍이 막 주약란의 오른 손과 마주치려고 할 때 갑자기 어떤 흡인력이

자기의 장력을 이끄는 것 같았다.

아차하고 느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두 가닥의 강한 장력이 한데 부딪치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라

대여섯 자가량 날아가서는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눈앞에 불꽃이 튀기며 귀에서는 윙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재빨리 머리를 들어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니

철검서생이 한 손을 가슴 속에 대고 헐떡이고 있었다.

상당히 다친 모양이었다.

한편 주약란은 한 쪽에 서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