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 장 죽음의 그림자를 밞으며 <聽立吹簫>
이때 제원동은 사경이 넘은 밤하늘을 보고는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대사님, 너무 겸손의 말씀이시오.」
응수하고는 뚜벅 뚜벅 걸어 초진대사의 옆을 지나 이요홍에게 다가갔다.
이요홍은 중태에 빠져 있는 양몽환을 부둥켜안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 두 사람 몇 자 밖에는 단정히 앉은 옥소선자가
커다란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날처럼 그녀의 얼굴에는 조금도 질투나 애석한 빛이 없는 표정이었다.
희비애락을 통달한 듯한 모습이었다.
너무도 심한 침통은 오히려 엄숙할 지경으로 심각하였고
눈물도 질투도 속으로 깊이 참고 있는 듯싶었다.
오직 고요하면서 조용히 바라보는 눈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상을 자아내게 하는 풍경이었다.
제원동이 이요홍에게 다가가서는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소저, 이제 가지?」
그러나 이요홍은 제원동을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안가겠어요.
가서 아버지께 만불정의 승려들을 죽이도록 말씀해주세요.」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녀의 태도에는 조금도 충격을 받았다는 인상도 없이
오직 담담히 말할 뿐이었다.
승일청이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여기 남겠다는 거냐?」
이요홍이 자기 몸에 안긴 양몽환을 보며
「이 이와 같이 여기 남겠어요.」
제원동이 양몽환을 바라보니
그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입가에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상반신이 이요홍의 몸에 안겨 꼼짝 않는 것이
겨우 한 가닥 숨 밖에 붙어있지 않은 것 같았다.
제원동은 고개를 흔들며 나직이 말했다.
「그 사람은 살기 틀렸어. 여기 있어봤자 아무 소용없겠는 걸」
눈을 깜박이는 이요홍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러면서 침통히 말했다.
「더 살지 못하리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그가……」
제원동이 그 말을 가로채서 물었다.
「만일 그가 죽으면 어쩌지?」
이요홍이 잔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죽으면 이 분의 시체를 묻고서……」
제원동이 초조한 어조로 또 다시 가로채어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 쓸데없는 소리 말아!
너의 아버지께서는 강호에 덕망이 있는 사람으로 천용방을 통괄하고 있다는
신분을 좀 생각해 보렴.
시체를 매장하는 것이 네가 할 일인가?
그리고 그는 곤륜파의 제자로 곤륜삼자가 이 사람들에게 복수할 지도 몰라.
그를 내려놓고 같이 가자!」
이요홍이 제원동을 바라보며 말했다.
「꼭 저를 데리고 가야겠어요?」
제원동이 발을 굴리며 화를 냈다.
「그래 내가 지금 너한테 농담을 하는 줄 아느냐?」
이요홍이 싸늘하게 쏘아보며 말했다.
「저를 데리고 가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한 가지 조건 이 있어요.」
제원동은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말해 봐! 어떤 조건인지?」
그러자 옥소선자를 싸늘하게 건너다보며
「조건은 저 흑의 여인을 죽여 달라는 거예요.」
제원동은 놀란 듯 눈이 둥그레지며 소리 쳤다.
「그녀를 왜 죽여? 그녀가 누군 줄이나 아느냐?」
이요홍은 약간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알아요. 흥! 염치없고 부끄러운 줄 모르는 여인이지요.」
그러자 옥소선자는 퉁소를 쥐어 들고 사뿐 사뿐 이요홍에게로 다가 왔다.
승일청이 껑충 뛰어 옥소선자의 앞을 가로막으며 냉랭한 어조로 물었다.
「어떻게 하자는 거야?
그녀가 우리 방주의 귀한 따님이신 줄 그대는 알고 있지 않아?」
옥소선자가 퉁소를 치켜들며 말했다.
「알고는 있죠. 왜? 당신은 나와 싸우자고 나서는 거요?」
승일청이 웃으며 나무랬다.
「당신은 이미 기진맥진한데다가 또한 중상을 입고 있으니
설사 내가 싸워 이겨도 명예스럽지 못한 일이오.
하지만 당신이 망령되게 우리 방주의 따님에게 손을 쓰겠다면
죽는 길을 스스로 택한다는 것을 명심 하시오.」
옥소선자는 코웃음 치고는 퉁소로 승일청을 찌르는 것이었다.
승일청은 선뜻 옆으로 비켜서다가 휙! 휙! 장풍을 일으켜 후려쳐서는
옥소선자를 세 걸음이나 물러서게 했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나와 싸우고 싶으면 당신의 상처가 낫고 몸이 회복된 뒤에 싸우기로 하시지,
지금 당신은 결코 나를 당할 수가 없을 것이오.」
그러나 옥소선자는 아무 소리 없이 퉁소를 맹렬히 휘두르며 일곱 번을 찍고 찌르고 후려쳤다.
승일청은 두 손을 휘둘러 피하고 막고 하여서 옥소선자의 재빠른 일곱 번의 공격을
막아내긴 했지만 그도 역시 너덧 걸음 물러서야 했다.
그러자 옥소전자의 공격이 늦추어 졌다.
그들을 타서 승일청은 즉각 수장(手掌)을 휘둘러 죽지 않을 만큼 장풍의 공격을 가해
옥소선자는 이미 기진맥진한 몸이었다.
그나마 중상을 입은 몸이면서도 여태껏 견디어 온 것은 오직 양몽환이 준
하얀 영약의 효능에 의해서였다.
겨우 일곱 번을 공격하고 승일청의 네 번 공격을 막고 나니
그만 헐떡이며 숨이 가빠졌다.
승일청은 손을 거두고 웃으며 다시 말했다.
「우리 방주께서 당신의 대명을 익히 듣고 흠모한 나머지 제자를 풀어 널리 당신을 찾았었소.
그러나 당신의 종적이 묘연하고 거처가일정치 못하여 결국 찾지 못했소.
지금도 우리 방주께서는 당신 옥소선자에 대하여 여전히 잊지 못하시고 계신데
당신만 우리 천용방에 가입할 것을 허락한다면 우리 방주께서 총회를 여시고
우리 다섯 사람의 단주들을 데리고 기꺼이 맞이할 것이오.
그리고 무예계는 멀지 않은 장래에 천지가 진동할 풍파가 일어날 것이오.
더욱이 소위구대 문파에서들은 우리와 같은 야인을 조금도 눈여겨보지 않으니, 하! 하!……」
그는 한동안 앙천대소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모두 정통파로 자처하는 구대문파로부터 무예계 밖으로 내던져진 사람들이 아니오?
강호의 분쟁이 일어나기 만 하면 그때마다 저들은 우리를 파리 목숨처럼 잡아 죽이지 않았소?
억울한 일이었지……
만일 우리가 그들에게 잡혀 터무니없이 죽기 싫다면 단결하여 하나의 방(幇)을 형성함으로서
그들에게 대항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요.
요번에 또 다시 풍파가 일어난다면 그 처절함이 란 결코 삼백년 전 소실봉(少室峯)에서
서열을 위한 검술시합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오.
당신 혼자서 아무리 재간이 높다한들 구대 문파에 대항하지는 못할 것이오.
우리 천용방으로 말하면 비록 천하의 대인물들이 다 모였다고는 할 수 없어도
구대문파 이외의 고수들은 대부분 망라하였다고 생각하오.
더욱이 우리 이 방주께서는 무예도 절륜하실 뿐 아니라
아량이 또한 바다같이 넓은 분이란 말이오.」
하고 잠시 말을 끊었다가는 다시 계속했다.
「오늘 저녁 본인이 이와 같이 침이 마르도록 입을 놀리는 것은
당신이 우리 천용방 총단(總壇)에 한 번 들어와서 우리 이방주와 의견을 나누어 보라는 것뿐이오. 당신이 우리 천용방에 가입하고 안하는 것은 절대 강요하지는 않겠소.
더욱이 지금의 당신은 심한 중상을 입은 몸으로 일반 약을 가지고는 치료할 수 없는 몸이오.
다행히도 우리 방주께서는 무예제의 독보적인 건원지신공(乾元指神功)이란 재간을 지니고 계시오. 때문에 어떠한 곳의 중상을 막론하고 내장이 완전히 파괴되지만 않고 원기가 흩어지지만
않았다면 고칠 수 있소. 당신이 우리 방주와 만나보길 응낙만 한다면 이 승모가 기꺼이
모셔다 드리겠소.……」
옥소선자는 다소곳이 그 말을 전부 듣고 나서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창란이란 사람이 역시 대단한가 보군요.
당신이 그토록 존경하게끔 만들었으니.
아마도 현세에 그와 같은 사람이 없겠군요.
호의는 잘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 갈 수는 없어요.」
하고 천천히 양몽환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침울하게 탄식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저의 동생의 일을 끝내고 난 뒤에도 목숨이 붙어 있다면 틀림없이
당신의 천용방 총단에 한 번 가겠어요.」
이때 왕한상은 운기조식(運氣調息)을 끝마쳤다.
천천히 이요홍에게 가서 양몽환을 살펴본 후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상처가 너무 심해 살아나기 힘들겠어. 그런데 왜 네가 안고 있지?」
왕한상의 말을 듣고 난 이요홍은 그만 얼굴빛이 싹 변했다.
그녀는 왕한상의 능력을 알고 있었으며
그의 의술은 그녀 의부 소천의(蕭天儀)에 못지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왕한상이 스스로 양몽환을 구해 주게끔 하느라고 여태껏 양몽환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왕한상의 성격이 결코 허례나 허식을 모르는 성격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양몽환이 살 수 없다는 말에 그만 간담이 찢어지는듯함을 느끼는 순간!
정신이 아찔하며 자기도 두 손을 놓았다.
그러자 양몽환은 그녀의 품속에서 미끄러져 저만치 굴러갔다.
그제야 이요홍이 제 정신으로 돌아오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몸부림치며 통곡하던 이요홍은 저만큼 굴러간 양몽환의 가슴에 엎어지려는 바로 그때
제원동이 코웃음을 치며 왼 손으로 이요홍의 몸을 낚아챘다.
그리고 꾸짖는 소리로
「여기가 어떤데 남이 조롱하는 것도 몰라?」
하면서 눈을 부라렸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왕한상은 손을 들어 이요홍의 혼혈(昏穴)을 찔러 잠들게 했다.
그리고는 제원동을 돌아보며
「지금이 어느 땐데 그녀를 나무라고 있소? 빨리 데리고 가시오.」
하고 떠나기를 재촉했다.
만일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그녀를 일장에 죽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방주의 사랑하는 딸이고 평소 이창란까지도 그녀를 어쩌지 못하는 터라
비록 성이 났지만 화풀이 할 상대가 아닌 것이었다.
그러자 그의 눈에 양몽환이 누워 있는 모습이 비쳤다.
그는 화풀이의 대상이라도 찾은 듯 성큼 다가서며
오른 발을 들어 양몽환의 가슴을 겨누고 밟았다.
그 순간!
옥소선자가 놀라 소리 지르며 오른 손의 퉁소로 암기를 대신하여 휙! 던졌다.
그러자 퉁소는 번쩍하며 제원동의 다리로 날았다.
이요홍 때문에 기분이 상했던 제원동은 옥소선자가 던진 퉁소에 정통으로 맞았다.
뜻밖의 공격에 막을 새도 없이 비틀거리다 다리를 꺾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더구나 평소의 날카로움이 사라진 그에게는 의외의 공격을 피하지도 못하였겠지만
잔뜩 화가 나서 한 가지 생각만 하느라고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가 옥소선자의 공격에
맥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옥소선자가 던진 퉁소 정도로 중상을 입을 제원동도 아니었다.
다만 온 힘을 다해 던진 옥소선자의 퉁소가 그만큼 빠른 속도로 날았을 뿐이었다.
제원동은 의외의 습격에 놀라 멈칫하는 순간!
옥소선자는 벼락 같이 달려들어 쓰러져 있는 양몽환을 일으켜 안음과 동시에 퉁소도 집어 들었다.
한편에 쓰러져서 아픔을 참고 있던 제원동은 옥소선자의 일격인 퉁소에 맹랑하게 넘어진 것을
생각하며 울화통을 터뜨렸다.
그는 벌떡 일어나며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죽고 싶어?」
하며 그녀의 앞길을 막아섰다.
그러자 옥소선자는 넌지시 숙였던 고개를 갑자기 치켜들며
「퉤!」
하고 입안에 물었던 붉은 선혈을 제원동의 얼굴을 향하여 뱉었다.
제원동은 다시 생각지도 못했던 옥소선자의 행동에 또 한번 놀라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나 일단 옥소선자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피는 제원동이 흔드는 손바닥에 맞으며
이리 저리 사방으로 튀기고 말았다.
삽시간에 얼굴이며 옷 할 것 없이 붉은 피 바가지를 뒤집어 쓴 제원동은
황급히 얼굴의 피를 문질러 닦았다.
이 틈을 이용한 옥소선자는 양몽환을 안은 채 몸을 날리고 말았다.
이때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승일청이 뛰어나오며 들으려고 하자
왕한상이 막아서며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승단주! 그만 놓아 보내시오」
하고 몸을 홱 돌린 왕한상은 그 길로 초범대사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부채를
<쫙!>
펴면서 옆에 지키고 있는 초혜를 후려쳤다.
그리고는 다시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돌아서며 초범대사의 혈도를 찔러버리는 것이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문자 그대로 전광석화(電光石火) 그것이었다.
대낮의 날벼락도 유분수지,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길도 없이
왕한상의 부채와 기습에 무방비상태로 있던 초범대사와 초혜는 정신이 쑥 빠지며
늘어져 버리고 말았다.
간단히 일격으로 성공한 왕한상은 넘어진 초범의 몸을 번쩍 들어 제원동에게 안겨 주며
「빨리 떠나시오! 승단주와 내가 추격하는 것을 막으리다.」
하고 노한 소리로 외쳤다.
초범대사의 몸뚱이를 엉겁결에 받아 안은 제원동은 잠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서 있다가
왕한상의 노호 소리에 잊었던 것이나 생각난 것처럼 다리를 절룩거리며 아래쪽으로
겅둥 겅둥 달려 내려갔다.
제원동은 왕한상이 초범대사를 사로잡아 가는 일에는 불만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함으로서 남아 있는 아미파(峨嵋派) 장로 세 사람으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 대항하도록 하는 결과를 만들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원동이 제아무리 불만이라 하더라도 왕한상의 지위와 덕망으로 보아
도저히 항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시키는 대로 실행하는 도리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과연!
그들의 계획은 들어맞았다.
초원 ,초진 ,초혜 세 사람이 일제히 몸을 날려 덤벼들었다.
초원과 초혜는 왕한상을 공격하고 초진은 승일청을 휘몰아치는 것이었다.
승일청은 몸을 재빠르게 돌리며 구환도를 뽑아 휘둘렀다.
승일청의 날카로운 칼날을 피하던 초원은
「아차!」
하는 순간에 세 번 계속하여 내려치는 칼날을 피하느라고 오륙 장이나 뒤로 물러섰다.
그러는 한편!
왕한상은 부채를
<쫙!>
펴면서 초혜의 장검을 간단히 막아 물리쳤다.
이때, 오륙 장이나 뒤로 물러섰던 초원은 가만히 있는 왕한상에게 기수를 돌려 협공해 들이 닥쳤다.
그러나 왕한상은 부채를 펴서 역시 가볍게 막아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얼마동안 치고 막으며 이십여 수를 교환한 초원은 홀연!
몸을 뒤로 돌리며 꽉 쥐었던 주먹으로 자기의 가슴팍을 치면서 이를 갈았다.
그러한 얼굴에는 살기(殺氣)가 번득거렸다. 그러는 그는 왕한상을 노리고 이를 갈았고
한편으로는 암암리에 공력을 운행하고 있었다.
왕한상은 부채를 펴서 힘 있게 쥐고 언제든지 어떠한 공격도 막아내려는 여유 있는 태도로
초원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왕한상은 일찍이 무공의 절정을 이룬 사람으로 그의 풍부한 경험은
적의 속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을 만큼 풍부했다.
그런 그의 식견으로 볼 때 초원의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필살의 일격으로 자기와 판가름 하려는 것이다.
(음…… 저놈이 필살의 일격을 노리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왕한상은 초원의 행동을 살피는데 소홀히 하지 않으며 날카롭게 일갈했다.
「귀파(貴派)는 우리 방주님의 무남독녀를 만불정에 납치하여 이틀 동안이나 감금하였소.
그래서 우리도 이에 대한 응분의 조처로 귀파의 장문인을 천용방의 총단에
이십일 동안만 감금하겠소.
만일 불만이 있으면 천용방 총단에 이 왕모(王某)를 찾아오시오.
이만 실례 하겠소.」
하고는 몸을 날려 승일청의 옆으로 달렸다.
「승단주! 갑시다.」
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몸은 쏜살같이 날아 어느덧 일장 밖을 달려가고 있었다.
일장 밖을 피해 나온 왕한상은 어느 사이에 주머니에서 강담(鋼膽)을 뽑아 손아귀에 힘껏 쥐었다.
한편-필살의 일격만을 노리며 기력을 운행하던 초원은 갑자기 달아나는 왕한상과 승일청을 보자,
(놓쳤구나! )
분통을 참지 못한 초원대사는 속으로 부르짖으며 부라 부라 뒤를 쫓아 소리 높이 외쳤다.
「이 왕모 놈아! 게 섰거라! 도망가면 어디로 가겠느냐?」
달려가는 승일청과 왕한상과 쫓아가는 초원과 초혜의 결사적인 경주는
넓은 벌판을 뿌연 먼지로 뒤덮었다.
결사적인 경주 끝에 선후(先後)의 거리는 일약 팔마장 정도로 좁혀지고 말았다.
이때 초원은 가슴에 대고 있던 두 개의 손바닥을 앞서 달리는
승일청과 왕한상의 등을 향하여 일제히
<쫙!>
폈다.
그 순간!,
전광처럼 빠르고도 강한 장풍이 무시무시한 흡사 노도와 같은 소리를 내며
왕한상의 등을 향하여 날았다.
그때-,
앞으로 달리던 왕한상은 초원의 필살의 일격을 예감하고 세심한 주의와 신중을 기하며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만일 왕한상이 돌아서면서 장풍을 막아낸다면 막아 낼 수도 있지만 만일에
그 장풍을 막아낸다고 가정한다면 워낙 거세고 무서운 장풍이 허공에서 부딪치게 되는 경우,
맞부딪친 바람은 서로 뒤로 돌아서서 불게 되고 그렇게 된다면
그 역풍(逆風)의 강도(强度)로 둘 중의 하나 아니면 둘이다
창자가 터져나을 것은 정해진 사실이었다.
이것은 내공(內功)의 강력을 다투는 것으로서 본인의 공력이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무술의 하나였다.
이러고 보면 왕한상도 약간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초원의 두 주먹이 일으킨 장풍은 이미 한 마장 밖에까지 다다랐다.
이제 맞서서 막는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 그렇다면 늦었다.
왕한상은 막는 것을 포기하고 재빨리 엎드렸다
<휙->
질풍같이 달려든 장풍은 그 일대를 휩쓸며 지나갔다.
그러나 그 무섭고도 강한 장풍을 피해 아무리 재빠르게 엎드렸다 해도
완전히 장풍을 피할 수는 없었다.
초원의 강력한 필살의 일격인 장풍은 납작 엎드린 왕한상의 몸을 몇 번이나
떼굴떼굴 굴려 이장 밖에 있는 절벽까지 굴려 놓고 말았다.
정말 몸서리치는 무서운 장풍이었다.
절벽까지 굴러간 왕한상! 아래는 수십 길 낭떠러지,
떨어지면 뼈도 제대로 추릴 수 없을 만큼 깊은 낭떠러지 까지 굴러온 왕한상의 몸은
「아차!」
떨어지려는 찰나,
뒤에서 미처 허겁지겁 달려온 승일청이 손을 내밀어 왕한상의 옷을 잡는 가 했다.
그러나 승일청의 손은 왕한상의 옷을 스치는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놓치고 말았다.
「앗!」
드디어 왕한상의 몸은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 어찌된 일인가!
위기일발의 직전에서 왕한상의 오른 손은 절벽의 바위 사이에 있는
소나무 가지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리고 말았다.
천우신조(天佑神助)랄까.
위기일발 직전에서 소나무를 잡고 대롱대롱 매달린 것도 잠시,
엄지손가락 굵기의 소나무가 왕한상의 육중한 몸을 지탱할 수 없었다.
드디어 천우신조도 무위로 돌아가는 듯 작은 소나무는 뿌리째 뽑히며
왕한상과 동체(同體)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때,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던 왕한상은 소나무가 뿌리째 뽑아지는 순간적인 찰나,
그 찰나에 진기를 운행하며 두 팔을 쭉! 피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몸은 풍선처럼
절벽 위로 올라서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일은 무술에 정통하여 내공을 운행하며 그 민첩함이 절정에 달한 무술인이 아니면
초인적(超人的)인 행동에 경탄할 것이지만 무술계에서는 조금도 신기할 것도 못 되었다.
왕한상이 아슬아슬하게 절벽의 일촉즉발에서 올라오자
뒤따라 달려 온 초원이 번개 같이 달려들어 아직 자세도 바로 잡지 못한
왕한상의 가슴을 겨누고 오른 손을 번쩍 높이 들었다.
이때,
모든 사태를 미리 예감한 승일청이 대기하고 있었다는 듯이 오른손을 쳐드는
초원의 옆구리를 겨누고 정확한 일격을 가하고 말았다.
그러나 승일청의 일격이라는 것도 무시무시한 장풍이어서 강도가 지나치면
초원의 옆에 있는 왕한상의 생명까지도 없어지는 억센 장풍이었다.
이런 것을 미리 계산한 승일청은 자기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의 절반가량을 투입하여
초원을 협공한 것이었다.
고수와 고수끼리 싸울 때 전력으로 공격하였다가 상대방이 피하여버리면
일단 내 뻗쳤던 것을 거두어들이기 전에 상대방의 공격을 받게 되는 수가 없지 않았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타산이 없으면 전력으로 상대방에게 공격을 가하지 않고
그러한 공세는 극히 피하는 것이 무술인들의 공통적인 일이었다.
이때, 초원대사는 암암리에 승일청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한 듯
재빠른 솜씨로 승일청의 공격을 막으며 그와 동시에 왼 손으로 은근히 승일청의 등을
내려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승일청의 공격이 전력이 아닌 그 절반 정도의 힘으로 공격해 올 줄은 몰랐던
초원은 서로의 장풍과 장풍이 부딪치는 찰나,
즉각 이상함을 느꼈다.
공력으로 논한다면 초원이 한 단계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의초원은 두 팔에 힘을 분산하고 있기 때문에 전력으로 응수하지 않았던 것이다.
승일청의 장풍이 초원의 장풍을 들고 들어오는 경우,
초원이 막지 않고 피한다면 그 억센 바람은 절벽 위에 서 있는 왕한상을 ?
여지없이 절벽 밑으로 떨어지게 할 것이었다.
그러나 왕한상 바로 옆에 있는 초원 자기는 두말할 것 없이
소나무가 왕한상과 동체가 되어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신세를 면할 길이 없었다.
초원은 사정이 아주 위급함을 깨닫고 재빨리 왼 손을 거두고 그 자리에 엎드렸다.
그와 함께 왕한상도 한 옆으로 비켜서며 엎드렸다.
의외로 목표를 잃은 승일청은 일단 뻗친 손의 여세로 자기의 몸도 휘청거리며
쓰러질 듯하다가 몸에 중심을 잡고 겨우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때 초원보다 한발 늦게 달려오던 초혜가 뒤에서부터 달려들며 오른손에 공력을 쏟아
승일청의 등을 후려 갈겼다.
간신히 자세를 바로 잡았던 승일청은 갑자기 뒤에서부터 달려든 공격에 피하지도
그렇다고 돌아 서서 막을 수도 없이 초혜의 공격을 이를 악물며 받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자기 내공의 절반 밖에 힘을 쓰지 않은 승일청이지만 그 내공의 소모만큼
다시 진기를 집중하여야 재차 공격의 원동력이 되는 것을 다시 수습할 여유도 없이,
달려온 초혜의 장풍 일격은 승일청의 몸을 허공으로 올려놓고 말았다.
떨어지면 바로 절벽 밑-.
앗!
초원의 공격으로 절벽 위에서 위기를 모면한 왕한상은 그동안 암암리에 내공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두 다리에 힘을 주어 진기를 불어 넣은 다음 절벽의 탄탄한 바위 위에 몸을 반석같이
굳혔다.
그리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왕한상은 승일청의 몸이 허공으로 날자 재빨리 두 손을
<쫙!>
펴는 것과 거의 같은 시각에 절벽 밑으로 낙하하는 승일청의 몸을 받아 안았다.
승일청을 받아 안고 가만히 생각하는 왕한상은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둘이 다 똑같은 신세가 되어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게 되는 이 수치,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미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왕한상은 승일청을 바위 위에 내려놓고 승일청의 기력이 운행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적의 공격을 견제하며 다시 암암리에 진기를 집중시켰다.
이윽고 승일청의 얼굴에서 생기를 찾은 왕한상은 초원과 정면으로 일전을
겨루기로 결심하고 내달렸다.
그리하여 왕한상과 초원은 넓은 들과 가파른 절벽을 무대로 질풍과 노도 같이
허공에 바람을 일으키며 맞붙었다.
용호상박(龍虎相搏)! 바로 그것이었다.
왕한상과 초원이 일으키는 장풍은 주위 일대를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꺾어지는 나무, 날으는 바위, 그리고 눈도 뜰 수 없이 날리는 모래와 먼지,
그 뿐 아니라 장풍과 장풍이 허공에서 부딪치는 요란한소리는 주위 일대를
쩌렁 쩌렁 울리며 하늘을 쪼개는 소리 같았다.
그때!
별안간 먼지 속을 뚫고 뛰어나온 초혜가 왕한상을 가로 막고 나서며 푸른빛이 번쩍이는
단검을 휘두르다 왕한상의 가슴을 겨누고 던졌다.
초혜의 손아귀를 벗어난 단검은 고막을 째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허공을 뚫고 날았다.
「앗!」
그러나 비명의 외마디 소리를 친 것은 왕한상이 아니라 옆에서 보고 있던
승일청의 격노한 소리였다.
여지없이 왕한상의 심장에 꽂혀야 할 초혜의 단검은 왕한상이 펴든 부채에 맞고 힘없이
<뎅그렁!>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 떨어진 칼을 집어든 왕한상은 역습의 태세로 비수의 칼끝을 초혜의 가슴으로 향하고 던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돌변한 역습에 몸을 굽히며 자기의 단검을 피하는 다음 순간
자기가 칼을 피하느라고 몸을 굽히는 그 틈을 이용한 왕한상의 번개 같은 공격에
견정혈(扁井穴)을 찔린 초혜는 왕한상의 날쌘 공수(攻守)에 어안이 벙벙할 따름,
과연 자기의 견정혈이 공격을 받았는지 어떤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만큼 왕한상의 공격은 날카롭고도 빨랐다.
이때까지 왕한상과 승부를 겨루다 초혜의 출현으로 주춤했던 초원은 초혜가 불리해지자
동발(銅鉢)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와 함께 어안이 벙벙해 있던 초혜도 초원의 출현으로 문득 정신을 차리고 같이
동발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것이었다.
다시 전세는 역전되어 二대 一로 승부를 겨루게 된 왕한상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도 없이
냉소를 터뜨리면서 손에든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하며 공격해 오는 두 개의 동발을 피하고 있었다.
초원과 초혜를 앞뒤로 하고 가운데서 그들의 공격을 피하는 한편 진기를 모았다가 내려치는
장풍은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강해졌다.
한편- ,
아무리 동발을 휘둘러도 맞아주지 않는 것에 분통이 터진 초원은 동발을 내던지고
이번에는 가슴에 두 손을 모았다가 강한 장풍을 일으키며 달려들었다.
이때 초원의 장풍을 미리 알아챈 왕한상은 땅에 납작 엎드렸다.
그러자 초원의 두 손바닥에서 일으킨 장풍은 목표물인 왕한상을 지나 뒤에서
팔을 휘두르고 달려들던 초혜에게로 달려가고 말았다.
순간!
「앗!」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초혜를 의식하며 왕한상은 엎드린 채
승일청에게로 달려가서 가만히 속삭였다.
「승단주! 먼저 가시오. 나는 조금 더 남아서 저놈들 끼리 중상을 입도록 한 다음
곧 쫓아가겠소이다.」
그러자 승일청은 웃으며
「염려 마오! 좀 더 구경이나 하겠소이다. 하…… 하……
내 상처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 같으오! 」
하고 말을 마치자마자 쓰러졌던 초혜가 초원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 기력을 운행한 후
뒤 미처 따라온 초진까지 합세하여 파죽지세로 돌격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왕한상과 승일청은 별로 놀라는 기색 없이 응당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태연히 일어나
서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마주쳐 나갔다.
왕한상은 간간이 냉소를 터뜨리며 부채를 펴서 초원의 공격을 막는 한편 한 손으로는
초진에게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는 한편 승일청은 구환도를 높이 들고 빙 빙 휘두르며 초혜를 가로 막고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다시 살벌한 전투장으로 화한 주위 일대는 먹구름이 핀 듯 그들이 날리는
먼지로 사방이 어두워 질 정도였다.
칼과 칼이, 장풍과 장풍이 그리고 새파란 장검이 차가운 빛을 뿌리며 종횡(縱橫)하는 싸움,
이 싸움이야 말로 추호의 양보나 여유도 있을 수 없는 생사불사의 중대한 싸움으로 변하고 말았다.
왕한상은 그의 절기인 사행팔괘 장을 휘두르며 초진과 초원을 상대로 썩은 풀치듯 지쳐 들어갔다. 그의 날쌘 동작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의 장관을 이루며 숨쉴 겨를도 없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약간의 상처를 입은 승일청도 구환도를 번개같이 휘두르고 공격하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무술에 자신이 있는 초혜였으나 그의 놀랍고 날카로운 공격에는
적수가 아닌 듯 삼십 합 후에는 점점 힘겨워 하는 자태가 역력했다.
초혜는 갑자기 자기의 전법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 초혜는 사형이 납치된 것을
분통이 여겨 자기가 여인이라는 것도 잊고 승일청과 겨루게 되고 말았었지 만
선천적인 여인의 가냘픈 결심으로는 사나이의 힘을 견뎌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즉각 무거운 구환도와 맞부딪치지 않으려고 전법을 변화시켜 가벼운 검법과
경신술로 상대하기 시작했다.
이 일장(一場)의 결투는 왕한상이 기묘한 신법으로 초진과 초원을 합친 공력에 미달하는
공력을 보충하므로 서 그들의 공세를 막으며 쌍방이 모두 불승불패의 무승부로 계속되었다.
어느덧-동쪽이 밝아올 무렵까지 장검을 교환하게 된 쌍방은 점차 강약지세가 판이해졌다.
초혜는 한동안 견디어 냈으나 이에 반격할 여지가 없는 태세가 역력했고 왕한상의
사행팔괘장이 점점 더 복잡 기묘하며져 초원과 초진은 도저히 다음 수를 예측할 수 없으므로
기선을 제압당하고부터 하나도 손바람을 막아내지 못하고 어찌할 줄 몰랐다.
그러나 왕한상의 내부에 받은 상처는 오랫동안 싸움으로서 점점 덧나기 시작한 모양으로
가쁜 숨을 쉬게 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그는 억지로 싸워 나간다면 상처가 악화되어
일단 자기가 쓰러지는 순간에는 당장 잡혀 죽게 될 것을 짐작했다.
곧이어 그는 맹렬히 공격을 퍼부어 초진을 뒤로 물러가게 한 다음 냉소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귀하의 무공도 별것 아님을 이 왕모(王某)가 친히 겪었소.
오늘은 이만 하고 다음에 봅시다.」
하고는 몸을
<휙!>
날렸다.
이에 우세한 싸움을 이끌고 있던 승일청 역시 왕한상이 몸을 날리자
즉시 두어 번 맹렬히 공격하여 초혜를 물러나게 하고는 몸을 날려
왕한상의 뒤를 따라 달려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초원과 초진은 갑자기 달아나는 왕한상과 승일청의 뒤를 쏜살같이 쫓아갔다.
그러자 초혜도 뒤를 쫓았다.
쌍방은 약 이장(二丈) 정도의 거리를 두고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경주를 벌렸다.
앞에서 내달리던 승일청은 세 명의 장로가 뒤를 바싹 따라오는 것을 흘깃 보고는
자모강담을 하나 꺼내어 뒤로 힘껏 내던졌다.
자모강담은 강호에서 이름 높은 암기로서 위력이 대단한 것이었다.
일단 승일청의 손을 떠난 강담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번개 같이 날아갔다.
제일 먼저 달려오던 초원은 날아오는 강담을 피하려고 조금 굽혔다.
그러자 초진을 스쳐간 강담은 바로 뒤에 따라오던 초원의 가슴을 향하여 날았다.
초진은 즉시 동발을 휘둘러 날아오는 강담을 내리쳤다.
<쨍!>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초진의 동발에서 들린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른 쪽 다리에 갑자기 통증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한줄기의 섬광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아픔을 참고 다시 앞으로 뛰었다.
원래 승일청의 그 커다란 강담 속에는 또 다른 다섯 개의 조그만 강담이 있어 무기에
강담이 맞으면 그 껍질이 쪼개지게 되며 즉각 안의 다섯 알의 강담이 튀어나와
상대방을 때리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초진대사의 동발은 다른 무기와 달라 면적이 좀 큰 것으로 승일청의 강담 안의
적은 강담 다섯 알 중에 두 알이 동발에 부딪쳐 떨어지고 다른 두 알은 귀밑을 스치고
지나갔으며 남은 한 알이 그의 다리를 때렸던 것이었다.
가장 뒤에서 따라오던 초혜는 초진이 강담을 때리는 것을 보고는 즉시 그 자리에 섰다.
그러자 두개의 섬광이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그녀는 급히 들었던 장검으로 내리쳐서 날아오는 강담 한 알을 검으로 깨뜨려 버렸다.
그때, 왕한상과 승일청은 세 장로가 암기를 피하느라고 주춤하는 순간
어느덧 몇 십장을 날아 달려가고 있었다.
초원은 번개같이 사라져가는 두 모습을 바라보며 이미 따를 수 없음을 알았는지
장탄식하며 묵묵히 섰다. 그의 얼굴은 비통과 절망으로 꼭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초진도 초혜도 초원의 양쪽에 서서 역시 침통한 빛이 되어 말을 못했다.
이때 초진은 오른 쪽 다리가 점점 아프고 상처 난 곳이 따끔 빠끔하여 극히 참기 어려웠다.
고통을 참느라고 함을 뻘뻘 흘리고 있는 초진의 상처는 이미 시퍼렇게 피가 죽어
부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다 돌연 초원이 발을 구르며 크게 웃었다. 웃음소리는 처절을 극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이었다.
초진은 돌변한 초원의 처절한 웃음소리에 깜짝 놀라
다리의 아픔도 잊은 채 멍청히 서 있었다.
그러나 초혜는 당황하며 다급한 소리로
「대사형! 대사형! 왜, 그러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그 말에 초원은 미친 듯이 웃던 웃음소리를 뚝 그치며 두 줄기 눈물을 좌르르 흘리는 것이었다.
「우리 ?아미파가 문호를 창립한 이후 오늘과 같은 치욕을 당한 예는 없소.
장문인이 납치되어 갔는데 우리들은 무슨 체면으로 무예계에 발을 들여 놓으며
역대 사부님들과 장로님들의 영(靈)을 대할 것이오」
초진은 상처의 아픔을 참으며
「대사형은 너무 자책 마시옵소서. 일이 기왕 그렇게 된 바에야 뒷일을 잘 처리하여……」
하다가 갑자기 상처가 급격히 아픈 듯 얼굴을 찌푸리며 다음 말을 못 잇고 땀을 뻘뻘 흘렸다.
이때 초원과 초혜 두 사람은 다같이 초진의 얼굴 표정을 지켜보다 당황하며 초혜가
몸을 굽혀 초진의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는 얼굴을 찌푸리며
「독이 묻은 암기에 맞았어요.」
하고 몸을 폈다.
그러자 땀을 뻘뻘 흘리며 고통을 참던 초진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불에 덴 것처럼 아프니 무슨 독일까요?」
하고 비통해 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초원은 상처를 살폈다.
그러나 이미 퉁퉁 부어올라 독이 퍼질 대로 퍼진 다리를 살펴보며 속으로는 놀랐으나
아무렇지 않은 듯 침착하게
「빨리 피를 뽑아 독을 제거해야겠소.
우선 절로 돌아가 독을 치료한 뒤에 다시 천용방 총단으로 달려갑시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초혜는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천용방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어요. 그런데 상처까지 있는 우리 세 사람의 힘으로는
너무 약할 것 같소.
그런즉 무당, 청성(靑城), 설산(雪山) 세 파에 연락하여 힘을 합쳐 가기로 하죠.
그들 세파 역시 천용방과는 이미 감정이 나쁜 사이여서 합세하기에는 어렵지 않을 거예요.」
초원이 어두운 얼굴로
「청성파는 우리 과와 관계가 깊은 사이로서 틀림없이 협조하여줄 것이지만
무당, 설산 두 파는 비록 천용방과 원한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도와줄지 예측하기 힘들어요.
그보다 우선 사제의 치료부터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하는 말에 따르기로 했다.
초원은 초진을 부축하여 절로 향했다.
날은 이미 저물어 사방이 어둠에 싸인 하늘에는 밝은 달이 금빛도 찬란히 넓은 산과 들을
비쳐 주고 있었다.
그때 문득!
맞은편 산허리에 우뚝 선 소나무 밑에 전신을 검은 복장으로 감춘 여인이 나타났다.
그 여인은 머리칼을 산발하고 백지장 같이 하얀 얼굴에는 핏기조차 없이 창백했다.
그리고 더욱 이상한 것은 옥으로 다듬어진 퉁소를 옆에 놓고 앉은 여인의 품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이가 안겨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도 슬픔도 없이 넋을 잃은 표정으로 않아 있을 뿐이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칼이 흐트러지고 우수수 나뭇잎이 떨어지는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은 처량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이때!
갑자기 그녀의 품에 젊은이가 정기 없는 눈을 뜨며 간신히 여인을 쳐다보고 입을 떼었다.
「난…… 이제 틀렸어…… 그만…… 떠나시오.」
그러나 흑의 여인은 고개를 흔들며
「동생! 안 가겠어. 언제든지 같이 이렇게 있겠어요!」
그러자 그녀의 품속에서 몸을 일으키며 젊은이는
「그럴 필요 없어요. 이 양몽환은 결코 죽지 않아요.
죽는다 해도 어제 저녁에 구하여 준 일은 잊지 않고…… 보답……」
하고 말을 마치지 못하고 급기야 피를 뽑으며 비틀 비틀 뒷걸음질쳤다.
흑의 여인은 재빨리 부축하며
「상처가 극히 심중하니 조식(調息)해요. 몸을 아껴야지……」
「걱정을 해주어 고맙소. 그러나 너무 걱정하진 말아요. 죽어도 깨끗이 죽겠소.」
하는 소리에 흑의 여인은 창백한 얼굴에 한줄기 날카로운 빛이 지나갔다.
옆에 놓아두었던 퉁소를 집어 들며 노기 띤 음성으로
「뭐라고요? 내 비록 세상을 등지고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는 몸이지만
남의 고통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요. 너무 가혹한 말이군요.」
하는 여인의 태도는 자기의 성의에 너무나 냉담한 양몽환을 저주하는 듯 했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조금 처량해지는 듯한 것을 감출 길이 없었다.
양몽환은 목구멍에서 나오는 피를 뱉지 않고 삼키며 여인에게 얼굴을 돌렸다.
「성의와 정성은 잊을 길은 없소.
그러나 옥소선자처럼 아름답고 무술계에서 쟁쟁한 여인과 이런 심산에서 있다가
남에게 발견이라도 되면 옥소선자의 신상에 좋지 못한 소문이라도 날까
걱정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오. 그 외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일년 동안 나의 기분대로 살고 또 행동할 뿐이에요.
나의 이름은 더렵혀지거나 말거나 그런 것에 구애받진 않아요.
다만 당신을 살리고 싶은 것이 지금 내 마음이에요.」
「…………」
「당신은 몸을 조심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해요.」
「고마운 말이지만 이제 곧 죽을 몸을 왜 이렇게 도와주어서 내 마음을 송구스럽게 하시오?」
옥소선자는 양몽환의 말을 듣고 어이없는 듯 한참 바라보다가는 생글 생글 웃으며
양몽환에게 다가섰다.
「동생의 마음을 더욱 송구스럽게 한다고요? 호…… 호……
나는 내 손으로 동생을 죽여야만 마음이 편하겠어요.」
하고는 퉁소를 높이 들었다가 양몽환을 향하여 내리쳤다.
양몽환은 생각지도 못했던 옥소선자의 공격에 흠칫하며 우선 퉁소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며 독용분무(毒龍噴霧)의 일장으로 옥소선자의 어깨에 적중시켰다.
이는 천강장(天?掌)에서 가장 절묘한 무술 중의 하나이며 굉장한 위력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양몽환의 입은 상처도 상처이지만 죽음직전에서 옥소선자의 구원으로
의식을 회복했으나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양몽환의 기력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와 같은 상태에 있는 양몽환의 일격이야 말로 어린애의 주먹만큼도 위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양몽환이 옥소선자를 향하여 크게 휘두른 일격은 어이 없이도 양몽환 자기 자신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한편, 양몽환의 일격을 받은 옥소선자는 그의 공격이 아주 형편없이 미약하기는 했지만
그의 기묘한 무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옥소선자에게 일장을 적중시킨 양몽환은 자기가 지금의 상태로는 어떠한 공격도
허사라는 것을 직감하고 더구나 옥소선자에게 창피만 당할 것에 두려워 공격한다는 것을
포기하고 맞은편 산봉우리를 향하여 몸을 날리고 말았다.
양몽환의 묘한 절수(絶手)에 감탄을 금치 못하던 옥소선자는 양몽환이 갑자기
뛰어가는 것을 보고 잠시 원망이 가득 찬 눈길을 돌리다가 몸을 날려 양몽환의 뒤를 쫓았다.
양몽환은 뒤에서 달려오는 옥소선자를 돌아보고는 몸의 아픔도 잊고, 있는 힘을 다하여 달렸다.
이윽고 양몽환은 자기가 지니고 있는 모든 기술 즉 경신법과 경법과 무공을 이용하여
아픔과 피로를 참아가며 수백 장(數百丈)을 달려 높은 산봉우리까지 달려올 수 있었다.
뒤에서 공력을 이용하여 양몽환의 뒤를 따라오던 옥소선자는 양몽환의 무서운 집념과
굳은 의지에 새삼 감탄하며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아무리 영약으로 의식을 회복하고 공력도 어느 정도로 운행할 수 있다 하더라도
죽기를 결심한 듯 옥소선자를 피해 달아나는 양몽환의 의지력에는 옥소선자도
입을 벌릴 수밖에는 없었다.
옥소선자가 산봉우리 위까지 올라갔을 때 양풍환의 몸은 이미 다른 산을 넘어
절벽 위를 달려가고 있었다.
산봉우리에서 앞으로 그냥 달려가는 양몽환을 어이없이 바라보고 있던 옥소선자는
그곳이 바로 수백 길 낭떠러지라는 것이 생각되자 문득
(저 절벽에서 몸을 던져 죽을 결심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한 옥소선자는 일순-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 파르르 입술이 떨렸다.
순간!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옥소선자는 몸에 있는 공력을 있는 대로운행 집중하여
번개같이 날며 큰 소리로 외쳤다.
「동생! 뛰지 말아요!」
하는 그녀의 외치는 소리는 외침이 아니라 울부짖음 그것이었다.
아! 이 얼마나 안타까운 순간인가!
옥소선자도 더 쫓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듯 서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아무 생각도 없이 앞으로 달리기만 하던 양몽환은 뒤에서 울부짖는
옥소선자의 비명 같은 외침 소리를 듣고는 더 뛸 수 없는 듯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때,
옥소선자는 새파랗게 질린 채 오들오들 떨며 십여 장 뒤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지치고 쇠약한 몸으로 수백 장의 거리를 달려온 양몽환은
몸을 더 지탱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앗!」
옥소선자의 자지러지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하늘을 가르는 듯 처참했다.
(기어코 떨어졌구나! )
온 몸의 기운이 싸악- 빠지며 정신까지 아찔해 지는 옥소선자는 순식간에
몸을 날려 양몽환이 쓰러진 곳으로 번개처럼 달려갔다.
그러나 다행히 양몽환이 쓰러진 곳은 낭떠러지의 한걸음 못 미친 바위 위였다.
조금만 더 몸을 움직였거나 발을 짚었으면 어디 가서 매도 추리지 못할
신세가 될 뻔 했던 것이었다.
옥소선자는 엎어지듯 양몽환의 몸 위로 쓰러지며 가슴을 헤치고 귀를 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양몽환의 가슴에서 귀를 떼는 옥소선자의 이마에는 수없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숨은 붙어 있었다.
미약하기 그지없는 양몽환의 심장에서는 실낱같은 가느다랗고 가냘픈 심장의 뛰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무술계에서의 경험이 풍부한 옥소선자는 양몽환을 치료하여
소생시킨다는 것은 약으로는 도저히 불가능 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만큼 양몽환은 중태였다.
그녀는 쏟아지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었다.
심뢰의 일장(一掌)을 받아 내부의 각 기관이 휘말린 양몽환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숨을 붙이고 있는 것은
강에서 만난 백의(白衣)소녀가 준 영약의 효과에 기인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양몽환 스스로 치료를 서둘렀더라도 이와 같이 위태로운 상태는 없었을 것이었다.
그런 것을 옥소선자나 자기가 무술계에 퍼질 추문을 두려워하여 옥소전자의 간호를 물리치고
수백 장(數百丈)의 산길을 뛰어 달리는 무모한 것으로 더욱 위급을 초래하게 되고 말았다.
이로써 양몽환의 내상(內傷)은 급변하여 내부의 기능이 소실(消失)되는 것은 물론
전신의 혈맥마저 차츰 폐쇄 되어가고 있는 지경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
리하여 양몽환의 병세는 일각일각 위기를 향하여 치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옥소선자는 들었던 퉁소를 놓고 그래도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마음을 긴장시켰다.
그러는 그녀의 얼굴에도 상처의 아픔으로 병색이 완연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고 양몽환을 향하여 마주앉은 옥소선자의 표정은
심각하고 날카로웠다.
한참 동안 양몽환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옥소선자는
자기 몸에 있는 진기를 있는 대로 집중시켜 두 손 끝에 모은 다음
양몽환의 각처 요혈을 찌르고 다시 또 찌르고 그러다가는 전신과 관절을
주무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쉬지 않고 혈도와 몸의 관절을 정성으로 주무른 효과도 없이
양몽환은 점점 더 눈을 내려 감고 숨소리도 약해지는 것이었다.
초조와 절망에 빠진 옥소선자는 손을 멈추고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리고는 죽은 듯이 누워있는 양몽환을 물끄러미 한동안 바라보다가
갑자기 얼굴에 슬픔을 띄우며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동생아! 고요히 잠을 자거라. 너를 위해 평안한 영면지소(永眠之所)를 만들어
강호의 모든 분란을 일소하고 너를 지켜주마! )
그녀는 몸을 일으켜 양몽환을 안고 퉁소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허탈해진 사람처럼 산봉우리를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자기 스스로를 통제할 능력마저 잃어 버렸다.
텅 비인 마음속에는 슬픔도 분노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정신없이 몇 개의 산을 넘고 어느 시냇가에 도달하여
졸졸 흐르는 맑은 물소리에 갑자기 갈증을 느꼈다.
그녀는 양몽환을 땅에 눕히고는 물을 몇 모금 마셨다.
얼음같이 차가운 물에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든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 삼면에는 모두 연이은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정 북방 수백 장쯤 되는 곳에
높다란 산이 우독 솟아 있고 한줄기의 폭포가 그 산의 험준한 절벽 사이를 쫓아서
내려오다가 밑의 돌출한 커다란 바위에 부딪쳐 사방으로 물방울을 튀기고 있었다.
그 폭포를 멀리서 보면 한 조각의 깊은 안개 덩어리가 허공중에 응결된 듯 하였다.
옥소선자는 잠깐 거리를 재어본 후 양몽환을 다시 안고 시냇물을 따라
북쪽의 높은 산봉우리로 걸음을 옮겼다.
폭포가 점점 가까워 오며 물이 떨어지는 소리는 더욱 커져 뇌성같이 울려오는
소리가 점차 뚜렷해졌다.
차가운 물방울이 그녀의 얼굴에 튀어올 때마다 그녀는 다시 공허한 세계에서 깨어났다.
이윽고 옥소선자는 양몽환의 육중한 몸을 안고 높은 산을 넘어 어느덧 계곡까지 내려 왔다.
그 곳에는 푸른 잎이 우거진 소나무와 기름이 도는 듯한 노란 잔디가 푹신한 방석과도 같이
가지런히 깔려 있었다.
그리고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골짜기에 햇빛이 쨍쨍 내려쪼여 따뜻하고 아늑했다.
옥소선자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따스한 햇살에 스르르 감겨지는 눈을 떠 품에 안고 있는
양몽환을 내려다보았다.
꼭 감은 두 눈, 관옥(冠玉)같은 옛 얼굴빛은 이제 백납같이 창백해져 실낱같은
숨만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탄식하는 듯 한숨을 쉬며 양몽환을 가만히 흔들었다.
「동생! 왜 이제는 또 뛸 생각도 않지? 그러나 평안히 자요! 내 너를 지켜 줄께.」
하고는 가만히 고개를 숙인 옥소선자는 자기의 뜨거운 입술을 양몽환의 꼭 다물어진
입술 위에 대며 입을 맞추었다.
양몽환의 핏기 없는 입술에서 입을 뗀 옥소선자는 어떻게 하겠다는 결심도 없이
양몽환을 안고 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녀의 시선에는 가파른 절벽에 있는 하나의 굴을 발견했다.
(옳다! 저곳이라면 편히 잠들 수 있겠지-)
이렇게 생각한 옥소선자는 굴을 향하여 급히 달렸다.
그러나 그 굴은 겨우 한 칸 정도 밖에 안 되고 그 안에는 짐승들이 죽어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옥소선자는 실망을 한 아름 안고 굴을 나와 다시 절벽을 타고 북쪽으로 나아갔다.
이때 그녀와 품속의 양몽환은 폭포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튀기는 물방울로 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생각난 듯 고개를 들고 폭포의 물이 부딪치는 바위 밑을 쳐다보았다.
그 돌출한 커다란 암석 밑에는 움푹 파진 굴이 있었다.
그 굴은 얼마나 깊이 파여져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두 사람이 거처할만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곳까지는 가파르고 매끄러운 절벽으로 옥소선자가 선 곳에서
약 이십여 장이나 되는 거리에 있었고 올라가기도 힘 든 곳이었다.
옥소선과는 한참 동안 생각한 끝에 양몽환을 내려놓고 등나무 줄기를 듬뿍 구해왔다.
그리고 그 등나무 한 쪽을 자기 몸에 감고 한쪽은 양몽환의 몸을 감은 뒤
그녀는 벽초공(壁超功)의 무공을 발휘하여 그 돌출한 바위 밑 움푹한 곳에 도달한 후
양몽환이 묶여져 있는 등나무 줄기를 잡아끌었다.
그 움푹 파여진 곳은 명실공히 하나의 굴이었다. 왼쪽으로 돌아 오른쪽으로 굽어지는
약 이장의 깊이로 넓이가 여덟 자의 동굴로서 그것은 인공적인 굴과 다름없었고
그 입구에서 튀기는 물방울과 돌암(突岩)에 부딪쳐 쏟아지는 폭포수로 안개가 끼 듯
자욱이 시야를 가려주고 있었다. 양몽환을 굴속까지 끌어올린 옥소선자는
양몽환을 편안한 자세로 쉬게 하였다.
그러나 양몽환은 여전히 혼미상태에 빠진 채 실낱같은 숨만 쉬고 있었다.
옥소선자는 양몽환의 맞은편에 앉아 물끄러미 양몽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퉁소를 들고 서글픈 듯 눈물을 글썽거리며
「너를 위해 퉁소라도 불어 주마.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지만, 불어 줄께.」
하고는 퉁소를 살며시 입술에 갔다대는 옥소선자의 눈에는 눈물이 번득이고 있었다.
옥소선자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가만히 퉁소에 입김을 넣어 불기 시작했다.
마디마디 단장을 끊는 듯 애타는 퉁소 소리가 여음에 여음을 타고
미처 고백하지 못한 사랑의 하소연을 퉁소로 표현하듯 그 소리는 애절하고도 슬펐다.
그러는 옥소선자의 마음속에는 울분과 슬픔 그리고 애수가 굽이굽이 오장육부를 찌르고
급기야는 비통에 빠져 있던 옥소선자의 강한 심장을 통곡으로 변화시키고 말았다.
그 울분과 모든 비애를 발산시키는 듯 애절한 퉁소 소리는 옥소선자의 가슴을 찔러
그는 더없이 처참했다.
이윽고 옥소선자의 울음은 큰 소리로 변하고 말았다.
얼마 동안이나 그렇게 슬피 울었을까.
홀연!
뜻밖의 굵은 목소리가 옥소선자의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흥! 아주 제법인걸! 죽어가는 사람 옆에서 퉁소를 불다니!
하지만 십년 백년을 불어도 소용 있나?」
하는 것이었다.
퉁소를 불며 비통에 잠겨 있던 옥소선자는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스라치듯 놀라며 몸을 급히 돌렸다.
그러나 옥소선자는 퉁소의 청아하고도 슬픈 곡조에 자신도 모르게
감동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공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심난에 빠져 있었던 때였다.
옥소선자는 불던 퉁소를 거두어 힘 있게 쥐고 소리 나는 곳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그곳에는 여인처럼 아름답고 귀여운 얼굴의 소년이 황의(黃衣)를 입고
장검을 멘 채 서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팔목에는 금환이 끼워져 있었다.
(아름다운 소년이군!)
하고 얼핏 생각하는 옥소선자를 비웃는 듯 바라보던 소년은
쓰러져있는 양몽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옥소선자는 그의 아름다운 자태에 매혹되듯 하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퉁소를 편 손을 높이 쳐들어 허공을 가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당신은 누구요?」
금시 퉁소로 내려칠 기세로 다가갔다.
그러나 황의 소년은 눈썹 하나 까딱 없이 두 손바닥을 벌려
방어태세를 취하며 늠름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본인은 도옥이라 하는 사람이오만,
아가씨는 무술계에서도 이름 높은 옥소선자가 아니신지」
하고는 그녀의 대답은 들을 필요조차 없다는 듯이 말을 계속했다.
「미안하오만 거기 누워 있는 사람은 곤륜파의 양몽환이 아니오?」
하는 그의 태도는 자신과 긍지로 가득 찼다.
도옥의 말을 들은 옥소선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서
자기의 이름과 양몽환의 이름까지 대며 늠름하고 태연자약하게 행동하는
그의 태도에 내심 저윽이 놀랐다.
옥소선자가 괴이한 듯 도옥을 바라보는 동안-.
도옥은 누워있는 양몽환에게 다가오며 또 한 번 비웃는 듯 냉소하며
옥소선자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조롱하듯 웃음을 띠며
「양형은 여복(女福)도 많군, 전에는 예쁜 사매가 따르더니
오늘은 옥소선자께서 피리까지 불어 주시고…… 흥!」
하는 것이었다.
순간!
옥소선자는 도옥의 비웃음과 조롱에는 더 참을 수 없었다.
높이 쳐들었던 퉁소를 도옥의 명문혈을 향하여 내리쳤다.
그러나 옥소선자의 일격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냉소하며
가볍게 몸을 피한 도옥은 주춤 몇 걸음 물러서는 척 하다가 벼락같이
옥소선자의 퉁소를 막으며 분운취월(分雲取月)의 한 수로 역습하며 내달렸다.
그러자 옥소선자는 황망히 몸을 피하며 다시 공격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바로 그 때였다.
잠시의 여유도 주지 않고 느닷없이 내달리던 도옥은 옥소선자가 몸을 피하자
눈 깜박하는 사이에 쓰러져 있는 양몽환을 번쩍 들어 옆에 끼는 가 했는데
어느 사이에 노란 옷자락을 펄럭거리며 달아나는 것이었다.
「앗!」
옥소선자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퉁소를 휘둘러 몸의 진기를 암암리에 운행하여
도옥의 뒤를 따라 달렸다.
그러나 도옥이 양몽환을 안고 달려가는 길은 수백 길이 넘는 절벽 길이었다.
그리고 그 절벽을 끼고 바로 옆에는 폭포가 쏟아져 깊은 못을 이루고 있었다.
비록 무공이 절묘하여 귀신같은 재간이 있다 하더라도 도옥 혼자 몸이 아닌
양몽환을 그도 시체나 다름없는 양몽환을 안은 채 뛰어 달린다는 것은
죽음을 초래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옥소선자는 급히 도옥의 뒤를 따르다가 일이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자기가 급히 따라 감으로서 도옥을 당황하게 하여 절벽 밑으로 아니면
깊은 연못으로 빠져 양몽환을 죽이면 모든 것이 허사라는 것도 직감했다.
도옥의 안하무인격인 무례한 행동에는 참을 수 없었지만 양몽환을 생각하고
따라가던 속도를 늦추었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퉁소를 삼성축윌(三星逐月)의 무술로 변화시켜
앞서 가는 도옥을 향하여 연거푸 세 번을 찔렀다.
그러나 앞서 달리던 도옥의 무술도 이만 저만한 절묘한 무공이 아니었다.
옥소선자의 날카로운 삼성축윌의 세 수를 왼 손으로 간단히 막아버리고 말았다.
옥소선자의 묘수를 가볍게 막아버리는 도옥의 절묘한 무공에 저윽이 놀란 옥소선자는
어안이 벙벙했다.
비록 도옥의 수법이 무술계에서는 볼 수 없는 괴상한 무공이지만 옥소선자처럼 무술계에
명성이 쟁쟁한 자기 자신도 아직 도옥과 같은 신묘한 수법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옥소선자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버린 도옥은 몸을 돌려 옥소선자를 향하고 왼 손을
앞가슴에 대는 척 하면서 몸을 사리며 달려들었다.
옥소선자는 도옥의 안하무인격인 행동에 크게 노하여 달려드는 도옥의 머리를 향하여
들고 있던 퉁소를 공작법(孔雀法)으로 급변시켜 크게 원(圓)을 그리면서 마주 후려쳤다.
그러나 도옥이 쓰는 수법은 일찍이 삼음신니의 권법책에 기록되어있는 절학의 한 수로써
괴인 각우(覺愚)를 죽게 한 바로 그 수법이었다.
이것은 유어역랑(遊魚逆浪)이라는 절학의 무공으로 상대방이 발휘한 무공을 역이용하여
무서운 장풍을 일으켜 역습하도록 되어 있는 무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좀처럼 이 살인적인 유어역랑의 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한 무공을 지금 도옥은 옥소선자에게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한
옥소선자는 퉁소로 후려친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도옥이 그녀의 퉁소를 따라 몸을 움직이며 옥소선자 옆으로
달려 들어오는 것이었다.
처음 겪는 기묘한 신법에 깜짝 놀란 옥소선자는 재빨리 왼손으로 장풍을 일으켜
도옥에게로 밀어 붙였다.
그러나 도옥은 왼손을 슬쩍 내려뜨리며 몸을 옆으로 비켰다.
그러자 옥소선자의 손이 도옥을 스치고 지나가는 찰나!
어느 사이에 도옥의 손아귀에 옥소선자의 팔이 잡히고 말았다.
그 순간!
도옥에게 팔이 잡히고 관절까지 잡힌 옥소선자는 그의 수법이 타혈(打穴) 수법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직감하고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옥은 코웃음을 치며 건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옥소선자는 온몸의 힘이 단번에 빠져 나가는 것
함께 관절이 부러져 나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옥소선자는 이 상태로 도옥이 자기의 손을 비튼다면 팔이 부러질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개성이 강한 그녀는 입을 꼭 다물며 고통을 참았다
그러자 도옥은 잘을 더 비틀지 않고 힘주어 잡은 채 노려보며 냉소했다.
「아가씨! 어떻소? 졌다고 생각하진 않으시오?」
옥소선자는 노기를 띠고
「마음대로 하지!」
하고 차갑게 내쏘며 잡힌 팔목을 뽑으려고 했다.
그러자 도옥은
「당신 하나를 없애는 것은 간단하지만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하고는 옥소선자의 팔을 놓으며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도옥의 손에서 놓여나온 옥소선자는 잡혔던 팔을 움직이며 도옥을 노려보았다.
한참 동안 노려보던 옥소선자는 도옥의 늠름하고 씩씩한 얼굴에 도취된 듯
점점 눈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오른 손으로 양몽환을 힘 있게 끌어안고 있는 도옥의 얼굴은 윤기가 돌고
백옥같이 하얀 이가 가지런히 차돌처럼 단단하게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의 미목(眉目)은 그려 붙인 듯 하고 그의 자태는 외양은 비록 남자이지만
만일 여자라면 드물게 보는 미인의 얼굴이었다.
옥소선자가 자기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아챈
도옥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자! 졌다고 생각하진 않으시오?」
하고 또 조롱 섞인 말로 빈정거렸다.
그제야 제 정신으로 돌아온 옥소선자는
(휘익!)
몸을 날리며 퉁소를 휘둘렀다.
옥소선자가 이를 악물며 달려들자
도옥은 다시 유어역랑을 써서 가볍게 옥소선자의 오른 팔목을 잡고 말았다.
「그래도 졌다고 생각하지 않으시오?」
여전히 빈정거리며 비웃는 도옥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옥소선자도속으로
화가 뻗칠 대로 뻗쳐 이를 갈았다.
그러나 팔목이 잡혀 꼼짝할 수 없었다.
그때!
도옥의 오른 손에 안겨있던 양몽환이 혼미해 졌던 정신을 차리며
신음 같은 소리로 도옥을 불렀다.
「도형! 그녀……를…… 해치진…… 말아요.」
하는 소리에 잡았던 옥소선자의 손을 놓고 양몽환은 죽은 듯이
눈을 감은 채 꺼지는 듯한 가는 숨만 쉬고 있었다.
순간!
옥소선자를 날카롭게 노려본 도옥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고함을 질렀다.
「양형! 살아봤자 고생이오. 이 도옥이 편히 잠들게 해 주겠소!」
하고는 절벽으로 양몽환을 안고 올라갔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양몽환을 높이 쳐들고 수백 장의 절벽 밑을 굽어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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