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비연경룡

제 21 장 만불정(萬佛項)에서의 위기일발 <鶯飛燕舞>

오늘의 쉼터 2014. 6. 22. 13:29

제 21 장 만불정(萬佛項)에서의 위기일발 <鶯飛燕舞> 
 
 

  옥소선자는 양몽환의 당황하고 화가 난 얼굴을 재미있는 듯 보고 있었다.

살짝 들여다보고는 픽하고 웃었다.

  양몽환은 더욱 얄미워 얼굴을 찡그렸다.

 

「이야기를 안 했으면 그만이지 왜 웃소?」

 

  옥소선자는 가만히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모양 좀 보시죠. 호호……

그러다 병이 나면 어떻게 하려고요?」

 

  양몽환은 더 한층 약이 바짝 올랐다.

  한 손으로 뿌리치면서 화를 냈다

 

「누가 당신 보고 걱정하라고 했소!」

 

  옥소선자는 가볍게 양몽환이 뿌리친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는 여전히 방글거리면서 놀리는 것이었다.

 

「어머나! 만약 내가 죽게 되면 만불정(萬佛頂)을 빠져 나가지는 못할걸요.」

 

여전히 방글거리면서 약을 올려 주었다.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손으로 그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양몽환은화도 났지만 그보다도 부끄러움이 앞섰다.

오른 팔에 힘을 주어 뿌리쳤다.

손이 빠지자 노기를 품은 어조로 꾸짖었다.

 

「왜 이렇듯 무례하게 구시오? 내가 한번 미워하긴 시작하면……」

 

  옥소선자는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미워해도 나를 잡아가지는 못하겠죠.」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지 갑자기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날카로운 소리였다.

 곧이어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리고는 네 사람의 승려가나타나 그들을 포위하는 형세를 취하고 서는 것이었다.

그래도 옥소선자는 태연히 큰 소리로 웃으며 양몽환을 돌아다보고 있었다.

 

「동생! 어때요? 방금 그 일장으로 정말 나를 죽이기나 했더라면

지금쯤은 동생 혼자 꼼짝없이 위험에 빠지고 말았을 것 아녜요?」

 

  양몽환은 쓴 웃음을 웃었다.

 

  양몽환은 옥소선자와 같이 염치불구 하고 제멋대로 종알거리는

여인을 만나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당장에 몇 마디 쏘아주고 싶었지만 주위 형편을 생각하여 잠시 참았다.

네 사람의 적에게 포위된 지금에는 그녀의 도움으로 포위망을

뚫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어 목구멍까지 나왔던 말을 삼키고 말았다.

  양몽환은 담담히 웃으며 동발(銅鉢)을 든 승려에게 물었다.

 

「노선배님께서는 저의 사부님의 친구이시라는데

제가 어찌 감히 무례한 행동을 하겠습니까?

다만 노선배님께서 저의 사부님의 얼굴을 보아서 이 후배를 데리고 가 주십시오.

귀파의 장문 선배님께 알현할 기회를 주셔서

사부님의 행방을 알도록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동발을 든 승려는 기다란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마지못해 옆에 서 있는 젊은 승려에게 묻는 것이다.

「곤륜파의 일양자 도장께서 근일에 우리 만불사(萬佛寺)에 오신일이 있느냐?」

 

  젊은 승려는 두 손으로 철선장을 잡고 흑의의 옥소선자를 노려 보다

동발 승려가 묻는 말에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선장을 오른손으로 모아서 잡았다.

그런 후 왼 손을 가슴에 대면서 허리를 굽히고 공손히 대답했다.

 

「제자는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저 흑의의 젊은이는 수일 전 우리 절에서 도망친 사람입니다.

도망가는 것을 잡지 않고 두었는데 오늘 또 나타났습니다.

다시 나타난 이상 절대로 놓쳐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동발 승려는 매우 엄숙한 얼굴로 양몽환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떻든 이번만은 너의 사부님 얼굴을 봐서 놓아 주겠다.

두말 말고 빨리 만불정을 내려가거라.」

 

  그러나 사부님의 안부를 모르고는 그대로 내려갈 양몽환이 아니었다.

양몽환은 옥소선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왼 손으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얼굴에 가득히 웃음을 띤 채 아무 말도 안 했다.

양몽환은 그녀에게 묻고 싶었지만 또 다시 그녀가 무슨 장광설이나 걸어올까 해서 그만 두었다.

그리고는 한 번 더 고 동발 승려에게 정중히 예를 올리고 웃으며 말했다.

「후배는 사부님께서 확실히 이곳으로 오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선배님께서 사부님의 친구이시니 모쪼록 후배를 도와 사부님의 행방을 알려 주십시오.」

 

  동발 승려는 약간 난처한 빛을 띄웠다.

그런 후 냉정한 어조로 명령이나 하는 듯이

 

「알겠다. 어쨌든 여기를 떠나거라! 내가 장문인에게 물어 보아서

정말 너의 스승이 만불사에 계시다면 말씀드려 무사히 돌아가시게 하겠다.」

 

  양몽환은 그래도 초조하기만 했다.

 

  다시 공손히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시면 노선배님! 소제가 귀파의 장문인을 만나 뵈옵게라도 해주십시오.」

 

  그러자 간청하는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꾸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도대체 네가 무엇인데 귀하신 장문 사존을 만나겠다고 하느냐?」

 

  건방지고 오만한 말투였다.

 

  양몽환이 바라보니 바로 동발 승려가 말을 묻던 젊은 승려였다.

울컥 화가 치민 양몽환이 반박하려고 하자 옥소선자가 먼저 웃으며 가로막고 나섰다.

 

「대단하시군, 함부로 입을 놀리는 걸 보니 무척 살기가 싫은가 보군. 흥!」

 

  그 말을 듣자 젊은 승려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 승려는 아미파(峨嵋派) 장문인 초범대사의 삼대 제자로 심뢰(心雷)라는 중이었다.

그는 초범대사의 총애를 받아 무공의 절기는 동문 사형제들 보다는 월등하였다.

그래서 항상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터였다.

지난번 양몽환이 이요홍을 구하려고 만불사에 뛰어 들었을 때는 마침 외출하고 없었다.

돌아와서 그의 두 사형과 사제 세 사람이 덤벼들어서도 양몽환을 잡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대단히 분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던 중 마침 그때 장본인인 양몽환과 만나게 되어 복수를 하려는 참인데

동발 승려가 옆에 있어서 달려들지는 못하고 분노를 억제하고 있던 중이었다.

  어쨌든 무슨 트집을 잡든지 양몽환을 자극시켜 싸움을 벌려 복수하려고 노리고 있는데

부득부득 장문인을 만나게 해 달라는 양몽환의 요구에 마침 잘 되었다 싶어

한바탕 쏘아붙이고 만 것이었다.

심뢰 화상은 옥소선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는데

그녀가 대꾸하자 화를 벌컥 내며 달려 왔다.

그리고는 철선장으로 후려치면서 고함을 질렀다.

 

「무엇이 어째! 그래 누가 살기 싫어졌는지 해 보자!」

 

  그러나 옥소선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간지러운 웃음을 터뜨리면서 슬쩍 양몽환의 옆으로 피하였다.

그리고는 양몽환에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어때? 저걸 죽일까? 살려 둘까?」

 

  양몽환은 그녀의 성미가 악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황급히 말렸다.

 

「그를 해치면 안 되오!」

 

  그러나 옥소선자는 빙글 몸을 돌려서 심뢰 화상의 옆으로 다가 가며 이죽거렸다.

 

「그렇다면 조금 쓴 만이나 보여 줄까?」

 

  옥소전자의 안하무인격인 행동에 심뢰는 은근히 마음을 도사렸다.

  그러자 양 편에 서 있던 두 승려도 슬며시 심뢰를 감싸고 나셨다.

그때, 옥소선자의 퉁소가 번개 같이 바람을 갈랐다.

두 승려는 미처 손 쓸 틈도 없었다.

두 승려가 허겁지겁 피하자 곧장 뛰어 들어간 옥소선자의 왼 손은

심뢰의 가슴을 찌르며 들어갔다.

어찌나 재빠른 술법인지 번갯불 같았다.

심뢰 화상도 그 신출귀몰하는 술법에는 그만 숨을 죽이고 말았다.

자기의 앞가슴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심뢰 화상은 급히 철선장을 휘둘러 막았다.

그러나 허사였다!

옥소선자가 갑자기 수법을 바꾸어 손으로 느닷없이 원을 그리면서 펄쩍 뛰었다가는

심뢰의 풍부혈(風府穴)을 찌르면서 달려드는 것이었다.

순간, 심뢰는 피하려고 안간힘을 썼었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늦어서 오른쪽 어깨가 찌르르 하는 고통에 그만 선장을 놓치고 말았다.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란 동발 승려는 재빨리 달려들면서 동발로 옥소선자의 머리를

깨져라 하고 후려쳤다.

그 동발은 적어도 백 근 이상의 무게를 가진 것이었다.

옥소선자도 감히 맞받을 수 없으리라 짐작하였다.

그러나 재빨리 몸을 피한 옥소선자는 퉁소로 동발 승려의 현기혈(玄氣穴)을 노리고

후려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동발 승려는 옥소선자의 퉁소 수법이 재빠름을 알아채고는 석자나 물러섰다.

그러나 옥소선자가 깔깔거리며 약을 올렸다.

 

「법사님, 가지 말고 좀 더 놀아요.」

 

  얄밉도록 웃으면서도 손은 여전히 번개같이 움직이며 삽시간에 연달아

네 번을 공격해 오는 데는 아무리 도를 닦은 중이라도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 화가 치민 동발 승려는 성난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휘두르는 동발에서는 삽시간에 바람이 일어나

눈앞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때마다 쨍그랑하는 쇳소리가 울렸다.

이 소리는 모두 퉁소와 동발이 맞부딪치는 소리였다.

퉁소의 공격을 막자 동발 승려는 즉각 반격을 가하였다.

거대한 몸집과 동발은 언뜻 보기에는 굉장히 육중한 것 같았다.

화상은 옥소선자의 빈틈을 노려 번개 같이 돌아갔다.

그러자 옥소선자 역시 지지 않으려는 듯이 퉁소를 재주껏 휘둘렀고

몸은 재빠른 제비처럼 가볍게 날아 돌아갔다.

이와 같이 모두 뛰고 나는 재빠른 움직임에 사람의 형체마저 분간할 수 없었다.

  옥소선자와 동발 승려가 한데 어울렸다.

주위에 섰던 세 승려도 일시에 선장을 휘두르며 양몽환을 공격했다.

이들은 모두 아미파 장문인 초범대사의 문하제자였다.

바로 만불사의 사대 호법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자들인 만큼 무공의 조예들도 깊었다.

세 사람이 달려들자 양몽환도 어쩔 수 없이 검을 빼들었다.

다행히도 심뢰 화상이 현기혈을 찔리고 싸우지 못하기 때문에 양몽환도

겨우 그들과 맞싸울 수 있었다.

그는 오른 손으로 분광검법을 쓰고 왼 손으로는 등인대사에게서 전수 받은 십팔나한 장법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의 공격이 이십 여 합에 이르기 까지도 한사람의 중을 쓰러뜨릴 수는 없었다.

그러는 한편 옥소선자와 동발 승려도 역시 제각기 자기들이 사랑하는 절기로서 다투고 있었다.

동발을 든 승려는 아미파 사로(四老)중의 한 사람으로 무예가 절묘한바 있었다.

그렇건만 옥소선자와 같은 강적과 맞서서는 이길 가능성은 없고 겨우 전력을 다하여

방수(防守)에 열중할 도리 밖에 없었다.

이들이 싸우기를 약 삼십 여 합 하였을까?

갑자기 옥소선자가 날카롭게 한소리 부르짖으며 마운십팔수(摩雲十八手)를 전개하였다.

허공에 몸을 날리는가 하면 때로는 앞에서 때로는 뒤로부터 표연히 공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동발 승려는 겨우 여섯, 일곱 번을 막아 내고는 당할 수 없었음인지

취팔선신법(醉八仙身法)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이 수법은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며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일장 둘레에서 빙빙 돌며

싸우는 술법이었다.

 

그의 이러한 수법은 걸음걸이가 조금도 법칙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유심히 살펴보면 때로는 서서히 또 때로는 빠르게 움직여 손에 들린

동발과 혼연 일체가 되어 움직이는 것이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옥소선자는 이미 아미파에는 이 같은 취팔선(醉八仙)이란 요란한 신법이 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기가 다행이었다.

때문에 동발 승려가 비틀 비틀 하면서 묘하게 움직이자

즉각 알아차리고는 더욱 날렵하게 움직여 세찬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옥소선자도 그 이상 더 뚫고 들어 갈 수 없는지 연달아 퉁소와 동발이 부딪치는

소리만 들려올 뿐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양몽환 역시 검과 장으로 세 승려와 싸우긴 해도 여전히

서로 승부를 가릴 수 없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었다.

바로 그 순간!

 

「나무아미타불!」

 

하고 우렁찬 염불 소리가 진동하였다.

그리고는 양몽환을 공격 하고 있던 세 승려가 삽시간에 물러나는가 하면

동발 승려도 급히 공격을 멈추고 몸을 돌리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자 의아하게 두리번거리던 양몽환은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몸에는

붉은 가사를 걸치고 키가 훌쩍 큰 아미파의 장문인 초범대사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왼 쪽에는 회색 승의에 기다란 눈썹을 한 깡마른 노승이 눈을

반쯤 감은 채 서 있고 오른 쪽에는 하얀 버선을 신은 여승이 서 있었다.

그리고 옥소선자에게 혈도를 찔린 심뢰가 이 사람들에 의해 혈도를 풀고 운기하고 있었다.

  뜻밖에 강호의 고수들과 접하게 된 양몽환은 이제 그 만큼 경험도 늘었다.

양몽환은 그 여성이 초범대사와 나란히 서 있는 것으로 미루어 장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칼을 접으며 공손하게 읍을 하는 것이었다.

 

「곤륜파의 제자 양몽환이 삼가 대사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그러자 초범대사는 담담한 표정으로 양몽환과 옥소선자를 번갈아보며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강호에 이름 난 옥소선자가 이 황산에 오신 줄도 모르고 영접하지 못해 죄송 무지로소이다.」

 

  그 말에 옥소선자는 깔깔 웃으며

 

「대사부께서 너무 겸손하신 말씀이에요.

소매(小妹) 심심해서 놀러 왔을 뿐이죠.」

 

내뱉듯이 말했다.

 

「그럼 너는 저 옥소선자를 믿고 한 번 갔다가 또 다시 왔느냐.」

 

하는 것은 양몽환에게 하는 말이다.

 

「내가 다시 온 것은 사부님의 소식을 알고자 해서 왔습니다.」

 

  어디 까지나 공손한 말에 초범대사 옆에 섰던 노승이 갑자기 감았던 눈을 뜨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양몽환을 쏘아 보는 것이었다.

 

「너의 사부란 일양자인가?」

 

「네, 그렇습니다. 노선사께서는 저의 스승을 보셨습니까!」

 

하고 양몽환이 기뻐서 묻자 노승은 나직이 아미타불을 외우고는

눈을 다시 감아 버리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그의 표정은 일양자의 행방을 알고 있는 듯 하였다

다급해진 양몽환은 조금 소리를 높였다.

 

「노선사께서는 저의 스승의 행방을 아시면서 왜 대답을 안 하십니까?무슨……」

 

하는데 초범대사가 갑자기 소리를 꽥! 지르며 그의 말을 가로 막았다

 

「여기가 어느 곳인데 네가 함부로 떠드느냐? 곤륜파의 규칙은 엄하다더니

그렇지도 않은가 보구나.

곤륜 삼자가 어찌 너같이 예의를 모르는 녀석을 가르쳤는지 한심하군!」

 

점잖게 꾸짖는 초범대사를 바라보는 양몽환은 모욕이라도 당한 듯 무안해졌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때 옥소선자의 낭랑한 음성이 들렸다.

 

「곤륜삼자가 뭐 어때요?

 내가 보기에는 당신들 아미파보다는 훨씬 훌륭해요.

일파 종사의 신분이면 만불사의 승려들이나 호령할일이지

왜 남에게 큰 소리를 치고 야단이죠.」

 

  아니꼽다는 듯이 눈을 흘기는 옥소선자의 말에 눈을 감았던 노승은

불이 번쩍 번쩍 하는 눈빛으로 옥소선자를 노려보았다.

 

「여시주가 바로 유명하다는 옥소선자이시오?」

 

  옥소서자는 여전히 차가운 태도였다.

 

「과분한 말씀. 대사님의 칭호는 어떻게 되는지요?

소매(小妹)의 아둔한 눈은 대사님을 몰라보겠군요.」

 

  노승은 다시 눈을 감으며 두어 번 잔기침을 하고는 조용히 대답했다.

 

「아미타불. 노화상은 산야초인(山野草人)으로 이름은 잊은 지 오래 되었소.」

 

하자

 

오른 쪽의 여승도 거만한 태도로 나서는 것이었다.

 

「강호에 옥소선자의 대명이 널리 알려져 소승이 흠모한지 오래요.

오늘 이 기회에 그대의 절기를 구경하게 되어 영광이군요.」

 

하고는 썩 나서며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나직이 아미타불을 불렀다.

옥소선자는 눈앞에 서 있는 화상들이 모두 강적임을 직감했다.

더욱이 안광을 번쩍이는 기다란 눈썹의 노승은 재간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생 동안 예의와 속박에 구애되어 본 일이 없는 옥소선자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냉소를 터뜨렸다.

 

「싸우시는데 그렇게 점잔을 뺄 것은 없는 줄 아는데요.」

 

하고 말이 떨어지자마자 번개 같이 몸을 날려 앞으로 달려 나가면서

퉁소로 바람을 일으켜 순식간에 세 곳을 찔렀다.

이에 중년 여승은 등에 메고 있던 장검도 빼지 못하고 재빨리 뒤로 다섯 자를 물러섰다.

그리고는 두 손에 손바람을 일으켜 급히 후려침으로서 겨우 막아냈다.

 

이렇게 싸움이 벌어지자

가만히 보고만 있던 초범대사가 준엄한 얼굴로 크게 꾸짖었다.

 

「옥소선자! 본 파와 그대 사이에는 서로가 따져야 할 일은 하나도 없어!

그런데도 다시 만불사에 나타나 시비를 걸어온다는 것은 아미파의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그대를 그냥 둘 수 없소!」

 

  그러나 옥소선자는 여전히 태연하고도 차가운 태도로 대꾸했다.

 

「가만히 두지 않으면 별 수 라도 있나요?

더구나 부처가 되겠다는 중이 여자를 어쩌시겠다는 거예요?」

 

놀리는 듯 깔깔거리기까지 했다.

이때 더 참지 못할 만큼 눈썹이 곤두선 여승은 장검을 때어 들고 달려들면서

옥소선자의 어깨와 가슴을 노리고 능수능란한 수법으로 쳐들어 왔다.

그러자 옥소선자도 때를 같이 해서 퉁소로 검을 막아 내고는

두 번 휘두르며 어울려 돌아갔다.

이 바람에 삽시간에 검과 퉁소의 광막은 하늘을 덮을 듯 했다.

  그러한 옥소선자는 일변 싸우면서도 주위의 동정에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초범대사와 동발 승려는 좌우에 서서 그들의' 싸움을 주시하고만 있고

기다란 눈썹의 노승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서서는

격렬한 격투에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양몽환은 초범대사의 네 제자들에게 포위된 채

쌍방이 일촉즉발의 태세로 노리고 있었다.

그러한 양몽환을 바라보는 옥소선자는

그가 네 승려의 협공을 막아내지 못 할까 무척 염려스러웠다.

그래서 옥소선자는 될 수 있는 대로 양몽환과 뭉쳐야겠다고 생각하고 즉시 공세를 취하였다.

옥소선자의 퉁소가 느닷없이 날카롭게 연달아 휘둘러졌다.

그 바람에 여승이 급히 뒤로 물러나자

그 틈을 이용하여 양몽환의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때 초범대사의 일갈 소리가 났다.

그리고는 옥소선자의 앞을 막아서서는 두 손으로 장풍을 일으켜 후려쳤다.

원래 초범대사는 아미파의 장문인으로 공력의 심후함이 대단했다.

그가 장풍을 몰아친다면 그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그러한 그의 장풍을 잘 알고 있는 옥소선자도 그 장풍만은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 틈을 노리고 여승의 장검이 옥소선자를 향하여 유성처럼 흘렀다.

  소름이 끼치도록 아슬아슬한 위기를 면한 옥소선자는 날아오는 장검을 퉁소로 후려쳐 버렸다.

그 순간 옥소선자의 얼굴도 핼쑥해졌다. 그러한 옥소선자의 얼굴에는

싸늘한 빛이 도는 가 했는데 휙! 공중으로 치솟아 운용삼현(雲龍三現)법을 써서

퉁소를 휘두르니 그 기세는 성난 호랑이처럼 날카로워 도저히 막을 도리가 없었다.

  재빨리 뒤로 물러서는 여승도 속으로 과연 옥소선자의 소문이 거짓이 아니라고 감탄 했다.

그러나 물러설 수만은 없는 여승이었다. 몸을 가다듬고 장검을 겨누던 여승은

또 다시 땅을 박차고 나는 옥소선자의 행동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허공으로 날은 옥소선자는 공중에서 빙글 돌고는 뜻 밖에도 수 장 뒤로 물러나

사뿐히 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미처 그 연유를 깨달을 들도 없이 다시 한번 몸을 날리면서 퉁소를 무섭게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양몽환을 둘러싸고 있던 두 승려가 뜻밖의 기습에 놀라 황망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양몽환의 옆으로 달려 온 옥소선자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들의 수가 많으니 일찍 돌아가요!」

  양몽환은 그녀가 자기를 염려해 주는 것이 고마웠다. 그러나 마음한 구석에는 여전히 불안하고 조심스러웠다.

「아니, 저 때문에 싸울 필요는 없어요. 당신이나 빨리 가시오.」

하는 말에 옥소선자는 정이 듬뿍 어린 얼굴로 웃는 것이었다.

「동생이 안 간다면 나도 안 가겠어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지. 어차피 한번은 죽을 목숨이라면 여기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피를 쏟아도 좋아요.」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달려드는 여승의 차가운 검광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와 때를 같이해서 양몽환을 둘러쌌던 승려들도 제각기 철선장을 비껴들며 전후좌우에서 양몽환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왔다.

  이윽고 옥소선자는 표독스럽게 외쳤다.

「어차피 한 번 죽어 보려고 마음먹었다면 통쾌히 싸워 볼까?

동생, 누나의 퉁소 수법이 어떤 가 잘 봐요.」

  삽시간에 그녀의 얼굴빛이 싸늘해지면서 느닷없이 무슨 마력을 내 뿜는 듯이

무섭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한 그녀의 퉁소 수법은 성난 파도와 같이 날카롭고 무서웠다.

이러한 옥소선자의 수법에 여승은 또 한번 놀랐다.

숨 가쁘게 피하기도 바빴다 그러니 반격이, 이라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한편 양몽환도 눈부시게 돌아갔다.

그러면서 기분이 좋은지 길게 휘파람까지 불었다.

그는 왼 손으로 비폭유천(飛瀑流泉)의 장법을 쓰고 오른 손의 검으로는 행화춘우(杏花春雨)였다.

하나는 십팔나한장 가운데의 위력 있는 장법이고 또 하나는 추혼십이검 가운데의 절묘한

검법으로 기세 있게 네 승려의 선장을 몰아치고 있었다.

  양몽환의 장풍과 검이 어우러져 자기들을 몰아치자 심뢰 화상은 울화가 벌컥 치밀었다.

특히 이 싸움은 사백부들과 사형제들이 유심히 지켜보고 있기도 하지만 조금 전에 혈도를

짚이고 축 늘어졌던 창피한 꼴을 생각하면 치가 떨렸던 것이다

  심뢰는 모든 울분을 양몽환에게 풀자는 듯이 전력을 다하여 위에서 내려치고

옆에서 후려치며 맹렬히 공세를 퍼부어 왔다.

  양몽환이 이들의 철선장을 혼자 막는 다는 것은 보통 힘 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십여 합 이후에는 어느덧 기선을 제압당하였고 드디어 열세에 몰리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더구나 양몽환은 승려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위협만 주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싸우니 그것은 힘든 고역이었다.

그러는 한편 옥소선자는 중년 여승과 여전히 싸우면서도 언제나 양몽환의 신변을 걱정해서

지켜보며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윽고 양몽환은 열세에 몰리고 말았다.

제대로 반격해 보지도 못하고 방비에도 급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의 입장도 매우 위태로워보였다.

옥소선자는 갑자기 바람을 일으키듯 날카로워 지면서 맹렬한 공격을 가하고

몸을 날려 양몽환에게로 달려 왔다.

그 즉시 천외래운(天外來雲) 한 수로서 단숨에 승려를 무찔러 사방으로 흩어지게 한 후

양몽환과 나란히 섰다.

 

「동생, 힘을 내요……」

 

하는데 일진 장풍이 질풍처럼 휘몰아쳐 왔다

 

마음 놓고 말하던 옥소선자는 엉겁결에 급히 피했다.

그러자 칼날처럼 날카로운 장풍은 옥소선자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옥소선자는 삭막한 얼굴에 가득히 살기를 띄우고

여승 앞을 가로막고 있는 초범대사를 노려보며 옥퉁소를 고쳐 쥐었다.

  그리고는 싸늘하게 냉소를 터뜨렸다.

 

「비겁하게도 우리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도둑괭이처럼

독수를 휘두르는 짓은 적어도 일파 장문인의 신분으로 부끄러운 행동이 아니오?」

 

  그러자 초범대사도 싸늘하게 맞섰다.

 

「남의 금지 구역에 함부로 뛰어 들어 무예제의 대기(大忌)를 범한 사람에게

무슨 예의가 필요하다는 말이오!」

 

  옥소선자는 그의 대답을 듣고는 갑자기 깔깔대며 웃었다.

 

「좋아요. 그렇다면 한꺼번에 전부라도 달려드세요.

얼마든지 상대해 드리겠어요. 공연히 후회하지는 마세요.」

 

「당신 같은 여자쯤은 뭐 귀찮게 여럿의 힘도 필요 없지.

나의 주먹이나 받아 보시고 말하지.」

 

  그 말과 동시에 또 다시 날카로운 일격을 갈겨 왔다.

그와 함께 옥소선자도 그 즉시 퉁소로 그의 팔을 후려치자

초범대사는 후딱 오른 팔을 거두고는 왼 손으로 후려치는데

그 공격의 순수함과 번개같이 빠른 수법에는 옥소선자도 양몽환을

도와줄 생각도 못하고 맞붙어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초범대사는 맨손으로 가하는 공격이었으나 한번 후려칠 때마다

한 줄기의 강렬한 잠력(潛力)은 그 기세가 얼마나 사나운지 마치 내리치는 철추와 같았다.

  이와 같이 날카로운 공격을 막고 있던 옥소선자는 공력으로 그를 이겨낼 수 없음을 알았다.

잠시 진기를 모은 옥소선자는 수법을 비운 십팔수로 바꾸어 번개같이 허공으로 뛰어올라

공격을 가했다.

  초범대사는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날렵한 신법과 악랄한 공격에 당황하면서도

과연 옥소선자는 드물게 보는 강적이라고 감탄을 연발했다.

  그러던 초범대사는 진기를 단전에 모으고 두 팔에 공력을 집중하는

한편 두 발을 정(丁) 자 형으로 버터고 서서는 아미파의 독특한비결인

금강장(金剛掌)으로서 정(靜)으로 동(動)을 제하려는 듯 옥소선자가

허공에서 공격해 올 때마다 한 주먹을 후려치고 또 후려치고 했다.

 옥소선자의 민첩한 공격과 초범대사의 강렬한 장풍은 쉽사리 승부를 가릴 수 없는 싸움이었다.

한편, 양몽환은 네 명의 승려를 상대로 눈부시게 치고 찌르고 하였으나

위험한 고비를 몇 번이나 아슬아슬하게 넘기는 악전고투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양몽환은 어떤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재차 공격해 들어가는 양몽환의 칼끝에서는 살기가 돌기 시작했고

기묘하게 발휘되는 절묘한 수법은 삽시간에 네 명의 승려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리고 양몽환은 싸늘하게 소리쳤다.

 

「이와 같이 나를 지나치게 핍박하시면 나의 손이 악수를 쓴다 해도 탓하지 마시오.」

 

  그러나 심뢰 화상은 코웃음을 쳤다.

 

「흥! 얼마나 묘한 재간이 있는지 어디 마음대로 써 보란 말이야.」

 

하고는 선장을 휘둘러 일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서 세 승려도 다시 기를 쓰고 공격해 왔다.

 

위기에 직면한 양몽환은 급히 피하면서

 

「여러분이 이렇듯 사람을 정박하시다가 혹시 실수하여 다치게 되더라도

나를 원망하지는 마시오.」

 

하고 짧은 순간에 추혼십이검 중의 만봉출소(萬峰出巢)를 펼치면서

칼바람을 일으켰고 손으로는 비발당종(飛?唐鍾)의 수법으로 장풍을 몰아쳤다.

  이렇게 되자 검광은 번개처럼 번쩍거리며 눈앞을 어지럽혔고 장풍은 거센 질풍처럼

잇달아 휘몰아치는 데는 제 아무리 기세 있는 승려들도 뒤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심뢰 화상 역시 멈칫했으나 곧이어 급나사월(急拏射月)이란 한 절묘한 장법(杖法)을

전개하면서 큰 소리로 호령하는가 싶더니 철선장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

날아 양몽환에게로 부딪쳐 왔다.

 

그러자 양몽환은 오행미종보 신법으로 슬쩍 선장을 가볍게 비키고는

검을 옆으로 베이듯 후려쳤다.

심뢰 화상은 오행미종보 신법을 경험한 바가 없었다.

따라서 한번 그의 그림자가 훌쩍 스치자 사람은 사라지고 간곳이 없었다.

그만 멍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목이 선뜩 하자 크게 놀란 심뢰는

다급한 김에 일장 넘어 뛰어 달아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발 늦었던지

어느 틈에 목에는 한 치 정도로 양몽환의 검에 찢어지고 말았다.

그 사이에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으며 여유 있게 칼을 고쳐 쥐었다.

그와 반대로 옥소선자와 초범대사와의 싸움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초범대사의 주먹의 위력은 놀라운바 있었다.

한번 휘두를 때마다 휙! 휙! 하는 강한 바람이 일었다.

  옥소선자도 여전히 비운십팔수로서 날렵하게 대항하고 있었다.

앞에서 번쩍 하는가 하면 뒤에서 퉁소를 휘두르니

상대방으로 하여금 어디서 어느 곳을 공격하는지

알 수 없도록 갈팡질팡 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때 혼비백산해서 물러났던 심뢰와 네 명의 승려들은 잔뜩 정신을 차리고

대비하면서 곧 사면으로 나누어 양몽환에게 다시 공격해 왔다.

양몽환은 부득이 이렇게 될 바에는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다고 각오했다.

더구나 사부의 행방도 모르는 처지에 그대로 물러날 수 없고 보면

이 싸움의 승부나마 가리기 위해서 끝까지 대항하지 않을 수없었다.

네 승려들도 기를 쓰고 죽기를 각오한 듯 달려들었다.

네 자루의 선장은 광풍과 같이 양몽환을 덮치며 공격하여 왔다

그러자 양몽환은 다시 위험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특히 심뢰 화상의 철선장은 신랄하게 양몽환의 요혈만 노리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급박한 형세에 처한 양몽환은 어쩔 수 없이 검법을 일변하여 비장의 추혼십이검을

다시 전개하여 맞섰다.

그러나 추혼십이검이 비록 절묘한 검법이라 하나 네 승려의 재간이

워낙에 특출한 바 있고 양몽환의 공격으로서는 추혼십이검의 위력을

십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네 사람을 상대로 하고는 공세를 겨우 면하는

도리밖에는 없었다.

  서로가 승부 없이 다시 십여 합을 끌자 화가 난 심뢰가 고함을 지르며

아미파의 자랑인 풍뢰장법(風雷杖法)을 전개하는데 갑자기 전장을 급격히

휘둘러서는 폭풍이 불어 닥치듯 공세를 퍼부었다.

그러자 다른 세 승려도 풍뢰의 장법을 전개하여 양몽환을 물샐 틈도 없는

장막(杖幕) 속에 가두어 놓으니 형세가 급격히 위태해지고 말았다.

  양몽환은 어쩔 수 있이 다시 오행미종보 신법을 전개하여 훌쩍 뛰어

선장의 장막을 급히 뚫고 나왔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동발을 든 승려에게 말했다.

 

「노선배님! 따져보면 우리 양 파는 평소에 아무 원한이 없는 사이가 아니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하의 제자들이 이렇듯 우리에게 달려드니

만일 우리 후배가 실수라도 하는……」

  그 말이 미처 끝나지도 아니해서 심뢰가 고함을 질렀다

 

「건방진 수작!」

 

하면서 휙 하고 바람을 일으키며 선장으로 머리를 후려쳤다.

양몽환이 다급히 몸을 날려 옆으로 피하자 심뢰는 이미 예측한 듯

 몸을 돌리면서 선장을 다시 돌려 옆으로 쓸듯이 양몽환의 피하는 몸을 따라 후려쳤다.

이 장법의 비결은 풍뢰장법중의 절기로 신용탁두(神龍卓頭)라고 불리는 수법으로서

상대방의 기선을 제하는 것에 묘리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양몽환이 등 뒤에서부터 예리한 바람 소리를 들었을 때는

이미 피할 수 없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황급한 중에도 최선을 다해 급히 몸을 돌이켜 적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비록 그의 임기응변이 빨랐다 해도 불행히 선장은 그보다 더 빨리 다가왔다.

양몽환은 심뢰 화상과 두 자의 간격을 남겨두고 어쩔 수 없이

온 몸에 공력을 운기하고는 검으로 후려친 일장을 받아야만 했다.

순간! 몸이 휘청 거렸다.

 

그러자 울컥! 하고 한모금의 피를 토했다.

다행히 양몽환과 심뢰와의 거리가 가까웠고 선장은 긴 무기로서 안 쪽에 힘이

적게 미치는 까닭에 상당히 무서운 장풍이었지만 그렇다고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양몽환은 부지중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단숨에 진기를 북돋아 가슴에서 치미는

기혈을 억제하고 검을 휘둘러 맹렬한 기세로 심뢰의 가슴을 찔렀다.

상처를 받고 분노 끝에 찌른 것이라 번개 같이 빨랐다.

심뢰 화상이 깜짝 놀랐을 때에는 장검은 벌써 그의 가슴을 꿰뚫고 있었다.

양몽환은 칼을 빼고 길게 휘파람을 불면서 심뢰의 시체를 발길로 차 버렸다.

심뢰의 시체는 붉은 피를 사방에 뿌리며 일곱 자 밖으로 떨어져 뒹굴었다.

그러나 양몽환도 견딜 수 없는지 휘파람을 불고나자 선혈을 토하며 비틀거렸다.

  이 모든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세 승려들도 어처구니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시 동안 주위는 얼어붙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얼마가 지난 후 검으로 땅을 짚고 간신히 일어난 양몽환은

심뢰의 시체를 바라보면서도 연이어 피를 토했다.

그러자 옆에서 눈이 둥그레졌던 세 승려들도 갑자기 선장을 치켜들고는 다시 몰려들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이미 반 혼미 상태에 빠져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로서

승려들이 달려드는 것도 통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위급한 찰나!

돌연 옷자락을 스치는 소리와 함께 옥소선자가 날카로운 소리를 부르짖으며

양몽환의 곁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왼손을 내밀어 양몽환을 끼어 안았다.

그리고는 오른 손의 퉁소를 휘둘러 세 승려의 선장을 물리치고는

곧 이어 이를 갈면서 역습을 벌려 한 승려에게 달려드는 가 했을 때 퉁소를 번개같이

내려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승려의 머리는 박살이 나고 말았다.

원래 그녀는 비운 십팔수로 초범대사와 격전을 벌리던 중이었다.

갑자기 양몽환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즉각 달려오다 때마침 세 승려의 협공으로

위태롭던 양몽환을 구하게 된 것이었다.

옥소선자는 연이어 살기등등해서 퉁소를 휘둘러 두 명의 승려를 물리치고는

몸을 훌쩍 날려 이 장 밖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양몽환을 유심히 보았다.

양몽환은 눈을 꼭 감은 채 죽은 듯이 혼절하여 있었고 그러한 양몽환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에서는 두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자 절호의 기회를 얻은 동발 승려와 여승은 검과 동발을 치켜들고 옥소선자의

좌우 양측을 막아서는 것이었다.

그들은 곧 일격을 가할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옥소선자도 곧 눈물을 거두고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던 그녀는 불쑥 중년 여승을 노리고 퉁소를 내찔렀다.

그녀는 세 사람 중 중년 여승이 가장 약하게 보여 전력으로 공격하면

혹시 포위망을 벗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에 여승은 코웃음을 치면서 검을 쳐들어 퉁소를 막는 한편 왼손으로 장풍을 후려쳤다.

목표는 의외로 옥소선자가 아닌 양몽환이었다.

그 행동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옥소선자는 뒤로 피할 새도 없이 다급한 김에 소리를 질렀다.

급히 몸을 돌리면서 양몽환 대신으로 오른쪽 어깨를 내밀어 여승의 일장을 자기가 받고 말았다.

그것은 자기의 품에 안겨 있는 양몽환이 맞았다가는 그 당장에 절명 할 것을 알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불의의 장풍을 맞은 옥소선자는 비틀거리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오른 쪽 어깨뼈가 쪼개지는 듯한 아픔에 정신이 혼미하여 지고 거의 실신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때 초범대사의 매정스러운 말이 들렸다.

 

「옥소선자, 우리 아미파와 그대 간에 아무런 원한도 없으면서

오늘 이와 같은 불상사를 일으키게 된 원인은 모두 그대가 져야할 것이오.

그렇다면 어서 항복하시오.

이제 그 꼴을 하고 도망치려 고는 생각도 말고 애쓰지도 마시오.」

 

  그러나 이 틈을 타서 숨을 약간이나마 돌린 옥소선자는 여전히 냉랭한 얼굴이었다.

 

「당신들 아미파는 강호 구대문파의 하나라고 자처하면서도

그 하는 짓은 비열하게도 모두 강호 무예계의 규칙을 어겼어요.

부끄럽게 생각지 않으세요?」

 

  그 말에 초범대사는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누명을 씌우지 마시오. 우리가 어떤 규칙을 저 버렸단 말이요?」

 

옥소선자도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많은 사람으로서 혼자인 상대를 공격한다는 것은 비겁한 규칙위반이지 뭐예요?」

 

  그 말에 초범대사는 코웃음을 쳤다.

 

「그거야 당신네들이 먼저 사사로이 남의 금지 구역에 들어 왔으니

그것부터 대기(大忌)를 범한 것이 아니요.

우리가 많은 수로 공격한 것은 당연 하지.」

 

  옥소선자는 그 들이 나마 조식을 취하고 나니 오른쪽 어깨가 한결 나았다.

초범대사의 말이 끝나자 불쑥 퉁소를 내밀었다.

 

  초범대사는 갑작스럽고도 맹렬한 기세에 그만 눌려 버리고 말았다

  두 걸음을 재빨리 물러나서 두 손으로 번갈아 장풍을 후려쳤다.

산이라도 무너뜨릴 듯한 기세로 밀려오는 장풍이었다.

옥소선자는 초범대사의 내공력이 대단하여 중상을 입을까 두려워 훌쩍 뛰어 피했다.

  초범대사는 연달아 일성을 대갈하며 달려들면서 빗발치듯 장풍을 후려쳐 보냈다.

매수(每手)마다 지독한 장풍이었다.

  옥소선자는 사태가 이미 기울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양몽환을 바짝 당겨 안으며 오른 손의 퉁소로

위험을 무릅쓰고 반격을 시도했다.

  또 다시 치열한 격투는 삽시간에 벌어지고 말았다.

옥소선자는 만약의 경우 양몽환과 함께 죽을 결심을 하고 여전히 안고 싸웠다.

  서로의 공방전도 이윽고 삼십여 합.

  초범대사는 심후한 공력으로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옥소선자도 신속하고 절묘한 퉁소의 수법으로 가로 막고 찌르며 눈부시게 막아냈다

동발 화상과 여승은 옥소선자가 저희 장문인의 돌이라도 부술 만큼 강한 금강권(金剛拳)에

수십 번을 공격당해도 피하지 않고 도리어 역습해 오는 것을 보고는 강적이라고

감탄을 금하지 못 했다.

  만약 오늘 저녁에 그녀를 놓친다면 아미파의 강적을 하나 더 보태게 되어

후일에 후환이 무궁하겠다고 까지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생각한 두 승려는 동시에 한발 나셨다.

만일 옥소선자가 초범대사의 공격을 벗어나면 즉각 공격하려는 태세였다.

  옥소선자는 일생 동안 수 없는 격투를 치러 왔으나 결코 오늘저녁과 같이

당황해 본 예가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초범대사의 웅후한 권풍을 막아야 할 뿐 아니라 양몽환에게도

주의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싸우기를 십여 합, 그때 옥소선자가 먼저 빈틈을 포착했다.

삽시간에 달려들면서 세찬 공격을 잇달아 퍼부었다.

  그러자 초법 대사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그러는 한편 옥소선자는 불안한 마음이 들어 양몽환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장풍의 여세가 스치어 갔는지 완전히 정신을 잃고 있지 않는가?

순간, 가슴이 서늘해지며 울분이 와락 치밀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물불도 가리지 않고

전력을 다 하여 퉁소를 맹렬히 휘두르는 옥소선자였다.

  초범대사는 그녀의 먼젓번 공세에 몰려 물러난 것만도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그런데 다시 그녀의 공격을 받자 이를 갈며 오른 손으로 얼굴을 후려쳤다.

  그러나 옥소선자는 대담하게 맞서면서 몸을 비틀어 그의 주먹을 피하고는 계속하여

질풍처럼 초범대사의 정면을 뚫고 들어갔다.

죽기를 각오한 공격이라 퉁소는 날카롭게 찔러 들어갔다.

초범대사도 그와 같은 필사의 기세에 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퉁소는 바람을 가르고 유성처럼 전후좌우에 빛을 풍겼다.

  그러자 초범대사는 더 어떻게 막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고작 몸을 돌려 물러나며 옥소선자의 팔을 한 번 후려칠 뿐이었다.

초범대사가 피하자 옥소선자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퉁소를 높이 들었다가 초범대사의 어깨를 내려 쳤다.

  그 순간, 노호성과 비명이 동시에 일어났다.

그리고는 다음 순간,

  초범대사는 어깨를 움켜잡은 채 비틀거리며 여섯 , 일곱 걸음을 물러났다.

그러다가는 그만 휘청거리며 주저앉는 것이었다.

그러나 옥소선자도 초범대사의 왼쪽 주먹에 뒷등 오른 쪽을 맞고는 대, 여섯 자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서로가 치고 맞은 모양이었다.

  옥소선자는 중년 여승과 초범대사에게 일격씩 당하고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뜻밖에도 입술에서 선혈을 흘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품에 안은 양몽환은 놓치지 않고 있었다.

  순간적인 변화에 동발 승려와 여승이 손을 쓸려고 할 때는 이미 때가 늦었었다.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하던 두 승려는 일제히 초범대사에게 달려가 허리를 굽히는 것이었다.

 

「상처 가 어떠십니까?」

 

  허리를 굽히고 묻는 말에 초범대사는 고개를 흔들고는 천천히 눈을 감는 것이었다.

  말하지 않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은 몹시 다쳤다는 것을 알았다.

중년 여승은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옥소선자에게로 달려갔다.

  한편, 이때 옥소선자는 간신히 땅을 짚고 일어나 앉는 순간이었다.

윤기가 돌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졌고 머리는 흐트러진 채 입가에는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왼 손으로는 여전히 양몽환을 안고 있었다.

언제나 들고 있던 퉁소는 벌써 떨어뜨리고 손에 없었다.

여승이 다가가도 옥소선자는 전혀 의식치 못하는 듯 돌아보지도 않고

양몽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중년 여승은 손에 든 검을 옥소선자의 앞가슴에 갖다 겨누었다.

그리고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옥소선자! 이 만불사에서 피를 흘리고 죽어 지리라고는 몰랐겠지?」

 

  옥소선자는 가슴 앞에 들이 대인 칼끝은 눈에도 들지 않은 듯

예사롭게 고개를 들고 중년 여승을 쳐다보며 담담히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양몽환에게 나직이 말했다.

 

「동생, 동생! 눈을 떠 봐요? 이제 우리는 죽게 되었나봐!」

 

하고는 샘솟듯 고이는 선혈을 울컥 토했다.

 

  그러자 여승도 무척 그 모습이 안 되었는지 한 손을 가슴 위에 세우고는

 나직이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것이었다.

「옥소선자, 그대의 뜻을 이루어 주지……」

하고 검을 치켜들었다.

  옥소선자는 죽음을 바로 목전에 두고 태연했다.

두 손으로 양몽환을 꼭 끌어안고 바로 앉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손톱 끝만큼도 당황하거나 또 슬퍼하지도 않았다.

  언뜻 보면 생사를 초월한 도인과도 같았다.

  여승은 옥소선자의 목을 겨누고 검을 높이 들었다.

내려치기만 하면 옥소선자의 일생은 머리가 떨어짐과 동시에 막을 내리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난데없이 준엄한 소리가 들려왔다.

 

「속히 검을 거두고 물러서시오.」

 

  흠칫 놀란 여승은 등에는 청강일월륜(靑鋼日月輪)을 메고 한 손에는 비발(飛?)을 들고

당장에라도 던지려는 자세로 서 있는 오십 전후의 늙은이를 발견했다.

 

  순간, 여승은 정신이 아찔했다.

그때 다시 호령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비발 송씨가 어떤가 보여줄까?」

 

  이때 동발 승려가 비발을 든 노인에게 달려가며 고함쳤다.

 

「제원동(齋元同)! 네가 만불사에는 왜 왔느냐?」

 

  그러면서 동발 승려가 달려들자 제원동은 몸을 가볍게 슬쩍 비키고는

왼 손으로 재빠르게 후려치면서 오른 손은 비발을 번개같이 내던졌다.

비발이 날아가는 소리는 요란스러웠다.

싸늘한 빛이 번쩍이며 눈을 어지럽히고 꼬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은 주위를 뒤흔들며

곧장 중년 여승을 향해 날아갔다.

  제원동의 비발은 망월(望月)같이 큰 것으로 강호에서는 저명한 암기(暗器)로서

누구나 그 위력에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중년 여승은 비발의 기세가 자못 흉흉한 것을 보고는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는 한편

온 힘을 불끈 주어 검으로 간신히 막았다.

 

  <쟁그랑!>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중년 여승은

오른 팔이 찡하여 두 걸음을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비발도 목표를 벗어나 그녀 옆을 스치고 지나가더니

삼장 밖의 바위에 부딪쳐 바위를 산산조각으로 내고 떨어졌다.

  이 순간에 제원동은 동발 승려와 어느새 삼합을 교환한 뒤 옥소선자의 옆으로 다가섰다.

그제야 눈을 감고 있던 초범대사가 눈을 떠 백보비발 제원동을 바라보고는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이를 본 여승은 초범대사의 상처 입은 몸을 염려하였지만 그래도 제지 하지는 못하고

몸을 날려 초범대사의 옆에 바짝 붙어 서서 보호하듯이 따라가는 것이었다.

그러자 월백의 가사에 기다란 눈썹의 깡마른 노승도 눈을 번쩍 뜨더니

안광이 번쩍이는 두 눈으로 제원동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아미타불, 제시주는 그동안 안녕하셨소? 이 늙은이를 아직 기억하시오?」

 

하고는 천천히 제원동 앞으로 다가갔다.

 

고개를 돌려 노승을 보는 제원동의 얼굴에 잠시 동안 경악의 빛이 스쳐갔다.

그러나 그것도 일순이었다.

 

냉정을 되찾고는 등에 있는 청강일월륜을 손에 들며

 

「하! 하! …… 기억하고 있으면 어떻게 하겠소?

수가 많다고 위협하지는 마시오.」

 

했다. 그러자 그때 또 밑에서 갑자기 긴 휘파람 소리가 휙! 들려오고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만불정 봉우리 위에는 또 다른 두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초범대사가 바라보니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려와서 몇 자 밖에 서는데

그 몸 움직임이 대단히 빨랐다.

두 사람은 석자 밖에까지 와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모두 두루마기를 입은 오십 정도의 노인이었다.

왼 쪽에 선 사람은 누런 장삼에 유건(儒巾)을 쓰고 손에는 거의 두자쯤 되는

부채를 쥐고 흔들며 서 있었다. 오른 쪽은 청색의 장삼에 등에는 구환도(九環刀)를 메고

허리에는 표창(?滄) 주머니를 달고 있었다.

 

제원동은 부채를 든 노인을 평시에도 상당히 존경하는지 손에 든

청강일월륜을 옮겨 쥐고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절을 받는 그 노인도 부채를 반쯤 내리면서 점잖은 태도로

왼 손을 가슴 앞에 세워 반례하고 웃으며 말했다.

 

「제단주! 안녕하시오!」

 

  새로이 나타난 사람들과 인사를 마친 제원동이 청강일월륜을 거두고

다시 노승을 바라보며 싸늘한 어조로 빈정거렸다.

 

「노선사께서는 명도 기시오. 아직 죽지도 않고 살아 있군. 핫하……」

 

「인자하신 부처님이 노승을 아직껏 부르시지 않는데 어떻게 죽을 수 있소?」

 

  부채를 든 새로 온 노인이 나서서 코웃음을 치며 노승을 놀렸다.

 

「불문(佛門)에서 그대를 거두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좋은 일을 해드려야겠군.

그대를 도와 미안하지만 다시 투태(投殆)하도록 해드릴까?」

 

  그 말을 듣던 노승의 얼굴빛이 홱 변하면서 안광이 번쩍이는

두 눈초리로 부채를 든 노인에게 옮기며 한번 크게 웃는 것이었다.

 

「핫하…… 왕시주! 너무 겸손의 말씀이군.

귀방의 방주인 이창란도 감히 이 노승에게 그렇듯 무례하지는 않을 것이오.」

 

  부채를 든 노인은 쓰디 쓴 웃음을 두어 번 싱긋거렸을 뿐 대답을 안 하고 있었다.

그때 산 밑에서 여인의 숨 가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비록 작았지만 모두 무예계의 고수들인지라 완연히 들을 수 있었다.

이윽고 천천히 모습을 나타내는 사람은 경장(輕裝)의 소녀였다.

 

  그 소녀는 부채를 든 노인 앞으로 다가서더니 땀을 씻는 한편 헐떡이면서 말했다.

 

「숨 가빠 죽겠어요. 아이 숨차……」

 

  그러면서 둘레를 살펴보다가 눈길이 둥그레지면서 흑의 여인의 품에 꼭 껴안긴

채 정신을 잃고 있는 양몽환의 얼굴에 떨어졌다.

  그 흑의 여인의 입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조금도 고통스러운 빛은 없이

오직 온화한 모습으로 양몽환을 꼭 껴안고 죽은 듯 앉아 있었다.

  헐떡이며 달려 온 소녀는 바로 천용방의 방주 이창란의 무남독녀인 이요홍이었다.

이요홍의 뇌리에는 순간적으로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란 말인가?)

 

  그것은 얼마 전 양몽환과 이요홍이 마지막 같이 있던 곳은 숭녕(崇寧) 벌판이었다.

양몽환이 그녀만을 벌판에 남기고 매정스럽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녀에게서

도망이나 하듯이 떠났던 것이었다.

  그때 이요홍은 버림받은 슬픔과 아픔에 가슴은 찢어지듯 쓰렸고 타오르던

사랑의 불길은 어느덧 원망으로 변하였던 것이다.

양몽환의 모습이 숭녕 벌판에서 차차 사라지자 이요홍은 고만 너무 서러워

개울가의 버드나무 아래 쓰러져 하염없이 울고 말았던 것이다.

 

오랫동안 참았던 그리움은 설움으로 변하고 안타까운 눈물은 그칠 줄 모르게 마냥 울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갑자기 그녀 옆에서 늙은이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 왔던 것이었다.

 

「아니? 네가 왜 여기서 울고 있느냐?」

 

화다닥 놀라 바라보는 이요홍의 눈에는 누런 장삼에 부채를 든 방면장미(方面長眉)의

노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요홍은 그 선비 차림의 노인을 보자 길을 잃고 울고 헤매던 아이가 어머니를 본 듯이

달려가 그 노인의 품에 안기면서 우는 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나 좀 도와주세요. 분해 죽겠어요.

글쎄 아주 고약한 놈들이 나를 한바탕 골려주고 도망갔어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나 혼자 이런 곳에 내버려두고 찾아오지도 않아요.

분해 죽겠어요.」

 

  부채를 든 노인은 두 가닥 긴 눈썹을 찡긋하고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랑스럽게 말했다.

 

「그래? 그놈들이 누구란 말이냐? 내가 혼을 내주마.」

 

  그러나 이요홍은 오히려 속이 뜨끔하여 미처 대답을 못했다.

 

  왜냐하면 이 부채를 들고 누런 장삼을 입은 노인은 천용방 오기단주(五旗壇主) 가운데서도

무공이 가장 강한 자로 천용방 안에서 신분과 무공이 이요홍의 아버지인 이창란 바로 다음에

가는 인물인 것이었다.

그의 직함은 비록 황기단주(黃旗壇主)로서 다른 홍, 남, 백, 흑 사기(四旗)단주와 같은

지위를 가졌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제이방주와 다름없어서 기타의 사기단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처지였다.

이창란이 홍 ,남 ,백 ,흑 사기 단주를 부하로 삼을 때 먼저 무예로 제압한 뒤 말로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심복으로 삼았지만 이 황기단주인 왕한상(王漢湘)에게 만은

이창란이 그러지 못하고 네 차례나 그가 은거하고 있는 안탕산(雁蕩山)에 온갖 예의를 갖추어

방문한 후 겨우 절학을 지닌 이 기인(奇人)을 움직여 응낙을 얻고서야

천용방을 창립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왕한상은 비단 무공이 절륜할 뿐 아니라 박학(博學)의 인물이었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은 물론이거니와 유(儒), 불(佛), 도(道) 등의 제가(諸家)의 학문에 깊었다.

그가 안탕산에 은거한 삼 십 년 동안을 대부분 오행기술(五行奇術)과 괄괘역리(八卦易理)를

연구하며 지냈던 것이다.

해천일수 이창란이 천용방을 창립한지 이십 년 만에 그 세력을 전국적으로 떨친 데에는

왕한상의 책략과 도움이 다대하였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이요홍은 어릴 때부터 부친 옆에서 자랐기 때문에 왕한상을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무척 따랐고 귀여움도 많이 받는 터였다.

왕한상은 보기에는 점잖고 인자한 용모를 가졌지만 눈은 굉장히 차갑고 오만한

성격의 소유자였었다.

그가 나서서 싸워야 할 때는 극히 드물었지만 한 번 싸웠다 하면 신속하고

악랄한 수법으로 인정도사정도 없이 상대방을 끝내 박살을 내고야 마는 것이었다.

그가 천용방에서 싸우는 것을 이요홍은 단 한번 보았을 뿐이었다.

그때 그 상대방도 굉장한 인물로서 맨손으로 황기단 아래 있는 다섯 명의 향주(香主)를

연패시키자 이에 화가 치민 왕한상이 나서서 전광석화와 같은 빠른 승세로 단 세 수에

상대방을 때려죽이고 만 일이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비록 양몽환이 자기를 이 벌판에 버리고 가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나쁘게 말할 수가 없어 대답을 못해 망설였던 것이었다.

사실 따져 보아도 양몽환이 잘못한 것은 없었다.

그러니 자칫 잘못 대답하게 된다면 양몽환은 애매하게 왕한상에게 죽고 말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녀는 몇 번 생각해 보았으나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오랫동안 주저하고 대답을 하지 못하자 왕한상은 의심이 나는지 이요홍을 쏘아보며 물었다.

 

「무슨 말하지 못할 일이라도 있느냐?」

 

  이요홍은 즉각 그가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급한 나머지고개를 흔들며

거짓말로 대답했다.

 

「아미파의 승려들에게 잡혀 가서 만불사의 석실에 갇혀 며칠 굶었어요!」

 

  왕한상의 눈빛이 그제야 풀어지며 그 대신 놀라워했다.

 

「아미파의 승려들이 너를 얼마 동안 굶기더냐?」

 

  이요홍이 잠깐 생각하여 보고 말했다.

 

「이틀 굶었어요.」

 

  왕한상이 웃으며 이요홍을 달래듯이 말했다.

 

「그래? 그럼 아미파의 장문인 초범대사를 잡아 천용방에 데리고 가서는 이십 일만 굶기자.」

 

  이요홍은 웃으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는 어리광을 피웠다.

 

「그럼 지금 바로 가요.」

 

  그녀는 갑자기 양몽환이 혼자서 만불사로 달려간 일에 불안을 느꼈던 것이다.

 

왕한상이 웃으며 말했다.

 

「만불사의 승려들은 도망을 가지도 않을 텐데 하루 이틀 늦으면 어때?」

 

  그러나 이요홍은 기다릴 수 없었다.

양몽환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자 원망은커녕 불안하여 금방이라도 쫓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요홍은 고개를 흔들며 마구 응석을 부렸다

 

「그 승려들이 미워 죽겠어요. 지금 빨리 가요!」

 

  왕한상은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렇다면 우선 흥기단의 제단주(齋壇主)와 백기단의 승단주(勝壇主)가 같이

천서(川西)땅에 왔으니 오늘 저녁 화양(華陽)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단 말이다.

먼저 그들을 만난 후에 가자.」

 

  왕한상은 비록 냉정하고 오만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이창란에게 대해서는 존경하고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터이며 이요홍을 친 딸처럼 귀여워하고 있는 처지였다.

이요홍이 보채는 까닭에 어쩔 수 없이 그는 즉시 몸을 날려 달렸다.

뒤이어 이요홍도 혼신의 힘을 다해서 따랐다. 본래 그녀의 별명이 무영녀(無影女)인만큼

경신술에 있어서는 조예가 상당하여 한번 움직이면 나는 듯 했다.

 그러나 왕한상은 옷자락을 펄럭이며 물이 흘러가듯이 소리 없이 걸어가는데

이요홍이 제아무리 뒤따라도 따를 수 없었다.

출발할 때부터 다섯 자 거리이던 것이 이십 여리를 쫓아도 역시 그 간격이었다.

이요홍은 한번 어리광을 피워 볼 수밖에 없는 듯이 소리쳤다

 

「아저씨! 아저씨! 조금 기다려요. 숨이 차서 뒤따라가지 못하겠어요.」

 

  왕한상은 걸음을 멈추고 웃으며 이요홍이 옆에 오기를 기다렸다.

이요홍이 그의 팔을 붙잡고 웃으며 재잘거렸다.

 

「아저씨, 날 붙잡고 가요. 네?」

 

  왕한상은 웃으며 끄덕이었다.

 

「대낮에 경신술을 전개할 수는 없고 조금만 발을 빨리 움직이면

어둡기 전에 화양에 도착할 거야.」

 

하고는 오른 팔에 조금 힘을 주는데 이요홍은 금시 몸이 둥실 뜨는 것만 같았다.

왕한상이 발걸음을 조금 빨리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바람과 같이 빨랐다.

그렇다고 달리는 듯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이요홍은 끌리는 대로 둥실 허공에 떠서는 조금도 기운을 쓸 필요가 없었다.

전신이 한 가닥 잠력(潛力)에 받쳐져서는 이끌어 갔던 것이었다.

 

그들은 해가 지기 전에 화양에 도착했다.

천용방의 세력은 이미 사천(四川)땅만 하더라도 곳곳에 퍼져 있었다.

더욱이 화양은 분타(分舵)가 설립되어 있는 곳으로 두 사람이 막 성안으로 들어서자

두장정이 나타나 그들의 독특한 신호인 방례(幇禮)로서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천용방이 사천성에 설립된 십여 곳의 분타(分舵)는 모두 왕한상이 친히 설립한 것으로

파수들 역시 모두 그를 알고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두 장정의 안내를 받아 어느 커다란 여인숙에 들게 되었다.

그곳에는 벌써 제원동과 승일청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에서도 이요홍은 양몽환에 대한 걱정을 늘어놓으며 그들을 들볶아서는

억지로 끌다시피 해서 곧장 만불사를 향해서 달렸다.

그러나 빨리 가자고 서두르는 이요홍은 도리어 세 무예계의 기인들의 걸음을

따르지 못해 결국 왕한상이 그녀를 또 다시 붙들고 달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산 밑에 도착하자 위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원동이 뛰어 올라오게 되었고 비발로서 옥소선자의 목숨을 구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자 또 다시 위에서 제원동이 싸우는 소리에 이요홍을 내버려 두고는 왕한상과 승일청이

뛰어 달렸고 그다음으로 이요홍이 달려오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요홍은 양몽환이 옥소선자의 품속에서 기절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가……)

 

  이요홍은 잠시 멈칫하였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나 난 듯이 양몽환에게로 뛰어갔다.

그녀는 양몽환이 크게 다친 것을 직감하고는 남이 비웃을 것도 아랑곳없이

양몽환에게로 달려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적아(敵我)의 위치를 분별하지 못한 나머지

곧장 초범대사에게로 달려 들어간 형세로 오해 받고 말았다.

초범대사의 가까이 서 있는 동발 승려가 초범대사에게 덤비는 것으로 잘못 알고

훌쩍 나서면서 외쳤다.

 

「어떤 계집이냐?!」

 

눈을 부라리면서 동발로 삽시간에 내려쳤다.

그런 줄도 모르고 몸을 날린 이요홍은 너무나 급한 김에 몸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차!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한 순간 싸늘한 장풍이 이요홍의 등 뒤에서 닥쳐와

동발 승려의 동발을 후려쳤다.

그 바람에 백근이나 되어 보이는 동발은 옆으로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이요홍은 그런 것도 미처 모르고 또 다시 몸을 날렸다.

오직 이요홍에게는 양몽환만 보이는 듯 했다.

양몽환의 옆으로 달려 온 이요홍은 옥소선자의 품속에서 양몽환을 빼앗았다.

그녀는 여러 사람이 보는데서 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양몽환의 가슴에 손을 얹고 맥을 짚었다.

약한 기세나마 심장이 뛰고 있었다. 급히 공력을 양 팔에 집중한 이요홍은 양몽환의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때 동발 화상은 이미 왕한상의 부채에 밀려 한쪽으로 물러났고 제원동과 승일청은

청강일월륜과 구환도를 꼬나 잡고는 날카로운 태세로 지켜보고 있었다.

다만 왕한상만이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태연한 태도로 부채를 펴들고는

시원스럽게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방금 그는 한 수로서 이요홍을 보호하여 동발을 밀쳐내고 다시 두 번을 공격하여

동발 승려를 멀찌감치 물러서게 하였던 것이었다.

왕한상은 이요홍이 옥소선자로부터 양몽환을 빼앗아서는

가슴을 문지르고 있는 광경을 보고 말없이 다가갔다.

이요홍은 양몽환의 가슴을 수차 안타깝게 문질렀으나 여전히 깨어나지 못했다.

그가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하던 차에 왕한상이 다가와서 조용히 물었다.

 

「네가 안고 있는 사람은 누구냐?」

 

  그녀는 벌떡 일어서면서 왕한상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애원했다.

 

「아저씨, 빨리 이 사람을 구해주세요. 네?」

 

  왕한상은 땅에 쓰러진 양몽환을 두어 번 바라보고는 싸늘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군데 네가 구하려고 애쓰느냐 말이다.」

 

  이요홍은 순간 멈칫 하였다가는 나긋하게 말했다.

 

「이 사람은 나의 생명을 구해준 일이 있어요.

그러니 나도 그 은혜를 지금 보답해야겠어요.」

 

  왕한상은 그제야 웃으면서 주저앉고는 왼 손으로 양몽환의 등, 명문혈(命門穴)을

가볍게 후려치고는 즉각 진기를 손가락에 모았다.

동시에 재빨리 양몽환의 복결(腹結), 백회(百會) 그리고 현기(玄氣)삼대 요혈을 때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양몽환은 길게 숨을 몰아쉬며 사르르 눈을 떴다.

이요홍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양몽환 앞에 자기 얼굴을 내밀며 외쳤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요?」

 

  양몽환의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가 떠오르면서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무슨 말을 할 듯 입술을 움직이다가는 울컥! 하며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하였다.

그 피는 온통 이요홍의 옷으로 튀었다.

그러자 이요홍은 와락 양몽환을 안고는 양몽환의 얼굴 위에 눈물을 뿌리는 것이었다.

이때 왕한상은 눈살을 찌푸리며 슬쩍 옥소선자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백의 여인과 양몽환을 바라보았다.

넋을 잃은 듯한 그녀의 얼굴 표정은 서러운 듯 노한 듯 무척 착잡해 보였다.

이 짤막한 순간에 사랑에 얽힌 이 모습은 그 자리에 있는 고수들로 하여금

측은한 정을 느끼게 하였다.

왕한상은 혼신의 진기를 단전에 모으고는 고개를 들며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 소리는 신비롭게 용이 울부짖듯 밝고 높이 밤하늘로 울려 퍼져 나갔다.

마치 금과 옥이 부딪쳐서 나는 소리 같았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으로 놀라게 하는 것이었다.

그때 또한 깡마른 월백 가사의 노승이 홀연 합장하고 한소리 불호(佛號)를 외쳤다.

길고 힘찬 것이 마치 성난 사자가 노호하듯 하니 듣는 사람의 마음을 또 다시 놀라게 하였다.

왕한상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괄창산에서 서로 이별한지 어언 십팔 년, 방금 당신 사후기공(四吼氣功)은

그때 보다 더욱 진보되었소이다.」

 

  이 월백 가사의 노승은 법호가 초원이라 했다.

아미파의 십 삼대제자들 가운데 무공이 가장 강한 자였다.

아미파 십 삼대 장문인 초범대사와 동발 승려인 초진(超塵)대사

그리고 중년 여승 초혜와 더불어 아미사노(蛾嵋四老)라고 일컬어져 있었다.

그 중에서도 초원대사의 무공성취가 다른 세 사람의 사제보다 월등한 바가 있는 것이었다.

 

원래 아미파의 십 이대 장문인 일통대사(一通大師)가 전부 네 명의 제자를 두었는데

초원이 가장 나이가 많았었다. 그가 아미파에 들어온 이십 년 후에 다시 다른 세 명의

제자가 들어 왔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초원은 대사형의 신분으로 스승을 대신하여 사제들과 사매에게 무공을

전수하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일통 대사가 원적(園寂)하기 이년 전에 초원이

우연한 실수로 아미파의 규칙을 어기게 되어 이십 년의 행각이란 벌을 받고 쫓겨났었다.

정처 없이 떠돌며 무예를 닦는 수도의 세월이었다.

그 후 초원이 행각을 떠난 지 삼년 째 되던 해였다.

일통 대사가 병들자 스스로 죽을 것을 예감했다.

초진, 초범, 초혜 세 제자를 불러 무공과 불전(佛典)을 시험하러 보았다.

그중 초범이 우월하여 장문인의 신분을 계승하도록 하고는 일통대사가 죽었다.

큰 제자를 물리치고 그 아래 제자를 장문인으로 정하고 대통을 잇게 하는 것은

원래 무예계에서는 극히 피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초원이 행각으로 떠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다.

 

초원이 행각하기를 이 십 여년!

 

다시 절을 찾아 왔을 때에는 초범이 장문인의 위치를 이어 받은 지

어언 십팔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행각 이십 년 만에 천하 명산을 유력하고 성격이 일변하였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오히려 셋째 사제인 초범이 장문인이 된 것을 조금도 시기하지 않고

항상 그의 그늘에서 그를 도와 아미파를 크게 떨치게 하는 데 노력해 왔다.

 

초원은 흔히 초진과 같이 강호에 나타나서는 무예계의 행세를 살피기도 하였었다.

그러다가 십팔 년 전 장진도(藏眞圖)에 대한 소문으로 괄창산에 갔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 마침 왕한상과 한 번 대면할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때 두 사람은 서로 손으로서 싸우지 않았다.

서로 공력을 집중하여 하나는 휘파람으로 하나는 나직한 후성(吼聲)으로

약 일각의 시간을 두고 이른바 내공의 시합을 벌려 보았었다.

그러나 결국 화산파의 팔비신옹(八臂神翁) 문공태(聞公泰)가 나타나는 바람에

문공태에게 선수를 빼앗길까 염려하고 그 정도로 그만두고 서로 헤어졌었다.

 

그것이 십팔 년이 지난 오늘!

 

두 사람은 다시 만불정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초원대사는 고개를 들고 헛웃음을 두어 번 웃었다.

 

「피차일반이지요. 왕단주의 공력도 그때보다 정진했소.」

 

  왕한상이 부채를 다시 피며 말했다.

 

「귀파가 무림에서는 구대 정통파의 하나라고 자부하는 터에

우리 같은 강호 초인들은 무시할 것이오.

허! 허! 그러나 이 왕한상 역시 구대문파의 고수님들을 안중에 두지는 않소.

천용방은 삼년 이내에 틀림없이 당신네들 구대문파의 고수들을

우리 총당(總堂)에 초청하여 한번 우리의 절기를 구경 시키겠소.」

 

초범대사는 한동안의 조식 끝에 상처가 한결 나았다.

눈을 떠 왕한상을 바라보며 참견하는 것이었다.

 

「귀방주가 그와 같은 웅심이 있다면 아주 잘 되었소이다.

그때는 귀방의 크게 떨치고 있는 세력으로 보아 삼백 년 전 소실봉의 검술대회 보다

더 성황을 이를 것을 기대하여마지 않는 바입니다.

우리아미파도 전갈만 있으면 꼭 참가하겠소.」

 

  왕한상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과분하신 말씀, 귀파가 참가하든 말든 그런 것은 우리 천용방과 크게 관계가 없는

사실이고 지금 단 두어 가지 일을 물을 것인즉 해답을 받고자 하는 바이오.」

 

  초범대사도 겉으로는 웃으며 대꾸했다.

 

「왕단주께서 물을 말씀이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물으십시오.」

 

「귀파가 무예제의 정통파로 자처하면서 예의범절도 없이

왜 우리 방주의 무남독녀를 만불사로 잡아 갔소?

이따위 짓은 강호 도의를 크게 위배한 일이 아니오?」

 

  그 말을 듣고는 초범대사의 눈초리가 천천히 이요홍을 더듬어 갔다.

그녀는 중태에 빠진 양몽환을 꼭 안고는 주위 사람들이야 무어라

말을 하든 말든 도무지 아랑곳없이 울고만 있었다.

초범대사의 시선은 다시 이요홍의 바로 옆에 있는 옥소선자에게 쏠렸다.

강호에서 종횡으로 휩쓸던 옥소선자는 간신히 조금 기운을 내어

양몽환과 이요홍을 바라보고 누웠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조금도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었다.

초범대사는 가만히 불호를 중얼거리고는 말했다.

 

「왕단주의 말씀과 같이 귀방 이소저는 우리 파의 제자가 만불사로 잡아 왔었던 것은 사실이요.

그러나 이는 그녀가 연자추혼표(燕子追魂?)라는 극독이 있는 암기를 사용하여

대뜸 본 파의 두 제자를 죽였기 때문이었소.

도대체 그런 악독한 수법은 서로 간에 깊은 원한이 없는 한……」

 

하는데 제원동이 코웃음을 치며 그 말을 가로겠다.

 

「강호에서 싸우는 것은 죽기 아니면 살기인 것으로 암기를 사용함이

강호규칙을 어겼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오.

도리어 많은 수로 달려드는 짓이 비열한 행위지요.」

 

  초범대사는 제원동을 한 번 쳐다보고는 계속해서 말했다.

 

「비록 만불정에 구금 하였지만 그녀에게는 조금도 학대하지는 않았소.

이 점에 있어서는 이 소저에게 물어 보시면 알 것이오.」

 

  왕한상이 하늘을 쳐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어쨌든 이번 사건의 원인이야 어디 있든 둘째로 치고 다만 당신들이

본방 방주의 무남독녀를 잡아다 구금시켰다는 점에 있어서는

우리 방의 방주를 무시한 소행이오.

귀파는 어떻게 본방에게 이 일을 수습해 주겠소?」

 

  초범대사는 그 말을 듣고는 화가 치밀었다.

나직이 불호를 외치고는 대답하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이요홍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바라보니 양몽환이 그녀 품에서 버둥거리며 일어섰다가는 휘청거리면

서두어 걸음 걷다가 다시 쓰러지는 것이었다.

 

이요홍은 그가 갑자기 몸을 일으킬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가 그를 부축하려고 할 때는 양몽환이 다시 쓰러진 뒤였다.

양몽환이 쓰러진 곳은 옥소선자가 누워 있는 곳에서 불과 두자 남짓 한 거리였다.

양몽환은 기를 쓰며 기어갔다.

겨우 다다르자 양몽환은 간신히 품속에서 알약을 한 알 꺼내어 쓰러져 있는

옥소선자의 입에 간신히 넣어 주었다.

그러자 이요홍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옆에서 이를 바라볼 뿐

막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옥소선자의 입에 가까스로 약을 넣어준 후 양몽환은

또 다시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때서야 이요홍은 쫓아가서 양몽환을 다시 부축하여 앉혔다.

옥소선자는 이제 마지막 숨을 거둘 때였다

양몽환이 허우적거리며 가서 그녀의 입에 넣어 준 약마저 삼킬 기운이 없었다.

그러나 그 알약은 입에 들어가자 저절로 녹으면서 청아한 향기를 내며

침과 함께 넘어가는 것이었다.

이 알약은 그전에 배에서 만난 어떤 소녀가 준 것으로 가정강변(嘉定江邊)에서

양몽환이 한 알을 먹고 한 알을 남긴 것이었다.

그것이 문득 생각나서 옥소선자의 도움에 보답하고자정신이 좀 들 때

애써 옥소선자의 입속에 넣어 준 것이었다.

그는 조금이나마 도움에 보답하고자 하였을 뿐

옥소선자의 목숨을 구하리라고 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그는 그 알약의 신기한 효력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약을 준 백의(白衣)소녀마저도 다섯 알의 알약을 자기 어머니가 허다한

영약 뿌리를 캐어 만들었다는 것만 알 뿐 사실 얼마만큼의 심혈을 기울였는지

또는 얼마만큼의 효과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였다.

그녀는 그냥 예사롭게 양몽환에게 두 알을 주었고 양몽환도

그저 단지 좋은 약이려니 하고 한 알을 먹고 또 한 알을 옥소선자에게 준 것이었다.

만일 그 당시 그도 그 한 알을 먹지 않았다면 벌써 숨이 넘어 간지 오래였을 것이었다.

옥소선자는 그 약을 삼키자 갑자기 신기하게도 원기가 다시 단전으로 모이기 시작하여

뜨거운 한 가닥의 기운이 온 몸으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에는 맥도 점차 되살아났다.

드디어 길게 숨을 돌리고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가만히 힘을 주어 벌떡 일어서니 정말 일어날 수도 있었다.

놀랍고도 신기한 약이었다.

죽음의 변두리에서 헤매던 그녀가 다시 홀연히 삶의 세계를 되찾으니

너무도 이상하여 일순 멍해졌다.

그녀는 그래도 못미더워 시험하여 보려고 암암리에 공력을 운행시켜 보니

혈맥이 형통하고 온 몸에 기운이 퍼지는 것이 언제 상처를 입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녀는 땅에 떨어진 퉁소를 집어 들고 양몽환에게로 다가가서는 나직이 말했다.

 

「동생! 동생이 준 약이 이토록 신기할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왜 동생이 먹지 않고 나를 주었죠? 어서 동생도 한 알 먹고 기운을 내요!」

 

  양몽환은 기뻐하면서도 한편 쓸쓸히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힘없이 말했다.

 

「단 한 알…… 그것 밖에 없었소.」

 

옥소선자는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고 너무 감격하여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퉁소마저 집어 던지고는 양몽환의 두 손을 잡고 흔들며 흐느꼈다.

 

「그럼 왜 동생이 먹지 않았지? 왜…… 왜 그랬냐 말이에요!」

 

반쯤 꿇어 앉아 양몽환의 두 어깨를 받치고 있던 이요홍이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너무 소란을 피우지 말아요.」

 

옥소선자는 이요홍을 보고 쓸쓸하게 웃고는 양몽환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동생, 잠시만 기다려 줘요! 내가 초범을 죽이고 나서 동생 따라 나도 죽을 테니깐

그때까지는 죽지 말아 줘요!」

 

  말하자마자 퉁소를 집어 들고는 몸을 훌쩍 날렸다.

그야말로 번개같이 초범대사에게 공격하여 갔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죽음의 변두리에서 신음하던 여인이 그토록 재빨리 몸을 일으켜

공격해 올 줄이야 어느 누가 알았으랴?

초범대사는 앞이 아찔하지 깜짝 놀라면서 피하려고 하였을 때에는 때는 벌써 늦었었다.

동발 승려인 초진대사와 초범대사 또 그 옆에 있던 여승 초혜도 미처 어떻게 구해 보려고

손을 쓸 틈도 없었다.

 

  위기의 순간!

 

  돌연 초원이 바람 같이 휙 달려오자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한 번 움직이는 찰나

초범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리고는 왼 손을 들어 퉁소를 잡는 것과 동시 오른 손으로는 바람을 일으켜 후려치면서 호령했다.

 

「죽고 싶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왕한상의 차가운 어조가 툭 튀어 나왔다.

 

「그렇게는 안 될걸!」

 

  오른 손의 부채를 들고 조금도 움직이는 것 같지 않은데 이상스럽게도

어느덧 옥소선자의 오른 쪽에 다가 와서는 부채를 접어 초원의 오른 손목의 맥혈을

찌르는 것이었다.

 

세 사람의 동작은 너무도 빨라 누가 먼저고 누가 뒤인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분간을 못하게 했다.

초원은 왕한상의 부채에서 칼날 같은 날카로운 바람이 일어남을 즉각 느꼈다.

왕한상이 자기 앞에 겨눈 부채 끝에서는 엄청난 내공력이 송곳 끝처럼 합쳐 쏟아지니

금석이라도 뚫을 것 같았다.

자기가 비록 혼원기공(混元氣功)으로 몸을 감싸고 있다지만 만약에 한번 찔리기만 하면

감당치 못할 것을 깨달았다.

초원은 재빨리 오른 손을 거두어 들였다.

그들을 노려 재차 옥소선자의 퉁소가 초원의 왼 팔을 찔렀지만 마치 쇠에 부딪친 것처럼

퉁소가 튕겨 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실은 초원도 퉁소에 찔린 곳이 무척 아파 거의 참지 못할 정도였다.

초원은 식은땀을 흘렸다.

만약 옥소선자가 상처받기이전 같으면 비록 자기가 혼원기공으로 몸을 감싸고 있다 해도

그녀의 일격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감탄했다.

그러자 불현듯 화가 불끈 솟았다.

초원이 독살스럽게 외치며 움츠렸던 오른 손으로 휙 하며 한 가닥의 강렬한 장풍을 일으켜

왕한상을 후려쳤다.

그와 동시에 왼 손을 쭉 뻗으며 옥소선자의 가슴도 후려쳤다.

그러나 왕한상은 그 일장을 예측이나 한 듯 수중의 부채가 허공을 치는 순간,

그 몸은 어느덧 몇 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왼 손으로 질풍같이 초원이 옥소선자의 앞  가슴을 노리고 친

왼 손을 움켜잡으려고 하면서 오른 손의 부채를 왁 펴서는 옥소선자의 가슴을 보호해 주었다.

그러자 초원의 오른 손 장풍이 왕한상의 앞가슴으로 달려 올 때는 왕한상의 부채가 가볍게

흔들리며 부채에서 나온 일종의 탄력이 교묘히 초원의 손바람을 옆으로 비켜나게 했던 것이었다.

그러자 장풍은 왕한상의 부채 끝에서 미끄러져 왕한상의 옆을 스치고 뒤에 서 있는 자모신담?

(子母神膽) 승일청(勝一淸)에게로 부딪쳐 갔다.

이를 본 승일청은 장풍의 맹렬한 기세에 오른쪽으로 두어 걸음 비켜서자

강한 한 줄기의 바람은 제원동과 승일청의 사이를 뚫고 그들의 옷자락을 펄럭이며 지나갔다.

왕한상은 부채를 펴서 초원대사의 장풍을 미끄러지게 하는 동시에 왼 손으로 초원이

옥소선자를 치던 손마저도 거두어들이게 하고는 그 즉시 왼 발을 들어 초원의 아랫배를 차면서

좌우 양 손을 휘두르며 공격 했다.

두 손과 한 발이 일시에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 마치 폭풍우와 같아 초원은 부득이 옥소선자를

더 공격하지 못하고 뒤로 일곱 자나 밀려 났다.

이때 왕한상은 코웃음을 치며 질풍같이 따라가면서 부채와 왼 손을 한꺼번에 휘둘러

부채로 찌르기를 세 번, 왼 손으로 다섯 번이나 쳤다.

이 급격한 무공에 초원은 완전히 기선을 제압당하고는 연신 밀려나기만 했다.

이와 같이 왕한상이 초원대사를 막자 옥소선자는 퉁소를 휘두르며 다시 초범을 공격하니

옆에 섰던 초혜가 검을 들고 나와 그녀를 가로 막았다.

여인 대 여인의 격전이 벌어졌다.

동발을 든 초진이 바라보니 제원동과 승일청이 제각기 무기를 들고 한 쪽에서

태세를 갖추고 있는지라 자기가 나서기만 하면 그들 두 사람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또 초범대사의 상처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동발을 들고는 초범을 지키기로 했다.

왕한상과 초원이 싸우기를 이십여 합. 그러나 초원대사는 끝내 제대로 한 번 공격해 보지도 못했다. 이리 저리 피하면서 웅후한 공력으로 간신히 자기 몸을 지킬 수는 있었다.

옥소선자는 중상을 입은 몸인 만큼 겨우 한 가닥 남은 악과 신기한 영약의 힘으로

겨우 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힘으로는 오래 견딜 수 없었다.

겨우 십 오합에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여승 초혜는 이 들에 우선 강적 하나를 제거하자는 마음을 먹었다.

팔에 힘을 불끈 주고는 절묘한 한 수를 전개하려는 순간,

제원동이 일갈하며 손에 든 청강일월륜을 양 손에 거머쥐고 뛰어들었다.

청강일월륜이라 함은 일(日)과 월(月)을 상징한 것이다.

그는 우렁차게 소리치면서 하나는 초혜의 가슴을 노리고 하나는

허리를 노리면서 동시에 달려들자 옥소선자를 내려치려던 초혜는 불시에 막을 길이 없어

세 걸음이나 급히 물러서고 말았다.

제원동은 초혜를 물리치고는 고개를 돌려 옥소선자에게 말했다.

 

「상처가 낫지 않은 몸으로 오래 싸울 수 없을 것이오. 저리 가서 쉬시오.」

 

평소 같으면 화를 내고 마다할 옥소선자였으나 지금은 기진맥진한 몸이라

웃음을 띠고 두어 걸음 물러서더니 그만 지쳐버린 듯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제원동은 초혜를 물러나게 하였을 뿐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왕한상과 초원의

싸움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때 왕한상과 초원의 싸움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초원은 몰리고 몰린 나머지 최후의 비법으로 주동적인 입장을 취해서

아미파의 장기인 금강권(金剛拳)으로 왕한상과 상대하고 있었다.

한 번 주먹을 휘두를 때 마다 휙! 휙! 하는 권풍이 일어나는 위력은 초범이

그 권법을 휘두르는 것과는 위력이 천양지차였다.

왕한상은 그의 절기인 사행팔괘장(蛇行八卦掌)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얼핏 보아 몸은 손과 같이 가볍게 움직이지만 발걸음은 휘청 휘청하여

육중한 몸을 제대로 못이기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둥실 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또한 그가 내려치는 손은 허술하여 조금도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초원은 왕한상이 내려치는 손이 표면으로는 허술하게 힘이 없어 보이나

실은 강력한 내가잠력(內家潛力)이 숨겨져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그의 허술한 장풍이 자기의 몸에 적중하기만 하면

즉각 그 잠력이 튕겨 나와 내부를 상하게 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싸움은 막상 막하! 예측을 불허했다.

암석의 산이라도 갈라놓을 듯한 지강(至剛)한 주먹으로 하나는

송과 같이 부드러운 손으로 번개 같이 돌아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계속하여 백여 합을 교전했지만 여전히 승부는 가릴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초원의 금강권은 한번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상당한 진기를 소모하는 것이었다.

 만약 상대의 공력이 약하면 단 두 세 번에 때려눕힐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왕한상과 상대함에 있어서의 정세는 판이한 것이었다.

한편 왕한상은 극히 진기를 소모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단지 초원의 주위를 맴돌며 기회 있을 때 마다 한번씩 슬쩍 공세를 취하여

초원이 진기를 소모시키도록 자극할 따름이었다.

  즉 이유제강(以柔制剛)의 수법으로 왕한상은 초원의 진기를 소모시키는데 주력하였다.

이에 반하여 초원은 자기의 공력에 자신이 있는지라 왕한상이 자기와 맞서 공력으로

 판가름하지 않으면 결코 금강권의 공격을 백여 합 까지는 견디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맹렬한 공력을 퍼붓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한상의 사행팔괘 장법은 안탕산에 은거할 때에 뱀이 기어 다니는 것을 보고

영감(靈感)이 우러나 창안한 장법이었다.

각별히 부드러움(柔)을 특기로 한 장법 중 절묘한 것만 뽑아 일관된 육십사식(六十四武)의

사행팔괘장을 만든 것이었다.

극히 부드러우면서도 팔괘의 변화를 이용하여 슬쩍 슬쩍 움직이는 가운데

살기를 품고 있는 것이다.

  왕한상의 이 절묘한 장법은 바로 금강권의 극성(克星)으로 초원이 느꼈을 때는

이미 백여 합을 싸우고 혼신의 진력이 반이나 소모되어 이마에서 땀이 흐르고

권풍이 점차 약하게 될 때였다. 그러나 왕한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전히

가벼운 몸짓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때서야 초원은 자기 앞의 적이 자기 평생에 처음 만난 강적이며 이대로 싸우다가는

상대방의 장법에 설사 다치지는 않더라도 지쳐 쓰러질 것을 알았다.

즉각 그는 맹렬한 공격을 멈추고는 전신에 운기하여 두 손으로 앞가슴을 막을 때

왕한상의 몸짓에 따라 빙글빙글 돌 뿐이었다.

  이때 왕한상의 코웃음이 터졌다.

 

「천하에 유명한 금강권 역시 별 것 아니로군.」

 

하고는 장법을 슬쩍 바꾸면서 쪽 앞으로 달려들며 왼 손의 손가락으로

초원의 기문혈을 노리고 오른 손의 부채를 활짝 펴서는 허리께를 후려치면서

일시에 두 손을 같이 써서 공격해 들어갔다.

  초원은 깜짝 놀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의 무예는 과연 특이하군. 부채의 공격수는 허허실실 예측하기 어려우니

생사를 걸고 싸우지 않는다면 실로 이기기 어렵겠다.)

 

  하지만 왕한상의 공세의 허실을 알 길이 없어 석자를 물러섰다.

그러면서도 오른 손의 주먹을 쥐고 은근히 진기를 모았다.

  왕한상은 초원이 오른 손의 주먹으로 진기를 모으는 것도 모르고

부채를 접어서 질풍 같은 솜씨로 초원의 현기혈을 찔렀다.

 

  그때 초원이 갑자기 일갈하면서 오른 쪽의 주먹으로 왕한상의 앞가슴을 힘껏 내질렀다.

강한 주먹이었다.

이는 미리 힘을 모았다가 역습을 했으니 한가악의 사나운 바람과 더불어

산이라도 무너뜨릴 것 같은 기세였다.

  쌍방의 거리가 가깝고 또 너무도 의외라 비록 절묘한 재간을 지닌 왕한상이라도

피하기 힘든 것 같았다. 하물며 겨우 발을 떼는 때에 급격히 부딪쳐 왔으니 더욱 그랬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순간!

 

  그러나 그는 역시 오랜 경험을 쌓은 자이고 또 내공의 경신술이 극에 달한 자였다.

바람이 몸에 스치는 것을 느끼는 순간 왕한상은 몸을 공중으로 날려 초원의 권풍을

벗어나고 있었다.

  재빠른 경신술이었다.

그러나 초원의 권풍은 사나웠다. 연달은 초원의 권풍에 스치게 되어 왕한상도 허공에서

두 번을 맴돌며 이장 밖으로 밀려 나가야 했다. 얼마 후 초원의 권풍이 소실되자

비로소 땅 위에 내려설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위기를 당해 보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왕한상은 화가 치밀었다.

발이 땅에 닿자마자 즉각 몸을 날려 덮치면서 접었던 부채를 들어 질풍같이

초원의 장대혈(將臺穴)을 찌르고 들어갔다.

그러자 초원도 주먹을 들어 그 손목을 때렸다. 왕한상은 부채를 내렸다가

부채를 활짝 피면서 초원의 허리를 비로 쓸듯이 후려쳤다.

초원은 급히 몸을 돌려 재빨리 뒤로 물러서면서 두 주먹으로 연신 공격했다.

  왕한상은 조금 전 초원의 권풍에 스쳐 내부에 조금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런 몸인데도 그는 공격의 세찬 기세를 늦추려고 하지는 않았다.

내부의 상처는 그의 지순한 공력으로 당분간 능히 참고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원의 주먹도 악착같이 반격하여 왔다.

  왕한상은 즉각 사행팔괘장을 전개하여 초원의 주위를 질풍같이 맴돌기 시작하였고

한 자루의 부채가 각 가지의 수법을 벌릴 때마다 공격은 날카로웠다.

때로는 부채가 활짝 펴졌다가 재빨리 접히고 때로는 접힌 부채가

재빨리 펼쳐지기도 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눈부시게 했다.

  초원대사는 비록 혼신의 정력을 집중하고 응전하였으나 그때마다

왕한상의 공격 수법을 파악할 수 없었다.

분명히 오른 쪽으로 공격하여 오누나 싶어 그 쪽으로 맞서서 주먹을 후려치면

번쩍하는 사이에 돌연 뒤에서 공격하곤 하는데 그 빠름이 정말 번개와 같았다.

급기야 이리 저리 날뛰며 무수히 떨어지는 왕한상의 공격에 얼마 안가

그의 이마에서도 땀이 비 오듯 흐르기 시작했다.

  초범과 초혜는 이미 그들의 대사형이 계속해서 싸운다면 십 합을 넘기기 전에

왕한상의 손에 상할 것 같이 보였다.

그들은 초조한 나머지 막 뛰어 나가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으윽!」

 

하는 초원의 신음이 터졌다.

 

  동시에 왕한상의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어처구니없이도 초원대사의 깡마른 몸집이 일곱 자 밖으로 날아가 정신없이 돌아가며

비틀거리는 것이었다.

비록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상처를 입은 것은 틀림없었다.

 

초진은 손에 동발을 휘두르며 대갈하고 달려갔다.

왕한상은 그 보다 더 빨리 번쩍하니 몸을 날려 초원의 등 뒤로 돌아가서는

초원의 명문혈을 후려치려고 하였다.

이는 인신(人身) 십이(十二) 사혈(死穴)중의 하나로 맞으면 즉사하는 곳이었다.

초진은 급한 김에 구하려고 뛰어들기는 했지만 때가 늦었다.

초혜가 기절할 듯이 비명을 질렀다.

 

순간 왕한상의 손에 초원은 즉사하는가 싶었다.

갑자기 초원대사가 몸을 와락 앞으로 숙이면서 느닷없이 주먹을 뒤로 휘둘렀다.

그러자 번개같이 왕한상의 아랫배로 들어가는 주먹 이었다.

 

만일 이때 왕한상이 그대로 손을 내려친다면 초원대사의 명문혈을 때려

즉사시킬 수도 있었으나 왕한상 역시 아랫배를 맞아야 하는 것이었다.

왕한상은 자기 자신부터 보호하지 않을 수 없어 옆으로 기우뚱 하니 비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왕한상의 손은 자연히 빛나가고 말았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두 사람의 입에서는 똑같이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초원대사는 비록 급소는 벗어났지만 왕한상의 일장에 땅에 픽 쓰러지는 동시에

왕한상 역시 초원의 일격에 허벅지를 맞고는 일곱 걸음 밖으로 날아가 주저앉았다.

 이는 순간적으로 일어난 변화로 초진이 달려갔을 때에는 두 사람은 벌써 각기 중상을 입은 후였다.

그리고 초진이 자기 대사형을 부축하여 일으킬 때에는 왕한상 역시 달려온 제원동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왕한상은 억지로 상처의 통증을 참으며 냉소하면서 말했다.

 

「늙은 화상! 왕모의 부채 일장 맛이 어떠시오?」


  초원 역시 일성 불호를 크게 외치고 대꾸했다.

 

「왕단주의 장력이 여간 아니오.

허나 늙은이의 뼈다귀가 그런 대로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소.」

 

  왕한상이 고개를 쳐들고 웃더니 다시 말했다.

 

「그럼 열 수 더 겨누어 봅시다.」

 

  초원은 맹렬히 진기를 돋우어 내부의 상처를 진압시키며 대꾸했다.

 

「좋소. 얼마든지 상대해 주겠소.」

 

  또 다시 왕한상이 몸을 번쩍 날려 초원대사의 앞으로 달려가니

삽시간에 부채를 들어 가슴을 찔렀다.

초원도 껑충 뛰어 비키면서 주먹으로 한대 내갈겼다.

  두 사람은 다 같이 다시 싸우게 되면 누가 지고 이기든 간에

각기 받은 상처의 악화로 최후에는 모두 쓰러지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도 사람이었다.

사람이란 결국 피와 살로 구성된 몸뚱이기에 운기하여 혈맥을 폐쇄시킴으로서

피의 순환을 막아 잠시 동안은 상처의 통증이 즉각적으로 일어나지 않도록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억지로 아픔을 참고 다시 몸을 움직이거나 싸우게 되면 받은 상처가 단번에

악화할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때 가서 진기가 소모하고 기진하게 되면 걷잡을 수 없게 되어 심하면 당장에

절명하거나 애써 익힌 무예도 써 볼 수 없는 가련한 병신이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이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한 때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의 손과 주먹이 다시 맞붙어 어우러지려고 할 때 엉뚱하게도 제원동이

껑충 두 사람의 가운데에 뛰어들며 청강일월륜 한 쌍을 들어 초원에게 한번 즉 휘둘렀다.

준비를 하고 있다가 한번 휘두르자 그 기세는 여간 강렬한 것이 아니었다.

초원은 그 당장에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초진대사가 동발을 휘두르며 제원동에게 달려들었다.

제원동이 무기를 재빨리 거두어 세 걸음을 물러서서는 말했다

 

「우리 방주께서 이미 당신네들 구대 문파를 초청하여 벌릴 무술대회는

삼년 내에 꼭 실현할 것이오. 그때 비로소 귀파와 고하(高下)를 판가름 하게 될 것이며

무당(武當) 소림(少林)파와도 시합을 가져 누가 강호의 패주가 될 것인지 정하게 될 것이오.

그러니 오늘 저녁은 이만 실례하겠소.」

 

하고는 왕한상에게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방주의 명령을 어기시는 것도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왕형께서는 대임을 지고 계시는 몸입니다.

사소한 일에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여 대국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함이

옳은 처사인줄 생각합니다.

소제의 의견을 나쁘다 생각마시고 오늘 저녁은 이만함으로서 방주의 뜻과

기대를 저버리지 마시옵기 바랍니다.」


  왕한상은 그가 호의로 상처가 덧나기 전에 그만두자는 뜻을 잘 알고 있었다.

  왕한상도 웃으며 대답했다.

 

「제단주 말씀이 옳소._」

 

하고는 갑자기 싸늘한 얼굴이 되어 초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사의 무공은 과연 상당하시오.

오늘 우리들의 싸움은 다음 시합대회 때 판가름을 내기로 합시다.」

 

「아미타불, 그때 꼭 참석하리다.」

 

「그때 천하 무예계 고수 앞에서 기필코 생사를 판가름 합시다.」

 

「왕시주의 무공은 과연 무방한 바 이 늙은 중이 적수가 못되지만

어떠한 일이 있던지 간에 상대하여 드리지요.」

 

하고 초원대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