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비연경룡

제 19 장 한(恨) 맺힌 사람의 눈물 <恨海苦難>

오늘의 쉼터 2014. 6. 22. 13:17

제 19 장 한(恨) 맺힌 사람의 눈물 <恨海苦難>
 

 

  사실 동숙정은 사부님에게 정조를 잃은 사실을 솔직하게 말씀을 드린 후 자결할 마음이었다.

그러나 위치가 장춘곡(長春谷)이란 곤륜파 역대 조사법체(祖師法體)를 모셔 놓은 장엄하고

성스러운 곳이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혜진자는 미소를 짓고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마음 놓고 말하라.

그러면 내가 모든 일을 책임지고 해결해주마.」

 

  동숙정은 스승의 말을 듣자 가슴이 칼에 찔리는 듯 쓰리고 아프고

온 몸의 피가 끓어올라 하마터면 쓰러질 뻔 했다.

그러나 스승의 자애로운 말에 정신을 가다듬고 대답하려는 순간!

어떤 사람이 질주해 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매화나무 숲 밖에 까지 다다랐다.

  혜진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숲을 나가자 동숙정도 곧 스승의 뒤를 따라 나갔다.

  동숙정은 달려온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오른 쪽 팔이 완전히 잘리고 그곳에서는 피가 흘러 온 몸이 피투성이였고

숨을 헐떡거리며 혜진자에게 쓰러지듯 달려오는 것이었다.

 

「사숙님!」

 

  그리고는 까무러쳐 버렸다.

 

  이 돌연한 사태에 혜진자는 침착성을 잃고 그 사람을 부축하여

오른 손으로 그의 명문혈을 문질렀다.

  그러자 그 사람은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눈을 떴다.

 

「웬일이냐? 이 상처는?」

 

  급히 물었다.

 

  그는 다른 사람 아닌 옥영자의 큰 제자 황지영(黃志英)이었다.

그는 고통을 참고 동숙정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고 말했다.

 

「제자가 뒷산을 순찰하다 황의소년(黃衣少年)을 만났는데……」

 

  숨이 찬 듯 헐떡거리며 말을 하지 못했다.

  혜진자가 급히 물었다.

 

「그 사람이 어디 있지?」

 

「장춘곡 입구에서 ……」

 

하고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혜진자는 동숙정을 돌아보며

 

「빨리 사형의 상처를 치료해라!

먼저 지혈시킨 후 삼청궁으로 스승님께 데리고 가라!」

 

하고 혜진자는 몸을 날리고 이미 수장 밖으로 사라졌다.

상처의 길이는 약 세 치 가량 되어 보였다.

동숙정은 철철 흘러내리는 피를 막으려고 도포를 찢어 상처에 댔다.

 

「큰 사형! 삼청궁으로 모시고 가겠어요.

장문사백의 치료를 받으시도록 하세요!」

 

  황지영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얼빠진 사람처럼 동숙정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황지영의 아픔은 보기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것이었다.

 

「괜찮아! 사매는 빨리 이곳을 피하시오.

 내 상처는 가볍지는 않지만 조금 쉬면 혼자 갈 수 있을 거야!」

하고는 빨리 가라고 손짓하는 것이었다.

 

  동숙정은 어떻게 된 일인지 눈을 크게 뜨며

 

「큰 사형!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하고 되물었다.

그러나 쓰리고 아픈 듯 눈을 감은 황지영은 고개를 흔들며 동숙정의 말을 제지했다.

 

「여러 말 말고 가시오! 황의 소년의 무공과 재간은 나보다 훨씬 무섭소.

셋째 사숙이 오시면 갈래도 갈 수 없소!」

 

  동숙정은 안색이 변하며 두 볼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 그가 다 말했어요?」

 

  황지영은 약간 긴장하는 듯 하며 동숙정을 원망에 가득 찬 눈초리로 바라보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그러는 그의 표정은 엄숙했다.

 

「아니! 그러나 추측해도 알 수 있는 일이야,

동사매! 이 평생에 우리는 또다시 만날 인연이 없을 듯 하군.

십여 년 동안 내 마음에 억제해 온 하고 싶던 말을 하겠소.

만일 내 말이 당돌하다해도 용서해 주길 바랄 뿐이오!」

 

하는 말에 동숙정은 다급하게 황지영을 안고 물었다.

 

「사형! 이 몸도 죽길 바래요.

사형이 저에게 이렇게 깊은 정으로 대해 주는 줄을 몰랐어요.

차라리 저를 죽여주세요.」

 

  황지영은 돌연 몸을 일으키고 동숙정의 두 손을 잡으며

 

「이 곳은 말할 곳이 못되오. 다른 곳으로 가서 말하지!」

 

  웃는 듯 태연하게 말은 하지만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러 내렸다

 

  동숙정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이 고통을 참느라 떨고 있었다.

 

  황지영과 동숙정은 매화나무 숲을 지나 두 산봉우리를 넘어 조용한 절벽 아래에 앉았다.

 

「사매! 이 곳을 아직도 기억하지?」

 

  동숙정은 크게 눈을 뜨고 하늘에 반짝이는 별만 쳐다보며 멍하니

황지영의 말을 못들은 척 했다.

  그는 길게 한숨을 쉬고 동숙정의 어깨를 흔들면서 말했다.

 

「사매! 사매!」

 

동숙정은 생각 속에서 깨어난 듯 서서히 눈을 황지영의 얼굴로 돌렸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별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큰 사형! 저를 원망하셔요!」

 

「아니」

 

  동숙정은 황지영의 품 안에 엎어져 소리를 내어 울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호소하듯 말했다.

 

「당신이 저에게 잘 대할수록 저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 아프고 고통도 심했어요.

저는 스승님 앞에 꿇어 앉아 스승님이 한 칼에 죽여주었으면 좋겠어요.

저의 마음은 고통스럽습니다.」

 

  황지영은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어 눈물을 흘리며 왼 손으로 동숙정의 머리를 쓰다듬고

할 말을 잊어버린 듯 어찌할 줄을  몰랐다.

 

십여 년 동안 그려오던 그녀가 자기의 품에 안기자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여

오른 손 상처의 고통도 잊고 자신도 모르게 힘껏 안았으나 상처가 아파지자 손을 놓았다.

  그러자 동숙정이 황지영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먼동이 트려는지 반짝이던 별빛도 희미해 겼다.

동숙정을 껴안고 있던 황지영은 날이 밝아 옴을 느끼고 동숙정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십 년을 두고 마음속으로 사랑하던 동숙정을 이별해야하는가.

이것도 운명인가? 기구한 팔자구나……)

 

  황지영은 쓰리고 아픈 상처의 고통을 참으며 동숙정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이미 때는 늦었다. 이제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황지영은 소리높이 외치고 외쳐서 답답한 가슴을 털어버리고 싶었다.

 

「사매! 이미 오경이 넘었어. 이제는 그만 돌아가오.」

 

  동숙정은 눈물을 닦으며 홀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안 가겠어요. 스승님을 뵈옵겠습니다.」

 

「셋째 사숙이 아무리 사매를 사랑한다 하지만 구할 수는 없어.

그렇게 한다면 파문의 규칙에 의해 처벌받게 된다는 것을 몰라!」

 

「제가 저지른 일인데 어찌 피할 수 있겠어요?」

 

  황지영은 묵묵히 고개를 떨어뜨리고 한참 생각한 후 돌연!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넓은 천지인데 어찌 삼청궁에서 죽을 것인가?」

 

  동숙정은 그 말을 듣고 혼자 생각했다.

 

  (비록 내가 문파의 제재를 달갑게 받더라도 형벌을 받기 전에

동문 사제, 사형, 사매들 앞에서 죄상을 자백하게 된다면

죽는 것은 그다지 두려울 것 없지만 부끄러워 어떻게 자백을 할 수가 있겠나.)

 

  황지영은 그녀가 깊이 생각에 잠겨 있음을 보고 말했다.

 

「날이 곧 샐 것 같은데 …… 나도 오래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소.」

 

하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겨 놓았다.

 

  이를 본 동숙정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큰 사형!」

 

하고 부르며 뒤를 따랐다.

 

  황지영은 잠잠히 뒤로 돌아서서 동숙정을 바라보았다.

 

「?…………」

 

  동숙정은 황지영의 앞으로 다가가 머리를 숙였다.

 

「저에게 이렇게 깊은 정을 주셔서, 저…… 저는……」

 

하고 더 말을 계속하지 못했다.

 

  황지영은 자소하듯 동숙정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이런 일생을 이미 만족하게 생각했소.

아무래도 헤어져야 할 일이면 그냥 돌아서서 가시오.」

 

  동숙정은 그의 어깨에서 또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서도

그의 앞가슴에 몸을 기대면서 눈물을 닦았다.

 

「큰 사형! 제가 상처를 또 한번 매어 드리죠.」

 

  고개를 끄덕이는 황지영의 입가에는 쓸쓸한 웃음이 감돌았다.

빛나는 두 눈으로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동숙정은 슬픈 마음이나 부드러운 솜씨로 도포 자락을 찢어 세심하게 상처를 매었다.

 

「사매! 나는 더 이상 무술계에 나설 수 없는 몸이 되었소.

그러나 사매는 더 무술계에 나서야 할 몸, 부디 몸조심 하고 자중하기를 부탁하오.」

 

  동숙정은 구슬 같은 눈물이 한없이 쏟아져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명심 하겠어요.」

 

  상처를 조심히 매어 준 동숙정은 황지영의 충고에 마음 깊숙이 정을 느끼며

황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면 뒤 돌아보지 말고 가요.

사람들의 눈이 많아 더 지체할 수가 없소. 찢어진 도포는 벗어 들고 가요!」

 

  한 마디를 남긴 황지영은 가던 길을 미련 없이 가버렸다.

사나이의 굳은 사랑이 이루어지기는 하였으나 생과 사의 기로에서 만났다가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 황지영의 가슴 속에는 어떠했을까!

미련 없이 돌아선 황지영이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멀리 사라져가는 황지영의 뒷모습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던 동숙정은

끝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한탄하며 망연히 서있었다.

 

이윽고 동숙정의 시야에서 황지영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땅이 꺼지는 한숨을 쉬고 걸음을 옮겼다.

 

(아! 나는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이 세상 천지에 나하나 뿐,

누구를 의지하고 괴로운 인생길을 걸어야 할까?)

 

  이렇게 생각하자 알 수 없는 눈물이 펑펑 쏟아져 더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빼앗긴 정조와 생이별의 사랑, 그리고 지나온 가지가지의 고생이 한꺼번에 밀물처럼

몰려와 몸부림치며 울게 했다.

 

  한편 동숙정을 돌려놓고 도망치듯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던 황지영은

산모퉁이를 돌며 마지막으로 동숙정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황지영의 눈에는 몸부림치듯 흐느껴 우는 동숙정의 모습을 멀리 바라보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언제 또 다시 만나리라는 기약도 없이 헤어져야 하는 황지영의 가슴은 사막처럼

답답하고 쓰라렸다.

비록 잊어버리자고 결심하며 돌아선 황지영의 굳은 결심도 흐느껴 우는

동숙정의 모습을 보고는 한 가닥의 애수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이라면 잊어버리는 것이 좋은 것인지도 몰랐다.

 

얼마동안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던 황지영은 고개를 흔들고 돌아섰다.

그리고 맞은편에 보이는 삼청궁을 향하여 길을 재촉했다.

쑤시고 아픈 팔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 내려 황지영의 머릿속에도 고통을 참는 다는 것 밖에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황지영이 궁 밖의 대문에 도착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칼을 등에 맨 젊은 도사 두 명이 달려 나왔다.

그리고 황지영 앞에서 합장한 후 부축하며,

 

「큰 사형! 잘 돌아 오셨습니다.

지금 큰 사형을 찾으러 나가던 길입니다.

하고는 황지영을 껴안듯이 부축하며 걸음을 옮겼다.

황지영은 고통을 참으면서 젊은 두 명의 도사를 바라보았다.

 

「스승님은?」

 

「스승님은 대웅전에 계십니다.」

 

「음……」

 

 신음소리를 내는 황지영은 그들의 부축을 받으며 궁 안으로 들어갔다.

몇 겹이나 되는 방사(房舍)를 지나 가산(假山)에 위치한 대웅전에는

둥그런 의자에 옥영자가 앉아 있었다.

옥영자의 주위에는 두 명의 어린 동자(童子)와 네 명의 젊은 도사가 서 있으며

오른 쪽에는 셋째 사숙 혜진자가 앉아 있었다.

 

황지영은 땅에 엎드리며 절을 했다.

그리고는 옥영자와 혜진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자 황지영이 스승님을 뵈옵니다.」

 

하고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옥영자는 혜진자를 잠시 돌아본 다음 물었다.

 

「동사매는 어디 있느냐?」

 

  황지영은 엎드린 채 대답했다.

 

「동사매는 저의 상처를 매어준 후 곧 헤어졌습니다.」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스승님!」

 

하고 대답하는 황지영의 음성은 몹시 떨렸다.

 

「음! 너는 정말 대담하구나! 우리 곤륜파에서 스승을 기만하는 제자에게

어떠한 처벌을 내린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겠지?」

 

  황지영의 등허리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알고 있습니다. 스승님!」

 

「그럼 , 말해 보라!」

 

 잘라진 팔의 아픔과 준엄한 스승의 문죄에 입술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황지영은 입을 열었다.

 

「스승을 기만하고 조선(祖先)을 욕되게 하는 자는 사죄(死罪)에……」

 

  순간-

 

  옥영자의 안색이 돌변하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너는 수좌제자(首座弟子)로서 우리 문파의 엄한 규율을 잘 알고 있는 네가

스승을 기만하지는 않을 줄 믿는다. 바른대로 말해라! 동사매는 어디 갔는지?」

 

  황지영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제자…… 제자는 정말 모릅니다.」

 

「정 말 모르는가?」

 

「네! 정말 모릅니다.」

 

하는 말에 옥영자는 더 묻지 않고 혜진자를 돌아보았다.

그때까지 옥영자와 황지영의 문답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혜진자는

옥영자를 바라보며 탄식 하듯 말했다.

 

「둘째 사형! 영아만 추궁할 것이 아닌 것 같소.

그 년이 사사로 사람을 장춘곡 석실에 숨겨 놓은 것은 틀림없이

사전에 어떤 계획이 있었을 것 같소.

내가 십여 년 동안이나 가르친 보람이 허사가 되었소.」

 

하고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옥영자는 혜진자의 말도 일리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황지영을 일으켜 세운 후

상처를 치료받도록 분부했다.

 

그리고는 혜진자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오. 이왕 저지른 일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평소 정아(동숙정)의 언행으로 본다면 상상 밖의 일이오.

그러나 수상한 점도 여러 가지가 아니지만

우선 천천히 조사해서 일을 처리하도록 해야 할 것 같소.

 

옥영자의 말이 끝나자 의자에서 일어난 혜진자는 몇 걸음 다가가서

옥영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장문사형이 판단하신 것과 제가 추상하는 것이 일치하는 것 같소.

속히 반역한 제자를 잡는 것이 중하요 정아가 이 한 시간 동안에 갔으면 얼마나 갔겠소.

내가 곧 잡아 오겠소.」

 

「그 생각도 좋긴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도망갔는지는 알아야하지 않겠소?」

 

「구석구석 뒤져서 잡을 도리밖에 없는 듯 하오.」

 

「그럼 같이 갑시다.」

 

  혜진자와 옥영자는 동숙정을 잡으려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시중하는 두 동자에게 분부했다.

 

「너희들은 큰 사형의 치료가 끝나는 대로 곧 석옥(石獄)에 가두고 엄중히 지켜야 한다.

한 발이라도 나오지 못하게 하라!」

 

  옥영자의 추상같은 분부에 두 동자는 함께 절하고 물러섰다.

그제야 황지영의 상처가 위중하였음을 깨달은 혜진자는 옥영자를 불렀다.

 

「영아치 상처가 위증한 듯한데 누구에게 치료를 분부하셨소?」

 

「염려 마시오. 송(松), 학(鶴) 두 제자가 잘 치료할 것이요. 어서 갑시다.」

 

하고 앞장서서 나가는 옥영자의 소매를 급히 붙잡은 혜진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러는 그의 표정은 매우 심각했다.

 

「무슨 일이오?」

 

하고 황급히 묻는 옥영자의 말에 잡았던 소매를 놓으며 혜진자는 음성을 낮추었다.

 

「우리 둘이가 다 이곳을 비울 수는 없을 것 같소.

환아의 소식도 모르는 이때에 또 이런 일이 생겨 위급한 때가 아니오?

만일 그 도옥이란 놈이 이곳을 급습한다면 그야말로 큰 일일 것 같소.」

 

  혜진자의 말을 들은 옥영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렇기도 하오.」

 

「그런즉 둘째 사형은 이곳에 남아서 자리를 지키시오. 나 혼자 찾아보겠소.」

 

  옥영자는 가늘게 한숨을 쉬며

 

「모두 내 덕이 없는 탓이오.

제자를 잘못 가르친 죄로 역대(歷代) 조사(祖師)에게 모욕을 주고 …… 부끄럽소.」

 

「어찌 둘째 사형의 죄겠소. 우리 모두의 죄지요.」

 

  역시 혜진자도 한숨을 쉬었다.

 

「이왕 벌어진 일을 탓해서 무엇 하겠소.

우선 환아부터 찾아야겠지만 이왕에 정아를 찾으려던 마음인데 돌아설 수도 없소.

백리(百리)안 만 찾아보고 곧 돌아와서 다시 의논 합시다.」

하는 옥영자의 제안에 혜진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웅전을 나가자

곧 뒤따라 옥영자가 뒤를 따랐다. 삼청궁을 나온 옥영자와 혜진자는

동숙정이 도망갈 가능성이 많은 동남쪽과 동북쪽으로 각각 헤어져 달렸다.

그렇게 백리 안을 뒤져 보았으나 그림자도 찾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한편- ,

 

 황지영과 헤어져 시름없이 정처 없는 길을 가던 동숙정은 솟구쳐 오르는

슬픔과 눈물을 닦고 정신을 차렸다.

 

 (곤륜파의 규율은 엄하다.

죄를 범한 제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규율대로 처벌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비록 나는 스승 혜진자의 총애를 받은 몸이지만 나를 구원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동숙정은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규율대로 번뜩이는 칼날에 떨어지는 자기의 머리를 연상하고

 

「으악-」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죽기는 싫다.

붙잡히기만 하면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 도망갈 수밖에 없구나.)

 

  이렇게 생각한 동숙정은 어떻게 하든지 도망가서 살고 싶다는 욕망이 용솟음치는 것이었다.

붙잡히는 날이면 틀림없이 삼청궁으로 끌려가 규율대로 벌을 받고……

 

순간

 

동숙정의 머리 속에는 자애로웠던 혜진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스승을 배반하고 도망가는 이 제자…… 저주스럽구나.)

 

동숙정은 떠오르는 스승의 얼굴을 머리를 흔들어 지워 버렸다.

그러나 쉽게 지워지지 않는 혜진자의 자애로운 얼굴이기도 했다.

 

얼마 동안 망연히 서서 이 일 저 일 생각하던 동숙정은 문득 도옥을 생각했다.

항상 냉소하며 비웃는 듯 차가운 표정이면서도 어딘가 미남자로 생긴 도옥의 얼굴이

혜진자의 얼굴을 지우며 포개어져 나타났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 나는 이미 도옥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았는가.……

이제 내가 찾아가 몸을 의지할 곳은 도옥이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지금까지 초조하고 슬프던 마음이 활짝 개이며 속히

도옥을 찾아야겠다는 일념이 머리 속에 꼭 차고 마는 것이었다.

 

동숙정은 도옥을 찾아 가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마음은 홀가분하고 생기마저 돌았다. 동숙정은 펄럭거리는 도포를 벗어 버리고

보검을 어깨에 멨다.

그리고 이미 석실에서 사라졌을 도옥을 찾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험한 산, 깊은 물을 넘고 건너 계곡을 타고 달리기 며칠.

주린 창자와 상처투성이에 만신창이가 된 동숙정이 지칠 대로 지친 채 도착한 곳은

청해(靑海)의 어느 성경(城境)이었다.

그러나 맞아줄 사람도 그렇다고 수중에 한 푼의 돈도 없는 동숙정에게는

많은 여인숙도 빈 절간만 못하였다.

나무뿌리로 연명하고 절간 아니면 바위 밑에서 밤을 지새우며

다시 걸음을 옮겨 사천성(四川省)의 숭령현(崇寧縣)에 도착했을 때는

더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눈앞이 캄캄해 지는 것을 느낀 동숙정은 밤이 깊어 간다는 것을 깨닫고 간신히 일어났으나

그녀의 몸은 펄펄 끓는 물처럼 뜨거웠고 그런가 하면 견딜 수 없이 오한(惡寒)이 나서

더 이상 벌판에 쓰러져 있을 수 없었다.

곤륜파로 끌려가 한칼에 머리가 떨어지기 전에 아니 천신만고하여 찾아가는

도옥을 만나기도 전에 이름 없는 벌판에서 죽을 것만 같았다.

 

동숙정은 몸에 남아 있는 기력을 다하여 기다시피 마을을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 여인숙 앞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온갖 마음의 번민과 며칠동안 굶으며 몇 백리 길을 달려온 동숙정의 연약한 몸은

자리에 눕자 병세가 급변하여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헤매게 되고 말았다.

하루, 이틀…… 계속해서 위독해지는 그의 병세는 객지의 여인숙에서 신음 소리만 높아갔다.

 

처음 여인숙 앞에 쓰러진 걸인 차림의 동숙정을 발견하고 방에 눕힌 여인숙의 주인은

하루 이틀…… 갈수록 병세가 위독해 지는 것에 당황했다.

 

걸인 차림인 동숙정을 하룻밤 재워서 보내려고 했던 주인은 기가 막혔다.

 

(이 일을 어쩐담.…… 보아하니 돈도 한 푼 없는 걸인이고 약값 밥값은 고사하고

덜커덕 죽어버리면 관청에서 오라, 가라 ……하! 이거 큰일 났는데……)

 

  수심이 가득 차 안절부절 했다.

  그렇다고 다 죽어 가는 사람을 밖으로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설사 내쫓는다 하더라도 업어서 내 놓아야만 될 것 같아 더욱 난처했다.

원래 여인숙에서는 돈이 없고 누추한 옷을 걸친 걸인이라도 얼굴이 비법하게 생긴

사람이면 괄시하지 못했다.

 

그것은 흔히 무술재의 고수들이 항용 걸인차림으로 변장하고 다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인숙의 주인도 동숙정의 얼굴과 보검을 보고 방으로 옮겨 눕히긴 하였지만

병세가 위독하고 보면 문제는 달라지는 것이었다.

동숙정이 신음하는 소리에 방으로 들어온 여인숙의 주인은 한 편에 서서 동숙정의 동정을 살폈다. 그리고는 혼자 중얼거렸다.

 

 (흠! 무엇하는 사람인데 저런 훌륭한 보검을 가지고 있을까?……

밥값과 약값으로 저 보검이나 뺏을까? )

 

하는데 갑자기 동숙정이 몸을 돌리면서 주인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순간-,

 

  여인숙 주인은 가슴이 덜컥했다.

 

  (내가 한 말을 들었을까)

 

  그러나

 

「여보세요! 물을 좀 주세요!」

 

하는 은방울 소리같이 밝고 고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주인은 화닥닥 놀라며 동숙정의 얼굴을 급히 바라보았다.

 

  비록 중병을 않고 있는 동숙정이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는 감출 길이 없었다.

머리는 산발하고 다 떨어진 누더기 옷을 입었으나 낭랑한 목소리와 빛나는 눈동자에

넋을 잃은 채 바라보는 주인은 꼭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한편,

 

  중태에 빠진 동숙정의 눈이 얼빠진 듯한 주인의 얼굴에 멎었다.

주인의 얼빠진 듯한 얼굴을 바라보던 동숙정은 한 번 더 재촉했다.

 

「물을 좀 주세요!」

 

  그제야 주인은

 

「예예……」

 

하며 허겁지겁 문을 차고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 들어오는 그의 손에는 따스한 물이 담겨진 그릇을 들고 들어 왔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먹여주는 물을 마시려던 동숙정은 자기가 중병을 않고 있다는 것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급히 일어나 앉으려다 힘없이 자리에 눕고 말았다.

 물그릇을 든 채 동숙정이 다시 자리에 눕는 것을 바라보던 주인은

물그릇을 놓고 동숙정을 부축하여 앉힌 후 물그릇을 입에 가까이 대어 주었다.

 

그때였다.

 

남자의 손이 동숙정의 두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와 자기를 부축하여 앉혀 주는 것에

비위가 상한 동숙정은 일어나 앉자마자 눈썹을 치켜 올리며 손을 번쩍! 들어

주인의 가슴을 향하여 휘둘렀다.

그러자 주인의 손에 들렸던 물그릇이 뒷벽에 부딪치며

 

 <쨍!>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그뿐 아니라 가벼운 일격에 주인은 뒤로 벌렁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의 어깨는 떨어져 나가는 진통을 겪었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다고 주인이 무슨 무공이 있어 재빨리 피하지도 역습하지도 못하고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 수상하다 했더니 …… 나도 사람은 잘 보는구나.)

 

  도리어 이렇게 자기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엉금엉금 문밖으로 기어나가고 말았다.

그러나 자기의 몸에 남자의 손이 닿는 순간을 참지 못하고 일격을 휘두른 동숙정은

중병에 시달리던 중에 지나친 무리였던지 눈이 감겨지며 혼미상태에서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방에는 등불이 켜지고 산산이 깨졌던 물그릇도 말끔히 치워진 것을 잠시 훑어보던

동숙정은 혼곤히 잠에 빠지고 말았다.

 

  그 다음날.

 

  정오에야 잠에서 깬 동숙정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 옆에는 오십 세 가량의 노인이 서 있는 것이었다.

  동숙정이 눈을 깜박거리며 노인을 자세히 바라보자 노인이 빙긋이 웃으며

 

「깼군! 좀 어떠시오?」

 

하고 다정하게 묻는 것이었다.

 

  동숙정은 의아한 빛을 감추지 못하며

 

「그런데 …… 누구신지요?」

 

하며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자 노인은 황급히 손을 흔들어 제지하며

 

「안돼요! 일어나면, 내가 누구인지는 차차 알아도 되지만

아가씨의 병세가 대단히 위중해 지금 의원을 모시러 갔는데 곧 올 때가 됐소!」

 

하고는 연방 문밖을 내다보는 것이었다.

동숙정은 노인의 성의가 고맙기도 하고 한편 초면인 노인에게 신세를 지게된 것을 미안해했다.

더구나 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는 동숙정이었다.

 

「은혜는 고맙습니다만 저에게 가진 돈도 없어요.

있다면 이 보검하나 뿐인데 약값을 대신해 주십시오.」

 

하는 말에 노인은 펄쩍 뛰며 또 손을 가로 흔들었다.

 

「무슨 소릴 …… 그런 것은 염려 말고 속히 회복해야 하오!」

 

「어찌 이렇게 큰 신세를 지겠습니까?」

 

  거듭 동숙정이 사양하자 노인은 어린애를 타이르듯 조용조용히 말하는 것이었다.

 

「객지에 나오면 고생이오. 더구나 중환인데 아무 걱정 말고 며칠 쉬면 곧 완쾌되오.

약값은 이 늙은이가 내겠소!」

 

하고 웃는 것이었다.

 

  그때 의원이 들어 왔다.

  의원은 표정하나 없이 냉담한 태도로 동숙정의 맥을 짚어본 다음

 

「찬 바람 때문이오!」

 

하고는 약 한 첩을 내놓고 나가 버렸다.

 

그러는 의사의 태도는 냉랭하고 한편, 안하무인격인 태도였다.

 동숙정은 의사의 냉랭하고 건방진 태도에 비위가 상했다.

 

「전, 약 안 먹겠어요.」

 

하는 날카로운 동숙정의 말에 약봉지를 받아 들고 있던 노인은 저윽이 놀랐다.

 

「왜?」

 

  동숙정은 고개를 벽 쪽으로 돌리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건방져요! 냉랭하고.」

 

  그제야 노인은 빙긋이 웃으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허…… 허…… 난 또 왜 그러는가 했소.

그 의사는 원래가 그 모양이오.

하지만 우리 고장에서는 제일 용한 사람이오.

성격은 저모양이지만 백발백중이거든……」

 

하고 동숙정을 안심시키는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밖이 술렁거리며 큰 소리가 들려 왔다.

 

「주인 없소? 빨리 밥과 술을 가져 오슈.

그리고 말에게는 콩을 듬뿍 먹이고! 갈 길이 바쁘오!」

 

  순간!

 

  동숙정은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그릴리가……)

 

  그러나 그 목소리는 분명히 도옥, 금환이랑 도옥의 목소리였다.

  동숙정은 천신만고하여 도옥을 찾아가던 길에 중병에 걸려 신음하는

여인숙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꿈일까? 생시일까? 휘청거리는 몸을 이끌고 문을 열어 잡은 동숙정은

 

「아!」

 

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를 뿐 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때,

 

  황의도포(黃衣道袍)를 펄렁거리며 애마(愛馬) 적운추풍구(赤雲秋風駒)의 고삐를 쥔 채

일꾼과 이야기를 하던 도옥은 동숙정을 보는 순간 가슴이 덜컥! 했다.

뜻밖의 상봉에 기쁨과 슬픔이 뒤범벅이 되어 있는 동숙정을 저윽이 바라보던 도옥은

알 수 없는 감회가 착잡하게 엇갈렸다.

그러나 마음을 진정시킨 도옥은 천천히 다가왔다.

어쩔 수 없이 도망쳐 나오다 마지막으로 의지할 곳을 찾아온 동숙정의 마음이야

무슨 말로 표현할 것인가!

천만가지의 감회가 눈물로 되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질 뿐 할말을 잊은 채 서 있는

동숙정의 앞에 까지 다가온 도옥의 첫마디는 너무나 동숙정의 가슴을 실망으로

채워주고 말았다. 

 

「웬일이지? 날 찾아 올리는 없고, 쫓겨 온 모양이군!」

 

  순간!

 

  동숙정은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비분(悲憤)을 쏟다가

울음을 갑자기 그치고 이를 악물었다.

 

  (나는 너를 찾아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왔다.

그런데 위로의 말 대신에 내 가슴을 이토록 슬프게 하고 창자가 메어지게 하다니,

이 뻔뻔한……)

 

생각할수록 분함을 참을 길이 없었다.

 

동숙정은 자기의 중환인 몸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을 높이 들었다.

 

「휘익!」

 

  날카로운 소리를 냄과 동시에 동숙정의 손은 도옥의 어깨를 향하여 내려쳤다.

그러나 그녀의 일격도 무위.

 

잠깐 사이에 동숙정의 손목은 도옥의 명문혈을 노리는 손아귀에 잡히고 말았다.

 

「인사하는 사람에게 무공으로 대하다니 ……」

 

하고 말한 도옥은 동숙정의 손목이 불덩이처럼 뜨거운 것을 느끼고 다급하게 물었다.

 

「아니? 손이 왜 이렇게 뜨겁지? 어디 아파?」

 

  그러나 도옥의 손아귀에 잡힌 손목을

 

  홱!

 

  뿌리치며 날카롭게 쏘아보던 동숙정은 아름다운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흥! 당신이 관계할 바 아니에요!」

 

부르짖듯 외치고는 몸을 더 지탱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버리자

당황한 도옥은 재빨리 쓰러진 동숙정을 일으켜 안고 방으로 들어가 눕혔다.

그러자 지금까지 동숙정과 도옥의 거동을 바라보며 가만히 방에 앉아 있던 노인이

도옥에게 약봉지를 주면서

 

「이 약을 먹이시오. 병세가 위중하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약을 받아 든 도옥은 황망히 읍하며

 

「선배는 누구신지, 그리고 무슨 병이 오니까?」

 

하고 공손히 물었다.

 

「이 노인은 성은 주라고 하는 이집의 주인 되는 늙은이요.

원래아들 놈이 여인숙을 하였소. 마는 한가해서 나왔을 뿐이었소.

그런데 방금 의사가 다녀가면서 준 약이 바로 그 약이오.

너무 피곤하고 찬기가 들어서 않는 것이라 하오.」

 

하고 자기의 신분과 동숙정의 병 증세를 단번에 말하는 것이었다.

 

도옥은 다시 읍하며

 

「황공하오이다. 소저는 저의 사매입니다.」

 

「그러하신가. 소저가 혼자 중환에 신음하기로 좀 보살펴 주었을 뿐이오.

속히 약을 먹이시오……」

 

「고맙습니다. 주인님!」

 

「허 …… 고마울 것이 뭐 있겠소.……누구나 곤경에 빠질 때가 있는 법이오.」

 

하고 겸손했다.

 

도옥이 백배사례하고 다시 읍하자 노인은 밖으로 나가며

 

「곧 약을 먹이시오!」

 

더 당부하고 나갔다.

 

노인이 밖으로 나가자 도옥은 노인이 준 약봉지를 집어 던지고 자기 품에서

하얀 알약을 꺼내어 동숙정의 입에 넣었다.

 

그때-

 

밖으로 나갔던 노인이 물을 떠가지고 들어오다 약봉지가 떨어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찌 약을 먹이지 않소?」

 

하는 그의 눈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그러자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달리 급변한 노인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자

도옥도 마주 눈썹을 곤두세웠다.

 

「왜 그러시오?」

 

「왜 그러시오라니? 그것이 어떤 약인 줄 알고 버렸소?」

 

노인은 자기가 지금까지 성심 성의껏 돌봐주고 약까지 준 보람도 없이

방 한구석에 던져져 있는 약봉지가 자기를 무시한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한편 도옥은 천하에 어떤 약이라도 자기가가지고 있는

구전보명환(九轉保命丸)에 비길 수 없음을 자부했고 더구나 남에게서

도움이나 구원을 받는 것이 천성적으로 못마땅해 하는 도옥으로서는

 별로 노인의 호의가 탐탁할 리 없었다.

 도옥은 노인의 대성일갈에 잔뜩 비위가 상했다.

 

  (그까지 것 도움 좀 베풀었다고…… 흥!)

 

「도대체 그것이 무슨 약이란 말이오?」

 

「무슨 약이냐고? 우리 고장에서 제일가는 주일첩, 우리 종씨의 명약이오!」

 

「종씨 (宗氏)라면 당신이나 드시오!」

 

말을 마치자마자 태음기공의 한 수로 ,노인의 대양과 소양을 무찔러 버렸다.

이 수법은 그 효력이 삼일 후에야 발작되는 것으로서 혈도가 막히고 신경이 마비되어

끝내 죽게 되는 무서운 수법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알리 없는 노인은 은혜를 배반하고 손찌검까지 하는 도옥을

더 상대하지 않고 나가버렸다.

그리고는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고얀 놈이군. 은혜도 모르는 무례한 같은 놈……)

 

  노인이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가자 도옥은 동숙정에게로 다가갔다.

동숙정은 도옥이 입에 넣어 준 구전보명환의 효과로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이 구전보명환은 일찍이 묘수어은 소천의가 깊은 산중에서 백가지의 영약만을

채집하여 만들어낼 신약(神藥)으로서 백병을 치료, 회생시킬 수 있는 오묘한 약이었다.

  도옥은 동숙정이 깨어날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지켜보고 있는 도옥의 눈은 점점 붉은 빛으로 물들어 졌다.

  누더기가 된 옷은 다 떨어져 속살이 보이고 숨을 쉴 때마다 두개의 젖무덤은

둥실둥실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언젠가 석실(石室)에서 동숙정의 따스한 몸을 어루만지며

소혼(消魂)의 하룻밤을 즐기던 일을 되새기며 어느덧 흥분하여 욕정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

 

  중병에서 헤매다 구전보명환을 먹고 잠이 든 수척한 얼굴을 보자

불타오르던 욕정도 식어지고 오히려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눈을 뜬 동숙정은 머리맡에서 자기를 지키고 있는 도옥을 발견하자

아픔도 잊은 듯 평화스럽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사르르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사라졌던 욕정이 되살아난 도옥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동숙정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도옥의 손이 동숙정의 몸을 애무하자 동숙정도 경쾌함을 참지 못하고 몸부림치며

도옥을 와락 잡아끌었다.

가쁘고도 피곤한 시간이 서서히 지나갔다.

지금까지 원망과 슬픔으로 가득 찼던 동숙정의 두 볼에는 엷게 붉은 빛이 돌며

모든 것을 잊은 듯 행복해 보이기만 했다.

그러한 동숙정이 더욱 사랑스러운 듯 도옥은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직 날 원망해?」

 

「네, 아직도……」

 

「그럼 나를 좀 때려줘.」

 

하면서 도옥은 자기의 뺨을 내밀었다.

 

그러자 동숙정은 팔을 벌려 때리는 시늉을 하다가

도옥의 목을 끌어안고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는 동숙정의 눈에는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뻐서인지, 슬퍼서인지 동숙정 자신도 모르는 눈물이었다.

도옥은 동숙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만히 속삭였다.

 

「왜 울어? 바보같이!」

 

「기뻐서요.」

 

「기뻐도 눈물이 나는군!」

 

하고는 동숙정을 번쩍 안아 자리에 다시 눕힌 다음

 

「하루만 푹 쉬면 완전히 회복될 거야,

내 나가서 고기 국을 구해오겠어. 그 동안 좀 쉬고 있어!」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과연,

 

  구전보명환의 약효는 놀라웠다.

며칠 동안의 병고도 씻은 듯이 완쾌해진 동숙정은 도옥이 구해가지고 온

고기 국을 오랜만에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동숙정이 고기 국을 맛있게 먹는 동안 도옥은 옷장수를 데리고 돌아 와

동숙정의 몸에 맞는 옷을 지으라고 분부했다. 하루 동안이면 옷을 만들겠지,

그 동안 더 쉬고 내일 함께 일찍 떠나기로 하자!」

 

  동숙정은 도시 꿈만 같은 일의 연속인 며칠 동안의 일을 생각하며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일까)

 

하며 눈을 깜박거렸다.

 

  그리고는 도옥을 바라보며 행복한 듯 웃었다.

 

「그런데 당신은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겠어요?」

 

하고 묻자 도옥은 싱글싱글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며

 

「재미나는 곳이 많지. 당신을 데리고 강남풍경이나 구경할까 하는데……」

 

하는 것이었다.

 

  동숙정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수그렸다.

 

「왜? 스승이라도 쫓아올까 해서?」

 

하는 말에 동숙정은 공포에 가득 찬 얼굴을 들면서 호소하듯 애원했다.

 

「제발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둘이만 조용히 살아요. 네?」

 

하는 말에 도옥은 동숙정을 힘껏 끌어안으며 입술을 찾았다.

 

 이윽고 방의 등불이 꺼지고 두 젊은 남녀는 마음껏 운무(雲霧)의 정을 즐기는 사이에

들창이 훤히 밝아오는 것도 몰랐다.

 

그 순간의 동숙정은 억 만 가지 걱정과 번민을 잊어버리고

몸 안에 있는 정열을 다 쏟아 놓을 수 있었다.

벌써 몇 번째의 쾌락인가!

 

다음날 아침 옷장수는 새 옷을 보내왔고,

도옥은 도옥대로 동숙정이 타고 갈 한 필의 말을 구해 가지고 들어왔다.

산발했던 머리를 곱게 벗고 새 옷으로 단장한 동숙정의 모습은 아름다운 것만을

전부 모아 놓은 듯 우아하고 청순한 자태였다.

도옥은 동숙정이 말에 오르길 기다려 적운추풍구에 가볍게 올라타자

두 필의 말은 나란히 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추위와 얼음을 녹이고 봄바람을 안고 달리는 두 필의 말은 한숨에 종영성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도옥과 동숙정은 말의 속도를 늦추며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그 웃음은 동숙정이 아직 맛보지 못한 행복스러운 웃음 그것이었다.

동숙정의 행복한 웃음을 보는 도옥 역시 마냥 기쁘기만 했다.

 

「왜 웃지? …… 새 옷을 입은 당신은 더 아름다운데!」

 

「호…… 호! 거짓말! …… 도포만 입던 습관이어서 그런지 거북하고 갑갑해요

 

「도포는 싫어. 크고 넓기만 한 도포가 무엇이 좋다고!」

 

「그래도 저의 스승님이 이런 옷 입은 것을 본다면 큰 일 날거에요.」

 

「큰일? 쫓겨난 사람이 곤륜파의 규율을 따져서 뭘 해.

당신을 이제 누구도 구속할 수는 없단 말이야!」

 

「쫓겨 나오진 않았어요. 미리 도망쳤어요.」

 

「도망?」

 

「그럼요. 우리들의 일을 큰 사형이 다 알고 있는 걸요.」

 

「그래서 도망 나왔군.」

 

「그런 것도 아니지만……」

 

  다시 말을 멈추었던 동숙정은 도옥의 옆모습을 살짝 흘겨보며,

 

「큰 사형의 상처는 당신이 냈어요?」

 

하고 물었다.

 

  그러나 도옥은 본시 그의 성격대로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약간 빈정거렸다.

 

「죽여 버리려다 상처만 냈지. 그 대신 유곡(幽谷)을 지키는 두 놈을 잘라버렸지!」

 

하고 별로 대수로운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했다.

 

  사실, 사건이 나던 그날 밤 황지영은 달아나는 동숙정의 거동이 수상한 듯해서

두 사제와 이야기 하다 말고 장춘곡으로 되돌아 왔던 바로 그때였다.

 

황지영은 무심코 석실 문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때, 석실에서 뛰어 나오는 도옥과 엉겁결에 마주친 황지영은 깜짝 놀라며

 

「누구냐?」

 

  소리를 외쳤다.

 

그러나 도옥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장검을 뽑아 내려쳤다.

 

그 순간!

 

「으윽!」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황지영의 어깨에서는 검붉은 퍼가 쏟아지고 말았던 것이었다.

 일단 황지영의 어깨를 내려쳐 팔뚝을 잘라버린 도옥은 황지영의 비명 소리에

곤륜삼자라도 달려들까 두려워 급히 그 자리를 피하여 도망치려는데

그때 마침 유곡(幽谷)을 순찰하던 정수(淨修)와 정진(淨塵) 두 제자가 달려들었다.

 이들은 옥영자의 제자들로서 검술도 대단한 도사들이었다.

그러나 도옥은 급한 마음에 장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두 도사에게 지쳐 나갔다.

 도옥이 장검을 휘두르고 미친 듯이 달려들자

두 명의 도사는 재빨리 몸을 피하며 역습해 들어오는 것이다.

 빨리 도망가려던 도옥은 의외의 호적수들을 만나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고

더구나 급했던 마음에는 속히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이윽고 눈에 살기가 등등한 도옥은 풍권천운(風捲天雲)의 한 수로 정수의 왼쪽 팔을 내리 찍고

그 여세로 두병범월(斗秉犯月)의한 수를 번뜩이며 정진의 허벅다리를 내려찍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곡을 빠져 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도옥의 금환검의 일격으로 팔이 팔린 황지영은 도옥이 황급히 뛰어 나온

석실로 상처를 움켜 쥔 채 달려 들어갔다.

 

그것은 동숙정의 거동이 수상했다는 점과 뒤이어 뛰어 나온 도옥과 연관시켜

어떤 해괴한 사건이 석실 안에서 벌어졌을 것이라고 단정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어지럽혀진 석실 안에는 붉은 피로 얼룩진 한 장의 하얀 손수건이 떨어져 있었다.

  손수건을 집어든 황지영은 손수건의 임자가 틀림없는 동숙정이라는 것과

무슨 사건이 일어났었다는 것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

 

황지영은 피 묻은 동숙정의 손수건을 품속에 넣은 후 되돌아 나오다

정수, 정진 두 사제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황지영은 자신의 상처 때문에 돌보지 못하고 그 길로 피를 흘리며

삼청궁으로 달려 왔던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

사제들의 부축으로 역시 되돌아 온 정수와 정진은 그 동안의 일을 혜진자 앞에서 자세히 말했다.

  두 제자가 이구동성으로 자세하게 설명하는 도옥과 동숙정의 행동을 가만히 듣고 있던

혜진자의 얼굴은 점점 어두운 빛으로 변해가며 입이 꽉 다물어 졌다.

 

  (음…… 어쩐지 요사이 동숙정의 행동이 수상했어.

더구나 매화꽃 숲 속에서 울기까지 하고……)

 

  곰곰이 생각하던 혜진자는 자기가 지금까지 길러 온 제자를 의심하게 된다는 것이

더욱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제자라고 규율을 무시할 수는 도저히 없었다.

중상 당한 두 제자를 내려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던 혜진자는 그들의 상처가 위중함을 알고

급히 치료를 받도록 분부했다.

그러나 치료를 한다 해도 일생 불구의 몸이 될 것은 명확했다.

그러한 제자를 바라보는 혜진자의 마음은 더 없이 슬펐고 분노가 끓어올랐다.

여러 제자들이 정수와 정진을 떠메고 치료실로 올라간 다음 혜진자는 도포를 갈아입고

옥영자를 찾아 갔다.

 

「뭐? 뭐라고?」

 

  혜진자에게서 대강 이야기를 들은 옥영자는 펄쩍 뛰며 놀랐다.

 

「가봅시다. 그 석실에!」

 

  바람을 일으키며 옥영자와 혜진자는 석실 안으로 들어섰다.

별로 이렇다 할 흔적은 없으나 한 쪽으로 사람이 쓰러졌던 자리와

그 옆에 약간 어지럽혀진 몇 개의 떡 조각이 있을 뿐 극히 조용했다.

그리고 그 옆의 암문(暗門)도 열어 본 흔적은 없었다.

그 곳에는 역대의 곤륜파 조사(祖師)들의 법체가 모셔진 곳이었다.

석실을 나온 옥영자와 혜진자는 서로 말은 없었지만 대강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은

짐작하는 듯 쓸쓸한 표정이었다.

 

삼청궁으로 돌아온 옥영자와 혜진자는 당장 황지영과 동숙정을 불러 오라고 벽력같이 호령했다

스승님의 호령을 받은 제자들은 사방으로 황지영과 동숙정을 찾아 나셨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황지영이 동숙정과 헤어진 후 삼청궁으로 되돌아오는 길이었던 것이었다.

그 동안의 벌어진 일을 알길 없는 동숙정은 황지영과 정수, 정진을 상대하여 싸우던 도옥의

이야기를 듣고는 새삼 놀랐다.

 

그러자 도옥은 자신 있는 어조로 동숙정을 불렀다.

 

「당신이 자랑하는 곤륜파도 알고 보니 형편없더군.

제아무리 구대문파(九大門派)에서 제일 강하다고 하지만

무술의 절학(絶擧)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그렇지만 당신은? 절학까지 쓰는 당신이 상처를 받고 장춘곡 석실에 있었어요?」

 

  동숙정이 화를 내며 되묻는 말에 도옥은

 

  돌연!

 

  얼굴빛이 변하며

 

「뭐. 뭐라고?」

 

하는 바로 그때,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도옥의 귀를 울렸다

 

  (누구일까)

 

하며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과연, 먼지를 뿌옇게 날리며 한 필의 말이 유성같이 달려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 위에 탄 사람이 손을 흔들며 반가운 목소리로 도옥을 불렀다.

 

「도형! 그간 안녕하시오! 또 만나게 됐군요.

그제야 금환이랑 도옥은 달려오는 상대방의 반가워하는 목소리를 듣고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는 도옥도 말을 몰아 마주 나갔다.

  이윽고 달려오던 한 필의 말은 도옥 앞에서 멎으며 도옥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러자 역시 도옥도 손을 내밀어 상대방의 손을 잡으며

 

「양상공이 아니시오?」

 

하며 말에서 내렸다.

 

  그러는 한편-

 

  도옥의 옆에 섰던 동숙정은 마상에서 내리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동숙정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뿐 아니라 몸까지 부들부들 떨렸다.

 

  (아! 여기서, 여기서 붙잡히고 마는 구나……)

 

하고 공포에 떠는 동숙정은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지금 말을 달려온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양몽환이었다.

이때 양몽환은 도옥의 손을 잡고 흔들며

 

「항상 도형만 생각했는데 반갑소.)

 

  그러면서 동숙정을 바라본 양몽환은 깜짝 놀라며,

 

「아! ?난 또 누구시라고? 동사매가 변장할 줄은 몰랐소. 몰라볼 뻔 했는데요.」

 

하며 하! 하! 대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숙정은 얼굴을 들지 못하고 외면하며 갑자기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벽지에서 양몽환을 만난 것도 그렇지만 자기가 여기까지 도옥을 따라오게 된 일이

부끄럽기도 하고 더구나 곤륜파에서 쫓기다시피 도망해 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들이

일시에 동숙정을 울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 동숙정이 외면하며 울음을 터뜨리자

눈치가 빠른 양몽환은 동숙정의 변장한 것을 연관시키며 무엇인가

짐작케 하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스승님의 책망이라도?」

 

  그제야 동숙정은 눈물을 닦으며 양몽환을 바라보았다.

 

「저는 파의 계율을 범한 몸이어서 더 곤륜파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게 되었어요.」

 

「네? 계율(戒律)을? 그럼 축출 당하셨소?」

 

「아니 , 그냥 나와 버렸어요.」

 

  순간- ,

 

  양몽환은 깊은 구렁텅이로 자신의 몸이 떨어지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어이가 없었다.

 

  (…… 무슨 일을 저질렀다는 것일까?

설사 파계(破戒)를 했다 해도 용서받을 수도 있겠는데 도망까지? )

 

  양몽환의 머리 속은 복잡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데리고 가서 용서를 빌면?……)

 

  여기까지 생각한 양몽환은 천천히 동숙정 앞으로 걸어갔다.

 

「동사매! 계율을 범했다 해도 스승님은 용서해 줄 것입니다.

어떠한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동사매는 스승님께서 가장 총애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비록 동사매가 스승을 떠나 이곳까지 왔다고 해서 십여 년간의 사제지간(師弟之間)을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끊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 생각 마시고 저하고 함께 금정봉으로 가십시다.

저도 용서해 주시라고 빌겠습니다.」

 

하며 되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양몽환의 말은 옳은 말이었다.

순간적인 잘못으로 사제의 의를 끊을 수는 없다.

더구나 지금의 동숙정으로는 용서를 빌어야 할일이지 도망갈 일은 되지 못했다.

양몽환의 부드러운 말은 사리에 맞는 말이었고 동숙정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이었다.

그러나 동숙정으로서는 어떻게 또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양몽환은 동숙정의 얼굴을 살피며 더 말을 계속했다.

 

「우리 곤륜파의 명성은 동사매도 아시다시피 쟁쟁합니다.

그런데 동사매의 단순한 과오로 웃음거리가 된다면

우리 곤륜파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동숙정은 함구무언 고개를 숙인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때 양몽환은 동숙정과 도옥을 번갈아 보며 착잡한 생각을 했다.

 

  (음…… 이미 동사매와 도옥의 사이는 남남이 아닌 깊은 관계가 있구나! )

 

  양몽환은 이만큼 눈치가 빨랐다.

 

  그렇다고 도옥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동숙정에게 대의(大義)를 택하라고 권고할 뿐이었다.

그러나 양몽환으로서는 동숙정의 간직한 비밀이나 쓰라린 과거를 알 길 없었다.

  잠시 동안 조용한 시간이 흘러갔다.

  이윽고 수그렸던 얼굴을 든 동숙정은 양몽환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지금까지의 대화와는 아주 정반대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에요?」

 

  양몽환은 의외의 물음에 당황했다.

그러나 곧 태연한 태도로 웃으며 동숙정을 바라보았다.

 

「기련산에서 주소저를 만나 괄창산까지 모셔다 주고 오는 길입니다.」

 

  그러자 동숙정은 갑자기 생기를 띄우며

 

「그러셨군요. 알겠어요.」

 

하는 동숙정의 입가에는 웃음마저 돌았다.

 

  그러한 동숙정의 표정을 지켜보고 있던 양몽환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그러시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별 것 아니에요.

지금 금정봉에서는 야단일 거예요.」

 

「저 때문에요?」

 

「그렇죠! 돌아오지 않는 다구요. 반 년 동안이나……」

 

「음……」

 

  깊은 신음소리를 내는 양몽환의 뇌리에는 지난 반년 동안의 기기묘묘했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양몽환의 심각한 표정을 지켜보고 있던 동숙정은 계속 다그쳐 물었다.

 

「그럼 괄창산에서 금정봉까지 오는데 얼마나 기간이 걸려요?」

 

「글쎄요. 괄창산에서 금정봉까지 거의 만리(萬?) 길은 될 겁니다.

갈 때에는 주소저의 영학 현옥(靈鶴玄玉)인 백학(白鶴)을 타고 이틀 만에 당도했죠.

그리고 올 때에는 내 경공법으로 따진다면 금정봉까지 한 달이면 돌아올 겁니다.」

 

「그런데 왜 반년이나 걸렸죠?」

 

「아, 그건 정말 의외의 일을 당해서 ……」

 

하고 말을 맺지 못하자 동숙정이 약간 비웃으며 물었다.

 

「말 못할 사정이라면 묻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반년 동안에 한번이라도 하림을 생각해 본 일은 있어요?」

 

  날카로운 물음이었다.

  그 속에 독 없는 가시가 들어 있는 물음이었다.

 

순간!

 

하림이라는 심사매의 이름이 나오자 양몽환은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이것을 노리고 있는 동숙정의 날카로운 눈이 양몽환의 변하는 얼굴빛을 놓칠 리 없다.

 

「생각하신 일이 없죠?」

 

「생각은 했어요.

그러나 사백님과 동사매가 돌봐 주실 줄 믿고 마음 놓고 있었습니다.」

 

「그럼 마음 놓고 반 년 동안을 유쾌하게 지내셨다는 말인가요?」

 

  양몽환은 대답할 바를 몰랐다.

동숙정의 묻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잠시 생각한 다음 입을 열었다.

 

  (하림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불순한 행동이라도 했다는 것일까?)

 

「동사매가 묻는 뜻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하고는 잠시 말을 멈추고 동숙정을 본 다음 말을 계속했다.

 

「재미가 아니라 위험한 고비를 수 없이 넘기고 물에도 빠지고

감옥에도 며칠씩 갇혀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세요? 고생만 하셨군요.

그렇지만 당신 때문에 하림이 중병을 앓았어요.)

 

  양몽환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놀랬다.

 

「중병을? 지금은 어떻게 됐어요?」

 

대경하여 묻는 양몽환과는 반대로 동숙정의 대답은 조용했다.

 

「만일 주소저가 때 마침 오지 않았더라면 시체가 된지도 오래 되었을 거예요.」

 

그제야 하림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고 길게 탄식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심사매는 너무 성질이 급해서 탈이야……」

 

그때까지 한 편에 서서 양몽환과 동숙정의 대화를 듣고 있던 도옥은

양몽환과 동숙정을 번갈아 보며 그의 독특한 비웃는 듯한 어조로 양몽환을 불렀다.

 

「양형! 아까 돌연하고 의외의 일을 당하여 반 년 동안이나 지연됐다고 했는데

그 의외의 일이 골치 아픈 일이었소?」

 

  양몽환의 지나온 반년에 상당한 관심이 있는 눈치였다.

 

「말하자면 한이 없소. 우리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여인숙이라도 찾아가서 천천히 이야기 합시다.」

 

  양몽환은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몸도 피곤했다.

그러자 동숙정이 나서며

 

「저를 금정봉까지 압송하려고 하세요?」

 

  양몽환은 빙긋이 웃으며 동숙정을 바라보았다.

사실 계율을 범하고 파를 배반하면서 도망가는 제자는 누구를 막론하고라도

같은 문파의 제자나 스승이 압송할 권한은 있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동숙정을 압송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동숙정 스스로 되돌아가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어찌 그렇게 하겠습니까?

곤륜파와 보살펴 주신 스승님을 생각해서라도 돌아가 주기만 바랄 뿐입니다

그 소리에 동숙정은 갑자기 실신한 사람처럼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는 차차로 작아지며 울음으로 변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돌변한 사태에 도옥은 도옥대로 양몽환은 양몽환대로각기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얼마 동안 목을 놓고 울던 동숙정은 울음을 그치며 양몽환에게 대들듯이 다가오며

날카롭게 외쳤다.

 

「나를 잡아 가진 못해요!

잡아 가려면 나를 죽여서 시체를 가져가세요!」

 

눈물어린 동숙정의 얼굴은 머리칼이 흩어져 미친 사람 같았다.

양몽환은 난처한 표정으로 도옥을 바라본 후 동숙정에게 공손히 읍했다.

 

「동사매! 진정하십시오. 이 양몽환을 믿으십시오.」

 

「나는 죽어도 안 가겠어요. 내가 갈 길은 단 두 길 뿐이에요.

죽음 아니면 스승을 배반하고라도 돌아가지 않는……」

 

  동숙정의 마음은 이미 결정된 듯 굳은 결심을 표하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한참 동안 어찌 할 바를 몰라 망설이다가,

 

「곤륜파에서 추격해 온다면?」

 

하자 옆에 있던 도옥이 그의 독특한 비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양몽환을 노려보며

 

「흥! 곤륜 삼자가 다 달려와도 어림없지!」

 

하며 냉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그의 표정을 못 본 척 하며 급히 화제를 돌렸다.

 

「도형! 언제 곤륜산에 가 봤소? 그리고 동사매와는?」

 

하는 물음 속에는 여러 가지의 의미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동숙정과 도옥의 관계가 과연 어느 정도의 깊이가 있는가를 재어보는

척도(尺度)가 되기 때문이었다.

돌연한 양몽환의 질문에 도옥의 얼굴은 노기가 충천했다.

 

「그건 왜 묻소? 내가 곤륜산에 갔던 안 갔던 양형이 무슨 상관이오?」

 

금방 달려들 기세였다.

 

「도형! 오해 말아요.

동사매의 일로 도형을 원망할 양몽환은 아니오!」

 

도옥의 성품을 잘 아는 양몽환은 지금쯤 도옥은 분명히 암암리에 진기를 운행하여

공격해 올 것을 알고 있었다.

 

  과연-,

 

  양몽환의 생각대로 겉으로는 웃는 척하면서 암암리에 운기를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자 양몽환도 은근히 기력을 조절하여 도옥의 일격을 막을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도옥을 주시하고 있었다.

도옥의 성격이 그렇듯이 그의 독특한,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웃는 척 하면서

벼락같이 달려드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양몽환으로서는 대단한 주의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때-,

 

  양몽환과 도옥의 사이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동숙정은 재빨리 두 사람의 가운데로

뛰어 들며 양몽환을 바라보았다.

 

「왜들 이러세요? 나 하고 말 좀 해요!」

 

  그제야 위기일발의 아슬아슬한 순간이 무사히 스치고 지나가 버렸다.

도옥이 집중했던 운기를 흩어 버림을 안 양몽환도 숨을 돌리며 동숙정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동사매! 어떻게 하시겠어요? 저와 함께 가지 않겠어요?」

 

「안 가는 것이 아니라 못가요. 더 묻지 마세요. 나는 정말……못가요.」

 

  동숙정의 하는 말 속에는 여러 가지의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양몽환은

길게 한숨을 쉬고 시선을 망연히 먼 곳으로 돌리고 말았다.

여자가 남자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지 못할 사정이라면 굳이 듣지 않아도

알만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입술을 깨물며 흐느끼듯 말하는 동숙정의 얼굴을

더 바라볼 수도 없었다.

 

  (무엇이 , 무슨 일이,

무엇 때문에 동숙정을 이렇게 말하지 못할 사정을 간직하도록 만들었는가? )

 

  양몽환의 얼굴에도 비감한 빛이 수 없이 했다가는 사라졌다.

양몽환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그렇다. 나는 아직 모르고 있을 지도 몰라,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모르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마음대로 가게 하리라……)

 

힘없이 감았던 눈을 또 그렇게 힘없이 뜬 양몽환은 조용히 동숙정 앞에서 물러났다.

그리고는 체념한 듯 슬픈 얼굴에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도옥을 불렀다.

 

「도형! 그럼 동사매와 함께 안녕히 가십시오!」

 

  동숙정은 울고 있었다. 흐느끼며 우는 것이었다.

 

「동사매! 안녕히! 몸조심 하시고 안녕히!」

 

하고 마지막으로 동숙정에게 읍한 다음 도옥을 향하여

 

「다시 만나기를 바랍니다.

그 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고는 천천히 자기가 타고 온 말에 올랐다.

 

이리하여 곤륜파라는 한 문파 에서 자라난 두 제자는

서로 쓰라린 가슴을 안은 채 영원히 갈라서 버리고 말았다.

  누가 옳으며 누가 그른가를 그 누가 어찌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양몽환은 말고삐를 잡아채며 힘껏 말 궁둥이를 찼다.

같은 파의 제자로서 동고동락하기 십 오륙년, 이제 파(派)를 배반하고

스승을 배신하고 같은 제자와 영원히 헤어진 동숙정은 멀어져 가는

양몽환을 바라보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리고 동숙정은 죄책감에 소리를 죽여 가며 울고 있었다.

이러한 정경을 보고 있던 도옥은 적운추풍구에 올라타며 비웃는 듯한

그의 독특한 웃음을 띠며 동숙정을 불렸다.

 

「양형을 따라 가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울지 말고 따라가!」

 

하는 그의 음성은 차가운 바람과 같았다.

 

  마음속으로 흐느끼며 울던 동숙정은 도옥의 말이 떨어지자 노기를 띠며

 

「뭐라고요? 양사제는 당신처럼 엉큼한 사람은 아니에요. 의심하지 말아요.」

 

「흥! 당신의 말대로라면 이 도옥이 천하에 나쁜 놈이라 그런 말이군!」

 

「그럼? 당신이 선량한 사람인줄 아세요?」

 

「흥! 내가 나쁜 사람이라?

그러나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과는 종이 한 장의 차이라는 것을 모르는가?」

 

「알았어요, 당신은 선량한 사람이에요.」

 

하고는 눈을 흘기며 말위에 올라탔다.

 

  말에 올라탄 동숙정은 양몽환이 사라진 곳을 한 번 돌아보고는

도옥의 적운추풍구와 말머리를 나란히 세운 후 도옥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당신과 함께 가겠어요!」

 

  한편, 동숙정과 도옥을 남겨두고 곤륜산 금정봉을 향하여 말을 달리던 양몽환은

자기가 타고 있는 말의 말발굽 소리 아닌 또 다른 한 필의 말발굽 소리를 듣고

급히 말을 세우고 돌아보았다.

그러자 뿌연 먼지 속을 뚫고 무영녀 이요홍이 달려오고 있음을 발견했다.

 

  (웬 일일까?……)

 

하는 순간에 쏜살같이 달려오던 이요홍의 말은 양몽환이 서 있는

 바로 앞에서 딱! 멈추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이요홍의 몸이 말 위에서 굴러 떨어지려는 찰나!

 

「앗!」

 

  비명을 지르며 말 위에서 급히 내린 양몽환은 굴러 떨어지는 이요홍의 몸을 받아 안았다.

  너무나 순간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이요홍이 다칠 것만을 염려하고 급히 받아 안은

양몽환과는 반대로 미리 이렇게 될 것을 계획이나 했던 것처럼 이요홍의 몸이 양몽환의 품에

안기는 순간,

이요홍은 양몽환의 목을 끌어안으며 자기의 볼을 양몽환의 얼굴에 부비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요홍은 속삭이듯 말하는 것이었다.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호…… 호 ……」

 

  양몽환은 이요홍을 땅에 내려놓으며

 

「누가 그렇게 달리라 했소? 부딪치려고 마음먹었던 모양인데……」

 

「네? 너무 하신데요. 저는 떨어지는 줄만 알고 아무 정신도 없었는데 ……」

 

  하고는 양몽환의 두 손을 끌어다 자기의 가슴에 놓으면서

 

「자, 이것 보세요. 얼마나 제 심장이 뛰고 있는가!」

 

  그러는 이요홍은 웃음을 머금은 채 양몽환을 살짝 흘겨보는 것이었다.

  그제야 양몽환도 피식 웃었다.

 

  이요홍의 행동을 짐작할 수 있는 양몽환은 이요홍보다 오히려 더 얼굴이 빨개졌다.

양몽환은 이요홍에게서 시선을 옮기며

 

「무슨 일로 이렇게 급히 따라 왔소!」

 

「따라 오다뇨? 이 길로 다니면 안 되나요?

제가 가는 길에 당신이 먼저 가고 있었다 뿐이에요.」

 

  양몽환은 또 한번 피식 웃었다.

 

「그럼 , 그냥 앞서서 가지 않고 왜 여기 서있죠?」

 

하고는 이요홍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요홍은 눈을 깜박이며 화가 난 얼굴로 양몽환을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생글생글 웃는 것이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그것은 제가 할 말이에요.

제가 가는 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 건 누군데요?」

 

  이요홍의 마음속을 이미 눈치 챈 양몽환은

 

「하……하……」

 

  소리를 내어 통쾌하게 웃으며 말 위로 가볍게 올랐다.

 

「하여간 나는 곤륜산으로 가는 길이오.

 따라오지 말고 앞서서 가시오!」

 

하고 말머리를 돌리려는 순간!

 

  어느 틈에 달려든 이요홍은 양몽환의 도포를 낚아챘다.

그와 동시에 양몽환의 도포는 보기 좋게

 

  <찌익!> 

 

  소리를 내며 찢어져 버리고 말았다.

 옷이 찢어지는 바람에 화가 난 양몽환은 이요홍을 노려보며 손을 휘둘러

신용요미(神龍搖尾)의 한 수로 내려쳤다.

그러자 이요홍은 재빨리 몸을 피해 양몽환의 가슴으로 달려들어 꼭 안기고 말았다.

 

이요홍의 대담하고도 뜻밖의 일에 당황한 양몽환은 자기를 껴안은

이요홍을 간신히 떼어 놓으며 이요홍을 내려 보았다.

그러자 이요홍은 생글생글 웃으며 곱게 흘겨보는 것이었다.

 

「연약한 여자를 그렇게 치는 법이 어디 있어요?」

 

  양몽환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요홍의 정열적인 행동에 산란해지는 가슴을 진정하며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이요!」

 

  역정을 내듯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이요홍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도리어

 

「저도 데리고 가요? 네?」

 

하면서 양몽환의 손을 꼭 잡는 것이었다.

 

  이요홍의 노골적인 사랑의 고백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양몽환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안돼요.」

 

「그럼 왜 저를 살려 주었죠? 죽게 내버려 두었으면 ……」

 

  기어이 눈물을 흘리며 이요홍은 양몽환의 가슴으로 쓰러지는 것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벌어지자 양몽환은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요홍을 구해준 것은 결국 다른 생각이 있어서 살려준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이렇게 이요홍이 다가들자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미처 말을 맺지 못하고 양몽환의 가슴에 엎드려 울던 이요홍은 눈물을 흘리며

양몽환을 바라보았다.

 

「제가 싫다면 그냥 죽게 두지 않고 저 때문에 당신은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왜 살렸죠.

저는…… 결심 했 ……당신과……」

 

  양몽환은 길게 한숨을 쉬며 이요홍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그것은 지나친 생각이요.

의분(義憤)에 못 이겨서 당신을 구한 것뿐이오.

나는 절대로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소.」

 

「거짓말이에요. 그래서 고생하시진 않았어요.」

 

  양몽환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나에게 몸을 바치려고 하는

이요홍을 나는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양몽환은 이요홍을 가슴에 안은 채 망연히 서서 침통한 생각에 잠겨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흐느껴 울던 이요홍은 갑자기 울음을 그치고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감고 있던 양몽환의 허리에서 서서히 두 팔을 풀고 한 걸음 물러섰다.

 

「좋아요. 당신은 심사매 때문에 그러시죠?

저보다 심사매가 더 예뻐서 그러시죠?」

 

  날카롭게 양몽환을 노려보는 이요홍의 눈 속에는 질투가 가득 차 있었다.

그러자 양몽환은 어이없다는 듯 입을 크게 벌리면서

 

「사리에 닿지도 않는 말은 마시오!」

 

「그럼 왜 저를 싫어하시죠? 제 마음을 몰라주시고……」

 

  양몽환은 이요홍을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당신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오.

그렇다고 심사매를 생각해서도 아니요.

당신은 이미 금환이랑 도옥의 사랑을 받고 있는 몸이 양몽환을 잊어 주시오!」

 

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자 이요홍이 막아서며

 

「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나 할 말이 있어요.」

 

「무슨 말을?」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이죠?」

 

하고 묻는 이요홍의 태도는 좀 전의 울며 사랑을 고백하던 때와는 딴판이었다.

양몽환은 돌변한 이요홍의 태도에 짐짓 놀라며,

 

「곤륜산으로, 급히 스승님을 뵈어야 할 일이 있소!」

 

양몽환의 ?말에 이요홍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자신 있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그렇지만 가셔도 소용없어요.」

 

  차갑게 한마디 던지고는 돌아서 버렸다.

 

  그러자 양몽환은 깜짝 놀라며 이요홍의 앞으로 다가서며

 

「어떻게 알죠?」

 

하고 급히 물었다.

그러나 이요홍은 냉정한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알아요. 스승이 그 곳에 없는 것을!」

 

  이때 양몽환은 이요홍이 자기를 곤륜산으로 가지 못하게 하려는 계획임을 직감하고

 

「당신이 나를 못 가게 하려는 말이죠. 믿지 않겠소!」

 

하고는 휙 돌아서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이요홍은 양몽환의 등에다 대고 혼자 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그것은 당신의 자유에요. 그러나 스승님은 안 계세요.」

 

  급히 돌아서던 양몽환은 아무래도 이요홍의 말이 농담은 아닌듯한 생각이 들어서 다시 돌아섰다.

 

「그럼?」

 

「그때, 당신이 저를 구한 후 대신 잡히자

저는 당신을 구하려고 몇 번이나 애썼지만 구할 수 없었어요.」

 

「? …………」

 

「그래서 저는 그 결로 곤륜산을 찾아가 당신의 스승을 찾았어요. 구원을 청하려고」

 

「그럼 삼청궁엘 갔었다는 말이오?」

 

하고 다급하게 물었다.

 

「삼청궁까지는 가지 못했어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이틀 동안이나 산중에서 헤맸어요.

그러나 찾을 길은 없고 당신을 빨리 구해야할 생각만 하느라고 배고픈 것도 모르고 헤맸어요.」

 

「저 때문에 그런 고생을 했군요.」

 

「그러면요!」

 

「감사합니다!」

 

  양몽환의 말에 이요홍은 기쁜 듯이 웃으며 곱게 눈을 흘겼다.

 

「저는 피곤한 것도 모르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천만 다행으로 일양자 노선배를 만날 수 있었죠.

그래서 저는 당신의 위급함을 알리고 빨리 구해줄 것을 애원했어요.」

 

  순간-,

 

  양몽환은 마음속으로 이요홍이 자기 때문에 삼청궁까지 찾아갔던 것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다.

 

「미안하오. 저 때문에 ……

제가 당신을 구해 준 것은 옛 은혜를 보답하려는 마음뿐이었는데 정말 감사하오.」

 

  그러자 이요홍은 모든 슬픔을 잊어버린 듯 밝은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그때 일양자 노선배는 칼날 같은 절벽 위에서 싸우고 있었어요.

너무 맹렬히 싸우느라 밑에 낭떠러지도 모르고 말이에요.」

 

「누구와 싸우죠?」

 

「검은 옷을 입었는데 무기라고는 구슬이 달린 퉁소에요.」

 

하자 양몽환은 소스라치듯 놀랐다.

 

「그러면? 옥소선자란 말이요!」

 

「글쎄 그것 까지는 모르겠어요.

저는 너무 피로해서 싸우는 곳까지는 가지 못하고 고함을 쳤어요.

그때 일양자 노선배가 저를 발견하고 손을 멈추는데 번개같이 흑의인이 달려들지 않아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어요.」

 

「다쳤는가요? 옥소선자에게?」

 

「다치진 않았어요. 재빨리 막았어요. 그리고는 또 싸우는 거예요.」

 

「그 흑의인이 퉁소를 가졌다면 틀림없는 옥소선자요.

그의 무공은 강하고 매우 날카롭기로 유명한데 …… 어떻게 됐어요?」

 

「저는 있는 힘을 다해서 소리를 질렀어요.

그래도 계속 싸우기에 할 수 없이 당신이 붙잡혔다고 했어요.」

 

「음 …………」

 

「그랬더니 일양자와 흑의인은 싸움을 멈추고 제게로 달려오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빨리 구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말했죠.」

 

  양몽환은 초조하게 이요홍의 입을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흑의인은 당신하고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일양자 노선배보다 더 놀라며 당신이 어디 있느냐고 묻더군요.」

 

하고는 의미 있는 웃음을 짓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못 본체하고 다음을 재촉했다.

 

「저는 대답을 안 할까 했어요.

그러나 당신을 빨리 구해야 된다는 생각에 사실대로 말했죠.」

 

「음…… 스승님이 무어라고 했던가요?」

 

「잠자코 있었어요.

그런데 그 흑의인이 일양자 노선배에게 돌아서며 도장(道長)! 하고 부르더군요.」

 

  <그만 싸웁시다.

 곤륜삼자가 저를 속이는 줄 알았는데 양몽환이 아직 돌아오지 않는 것이 사실이군요.>

 

「이렇게 말하고는 질풍같이 어디론가 가버렸어요.

그리고 일양자 노선배도 곧 뒤따라 가버리고 저만 혼자 남았죠.」

 

  양몽환은 깊은 한숨을 쉬며 탄식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가 아미산을 떠나온 지가 벌써 육일이 지났는데

스승님과 옥소선자가 아미산으로 갔다면 어떻게 하지?」

 

「걱정해도 소용없어요. 벌써 아미산에 도착했을 거예요.」

 

「그럼 나도 가야지!」

 

하고 양몽환은 말머리를 돌렸다.

 

「잠깐만!」

 

  양몽환을 불러 세운 이요홍은

 

「저도 가겠어요. 모든 것이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에요. 가서 사과드릴래요.」

 

  양몽환은 고개를 흔들며 거절했다.

 

「필요 없소! 나 혼자 가겠소!」

 

하고 말 잔등을 때렸다.

그러자 이요홍이 달려들며 날카롭게 대들었다.

 

「당신은 왜 저를 싫어하죠? 잘못한 것이라도 있어요?」

 

하는 그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양몽환은 이요홍의 눈물어린 얼굴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싫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요.

당신이 나를 위하는 마음은 이미 알고도 남음이 있소.

그러나 당신과 함께 아미산으로 간다면 다른 사람들이 보고

무슨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뜨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피차 불쾌한 일이오.

만일 스승님이 이런 소문을 듣는다면 나는 우리 파에서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하고는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 보인 양몽환은 천천히 말머리를 돌려

아득한 하늘을 바라보며 말채찍을 높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