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장 사랑과 욕망의 갈등 <堅貞娘子>
석실을 나온 동숙정이 급히 달려 하림의 거실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밤 삼경이었다.
그런데 하림의 거실에 불빛이 없이 캄캄하여 가만히 창문을 두드리고 두어 번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문 앞으로 돌아간 그녀가 문을 밀자 문이 쪽 열렸다.
방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켜고 보니 침대 위의 이불과 요는 깨끗이 정돈되어 있을 뿐
주약란과 하림은 보이지 않았다.
불을 끄고는 하림의 거실을 나왔다.
주위는 고요하고 쓸쓸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천천히 마당을 가로 질러 뒤의 매화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청아한 매화의 향기가 은은하였지만 그녀의 마음은 그러한 향기를 마시며
아름다운 공상의 날개를 펴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그녀의 등 뒤에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 왔다.
「밤이 깊었는데 왜 아직 안 가시오?」
동숙정이 돌아보니 황지영이 한 그루의 매화나무에 기대어 섰는데
그녀와는 겨우 두 석자의 거리 밖에 안 되었다.
그녀는 산란한 마음에 눈과 귀의 평소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여
황지영이 바로 그녀 뒤에 있었는데도 몰랐던 것이다.
약간 섬뜩해진 마음을 안정시켰다.
「이렇게 깊은 밤에 어떻게 오셨어요?」
황지영은 두어 걸음 다가오며
「나는 사매와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동숙정은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깊은 밤에 무슨 이야기에요? 내일 하도록 하시죠.」
하고는 돌아섰다.
그녀는 근 수년간 될 수 있는 한 황지영을 피하는 태도를 취하여왔으나
이와 같이 딱 잘라 거절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너무나 매정한 태도에 황지영은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서서는 말을 못했다.
동숙정은 몇 번 걸음을 옮기다가
갑자기 너무 상대방의 감정을 무시하는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곧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사형, 무슨 요긴한 이야기라도 있으신가요?」
황지영은 속으로 하고 싶은 말을 가득히 준비하고 있었으나 동숙정이 냉정하게
잘라 거절함에 어쩔 줄을 모르게 되고 전신의 맥이 탁 풀려 말조차 할 기력이 없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괜 …… 괜찮소. 사매의 심정이 좋지 못하다면 폐가 될 테니까.」
하고 한숨을 땅이 꺼지게 쉬고는 돌아섰다.
황지영이 처량하게 돌아서 가는 모습을 보며 동숙정은 십여 년간
그녀에게 베푼 정의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동숙정은 하림의 방으로 돌아와서 다시 등잔에 불을 켜고는 옷을 입은 채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말 못할 자기의 처지에 그만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아무리 의지가 강한 여인이라도 일단 애정관계에 휩쓸리게 되면 약하게 변하는 것인지
동숙정도 예외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한번울음이 쏟아지자 걷잡을 수 없었다. 점점 더 터지는 흐느낌에 등잔불마저 깜박이는 듯 했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주약란과 하림이 들어왔다.
동숙정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림이 그녀에게로 다가와서는
「언니 무슨 근심이라도 생겼어요?」
주약란의 냉엄한 눈초리가 동숙정의 얼굴을 스치며
눈물에 젖은 베개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다시 동숙정의 얼굴을 바라본다.
동숙정은 그 눈초리가 마치 자기의 가슴 속까지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눈물을 닦고 침대를 내려오며 고개를 흔들면서
「단지 내 신세가 서글퍼져서 그래 ……」
하고 쓸쓸히 웃었다.
「그렇군요. 언니는 아버님과 어머님이 생각나셨군요.
나도 부모님들이 생각날 때에는 시원하게 울어요.」
동숙정은 쓸쓸히 웃음을 띠고 방을 나서며
「사매 말이 맞았어.」 ,
주약란은 줄곧 입을 열지 않다가 동숙정이 사라지자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아마 굉장한 고민이 있는 것 같군.」
하는 말에 하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요. 부모님이 생각나면 누구나 서러워지죠.
대 언니는 부모님이 계세요?」
그 말에 주약란이 눈가가 붉어지며 가냘프게 웃었다.
「나의 신세를 이야기하자면 길고 처량해, 이 다음에 천천히 이야기해 주지.」
하림이 문 밖으로 한 번 얼굴을 내밀고 등인대사의 방에 여전히
불빛이 없는 것을 보고는 주약란에게 다가오며
「언니, 사부님과 등인 사백부님께서 이렇듯 오래 돌아오시지 않는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고 걱정했다.
「너의 사부님과 등인 사백은 아마 너의 큰 사백님을 찾지 못해서 못 돌아오고 있을 거야.
그들이야 위험이 없지만 너의 큰 사백부님은 알 수 없지.
옥소선자의 무예가 결코 얕볼 수 없는 만큼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누가 이길는지 예측할 수 없는 일이지.
그렇다 저렇다 하더라도 엿새 동안 판가름이 나지 않을 수는 없을 텐데. 내일 우리가……」
하는데 밖에서 가볍게 옷자락을 끄는 소리가 났다.
「너의 사부님과 등인 사백부님이 오셨어.」
하는 주약란의 말에 하림은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창 밖은 어둠 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밝은 곳에서 어두운 어둠 속의 물체가 보일 리 없었다.
하림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자 주약란에게 다시 물어 보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들려오는 발소리와 함께 혜진자와 등인대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대사는 선장을 들고 혜진자는 검을 메었는데 두 사람 모두 깊은 수심에 잠겼다.
혜진자가 억지로 웃으면서 합장하며
「주소저의 도움으로 하림이 이렇듯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하림은 마음씨 고운 천사예요.
신령들이 수호하는데 이 후배가 때맞추어 보게 된 거겠죠.」
주약란의 겸손한 말이었다.
그때 하림은 혜진자에게로 다가갔다.
「사부님, 큰 사백부님을 찾으셨어요?」
등인대사가 한숨을 쉬며
「나와 너의 사부님이 헤어져 이 근방 십리 이내를 샅샅이 뒤져보았지마는
빙애(氷崖)위에 두 사람이 결투한 흔적만 있을 뿐 너의 큰 사백부님은 간 곳이 없구나.」
하자 주약란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그 빙애(氷崖) 위에 핏자국 같은 것이 있던가요?」
다급히 묻자 혜진자가 침울한 어조로
「그곳은 허공에 툭 튀어나온 곳인데 밑에는 천장(千丈)이나 되는 절벽으로
눈이 얼어붙어 뱀과 같은 짐승도 미끄러질 정도야.
빙애에 핏자국은 없지만 한쪽이 깨져 있어요.
둘이 싸우다가 깨지는 바람에 깊은 계곡으로 떨어지지나 않았는지.
하여간 싸움을 칠일간이나 밤낮 없이 싸울 수도 없는 일인데 ……」
혜진자는 극히 침착한 태도를 보이려고 하나 얼굴에 나타난 깊은 수심은 감출 수는 없었다.
주약란이 그녀의 심정을 짐작한 듯 밝게 웃으며
「제가 직접 가 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수십 수백 년 간이나 얼어붙은 얼음덩이가
그들이 다같이 죽을 마음으로 천근타신법(千斤墮身法)을 써서 고의로 한 귀퉁이를
허물어뜨리지 않았다면 결코 그 귀퉁이가 허물어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만일 옥소선자가 일부러 일양자 선배님을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해도
일양자 선배님과 같은 무예의 재간으로서는 결코 그녀의 수단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에요.
유일한 가능성은 그들이 싸우다가 승부를 판가름할 수 없어 내공력을 발휘하여
전력으로 싸우다가 함께 떨어질 가능성은 있지만……이가능성은 희박해요,
즉 한 귀퉁이가 허물어지려고 할 때 그들은 다같이 손을 멈추고 뛰어나을 수 있었을 터이니까요.」
하고는 다시 주약란이 혜진자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일양자 선배님께서는 옥소선자와 무슨 원한이라도 있나요?」
혜진자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런 원한도 없어요. 월전(月前) 깊은 밤에 삼청궁에 와서 양몽환을 내 놓으라고 하기에
내가 삼청궁에 양몽환이 없다고 하였더니 믿지 않고 감정을 품은 채 돌아갔소.
그리고는 일주일 전에 공동과의 신원통과 짝을 지어 이리로 와서는 소란을 피우며
대사형과 한참 동안 싸웠는데 나와 둘째 사형이 달려갔더니
칠일 후에 다시 와서 대사형과 결투를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갔지요. ……」
그녀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주약란은 얼굴에 노기를 가득히 띠고
「아니, 무엇 때문에 양몽환을 찾아요? 살기가 싫어진 모양이지?」
혜진자가
「나와 대사형이 물어 보았지만 대답은 않습니다.」
주약란은 코웃음을 쳤다.
「지금 이미 자시가 넘어 그 절벽은 어두워 보이지 않을 거예요.
내일 아침 같이 가서 살펴보기로 하지요.」
하고서는 노기도 사라지고 진정되었다. 혜진자는 설마 주약란이
절벽 아래까지 내려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담담히 웃고는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
등인대사도 합장하고는 나가 버렸다.
두 사람이 나가자 남은 두 사람은 침대 위로 올라갔다.
하림이 궁금한 듯
「언니, 옥소선자가 무엇 때문에 오빠를 찾을까요?」
주약란은 웃으며
「빚을 받으려고 찾는 게지.」
하림이 이상한 듯
「오빠가 그녀의 물건이라도 가져갔나요?」
자못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가 옥소선자의 마음을 훔쳐가고 또 옥소선자가 훔쳐온 설삼과를 먹었지.」
하림은 어리둥절하더니 탄식하며
「알았어요. 옥소선자도 오빠가 좋아져서 이곳 금정봉까지 찾아 온 것이군요.
오빠가 좋으니까 모두 좋아하거든. 언니도 좋아 하죠?」
너무나 노골적인 물음에 주약란은 얼굴이 붉어지고 말문이 막혔다.
주약란은 그냥 웃기만 했다.
그러자
「언니, 내가 말을 잘못 했어요?」
그제야 주약란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니, 글쎄 …… 나도 잘 모르겠어. 그를 좋아 하는지 어떤지 ……」
「그렇게 쉬운 일을 몰라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나는 알 수 있는데 .」
「글쎄 너의 입장에서는 매우 쉬운 일이지만 내게 있어서는 어려운 문제가 되는 거야.
림매 (琳妹)! 이따가 생각해 보고 이야기 해 줄께.」
「그렇게 어려운 문제인 줄 알았으면 묻지를 말았을 걸.」
주약란은 쌩긋 웃으며
「밤이 깊었으니 일찍 자고 내일 큰 사백부님을 찾으러 가자.」
하는 말에 하림도 걱정했다.
「나의 큰 사백부님이 정말 그 깊은 계곡에 떨어졌다면 많이 다쳤을 터인데
오빠가 알면 매우 걱정하겠어요.」
주약란은 손바람으로 등잔불을 껐다.
「너의 큰 사백부님과 옥소선자가 원한이 없는 이상에 같이 죽기로 싸우며
떨어지지는 않았을 거야.」
이튿날 아침 주약란과 혜진자 등 네 사람은 그 빙애로 달려갔다.
그 곳은 어느 높은 산의 중턱에 위치하는 돌출한 빙암(氷岩)으로 둘레가 반무(半畝)되는
미끄러운 곳이었다.
산봉우리 위에 올라서자 주약란은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 소리가 길게 산으로 메아리쳐 가다가 끊어지면 다시 휘파람을 불었다.
연거푸 세 번을 불고는 돌연 몸을 날려 백 길이나 되는 빙암으로 뛰어 내리는 것이었다.
혜지자 등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
세 사람이 일제히 낭떠러지의 밑을 보자 주약란은 머리를 아래로 하고 쏜살같이 내려가더니
그 빙암에 닿을락 말락 할 때에 홱 몸을 바로 세워 그 빙암 위에 섰다.
그리고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등인대사는 혜진자를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와 같이 놀라운 경신술은 생전 들어보지 도 못한 건데 혹시 무예계에서 말하는
능공허도(凌空虛渡)가 아닌가요?」
혜진자 역시 주약란의 놀라운 무공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의 재간은 정말 어느 정도인지 추측할 수가 없는데 틀림없이 내력이 있는 인물이에요.
우선 우리도 벽호공(壁虎功)으로 내려가 보지요. 그녀가 무어라고 말할는지 들어나 보게요.」
등인대사가 하림을 보고
「림아, 너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하고는 먼저 벽호공으로 내려가는 혜진자를 따라 급히 내려갔다.
두 사람이 그 빙암에 내려섰을 때에 주약란은 그 위에 박혀있는 발자국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한참동안 눈 위에 박혀있는 발자국을 살펴보던 주약란은 눈살을 찌푸렸다.
「굉장히 싸웠군요.
여기 있는 이 발자국으로 보아서 아무도 우세한 위치에 서지 못했어요.
이 발자국은 바로 내 공을 운집시켜 싸울 때 남겨진 것인데 ……」
하더니 갑자기 가장자리에 가 섰다.
과연 허공으로 돌출한 한 모퉁이에는 허물어진 흔적이 보이는데
그 아래는 시커먼 거물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듯 캄캄할 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혜진자는 주약란의 옆에 가 서며
「두 사람이 내공을 운집하여 싸웠다면 다른 일에 정신을 팔 여가가 없었을 터이니
떨어져 나간 얼음 조각과 함께 틀림없이 수 천길 아래로 떨어졌을 겁니다.」
「여기에 남긴 결투 흔적으로는 말하기 힘들어요.
후배가 저 아래 계곡까지 가보아야겠어요.」
등인대사는 급히 만류했다
「밑이 보이지 않는 계곡이라 내려가기가 곤란할 걸요.」
그러나 주약란은 다시 고개를 들고 휘파람을 한번 불었다.
「어검술로 비행하여 내려가는 이외에는 아무리 강한 경신술로도 내려가기 곤란하죠!
후배는 어검술의 비결을 조금 알고 있으나 아직 내려갈 능력은 없습니다.」
하고 말이 끝나자 갑자기 하늘에서 학이 우는 소리와 함께 백학 현옥이 커다란 몸집을
잽싸게 돌려 주약란의 옆에 가 내려앉았다.
혜진자는 그제야 아무리 깊은 계곡이라도 이와 같은 영특한 날짐승이 있으면
문제없이 내려갈 수 있음을 알았다.
주약란이 학의 등에 타자 현옥은 즉각 커다란 날개를 펼치며 공중에서 한바퀴 돌더니
곧장 아래로 내려갔다.
흰 점이 작아지면서 끝내 안개와 어둠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았다.
한편 주약란은 밑에 닿자 즉각 학의 등에서 뛰어 내렸다.
주위에는 얼음과 눈으로만 쌓여서 살을 에는 듯한 추위만 느껴질 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계곡은 퍽 깊었으나 넓지도 길지도 않았다. 얼마동안 세세히 살펴보았으나
일양자와 옥소선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얼음으로 쌓인 계곡에 맹수와 뱀 같은 짐승도 있을 수 없고 일양자와 옥소선자도
떨어지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다시 학을 불러 타고 빙암으로 올라와 학의 등에서 내렸다.
그러자 혜진자가 초조한 얼굴로 다가왔다.
「주소저, 그들은 ……」
하고 말을 맺지 못했다.
그리고는 얼굴이 새파래져서 꼼짝도 않고 주약란의 입술만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러자 주약란은 고개를 흔들었다.
「계곡은 사방이 눈에 얼어붙어 뱀 한 마리도 살지 못할 것 같더군요.」
혜진자는 눈물을 가득히 머금고는
「떨어지면 뼈가 가루가 되겠지요.」
주약란이 웃으며
「후배가 샅샅이 뒤져 보았어요. 그러나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어디로 갔을까? 다른 곳으로 가서 싸우고 있을까?」
주약란이 웃으며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이 넓은 곳에서 싸우지 않고 어딜 갔겠어요?」
그러나 등인대사는 침울한 표정이었다.
「어떤 뜻밖의 사고라도 생기지 않았을까?」
주약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군요. 싸움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겨 잠시 싸움을 멈추었는지도 모르죠.……」
하고는 갑자기 절벽 쪽으로 달려가는데 혜진자와 등인대사도 뒤 따라 가서 그 곳을 보니
얼음으로 뒤 덮인 절벽에 검으로 쓴 듯
(환이 위험을 당하여 황급히 구하러 감)
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그 글자들이 흐트러진 것으로 보아 일양자는 매우 황급히 쓴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글자를 보자 주약란은 제 정신이 없는 듯 휘파람으로 백학(白鶴)현옥을 불러 등에 타고는
떠나려고 하자 등인대사가 황망히
「주소저 잠깐, 이 늙은이가 몇 마디 드릴 말씀이 있소.」
주약란은 급한 듯이 먼저 입을 열었다.
「림매의 상처는 이미 완치되어서 이제 걱정할 건 없어요.」
등인대사는 머리를 흔들었다.
「이 글자는 남긴 지가 적어도 며칠은 될 텐데 ,
소저는 그들이 어디로 갔으리라 생각하시고 쫓아가려고 하시오……」
그러자 혜진자가 손을 저었다.
「급하게 굴어도 소용없어요.
우선 집으로 돌아가서 의논하여 일제히 찾아 나서기로 하죠.」
주약란은 할 수 없이 학의 등에서 내렸다.
「옥소선자, 이 더러운 여자 같으니.」
등인대사는 주약란의 이렇듯 초조하고 근심에 싸인 얼굴은 처음대하는 것이다.
이 순간이야 말로 그녀의 소녀다운 모습을 어김없이 발로시킨 것이었다.
평소 주약란은 고귀한 용모와 사람을 누르는 위엄으로 소녀의 본성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며
가히 하늘의 별이 운무에 가린 듯 신비스러운 존재로만 느껴졌으나
이제 양몽환이 위험하다는 일양자가 남긴 글에 초조한 나머지 나타낸 자태는
결코 하늘의 별도 신비스러운 존재도 아닌 한낮 사나운 소녀에 불과한 것이다.
주약란은 등인대사와 혜진자가 자기를 주시하는 눈초리에 겨우 자기의 실태를 느끼고는
그만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곧 정신을 차린 듯 담담히 웃어 보이며
「아마도 일양자 선배님과 옥소선자가 싸울 때 달려 온 양몽환이
옥소선자에게 붙잡혀 간 것일 거예요……」
혜진자가 고개를 흔들며
「몽환은 대사형의 전 무공을 물려받은 몸으로 비록 옥소선자를 이길 수는 없지만
잠시 동안 자기 몸만은 보호할 수 있는 무공인데……
옥소선자에게 잡히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자 주약란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오늘 내가 왜 이리 허둥댈까?
단지 내가 가르쳐 준 오행미종보의 신법만 하더라도 능히 옥소선자와 다툴 수 있을 텐데 ……)
한편, 등인대사는 그러한 주약란의 초조해 하는 모습을 보고는
가슴이 서늘해 옴을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양몽환에 대한 정이 저렇게 깊으니 하림의 장래가 염려스럽구나.
무공으로나 자색으로나 하림이 그녀와 비할 수 없으니 일양자와 혜진자가
나서서 돕는다 하더라도 해결될 수 없을 것 같군.……)
그는 절로 장탄식이 나왔다.
깊은 수심에 잠겨 한숨짓는 등인대사의 마음을 혜진자가 이해 못할 리가 없다.
그러나 그녀는 성급하게 다루어서는 안 될 문제라고생각하고는
「우선 돌아가기로 하죠.
조그만 단서만 얻게 되더라도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하고는 벽호공을 전개하여 등을 벽에 기대고는 흐느적흐느적 올라갔다.
그러나 주약란은 학을 타고 먼저 올라올 수 있었다.
주약란이 산봉우리에 도달하자 하림이 다가오며
「대 언니, 큰 사백부님을 찾으셨어요?」
주약란의 손을 잡으며 주시했다.
주약란은 하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래로 떨어진 것이 아니고 오빠를 찾으러 갔어.」
하림은 놀란 듯한 얼굴빛으로
「큰 사백부님은 재간이 훌륭하셔서 떨어지지 않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오빠는 어떻게 되었어요?」
주약란은 양몽환이 위험한 경지에 빠졌음을 알려 주고 싶었으나
그녀가 걱정하는 표정을 보자 차마 그 말을 못하고 말았다.
이어 혜진자와 등인대사가 올라오자
그들은 다시 하림의 거처로 발길을 돌렸다.
얼마 후에 그들은 하림의 처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약란은 줄곧 생각하여 본 결과 이 일과 옥소선자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양몽환이 위험에 봉착하였다면 그 자신이 스승에게 나타나 구원을 청할 수 있고
필시 다른 사람이 일양자와 옥소선자가 싸우는 곳에 달려 와서 양몽환이
위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을까?
그런데 누가 소식을 전했을까?
양몽환은 지금 어디에 있으며 또 아직 살아 있을까?
그리고 삼청궁과 그 빙암이 있는 곳과는 불과 이십 리밖에 안 되는데도
일양자가 와서 알리지 않은 것을 보면 틀림없이 일이 급하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해 보는 주약란이었다.
집에 돌아 와서도 주약란이, 여전히 깊은 생각에 잠긴 것을 본 혜진자는
방해가 안 되도록 나직한 목소리로 등인대사를 불렀다.
「대사님은 친히 저의 사형과 옥소선자가 싸우는 것을 보아서 아시겠지만
둘 중에 누가 좀 더 강해요?」
하고 물었다.
「두 사람의 공력은 백중지세인데 경력(경力)과 검법은 댁의 사형이 한 수 높다 할 수 있겠고
경신법 재간에 있어서는 옥소선자가한 수 높을 겁니다.
특히 그녀가 공중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신법은 희한한 재간이더군요.」
하는 것이었다.
「대사님의 말씀이 옳다면 몽환이는 결코 옥소선자가 붙잡아 간 것은 아닐 거예요.
환의 무예와 사형이 앞에 있는데 그녀 마음대로 될 수는 없을 것이고 증대한 문제는
그들 두 사람이 어떻게 소식을 전해 들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소식을 전달해 준 사람만 찾으면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거예요.」
그때 주약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래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전달해 준 사람도 이미 멀리 갔을 터이니
찾기란 여간 힘들게 된 것이 아니에요.
제가 먼저 쫓아가고 싶은데 두 선배님께서는 천천히 뒤따라오시죠.」
등인대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렇게 넓은 천지에 어디 가서 찾겠소?」
주약란이 쓸쓸히 웃으며
「조그만 단서라도 잡기만 하면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때서야 하림도 양몽환의 신상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짐작하였는지
주약란에게 다가가서는 침울하게
「언니, 오빠를 찾으러 간다면 저도 데려가 주세요.」
애원하듯 매달렸다.
「그래, 같이 가기로 하지.」
등인대사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안 돼요. 단서도 없이 찾아 나선다는 것은 바다 속의 바늘 찾기야.
사람을 구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빨라야 하는데 정말 양몽환이
위험한 경지에 빠졌다면 이미 때는 늦은 거요.
더구나 복수를 하자는 것도 아닌데 계획이나 세우고 떠납시다.」
하는 말에 주약란이 멈칫했다.
「선배님 말씀이 옳습니다. 고견을 말씀해 보십시오.」
등인대사는 주약란의 그와 같은 반문에 도리어 어리둥절했다.
「이 늙은이 생각으로는 맹목적으로 나서는 것보다 소식을 기다려봄이 어떨까 하는 거요.
일양자는 계략이 있는 분이요.
정말 일이 까다로울 것 같으면 삼청궁에 응원을 청하려 할 것이오.
양몽환이 위험에 빠졌다는 소식은 아마 일양자와 옥소선자로 하여금
전의를 해소시키고 같이 달려간 것으로 생각됩니다.」
주약란이 들으니 등인대사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을 온통 양몽환에게 바쳤는데 어떻게 가만히 앉아
오는 소식을 기다릴 수 있으랴?
그녀는 한동안 생각해 보고는 고개를 들었다.
「선배님 말씀도 옳습니다만 많은 일이 상상외로 진전되는 수가 있을 수도 있어요.
저에게 한 가지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두 분 선배님께서는 금정봉에서 일양자 선배님께서 오는 소식을 기다리기로 하고
저와 하림은 같이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요?
소식이 있는 대로 현옥으로 서신을 보내어 응원을 청하기로 하되 일주일 이내에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할 때에는 돌아오겠습니다.
그 반면 두 분께서 무슨 소식을 들으시면 그 방향을 글로 남겨 두시고
저와 하림이 달려가기로 하지요.」
혜진자는 대뜸 찬성했다.
「그 방법이 좋군. 그럼 일 주일을 기한으로 약속합시다.」
주약란은 일부러 침착한 웃음을 웃어 보이고는 하림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
그리고 휘파람으로 현옥을 부르고 하림의 귓가에다
「현옥을 타고 싶어 했지 ? 오늘 실컷 타게 해줄게.」
하면서 하림과 같이 학에 올랐다.
그러자 현옥은 한 번 길게 울고는 허공으로 치솟았다
등인대사는 백학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넋을 잃었다.
하림을 데리고 주약란이 떠나자 등인대사는 걱정과 함께 가슴이 미어지는 것이었다.
혜진자는 등인대사의 근심스러운 표정에 하림의 신변을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사님, 걱정 마십시오.
내가 보기에는 주약란이 하림을 진심으로 위로하는 것 같아요.」
등인대사는 가볍게 탄식했다.
「그러길 바랍니다.」
하고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동숙정이 들어왔다
동숙정은 사부님을 보자 급히 달려 와서는 읍하고 옆에 다가 섰다.
이 이틀간 혜진자는 등인대사와 일양자를 찾느라고 바빠서 동숙정을
한 번도 유의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그녀를 만나자 혜진자는 궁금한 듯
「정아, 이 며칠 간 어디에 가 있었니?」
사부의 물음에 동숙정은 가슴이 뛰었다.
「제자는 어제 저녁 이 곳에 와서 심사매와 한 동안 이야기하고는 삼청궁으로 돌아갔었습니다. 」
그녀는 혜진자가 어제 저녁 삼청궁으로 갔는지 안 갔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말을 그렇게 하였지만 하고 나서도 불안한 기색은 가시지 않았다.
혜진자는 그녀의 태도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였으나 어릴 때부터 성실하다는 것으로
알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 사백부님께서 계시더냐?」
이 말을 듣고서야 동숙정은 안심했다.
얼른 침착성을 되찾고 웃으며
「예, 지금 삼청궁에 계십니다.」
사실 혜진자도 옥영자가 기련산에서 돌아온 이후 내공을 수련하느라고
단실(丹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은 것도 알 수 있었던 것이며
동숙정 역시 알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태연히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혜진자는 등인대사에게 고개를 돌리며
「대사님은 여기서 잠시 쉬도록 하십시오.
저는 삼청궁으로 돌아가 무슨 소식이 있는가 알아보고
또 장문 사형께 청해서 제자들을 파견하여 대사형의 행방을 탐지하도록 해야겠습니다.」
하고는 합장하고 돌아 서서 나갔다.
동숙정은 사부님이 나가자 등인대사에게
「사백부님, 심사매와 주소저는 어디로 갔어요?」
하고 물었다.
「그들은 너의 큰 사백부님과 양몽환을 찾으러 갔다.」
동숙정은 놀라운 표정으로
「그러면 며칠 간 못 오겠네요?」
등인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약란과 너의 사부님이 일주일을 기한으로 찾지 못하면 돌아오기로 하였으니
열흘 안에는 돌아올 수 있을 거야.」
동숙정은 더 묻지 않고 부엌으로 들어가서는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숨겨 가지고는 도옥이 숨어있는 석실로 달려갔다.
도옥은 근 이틀 동안의 조섭으로 병세는 거의 완치되었다.
그동안 동숙정은 대부분의 시간을 도옥의 옆에서 보냈는데 도옥의 준수하고
아름답게 생긴 용모에 완전히 사로잡혀 잠시 동안이나마 사부의 십수 년간의 교양과
곤륜파의 삼엄한 규율, 그리고 황지영의그녀에 대한 애정을 잊고 있었다.
그녀가 파수를 보고 있는 동문의 눈을 피해 험한 길을 택하여 석실에 도착하였을 때
도옥은 조식에 잠겨 있었다.
이때 도옥의 소음 소양 두 경맥은 이미 유통이 되고 전신의 기력도 막힘없이 운행할 수 있었다.
더욱이 그는 삼음신니의 권보에서 인신(人身)의 기경혈맥이 돌아가는 이치를 터득하여
급속도로 몸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숙정은 숨겨 가지고 온 음식을 풀어 놓고 밝게 웃었다.
「그 청의 소년과 심사매는 큰 사백부님을 찾으러 갔다고 해요.
이제 마음 놓고 정양할 수 있어요.」
도옥이 약간 놀라며
「아니, 그 청의 소년이 심사매를 데리고 갔다는 거요?」
동숙정이 웃으며
「그래요. 그 사람 잘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도옥은 눈살을 찌푸리며
「당신은 양몽환을 알고 있소?」
「왜 몰라요? 큰 사백부님의 제자인데.」
「심사매는 양몽환을 좋아하지 않소?」
동숙정이 픽 웃으며
「빨리 먹기나 해요. 다 식겠어요.」
그러나 도옥은 여전히 엄숙해졌다.
「왜 웃지?」
「당신은 심사매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사실 그렇죠?」
「맞았소. 나와 양몽환은 친한 친구요.
그렇지 않다면 왜 하림의 병을 치료 했겠소?」
태연히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신은 남들에게 오해를 받고 있어요.
나의 사부님과 등인대사님은 비록 당신에게 경계심을 갖고는 있으나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하지는 않는데 그 주소저는 한 입으로 당신의 심지가 흉악하고……」
도옥이 코웃음을 치며 동숙정의 말을 가로챘다.
「그럼 그 청의 서생은 여인이 남장을 한거로군.」
동숙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도옥은 다시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말이 맞아, 이 도옥은 결코 좋은 사람은 못되오.
당신은 나를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을 거야.」
하고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도옥이 불쑥 뱉듯이 하는 말에 동숙정은 한동안 얼이 빠진 것처럼 앉아 있었다.
「당신은 왜 저에게 이렇게 대하죠?
내가 그녀의 말을 믿었다면 이렇게 하고 있겠어요?」
하고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도옥은 그러한 동숙정의 표정을 못 본체 하고 여전히 음식만 입에 떠 넣었다.
그러나 도옥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자
마음이 많이 누그러진 듯 눈물을 닦으며 듬뿍 정을 담은 눈으로 도옥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드세요. 누가 빼앗아 먹기라도 해요?」
도옥은 역시 한 번 싱긋 웃을 뿐 말이 없었다.
동숙정은 도옥이 자기를 보고 웃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삼청궁에서 지낸 동숙정은 황지영이 그토록 가까이 접근해 와도
아무렇지도 않았었다.
그러던 것이 도옥과는 한 번 만남으로써 그만 한 가닥 정념(情念)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도옥의 준수하고 풍류적인 모습은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이상형의 남자였던 모양이다.
일단 그 환상이 실제로 눈앞에 나타나자 자석처럼 끌려 모든 주위 환경의 속박도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음식을 맛있게 먹은 도옥은 다시 눈을 감고 조식을 취하는 것이었다.
동숙정은 그릇들을 치우고는 옆에 앉아 도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도옥은 몸이 거의 회복됨으로서 얼굴이 불그레 윤기가 돌았고
그 얼굴은 촛불에 비쳐 더욱 늠름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입가의 가느다란 웃음은 더욱 사람의 마음을 매혹시키는 것이었다.
본래 준수하게 생긴 도옥의 얼굴은 상처를 입은 몸이 회복되어 얼굴에 약간 떠도는
피곤한 기색이 겹쳐 동숙정으로 하여금 더없는 정과 애처로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도옥의 옆으로 다가가 그의 한 쪽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상처가 어때요? 좀 나아진 것 같아요?」
부드럽고 매끄러운 손이 자기의 왼 손을 꼭 잡아 주자
도옥은 가슴이 울렁거려 더 조식할 수 없었다.
눈을 뜬 도옥은 동숙정을 바라보고 웃으며 정답게 대답했다.
「많이 좋아졌어, 앞으로 이틀 후면 완전히 회복될 것 같은데.」
그러자 동숙정은 슬픈 어조로
「당신은 상처가 나으면 바로 떠나겠지요.
또 언제쯤 만나게 될까요?」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생리사별(生離死別)은 정해진 천리(天理)인데 미련 둘 것이 못 되는 법이오.」
동숙정은 이 말에 두 줄기의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도옥은 그러한 동숙정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당신들 곤륜파의 제자들은 모두 도포를 입어야 하오? 심하림은 입지 않았던데?」
순간, 동숙정은 얼굴을 들고 도옥을 바라보다가는 다시 고개를 내렸다.
도옥은 더 묻지 않고 눈을 감으며 다시 조식을 취하고……
동숙정은 남은 음식을 다시 챙겨 가지고 굴을 빠져 나왔다.
도옥은 호흡을 조절한 뒤 다시 벽에 기대어 거꾸로 서서는 전신의 기경을 모두 역행시켰다.
그것이 끝났을 때에는 상처가 완전히 나아질 듯 기분이 상쾌하여 천천히 석실을 나왔다.
분지에 이르자 하늘에는 노을이 붉게 물든 몇 조각의 구름이 떠있고 들은 그윽한 향기를
풍겨 기분은 몹시 상쾌했다.
이 며칠동안석실에서 상처를 치료하던 생각이 나자 그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통쾌한 웃음은 메아리 되어 다시 울리고……
한참 동안을 미친 듯이 웃던 도옥은 웃음을 참았다.
그러나 이 며칠간 기경을 역행시키느라고 진기를 많이 소모한 까닭인지
곧 몸이 피곤해 오는 것이었다.
그는 천천히 석실로 되돌아와 벽에 등을 비스듬히 기대고는 눈을 감고
어느덧 깊이 잠이 들었다.
그가 깨어났을 때에는 밤은 이미 자시가 지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는 도포가 덮여 있었으며
그의 옆에는 한 소녀가 달게 꿈을 꾸는 듯 자고 있었다.
그 소녀는 바로 동숙정이였다.
그녀는 옆으로 누워서는 가느다란 숨을 쉬며 깊이 잠들어 있었고 붉게 물든 듯한
얼굴과 풍겨오는 처녀의 향긋한 냄새는 등잔불 빛에 더욱 아름답고 향기로웠다.
한 참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며 피가 끓어올랐다.
그리고 아랫배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불쑥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는 억제할 수 없는 욕정이 일어나며 숨이 찼다.
도옥은 냉혹한 사람으로 모든 일을 항상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처신하여 온 자였다.
상대방의 처지와 기분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온 도옥이 욕정에 불타
동숙정의 가슴을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달콤하게 잠이 든 동숙정은 갑자기 와락 그녀의 몸을 끌어안는 바람에 놀라 눈을 떴다.
순간 자기의 몸이 도옥의 품에 안긴 것을 알자 부끄럽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하여
날카롭게 부르짖는다.
「왜 이래요! 빨리 놓으세요.」
하면서 힘을 주어 도옥의 품에서 빠져 나왔다.
그러나 욕정이 불타올라 눈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도옥이 그냥 있을 리 없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해?」
가쁘게 숨을 쉬며 뜨거운 입김을 뿜었다.
「당신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죽게 내버려 두었을 거예요.」
몸을 간신히 뺀 동숙정은 밖으로 뛰어 나왔다.
「어디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아?」
욕정에 포로가 된 도옥은 야수처럼 돌변하여 뛰어 나가는 동숙정을 끌어 잡았다
이제 상처도 완치되고 정력도 회복된 도옥은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때 당황한 동숙정은 몸을 홱 돌리며 도옥의 왼 손을 뿌리치고 힘껏 발길로 걷어찼다.
그러나 도옥은 재빨리 몸을 돌려 두 발을 비키고는 달려들면서 왼손으로
동숙정의 어깨를 후려치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동숙정은 급히 뒤로 물러났다.
비록 도옥의 일장은 피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함으로써
도옥에게 석실의 입구 쪽을 빼앗기고 말았다.
도옥이 재빨리 문을 막아서서 웃으며
「나를 좋아하면서 싫은 척하고 있지?
이 금환이랑 도옥이 설마당신의 배필로서 자격이야 없지 않겠지?」
조롱하는 듯한 어조에 동숙정은 더욱 부끄럽고 화가 났다.
홀연 자기의 검이 한 쪽에 있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달려가 집어 들었다.
그리고 노기를 띤 채
「얼른 비켜서지 않으면 용서치 않겠어요.」
하는 말은 부끄러움과 분노에 찬 어조였으나 여전히 정이 담긴 어조였다.
도옥은 껄껄 웃으며
「당신의 재간으로 이 석실을 빠져 나갈 수는 없을 걸!」
동숙정은 더 말하지 않고 검을 휘둘러 도옥의 가슴을 찔렀다.
그러나 도옥은 옆으로 슬쩍 비키면서 달려드는 동숙정에게 오른손으로
장풍을 일으켜 후려치자 동숙정은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이어 다급하여진 동숙정이 세 번을 후려치며 공격하는데
그 때 검은 악독하여 조금도 사정을 둔 것은 아니었다.
도옥은 그녀를 너무 얕본 나머지 위험한 고비를 간신히 넘겼다.
더욱 화가 난 도옥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좋게 말할 때 안 듣고 나를 원망치 말아! 」
하고는 왼 손으로 질풍같이 벽산역화(劈山力華)의 수로 비스듬히 동숙정의 어깨를 후려쳤다.
동숙정의 검끝이 영풍단초(迎風斷草)의 수로 도옥의 팔을 후려치자
도옥은 왼 손을 재빨리 움츠리는 동시에 오른 쪽 발을 움직여한 발 다가서며
오른 손으로 전광석화와 같이 동숙정의 오른 손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힘을 주었다.
이윽고 땡그랑 떨어지는 장검이었다.
도옥의 이 몇 수는 한결같이 삼음신니의 권보에 실린 수법으로 동숙정이 막을 재간이
전혀 없는 것으로 멈칫하는 순간에 손을 잡히고 다시 도옥의 품속으로 안기우고 말았다.
가슴과 가슴을 맞대고 얼굴과 얼굴을 맞대게 된 동숙정은 힘껏 버둥거렸지만
힘을 준 도옥의 팔을 풀 수는 없었다.
동숙정이 철이 난 이후 이렇게 남자에게 꼭 껴 안겨 보기는 처음이었다.
가슴은 방망이를 치는 듯 빠르게 뛰고 생전 느껴볼 수 없었던 긴장과 야릇한 흥분에
전신의 맥이 탁 풀렸다.
점차 버둥거리길 그치고 숨만 가쁘게 몰아쉴 뿐이었다.
그 반면에 도옥이 역시 얼굴은 상기되고 두 눈도 충혈 되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는 인간의 또 다른 일면으로서 죄악이기도 했고 본능이기도 한 것이었다.
이미 저항력을 잃어버린 동숙정은 눈물을 흘리며 애걸했다.
「우선 놓아요. 좋게 이야기하면 될 것 아녜요.
이렇게 나를 대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도옥은 더욱 팔에 힘을 주어 안아 그의 얼굴은 점점 더 붉어지기만 했다.
동숙정은 벗어나려는 마음은 있었으나 전신이 찌르르하니
맥이 풀리고 또 도옥은 두 손으로 동숙정의 미용(尾龍)과 거골(巨骨)의 두 혈맥을 움켜잡고 있다.
그 두 혈맥은 전신을 마비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동숙정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도옥의 뜨거운 입술이 가까이 다가오다 그녀의 입술위에 포개어 졌다.
짜릿하니 젖어오는 야릇한 쾌감……
아직까지 동숙정은 남자와 접촉해 본 일이 없으며 그렇게 친하던 황지영까지도
그녀의 손 한번 잡아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제 도옥에게 서로 앞가슴을 맞대고 입술까지 포개어지자
전신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만 같고 정신은 아찔하여 마치 바다 가운데 떠 있는
일엽편주가 파도에 실려 둥실거리는 것 같은 기분만을 느끼는 것이었다.
도옥은 동숙정이 더 반항하지 않자 때는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동숙정의 거골과 미용 두 혈맥을 짚고는 땅 위에 눕혔다.
동숙정은 곧 자기 몸이 더럽히게 되는 줄 알았으나 혈도를 짚인 몸으로 항거할 수 없어
도옥이 움직이는 대로 내맡길 수밖에 없었다.
도옥은 손을 움직여 그녀가 입고 있는 청색 경장(輕裝)을 벗기기 시작했다.
드디어 등잔불 아래 완연히 드러난 여인의 나체,
눈과 같이 하얗고 구슬과 같이 빛을 발하는 아름다움!
도옥은 욕정에 이글이글 타는 듯한 눈을 부릅뜨고는 매끄러운 육체의 비밀을 찾아
손을 더듬으며 가늘은 웃음을 짓고 풍만한 육체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동숙정은 오늘 밤 도옥의 유린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부끄러움과 후회의 눈물인양
두 줄기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도옥이 나직이 숙이! 하고 두어 번 불렀다.
그 소리에 동숙정은 눈을 떴다가 얼른 감아 버렸다.
도옥은 재빨리 자기도 옷을 벗고는 손으로 등잔불을 껐다.
이윽고 캄캄해지는 석실,
곤륜파의 역대사조 법체를 모셔 놓은 장엄한 곳은 이내 더럽혀지는 것이다.
그녀는 더 반항할 수 없어 이 십 년간 고이 간직해 온 순결을 도옥에게 맡긴 채
몸을 비비꼬고 있었다.
점점 여인의 신음소리는 높아지고 인류의 생명을 이어가는 본능적인 환희는 잠시 동안
그녀의 아픔과 비애를 잊게 하고 있었다.
등잔불이 다시 켜지며 먼저 옷을 입은 도옥이 일어나 앉고 동숙정도 환희와 절망에 빠졌던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재빨리 옷을 입은 그녀는 너무나 어이없게 버려진 순결성에 새삼스럽게 설움이 복바치는 듯
도옥에게 엎드려서는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한번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자 더욱 설움과 만 가지 회포가 끓어오는 듯 세차게 우는 것이었다.
도옥의 앞 가승 옷자락이 푹 젖었을 때였다.
갑자기 동굴 입구에서
「안에서 우는 게 누구냐?」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그 곳과는 수 십 자의 거리가 있었지만 고요한 밤이라 울음소리는 똑똑히 들렸던 것이다.
그 소리는 마치 청천의 벽력과 같이 동숙정의 오장육부를 뒤집는 것처럼 놀라게 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매우 익은 황지영의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울음을 그치고 정신을 차리며
「대사형이 왔어요. 어떻게 하죠?」
하고 겁에 질린 듯 도옥을 흔들었다.
「당신의 사부님이 왔다 하더라도 겁날 것 없어. 내 가서 죽여 버리고 오지.」
하고 도옥은 금환검을 잡는 것이었다.
동숙정은 도옥의 소맷자락을 잡고 울먹이며
「죽이면 안 돼요」
애원했다.
「죽이지 않으면 당신을 가만 두지 않을 걸.」
「이 석실에는 우리 파의 금지지역으로서 장문사형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들어오지 못해요.
대사형과 저는 장문인의 지시로 이 곳을 관리하기 때문에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지만
이 달은 나의 담당으로 대사형도 함부로 들어 올 수는 없어요.
당신이 잠깐 숨어 계세요.
내가 거짓말로 쫓아 보내겠어요.」
하고 부드럽게 말하자 도옥은 더 고집을 부리지 않고 금환검을 놓으며
「그렇게 되면 당신의 대사형의 재수가 너무 좋은 걸.
그러나 그가 가지 않으려고 하면 죽여 버리겠소. 그때 가서는 막지 말아.」
동숙정은 이 말을 듣고도 말없이 천천히 입구로 나갔다.
황지영은 아래 위 검은 복장으로 장검을 들고 동굴 입구에 서 있다가
동숙정이 나오는 것을 보자 약간 놀라며 뒤로 물러서서는 동숙정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는 것이었다.
그 두 눈은 마치 비수와 같아 동숙정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가 수그러졌다.
「그만 보세요? 모르는 사람같이!」
「이 깊은 밤에 석실에 숨어서 왜 울지 ? 무슨 일이라도 있소?」
동숙정은 담담하게 웃으며
「아무 것도 아니에요 ! 그런데 왜 아직 안 주무셨어요?」
황지영은 한숨을 쉬며
「삼사숙께서는 너무 하셔.
심사매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입문한지 불과……」
그러자 동숙정이 급히 막았다.
「대사형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심사매와 저는 친 자매와 같고 그녀도 사부님과는 친한 사이에요……」
황지영은 어안이 벙벙한 듯
「그러면 왜 동굴에 숨어서 울지?」
동숙정은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그저…… 갑자기 내 신세가 서글퍼져서 ……」
황지영은 무한히 동정적인 어조로
「시각이 이미 사경이 넘었는데 돌아가 주무시오.
너무 울면 몸에도 해롭고 또 부질없는 짓이니까.」
하고는 무던한 관심과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서는 것이
그녀를 바래다 줄 것 같은 태도였다.
평소 같으면 동숙정이 그를 먼저 가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 그에게 더 없이 미안하고 송구스러운 것이었다.
동숙정은 쓸쓸히 웃으며
「조금 기다리세요. 석실에 등잔불을 끄고 오겠어요.」
근 반년 동안 그에게 냉정히 대해 오는 동숙정이 갑자기 태도가일변하여
부드럽게 대해 주자 황지영은 기뻐서 싱글벙글 했다.
반면 동숙정은 코가 시큰하며 눈물이 와락 쏟아져 황망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황지영이 그러한 모양을 보지 않도록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동굴 속으로 뛰어 들자마자 갑자기 아랫배가 아파 더 서있지 못하고
그만 배를 안고 주저 않았다.
황지영이 급히 몸을 날려 다가왔다.
그리고는 장검을 놓고 그녀를 부축하며
「사매, 어떻게 된 거요?」
동숙정은 도옥과의 순간적인 관계로 생긴 생리변화인 것을 알았다.
입술을 깨물고 황지영에게 잡힌 팔을 움츠렸다.
「배가 좀 아플 뿐이지 괜찮아요.」
이때 동숙정이 왼 팔을 움츠리다 무심결에 그녀의 매끄러운 손이
황지영의 손아귀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뼈가 없는 것 같이 부드러운 손이 자기 손에 닿자 황지영은 무심코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부드러운 옥과 같은 촉감에 황지영은 가슴이 뛰었다.
동숙정은 황급히 힘을 주어 손을 빼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 도옥은 벽에 등을 기댄 채 태평스럽게 앉아 있다가 동숙정이 뛰어 들어오자
「대사형은 갔어?」
지금 그녀의 심정은 도옥에 대하여 미움과 사랑으로 얽혀 붙잡고 쥐어뜯고 깨물어 주고 싶었다.
그런가 하면 도옥의 품에 안겨 실컷 울고 싶은 심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착잡한 심정을 눌렀다. 그리고는 쓸쓸히 웃었다.
「대사형이 기다리고 있어서 삼청궁으로 돌아가야겠어요.」
하는 그녀를 쳐다 본 도옥은 아무 변화도 없었다.
그리나 그의 표정은 차갑기만 했다.
동숙정은 순간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서글픔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도옥의 뺨을 후려치고 말았다.
그 순간, 도옥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움켜잡으며 싸늘한 어조로
「당신 대사형이 지금 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때 침착하지 못하고
소란을 피우면 당신에게 무슨 이득이 있소?」
그 말에 두 줄기의 눈물을 흘리면서 수심을 띄운 얼굴을 든 동숙정은
애원하는 듯한 어조로 도옥을 불렀다.
「당신…… 당신은 나를 그냥 내버리고 말겠지요?」
도옥은 고개를 들고 웃으며
「그럼 어떻게 해 달라는 말이지?」
동숙정은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꼭 깨물면서
도옥의 두 손을 사납게 뿌리치며 소리쳤다.
「나의 순결을 짓밟고서……」
흐느껴 우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 달라는 거야?」
도옥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 세상에 다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녀요?」
순간 도옥의 얼굴에 교활한 웃음이 스쳤다.
「그렇다면 죽어야겠다는 말이군?」
동숙정은 갑자기 도옥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슬프게 울었다.
「나를 데리고 가 줘요.」
그러나 도옥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너의 사부가 너를 잡아 죽이려고 사람을 보낼지도 모르는데 두렵지 않아?」
동숙정은 고개를 들고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세상은 이렇듯 넓은데 우리 둘이 조용한 곳에 가서 숨어 살아요. 난……」
그러자 고개를 흔들며
「안 돼, 지금 나에게는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어찌 너를 데리고 은거할 수 있어?」
하는 것이었다.
「그럼 저를 버리겠단 말씀이에요?」
그때 밖에서 황지영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도옥이 그녀를 살짝 밀어내고 웃으며 나직한 음성으로
「당신 사형이 기다리고 있으니 우선 삼청궁으로 돌아가요.
이후의 일은 천천히 이야기하기로 하고.」
동숙정은 혹시 황지영이 석실로 뛰어 들어올까 걱정되어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금정봉에 갔다가 곧 올게요.」
도옥은 다만 미소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동숙정은 마음이 산란하여 총총히 석실을 나갔다.
기다리다가 초조해진 황지영은 동숙정이 나오자 기쁜 듯이 다가서며
「사매는 소제하고 ……」
하다가 돌연 그녀의 얼굴에 마르지 않은 눈물자국을 보고는 놀라 말을 뚝 그쳤다.
그러자 동숙정은 억지로 웃으며
「그래요. 석실을 소제하느라고 오래 기다리게 했군요.」
황지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런데 왜 우시오?」
하는 말에 눈물을 닦으며 동숙정은 미소를 지웠다.
「울지 않았어요.」
하고는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황지영은 몇 번 부르려다가 그만 두고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러한 그들은 서로 무거운 심정으로 걷기만 하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칼을 든 두 도인이 뛰어나와 막아섰다.
「누구냐!」
하고는 곧 누구인지 알아본 모양으로 검을 거두고 길을 비켜 주었다.
「대사형과 숙사매이시군!」
하면서 왼 손을 가슴에 갖다대며 인사를 했다.
동숙정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총총히 앞으로 달려갔다.
황지영은 그대로 서서 두 사제와 몇 마디 말을 나누고 있었다.
저만치 달아나는 동숙정을 곧 쫓아가려고 했으나 두 사제가 그를 바라보며
의미 있는 듯한 웃음을 보내는 데는 어쩔 수 없이 아무 일도 없는 양
천천히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산 구비를 돌아선 동숙정은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황지영과 같이 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 하면 황지영의 따뜻한 위로와 태도는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단숨에 매화 숲까지 달려 와서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몸의 긴장을 풀자 갑자기 아랫배가 아파와 다시 아랫배를 부둥켜안고 주저앉았다.
청아한 매화의 향기는 그녀의 코에도 스며 왔지만 파도치는
그녀의 심정을 좀처럼 가라앉혀 주지는 못했다.
그녀는 그냥 나무에기대고는 주저앉았다.
이때 시각은 이미 사경이 지난 때였으나 별빛 아래 주위의 풍물을 어렴풋이나마 볼 수는 있었다.
만발한 매화는 여전히 드높은 향기를 뿜건 만은 자기는 이미 순결성을 잃은 몸이라고 생각하는
동숙정이었다.
그리고 이 일을 사부께서 안다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대사형이 알게 된다면
얼마나 괴로워 할 것인가?
그러나 그녀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역시 도옥의 그녀에 대한 냉정과 무관심이었다.
그녀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앞길이 막막하기만 했다.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없는 처지이기에 그녀는 더 슬프고 괴로운 것이다.
여러 가지로 생각하던 동숙정은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러나 소리는 낼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소리 없는 울음은 더욱 사람의 정신을 흐리게 하는 것인지
얼마 안 있어 동숙정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소리라도 크게 내며 울었으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때 돌연 청아한 음성이 그녀의 뒤에서 울려왔다.
「정아 아니냐? 왜 여기서 울고 있니?」
비록 음성은 부드러웠으나 동숙정의 귀에는 마치 벽력과도 같았고 혼미해 가던
정신에 찬물을 끼얹는 것만 같았다.
눈물을 닦고 바라보는 동숙정의 눈앞에는 혜진자의 얼굴이 커다랗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녀는 어느 덧 동숙정의 옆에 와서 미간을 찌푸리고는 근심이 가득 찬 얼굴로
동숙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숙정은 심신을 진정시키고는 떨리는 음성으로
「사부님. 전 전……」
말을 하지 못하고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걷잡을 사이도 없이 흐느껴 울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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