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비연경룡

제 16 장 양몽환은 어느 곳에

오늘의 쉼터 2014. 6. 22. 13:09

 

제 16 장 양몽환은 어느 곳에

 

 

  하림이 정신을 차리자 혜진자는 침대 가에 앉아서 그녀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으며

 

「애야, 지금 어디가 괴로우냐?」

 

「속이 떨려요.」

 

하고 대답하자 혜진자는 곧 이불을 조심스럽게 덮어주며 말했다.

 

「그렇겠지, 며칠 산 위에서 서 있었기 때문에

만년 빙설의 한독이 몸에 스며들어서 그런거야,

곧 나을 거야!」

 

그러자 하림은 가볍게 숨을 쉬고 웃었다.

 

「그 산 위에 혹시 몽환 오빠가 오는가 하고 올라갔었는데

오빠는 오지 않고 저만 도리어 이 꼴이 되었군요.」

 

「걱정 마라. 그보다 몸조리나 잘 해라.

네 오빠는 곧 오게 될 거야.」

 

「하지만 언제 올는지.

지금 오면 저는 마중도 나갈 수 없겠어요.」

 

하림의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오직 양몽환에 대한 애정만이 담겨 있었다.

혜진자는 탄식하면서 하림을 좀 부축해 주려고 하는데

등 뒤에 서있던 등인대사가 노기 띤 음성으로

 

「만일 양몽환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하고 묻자 하림은 갑자기 눈을 둥그렇게 했다.

그 표정이 이상해졌다.

 

「오빠는 꼭 돌아 올 거에, 제가 싫어졌다 하더라도

곧 돌아와서 이야기 할 거예요.」

 

하고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등인대사가

 

「하림아! 하림아!」

 

하고 불렀으나 가쁜 숨소리만 들릴 뿐 또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일양자가 급히 추궁과혈법으로 하림의 요혈을 주물렀다.

그러나 아까와 같은 효과는 일어나지 않고 여전히 혼수상태에 있을 뿐이었다.

하림의 기경팔맥 가운데 도옥에 의하여 세 곳이 유통되고

아직 다섯 곳이 막혀 있으므로 잠시 깨어났다가 다시 혼미 상태에 빠진 것이다.

일양자의 수법으로는 인체 내부의 요혈을 유통시키지 못했고

따라서 아무 효과도 기대할 수 없었다.

 

일양자는 손을 멈추고

 

「병세가 많이 호전된 것 같았는데 왜 또 혼수상태에 빠질까?」

 

하며 고개를 저었다.

 

혜진자도 역시 속수무책이었다.

등인대사는 놀라는 한편 혹시 자기가 꾸짖은 탓으로

하림의 병세가 악화된 것이나 아닐까 하고 더욱 불안을 느끼는 것이었다.

세 사람이 한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 원인을 알아 낼 수가 없어

그만 물러 나오고 말았다.

병실에 혼자 남은 동숙정은 하림 사매가 갑자기 호전되었다가

다시 악화되는 것이 이상스럽게도 자기가 잠깐 방을 비운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이상한 의심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방 안을 둘러보는 그녀의 눈은

곧 뒤쪽 창틀에 떨어진 한조각의 얼음에 멈추어졌다.

너무 작아서 눈에 잘 뜨이지 않을 정도의 것이었다.

동숙정은 깜짝 놀라 창 밖을 내다  보았다.

그러나 뒷마당에는 다만 백설이 함여 있을 뿐

아무리 살펴도 그 밖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원래 도옥은 뒷마당의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도록

매화꽃 밭을 돌아서 들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동숙정은 웬 일인지 그 한 조각의 얼음과 하림의 병세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만 같이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다 할 증거가 없어 경솔하게 고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하림의 옆으로 돌아온 얼마 후에 하림은 다시 깨어났으나

이윽고 다시 혼미상태에 빠져 갔는데 이런 상태가 며칠 동안이나 계속 되었다.

 

그 동안 동숙정은 침대까지 가져다 놓고 하림의 병세를 지키고 있었고

혜진자는 낮에 만 있다가 저녁에는 삼청궁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리고 일양자는 등인대사와 같이 기거하면서 수심에 잠긴

등인대사를 위로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동숙정은 점차 하림이 깨어나는 것이 일정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또한 열두 시간 동안에 꼭 세 번을 깨어난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하여 깨어날 때가 되면 미음을 준비했다가 먹이곤 했던 것이다.

 

닷새가 지나자 하림의 병세는 더욱 악화된 듯 했다.

하루에 세 번씩 깨어나긴 하지만 깨어 있는 시간이 점점 단축되어 갔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동숙정의 마음속에 일어나 있던 의혹도 점점 엷어갔다.

엿새째 되는 날부터는 큰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동숙정은 창문에기대어 점점 수척해 가는 하림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돌연 한 사람의 그림자가 뒤쪽 절벽 위에서 직선으로 내려왔다.

동숙정은 재빨리 벽에 걸려 있는 보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는 동안 그림자는 창문 앞까지 달려 왔다.

동숙정은 일양자에게 알릴까하고 망설이는 순간,

그 사람은 어느새 창문을 넘어 뛰어 들어오는 것이었다.

동숙정은 재빨리 일격을 가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손바람으로 가볍게 막고는 검은 복면을 벗고

천천히 의자에 가 앉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옥소선자였다.

동숙정은 자기의 무공이 옥소선자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림의 침대를 막고 섰다.

그리고 일양자와 등인대사가 지척지간에 있으므로 어떤 기미만 보이면

달려오리라 생각하고 일부러 목청을 높여 말했다.

 

「왜 또 왔어요,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기나 하세요?」

 

  그러나 옥소선자는 침대에 누워 있는 하림을 힐끗 보고는 웃으며 말하는 것 이었다.

 

「그가 누구지? 굉장히 중태인 것 같은데!」

 

「나의 사매요.」

 

  옥소선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다가가더니 하림의 이마와 맥을 짚어 보고는

 

「과연 중태인 것 같군,더 지체하면 치료가 어렵겠어.」

 

하고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이 말하자 동숙정의 마음이 당겼다.

 

「왜 하느님께선 이렇듯 천진난만한 사매에게 고통을 주시는지.」

 

하고 탄식하자 옥소선자가 웃으며 말했다.

 

「나더러 치료해 달라는 말 같은데 설령 치료할 수 있다하더라도 나는 시간이 없어요.」

 

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상했던 대로 일양자와 등인대사가 달려 왔다.

 

  일양자는 눈이 둥그레졌다.

 

「허허, 여걸께서는 과연 약속을 잘 지키시는군.」

 

하고 너털웃음을 웃자

 

「오늘은 우리가 약속한 날짜의 마지막 날입니다.

조용한 곳에서 꼭 승부를 가리도록 해요.」

 

  낭랑한 목소리였다.

 

「좋소!」

 

하자 옥소선자는 곧 몸을 날려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앞이 내다보이지 않을 만큼 큰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 나가던 일양자는 걸음을 멈추었다.

 

「자, 여기서 얼마 안 되는 곳에 아주 은밀한 곳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는 게 어떻겠소!」

 

「아니, 제가 좋은 곳을 택해 놓았어요, 도장께선 가보기만 하세요.」

 

「그렇다면 틀림없는 곳이겠지.」

 

  옥소선자가 앞장서서 몸을 날리자 일양자도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십장 가까이나 달려갔을 때 등인대사가 큰 소리로 불렀다.

 

「두 분은 잠깐 내 말을 들어 보시오.」

 

  일양자와 옥소선자가 걸음을 멈추자 등인대사가 곧 몸을 날려 다가왔다.

 

「두 분이 싸우시는 곳에 소승이 따라가서 증인이 되었으면 하는데 어떻겠소?」

 

  그러자 일양자가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들은 수십 년간이나 사귀어 온 친구이오.

만일 내가 남에게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것을 대사가 어떻게 보겠소?

따라 오지 않는 것이 좋겠소.」

 

하는 것이었다. 등인대사는 탄식하듯

 

「서로 피맺힌 원수도 아닌데 왜 그렇게 싸우려고 하는 거요?」

 

하고 말을 시작하려 하자 옥소선자는 귀찮은 듯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일양자는 웃음을 띠며

 

「저 여자의 무공은 상당한 경지에 도달해 있어서 아무도 승부를 예측할 수가 없소.

무릇 무예인이라면 모두가 이름 때문에 죽고 살지 않소?

천기진인(天機眞人)과 삼음신니(三音神尼)같은 수양이 깊은 사람도 서로 싸우다 죽었지만

그들 역시 천하제일인자라는 칭호 때문이 아니요?

그래도 그들 두 사람은 수양이 깊은 탓으로 죽기 전에 대오(大悟)하여 지기(知己)가 되었고

마침내 두 사람의 무공 비결을 함께 기록하여 귀원비급(歸元祺?)이라는

책을 후세에 남기지 않았소?

물론 그 사람들은 절세의 무술이 유실되지 않도록 하자는 마음에서 그것을 남긴 것이었지만

결국에는 그 때문에 비참한 살상이 일어날 줄은 그들 자신도 몰랐을 것이오.」

 

일양자는 갑자기 표정이 엄숙해지더니

곧 머리에서 옥비녀를 뽑아 등인대사에게 주며 말을 계속했다.

 

「만일 내가 열두시 경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줄 아시오.

그리고 이 옥비녀를 가지고 있다가 만일 양몽환이 의롭지 못한 행동이 있었다면

이것으로 내 대신 문호를 처리해 주시오.」

 

등인대사는 그 옥비녀를 받으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자 일양자는 몸을 홱 돌이켜 옥소선자의 뒤를 따라 앞으로 달려가고 말았다.

옥소선자는 절벽 아래서 기다리고 있다가 일양자가 오는 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안 오는 줄 알았죠.」

 

그 말에 일양자는 얼굴빛이 바뀌었다.

 

「설령 불 속으로 뛰어든다 하더라도 약속을 어길 리야 있겠소?」

 

그 말에 옥소선자는 갑자기 몸을 돌려 절벽 위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 뒤로 일양자도 바짝 그녀를 따라 올라간다.

등인대사는 두 사람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등인대사는 여전히 움직일 줄 몰랐다.

그의 회색 승의에는 어느새 눈송이가 얼어붙어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한 사람이 매화 밭을 지나 등인대사에게 다가오더니 합장하며

 

「대사님, 무슨 일을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제야 대사는 꿈속에서 깨어난 듯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혜진자임을 알아보았다.

 

「지금 사형이 옥소선자에게 이겨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고 등인대사가 대답하자

 

그의 두서없는 말에 혜진자는 어리벙벙한 얼굴로 물었다.

 

「네? 옥소선자가 또 나타나서 소란을 피우나요?」

 

  등인대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이 또 겨루어 보려고 하는군요?」

 

  혜진자는 자못 놀라는 표정이었다.

 

「어디로 갔어요?」

 

「저 절벽 위로 올라갔는데 거기서 다시 어디로 갔는지 모르죠.」

 

  혜진자는 더 묻지도 않고 절벽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녀 역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멍하니 서 있던 등인대사는 곧 하림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방 안으로 들어간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없었다.

 

동숙정이 검을 든 채 문 앞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혈도를 누구에게 짚인 모양이었다.

 

등인대사는 먼저 황급히 하림에게로 가보았다.

하림은 여전히 평화로운 꿈속에 빠져 있었고 그녀의 얼굴이 불그레한 것이

병세가 훨씬 호전 된 것 같았다.

이 너무나 갑작스러운 변화에 등인대사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문 쪽으로 다가가 동숙정을 일으켜 살펴보자

과연 오른 쪽 어깨의 풍부혈(風府穴)이 짚여 있었다.

급히 주물렀다.

다행히 심한 상처는 아닌 듯 동숙정은 곧 깨어 많다.

깨어난 그녀는 곧 하림에게 달려가 보더니 이상이 없음을 알자

자기가 당한 그동안의 경과를 등인대사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실은 일양자와 옥소선자가 싸움을 하고자 밖으로 나갔을 때에

그녀 역시 그들을 따라 나갔다가 자기는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음을 알고

곧 방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들어오자마자 누군가의 손에 의해 풍부혈(風府穴)을 짚여 의식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등인대사는 이야기를 듣고 이 조용한 금정봉(金頂峯)에 무슨 일로 갑자기 많은 고수들이

모여드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옥소선자와 신원통 그리고 동숙정의 혈도를 짚은 정체모를 사람,

그들 일행이 왜 여기 나타났는지 알 길이 없었다.

 

동숙정은 등인대사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자 곧 하림의 침대 곁에가 앉았다.

 

그때,

 

갑자기 하림이 눈을 뜨고 일어나려는 듯이 팔을 뻗으며

 

「숙정 언니 ,갑갑해 죽겠어요.」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동숙정은 황망히 그녀를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안 돼,일어나지 말아요. 가만히 누워 있어요.」

 

하림은 길게 숨을 내쉬며

 

「오빠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요?」

 

했다.

 

「응, 아직 안 돌아 왔어.」

 

「숙정언니는 오빠가 돌아올 것 같아요? 나를 찾아서 말예요.」

 

  동숙정은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돌아 올을 거야, 그래서 빨리 몸이 낫도록 조리를 해야지.」

 

  하림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언니 말이 옳아요, 몽환 오빠는 대 언니에 의해 잡혀 있거나

아니면 오는 길에서 어떤 사고가 일어나 지금까지 못 온 거예요.

하지만 오빠는 꼭 돌아올 거예요.」

 

동숙정도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다.

양몽환이 의리를 저버린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지

중도에서 어떤 사고가 일어나 못 온다는 생각은 미처 못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양몽환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양몽환이 중도에서 어떤 사고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자

동숙정은 웬일인지 자꾸만 초조해졌다.

 

「그렇지! 틀림없이 어떤 사고가 생긴 모양이야.」

 

하고 부르짖자

동숙정의 그러한 태도에 하림 역시 극도로 불안해진 듯 벌떡 일어나 앉으며 큰 소리로

 

「사백부님!」

 

하고 불렀다.

그때까지 등인대사는 하림의 상처가 호전된 원인을 생각하느라고 하림이

정신을 차린 것도 모르고 있다가 그녀가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순간,

 

놀람과 기쁨으로 엇갈린 등인대사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하림아! 하림아! 네가 깨어났구나.」

 

하고 팔을 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림은 이마를 찌푸린 채

 

「몽환 오빠가 아직 오지 않는 것은 틀림없이 어떤 사고가 생긴 탓일 거예요.

우리들이 빨리 가보는 게 어떨까요? :

등인대사는 어리둥절하다가 차츰 침착성을 되찾고는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결코 배은망덕할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면 정말 사고라도 난 것이 아닐까?

그러나 갑자기 다른 생각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주약란이 상처를 입고 양몽환과 같이 괄창산으로 갈 때,

주약란의 그 애정 어린 눈동자 만일 주약란이 양몽환에게 애정이 없었다면

결코 위험을 무릅쓰고 기련산까지 가서 그들을 구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등인대사는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설삼과를 구하러 간다고 간 것이 남이 주는 차(茶)속에 약이 들어 있는 줄도 모르고

마셨다가 사로잡힌바 되어 지하실에 수 일 간이나 감금된 것을 주약란이 구해냈으니

말하자면 주약란은 자기의 생명의 은인이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점으로 보아 주약란이 양몽환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만큼 먼 길을 혼자 가라고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애초에 두 사람이 같이 학을 타고 갔으면 돌아올 때에도 학으로 業어야 할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한 등인대사는

 

「음, 올 때도 그 학을 타고 올 테니까

결코 도중에서 어떠한 사고가 있으리라고는……」

 

하고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하림이 뒤로 벌렁 눕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대 언니가 오빠를 못 가게 한 것이 틀림없어요.」

 

하며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는 천정만 멍하니 바라본다.

그것을 본 등인대사는 가슴이 아팠다.

 

「림아, 푹 쉬어라.

네 병이 다 나으면 너를 데리고 괄창산으로 가서 오빠를 찾도록 하자.」

 

하고 등인대사가 위로하자

하림은 두 눈을 그에게로 돌리고 쓸쓸히 말하는 것 이었다.

 

「괄창산에 갈 필요는 없어요,

오빠는 꼭 저를 찾아 올 거예요.」

 

「그럼 몸을 조리하면서 기다려 보자!」

 

그녀는 다시 쓸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았다.

그 모양을 본 등인대사는 마치 자기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원래 하림의 어머니는 강제로 심사랑(沈士郎)이라는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하림의 어머니를 사랑하던 등인대사는 가승에 깊은 상처를 안고 속세를 등졌던 것이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고행(苦行)을 했지만 여전히 옛정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끝내는 그녀의 유언을 저버릴 수 없어 하림을 키우게 되었던 것이다.

하림을 양육하는 동안 부녀지간 이상의 정을 느끼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다시 속세의 번뇌에 사로잡히게 된 등인대사는 정말 무념 무아의 경지란

용이한 것이 아니라고 자탄해 보는 것이었다.

얼마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등인대사는 하림이 잠이 들자 천천히 방을 나갔다.

 

동숙정이 그를 따라 나오며

 

「사백부님,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하고 부르자 그는 뒤로 돌아섰다.

동숙정은 가까이 다가가서 말했다.

 

「심사매의 병세가 갑자기 호전된 것을 사백부님께선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등인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마 누가 남몰래 치료해 주는 것 같군.

그러나 그 사람은 바로 네 혈도를 짚던 사람일 거야.

그리고 그것은 아마 약물에 의한 치료가 아니라,

그 자신의 심오한 공력으로서 치료한 것 같군.

하림의 상처는 깊은 내상(內傷)으로서 보통 수법으로는 안 되는 거야.

아마 독특한 방법으로 내부의 혈맥을 유통시키고 한기를 제거시킨 모양인데

처음에는 완전히 성공을 거두지 못한 탓으로

수시로 깨어났다가 다시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던 모양이지,

그런데 세상에서 이런 공력을 가진 사람은 몇 사람밖엔 없는데

이 곤륜산에 나타날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란 말이야.」

 

그 말을 듣자 동숙정은 이미 기련산 속에서 일어났던 일을

하림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 이제 사백부님이 말씀하시는 사람은 바로 저의 사부님의

사독을 치료한 주약란이 아닙니까?」

 

하고 물었다.

 

「그렇지, 그녀 이외엔 림아의 상처를 치료해 줄 사람이 없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녀가 사부님을 구해 주었을 때도 돌연 방안에 나타났어요.

그때 저는 잠도 채 들기 전이었는데

갑자기 사부님의 침대 옆에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보고는 벌떡 일어났으나

어느새 어떻게 된 일인지 혈도를 짚이고는 쓰러져 버렸었지요,

그런데 조금 전에도 그랬어요.

너무 느닷없는 일이라 얼굴도 보지 못하고 혈도를 짚였죠.」

 

하고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등인대사가 위로하듯 말했다.

 

「그야 너무 급작스럽게 당하는 변이라 어떻게 방비할 겨를이 없는 것이 당연하지.

그러나 너의 혈도를 짚은 사람이 바로 주약란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모르겠군.

만일 그녀라면 숨을 필요 없이 우리와 만날 것이 아닌가?

그리고 엿새 전에 하림의 병세에 차도가 있고부터 오늘까지 주약란이

줄곧 숨어 있었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도대체 왜 숨어 있어야 했던가가 의심스럽단 말이야.

더구나 너의 백부님들과 사부님 그리고 이 늙은이까지

모두 그녀의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하림과는 더 없이 좋은 사이가 아니냐 말이야.

그런데도 숨어 있게야 하다니 아무래도 그 영문을 모르겠군.」

 

  동숙정은 그 말을 듣자 여자라는 것은 결국 질투의 감정을 벗어날 수 없으며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사매지간이라 하더라도 양몽환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한편 몇 번 밖에 하림을 대하지 못한 주약란이 어떻게 그런 아량을 베풀 수 있겠느냐고

말하고 싶었으나 끝내 그 말은 하지 못하고 말았다.

동숙정의 그런 표정을 눈치 챈 등인대사는 웃으며 말했다.

 

「음, 그럼 또 다시 누가 나타날지도 모르니 숨어서 기다리기로 하지.」

 

  동숙정도 곧 호응했다.

 

「네, 그게 좋겠어요.

그럼 저는 하림사매의 방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겠어요.」

 

  등인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그러나 절대로 경솔하게 싸우면 안 돼.

무슨 이상이 있거든 먼저 나에게 신호를 하도록 해라.

그러면 내가 곧 오겠다.」

 

이렇게 두 사람은 약속하고 등인대사는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눈보라는 뜸해져 있었다.

다만 뜰 앞에 매화 몇 송이가 풍설의 재촉에 다투듯 피어나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하림의 방을 나온 등인대사는 그 매화꽃을 바라보며 잠시 동안 감개가 무량했다.

만일 사람이 속세의 모든 인연을 끊고 산야에 파묻혀 유유자적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본래 자기는 속세를 등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림 때문에 어느새 다시 세파의 소용돌이 속에 뛰어 들게 되었고

앞으로의 귀추도 예측할 수가 없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간단한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는 못했다.

 

한편,

일양자와 옥소선자는 저마다 전력을 다하여 절벽 위로 올라가 다시 앞으로 달려갔다.

그들의 비슷한 경신술은 서로가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옥소선자가 걸음을 멈추며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를 퉁소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산봉우리 중턱에 돌출한 빙암(氷岩)이 있어요.

그 밑은 수천 장의 절벽으로 떨어지면 뼈도 찾지 못할 곳이지요,

바로 그 위에서 승부를 가립시다.

만일 승부가 나지 않을 때엔 누구든지 힘주어서 얼음을 밟으면

얼음이 깨어져 떨어지게 되어 있지요.」

 

  일양자는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음, 좋은 곳을 선택했군요.」

 

  옥소선자가 갑자기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거기까지 몇 리나 되겠어요?」

 

  잠시 동안 눈으로 계산한 일양자는

 

「아마 이 십리쯤 될 거요.」

 

「그렇다면 시간을 허비할 것 없이 싸우면서 그곳까지 가는 게 어때요?」

 

「좋은 생각이시군, 아가씨다운 생각이군요.」

 

  일양자는 대답하며 검을 뽑았다

 

  옥소선자도 역시 몸을 날려 퉁소를 휘둘렀다.

이리하여 엿새 동안의 싸움은 다시 그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하여

빙판(氷板) 위에서 시작되고 말았다.

 

옥소선자가 몸을 돌리면서 퉁소로 검을 후려치자

일양자는 장검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퉁소를 피하고는 몸을 획 날려 옥소선자 앞을 지나갔다.

두 사람의 간격은 어느새 일장이나 떨어져 있었다.

이와 같이 두 사람은 서로 공격과 방비를 번갈아 하면서 제각기 절묘한 재간을 발휘하여

펑펑 쏟아지는 눈보라 가운데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숨 돌릴 사이도 없었다.

혜진자가 등인대사의 말을 듣고 절벽 위로 올라갔을 때에는

이미 거기에서 십리 가량이나 떨어진 곳에서 싸우고 있었다.

 

절벽 위로 올라선 혜진자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두 사람이 보이지 않자 걱정이 되었다.

그때 동쪽 방향에서 검은 점이 하나 나타나더니

삽시간에 혜진자가 서 있는 산봉우리 위로 다가왔다.

그녀가 주약란의 백학임을 알아보았을 때는

그 학은 이미 그녀의 머리 위로 지나갔을 때였다.

혜진자는 단번에 주약란이 양몽환을 보내온 것이 아니면 틀림없이

주약란이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그 학을 바라보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검은 점만이 잠시 보였다가

곧 사라져 버린 뒤였다.

절벽 아래에는 매화꽃이 눈 속에 만발하여 마치 수를 놓은 듯 아름다웠다.

갑자기 매화 밭에 사람의 그림자가 번뜩하고 사라지자

혜진자는 깜짝 놀라 바로 아래로 뛰어 내려가려다가 문득 생각하는 바가 있어

절벽에 있는 커다란 소나무에 올라가 몸을 숨기고 아래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시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매화나무가 우거진 곳에서 이상한 복장을 한 소년이 나타났다.

거리가 먼데다가 눈 이오기 때문에 그 소년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얼핏 보기에도 양몽환이나 주약란이 아님을 쉬이 알아 볼 수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복장이었으나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매화나무에 몸을 감추고 있던 소년은 등인대사와 하림이 묵고 있는 초가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초가집으로부터 십여 장 가량이나 떨어졌을 때 홀연 매화나무 위로 올라서고는

경신술을 전개하여 나무 가지를 딛고 건너가는 것이었고 다시 가볍게 몸을 날려

지붕위에 서는 것이 아닌가?

 

 이 광경을 본 혜진자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

결코 동숙정이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님을 깨닫고 곧 몸을 돌려

그 길로 질풍 같이 아래로 내려갔다.

삽시간에 초가집까지 다가온 혜진자가 바라보자

그 소년은 눈을 살며시 감고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아마도 운기조식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 등인대사는 혜진자보다 한 걸음 먼저 한쪽지붕 위에 서서는 선장을 비껴들고 섰지만

등인대사와 여섯 자 가량의 거리를 두고 앉아 있는 소년은 전혀 본체도 하지 않았다.

혜진자는 걸음을 멈추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횐 얼굴이 여자처럼 맑고 아름다웠고

그의 하얀 손에는 금환을 차고 이상하게 생긴 검을 메고는 침착하게 앉아 있는 데는

혜진자가 섬뜩할 정도였다.

 

「당신은 누구요?」

 

혜진자가 외치자 소년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혜진자와 등인대사를 쳐다보고는 웃는 얼굴로 말하는 것이었다.

 

「두 분께서는 건망증이 심하시군요.

기련산에서 한번 만난 일이 있는데 불과 반년 만에 잊으셨나요?」

 

  그 당시 도옥이 중태에 빠졌을 때 경맥을 만져 준 일양자만이 좀 기억에 있을 뿐,

등인대사와 혜진자는 한 번 스쳐본데 불과해서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몇 번 삼청궁을 드나들면서 그들을 보았고 또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엿들은 일이 있으므로 총명 한 도옥은 모든 사정 알아채고 등인대사와 혜진자 역시

기련산에서 만났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혜진자는 잠깐 생각한 끝에 일양자가 어느 굴에서

그를 구하여 보려고 시도하던 일을 생각하였다.

그래서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귀공이 바로 친용방 이방주의 문하 제자이시군.

반년 전에 당신의 사매인 이요홍의 소개로 한번 만난 일이 있죠.

그러나 그때 당신은 마침 병중이었지 ……」

 

하자 도옥이 냉소하며 "

 

「그렇소, 내가 바로 도옥입니다.

기련산 속에서 내가 병이 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 의해 암살을 당할 뻔 했었지요.

이번에 곤륜산에온 것은 나를 암살하려던 사람을 찾아 빚을 갚고자 온 것입니다.」

 

  혜진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럼 당신을 암살하려던 사람이 우리 금정봉에 있다는 말인가요?」

 

하고 급히 물었다.

 

「처음에는 곤륜 삼자 중의 한 사람이 한 짓이 아닌 가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도옥의 건방진 태도에 약간 화가 난 혜진자는 노기를 띠며

 

「곤륜 삼자는 당신을 해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을 구해준 은인이지요.」

 

「글쎄요, 나를 구한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빛은 인정치 않겠습니다.

현도관주 정도의 추궁과혈수법으로는 아마 나는 기련산의 얼음구덩이 속에

파묻히고 말았을 테니까요.」

 

혜진자도 냉소하며 다시 말했다.

 

「사람의 생명을 구해 준 것은 결코 당신에게 은혜를 입히고자 한일은 아니요.

그 보다는 무슨 일로 여기 왔는지 알고 싶을 뿐이오.」

 

  그때 도옥은 천천히 일어나 살며시 운기(運氣)해 본 결과 아직 원기가 회복되지 않아

두 사람과 싸워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천천히 옷에 눈을 털면서 대답했다.

 

「기련산에서 구해 준 은혜를 갚고자 당신의 제자를 치료해 주려 고왔소.」

 

「하지만 상처가 심해서 당신의 힘으로는 안 될 걸요.」

 

「천만의 말씀,내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미 죽었을 거요.」

 

  그러자 등인대사가 반신반의로 말했다.

 

「그렇다면 아직 완치되지도 않았는데 왜 치료의 손을 멈추었소?」

 

  그 말을 들은 도옥은 등인대사를 바라보고 쏘아붙였다.

 

「허참! 당신네들은 마치 싸움이라도 하려는 말투군요.

그녀를 치료해 주자면 먼저 당신들과 승부를 겨루어야 되겠군요!」

 

  등인대사가 갑자기 선장을 휘두르며 아래로 내려가자 도옥 역시 곧 뛰어 내렸다.

그리고 도옥을 중간에 두고 등인대사가 앞장 선 채. 하림의 방문 앞에 다다랐다.

그때 돌연 몸을 돌린 등인대사는 도옥을 향해 소리쳤다

 

「함부로 지껄이면 내 선장이 용서치 않을 꺼다.」

 

  그러나 도옥도 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마 대사의 그 선장은 내 맨 손도 못 당할 거요.」

 

  그러자 등인대사는 도리어 크게 웃으며

 

「젊은 분이 큰 소리가 대단하군.」

 

하고는 옆으로 훌쩍 비켜섰다.

 

그러자 도옥은 거만스럽게 웃으며 곧장 하림의 침대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장검을 들고 하림의 침대 옆에 앉아있던 동숙정은 도옥이 다가오자 한옆으로 물러섰다.

도옥은 엿새 전에 여기 와서 겨우 하림의 기경팔맥 중 세 곳을 유통시켰고

다섯 곳은 기운이 없는 탓으로 물러갔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엿새 동안을 휴식, 기운을 되찾아 다시 왔을 때에

마침 옥소선자가 찾아와서 일양자와 싸우는 바람에 모두 방을 비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 틈을 타서 방으로 들어간 그는 문 뒤에 숨어 있다가 동숙정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혈도를 짚었던 것이다.

또한 그때는 등인대사가 넋을 잃고 생각에 잠겨 있던 때라

하림의 기경팔맥 중 네 곳을 다시 유통시키고 기운이 다 없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한 곳까지 유통케 할 수도 있었으나

자신의 원기를 너무 소모시켜선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그만 두었었다.

그리하여 방을 물러나온 그는 이번에는 뜰 앞 매화 밑에 숨어 운기조식으로

기운을 회복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매화 맡에서 조식을 한 뒤 도옥은 문득 하림의 나머지 한 곳

철도를 유통시키고 나서 그를 데리고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의 원기가 소모될 것을 각오하고 하림이 않아 누워 있는

초가집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밖에서 순시하고 있던 등인대사가 그를 발견하고 지붕 위로 올라가는

그를 가로 막았던 것이다.

도옥은 자기의 형체가 발각 당하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지붕위에 앉은 채 쉬고 있었다.

얼마 후 혜진자도 달려오기에 이르자 도옥은 속으로 초조해졌다.

왜냐하면 원기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이때 등인대사에다가 다시 혜진자마저 나타난다면

도저히 그는 적수가 못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중히 생각한 끝에 마침내 기련산에서 받은 은혜를 갚고자

하림의 상처를 치료해 주겠노라고 공언하게 된 것이었다.

그의 말과 그의 태연 침착한 태도에 혜진자는 반신반의 하였지만

이십 여일이나 하림의 병세에 시달려 머리가 피로해진 등인대사는

곧 지붕 위에서 내려가 그를 인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침대 옆에 가까이 다가간 도옥이 살펴보니 하림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혈도 네 곳이 방금 유통됐으므로 얼마 동안 가야만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 도옥은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내가 보건대 하림은 빙설의 한독이 몸 깊숙이 스며들었기 때문에

곧 기경팔맥을 유통시켜야만 상처가 호전될 수 있습니다.

내가 이미 일곱 곳을 유통시켰으니까 이제 한 곳만이 남았는데

먼저 생강탕(生薑湯)을 한 그릇 준비해 주시오.

이제 남은 한 곳마저 유통시키고 난 뒤 생강탕을 먹이고 약 한식경만 재웠다가

깨우면 곧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자 동숙정은 그의 말대로 생강탕을 준비하도록 하는 한편 혜진자는

침대 옆에 앉아 도옥이 손쓰기를 기다리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도옥은 혜진자가 자기를 감시하고 있음을 알고는 냉소하더니

갑자기 공력을 집중시켜 왼 손으로 번개같이 하림의 몸을 젖히면서

그와 동시에 오른 손으로 하림의 둥을 두드렸다.

 

혜진자가 급히 막으려고 하였으나 도옥의 이마에 솟는 땀방울을 보고는

손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하림의 남은 혈맥마저 유통시키고 난 도옥은 원기를 소모한 탓으로 숨을 헐떡거렸다.

그는 손을 멈추고 물러서더니

 

「이젠 기경팔맥을 모두 유통케 했소. 아마 한식경 후에는 깨어날 것입니다.」

 

하고는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그러자 둥인 대사가 급히 문을 막아서며 말했다.

 

「젊은 시주께선 자신의 공력 소모도 불구하고 이렇듯 사람을 구해주셨으니

뭐라고 고마운 말씀을 해야 할지 모르겠소.

더구나 지금은 풍설이 심한데 어떻게 떠나신단 말이오?

이 늙은이 방에 들어가서 차나 마시면서 눈보라가 멎기를 기다려 떠나시지요.」

 

  귀한 손님을 대접하듯 공손히 만류하는 것이었으나 도옥은

그것이 하림에게 어떤 독수를 쓴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여 붙잡는 것으로만 생각되는 것 이었다.

 

그러나 도옥은 하림이 한 식경 후에 반드시 깨어날 것을 확신하고 있는 터라,

이 기회를 이용하여 원기나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곧 등인대사를 따라갔다.

방 안에 들어가 등인대사가 따라 주는 잣으로 만든 차를 한 잔 마신 도옥은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도 없이 등인대사의 침대 위에 앉아서는 눈을 감고 조식을 취했다.

그 너무나 무례한 태도에 아무리 수양이 높은 등인대사도 와락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는 하림을 구한 구명의 은인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억지로 화를 누르고 도옥의 앞에 앉았다.

얼핏 보기에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내공을 닦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실지로는 저마다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었다.

등인대사는 정말 한식경 후에는 하림이 깨어날 것인가?

깨어나면 다시 혼수상태에 빠질 것인가?

또 하림이 깨어나기 전에 도옥이 가겠다면 어떤 구실로 붙잡을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 없다.

한편 도옥은 이제는 하림의 기경팔맥이 유통되게 되었으니

일단 금정봉을 하직하고 적운 추풍구(赤雲追風駒)를 타고 멀리 떠나야겠는데

이 기회에 하림으로 하여금 자기를 따라 오도록 할 수는 없을 것인가?

그리고 등인대사와 혜진자의 감시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이렇듯 서로 자기대로의 생각에 잠겨 있으면서도

살며시 상대편의 거동을 주의하고 있었으므로 겉으로는 예사로운 것 같지만

실은 일촉즉발의 긴장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갑자기 주렴(珠簾)을 걷어 올리며 동숙정이 들어와 등인대사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하림사매가 깨어났다고 사백부님께서 빨리 와 보시라는 사부님의 분부십니다.」

 

등인대사는 벌떡 일어나 황급히 밖으로 쫓아 나갔다.

그러자 도옥은 동숙정을 보고 싱긋 웃고는 다시 눈을 감는 것이었다.

너무나 매혹적이고도 야릇한 웃음에 동숙정은 그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급히 문으로 달려가서는 다시 도옥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살며시 눈을 감고 있던 도옥은 입술에 가느다란 웃음을 띤다.

그의 불그레한 입술, 그리고 하얀 이는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다시 두근두근 가슴이 뛰자 동숙정은 재빨리 밖으로 뛰어 나오고 말았다.

한편, 등인대사가 하림의 거실로 달려가자 하림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얼굴은 좀 전 보다 많이 수척한 것 같았으나 얼굴에 핏기가 도는 것이

 병세가 많이 호전된 모양이었다.

등인대사는 기쁜 듯이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림아! 이젠 괜찮니?」

 

하고 다정스럽게 물었다.

 

  하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네, 괜찮아요. 며칠 않는 동안 사부님과 사백부님에게 너무 걱정을 끼쳐 드렸어요.

이제 제가 일어나면 마음껏 효도하겠어요.」

 

했다.

 

등인대사는 하림의 병세에만 정신이 팔려 옆에 혜진자가 있는 줄도 모르다가

하림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합장을 했다.

 

「소승이 실례했습니다.」

 

허리를 굽히자 혜진자는 급히 답례했다

 

「별 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우리 사이가 더 생소해집니다.

그런데 이제 제 시스는 생각해 낼 수 없는 의문이 있어서 잠깐 와 주십사 한 것입니다.」

 

「무슨 일인지요?」

 

「다름이 아니라 하림의 상처를 치료해 준 사람이 정말 기련산에서 만난 도옥일까요?」

 

「아마, 틀림없을 겁니다.

그 사람의 복장은 아주 특이하니까요?」

 

「이해가 안 가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그가 기련산에서 중상을 입었을 때 이창란 등도 물러가고 이요홍도 우리와 같이

그를 기련산을 떠났는데 대체 누가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하림의 기경팔맥은 인체 내부에 있는 경맥이기 때문에 그 경맥을 유통시키려면

어떤 독특한 수법이 아니고는 안 될 텐데 아직 강호에서 그런 수법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습니다.

주약란이 저의 몸에 스며든 뱀독을 치료하기 위해 기경팔맥을 유통시켰는데

이제 도옥이 역시 하림의 기경팔맥을 유통시켰는데 좀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들은 등인대사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과연 그렇습니다.」

 

  혜진자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조금 전에 뒷산 봉우리에서 주약란의 백학을 보았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

아직도 많은 의문이 있어요.

즉 양몽환의 소식이 반년 동안이나 묘연한 때에 도옥이란 젊은이가

느닷없이 나타나서 는 하림의 치료를 해주는가 하면 백학이 나타났는데도

사람은 보이지 않으니 이상하기만 하군요……

혹시 주약란이 도옥을 보내온 것이 아닐까요?」

 

그 말을 들은 등인대사는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혜진자는 가볍게 탄식하며

 

「주약란이 절묘의 재간을 지닌 데다  인물 또한 선녀 같은데 혹시 그녀 와 양몽환이 ……」

 

하다가 웬일인지 말을 뚝 그쳤다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하림이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사부님! 제가 괴로워 할까봐 말을 안 하세요?」

 

  혜진자는 눈썹을 세웠다.

 

「만일 내 생각이 맞는다면 어차피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 일이다.

차라리 지금 알아 두는 게 낫겠지!」

 

  등인대사가 합장을 하고

 

「업(業)입니다. 그게 업입니다.」

 

하면서 염불을 외우기 시작했다.

 

  혜진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주약란이 저의 뱀독을 치료해 주고 또 기련산까지 달려와서

도와준 것은 결국 양몽환을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또 그녀가 도옥을 구해서 무공을 가르쳐 주어 이곳으로 보내온 것 같아요.

다만 하림에게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에 관해서는 아직 예측할 수가 없지만.」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학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등인대사와 혜진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가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평평 쏟아지는 눈 속을 뚫고 커다란 학이 획 지나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등인대사는 어두운 얼굴로 혜진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과연 주약란의 백학이군요.

정말 당신의 예측이 맞을 것 같습니다.」

혜진자가 그 말에 대답하려고 할 때 도옥이 등인대사의 거실에서 나왔다.

그러자 혜진자는 대답도 못하고 몸을 획 날려 도옥의 앞을 막아섰다.

 

「이 폭설 속을 어떻게 가시려고? 며칠 더 쉬면서

우리들과 천천히 이야기나 하다가 폭설이 그치면 가시죠?」

 

  도옥은 어리둥절하더니 두 걸음 물러서서는 코웃음을 치는 것이다.

 

「나는 이제 기련산에서 받은 은혜는 갚은 셈입니다.

무슨 할 일이 또 있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대답하면서 슬며시 공력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혜진자가 차갑게 쏘아 보았다.

 

「주약란이 그대를 여기 보낸 것이 하림을 구하기 위한 것뿐이요?

어떻게 그 수만리 떨어진 곳에서 하림이 만년 빙설의 한독에 신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도옥은 혜진자가

그를 붙들어 놓으려고 하는 계획인 줄만 알고 화가 났다.

 

「주란이고 우황이고 나는 모르는 사람이요.

고의로 시비를 걸어온다면 얼마든지 상대해 드리겠소.」

 

하고는 진기를 돋우어 싸울 준비를 했다.

그러나 하림의 상처를 치료하느라고 너무 원기를 소모한 탓으로 갑자기 진기를 돋우자

그만 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이대로 무리하게 기운을 내어 싸운다면 자기 몸에 해로울 뿐 아니라

승부에도 매우 불리하다는 것을 밀고는 곧 긴장을 풀며 뒤로 및 걸음 물러섰다.

 

혜진자는 이미 손을 들고 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도옥이 돌인 자세를 바꾸어 뒤로 물러나자

그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한 번 시험해보고 싶어 공격을 개시하려는 찰나

하림이 갑자기 소리치며 뛰어 나왔다.

 

「사부님, 싸우지 마세요. 그이는 몽환 오빠의 친구예요.」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보니 하림이 어느새 방에서 나왔는지

흰 옷에 점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수척한 얼굴로 그들을 향해 뛰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혜진자 옆에 오더니 말했다.

 

「몽환 오빠와는 아주 가까운 사이예요. 제가 할 말이 있어요.」

 

  혜진자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하림은 도옥에게 다가가서 웃으며 말했다.

 

「그날 병이 났을 때에 아무리 불러도 모른 척 하였는데

아마 너무 다쳐서 제 목소리를 못들은 모양이죠?」

 

  도옥은 잠깐 어리둥절했으나 곧 그녀가 기련산에서의 일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는 너무나 중태였었소.」

 

「제가 아플 때에는 사부님과 사숙님 그리고 숙정언니가 간호해 주셨는데

혼자서 고생이 많았겠어요.」

 

  도옥은 그녀의 말에 약간 쓸쓸한 표정이 되더니

곧 담담히 웃으며

 

「우리 인간이란 결국 생사이합(生死雜合)을 피하지 못하는 거요.

그 정도를 가지고 고생이라 할 것도 없소.」

 

  하림은 새초롬한 눈동자를 커다랗게 뜨고는 도옥을 바라보고 생긋이 웃었다.

 

「사람이 병이 들었을 때에는 마음 역시 괴로운 거예요.

그 깊은 산중에 돌보는 사람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병이 나았어요?」

 

  도옥은 그녀의 부드럽고 따뜻한 눈초리에 그만 거짓말 할 용기가나지 않았다.

 

「어느 늙은 중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중이 치료해 주더군요.」

 

  혜진자가 그 말을 듣자 웃으며 말했다.

 

「아마 젊고 아름다운 처녀였겠죠?

그녀가 당신을 치료해 주고 또 이곳까지 보내준 것이 아닐까요?」

 

  도옥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는 다시 하림에게

 

「소저는 기경팔맥이 방금 유통됐으니 며칠 동안 푹 쉬어야 할 거요.」

 

  도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하림이 몸을 부르르 떨며 오른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떨려서 못 견디겠어요.」

 

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등인대사는 재빨리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하림아! 하림아!」

 

하고 불렀지만 핏기가 돌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지면서 휘청거리기만 했다.

 

돌연한 변고에 혜진자도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도옥이 가버리는 것도 보지 못했다.

혜진자가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도옥은 사라지고 난 뒤였다.

혜진자는 발을 동동 굴렀다.

 

「과인 내 생각이 맞았군,

겉으로 하림의 상처를 치료하는 체 하다가 몰래 독수를 뻗쳤으니 말이야.

대사께서는 빨리 하림을 방에 눕히세요.

 제가 가서 결판을 내고 오리다.」

 

  등인대사는 하림을 안고 서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 전신을 부르르 별고 있었다.

얼마 만에 야 가슴을 진정시킨 그는 품에 안긴 하림을 내려다보며 울먹이는 소리로

 

「하림아! 하림아! 정녕 하늘도 무심하구나.

너같이 순결한 아이에게 이런 벌을 내리다니……」

 

하고 탄식하는 것이었다.

 

한편, 혜진자는 도옥을 추적하려고 하였으나

대사의 너무나 애통해하는 모습을 보고는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사님,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속히 구원해야 할 때입니다.

우선 하림을 방으로 데리고 가십시오.

그리고 이 애는 이미 곤륜파의 제자입니다.

이 애의 원수를 갚는 일은 우리 곤륜파가 맡아서 해줘야 갰습니다.」

 

  차츰 제 정신을 되찾은 등인대사는 휘청거리는 하림을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혜진자 역시 그의 뒤를 바짝 따라 들어갔다.

실내는 이불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동숙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한동안 동숙정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한 그녀는

더욱 초조하여져 밖으로 뛰어 나갔다.

밖에 나와서 둘러보니 동숙정은 어느 매화나무에 기대어 멍하니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도포 자락에 떨어진 눈송이로 보아 꽤 오랫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혜진자는 깜짝 놀라며 이것은 틀림없이 누구에게 혈도를 짚여

그곳에 방치된 것이라 생각하고 재빨리 몸을 날렸다.

그러나 동숙정은 멍하니 꽃을 바라보고 있을 뿐 혜진자가 옆에 다가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본 결과 혈도를 짚인 것 같지는 않았다.

혜진자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숙정아, 뭘 멍하니 보고 있는 거냐?

너의 사매가 사경(死境)을 헤매고 있는 이때 너는 꽃구경을 하고 있느냐?」

 

하고 외쳤다.

 

그제야 동숙정은 깜짝 놀라 눈 위에 쓰러지는 것이었다.

 

그리 고는

 

「저는‥‥ 저는……」

 

하고 당황해 했다.

 

더욱 화가 난 혜진자는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크게 뜨고 내려 다 보았다.

그러자 어쩐지 그녀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더럭 의심이 난 그녀는 노기를 억제하며

 

「혼자서 눈을 맞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니?」

 

하고 얼굴을 다시 살폈다.

 

  지금의 동숙정은 일찍이 부모를 잃고 세살 때 혜진자를 따라 금정봉 삼청궁에 와서

십팔 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혜진자에게서 교육을 받으며 자라왔었다.

그리 하여 많은 제자들 가운데서도 그녀는 가장 스승의 총애를 받아 왔었다.

언제나 혜진자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으니 사제지간이라기보다는

그 정의가 모녀와 같은 사이였다

그러나 하림이 혜진자의 문하에 들어오고부터는 사정이 좀 달라졌다.

즉 혜진자가 하림에게 더욱 큰 총애를 기울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림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는 동숙정은 도리어 다른 사람이

불평을 해도그것을 감싸주면서 하림을 친 동생과 같이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숙정은 혜진자를 따라 강호에 출입했을 뿐 아니라

일찍이 부모를 잃은 몸으로 세상의 험난함을 잘 알고 속세를 떠나 도의(道衣)를 입고

은사를 따라 도가(道家)에 몸을 바치려고 결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옥영자의 첫 제자 황지영(黃志英)이 십년 동안이나 애정을 갖고

그녀를 대해 왔지만 결코 마음을 주지 않고 지내온 것이었다.

  그러던 동숙정이 도옥을 만나면서부터 도옥의 그 맑은 용모에 매혹되어

소녀의 순정이 동요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을 스승에게 그대로 고할 수는 없었다.

동숙정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곧 변명을 했다.

 

「실은 사부님과 등인 사백부님 간의 말씀을 엿듣고 있는 것이 옳지 못한 것 같아서

이렇게 나와 설매(雪梅)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하고 얼버무렸다.

이것은 그녀가 평생 처음으로 스승에게 하는 거짓말이었다.

혜진자가 그녀의 동정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지만 동숙정을 잘 아는

그녀는 아마 말 못할 어떤 고충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하림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됐으니 빨리 가 보아라.」

 

  동숙정은 재빨리 일어나 어깨의 눈을 털고는 단숨에 하림의 방으로 달려갔다.

방에는 하림이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고 등인대사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혼자 염불을 외우며 방안을 초조하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동숙정은 황급히 하림의 침대 달려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매! 하림사매……」

 

하고 연거푸 불렀다

그러나 조금도 반응이 없고 다만 가느다란 숨소리가 들릴 뿐이다.

바로 그때 그녀의 등 뒤에서 아름다운 음성이 묘연히 들려 왔다.

 

「무슨 병인데 그렇게 심한가요?」

 

  동숙정이 고개를 돌려보니

청의를 입은 한 미소년이 발걸음도 가볍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이때 갑자기 등인대사가 노기를 띤 음성으로

 

「주약란! 그대는 여기 무엇 하러 왔소?」

 

하고 소리 쳤다.

 

  그러자 주약란은 걸음을 멈추고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를 등인대사에게 돌렸다.

 

「제가 와서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비록 짤막한 한마디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위엄이 있는 말에 등인대사는 그만 주춤했다.

 

  동숙정은 그녀를 요주(饒州) 여인숙에서 본 일이 있고

또한 그녀의 무공이 놀랍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슬그머니 장검을 잡았다.

주약란은 차갑게 주위를 훑어보며 천천히 동숙정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한 그녀의 표정은 동숙정의 장점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등인대사는 급히 몸을 날려 침대의 하림을 막고 서서 두 손을 올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고 있었다.

 

순간,

 

주약간의 얼굴에는 의아해 하는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두 사람을 훑어보고는 하림에게로 시선을 들렀다.

이윽고 하림의 병세가 보통 중태가 아님을 알게 된 그는

갑자기 눈썹을 치켜 올리는 것이었다.

 

「하림이 저렇듯 위중한데 병을 치료할 생각은 아니 하시고

검을 들고 막고만 섰으면 대체 어쩌겠다는 것이죠?」

 

등인대사는 냉소했다.

 

「저 애가 병들어 죽으면 곧 당신의 의사대로 되는 것이 아닐까?」

 

  순간,

 

주약란은 입술을 파르르 떨다 갑자기 날카로운 기합 소리 와 함께

오른 손을 들어 등인대사의 두 손을 막는 동시에 왼 손은 동숙정의 검을 빼앗아 뒤로 홱 던졌다.

장검은 마치 한 자루의 비수처럼 때 마침 그곳에 뛰어 들어 오려던 혜진자의 얼굴 위로

번개같이 날아갔다.

 그녀가 한 번에 세 사람을 공격하는 솜씨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등인대사의 두 손은 그녀가 오른 손을 휘두르자마자 어찌된 셈인지

그 위력을 발휘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고 또한 동숙정은 아차 하는 사이에

오른 손이 찌르르하며 검을 놓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 밖에 서 있는 혜진자는 은혜를 입은 바가 있으므로 공격하지도 못하고 있다가

주약란이 손을 쓰자 하림을 해치우는 줄 알고 급히 뛰어 들었다.

그리고 막 문을 들어서려는 찰나 눈앞이 번쩍하면서 날아오는 장검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면서 들고 있던 보검으로 재빨리 막았던 것이다.

이윽고 쇠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날아오는 장검을 뿌리치긴 하였으나

오른 손과 팔이 떨리고 뜨끔할 때는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등인대사와 동숙정을 물리치고 나서 재빨리 하림에게로 달려간 주약란은

하림의 이마를 짚어 보더니 다시 두어 번 하림을 불러 보는 것이었다.

  이때 등인대사와 혜진자는 모두 주약란의 등 뒤와 옆에 바짝 붙어있었다.

그리고 만약 주약란이 조금이라도 하림에 대해 수상한 거동을 보이면

곧 그에 대처하려고 공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약란은 그들의 거동은 아랑곳없이 태연히 하림을 불러 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왜 이렇듯 중태에 이르기까지 치료를 않고 내버려 두었습니까?」

 

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혜진자는 그녀의 눈과 마주치자 갑자기 요주 여인숙에서

그녀에게 치료를 받던 광경이 떠올라 차마 쳐다 볼 수 없어 그냥 고개를 숙였다.

등인대사 역시 주약란의 시선을 피하면서

 

「양몽환을 기다린다고 높은 산 위에서 며칠 동안이나 먹지도 않고

말도 없이 서 있은 탓으로 아마 빙설이 몸에 스며들어 체내의 경맥이 상한 것 같소……」

 

하자 주약란은 갑자기 얼굴빛이 변하면서 눈에서는 불이 번쩍했다.

 

  그리고 등인대사를 노려보며 성급하게 물었다.

 

「아니, 그럼 양상공이 아직도 이곳에 돌아오지 않았단 말씀입니까?」

 

  그러자 등인대사도 마주 눈을 부라렸다.

 

「양몽환을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그 도옥이란 자를 보내어 암암리에 독수를 뻗치다니 대체 어떻게 하려는 속셈이오?」

 

  순간, 주약란은 금세 빛이 달라지며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뭐라고요? 내가 누구를 시켜서 어떻게 했다는 말씀이에요?

그는 나를 괄창산까지 보내준 그 이튿날 편지 한 장만을 남기고 가버린 지

이미 칠 개월 가까이 되었어요?」

 

하면서 입술을 파르르 떠는 주약란은 순간

그들이 자기에게 무슨 오해를 하고 있음을 눈치 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양상공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군요.」

 

「모르긴 하지만 아마 아직 괄창산에 있을 것 같은데?」

 

여전히 의심하는 듯한 등인대사의 말에 화가 바짝 난 주약란은

품속에서 백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혜진자에게 그것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남긴 편지에요.

그의 필적이 아닌 가 자세히 보세요!」

 

  혜진자는 급히 편지를 받아 펼쳤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래와 같은 글월이 적혀 있었다.

  보잘 것 없는 저를 이토록 아껴 주시는 데에는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응당 몸이 완전히 회복된 후에 떠나야 도리이겠지만 사문중이 모두 바쁜 때이며

또한 제(弟)가 곤륜파의 문하로서 혼자 주소저의 가호 밑에 세월을 허송하기도

송구스러워 이만 총총히 이별을 고합니다.

옥체 보증하시기를 빌면서 ……오월 십 칠 일

                                                                  양몽환 올림

 

  날짜를 계산해 보니 반년이 넘는다.

그것을 본 혜진자는 다시 편지를 접었다.

그러자 주약란이 가볍게 탄식하며

 

「그 당시 나는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병석에서 일어났을 때에는 이미 순일(旬日)이 지난 후였지요.」

 

하고는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지난 반년 동안은 어인 공력을 수련하느라고 괄창산을 한번도 떠나 보지 못 했죠.

 

혜진자는 양몽환이 남겼다는 편지와 주약란의 이야기를 듣자

비록의혹이 완전히 풀리진 않았다 하더라도 이제까지 너무나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곧 허리를 굽히면서

 

「주소저께서 이렇게 나타나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더 죄를 지을 뻔 하였소.

자세한 내막도 모르고 공연히 몇 가지 일이 우연히 일치되어 소저를 의심하고 있었소.」

 

하고는 곧 도옥이 하림을 위해 치료하여 주던 모든 경과를 상세히 들려주었다.

  그러자 주약란은 쓸쓸히 웃으며

 

「그런 우연히 있었다니 저를 의심한 것도 무리가 아니군요.

이제당장 급한 일은 먼저 하림의 상처를 치료하는 거예요.」

 

하고는 허리를 굽혀 세심히 하림의 몸을 살피는 것이었다.

 

  등인대사와 혜진자 그리고 동숙정의 눈동자는 일제히 주약란의 얼굴로 쏠렸다.

세 사람은 모두 하림의 생명이 주약란에게 달려 있다고 믿는 것이었다.

  주약란의 손이 몇 번 하림의 몸에서 오르내리면서 차츰 그녀의 얼굴이 긴장되고

끝내 이상한 표정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손을 멈추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경팔맥이 모두 창통(暢通)하고 있는데 이상하군.

아무래도 병의 근원을 찾지 못하겠어요.」

 

  이 말은 등인대사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단번에 대사의 이마에서는 땀이 솟았다.

그는 길게 탄식하며 합장했다.

그리고는 염불을 외운 다음

 

「보살에도 자애(慈愛)가 없고 아무리 맑은 마음이라 하더라도 역시 선경(仙境) 은 아니로다.

삼십년 무상(無常)은 창천(蒼天)으로 떨어지는구나.」

 

하고 개탄하더니 몸을 돌려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것이었다.

혜진자가 깜짝 놀라 황급히 문 앞을 막아섰다.

 

「아주 구할 길이 없다고는 안했는데 대체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그러자 등인대사는 웃으며

 

「이 사람은 이제 하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졌소.

다만 제원동(齋元同)을 죽여 없애는 일 한가지 밖에는……」

 

하고는 품속에서 옥비녀 하나를 꺼냈다.

 

「이것은 당신의 사형의 옥비녀요.

옥소선자와 싸움을 하기 위해 떠나기 직전에 나에게 주면서

만일 양몽환이 계율을 어기거나 저버리는 일이 있다면

이 옥비녀로 자기 대신 문호를 맡아 달라고 하였소.

이제이것을 돌려 드리니 당신의 사형에게 못보고 간다고 전해나 주시오.」

 

하며 옥비녀를 건네주고는 두 손을 탁하고 후려쳤다.

 

  혜진자는 등인대사가 이렇듯 갑자기 손을 쓸 줄은 몰랐다.

순간 한 가닥 억센 바람이 부딪쳐 오자 그녀는 급히 옆으로 비켰다.

이윽고 훌쩍 마당으로 뛰어가던 등인대사는

곧장 자기의 거실로 달려 가 간단히 보따리를 챙겨 가지고는 선장을 들고 다시 나왔다.

혜진자는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장검을 때어 들고 그의 앞길을 막았다.

 

「대사께서는 가시더라도 대사형을 한 번 만나 보시고 가십시오.」

 

  그러나 등인대사는 고개를 들고 허허허 하고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웃는 듯 우는 듯,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처절(悽絶)한 느낌을 주는 그런 것이었다.

한참 동안 웃고 있던 웃음소리가 갑자기 멈추어졌다.

그러한 대사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돌연 몸을 홱 돌이킨 등인대사는

혜진자를 한 번 바라보지도 않은 채 재빨리 사립문밖으로 뛰어가는 것이었다.

  혜진자는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몸을 훌쩍 날려 등인대사의 앞을 막아섰다.

 

「대사님, 대사님께서 꼭 가시겠다면 더 만류하지는 않겠어요.

그러나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대사형께서 돌아오시면 곧 떠나도록 하십시오.」

 

  등인대사는 노기 띤 얼굴로 말했다.

 

「만일 그가 오늘 돌아오지 않는다면?」

 

혜진자는 얼굴빛을 고치며

 

「아무리 늦어도 오늘 저녁까지는 돌아오실 겁니다.

만일 그때까지 돌아오시지 않으면 대사께서는 내일 아침에 떠나십시오.

결코 더 만류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등인대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날개라도 있으면 날아가고 싶은 심정인데 어떻게 하를 밤을 기다리라는 말씀이오.

어서 길을 비키시오! 서로 정의를 상하지 않도록 말이오.」

 

  혜진자는 다시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이렇게 떠나시면 저는 대사형에게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어요?」

 

  혜진자의 간곡한 만류에도 등인대사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더 말씀하지 말아 주시오.」

 

  그러나 혜진자도 역시 버티고 서 있었다.

등인대사가 이제 심한 충격을 받은 채 떠나게 되면 틀림없이

귀주성(貴州省)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천용방의 본거지로 제원동을 찾아가서

격렬한 싸움을 벌이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혜진자는

그 결과까지도 예견하고 있는 만큼 도저히 그가 떠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대사님과 저의 대 사형과도 수십 년 간 사귀어 온 막역한 친구가 아니십니까?

그를 도와 괄창산에 비급(秘?)을 찾아 갔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또 저를 위하여 그 큰 위험을 무릅쓰고 대각사에 설삼과를 찾으러 가신 것도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우리 곤륜파에 하림과 같은 소녀를 추천해 주셔서 ……」

 

하자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등인대사는 표정이 돌변하는 것이었다.

 

「당신네들의 곤륜파에 입문(入門)시키지 않았더라면 그 애는 아직 죽지는 않았을 거요!」

 

하고 외쳤다.

 

그러자 혜진자의 얼굴빛이 갑자기 변했다.

 

「대사께서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오?

곤륜파에는 제자가 하림혼자 뿐이 아니요.

더구나 우리가 그 애를 억지로 입문시킨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등인대사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 나가고 말았다.

 


(제 2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