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비연경룡

제 15 장 불타는 여심(女心) <傷情遠客>

오늘의 쉼터 2014. 6. 22. 12:33

 제 15 장 불타는 여심(女心) <傷情遠客> 
 

 

  그러나 등인대사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하림이 매일 같이 시원하게 말이라도 했으면 제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진 않았을 거야.

온 종일 문에 기대고는 말도 않고 웃지도 않았어.

아무리 말을 시켜도 입을 쪽 다문 채 이틀 밤낮을 뜬 눈으로 지새울 뿐 먹은 것이라곤

겨우 과실 몇 알 밖에 없으니……」

 

동숙정은 눈을 크게 뜨며

 

「그렇다면 이미 닷새 동안이나 음식을 먹지 않았군요?」

 

「그렇지, 더 굶으면 몸을 지탱하지 못할 거야.

그리움에 지쳐 원기를 잃은 데다 춥고 굶주려 사흘을 넘기지 못할 것 같군.」

 

「그런데 어떻게 이 산봉우리 위로 올라오게 됐지요?

살을 에는 듯 하는 찬 바람에는 하림사매 뿐 아니라

건강한 사람도 닷새를 견디지 못할 텐데‥‥

 

  등인대사는 돌연 크게 웃었다.

 

  경악과 비분이  엇갈린 그 웃음소리는 마치 맹수의 포효(포효) 같았다.

  얼마 후 웃음을 그친 대사의 이마에는 끓은 주름이 잡혔다.

  그리고는 길게 탄식하는 것이었다.

 

「사흘 전 인시(寅時)쯤, 갑자기 양몽환이 돌아온다고 하면서

제일 높은 산봉우리 위에 올라가 보겠다고 하더군.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녀를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얼굴이 꿈꾸는 듯한 몽연한 표정이었어.

그래서 신경이 피로하여 환상에 사로잡히고 있는 줄 알았지.

하지만 환상을 본데 지나지 않은 거라고 일러 준다면 여태껏

그녀의 몸을 지탱하고 있던 정신의 지주(支柱)가 허물어져

다시는 못 일어날 것 같아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었지.

그래서 여기 올라오더니 괄창산이 어느 쪽이냐고 묻고는

그 사나운 눈보라 속에서도 동쪽을 향해 이틀 낮 하를 밤을 꼼짝 않고 서 있었다네.

다행히 오늘 저녁엔 바람도 자고 눈도 멎었기에 아래쪽에 한 번 다녀왔어.」

 

  그 말을 듣자 동숙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림 사매를 이 모양으로 만든 것은 양몽환이 배반했기 때문이에요.

사부님께 말씀드려서 장문사백으로 하여금 본사의 계율에 의해 죽음을 내리도록 해야겠어요.」

 

  등인대사도 얼굴에 살기를 띠웠다.

 

「물론, 나도 용서하지 못해.

이제 산을 내러가는 대로 양몽환을 찾아내서 이 산장으로 처치해 버릴 작정이야.」

 

하고 선장을 치켜드는 것이었다.

그때 갑자기 그들의 등 뒤에서

 

「만일 그놈이 정말로 사문의 계율을 배반했다면 대사가 손을 쓰기 전에 내가 잡아 죽이겠소.」

 

등인대사가 돌아다보니 어느새 왔는지 일양자가 달빛 아래 도포자락과 수염을 휘날리며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일양자를 보자 동숙정은 황망히 바위 위에서 내려 눈이 덮인 땅 바닥에 엎드렸다.

 

「불초 등속정이 삼가 대사백님에게 인사드립니다.

제자 일시 울분을 참지 못해 함부로 지껄인 것을 사백님께서 널리……」

 

하자 일양자는 고개를 흔들며

 

「아니야, 환아가 정말 본 파의 계율을 어겼다면 으레 엄한 징벌을 내려야지.

결코 너를 탓할 수는 없어, 어서 일어나라.」

 

하고는 바위 위로 뛰어 올랐다.

 

그때 일양자가 하림의 모습을 자세히 살피더니 당황한 듯

 

「림아가 이미 크게 몸을 상한 것 같으니 우선 림아부터 구해 놓고 보자.」

 

하고는 오른 손으로 하림의 등 뒤 명문혈(命門穴)을 짚으려고 했다.

이때 등인대사가 갑자기 한 걸음 나서며 왼 손으로 일양자의 오른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크게 상한 줄 알면서 어찌 경솔하게 손을 대려고 하시오?

그 애는 이미 생명이 위독합니다. 신중을 기하시오.」

 

일양자와 등인대사는 이미 수 십 년 동안이나 사귀어 왔지만

이렇듯 박절한 언사로 대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양자는 약간 멈칫하더니 곧 웃으며 말했다.

 

「허 참, 반달 동안이나 풍설이 심하다가 오늘 밤에야 겨우 멎었기에

대사와 더불어 달빛 아래 눈이나 밟자고 찾아 갔더니 부재중이더군.

대사의 그 호탕한 웃음소리만 없었던들 아직 찾고 있었을 것이오.」

 

  그 말을 듣자 등인대사는 양 미간을 찌푸리며 일양자의 웃음을 무시해 버렸다.

 

「나는 이미 하림과 같이 여기서 수일 동안이나 풍설을 맞고 지냈기 때문에 몹시 피곤하오.

달구경할 기분도 없고.」

  일양자는 달을 쳐다보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대사! 수 십 년 간 사귀어 온 대사가 아직도 내 사람됨을 모르시오? 내 평생에 제자라고는 두 명 뿐이었소. 그러나 첫 번 제자는 파의 규율을 어겼기에 추방시켰소만 사흘 밤을 울며 용서를 빌기에 농담 삼아 장진도(藏眞圖)를 구해 오면 다시 받아들이겠노라고 했더니 그 때문에 마침내 현도관(玄都觀) 문 앞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소. 이제 환아가 만일 곤륜파의 규율을 어겼다면 결코 용서하지 못하겠소. 대사가 말하는 것을 대개 들었소만 대사가 꼭 괄창산으로 갈 작정이라면 나도 같이 가겠소. 그러나 우선 하림을 구하도록 해야 할 것이 아니요?」

등인대사는 슬픈 표정으로

「옳은 말이오. 하림의 모친으로부터 후사를 부탁 한다는 유언까지 받은 일이 있는데 만일 그 애의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내 어찌 죽은 후에 하림의 모친을 대할 수가 있겠소?」

하며 너무나 격한 나머지 자기만 알고 있는 비밀까지 털어 놓았다.일양자는 추연해지는 둥인 대사를 바라보며

「하림이 이미 곤륜파에 들어온 이상 장래 어떤 풍파가 일어나더라도 우리가 어찌 보고만 있겠소. 우선 이 하림부터 구하고 의논합시다.」

  그러자 등인대사는

「이미 며칠 동안에 걸쳐 심신이 쇠잔해졌으니 자칫 잘못 하면 도리어 해를 끼치게 될 것 같아 염려스럽소.」

일양자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하림의 이마를 만져 보았다. 얼음과 같이 차다.

「왜 이토록 수 일 간이나 내버려 두었소? 이곳 찬바람은 수천 년 적빙(積氷)의 한기(寒氣)가 있어서 공력이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도 견디지 못할 텐데 하물며……」

하고 혀를 찼다.

  그러자 등인대사가 갑자기 앞으로 나셨다.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서 양몽환을 찾아옵시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구하도록 해야겠소.」

하는 것이었다.

「우리도 자신이 없는데 양몽환인들 별 수 있겠소?」

의아한 표정을 하자

 

「그러나 환아의 손으로 하림을 죽이던지 살리던지 하도록 해야 좋을 것 같소.」

 

일양자는 그제야 그 뜻을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처량한 퉁소 소리가 울려 왔다.

그러자 동숙정이 먼저 그 퉁소 소리에 마음이 움직여 진 듯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대사백님! 이 처량한 퉁소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아마 옥소선자가 또 온 것이 아닐까요?」

 

  일양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아직도 가지 않았을까?」

 

  퉁소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젊은 여인의 오열(嗚咽) 소리 같이 애처롭고 슬픈 곡조였다.

수양이 깊다는 일양자도 그 소리를 듣고는 차츰 마음이 흔들렸다.

더구나 가슴 아픈 과거를 가진 등인대사는 거의 정신을 잃은 채 듣고 있었다.

 

어느 듯 그 퉁소 소리는 바로 가까운 곳에 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어스름 달빛 아래 그쪽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긴 머리를 늘어뜨린 흑의의 여인이

퉁소를 불며 동 쪽으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는 일양자 일행이 서 있는 바위 쪽으로 곧장 다가오는 것이었다.

 

일양자는 그 퉁소 소리에 넋을 잃은 듯 흑의 여인의 가냘픈 자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삐리>

 

갑자기 퉁소 소리가 커지면서 일양자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바로 옥소선자 그 여자였다.

일양자는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바로 십 여일 전에 삼청궁을 떠들썩하게 하고 떠났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그녀는 복면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녀의 아름다운얼굴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일양자는 문득 등인대사를 쳐다보니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직도 퉁소 소리의 마력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마 그는 수 십 년 전 애절한 추억의 한 토막 한 토막을 되씹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 일양자는 생각했다…

즉 하림은 슬픔에 지쳐 원기를 잃고 진기가 한곳으로 응결(凝結)된데다 가

혹한이 몸에 스며들어 겨우 그 정신력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지만 일단

그의 정신력이 소진(消盡) 될 때는 어떤 영약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혈도를 이제라도 주물러서 유통시킨다면 비록 위험한 노릇이긴 하지만

회생의 희망을 걸 수도 있다.

 

지금 대사는 염려한 나머지 전혀 손을 못 대게 하지만 이것은 도리어 하림에게 해로울 것이니

그가 퉁소 소리에 정신이 없을 때 하림을 구하여 보자.

이렇게 생각한 일양자는 곧 오른 손으로 하림의 명문혈을 짚고는

곧이어 빠른 속도로 다시 차림의 여덟 개의 대혈(大穴)을 주물렀다.

그러는 일양자는 자신의 행동이 대단한 모험임을 잘 알고 있었다.

만일 자칫 잘못 하였다가는 하림의 체내 진기를 유통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혈을 역행시킬 수도 있다.

그렇게 되어 기혈이 구대요혈(九大要穴)에 모여 응결 된다면 하림은 당장 절명하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등인대사와의 수 십 년 우정이 깨어질 뿐 아니라

목숨을 건 유혈극마저 빚어내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일양자는 하림의 구대요혈을 주무르고 나서는

매우 긴장한 얼굴로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하림은 이윽고 길게 숨을 몰아쉬더니 눈을 두어 번 깜박거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몇 모금의 피를 토해 내고는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일양자는 이미 예기하고 있던 터라 두 팔로 곧 그녀를 안아서는 눈 위에 눕히고

추궁과혈법(推官過穴法)으로 하림의 전신 혈맥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눈을 반쯤 감은 일양자의 두 손은 번개같이 하림의 몸에서 왔다 갔다 하고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일각 가량의 시간이 지난 뒤 겨우 하림의 혈도를 유통시킬 수 있었다.

이윽고 눈을 뜬 하림은 천천히 일어나 앉으면서 자기가 왜 여기 와 있는지 모르는 듯

주위를 둘레둘레 살피는 것이었다.

그리고 등인대사를 보자 소스라치듯 놀라고는 다시 일양자가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정신이 완전히 드는지 오른 손으로 눈을 부비며

 

「대사백님, 제 오빠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일양자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웃는 얼굴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염려마라, 곧 올 테니 몸이나 조심하도록 해라.」

 

하림은 쓸쓸하게 웃으며

 

「저는 언제까지나 오빠를 기다리겠어요. 십년이라도 백년이라도…….」

 

하면서 퉁소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애절한 퉁소 소리에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고

차츰 그녀의 울음은 통곡으로 변하고 말았다.

 

처량한 퉁소 소리와 하림의 통곡 소리는 산봉우리에 메아리쳐서 형언할 수 없는

비장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퉁소 소리가 다시 그쳤다.

일양자는 먼저 의식을 되찾고 벌떡 일어나면서 울고 있는 하림을 껴안았다.

그리고는 숨을 크게 들여 마신 다음 고함을 질렀다.

평지에 벼락이 떨어진 듯 등인대사와 동숙정은 깜짝 놀라 고개를 일양자에게로 돌렸다.

그리고는 등인대사는 얼굴에 고드름이 된 눈물을 때어 내며 속으로 부끄러워 하는듯한 표정이었다.

 

옥소선자 역시 일양자의 일갈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일양자를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상대방이 일양자임을 알아챈 옥소선자는

 

「양몽환이 돌아 왔어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일양자는 엄숙한 어조로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하고 대답하자 하림이 눈을 뜨고 옥소선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를 찾고 싶으시거든 큰 언니에게 물어보세요.」

 

그러자 옥소선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네 오빠가 양몽환이냐? 큰 언니는 또 누구며 어디서 사느냐?」

 

이때 갑자기 일양자는 하림을 안은 채 몸을 날려 팔구 척 밖으로 피했다.

 

옥소선자가 냉소하더니 흑의를 휘날리며 그림자 같이 일양자의 앞을 가로 막으며

 

「현도관주(玄都觀主)가 안고 있는 처녀는 누구에요?

그리고 왜말을 못하게 하죠?」

 

  일양자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어떤 사람이던 당신이 상관할 것은 없지 않소.」

 

  옥소선자는 노기를 띠며 한걸음 다가섰다.

 

「흥! 양몽환을 생각해서 당신과의 충돌을 피하는 거지,

결코 당신을 겁내기 때문은 아니에요.」

 

  일양자는 혹시 옥소선자가 하림을 해칠까 염려하여 하림을 동숙정에게 맡기고

옥소선자를 막으려는데 한발 먼저 칼을 뽑아 든 동숙정이 옥소선자를 찔렀다.

 

옥소선자는 곧 퉁소로 동숙정의 장검을 받아버리고 도리어 퉁소를 동숙정의 가슴으로 들이 밀자

동숙정은 세 걸음이나 뒤로 물러섰다.

 

옥소선자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것과 수법이 악랄하다는 것을 아는 일양자는

하림을 안고 다시 오른쪽으로 피했다.

옥소선자는 결코 일양자와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하림으로부터 양몽환의 행방을 알고자 했을 뿐인데 일양자가 먼저 피하면서

하림에게 말을 시키지 않는 것에 그녀는 화가 났다.

날카로운 기합 소리와 함께 용형일식(龍形一式)의 수법으로 맹렬하게 달려들며 일양자를 찔렀다.

 

일양자의 발이 막 땅에 닿으려는 찰나 바람소리를 일으키며 퉁소가 느닷없이 찔러왔다.

일양자는 황망히 몸을 돌이켜 퉁소의 공격을 피하면서 오른 발로옥소선자의 원 손을 걷어찼다.

냉소를 터뜨리는 옥소선자는 일양자의 공격을 피하기도 싫은지 오른 손으로 일양자의 오른 발

태중혈(太沖穴)을 취하고 왼 손의 퉁소로는 곧장 가슴을 찌르는 것이었다.

무공이 비슷한 사람끼리는 막대기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대단한 차이가 있다.

더구나 일양자는 하림을 안고 있기 때문에 옥소선자의 공격에 어쩔 수 없이

뒤로 일장 가량이나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옥소선자는 다시 공격을 가하여 일양자를 사로잡아 양몽환의 행방을 추궁할 마음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순간,

갑자기 등 뒤로부터 강력한 압력이 가해져 왔다.

그 압력의 강세(强勢)로 미루어 보아 옥소선자는 얕볼 수 없는 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곧 질풍 같이 몸을 앞으로 날려 적의 기습을 피하면서 여전히 일양자의 가슴을 노리고

퉁소로 들이 밀었다.

옥소선자의 등 뒤에서 공격한 사람은 바로 등인대사였다.

그는 처음에는 옥소선자가 양몽환의 행방을 묻는데 이상한 생각이 들어 옥소선자의 공격을

저지시킬 생각을 못하고 있다가 일양자가 하림을 안고 갈팡질팡하는 것을 보고서야

미처 소리칠 사이도 없이 선장으로 옥소선자를 후려쳤던 것이다.

그러나 옥소선자는 몸을 돌린 채 등인대사와는 상대도 않고 여전히 일양자를 공격했다.

등인대사는 더욱 초초해진 나머지 대갈일성과 함께 맹렬한 기세로 뒤쫓아 가서

선장으로 다시 후려 쳤다.

 

일양자는 방금 상대방에게 약간 쓴 맛을 보았던 터라 다시 맹렬한기세로 달려들어 후려 갈겼다.

그와 동시에 옥소선자가 다시 공격하려는 순간 갑자기 등인대사가 맹렬한 기세로 옥소선자의

머리를 향해 선장을 내려치고 말았다.

 

원래부터 오만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 옥소선자도 연거푸 공격하여오는 등인대사의 공격에는

약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재빨리 옆으로 몸을 때내 선장을 피하고는 몸도 번개 같이 돌이켜 일시에 등인대사의

현기(玄氣), 장대(將台),기문(氣門) 삼대 요혈을 노리고 찔렀다.

 

깜짝 놀란 등인대사는 급히 세 걸음을 물러나서는 광풍을 휘몰 듯 선장을 휘두르며

옥소선자를 옆으로 후려쳤다.

 

그러자 옥소선자는 날카롭게 외치며 왼 발을 뒤로 차면서 몸을 날려 등인대사의 가슴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리고 연이어 몸을 앞으로 밀며 퉁소로 등인대사의 단전(丹田)을 겨누고 후려치는 옥소선자였다.

 

이때 등인대사는 재빨리 물러났으나 갑자기 승포가 퉁소에 찢겨 그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이것은 등인대사로서는 삼 십 년 이래 처음 당하는 치욕이었다.

순간, 대사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별안간 등인대사는 대갈일성과 함께 그의 절기인 복용장법을 전개하여 번개 같이 뛰어 나갔다.

광풍같이 휘몰아치는 그 장막(杖幕)은 일시에 옥소선자를 감싸는 듯 했다.

한편 일양자는 이미 하림을 동숙정에게 맡긴 후라 검을 빼어든 채 싸움을 바라보고 있었다.

등인대사가 복용장법으로 옥소선자를 압도하는 것을 보자

그는 속으로 등인대사의 복용장법이 추혼십이검에 비해 손색이 없는 절기라고 감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날카로운 고함 소리와 함께 옥소선자는 그 맹렬한 장막 속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곧이어 몸을 솟구친 옥소선자는 공중에서 옥퉁소를 좌우로 번개 같이 휘둘러 순식간에

등인대사를 몰아 세웠다.

그러자 등인대사는 황망히 선장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는 풍차(風車)와 같이 빙빙 돌렸다.

 이때 옥소선자는 마치 한 마리의 제비 같이 획 등인대사의 머리 위를 날아 퉁소와

한 덩어리가 되어 일양자에게 덮치는 것이었다.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공격하는 것을 본 일양자는 속으로 감탄해마지 않으면서 검을 들어 후려쳤다.

 

그와 더불어 장검과 옥퉁소가 함께 부딪치자 옥소선자는 그 부딪치는 반동의 힘을 이용하여

다시 몸을 일장이나 더 솟구치고는 허공에서 연거푸 두 번이나 공전(空轉 )하고는

다시 등인대사의 명문혈을 노리고 찌르는데 그 솜씨는 놀랄만한 것이었다.

그러자 등인대사는 재빨리 앞으로 여덟 자나 뛰어 비키고는 몸을 돌리면서 선장으로 내리 갈겼다. 그러나 옥소선자의 동작은 그보다도 더 빨랐다.

지면에 발이 닿는 순간 다시 몸을 솟구쳤고 등인대사의 선장이 다다랐을 때에는

이미 허공에 일장 이상이나 높이 했다가 다시 일양자의 머리를 향해 내리 덮치는 것이었다.

이 수법은 너무나 번개 같아 일양자도 황망히 뒤로 몇 자나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검을 휘두르며 요격 태세를 갖추었다.

다시 검과 퉁소가 부딪치더니 옥소선자는 어느새 반동력을 이용,

이장 높이로부터 등인대사에게 덮쳐들었다.

이 옥소선자의 수법은 바로 그녀의 절기인 비운 십팔수(飛雲十八手)라는 수법으로서

제비가 물을 차듯 이리 날고 저리 날아 공격 하는 것이었고 상대방의 무기와 부딪치는

반동력을 이용하여 오랫동안 땅위에 내려서지 않는 수법이다.

처음 한동안은 일양자와 등인대사가 그녀의 경신술이 놀랍다고 생각하였을 뿐

그다지 독특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차츰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즉 허공에서 이리 날고 저리 나는 수법이 점점 복잡 미묘하여 지고 분명히 앞에서

공격하여 온다고 느끼는 순간 어느새 몸을 날려 뒤로 돌아가 퉁소로 요혈을 절러오는가 하면

등인대사를 겨누고 날아간 것 같은 데도 갑자기 몸을 홱 돌려 일양자에게 달려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퉁소로서 공격하는 수법도 어떤 때는 한 번 찌르다가 후려쳤다가는 갑자기 몇 수를

한꺼번에 써서 공격해 오는 등 갖가지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에 일양자와 등인대사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일양자와 등인대사는 절묘하면서도 표홀(飄忽)한 옥소선자의 전법에 기선을 제압당하고

그 솜씨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옥소선자는 등인대사와 일양자 사이를 쉴 새 없이

날아다니며 더욱 더 맹렬하게 공격을 가는 것이었다.

 

한편 일양자는 옥소선자의 기습을 막으면서도 마녀 같은 옥소선자의 실력에 경탄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공격만 당하는 것은 선책(善策)이 아니며 공력을 집중하여 역습을 행함으로써

상대방의 공세를 깨뜨려 보아야 했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곧 공력을 집중, 전력을 다해 일격을 가하려고 틈을 노리고 있었다.

 

때마침 옥소선자가 머리 위에서 일양자를 공격해 오자 일양자는 대갈일성과 함께

몸을 일장 이상이나 솟구쳐서는 장검을 휘둘러 온 하늘에 은빛 광막(光幕)을 일으키는 동시에

왼 손에 잔뜩 힘을 주어기회 있는 대로 후려치려고 하였다.

 

일양자가 이번에 휘두를 검수의 장법은 만봉출소(萬峰出巢)라는 추혼십이검 가운데서

가장 절묘한 수법으로서 검이 수천 개로 변하여 광풍이 몰아치듯 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때 옥소선자는 능히 맞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곧 단전에 힘을 모아 앞으로 나가던

몸을 재빨리 멈추면서 아래로 떨어져 갔다.

 

허공에서까지 몸을 마음대로 놀릴 수 없게 된 일양자도 결국 헛되이 옥소선자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게 되었다.

재빨리 땅에 뛰어내린 일양자가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옥소선자는 다시 몸을 솟구쳐 등인대사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에 화가 치민 일양자는 몸을 날려 달려가면서 큰 소리로

 

「그 정도의 재간으로는 어림도 없다! 옥소선자란 이름만 날리고 있었구나!」

 

하고 외쳤다.

 

그 말을 들은 옥소선자는 몸을 돌려 갑자기 일장 이상이나 물러나는 것이었다.

 

「흥! 입씨름은 필요 없어요.

자, 그러지 말고 어떻게 싸우자는 제의를 해요.

나는 그 제의대로 상대해 드릴 테니까.

하지만 상대를 하는데 있어선 한 가지 걸어 놓고 싸워야 해요.」

 

일양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무엇을 걸자는 건지 빨리 말하오! 사람의 머리라도 걸겠소.」

 

옥소선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일 내가 지면 옥퉁소를 깨뜨리고 삭발하여 심산(深山)에 잠적하고

다시는 강호에 나타나지 않겠어요.」

 

  그러자 일양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응수했다.

 

「그럼, 나는 오른 팔을 잘라 다시는 검을 손에 쥐지 않도록 하지.」

 

  그 말에 옥소선자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만일 당신이 진다면 양몽환의 행방을 가르쳐 주세요.」

 

  그 말을 들은 일양자는 그녀의 양몽환에 대한 정이 얼마만큼 두터운가를 알고 저억이 놀랐다.

일양자 역시 남몰래 양몽환을 생각하고 있으며 언젠가 혜진자가 양몽환이 의리가 없다고

비난했을 때에도 극력 변호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의 마음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일양자는 갑자기 엄숙한 얼굴이 되며 물었다.

 

「그럼, 반 달 동안에 두 번이나 금정봉에 온 것도 양몽환을 보기 위해서였소?」

 

  옥소선자는 고소를 지으며

 

「본래 다시는 그를 보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어느 듯 나도 모르게 여기 오게 되었어요.」

 

일양자의 어조가 날카롭게 변했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이요?

우리 곤륜파의 계율에는 만일 문하제자가 사문의 계율을 조금이라도 어기면

엄중한 징벌을 받아야 하는데 이제 당신이 함부로 지껄여 그에게 누명을 씌워선 안 되오.」

 

옥소선자는 돌연 머리를 들며 깔깔대고 웃는데 그 웃음소리는 울분과 슬픔이 섞여 있어

듣는 사람에게 소름을 끼치게 했다.

 

이윽고 그녀는 웃음을 그치고는 둥그런 눈을 크게 떠서 일양자를 주시 했다.

 

「흥! 당신들이 양몽환의 털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나는 곧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당신네들의 삼청궁을 싹 불태워 버릴 거예요.」

 

하고 외치는 것이었다.

 

  일양자는 그 말에 벌컥 노기를 띠며

 

「뭐라고? 내 제자를 내 마음대로 하는데 삼청궁을 불태우다니?

어디 사람들을 청해 보시지!」

 

  그러나 옥소선자도 만만치 않았다.

 

「삼청궁을 불태우는 것쯤은 문제가 아녜요.

일년 내에 불태워 보일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우선 싸움이나 해 보고 만일 당신이 지면 양몽환의 행방을 알려 줘야 해요.」

 

일양자는 천천히 검을 치켜들며

 

「좋아! 이기기만 하면 가르쳐 주지!」

 

하고는 옆에 서 있는 등인대사를 향해

 

「하림은 이 이상 더 찬 기운을 쏘이면 안 될 테니까. 데리고 내려가시죠.」

 

했다.

 

옥소선자가 그것을 제지하려고 하였으나 일양자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자기가 이기기만 하면 양몽환의 행방을 알려 준다는 약속이 있으므로 그만 두었다.

등인대사가 내려간 후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 노려보다가 먼저 옥소선자가

일양자의 가슴을 향해 찔렀다.

그러자 일양자는 장검으로 퉁소를 쳐서 밀어내며 옥소선자의 왼쪽 어깨를 내려치는 것이었다.

 

옥소선자가 살짝 비키면서 역습을 감행,

두 사람은 다시 어우러지니 이번엔 조금 전과는 약간 형세가 달랐다.

즉 이번에는 수법 상으로 서로 기선(機先)을 제하려 할 뿐 아니라 퉁소와 장점에

제각기 내공력을 투입시켜 상대방에게 약간의 빈틈만 생기면 그 즉시 파고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서로가 먼저 와락 달려들지 못하고 한참 노려만 보다가 한데

어울렸다가는 다시 떨어지곤 하는데 그 한수 한수는 필살의 일격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공격과 기지 그리고 경험과 수법을 모두 경주하여 싸우는 것으로서

단 일순간에 생사의 판가름이 나는 결투인 것이었다.

어느덧 한 식경을 싸우게 되자 옥소선자가 더 참을 수 없는 듯 갑자기 큰소리를 외치며

몸을 훌쩍 날렸다.

그러자 일양자도 은빛 무지개를 그리며 옥소선자의 다리를 노리고 위로 뛰어 오르며 찔렀다.

장검이 닿을 듯 말 듯 하는 순간 홀연 옥소선자가 다리를 웅크리며 두 번의 공전(空轉)으로

일양자의 검을 취했다.

그리고 허리를 펴고 퉁소를 휘두르며 달려들자 일양자는 다리를 한번 차므로써 다시 몸을

다섯 자 가량이나 더 솟구쳐 위기를 면했다.

그리고 대갈일성과 함께 팔방풍우(八方風兩)의 수법으로 비바람이 몰아치듯 검을 휘둘러

옥소선자를 검의 광막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옥소선자도 역시 재빠르게 두 번 공전하면서 일장 가량 물러났다.

그러자 일양자는 옥소선자의 그 경신법의 재간을 세상에서 다시 찾아볼 수 없는

신묘한 신법이라고 감탄했다.

두 번이나 허탕을 친 그는 허공에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하고 곧 아래로 떨어졌다.

그의 발이 막 땅에 닿으려고 할 때 갑자기  등 뒤에서 찬 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몸을 앞으로 날리면서 검을 맹렬히 휘둘러 자기를 보호하였다.

 금과 옥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옥소선자는 반동의 힘을 이용하여 다시 일장 일곱 자나 떠올랐다. 그리고 공전을 하면서 머리를 아래로 숙이고는 질풍같이 내려와 일양자의 머리 위 다섯 자 쯤에서 퉁소를 내려치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수백 수천의 퉁소가 공격을 하는 것 같았다.

이것은 옥소선자의 비운 십팔수 중에서 가장 정묘한 수법 셋 중의 하나로 일장의 주위를 퉁소의

광막으로 뒤덮는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깜짝 놀란 일양자는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모든 공력을 검 끝에 집중시켜 자기의 머리 위를 경계하는 한편 상대방이 내려치는

퉁소를 후려 갈겼다.

그러자 폭포 같이 내려 쏟아지던 퉁소의 광막과 번쩍거리는 검이 다시 부딪치고는 한참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일양자가 길게 휘파람을 불며 전력을 다하여 부딪치자 옥소선자는 다시 그 반동을 이용하여

몸을 솟구쳐 공전 하면서 일양자의 머리를 공격 하는 것이었다.

 수 십 년 동안 강호에서 수많은 고수들과 겨루어 본 일양자지만은 옥소선자와 같이 허공에서

재주를 부리는 적수는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이 삼십 합을 거듭했으나 여전히 승부는 나지 않았다

일양자는 비록 옥소선자의 비운 십팔수로 해서 반격을 가하지는 못했지만

곧 이정제동(以靜制動)으로 옥소선자를 다루어야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또한 너무 서두르지 않고 공격을 집중하여 수세를 취하였다가 옥소선자가 허공에서

공격해 올 때마다 그것을 솜씨 있게 막기만 했다.

그러니까 우선 공격의 입장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옥소선자는 비운 십팔수로 이십 합이면 능히 일양자를 이겨낼 줄 알았으나

약간 우세한 입장에 놓였다는 것뿐이었다.

오랫동안 싸워서 크게 공을 거두지 못하여 화가 난 옥소선자는 곧 땅으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전신의 공력을 집중하여 일양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일양자 역시 장검을 비스듬히 들고 왼 손을 가습에 세우고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 순간 요란한 고함 소리와 함께 일양자의 앞가슴을 노리고 들어오는 옥소선자.

그것을 막고 두 번 공격하는 일양자의 검,

드디어 옥소선자는 퉁소로 운용삼성(雲龍三星)의 수법을 전개했다.

그러자 세 줄기의 바람이 쏜살 같이 일양자의 당문(當門)과 견정(肩井), 현기혈(玄氣穴)삼대

요혈을 노리고 부딪쳐 왔다.

 

그러자 일양자는 재빨리 검으로 반원을 그리면서 전광석화와 같이 옥소선자의 현기혈을

노리고 찌르는 동시에 왼 손으로 일진의 장풍을 일으켜 옥소선자가 발사한 세 줄기의 바람을

물리쳐 버렸다.

순간 두 사람은 다 같이 심신의 요동을 느끼며 장검과 퉁소가 늦추어 지는가 하면서

약속이나 한 듯 제각기 다섯 자씩 물러서고 말았다.

잠시 후,

옥소선자는 잠깐 호흡을 조절하는 듯 하고는 다시 앞으로 나가면서 퉁소를 번쩍 휘두르자

한 줄기의 날카로운 바람이 일양자에게로 밀어 닥쳤다.

 

그러자 일양자는 허공으로 장검을 휘둘러 퉁소에서 발사된 바람을 막아 내고는

왼 발을 반쯤 밀어 내며 장검으로 다시 반격을 시도 했다.

그러나 옥소선자는 일양자가 반격을 개시하기 전에 앞으로 나가던 몸을 재빨리 정지시키고는

일양자 주위를 빙글빙글 돌아갔다.

그러면서 허공에다 퉁소를 흔들었다.

그때마다 한 줄기의 강한 바람이 일어나 일양자의 요혈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드는 것이었다.

일양자는 전신의 공력을 장검에 집중시키고 옥소선자가 오는 대로 몸을 돌리면서 장검을 후려쳤다. 그럴 때마다 장검에서 획획 하는 소리와 함께 퉁소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밀쳐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던 두 사람은 서로 간격을 두고 내공력으로 싸울 뿐 조금도 무기를 부딪치려 고는 하지 않았다.

이것은 가장 내공력을 소모시키는 싸움으로서 채 일각도 되기 전에 두 사람의 이마에서는

땀이 흐르기 시작하고 두 사람의 얼굴은 점점 더 긴장해졌다.

그리고 두 사람은 피차간에 결투가 곧 판가름 날 때가 닥쳐왔으며 조금만 소홀히 했다가

적의 일격을 당하는 날이면 적어도 중상이 아니면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더 지탱하느냐에 따라 승부가 결정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열 몇 번을 교합하고 일양자는 땀이 비 오듯 흘러 도포가 젖을 정도였으며

옥소선자 역시 점점 숨이 가빠지며 그 몸 쓰는 폼이 차츰 둔해지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거의 곧 쓰러져 버릴 것만 같이 지쳐 있었다.

그때 갑자기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일양자와 옥소선자는 모두 놀래어 손을 동시에 멈추며 돌아보았다.

일장가량 밖에서 한 장정이 등에는 한 쌍의 규용봉(九龍棒)을 멘 채 서있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일양자와 옥소선자가 다 아는 사람으로서 바로 공동파의 장문인 음수일관 신원통이었다. 그를 본 두 사람은 다 같이 놀라는 듯했다.

일양자가 먼저 두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

 

「신형이 이곳 곤륜산엘 다 오시다니, 영접 못한 것을 용서하시오.」

 

  그러자 신원통은 일양자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옥소선자를 향해 말했다.

 

「흥! 땅 끝까지 가더라도 너를 찾는 이 신원통이다.」

 

  옥소선자는 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으나 다시 생각하여 보니

섣불리 그를 다루었다가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지친 몸에 이 십 여 합도 싸우지 못할 것 같아

차라리 참고 있다가 원기를 회복시킨 뒤에 처치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옥소선자는 냉담한 어조로

 

「대체 나를 찾아서 어쩌겠다는 거요?」

 

하고 응수했다.

 

신원통은 옥소선자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그녀는 싸움 끝에 얼굴이 불그레했으므로 더욱 매혹적이었다.

신원통은 그동안 고생 하며찾아다니던 것조차 잊어버리고 웃으며

 

「내 말은 다름이 아니라 당신 혼자서 다니면 남에게 해를 당할까봐서 보호해 주려던 거지.」

 

  순식간에 바꾸어지는 신원통의 표정에 옥소선자는 문득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신원통은 자기가 한 말이 옥소선자의 환심을 산 것으로 알고 득의양양한 얼굴을

일양자에게 돌리며 말했다.

 

「오랫동안 귀파의 천강장(天墨掌)과 분광검법이 무예계에서 독보적인 것이라고 들어 왔는데

조금 전에 보니 과연 도형의 솜씨가 대단하더군요.

그래서 소생이 한 번 구경을 하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일양자는 조금 전에 냉대를 받아 이미 기분이 나쁘던 차에 다시 정면으로 도전하여 오자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지친 끝에 싸우면 결국자기에게 이롭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참을 수 없어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거 참 좋은 말이오. 약간 지치긴 했지만 얼마든지 상대해 드리죠.」

 

  신원통은 삼청궁에서 멀지 않은 이곳에 두 사람이 그토록 오래 싸웠는데도

왜 곤륜파에서는 응원 오는 사람이 전혀 없을까 하고 이상히 생각하며 등에 메고 있던

한 쌍의 규용봉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는 살며시 공력을 집중하고 전력을 다하여 공격하려 했다.

그것은 일양자의 진기가 거의 소모된 것을 알고서 일격에 그를 쓰러뜨리고 한시바삐

옥소선자와 떠나자는 심산인 것이다.

만일 지체되었다가 옥영자와 혜진자가 달려오는 날에는 크게 불리할 뿐 아니라

빠져 나가기도 힘들 것 같았다.

눈치가 빠른 일양자가 신원동의 속셈을 알아 차렸으나 본래 자존심이 강한 그는

지친 몸으로 신원통의 일격조차 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공력을 집중시키고

만반의 대비 태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신원통의 입가에 음흉스러운 웃음이 혀 올랐다.

쌍봉(雙棒)을 모아 쥐고 막 공격하려는 데 돌연 옥소선자가 나서며 손을 들었다.

 

「나와 현도관주가 내기를 걸고 싸우는 중인데 웬 간섭이에요.」

 

하고 외치며 순식간에 퉁소를 네 번이나 휘두르는 것이었다.

 

그러자 전혀 준비가 없었던 신원통은 간신히 그 공격을 피하였다.

그러나 화가 난 신원통은 그 화풀이를 하려는지 고함을 지르며 일양자에게

급한 기세로 규용봉을 휘둘렀다.

 

이 일격은 그의 전신의 공력을 집중한 것으로 일양자가 검을 들어 그것을 막으며

단번에 세 걸음이나 물러서야 했다.

일양자의 공력으로 말하면 결코 신원통에게 손색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두 식경 동안이나

옥소선자와의 싸움에서 내공력을 소모 시키고 아직 원기를 회복치 못한 까닭에 이렇듯

밀려나게 된 것이다.

맞받아 싸울 수 없음을 안 일양자는 신원들의 네 차례의 공격을 막아낸 뒤 장검으로

삭풍광소(朔風狂嘯)의 변화를 일으켜 무지개를 그리며 내리 치자

신원동이 몸을 비켜 피했다.

그는 잇따라 반격의 틈을 주지 않고 추혼십이검법을 전개, 속공(速攻)을 퍼부었다.

 

이 추혼십이검은 비단 그 위력이 강할 뿐만 아니라 변화가 괴이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어쩔 줄 모르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일양자의 장검은 점점 더 은빛을 발하여 신랄해진다.

그러자 신원통은 반격할 여지가 없는지 한 쌍의 규용봉을 맹렬히 휘둘러 몸을 보호하면서

겨우 검의 광막 밖으로 빠져 나갔다.

그때 일양자는 손을 잠간 멈추고 도대체 곤륜파와 공동 파가 평소에 하등의 감정이

있을 리가 없는데 왜 신원통이 일파의 장문인으로서 무예계의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전력으로 자기를 해치려 하는지 그 이유를 물어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때 신원통이 손을 번쩍 들어 일장을 갈겨 오는 것이었다.

강렬한 찬 바람이 날아오자 지친 몸으로 그것을 맞받을 수 없다고 단정한 일양자는

곧 뒤로 재빨리 물러섰다.

 

 그러자 신원통이 냉소하며

 

「당신과 같은 고수가 왜 나의 일장을 또 받지 않으시오?」

 

하고 돌아오는 폼이 어떻게 해서든지 일양자를 일격에 쓰러뜨리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일양자가 그 말에 대답하기 전에 갑자기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를 내면서 옥영자와 혜진자

그리고 등인대사가 나타났다.

그리고 옥영자가 몸을 날려 일양자를 막으면서 장검을 치켜들고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신형은 시위나 하려고 여기 오셨소? 어디 빈도가 사형을 대신하여 한 번 받아보리다.」

 

  그들 일행이 나타나자 신원통은 형세가 위태롭게 된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옥소선자에게 다가가서 나직한 소리로

 

「자, 내가 막을 테니 먼저 내려가서 기다려 주시오.」

 

하고 속삭였다.

 

신원통이 옥소선자에게 굽실대는 것을 보자

자기가 장문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선수를 가한 것이 오해에 기인한 것이라

짐작케 된 일양자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옥소선자는 신원통이 나타내는 애정의 표시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는 듯

쳐다보지도 않고 일양자에게 다가 와서 말했다.

 

「오늘 승부가 나지 않았으니 수일 내에 다시 와서 싸움을 계속하겠소.」

 

  일양자가 대 답했다.

 

「좋습니다. 그럼 기다리죠.」

 

옥소선자는 찰찰하게 웃고 퉁소를 입에 갖다대고는 애절한 가락을 불면서

몸을 돌려 내려가고 마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신원통의 얼굴에는 노여움과 아쉬움으로 읽힌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때 옥영자가 검을 들고 대갈하며 추격하려는 것을 일양자가 막으며

 

「그녀는 결코 시비를 걸려고 온 것이 아니니 놔두시오.」

 

했다.

 

퉁소 소리는 점점 밀어지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제야 꿈에서 깨어난 듯이 깊은 한숨을 내 쉰 신원통은 갑자기 몸을 날려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일거일동을 주시하고 있던 옥영자가 더욱 빨리 몸을 날려 그를 가로 막고 나섰다.

 

「신형은 공동파의 장문으로서 우리 금정봉(金頂峯)에 와서 이유 없이 소란만 피우더니

이제 그냥 가실 작정이시오?」

 

신원통이 보니 일양자와 혜진자 등도 주위에 서 있었다.

자기는 완전히 포위당해 있는 셈이었다.

 

그는 곧 규용봉을 잡으며 외쳤다.

 

「당신네들이 한꺼번에 나서겠소? 아니면 한사람씩 나서서 상대하시겠소?」

 

  일양자는 엄숙히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서로가 아무런 원한이 없는 처지인데 왜 신형은 이곳에 나타나서

빈도에게 사정  없는 공격을 가하시오!

그 이유를 말해 주시오.

우리들은 결코 여러 사람의 힘으로 신형을 해하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오.

말해 보시오.」

 

  그러자 신원통은 얼굴이 붉어질 뿐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자 옥영자가 냉소하며 말했다.

 

「신형이 아무 말도 않는 것은 무공으로서 시비를 가리자는 것이오?」

 

  그러자 그렇지 않아도 기가 죽은데다가 다시 도전을 받은 그는 왈칵 성을 내며

 

「좋소, 그럼 어디……‥」

 

하고 외치며 규용봉을 휘둘러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옥영자는 신원통의 규용봉을 피하며 연이어 세 번을 찔러 나갔다.

그의 수법은 바로 추혼십이검법 중의 하나로서

그것을 받은 신원통은 재빨리 몸을 비켜 간신히 피했다.

  이때 일양자가 그들 가운데 뛰어 들며 싸움을 제지 시켰다.

 

「피차 아무런 원한도 없는 사이이니 우리가 좀 참토록 하지!」

 

하고는 다시 신원통에게

 

「조금 전에 신형이 빈도에게 그렇듯 악랄한 수법으로 대해온 것을 보니

아마도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소.

신형은 일파의 장문인 만큼 오늘 저녁 이 싸움에 누가 다치게 되던 간에

양 파 간에 대립이 생길 것이요.

그러면 결코 사사로운 개인감정에 그치는 일이 아니니

신형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고 행동하시오.」

 

하고는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신원통은 그의 말에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데다

형세가 불리해진 것을 느끼고 그만 고개를 숙었다.

그리고는 곤륜 삼자에게 두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곧 달아나 버렸다.

 

그가 사라지자 옥영자는 고개를 돌려 일양자를 한번 바라본 후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혜진자는 참지 못하는 듯 불평어린 어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대사형, 사형께선 그렇게 관용과 양보로써 대하시지만

그 때문에 우리 곤륜 일파에는 굉장한 영향이 있단 말이에요.

후일 강호에 우리 곤륜파가 저들의 도전을 받고도 꼼짝 못했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뭐라고 변명한단 말입니까?

우리 파의 역대 조사(祖師)에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일양자는 담담한 어조였다.

 

「지금 천용방 방주 해천일수 이창란이 야심을 품고 무예계의 구대 문파와 겨루어 보고자

수많은 문외(門外)의 고수들과 낭인(浪人)들을 포섭하여 일파를 형성하고 있소.

아마 삼 년 이내에 이 강호에는 큰 파란이 다시 일어날 것 같소.

그런데 만약 오늘 우리가 신원통을 해치게 되었다면 공동파의 보복이 반드시 있을 것이고

또 우리가 이를 물리친다 하더라도 실력 면에 큰 손실을 보아

삼년 후의 분쟁에 대처할 수 없게 되오.」

 

  혜진자는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고 옥영자 역시 일양자의 그 깊은 생각에 감탄할 뿐이었다.

  적이 사라지자 그들도 산을 내려와서 옥영자는 곧장 삼청궁으로 돌아가고 일양자와 혜진자는

등인대사를 따라 하림에게로 갔다.

혜진자는 거의 반달 동안이나 하림을 보지 못하였지만 하림에게 대한 정은 실로 야릇하게

두터워 가는 것이었다.

 

  혜진자는 하림이 병으로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자 더욱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잠시 후 그녀는 곧장 하림의 거실로 들어갔고 일양자와 등인대사는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방에는 촛불이 실내를 비쳐주고 있었고 하림은 눈을 감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동숙정은 수심에 담긴 얼굴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혜진자가 달려 들어가자 동숙정이 일어나 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혜진자는 앉아 있으라고 손짓 하고는

 

「병세가 어떠냐?」

 

하고 급한 어조로 물었다.

 

  동숙정이 울먹이며

 

「매우 중태에요.」

 

하고 눈을 내려 깔았다.

 

  혜진자가 천천히 다가가서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하림의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너무나 차가운 체온에 혜진자는 깜짝 놀라며 약간 노기를 띤 눈초리로

동숙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중태인 것을 왜 미리 알리지 않았느냐?」

 

  동숙정은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사부님의 명을 받들고 하림 사매를 찾아 왔을 때에는 이미 여기 없었어요.

등인 사백님이 저를 데리고 금정봉으로 올라가시는데 그곳에 풍설을 맞고 서있더군요.

그때 등인 사백님 말씀이 그곳에 하림사매가 서 있은 지

이미 사흘 밤낮이 지났노라고 하시더군요.」

 

  동숙정은 산 위에서 일어났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 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등인 사백님과 제가 이리로 데리고 왔을 때에는 하림 사매가 웃기도 하고

말도 하다가 차츰 맥박이 약해지며 혼수상태에 빠졌어요.

등인 사백님이 아무리 애써도 깨어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지금등인 사백님께서 사백님과 사부님을 모시러 가고

저는 여기서 지키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자 등인대사가 나서며 자세한 병세를 차근차근히 말하고는

 

「그래서 나는 하림이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져서

산 위에서 결투가 있는 것도 잊어 버렸지요.

두 분을 청하러 갔을 때엔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난 뒤였소.」

 

  사실 하림의 병세가 악화되어 어쩔 줄 모르다가 삼청궁의 혜진자에게

구원을 청하러 간다고 간 것이, 옥영자와 혜진자를 만나게 되어서야 비로소

일양자가 아직도 산 위에 있다는 것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래서 옥영자와 혜진자를 데리고 달려갔던 것이었다.

  모든 경과를 듣고 난 혜진자는 크게 실망하였다

그토록 혹독한 추위 속에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지냈으니

전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혜진자는 실망 끝에 눈물을 흘렸다.

  이때 일양자의 조용한 음성이 들렀다.

 

「하림은 옥소선자의 퉁소 소리에 감동되어 통곡을 했었죠.

그래서 가슴에 쌓여있던 울분도 다 풀어지게 됐었지요.

지금 하림의 몸에 스며든 한기만 제거하면 걱정 없을 것 같소.」

 

  혜진자는 고개를 들어 일양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림은 사형께서 저에게 천거(薦擧)한 아이인데 만일 이 애가 죽기라도 하면……」

 

하자 일양자가 탄식하며

 

「우선 추궁과혈수법으로 그녀의 혈맥을 유통시켜 봅시다.

어쨌든 우리는 모든 방법을 다 해 노력해 봐야지.」

 

  그러나 등인대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벌써 내가 갖가지로 시도해 보았지만 아주 어려울 것 같소.」

 

  그때 일양자가 침대 옆으로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얼굴은 창백하여 혈색이라고는 전혀 없으며 가늘게 맥박이 될 뿐이었다.

 

  일양자는 속으로 놀래며 음한 기운이 이미 근골과 내장에 침입 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전히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는 염려 없다는 듯이 웃으며

 

「이 애가 워낙 산 위에 오래 서 있었기 때문에 한독(寒毒)이 몸에 침입하여

혈맥과 혈도(穴道)가 막혔소.

조심스럽게 주무르고 따뜻하게 하면 혹시 낫게 될 지도 모르오,」

 

하고 말했다.

 

  그의 그러한 태도를 보자 혜진자도 약간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곧 공력을 집중하고는 두 손으로 하림의 각처 요혈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혜진자의 얼굴에는 땀이 흐르기 시작하였으나

하림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의식을 찾지 못했다.

혜진자는 잠깐 손을 멈추고 일양자를 바라보더니 다시 주무르기를 계속했다.

  어느덧 창문이 밝아 왔다.

햇살이 창백한 하림의 얼굴과 땀에 젖은 혜진자의 얼굴을 비쳐 주었다.

그리고 초조하고 비통한 표정이 엇갈린 등인대사의 얼굴에도 그 햇빛은 비쳐지고 있었다.

  혜진자의 도포가 차출 땀에 젖기 시작했다.

  일양자는 하림의 반응을 살피면서 도 한편으로는 혜진자의 극진한 간호에 머리가 절로

숙여지는 것이었다.

  그는 혜진자의 내공력이 비록 하림의 한독을 해제시키진 못할지라도 적어도

질식한 하림을 한번쯤 의식을 되찾게 할 수는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혜진자와 등인대사로 하여금 마음을 놓게 한 다음 서서히 하림의 병세를

회복시키려는 것이었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갑자기 하림이 한숨을 내쉬고 몸을 두어 번 움직였다.

그러자 혜진자는 비 오듯 쏟아지는 땀방울도 아랑곳없이

더욱 두 손에 힘을 주어 주무르는 것이었고 동숙정은 손수건으로

혜진자의 땀방울을 씻어 주고 있었다.

다시 하림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두 눈을 천천히 뜨고는 혜진자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쓸쓸히 웃으며

 

「사부님, 전 지금 오빠를 보았어요!」

 

했다.

 

혜진자가 그 말에 대답도 하기 전에 하림은 다시 눈을 감으며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등인대사가

 

「조금 의식을 되찾았다가 다시 혼수상태에 빠지는 걸 보니 내상이 대단한 모양이군.」

 

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일양자는 하림이 다시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을 보고 이제는 구할 길이 묘연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사실대로 이야기 할 수 없는 일양자는 하림의 이마를 짚으며 일부러 웃는 얼굴로 말했다

 

「너무 걱정할 건 없소.

워낙 오랫동안 몸이 얼었기 때문에 그렇지,

이제 한잠 푹 자고난 다음에 막힌 혈도(穴道)를 유통시키기로 하겠소.」

 

  그 말을 들은 혜진자는 약간 위안이 되는지 반신반의 하면서 물었다.

 

「그토록 공력을 다했으니까 곧 혈맥이 통해 지겠지요.

하지만 왜 잠깐 의식을 찾았다가 다시 혼수상태에 빠질까요?」

 

  일양자가 대답했다.

 

「살을 에는 듯한 그 추운 곳에서 사흘이나 서 있었으니

이 애의 공력으로서는 감당해 낼 수 없는 노릇이었소.

더구나 그 봉우리에는 수 천 년이나 묵은 빙한(氷寒)이 스며 있으니

몸의 각처 혈맥(穴脈)이 온전할 리가 없잖소?

사매가 비록 공력을 다하여 철도를 유통시키긴 했지만

그 중의 몇 군데 혈맥이 더욱 많이 상한 까닭에 한기가 응결(凝結)하여

다시 혼수상태에 빠진 것 같소.

우선 푹 쉬게 한 다음다시 내가 하림의 혈맥을 유통시켜 보겠소.

그렇게 몇 번 하노라면 아마 한기(寒氣)를 밖으로 제거할 수 있을 거요.」

 

  일양자의 말에 전혀 수긍이 가지는 않았지만 평소 가볍게 말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공력과 경험이 자기보다 깊다는 것을 아는 혜진자는 믿어 두기로 했다.

  등인대사는 별로 사고의 능력이 없을 정도로 정신이 흐렸으며 따라서

일양자의 말을 생각해 보지도 못하였다.

  이리하여 세 사람은 일제히 하림의 거실에서 물러 나오고 동숙정혼자만이

수심에 잠겨 하림을 지켜보고 있었다.

  동숙정은 가만히 반년 전의 일을 생각해 보았다.

절동(浙東)땅 여인숙에 투숙한 어느 날 밤 하림은

그녀에게 양몽환을 좋아하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었다.

그때 그녀는 양몽환이 변심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었다.

단순한 물음에 지나지 않았지만 하림은 어쩔 줄 모르고 밤중에 양몽환을 찾아가던 일,

그리고 양몽환이 변심한다면 하림은 세상에서 더 살아갈 수 없다던 말이 생각났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의 머리에는 양몽환의 웃음 띤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결국 그녀 스스로도 마음 깊숙이 양몽환의 인상을 간직하고 있던 것일까?

어느덧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통곡이라도 했으면 시원해질 것만 같았다.

산들거리는 산바람이 매화 향기를 가득 몰고 불어 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왔는지 혜진자가 문 앞에 서서 그녀를 주시하고 있지 않는가?

깜짝 놀란 그녀는 벌떡 일어나 엎드려 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혜진자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왜 울고 있지?」

 

「양사형이 하림 사매를 이토록 만들어 놓은 것이 원망스러워 울었어요.」

 

  그러자 혜진자는 가볍게 탄식하며 하림에게로 다가가 하림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심장의 고동이 약한 것을 알자

 

「한번도 움직이지 않더냐?」

 

하고 물었다.

 

  동숙정은 생각에 빠져 그다지 주의해 보지도 못하던 터라

잠간 주저한 뒤 아니라고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혜진자는

 

「너도 피곤할 테니 가서 쉬어라.」

 

「저는 조금도 피곤한 줄 모르겠어요. 그냥 여기 있겠어요.」

 

과연 피곤한 빛이 보이지 않자 혜진자는 더 권하지 않고 그냥 돌아갔다.

 

혜진자를 보내고 심란한 마음을 달랠 길 없는 동숙정도 밖으로 나왔다.

 

그때 창문 밖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금환이랑 도옥이 툭 튀어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등인대사와 동숙정을 따라 산 위 까지 가서는

그 동안의 모든 경과를 훔쳐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도옥이 하림을 따라 내려가지 않은 것은 일양자가 지치기를 기다려

기련산에서 당한 복수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원통에 이어 옥영자 등이 몰려오자

좀 체로 경솔히 움직이지 않는 그는 기회를 얻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일양자 일행의 뒤를 따라 내려와서 하림이 정양하고 있는

이곳 절벽에 있는 소나무 위에 몸을 숨겼던 것이나 근심으로 경황이 없는

일양자 일행은 사람이 숨어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해는 높이 떠올라 하림의 창백한 얼굴을 환히 비쳐주고 있었다.

 

그때 도옥이 가까이 다가가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하림의 각처 혈도를 만져 보는 것이었다.

그녀의 몇 군데 요혈은 거의 경화되어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이 이상 더 지체하면 상처가 확대되어 혈도가 폐쇄될 뿐 아니라 완전히 경화되어

설사 기사회생의 영약이 있다 하더라도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각우(覺愚)로부터 무공을 전수 받은 뒤 무공에 상당한 진전을 보았을 뿐 아니라

근래에 삼음신니(三音神尼)가 만든 삼결도(參決圖)를 보고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한참 동안 상처를 주물러 상원(傷源)을 찾아냈다.

하림은 한독이 인체 내부의 경맥(經脈)에 침입,

그것이 응결(凝結)된 채 흩어지지 않고 있었으므로 보통 추궁과혈수법으로는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그의 공력으로 하림의 경맥을 유통시키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공력이 아직 작은

그가 원기를 크게 손상시켜야 할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자 수개월 동안 품어오던 하림에 대한 정이 싹 가셔지는 동시에 하림의 창백한

그 모습에서 예전의 아름다움은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이키는 그의 뇌리에 번개 같이 떠오르는 추억이 있었다.

기련산 속에서 하림이 대각사 승려들에게 상처를 입었을 때 그녀를 구하여

어느 조용한 산골로 도망쳤었다.

그때 하림은 여전히 혼미상태에 빠진 채 그를 양몽환인줄 알고 가슴에 파고들며 신음했었다.

그때의 그 부드럽고 달콤한 처녀 특유의 체취에 걷잡을 수 없는 욕정이 일어나

어느 동굴로 찾아 들어 그녀의 옷을 벗기고 매끈한 그 육체를 어루만지던 일,

그리고 마침내 순결 무후한 처녀성을 침범하려고 할 때

느닷없이 어떤 사람의 투골타맥(透骨打脈)의 수법으로 상처를 입고 쓰러졌던 일 등

잊지 못할 순간적인 장면이 떠올랐던 것이다.

 

도옥은 잠시 정신을 되찾으며 자세히 하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비록 창백하고 초췌하긴 하였으나 꼭 다물어진 붉은 입술, 그린 것 같은 검은 눈썹,

그리고 희고 횐 섬섬옥수와 얼굴은 여전히 더 없는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이제 다시 자기가 만일 하림과 같은 여인을 놓친다면 이 세상 그 어느 곳에 가서

그녀와 같은 아름답고 다정한 여인을 만나 볼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던 그는 갑자기 공력을 집중하여 순식간에 하림의 십이대혈(十二大穴)을 주물렀다.

그러나 겨우 하림의 기경팔맥(奇經八脈)중의 세 곳을 유통시키고는 지쳐서

손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삼음신니의 삼결도에서 인체 내에 있는 경맥의 분포 상황을 완전히 파악 하였으나

공력이 적은데다가 처음으로 시도해 보는 일이므로 긴장한 나머지 진기를 너무 소모한 탓이었다.

 그는 이번 자기의 소모로 인해 적어도 사흘 이상은 휴식해야만 그의 원기를 회복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더 ,치료할 수 없다는 것과 만일 지친 몸으로 곤륜파의 사람과 부딪치게 되면 그들에게 사로잡히게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잠깐 휴식하고는 곧 밖으로 나왔다.

  도옥이 사라지자 곧이어 동숙정이 들어 왔다.

그녀는 세심한 여인이라 금방 하림이 덮고 있던 이불자락이 움직였다는 것을 발견했다.

깜짝 놀라 하림의 옆으로 달려가 바라보니

하림은 그대로 편안히 누워 있는 것에 겨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가만히 살펴보니 하림의 얼굴색이 많이 호전되어 있었으므로 기뿐 나머지

빨리 사부님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자리를 일어나려 하는데

갑자기 하림이 잠꼬대를 하듯

 

「몽환……오빠……우리……고기……잡으러…… 갈까요?」

 

하고는 모로 눕더니 다시 기척이 없다.

 

  동숙정은 멈칫하다가 가만히 두어 번 불러 보았다.

그러나 역시 혼수상태에 빠진 채 꼼짝도 않는다.

동숙정은 살며시 하림을 두어 번 흔들어 보았다.

그러자 동숙정은 혹시 회광반조(廻光反照)나 아닌가 하여 가슴이 덜컥 내려 않았다.

  곧 등인대사의 거실로 달려가자 대사는 대나무 의자에 앉아 수심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일양자와 혜진자는 눈을 지그시 감고 조식(調息)을 하고 있었다.

  그때 일양자가 눈을 반짝했다.

 

「사매의 병세에 무슨 변화라도 있느냐?」

 

「하림 사매가 잠깐 깨어나서 말을 한마디 하고는 다시 혼수상태에 빠졌어요.」

 

  일행은 곧 하림의 병실로 향했다.

 

  과인 하림의 얼굴빛은 많이 호전되어 있었다.

일양자는 속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하림의 요혈을 주물러 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하림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한참 동안 그들을 바라보다가 쓸쓸히 웃으며

 

「사부님 ,사백부님 ,숙정 언니」

 

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순간 혜진자와 등인대사 그리고 일양자와 동숙정은 자기들의 귀라도 의심 하는 듯 귀를 세웠다.

드디어 하림은 정신을 차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