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장 어둠 속의 아름다운 빛 <柳暗花明>
그 다음날 정오,
도옥은 곽극감(?克甘) 읍(邑)에 도착하여 하루 밤을 쉬고 건량과 식수를 준비하여
다음날 또 다시 길을 떠났다.
이때 그의 심정은 자기를 해친 원수를 찾는다는 것보다
더 갈망되는 것은 귀여운 모습의 하림을 만나 보는 것이었다.
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하림이 사랑스럽고 그리워져 견딜 수가 없었다.
해가 질 무렵, 곤륜산 자음에 도착한 도옥은 사방을 틀러 보았다.
주위도 고요하고 기이한 산봉우리는 병풍처럼 빙 둘러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아 있고
겹겹이 싸인 산 계곡은 아름답고 수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정말 곤륜산은 아름답구나! 그래서 사람들은 곤륜산을 찬양하는가?)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하며 말을 몰아 바로 맞은편 산봉우리로 올라갔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수없는 산봉우리 뿐,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길이 없었다.
더구나 곤륜삼자가 금정봉(金頂峯) 삼청궁(三淸官)에 기거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도옥이지만 셀 수 없이 많은 산봉우리 중에서 어찌 금정봉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마냥 아득하기만 했다.
(일년 열두 달을 헤매어도 못 찾겠구나?)
탄식하며 양몽환에게 더 자세히 묻지 못한 것이 후회막심이었다.
두리번거리던 도옥은 바로 발밑에 칼로 깎은 듯한 절벽을 발견하고 한 걸음 물러섰다.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근심에 싸였다
어디서 잘까? 하는 생각에 골몰하던 도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산에는 잘만한 곳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 곳에서나 하룻밤을 새우며 태음기공이나 연마할 수밖에 없지
날이 새거든 다시 금정봉을 찾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결심한 도옥은 말에서 가볍게 내려 절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몇 년 열두 달 햇빛이라고는 조금도 들지 못한 절벽 밑은 습하고 또 어두웠다.
그리고 차가운 바람이 서서히 감돌며 도옥의 몸을 엄습해 왔다.
그러나 도옥은 이를 악물고 기력을 조정하며 각우가 가르쳐 준 무술을
하나하나 시험해 나가기 시작했다.
먼저 도옥은 뼈를 깎는 듯한 음한(陰寒)의 차가운 공기를 뱃속에 빨아 넣은 후
자신의 진기로 경맥 속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또 다시 신체의 모세공을 통해 산발하도록 했다.
이것은 태음기공의 초보적인 기초에 불과했다.
앞서 사람으로, 하여금 추위를 이겨내는 무술로서 차가운 한기를 체내에 흡수하여
저장했다가 적을 대할 때 진기로 찬 바람을 뽑아내며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술을 연마할 때는 필히 일정한 심법(心法)을 알아 두어야 성공할 수 있다.
만일 실수하여 찬 바람을 통에서 잘 흡수하지 못하면 바람이 경맥에서 얼어붙어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처음으로 연습해 보는 도옥은 약간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비결대로 조심스럽게 연습을 거듭하는 동안 점점 익숙해지며
살과 뼈를 깎는 듯한 추위는 어느새 훈훈하게 도옥의 몸을 녹여주는 공기로 변하고 말았다.
도옥은 땀을 뻘뻘 흘리며 연습에 열중한 나머지 날이 새는 것도 모를 지경이었다.
절벽 위에서 적운 추풍구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였던들 며칠간이나 계속되었을 것이다.
적운 추풍구의 울음소리로 날이 샌 것을 깨달은 도옥은 나는 듯이 절벽을 기어올라 말 위에 올랐다.
무수한 산봉우리를 넘친 넘어 금정봉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하루 종일 헤맨 도옥은
또다시 날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서서히 말을 몰아 솔밭 오솔길을 따라 정처 없이 말이 가는대로 가고 있었다.
그때, 홀연… ,
오른 쪽 숲 속에서 백광이 번쩍이며 검술을 연습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옥은 말을 멈추게 한 후 발걸음을 죽이며 가까이 다가갔다.
과연,
그 곳에는 삼십세 가까운 거한과 젊은 여도사가 서로 칼을 겨누고 검술에 열중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검법을 가만히 관찰한 도옥은 두 명이 모두 극히 민첩한 동작에 저억이 놀랐다.
거한의 검법은 빠르면서도 정확하여 여도사의 검술을 이리 저리 막아내는 모습이
보통의 무술인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돌연!
여도사는 절학을 발휘하여 순식간에 날카로운 공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한은 침착하게 장검을 휘둘러 여도사의 무공을 막으며 땀을 닦고 손을 멈추었다.
그러자 엄숙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됐소! 사매의 검술과 공력은 매우 진전됐소.
차후 이년 동안만 더 노력한다면 무공에 따를 사매가 없겠는데.」
하는 말에 여도사도 이마에 땀을 닦으며
「그렇지만 제가 이년 동안을 더 연습한다면 다른 사매도 또 연습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지금이나 이 년 후나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여도사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거한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여도사에게 얼굴을 돌렸다.
「음! 그 말도 일리는 있소.
그러나 만일 지금부터라도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이년 후 까지 갈 것 없이
내일 당장이라도 사매를 능가할 사매가 나타난다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렇지 않을까?」
한마디 한마디가 천만번 지당한 말이었다.
여도사는 자기가 한 말에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말을 잘못했어요, 사형님!」
여도사가 사형이라고 칭한 거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요한 이야기라도 하듯
주위를 둘러 본 다음 여 도사에게 향했다.
「요새 들리는 소문은, 셋째 사숙이 사매를 총애하였는데 근래에 와서는
다른 사람이 총애를 받는다는 소문이오.」
「네? 다른 사람이라면 누구일까요?」
「글쎄, 누구인지는 나도 확실히 아는 바가 없소.
그린데 요새 세 분의 사숙께서는 서로 의논하여 각 사람이 가장 총애하는
제자 한 사람씩을 선출하여 추혼십이검법을 가르쳐 계승하기로 하였다는 소식이오.
사매도 잘 알고 있겠지만 우리 문파에서는 추혼십이검법을 절학으로 삼고 있으니……」
「예, 저도 알고 있어요.
우리 문파의 절학은 그 추혼십이검법 밖에 없어요.」
「알고 있군요.
그런데 큰 사백님의 단 하나 뿐인 제자는 이미 추혼십이검법을 배웠다는 소문이오.
그래서 나는 사매가 셋째 사숙의 계승자가 되어 추혼십이검법을 배우길 원하는 것이요.
내 말을 알아듣겠소?」
한편에서 몰래 대화를 듣고 있는 도옥은 그들의 대화로서 대강 알아들을 수 있었다.
(흠! 스승의 제자가 되도록 무술을 연습시키는 모앙이구나,
거한이나 여도사나 매우 관심은 있는 모양인데…… 조금 더 들어 보자……)
도옥은 귀를 세우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도옥이 숨어서 엿듣고 있다는 것을 알리 없는
그들은 모두 침울한 분위기에 빠져 있는 듯 조용했다.
숨어서 엿보고 있는 도옥의 눈에 비치는 여도사의 모습은 비록 도포를 입어
행장을 수수하게 차렸지만 얼굴과 그녀의 몸매는 아름다움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윽고 여도사는 침울했던 얼굴이 차차 밝아지며 빛나는 눈동자를 거한에게 돌렸다.
「장문사백(掌門師伯)의 제자가 아홉 명이나 있어요.
그러나 그중에서 계승자가 될 제자는 모르긴 해도 큰 사형(大師兄)이 틀림없어요.
사형이 장문좌하(掌門座下)의 큰 제자이자 우리 곤륜파 제자중에서 수석(首席)사형이고
또 무공을 따를만한 제자도 없지 않아요.」
여도사의 칭찬을 받은 거한의 사형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흔들었다.
「천만에! 지금 말한 것은 모두 틀렸소! 내 마음은 그렇지도 않은데」
하는 말에 여도사는 손을 흔들어 그의 말을 부인했다.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사형은 제가 스승님의 후계자가 못 될까봐 걱정 하시죠.」
거한은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말을 수긍했다.
「그렇지만 저는 후계자가 되거나 안 되거나 그런 것엔 추호도 관심 없어요.
지금 사형께서 말씀하신 나의 총애를 뺏는다는 사람은 심사매라는 것도 알고 있고요.
그러나 스승님께서 심사매를 총애하고 사랑하는 것은 심사매가 아직 어리고
천진난만한 소녀이기 때문일꺼에요.
우리들이 심사매를 사람하고 귀여워 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다시 말한다면 귀엽고 악의 없는 심사매를 사랑한다는 것은
지정(至情),지선(至善),지미(至美)에서 우러나오는 것 이외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봐요.」
「어떻게 잘 알죠?」
「호…… 호……」
여도사는 유쾌하게 웃으며 사형을 바라보았다.
거한인 사형은 여도사의 얼굴 표정에서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고 조금 당황했다.
그러나 부드러운 표정으로 칼을 칼집에 끼우면서 화제를 바꾸고 말았다.
「그건 그렇다치고 큰 사백님의 제자 중에 무술계에서 보기 드문
기재(奇才)가 있다는 말을 항상 들어서 한 번 만나 봤으면 하고
기다리는데 왜 곤륜산엔 오지 않을까요?」
하는 사형의 말에 여도사도 곧 먼저의 화제를 잊고 대답했다.
「저는 만나 본 일이 있어요. 보기에도 절세적인 총명과 재질을 겸비한 것 같아요.
더구나 외모는 늠름했어요.」
사형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비상한 관찰력이군요. 꽤 유심히 보았던 모양이죠?」
비꼬는 듯 조롱하는 말에 얼굴을 붉힌 여도사는 눈을 흘기며
「그런 말씀하면 스승님께 고해 바쳐서 혼내겠어요.」
귀여운 얼굴에 살짝 웃음을 지었다.
「하…… 하 ……
그러면 용서하여 주시고 스승님께 일러바치지 말아 주십시오.」
하며 여도사 앞에 읍을 하며 비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자 여도사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호…… 호……」
「하…… 하……」
사형과 여도사는 즐겁게 웃었다.
잠시 후, 거한은 음성을 낮추며 다시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셋째 사숙께서 새로 입적시킨 심사매를 두 번 밖에 만나보지 못했소.
꼭 셋째 사숙과 함께 다녀서 자세히 볼 수도 없고.」
순간!
여도사의 표정이 일변하며 냉정하게 한마디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뒤따라 다니시죠?」
말을 마친 여도사는
(휘익! )
몸을 돌리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여도사가 달아나는 것을 어이 없이 바라보고 있던 사형은
내심 저억이 놀라며 곧 뒤를 따라 달려갔다.
한편…,
이러한 광경을 나무 뒤에서 끝까지 듣고 있던 도옥은
그들의 말로서 곤륜파의 제자임을 알고 그들의 뒤를 따라 말을 몰았다.
해는 이미 서산 위로 넘어가고 점점 어두워지는 산 속에서 앞서 달려가는
사형과 여도사를 따라 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곳 지리에 밝은 그들에 비한다면 여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제대로 길도 찾지 못할 형편이었다.
도옥은 그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조심해서 말을 몰아 산 봉우리를 넘어섰다.
산봉우리에 올라선 도옥은 눈앞에 전개된 광활한 평야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의 연속적이던 곳에 이렇게 넓은 평야가 있으리라고는
상상 이외의 일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마음이 탁 트일 만큼 넓은 평야에서 눈을 굴던 도옥은
기기묘묘한 산봉우리가 에워싼 가운데에 웅장하게 서있는 사원(寺院)을 발견했다.
(아! 저곳이 삼청궁(三淸宮)이라는 곳인가?
그렇다면 내가 찾아다니던 금정봉이 바로 이곳임이 틀림없다.)
도옥이 넋을 잃고 금정봉과 삼청궁을 번갈아 보는 동안,
거한과 여도사는 어디로 갔는지 알길 조차 없이 되고 말았다.
도옥은 땅을 박차고 허공을 날아 맞은편의 높은 산봉우리로 올라가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들아 보았다.
그리고 도옥은 울창한 소나무 숲을 발견하고 다시 몸을 날려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인기척은 고사하고 짐승의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 속이었다.
그뿐 아니라 어디로 나가야 숲 속을 빠져 나가는지 길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그들의 행방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이 숲 속을 빠져 나오는데
더 위급한 도옥은 한 시간 가량 헤매다가 오솔길을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그 길은 오행생극 진도(五行生克陣圖)를 이용하여 부설된 길이었다.
만일 도옥이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았더라면 영영 길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리라고
생각하는 그의 이마에는 땀이 흘렀다, 참으로 기기묘묘하고도 정교하게 길을
만들어 놓은 데는 다만 아연할 따름이었다.
정교한 오솔길을 따라 숲을 빠져 나온 도옥은 주위를 세심히 관찰한 후
조심조심히 걸음을 옮겨 이윽고 도달한 곳은 사오백장의 높이가 넘을 듯한 절벽 밑이었다.
길게 숨을 들여 마셨다가 천천히 내쉰 도옥은 몸의 공력을 집중 운행하여
경신법(輕身法)을 발휘하여 가볍게 땅을 박찼다.
순간…,
그의 몸은 흡사 제비 같은 빠른 속도 절벽을 끼고 높이 날아 정상(頂上)에 오를 수 있었다.
절벽의 정상에 오른 도옥은 얼마 밀지 많은 거리에 멀리서 보던 그 웅장한 사원이 신기루처럼
나타나고 그 주위로 도사들이 기거하는 듯한 수많은 지붕들이 즐비한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이제는 내 원수를 찾아 갚고 이 산봉우리를 통쾌하게 웃으리라.)
생각하는 찰나…,
검은 그림자가 달빛을 가리면서 쏜살같이 사원의 지붕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검은 그림자가 지붕에 내리는가 했는데 어디론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
도옥의 머리 속에는 알 수 없는 의혹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누구일까?
저렇게 빠른 신법을 쓰는 검은 그림자는 과인 곤륜삼자의 한 사람일까?
그렇다면 정정당당하게 대문으로 들어갈 일인데 왜 지붕을 타고 넘을까?
혹시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것인가?)
(그런 것도 아니라면 어느 파의 정탐꾼일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생각한 도옥은 무슨 일인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재빨리 청정 삼점수(淸?三點水)의 신법을 발휘하여 일약 사원의담 위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담 위에 몸을 숨긴 도옥은 숨소리를 죽이며 동정을 살폈다.
그러던 그의 눈에는 결코 이상할 것 없는 고요함 속에 밤이 깊어가는 것뿐이었다.
아름다운 물과 기묘한 나무로 잘 가꾸어진 정원과 하얀 조약돌을 반듯하게 깔아
통로를 만든 운치 있는 정원.
조약돌이 깔린 통로를 한참 따라 가면 대문 많 계단 밑에서 멈추어지는,
흔히 사원에서 볼 수 있는 정원,
그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이상한 것이라곤 발견할 수가 없었다.
도옥은 약간 긴장을 풀며 담에서 가볍게 뛰어 내렸다.
그리고 조약돌을 깔아 놓은 통로를 피하여 소나무와 대나무 사이로 몸을 숨기면서
대문 앞의 계단에서 발을 멈추었다.
계단에 서 있는 도옥의 눈에는 대문 안의 정경이 한 눈에 보였다.
더구나 밀리서도 안을 다 볼 수 있을 만큼 활짝 열어 놓은 대문이며
주위의 환경으로 미루어 보아 추호도 방비를 하지 않는 무방비 상태였다.
도옥은 모든 긴장을 풀고 여유 있게 사방의 동정을 살필 수 있었다더구나 무방비 상태인
사원에서의 도옥은 제집이기나 한 것처럼 이리저리 다니며 눈여겨 볼 수 있었다.
향기로운 꽃 냄새와 풀벌레 우는 소리가 자욱한 사원의 넓은 뜰 한옆으로 대웅전(大雄殿)이
위엄 있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고 대웅전의 기둥에도 초롱불이 켜진 채 바람에 흔들리고 신단(神壇) 앞에는
촛불이 대웅전 안을 찬란하게 비쳐주고 있었다.
대웅전의 외부와 내부를 샅샅이 살핀 도옥은 그 다음의 웅장한 건물로 발을 옮겼다.
그곳에는 첫 번째보다 더 호화찬란한 장식으로 꾸민 대웅전이 있었고
그 대웅전을 가운데로 이름도 모를 기화요초(奇花妖草)가 만발해 있었다.
그러는 동안 도옥은 곤륜파의 누구도 만나는 일 없이 두루 살필 수는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이토록 웅장한 곳에 어찌 사람의 인기척도 없을까 하는 의심이 생겼다.
(정말 이상하고 괴상한 일이군, 어찌 사람의 그림자도 없을까?)
이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기웃거리는데
돌연…,
어느 멀지 않은 곳에서 기합 소리가 크게 들려 왔다.
도옥은 황급히 몸을 날려 어두운 숲 속으로 숨에 동정을 살폈다.
그러자,
한사람의 검은 그림자가 허공을 날아 도옥이 숨어 있는 바로 앞에서 벌렸던 두 팔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대웅전의 한 쪽 방문이 열리며 눈 깜짝 할 사이에 네 명의 도인이
나타나는 가 했는데 어느 사이에 검은 그림자의 앞을 가로 막고 일렬로 늘어서는 것이었다.
「?……」
하나의 그림자도 네 명의 도인을 상대로 번쩍이는 칼을 뽑아드는 것이었다.
도옥은 숨도 크게 쉬지 않고 다음에 일어날 사태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검은 복면에 검은 옷을 입은 한 명의 그림자는 달빛에 반사되는 눈빛이 한없이 차고 날카로웠다.
검은 흑의인(黑衣人)을 노려보고 있던 네 명의 도인은 군호(單號)에 맞추듯
일제히 장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러는 그들의 검술은 과연 고수들의 검술 그것처럼 민첩하고 빨랐다
그러나…,
일제히 달려드는 도인들의 일격을 교묘히 피해 나오며 역습하는 혹의인의 검술은
도인들보다 더욱 날카롭고 사나웠다.
날카로운 기합 소리를 내며 혹의인이 칼을 번쩍 드는 순간,
한줄기의 횐 빛이 유성처럼 지나가며 맨 앞에 선 도인의 칼을 공중으로 높이 올려놓고 말았다.
칼과 칼이 서로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육박해 오는 흑의인의공격에 몇 걸음 뒤로 물러선
도인들은 잠시 여유를 가진 뒤 분산하여 앞과 뒤로 쳐들어갔다.
이때!
뒤로 돌아간 도인의 손이 하늘 높이 올라갔다 내려오며
흑의인의 뒷등을 겨누고 내려치는 순간 흑의인은 재빨리 손을 돌려 장검을 막으며
역습으로 단번에 세 수를 잇 따라 공격을 가했다.
일진, 일퇴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숲 속에서 이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도옥은 흑의인을 관찰했다.
지금까지 혹의인이 빼들고 있는 무기가 장검인줄 알았던 도옥은
그것이 두 척 가량의 길이를 가진 퉁소임을 알고 깜짝 놀란다.
그리고 비로소 그 인물의 주인공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무술계의 여마(女魔) 옥소선자(玉蕭仙子)가 아닌가?
생각하며 도옥은 여마귀 옥소선자의 날카로운 공격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과연…,
그녀의 공격하는 수법은 무술계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여마귀임을
여실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더구나 그 무기가 퉁소인데는 더욱 아연 할 뿐이었다.
한편…,
옥소선자를 상대로 하고 싸우는 도인도 중년(中年)의 여도사이며
얼굴은 고상하고 위엄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보검은 용이 하늘을 나는 듯 빠르고 날카로웠다.
도옥은 그들의 싸움을 구경하며 옥소선자의 익숙한 솜씨에 비해
여도사의 검술도 못지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보검을 휘두르며 급히 두 수를 공격한 여도사는 일단 칼을 거두어
상대방의 가슴을 겨누며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옥소선자가 아니오?」
하는 물음에 혹의인은 별안간 퉁소를 흔들며 박장대소 하는 것이었다.
「맞았소! 당신은 혜진자이시군요?」
이때…,
뒤늦게 소식을 들은 곤륜파의 제자들은 대웅전의 넓은 뜰로 밀어 닥쳤다.
숲 속에서 사태를 주시하는 도옥의 눈에는 산 속에서 추격하다 놓친 거한과 여도사도
끼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들은 거의 도포를 입고 있었으며 문제의 거한만은 가벼운 경장 차림이었다.
혜진자는 일찍이 일양자와 옥영자 그리고 등인대사와 함께 기련산을 떠나
이곳 곤륜산 삼청궁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잠시 후…,
상대가 틀림없는 옥소선자 임을 확인한 혜진자는 무술계에서도 악명 높고 신랄한
그의 소행에 잠시도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침착하게 물었다.
「당신은 우리 곤륜파와 아무 원한도 없는데 이 밤중에 삼청궁까지 어찌 오셨소?」
옥소선자는 다시 유쾌한 듯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곳 삼청궁에 온 것은 단지 사람을 찾으려고 왔을 뿐이오.
그런데 당신은 말도 없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든단 말이오?
손님 대접을 이렇게 하는 법도 있소?」
옥소선자의 말을 들은 혜진자는 과연 그의 말대로 묻지도 않고 칼을 들었었다.
(그러나 사람을 찾는다면 정당하게 말하고 찾을 것이로되
어찌 야밤중에 지붕을 넘어 들어온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꿍꿍이 속인가?)
여기까지 생각한 혜진자는 슬그머니 비위가 거슬렸다.
(그리고 그의 오만한 태도, 남의 총당을 침범한 주제에 그래도 큰 소리를 치다니……)
괘씸한 생각을 누를 길이 없었다.
「사람을 찾는다면 정정 당당하게 방문하여 찾을 것이지,
어찌 이 야밤중에 온단 말이오?」
옥소선자는 웃으며 말했다.
「옳은 말이오.
그러나 내가 정정 당당하게 와서 사람을 찾겠다고 한다면
당신들이 나를 만나주지 않을 것 같아 이렇게 실례하였소!」
갈수록 큰 소리로 혜진자에게 대들었다.
혜진자는 부글거리는 분통을 누르며 옥소선자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저 여마귀가 누구를 찾아 왔을까?
혹시 내가 없는 동안 큰 사형 일양자와 무슨 관계가 있었던가?
그래서 일양자를 찾아 왔다는 것일까?)
속으로 생각한 혜진자도 자기의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강렬한 질투심이 불타올랐다.
그러나 옥소선자가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말은
혜진자의 생각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화내지는 마시오.
당신들의 곤륜파문하에 양몽환이란 제자가 있소?
나는 그 사람을 찾으려고 천리 길을 왔소.」
하는 것이었다.
순간, 혜진자는 실망의 큰 덩어리가 가슴을 쾅, 쾅, 치는 듯 했다.
그러자 홀연!
뒤에서 쟁쟁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있소! 당신이 그를 찾아 어떻게 하려오?」
옥소선자는 즉시 소리 나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밤바람에 흰 수염과 검은 도포를 날리며 서 있는
일양자가 장검을 메고 자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예전부터 일양자와 안면이 있는 옥소선자는
여자의 교태로운 웃음을 생긋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현도관주! 그간 안녕하셨어요? 언제 이곳으로 오셨습니까?」
하고 아양을 떨었다
그러나 일양자는 냉랭한 음성으로
「내가 태어난 곳인데 못 올 곳에 왔다는 말이오?」
하고 오히려 반문했다.
그러는 그의 태도는 차가운 서리가 내린 듯 싸늘했다.
일양자의 차가운 태도에 옥소선자의 입가가 씰룩해지며 아니꼬운 기색이 비쳤으나
곧 부드러운 미소로 본연의 성품인 여마귀의 자태를 감추고 웃음을 띠웠다.
「아하! 그러셔요? 저는 그런 것도 모르고 미안합니다.」
하는 것이었다.
일양자는
(이상하다. 거만하고 무술계에서도 악명이 높아 여마귀라는 별명까지 붙어 있는
옥소선자의 태도가 이렇게 부드러울 수 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옥소선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약간 음성을 낮추며 말했다.
「도대체 양몽환을 찾는 이유는 무엇이오?
혹시 그가 무슨 잘못이라도 범했다면 대신 사과하겠소!」
「잘못이요? 그런 것은 없어요. 다만 한 가지 묻고 싶을 뿐이에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는 한편 옥소선자도 곤륜산에 자기가 직접 와서 일양자에게나 혜진자에게
이상한 오해를 받는 것 같은 인상을 강렬하게 느꼈다
이때 일양자와 옥소선자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혜진자는 옥소선자의 태도나
말하는 표정으로 볼 때 어떤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지려고 온 것이 아님을 깨닫고
자기가 오해했던 것에 미안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다고 양몽환을 만나겠다고 찾아온 옥소선자를 거절해서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혜진자는
(어쨌든 방으로 들어가서 말을 들어 보자)
이렇게 일단 결심한 후 주위에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손을 번쩍 들었다.
「물러들 가거라.」
부드러운 음성이다.
혜진자의 손짓에 모든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고 일양자와 혜진자만이
옥소선자를 마주 대하고 섰다.
그러자 옥소선자도 상대방의 눈치를 채고 퉁소를 고쳐 잡았다.
이때 혜진자는 옥소선자의 앞으로 나서며 합장한 후 정답게 말했다.
「이런 누추한 곳을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방금 잘못을 널리 양해해 주신다면 잠시 안으로 들어 가셔서
우의를 굳히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
옥소선자는 급히 답례를 하고 말했다.
「야밤중에 온 불청객은 내심 미안하고 큰 죄를 진 것 같습니다.
그냥 물러가게 해 주십시오.」
혜진자는 웃으며 말했다.
「천만에 말씀을 …… 오래전부터 명성을 추모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뵈옵게 된 것도 인연연가 하옵니다.
대접할 것은 없으나 잠시 쉬었다 가시기 바랍니다.」
정중한 인사의 말에 옥소선자는 더 사양하지 못하고 혜진자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가는 일양자는 아무리 생각해도옥소선자가 찾아 온 뜻을 알 길이 없었다.
일양자는 입을 굳게 다물고 옥소선자에 대응할 묘책을 강구하며 묵묵히 뒤를 따랐다.
대웅전의 가산(假山) 한쪽 기슭을 돌아서자 대나무가 우거진 속에 아담한 집이 두 채 있었다.
앞서 가던 혜진자는 방문을 열고 옥소선자와 일양자를 안내했다.
그 방은 바로 혜진자의 거실이었다. 넓은 중간 객실에는 나무로 만든 탁자와 대나무로 만든
의자가 깨끗하게 놓여 있었다.
혜진자는 옥소선자와 일양자가 의자에 않기를 기다려 자신도 앉았다.
탁자 위에는 밝은 촛불이 조용히 타고 방안은 초라는 냄새가 꽃의 향기처럼 은은히
세 사람의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
그때 방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아름다운 여도사가 은 쟁반에 차(茶)를 준비해 가지고 들어와
옥소선자, 일양자, 혜진자의 순서로 공손히 바친 후 혜진자의 뒤로 물러섰다.
옥소선자는 그런 것은 흥미 없는 듯 흘깃 보고는 찻잔을 탁자에 놓고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일양자는 빙그레 웃으며 차를 마신 후 옥소선자에게 얼굴을 돌렸다.
「사슴의 뿔로 만든 록차(鹿茶)입니다. 조금 들면서 이야기 합시다.」
하고 권하자 옥소선자는 마지못해 찻잔을 들었다.
그러나 입술에 댈 뿐 마시지는 않고 다시 내려놓았다.
일양자는 더 권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옥소선자에게 물었다.
「양몽환을 만나려고 여기까지 오셨소?」
옥소선자는 그때까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복면을 벗으며
「그렇습니다.
야밤중에 찾아온 것은 오로지 그에게 몇 가지 물어 볼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는 그의 태도는 과연 여마귀의 칭호를 들을 만큼 명확하고 대 담했다.
그때 복면을 벗은 옥소선자를 바라보며 혜진자는 그의 아름다움에 소스라치듯 놀랐다.
더구나 그가 상상했던 옥소선자는 늙고 주름투성이의 마귀 할머니인 줄 알았는데
새파란 처녀이자 아름다움이란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한편 일양자의 놀라움도 컸다.
원래 그녀와 안면이 있는 일양자였지만 항상 복면을 하고 있는 모습과 음성만 알고 있을 뿐
이토록 까지 아름다움의 소유자인 줄은 상상 밖의 일이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귀신? 도깨비? 옥소선자가 틀림없는가?)
놀래는 혜진자와 일양자의 둥그런 눈은 깜빡일 줄을 몰랐다.
이러한 모양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던 옥소선자는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와 양상공이 기련산에서 만났을 때
그는 황폐한 계곡에서 몹시 앓고 있었어요.
저는 가엾은 생각이 들어 그 길로 대각사에 들어가 설삼과를 훔쳐 그이의 병을 고쳤지요……」
「? ……」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어안이 벙벙해 있던 혜진자와 일양자는
옥소선자의 낭랑한 말에 또 한 번 놀랐다.
더구나 악명으로 이름 높은 여마귀 옥소선자가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는 실로 놀라움뿐이었다.
그러나 옥소선자도 비록 악명의 여마귀이나 여자임은 감추지 못했다.
혜진자와 일양자 앞에서 양몽환을 구하게 된 이야기를 하는 옥소선자의 눈에는
맑은 이슬이 수 없이 맺히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붉히며 외면한 옥소선자도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혜진자와 일양자는 그로부터 얼마 동안…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 정신을 되찾으며 맑은 정신으로 돌아갔다.
현도관 주인인 일양자는 꼭 다물었던 입을 열며 진심으로 감사함과 무례의 사과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무례함을 용서하시오.
더구나 소승의 보잘 것 없는 제자를 구해주신데 대하여는
무슨 말로 감사함을 표해야 할지 난망(難忘)이오.
우리 환아(?兒)가 돌아오는 대로 제가 함께 찾아가서 사례를 드리겠소이다.」
하는 그의 표정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마움과 사례 그것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지나치게 옥소선자를 오해하고 적대시 하였구나‥‥)
일양자의 말이 떨어지자 옥소선자는 돌연!
두 눈에 번개 같은 광채가 번쩍하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는 그녀의 표정은 자기의 귀를 의심하는 듯 고개를 바짝 들며 물었다.
「네? 그럼 아직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씀이에요?」
순간…,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긴장하자
일양자는 옆에 있는 혜진자에게 구원을 청하듯 얼굴을 돌렸다.
「어찌 거짓말을 하겠소, 환아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혜진자의 말을 들은 옥소선자는 한 가닥 걸었던 희망이 끊어지는 듯
낙심천만의 서글픈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마치 슬픔을 달래는 것처럼.
얼마 동안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던 옥소선자는
이윽고 수심이 가득 찬 얼굴을 들었다.
그러한 그녀의 얼굴은 절세미인의 아름다움이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 가득 찬 수심은 그녀를 더욱 정초한
한 송이의 꽃으로 만드는데 결함이 없었다.
돌연 옥소선자의 노기 띤 얼굴은 수심이 가득 찬 기색으로 변하고
이어 한숨을 땅이 꺼지도록 쉬고는 서서히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
일양자를 주시하고 물었다.
「그이가 저를 만나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정말 돌아오질 않았어요? 대답해 주세요.
제가 기련산에 또 가봤으나 만나지 못하고 오는 길이예요.」
일양자와 혜진자는 옥소선자의 심중과 모든 사태를 알아채고
더욱 미안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참으려고 해도 자꾸 흐르는 눈물을 씻을 생각도 못하고 있는 옥소선자를 바라보던
혜진자는 다정하게 말했다.
「심정을 알겠소마는 큰 사형이나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아직 환아가 돌아오지 않아서 우리도 걱정하고 있던 중이오.
정 믿기 어려우면 마음대로 찾아봐도 좋아요.」
그제야 옥소선자는 눈물을 거두며 일어났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알겠다는 듯 잠잠히 섰다가 문을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옮기던 옥소선자는 돌아서서 일양자와 혜진자에게 고개를 숙이며
「폐를 끼쳐드려서 미안해요. 그리고 그이를 꼭 찾아야 갰어요.」
하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
혜진자는 옥소선자의 뒤를 급히 따라 나가며
「오기도 힘든 곳인데 쉬었다가 가시지요?」
하고 만류했다.
그러자 옥소선자는 고개를 돌려 쓸쓸하게 웃으며,
「차후에 자주 오겠어요.」
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날려 허공으로 치솟으며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옥소선자를 보낸 혜진자는 가벼운 한숨을 쉬면서 거실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앉은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는 일양자를 흘기듯 바라본 혜진자는
원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일양자를 불렀다.
「당신이 환아를 입적시켜 공연한 걱정을 하게 되었어요.
차후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이군요.
여마귀가 얼마나 표독스러운데 ……」
옥소선자의 차후 행동이 두렵기는 일양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혜진자의 말이 당치도 않다는 듯 쓴 웃음을 웃으며 혜진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있겠소?
더욱 환아는 총명하고 의지력이 강한 애여서 옥소선자에게 대단한 폐를 진 것 같지는 않소.」
「글쎄 너무 총명해서 옥소선자에게 무슨 오해라도 받고 있는지 그것이 걱정이에요.
만일 림아가 안다면 큰일이에요.」
「그건 무슨 말이요?」
「옥소선자의 눈치가 이상하지 않아요?
환아를 사이에 두고 림아와 옥소선자가 결판이라도 내겠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려오?」
일양자는 혜진자의 말이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여차하면 하림과 옥소선자의 대결이 없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복잡한 문제에 머리를 썩이지 않으려는 일양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밤이 너무 야심했소, 그만 쉬고 내일 의논하기 로 합시다.」
하고 일어나자 혜진자가 먼저 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삼경도 안 되었어요.옥소선자 때문에 마음만 심란한데 좀 더 이야기나해요.」
일양자를 잡아끌었다
그러나 일양자로서는 혜진자와 옥영자의 사이에 끼어 여러 가지로 더욱 애정 문제가
복잡하였던 것을 생각하며 야심한 밤에 혜진자와 마주 앉아 있기를 피하려고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완강히 잡아끄는 혜진자의 손을 뿌리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순간이었다.
삐이…,
어디선가 사람의 간장을 녹이고 애절하게 호소하는 듯 가냘픈 퉁소소리가 밤의 적막을
고요히 깨치며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 퉁소 소리는 어찌나 처량하고 애달픈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게끔 은은하게 사람의 심금을 울려 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복잡 미묘한 심경에서 일양자와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어 하는 혜진자의
울적한 가슴에는 그 퉁소 소리가 그대로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는 듯 하여 급기야는
눈물을 흘리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의식적으로 자기를 피하려는 일양자와 반생을 통해 사랑의 마음을 태운 자기의 순정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눈물을 흘리게 되고 자기의 호소와도 같은 퉁소 소리는 혜진자의
마음을 송두리째 뺏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한편…,
퉁소 소리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는 혜진자를 묵묵히 바라보는 일양자의 가슴 속에도
말할 수 없는 회포가 서리고 서렸다가 일시에 터지려는 것을 억제하며 혜진자를 외면하고
돌아섰다.
그러나 계속되는 처량한 퉁소 소리에 일양자도 감개무량한 마음을 걷잡을 길이 없었지만
다행히 퉁소 소리는 차차 좀 멀어지며 고요히 사라지고 말았다.
자기를 사랑하여 반생 동안이나 쫓아다닌 혜진자를 생각하면 아무리 굳은 사나이의
심장이지만 죄책감을 면할 수 없는 일양자이기도 했다.
한 여인이 몸부림치며 반생을 통하여 사랑을 고백하고 지금 자기 앞에서
흐느껴 운다는 것을 생각하면 일양자도 내장이 끊어지는 듯 쓰리고 아픈 심정이었다.
숙연해진 일양자는 잠잠히 명상에 잠긴 듯 눈을 감고 서 있을 뿐
어떻게 몸을 움직여야 할지를 몰랐다.
그러자 눈물을 거둔 혜진자가 표정을 고치며 서글픈 웃음을 웃었다.
「미안해요. 눈물을 흘려서……옥소선자의 퉁소 소리에 그만 마음이 처량해졌군요.」
하며 눈물을 깨끗이 닦는다.
「정말 옥소선자의 퉁소 소리는 애절하기가 말할 수 없군.
하마터면 나도 눈물을 흘릴 뻔 하였소.」
하고는 쓴 웃음을 웃으며 혜진자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심각하게 생각하는 듯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옥소선자와 환아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소.
저토록 슬픈 퉁소를 분다면 필시 무슨 곡절이 있는 듯한데.」
하고 혼자 말하듯 말끝을 흐렸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주약란이나 옥소선자는 절세의 미인들로서 환아에게 접근해오는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이 만만히 물러서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심소저가 가엾어요. 일생 동안 환아만 사랑하려는 림아가 ……」
여기까지 말한 혜진자는 심소저의 신세가 꼭 혜진자 자기 자신과 같은 길을
밟아 반생을 덧없이 보낼 것 같은 예감에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슬픔을 삼켰다.
혜진자로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심소저 하림이 누구에게도 양몽환을 뺏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이윽고 혜진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요새 림아는 아주 얼굴이 안 됐어요.
천진했던 모습이 사라지고 수심에 잠겨 있는 듯해서……
나는 림아가 한 많은 일생을 보내는 것은 보기 싫어요.」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때 옆에서 혜진자의 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여도사 차림의 동숙정이 나서며
혜진자의 말을 뒤받침 해서 말했다.
「저도 하림 사매가 걱정 되어요. 매일 오빠만 부르며 음식도 안 먹고‥‥.
더구나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은 자기가 싫기 때문이라고 그러면서 울기만 해요.」
혜진자와 동숙정의 이야기를 다 들은 일양자는 앞으로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할지 암담했다.
더구나 혜진자는 자기의 과거를 생각하고 하림만큼은 한 많은 일생을
보내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다.
혜진자는 묵묵히 서 있는 일양자에게 바싹 다가갔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환아는 당신이 아끼는 제자이지만 림아는 제가 아끼는 제자예요.
내 제자의 슬퍼하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어요.」
일양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혜진자는 단번에 해결을 지으려는 듯 일양자를 노려보았다.
자기는 사랑에 실패했지만 제자인 하림에게 마는 꼭 성공시켜 주고 싶었다.
그리고 자기의 패배를 보복이라도 하려는 듯 일양자에게 다가섰다
「하림을 죽이던지, 아니면 환아를 찾아오던지 양단간 일을 처리하세요.
우리 곤륜파의 제자가 다른 파의 여자와 내통하고 있다면 이것은 중대한 일이에요.」
그제야 일양자는 사태가 남자와 여자의 애정 문제가 아닌 다른 커다란 문제라는 것을
상기하며 표정이 굳어졌다.
「잘 알겠소. 그러나 환아는 내가 십 이년 동안이나 가르친 제자요.
환아의 일거일동을 감시하지 못한 것은 내 불찰이지만 그는 절대로 배신하거나
의리부동한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여하간 돌아오는 대로 진상을 따지겠소.」
하고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그러자 혜진자는 비꼬는 듯한 어조로 반박했다.
「십이 년 동만 가르친 제자라도 마음이 변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것은 내가 장담하오.
설사 일시적으로 애정 문제나 다른 곡절이 있다 하더라도 순간적인 일일 것이요.
조선사부(祖先師父)를 배반할 환아가 아니오.
만일 배반했다면 우리 파의 법규대로 처벌하겠소.」
하고 말하는 일양자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혜진자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끝까지 양몽환을 두둔하는 일양자의 태도가 혜진자의 비위를 건드렸다.
혜진자는 여자가 가장 기분 나쁠 때 외치는 소리 같은 날카로운 소리로 일양자를 쏘았다.
「당신은 십 이년간의 제자라고 두둔하지만 그가 돌아올 줄 생각하세요?
림아의 말대로 싫어서 오지 않는 거예요. 왔다면 벌써 돌아오지 왜 안 왔겠어요?」
혜진자의 날카로운 소리에 일양자는 분통이 터졌지만 참았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주약란의 백학을 타지 않고 경신법만 이용해서라도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거리와 시일로 따지더라도 반년이면 돌아오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일일까?……)
이렇게 생각하는 일양자의 머리 속에도 여러 가지의 의심이 하나 둘 떠올랐다.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는데 다시 혜진자의 말소리가 들렸다.
「반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한가지만으로도 우리 파의 규칙대로 처벌할 수 있어요.
만일 당신이 규칙대로 처벌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형(師兄)에게 영을 내리도록 하여
내가 처벌하겠어요.」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 버리고 말았다.
혜진자가 나간 후,
일양자는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며 혜진자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다
뒷짐을 진채 천천히 방을 나섰다.
그때 뒤에서 일양자의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켜보고 있던 동숙정은
급히 일양자의 발 앞에 끊고 엎드렸다.
「스승님…… 오늘 밤은 제자 동숙정이 시중해 모시겠습니다.」
하고 부복했다.
일양자는 손을 흔들어 거절의 뜻을 표하며 부드럽게
「아니다. 너의 스승님의 심기가 편찮은 것 같은데
오늘 밤은 네가 가서 잘 시중해 드려라!」
하고 혜진자에게 돌아갈 것을 권했다.
동숙정은 스승 일양자의 괴로움을 밤새 위로해 드리려고 간청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양자는 도리어 혜진자를 걱정하며 위해 주기를 바랐다,
동숙정은 엎드린 채 대답했다.
「제자는 사백의 분부를 받들 뿐입니다,
그러나 방금 제자의 실연으로 스승님과 사백님을 괴롭혀 드린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하림의 하소연을 일양자와 혜진자 앞에서 말한 것을 뉘우치며 용서를 빌었다,
일양자는 웃으며
「어찌 네 탓이냐? 일어 나거라!」
하고는 대웅전을 끼고 돌아 사라졌다.
한편…,
지금까지 나무 숲 뒤에 숨어서 일양자, 혜진자, 옥소선자의 대화와
주위에 동정을 살피고 있던 금환이랑 도옥은 그냥 숲 속에서 몸을 숨긴 채
앞으로 할 일을 머리 속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도옥은 우선 자기가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하림을 만나본 후 원수를 찾아
기련산에서의 복수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도옥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옥소선자 그 여마귀가 무슨 일로 양몽환을 찾아 왔을까?
그리고 나보다 먼저 검은 선을 그으며 대웅전으로 쏜살같이 달렸던
그림자는 분명 옥소선자였던가?)
여기까지 생각한 도옥은 일양자와 혜진자 그리고 옥소선자가 방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옥소선자가 방을 나온 후 슬프게 들리던 퉁소 소리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퉁소 소리가 그치자 노기 띤 혜진자가 나가던 것이며 일양자가 대웅전을 끼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까지 기억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옥소선자와 양몽환과의 사이에는 무슨 곡절이 있는지 모른다.……)
도옥은 하늘을 우러러 보고 삼경이 지났음을 짐작하고 숲 속에서 나왔다.
일단 숲 속에서 나온 도옥은 하림을 찾는데 만 정신을 쏟고 이 방 저 방 두루 다니며 헤매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방 그 어디에 하림이 있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일일이 방을 찾아 헤맨다면 발각될 우려도 없지 않았다.
도옥은 곰곰이 생각한 후 금정봉(金頂峯) 꼭대기에 숨어서 동정을 살피기로 하고 소리 없이
그 자리를 빠져 나오고 말았다.
금정봉에서 동정을 살피기도 무려 십여 일 그러나 끝내 하림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사흘이 지나갔다.
십 삼일 째….
금환이랑 도옥은 피곤과 추위로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상봉에서 내려 왔다.
일단 피곤한 몸을 회복한 후 다시 찾기로 하고 몸을 숨기고 쉴만한 곳을 찾아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도옥의 몸은 그런대로 조금씩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펑펑 쏟아져 내리는 폭설(暴雪)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도옥이 찾아 내려온 금정봉의 아래에는 천년 묵은 소나무와 기암(奇巖)들이 즐비하여
몸을 숨기기에는 적당했다.
피곤한 몸을 쉬는 동만 도옥은 틈틈이 불혈 착골법 중의 열두 가지 무술을 연습하여
무공의 진기가 빠져 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러므로 해서 그의 무술은 더욱 날카롭게 연마 되었다.
이윽고 몸의 원기를 회복한 도옥은 금정봉으로 다시 올라가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쏟아져 내리던 폭설도 그치고 오랜만에 맑은 하늘에 밝은 달이 사방을 비쳐주는
달밤이었다.
환한 달빛에 내려 비치는 소나무를 내려다보며 길을 찾던 도옥은
눈 위에 새겨지는 발자국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멀리 보이는 삼청궁에서 두 명의 검은 그림자가 도옥이 서 있는 곳을 향하여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뛰는 모습이나 태도는 도옥 자신보다는 못하였지만 날쌔고 가벼운 몸짓으로 보아
곤륜 삼자의 제자임을 직감했다.
(음, 잘 됐군. 눈 위의 발자국 때문에 걱정 했는데 ……
저놈들이 남긴 발자국을 밟으며 따라가면 흔적도 남지 않겠지……)
이렇게 생각하는데 두 명의 그림자는 어느덧 도옥이 숨어 있는 앞에까지 달려 와서는
발을 멈추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소곤소곤 무슨 중대한 이야기라도 하는 듯 음성을 낮추어 말하는 것이었다.
「넷째 사형! 사숙이 새로 입적시킨 제자를 보셨소?」
나이가 즘 들어 보이는 도사차림의 사나이가 고개를 흔들거리며 대답했다.
「다들 셋째 사숙이 입적시킨 제자가 아름답고 선녀 같다는데 나는 한 번도 못 보았어!」
했다.
그때 다시 처음 말을 걸었던 젊은 도사 차림의 사나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못 봤어요? 저는 두 번 봤는데요, 과연 절세의 미녀더군요.」
「무술도 절묘하다는 소문이던데?」
「그럼요! 지금까지는 동소저(童淑貞)가 제일 아니었어요? 남자는 큰 사형이지만」
「그렇지, 동소저의 무술이 놀랍지. 번개 같이 빠르고 그래서 스승님께서도 무척 총애했지 않나?」
「그런데 말이죠, 이번에 입적한 사매와 큰 사백이 삼청궁으로 돌아오신 후부터는
약간 변화가 생겼지요.」
「어떻게?」
「글쎄 제 말을 좀 들어 보세요.
셋째 사숙은 새로 들어온 사매를 더 총애하여 동소저가 과연 스승님의 뒤를
이어 받을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이 생겼죠.
그것이 동소저의 개인 사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만이지만.」
「그럼 동소저가 수제자가 못 된다는 말인가?」
「결국 그런 셈이죠.
거기다 더욱 중요한 것은 큰 사형의 수파제자(首派弟子) 자리까지 흔들려 큰 문제죠.」
「무엇이? 큰 사형의 수파제자의 자리까지 흔들려?」
하며 크게 놀란다.
그러나 젊은 도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착하게 말했다.
「제가 언젠가 단실을 경호할 때 사백님과 스승님,
그리고 셋째 사숙이 서로 의논하는 것을 엿들었죠.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지금추측해 보니 의미 있는 말이더군요.」
하자 늙은 도사는 답답하다는 듯이 젊은 도사에게 바짝 턱을 내밀었다.
「도대체 자네 말은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 다시 말해 보게!」
젊은 도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넷째 사형도 아시다시피 우리 곤륜파 일대는 솔직히 말해서
큰 사백님이 장문이 되셨으면 했지 않아요?」
「그건 그렇지!」
「그런데 원래 큰 사백님은 조용함을 좋아하시고 한운야학(閒雲野鶴)이시라
문호를 이어 받기 싫어한 까닭에 사숙님이 원숙하신 뒤 유서(遺書)한 후 멀리 떠났지요.」
「그런 건 나도 알아, 그 다음을 말하게……」
「자꾸 재촉하지 말아요, 차근차근히 말할게요.」
「그래, 빨리 하게.」
「그래서 유서(遺書)에는 스승님이 문호를 이어 받으라고 쓰여 있었대요.
그러니 수파제자(首派弟子)는 아니었지만 곤륜파의 장문인이 됐죠.」
「흠!」
「그러나 지금은 큰 사백님도 삼청궁으로 돌아오시고 더욱 제자까지
새로 입적시켜 총애하고 있지 않아요?」
「그렇다면 그 제자가 된단 말인가?」
「글쎄, 그것이 묘하거든요.
스승님은 장문인이고 큰 사형은 곤륜파의 수제자인데 우리 아홉 명의 제자 중에
큰 사형을 따를만한 무공이 어디 있어요?」
「흠……」
「그러니까 큰 사형 밖에는 수제자가 될만한 사람이 없다 이거에요.」
「그건 사실이야. 큰 사형을 따를만한 제자도 없을 걸세!」
하며 늙은 도사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젊은 도사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죠, 더욱 사건이 커졌어요?」
젊은 도사가 하는 말마다 늙은 도사는 새롭고 놀라운 소식에 감탄할 따름이었다.
늦은 도사는 귀를 바싹 올리고 젊은 도사의 입을 쳐다보았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사건도 이만 저만한 사건이 아니죠.」
「빨리 말을 해야 알지, 무슨 사건인데 그렇게 수선이야?」
「그것은 말이죠,
큰 사백님이 자기 제자에게 미리 추혼십이검법을 가르쳐 주었대요.」
「뭐? 뭐라고? 우리 곤륜파의 절학인 추혼십이검법을?」
하고 늙은 도사는 펄쩍 놀랐다.
「그런데 원래 곤륜 삼자가 약속하기를 서로 의논이 있어야 추혼십이검법을
가르치기로 했는데 그 약속을 어기고 가르쳤다는 거예요.」
「저런! 큰 사형도 십 육년 동안이나 스승님에게서 무술을 배우면서도
추혼십이검법을 사사로 가르치지 않았다는데 약속까지 어겼단 말인가?」
「예, 그런 것을 사백님이 자기 제자에게만 사사로 가르쳐 주었다는 거예요.」
「홈 ……」
「그런데 셋째 사숙이 큰 사백님을 찬성하고 또 말하기를 큰 사백님의 제자는
영리하고 재간이 있는 제자로서 틀림없이 곤륜파를 빛낼 것이라고 말했어요.」
「흠……」
늙은 도사도 심각한 얼굴을 지으며 계속 젊은 도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나는 더 엿듣지 못하여 더는 모르지만 하여간 큰 사형이
수파제자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실로 중요한 문제에요
「흠……」
가늘게 한숨만 연거푸 쉬던 늙은 도사는 젊은 도사를 바라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가 들은 이런 말을 큰 사형에게 말씀 드렸니?」
「네 했습니다.」
「그래, 아무 말씀도 안 하시든가?」
「별로 관심도 없는 듯 했어요.아무 말도 안하고 다만 담담하게 웃더군요.」
그러자 늙은 도사는 젊은 도사의 어깨를 잡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런 말은 차후 아무에게도 하지 마라.
스승님과 존장(尊長)님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엿듣는다는 것은 문파 규율에 위반되는 일이다.」
하고 말하는데 갑자기 흰 빛이 번쩍하며 한줄기의 빛이 삼청궁에서 뻗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삼청궁을 빠져 나온 흰 그림자는 순식간에 도사가 서있는 곳까지 달려오는 것이었다.
이때!
검은 도사가 맞받아 나가며 노기 띤 음성으로 소리쳤다.
「누구냐! 이 밤중에 나가는 놈이?」
그러자 의외로 상대방에서도 낭랑한 여자의 음성이 들려 왔다.
「나야! 뒷산으로 심사매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아! 동소저이십니까? 소제의 잘못을 용서하십시오.」
하고 손을 모아 읍을 하며 몇 걸음 나갔다.
「괜찮아! 왜 여기에 있지?」
하고 동숙정이 웃으며 물었다.
「예, 순찰중입니다.
그런데 심사매가 바로 새로 입적한 제자인가요?」
하고 늙은 도사가 허리를 굽실거리며 묻자
동숙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웃어 보인 후 다시 가던 길을 재촉했다.
동숙정이 사라지자 두 도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쪽으로 천천히 순찰 길을 떠났다.
한편…,
나무 위에 숨어서 곤륜파의 비밀과 며칠을 두고 헤매던 하림의 거처까지 알게 된 도옥은
기운이 백배하여 급히 동숙정이 사라진 뒤를 돌아 가볍게 몸을 날렸다.
동숙정이 사라져간 금정봉의 뒤에는 오륙백 장(丈)이 넘을 듯한 절벽이 깎아지른 듯
내려다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낭떠러지 기였다.
재빨리 달려온 도옥이 밭서 달리는 동숙정의 뒤 모습을 발견하고 조심조심 절벽을 벗어났다.
절벽이 끝나는 곳에는 기복이 심한 계곡이 하늘을 가려 암흑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 계곡을 사이 좁고 험한 협곡은 간신히 한사람의 몸이 빠져 나갈 수 있을 뿐이었다.
간신히 협곡의 좁고 험한 길을 빠져 나온 도옥은 눈발에 전개되는 새로운 절경에 놀랐다.
아름다운 꽃들이 수없이 피어 있고 손으로 다듬은 듯한 잔디가 매끈하게 깔려 있었다.
그리고 이름 모를 꽃들에서 나오는 향기로운 냄새에 가슴이 트이는 듯 상쾌했다.
도옥은 동숙정과의 거리를 얼마간의 간격을 유지하며 발각되지 않도록 조심했다,
높고 험한 산으로 둘러싸인 채 꽃향기가 그윽한 그야 말로 도원경(桃源境)이었다.
아름다운 꽃나무와 깨끗이 정돈된 듯한 잔디를 밟으며 얼마간 따라온 도옥은
갑자기 발을 멈추었다.
대나무가 우거진 속에 불빛이 새어 나오는 초가집 마당에서
동숙정이 걸음을 멈추었기 때문이었다.
도옥은 소리 나지 않게 몸을 숨기고 동숙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초가집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은 아직 사람이 잠을 자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숲 속에 몸을 숨긴 도옥의 가슴은 마냥 두근거리며 뛰고 있었다.
(이곳에 하림이 있는 모양이구나, 기어이 만나보게 될 것인가?)
초가집 마당으로 들어선 동숙정은 극히 낮은 목소리로
「사매!」
하고 불렀다.
그러나 초가집에서는 아무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백님!」
하고 불렀다.
그러나 역시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동숙정은 부르기를 단념하고 몇 걸음 다가가서 문을 가만히 밀었다.
「사르르……」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동숙정은 열린 문으로 들어서서 실내를 휘이 둘러보고는 안심했다.
그곳에는 등인대사의 신장과 하림의 보검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폭설도 그치고 달도 밝아 설경(雪景)이라도 보러 나갔나.……)
이렇게 생각하며 동숙정은 그들을 기다리기로 하고 잠시 앉아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동숙정은
(이 밤중에 어디를 갔을까?)
하는 이상한 생각이 문득 들자 더 기다리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때였다.
홀연…,
요란한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났다.
「누구야! 이 밤중에!」
하는 벽력같은 소리와 함께 대나무 숲으로부터 한 그림자가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소스라치듯 놀라며 몸을 재빨리 피한 동숙정은 그것이 등인대사의 목소리임을 알고
「사백님! 후배는 동숙정입니다. 스승님의 분부로 심사매를 데리러 왔습니다.」
하고 말했다.
노승은 달려오는 속도도 빨랐지만 급히 서는 것도 역시 빨랐다.
가사 자락을 펄떡거리며 달려온 등인대사는 동숙정을 노려보며
「동숙정? 림아를 데리러 왔다고?」
하고 연거푸 묻는 등인대사의 얼굴은 달빛 아래에서도
수심이 가득 찬 얼굴임을 알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상당히 피곤한 듯 눈 가장자리가 움푹 패여 있었다.
동숙정은 긴장하며 등인대사를 올려 보았다.
「사백님!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하고 황급히 물었다.
그러나 등인대사는 고개를 흔들며 가늘게 한숨을 쉴 뿐이었다.
그러는 등인대사는 심려하는 빛을 감추지 못하는 듯 했다.
「사백님! 심사매는 어디 있어요?」
동숙정의 물음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마침 잘 왔다. 잠간 기다려라.
내가 좀 가지고 갈 것이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나오는 동안 기다려라.
하림에게 데려다 주마!」
하고는 방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동숙정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이상한 예감이 들어 초조하기만 했다.
얼마 후,
방안의 불을 끄고 선장을 메고 나오는 등인대사의 어깨에는 작은 보따리가 매달려 있었다.
동숙정은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덜커덩 했다.
(이상한 일이다. 보따리와 무기를 들고 나오다니……)
이렇게 생각한 동숙정은 등인대사에게 다가갔다.
「대사백님! 웬 일이십니까? 하림을 데리러 간다면서 무기까지 가지고 나오시니?」
하고 황급하게 물었다.
그러나 등인대사는 쓴 웃음을 웃으며
「괄창산에나 가려고 ……」
하는 그의 태도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동숙정은 또 한번 놀라며
「괄창산은 왜 가시죠?」
하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돌연…,
등인대사는 눈을 부릅뜨며 상공의 밝은 달을 향하여 미친 듯이
「하…… 하……」
하고 웃는 것 이 없다.
그 웃음은 산 속의 뭇 짐승을 놀라게 할 만큼 요란하고 우렁찼다.
갈수록 불길한 예감을 씻어 버릴 수 없는 동숙정은 몸을 움츠리며.
「사백님!」
하고 불렀으나 동숙정의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양몽환을 꼭 찾고 말아야지. 암, 찾고말고.」
하는 등인대사의 표정은 분노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 그것이었다.
순간…,
동숙정은 사태가 중대함을 즉시 깨달을 수 있었다.
「사백님! 심사매를 만나게 해 주세요.」
하고 애원하자 등인대사는 비장한 각오가 이미 결정된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가는
「가자!」
하고 앞장을 서서 걸어갔다.
등인대사의 뒤를 바싹 쫓아 따라가던 동숙정은 등인대사의 마음속의 변화를
그의 표정으로는 알아내기가 어려웠다.
(무슨 일일까? 양몽환, 하림…… 어떻게 된 일일까?)
머리를 갸우뚱 거렸으나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대나무 숲을 돌아 꽃나무가 우거진 꽃밭을 지나면서부터
등인대사의 걸음은 차차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 빠른 속도를 동숙정의 걸음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동숙정은 급히 비행신법을 발휘하여 등인대사를 놓치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했다.
이윽고 등인대사가 걸음을 멈춘 곳은 높은 산봉우리 밑이었다.
그때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 따라 오는 동숙정을 기다려 등인대사는 동숙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앞에 가로 막힌 절벽을 가리키며
「이 절벽을 올라갈 수 있겠니?」
하는 것이었다.
등인대사가 가리키는 절벽은 상당히 가파르고 험했다.
그러나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올라갈 수 있어요.」
등인대사는 두 말 하지 않고 먼저 앞서서 험한 절벽을 오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절벽은 보기보다는 더 험했다 간신히 등인대사의 뒤를 따라 절벽 위까지 올라온
동숙정의 몸은 땀으로 목욕한 듯 철철 흘렀고 숨이 턱에 닿는 듯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등인대사는 피로한 기색도 없이 다시 달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동숙정은 등인대사가 향하여 가는 큰 바위를 겨냥하고 온 몸의 진기를 집중시켜
경신법을 이용하여 등인대사의 바로 뒤를 쫓아갔다.
드디어 산봉우리 위에 올라온 등인대사와 동숙정은 잠시 발을 멈추었다.
부근 일대에 있는 산봉우리 가운데서도 제일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온 동숙정은
도처에 눈이 쌓여 유리처럼 맑게 얼어 있는 얼음을 발견하고는 추위를 느꼈다.
그러던 동숙정은 바로 맞은편의 큰 바위 위에 흰 옷을 입은 소녀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그곳에는 속살이 다 보이는 듯 엷은 옷을 입은 하림이 차가운 바람에 옷깃을 날리며
동쪽을 향하여 경황없이 서 있는 것이었다.
순간…,
동숙정의 눈에는 눈물이 핑…돌았다.
「심사매!」
하고 부른 동숙정은 일약 바위를 향하여 몸을 날렸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하림은 돌아보지 않고 꼼짝없이 서 있는 것이었다.
동숙정은 엎어지듯 달려가 다시
「심사매!」
부르다
「앗!」
하고 소스라쳐 놀라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심사매의 몸은 이미 인간의 몸이 아니었다.
흘러내리던 눈물은 두 볼에서 그대로 얼어 고드름이 되어 있고
그녀의 몸은 이미 빳빳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동숙정은 정신을 차리며 하림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심사매! 동생!」
그러나 그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예전에 부드럽고 따스하던 손은 아니었다.
(이것이 웬 일인가,어찌된 일인가,
심사매가, 그렇게 아름답던 심사매가 얼어붙었다니 ……)
발을 구르고 울부짖었으나 심사매는 망부석처럼 부처가 되어
멀리 동쪽 하늘만 바라본 체 차디찬 얼음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 하림에게 무슨 대답이며 웃음이 있을 수가 없었다.
동숙정은 철근 같이 딱딱하고 차가운 하림의 손을 붙잡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한편 얼음이 된 바위 한 끝에 서서 눈물을 글썽거리고 서 있을 뿐 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동숙정이 흘리던 눈물도 금세 얼어붙고 마는 것이었다.
그제야 이 바위가 얼마나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부는가를 알 수 있었다.
뼈 속까지 얼게 하는 듯 차디찬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동숙정은
자기가 이곳까지 오느라고 너무나 땀을 흘리고 가쁜 숨을 쉬어 미처 추위를 몰랐던 것이었다.
이때 한편에서 하림과 동숙정을 바라보던 등인대사는 길게 탄식하며 동숙정을 불렀다.
「하림은 추운 이 바위 끝에서 이틀 동안을 새웠다.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또 말도 하지 않고 이렇게 서서 차가운 눈바람을 맞고 있다.
나는 림아의 몸에 떨어지는 눈을 털어 주며 지키고 있었어.
나는 두 끼의 밥을 먹고도 추위를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 림아는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저렇게 추위를 이기고 몸을 지탱하고 있구나.」
하는 등인대사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등인대사의 눈물도 금세 얼어붙고 마는 것이었다.
동숙정은 소리 내어 울며 울부짖었다.
「사백님! 어떻게 하면 될까요? 심사매를 구해 주세요. 네?」
하고는 팔을 벌려 하림을 안으려고 했다.
그때,
「안돼!」
벽력같은 등인대사의 음성이 동숙정의 팔을 내려놓게 하고 말았다.
그러자 등인대사는 계속해서 말했다.
「지금 림아의 몸은 얼어붙어서 움직이면 심한 상처를 입어 목숨을 잃게 된다.
더구나 내공기초(內功基礎)가 있는 사람이 외부의 강한 힘의 침습(侵襲)을 받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본능적으로 저항하는 힘이 생겨 침습을 막게 된다.
그러나 지금 림아의 몸에 있는 혈기(穴氣)가 굳어서 추위를 이겨내는 중력 밖에는
아무 진기도 없어 위험하다.」
동숙정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등인대사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러시면 왜 이 토록까지 버려두었습니까?」
등인대사는 고개를 푹 숙이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잠시 후…고개를 드는 그의 눈에는 노여움과 슬픔이 번득였다.
「거의 반달동안 림아는 환 오빠만 미친 듯이 부르며 왜 돌아오지 않느냐고 묻기만 했다.
그때마다 나는 곧 온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거짓말도 하루 이틀이지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까
림아를 속이는 줄 알고 나하고는 말도 안했지.」
여기까지 말한 등인대사는 길게 한숨을 쉬며 말을 계속했다.
「매일 문가에 서서 하늘에 뜬 구름만 쳐다볼 뿐 무슨 말도 한마디 안했어 .」
「그럼 왜 이 높고 추운 이곳까지 오도록 내버려 두었습니까?
반송장이 되도록 말 입니 다.」
힐난 하듯 묻는 동숙정의 얼굴은 노기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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