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장 신비한 영약의 설삼과 <雪參果>
옥소선자가 설삼과(雪參菓)를 양몽환의 입에 대어 주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입을 꼭 다물고 먹지 않으려하자 은근히 꾸짖었다.
「우선 이곳을 떠난 후 신원통을 떼어버릴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
잠시 그대로 있다가 밝은 정신을 차린 뒤에 곧 떠나기로 해요.」
하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애정이 넘쳐흘렀다.
양몽환이 잠시 동안 눈을 감은 채 몸을 가다듬자
얼마 후에는 진기(眞氣)가 창통(暢通)하여졌다.
옥소선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설삼과를 훔쳐
자기 병을 낫게 하여 준 생각을 하니
「애써서 간신히 구해온 설삼과를 먹지 않다니, 도대체……」
그러자 갑자기 밖에서 음수일판 신원통(陰手一判申元通)의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동생! 빨리 설삼과를 먹고 기운 차린 후 이곳을 빠져나가야 되오.
중놈들이 점점 많아지는데 만일 늙은 중놈들이 들이 닥치면 빠져 나가지 못하게 돼요.」
양몽환이 그 말을 듣고 보니 과연 그렇다. 우선 병을 고치고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설삼과는 천지간의 영기(靈氣)가 모여 생기게 된 영약(靈藥)으로
사람이 만든 약과는 판이 하도록 그 약효가 신기하였다.
설삼과가 들어가자 즉시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시원한 기운이 온 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단번에 양몽환은 생기가 도는 것이 병이 나아진 것 같은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양몽환이 설삼과를 받아 삼키자 옥소선자는 기뻐서 그의 손을 잡고 나직이 속삭였다.
「우선 이곳을 떠난 후 신원통을 떼어버릴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
잠시 그대로 있다가 밝은 정신을 차린 뒤에 곧 떠나기로 해요.」
하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애정이 넘쳐흘렀다.
양몽환이 잠시 동안 눈을 감은 채 몸을 가다듬자
얼마 후에는 진기(眞氣)가 창통(暢通)하여졌다.
옥소선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설삼과를 훔쳐 자기 병을 낫게 하여 준 생각을 하니
양몽환은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이때 밖에서 싸우는 소리는 점점 더 맹렬하여 진 듯 소란스러워 졌다.
이때,
양몽환은 몸을 날려 장검을 잡았다.
옥소선자는 그의 날렵한 행동과 조금도 병세가 없는 모습에
마음속으로는 극히 만족한 듯 하였다.
「동생! 이제 병이 완쾌된 것 같군!」
정말 동생인양 다정히 묻는 말에 차마 성을 낼 수도 없는 양몽환은 담담히 웃었다.
「괜찮습니다.
이렇듯 설삼과까지 얻어 나의 병을 구해준 은혜는 후일 기회가 있는 대로 갚겠습니다.」
차가운 한마디를 남기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양몽환의 돌변한 태도에 옥소선자는 적이 가슴이 아팠다.
평일의 그녀 같으면 아마 벌써 독수를 뻗쳤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양몽환이 냉정하면 냉정할수록
그가 보통 남자와 다르다는 어떤 느낌을 더욱 짙게 느낄 뿐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막아섰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몸으로 무예가 뛰어난
대각사의 승려들과 싸우는 것은 위험해요.
내가 앞에 설 터이니 뒤에서 따라와요.」
하며 앞서려고 했다.
양몽환은 냉정하게 바라보며
「필요 없을 것 같군요,
이곳을 떠나서는 각자 제 갈 길을 가기로 합시다.」
쏘아붙이듯 말하자 옥소선자는 야릇한 웃음을 띠며
「내가 호송하지 않으면 이 기련산(祈連山)을 빠져 나가지 못할 텐데.」
양몽환은 화를 내며 크게 소리쳤다.
「올 수 있었으면 갈 수도 있을 거요! 쓸데없는 걱정 마시지요!」
하고는 옆으로 비켜서 밖으로 뛰어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음수일판 신원통은 한 쌍의 규용봉을 힘 있게 휘둘러
바람을 일으키며 길목에 버티고 서서는 여덟 명 승려들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었다.
여덟 명의 승려는 모두 황색 승의(黃色僧衣)를 입었는데 벼랑의 상하 좌우에서
철필(鐵筆)과 동발(銅鉢)을 꺼내 비바람을 몰아오듯 휘두르며 마구 달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원통을 한 걸음도 물러나게 하진 못하고 있었다.
이들의 절박한 싸움으로 길목이 막힌 것을 안 양몽환은
승려들을 섬멸시키지 않는 한, 뚫고 나가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장검을 빼어 들고 가려는 찰나!
옥소선자가 앞질러서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신원통은 옥소선자가 번개같이 뛰어나와 돕자
용기백배한 듯 크게 웃으며 오른 손의 규용봉으로
날아오는 철필을 마구 후려치면서 왼 발을 번쩍 들어
번개같이 한 승려를 걷어찼다.
그러자 승려는 비명을 지르며 벼랑으로 굴러 떨어졌다.
음수일판 신원통(陰手一判?申元通)이 그들 여덟 명과 우열(優劣)을 가릴 사이 없이
막상막하로 싸우고 있었는데 이제 옥소선자까지 느닷없이 뛰어 나와 힘을 합하니
여덟 명의 승려는 삽시간에 기울어 쩔쩔 매었다.
옥소선자가 번개같이 휘두르는 퉁소아래 또다시 두 명이 무참하게 쓰러졌다.
신원통은 양몽환이 멀찍이 서서 그들의 싸우고 있는 모양을 구경하고 있음을 눈치 채자
자기의 재간도 자랑하고 싶은 교만한 생각이 들었다.
순간!
대갈일성하며 한 쌍의 규용봉을 맹렬히 휘둘러 위의 두 승려를 몰아 세위
물러나게 하고는 아래에 있는 한 승려에게 번개같이 달려들어 후려치는 것이었고
규용봉이 한 번 번득이는 곳에는 승려의 동발(銅鉢)이 여지없이 날아가 버린다.
그리고 신원통의 한 번 발길에 승려는 허공으로 붕 떠서는 아래로 떨어져 갔다.
이와 같이 하여 벼랑길을 막고 섰던 중들이 처치되어 길이 트이었다.
이 모양을 지켜보고 섰던 양몽환은 즉각 물실호기(勿失好機)라 생각 하고는
번개같이 몸을 치솟아 벼랑 아래로 내달렸다.
동시에 옥소선자의 눈은 가로 찢어지고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
양몽환의 거동을 은근히 눈여겨보고 있던 터이라
그가 인사말도 없이 훌쩍 달아나자 울화가 치밀었다.
곧 쫓아가려고 하였으나 자기가 쫓으면 신원통이 따라올 것이라
생각하고는 단념했다.
차라리 귀찮게 구는 신원통을 적과 싸우느라고 정신이 헛갈리는
이틈을 타서 처치하자는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는 못 본척하고 기회를 넘보고 있었다.
신원통 역시 양몽환이 달아나는 것을 보았지만
여전히 석연하지 못한 점이 있는지라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다.
이와 같이 두 사람이 제각기 딴 마음을 품고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바람에 네 사람의 승려는 그만큼 덕을 보게 되었다.
이는 신원통이 시간을 끌려고 손쓰는 폼을 은근히 늦춘 탓이요,
또 한편 옥소선자도 신원통의 일거일동을 살피느라고 승려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하지 않았던 탓이다.
이틈에 네 승려는 이들 두 사람을 상대로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옥소선자는 제비처럼 재빨리 협산초해(狹山超海)의 수법으로
위에 있는 한 승려의 철필(鐵筆)을 떨어뜨리고는 한달음에 육박하였다.
다시 몸을 돌려 다른 승려의 동발(銅鉢)을 떨어뜨리게 하자
위의 두 승려는 황망히 여덟 자나 뒤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좌충우돌 하는 바로 그때!
옥소선자는 느닷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온 몸의 진기를 모아 왼 손으로 신원통의 등을 후려쳤다.
그러는 한편 잇따라 오른 손의 퉁소로 신원통의 뇌호혈(腦戶穴)을 노리고 들어갔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옥소선자가 막상 손을 쓸려는 찰나!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한 그림자가 느닷없이 뛰어 들었다.
동시에 신원통에게 일장(一掌)을 가하는 것이었다.
엉겁결에 놀란 신원통은 급히 몸을 빼어서 석자나 물러가 위급을 면했다.
신원통이 불의의 변화로 위기에서 벗어나자
옥소선자는 기수를 돌려 새로 나타난 자의 유문혈(幽門穴)을 노리면서
왼 손의 장력을 급격히 회수해 들이고 말았다.
즉 신원통의 목숨을 노리고 취하여진 수법이 신원통을 구하는 수법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상대방의 무술은 굉장한 듯 하였다.
오른 손으로 휘진청담(揮塵淸談)의 수법으로 옥소선자의 퉁소를 막아냈다.
동시에 왼 손으로 재빨리 신용현조(神龍現造)의 수법으로 옥소선자의
머리를 노리는 데 그 손바닥에서 맹렬한 잠력(潛力)이 무섭게 압박해 왔다.
옥소선자는 즉각 뒤로 물러졌다.
그러자 상대방은 공격하여 오지 않고 멈추어 서서는 신원통을 보고 냉소하더니
「신원통! 자네들의 공동파와 우리는 아무 원한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본사의
제자들을 삼음장(三陰掌)으로 때리고 본사의금지 구역에 침입해 들어 와서는
설삼과를 훔쳐가니 도대체 무엇 때문이오?」
신원통이 그자를 자세히 살펴보니
그자는 하얀 승의를 입고 있는데 몸은 비쩍 마르고 작은 것이 장작개비 같았다.
나이는 육십 여세쯤 되어 보였다 이 자가 바로 대각사(大覺寺) 세 장로(長老)중의
하나인 고불(枯佛) 영공(靈空)대사였다.
깜짝 놀란 그는 속으로
(오늘 저녁은 이거 아무래도 힘들겠군.……)
하고 중얼거리면서 옥소선자에게 넌지시 일렀다.
「저 자는 바로 대각사(大覺寺)의 장로(長老) 고불(枯佛) 영공대사(靈空大師)이오.
싸울 때 조심하시오.」
옥소선자는 가볍게 웃어넘기며
「우리 두 사람이 설마 그에게 지려고요?」
하자 영공(靈空)의 독기(毒氣)가 서린 눈초리로 옥소선자를 뚫어지게 노려보고는
차가운 미소를 풍기었다.
「여시주(女施主)가 바로 삼년 전 본사에 나타나 소란을 피우고 설삼과(雪參菓)를
훔쳐간 옥소선자란 분이 아니오?」
옥소선자는 웃으며 빈정거렸다.
「그래도. 설삼과(雪參菓)의 맛을 잊지 못해서 삼년 후에 또 오게 되었군요.」
영공(靈室)은 깔깔 웃더니 뒤에 서 있는 네 승려에게 물었다.
「너희들 몇이나 왔느냐?」
황색 승의의 네 승려가 허리를 굽히며 기가 죽어 대답했다.
「제자들은 모두 여덟 명이 왔는데 네 사람은 저 두 사람의 술수(術手)에
벼랑 아래로 떨어졌지만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영공은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옥소선자와 신원통을 노려보고 음침하게 웃었다.
「두 분 솜씨가 굉장하군, 하루 저녁에 본사의 제자 여덟 명에게 해를 입혔으니」
하더니 자세를 가다듬지도 않고 비호같이 몸을 날려 두 사람에게 갑작스러이
공격해 오는데 날래기가 번개와 같았다.
신원통은 그 즉시 규용봉을 재빨리 휘둘러 막았다.
그러자 옥소선자도 퉁소를 휘둘러 공격하는데 영공은 맨손이나마
무궁무진(無窮無盡)한 변화로 두 사람의 공격을 막아낼 뿐 아니라
오히려 육박하여 온다.
이에 신원통과 옥소선자는 차츰 밀려났다.
끝내는 벼랑의 끝머리까지 밀리고 말았다.
절대절명(絶對絶命)! 옥소선자는 속으로 여간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이 늙은 중이 한 발자국만 늦게 와서 만약에 자기가 신원통을 해치우게 되었더라면
자기 혼자서는 이십여 합도 싸우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한편 고불 영공(枯佛靈空) 역시 대각사의 특기 주사장(朱絲掌)으로
상대하는 데에도 두 사람을 쓰러뜨리지 못하는 데에 무척 놀라고 있었다.
이 주사장(朱絲掌)은 매우 기묘(奇妙)한 장법(掌法)으로서
음유지력(陰柔之力)을 위주로 적의 권장무기(拳掌武器)에 따라 변하며
적의 힘을 빌려 적의 힘을 해소(解消)시키는 특징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적과 싸우게 되면 일반 권장법(拳掌法)은 새로운 수법으로
가다듬는 병폐가 있지만 이 주사장(朱絲掌)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즉각 기선(機先)을 제압(制壓) 할 수 있는 잇점이 있는 것이었다.
고로 신원통과 옥소선자 역시 비범한 재간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당당히 제압당한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원통과 옥소선자를 일시에 쓰러뜨릴 수는 없었다.
가장자리까지 밀리게 되자 두 사람은 불끈 화가 치밀었다.
옥소선자가 날카롭게 외치며 옥소(玉簫)와 왼 손을 일제히 휘둘러 치고
때리고 하며 삽시간에 십여 번을 공격하였다.
신원통 역시 일갈하면서 한 쌍의 규용봉을 맹렬히 휘둘러 공격하였다.
삽시간에 옥소와 규용봉은 영공을 휩싸듯 하였다.
영공은 더 이상 달려들지 못하고 주춤했다.
세 사람은 다시 일각(一刻)의 시간을 어울려 싸웠지만
여전히 막상막하(莫上莫下)의 국면(局面)을 이루고 있었다.
갑자기 영공이 획 획 두 장을 갈기고는 다섯 자나 뒤로 껑충 물러나서
그들을 노려보며 힘을 집중하는 듯 몸을 도사렸다.
이에 옥소선자가 성이 바싹 났는지 덤벼들려고 하는데 신원통이 고함쳤다.
「빨리 물러나! 노화상(老和尙)이 백독장(百毒掌)으로 해치려고 하는 거야!」
하고는 옥소선자의 손목을 잡아끌고는 벼랑 아래로 다급히 뛰어 달아났다.
영공은 껄껄 웃으며
「신원통! 살아서 돌아갈 것 같은가!」
고함치고는 마치 커다란 새와 같이 몸을 훌쩍 날려 그들의 뒤를 바싹 쫓았다.
세 사람의 경신술(輕身術)은 이미 상승경지(上乘境地)에 도달한 사람들이었다.
몸을 날리는 것이 번개와 같이 삽시간에 백 길이나 되는 벼랑도 훌쩍 뛰어 내렸다.
영공은 악착같이 쫓아왔다.
신원통은 이대로 쫓기느니 자기가 먼저 삼음장(三陰掌)으로 반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즉각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이 중놈아! 쫓아만 오지 말고 나의 삼음장풍(三陰掌風)의 맛이나 보려무나.」
그와 동시에 두 손을 들어번쩍하고 뒤집자
한줄기 차가운 바람이회오리 치면서 영공에게 휘몰아쳐 갔다.
삼음장(三陰掌)을 맞으면 한기(塞氣)가 오장육부(五藏六腑)를 찔러
죽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는 영공이었다.
영공은 비록 심후(深厚)한 공력(功力)이 있으나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각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진공강력(眞功强力)을 불러 일으켜 맞받아쳤다.
두 줄기 장풍이 한데 얽히자 무서운 선풍이 일어났다.
역시 공력(功力)에 있어 한수 모자라는 신원통의 삼음장풍(三陰掌風)이
영공의 강력(强力)에 흩어져 갔다.
그러나 그 때는 벌써 신원통과 옥소선자가 멀리 달아나는 중이었다.
영공이 아무리 쫓는다 해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도망치고 있었다.
화가 난 영공은 화풀이로 일장(一丈)밖에 서 있는 소나무를 향하여
일장(一掌)을 후려쳤다.
장품이 휘몰아쳐 가자 소나무는 뚝! 부러지며
가지와 잎들이 이리저리 휘날리고 주위에 흙과 모래들이 미친 듯 휘몰아 날렸다.
그제야 뒤에 있던 승려가 내려와 밑으로 굴러 떨어진 동료들을 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미 숨이 끊어졌고 두 사람 역시 한 가닥 숨만 붙어 할딱거렸다.
영공은 눈살을 절로 찌푸렸다.
「빨리 절로 데리고 가지 않고 무얼 꾸물거려!」
하고 호령하였다. 네 승려는 영공의 성질이 제일 거칠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
부산히 죽고 다친 동료들을 메고 달아났다.
영공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아 닥치는 대로 치고 박고 법석을 떨더니
잠시 후에야 성이 풀렸는지 길게 신음하듯 소리를 내면서 가버렸다.
영공이 가자 꺾어진 소나무 옆에 서있는 바위 뒤에서 뜻밖에도
온몸에 흙먼지를 덮어 쓴 양몽환이 나타났다.
그는 달아나다가 주백의(朱白衣)와의 약속을 생각하고
그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흙과 먼지를 덮어 쓰게 된 것이다.
영공(靈空)의 그와 같은 장력(掌力)을 보고 숨도 크게 못 쉬고 숨어 있다가
영공(靈空)이 가고나자 기어 나온 것이었다.
양몽환은 천천히 걸어 나와서 한쪽에 흩어져 있는 동발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곳은 바로 그 동굴의 옆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자세히 그 동발의 형태를 감상하면서 최근에 겪은 일들을
되새겨 보는 것이었다.
꿈과 같은 기적과 파란의 세월(世月)이었다.
그는 부친이 양몽환(楊夢?)이라고 이름을 지어준 데에 은연중 수긍(首肯)이 가는 점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일은 꿈이 아니고 현실이었다.
더구나 심하림(沈霞琳) 이요홍(李瑤紅), 주백의(朱白衣)
그리고 옥소선자(玉簫仙子) 등 여인 들은 한결같이 자기에게 호감을 가지고
은혜를 베푸는 등 야릇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처리하여야 될 것인지?
그 자신도 망망할 뿐이었다.
만감(萬感)에 교착(交錯)되어
그는 밤하늘에 총총한 별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바로 그때!
그의 등 뒤에서 가만히 한숨쉬는 소리가 가냘프게 들려왔다.
「무엇을 그토록 생각하고 있죠?
사람이 뒤에 와서 오랫동안 서서있는 것도 모르고?」
양몽환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언제 왔는지 주백의(朱白衣)가 서 있는 것이다.
하도 괴이한 해후에 얼떨떨해 있자 주백의가 웃으며 다가섰다.
「얼굴에 먼지도 씻지 않고!」
하면서 수건을 꺼내 닦아준다.
그러더니 갑자기 손을 멈추고 놀랐다.
「아니? 병들어 있다더니?…… 인제 완쾌 되었나요?」
건강한 양몽환을 보고 소리쳤다.
「설삼과를 한 알 먹었더니 병이 완쾌 됐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이전보다 정신이 더 또렷해지고……
확실히 그 설삼과는 천하의 영약이 군요.」
하고는
「그런데 주소저께서는 도옥(陶玉)을 구했어요?」
황급하게 물었다.
주백의는 웃으며 끄덕였다.
「구했어요. 간신히 찾아서 여러 승려들에게 포위당한 걸 구해주고 오는 길이에요.」
양몽환이 웃으며
「수고했군요. 감사합니다.」
그러나 주백의는 정색을 하며
「누가 감사를 바라고 한 것인가요?
그런데 설삼과는 어디서 구하셨어요?」
양몽환은 주저하지 않고 모든 경과를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주백의가 눈썹을 곤두세우며 다그쳐 물었다.
「옥소선자라고요? 다음에 만나기만 하면 그 여 도적을 없애 버리겠어요!」
양몽환이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아무 원한도 없는데 왜 남을 죽이려고 그러죠?」
주백의의 얼굴이 일순간 붉어지더니 두 눈을 깜빡이며,
「하림 사매를 위해 그러죠! 왜 내 말이 틀렸어요?」
양몽환은 고개를 끄덕이고 웃었다.
「옳습니다. 옳아요.」
하고 연거푸 옳다는 말에 주백의는 더 부끄러웠다.
그러자 곧이어 갑자기 그녀는 얼굴을 굳히며 양몽환을 노려보았다.
아름다운 가운데에도 사람을 위압하는 서릿발 같은 품위가 있는 주백의였다.
그와 같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태도에 양몽환은 도리어 당황했다.
고개를 숙이고는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 불쾌한가요?」
어찌 할 바를 모르며 눈치를 살펴보는 양몽환의 얼굴에
주백의가 이번에는 오히려 미안한 듯 쑥스런 웃음을 띠었다.
「제가 그렇게도 무섭던가요? 왜 당황하세요?」
양몽환이 안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당신의 태도에는 사람이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있어요.」
주백의는 웃으며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정말이에요?」
양몽환은 웃으며
「절남(浙南)땅 영계현(寧溪縣)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다른 사람에게서 볼 수 없는 위엄을 느꼈지요.」
주백의는 고개를 흔들며 아니라고 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그곳이 아니에요.」
양몽환이 잠깐 생각하더니 아차 했다.
「아! 그렇군요. 괄창산(括蒼山) 유곡(幽谷)에서 만났죠!」
주백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억력이 좋으시군.」
그러자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괄창산에서 나의 삼사숙(三師叔)이 묵인 철갑사피(墨鱗鐵甲蛇皮) 한 장을 얻었는데
그 사피(蛇皮)를 당신이 가져간 것이 아니요?」
주백의는 웃으며 끄덕였다.
「묵인 철갑사는 진귀(珍貴)한 구렁이로서 현옥(玄玉)이가 애써 몇 년 동안 찾다가
괄창산에서 발견하여 그 구렁이를 죽이고 나에게 달려 왔기에 쫓아갔더니……」
훗 훗! 하고 웃으며 어물거렸다.
「그래 앉아서 얻은 셈이군요.」
그제야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우리 삼사숙 말씀이 그 뱀 가죽은 창과 칼을 막을 수 있는 것으로
무예계에서는 대단히 진귀하게 여긴다더군요.
삼사숙께서 그것을 잃고는 한동안 몹시 섭섭해 하셨죠.」
주백의는 듬뿍 웃음을 머금고
「물론 진귀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게 신기한 물건은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도 가죽을 벗기는 수고는 당신들이 하고
나는 가만히 앉아 얻게 되어서 미안하게 생각하던 참이에요.
이 다음에 그 대신으로 선물을 하나 할게요.」
양몽환이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그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하자 주백의의 얼굴이 다시 흐려지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는 아무 말도 없었다.
양몽환은 자기가 또 섭섭한 말을 했구나 싶어 재빨리 말머리를 돌렸다.
양몽환이 웃는 얼굴로
「주소저! 하림 사매에게 가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자 주백의는 그저 담담히 웃고는 먼저 앞장을 섰다.
그리고는 날렵한 경신술로 달렸다.
양몽환은 자기의 경신술이 주백의보다 못함을 알고 있는지라 즉각 전력으로 달렸다.
다행히도 설삼과를 먹고 난 후라 이전보다 더 건강하여 졌음에 마음 놓고 달릴 수 있었다.
주백의도 아무렇지 않은 듯 청의를 펄럭이며 그와 발맞추어 달렸다.
한동안 달리자 날은 점차 밝아오고 동 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때 갑자기 주백의가 걸음을 멈추고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잠시 넋을 잃은 듯 서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어느 덧 이슬이 맺혀 있는 것이다.
아침 햇빛에 진주처럼 반짝였다.
입가에는 쓸쓸한 웃음이 맴도는 것이 흡사 한 송이의 수줍은 매화꽃 같은 웃음이었다.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아름다우면서도 고독해 보였다.
양몽환 역시 감개가 없지 않았다.
「주소저! 무엇을 생각하시죠?」
주백의는 고개를 돌리고 쓸쓸히 웃었다.
「봐요, 해가 막 솟아오르려고 하는데 우리는 와야 할 곳에 다 온 것이에요.」
무슨 뜻인지를 몰라 양몽환이 어리둥절 하는데 주백의의 눈동자에서는
두 줄기의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가요, 사매(師妹)가 무척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하고는 먼저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 뒤를 바짝 따라 가면서 주위를 살피는 양몽환의 눈에는 퍽 눈에 익은 풍경이었다.
산봉우리에 올라서자
그는 그곳이 바로 하림 사매와 만났던 유곡(幽谷)인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계곡은 옛날과 변함없었다.
꽃들은 여전히 오색찬란하게 피어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또한 계곡의 물도 졸졸 흐르고 있었다.
그들이 굴 앞에 당도하자 현옥이 굴 입구에서 있다가
이제 자기 임무를 끝마쳤다는 듯이 길게 울며 하늘높이 날아갔다.
양몽환은 발걸음을 빨리하여 들어갔다.
굴속에는 하림이 머리를 흩트린 채 초라한 모습으로 벽에 힘없이
기대어 앉아 있다가 양몽환을 보자 그녀는 처량히 웃으며 말했다.
「오빠! 오빠의 친구 분이 오실 줄 알고 꼼짝 않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양몽환은 너무도 반가워 주백의가 뒤에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달려가서는 하림의 손을 덥석 잡았다.
「상처는 다 나았어?」
그러자 하림은 고개를 힘없이 가로저었다.
「그 승려의 일장(一掌)을 받고 쓰러진 뒤에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도옥이가 나를 구한 것 같았는데 정신이 들고 보니
도옥은 보이지 않고 오빠 친구가 옆에 있지 않아요?
피를 많이 토했어요.
마침 오빠 친구가 약을 주지 않았더라면 다시는 못 볼 뻔 하였어요.」
하고는 무한히 고마운 눈빛으로 주백의를 바라보았다.
양몽환은 가슴이 아팠다.
「지금은 좀 나은 것 같아?」
주백의가 먼저
「상처가 대단합니다. 비록 나의 팔보속명단(八寶續命丹)을 먹었다지만
하루 이틀에 회복할 상처가 아니에요.
다행하게도 뼈는 상하지 않았지만 그토록 큰 상처는 무예를 단련한 몸으로는
입지 않을 것으로 생각 되는데 아마도 맞을 때에 전혀 저항하는 힘을 써 보지도 못한 것 같아요.」
양몽환은 주백의가 무학(武學)에 능하고 의학(醫學)에 깊은 조예를 갖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지라 더욱 초조하여 물었다.
「그렇다면 나의 사매가 지금 위험한 상태에 놓인 것이 아니잖습니까?」
그러자 주백의는 하림의 병세를 걱정하는 양몽환의 표정이 자기에게
치료를 부탁하는 듯 하여 주백의는 얼굴이 불그레하니 상기 되었다.
그러고는 한 동안 대답을 못하였다.
「그렇지는 않지만…… 오랫동안의 치료가 필요할 것 같아요,」
하림은 매우 이상한 듯 주백의의 얼굴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남자도 아니면서 왜 남자 복장을 하고 있죠?」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더욱 난처하여진 주백의는 재빨리 남장을 벗었다.
그러자 노란 바탕의 여장이 드러났다.
그런 후에 하림의 옆에 앉는 것 이었다.
「바른대로 말해주지 않아서 나를 미워하고 있을 거야?」
하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미워하긴요.」
하고는 가득히 의심을 담은 눈초리로 양몽환을 바라보았다.
「오빠는 알고 있으면서 왜 저에게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았죠?」
양몽환은 적당히 대답하여 그녀의 의심을 풀어 주려고 하였으나
순진한 하림에게 차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주백의는 가볍게 탄식하며 대신 말했다.
「오빠를 탓하지 말아요. 안다고 하여도 사매에게 말하기는 거북했을 거야.」
하림은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였다.
「언니 말뜻을 알겠어요.
언니가 말하지 말라고 하였으면 말할 수 없었겠죠.」
하고 웃는 것이 의심이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주백의의 앞가슴에 정묘(精妙)하게 수 놓여진 백봉(白鳳)을 눈 여겨 보았다.
「언니! 이 새가 굉장히 아름답네요.
제 병이 낫거든 어떻게 수놓은 건지 가르쳐 주세요. 네?」
주백의는 가볍게 하림을 품에 안으면서 대답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가르쳐 주지.」
하림은 기쁜 듯 주백의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언니 또 남자 옷을 입을 거예요?」
하고 새삼스럽게 묻자 주백의는 웃으면서 끄덕였다.
「남자 옷을 입고 강호에 활약하는 것이 편리해.
그 이유는 이 다음에 이야기해 주겠어.
이제 이야기 그만 하고 푹 쉬어요.
정오쯤 되어서 나의 내공력(內功力)으로 병을 치료할 터이니.」
하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르르 눈을 감고 주백의의 품에서 잠이 들어 버렸다.
양몽환은 두 미모의 처녀가 서로 껴안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는
그 황홀함에 얼이 빠졌는지 넋을 잃고 보고만 있었다.
주백의가 여장으로 되돌아가자 고상한 위엄이 더 한층 품겼다.
정다운 기분도 한결 더 따뜻이 감돌았다.
그녀는 하림을 안고 마치 어머니라도 된 듯이 때때로 자애로운 웃음을 띠웠다.
하림이 깊이 잠들자 주백의는 양몽환을 보고 웃었다.
「내가 간 후에 무서워 잠을 못자고 우리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느라 지쳐 있었는가 봐요.
도리어 내상(內傷)에 해로운데 ……
처음에는 한 병의 영단(靈丹)으로 그녀의 상처를 낫게 하려고 하였는데 이제 틀렸어요.
그리고 어찌된 것인지 나도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어요.
나의 본신공력(本身功力)으로 그녀를 치료한다면 비단 내상을 치료할 뿐 아니라
그녀의 내공의 진보에도 큰 도움이 될 거에요.
그러나 그렇게 치료하자면 사흘 밤낮을 요하게 되는데 수고스럽지만
그동안 문밖에서 지켜주셔야 갰어요.
그녀가 깨어나면 곧 치료를 하겠어요.……」
양몽환은 그 말에 크게 감동했다.
「그렇게 대해 주시니 정말로 고맙군요.
하지만 내공력으로 사흘 밤낮을 치료 한다면 당신의 진기도
크게 소모될 뿐더러 만일 대각사 승려들이라도 쫓아온다면 나 혼자 막지 못할……」
주백의는 웃으며
「그건 관계없어요. 백학(白鶴) 현옥으로 하여금 도와 드리게 할 터이니까.
그래도 위급할 때에는 휘파람으로 알리세요. 제가 곧 나가 도우겠어요.」
양몽환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 말도 않고 주백의만 쳐다보았다.
너무나 뚫어지게 바라보는 바람에 주백의의 볼이 수줍은 듯 불그레해졌다.
그녀는 일부러 화가 난 듯 눈을 곱게 흘기었다.
「보기에는 얌전한 사람이 갑자기 이상해졌군요.
뭘 그토록 보시죠? 제 얼굴에 꽃이라도 피었어요?」
양몽환도 성인(聖人)이 아닌 바에야 선녀같이 아름답고 고귀한
아가씨를 앞에 두고 어찌 얼이 빠지지 않으랴?
더구나 그녀가 일부러 수줍음을 감추고 화가 난 듯
꾸짖는 모습은 한결 더 아름답게 보였다.
「그렇게 여자 옷으로 단장하고 보니
고귀한 품위가 더욱 넘치는군요.
한결 더 다정스러워 보이고요.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고 ……
예 어른들의 말에 미색(美色)은 주린 배도 불리게 한다는
말씀이 결코 거짓이 아니군요.」
말해 놓고 보니 너무나 방자한 언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는 감히 쳐다보지를 못했다.
한참 동안을 꾸중을 들을 것만 같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주백의는 아무 말도 없었다.
(큰일 났구나! 이젠 정말 화가 났는지도 모르겠는데 ……)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는 정을 가득히 품고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는가?
부지중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상기된 얼굴을 옆으로 살그머니 비키는 것이었다.
고요한 동굴 속이었다.
그러나 양몽환과 주백의 두 사람의 가슴 속은 야릇한 심정으로 마냥 출렁거리기만 했다.
한 동안 그렇게 서로 침묵을 지키고 서 있던 양몽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밖은 따뜻한 햇살에 오색영롱한 풀들이 미풍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양몽환은 풀밭을 지나며 최대의 시련(試鍊)이 그의 앞을 가로 막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조금만 잘못하면 깊이를 알 수 없는 애정의 파도에 휩싸이고 말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고 잡념을 떨쳐 버리려고
냇가에 앉아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그러는 양몽환은 차츰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사람을 취하게 하는 향긋한 향기가 풍겨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언제 왔는지 주백의가 그의 왼 쪽에 앉아있지 않는가?
그가 바라보자 그녀는 생긋이 웃으며 바라보는 것이었다.
「혼자 넷 가에 앉아 무엇을 또 생각하고 계세요?」
양몽환은 어물거리며
「저의 사부님은 설삼과를 구해서 돌아가셨을까?
그리고 셋째 사숙께서는 아직도 요주(饒州)의 여인숙에 그대로 계시는지,
또 상처가 완쾌 되셨는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백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혜진자의 상처는 염려할 것 없어요.
현옥으로 하여금 금선사독을 흡수(吸收)하게 하였으니까.
또 제가 그녀의 기경팔맥(奇經八脈)을 전부 유통시켰으니
그녀의 그와 같은 심후한 내공력으로 열두시 경이면 완전히 회복할 수 있었을 거예요.
하림의 상처를 치료한 뒤에는 현옥으로 요주에 보내 드릴까요,
그렇지 않으면 곤륜산(崑崙山)으로 보내드릴까요?」
양몽환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그러면 주소저께서는 어디로 가시겠소?
우리와 같이 곤륜산으로 가서 며칠 쉬다 가면 어때요.
사부님과 사숙님들이 틀림없이 환영할 거예요.」
주백의는 쓸쓸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림의 상처가 나으면 저는 그대로 저 갈 길을 가야겠죠,
하림은 그토록 순결하고 천진하고 또 당신에게 온 정성을 다 바치고 있으니……
만일 버림을 받는다면 그녀는 살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당신의 사부님과 사숙님들이 저를 환영할 까닭이 없어요.
그들과 사귀려고 혜진자(慧眞子)의 상처를 치료한 것은 아니니까……」
양몽환은 탄식하며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모두가 나를 위한 것인 것을……」
주백의는 잡히는 대로 꽃을 한 송이 꺾어서는 개울에 던졌다.
그러고는 일어나 천천히 동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한 그녀의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주백의가 여전히 여장으로 어깨에 내려뜨린 곁은 머리는 바람에 살랑거렸다.
그녀의 아름다운 뒷모습은 고독에 짓눌린 듯이 한없이 무거워 보였다.
발걸음도 무거웠다.
양몽환은 그 순간 참기 어려운 괴로움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지금 참혹하리만큼 냉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는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사흘이라는 시일이 흘렀다.
양몽환은 그동안 밖에서 몇 번이나 동굴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는지 몰랐다.
그러나 주백의의 애수에 젖은 듯한 눈과 쓸쓸한 미소가 마음에 걸렀다.
또한 하림의 천진한 웃음을 대하기가 괴로웠던 것이다.
주백의와 양몽환은 서로 최대한의 노력으로 자기들의 감정을 죽여야 했다.
천진난만하고 순결한 하림을 비통한 절망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
나흘 째 되는 정오였다.
양몽환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안으로 들어갔다.
주백의와 하림은 붙어 앉아 서로의 손바닥을 밀착시키고 있었다.
아마도 주백의가 하림을 위해서 최후의 치료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양몽환은 다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절벽을 타고 봉우리 위로 올라가서 어느 바위 위에 앉았다.
그 바위는 바로 주백의가 남장을 벗고 본색을 드러내던 곳이었다.
그는 두 손으로 턱을 고이고는 하늘에 떠도는 구름을 막연히 마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돌연 그의 귀에 부드러우면서도 애상에 젖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하림의 상처가 이제 완치되었으니 저도 가야겠어요.」
양몽환이 고개를 돌리니 초췌해진 얼굴로 주백의가 그의 옆에 서있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주백의의 안색을 보고 놀랐다.
「아니? 얼굴색이? ‥‥ 어디 아파요?」
그러자 주백의는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양몽환은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당신이 본신의 진기로서 하림 사매의 상처를 치료하였으니
당신의 공력과 체력 을 많이 소모했겠군요.」
하자 주백의는 쓸쓸히 웃었다.
「공력이 좀 소모되긴 하였으나 며칠 휴양하면 회복할 수 있어요.
그러나 내 마음 속의 상처는 영원히 고쳐지지 않을 거에요.
너무나 냉정하더군요. 사흘 밤 동안 한 번도 들어와 보지도 않다니……」
하는 주백의의 두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사실 방해가 될까 염려해서 소리 없이 들어 다 나온 것을 주백의는 모르고 있었다.
「혹시 방해가 될까 해서……」
주백의는 쓸쓸히 웃으며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하림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오빠도 계셨군요.」
하고 주백의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무서워 혼날 뻔 했어요.」
하고는 나는 듯이 달려와 주백의의 가슴에 머리를 묻는 것이었다.
그러자 거의 울음을 터뜨리려던 주백의는 억지로 참는 듯 상냥하게 웃었다.
「기분이 어때? 좀 나은 것 같아?」
하림이 티 없이 웃으며 끄덕였다.
「예 완전히 나았어요.
언니가 그토록 애써서 구해 주었는데 언니가 가고 나면
나는 언니 생각에 어떻게 지낼까 걱정이 돼요.」
울먹거리는 하림을 주백의는 가볍게 안았다.
「언니가 가더라도 오빠가 있는데 뭐 마찬가지 아냐?」
주백의도 울먹거리며 양몽환을 훔쳐보았다.
하림은 눈에 가득히 눈물이 고인채로 한동안 주백의를 바라보더니,
「언니!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 주시겠어요?」
그녀의 눈동자에 무한한 정이 넘치는 것을 본 주백의는
「뭐 현옥을 타고 싶다는 청?」
그러자 고개를 흔드는 하림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주백의는 급히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울지 말아요. 언니는 사매의 청을 무엇이든지 들어 주했어.」
그제야 하림은 눈물을 닦으며
「가지 말아요. 언니가 떠나면 오빠도 섭섭해 하고 저도……」
하고 양몽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빠! 언니보고 가지 말라고 말씀하세요?」
양몽환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녀는 다시 얼굴에 기대를 걸고는 주백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주백의는 괴로웠다.
하림이 그녀에게 정을 두면 둘수록 그녀는 떠나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양몽환에 대한 그 자신의 애정을 억제하지 못할 것 같았다.
같이 있게 되면 결과는 비참해 질 것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주백의는 여러 가지 생각이 일시에 몰려와 어떻게 처신해야 옳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었다.
「울지 말아요. 가지 않겠어.」
그제야 하림은 고개를 들고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활짝 웃으며 주백의의 손을 잡아 이끄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목욕을 못했어요. 저기 가서 목욕이나 같이 해요.」
주백의는 주위를 조심히 살펴보았다.
그녀 역시 하림의 치료에 며칠간 목욕을 못했던 차라 하림과 함께 목욕을 하고도 싶었다.
주백의는 양몽환을 돌아보며
「여기서 망이나 보세요. 우리가 목욕을 마칠 동안만.」
여태껏 양몽환은 옆에서 입을 열수가 없었다.
그는 주백의를 떠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렇다고 떠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감정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괴로운 심정으로 그녀의 이야기만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주백의가 하림의 청을 응낙한다고 하자
속으로는 가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마의 주름살이 저절로 펴짐은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던 양몽환은
「응 응, 여기서 있을 테니 목욕 끝나고 불러줘요.」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주백의는 하림을 이끌고 냇가로 내려갔다.
아래로 내려가는 두 소저의 모습을 바라보는 양몽환의 마음속은 착잡했다.
얼마 후, 갑자기 산봉우리 위에 회색(灰色)도사 차림의 도인이 나타났다.
그의 경신술은 놀라운 바가 있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깊은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발견하지 못하였던 것이었다.
양몽환은 재빨리 걸어 나가 그 도사의 앞을 막았다.
「어디서 오신 분인데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그 도사는 나이 약 오십이 되었고 유난히 눈이 빛났다.
그리고 장검을 등에 메고 두 눈의 정기가 강한 것으로 보아
내공에 대단한 조예를 가진 도사로 보였다.
양몽환이 막아서자
그 도사도 즉시 발걸음을 멈추며 엄숙한 표정으로 꾸짖었다.
「이 넓은 지역에 사람이 다니지 못할 이유라도 있소?」
양몽환은 자기가 곧 이치에 닿지 않는 물음으로 상대방에게 대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한동안 대답할 바를 몰랐다.
잠시 후 정중한 말씨로 웃으며 변명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
사실은 지금 계곡 아래서 목욕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도사께서
길을 돌아가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쉬었다 가시라고 드린다는 말씀이 그렇게 되었군요.」
그제야 도사도 빙긋이 웃고는 몸을 돌이킬 듯하다가 다시 양몽환을 유심히 보았다.
「젊은이는 산에 사는 사람 같지 않은데 어찌 이 황망한 산 속에 계시오?」
양몽환은 속으로
(이상한 일이군, 내 얼굴에 산 속에 살지 않는다는 글이라도 써있 다는 말인가.)
생각하는데 곧 이어 어디선가
「너…… 양몽환이 아니냐?」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양몽환이 놀래어 그쪽을 바라보자
셋째 사숙인 혜진자가 올라오고 있지 않는가!
양몽환은 놀래 달려 내려가자 혜진자도 쏜살 같이 달려오더니 그 도사를 보고
「이 애가 바로 제가 말한바 있는 대사형의 문하 제자예요.」
하자 도사는 유심히 양몽환을 아래위로 자세히 살펴보는 것 이었다.
그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정말 상선지재(上選之材)요 대사형의 눈은 역시 우리 보다는 높다란 말이야.」
혜진자는 가볍게 웃으며 양몽환에게 재촉했다.
「빨리 장문인(掌門人)에게 알현하여 벌을 받도록 하지 않고 왜 섰느냐?」
양몽환은 속으로 멈칫하였다.
알현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벌이라니?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면서도 땅에 엎드려 큰 절을 올렸다.
그 도사는 절을 받고서 양몽환에게 일어나라 이르고는 가볍게 탄식하였다.
「대사형이 사사로이 추혼십이검(追魂十二劍)을 가르친 것은
비록 우리들이 정한 계율을 어긴 거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야 탓할 수 없는 노릇 아니오.」
혜진자가 양몽환에게 벌을 받으라고 한 것은
그녀의 둘째 사형이 그와 같은 말을 하게 하려는데 있었다.
그러므로 일양자(一陽予)에게 추혼십이검을 사사로이 전수한 책임을
추궁치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곤륜파의 장문인 옥영자(玉靈子)역시 그녀로부터 그러한 사실을 들었기 때문에
그녀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 사실을 맨 처음 요주에서 전해 들었을 때는 매우 화가 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양몽환을 대하고 보니 그 인재에 매혹되어 추궁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옥영자(玉靈子)가 혜진자를 요주(饒州)에서 만나게 된 것은 양몽환이
길에 남긴 곤륜파(崑崙派) 특유(特有)의 부호(符號)를 보고 혜진자를 찾게 된 것이었다.
또 혜진자로부터 괄창산(括蒼山 )에서의 경과(經過)와 양몽환과 하림의 실종(失踪) 사실을
듣고는 즉각 동숙정(童淑貞)에게 곤륜산으로 돌아가라
이르고는 이 기련산(祈連山)으로 일양자(…陽子)를 찾아 왔다가 일양자를 만나기 전에
양몽환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한편 혜진자는 일양자가 사사로이 추혼십이검(追魂十二劍)을 양몽환에게
전수(傳授)한 사실에 대해 아는 척 하지는 않았지만 화가 난 옥영자의 얼굴을 보고는
어떻게 하든지 그 일을 무사하게 해결(解決)토록 노력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차마 정면으로 추궁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은 못하고 은근하게
눈치껏 그녀의 뜻을 전한바 있으나 옥영자로부터 대답이 없었다.
때문에 조그만 일에도 트집을 잡으면서 옥영자를 못살게도 굴어 보았으나
양몽환을 만날 패까지 기어코 확답(確答)을 듣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양몽환 앞에서 추궁하지 않겠다는 뜻을 확실히 나타내자
혜진자는 줄곧 그를 괴롭혔던 생각을 하고는 한편 미안하고 죄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양몽환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는 나타난 도사가 바로 장문(掌門)인 사숙임을 알고는
즉시 공손히 서서 하림을 찾게 된 경과를 또렷한 말로 간략하게 말씀을 드렸다.
말을 듣고 난 혜진자는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여기 있다니 큰 수고는 덜은 셈이군.
그렇지 않으면 너의 사부님을 만나 보고 또 너희들을 찾아야 했을 것을‥‥
양몽환이 성급히 되물었다.
「아니, 사부님께서 아직도 돌아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혜진자가
「나와 너의 사숙께서 여기 온 것은 너의 사부님이 돌아오지 않아서이지만…….」
하고 다시
「나의 병독(病毒)을 치료해 준 사람이 여기 있다고 하였는데
고마운 인사 말씀이라도 드려야겠구나. 지금 어디 있지?」
하자 양몽환이 어리둥절하였다가 웃으며
「지금 사매와 목욕하고 있습니다.」
혜진자는 어이가 없는 듯 놀랬다.
「뭐라고? 하림과 목욕을 하다니?」
혜진자가 오해를 하고 있음을 알고 양몽환은 급히 말했다.
「그 역시 여자입니다. 깜박 잊고 말씀을 드리지 못했군요.」
순간, 치료 때 남자에게 전신을 어루만지게 했다는 사실에 비록 부득이 한 일이었지만
속으로 편치 못했던 혜진자는 그 말을 듣고는 안심한 듯 웃기까지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뇌리(腦裡)에는 무서운 상념(想念)이 떠올랐다.
즉시 싸늘하여진 그녀의 두 눈동자는 양몽환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두 눈동자는 마치 예리한 칼날이 되어 양몽환의 마음을 뚫을 것 같았다.
불안하여진 양몽환은 그만 고개를 수그렸다.
혜진자는 몇 번 무슨 말을 물어 볼 것 같이 하다가 탄식하고는
옥영자에게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사형, 대각사로 찾아가 대사형의 소식을 알아보는 것이 어떻겠어요?」
옥영자는 은근히 걱정하는 듯이 말했다.
「가긴 가야지만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할런지 모르겠군.
만일 암암리에 탐지(探知)하는 방법을 취하면
우리 곤륜파의 위신에 크게 영향이 있게 될 것이오.
그렇다고 정식으로 방문하는 절차를 취한다면
그들이 미리 준비하여 소식을 얻지 못 할까 두렵소.」
혜진자는 옥영자가 일파의 장문인 신분으로 몰래 탐지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사형께서 몰래 탐지하는 것이 부당하다면 정식으로 방문(訪間)하죠.」
하고는 고개를 수그리는 그녀였다.
옥영자는 혜진자의 태도에서 일양자에 대하여 대단히 염려하고 있다는 것과
자기가 몰래 탐지 하려고 하지 않은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여하튼 정식으로 탐지하거나 몰래 가거나 대각사의 승려만 만나면
대사형의 소식을 어떠한 방법으로도 알 수 있게 될 것이요.」
하고 말했다.
곤륜파 삼자(三子)의 미묘한 관계는 결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아주 잊어버려 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할 때마다 착잡한 심정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두 사형제의 정의(情誼)를 위해서
자기의 감정을 죽여야 했던 혜진자가 더 괴로웠다.
수 십 년 동안 얼마나 울면서 오늘에 이르렀는지 알 수 없으며
두 사형을 입술을 꼭 깨물고 똑같이 대해 왔던 것이다.
일양자가 두 사람을 위하여 소리 없이 떠나자
옥영자는 할 수 없이 장문인 지위를 계승하게된 것이었다.
그 이후 곤륜산의 금정봉(金頂峯)에 있는 삼청궁(三淸官)에서
십 삼년 동안을 두 사형제의 우의에 변함이 없도록 혜진자는 노력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구원(丘元)의 금사뱀에 물림으로서 일양자가
그녀와 십년을 같이 있다가 죽겠다는 명확한 애정의 표시에
혜진자는 삼십 년간이나 억제해온 감정이 밑뿌리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며
불현 듯 일양자에 대한 많은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옥영자의 한탄소리에 혜진자는 퍼뜩 자기의 태도가
너무나 노골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신을 나무랬다.
겸연쩍은 웃음을 띠고 혜진자는 입을 열었다.
「정식으로 방문하기로 하겠으면 바로 지금 가시는 것이 좋겠군요.」
그러자 옥영자는 싱긋이 웃으며 하늘을 한번 처다 보고는
혜진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이 미시(未時)경이니 조금 있다가 가기로 하죠.」
혜진자가 무어라고 대답하기 전에 양몽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주백의가 대각사의 위치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제자가 물어보기로 하죠.」
하고 세 사람이 말을 주고받은 지
얼마 안 되어 하림과 주백의가 목욕을 끝내고 위로 올라 왔다.
혜진자는 여장을 한 주백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하림 보다는 몇 배나 더 아름답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주백의는 혜진자의 시선을 느꼈는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혜진자를 쳐다보았다.
혜진자도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마을이 선뜻해 짐은 어쩔 수 없었다.
주백의의 아름다우면서도 사람이 함부로 범하지 못할 위엄에
더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혜진자는 여영웅(女英雄)께서 또 사독(蛇毒)을 치료하여준데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혜진자가 합장배례하며 치하하자
주백의 역시 몸을 숙이며 사양했다.
「대단치 못한 수고에 너무 과분한 말씀이옵니다.」
주백의의 태도는 비록 태연한 면이 있으나
그렇다고 상대방에게 거만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한편 오랜만에 셋째 사숙 혜진자를 만나게 된 하림은 기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사부님의 상처는 다 나았어요?
언니의 재간은 정말로 놀라워요.
사부님도 구하시고 오빠와 저도 구해주었어요.
그리고 오빠의 친구 도옥이라는 사람도 구했어요.」
지나간 이야기에 여념이 없었다.
혜진자는 이해하지 못할 점이 있었지만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하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혜진자에게 있어서는 하림이 지난 날 과거의 화신(化身) 같은 생각이 드는 한편
양몽환은 지난날 일양자로 착각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은 삼십년 동안 사랑의 결실을 보지 못하였지만
대신 하림이 맺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았던 하림보다 더 아름다운 절세의 미녀 주백의가 나타나
나무로써 한 줄기의 불안이 감도는 것이었다.
더욱 주백의는 신비한 경지에까지 도달한 무예의 절인인 반면 순진하기만 한 하림이
상대를 어떻게 이겨낼 수 있으랴 싶은 걱정에 앞날이 염려스러워 지는 것이었다.
혜진자는 시름없는 생각에 젖어 어느덧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다는 것마저 잊고는
넋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한 사부의 태도에 하림은 눈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때였다.
「에잇!」
하는 주백의의 소리와 함께 손이 번쩍하며 두 개의 콩알만 한 은빛 덩어리가
번개같이 넉 장(四丈) 밖에 서있는 거송(巨松)의 무성한 잎을 뚫고 들어갔다.
그러자 두 명의 황의 승려가 쿵하며 떨어졌다.
순간, 옥영자의 얼굴이 붉어지면서 가볍게 감탄했다.
이때 펄쩍 정신이 든 혜진자는 하림이 아직 장문 사백(師伯)에게
인사를 올리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참! 빨리 장문 사백에게 인사드려라.」
하림이 두어 걸음 다가가 공손하게 큰 절을 올리자
옥영자는 의젓하게 큰 절을 받는다.
이어 혜진자는 주백의와 옥영자를 인사시키는데 소개말을 해놓고는
이름을 몰라 머뭇거리자 주백의가
「후배는 주약란(朱若蘭)입니다.」
하고는 약간 고개를 숙여 보이고 담담히 웃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 몸가짐에서도 고귀한 기품이 풍겼다.
그러자 하림은 의혹에 찬 눈으로 주약란을 바라보았다.
「아니? 언니가 목욕할 때에 나보고는 소대(小黛)라고 하고는
이제 또 약란(若蘭)이라고 해요?
설마 나를 속인 것은 아니겠죠?」
주약란은 소리 없이 웃었다.
「아냐, 소대(小黛)는 아기 때 나의 이름이니
나를 역시 대(黛) 라고 불러 줘 .」
하림은 그제야 의혹을 풀었다.
「이름이 두개 있는 이상 아무 것이나 부르겠어요.
난이 언니, 또는 대 언니, 다 같은 언니의 이름인데 어때요.」
아주 천진난만하게 하는 말에 주약란도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주백의의 웃음은 마치 백화가 만발한양 적이 매혹적이었다.
양몽환은 자기도 알 수 없는 웃음을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쓰러져 있는 두 승려를 끌고 왔다.
이 두 승려는 모두 주약란의 미립타혈신공(米粒打穴神功)으로서
무니주(牟尼珠)로 그들의 혈도(穴道)를 적중시켰던 것 이었다.
옥영자가 보니 은빛 찬란한 무니주가 두 승려의 요혈(要穴)에 박혔는데
살에 못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옥영자도 겨우 이십세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주약란의 놀라운 신공(神功)에 내심 탄복했다.
「여영웅(女英雄)은 정말 놀라운 재간을 지녔습니다.
무예계에서 보기 드문 것으로 빈도(貧道)도 오늘에야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주약란은 웃으며 겸손해 했다.
「곤륜삼자의 고명은 강호(江湖)에서도 널리 떨치시는 바이온데
미숙한 저의 솜씨에 웃지나 마십시오.」
「미립타혈 신공은 이미 무예계에서 실전(失傳)된 것으로서
아직 빈도가 이 재간에 능통하신 분을 보지 못한 바인데
스승 되시는 분은 틀림없이 일대 기인(奇人)이시 갰습니다.」
「저의 스승은 이미 은퇴하신 분으로 알려 드릴 수 없는 고충이 있으니 용서 하십시오.」
정중한 거절에 옥영자는 말머리를 돌렸다.
「이 두 승려는 대각사의 승려인 것 같은데 빈도가 물어 볼 말이 있으니
수고스럽지만 혈도를 풀어 주십시오.」
주약란은 방긋 웃으며 두 승려에게 다가가 손가락을 두어 번 흔들었다.
그러자 살속 깊숙이 꽂혔던 무니주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주약란이 순전히 내공력을 손가락에 투입하고 승려의 몸에 손가락도 대지 않고
빼어내는 데는 절로 감탄이 나왔다.
얼마 후 두 승려는 무늬주가 빠지는 동시에 주약란에 의해 혈도가 뚫려
한번 몸을 움직이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옆 사람도 몰라보고 얼빠져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옥영자가 한걸음 나섰다.
「두 분은 대각사의 승려 분들 이시요?」
두 승려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르고 전신이 쑤시고 아픈 지경에
반항할 힘도 없을 뿐더러 거짓말을 하였다가는
또 어떤 고통을 당하게 될 런지 알 길이 없어 벌벌 떨었다.
「그렇습니다마는 도장(道長)은 누구신지……」
「빈도 옥영자는 정식으로 귀사 주지를 뵙고자 하던 차이니
두 분께서 수고스럽겠지만 인도해 주십시오.」
두 승려는 강호에 경험이 없는지 옥영자가 누구란 것을 모르는 듯 쳐다만 보다가
「도장께서 본사 주지님을 만나 뵙겠다면 소승들이 안내를 하죠.」
하고는 비틀거리며 앞장을 섰다.
혜진자와 옥영자가 중들의 뒤를 따르자 양몽환은 주백의를 불렀다.
「주소저! 저도 대각사에 가서 사부님의 소식을 알아보겠습니다.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사숙의 뒤를 따르고 하림도
즉시 하직을 고하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홀로 남은 주백의는 흐르는 눈물도 씻지 않고 동굴로 되돌아갔다.
그리고는 남장(男裝)으로 옷을 갈아입고 현옥의 잔등에 올라탔다.
그러자 그녀 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현옥은 길게 울며
허공을 날아 북쪽을 향해 날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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