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장 하림과의 재회(再會) <雪月重光>
북쪽의 산기슭에 도달한 양몽환은 심한 갈증에 견딜 길 없어
이리저리 물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한 모금의 갈증을 면할 물은 찾을 길이 없었다.
양몽환이 기진맥진하여 쓰러지듯 얼마를 휘청거리며 가는
그의 뒤에서 어디선가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지칠 대로 지친 양몽환의 얼굴에는 금세 생기가 솟으며
꺼져가든 용기가 일시에 샘솟듯 솟아 나왔다.
양몽환은 귀를 기울여 물소리가 나는 곳을 눈으로 더듬어 급히 달려갔다.
과연…, 그 곳에는 아주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물은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절벽을 끼고 흐르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높은 절벽을 따라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어떻게 하면 물이 흐르는 절벽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며 다시절벽을 바라보다
또 다른 괴이한 현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소나무 뒤로 흐르는 물을 끼고 얼마를 더 내려가다
첫눈으로는 도저히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수풀이 우거진 사이에 동굴이 있음을 발견한 것이었다.
양몽환은 지금까지 한 모금의 물을 찾기 위해 목마름을 참고 있던 것과는 달리
괴상한 동굴에 매혹되어 물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호기심에 끌린 양몽환은 천신만고 끝에 동굴 입구에 다다랐다.
동굴 앞에 버티고 선 양몽환은 지금까지 들려오던 물소리가 절벽의 소나무 뒤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동굴 속에서 들려온다는 것을 동굴 앞에 서서야 알았다.
그러나 그 동굴 속에서는 물소리 뿐 아니라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는 것도 느꼈다.
막상 물소리가 들리는 동굴 앞에서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와 갈증으로 거의 빈사 상태에 있던
양몽환은 갑자기 생기가 솟고 그의 눈에는 알 수 없는 광채와 생기가 불 타 오르고 있었다.
양몽환은 마음속으로 모든 위험을 극복하리라는 결심을 한 후 동굴 속으로 몸을 디밀었다.
동굴 속은 문자 그대로 캄캄 절벽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몇 번의 위험한 굽은 길을 돌자 이윽고 앞이 희뿌옇게 밝아오며
물 흐르는 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양몽환은
<번쩍!>
정신이 들며 황급히 달려 나갔다.
그야말로 아름다움 그것이었다.
비단 같은 잔디가 깔려 있는 들판,
이름 모를 기화요초가 산들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가 하면
향긋한 풀냄새가 바람에 날려 오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는 아름드리 노송(老松)이 꽉 들어차
풍경화 같은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바람이 스치고 지날 때 마다 우수수 나뭇가지와 잎이 흔들리고
그것은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양몽환은 목이 마르던 것도 잊어버리고 주위의 풍경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멍청히 서 있던 양몽환은 어디선가 이상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하며
잠시 고개를 들었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짐승의 울음소리라고 착각한 것은 새끼 노루의 울음 소리였고
그 울음소리 사이로 꿈에도 잊지 못하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의 오빠가 날 찾게 되면 노루야! 이렇게 너하고 놀지도 못할 거야.」
순간…,
양몽환은 까물어치 듯 놀라며 숨을 죽이고 소리 나는 곳을 주시했다.
그 다음 그 목소리의 주인은 하림임에 틀림없다고 단정하자 목청을 다하여
「심소저!」
부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대각사(大覺寺)의 중들에게 잡혀간 하림이 어떻게 이곳에 와 있을까?)
하는 이상한 생각이 퍼뜩 들어 우선 동정을 살피고 다음 일을 하기로 작정 했다.
양몽환은 발자국에 바스락거리는 가랑잎 소리를 죽여 가며 조심스럽게 계곡을 넘어
산등성이에 올랐다.
그리고 사방을 자세히 살폈다.
그러는 그의 입에서는 가느다란 경탄의 소리가 저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아! 하림!」
그것은 분명히 하림이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연못에 하얀 발을 담그고 턱을 고인 채
옆에 서 있는 새끼 노루를 쓰다듬고 있는 소녀는 바로 하림 심 소저였다.
양몽환은 더 이상 주위를 돌아볼 경황이 없었다.
격동하는 감정을 누를 길 없어
「하림!」
하고 외치며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러자 갑자기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흠칫 놀라며 옆에 있는
새끼노루를 끌어안다 달려오는 사람이 양몽환이라는 것을 알고 하림은 미친 듯이
「오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마주 달려 왔다.
이윽고 두 남녀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 부둥켜안으며
감격의 눈물로 서로의 뺨을 적셨다.
얼마 동안 그렇게 아무 말 없이 껴안고 있던
양몽환과 하림은 마음을 진정하며 몸을 떼었다.
그 동안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 노루는
그 큰 눈을 껌벅이면서 양몽환과 하림을 번갈아 보다 풀을 뜯어 씹는 것이었다.
하림은 너무나 격동되었던 일순의 감정을 억제하고 눈물을 닦으며
「오빠!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꼭 나를 찾아 올 줄 알고 기다렸어요.」
하고는 또 눈물을 흘렸다.
양몽환은 하림의 눈물을 보지 않으려는 듯
잠시 외면했다가 돌아서며 아무 말 없이 하림의 손을 힘 있게 쥐었을 뿐이었다.
「오빠! 오빠의 친구 되는 분이 저에게 말했어요. 오빠는 꼭 찾아올 거라고요.」
그러나 양몽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이렇게 만난 것만이 기쁠 뿐이었다.
「나는 오빠가 안 오면 그 큰 학(鶴)을 타고 훨훨 날아보고 싶었어요,
그러나 오빠가 나를 찾아 와서 내가 없으면 어떻게 할까 그것만 걱정했어요.」
그제야 양몽환은 정신을 수습하고 하림의 하얀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심소저!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어! 늦어서 미안해.」
하는데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낭랑하게 들렸다.
「양형! 오래만이요.
그러나 양형은 기쁘겠지만 나의 그동안에 괴로움은 말이 아니오.」
양몽환은 소스라치듯 놀라며 뒤를 돌아보자
그 곳에는 주백의가 의젓하게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급히 읍을 하면서
「주형이 기지(奇智)를 가르쳐 준 것도 아직 은혜를 갚지 못하고 있는데
또 이와 같이 멀리 서북까지 오셔서 저의 사매도 구하여 주시니
무슨 말로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백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감사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괴로웠다고 한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오.
폐만 끼치게 되어서 이 양몽환은 몸 둘 곳이 없습니다.」
하며 또 읍을 했다.
「하‥‥하, 별 말씀을‥‥ 너무 과분한 말이오.
그런데 당신의 사매가 당신이 언제 오느냐고 묻기에
곧 온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바로사실이 되어버렸소이다. 하하!」
하고 쓸쓸히 웃고는
「양형이 더 늦게 오셨더라면 우리는 백학(白鶴)인 현옥(玄玉)을 타고
요주(饒州)로 찾아 가려고 하였습니다.
양형께서 사매의 소식을 탐지하지 못하여 요주(饒州)로 돌아가리라 짐작하면서……」
하고 말하였다.
양몽환은 주백의 앞으로 다가 가며
「세상에는 기적과 같은 일들이 않군요.
만일 천용방(天龍幇)의 금환이랑(金環二郎)도옥(陶玉)을 만나지 못하였더라면
이곳 기련산(祈連山)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 주백의가 웃으며
「그런데 어떻게 빨리 올 수 있었습니까?」
「도옥이 기르고 있는 천리마(千里馬)를 타고 왔습니다.
정말 천리마는 보마(寶馬)이더군요.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것을 평지와 다름없이 달리더군요.
그 덕택으로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준마가 있다니 한 번 구경하고 싶군요.」
하는 말을 남기고는 쓸쓸히 오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양몽환은 멀리 사라지는 주백의의 뒷모습을 보고
그의 날씬한 몸매에서 여자 같은 인상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 전 깊은 밤중에 공동묘지에서 주운 비단 수건을 생각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뒤따라가려는 데 하림이 다가 서서 손을 잡았다.
「정말 저분이 아니었더라면 오빠와 다시는 만나지 못할 뻔 했어요.」
했다.
그러는 하림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득차있었다.
순간, 양몽환은 며칠 동안 쓸쓸함과 고통을 겪었던 하림을 위로하며
「심소저!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오. 너무 괴로워하지 마라.」
하고 오빠 이상으로 정다운 애정을 표했다.
하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 정도 위로가 되는 듯 웃어 보였다.
「그러나 오빠! 그 중들이 아주 나쁜 사람들이에요.
그들은 나쁜 야심을 품고……
그런데 그때마다 오빠의 친구 분이 도와주었어요.」
「흠! 그렇다면 그 주백의가 고마운 사람이군.」
「그분 아니었으면 전 벌써 죽어버렸을 거예요.」
하고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필경 억울한 일을 당할 뻔 했구나!
위기를 당할 때마다 주백의의 도움이 얼마나 컸을까?)
양몽환은 흐느껴 우는 하림의 눈물을 닦아 주며 다시 홀로 깊은 생각에 빠졌다.
(분명히 주백의는 생김새나 몸매로 보아 틀림없는 남장 여인(男裝女人)이다.
그런데 위급한 때 마다 나를 도와준다.
하림의 일이나, 파양호의 현금(현琴)을 끊던 일,
사숙(師淑)을 죽음에서 건져준 일……그러나 그뿐인가?
신묘한 신법(神法)까지 전수하여 준 주백의가 아닌가!)
양몽환은 생각할수록 앞으로 주백의를 어떻게 대하여야 할 것인가 막연하기만 했다.
한편…,
하림은 양몽환의 지극한 사랑을 직접 몸으로 느끼며 지난 며칠 동안의 고생도
눈 녹듯 잊어버리고 다만 행복한 얼굴로 기쁨만이 가득 차 있었다.
양몽환이 착잡한 시름에 잠겨 있는 동안 하림은 끝없는 환희에 잠겨 있었다.
그러던 하림이 양몽환의 가슴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며 양몽환을 보았을 때
양몽환은 깊은 시름에 잠겨 우수에 가득 차 있었다.
하림은 깜짝 놀라며
「오빠! 웬 일이세요. 속상한 일이라도 있어요?」
하고 묻는 말에 퍼뜩 제 정신으로 돌아온 양몽환은 황급히 고개를 흔들면서 웃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양몽환의 말에 안심한 하림은 새끼 노루를 가리키며
「먹이를 주어야겠어요.」
하고는 곧 이어
「우리 저쪽 굴 안으로 들어가요.」
새끼 노루를 안고 먼저 걸어갔다.
앞서 가는 하림의 뒤를 따라 가며 양몽환은 앞으로 할 일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렇다. 주백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모든 것이 명백해지면 곤란할 때도 있을지 모르지.
이제 우리들은 이 기련산을 빠져나가 곧 곤륜산으로 가야할 몸이 아닌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데 앞서 가던 하림이 양몽환을 바라보며 또 다른 굴을 가리켰다.
「오빠! 오빠의 친구 분과 저는 이 굴속에서 살았어요.」
하는 말에 굴속을 자세히 보았다.
과연…,
굴속은 깨끗이 정리되어 있으며 하림의 잠자리인 듯싶은 곳에는 깨끗한 이불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사람이 깎아 놓은 듯한 청석(靑石)위에는 몇 병의 양젖과 과실이
정결하게 놓여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하림은 양젖 한 병을 집어 손바닥에 쏟아 노루에게 먹이며 남은 양젖을 양몽환에게 주었다.
「오빠! 마셔봐요, 맛이 좋아요.」
양몽환은 한 숨에 다 마셔 버렸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목이 말라 갈증을 참을 수 없었던 일을 생각하고 쓴 웃음을 지었다.
하림을 만난 충격으로 갈증마저 사라졌던 것이었다.
단숨에 마셔 버리는 양몽환을 지그시 바라보던 하림은 다시 새 병을 주며
「목이 말랐어요?」
하자 양몽환은 병에서 입을 떼며
「아! 이젠 살 것 같군!」
혼자 소리처럼 외쳤다. 사실 살 것 같았다.
한 모금의 양젖이 이렇게 고마운 줄은 미처 몰랐다.
양몽환이 양젖을 다 마시기를 기다려 하림은
양몽환의 가슴으로 파고들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그리고는 금세 깊은 잠에 빠져 들고 말았다.
금세 깊은 잠에 빠진 하림은 요 며칠 동안의 괴로움과 피로함을 일시에 푸는 듯
새근새근 숨소리도 곱게 잠이 들었다.
하림의 자는 모습에서 양몽환은 자기의 나이가 이십 세를 넘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혼자 실소하였다.
하림이 잠들자 이불 위에 눕히고 일어서려던 양몽환은 옆에 앉아있는
새끼 노루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자기가 마시다 남긴 양젖을 조금 더 먹인 후 밖으로 나갔다.
적막하기만 한 산 속은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우수수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 고요하기만 했다.
뒷짐을 진채 한 걸음 한 걸음 경치를 구경하며 걸음을 옮기던 양몽환은
높이 솟은 절벽의 바위 위에 앉아서 먼 곳의 경치를 보려고
경신법(輕身法)을 이용하여 쉽게 올라갔다.
과연…경치는 일색이었다.
높은 산과 계곡과 계곡 사이로 푸른 잔디가 깔린 들이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다.
눈앞에 전개되는 풍경에 도취되어 무심히 서 있던 양몽환은
약 오마장 앞에 등나무 숲이 우거진 곳에 뒷모습으로도 알 수 있는
주백의가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꼼짝없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내심 저윽이 놀랐다.
그러나 양몽환은 주백의가 필시 자기가 온 것조차 모르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은 그를 만났을 때 웃던 쓸쓸한 얼굴의 표정을
상기하고 더구나 이 외 따른 곳에 혼자 서 있음은 그만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리라 여기고
소리 없이 주백의 옆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겨 다가갔다.
양몽환이 거의 주백의 옆에 다가가도 인기척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는 여전히 똑같은 자세로 서 있는 것이었다.
마음속으로 이상한 생각이 든 양몽환은 주백의가 놀라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 주형!」
하고 불렀다.
그제야 놀라듯 뒤를 돌아보는 주백의의 얼굴은 여러 갈래의 눈물자국이 나 있었다.
그리고 자기를 부른 사람이 양몽환이라는 것을 안 주백의는
눈에 가득한 눈물을 닦으며 쓸쓸하게 웃는 것이었다.
「주형! 어찌 이 추운 꼭대기에 서 계시오.」
양몽환이 가만히 말하자 주백의는 또 쓸쓸히 웃으며
「양형은 어찌 혼자 올라 오셨소? 사매는 어디가고?」
하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마주 웃어 주며
「사매는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피로했어요, 사매께서는.
그런데 양형은 나를 찾아 이곳까지 올라 오셨던가요?」
하는 말에 양몽환은 황급히
「아, 네, 그저 올라오고 싶더군요.‥‥」
하고 양몽환도 나직이 말했다.
주백의는 땅이 꺼지듯 깊은 한숨을 내 쉬며 혼자 소리로
양몽환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읊는 것이었다.
「……눈물은 가득히 수심되어 흐르고 넘은 저 구름보다 더 멀고나……」
그리고는 곧 몸을 돌려 북쪽으로 걸어갔다.
양몽환이 재빨리 다가가며
「 주형! 잠깐만!」
하고 불러 세우자 주백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며
「어찌 하여 부르십니까?」
하고는 더 이상 억제하지 못하고 주르륵 눈물을 흘리고 마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기절할 듯 놀라며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때였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주백의는 머리에 쓰던 두건(頭巾)을 벗어 버리고 말았다.
순간…,
「앗! 당신은……」
경탄과 놀라움으로 소스라치며 놀라는 그의 눈에는
칠흑같이 검은 여인의 머리칼이 치렁치렁 늘어지며 바람에 휘날리는 것이었다.
「‥」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니었다.
두건을 벗어버린 주백의는 결심한 듯 입을 다물며 윗옷을 벗어 버렸다.
거기에는 여자의 젊은 속옷과 돌출한 유방이 나타나 있었다.
희고도 밝은 여인의 살결은 젊은 속옷을 뚫고 투명하게 보였다.
양몽환은 급기야 외면하고 돌아 섰다.
그때 주백의의 가냘픈 목소리가 양몽환의 귓전을 때렸다.
「나는 지금껏 당신을 속여 왔어요.
이제 당신의 사매와 사흘 동안 굴속에서 지낸 일이 의심되지 않고 오해도 풀 수 있겠죠?」
그러면서 계속 주백의는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외면하고 돌아선 채
「당신이 여자이리라고는 꿈에도,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더구나 제가 무슨 의심이나 오해를 하겠습니까?」
그동안 겉옷을 입고 두건을 쓴 주백의는
「그동안 끼친 폐가 많았어요.
용서하여 주세요.
지금 내가 옷을 벗어 보인 것은
당신과 나와의 인연이 다 한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에요.
당신의 사매는 참 귀여워요. 기리 보중하시길……」
말을 채 끝마치지 못한 주백의는 돌아서서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때까지 외면하고 섰던 양몽환은 주백의의 목소리가 갑자기 멎자
이상한 생각이 퍼뜩 들어 돌아보았을 때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주백의가 가고 있었다.
양몽환은 급히 주백의의 앞으로 달려가 길을 막으며,
「주소저!」
하고 부르며 주르륵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주백의는 양몽환의 모습을 보고는 눌렸던 감정이 풀어지며
자기의 손수건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양몽환의 눈물은 기어이 주백의를 다시 또 울리고 말았다.
주백의는 지금까지 속으로만 사랑하던 양몽환을 호젓이 대하고는
가식적인 차가운 감정을 없애고 여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주백의는 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양몽환을 바라보며
억제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한편…,
양몽환은 자기를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끝내 돌아서야 했던 주백의의 순정에 가슴 깊이 탄식하며 무심했던 것을 뉘우쳤다.
그리고 양몽환은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체취에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백옥과 같은 두 손을 움켜쥐었다.
빛나는 눈동자와 마주치는 눈동자가 수 천만 마디의 달콤한 말보다
더욱 강한 사랑을 약속하는 듯 했다.
순간…,
주백의는 감격에 벅차올랐다.
언제 남자에게 손을 잡혔던가.
그런데 지금 꿈에도 잊지 못하고 오랫동안 애태우며 갈망하던
양몽환의 손이 뜨겁게 자기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에 세상을 다 얻은 듯 만족했다.
급기야 주백의는 양몽환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양몽환의 머리에는 또 하나의 여자가 생생히 떠올랐다.
(하림!)
양몽환은 주백의를 품에 안은 채 오랫동안 번민 속에 빠져 있었다.
(스승님이 부탁한 하림!
그리고 나의 은인인 주 소저! 나는 어찌 했으면 좋을까! )
번민 속에 빠져 망설이던 양몽환은
괴로운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심하듯 냉정을 되찾으며 주소저의 등을 쓰다듬었다.
「주소저! 지금까지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더구나 나의 사매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순간…,
주백의는 가늘게 떨며 양몽환의 품에서 빠져 나왔다.
그러는 그녀의 얼굴은 백지장 같이 하얗고 핏기가 없었다.
잠시 동안 슬픔을 참느라고 말을 못하던 주백의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미 각오한 몸, 은혜랄 것도 없어요. 부디 사매를 사랑해 주세요.」
하고는 조용히 양몽환의 앞을 물러나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걸음을 옮겨 가던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얼 만큼 가던 주백의는 망연히 서있는 양몽환을 돌아보며
「빨리 이곳을 벗어나세요. 아무래도 대각사의 중들이 염려스러워요.」
한마디를 남기고 다시 돌아서려는 찰나,
멍청히 서 있던 양몽환의 몸이 옆으로 비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예전 사촌 누나인 옥견(玉娟)의 무덤에서 일으켰던 진기(眞氣)의 응결,
바로 그것이었다.
주백의의 출현과 이별에 너무도 상심한 까닭이었다.
주백의는 양몽환이 쓰러지자 나는 듯이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사랑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죽음을 앞에 둔 양몽환을 남기고 갈 수 있으랴!
주백의는 곧 빠른 동작으로 쓰러진 양몽환을 부둥켜안았다가 가만히 뉘어 놓았다.
그리고 명문(命門), 당문(當門), 폐해(肺海), 삼대혈(三大穴)을 차례차례로 힘껏 눌렀다.
양몽환은 깊은 잠에서 깨듯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주백의는 양몽환이 깨어나자
다시 새로운 눈물이 쏟아져 그의 가슴에 엎어지며 울부짖었다.
「저를 잊어 주세요! 네?」
하며 몸부림치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땅이 꺼지는 듯한 한숨을 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두 남녀가 서로 사랑할 수 없음을 말없이 탄식하며 조용히 앉아있을 무렵,
갑자기 남쪽의 산줄기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웬 연기일까?」
하는 주백의의 소리에 눈을 번쩍 뜬 양몽환은 그 연기가 도옥(陶玉)의 소행임을 알았다.
그러자 주백의는 재빨리 나무 위로 올라가 연기가 솟아오르는 곳을 살펴보고는
곧장 아래로 구를 듯이 달려갔다. 아무 말 없이 주백의가 사라져 가자 양몽환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달려온 도옥에게 미안하다)
이렇게 생각하며 굴을 향해 달렸다.
달리면서 주백의의 행방을 찾았으나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림자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영원히… 주백의는 사라졌는가!)
굴속에 당도한 양몽환은 아직도 곤하게 자고 있는
하림과 그 옆에 종이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그 쪽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쓰여 있었다.
「속히 이곳을 피하시오. 대(黛)」
양몽환은 주백의가 써 놓고 사라진 것임을 짐작했다.
대(黛)라면 주백의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단정한 양몽환은 주백의의 세심하고도
아름다운 마음씨에 마음속으로 거듭 감사할 뿐이었다.
(주백의는 기어이 떠나고 말았구나, 아!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공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굴 밖으로 나와 사방을 휘둘러보았으나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바위뿐 주백의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양몽환은 얼마 동안 실망의 및을 감추지 못하고 서 있다가
힘없는 걸음을 옮겨 굴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하림은 모든 번민을 잊은 채 그냥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단꿈을 꾸는 듯 깊은 잠에 빠진 하림을 깨우기를 망설이던
양몽환은 사태가 위중함을 깨닫고 지체 없이 하림을 흔들어 깨웠다.
눈을 부비며 잠을 깬 하림은 양몽환을 발견하고 생긋 웃으며
「오빠! 오빠를 만나면 할 이야기가 태산 같았는데 그만 잠이 들어 버렸어요.」
하고 응석부리듯 말했다.
양몽환은 하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급히 그러나 다정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심소저! 이제 보니까 아주 잠꾸러기군……
그 이야기는 이 다음에 밤새도록 하고 우선 잠깐만 기다려요.
곧 도옥을 데리고 돌아오겠어.」
하고 다시 밖으로 뛰어 나갔다.
급히 뛰어나가는 양몽환을 바라보고 있던 하림은
「오빠! 저도 같이 가요!」
하는 하림의 소리에 뛰던 걸음을 멈춘 양몽환은
(퍼뜩)
생각되는 바가 있었다.
(이왕 떠나버린 주백의를 찾을 길은 없다.
도옥을 만나는 길로 바로 이곳을 떠나자)
이렇게 생각한 양몽환은 뒤에서 달려오는 하림에게 빨리 오라고 손짓 을 했다.
하림은 엎어지듯 달려와 양몽환의 손을 잡으며
「오빠! 저를 두고 가려고요?」
하고 쥔 손을 꼭 잡아 흔들었다.
양몽환은 웃으며
「아니! 도옥 사형을 만나서 같이 가려고 했을 뿐이야.」
대답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하림은 양몽환에게 끌리다시피 따라 가며
「오빠! 그런데 오빠의 친구 분은 참 좋은 분이에요?」
「 주백의 말인가?」
「네, 그분은 저를 구해주고 또 이 보검도 주었어요.」
하며 금빛 찬란하고 날카로운 검을 보여 주었다.
양몽환은 하림이 보여 주는 보검을 바라보며
주백의의 아름다운 마음씨에 다시 한번고마움을 느꼈다.
얼마 동안 산비탈 길을 내려와 다시 산봉우리를 향하고 올라가려 할 때에
하림은 잡았던 양몽환의 손을 놓으며 갑자기 멈추었다.
「오빠! 우리가 다 가버리고 나중에 오빠 친구 분이 와서
우리를 찾다가 실망하면 어떻게 해요? 제가 남아 있을까요?」
하림의 말을 듣고 양몽환은 깨닫는 바가 있어 머리를 끄덕였다.
사실 가버린 주백의이지만 언제 다시 나타나서 자기를 찾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양몽환은 해가 지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불현듯 떠오르는
주백의의 생각에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주백의를 기다려 이곳에 있을 수도 없는 일이어서
양몽환은 진퇴양난에 빠져 혼자 심사숙고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옳단 말인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주백의를 잊을 길이 없었다.
그런데 자기보다 먼저 하림을 걱정해 주는 것을 양몽환은 내심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이미 떠나버린 사람, 인연이 생겨 만나게 된다면 어느 곳에서든 만나지 못하랴.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강경하게 말했다.
「올 것 같지는 않아, 그냥 가자!」
하고 하림을 재촉했지만 한 가닥 기다림의 마음은
차마 발길을 돌아서지 못하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림은 그의 말이 믿기 어려운 듯 몇 번이나
그를 처다 보고는 다시 더 묻지 않고 양몽환과 함께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가파른 절벽을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올랐을 때는
이미 긴 해도 저물어 서산마루에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양몽환은 숨가빠하는 하림을 돌아보며 미소를 띠웠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천진난만하던 하림이 갑자기 슬픈 얼굴을 들며
「오빠!」
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섬뜩 놀라며,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하고 물었다.
그제야 하림은 눈물을 흘리며
「새끼 노루를 두고 왔어요.」
하는 것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양몽환도 하림의 품안에서 떨어질 줄 모르던 새끼노루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되돌아가서 데리고 올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양몽환은 비통해 하는 하림의 손을 잡으며
「너무 염려할 것 없어, 아무래도 우리들이 기를 수 없는 것 아냐?
엄마가 와서 찾아 갈 거야!」
하며 위로했다.
양몽환의 다정스런 위로의 말에 하림은 눈물을 그치며
「그 노루도 오빠 친구 분이 잡아준 거예요.
그날 요주(饒州)에서 날이 저물도록 오빠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그래도 안 오기에 혼자 오빠를 찾아 나왔어요.」
납치당해 가던 그때 이야기였다.
「그랬던가? 처음 듣는 소린데 그래서? 어떻게 납치당했지?」
「아무리 찾아도 오빠가 없잖아요?
그래서 호숫가에 앉아 좀 쉬려고 하는데
갑자기 웬 낯선 두 사람이 나타나서 내 혈도를 찔러버렸어요」
하림의 말을 들으며 양몽환은 그날 자기가 하림을 찾아 나섰던 일이며
천용방의 최문기와 싸우던 일을 생각하며 흥미진진하게 하림의 다음 말을 듣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정신을 차렷을 때에는 마차에 실려 어디론가 달리고 있었어요.
마차의 창문을 다 닫아서 밖을 내다보지 못하게 하고 말예요.」
「 그리고는?」
하림은 한숨을 쉬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다음 말을 계속하는 것이었으나
그의 표정은 무서운 악몽에서라도 깨어난 듯 공포의 빛이 가득했다.
이러한 하림을 바라보는 양몽환의 가슴 속에도 뜨거운 피가 끓어올랐다.
「그리고는 입도 헝겊으로 틀어막고 손과 발도 묶었어요.
그래서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으려고만 생각했어요.」
「음……」
양몽환은 깊은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러나 제가 죽어 버리면 오빠가 나를 찾아도 소용없겠지. 이렇게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대각사의 증들에게 잡혔지?」
괴한들에게 납치당해 간 하림이 어떻게 대각사의 중들의 손에 넘겨졌는지 궁금하였다.
「글쎄 말예요.
나는 마차 안에서 생각하는 것이 오빠뿐인데 무슨 딴 정신이 있겠어요?」
「그야 그렇겠지.」
하림은 양몽환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잠시 흐느껴 운 다음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면서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마차가 썼어요.
그래서 나도 깜짝 놀라 가만히 있는데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아요?」
「싸워?」
「예! 그냥 고함을 치며 싸우는 소리예요,
그래서 나는 오빠가 나를 구하러 온 줄 알았어요.
그런데 밖이 잠잠해 지기에 가슴을 두근거리며 귀를 기울였죠.」
「어떻게 되었어? 다음엔?」
「그런데 갑자기 마차의 문이 광! 열리며 중들이 들이닥치지 않아요.」
하고는 그때 놀랬던 일을 생각하는 듯 하림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가슴을 들어 내렸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치는 일인지도 몰랐다.
양몽환은 하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심소저! 그 중이 한 사람은 뚱뚱하고 한 사람은 키가 작은 중이였지?
회색 도포를 입은?」
「그래요! 그런데 오빠가 어떻게 알죠?」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양몽환을 바라보며 신기하다는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양몽환은 그런 표정의 하림이 귀여운 듯 다시 등을 두드려 주며
「그 중들은 도옥이가 죽여 버렸지!」
「도옥? 오빠의 친구 분 말이죠?」
「응, 이제 곧 그 친구가 여기에 올 거야.」
하고는 곧 이어
「그놈의 중들이 우리 심 소저를 또 다른 중들에게 인계했군!」
모든 것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양몽환을 빤히 바라보던 하림은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 중들은 천하에 나쁜 중이예요!」
「음‥‥ 그 중들이 무슨 나쁜 짓을 했나?」
「손과 발을 묶인 날 질질 끌고서 어떤 공동묘지에다 끌어다 놓는 거예요.
그리고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황색 승의(僧衣)를 입은 중이 달려 왔어요.
그리고는 그들에게 무슨 말인지 귓속말을 한 후 나의결박을 풀어 주었어요.」
양몽환은 하림이 납치당하던 이야기를 들으며 모든 것이 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임을 알고 마음 속 깊이 사과했다.
그러나 양몽환의 마음을 알길 없는 하림은 다시 말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저는 결박을 풀어 주기에 이제는 살았구나! 했어요.
그런데 그 놈들이 먼저 내 혈도를 찔렀기 때문에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어요.
도망갈 수도 없고 싸울 수도 없고 정말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자기들이 입었던 중 옷을 벗어 나를 둘둘 마는 거예요.
수건으로 또 눈도 가리고」
「나쁜 놈들! 그래서?」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어요.」
양몽환은 하림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만히 날짜를 계산해 보았다.
날짜로는 모두 이틀이나 먼저 출발한 것으로 되었다.
그렇다면 아무리 도옥의 천리마 보다 빠르다 해도 자기보다 더 빠를 리가 .
없다는 의문이 생겼다.
천리마로서 달려온 양몽환은 비록 이틀 늦어 졌다하더라도
하림과 그 중보다 먼저 도착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럼 사매와 그 황색승의(黃色僧衣)의 중은 말을 타고 이곳까지 왔나?」
하림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사흘째 되는 날,
어느 깊은 골짜기의 절간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그 절간에는 많은 중들이 있었죠.
밤이 되자 그 중들은 어디서 잡아 왔는지 괴상망측하게 생긴 집채만 한 새 두 마리를 가져왔어요. 그리고 황색승의의 중이 나를 보고 그 커다란 두 마리 새가 나를 풍경이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고 하더군요.
나는 역시 거짓말인줄 알고, 싫다고 했어요.
그러나 중들은 나에게 달려들어 저를 그 한 마리의 새 등에 묶더군요.
그리고 자기는 다른 한 마리 새 등에 타고서 날랐죠. 하룻밤을 새 등에서 지새우게 된 거죠.」
양몽환은 도대체 귀신에게 홀린 것 같았다.
양몽환은 눈을 감고생각에 잠겼다.
(대각사의 중들이 이러한 새로서 비밀리에 행동하기 때문에
강호에서는 아직 그들의 행적을 모른다는 것인가 ‥‥)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자기가 그들 보다 빨리 도착할 수 없었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하림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 이튿날 날이 밝을 무렵에 그 새들은 날을 기운이 없어졌는지 어느 굴속에 앉아 쉬었어요.
그 중은 새에게 먹이를 먹인 후 다시 날게 되었죠.
그런데 그 새들이 보기에는 흉악하게 생겼지만 가다가 쉬고 또 쉬고 하는 것이
지친 것 같고 백학(白鶴)에는 비할 수 없었어요」
양몽환은 웃으면서
「그야 그렇지, 그 백학(白鶴)인 현옥(玄玉)은 천 년 이상의 신물(神物)인데
어찌 대각사의 새들과 비교할 수나 있어?」
하림은 방긋 웃으며 다시 계속했다.
「그 두 마리 새들은 점점 쉬는 횟수가 잦아져 이튿날 밤에는 다섯 번 이상을 쉬었어요.
그리고 사흘째 되는 오전에야 겨우 이곳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당도하였는데
그때 그 황의의 중은 이제 한 산등성이만 넘으면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면서
그의 법호는 법뢰(法雷) 인데 잊지 말아 달라고 하잖아요. 호……호……」
「죽일 놈의 중이군…」
「그렇지 않아도 오빠의 친구 분을 만나 땅에 떨어져 박살이 났어요.」
「그래? 그럼 주백의가 사매를 구해서 동굴 속에 있게 되었군!」
「그래요. 그 중이 나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오빠의 친구 분이 백학을 타고 추적하여 왔어요.
그 중을 무찔러 떨어뜨리고 내가 묶여 있는 새 위에 올라탔어요.
그리고는 그새도 죽여 버렸어요.
정말 놀라운 재간이었어요.
그리고 다른 한 마리 새는 허공에서 백학이 물어 죽이고‥‥
그런 다음에 내 결박을 풀어주고 같이 백학을 타고 이곳까지 오게 되었어요.
그때 내가 오빠의 소식을 물으니까 며칠 있으면 온다고 했는데 정말 오빠가 나타나셨어요.
그렇지 않았으면 나는 벌써 죽었을 거예요.」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양몽환은 주백의에게 무엇으로 감사해야 할지 몰랐다.
근 한 달 동안에 주백의에게서 받은 은혜를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만큼 크고 또 많았다.
이야기를 마친 하림은 머리를 양몽환의 어깨에 기대며 주위를 살펴보다가
수풀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오빠! 저기! 불이 붙어요!」
양몽환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며 금환이랑 도옥을 생각했다.
애초에 헤어질 때 약속을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 때고 수풀 속에 불이 나거든 만나자!)
불이 난 곳은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였다.
더구나 밤이 점점 깊어지는 어둠 속을 뚫고 산길을 더듬어 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약속을 저버릴 수는 더욱 없었다.
「심소저! 우선 저 불탄 곳으로 가서 다음 일을 생각하지!」
양몽환의 말에 하림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즉시 경신법을 전개하여 불타는 곳으로 달려갔다.
날은 점점 어두워 오고 또 이 깊은 산 속에 길이 따로 있을 리도 없었다.
수 십 길의 낭떠러지가 아니면 깎아지른 절벽이 가로 막길 계곡이 아니면
빠져나갈 수조차 없이 수목이 우거진 곳을 혜치고 나오면 비 오듯 땀이 흘러
옷을 흠뻑 젖게 하였다.
그러나 불난 곳이 점점 가까워지며 따라서 주위가 밝아오는 것이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반갑고 피로도 잊게 하여 주었다. 괴로움과 힘든 것도 잊고 그들은 달려갔다.
보기에는 별로 멀지 않은 것 같았으나 상상 밖으로 멀고도 멀었다.
쉬지 않고 달렸으나 여전히 멀고 험한 거리였다.
하림은 흐르는 땀을 씻으며 오빠를 불러 세웠다.
「오빠! 상당히 멀어요. 잠시 쉬었다 가요, 네?」
하는 말에 양몽환도 걸음을 멈추며 하림을 돌아보았다.
사실 양몽환도 지치고 배도 고팠다. 갖고 왔던 건량은
모두 천리마 적운 추풍구(赤雲追風駒)의 등에 실어 묶어 둔 채 떠나온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도옥이 자기를 찾고 있으리라는 것을 생각하고는 기운을 내서
「자! 조금만 더 가면 돼, 쉬면 더 힘들어.」
하고 웃으면서 하림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하림은 양몽환의 말에 용기를 얻은 듯 이끄는 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번 지치기 시작한 하림은 곧 숨이 턱에 닿는 듯 연거푸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양몽환은 하림을 부축하며 공력을 운행하여 더 달리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나 하림이 지친 것을 돌아보고는 달리기를 단념하고 바위 옆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서 좀 쉬었다 가기로 하지.」
하고 양몽환이 먼저 않았다. 그러자 곧 쓰러질듯이 하림도 않으며,
「제가 너무 형편없군요.」
하고 웃었다. 그리고 하림은 양몽환의 가슴에 몸을 기대어 금세 잠이 들어 버렸다.
피곤한 탓이었는지 차가운 밤바람도 모르는 채 깊은 잠에 들어가고 말았다.
으스스 추운 밤이었다. 더구나 허허 벌판에 바람을 막아 줄 만한 것도 없고
또 땀을 많이 흘린 탓인지 더 추웠다.
양몽환은 자기의 품속에서 달게 자는 하림에게 아무것도 덮어 주지 못하는 대신
그의 몸을 꼭 껴안아 주었다.
이때 홀연 .」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밤의 정적을 뚫고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듣고 있던 양몽환은
이 깊고 어두운 산중에서 달릴 수 있는 말은 도옥의 천리마 외에는 없으리라 짐작하고는
즉시 큰 소리로
「도형!」
하고 불렀다.
과연 곧이어 남쪽에서 도옥의 날카로운 회답이 들려왔다.
이때 양몽환의 품속에서 잠을 자던 하림은 양몽환의 고함치는 소리에 놀라 깨었다.
이윽고 말발굽 소리는 지척 간에서 요란하게 들렸다.
양몽환이 벌떡 몸을 일으키는 순간,
쏜살같이 달려온 도옥과 말은 양몽환과 하림이 서 있는 바로 앞에 와서 멈추었다.
그러나 도옥은 말에서 내리지 않고 하림의 아래 위를 찬찬히 살펴 본 후에야
말에서 내리며 양몽환을 바라보았다.
「이 백의 소저가 바로 양형의 사매요?」
하고 물었다.
양몽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소.」
하고는 곧 두 사람을 인사시켰다.
도옥의 기기괴괴한 복장과 손목에 찬 금환(金環) 등을 보고
매우 기이하게 생각한 하림은 도옥을 보고 방긋 웃었다.
금환이랑(金環二郎) 도옥(陶玉)은 내 외공(內?外功)을 겸비한고수로서
밤에도 주위의 사물을 거의 낮과 같이 분별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림이 하얀 이를 보이며 방긋 웃자
그만 가슴이 울렁거려 잠시 동안 멍청히 섰다가 겨우 웃으며
「과연 양형은 복도 많소.」
하고 빈정거렸다.
양몽환도 하림을 슬쩍 바라본 후 도옥을 바라보며 웃었다.
「하 하! 농담의 말씀을…… 그런데 어떻게 여기로 오시게 되었소?
우리는 지금 불난 곳을 향하여 달리다가 피곤해서 잠시 쉬던 참이지요.」
「우리가 약속한 대로 열 군데에 불을 놓고 양형을 기다리다가
그만 대각사의 중놈들과 만나 싸우게 되었는데 중놈들이 너무 수가 많아 그만 빠져 나왔소.
나는 양형이 그들에게 잡힌 줄 알고 절로 달려가 양형을 구하고는
절에 불을 질러 깨끗이 소제할까 하던 참이었소.
그런데 양형이 이렇게 사매와 함께 여기 있는 줄은 생각 밖이오!」
양몽환은 내심 미안함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만난 것만도 천만 번 다행으로 생각하며
하림을 찾게 된 경과를 대략 이야기 하여 주었다.
하림을 구하게 된 이야기를 들은 도옥은 눈웃음을 치며
「그렇게 커다란 백학이 사람까지 태운다니 희한한 일이군!」
하고 놀라는 것인지, 비꼬는 것인지,
분간키 어려웠다. 도옥의 그 말 속에는 적의가 있는 듯 하였다.
양몽환은 도옥의 성품이 원래 파악하기 어려운 사람임을 알고
또 주백의는 이미 떠났으므로 다시 부딪칠 기회가 없으리라
생각하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보다 양몽환이나 하림은 배가 더 고팠다.
양몽환은 시장기를 느끼며
「도형! 마침 잘 왔소, 배가 고픈데 건량이 남았소?」
하고 화제를 돌렸다.
도옥은 즉각 말 잔등에서 건량을 꺼내 하림에게 주었다.
하림은 건량을 삼등분하여 각각 나누었다.
그러나 도옥은 자기가 받은 건량을 먹지 않고 한 옆으로 놓아 버리고 말았다.
하림은 건량을 먹으면서 도옥에게
「왜 드시지 않죠? 시장하지 않으세요?」
하자 도옥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기 몫을 도로 건량대(幹糧錢)에 집어넣었다.
건량을 먹은 양몽환은 어느 정도 기운이 났다.
「도형! 대각사의 중들이 극악무도하고 난폭한 것 같소.
우리 세 사람의 힘으로는 중과부적이 아니겠소?」
하고 양몽환은 지금까지 생각하던 문제를 털어 놓았다.
양몽환의 말을 듣고 있던 도옥은 태연자약하게 앉아서 너털웃음을 웃는 것이었다.
「허‥‥ 허 ? 그렇다고 기왕 이 기련산까지 왔는데
대각사의 설삼과(雪參葉)라도 몇 개 먹고 가야지 그냥 갈 수야 있소?」
하고 말을 마쳤을 때였다.
그때…,
어둠 속에서 갑자기 요란한 웃음소리와 함께
「이놈들아! 대각사의 설삼과가 그렇게 먹기 쉬운 줄 아느냐? 우선 이것부터 먹어라!」
화살 소리와 함께
<쌩!>
하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려 왔다.
한가롭게 이야기하던 양몽환 일행은 난데없는 요란한 소리에
정신을 수습할 사이도 없이 날카로운 쇳소리에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몸을 납작 엎드렸다.
새파란 빛을 번쩍이며 세 자루의 칼 청정검(淸?劍)이 그들의 머리 위를 날아
뒤편의 바위에 부딪치며 불꽃을 튀기는 것이었다.
이때…,
양몽환은 몸을 날리면서 장검을 빼어 들었다.
그리고 어둠 속을 달리는 그의 눈에는 이장밖에 두 사람은 계도(械刀)를 들고
두 사람은 선장(禪杖)을 든 네 사람의 중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때 도옥은 어느 틈에 한 주먹의 독침을 뿌리고는 장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자 네 사람의 중들도 역시 일제히 계도와 선장을 휘둘러 도옥이 뿌린 독침을 떨어뜨렸다.
그 순간을 이용하여 재빠르게 달려든 도옥은 금환검(金環劍)을 휘두르며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도옥의 금환검이 세 번째 내려치는 찰나 선장을 들었던 중이 서너 걸음 뒤로 비틀거리다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세 명의 중들은 자기의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일제히 합세하여
강력하게 공격하여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선장을 든 승려는 도옥에게 겨누었던 선장을 돌려 적운 추풍구의 가슴을 겨누고
달려드는 것이었다.
도옥은 순간…,
적운 추풍구의 위험을 알아채고 몸을 날려 일학충천(一鶴沖天)의 수법으로
몸을 일장이나 높이 하늘로 솟았다가 쏜살같이 내려오며 칼을 휘둘렀다.
이러는 한 편…,
양몽환과 하림도 자기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더구나 대각사의 중들을 극히 증오하던 양몽환은 사정 볼 것 없다는 듯
추혼십이검(追養十二劍)의 수법을 전개하며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번쩍 들었던 칼을 내려쳤다.
그와 함께 양몽환의 칼끝에는 계도를 휘두르던 중의 한쪽 팔이
<풀썩!>
잘라져 떨어졌다.
「아이쿠!」
하는 비명 소리와 신음소리 그리고 칼이 부딪치는 쇳소리는 적막한산 속의
어두운 밤을 온통 뒤집어 놓았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도옥의 날카롭고도 매서운 금환에 적운 추풍구를 노리던 선장의 중이
두 동강이가 나며 피를 뿜는 것이었다.
일시에 두 명의 동료를 잃은 나머지의 중들은 악이 날대로 났다.
있는 힘을 다하여 하림과 양몽환에게 합세하여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을 간단히 막아내며 역습해 오는 데는
잠시 뒤로 주춤 물러서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바로 그때,
뒤에서 기회만 노리고 있던 도옥의 날카로운 눈이 번쩍하며 빛났을 때에는
한 주먹의 독침이 기다렸다는 듯이 허공을 가르며 날았다.
「아차!」
두 명의 중들은 거의 동시에 이구동성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앞에 있는 양몽환과 하림을 겨누던 중들은
뒤에서 도옥이 기다리고 있는 줄은,
더구나 독침을 뿌릴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었다.
중들의 몸에 박힌 무수한 독침은 사정없이 독을 발산하여
그들의 몸을 흐느적흐느적하게 마비시켜 버리고 말았다.
이윽고 그들은
<뎅그렁!>
무기를 떨어뜨리며 썩은 나무기둥 쓰러지듯
힘없이 쓰러져 버리고 주위는 다시 조용해 겼다.
그러자 제일 먼저 양몽환의 칼에 한 쪽 팔을 잘린 중이
갑자기 일어나서 북쪽을 향해 달아나는 것이었다.
이것을 본 도옥은
「이 도적놈아, 네가 가면 어디까지 갈 테냐?」
외치고는 적운 추풍구에 나는 듯이 올라타자
천리마는 쏜살같이 도망가는 중을 쫓아갔다.
죽을힘을 다하여 달리는 중을 쉽게 쫓아간 적운 추풍구는 몇 걸음의 거리를 두고 섰다.
순간…,
도옥의 금환검이 파란 빛을 번쩍이며 허공으로 솟았다가 내려치는 찰나,
중의 머리가 댕강 잘라져 떨어지고 머리를 잃은 몸뚱이는 몇 걸음이나
더 앞으로 달리다가 허깨비처럼 나둥그러지고 말았다.
양몽환과 하림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온 도옥은 피 묻은 칼을 쓰러진 중의 옷에 닦으며
「양형! 아무래도 저놈들이 무슨 눈치를 챈 모양이오.
여기 이놈들은 내가 아까 만났던 놈들과는 다르오.
내 이렇게 대각사의 중놈들이 형편없는 줄은 몰랐소.」
하고 양몽환과 하림을 번갈아 보고는
「어떻소? 양형이나 사매도 무술이 보통이 아닌데
우리 셋이서 대각사로 쳐들어가 몽땅 해치웁시다.」
하고 기세 있게 말하는 것이었다.
도옥의 자신 있는 말을 듣고 양몽환은 얼굴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주백의가 나에게 빨리 이곳을 떠나라고 한 것은 결코 농담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주백의는 나보다 더 영리하고 생각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이곳을 떠나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양몽환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진퇴양난의 근심에 싸여 있었다.
양몽환의 이와 같은 표정을 지켜보던 도옥은 자기의 성미대로 한다면
벌써 대각사로 달렸을 것이다.
그러나 양몽환의 옆에 서 있는 하림의 얼굴을 본 도옥은 더 재촉하지 못하고
하림의 얼굴만 주시하고 있었다.
하림은 밝은 눈을 내려 깔고 쓰러져 죽은 중들의 시체를 보고 있다가 양몽환을 불렀다.
「오빠! 저 중들이 불쌍해요. 땅 속에 묻어 주면 좋겠어요.」
하는 하림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하림의 순진성에 감동한 양몽환은 고개를 끄덕이고 곧 땅을 파기 시작했다.
양몽환이 땅을 파기 시작하자 하림도 검을 뽑아 들고 땅을 팠다.
그러는 한편…,
자기가 묻는 말에는 대답도 없이 하림과 땅을 파고 있는 양몽환을 노려보던
도옥은 화가 부글부글 끊었다.
그때 하림이 도옥을 바라보며
「도옥 오빠도 좀 거들어 주세요.」
하는 바람에 무안을 당한 도옥은
「아‥‥ 아‥‥」
괴상한 소리를 연발하며 칼을 뽑아 들고 땅을 팔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꽤 넓은 구덩이가 파졌다.
네 명의 시체를 묻고 흙을 덮었을 때는 어지간히 밤도 깊어 거의한식경이나 되어 있었다.
네 명의 시체를 완전히 흙을 덮어 묻은 다음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도옥은 자기도 모르게 하림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을 억제할 수없어
하림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외면하며 실소했다.
(왜 그럴까? 그녀의 아름답고 귀여운 얼굴과 한없이 밝은 눈동자가
나를 못 견디게 하는 것은‥‥ 왜 그럴까?)
이렇게 황량한 생각을 하던 도옥은 맞은편 남쪽에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저 원시림은 적어도 만경(萬頃) 이상이 될 거요. 하루 이틀에는 꺼지지 않겠는데 ……」
하는 말에 하림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도옥에게 돌리며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많은 짐승이 불에 타 죽겠죠. 불쌍해요, 우리들이 저 불을 끌 수 없을까요?」
양몽환은 고개를 흔들었다.
「서 너 사람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지!」
하고 대답하자
도옥이 웃으며
「지금 저 불은 퍼질 대로 퍼져서 사 오백 명의 사람으로도 끌 수 없을 거요.
비가 쏟아지거나 아니면 부근 산봉우리의 만년이 넘는 얼음이 녹아 홍수가 되어
흐른다면 몰라도 저쪽 숲이 다 타기 전에는 힘들지요.」
하고 말을 마치는데 어디선가 심금을 울리는 이상한 피리 소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들려왔다. 하림이 놀래서 양몽환에게 다가오며
「오빠! 이 소리는 귀신의 소리가 아니에요?」
가늘게 떨리는 음성으로 묻는 것이었다.
양몽환 역시 그 소리가 어느 정도 마음을 오싹하게 하는
음산한분위기를 조성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하림과 같이 떨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니! 겁낼 것 없어!」
그러자 가만히 피리 소리를 듣고 있던 도옥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이것은 녹림도(緣林道)에서 사용하는 것인데 신호하는 것이오.
외부의 사람이 듣기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들려오는 것 같지만
무슨 소식을 전달하고 있을 거요,
이는 귀초(鬼哨)라는 것으로 오금(五金)을 혼합하여 만든 것도 있고
대나무로 만든 것도 있는데 밤에는 수 십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죠.
잘 들어 보시오.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 올 테니.」
과연…,
얼마 안 있어 그 괴상한 피리 소리가 멈추자 약 일각의 시간을 두고
또 다른 피리 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려왔다.
도옥이 웃으며
「아마도 대각사의 중놈들 짓인 것 같소. 선후호응(先後呼應)하는
이 소리는 지금쯤 수림지(樹林地) 밖으로 전달되었을 겁니다.
이것을 사용하면 하루 저녁에‥‥.」
하는데
그들이 서 있는 산꼭대기에서
(삐익! 삐익!)
소름이 끼치는 듯한 피리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를 듣자 급히 금환검을 빼어든 도옥은
「중놈들이 여기까지 온 것 같소. 우리들을 포위할 모양이오.」
했을 때였다.
돌연…,
맞은 편 산꼭대기에서 불빛이 번쩍이며 몇 사람의 그림자가
그들을 향하여 달려오는 것 같았다.
양몽환은 하림의 손을 잡고 일어나면서 나직한 음성으로
「도형!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으오.」
하자 도옥은 담담한 목소리로 웃으며
「피하기도 틀렸소. 그들은 이곳 지리에 밝을 뿐 아니라
도처에 매복하고 우리를 포위 공격하여 올 것 같소.」
「그렇다면 또 싸워야 갰군.」
도옥이 껄껄 웃으며
「그렇죠, 그들이 수가 많아지면 포위망을 뚫기가 곤란해질지도 모르오.
날이 밝기 전에 먼저 공격하여 물리쳐야 할 겁니다.
두 분이 또 자비심을 가지고 대한다면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진 못할 것입니다.」
하고는 왼 손으로 한 주먹의 독침을 움켜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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