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비연경룡

제 5 장 사랑을 찾아 꽃 피우는 여인들 <兩女愛深>

오늘의 쉼터 2014. 6. 22. 10:28

제 5 장 사랑을 찾아 꽃 피우는 여인들 <兩女愛深> 
 

 

  청의 소녀는 야경을 감상하는 것처럼 하면서 양몽환을 뚫어지게 쏘아 보며

곧은 자세로 거만하게 지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일양자는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참! 이상한 사람이군! 그러나 우리에게 악의는 없는 모양이다.」

  이때 양몽환이 스승을 바라보며

「영계현에서 제가 만난 일이 있는데 우리들의 뒤만 쫓고 있습니다.」

하고 그동안의 일을 자세하게 말했다

  일양자는 한참 생각하다가

 

「무술계에는 상상 이외로 이상한 사람들이 많으니 항상 조심하면 염려 없다.」

 

  그는 말을 하면서 그 청의 여인의 거동과 뒤를 쫓는 원인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 이유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

그들은 하루 밤을 노숙한 후 다음날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길을 재촉했다.

날이 새면 걸음을 재촉하고 딴에는 노숙을 하며 십 여일을 지난 후

비로소 강서성에 도달하였다.

  도착한 즉시 가마를 버리고 마차로 옮겨 탔다.

그리고 행인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하림과 동숙정을 마차에 태웠다.

그러나 역시 화상과 도사 그리고 경장을 한 양몽환의 늠름한 모습이

사람의 눈을 피하기에는 힘들었다.

  며칠을 쉬지 않고 마차를 몰아 파양호 부근의 교두부에 도달하였다.

  이곳은 상업 도시여서 그런지 수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일양자는 일행을 이끌고 여인숙을 찾아 피곤한 몸을 쉬게 한 후

홀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 넓은 파양호에서 비록 천하에 명성을 떨친 묘수어은

소천의 이지만 어디 가서 찾는다는 말인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교두부에 도착한 사흘 째,

  아침부터 묘수어은 소천의를 찾으러 나간 일양자는 점심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양몽환은

 

  (가만히 앉아서 돌아오기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나가서 찾아보자)

 

   이렇게 생각하고 밖으로 나왔다.

거리는 왕래하는 사람들로 붐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사람들 틀에 끼여 밀리는 대로 얼마를 배회하는 동안에 파양호 호반까지 오게 되었다.

호중(湖中)에는 수 십 척의 배가 여기 저기 정박해 있고 끝없는 호수의 경치는

동정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양몽환은 스승을 찾는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에 도취되어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홀연!

 

  은방울 같은 밝은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호…… 호…… 왜 혼자 오셨어요? 사매는 안 오시고……」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바로 청의 소녀가 생끗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양몽환은 흠칫 놀랐으나 곧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소녀를 향해 미소를 띠우고는 다시 호수로 눈을 옮겼다.

 

  순간 ….

 

  청의소녀 이요홍은 한줄기의 수치감과 분노로 눈물을 흘릴 듯 했으나 억제하고

양몽환의 앞을 가로 막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 그날 저녁 제가 아니었더라면 도망갈 수도 없었고

당신 대신 제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하마터면  죽을 뻔 했는데

오늘 만나도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조차 없으세요?」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녀의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가늘었다.

그때야 양몽환은 그녀의 도움으로 위기를 빠져나온 일을 상기했다.

 

  (만일 청의 소녀가 소식을 전해 주지 안했더라면?……)

 

하는 생각에 미치자 소녀의 애처로운 모습 앞에서 너무나 무정한

자기 스스로를 뉘우치며 곧 부드러운 미소를 보냈다.

 

「제가 지금 극히 곤란한 일을 생각하느라고 그만……」

 

  말을 마치지 못하고 미안해하며 사과했다.

 

  이요홍은 양몽환의 얼굴에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보고

또한 수심에 찬 것을 느끼고는 밝은 얼굴로 웃으며

 

「그런 줄도 모르고…… 그런데 무슨 곤란한 일이 있으신지?

저에게 말씀해 주실 수 없어요? 도와 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드리겠어요.」

 

하고는

 

「사매를 잃으셨나요?」

 

하고 걱정스럽게 묻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걱정의 빛을 띠우는 그 천진한 모습이

더욱 정다움을 느끼게 했다.

 

「아닙니다. 저는 은퇴한 기인(奇人)을 찾고 있습니다.」

 

  그 말에 이요홍은 고개를 갸우뚱 하고 생각 하더니

 

「혹시 찾는 사람이 묘수어은 소천의가 아닌지요?」

 

  양몽환은 놀라며

 

「맞았소! 이 소저께서는 그분의 거처를 아십니까!」

 

  이요홍은 웃으며 말했다.

 

「알고말고요. 호 호…… 만일 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몇 개월을 찾아 헤매도 아마 찾을 수 없었을 거예요.」

 

  양몽환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럼, 이 소저는 어떻게 아시지요?」

 

「왜 제가 모르겠어요? 저의 의부(義父)인데요!」

 

「예? 의부시라고요? 그럼 거처를 아시겠군요?」

 

「알고는 있지만 의부는 이미 은퇴하여 오년이란 먼 전날부터 손님은 사절이래요.」

 

  양몽환은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 들어 가는 듯 했다.

 

  (사숙 혜진자의 무술이 완전히 상실된 지금 오로지 묘수어은 소천의에게

희망을 걸고 이곳까지 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다행히 이요홍을 만나 상면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가 했는데

만나 주지 않는다면……)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이요홍을 이용하여 묘수어은

소천의와 상면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어떠한 방법으로 이요홍의 마음을 돌리는가?

  이윽고 양몽환은 수심에 가득 찬 얼굴을 들고 이요홍에게 사정하려 했다.

  그러나 양몽환의 일거일동을 지켜보고 있던 이요홍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의 의부님은 만나서 무얼 하시겠어요?

혹시 당신의 보배 같은 사매님께서 중한 병에라도 걸렸나요?」

 

  양몽환은 잠잠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 이요홍의 마음 한구석을 꿰뚫어 보고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이요홍은 하림 사매를 시기하고 있다)

 

고 느낀 것이다.

 

그러나 양몽환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사매가 아니라 저의 사숙님이 아프십니다.」

 

  이요홍은 눈을 크게 뜨고 놀라며

 

「곤륜삼자가?」

 

「사숙(師叔) 혜진자가 구원의 금선사(金線蛇) 독에 걸려 위독하십니다.」

 

하고 말할 바로 그 때였다.

 

  호중(湖中)에서 쾌속정 한 척이 질주해오다

이요홍과 양몽환이 서 있는 앞 부두에 멈추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배 위에 서 있던 두 명의 어린 소녀가 이요홍 앞으로 다가와 공손히 절하며 말했다.

 

「저의 아가씨가 음식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희와 같이 이 배를 타고 오시라는 분부 이십니다.」

 

  이요홍은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려 다시 양몽환을 바라보며 생끗 웃었다.

 

「먼저들 가거라! 곧 간다고 전해라」

 

  두 소녀는 이요홍의 말을 듣고 다시 허리를 굽혀 절한 다음

조용히 물러가 배 위로 올라갔다.

  두 시녀가 돌아가자 이요홍은 양몽환의 얼굴 앞으로 바싹 다가서서 정다운 목소리로

 

「바쁘시지 않으시면 저와 동행하여 주실 수 없을까요?」

 

  초대에 동행할 것을 바라는 이요홍의 마음을 알아 챈 양몽환은

묘수어은 소천의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이라도 하기로 이미 결심이 되어 있었다.

  이요홍의 말이 내심 반갑기는 했으나 정중히 거절하는 것처럼 표정을 지으며

 

「고맙소. 그러나 소저를 청하는 초대인데 어찌 제가 가겠습니까?

또 제가 간다면 불편함이 있을까 걱정 됩니다」

 

  이요홍은 웃으며

 

「염려할 것 없어요.

더구나 배 안이 이곳 보다 조용해서 이야기하기도 좋을 것 같아요. 같이 가요.」

 

「그럼 폐를 끼치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저의 소원인 소노선배님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하며 읍(揖)했다.

 

  그러나 이요홍은 읍을 받는 것이 부끄러운 듯 몸을 돌리며

한 쪽으로 외면하고 입을 가리고 약간 웃었다.

 

「그럼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 작정이시죠?」

 

「무엇이나 보답할 수 있다면 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가십시다.」

 

  이요홍의 뒤를 따라 배에 오른 양몽환은 배안이 깨끗하게 정리 되 있음에 놀랐다.

  미리 준비된 꽃무늬의 팔선탁자(八仙卓子) 위에는 음식이 가득히 차려져 있고

방안은 온통 주란(朱欄)꽃 향냄새로 가득차있었다.

양몽환이 두리번거리며 여기저기 바라보고 있을 때 한 쪽 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짙은 녹색 옷을 입은 소녀가 칠흑같이 검은 머리를 날리며 사뿐 사뿐 걸어 나왔다.

  이요홍은 그 소녀에게로 달려가 손을 잡으며

 

「동생! 동생의 동의도 얻지 않고 손님 한분을 모셨으니 용서해요.」

 

하며 양몽환을 가리켰다.

 

  녹의 소녀(綠衣少女)는 양몽환을  훑어보고 그의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와

늠름한 모습에 반하듯 바라보다가 이요홍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홍언니! 언니와 어떻게 되는 사이죠?

미리 말씀도 안 하시고…… 반했어요. 호호……」

 

  이요홍도 생끗 웃으며 눈을 가늘게 흘기는 듯하다가

 

「미안해, 지금 곧 소개해 줄께!」

 

  녹의 소녀는 수줍은 듯 눈을 내려 깔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요홍은 녹의 소녀를 이끌고 양몽환 앞으로 다가 왔다.

그리고 양몽환에게 녹의 소녀를 가리키며

 

「이 분이 바로 의부의 따님인 녹봉황 소설군(緣鳳凰蕭雪君)입니다.」

 

하고 소개 했다.

 

  양몽환은 약간 허리를 굽혔다.

 

「용서하시오. 이소저의 불청객으로 그만 이렇게 실례하게 되었소이다.」

 

  소설군은 상냥히 웃기만 했다. 그때 이요홍이 나서며

 

「왜 제가 강제로 끌고 왔다는 말씀은 안 하시죠?」

 

하고는 정다운 눈빛으로 양몽환을 흘기는 듯하다가 녹의 소녀에게 말했다.

 

「이분은 양몽환이라 부르며 곤륜파의 일양자 노선배님의 제자야」

 

  그러자 소설군은 의자를 가리키며

 

「누추한 곳에 왕림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처음으로 양몽환에게 말하며 고개를 숙여 목례했다.

양몽환도 녹의 소녀에게 답례하고 팔선탁자를 가운데로 하고 의자에 앉았다.

  양몽환이 앉기를 기다려 이요홍, 소설군도 잇따라 나란히 앞자리에 앉았다.

세 사람이 자리에 앉자 배는 호심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호수 가운데로 천천히 달려가는 배 안에서는 세 사람이 마주 앉아

술잔을 돌려가며 취홍에 잠겨 있었다.

  진귀한 음식과 향내 나는 술은 방안의 분위기를 더욱 황홀하게 하여 주었고

두 소녀의 몸에서 나는 향냄새와 주란꽃 냄새는 양몽환을 더욱 황홀하게만 하는 것이었다.

 

  어느덧 술도 몇 순배!

  양몽환의 의기는 점차로 대담해지며 부끄러움 없이 말할 수 있도록 되었다.

 

「이 소저! 이제는 저의 약속도 지켜 주셔야죠?

이소저의 말대로 이곳까지 따라 왔으니 말입니다. 하…… 하」

 

하는 양몽환의 말에 이요홍은 들었던 술잔을 놓았다.

그녀의 취기 어린 눈빛에는 정이 가득히 고여 있었다.

 

「의부님을 만나 보시겠다는 것 말씀이죠?」

 

「그렇습니다.」

 

  그러자 이요홍보다 먼저 녹의 소녀 소설군이 말했다.

 

「저의 아버님을 만나시려고요?」

 

「네, 급한 일이 생겨서……

어떻게 거처만이라도 가리켜 주시면 감사하겠소이다.」

 

  눈을 깜박거리던 소설군은 이요홍을 돌아다보고 웃으며

 

「홍언니! 약속하셨어요? 이분과?

  술에 취한 듯 두 볼이 복숭아 빛으로 물든 이요홍은 눈을 가늘게며

 

「안 된다고 몇 번 말씀을 드렸는데도 굳이 만나게 해 주십사 간청해서……

스승님이 중환이시라고.」

 

  이때 말을 막으며 녹의 소녀는 양몽환을 바라보았다.

 

「저의 아버님은 이미 무술계에서 은퇴한 사람,

천용방에서 그렇게 오시라고 해도 안 간 사람이에요.

그런데 중한 병을 고치기 위해서라고 무술계에 나선다는 것은 곤란할 거 에요.」

 

  양몽환은 잠시 실의에 빠졌다.

그러나 곧 머리를 흔들며 들었던 술잔을 놓았다

 

「소 노 선배님처럼 천하제일의 의술을 가지신 분이 중한 병에 들어 고생하는 사람을

구해준다면 그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

두 소저께서 간청하여 저의 셋째 사숙의 병을 치료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정중한 청에 이요홍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모르시는 말씀, 무술계 고수들의 병은 거의 싸우다 다치는 병이에요.

그런데 만일 저의 의부께서 그 병을 고쳐 준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자기를 해한

사람에게 복수를 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저의 아버님은 병을 고쳐 주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복수하게 하는 것 이 외에 무엇이 있겠어요?」

 

「아니 그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틀림없는 일이에요.

원수를 많이 만드는 병 치료는 무슨 일이든 사절 입니다」

 

양몽환은 적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림 도저히 방법이 없다는 말씀이군요!」

 

이요홍은 실망하는 양몽환을 바라보자 어떤 알지 못할 정이 솟아났다.

 

「아직 실망하지는 마세요, 다른 방법을 생각해볼게요.」

 

「꼭 이루어 주십시오.」

 

「그럼 술을 더 들어요.」

 

실망에 가득 찼던 양몽환은 생기를 되찾으며 손을 흔들었다.

 

「더는 못 마시겠어요, 아주 취하는 걸요.」

 

「그럼 차라도」

 

  이요홍은 소설군을 바라보며 대신 차를 청했다.

술잔이 차 잔으로 바뀌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때, 녹의 소녀 소설군은 이요홍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다가는

 

「언니!」

 

하고 불렀다.

 

  소설군의 부르는 소리에 대답 대신 고개를 돌린 이요홍의 얼굴은 꽤 붉어져 있었다.

그러나 붉어진 얼굴은 취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난 지금, 언니가 말하는 것을 잘 모르겠어요.」

 

「무슨 말을?」

 

「의부를 어떤 방법으로 만나게 해드린다는 것인지 말이에요」

 

「글쎄…… 동생이 힘을 도와준다면 될 것 같아」

 

「제가 어떻게 도우면 돼요?」

 

  이요홍과 소설군의 대화를 듣고 있던 양몽환은 점점 취해 오는 몸을

가누기 힘들어 찬바람을 쏘이려고 밖으로 나갔다.

 

「곤륜 삼자가 우리 의부를 찾아 가게 하는 방법」

 

「그럼 의부의 거처를 가르쳐 주라는 말인가요?」

 

「그런데 간단한 일이 아니어서 걱정이야,

의부가 거절하지 않는 방법이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안 된다고 명백하게 말을 하면 되잖아요?」

 

「그럴 수는 더욱 없고……」

 

  이요홍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일시 우수의 점은 그림자가 지나갔다.

이요홍의 안타까운 듯한 표정을 지켜보고 있던 녹의 소녀는

가늘게 한숨을 쉬며 떨리는 음성으로

 

「이 동생이 수고해서 될 일이라면 도와 드리겠어요.

언니만 기뻐한다면 무슨 일이든지 할게요.」

 

「그러나 내가 그들을 도와주어서 의부를 만나게 해 주어도

별로 고맙게 생각하지는 않을 거야!」

 

  근심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녹의 소녀는 이러한 이요홍의 마음을 알 길이 없었다.

 

「감사해 하지도 않을 일을 언니는 왜 하려고 그러세요?」

 

그러자 한참 후 후욱-- 한숨을 쉰 이요홍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도 모르겠어, 이런 것이 정이라는 것일까?

서로 파가 다르니 언제 적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을……」

 

「호……호…… 언니의 마음 이젠 알았어요.」

 

  녹의 소녀는 이요홍의 마음이 양몽환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 챌 수 있었다.

 

「언니는 얼마나 좋을까?……」

 

  놀리는 듯 말하는 소설군의 말을 듣고 얼굴이 더욱 새빨개진 이요홍은 표정을 바꾸며

 

「동생도 그런 때가 있을 걸……」

 

「제발……」

 

이요홍과 소설군은 서로 마주 바라보며 함께 웃었다.

그러던 이요홍은 웃음을 그치며,

 

「그런데 이렇게 하면 어떨까?」

 

「내일 호수에서 곤륜파와 시비를 걸고 싸우면?」

 

「그러면요?」

 

「우리가 지는 척 하고 뒤로 물러서면 그들이 따라 올 것이 분명하지?」

 

「물론, 따라 오지 않고 어쩌겠어요.」

 

「바로 그거야,

그때 동생이 수고롭지만 우리 편이 지는 척 하고 집에 돌아와 의부님께 구원을 청하면」

 

「그러면 그들과 만날 수 있다는 거죠?」

 

「호호……」

 

「그러나 만일 그들이 우리에게 진다면 어쩌죠?」

 

「지는 척 해주어야지.」

 

  소설군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고 내일의 행동 계획을 짰다.

모든 계획을 세운 이요홍과 소설군은 아직도 먼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양몽환의 옆으로 다가 갔다.

  그러나 양몽환은 옆에 누가 온지도 모르고 앞 쪽만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요홍과 소설군은 양몽환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양몽환이 바라보는 앞 쪽을 바라보고

새로운 현상에 놀랐다.

약 십여 장 거리의 밖에 파도를 헤치며 질주해 오는 한 척의 배를 발견했다.

거리가 워낙 멀어서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그 배에는 선비차림의 소년이

청의 도포(靑衣道布)를 입고 양몽환이 서 있는 쪽을 바라보는 듯 서있고

회색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이 등을 돌리고 열심히 노를 젓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배는 순식간에 오척 가량의 거리를 두고 옆으로 질주해 갔다.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배는 회색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이 젓는 노에 물방울이

산지사방으로 부서지며 흰 물거품을 내는 것이었다.

  이요홍은 노를 젓는 노인이 뒤로 돌아 앉아 노를 젓기 때문에 얼굴을 볼 수 없으나

그 힘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더욱 이상한 것은 뱃머리의 청의 도포를 입은 소년의 얼굴이었다.

눈이 부리부리 하고 어깨가 딱 벌어졌는가 하면 늠름한 자세와 웃는 듯한

그의 환한 얼굴이 정말 잘 생긴 얼굴이었다.

 

  (참 잘 생긴 남자구나)

 

  속으로 감탄을 연발하며 멀리 사라지는 소년의 모습에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양몽환이 그러하듯 청의 소년도 양몽환을 바라보며 웃음을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청의 소년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다보며 양몽환에게 신비한 미소를 보내는 것이었다.

  배가 멀리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될 때 까지도 눈을 돌리지 않고 지켜보고 서 있었다.

  이요홍은 양몽환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아는 분이세요?」

 

  그제야 양몽환은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돌리며 웃고 말했다.

 

「아니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거의 한달 동안에 세 번이나 만났죠.

처음 절강성 영계현성에서 만난 후, 줄곧 우리를 따르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곳 파양호까지 왔군요.」 

 

  이요홍은 갸우뚱거리며

 

「그래요? 전 아직 본 일이 없어서 누구인지는 알 수 없어요,

그러나 노를 젓는 사람의 힘이 굉장하군요.」

 

「왜 여기까지 따라 왔는지 모르겠는데……」

 

  양몽환은 그가 이곳까지 쫓아 왔다는 것이 반가울 리 없었다.

그의 뇌리에는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가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요홍은 양몽환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하는 것이었다.

 

「혹시 그 귀원비급을 찾으려고 쫓아 왔는지도 몰라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귀원비급도 알고 보면 무슨 짐승의 그림이라는데……」

 

「짐승의 그림이요?」

 

「그렇습니다. 아직 모르고 있었던가요?」

 

  이요홍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그러나 그 귀원비급이 절세의 진귀한 보배라 하더라도 저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어요.」

 

하는 이요홍의 말 속에는 어떠한 올가미가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양몽환은 더 이상 귀원비급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양몽환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화제를 바꾸었다.

 

「그럼 약속대로 의부님의 거처를 가르쳐 주십시오.」

 

하는 말에 이요홍은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유유히 대답했다.

 

「그 일은 제가 힘 있는 데 까지 노력은 하겠어요.

그러나 저의 의부님은 고집불통이어서 대답할 수가 없어요.」

 

「그럼 안 된다는 말씀이군요.」

 

다급하게 물었다.

양몽환의 초초해지는 모습을 바라보다 이요홍은 비꼬는 듯한 소리로

 

「그렇게 급하게 서두루진 마세요.

아직 제 이야기가 끝나지도 않았잖아요?」

 

  그제야 양몽환은 자기의 표정이 그렇게까지 급했던가 생각하고 침착하게 말했다.

 

「용서하시오. 너무 걱정한 나머지……」

 

「알겠어요. 저의 아버님도 인정이 있는 분이라 자세한 말씀을 드리면 될 거예요.」

 

「그러나 어디에 계시는지 거처를 모르는데 어떻게 자세한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그건 염려 없어요. 이미 다 생각해 두었어요.」

 

  이요홍의 말에 양몽환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좋아하며

그 생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싶었다.

 

「어떤 생각이신가요? 빨리 말해 주십시오.」

 

  이요홍은 기뻐하는 양몽환을 정답게 바라보며 생끗이 웃었다.

 

「그것은 이렇게 하면 될 거예요.」

 

「어떻게요?」

 

「내일 오정 때쯤 이곳에서 내 동생 소설군 아가씨와 싸움을 벌여요.

그러다 우리 편이 지면 내 동생이 의부님께 구원을 청하러 가거든요.」

 

「그러면?」

 

「그러면 의부님께서도 이곳에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되거든요.」

 

「과연……」

 

「그때에 만나서 말씀하세요.」

 

「하아…… 좋은 생각이군요. 그러나 너무 소설군 소저께 미안해서……」

 

  이요홍은 자기의 꾸민 일에 감탄하는 양몽환을 보며

 

「그러나 너무 기뻐하진 말아요. 만일 진다면 만사가 무로 돌아가게 돼요」

 

「그러면? 정말 싸움을 하란 말인가요?」

 

  양몽환은 놀랐다.

 

「호…… 호…… 눈치껏 싸우면 돼요. 그러나 당신 사매가 눈치 채면 큰일 나요.」

 

  그제야 모든 것을 알게 된 양몽환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저의 사매는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소저 입니다. 너무 흠 잡지 마시오.」

 

  그러자 이요홍은 눈을 흘기듯 하며 차갑게

 

「그렇겠죠. 순진할 뿐 아니라 꽃같이 아름답고 또 당신에게 깊은 정도 있고요.」

 

하는 이요홍의 말 속에는 뼈가 들어있는 질투 그것이었다.

양몽환은 이요홍의 말을 듣고 약간 불쾌했으나 이요홍의 뜻이

이미 자기 자신에게로 향한 것을 느끼고 얼굴을 붉혔다.

더 이상 이요홍과 함께 있기가 거북하였다.

 

  양몽환은 이요홍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웃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이 소저! 오늘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 많았습니다.

날도 저물었는데…… 돌아갈까 합니다.」

 

  그러나 이요홍은 질투가 가득 찬 얼굴을 들면서

 

「불쾌하신가요? 가시더라도 제가 모셔드리겠어요.

호반에서 이곳까지는 십리가 넘어요, 날아갈 수도 없는데……」

 

  양몽환의 마음은 괴로웠다.

 

  (하림과 이요홍의 뜻이 같은데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라고 생각하며 사방을 휘이 둘러보았다.

 

  이요홍의 말대로 호반은 십리 길이 넘는 거리에 가물가물 보이고

망망한 호수는 거울처럼 맑을 뿐이었다.

  양몽환과 이요홍은 아무 말 없이 돌아 서서 방으로 들어가려다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그것은 쾌속정의 돌연한 발동 소리가 뒤에서 날카롭게 들려온 때문이었다.

조용하고 망망한 호수에 언제 쾌속정이 나타났을까 하고 생각할여유도 없이

질주해온 배는 청의 소년이 타고 있던 바로 그 배였다.

뱃머리에 늠름하게 버티고 서 있던 청의 소년은 양몽환과 이요홍이 돌아서는 것을 보자

여유 있게 웃으며

 

「벌써 가시렵니까? 우리도 교주 부두까지 가는데 같이 가는 것이 어떻소?」

 

  양몽환은 생각지도 않았던 청의 소년의 청을 듣고 미처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데

다시 청의 소년의 말소리가 들렸다.

 

「나뭇잎 같이 작은 배지 만 사양하지 마시오.

 파도를 헤치고 질주하는 맛이 상쾌하기도 하오」

 

  양몽환은 얼마동안 생각에 잠겼다

 

  (같이 타고 가면서 청의 소년의 마음속을 알아보는 것도 좋으리라. )

 

  이렇게 생각한 양몽환은 이요홍과 녹의 소녀 소설군에게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폐를 끼칠 수 없으니 이분의 배로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작별을 고하고 곧 작은 배로 옮겨 탔다.

 

  양몽환이 가벼운 동작으로 옮겨 타자 배는 기다렸다는 듯이 파도를 헤치며 질주해 나갔다.

배가 빠른 속도로 얼마를 달린 다음 청의소년이 손짓을 하자 빠르게 달리던 배는

속도를 늦추며 천천히 나아갔다.

 

  배의 진동이 적어지며 속도가 늦추어 지자 청의 소년은 양몽환을 바라보며

 

「무례함을 용서하오.

좋은 음식으로 대접하지는 못하나 이야기라도 하면서 가는 것도 좋지 않소?」

 

  양몽환은 대답대신 웃으며 청의 소년의 얼굴을 여러모로 관찰했다.

과연! 멀리서 느낀 바와 같이 청의 소년은 준수하고 잘 생긴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 퍼지는 광채가 사람을 위압하는 듯 날카로웠다.

  그러는 한편 양몽환의 대답을 기다리는 청의 소년은 자기를 자세히 쳐다보며

미소만 띠우는 양몽환의 얼굴도 과연 미남자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번까지 귀형과 나는 세 번째 만나는 듯싶소.

한 번 만나는 것도 인연인데 우리 서로 통성명이나 하고 지내면 어떻겠소?」

 

하고 속이 탁 트이게 말하는 청의 소년의 말을 듣고 양몽환도 쾌히 응했다.

 

「좋소이다. 저는 양몽환이라 하오.」

 

  청의 소년은 눈을 한바퀴 돌리고는 비로소 말했다.

 

「하아! 그렇소이까, 나는 성은 주(朱), 이름을 백의(白衣)라 부르오.」

 

하고는 조용히 웃는다. 

 

  양몽환은 그의 신비로운 웃음에 현옥된 듯 했다.

 

「참 좋은 이름이오. 그 이름과 같이 우아하고 또한 속세를 버린 분 같소!」

 

「속세를 떠난 사람이 어찌 이런 곳까지 왔겠소? 하하……」

 

하고 웃었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실의와 허탈을 감추려는 듯한 것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의 정체를 알 수 없고 더구나 지금의 표정으로 보아

깊은 곡절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물어 볼 수는 없었다.

 양몽환은 자리를 고쳐 앉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주형은 절강성 동녘에서 뵈었는데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셨소?」

  주백의는 고개를 돌려 잔잔한 호수를 내려다보며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한마디 했다.

 

「별 것은 아니요. 사람을 좀 찾을까 하고 있소이다.」

 

하고는 일어서서 뒷짐을 진채 뱃머리에 기대고 밀려 기는 흰 거품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청의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언뜻!」

 

지나가는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분명히 괄창산에서 만나본 청의 소년과 닮았다.

네가 추측하는 것이 옳다면 사태는 심상치 않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며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의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배는 다시 속도를 내어 질풍처럼 달려 순식간에 부두에 닿았다.

주백의가 먼저 호반으로 가볍게 뛰어 오르고 그 뒤로 양몽환이 올라갔다.

  부두로 올라온 주백의와 양몽환은 서로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양형! 차후에도 만났으면 좋겠소.」

 

  주백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동감이오. 그러나 주형은 내가 이미 몇 번 본 바와 같이 신출귀몰한데 어찌 만날 수 있겠소.」

 

  양몽환은 진심으로 그의 빠른 행동을 칭찬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주백의는 머리를 흔들며

 

「진정으로 하시는 말씀이오?」

 

「내 어찌 빈 말을 하겠소?」

 

「반갑소, 그럼 내일 또 만나기로 합시다.」

 

  한 마디를 남기고는 뱃머리를 돌리게 한 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여인숙으로 돌아온 양몽환은 문 앞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하림을 발견하고

다가가려고 하자 먼저 양몽환을 발견한 하림이 나는 듯 달려 왔다.

 

「오빠! 웬 일이세요?

반나절 동안이나 줄곧 찾았는데 아직 밥도 안 먹고 오빠가 돌아오기만 기다렸어요.」

 

하는 하림의 태도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하하…… 내가 일 년이고 이 년이고 돌아오지 않으면?」

 

  자기를 생각해 주는 것이 사실 싫지도 않았다.

양몽환은 정말 오빠처럼 하림의 손을 잡아 주며 농담으로 말했다.

그러자 하림은 눈물을 흘리며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지치면 죽어 버리겠어요.」

 

  하림의 말을 듣는 순간, 양몽환의 마음은 마냥 설레었다.

 

  (내가 정말 잘못 했구나, 순진한 하림을 울리게 하다니)

 

  마음속으로 사죄하며 하림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일양자가 기력을 운행조절하다 양몽환이 들어옴을 보고 근엄하게 물었다.

 

「어딜 갔다 오느냐!」

 

「묘수어은의 행방을 찾고자 다녀오는 길입니다.」

 

하고 공손히 절한 후,

그간 일어났던 일을 소상하게 말했다.

호중(湖中)에서 묘수어은 소천의를 만나게 될 것 같다는 이야기까지 다 듣고 난 일양자는

속으로 양몽환의 솜씨에 감탄했다.

 

  (나는 사흘을 두고 헤맸어도 소식을 못 들었는데

반나절 동안에 소식을 알아온 몽환은 과연 영리하구나)

 

  이렇게 생각한 일양자는 양몽환이 사랑스럽고 믿음직스러웠다.

그러나 담담한 어조로 말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어쨌든 가보자!」

 

  양몽환과 하림은 조용히 스승님 앞을 물러 나왔다.

 

  이튿날 아침.

  일양자의 일행은 약속한 호중(湖中)으로 배를 타고 나갔다.

배가 점점 호수 깊숙이 들어가자 누구나 없이 약간 불안한 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더구나 자기의 병을 치료 받기 위해서 아침부터 제자들을 고생시키는 것을 생각하며

혜진자는 감개가 무량하였다.

이윽고 호중에 도착한 일양자 일행은 배를 멈추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중에서도 양몽환은 더욱 초조해 하며 이요홍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빌고 있었다.

 

  그때, 과연 ….

 

  한 척의 배가 쏜살 같이 달러 오고 있었다.

거의 배가 마주칠 듯 가까운 거리에 까지 접근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배에서는

 

「올라가도 괜찮소?」

 

하는 소리와 함께 주백의가 벌떡 일어서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이요홍의 배인 줄 알고 있던 양몽환은 약간 실망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으며

 

「좋소

 

하고 고개까지 끄덕였다.

 

  주백의는 양몽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큼 옮겨 탄 후 자기가 타고 온 큰 배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회색 도포의 노인은 아무 말 없이 배를 돌려 사라지는 것이었다.

  주백의는 양몽환이 서 있는 곳까지 와서 고개를 숙여 보이며 나지막하게

 

「마음 놓으시오. 방해는 않겠소!」

 

  양몽환은 그냥 서서 담담히 웃은 후

  일양자에게 주백의를 소개했다.

  주백의는 일양자에게 공손히 읍을 하자 일양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면밀히 관찰하는 듯 하다 고개만 끄덕거릴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일양자는

 

  (비범한 인재로군!)

 

하는 생각과 어째 이곳에 나타났을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양몽환은 양몽환대로 돌연한 주백의의 출현으로 알지 못할 의심이 생겼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알고 오셨소?)

 

하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일양자의 앞을 물러선 주백의는 양몽환의 서있는 곳 가까이 다가오며

 

「양형! 나타났소이다. 준비하시오!」

 

하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긴장하며 앞을 바로 보았다.

 

  순간 ….

 

  한 척의 쾌속정이 흰 파도를 좌우로 가리면서 달려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워낙 먼 거리이기 때문에 이요홍의 배인지, 아닌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양몽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과연 이요홍일까 생각하는데 그 눈치를 챈 주백의가

 

「틀림없는 이요홍의 배요.」

 

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지척 간에 도달한 배는 이요홍의 쾌속정임에 틀림없는 그 쾌속정 이었다.

양몽환은 내심 주백의의 예민한 관찰력에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서운 안력(眼力)이다!)

 

하고 소리 없이 외쳤다.

양몽환은 일양자에게로 다가가

 

「사부님! 바로 저 붉은 색의 쾌속정입니다.」

 

하고 질주해 오는 쾌속정을 가리켰다.

 

  일양자는 입을 굳게 한일자로 다물었던 입을 떼면서

 

「음 그럼, 나가야지!」

 

하고는 배를 전진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양자의 명령이 일단 떨어지자 일양자의 일행을 태운 배는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 오는 쾌속정을 향해 힘차게 노를 저어 나가는 것이었다.

  드디어 두 척의 배가 서로 마주 바라볼 수 있는 가까운 거리로 좁혀졌다.

그러나 쾌속정은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정면으로 충돌할 기세였다.

  만약, 두 척의 배가 충돌한다면 일양자의 배는 문자 그대로 일엽편주!

산산조각이 나고 말게 되는 것은 물론 서로의 생명까지도 수중고혼(水中孤魂)이 될 위기였다.

  일양자의 뱃사공은 질겁하며 급히 뱃머리를 돌려 피하자 쾌속정은 다시 방향을 바꾸어

뒤편에서부터 달려드는 것이었다.

 

  위기일발!

 

  일양자의 뱃사공들은 젓던 노를 들고 만일 충돌하려고 가까이 오면

일제히 노를 이용하여 쾌속정을 떠밀려고 뱃전으로 나섰다.

 

  바로 그때 _ ,

 

  주백의는 황급한 소리로 양몽환에게 외치는 것이었다.

 

「빨리! 손을 쓰시오!」

 

  이 말에 양몽환은

 

「언뜻!」

 

  정신이 들며 이를 악물었다.

  양몽환은 주저하지 않고 사공이 들고 있는 노를 뺏어들자

 

「휘익」

 

허공을 가리면서 쾌속정의 뱃머리를 내리쳤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가?

 

  양몽환의 무서운 장풍으로 여지없이 뒤로 물러서야 할 쾌속정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 뿐인가?

 

  돌연!

 

  번쩍! 하는 파란 빛과 함께 날카로운 단검이 바람처럼 날아와 양몽환이 들고 있는

노를 댕강! 꺾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것이었다.

 

「양도령님! 노를 조심하세요!」

 

  양몽환은 산란해지는 정신을 수습하며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 쾌속정의 배 위에는 녹의 소녀 소설군이 요염한 자세로 서있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소설군의 기민한 행동에 적이 놀라며

 

  (깜직한 짓이군! )

 

하는 생각과 함께 문득 떠 오른 것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바로 그것이었다.

 

  양몽환은 순간,

 

「번쩍……」

 

  빛을 내며 바람을 가르고 날아오는 소설군의 긴 칼을 봉운폐월(封雲閉月)한 수로

가볍게 막으며 두 발에 공력을 가하여 쾌속정의 뱃머리를 밀었다.

  그러자 충들 직전의 두 배는 위기를 모면하여 두 배가 동시에 뒤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양몽환의 발길에 여지없이 밀려가던 쾌속정이 문득 주춤 서는 가 했을 때,

  쾌속정은 전술을 바꾸어 꼼짝 움직이지 않고 대신 소설군이 뱃전을 가깝게 대고

순식간에 몸을 날려 양몽환의 배로 사뿐히 내려 긴 칼을 휘두르며 접근해 오는 것이었다.

  드디어 칼과 칼이 마주치며 검광이 번쩍 이는 무서운 싸움은 벌어지고 말았다.

  소설군과 양몽환의 칼싸움은 모든 것을 잊어버릴 만큼 격렬한 싸움 그것이었다.

소설군의 무술은 정말 날카롭고도 빨랐다.

양몽환은 잠시 숨을 돌리며 날아오는 소설군의 공격을 피하면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소설군이 이렇게 달려든다면 어제 이요홍과의 약속이 틀리지 않은가?

서로 싸우는 척 하기로 했는데……)

 

  이러한 생각을 하는 양몽환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설군의 공격은 여유를 주지 않고 육박해 오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뒤로 뒤로 밀리다 하는 수 없이 적수박용(赤手縛龍)의 한 수로

소설군의 오른쪽 손목을 휘어잡았다.

그러자 약간 기운이 빠지는 듯 칼을 잡은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그러한 소설군의 손목을 놓아 주며 재빨리 몸을 돌려 소설군의 뒤로 피했다.

 

  순간…,

 

  소설군의 얼굴이 약간 붉어지는 가 했는데 다시 입을 꼭 다물며 공격해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소설군의 예리한 공격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더구나 공격하는 것도 모두

요혈(要穴)의 치명상을 입을 만한 부위였다.

  양몽환은 봉운폐월(封雲閉月)과 적수박용(赤手縛龍)의 수로 물리치고

공격해 오는 소설군의 무술에 감탄하며 한 번 더 신법을 쓰기로 하였다.

그것은 곤륜파의 삼십육식(三十六式) 천강장법이었다.

  갑자기 양몽환의 공격이 돌변한 것을 직감한 소설군은 약간 뒤로 물러서며

어떤 위험 앞에서 몸을 사리듯 움츠리며 조금 전처럼 날카로운 공격을 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양몽환과 소설군의 싸움은 거의 오 십 여수! 그러나 승부는 나지 않았다.

 

  한편…,

 

  일양자 일행 속에서 싸움을 보고 있던 하림은 양몽환의 공격이 지지부진함을 참지 못하여

대신 싸우려고 날카로운 눈에 광채를 띠우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하림과 똑같이 생각하고 있던 주백의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양형! 양보하지 말고 속히 싸워요!」

 

하는 소리에 양몽환은 비로소 무엇인가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렇지, 이렇게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렇게 결심한 양몽환은 즉시 무술의 신법을 발휘하여 공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소설군의 기기묘묘한 신법인 백운출유(白雲出?)를 막아내며 번개같이 옆으로 피한 양몽환은

일단 숨을 돌리고 날쌔게 달려들었다.

왼 손으로 추문견산(推門見山), 오론 손으로 삼성수월(三星遂月)의 두 수와 위로

천영혈(天靈穴)을 공격하고 아래로는 곡척혈(曲尺穴)로 공격하여 들어가며

잠시의 여유도 주지 않았다.

  이처럼 표변한 양몽환의 노도와 같은 공격에 당황한 소설군은 주춤 공세를 멈추고 말았다.

그 순간을 이용하여 손바닥을 쫙! 펴서 무서운 장풍을 냄과 동시에 방화불유(傍花拂柳)로

신속하고도 맹렬하게 내리쳤다.

천강장법 중에서도 가장 무섭고 묘한 절세의 한 수로 공격을 받은 소설군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쥐고 있던 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순간…,

 

  소설군은 온 몸의 기운이 다 빠지며 마치 마취되는 듯 하는 것을 느끼자

더 버티고 있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소설군은 양몽환이 새로운 신법을 이용하기 위하여 몸에 공을 집중 시키는 순간을 이용하여

 

  <휘익!>

 

  몸을 날려 자기의 쾌속정으로 피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 다음 순간-,

 

「오성강환(五星鋼環)의 맛이나 보세요!」

 

하는 소설군의 소리와 함께 강한 빛이 번개같이 양몽환을 습격 하는 것이었다.

 

  양몽환이 허리를 굽히며 소설군의 오성강환을 피하자

소설군을 태운 쾌속정은 파도를 헤치며 유성같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유성같이 달아나는 쾌속정을 바라보던 일양자는 뱃사공들과 함께

힘껏 노를 저어 추적해가기 시작했다.

 

  한편…,

  주백의는 양몽환 가까이 다가 와서 질주해 가는 쾌속정을 가리키며

 

「이런 배로 추적해 갈 수는 없소!」

 

했다.

 

  양몽환은 수심을 띠우며

 

「그럼? 다른 수가 없습니까?」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주백의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빙그레 웃고는 슬쩍 오른손을 들었다.

 

  그 순간…,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던 쾌속정의 속도가 돌연 느려지는 것이 아닌가?

  이 돌변한 사태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양몽환을

흘깃 바라본 주백의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가느다란 은빛의 실을 쥐어 주었다.

 

「양형! 이 줄을 잡고 계십시오,

지금 저 쾌속정과 이 배와는 양형이 가지고 있는 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니! 그럼?」

 

「예,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쾌속정이 이 배를 끌고 가는 중입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과연 노를 젓지 않아도 배는 잘 달리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그저 감탄하며 놀랄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엄두도 나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하고도 희한한 일이다.

도대체 이 부드러운 실이 무엇이란 말인가.

더구나 질주해 가는 쾌속정을 손 한번 들어서 이 가느다란 실로 얽어매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다……)

 

  이렇게 놀라던 양몽환은 또다시

 

  (어쨌든 이 신비한 주백의의 정체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하는 의문에 봉착하고 말았다.

 

  양몽환은 은실을 가만히 만지작거리며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경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주형의 신(神)같은 재주에 놀라고 감탄할 뿐입니다.」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주백의는 별로 신기한 일도 못된다는 듯 태연히 웃으며

 

「과분한 말씀이오.」

 

「천만에! 도대체 무슨 기술로 그렇게 달리는 쾌속정도 잡을 수 있습니까?」

 

「하…… 하…… 알고 싶으신가 보군요.」

 

  그러고는 느닷없이 너털웃음을 웃는 것이었다.

상쾌하게 웃는 주백의의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던 하림은 양몽환의 옆으로 바싹 붙어 섰다.

 

「오빠! 무슨 싸움을 그렇게 하셨죠? 더구나 여자와?」

 

  순간, 양몽환은 하림에게까지 이요홍과의 약속한 일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하림이 꼬치꼬치 묻는 것을 미리 방지해 두자는 속셈이었고

또한 이요홍의 이야기를 해서 마음에 어떤 충격이나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 별로…… 차후에 말해 줄께.」

 

  양몽환의 말에 하림은 고개를 끄덕인 후 주백의를 돌아보고 또 물었다.

 

「이 분은 오빠의 친구 분인가요? 전 처음 보는 분이군요.」

 

  하림의 물음에 양몽환은

 

「아하! 아직 몰랐던가?」

 

하고는 주백의를 소개하였다.

 

  하림은 주백의의 얼굴을 얼마동안 바라본 후 귓속말로 가만히 양몽환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오빠! 만일 여자라면 절세의 미인이 될 것 같아요.」

 

하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하림의 엉뚱한 이야기에 자못 놀라며 주백의 앞에서 둘이만

귓속말을 한 것이 실례되는 것 같아 사과하는 것처럼 말했다.

 

「주형! 미안하오. 하림은 아직 어려서 주형을 몰라보는 모양입니다.」

 

「별 말씀을…… 사매는 퍽 아름답군요.」

 

하고 조용히 웃는 것이었다.

 

  그런 후 하늘의 흰 구름을 쳐다보며 가볍게 한숨을 쉬는 것을 양몽환은 미처 보지 못하였다.

  하림은 주백의에게 눈을 돌리며

 

「용서해 주세요. 너무 버릇이 없어요.」

 

  하는 말에 주백의는 당황하며

 

「용서할 것까지야 있나요 뭐……」

 

하며 웃어 주었다.

 

  그제야 하림도 웃으며

 

「그럼 마음 놓았어요.」

 

  그러는 하림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잠시 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양몽환과 하림을 적이 바라다보던 주백의는

그들에게서 눈을 돌려 망망한 호수를 굽어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잔잔한 얼굴에는 호수에 파도가 일듯이 어떤 알 수 없는 감정이 굽이치고 있었다.

 

  한편…,

 

  하림은 양몽환의 손에 드리워진 은실을 뱃머리에 챙챙 가마 매고

 

「짝! 짝!」

 

  손뼉을 치는 것이었다.

 

「어머! 쾌속정이 우리 배를 끌고 가네요!」

 

  놀라움과 기쁨에 환성을 터뜨렸다.

  쾌속정이 양몽환의 배를 끌고 거의 한 시간을 달리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꾼 쾌속정은

멀리 보이는 섬을 향하여 질주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멀리 보이던 섬이 점점 뚜렷하게 보여 모든 것을 분간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주백의는 손을 슬쩍하고 또 한 번 들었다.

  그러자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은실이 쾌속정에서부터 풀렸다.

그와 함께 쾌속정과 끌려가던 배와의 거리는 다시 멀어지기 시작했다.

주백의는 은실을 거두어 품속에 넣었다.

  그러자 무거운 짐을 풀기나 한 듯 쾌속정은 빠른 속도로 달려 거의 섬에 도착하는 듯 했다.

  그러나 양몽환의 배가 섬에 거의 닿으리라고 생각되는 시간에는 쾌속정의 행방은

묘연해지고 말았다.

 

「앗! 쾌속정이 없어졌다」

 

  외치는 소리에 일제히 돌아다 본 일양자 일행은 다만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지금까지 호수에 떠 있던 쾌속정은 간 곳이 없고 잔잔한 호수에 맑은 물과 몇 십 길이

넘는 높은 절벽이 가로 막고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절망하듯 일양자의 침울한 탄식 소리가 더 한층 실감을 돋구어줄 뿐이었다.

 

  그러나……,

  주백의는 쾌속정의 행방을 알고 있는 듯,

그 맑고 아름다운 얼굴에 아무 표정도 없이 담담히 서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백의의 태도에 양몽환은 한편 느끼는 바가 있어 그에게로 다가갔다.

 

「주형! 찾는 방법이 없겠소? 앞에는 절벽 밖에 없군요.」

 

하는 말에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 듯 하던 주백의는 양몽환을 마주 보며

 

「소천의는 참으로 묘한 분이군요.」

 

한 마디 하는 것이었다.

 

「어째서 그렇다는 말씀입니까?」 

 

  다급한 양몽환이 급히 물었다.

 

「하……하…… 저걸 보십시오! 절벽뿐인 바위에 문을 만든 모양이오.」

 

「옛? 문이라니?」

 

「암문(岩門) 말이요. 자세히 절벽을 훑어봅시다. 문이 있을 것 같소.」

하고는 배를 절벽 가까이 대라고 가만히 소리치는 것이었다.

배는 절벽에 바싹 붙여졌다. 얼마 동안 절벽을 더듬으며 관찰하던 주백의는

 

「여기 이 틈이 조금 벌어진 곳이 암문인 듯싶소.」

 

하는 단정을 내렸다.

 

  그러자 그 말을 기다리고 있던 일양자는 온몸의 정기와 공력을 다하여 절벽을 밀었다.

그러나 절벽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와 반면에 배가 뒤로 미끄러져 갈 뿐이었다.

  뱃머리에 서서 일양자의 행동을 주시하던 주백의는 가소롭다는 듯이 외면하여

웃고는 정색을 하며 양몽환을 손짓하여 불렀다.

 

「양형! 아무리 밀어도 안 될 것 같소.」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음…… 이렇게 합시다.

저 노인이 들고 있는 선장(仙仗)으로 절벽을 두드리면 될 것 같소.」

 

  양몽환은

 

  (저까짓 지팡이로 어찌 절벽을 밀까)

 

생각했으나 주백의의 기적을 생각하고 일양자에게로 다가갔다.

 

  사부님! 저 등인대사님의 선장으로 밀어 보라는 주백의의 말입니다.」

 

그 말에 일양자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양몽환은 등인대사에게로 가서 허리를 굽히며

 

「노선배님! 그 지팡이를 좀 주십시오.」

 

「그래? 좋아!」

 

하고 성큼 내주었다.

 

  지팡이를 받아 쥔 양몽환은 곧 일양자에게 바쳤다.

일양자는 지팡이를 받아 들고 온 몸의 진기(眞氣)와 공력을 운행하였다가 일시에

 

「딱!」

 

  절벽을 내려 쳤다.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절벽의 바위가 산산 조각이 나고 사방으로 돌이 흩어져

물위로 휘익 날았다.

  바위가 부서지고 돌이 나는 데에 더욱 용기를 얻은 일양자는 계속해서

세 번을 똑같이 내리쳤다.

 

  바로 그때였다.

 

  <쾅!>

 

  드디어 절벽이 두 쪽으로 갈라지며 스르륵하고 육중한 돌문이 열리고 말았다.

  그 순간 일양자 일행은 일제히 소리를 치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행방을 감추었던 쾌속정이 문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이었고 더구나

그 쾌속정에는 긴 칼을 든 이요홍과 소설군이 샛별처럼 빛나는 눈을 반짝이며

서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뿐이 아니었다.

이요홍과 소설군이 서 있는 앞에 한 오십세 정도의 노인이 여덟팔자의

하얀 수염을 내려 쓸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하게 앉아있는 것이었다.

  얼마 동안 일양자 일행을 노려보던 소설군은 양몽환을 가리키며

 

「아버님! 바로 저 사람이 우리들을 추격해 왔습니다.」

 

하고 말했다.

 

  순간 양몽환은

 

  (그렇다. 저 노인이 묘수어은 소천의 바로 그 사람이다)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그러자 소천의 노인은 냉소하듯 얼굴을 찌푸렸다.

 

「음! 그런가? 참으로 드문 일이군, 이 누추한 곳까지 찾아와 주다니………

아직 이곳까지 들어온 사람은 없었는데」

 

  혼자 중얼거리고는 양몽환을 향하여 점잖게 말했다.

 

「미안하오. 이 누추한 곳까지 오게 해서………하여간 이리 올라오시오.」

 

  노인의 말이 떨어지자 일양자는 일행을 대표해서 엎드려 절하며

 

「조용한 주방(主幇)을 깨뜨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부득이한 일이 있어서 저질렀사오니 소형께서는 용서하심을 바랄 뿐입니다.」

 

  다시 합장을 했다.

 

  일양자가 읍을 하고 합장을 하자 소천의 노인도 합장을 하며

 

「알겠소이다. 그러나 내가 내 딸에게 속았으니 어찌하겠소!」

 

하고는 통쾌하게 웃어넘기는 것이었다.

 

「하하……」 

 

  바위가 날아갈듯이 웃고는 일양자 일행에게

 

「그러면 이 배로 모두 옮겨 타시오.」

 

하고는 일양자 일행을 태우고 온 배와 사공들은 사례한 후 돌려보냈다.

일양자 일행이 옮겨 탄 배는 돌문을 들어서서 절벽 사이로 흐르는 물을 따라 얼마를 더 내려갔다.

  좁은 협곡을 연상케 하는 절벽 사이를 빠져 나오자 확! 앞이 트이며 넓은 호수가 펼쳐졌다.

그리고 그 곳에는 세 척의 쾌속정이 정박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일행을 태운 배는 수풀과 나무가 우거진 사이에 지어 놓은 초가집 앞에서 멈추고

일행은 배에서 내렸다.

그리고 어느 틈엔가 청의 동자(靑衣童子) 두 명이 기다리고 있다가 초가집으로 일행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초가집으로 일행을 모신 청의 동자는 곧 김이 나는 뜨거운 차(茶)를 따라 주었다.

  일행은 아무 말 없이 묘수어은 소천의가 권하는 대로 차를 들었다.

이때까지 소천의 옆을 떠나지 않은 이요홍은 양몽환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의 눈에서는 불빛이 반짝거리듯 빛나고 또 아름다웠다.

  그런가하면 소설군은 소설군대로 주백의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방안은 조용히 차 마시는 소리와 눈과 눈이 부딪혀 일어나는 정(情)의 불빛만이

방안을 채우고 있었다.

  이윽고 한모금의 차를 마신 일양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처럼 은밀한 곳에 소형께서 살고 계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찾아 헤매기만 하였습니다.」

 

하는 말에 소천의는 들었던 찻잔을 놓으며 담담하게 웃고는

혜진자를 가리키며 묻는 것이었다.

 

「이 분은 당신의 사매 혜진자 여걸이 아닌가요?」

 

  일양자는 한숨을 몰아쉬며

 

「그렇습니다. 그가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폐를 끼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음, 과연 그렇군, 그런데 무슨 일이오?」

 

「소천의 형께서 이 혜진자의 병을 고쳐 생명을 살려 주신다면

우리 곤륜파에서는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하고는 다시 읍하며 합장을 했다.

 

  소천의는 가만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곳까지 찾아온 도형을 내 어찌 거절하겠소, 무슨 상처며 어떻게 당하셨소?」

 

  일양자는 소천의의 호의에 거듭 감사하며 혜진자의 상처와 금선사의

중독 사건을 자세히 이야기 했다.

  일양자의 말을 다 듣고 난 소천의는 얼굴을 찌푸리며

 

「금선사의 독은 워낙 지독하여 치료하기가 매우 어렵소,」

 

하는 것이었다.

 

  순간…,

 

  일양자와 일행은 다시 실망의 구렁텅이로 빠져 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소천의는 그들을 아랑곳 하지 않고 얼마를 더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며

혜진자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그리고는 손목을 잡고 맥을 짚어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어찌된 일인가! 맥을 짚어보던 소천의는 돌연 혜진자의 왼쪽 다리에 있는

곡지혈을(曲止穴)을 꽉 찌르는 것이였다.

그러자 혜진자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얼굴은 사색이 되고 말았다.

이 광경을 보던 일양자는

 

「앗!」

 

하고 놀라며

 

「소형! 무슨 짓이오!」

 

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는 번개처럼 달려들어 소천의의 풍부혈(風府穴)을 찔렀다.

 

  순간…,

 

  소천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왼손으로 일양자의 공격을 가볍게 막으며

 

「도형! 오해 마오. 독이 골수에까지 미쳤는가 보기 위해서요.」

 

하는 것이었다.

 

  일양자는 자기의 경솔함을 깨닫고 급히 사과했다.

그러나 소천의는 거들 떠 보지도 않고 품에서 금침(金針)을 꺼내 혜진자의 곡지혈에 찔렀다

곧 뽑고는 혈도를 풀었다.

그러는 소천의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흘렀다.

  일양자는 재삼 자기의 경솔함을 뉘우치며 말했다.

 

「소형! 저의 무례함을 용서하시오.」

 

  그제야 소천의는 이마에 땀을 닦으며 웃었다.

 

「돌연한 나의 행동 탓이오.」

 

할 뿐이었다.

 

  소천의는 동자에게 분부하여 촛불을 키게 한 후 약상자를 열게 하였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약병에 금바늘을 담갔다가 꺼낸 후 촛불에 달구었다

한참동안 달군 금바늘을 헝겊으로 그을음을 씻었다.

그리고는 금바늘 끝을 면밀히 조사한 소천의는 약상자를 치우며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고개를 가로 흔드는 그의 손에는 금바늘이 푸른색으로 변해 있는 가 이었다.

 

「어렵소이다.」

 

  이 한 마디 뿐 이었다.

 

  일양자는 황급히 소천의의 손을 잡으며 신음하듯 부르짖었다.

 

「그럼, 소형께서도 고칠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하는 일양자의 다급한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소천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

 

「금선사의 독을 치료할 사람이 없다는 말씀 입니까?」

 

  재차 묻는 일양자의 소리를 듣고 혜진자는 몸을 일으키는 듯 하다

간신히 일양자를 위로 하는 듯

 

「너무 염려하지 말아요.」

 

하고는 쓰러지듯 눕는 것이었다.

 

  다시 방안은 조용했다.

 

  촛불 타는 냄새가 조용한 방안을 가득 채울 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소천의는 눈을 뜨며 일양자를 향하여 돌아앉았다.

 

「도형! 미안하오, 그러나 치료할 수 없는 것은 아니요, 다만」

 

하는 말에

 

「펄쩍!」

 

  정신이든 일양자는

 

「네? 치료할 수 있어요?」

 

「그렇소마는 약도 구하기가 어렵고 또 만일 치료하여 완쾌 된다면 그 후가 문제요.」

 

  순간…,

 

  일양자의 뇌리에는 소천의의 말뜻을 알아 챌 수 있었다.

 

  (원수를 만드는 일, 바로 그것이다)

 

  생각한 일양자는 다시 합장하며

 

「소형! 알겠습니다. 그 일이라면 곤륜파의 명예를 걸고라도 맹세 하겠습니다.」

 

  소천의는 한숨을 몰아쉬고는

 

「비록 그렇다 해도 일이 매우 까다로워 어떤 실수가 일어나면

그야말로 예기치 못한 참사가 빚어질 수 있어서 하는 말이오.」

 

  일양자는 황급히 말했다.

 

「조금도 소형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 곤륜삼자는 신의(信義)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어떠한 일이라도 소형에게 까지 화가 미치지 않게 하겠습니다.」

 

  소천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면……… 그런데 약을 구하는 것도 위험한 곳이오.

약이 있는 곳에 숙모(叔某)란자가 있소.

그 숙모가 알면 틀림없이 분규가 일어날 것 같소.」

 

  일양자는 약간 마음을 놓으며

 

「사람을 살리려고 구하는 약인데 무슨 분규가 있겠습니까?」

 

  소천의는 가늘게 탄식하며

 

「노형은 잘 모르는 모양이오 그려 .

이제 내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자연 알게 될 거요」

 

하고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시작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이야기였다.

「청해성(靑海省)과 감숙성(甘肅省)사이에 있는 기련산(祈連山)이라는 곳은

일 년 열두 달 눈에 덮힌 기암(奇巖)봉우리가 있소이다.

종운암(?雲巖)이라고 부르는 이 기암의 봉우리 위에는 대각사(大覺寺)라는

오래된 사원(寺院)이 하나 있소이다.

그런데 이절 안에는 천하에 단 한 그루밖에 없는 진귀한 나무가 있는데

그 열매를 설삼과(雪參菓)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십 년에 꼭 한 번만 꽃이 피고 그 꽃은 백 년 만에야 열매를 맺는데

그것도 꼭 세 개 이상은 열리지 않는 열매이오.」

 

  소천의 말에 일양자와 일행은 신비 속에 빠진 듯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소천의는 말을 끊고 또 한번 탄식하듯 긴 한숨을 쉬며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혜진자의 병은 그 열매가 영약이오 그려.

그러나 절간의 중들은 모두가 다 훌륭한 무술을 지닌 고수들이고

그 나무의 열매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어서 구하기가 어렵다는 말이오.」

 

  일양자 일행은 새삼 어안이 벙벙할 뿐 묘책이 없었다.

 

「그런즉 내나 도형이나 간에 그 설삼과를 구하려면 필경

일대풍파가 일어 날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오?」

 

하고는 말을 마치는 것이었다.

 

  사실이었다.

어느 누가 명약을 소홀히 간수하며 또 빼앗길 것인가.

심각히 소천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일양자는 합장하며 일단 물러갈 것을 조용히 이야기했다.

 

「오늘의 가리킴은 영원히 명심하겠습니다.

저희들은 이제 물러갔다 다시 찾아뵙기로 하겠습니다.」

 

  소천의는 일양자와 함께 합장으로 대하며 부드럽게

 

「아니 좀더 앉아서 담소나 하십시다.

아무것도 준비한 것은 없으나 술은 있소이다.」

 

  일양자는 정중히 사양했다.

 

「아닙니다. 어찌 더 이상 폐를 끼치겠습니까? 차후를 약속하겠습니다.」

 

하는 말에 소천의도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물길을 따라 돌문까지 전송한 소천의는 영약이 없음을 한탄해 마지않았다.

그때 옆에 있던 소설군이 어리광하듯

 

「아빠! 언니 와 함께 손님을 전송하고 오겠어요.」

 

하는 것이었다.

 

  소천의는 딸을 보고 약간 미간을 찌푸렸으나 곧 허락해 주었다.

소설군은 이요홍을 끌고 양몽환의 배에 가볍게 뛰어 올랐다.

이요홍과 소설군이 배에 오르는 것을 본 일양자가 그들을 정중히 사절하려고 하자

소설군이 재빨리 눈을 깜박이며 그냥 있게 해달라는 듯 애원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속 뜻을 알 수 없는 일양자는 더 거절하지 못하고 돌아 섰다.

그러자 쾌속정은 이요홍과 소설군이 오르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물을 가르며

질풍같이 달려 어느덧 섬이 보이지 않는 지점까지 순식간에 달리고 말았다.

  소설군은 바람에 날리는 검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며 이요홍을 불렀다.

 

「언니! 저는 되돌아 갈 수 없게 되었어요.」

 

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요홍은 그런 소설군을 위로하며

 

「모두 나 때문이야. 미안해」

 

하며 소설군의 손을 잡아 주었다.

사실 이요홍의 사랑 때문에 소설군은 희생당하는 셈이었다.

  이요홍은 소설군에 대한 미안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소설군은 혼자 소리로

 

「아빠가 무술계에서 은퇴한 후로는 이백부(李伯夫)와 언니 이외에는

누구도 그곳을 가본 사람이 없어요.」

 

하는 것이었다.

 

  이 때 옆에서 이요홍의 자매가 주고받는 대화를 듣고 있던 양몽환은

그들에게 다가서며

 

「소 아가씨에게 폐를 끼쳐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만일 되돌아가시겠다면 제가 저의 사부님께 말씀드려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소설군은 고개를 강경히 흔들며 말했다.

 

「되돌아간다고 해도 아빠는 저를 옛날같이 사랑해 주시지는 않을 거예요.

아빠는 성격이 많이 변하셨어요.

가장 친했던 이백부와도 그렇고 확실히 무슨 곡절이 있는 것 같아요.」

 

하며 슬픈 얼굴을 지었다.

 

  이요홍은 소설군의 손을 잡으며

 

「나도 그렇게 생각은 했어,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없잖아?

우리 함께 가서 여쭈어 보도록 할까?」

 

「그래도 안 될 거에요.

아빠의 성품을 언니도 잘 알지 않아요?」

 

「그렇긴 해…… 모두 다 내 탓이고, 그리고」

 

  하는데 양몽환이 나서며

 

「제 탓이란 말이죠.」

 

하는 것이었다.

 

  이요홍은 눈을 흘기듯 양몽환을 바라보며 미소를 띠우고

 

「그런지도 모르죠,」

 

하고 말했다.

이때 저 편으로 등을 돌리고 서있던 주백의가 돌아서며

이요홍을 힐난하듯 말하는 것이었다.

 

「어찌 양형의 탓이겠소? 이소저의 탓이 아니고?」

 

하며 노려보았다.

 

  이요홍은 아연해 하며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요?」

 

  주백의는 얼굴 표정을 조금도 바꾸지 않으며 한 걸음 나섰다.

 

「왜라고요? 원래 소천의가 은퇴한 것은 하고 싶어서 은퇴한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의 협박에 의해 하는 수 없이 은퇴 한 것입니다.」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요홍은 얼굴을 붉히며 반문하려는데 주백의가 손짓으로

이요홍을 제지하며 말을 계속했다.

 

「더구나 어떤 비밀을 세상에 알리려고 하였으나 두려운 생각이 앞서

말도 못하고 성격도 변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이번에 양형의 돌연한 내방으로 여러분께 눈치라도 챈 것을

도리어 감사하지는 못하고 어찌 양형 탓이라고만 하오?」

 

  이요홍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길이 없었다.

 

  (비밀은 또 무슨 비밀이며 의부는 과연 두려워서 은퇴한 것일까?

그리고 이 주백의라는 사람은 어떻게 자세히 아는가?)

 

  이요홍의 머리 속에는 어지러운 일들이 마구 소용돌이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백의는 이요홍의 생각이 어떻든 말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는

양몽환을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

그리고 그 냉소는 차차로 변하면서 온화한 웃음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주백의의 소천의에 대한 폭발적인 말은 금세 일양자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듣는 사람마다 놀라움을 자아냈다.

 

  일양자는 깊은 시름에 잠기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무엇인가 고개를 끄덕거리게 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렇다. 주백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명성을 떨친 소친의가 홀연 은퇴할 이유가 무엇이며

더구나 대각사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혜진자의 맥을 짚을 때도 대각사란 말에 놀라며

공포의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지 않은가?)

 

한편…,

 

  놀랄만한 주백의의 말에 섬뜩 놀라는 소설군은 주백의의 말이

그저 황당무계하고 근거 없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수긍하게 되었다.

사실인지도 몰랐다.

소설군은 주백의 앞으로 다가가 나지막하게 걱정하듯 말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아빠의 행동이 좀 이상하다는 것은 느꼈으나 이유는 모르고 있었어요.

혹시 그 곡절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요?」

 

  주백의는 아직 통성명도 없는 소저의 말을 듣고 당황했으나

수심에 찬 듯한 소설군의 얼굴에서 정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침 그때,

 

  양몽환이 그들 사이에 끼며

 

「내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하고는 서로 머뭇거리는 소설군과 주백의를 인사시켰다.

둘이 통성명을 하는 동안 무슨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하림과 이요홍이 다가와 두 쌍의 남녀가 모였다.

「하…… 여기 이소저도 계셨군요. 마침 하림 사매도 있으니

서로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하면 어떻소?」

 

  너털웃음을 웃으며 어색했던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몰고 나갔다.

이렇게 하여 양몽환을 사이에 두고 서로 사랑으로 질투하는

이요홍과 하림은 정답게 담소하며 모든 회포를 푸는 듯 즐겁게 보였다

그러나 이요홍은 하림의 귀여운 모습에서 양몽환을 뺏기에는

그녀가 너무 가엾다는 느낌이 불쑥 지나갔다.

 

  (그렇게 되면 저 귀여운 하림은 얼마나 상심할까?)

 

하는 생각에 번민하고 있었다.

 

  (아! 나도 양몽환을 좋아하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좋담?)

 

  그러나 하림은 이요홍의 마음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요홍을 친언니처럼 따르며 좋아할 뿐이었다.

  이러한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던 병상의 혜진자는 하림의 천진난만하고

순진한 모습에 이끌려 한없이 사랑스러운 듯 바라보다가 일양자에게 부탁하듯

한 마디 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하림을 우리 문하에 입적시킨 것은 참 잘한 일입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잘 보살펴서 평생 슬픔을 모르는 제자를 만들어 주시요.」

 

  일양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염려 마오. 나보다 환아가 더 잘 보살펴 줄 것이오.」

 

하고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의 모습을 먼빛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는 일양자는 한 편, 주백의에게로 눈을 돌렸다.

주백의의 내력도 성분도 알 수 없으나 그의 날래고 기민한 행동

그리고 영리한 두뇌는 참으로 감탄할 만 했다. 처음 주백의를 보았을 때

경계하는 듯 의심도 했으나 같이 지내는 동안 의심도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이었다.

또한 혜진자와 일양자의 대화를 듣고 있던 등인대사는 속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하림은 내가 키웠다. 그러나 지금은 사랑을 알 때가 되지 않았는가?

부디 고생 없이 살기만을 빌 뿐이다.

그러나 이요홍의 출현으로 사랑싸움이라도 벌리는가 걱정했는데

일양자도 양몽환을 더 신임하고 하림을 맡긴다니……)

 

  등인대사는 자기의 마음과 꼭 같은 일양자를 고맙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쾌속정은 파도를 좌우로 기세 있게 가르며 호수를 달려 거의 해 가질 무렵에 닿았다.

  배가 부두에 정박하고 닻을 내리자 일행은 가볍게 배에서 뛰어 내 다.

  이요홍은 배에서 내릴 때 까지도 하림과 붙어 앉아 담소하다가 손을 부축하며 배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하림을 돌아보며

 

「동생! 몸조심해요. 언니는 가겠어!」

 

  하림은 잠시 동안 들었던 정에 이별을 아쉬워하며

 

「언니의 친절을 잊지 않겠어요. 또 만나기를 바래요.」

 

  이요홍은 약간 처량하게

 

「오빠가 더 친절하게 해줄 거야.」

 

「그렇긴 해요. 저는 오빠가 시키는 대로 하겠어요.」

 

  둘은 속마음이 다르나 밖으로 나타내지 않으며 총총히 작별을 고했다.

  양몽환은 떠나려는 이요홍과 소설군에게 가볍게 웃으며,

 

「두 분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차후 인연이 있어 다시 뵈옵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고 허리를 굽혔다.

 

  이요홍은 담담하게 웃고 소설군의 손을 잡고 다시 쾌속정으로 오르며

 

「저도 다시 만날 때를 기다리겠어요. 아무쪼록 몸조심 하세요.」

 

  말을 마친 이요홍은 멀리 하늘을 바라보며 망연히 섰다가 가늘게 한숨을 쉬며

 

「그럼……」

 

하고는 쾌속정 안으로 사라졌다.

 

  양몽환은 이요홍을 실은 쾌속정이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길게 몰아쉬고 망연히 서있었다.

이때, 뒤에서 전송하던 주백의가 양몽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이요홍은 양형을 좋아하는구려,

그러나 하림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떠나니 참으로 훌륭하오.」

 

했다.

 

  양몽환은 웃으며

 

「하…… 하……소설군도 주형에게 정이 들었던 모양이죠.」

 

하는 말에 주백의도 따라 웃었다.

 

  그렇게 따라 웃던 주백의는 양몽환의 옆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하림에게

잠시 눈을 돌린 후 돌아 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보기에는 허약하고 선비차림의 주백의이건만 그의 놀라운 절학이며

기민한 행동을 양몽환도 은연중 흠모하고 있었다.

앞으로 몇 걸음을 걸어가던 주백의를 양몽환은 따라가 붙잡았다.

 

「주형! 어디로 가시는 길이오?」

 

  주백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무 곳이나 갈 곳이야 없겠소?」

 

「왜 급하게 가시려 하오?」

 

  그러자 주백의는 숙연해지며 슬픈 어조로 혼자 중얼거리듯 말하는 것이었다.

 

「오래 있으면 정이 드는 법, 정이 들면 한(恨)만 남는다는데……」

 

하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주백의를 위로하며 그가 품은 뜻이 과연 무엇인가를 알고 싶었다.

 

「부평(芙?)같은 세상에서 만났소마는 이처럼 헤어질 수가 있겠소.

조금 더 쉬었다 가시오, 술이라도 드시면서……」

 

「호의는 감사하오. 마는 저는 술을 마시면 울기를 잘해서 사양하겠소이다.」

 

하고 말하는 주백의의 눈에는 안개처럼 뿌옇게 눈물이 고였다.

 

  양몽환은 내심 당황하며 무엇이 주백의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알 길이 없었다.

 

「주형! 미안하오. 무슨 불찰이라도 있었는지……

이 몽환은 주형과 함께 좀더 있고 싶어서 그러오.」

 

  양몽환은 진심으로 주백의와 함께 더 있고 싶었다.

그러나 주백의는 이미 결심하고 숙연한 마음을 스스로 달래는 듯 먼 하늘을 바라보고는

 

「차라리 안 만났다면 더 좋았을 것을…… 갈 길이 바쁘오니 용서하여 주시오.」

 

하는 그의 눈에는 잔잔한 호수 같은 밝은 눈동자가 눈물에 덮여 있었다.

 

  그 모습이 더욱 애처로웠다.

 

  (여자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얼굴일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났다.

 

「그래도 잠시 동안만 이 아우의 소원을 풀어 주시오.」

 

하는 양몽환의 태도는 좀처럼 길을 비켜줄 것 같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주백의는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그렇다면 이렇게 하시면 어떨까요?

아무리 이별이라도 슬픔은 마찬가지,

오늘밤 두시에 호반에서 기다리기로 하겠소이다.」

 

  양몽환은 주백의가 마음을 돌려준 것만도 감사해서 그의 말대로 하기로 하였다.

 

  (그렇다. 주백의는 나의 은인이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도와주지 않는가,

술이라도 한 잔 대접해서 보답이라도 해야지)

 

  양몽환은 길을 비켜 주며

 

「그럼 제가 먼저 두시 정각에 기다리겠소이다.」

 

하고는 허리를 굽혔다.

 

  주백의는 양몽환의 뜻을 고맙게 받으며 다시 걸음을 옮기려다

하림을 돌아보고 그의 순진한 성품에 탄복하듯

 

「양형! 당신의 사매도 동행해서 오시오!」

 

하고는 양몽환의 대답도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이

팔을 저으며 훨훨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어디로 왔다 또 어디로 가는 것일까? )

 

  멀리 사라져 버린 주백의를 생각하며 양몽환은 하림을 이끌고

쓸쓸히 여인숙을 향해 돌아왔다.

  여인숙에는 이미 들어온 일양자가 단정히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일양자의 머리 속에는 혜진자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종운암 대각사에 있다는

설삼과의 영약에 사로 잡혀 있었다.

 

  한편-,

 

  양몽환은 스승의 골몰한 생각에 방해하지 않게 일양자의 앞을 물러 나와

밤 두시가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생각에 잠겼던 일양자는 옆방으로 등인대사를 찾아 들어갔다.

등인대사와 대좌한 일양자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대사를 불렀다.

 

「등인대사!」

 

「무슨 근심이라도 있소이까?」

 

「예…… 혜진자의 병 때문에 걱정이 되오.」

 

「나도 지금 생각 중 이었소이다.」

 

잠시 말없이 않아 있던 일양자는 기침을 한 후

 

「그런데 소천의의 말이나 표정으로 봐서라도

소천의는 대각사와 무슨 곡절이 있는 것 같소.」

 

「글쎄 올씨다. 차차 알게 되겠죠.」

 

「그렇긴 하오. 그런데 우리 무술계에서는 종운암 절이 있다는 것도 처음 듣는 소리요,

더구나 설삼과를 지키는 중들의 무술이 굉장하다는데 혜진자를 구하려면

상당한 일대 격투가 일어날 것 같소.」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심오한 무술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니 더 답답하오.」

 

  대화는 다시 멈추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무술로 쟁쟁했던 소천의도 종운암의 중들을 두려워한다면

그들의 무술이 어느 정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며 또 간단한 일도 아니었다.

  이윽고 일양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여간 이러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소,

우선 환아와 림아에게 혜진자를 모셔 곤륜산으로 떠나게 하고 나는

이 밤이 새기 전에 종운암 대각사로 떠날 예정이오. 등인대사는 어떻게 하겠소?」

 

등인대사는 잠시 생각한 후 또렷하게 힘을 주며 말했다.

 

「노승은 이미 방장(방長)을 모신 몸, 대각사로 동행할 마음이오.」

 

  일양자는 얼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고맙소, 고맙소, 내 벌써 그러리라 짐작하고 물었소이다.」

 

  그 길로 일양자와 등인대사는 혜진자에게 사실을 이야기 했다.

일양자의 말을 들은 혜진자는 꺼져가는 듯한 목소리로 만류하는 것이었다.

 

「이 한 몸 때문에 위험한 곳엘 간다니 몸 둘 바가 없습니다.

소천의의 말도 대각사의 중들이 고수들이라 하지 않소이까?

제발 가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나 일양자는 고개를 흔들며

 

「이미 결정된 일이오, 아무 염려 마시고 곤륜산으로 가시오.」

 

냉담하게 한마디 할 뿐이었다.

 

「나는 죽어도 한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 가시려면 먼저 삼문사형(三門師兄)의 말을 들어 보고 계획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일양자는 혜진자의 말을 듣고

 

「그렇긴 하오만은 십팔나한장법과 이십사식 항용강법(二十四式降籠?法)은

무술계의 가장 명성 높은 절기로 이를 지닌 노화상을 모시고 가면 걱정할 것은 없소이다.

그러나 약을 구하려고 가는 것이지 싸우려고 가는 것은 아니요.

적어도 대각사의 승려라면 도를 닦는 고승(高僧)들인데 사람을 구하는 약을 왜 아니 주겠소?」

 

  이미 굳어진 일양자의 마음을 돌릴 길은 없었다.

  혜진자는 만류하기를 단념하고 일양자를 적이 바라본 후 눈을 감고 말았다.

  혜진자 앞에서 물러난 일양자는 행장을 수습하고 양몽환에게

혜진자를 곤륜산까지 모시라고 분부했다.

 

  밤도 거의 깊어갈 무렵.

 

  설삼과를 구하기 위한 일양자와 등인대사는 달빛을 바라보며

대각사를 향해 바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일양자와 등인대사가 떠난 후 양몽환과 하림

그리고 동숙정은 스승님의 장도(長途)를 축원하고 제 각기 방으로 들어가 자기로 했다.

  제 방으로 돌아온 하림은 훌훌 옷을 벗고 자리 속으로 막 들어가려는 때였다.

 

「달그락!」

 

밖에서 누가 문고리 벗기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이때 하림은 소스라쳐 놀라며 문을

 

  <쾅!>

 

하고 열었다.

 

  그러던 하림은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그곳에는 새 옷으로 말쑥하게 갈아입은 양몽환이 웃으며 서 있었다.

 

「오빠! 웬 일이세요? 새 옷을 입고……, 아주 훌륭해요!」

 

  환호소리를 내며 양몽환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양몽환은 달려 나오는 하림을 안으며

 

「주형과 약속한 시간이 거의 되었소. 속히 가지 않으면 늦어요.」

 

하는 말에 하림은 벗어 놓았던 옷을 입기 시작했다.

 

  양몽환은 하림이 옷을 입는 동안-----

마음이 울렁거리고 가슴이 떨려오는 것 같았다.

 

  이윽고 옷을 다 입은 하림은

 

「오빠! 낮에 그 친구 분 만나러 가는 거예요?」

 

하고 물으며 서랍에서 잘 익은 복숭아를 꺼내 껍질을 벗겼다.

 

「참 훌륭한 분이지, 그의 무공은 기인이오,

소천의에게 못지 않은 무술을 가진 것 같아.」

 

「그럼 그 분이 소천의보다 더 강한가요?」

 

「그것은 모르지, 내 생각이니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하림은 복숭아의 껍질을 벗겨 양몽환에게 주며

 

「헌도관의 복숭아도 지금 한창이겠죠.」

 

  양몽환은 복숭아를 받았다.

 

「곤륜산에도 많이 있으니 걱정 말아요,」

 

  하림도 복숭아를 벗겨 한입 베어 먹으며 눈을 깜박 깜박 하는 것 이었다.

그러한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는 표정을 지었다.

 

「오빠! 저 말이에요. 그곳에 가면 하얀 학을 꼭 두 마리만 기르겠어요.」

 

  그러는 하림을 귀여운 듯 바라보며

 

「두 마리씩이나? 무엇에 쓰려고?」

 

「호…… 호…… 한 사람이 한 마리씩 타죠!」

 

하는 순간 …. 양몽환의 머리 속에는

 

「언뜻!」

 

  번개처럼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그것은 하늘 위로 나르는 한 쌍의 백학

  나는 땅 위에 우뚝 선 나무가 피어

  피로한 날개를 쉬게 하리니……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였다.

 

  양몽환은 하림이 이 시를 알았을 리는 없지만

하림이 기르겠다는 학은 필경 그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 것인지도 몰랐다.

  양몽환은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며 품에 안기는 하림의 등을 두드리며

 

「자, 시간이 됐어, 속히 호반으로 갈 시간이야.」

 

하고는 먼저 밖으로 나왔다.

 

  강하게 코를 찌르는 하림의 체취와 불을 내뿜는 듯한

그녀의 정열적인 눈을 피 하기라도 하듯이.

  인적(人跡)이 끊어진 밤거리는 달빛만 고요히 내려 쏟아지고

호반은 호반대로 조용하고 몇 척의 배가 등불을 킨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은빛 옷으로 화려하게 갈아입은 하림의 자태는 달빛을 받아 더욱 아름다웠다.

양몽환은 자기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는 하림의 옆모습을 보며

 

  (정말 아름다운 여자구나)

 

하는데 그 기미를 알아챈 듯 하림이

 

「오빠! 저 예뻐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양몽환이 무어라고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나며 조용한 음성으로 들려 왔다

 

「과연 아름답도다.

이렇게 아름다운 소저의 사랑을 받는 양형은 얼마나 행복하겠소!」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그곳에는 어느 사이에 나타났는지 주백의의 얼굴이 미소를 띠운 채 서 있었다.

  양몽환은 얼굴을 붉히며

 

「아! 언제 오셨소? 제가 먼저 온줄 알았는데……」

 

「그러시오? 너무 다정하게 이야기 하느라고 몰랐겠죠.」

 

하며 생글 생글 웃었다.

그러나 그의 웃는 얼굴과는 달리 눈에서는 차가운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양몽환은 무안함을 느끼면서도 한편 주백의의 악의 없는 놀림에 당황하면서

 

「정말 미안하오.」

 

하며 뒷머리를 긁었다.

 

  그러자 주백의는 통쾌하게 웃으며

 

「하…… 하…… 농담이었소. 자, 그럼 가십시다.

제가 미리 배 한척을 준비해 놓았소이다.

달구경이나 하며 이야기 하십시다.」

 

하고는 성큼 부둣가로 나갔다.

 

  과연, 주백의의 말대로 작고 아담한 한 척의 배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배에는 회색 도포를 입은 사람이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남에게 얼굴을 보이기를 두려워하는 듯 했다.

  배 앞에 다다른 주백의는 양몽환과 하림이 배에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맨 나중에 올랐다.

 

  배 안,

  깨끗하게 정리 된 방 안에는 두텁고도 푹신푹신한 양털 담요가 깔려 있고

그 가운데의 둥근 탁자 위에는 술과 진수성찬이 가득히 준비 되어 있었다.

  양몽환은 준비해 놓은 음식을 보자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주백의를 대접하려고 먼저 말을 했었는데 정 반대로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주백의는 양몽환과 하림을 귀중한 손님으로 극진히 대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둥근 상을 가운데로 하고 셋이 좌정하자 주백의는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회색 도포의 사람에게 나직이 말했다.

 

「먼저 가시오, 우리끼리 뱃노래나 좀 하고 가겠소.」

 

하는 주백의의 말에 회색 도포를 입은 사람은 소리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끝내 도포를 입은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한 양몽환은 서운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렇다고 주백의에게 물어 볼 것도 못되었다.

  배는 노를 젓지 않아도 잔잔한 호수 위에 소리 없이 떠서는 둥실 둥실 바람에 밀려갔다.

  주백의는 양몽환과 하림의 잔에 각각 가득히 술을 따르고 자기의 잔에도 따르었다.

  그러는 주백의의 예쁘고도 하얀 손과 술을 따르는 모습에 마치 방안에 가득한

주란(珠蘭)꽃 냄새도 더욱 분위기를 황홀하게 하였다.

술은 독하고도 향기로워 두 잔째는 정신이 몽롱하게 취해왔다.

얼굴이 빨개진 하림은 더 이상 마시지 못하겠다고 손을 내 저었다.

그러나 주백의는

 

「술은 삼배(三배)를 마셔야 합니다. 한잔만 더!」

 

하며 하림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사실 취하기는 양몽환도 마찬가지였으나 거절하지 못하고 석 잔을 받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주백의는 즐거운 듯 연방 술을 자작으로 따라 마시며 양몽환의 잔에다 또 따르었다.

 

「인생은 짧은 것, 오늘을 유쾌하게 헛됨이 없이!」

 

하면서 잔을 높이 드는 것이었다.

 

술은 넉 잔째를 지나 다섯 잔째로 옮겨지고 차차 취기는 점점 더 했다.

그러자 하림은 술기운에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양몽환에게 기대면서

 

「오빠! 머리가 빙빙 돌아요.」

 

하고는 눈을 감았다.

 

  양몽환은 자기에게 기대는 하림을 부축하며 주백의를 향하여

 

「주형! 저의 사매는 아직 나이가 어린 탓이니 무례함을 용서하오.」

 

하고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그러는 양몽환도 사실 제대로 몸을 가눌 수 가 없었다.

주백의는 술잔을 놓으며

 

「술이 과했던 모양이죠?」

 

하는 그의 얼굴도 취기로 빨갛게 되어 있었다.

 

  밤은 점점 깊어 세 시 경이나 되었고 잔잔한 호수에 뜬 배는

어느덧 호심(湖心)으로 천천히 미끄러지고 있었다.

  이때 주백의는 하림의 자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양형! 제가 오늘 두 분을 위하여 노래를 한 곡조 읊으려고 하오만은 어떠실지?」

「아! 영광입니다. 들려주십시오.」

 

  양몽환은 노래를 들려주겠다는 말에 정말 고마워하며 재촉했다.

 

「그러면 잠시 기다리세요.」

 

하고 주백의는 방을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돌아오는 그의 손에는 색깔도 영롱하고 찬란하게 구슬이 박힌

가야금을 들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찬란하고도 맵시 있게 만든 구슬 가야금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자 주백의는 웃으며

 

「뭘 그렇게 바라보시오? 하…… 하……

이 가야금이 진귀하기는 하지만 주인을 잘못 만나 허송세월을 합니다.」

 

하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황망히 부정하며

 

「천만에 말씀을. 저를 위하여 진귀한 가야금까지 보여 주시니 영광일 뿐입니다.」

 

하고 겸손해 했다.

 

  주백의는 눈웃음을 짓고는 백설 같은 횐 손으로 가야금 줄을 조정한 후

 

「그럼 한 곡조 부르겠습니다. 허물이나 마십시오.」

 

  손가락이 움직였다.

 

  이윽고 청아하고도 은은한 가야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처음의 곡조는 온 몸을 어루만지듯 고요히 흐르다가 차차 높아지고

또 그러는가 하면 다시 낮아져 인간의 희로애락을 다 나타내는 듯

슬프기도 하고 처량하기도 하여 맑고 아름다운 곡조가 되기도 했다.

  주백의의 가야금 소리는 양몽환뿐 아니라 누구의 심금도 울릴 지경이었다.

  양몽환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던 주백의의 가야금 소리가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펄쩍 제 정신으로 돌아온 양몽환은

자기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야금 소리에 취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윽고 주백의의 가야금 소리는 완전히 그쳤다.

그러나 여음은 방안 가득히 남아 연기처럼 나르고 있었다.

가야금에서 손을 뗀 주백의는

 

「어때요? 제 솜씨가?」

 

하는 것이었으나 그의 눈에도 눈물이 고이였다.

  양몽환은 눈물을 닦으며

 

「훌륭하오. 소리마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듯하고

가을 저녁 부슬비가 내리는 것 같기도 하오.」

 

  주백의는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사람을 만났으니 다시는 가야금을 뜯지 않겠소.」

 

하는 주백의의 눈에 반짝하는 빛이 났는가 했을 때

 

  돌연 ,

 

  가야금 줄을 와락 잡아당겨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돌변한 행동에 양몽환은 깜짝 놀라며

 

「주형! 무슨 짓이오?」

 

하고 소리 쳤다.

 

  그러나 주백의는 태연하게 .

 

「줄은 끊었어도 가야금은 그대로 있소.

다음 양형과 다시 만나면 새 줄을 끼워 한 곡조의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하고 가야금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양몽환은 주백의의 돌변한 행동에 놀라는 한 편 그의 굳은 결심에 또 한 번 놀랐다.

 

  (무서운 사람이다.)

 

  절로 탄식의 말이 나왔다.

 

  잠시 후

 

  주백의가 다시 방으로 들어 왔을 때는 좀 전의 일은 깨끗이 잊은 듯

미소를 띠우며 명랑하게 들어왔다.

 

  그 동안 양몽환의 품에 안겨 쌔근쌔근 깊은 잠을 잔 하림은 취했던 술이 깨어 일어나 앉았다.

  세 사람은 다시 둥근 탁자에 둘러 앉아 차를 마시며 화제를 바꾸어 담소했다.

술이 아직 완전히 깨지 못한 하림은 졸린 듯 하품을 한 후 주백의에게

 

「당신의 무공을 저의 오빠가 흠모하고 있어요.

오빠는 소천의보다 더 용하다고 하는데 저의 사부님의 병을 고칠 순 없나요?」

하고 묻는 하림의 얼굴에는 걱정의 빛이 완연했다.

  주백의는 하림의 얼굴을 보며

 

「걱정할 것 없습니다. 길인천상(吉人天上)이라 곧 회복될 것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양몽환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쓴 웃음을 웃었다

 

「저희들은 온갖 희망을 소천의에게 걸고 천신만고 끝에 찾아 갔습니다.

그러나 그도 속수무책입니다.

설삼과가 영약이라고 해서 사부님과 등인대사는 이미 대각사로 떠났습니다마는

기대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나처럼 무술계에 아무 경험도 없이 어떻게 혜진자 사숙님을 모시고

곤륜산으로 가야할지 걱정만 되는군요.」

 

하고 수심에 찬 말을 하는 양몽환의 얼굴은 한없이 처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