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귀원비급을 찾아서 저 먼 곳으로!<絶澗千尋>
혜진자(慧眞子)가 편지를 받아서 보니 일양자(一陽子)의 친필이었다.
혜진자는 낮 익은 필체를 대하자 삼십여 년 전의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혜진자가 소녀 시절이었을 때 대사형(大師兄)과 이사형(二師兄)의 사이에 끼어
애정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승(師父)이 돌아가신 후에 대사형 일양자가 문호(門戶)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양자는 이사제(二師弟)와 삼사매(三師妹)의 사랑이 깊어 가는 것을 알고는
사형제(師兄弟)간의 우애(友愛)를 깨칠까 염려하여 사제(師弟)옥영자(玉靈子)에게
문호를 맡긴다고 편지를 남겨 놓고 표연히 떠나가 버렸다.
일양자가 떠난 후 오년 간, 옥영자와 혜진자는 방방곡곡을 찾아 헤맸으나
일양자의 거처를 끝내 찾아 내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옥영자는 사형 일양자의 뜻을 좇아 사조(師祖)의 유상(遺像)에 예를 올리고
문호를 관장하였다.
옥영자가 문호를 계승할 그 이듬 해 일양자가 곤륜산(崑崙山)외 금정봉(金頂峰)에 있는
삼청궁(三淸宮)으로 돌아왔다.
옥영자는 장문지직(掌門之職)을 다시 일양자에게 주려고 하였으나 일양자는
끝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장문호(掌門戶)의 의식도 끝난 지금 어찌 마음대로 바꾼다 하시오.
나는 한 거처를 정하여 놓았으니 장문(掌門)을 본 후 곧 떠나가겠소.」
「그림 제가 누님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저는 사부님을 따른 지가 십이 년 밖에 안 되었습니다.」
이때 잠자코 있던 하림이 동숙정의 손을 잡으며
「언니! 저도 언니와 같이 부모가 없는 외로운 몸입니다.」
하고 말하는 그녀의 밝은 얼굴에는 검은 구름이 지나갔다.
이때 까지 제자들의 대담을 듣고 있던 혜진자는 마음속으로
목전의 일을 어떻게 치리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일양자의 편지에는 장진도(藏眞圖)를 얻었으므로
차양사(遮陽寺)의 등인대사(澄因大師)와 함께 절남(浙南) 괄창산(括滄山)으로
귀원비급(歸元秘?)을 찾으려고 떠나는 길에 양몽환과 하림을 데리고 갈 수 없으니
금정봉 삼청궁에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귀원비급을 찾는 대로 곧 돌아오겠다는 것과 옥영자와 혜진자가
괄창산으로 자기를 찾아오지 말도록 당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혜진자가 상북으로 일양자를 찾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혜진자는 한참 생각한 후 양몽환에게
「네 사부님께서는 장진도를 구한 후 괄창산으로 가셨다.
나는 요즘 풍문을 듣고 믿지는 않았으나 궁금해 찾아 왔다.
오늘 밤 너희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현도관으로 헛걸음을 할 뻔 했구나.」
혜진자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계속하여 말하였다.
「네 사부님께서는 너와 하림을 삼청궁에 머물게 하라고 하시었다만 조금 사정이 달라졌구나.
네 사부님께선 내가 상북으로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곤륜산은 길이 험하고 또 멀다. 이제 장진도의 소문이 새었고
또한 너희들이 십여 년간 무예를 익혔다고는 하지만 아직 무술의 경험도 없는
너희들을 곤륜산으로 보내기엔 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와 함께 절남 괄창산으로 너희 사부님을 찾아가 도와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혜진자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양몽환은 느끼는 바 있어 곧 이틀 동안에 일어났던
각파의 고수(高手)들을 만나 싸운 일을 낱낱이 혜진자에게 말했다.
혜진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양몽환의 말을 들은 다음
「화산파(華山派)의 괴수 팔비신옹 문공태(八臂神神翁聞公泰), 점창삼안(點蒼三雁)과
사수구원(蛇?丘元)등은 모두 무술계에 이름을 떨치는 인물들이며
또한 천용방(天龍幇)의 세력은 강남(江南)에 널리 퍼져 있으니
적을 경시(輕視)해서는 안 된다.
너의 사부님의 무술도 대단하지만 이 많은 고수들을 상대하기엔 곤란할 것이다.
다행히 이들의 목적이 장진도에 있으므로 그것을 얻기 전에는 사부님을 해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들은 오늘 저녁 남쪽으로 내려가자……」
혜진자는 여기까지 말을 하다 갑자기 얼굴을 들어 삼장(三丈)밖에 있는 큰 나무를 바라보면서
소리치는 것이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왜 숨으시오?」
이 말이 끝나자 큰 나무 가지가 무성한 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달빛에 검은 그림자를 끌며 큰 새가 나는 것같이 가볍게 혜진자가 있는
오륙 보 밖으로 훌쩍 내려섰다.
머리는 백발이며 흰 수염에 점은 장삼을 입은 한 노인이 손에 죽장을 짚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 늙은 몸이 문공태요 산야에 묻힌 몸을 곤륜 삼자와 견주어 논할 수 있겠습니까?」
양몽환은 이 사람이 바로 팔비신옹이란 것을 알아채고 급히 칼자루를 잡으며 경계했다.
그러자 혜진자가 담담히 웃으며
「화산파의 장문종사(掌門宗師)이십니까? 빈도(貧道)가 실례를 하였소이다마는
어째 혼자 이곳에 오셨습니까?」
문공태는 음흉하게 웃으며 혜진자를 노려보았다.
「천만에! 곤륜삼자는 과연 듣던 그대로군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왜 늙은 놈을 경계하고 있소이까?」
혜진자도 그의 말을 일소에 붙이고 문공태가 뛰어 내려온 나무를 다시 돌아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또 누군가 숨어 있는 표정이었다.
「숨지 말고 떳떳하게 나오시오!」
하는 혜진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 어두운 곳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화살과 같이 바람소리를 일으키며 달려 나오는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두 명의 괴한은 도포차림의 도인과 선비 차림의 서생이었다.
이때 팔비신옹이 나서면서
「내가 세 분을 소개 하겠소.
이 두 분은 유명한 점창삼안 중의 둘께와 세 째 되는 분들이고 이 분은 곤륜삼자의 혜진자입니다.」
혜진자가 웃으면서 공손하게 말했다.
「점창삼안의 대명은 오래 전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만
오늘 이렇게 두 분을 만나 뵈니 빈도(貧道)의 인연인가 합니다.」
그 중년 서생은 두 손을 읍하면서
「곤륜 삼자의 협명(俠名)은 무림(武林)까지 알려졌고
천강장(天?掌)과 분광검법(分光劍法)은 무술계에 으뜸입니다.
이렇게 만나 뵈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쌍장(?掌)을 휘둘러 숨은 힘을 쪽 뻗쳤다.
혜진자는 눈썹을 곤두세우고 오른 손으로 옷을 털고 왼손을 가슴에 댄 후
허리를 굽혀 선비를 쳐다보았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하고는 자기의 힘을 내니 두 힘이 맹렬히 부딪쳐 혜진자의 옷깃이 움직이고
그 중년 서생의 양 어깨가 두어 번 들먹거렸다. 이때 문공태가 나서며
「그럼 모두 괄창산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먼저 실례하겠소.」
하고는 왼 쪽 손바닥을 쭉 뻗쳐 두 사람의 사이를 뚫으며 나는 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서생이 급히 나서며 번개같이 달려가 문공태에게
「문형! 좀 기다리시오. 우리 같이 가는 게 어떻겠소?」
하고는 혜진자를 돌아보면서 말한다.
「차후에 다시 만납시다. 문 노인에게 선착을 뺏기면 큰일입니다. 먼저 가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도인을 재촉하여 문공태의 뒤를 따라 살같이 내달리는 것이었다.
혜진자는 세 사람이 멀리 가는 것을 보고는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했다.
(무의식중에 한 몇 마디 말로 저들에게 대사형의 거처를 알려 주고 말았구나.)
하고는 작은 소리로 양몽환에게
「어서 우리도 떠나자.」
양몽환과 하림 그리고 동숙정을 재촉했다.
괄창산은 절강 동남부(東南部)에 있는 산으로 상북에서 수 천리 길이었다.
혜진자는 일양자의 안위가 마음에 걸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길을 갔다.
그녀는 오랫동안 강호에 나다녔고 경력이 풍부하여 그녀의 안내로 가는 동안
양몽환은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심소저는 처음으로 하는 여행이라 가는 곳마다 신기한 것뿐이었다.
이 십 여일의 길을 걸어 당도한 곳은 절강성의 선거현(仙居懸)이라는 곳이었다.
이 선거현은 괄창산맥의 한 산성으로 시가(市街)가 번화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여인숙도 많았다.
혜진자는 양몽환과 하림, 동숙정을 데리고 그곳에서 제일 깨끗하고 큰 여인숙인
삼진원(三進院)에 들었다.
혜진자와 양몽환은 각기 방 하나씩을 차지하고 하림과 숙정은 한 방에서 쉬게 하였다.
일행은 간단히 저녁밥을 먹고 내일 해야 할 일을 의논했다.
「내일은 산으로 들어가야 한다. 괄창산은 연면천리(連綿千里)에 기봉(奇峰)이 많고
길이 험하여 산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야 될지 모르겠다.
오늘 밤은 편히 들 쉬고 내일 아침 일찍 떠나도록 하자.」
하고 말을 마치고는 앉은 채로 눈을 감았다.
양몽환 등 세 사람은 각기 자기 침실로 돌아와 쉬었다.
이 이 십여 일간의 여정(旅程)에 하림과 동숙정은 함께 기거하면서
심소저는 자기의 모든 것을 숨김없이 동숙정에게 말하여 주었다.
이날 저녁도 동숙정과 하림은 촛불을 사이에 두고 앉아 차를 마시며 한담하였다.
「언니! 내가 곤륜파에 들어간다면 장차 언니처럼 여승이 되나요?」
동숙정은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 그건 네 마음에 달려 있어.
다만 우리 곤륜파 제자의 대부분이 도가(道家)에 속해 있을 뿐이야.」
「나는 본래 출가(出家)하려고 하였어요.
그러면 오빠와 같이 다닐 수도 없겠지요.
장차 사부님께서 저를 여승으로 만들려 하거 던 언니가 잘 말씀해 주세요.」
동숙정은 하림의 진지한 태도를 보고서는
마음이 움직여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동생! 꼭 도와주지, 사부님께서도 꼭 여승이 되라고 하시지는 않을 거야.」
「환 오빠는 아주 착한 사람이에요. 언니도 그를 좋아 하시나요?」
순간 ….
동숙정의 두 볼이 빨개졌다.
그러나 그녀는 하림의 묻는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미처 대답할 바를 찾지 못하고 망연히 있다가 태연하게 말했다.
「네 환 오빠는 참으로 좋은 사람이야 만일 그가 딴 여자를 좋아하면 견딜 수 없겠지?」
하림은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이 말을 듣고는 한참 동숙정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비로소 천천히 말했다.
「만일 그가 나를 좋아 한다면 괜찮지만
그가 변심하여 나를 좋아 하지 않는다면 난 죽어 버릴 테에요.」
하고 말하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흰 치마 위에 떨어졌다.
동 숙정은 웃음의 말에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탄식하며
살며시 그녀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자 우리 그만 자자! 네 환 오빠는 좋은 사람이야. 절대로 변심하지 않을 거야.」
그제야 하림은 소매 자락으로 눈물 자국을 닦고는 얼굴을 돌려 웃었다.
「언니 먼저 주무세요! 저는 환 오빠에게 몇 가지 물어 보고 오겠어요!」
동숙정이 놀라며 물었다.
「넌 내가 한 말을 하려고?」
하림은 머리를 흔들며
「아뇨! 난 앞으로 그가 마음이 변하지 않겠느냐고 물으려 해요?」
하고는 방을 나갔다.
양몽환은 마침 정좌하여 있다가 하림을 맞아 주었다.
이때. 촛불에 비쳐지는 그녀의 얼굴은 꽃과 같이 아름다웠다.
큰 두 눈에 눈물 자욱이 있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그의 손을 잡고 물었다.
「왜 아직 자지 않고?」
하림은 양몽환의 품에 안기며
「마음이 변하여 날 사랑하지 않을 것인지 말씀해 주세요?」
양몽환은 뜻밖의 물음에 당황하며
「무슨 소리야?」
하고 눈을 크게 떴다.
「오빠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난 죽을래요.」
양몽환은 어이없이 웃으며 하림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여 주였다.
「어서 가서 자. 나는 마음도 변하지 않을 것이고 영원히 너만 생각해.」
이 말에 하림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만족한 듯 생끗 웃으며
「오빠!」
하고 부르고는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 속에는 천만 마디의 말보다 더 다정한 속삭임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양몽환의 방을 나와 자기의 침실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네 사람은 괄창산을 향하여 떠났다.
비록 혜진자가 강호에 오랫동안 나다녔다 하여도 이때만은 마치 망망한 대해에
돛 잃은 일엽편주와 같았다.
수많은 괄창산의 천봉만령(千峯萬嶺)과 유곡심학(齒谷深壑)의 이 천리 황산(荒山)에서
사람을 찾는 다는 것은 용이하지 않았다.
일양자가 또 보급(寶?)이 산중 어느 곳에 있는지를 설명하지 않았으므로
절제의 기지를 가진 혜진자도 연면기봉을 바라보고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길은 갈수록 험준하여 갔다.
더구나 초행(初行)길인 그들로서는 방향마저 찾을 수 없었다.
다행히 경신술(經身術)을 가진 그들은 겨우 방향을 잡아 산을 올라갔다.
십여 개의 산 고개를 넘자 해는 서산으로 넘어갔다.
혜진자는 물론 양몽환과 하림 그리고 동숙정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졌고
약간 가쁜 숨을 쉬며 산을 넘었다.
혜진자는 세 사람에게 가지고 있는 건량(乾糧)을 바위 위에 앉아 먹게 하고는
자기는 경신술을 발휘하여 우측에 있는 깎아지른 절벽위로 올라갔다.
마치 새가 나무 가지를 건너 앉은 것같이 옮겨 뛰어간다.
그리고는 잠깐 사이에 수 백 장을 올라갔다.
이것을 본 하림은 크게 감탄하여 중얼거렸다.
「스승님의 경공(輕功)은 정말 훌륭하구나. 내가 스승님과 같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양몽환이 웃으면서
「높은 무술을 익히려면 쉬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 할 날이 있지.」
하자 동숙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림 동생은 내외의 무술의 기초가 되어 있고 또 어여쁘게 생겼으니
제일 적당한 것은 날으는 기술(飛行輕功)을 닦는 게 좋겠어.
만일 하림이 열심히 배운다면 삼 년 안에 스승님의 절학(絶學)을 거의 익힐 수 있을 거야.
그러나 하림이 열심히 할지 모르지 내 생각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고는 생끗이 웃으며 양몽환을 쳐다보았다.
양몽환은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돌려 골짜기만 내려 보았다.
심소저는 머리를 들어 하늘에 떠도는 흰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골짜기를 내려다보던 양몽환은 갑자기
「앗!」
하고 외치는 것이었다.
이때 깜짝 놀란 동숙정과 하림은 눈을 크게 떴다.
바로 백 장이나 넘는 골짜기 밑에 사오장이 넘는 큰 뱀(大蛇)과 큰 학(巨鶴)이 싸우고 있었다.
큰 뱀 몸통은 먹과 같이 까맣고 비늘은 햇빛에 번쩍이었다.
백학도 매우 진기하게 생겼는데 보통 학보다 이십 배나 더 크고 벼슬은 불보다도 더 빨갛다.
학이 공중에서 빙빙 돌다가 뱀에게 덤벼들면 뱀은 하체를 똘똘 말고 상체를 위로 들고
무서운 독기를 뿜어낸다.
큰 학은 독사의 독기를 피해 급히 날개를 퍼덕이며 뱀의 주위를 돌며 긴 부리로
마구 쪼아 대며 괴성을 질렀다.
학과 뱀의 싸움이 한참 지나자 뱀의 입에서 뿜어내는 독기는 점점 줄어 들어갔다.
그러자 학은 몹시 교활하게 뱀이 독기를 거두어 드릴 때 갑자기 공격하자
독사는 도망가지 못하고 상체를 일으켜 적을 막는다.
양몽환 일행은 학의 공격을 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더 버티던 뱀은 잠깐 쉬는 듯 몸을 틀고 꿈적 않는다.
그러던 뱀은 별안간 몸을 일으키더니 살과 같이 학에게 덤벼들어
큰 입을 벌려 붉은 혀를 날름거린다.
학도 바른 쪽 날개를 번개같이 아래로 치고 두 발톱으로 뱀의 머리를 날카롭게 할퀴다.
서로 맹렬히 얼마동안 싸우다 기어이 검은 독사는 몸을 비틀며 슬슬 피해
달아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학은 두 발로 독사를 뒤집어 놓고 내장을 쪼아 먹는다.
그리고는 날개를 펄럭이며 길게 한 번 울고는 하늘높이 올라가고 말았다.
그리고 양몽환 등 세 사람의 머리 위를 빙빙 돌다가는 동 쪽을 향하여 날아가 버렸다.
하림은 학의 그림자가 없어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다가 생각하였다.
(저 큰 백학을 내가 탈 수 있다면 하늘을 날 수 있고……얼마나 좋을까!)
양몽환은 학과 뱀이 서로 싸우던 것을 생각하면서 마음속으로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머리를 숙여 깊은 골짜기에 죽어 있는 뱀을 자세히 관찰한 동숙정은
그것이 보기 드문 묵인철갑사(墨鱗鐵甲蛇)란 것을 알아내었다.
스승님의 말씀에 의하면 묵인철갑사의 가죽은 귀한 보물로 칼과 창을 막아 낼 수 있어
무림(무예계) 사람들은 진기한 보물로 여긴다.
그리고 이런 괴사(怪蛇)를 발견한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 독사의 독은 굉장히 독하여 한 번 물리거나 혹은 입에서 뿜는 독을 쐬기만 해도
백보 이내에서 죽고 만다.
이와 같이 세 사람은 각기 제 나름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림은 갑자기 학을 타고 싶다는 생각을 양몽환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어
양몽환을 바라보니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무술에 열중해 있었다.
하림은 조용히 불렀다.
「오빠도 백학을 타고 싶어요?」
그러나 양몽환은 학이 방금 두 발톱으로 뱀의 머리를 할퀴던 일을 생각하며
무술을 익히기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림의 묻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하림은 양몽환이 자기를 상대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바른 팔을 뻗어
양몽환의 팔을 잡아당기려 하는데 갑자기 심소저의 팔을 잡는 손이 있었다.
그리고는 곧 이어 부드러운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를 귀찮게 하지마라.」
하림은 놀라며 돌아보자 스승이 웃으며 서 있었다.
「스승님! 오빤 무엇을 하고 있지요?」
혜진자 미소를 지으며
「지금 무술을 익히고 있는 중이다.
네 오빠는 깨달음이 퍽 빠른 귀한 기질을 타고 났다.
네 대사백(大師伯)님께서 추혼십이검(追魂十二劍)을 물려준 일도 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앞으로 우리 곤륜파를 빛내게 하는 것은 양몽환의 손에 달려 있다.」
혜진자의 말을 들은 하림은 그 뜻을 똑똑히 알 수 있었고 스승님이
오빠를 칭찬해 주는 것이 기뻐서 웃으면서 말하였다.
「스승님! 오빠는 훌륭해요.
더구나 내가 모르는 일이 있으면 무엇이나 오빠에게 묻습니다.」
혜진자는 하림의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에서 자기의 지난 일을 생각하였다.
혜진자는 하림을 자기 가까이 불러 앉혔다.
「말하지 말고 네 오빠가 무술을 익히는 것을 잘 보아라!」
양몽환은 두 손을 번갈아 가며 한참 동안 연습하더니
그 오묘한 기술을 체득하지 못한 듯 탄식하며 두 손을 내렸다.
그리고는 혜진자를 바라보았다.
혜진자는 오 십이 다 되었지만 내공(內功)의 힘이 대단하여 삼십 세쯤 젊어 보였다.
양몽환은 허리를 굽혀 읍(揖)을 하고 말했다.
「무학을 깨닫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네가 방금 익힌 무술은 천강장(天?掌)중의 적수박용(赤手博龍)과 비슷한 것도 같고
어찌 보면 그렇지 않은 것도 같다. 적수박용보다도 더 오묘한 것 같은데 어디서 배웠느냐?」
하고 혜진자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방금 학과 독사가 싸울 때 학이 발톱으로 독사를 후려치는 것을 보고 우리 천강장중의
적수박용의 수와 흡사하여 한참 연습하였으나 아직 그 비결을 체득하지 못하였습니다.」
혜진자는 한참 생각하다가
「아깝게도 내가 직접 보지 못하여 대답하기 어렵구나.
적수박용은 천강장의 세 가지 절초(絶招)의 하나다.
너는 이미 적수박용의 수에 정통하고 재능이 뛰어나니 잘 연구하여 보아라.
내가 방금 연습하는 것을 다시 보면 반드시 오묘한 이치를 얻겠다.
열심히 하면은 기초(奇招)를 창조해 낼 것이다.
천강장의 삼십육식(三十六式)은 각 일식(一式)마다 선배님들이 심혈을 기울여 연구해 낸 것이다.
장차 네가 한 수를 연구해 내면 우리 형제들이 모두 기뻐할 것이다.」
혜진자의 말 속에는 다음 대의 우두머리로 추천하는 뜻이 들어 있다는 것을
양몽환은 즉시 깨닫지 못하였다.
동숙정이 듣고 있다가 몸을 돌리며 혜진자에게 말했다.
「사부님! 저 골짜기 밑에 있는 뱀이 묵인철갑사가 아닌지 보십시오.
방금 학과 싸울 때 입에서 독기를 뿜어냈습니다.」
그 말에 자세히 관찰한 혜진자는 마음속으로 놀랬다.
깊은 골짜기에 있는 큰 뱀은 확실히 묵인철갑사와 같았지만 큰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 말 없이 한참 있다가 내려가 보기로 결심하고는 세 사람에게 말했다.
「어디 내려가 보자.」
혜진자는 묵인철갑사라는 것을 알고는 그냥 지나 칠 수 없었다.
네 사람은 내려 설 곳을 가리면서 소나무와 바위가 뒤섞인 절벽을 타고 내려갔다.
혜진자는 몸을 굽혀 돌을 집어 들고 던졌다.
그러자 돌은 유성과 같이 날아 강철 같은 뱀 가죽에 정확히 맞았다.
그리고 뱀 가죽에 맞은 돌은 산산조각으로 깨져 흩어지는 것이었다.
혜진자는 세 사람을 데리고 죽은 뱀 근처에 이르러
「뱀을 칼로 잘라 보아라!」
철갑사의 가죽이 질긴 것을 알리 없는 양몽환은 말을 듣자마자
칼을 꺼내어 강하게 서너 번 내려 쳤다.
그러나 뱀의 몸뚱이는 끄덕 않고 대신 삼척의 탄탄한 칼날만 문드러지는 것이었다.
그러자 양몽환은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멍청히 서 있기만 하였다.
혜진자는 양몽환의 칼을 받아 가지고 뱀의 몸을 뒤집어 놓고 배 밑에 있는
흰 금을 따라 칼끝을 그어 내렸다. 그러자 구역질이 나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다행히 네 사람은 내공의 힘으로 그 냄새를 피하고 뱀 껍질을 벗기어 가지고
골짜기의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으며 혜진자는 양몽환을 불렀다.
「이 묵인칠갑사는 보기 드문 일종의 독사로 성질이 날카롭고 독이 세어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이 놈을 만나면 살아남기가 힘들다.
주로 큰 산의 캄캄한 동굴 속 같은 데서 살지. 뱀은 비록 독하나 가죽은 진기한 보물이지,
이렇게 큰 독사는 희귀한 것으로 우리가 오늘 힘 들이지 않고 얻었으니
그야말로 광세기연(曠世奇緣)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가죽을 다듬어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들면 모든 독을 피할 수 있으니
우리 곤륜파는 이 가죽으로서 강호의 어떤 자의 암기든지 대항할 수 있겠다.」
하고는 잘 접어 몸에 지니고 절벽을 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네 사람은 다시 만봉이 연접한 첩첩 산중을 걸어갔다.
산세를 살펴본 혜진자는 동남방의 산봉우리들이 더 기발하여 마음속으로
험한 산 속에 백운암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길로 세 사람을 데리고 동남방을 향하여 걸어갔다.
그러나 하림은 길을 걷는 동안 그 큰 학을 탔으면 하는 생각에 가득 차 한 마디 말도 없이
길만 걸었다.
그러한 하림을 본 양몽환은 무엇을 깊이 생각하는 것 같아 조용히 다가가서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난 아까 그 큰 학을 타고 싶은데 오빠도 방법이 없을 것 같아 물어 보지 않았어요.」
하고는 쓸쓸히 웃었다.
양몽환은 그녀의 쓸쓸한 웃음을 보면서 무슨 일이든지 너무 신경을 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을 상하게 할까 염려한 그는 웃으면서 위로했다.
「그거야 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다음에 학을 만나면 내가 잡아 주지」
「굉장히 빨리 나는 데 잡을 수 있어요?」
하고 하림은 웃었다.
그 말에 양몽환은 약간 얼굴을 붉혔다.
하림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려고 생각지도 않고 그냥 한 말인데 하림의 말을 들으니
사실 맞는 말이다. 가만히 침묵에 잠긴 그는 생각에 잠겼다.
(그렇군! 다음에 그 학을 만나도 잡을 수 없지!)
하림은 양몽환의 태도가 이상한 것을 눈치 채고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다정히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난 그 학을 타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러자 양몽환은
「며칠 안에 내가 작은 놈으로 한 마리 잡아 줄께.」
하고는 그녀를 보며 웃었다.
네 사람은 그날 밤을 산에서 노숙하고 다음날 날이 밝자 계속하여 길을 걸었다.
이때 이들은 괄창산맥에 들어와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네 사람은 이상한 돌이 울퉁불퉁 나와 있는 길을 걷고 있었다.
보통 사람은 걷기 어려운 위험한 길이었으나 경신술이 있는 이 네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계속 첩첩이 이어진 산은 얼마나 길이 멀리 뻗쳐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혜진자는 말을 하진 않으나 속으로는 걱정이었다.
백운암(白雲巖)이 어느 산 속에 있는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되돌아 설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갑자기 뇌성과 같은 맹수의 울음소리가 심산유곡에 메아리쳐 울렸다.
그러자 곧 잿빛 털에 검은 줄무늬가 있는 큰 사자가 입을 크게 벌리고 네 사람을 향하여
천천히 오는 것이었다.
하림은 놀래어 동숙정을 붙들고 외쳤다.
「언니! 저 호랑이는 참 큰 데 사람을 물어요?」
「저건 호랑이가 아니고 사자야. 동생은 무서운가?」
「예 좀 두려워요 그러나 무섭지는 않아요.
저놈이 우릴 해치려 하면 내가 죽여 버리겠어요.」
이 때 혜진자 등 네 사람은 수 십 장이나 되는 절벽 위에 서 있었다.
사자는 네 사람을 한참 보더니 한 번 울부짖고 유성 같이 날쌔게
네 사람이 서 있는 앞 바위 밑으로 달려들었다.
혜진자는 내공을 모으고 있다가 사자가 덤벼들자 곧 손을 내리쳤다.
이와 동시에 양몽환, 하림, 숙정이 등에 걸머진 칼을 빼어 드니
세 사람의 칼은 햇빛에 눈이 부시게 반짝였다.
그러나 사자는 바위 밑까지 왔다가는 갑자기 몸을 돌려 천천히 돌아간다.
백수지왕(白獸之王)이란 사자가 사람을 보고 그냥 돌아 서니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하늘에서 학의 울음소리가 들려 일행은 고개를 들었다.
과연, 하늘에는 흰 점이 하나 움직인다.
그리고는 학의 붉은 벼슬을 볼 수 있었다.
하림은 기뻐서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오빠! 저것 봐요! 큰 학이 정말 또 있어요!」
그러나 학은 백여 장쯤 떨어진 곳에서 날개를 흔든다.
그리고는 절벽이 이어져 있는 봉우리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학과 사자가 오른 쪽 절벽이 끝나는 곳에서
똑같이 사라진 점 이었다.
이상히 생각한 혜진자는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살폈다.
그 곳에서는 바람소리 속에 간간히 퉁소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그 퉁소소리는 크지는 않았으나 힘이 있었다.
한참 듣고 있던 혜진자는 놀라며 내공을 발휘하였다.
이때 양몽환 등은 그 퉁소 소리에 그만 내공이 약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혜진자는 마음이 급하여 세 사람의 혈도(穴道)를 막아 주려고 생각하는데
그 퉁소소리는 그치며 여음만 멀리 흩어졌다.
「사숙님! 이 퉁소 소리는 좀 이상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우리들의 내공마저 약화시키는군요.
아무리 제지하려고해도 못하겠어요.」
하고 감탄하는 것이었다.
혜진자는
「지금 그 퉁소 소리는 무문(武門)중에서 일종의 높은 내공이다.
내가 아는 바로는 천하에 이 내공의 힘을 가진 자는 많지 않아 옥소선자(玉簫仙子)에 틀림이 없다. 그녀가 괄창산에 왔단 말인가? 만일 이 마귀 년이 왔다면 네 스승님이 매우 위험하게 되었다.」
「그 옥소선자는 누구입니까?
팔비신옹 문공태와 천용방의 이창란(李滄瀾)보다 더 강합니까?」
하고 양몽환이 물었다. 혜진자는 머리를 끄덕이며
「그를 본 사람이 적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생겼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의 부드러운 퉁소 소리는 가끔 강호에 나타나서 적지 않은 무림(武林)의 고수들을
퉁소소리로 쓰러뜨리기 때문에 강호에서는 그를 옥소선자란 별명을 붙였다.
들리는 말에는 옥소선자는 검은 옷을 즐겨 입고 얼굴은 검은 비단으로 가린다고 들었다.
그녀는 변장(變裝)에 무쌍한 괴녀(怪女)로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본 사람이 없단다.」
혜진자가 막 말을 마치자 또 멀리서 학의 울음소리와 사자의 울부짖음이 들려 왔다
이번에는 소리가 더 처절하였다.
혜진자는
「가서 좀 보자!」
하고는 앞장을 섰다.
몇 구비를 지나자 앞의 경치가 일변하는 것이었다.
깊은 골짜기가산봉우리를 돌아 꼬불꼬불 뻗어 있고 지세는 평탄하였다.
온갖 기화(奇花)가 피어 있어 산들바람에 향내를 풍긴다.
그러나 그 사자나 학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네 사람은 경신술로 골짜기를 뛰어 넘어 계속 몇 개의 산봉우리를 넘어섰다.
혜진자는 양몽환과 하림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을 보고는 걸음을 멈추고
「이 골짜기는 봄과 같이 따뜻하고 경치가 좋군. 우리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가 가자.」
하는 것이었다.
이 때 해는 지고 저녁노을이 골짜기에 반사되어 창송취백(蒼松?柏)이
그 빛을 받아 더욱 파랗게 보였다.
하림은 풀 위에 누워 하늘에 구름의 변화를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는지
입가에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이때 사방을 살펴보던 혜진자는 갑자기 땅바닥에 무엇인가 써 놓고는
몸을 일으켜 절벽근처로 걸어갔다.
그리고 곧 등을 절벽에 대고 뱀이 기어가듯 백여 장이 넘는 절벽을 가볍게 올라가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작은 소리로 옆에 있는 동숙정에게 말했다.
「삼사숙(三師叔)의 벽호공(壁虎功)이 굉장하십니다.
우리는 삼십장(三十丈)밖에 못 올라가는데 사숙님은 단숨에 백여 장이 넘는 곳을
가볍게 올라가십니다 그려.」
「그래도 저보다는 많이 올라가시는군, 나는 겨우 이십 장 밖에 올라가지 못하는데.」
하고 웃으며 말하였다.
그리고 일양자는 금정봉 삼청궁에서 열흘을 묵고 곤륜산을 떠나
상북(湘北-湖北省)의 현도관(玄都觀)에 안주(安住)하기로 결심하고
곤륜산에는 발길을 끊다시피 하였다.
일양자의 뜻은 옥영자와 혜진자의 사랑이 와해되어 둘이 화해 한 후에야
다시 삼청궁으로 돌아 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옥영자와 혜진자는 일양자의 뜻을 알아 두 사람 사이에
사정(私情)을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그때 혜진자의 마음은 일양자를 생각하고 있었으나
옥영자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걱정이었다.
이러한 미묘한 사이로 몇 십 년간을 지내는 동안
누구도 말하지 않았으나 내심으로는 모두 깊이 새기고 있었다.
이제 혜진자의 나이 오십 전후, 모든 것을 과거로 돌려 잊어가고 있었다.
한동안 혜진자는 정신없이 생각에 잠겨 있고 양몽환(楊夢?)과 심하림(沈霞淋)
두 사람은 여전히 땅에 엎드린 채 일어날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자 그 묘령의 여승은 더 기다릴 수가 없는지
혜진자의 옆으로 다가 와서 조용히 말했다.
「사부님! 저 사람들을 일어나라고 하시지요?」
이 말에 혜진자는 제 정신을 차리고 양몽환과 하림이
나란히 꿇어 엎드려 있는 것을 내려다보고는 담담히 웃으며 말하였다.
「일어나 거라!」
하고는 달빛에 비쳐 편지를 뜯어 읽었다.
편지를 다 보고는 안색이 약간 변하면서 하림에게 물었다.
「네가 심하림이냐?」
하는 말에 심소저는 머리를 숙여 공손히 대답하였다.
「우리 곤륜파 문하에 들어오고 싶으냐?」
소저는 또 머리를 끄덕이고는 얼굴을 돌려 양몽환을 쳐다보았다.
양몽환이 작은 소리로 말하였다.
「사부님께 인사드려라.」
하자 심소저는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혜진자의 얼굴을 잠시 훔쳐보았다.
그때 일양자가 보낸 편지에는 심소저의 출신 내력에 관하여 자세히 써 있어서
대략 그녀의 과거를 짐작하고 곤륜파에 입적시킬 것을 결심했다.
하림이 스승에 대한 예가 끝나자 혜진자는 묘령의 여승을 가리키며
「저분이 너의 사형(師兄)이니 인사 드려라.」
하고 말하였다.
심소저는 몸을 돌려 여승에게도 인사했다.
그러자 여승은 합장을 하며 답례하고는 하림의 손을 잡으며
「동생! 나는 동숙정(童淑貞)이라고 해요.」
하고 다정하게 말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양몽환은 혜진자의
분부를 기다리지 않고 서너 걸음을 나서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뒤
「숙정 누님! 소제는 양몽환이라 합니다.」
하는 것이었다. 동숙정은 양몽환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저보다 떠 나이가 많은 것 같고 또한 대사백(大師伯)님의 제자이시니
저보고 동생이라고 부르십시오.」
그러자 양몽환은
「아마 제가 누님보다 늦게 입문(入門)하였을 것입니다.」
라고 웃으며 대답하였다. 동숙정은 눈언저리가 붉어지면서
「저는 부모가 없는 불운한 사람으로 세살 때 사부님이
곤륜산에 데려 오신지 벌써 십팔 년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림이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로 외쳤다.
「오빠! 사람이 와요.」
이 말에 동숙정과 양몽환은 일제히 뒤로 돌아 보았다.
과연 동쪽에서 한 청의(靑衣)소년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걷는 것 같으나 매우 빨랐다.
잠깐 사이에 세 사람 앞으로 왔다.
그러나 그 사람은 본체도 않고 그냥 냉소를 하면서 세 사람을 지나쳐 가 버리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머리를 돌려 그 청의 소년의 뒷모습을 자세히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 청의 소년은 두 발을 땅에 대지 않고 가고 있었다.
이 풀 위를 걷는 내공은 양 몽환도 할 수 있는 것으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단숨에 저렇게 먼 거리를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가볍게 빨리 가는 것인데 청의 소년은 그 행동이 매우 훌륭하였다.
양몽환은 마음속으로 자기의 무술은 청의소년을 따를 수 없고 일양자 사부님과
사숙 혜진자도 그에 미치지 못 하리라고 생각하였다.
양몽환은 멍청히 그 청의의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 산 꼭대기까지 올라간 혜진자는 동쪽에 凸형으로 튀어 나온
세 개의 높은 봉우리를 발견했다.
그 중의 한 봉우리에 흰 줄이 보이는데 저녁 햇빛을 받아 더욱 눈에 띠었다.
얼마동안 자세히 보던 혜진자는 그것이 다름 아닌 폭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골짜기 밑은 비록 꾸불꾸불하게 뻗어진 계곡이었으나
모두 저 높은 산봉우리에 연하여 있었다.
산세를 자세히 살핀 혜진자는 다시 벽호공의 수를 써서 절벽 밑으로 내려왔다.
그러자 양몽환이 방금 지나간 청의 소년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무림의 여걸이라 일컬어지는 혜진자도 이 말을 듣고는 안색이 변하는 것이었다.
정신을 집중하여 한참 생각하며 말이 없었다.
양몽환이 설명한 청의 소년의 신법(身法)은 일종의 높은 능공허도
내가신공(凌空虛渡內家神功)으로 이 법은 무림의 전설로만 전하는 것이었다.
수 십 년간을 강호에서 지낸 혜진자는 견문도 넓었다.
그러나 무예계에서 이런 경신술을 쓴다는 인물을 들어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언행이 신중한 양몽환의 말로 미루어 보아 청의 소년의 경신술이 정말이라고
느껴져 혜진자는 적지 아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혜진자는 한참 생각하다가 억지로 진정하며 다시 물었다.
「그 청의 소년은 대략 몇 살이나 되어 보이더냐?」
양몽환은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대답하였다.
「부끄럽습니다만 그 사람의 걷는 모양이 구름이 흐르듯이
보기에는 천천히 걷는 것 같은데 실지로는 비할 바 없이 민첩하였습니다.
제가 정신을 차려 보았는데도 그의 모습을 똑똑히 보지 못 하였습니다.
그는 키가 작고 섬세하게 생겼고 나이는 퍽 어린 것같이 보였으나
풀 위를 걷는 것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너의 말이 옳다면 그건 풀 위를 걷는 무술이 아니다.
그가 너의 옆을 지날 때 산들 바람이 일지 않던가?」
이 말이 양몽환을 깨우쳐 주었다.
「사숙님이 묻지 않으셨으면 제가 생각해 내지 못할 뻔 하였습니다.
청의 소년이 지나칠 때 바람은 느끼지 못하였고 또한 그의 옷자락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두 무릎을 곧 바로 세워 가지고 산들바람이 풀잎을 스치는 것 같은 신법이었습니다.」
혜진자는 그 말에 더욱 놀랬으나 담담히 웃으면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양몽환은 혜진자가 말을 다 하지 않은 것을 느꼈으나 혜진자가 말하지 않으므로
그 역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밤은 점점 깊어졌고 동쪽 하늘엔 밝은 명월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골짜기는 매우 조용해졌고 경치는 더욱 아름다워졌다.
혜진자는 천천히 일어나 달을 보면서 풀밭을 천천히 왔다 갔다 했다.
동숙정은 혜진자의 모습에서 마음속으로 무슨 어려운 문제를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 하였다.
바로 이때,
갑자기 고요한 산골짜기에 멀리서 큰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에 양몽환이 벌떡 일어나자 하림과 동숙정도 일어났다.
혜진자는 정신을 가다듬어 그 소리의 여음이 완전히 없어질 때가지 듣고 있다가
세 사람을 돌아다보며 말하였다.
「많은 무예계의 고수들이 모두 괄창산에 와 있다.
이 소리는 가까운 곳에 나는 것이다. 어서 가자!」
네 사람은 비행신법(飛行身法)으로 깊은 골짜기를 달려 두경(兩更)쯤 되는 시간에
칠팔십 리를 달려 왔다.
골짜기는 들어갈수록 점점 웅장하고 험해져 갔다.
다시 두 고개를 넘어 서자 우레와 같은 폭음소리가 들렸다.
그곳에는 凸형의 산봉우리가 우뚝 서 있었고 그 가운데로 기운찬 물줄기가 흘러내리는데
마치 산 위에서 흰 줄을 내려뜨린 것 같이 선명하였다.
또한 골짜기도 갑자기 확 넓어져 기화요초가 만발하여 향기를 내뿜고 있으며
골짜기가 끝나는 곳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다.
그 소나무 숲 뒤에 있는 작은 산봉우리가 퍽 아름답게 보였다.
그 곳으로 맑은 물이 흘러 내려 큰 소나무를 돌아 동굴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데
폭포 소리에 곁들여 졸졸 흐르는 소리가 운치 있게 들려 왔다.
혜진자는 양몽환 등을 물이 흐르는 굴 옆으로 데리고 가서 아래를 굽어보게 했다.
물줄기는 길이가 십장 정도에 넓이는 삼장 정도가 되어보였다.
이 골짜기는 평평하던 시내가 갑자기 아래로 떨어졌으므로 그 굴 밑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동굴 속은 캄캄하고 어두워 보이는 것 도 없었다.
조물주의 신기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불가사의 하게 느끼게 하고 감탄하게 하는 것이었다.
혜진자의 정통한 내공과 초인의 눈빛을 가지고도 십장 정도밖에 볼 수 없었고
그 이상은 알아 볼 방도가 없었다.
이때, 그 캄캄한 곳에서 흰 그림자가 번쩍하더니
전광석화와 같이 굴 밖으로 나와 바람을 일으키며 날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조금 전의 큰 학이었다.
백학이 굴 밖으로 날아 나오자 하림은 손뼉을 치면서 외쳤다.
「아! 저 큰 백학이 이 굴 속에 사는구나!」
그녀의 외침에 양몽환은 무의식적으로 재빨리 왼 손으로 얼굴을 보호하며
바른 손으로 천강장의 적수박용의 수를 석 학을 쏘는 것 같이 그 백학에게 덤벼들었다.
그 학은 위로 날다가 사람이 달려드는 것을 보고는 몸을 휙 돌려 왼쪽 날개로 번개같이
내려치며 양몽환의 장풍이 마치 닿기도 전에 장풍을 막아냈다.
그러자 학이 날개로 쳐 보낸 바람을 맞은 양몽환은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학은 유유히 흰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로 날아갔다.
돌변한 사태에 혜진자는 도포 자락을 날리면서 양몽환에게 달려가고 하림은
두 눈에 눈물을 흘리며 발발 떨기만 했다.
혜진자가 왼손으로 양몽환의 인중에 혈을 가만히 눌러주자
양몽환은 천천히 숨을 내쉬면서 눈을 떠 주위를 들러 보았다.
그리고는 멍청히 서시 자기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하림을 보며
「왜 울지?」
하고 물었다.
하림은 소매를 들어 얼굴에 눈물 자국을 밖아 내고는
「그 학이 나빠! 나는 다시 그 학을 생각하지 않을 테야.」
하고 하림이 막 말을 마치는데 돌연 소나무 뒤에서 꾸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하림이 아니냐? 왜 괄창산에 왔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그녀가 십여 년간 들어 익힌 소리로 누군지 돌아다보지도 않고
「사부님! 사부님!」
하고 외쳤다.
그러자 소나무 뒤에서 한 중과 한 도인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바로 일양자와 등인대사이었다. 하림은 두 팔을 벌리며 등인대사의 품에 안겼다.
노승은 왼 손에 선장(禪杖)을 짚고 바른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자애로운 목소리로
「너는 곤륜파의 제자가 되었는데 왜 그렇게 나를 부르느냐?」
혜진자는 갑자기 일양자가 나타난 것을 보고는 수 십 년 전의 지난일이 생각나
한참 멍하니 서 있다가 합장하고서
「대사형! 안녕하셨습니까?」
일양자는 웃으면서 답례를 했다.
「너희들은 왜 여기까지 찾아 왔느냐? 장문에 동생들도 모두 잘 지내느냐?」
혜진자는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참으며 웃으면서 말하였다.
「둘째 사형님께서도 안녕하십니다.
우리는 늘 대사형님을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대사형님을 찾아서 상북까지 오던 길에 우연히 도중에서
저 애들을 만나 오빠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괄창산에 와 계신 것을 알고 저 애들을 데리고 찾아오던 길에
이곳에서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일양자는 한숨을 쉬고서 무엇을 말 하려다 그만두고 몸을 돌려 혜진자를
등인대사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등인대사는 불경을 외우고 합장한 후 정중하게
「존함은 영사형(令師兄)에게서 늘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비로소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하림은 가엾은 아이로 제가 가르칠 수가 없어 맡기오니 잘 가르쳐 주시길 바랍니다.
소승 먼저 하림을 대신하여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하고는 다시 절을 하였다.
혜진자도 곧 합장하며 답례를 하였다.
그러는 중에도 일양자는 마음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장진도는 천하의 무예계에서 열망하여 구하는 보물로 이것을 차지하려면
반드시 비참한 싸움을 치러야 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혜진자가 난데없이 양몽환 등을 데리고 괄창산으로 왔으니
이는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마음을 써서 돌봐 주어야 하므로
마음속으로 불만이었으나 겉으로는 내색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혜진자는 십여 년간이나 보지 못하던 일양자를 만나 매우 기뻐다.
이들은 달빛 아래 둘러 앉아 길에서 보고 들은 일들을 자세히 일양지에게 이야기 하여 주었다.
각 파 고수들이 장진도를 뺏으려고 상북으로 모여든다는 풍문을 들었으나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혜진자가 말하는 것과 같이 화산파의 팔비신옹, 점창쌍안
그리고 천용방의 이창란 등의 일대 호걸들이 이미 괄창산에 들어왔고
더욱이 골짜기에서 들었다는 퉁소소리와 청의 소년의 말을 듣고 일양자는 더욱 놀랬다.
그들이 나타난 곳은 이곳에서 불과 백리에 지나지 않는다.
바야흐로 이 괄창산에서 비참한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일양자는 속으로는 걱정이 되었으나 겉으로는 진정하고 혜진자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나와 등인대사는 일주일 동안이나 괄창산을 헤매다가 겨우
이 골짜기에 도착하였는데 너희들이 한발 먼저 왔구나.」
「우리야 우연히 들어 왔던 길이지요」
하고 혜진자가 대답하였다.
일양자는 이때 시간이 귀하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달빛에 장진도를 내어 놓았다.
흰 비단에 산이 그려져 있는데 세봉우리가 凸형으로 나란히 솟아 있고
가운데 봉우리에서 폭포가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골짜기와 흡사하였다.
그리고도 골짜기가 끝나는 곳도 완전히 같았다.
사실 귀원비급이 이 근처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도에는 보물이 있는 곳을
명시하지 않아서 아무리 생각해도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한동안 의논하였으나 알 길이 없었다. 일양자가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고 있을 때
문득 달빛이 소나무를 비치고 바람에 소나무 그림자가 흔들리며 온 땅에 은빛이 어른 거렸다.
그는 곧 작은 소리로 지도에 써있는 글씨를 읽었다.
「푸른 소나무 위에 달빛이 비치면 돌 위에 밝은 샘이 흐르도다.」
일양자는 갑자기 일어나 거송(巨松)밑에 있는 큰 돌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 깨끗한 물이 졸졸 큰 바위를 돌아 백장 밖에 있는 깊은 동굴로 흘러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바위는 천연적으로 생긴 바위로서 그 주위는 의심할만한 아무런 표적도 없었다.
일양자는 실망하지 않고 한 시간 동안이나 주위를 들면서 자세히 살폈으나
아무런 단서를 찾아 내지 못하였다.
하림은 깨끗한 물을 보고는 며칠간 목욕을 못한 것 을 생각하고는
천천히 물가로 가서 신을 벗고 백옥 같은 두 발을 물에 담갔다.
이 물은 눈이 녹아서 내리는 물로서 뼈까지 차가왔다.
(이 곳에서 목욕이라도 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돌 위에 걸터앉아 두 발을 물에 담그고
그 맑은 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동안 장진도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양몽환은 걱정이 되어 물을 따라
내려오다 물가에 앉아 있는 하림을 발견했다.
양몽환이 가만히 그녀 옆으로 가서 조용히 말했다.
「무엇을 생각 하고 있니? 아직도 학을 타고 싶은가?」
하림은 얼굴을 돌려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이 산골짜기가 넓다면 물이 모여 호수가 되겠지…… 생각했어요.」
양몽환은
「아!」
소리를 질렀다.
그러는 그의 머리 속에는 번개 같은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이 산골에 흐르는 물은 수 백 년을 흘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저 굴 속이 얼마나 깊은지는 모르지만 물이 나가는 곳이 없다면 물이 꽉 찼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굴 속에는 반드시 물이 흘러 나가는 곳이 있을 것이다.)
생각하고 자기도 모르게 물 속으로 손을 뻗어 더듬어 보았다. 굉장히 미끄럽다.
자세히 보니 이 골짜기는 주위가 천연적인 석벽으로 되어 있었다.
장진도에 쓰여 있는 바위 위에 밝은 물이 흐른다는 뜻을 생각하고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 이 깊은 굴속에는 또 다른 천지가 있을 것이다!)
일양자 등은 침묵에 잠겼다가 양몽환이 지르는 소리를 듣고 모두 달려 왔다.
양몽환은 무의식중에 발견한 것을 일양자에게 이야기 했다.
과연 양몽환의 말대로 굴속은 미끄러워 발 디딜 곳이 없었다.
한참 생각한 일양자는 양몽환에게 분부했다
「가서 등나무를 거두어 오너라!」
하고는 풀밭에 정좌하여 눈을 감은 일양자는 내공을 운행 하는 것이었다.
혜진자는 일양자가 동굴 속을 탐색할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걱정만 하였다.
얼마 만에 양몽환은 등나무 줄기를 가지고 돌아 왔다.
그러자 일양자는 별안간 일어나서는 큰 소리로
「이 깊은 동굴 속의 벽은 몹시 미끄럽고 얼마나 깊은지 모른다.
벽호공의 무술로는 아래로 내려가기 어렵다.
나는 이 등 넝쿨을 이용하여 밑을 조사하고 올 터이니
너희는 내가 올 때까지 이곳에서 기 다려라!」
하고는 양몽환에게 모아 온 등 넝쿨을 하나하나 길게 이으라고 하였다.
양몽환은 등 넝쿨 다 이어 놓고서
「사부님! 제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러자 일양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밑은 깊이를 알지 못하고 그곳에 독물괴수가 있을지 모르니 네 힘으로 감당키 어렵다.」
「그럼 제가 대신 가보면 어떨까요?」
혜진자가 다시 나섰다.
「어찌 내 대신 위험한 곳에 가겠소.
양몽환과 하림 두 아이를 잘 보살펴 가르치기를 부탁하오.
그리고 내 대신 장문 동생에게 죄를 빌어 주시오.
나는 추혼십이검법을 내 마음 대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었소.」
혜진자는 이 말을 듣고는 마음이 언짢았으나 조용히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둘째 사형께서도 별로 화내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일양자는 등 넝쿨을 쥐고 물가로 내려가자.
등인대사가 천천히 등 넝쿨을 잡아 당겼다.
그리하여 잠깐 사이에 일양자는 그 깜깜한 동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혜진자 등은 정신을 바짝 모으고 동굴 밑을 바라보고 있었다.
등인대사의 손에서 넝쿨이 십장, 백장 천천히 풀려졌다.
그러하여 약 이백 장정도 내려갔을 때
그 깜깜한 곳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고 더 풀리지 않았다.
아마 일양자가 밑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일행은 긴장했다.
그들이 초조히 일양자가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일양자에게서 아무 소식이 없었다.
달은 지고 동쪽산위에서 해가 떠 올라왔다.
양몽환은 사부님의 안위에 걱정이 되어 참지 못하고 혜진자에게 인사를 하고는
「사숙님! 제가 사부님에게 한 번 내려가 보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혜진자는 양몽환의 초조한 태도를 보고 머리를 끄덕였다.
「조심하거라! 만일 사부님을 찾지 못할 경우에는 그 안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마라.」
양몽환이 대답을 하고 물 가까이 걸어가니 하림이 ?아 와서 물었다.
「오빠! 아래로 내려가시겠어요? 저도 같이 갈까요?」
「내가 내려가 보고 곧 올라올 터이니 넌 여기서 기다려라!」
「그럼 기다리고 있겠어요.」
양몽환은 담담히 웃고는 등 넝쿨을 잡고 천천히 아래로 내러갔다.
십장쯤 내려가자 날씨가 몹시 차가워 내공의 힘을 발휘하여 추위를 막았다.
굴 안은 마치 솥밑과 같이 생겨 내려 갈수록 점점 좁아져 갔고
이백 장되는 곳에는 두 장쯤 되는 둥근 바위가 있는데 흘러내리는 물은
그 바위에 부딪쳐 콩만 한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어 퍼지고 있었다.
이때 양몽환의 옷은 촉촉이 젖었다.
대략 이백 오십 장 쯤 되는 곳에 밑이 보였다.
길이는 일장쯤 되고 넓이는 약 팔 척쯤으로 물은 모두
이곳을 지나 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동쪽에 있는 반짝 반짝하는 바위에는 사람이
지날만한 석문(石門)이 반쯤 열려있었고 꼬불꼬불한 좁은 길이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만 하나 매우 캄캄하였다.
그러나 좀 더 들어가자 좁은 길이 확 트이며 환해졌다.
들어 갈수록 경치는 더욱 아름다워졌고 양쪽의 좁은 벽은 비취색으로 반짝이며
유리와 같이 빛났다.
이런 경치를 보는 양몽환은 감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이 넓다 하나 이런 깊은 동굴에 이런 세상이 있을 줄이야.
보지 않고는 누구든 믿지 못할 것이다.)
이때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 왔다.
양몽환은 일양자의 목소리인 것을 알고는 급히 두 모퉁이를 돌아갔다.
그곳에는 좁은 벽이 끝나면서 경치가 확 터지며 넓은 꽃밭에 각종의 꽃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일양자는 꽃나무 사이에 앉아 무엇을 생각하는지 양몽환이 가까이 다가가도 알지 못했다.
양몽환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꽃나무 숲으로 뛰어 들려다가 주춤 물러섰다.
그러는 그의 머리 속에는 번개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일양자는 이 꽃나무에 매여 나오지 못 하는 것 같다.
그는 무학이 뛰어나고 팔괘의 역리(易理)에 정통해 있다.
그런데 이 꽃나무들이 팔괘의 배열 방직으로 심어져 있다면
일양자를 곤란하게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양몽환이 이상히 생각되어 뛰어 들지 않고 자세히 꽃나무의 배열식을 살폈다.
그러나 질서 없이 심어져 있는 것이 팔괘의 방식 같지는 않았다.
양몽환은 천성이 뛰어난 사람으로 십 이년간이나 일양자를 따르면서
그의 절학의 무술과 학문, 팔괘역리의 오행기문(五行奇門)의 술(術)을 배웠지만
얼핏 알아 내지 못했다.
끝내 꽃나무 숲의 기이한 점을 알아 내지 못하고 막 걸어 들어가려는데
일양자가 일어나 좌측으로 돌았다.
이때 일양자는 오행기문의 걸음걸이로 왼쪽으로 일곱 걸음,
바른쪽으로 여덟 걸음을 왔다 갔다 하면서 그 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숲 속으로 들어가려 하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가던 길을 되돌아오는 것을 본 양몽환은
「사부님! 두 걸음만 더 들어 가십시오!」
하고 큰 소리로 외쳤으나 일양자는 아무 것도 듣지 못 했는지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일양자가 먼저 있던 곳에 다시 앉아 얼굴을 들고 장탄식을 하는 것을 양몽환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이 때 양몽환은 마음이 조급하여 졌다.
그는 일양자가 숲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 견딜 수 없었다.
한 참 생각한 그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일양자가 있는 곳이 바로 가운데이므로 한 쪽의 나무를 찍어 내면
그 효용이 없어져 일양자가 나을 수 있지 않을까?
이 꽃나무들을 벤다는 것은 즘 어렵지만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서는 할 수 없었다.
그가 칼을 빼어 이십 여주나 쓰러뜨렸을 때였다.
일양자의 눈빛이 갑자기 환해지며 양몽환이 칼을 들고 서있는 것을 보았다.
「이 나무들은 오행 기술로도 처리하기 어려웠는데 네가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구나」
하는 것이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나무를 베지 않고는 사부님을 구해낼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 무서운 일이다. 만일 너도 생각 없이 뛰어 들었다면 큰일 날 뻔 했구나.」
「그러면 남은 나무도 아주 다 베어 버리지요.
다음에 우리가 나올 때 다시 함정에 빠지지 않게요.」
「그럴 필요는 없다. 스물일곱 나무를 베어버렸으니
그 효용이 없어졌으니까. 빨리 들어가 보자.」
양몽환의 도움으로 간신히 빠져나온 일양자는 땀을 씻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계속해서 나무를 베어 버렸지만 일양자는 내버려두었다.
양몽환은 그 풀밭 안에서 몇 개의 해골을 발견하였다.
해골들은 수 척(尺)씩 떨어져 있었다.
양몽환은 걸음을 멈추고 일양자에게 물었다.
「이 해골들은 모두 사람의 해골일까요?」
「그렇겠지. 이 사람들도 귀원비급을 찾으려 이 곳에 왔다가
꽃나무 숲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굶어 죽은 것이다.」
하고는 조금 전에 자기가 갇혀 있던 생각을 하고는
다시금 몸서릴 치며 꽃 숲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풀밭을 지나 지세가 점점 좁아지면서
길이 끝나는 절벽 석문에 닿았다.
일양자가 내공의 힘으로 문을 밀자 안에는
한 칸 정도 되는 석실(石室 )이 있었다.
석실 좌우에는 큰 청석이 있는데 연대(蓮臺)같이 생겼다.
그리고 그 위에는 중과 도사가 각기 앉아 있었다.
굴 안에는 향내가 진동하여 코를 찔렀다.
가운데 청석 상 위에는 길이가 일척 정도에 높이가
오 척 정도 되는 옥함(玉函)이 놓여져 있고 대(臺) 앞에 놓여 있는
향로(香爐)에는 백색의 향이 가득 들어 있어
그 곳에서 이상한 향냄새가 퍼져나는 것이었다.
일양자는 이 중과 도사가 풍문에 들은 천기진인(天機眞人)과
삼음신니(三音神尼)의 법신(法身)이라고 짐작하고
그 앞에 굻어 앉아 합장 하였다.
양몽환도 일양자의 정중한 태도를 보고 따라서 합장했다.
그리고 천기진인과 삼음신니의 두 법체는 합장하고 앉아
마치 눈을 감고 참선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죽은 지 수 백 년이 되었는데 법체는 여전히 생생하였다.
이 두 선배 기인은 금강의 단단한 몸으로 단련하였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양몽환은 궁금하였으나
일양자의 태도가 너무나 숙연하여 감히 묻지 못 했다.
일양자는 유체법신(遺體法身)에게 참배를 마치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가 상 위에 있는 옥함을 자세히 보았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여덟 자의 글이 적혀져 있었다.
秘 ? 重 寶
(비 급 중 보)
珍 惜 莫 損
(진 석 막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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