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영웅(英雄)들의 사투(死鬪) <劍低奇逢>
일양자와 등인대사를 고별한 양몽환과 하림은 강가에 이르러 작은 배를 얻어 타고
강물 흐르는 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급류에 휘말린 조각배에 나란히 앉은 양몽환과 하림은 서로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양몽환은 물위에 생겼다가 사라지는 물거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는 동안
하림은 양몽환이 옆에 있다는 기쁨과 함께 등인대사와의 이별을 서글퍼하고 있었다.
배가 물결 따라 전가계(?家溪)를 지나자 복숭아꽃이 만발한 현도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림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양몽환을 쳐다보았다.
「곤륜산에 가 본 일이 있으신가요?」
양몽환은 고개를 저으며,
「십이 년 동안 사부님께서 나를 데리고 집에 다녀온 것 이외는 현도관을 떠난 일이 없소.」
「저도 제가 어릴 때 사부님과 함께 차양사(遮陽寺)에 가 보고는 십여 년 동안 현도관 이외에는
가본 곳이 없어요.
그리고 저는 이때까지 부모님의 얼굴도 모르고 자랐어요.
사부님이나 누구도 가르쳐주지도 않으시지만……」
하림은 고개를 들어 유유히 흘러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며 자기의 신세를 한탄했다.
(나는 왜 부모님이 안계실까?
이 세상 어디에라도 계시기만 하다면 찾아 올 수도 있겠지,
그리고 왜 등인대사님이나 스승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을까,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지도……)
이렇게 생각하는 하림의 가슴 속에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떠난 대사님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배는 강물이 빨라질수록 질풍같이 달렸다.
거센 강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마다 하림의 살 냄새가 양몽환의 코를 찔렀다.
그러나 양몽환은 하림의 상심한 얼굴을 보며 어떻게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이리 저리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림은 양몽환의 이런 사정을 알길 없어
「양사형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하는 말에 양몽환은 조금 당황했으나 곧 침착해지며
「아니, 아무것도.」
「그럼 어째 언짢은 얼굴을 하고 계세요?」
그제야 양몽환은 미소를 지으며
「심소저께서 상심한 듯 하여 무슨 위안이라도 하려던 중이오.」
하림은 생끗 웃으며 소매 끝으로 눈물을 닦고
「감사해요. 제가 공연한 말을 해서……」
하자 양몽환도 마주 보고 웃었다.
해가 서산에 떨어질 무렵에 배는 양몽환과 하림을 태운 채 동정호(洞庭湖)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고 있었다.
잔잔한 호수 멀리호숫가에 연하여 있는 어촌(漁村)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서서히 하늘로 올라가
흩어지고 어부들의 즐거운 노래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점차 어촌이 가까워지자 멀리서 보던 경치는 더욱 아름다웠고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의 모습도
뚜렷하게 보였다.
하림은 힘껏 노를 저었다.
하림은 어선이 즐비하게 늘어 선 사이를 용케 뚫으며 노를 저어 나갔다.
그때마다 흰 거품을 내며 갈라지는 물 그리고 어여쁜 얼굴에 홍조를 띠우며 능숙하게 젓는
하림의 노 젓는 모습은 어부들의 눈을 둥글게 하였다.
바로 그 찰나였다.
돌인, 정체불명의 쾌속정 두 척이 좌우에서 쏜살같이 달려와 양몽환과 하림이 타고 있는
배를 정면으로 받아넘기는 것이 아닌가.
「앗!」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달려드는 쾌속정을 재빨리 발견한 양몽환은 오른손 다섯 손가락을 쫙 폈다.
장풍을 내는 것과 거의 같은 시각에 일촉즉발로 달려들던 두 척의 쾌속정은
엎어질듯 기우뚱거리다 칠 팔 척이나 뒤로 밀려가고 말았다.
이 순간, 동작이 예민한 하림은 있는 힘을 다하여 선수(船首)를 돌리면서 노를 힘껏 저었다.
이와 함께 배는
<쉬익!>
물을 가르며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그러자 양몽환의 강한 장풍으로 뒤로 밀려갔던 정체불명의 쾌속정에서는
「으하하하……」
듣기에도 소름이 끼치는 괴한들의 냉소 소리가 들려왔다
하림은 위급한 시각을 모면하고 달리다 괴한들의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그들과 일전을 불사할 결심을 했다.
힘껏 노를 젓던 손을 멈추고 배를 돌리려 하자 양몽환이 하림의 결심을 막았다.
「심소저 배를 돌리지 마시오. 놈들의 배가 훨씬 빠르고 수도 많은 것 같소. 그냥 갑시다.」
하림은 입술을 깨물며
「가만히 지나오는 우리를 범하려는 비겁한 행동은 참을 수가 없어요!」
사실 하림의 말이 옳았다. 그러나 무례하다고는 하지만 참을 수 있을 때까지는 참는 것이
무술인 이라고 양몽환은 스스로를 억제하며
「심소저! 당연한 말이오.
그러나 사부님의 말씀에도 무술계에는 기괴한 일이 수없이 많다고 하오.
그만한 일에 신경을 쓰는 것은 무익한 일이니 우리 가는 길이나 재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하자 하림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겠어요.」
하고 지금까지 노했던 얼굴에 밝은 웃음을 띠우며,
「그런데 저 청이 하나 있어요.」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무슨?」
하며 하림을 보았다.
그러자
「이제부터 양사형을 오빠라고 부르겠어요? 그래도 화내시진 않겠죠?」
하는 말에 양몽환은 어처구니없는 듯 웃었다.
그것은 좋다던 가 나쁘다던 가의 뜻도 아닌 웃음이지만 오빠로 부르겠다는 것을
마다할 수도 없었다.
양몽환은 대답대신 하림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혼자 생각했다.
(심소저는 나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더구나 모든 일에 순종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나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지 않는가?
공연한 일로 심소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면…… 안된다. 안된다.)
이렇게 생각한 양몽환의 마음은 산란하기만 했다.
그러나 하림은
「그럼, 오빠라고 부르겠어요.」
하는 데는 양몽환도 가볍게 따라 웃고 말았다.
「오빠! 배를 어느 쪽으로 몰까요?」
새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묻는 하림을 바라보며
「동쪽으로! 이처럼 순풍이면 내일 오전 중으로 집까지 도착 할 수 있겠지.」
하림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돛을 높이 달고 뱃머리를 동쪽으로 돌린 후 마주 앉았다.
순풍을 안은 돛은 잔잔한 호수를 백조처럼 가볍게 떠서 흘러가고 있었다.
「오빠! 가족이 몇 분이세요?
어머님도 계시죠? 제가 함께 집에 가면 어머님께서 좋아하실까요?
저는 버릇없이 자라서 걱정이 되는군요.」
미처 대답할 사이도 없이 묻는 하림을 바라보며 적이 놀랐다.
그러나 담담한 어조로 웃으며
「하, 하, 하… 걱정할 것 없소, 내 어머님은 틀림없이 좋아 하실걸!」
하림은 기쁜 듯
「정말? 좋아라! 제가 어머님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얌전히 말도 잘 듣고 할게요.」
말하고 하림은 뱃전에 엎드려 물장난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그의 얼굴은 행복과 천진한 얼굴 그것이었다.
어느 듯 밤도 깊었다. 동정호 호수의 길이만도 삼백 리 달빛이 반사되어
거울같이 맑은 물 무수한 별이 총총히 뿌려져 박힌 하늘은 맑은 호수와 맞닿은 듯 끝없이 넓었다.
밤은 점점 깊어지고 三월의 차가운 바람이 으스스 한기를 뿌려주는 호수에 작은 배를 띄우고
마주 앉은 두 젊은 남녀의 심사는 천 갈래 만 갈래 이어지고 끊어지고 있었다.
이렇듯 조용한 시각에 어디선가 두런두런 소리가 나며 노 젓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쌍돛을 단 큰 배 한척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뿐인가,
뒤에서는 작은 쾌속정이 그것도 네 척이 나란히 서서 다가오고 있다.
저 배들이 적이라면 앞과 뒤에서 다가오고 있으니 독안에 든 쥐가 아닐 수 없었다.
양몽환과 하림은 일시에 일어나 앞과 뒤를 주시한 후 피할 수 없다면 저들과 일대 결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무언중에 결심했다.
하림은 민첩하게 행낭 속에서 보검 두 자루를 뽑아 그중 한 자루를 양몽환의 손에 쥐어주며
힘찬 목소리로
「오빠! 저곳을 보세요. 아까 무뢰한들의 배 같아요.
이번에는 피할 결이 없어요, 생사를 내어 다시는 못 오게 해요!」
하림이 말 하는 동안 양몽환은 칼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 거렸다.
그러는 동안
네 척의 쾌속정은 일시에 쫙 벌리며 양몽환과 하림을 에워쌌다.
그리고 넷 척의 뱃머리에는 장정이 하나씩 우뚝 서 있었다.
이때, 양몽환도 뱃머리에 떡 버티고 저서 큰 소리로 꾸짖었다.
「도대체 당신들은 누구인데 이렇게 길목을 막고 어지럽게 구시오?
돈 많은 장사꾼도 아닌 우리를 쫓아오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오?」
하자 왼쪽 두 번째 배 위에 서있던 거한이 너털웃음을 웃으며
「하, 하…… 그렇긴 하오,
그러나 두 분께서 거부행상(巨富行商) 같으면 이렇게 우리들이 동원되진 않았을 것이요.」
「그렇다면 무슨 일이오?」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시오.」
양몽환은 치가 떨렸으나 어쩌자는 것인지 듣고 싶기도 했다.
「얼마든지 물어 보시오!」
「하하…… 그렇다면 묻겠소,
대관절 현도관의 주인인 일양자와는 어떤 관계가 있으십니까?」
제법 양몽환과 상대하는 어투가 공손하기 이를 데 없다.
캄캄한 밤중이어서 얼굴의 생김새는 알길 없지만 목소리로 보아 괴수쯤 되는 상 싶었다.
양몽환은 조금 전의 분노가 어느 정도 수그러지며 극히 부드러운 소리로 그러나 냉정하게
「아하! 그것은 왜 묻소? 스승과 제자 사이오!」
「짐작한 바가 바로 맞는군! 하하……
그런데 노형! 내 말씀을 좀 들어 보시오.
일찍이 노선배인 일양자의 명성을 어찌 무술계에서 모르겠소마는
우리 두령께서 오래전부터 곤륜파의 분광검법(分光劍法)이라는 것에 탄복하셨소.
그래서 곤륜파의 여러분들을 만나보려고 그러는 것이오.」
장정의 말을 듣고 있던 양몽환은 어떤 함정에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이대로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순순히 끌려갈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나는 아직 무술계의 규칙이나 검술을 잘 모르는 제자에 지나지 않으오.
그런데도 당신들의 두령님이 우리를 만나 보겠다니 미안하지만 사양하겠소.」
말을 마치고 상대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돌아섰다.
그러자 정체불명의 괴한은 더욱 겸손해지며
「노형의 말씀도 일리가 있소. 그러나 무술계에 처음 나왔다는 노형의 늠름하고
대담한 말과 행동이 믿음직스럽소. 자, 저기서 우리 두령님이 기다리고 계시오.」
하면서 손을 들어 가리킨다.
양몽환은 무심코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고는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____」
바라보는 양몽환의 눈이 둥그레졌다.
과연! 괴한이 가리키는 곳에는 하림과 양몽환이 처음 발견한 쌍돛의 거대한 배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다가오던 배는 양몽환의 배와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서면서 환하게 불을 켰다.
대낮처럼 환하게 밝은 선상(船上)에는 단검을 허리에 꽃은 네 명의 날렵한 무사가 서있고
그 가운데 범 가죽을 깐 의자가 놓였다.
그리고 얼마 후,
선실의 문이 열리며 오십 세쯤 되어 보이는 풍채 좋은 노인이 나와 의자에 앉는 것이었다.
노인은 흰 수염을 바람에 날리며 양몽환을 향하여 정중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미안하오. 바삐 가는 길을 막아 소란을 피워 심려를 끼치게 됨을 용서하시오.
이쪽으로 건너 오셔서 이야기나 하심이 어떠하오. 무례함을 재삼 용서를 비오.」
양몽환은 어리둥절할 뿐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귀신에게 홀린 것이나 아닌가.
(도대체 저 분은 누구일까,
어째서 이름도 없는 나에게 공손한 말씨로 더구나 용서를 비는 것일까,
저희들의 두령님이라고 하는 저 노인은 과연 어느 파일까?)
양몽환은 자못 의심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옆에 서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상대방을 노려보는 하림에게
「심소저! 어떻게 되든 피할 수는 없소, 같이 가도록 합시다.」
그때 하림도 이미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 거렸다.
이리하여 양몽환과 심소저(沈少組) 하림은 마음속으로 굳은 결심을 한 후
큰 배를 향하여 몸을 날렸다.
양몽환과 하림이 날아오는 것을 본 선상의 노인은 자기를 호위하고 있는 장정에게
「너희들은 저기 귀한 손님의 배를 잘 보살펴라,
추호라도 파손됨이 없이 잘 지키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으리라.」
명령이 떨어지자 호위하던 네 명은 일제히 가슴에 왼손을 대며 허리를 굽혀 절하고 물러 나갔다.
그다음 노인은 양몽환과 하림을 향하여
「무례한 짓을 깊이 통찰하시고 이해하시기를 바라오,
원래 부하들이 무지해서 그렇소.」
하고는 곧 이어
「밤바람이 차가우니 안으로 드셔서 한기를 푸시도록 하시는 것이 어떨까 하오.」
양몽환은 갈수록 알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지만
옆에 하림이 있어서 조금 의지가 됨을 느끼며 노인 앞으로 한걸음 나갔다.
그리고 공손히 절하며
「후배는 아직 명성도 없는 제자인데 어찌 이처럼 대접이 막중하오니까?
다만 부끄럽기 이를 데 없소이다.
허락하신다면 노선배님의 귀성 존함이라도 듣고자 할 뿐이로소이다.」
노인은 횐 수염을 쓸며
「하, 하…… 하」
호탕한 웃음을 웃고
「어려울 것이 없소이다. 이 노부는 지금으로부터 이십여 년 전 귀형의 스승 되시는 분에게서
도움을 받아 생명을 건진 일이 있소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우리 안에 들어가 천천히 이야기 하도록 합시다.」
하고는 성큼 성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양몽환과 하림은 똑같이
(하여간 심상치 않은 일이다.)
하고 생각하며 노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양몽환과 하림이 노인을 따라 들어가자 문 앞에 서 있던 장정이 공손히 절한 후 물러갔다.
방안에는 불빛이 휘황찬란하고 이미 마련된 팔선탁(八仙卓) 에는 진수성찬이 가득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 푸른 옷을 입은 두 명의 동자(童子)가 시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노인은 양몽환과 하림에게 자리를 권하여 앉은 후 하림을 바라보며
「소저도 역시 곤륜파의 문하이신가?」
「예, 그렇습니다.」
「하, 하, 그러시군. 자 그럼 변변치 못한 음식이지만 많이 드시오, 우선 술을 마셔야겠군.」
하는 말이 떨어지자 하림이 말을 받으며
「그러나 미안한 말씀이지만 오빠와 저는 마시지 못하오니
속히 말씀을 끝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희들은 갈 길이 멀고 또 바쁩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좋소이다! 바른 말을 잘하는 소저는 과연 여장부답소.
그런데 어디까지 가시는지 모르겠소마는 우리 배로 모셔다 드려도 좋다면 기꺼이 응하겠소.
천천히 이야기나 하면서 함께 가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오. 하하……」
악의라고는 추호도 없는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양몽환은 약간 의심하며,
「악양(岳陽)까지 가는 결입니다마는 어찌 선배님께 폐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사양하자 노인은 고개를 흔들며
「별 말씀을…… 순풍에 돛을 달면 아무 걱정도 할 것이 못되오.
더구나 폐는 무슨 폐가 되겠소.」
말을 마치자 부하를 불렀다.
「뱃머리를 악양으로 돌려라!」
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배는 기우뚱 기우뚱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양몽환과 하림은 노인이 권하는 술잔을 사양하고 다과(茶果) 만을 들자
더 권유하지 않고 자작으로 술을 따러 마셨다. 그렇게 해서 마시는 술은 한이 없었다.
「한잔, 두잔……」
자작으로 마시는 술이 어언 백여 잔!
그러나 취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는 동안 노인은 계속 술잔만 비울뿐
긴요하다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양몽환은
「노선배님께서는 급히 긴요한 말씀이 있으시다고, 하셨는데
어떠한 말씀인지 듣고자 하옵니다.」
하는 말에 노인은 그제야, 들었던 잔을 탁자에 놓으며
「그렇소. 내가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를 명심해 들었다가 행하시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여기서 일단 말을 끊은 노인은 다시 빈 잔에 술을 따라 훌쩍 마시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이십년 전에 나는 어떤 사지(死地)에서 귀형의 스승님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 했소.
그것이 항상 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아 언제든지 그 은혜를 보답하려 하였소,
그런데 지금 귀형 두 분을 더구나 은인의 제자인 두 분을 만난 것이오,
그것은 마치 바로 은인을 만난 것처럼 기쁘오.」
「………」
양몽환과 하림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이제부터요, 요사이 풍문에 듣자니 귀형의 스승이자
나의 은인인 그분이 무술계의 보물인 장진도를 입수하였다는 소문이오.
그리고 그분은 장진도를 가지고 비급을 얻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는 소식이 있소,
그런데, 사실, 우리 무술계에서는 백년 이래 그 장진도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비명횡사 했소?
그런즉 큰 풍파 없는 무술계에는 이제부터 그 장진도를 빼앗기 위하여 일대 혈전이 예상되오,
사실은 이 늙은이도 장진도를 빼앗기 위하여 나선 길이오.
그런즉 나는 은혜를 갚자는 것이 도리어 원수가 되어 싸우게끔 되었으니
세상사 모를 일이오. 당신들은 속히 종적을 감추는 것이 현명할 것 같소,
무술계의 고수들은 지금 현도관의 곤륜파 무술인들을 찾아 헤매고 있소.
내가 할 이야기는 이것뿐이오. 이것이 은혜를 갚는 건지 어쩐지는 모르겠소.」
말을 마치는 노인의 얼굴에는 비장한 각오와 추연한 빛이 감돌았고 이야기를 듣는 양몽환은
적이 놀라며 사부님과 헤어지기 전의 일을 순간적으로 더듬었다.
(그렇다. 사부님과 헤어지기 전의 보름 동안은 거동부터 불안정했다.
그것은 역시 그 장진도 때문이었던가,
지금 노인의 말과 같이 스승님이 장진도를 가지고 계시다면
그것은 죽은 채방웅의 몸에서 나온 손수건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현도관에서 급히 떠나보냈고 스승님은 장진도의 그림대로 보물을 찾아 떠났다……)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지나갔다.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 연거푸 두 잔의 술을 따라 마신 노인은
「만약 차후에 귀형과 내가 또 만난다면 적이 될 것 같소 ,
몸을 소중히 간직 하시오.」
하는 것이었다.
그 뜻을 양몽환은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편, 하림은 하림대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잠잠히 앉아서
양몽환의 얼굴만 주시하고 있었다.
양몽환은 자리를 고쳐 앉으며
「진심으로 감사함을 표합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무술을 공부하는 몸,
비록 저의 사부님께서 장진도를 가지고 계신다 해도 저는 본 일이 없어서
무슨 말씀이라도 할 수 없음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말을 끊고 노인과 하림을 번갈아 본 다음 다시
「지금 각 파의 고수들이 저희 사부님을 노리고 있다는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 고수들의 일이므로 역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저는 언제든지 먼저 해하지 않음을 사부님에게 배운 몸, 조심하겠습니다.
그러나 칼산이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의지가 있사오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럼 노선배님! 오늘말씀 감사히 들었습니다. 그만 물러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하림과 함께 절하고 물러섰다.
그러자 노인은 황망히 선상(船上)까지 배웅해 주면서
「일양자의 제자를 만나 나의 마음은 기뻤소. 좀 더 이야기나 하면서
악양까지 모셔드리고자 했는데 섭섭하오.
마지막 부탁이니 악양까지 만이라도 모시고 가게 해 주시면 좋겠소이다.」
하며 붙잡는 것이었다.
애원하듯 붙잡는 노인을 거절하고 돌아설 수 없어 망설이던 양몽환은 다시 돌아섰다.
「오늘 노선배님의 지극하신 사랑과 성대한 초대에 감사를 드립니다.
노(老)선배님의 마음이 그러하시다면 악양까지 즐겁게 가겠습니다.
다만 폐가 될까 걱정할 뿐입니다.」
「천만에 말씀이오, 불편하시다 하더라도 이 노인의 청을 거절하지 마시 오.」
양몽환은 그만 다시 자리에 앉아 노인과 함께 긴 밤을 새우며 악양까지 가기로 하였다.
그리고
「노선배님께서 저희 사부님의 은혜를 갚고자 저희에게 베푸는 은총을 헛되지 않게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그러나 설사 저희 사부님께서 장진도를 가지고 계시다 하더라도 서로 파가 다른 이상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노선배님은 노선배님대로 소신껏 일하시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글쎄! 그렇긴 하지만 은인을 향하여 칼을 뽑을 수 없으니 걱정이 되오.」
「그러나 저는 아직 저희 사부님께서 장진도를 가지고 계시다는 확신은 없습니다.
그러하오니 사방으로 수소문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과연 귀형의 의견이 옳으오. 나도 그렇게 하려하오.
그러나 그 장진도가 누구의 손에 있던 우리파의 규율도 엄하여 손보고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을
귀형은 참작하기 바라오.」
양몽환은 입을 다물고 지금 노인아 한 말을 음미하고 있었다.
과연 무서운 일이다. 장진도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도 불사한다는 의지,
은혜도 저버려야 되는 무술계의 보물이 참으로 몇 사람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했다.
노인과 양몽환 그리고 하림은 제각기 다른 생각에 잠겨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어느덧 동녘 하늘이 붉게 타오르며 날이 밝아올 무렵 순풍에 돛을 단
쌍돛의 배는 악양 강변에 천천히 닻을 내렸다.
그와 함께 앞과 뒤에서 큰 배를 호위해 해 오던 배도 멈춘다.
양몽환과 하림이 탔던 조각배도 그들에게 이끌려 왔음은 물론이다.
양몽환과 하림은 노인에게 큰 절을 하며 자기들의 배인 조각배로 옮겨 탔다.
「노선배님! 안녕히 가십시오.」
「고맙소! 귀형도 보중하기 바라오.」
이래서 하루 동안의 해후는 끝났다.
노인이 탄 배와 호위 배들이 멀리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자
양몽환과 하림은 놓였던 대로 손 하나 대지 않은 자기들의 짐을 들고 배에서 내려 악양 땅을 밟았다.
(과연 노인은 기인이며 은인이다.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이 있으리라.)
노인의 은혜에 거듭 감사하며 양몽환과 하림은 싸늘한 새벽바람을 얼굴에 스치며 마을로 향했다.
그러나 채 날이 새지 않은 탓인지 평화스러운 마을은 새벽잠에 빠진 듯 조용하고 고요했다.
양몽환과 하림은 경공법(輕功法)을 써서 몸을 날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이십 여리를 날아 붉은 담장이 보이는 마을 앞에 사뿐히 내렸다.
「심소저! 저기 보이는 붉은 담장집이 우리 집이요.」
손을 들어 가리키는 곳을 본 하림은
「아주 아름다운 곳이군요.」
「내가 어릴 때 아버님은 관계(官界)를 떠나 조용히 살고 싶다면서
여기 동무령(東茂領)을 택하였소, 벌써 이십여 년이 되었죠.」
「조용해서 좋아요. 저곳 냇가에는 고기도 많겠죠?」
마을 앞을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을 가리키는 하림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순간, 양몽환의 기억은 십여 년 전 옛일로 거슬러 올라가 옥견(玉娟)이라는
소녀의 얼굴 앞에서 멎었다.
사촌(四寸)이 되는 옥견(玉견)은 양몽환보다 세살이 위였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고모뻘인 양몽환의 어머니가 길렀다.
그래서 양몽환과 옥견은 한 지붕 밑에서 살게 되었다.
그 후 세월은 흘러 어느덧 십여 년 양몽환과 옥견의 사이에는
사랑이라는 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찍이 일양자를 따라 현도관으로 들어간 양몽환에게는
보고 싶은 옥견을 마음대로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었고
옥견은 옥견대로 양몽환이 무술을 익히고 속히 돌아와 주기만 바라게 된
두 청춘 남녀의 끓는 사랑은 은연중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후 일양자와 함께 꼭 한번 집을 다녀가던 날 밤, 양몽환과 옥견은
이별을 슬퍼하며 밤새껏 몸부림치다 다시 장래를 굳게 약속하고 헤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미 장래를 약속한 옥견이 있는 집에 하림 소저를 데리고 들어간다면 옥견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렇지 않아도 하림은 나를 좋아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다는 말인가!)
이런 저런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양몽환을 바라보던 하림은
「오빠!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계세요?」
하는 말에야 양몽환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굴에 나타날 초조와 당황함은 감출길이 없었다.
억지로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스승, 스승님의 생각을……」 했다.
「옳아요. 지금 어디가 계실까……
그런데 내가 곤륜파에 입적하면 사부님을 어떻게 부르면 돼요.」
몽환은 약간 안으로 숨을 쉬며
「사백(師伯)님이라고 부르면 돼요.」
하면서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이때 하림도 양몽환의 얼굴을 보고 생끗 웃으며
그의 뒤를 따라 붉은 담장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맑은 물이 흐르는 시냇물을 뛰어 넘고 수풀을 지나 소나무가 우거진 길로 나섰다.
그러자 그 길은 곧장 양몽환의 집 대문과 바로 통하여 큰 대문이 환하게 보였다.
그 대문 기둥에는 수월산장(水月山莊)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현관이 있고
빠끔히 열린 문사이로 오십 세쯤 되어 보이는 하인 차림의 노인이 정원을 쓸다
양몽환을 발견하고 달려 나왔다.
「도련님! 늙은 이놈이 어제도 도련님 이야기를 했습지요.
그런데 오늘 이렇게 오시니……
바로 내일이 견소저의 제사(祭祀)날이라 도련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더니……」
하며 눈물을 닦는다.
양몽환은 화다닥 놀라며
「뭐! 뭐라고, 제사라니…… 그럼 견소저가 죽었다는 말이오?」
하인은 소매 뿌리로 연신 눈물을 닦아내며
「하늘도 눈이 멀었지. 그렇게 아름다운 견소저를 이 늙은 것보다 먼저 불러 가다니……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양몽환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휘청거리다 간신히 하인의 팔을 붙잡으며
「어찌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말하오, 정말 견소저가 죽었단 말이오?」
하며 흔들었다. 그러자 양몽환의 공력이 너무 억세어서 무심코 힘차게 흔들린 하인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없어 뼈가 부러지는 아픔을 참느라고 신음하며 눈물 콧물을 줄줄 흘렸다.
그러나 양몽환은 너무나도 돌연한 충격 때문에 힘차게 흔들었지만 그의 고통이
자기의 공력 때문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바로 그때,
대청마루에서 풍채가 의젓한 노인이 두루마기를 입은 채 나오며
「환아야! 무슨 짓이냐? 빨리 손을 놓아라!」
하는 호통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양몽환은 얼핏 손을 놓으며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근엄하신 아버지가 서 계시지 않은가 양몽환은 황망히 무릎을 꿇으며
「환아가 문안드립니다.」
하며 절을 했다.
그러나 노인은 양몽환의 절은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하인에게 물었다.
「다친 곳은 없느냐?」
하인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닦으며
「걱정 마십시오. 그래도 이놈이 지탱 할 수 있습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다행이군, 물러가 쉬게!」
하인은 굽실거리며 물러갔다.
그제야 노인은 땅에 엎드려 있는 몽환을 보며 나무랬다.
「너도 이미 이십 세의 장부다.
어찌 하인에게 소홀한 짓을 하느냐! 내 조금만 늦게 나왔더라면 팔이 부러질 뻔 하지 않았느냐?」
비로소 몽환은 자기가 너무 지나쳤다는 것을 깨닫고 용서를 빌었다.
「자식이 돌연한 충격으로 일시에 범한 일이오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고 사죄했다.
「음…… 견소저의 죽음은 나도 애석하다.
나와 네 어멈이 정성껏 있는 힘을 다했다마는 하늘의 뜻이다.
제 운명을 어쩌랴 그만 일어나 거라!」
하고는 이어 하림을 보고 나지막하게 물었다
「저 소저는 누구냐?」
양몽환은 일어서면서
「저의 사매입니다. 심하림이라는 소저이며 사부님의 분부로
곤륜산까지 데리고 가던 도중이옵니다.」
하고 하림에게 다가가 낮은 소리로
「나의 부친이시오.」
했다.
그러자 하림은
「백부님!」
하고 땅에 엎드리며 큰 절을 했다. 노인은 웃으며
「심소저, 일어나시오, 큰절까지 할 필요가 있나!」
하는 말에 일어나 잠잠히 양몽환의 뒤로 물러섰다.
양몽환의 아버지는 양장(楊璋)이라 불리며 명나라 무종(武宗)때 그 벼슬이 재상까지 올랐다.
그러나 뜻한바 있어 관직을 버리고 이곳에 수월산장을 짓고 풍류와 독서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양몽환의 나이 네 살 때 일이다.
어느 날 양몽환은 옥견과 냇가에서 물장난을 하며 노는 옆으로 스님 차림의 젊은이가
지나가다 어딘가 비범한 재주가 있는 듯 한 양몽환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응…… 보통 아이가 아니로군.」
하는 그는 누구 아닌 헌도관의 주인 일양자였다. 일양자는 곧 양몽환 소년의 아버지를 만나 담판했다.
「귀댁의 자제님은 보통 아이가 아닌 것 같소. 반드시 무예계에 정통할 상이로소이다.」
그러자 양몽환의 아버지 양장은 비록 스님 차림의 옷은 입었다 해도 선풍도골(仙風道骨)의 기품과 육예(六藝)에 정통한 일양자임을 즉시 깨닫고
「황송하오이다. 아직 나이 어려 미숙하오나 뜻이 그러하시다면 제자로 삼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리하여 그로부터 사년 후인 양몽환의 나이 여덟 살 때 일양자는 양몽환을 현도관으로 데려가 수제자(首弟子)로 삼게 되었다.
그로부터 십이 년_____
일양자는 양몽환에게 자기의 비법인 무술의 모든 것을 가르쳐 주어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러울 것 없는 쟁쟁한 무술인으로 키워놓고 홀연히 장진도의 그림을 따라 길을 떠나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양장은 아들 몽환과 하림을 대청으로 불러 앉힌 후
「어찌 너의 사부님은 오시지 않았느냐?」
「사부님은 다른 일에 바쁘셔서 모시고 오지 못하였습니다.」
「흠…… 그럼 현도관에는 언제 가려느냐?」
「사부님께서 분부하시기를 집에서 한 달 가량 쉬었다가 곤륜산으로 가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양장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너는 이미 곤륜파 문하가 된지도 오래니 사부님의 분부를 잘 받들어라. 나와 너의 어머니는 불행히 옥견이가 일찍 죽어 더욱이 세상사가 허무함을 느꼈다. 또 너의 외삼촌도 태수(太守)로 있을 때 불미한 일을 많이 하여 일찍 죽으니 모든 일이 인과보은(因果報恩)이라 자식까지도 화를 입는 모양이다. 저쪽 양심당(養心堂)에 가서 어머님을 뵈워라.」
「예……」
「그리고 내일은 옥견의 묘에 가 보도록 하고 모든 행동에 조심하여라.」
「……」
「너의 사부님도 고도(高道)한 분이니 이 세상에서 깨닫는 바가 있을 때는 멀리 떠나리라 생각한다. 차후부터 정신 차려야 하느니라.」
「아버님 말씀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하는 양몽환을 믿음직스러운 듯 지그시 바라보던 양장은 하림에게 자애로운 미소를 보내며 대청을 나섰다.
(모든 것을 초월한 아버지, 어지러운 세상을 깊이 깨닫고 초야에 묻혀 있는 아버지, 오정육욕(五情六慾)에서 벗어나 무아로 돌아간 아버지)
양몽환은 이러한 아버지가 가엾게 생각되다가도 한편 거룩하게 생각되었다. 방안은 얼마동안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양몽환은 어지러운 생각을 떨치듯 숨을 몰아쉬며
「심소저, 저의 어머님을 찾아가 뵈어요.」
하고 조용한 침묵을 깨뜨렸다.
이때 하림도 맑고 아름다운 눈을 아래로 내려 깔고 있다가 양몽환의 소리에 생끗 웃으며 따라 일어났다.
양몽환은 하림을 데리고 대나무가 우거진 숲을 지나 양심당으로 향했다. 삼간(三間)이 조금 넘을 듯한 초가지붕의 양심당은 그 깨끗함이 방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더 했다. 깨끗이 정리한 가구며 먼지하나 없이 닦아진 방안! 그 가운데 백송(白松)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팔선탁자(八仙卓子) 옆에 청의를 입고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불경을 외우는 중년 부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양몽환은 엎어지듯 어머니 앞으로 달려가 꿇어앉으며
「어머님! 환아가 돌아 왔습니다.」
하고 절을 했다.
양부인은 눈을 서서히 뜨고 얼굴 가득히 환희와 자애로운 웃음을 띠우며 몽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아들아! 잘 왔다. 이젠 젊은이가 됐구나!」
하고는 금세 눈물을 흘리며
「내일이 옥견이 제삿날이다. 너를 보니 더 슬퍼지는구나.」
「상심하지 마십시오. 인명은 재천이라 하지 않습니까.」
「네 말이 옳다. 죽은 사람이야 이제는 무슨 고생됨이 있겠느냐? 너도 상심 말아라.」
「내일이 마침 제삿날이라 하오니 묘에나 다녀올까 하옵니다.」
「그래라, 네가 온 것을 알면 얼마나 기뻐하랴.」
그리고는 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어머니를 진정시켜 드리고 바로 일어나 앉았다.
「저 백의소저는 누구냐?」
양부인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양몽환에게 묻자 하림은 나부시 큰 절을 하며
「백모님! 저는 심하림이라 부르옵고 양사형과 같은 곤륜파의 제자이옵니다.」
「그러면 몽환의 사매가 되는군. 몇 살이지?」
「열일곱 살입니다.」
양부인은 하림이 귀여운 듯 손을 잡으며
「집은 어디고? 어머니는 계신가?」
「소녀는 어릴 때에 부모님을 잃어 얼굴도 모르고 있사옵니다. 다만 소녀의 스승님이 이름을 심하림이라고 지어 주셨습니다.」
하고 눈물을 흘렸다.
양부인은 하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울지 마라…… 비록 살아계신다 하더라도 영원히 함께 살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림은 눈물을 닦으며
「백모님! 저는 오래 살고 싶어요. 일찍 죽지 않겠죠?」
하고 묻는 것이었다.
양부인은 눈을 감고 염불을 크게 외운 후
「생사는 재천이며 운명인데 어찌 알겠느냐?」
하림은 눈을 깜박거리며
「저도 모르겠어요. 백모님은 알고 계실 것 같아요.」
양부인의 자상한 눈이 하림의 얼굴을 한참 주시하고는
「너는 복이 많겠다. 우리 견아(娟兒)처럼 박명하지도 않겠고.」
하림은 얼굴에 웃음을 띠우며 양몽환을 향하여 생끗 웃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양부인은 감동한 음성으로 아들을 불렀다.
「환아야! 너의 아버님도 오랜 관직 생활에서 물러나 지금은 조용히 지내고 계시며 나 또한 불문(佛門)에 입적하여 도를 닦고 있으나 사람의 정이라는 것은 끊을 수가 없구나. 네 아버지와 나도 항상 너만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너는 이제 훌륭한 대장부가 되었으니 너의 일은 네가 해결하여라. 만사를 깊이 생각하고 해롭고 오욕된 곳을 피하도록 조심하여라.」
는 말을 마친 어머니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불경을 외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어머니의 마음에 깊이 감동하며 하림을 이끌고 소리 없이 어머니 앞을 물러 나왔다.
그 다음 날. 아침 일찍 하인은 몇 가지의 제품(祭品)을 준비하고 양몽환을 안내하여 옥견의 묘로 향했다.
이른 아침의 밝은 공기와 높은 산 계곡으로 떠오르는 해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얼마 동안 둘이는 말없이 걸어 옥견이 묻혀있는 묘에 당도하였다.
하인은 준비해 가지고 온 제품을 풀어 차려 놓고 울음 섞인 소리로 양몽환을 불렀다.
「도련님, 이 묘가 바로 견소저의 무덤입니다………도련님과 아씨를 모시고 고기 잡던 일이 어제같이 생생히 떠올라 눈에 보이는 듯 하옵니다.」
양몽환은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묵묵히 섰다가
「그럼 먼저 돌아가오. 나 혼자 조금 있고 싶소.」
하인은 양몽환을 위로하며
「이미 죽은 사람, 돌아올 수도 없사오니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도련님은 몸을 아끼셔야 합니다. 늙은 이놈이 곧 모시러 오겠습니다.」
하며 천천히 돌아서서 내려갔다.
하인을 돌려보낸 양몽환은 지금까지 몇 년을 마음속으로 사랑하던 여인의 무덤 앞에서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 꿇어앉은 자리가 헌근이 눈물에 젖고 통곡하고 통곡하던 양몽환은 급기야 눈에서 피를 쏟으며 혼수상태에 빠지자 기절하여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참고 참았던 눈물이며 또 사랑인가. 양몽환의 상심은 도를 지나 기력을 잃고 송장처럼 쓰러져 있는 것을 하인이 발견하기는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양몽환의 말대로 돌아 서던 하인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집으로 가는체 하다 숲 속에 숨어 정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양몽환이 쓰러지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달려왔으나 양몽환은 이미 기절해 버린 후가 아닌가!
하인은 기겁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몸을 흔들어 보고 가슴을 주무르기도 하다 도저히 혼자로서는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단숨에 양심당으로 뛰어 내려왔다.
그러나 집에는 조용히 눈을 감고 불경을 외우는 어머니와 하림만이 있을 뿐 양장은 일찍 외출하고 없었다.
하인은 하림을 붙잡고
「도련님이, 도련님이……」
할뿐 말도 제대로 못했다.
순간 하림은 양사형의 몸에 변이 일어난 것을 직감하고 옥견의 무덤을 향하여 하인을 앞세우고 급히 몸을 날렸다.
과연 예상한대로 양몽환은 피를 쏟고 기절해 있었다.
하림은 엎어지듯 양몽환의 가슴 위에 쓰러지며,
「오빠! 오빠!」부르며 흔들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눈을 멀건이 뜬 채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때, 하림은 언뜻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이윽고 결심한 하림은 양몽환의 왼쪽 팔을 잡고
<휘익!>
잡아챘다.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아픔을 참지 못하고 끙! 하는 신음 소리와 함께 양몽환의 정신은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깨어 날듯 하던 양몽환은 다시 얼굴이 파래지며 기절하려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하림은 한 번 더 양몽환의 팔을 잡아 좀더 세게 흔들려고 양몽환의 팔을 잡는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강하고 억센 바람이
<휘익!>
불어오는가했을 때는 하림의 몸이 두자(二尺)나 높이 하늘로 올랐다가
<꽝!>
하고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때,
아픔을 참고 정신을 차리려는 하림의 눈앞으로 한줄기의 빛이 번쩍 빛나며 카랑 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꼼작 마라! 정말, 너는 그를 죽이려느냐?」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이 돌연한 변화에 본능적으로 몸을 한쪽으로 피하면서 두리번거리는 하림의 눈에는 바로 동정 호수에서 만났던 노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노인은 하림을 노려보며
「쓸데없는 객기로 행동하면 못쓴다. 지금 그가 너무 상심해서 원기가 상해 자신의 진기(眞氣)가 굳어 버렸는데 과격하게 만지거나 움직이면 오장(五臟)에 굳어져 있는 진기가 흩어지지 않아 내장에 상처가 생겨 죽게 된다. 더구나 내공이 강하면 강한 사람일수록 심한 상처를 입게 된다는 것을 몰라? 설사,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종신 병신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가?」
하림은 자기의 행동에 스스로 몸서리쳐 놀라 눈물을 흘리며
「선배님! 어떻게 구할 길이 없을까요? 정말 죽는다면 나도 따라 죽겠어요.」
그러면서 하림은 하염없이 우는 것이었다.
노인은 얼마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과히 염려 마라, 내가 살려 놓으마.」
하고는 서서히 양몽환의 옆으로 갔다.
그리고 노인은 입을 꽉 다물며 오른손으로
<휘익!>
명문혈(命門穴)을 치면서 왼손으로는 추나수법(推拏手法)으로 양몽환의 당문(當門)과 폐해(肺海)를 눌렀다.
「휴우!」
드디어 양몽환은 긴 숨을 내쉬며 깨어났다
이를 보자 하림은 달려들며
「오빠!」
외치고는 양몽환을 일으켜 품에 안으며 자기의 흰 옷을 찢어 양몽환의 눈에서 흐르는 피를 씻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의식을 완전히 회복한 양몽환은 하림의 간호에 감동하여 눈을 돌리자 저 편에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또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앗! 당신은 동정 호수의……」
하고 놀라자 노인은
「허, 허…… 예 바로 맞소이다.」
「어찌 노선배님께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그러자 노인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하림이
「오빠! 노선배님께서 오빠를 구해 주셨어요.」
「뭐라고? 노선배님이?」
양몽환은 황급히 무릎을 끊고 엎드리며
「용서하십시오. 이 못난 사람을 더구나 생명까지 건져 주시다니!」
하고 감동하자 하림도 그제야 감사함을 말했다.
「노선배님! 오빠를 살려 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어요.」
「허, 허, 은혜야 무슨 은혜가 된다고……」
하고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뭐, 그만한 일을 가지고……… 원래 무술계에서 사람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는 이야기는 비일비재가 아니겠소, 과분한 말이오, 더구나 사매인 소저도 능히 할 수 있는 일을 너무 당황하기에 내가 거들어 주었을 뿐이오.」
하고 겸사의 말을 했다.
그때, 영리한 양몽환의 뇌리엔 번개같이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지금의 노선배가 양몽환의 사부인 일양자에게서 생명을 구하게 된 일이다. 지금 일양자의 제자인 양몽환 자기도 노선배에게서 생명을 구하게 된 것은 어느 정도 무엇인가 상통하는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양몽환은 정중히 사례하며
「노선배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노선배님의 자애로우신 인의(仁義)는 과거 저의 사부님께서 노선배님께 베풀어 주신 인의의 보답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원하건 데 하교 하실 말씀이 있으면 들려주십시오.」
노선배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호쾌하게
「하하하……」
웃었다.
「과연 당신은 영리하오. 우리 천용방(天龍幇)파와 곤륜파 간에는 지금까지 아무 원수나 적이 되지 않고 잘 지냈소. 그러나 귀파(貴派)의 스승이 가진 장진도는 무술계에서 제일가는 진귀한 보물로 어느 문파를 막론하고 서로 차지할 야심으로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오.」
양몽환은 빙그레 웃으며
「노선배님의 뜻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 장진도가 어느 파의 누구 손에 들어 있다는 것은 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자 노선배인 늙은이(老者)의 얼굴색이 일변하며
「흠…그렇다면 이 늙은이와 함께 우리 방의 방주(幇主)를 만나 주었으면 좋겠소.」
순간 양몽환은 노인의 심중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하,…하 저를 인질로 삼겠다는 말씀이시군요.」
노인은 차갑게 냉소하며
「우리방의 방규(幇規)가 엄하여 노부(老夫)가 멋대로 결정할 일이 아니니 용서하오.」
「아무리 허수아비 같은 곤륜파의 제자라 할지라도 노선배님의 뜻대로 어찌 따르겠습니까.」
「그렇다면 무술로 겨루기를 하면 어떻겠소? 당대의 쟁쟁한 대 협객인 일양자의 제자라면 역시 무술도 비범할 것이라 생각하오.」
양몽환은 태연하게 웃으며
「후배는 원래 우둔하여 배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노선배님께서 원하신다면 응하겠습니다.」
「물론 응하리라 생각하오.」
「그런데 노선배님과는 벌써 두 번째의 상면인데 아직 귀성대명(貴姓大名)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청컨대 통성명이나 우선 하면 어떻겠습니까?」
당돌한 양몽환의 말에 노인은 약간 기분이 상했으나 미간을 찌푸리며
「천용방장 총수(天龍幇長總帥) 우홍비(尤鴻飛)이며 양자강 구렁이라는 별명도 있지! 자, 그럼 시작해 볼까?」
하고 말을 마치자마자 오른 손을 번개같이 들어 양몽환의 어깨를 내리쳤다.
순간,
양몽환은 슬쩍 옆으로 몸을 피하여 우홍비의 장풍을 피하는 바로 그 찰나였다. 어느 틈엔가 옆에 서 있던 하림의 날랜 손이 우홍비의 장풍을 막아 도로 내리치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우흥비는 세 걸음이나 뒤로 물러가며 비틀거리다 섰다.
그러자 하림은 날카롭게 우홍비를 쏘아보며
「오빠를 구해 주신 것은 감사해요. 그러나 오빠를 치신다면 용서치 않겠어요.」
이 말에 양자강 구렁이 우홍비는 여유 있는 자세로 버터고 서서
「너의 무공도 강하다마는 여자와는 상대하고 싶지 않으니 물러가고 오빠와 한 수 겨눌 테니 보고 있어라!」
호통하는 것이었다.
우홍비의 호통에 하림도 지지 않고 쏘아 붙였다
「오빠의 무공은 나보다 강하답니다. 여자라고 비웃지 마세요.」
우홍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흥! 정말 그렇다면 할 수 없군! 그렇다면 우선 너부터 시험해보자!」
하림은 웃으며
「좋아요! 내가 지면, 그때 오빠와 겨루기로」
하고는 양몽환을 향하여 생끗 웃었다.
그리고는 늠름한 자세로 우홍비와 마주서는 것과 동시에 두 손을 번쩍 들어 우홍비의 두 눈을 찌르면서 앞가슴을 내리 쳤다.
이때, 우홍비는 재빨리 오른 손을 휘둘러 하림의 손을 잡아채려고 달려들었다. 하림은 몸을 획! 돌려 자세를 바꾸면서 오른 손바닥을 엎어 엽저유도(葉底?桃)란 수로 상대방의 곡지혈(曲池穴)을 치면서 백학량시(白鶴亮翅)로 동시에 육박해 들어갔다. 하림의 돌변한 공세에 혈도(穴道)가 끊기는 위기를 간신히 모면한 우홍비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으며 하림의 빈 구석만 찾아 일격을 노리고 있었다.
(나이 어린 여자에게 위기를 당하다니, 괘씸하구나, 한 번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군)
우홍비는 빙빙 돌며 하림을 노리다
「이때 닷!」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손바닥을 쫙 펴서 강한 장풍을 내며 일시에 하림의 가슴을 향하여 역습했다.
「앗!」
과연, 우홍비의 장풍은 강했다 하림의 몸이 휘청거리며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는 데는 날렵한 하림은 몰려오는 우홍비의 장풍이 조금 약해지는 틈을 타서 있는 힘을 다하여 손으로 우홍비의 장풍을 막으며 발길로 가슴을 찼다. 상상 이외의 반격 이었다.
우홍비는 여자라고 우습게 여기고 대단치 않게 상대했으나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는 것에 화가 치밀었다.
숨을 돌려 가슴을 내리치면 하림은 요리 조리 빠지며 간간히 협공해 오는 데는 어쩔 수 없이 감탄해 마지않았다.
싸움은 거의 육십 여수, 일진일퇴의 싸움은 끝이 나지 않고 주위의 모래가 하늘을 날아 먼지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이때까지 우홍비와 하림을 지켜보고 있던 양몽환은 하림의 날렵한 동작에 감탄하며 하림이 위기에 처하면 나서리라 생각하고 구경만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 우홍비는
(양자강 일대에서도 천용방 괴수인 내가 일개의 여자와의 승부에서 육십여 수까지 공격을 가해도 끝이 나지 않는다면 위신에 관계되는 일이다. 할 수 없지, 악랄한 수라도 한 가지 써서 처치해 버려야지!)
하고 생각한 후 지금까지의 공력을 하나하나 새로 모아 힘을 저장했다가 순간적으로 상대방을 혼란시키는 장풍을 내며 달려들었다. 그러자 하림의 몸이 기어이 비틀거리며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이때였다!
옆에서 보고 있던 양몽환이 이를 악물고 우홍비를 향하여 달려들려는 순간과, 비틀거리던 하림의 동작이 일변하며 십팔나한법의 하나인 권법(拳法)을 쓰며 달려든 순간과는 거의 같았다. 그러자 양몽환은 멈칫 물러서며 하림의 놀라운 재주에 어리둥절할 뿐 합세할 마음이 없어져 다시 물러서고 말았다.
십팔나한법은 등인대사의 창작이며 그 권법은 그 중의 하나다. 이 권법은 연약한 여 자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쓸 수가 없어 등인대사는 권법을 여자가 쓸 수 있도록 가볍게 고쳐 십여 년간 하림에게 익혀 준 것이다.
이렇게 하림이 권법을 고쳐 배운 것이 유운장(流雲掌)이며 지금 우홍비의 총 공격을 유운장으로 가볍게 막으며 역습한 것이다. 일시에 공력을 퍼부었던 우홍비는 자기가 일으켰던 장풍이 하림의 유운장으로 다시 되돌아오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 요 맹랑한 것이 만만치 않구나!)
우홍비는 다른 계책을 강구해야겠다고 하면서도 수시로 역습해 오는 하림의 공세를 막기에 여념이 없었다. 환장할 노릇이다.
어느덧 해도 한나절 우홍비와 하림의 일진일퇴는 거의 백여 수를 넘었다.
한편 ….
이때까지 우홍비와 하림의 싸움을 보고 있던 양몽환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의 싸움은 생사를 건 심각한 싸움으로 번질 우려도 있다. 아무리 하림이 날렵하다 하더라도 힘에는 한도가 있는 법, 힘으로써 우홍비를 대적 할 수는 없다. 만일 싸움이 계속된다면 어느 누구든 한사람은 치명상을 면치 못할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양몽환은
<휘익!>
바위를 부수는 듯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팔을 벌려 바람을 일으키며 두 사람의 가운데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천강장(天墨掌) 분량단류(分浪斷流)의 한 수로 우홍비의 공격을 격퇴한 후 웃으며 말했다.
「하…… 하…… 두 분 모두가 그만하면 됐습니다. 원래 원수진 일이 없는 사인데 무엇 때문에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합니까? 유 노 선배님께서 그만 진정하시고 싸움을 거두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연약한 여자의 몸이 염려됩니다.」
하고 하림의 몸을 걱정해서 말린다는 듯이 말했다.
양몽환의 겸손한 말에 우홍비는 여자라고 업수이 여겼으니 조롱을 당한 듯한 하림의 공격에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손을 들고 말았다.
「과연 귀형의 말이 옳소이다. 그리고 곤륜파의 무술이 비범하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소이다. 그러나 아직 승부는 나지 않았으니 더 계속해서 승부를 내야할 것 같소.」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으며 우홍비는 새삼 거드름을 피웠다.
양몽환은 손을 저으며,
「승부가 무슨 승부이겠습니까? 다만 서로의 무술을 시험했을 뿐이니 무승부로 해두기로 합시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오.」
「그리고 유 노 선배님의 말씀대로 제가 다음 기회에 천용방으로 찾아가 장진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그래서 오해하고 있는 장진도의 이야기를 자세히 드린 후, 다시 승부를 겨루자면 저도 우리파의 명령대로 따르겠사오니 이번만큼은 재삼 고려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양자강의 구렁이 우홍비는 양몽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떡이며
「귀형의 말이 옳소. 그러나 이 노부도 우리 방을 위해서는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으니 참작해 주기 바라오, 미안하오!」
하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그럼 다시 싸워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했을 때 홀연!
난데없이 괴상야릇한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양몽환과 하림은 동시에 놀라며 흘깃 뒤편을 바라보았을 때 그곳에는 먼지를 뿌옇게 날리며 질풍같이 달려오는 네 명의 장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것은!」
하고 하림이 외쳤을 때 이미 그들은 우홍비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것이었다.
그제야 그 네 명은 누구 아닌 동정호에서 쾌속정을 몰던 장정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 네 명의 장정이 우홍비와는 미리 밀약이 되어 있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었다.
「아차!」
양몽환은 그들의 올가미에 걸려들었다는 것보다 우홍비의 간사한 계략에 빠져 지금까지 무술시합을 구실로 시간을 끌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후회가 막심했다. 그러나 일은 당한일 어찌는 도리가 없게 되었다.
양몽환은 우홍비를 노려보며,
「비겁한 짓을 하는군요. 이렇게 올가미를 씌우려고 공작을 했으니 비겁하오!」
그러나 양자강 구렁이는 양몽환의 말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달려온 부하를 향하여,
「총당(總堂) 사람들도 다 모였는가?」
하자 그중의 한 장정이
「예, 홍기단(紅旗壇)의 제단주(齋壇主)와 흑기단의 최단주(崔壇主)는 이미 현도관으로 떠났으며 총단호법(總壇護法) 이향주(李香主)는 동정호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도 곧 이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우홍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방주의 영애(令愛)까지 출동했단 말인가?」
「이향주께서는 이번 일을 중시(重視)하고 스스로 출동하신 모양입니다.」
하는 말에 우홍비는 약간 실망하는 듯한 표정에 한 가닥 우수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현도관주인 일양자의 도움으로 나는 생명을 구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지금…… )
우홍비의 마음은 괴로웠다
「후우 ….」
가만히 쉬는 한숨 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양몽환은 우홍비의 거동을 바라보다 하림을 향하여
「심소저! 우리 갑시다.」
「예 , 가요!」
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들을 남기고 수월산장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자)
양몽환과 하림의 마음속에는 이렇게 그들을 피하려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몇 걸음도 가기 전에 그들 네 명의 장정이 길을 가로막아 서며 팔을 벌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우홍비가 그들을 가로 막고 손짓하여 제지하며,
「내버려둬라!」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지금 그들을 당해내기는 좀 어렵다. 응원군이 오면 천천히 해치워도 늦지 않다. 너희들은 먼저 그들을 따라가서 수월산장을 포위하고 그들의 행동을 감시하라!」
그들에게는 우홍비의 말이 엄한 명령이었으나 양몽환을 과대평가하는데 약간의 불만이 있었다. 그러나 방규율(幇規律)이 또한 엄하여 불만을 표시하지 못하고 명령대로 따르기로 하는 표정들이었다.
우홍비는 네 명의 장정을 둘러보다 그 중의 하나에게,
「가서 이향주를 모시고 오너라.」
다시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자 지목받은 장정은 나는 듯 뛰어가고 남은 세 장정과 우홍비는 수월산장으로 양몽환과 하림을 추적하려고 걸음을 옮기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하하……」
듣기에도 소름이 끼칠 정도의 음침한 웃음소리가 사방을 진동시켰다.
우홍비와 장정들은 머리에 찬 물을 끼얹는 듯 소스라치며 소리 나는 곳을 자세히 보았다.
과연 ….
그곳에는 백발의 노인이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서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얼핏 보면 중처럼 보이나 중 같지도 않고 짚고 있는 지팡이에서 연신 검은 빛이 뿜어 나오는 듯 하고 지팡이의 손잡이에는 뱀의 머리가 새겨져 있는데 마치 산 것처럼 꿈틀거렸다.
순간, 우홍비의 머리 속에는 언뜻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필시 저 노인은 무술계의 고수이자 무궁무진한 계략이 숨겨져 있으리라.)
우홍비는 겁먹은 소리로 나지막하게
「돌아보지 말고 해치지도 마라. 빨리 피해 가자!」
말과 함께 급히 몇 십 걸음을 옮기고 등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달렸다. 그리고 얼마만큼 왔다고 생각했을 때 뒤를 돌아보고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서 있던 노인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기 때문이다.
우홍비는 속으로 탄복하며,
(과연, 날쌘 신법을 지닌 사람이군! 혹시 수월산장으로 모여든 고수가 적지 않은 모양이다. 양몽환의 관상(觀相)에는 비록 위험이 잠복 하고 있으나……… 그렇다면 그를 잡아 인질로 삼으려는 우리들의 계책도 강력한 저지를 당했구나!)
여기까지 속으로 생각한 우홍비는 장진도 때문에 고수들의 죽음이 무수할 것을 내다보며 감개가 무량했다.
우홍비 일행은 도중에 말 한마디 없이 수월산장에 도착하여 각자 은신하고 잠복했다.
한편 ….
무사히 집까지 도착한 양몽환은 객실에서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 아버지 양장 앞으로 갔다.
지금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양장은 들었던 책을 놓으며
「음, 지금 돌아오느냐? 늦었구나!」
「예……」
「가서 쉬어라!」
「그런데 아버님!」
양장은 자애로운 웃음을 띠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냐.」
「죄송하지만 아버님을 더 모시고 있으려 했사오나 일찍 곤륜산으로 갈까 하옵니다.」
아들의 심각한 말에 양장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래…… 어쩐지 나도 그렇게 생각되는구나, 그래서 미리 어머니에게도 일러두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곧 떠나거라. 필요한 물건은 다 준비해서 묶어 두었다. 더 부족한 것이 없나 살펴보아라!」
하며 대청마루의 한 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하림과 양몽환의 칼 두 자루가 보자기에 싸여 있었고 또 하나의 보자기에는 여러 가지의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양몽환은모든 것을 알 것 같았다.
(아버님은 나보다 몇 백 곱절이나 앞서는 분이다.)
스스로 생각하며 다시 부모님을 하직해야 한다는 슬픔이 치솟았으나 자기 때문에 장차 일어날 괴로움을 부모님께 당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강한 일념이 슬픔을 억제하고 말았다.
양몽환은 떠날 채비를 차리고 아버지 앞에 꿇어 엎드려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이 불효자식은 어버이를 더 모시지 못하고 또 떠나게 되었습니다.」
「내 염려는 말고 너희들 몸을 보중하라!」
양장은 아들의 머리를 쓸어 주며
「곧 떠나겠으면 잠시 요기라도 하고 떠나거라!」
부드럽게 말하고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양몽환과 하림은 거듭 절하고 아버님의 건강을 빌었다.
하인이 들여온 음식을 대강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곧 일어났다.
「심소저! 갈 길이 머오, 빨리 떠납시다.」
양몽환의 재촉에 하림도 따라 일어서며
「어머님은 뵈옵지 않고 떠나나요?」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다 아시고 계셔요. 어서 나갑시다.」
하림은 다만 눈을 깜빡거릴 뿐 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문을 나서며 하림은 귀엽게 웃으며
「하림은 무슨 일이나 시키는 대로 하겠어요.」
했다.
이윽고 수월산장이 보이지 않은 길에 나셨다. 겉으로는 무표정한 것 같은 양몽환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갑자기 일어난 주위의 변화, 사랑하던 옥견의 죽음, 아버님의 초연한 모습, 어머니의 불경소리, 그리고 장진도…… 등등의 일로 자신도 모르게 슬픔이 솟아났지만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림은 얼마를 가도 침묵만 지킬 뿐 아무 말이 없는 양몽환을 바라보며
「오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하림이 나의 속을 환히 꿰뚫고 보는 듯 하여 흠칫 놀랐으나 곧 태연해지며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아니, 아무 것도」
「그런데 왜 얼굴색이 달라요?」
「하, 그건……… 지금 우리 뒤를 많은 고수들이 따르고 있어서
언제 화를 당할지 모르겠소, 오늘 안으로야 호남성 북부를 빠져 나가겠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소.」
「그럼 오빠, 빨리 가요!」
하림은 양몽환의 손을 잡고 걸음을 서둘렀다.
두 젊은 남녀의 걸음은 빨랐다. 비호처럼 씽씽 날아 달려 어느덧 해도 저물어 가는 무렵이 되었다. 그때 까지도 양몽환의 손을 꼭 잡고 따라오던 하림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오빠!」
상냥스러운 목소리로 양몽환을 불러 세웠다. 그러자 하림은 마주 바라보는 양몽환의 턱 밑에 머리를 바싹대며,
「저는 곤륜산에 안 가겠어요.」
응석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의아함을 금치 못하며
「그게 무슨 말이오? 우리 곤륜파에 입적하기가 싫다는 말인가요?」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에요.」
「그러면?」
하림은 한참 망설이다 눈물어린 얼굴을 들면서,
「오빠가 곤륜산까지만 나를 데려 다 놓고 어디로 혼자 가시려고 그러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을 듣고서야 양몽환은 모든 것을 짐작 할 것 같았다.
「하, 하! 그런 일은 염려 마오.」
「그러시다면 약속해 줘요. 같이 있겠다고요, 평생을……」
양몽환은 잠시 생각하다가,
「심소저! 나는 친동생처럼 여기고 보살피겠소.」
「감사해요, 오빠!」
하림은 다시 밝은 웃음을 띠우며 양몽환의 가슴에서 물러나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양몽환은 하림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생각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자기에게 매달려온다는 것이 한편 기쁘고 한편은 두렵기도 했다.
(과연 나는 하림을 끝까지 보살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으나 갈 길이 멀어 급히 걸음을 재촉하는 동안 잊어버리게 되었다.
또한 하림은 하림대로 양몽환과 함께라면 세상 어느 끝까지도 두려움 없이 따라 가리라 결심하고 또 만족해하는 것이었다.
해가 거의 질 무렵
이윽고 그들은 동무령(東茂嶺) 출구(出口)에 다다랐다.
이제 앞에 보이는 고개만 넘으면 악양(岳陽) 땅.
그 악양 땅을 눈앞에 두고 막 고개를 넘으려는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고개 위로 세 필의 말이 나타났다.
「오빠! 저것!」
하림이 가늘게 외치자 양몽환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쉬이!」
잠잠히 있으라는 시늉을 했다.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세 필의 말 위에는 가운데에 청의(靑衣)소녀가 앉아 있고 그 양편에 가벼운 옷차림의 장정이 소녀를 호위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드디어 가까이 온 세 필의 말을 똑바로 바라보던 양몽환의 입가에는 야릇한 웃음이 돌았다.
청의 소녀의 등에는 긴 칼이 메워져 있고 아름다운 얼굴에 칠흑같이 검은 머리와 반짝이는 눈동자가 과연 미인이었다.
그리고 그 소녀를 호위한 두 명의 장정 중의 한 명이 바로 우홍비를 호위하던 네 명의 장정중의 하나라는 것도 곧 알 수 있었다.
양몽환과 하림이 묵묵히 서 있는 앞으로 청의 소녀는 말을 바짝 몰아세우며 서자 호위하던 장정이 나서며
「이향주님! 바로 그 남녀 한 쌍이 이옵니다.」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청의 소녀는 양몽환과 하림을 싸늘한 눈초리로 훑어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분께서는 곤륜파의 일양자 노선배님의 제자이신가요?」
양몽환은 담담하고도 침착하게
「그렇소마는 어찌 바쁜 길을 막소이까?」
만만찮은 대답에 청의 소녀는 가볍게 말에서 내려 싸늘하고도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곤륜파의 분광겁법과 천강장으로 쟁쟁한 일양자의 제자에게 어찌 감히 길을 막겠소이까? 다만 한 가지 의논할 일이 있어서 왔소이다.」
하는 청의소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양몽환은
(과연 미인이로구나, 그런데 미간에 사람을 위협하는 상이 있어 좀 흠이다)
소녀의 관상을 보며
「무슨 의논이 있으신지? 속히 하시오!」
냉정하게 말했다. 소녀는 시종 싸늘한 비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쏘아 보았다. 그리고는 청의 소녀도 위협조로 말했다.
「묻는 말에 대답만 하면 돼요!」
「말하지 않는다면?」
양몽환도 지지 않았다.
「강제로라도 말하게 하죠.」
「흥! 대관절 당신은 누구요?」
청의소녀는 양몽환의 물음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거만한 태도로
「그런 것은 아실 필요 없어요. 묻는 말에나 대답해요. 안한다면 그때 내가 누구라는 것을 무술로 알려드리죠.」
양몽환은 기가 막혔다.
(도대체 이 여자는 누구란 말인가, 우홍비와 관계있다는 것은 저 호위하는 장정이 따라온 것으로 보아 짐작 하겠지만…… 하여튼 대담한 여자다!」
이렇게 생각하며 양몽환은 소녀의 거만하고 안하무인격인 태도가비위에 거슬려 불끈 했으나 마음을 진정하며,
「그러시다면 무슨 말씀인지 속히 하시오」
「잘 아시겠지만 지금 곤륜파의 수중에 장진도가 들어 있다는 것도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오. 혹시 그 장진도를 당신이 가지고 계시다면 조용히 내 놓으시오. 귀찮게 굴지 말고.」
양몽환은 피가 곤두서는 듯 화가 났으나 냉정하게 웃으며,
「하 하…… 그러시군. 장진도! 그런데 미안하지만 내 수중에는 없소. 설사 있다 해도 내놓지 못하겠다면 어떻게 하겠소!」
청의 소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메고 있던 긴 칼을 뽑아 쥐며
「아까도 분명히 말했지만 할 수 없죠. 강제로라도 빼앗겠어요.」
하며 곧 싸울 태세를 취했다. 그러자 호위하던 두 명의 장정도 단검을 빼어 들고 겨누는 것이 아닌가.
양몽환은 급히 사태를 파악하고 이곳을 빠져 나가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한 후 날쌘 동작으로 하림을 향하여,
「나를 따르라!」
한마디 하고는
<휘익!>
몸을 날려 한 마장이나 뛰어 날았다.
그러나 ….
한마장이나 가볍게 날아 그들에게서 피해 왔다고 했을 때 옥을 굴리는 듯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가 했는데 푸른빛이 번쩍하며 청의소녀가 양몽환과 하림의 앞을 딱 가로막고 서는 것이 아닌가?
양몽환도 마찬가지로 빨리 날아 뛰는 신법을 가지고 있는데 그보다 더 빠른 청의 소녀의 신법에 놀랄 뿐이었다.
(정말 빠른 신법이구나, 이 일을 어떻게 한다?)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서 있는 양몽환의 앞으로 청의소녀는 조용히 다가와 서며
「한 번 더 잘 생각해 봐요. 나를 피해서 달아나지는 못해요.」
양몽환은 소녀를 피해 달아난 것이 부끄럽기도 했으나 일이 이렇게 벌어진다면 도망만 갈 수도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손에 힘을 주어 칼을 잡으며
「당신이 무서워 피한 줄 아는 모양인데 어림없소!」
말을 마치자마자 소녀의 가슴을 겨누고 칼을 높이 들었다 내리치며 한월창파(寒月滄波)로 무찔렀다.
양몽환의 돌연한 공격에 청의 소녀는 당황했으나 곧 칼을 들어 양몽환의 칼을 막았다.
순간 ….
칼과 칼이 마주쳐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는 가 했는데 갑자기 양몽환의 팔이 진동하며 기진하여 쥐었던 칼을 떨어뜨릴 뻔 했다.
그리고 양몽환과 청의 소녀는 동시에 서로의 무술에 놀랐다.
(보통의 무술이 아니구나)
그러자 청의 소녀도 다리를 구부렸다 펴면서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는 한편 하림은 두 장정의 단검을 막아 불꽃 튀기는 공격이 이미 벌어지고 있었다.
일대는 급기야 싸움터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싸움은 점점 열이 올라 먼지와 모래가 날고 칼과 칼이 부딪치고 비참한 신음 소리로 몸이 오싹 했다.
그러나 양몽환처럼 신중을 기하지 못하는 성격의 하림은 두 장정을 상대할 애초부터 고수의 신법 즉 분광검법을 발휘하여 순식간에 두 장정을 거꾸러뜨리고 말았다.
얼핏! 하림의 싸우는 것을 본 양몽환은
(여기서 이런 자들과 싸워 시간을 허비할 것이 아니다 속히 빠져 나가자.)
생각하고 계속 역습해 들어오는 청의 소녀의 칼을 막는 동시에 추혼십이검법을 발휘하여 기봉등교(起鳳騰交), 역풍광숙(朔風狂潚), 무흠운수(霧欽雲收)등 세 가지의 검법을 이용하여 폭풍우 같이 공격했다.
일시에 세 가지의 공격을 받은 청의 소녀는 잠시 정신이 혼미하여 발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이때닷!」
양몽환은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허공을 날아 하림에게로 달려갔다.
「심소저! 그냥 두고 빨리 가요!」
하는 외침 소리에 하림은 여유 있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고 아직 허우적거리는 두 장정에게 한 번 더 분화불유(分花拂柳)를 일격 가한 다음 땅을 박차고 유성같이 허공을 날았다.
간신히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자세를 바로 세운 청의 소녀는 멀리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분함을 참을 수 없어 이를 갈다가 아직도 허우적거리는 두 장정을 향하여 쨍쨍한 쇳소리를 냈다.
「이 멍텅구리들아! 빨리 일어나지 못해! 그까짓 여자 하나를 당하지 못하는……」
분노가 가시지 않아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너희들은 속히 그들이 도망갔다는 것을 유괴수에게 알리고 곧장 동정호로 가라!」
말을 마친 청의 소녀는 훌쩍 말 잔등에 오르더니 양몽환과 하림이 사라진 곳을 향하여 급히 말을 몰아 달려 나갔다.
온 몸이 쑤시는 듯한 아픔을 참으며 벌벌 기어 일어선 장정들은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을 끌고 어슬렁어슬렁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
얼마를 숨 가쁘게 달리다 뒤에 아무도 ?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양몽환과 하림은 걸음을 늦추고 숨을 돌려 쉬었다. 거의 해가 서산으로 떨어질 무렵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며 시커먼 구름장이 이리저리 밀려와 금세 비라도 쏟아질 것 같다.
「오빠! 비가 올 것 같아요.」
과연, 번개와 뇌성이 동시에 치며 뿌옇게 안개가 깔려 왔다.
이 허허 벌판에서 비를 맞는다면 피할 곳도 없고 흠뻑 비에 젖어야 할 판이다.
양몽환은 급히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우거진 수풀과 바위뿐 초가 한 채도 없는 벌판이었다.
「큰일이군, 인가도 없고……」
탄식하듯 양몽환이 말하자 역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하림이 수풀이 우거진 캄캄한 곳을 가리키며,
「저어쪽! 지붕 같은 것이 있어요!」
하며 손가락질을 했다. 그 말에 양몽환도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과연, 그곳에는 지붕 같은 것이 멀리 보이는 것이었다.
「심소저! 정말 놀라겠는데! 무엇이나 잘 찾아내니…… 하하!」
「오빠! 놀리지 마세요, 호……호!」
오랜만에 둘은 정답게 웃고 서로 손을 잡은 채 지붕이 보이는 곳으로 뛰어 갔다. 급기야 후드득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몇 방울씩 떨어지던 비는 금세 댓줄기처럼 쏟아져 내렸다.양몽환과 하림은 경공법(輕功法)을 발휘하여 제비가 물 위를 나르는 듯 숲 속으로 들어갔다. 과연 그곳에는 다 쓰러져 가는 절이 있었다. 이미 폐사(廢寺)가 된 절에는 불상(佛像)이 깨어진 채 이리저리 뒹굴고 인기척도 없는 음침한 절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지붕만은 뚫어지지 않아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양몽환과 하림은 한편 구석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몸이 피곤하여 잠이 들 것도 같았으나 주위가 허술하고 으스스 추워 잠이 들지는 않았다.
폐허가 된 절에는 비 쏟아지는 소리뿐 고요했다. 이윽고 갑갑하다는 듯 하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빠! 정말 장진도를 오빠가 가지고 있어요?」
「아니! 보지도 못했어!」
하림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 둥 거리더니
「그런데 왜 우홍비 일당은 우리들을 따라오며 성화를 부리죠? 장진도도 없는데………이상한 사람들이야……」
천진난만한 하림의 말을 듣자 양몽환은 픽 하고 웃었다. 그러자 눈을 둥글게 뜨며 하림은
「왜요? 제 말이 우스워요?」
「하하! 아니……」
양몽환의 웃음소리에 하림은 낙심한 듯 한참 양몽환의 얼굴을 바라보다 살며시 양몽환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몰라서 묻는데 오빠는 웃는군요. 가르쳐 주면 묻지도 않을 것을…… 잘못했어요!」
하며 금세 울상이 되고 만다.
양몽환은 내심 적이 놀라며 하림을 위로할 양으로 하림의 가는 허리를 살며시 안았다.
「무엇이 우리 소저를 슬프게 하였을까? 나는 심소저의 말하는 표정이 귀엽고 예뻐서 웃었는데……」
양몽환의 부드러운 위로의 말에 하림은 생끗 웃으며
「그럼 제가 잘못 했어요.」
「아니! 웃는 사람이 잘못이지. 그런데 그들이 우리를 따라 오는 것은 장진도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그러는 것이야.」
하림은 양몽환의 두 손을 꼭 잡고
「그렇지만 자꾸 따라오며 싸움을 하려고 하잖아요?」
「그것은 우리들을 잡아다 인질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이지. 그러면 사부님이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장진도를 내 놓으리라는 것이 그들의 속셈이거든.」
「그럼 사부님께서 장진도를 가지고 계시나요?」
양몽환은 말했다.
「그것은 나도 잘 몰라.」
그제야 알겠다는 듯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하림은 양몽환의 어깨에 기대어 지그시 눈을 감는 것이었다.
이때, 양몽환은 하림의 순정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번민하고 있었다.
(지금 하림은 나에게 순정을 바치려고 한다. 그러나 사부님은 하림을 잘 보호 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어찌 이제 하림을 떨쳐버릴 수가 있으며 또 그렇게 된다면 하림의 가슴에 상처를 줄 것이다.)
양몽환은 하림의 허리를 안고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바로 그때 ,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가까이 들리며 두런두런 말소리가 났다.
「할 수 없군, 여기서라도 비를 좀 피하고 가야지」
순간 ….
양몽환은 하림을 이끌고 급히 깨어진 불상 뒤로 몸을 날려 숨었다.
이윽고 두 사나이가 양몽환과 하림이 숨어 있는 불상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양몽환과 하림은 숨을 죽이고 그들을 주시했다.
절간 안으로 성큼 들어서는 두 사람의 행색 은 나이가 거의 오 십대와 사 십대의 건장한 체격의 사나이 들이었다.
도사 차림의 얼굴은 하관이 쪽 빠진 사나이는 갈고리 같은 무기를 등에 졌고 선비 차림의 부른 도포를 입은 사나이는 허리춤에 무엇을 감추었는지 불룩했다.
그들은 들어서는 길로 얼굴에 묻은 빗방울을 훔치며 엉거주춤 마주 보고 앉는다.
잠시 후
선비 차림의 사나이가 무릎을 세우고 땅바닥에 그림을 그려 가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형님! 가만히 생각해 보시오, 현도관의 주인도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갈 위인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 장진도를 뺏으려면 일대의 사투(死鬪)가 벌어지지 않고서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도사 차림의 사나이는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더니
「흠……왜?」
그러자 선비 차림의 사나이가 펄쩍 뛰며 말을 받는다.
「왜가 다 뭡니까? 지금 천지 사방에서 고수라는 고수들이 몽땅 모여 들었으니 일이 크게 벌어지지 않고 배깁니까?」
「그건 어떻게 아는가?」
「다 알아 봤죠. 그런데 그 증에서도 천용방(天龍방)의 세력이 제일 강하고 그 다음으로 화산(華山)과 공동(??)의 두 파이며 그다음이 무당(武當), 소림(小林), 아미(峨嵋), 청성(靑城)입니다.」
「그렇다면, 각파의 고수들도 다 모여 들었겠군!」
「그러면요. 그런데 다른 파들은 걱정 없지만 화산파와 천용방의 실력이 대단합니다.」
「다른 파의 고수들은 안 왔더란 말인가?」
「아직 안 왔다는군요. 그러나 화산파는 팔비신옹 문공태(八臂神翁聞公泰)가 직접 제자들을 이끌고 오리라는 소문이며 천용방의 해천일수 이창란(海天一?李滄欄)은 오지 않았으나 부하인 홍(紅),백(白),흑(黑)의 삼기단주(三旗壇主)가 모두 호남성 북부에 모여 있다는 소문입니다.」
「흠……」
「그런데 공동파에서는 어떤 고수가 올는지 모르지만 아직 장문사형(掌門師兄)이 오지 않았으니 우리 사형제(師兄弟)의 실력으로 어려울 것 같은데요.」
선비 차림의 사나이가 긴 이야기를 마치자 도사 차림의 사나이는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번쩍 눈을 뜨며,
「동생 말도 일리는 있네. 그러나 각 파의 고수들이 모여서 지금 현도관의 주인인 일양자만을 노리고 있거든, 그러니 우리는 이틈을 노리는 거란 말이야.」
「이 틈이라니요?」
선비가 다급하게 묻는 것을 도사는 손을 들어 막으며
「서두르지 말게, 우리는 그들과 같이 어울려 싸울 것이 아니라 일양자의 제자를 잡자는 거란 말일세.」
「제자는 뭣에 씁니까?」
「모르는 소리! 제자를 잡아다 인질로 삼아서 현도관 주인 앞에 떳떳이 간다는 말일세.」
「그래서요? 그까짓 제자가 장진도를 가지고 있는 줄 아시오?」
「그렇지!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흠…… 제자의 생명과 장진도를 맞바꾸자면 아무리 일양자라도 제자를 죽일 수는 없는 법이거든」
「과연 …. 형님은 머리가 좋습니다.」
「헛헛허……」
「히히……」
두 사나이는 자기들의 계획에 탄복하여 통쾌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다른 하나의 통쾌한 웃음소리가 절간을 쩌렁 쩌렁 울렸다.
돌연한 웃음소리에 두 사나이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다 문 앞에 우뚝 서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 또 한번 놀랐다.
용안학발(龍顔鶴髮)의 노인은 회색 두루마기를 입었으며 머리는 백설(白雪)같이 희고 손에 죽장(竹丈)을 짚고 버터고 서서
「하하하……」
하고 정말 통쾌하게 웃다가 딱 그치며
「두 분의 이야기는 재미가 있소이다. 이런 황폐한 절간에 까지 오셔서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니…… 그런데, 여러분의 사형은 아니 오셨소?」
두 사나이는 이 노인이 바로 화산파 주지인 팔비신옹 문공태라는 것을 알아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곧 공손히 절하며
「예 , 사형은 바쁘셔서 오시지 못하였습니다. 저희 형제는 원래 야인인지라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 비를 만나 이곳으로 피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문형(聞兄)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문공태는 태연하게 수염을 내려 쓸며 「하, 하…… 점창파(點蒼派)가 당신들 형의 유능한 수완과 당신들 두 분의 협조로 번창하고 있다는 것을 내 이미 아는 바이오. 이 노부는 전부터 점창파(點蒼派)의 삼걸(三傑)에 매우 마음이 끌려 운남성으로 찾아 가볼까 했는데 이때껏 연분이 없어 가질 못하였소. 그런데 오늘 뜻밖에도 이렇게 만났으니 인생하처불상봉(人生何處不相逢)이군!」
문공태의 말을 듣자 도사 차림의 사나이가 한 걸음 나서며
「이 못난 저희들을 생각하기 싫다니 감사하오이다. 그런데 어찌 이 험한 골짜기까지 오셨습니까?」
문공태는 또 한 번 호탕하게 웃고
「하 하……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을 두 분이 몰라서 묻는다면 모르겠거니와 새삼 물을 것이 있겠소?」
문공태의 말에 두 사나이는 서로 쳐다보고는 선비 차림의 사나이가 억지 웃음을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모두 교묘하게 만났군요.」
「그렇소이다. 그런즉 우리 화산, 점창 두 파가 선수를 써야 될 것 같소.」
하고 문공태가 말을 받았다. 그러자 선비차림의 사나이가 다시 말했다.
「아니올시다. 문형의 탄지금환(彈指金丸)은 무술계에서도 쟁쟁합니다. 그 신법을 우리 점창파가 먼저 눈요기라도 할 수 있을 모양이죠?」
문공태는
「하…… 하……」
기왓장이라도 날릴 듯이 웃더니
「무술계에서 명성이 쟁쟁한 점창 두 기러기를 만난 것만 해도 노부가 호남성에 온 보람이 있었소. 그러나 당신들의 사형을 안 봤으니 세 기러기를 한 번에 만나보면 유감이 없겠소.」
이 말을 듣고 있던 도사 차림의 사나이가 눈을 부라리며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일 세 기러기가 함께 모이면 일일이 문형을 모시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하는 말에 문공태는 얼굴에 노기를 띠우며
「그렇다면 이 노부는 먼저 두 분의 무공을 배워야 되겠군!」
「때가 오면 사양하지 않고 싸움에 응하겠소마는, 당신의 화산파와 우리 점창파가 싸운다면 다른 파에게만 이롭게 할 뿐 백해무익이오.」
문공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옳은 말씀, 천용방 사람들이 많이 왔으니 다른 기회에……」
하는데 홀연
난데없는 호각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자 문공태는 급히 죽장을 짚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향하여 이상한 소리를 냈다. 문공태의 이상한 외마디 소리가 나자마자, 순식간에 빗속을 뚫고 한 거인이 달려와 문공태에게 귓속말을 하고는 빗속으로 달려가 버리고 말았다.
문공태가 떠나자 선비 차림의 사나이가 말했다.
「문공태가 제자의 보고를 받고 갔으니 뒤따라 가봅시다.」
하고는 도사 차림의 사나이와 함께 문공태의 뒤를 따라 빗속으로 사라졌다.
한편 ….
지금까지 불상 뒤에서 세 사나이의 대화를 빠짐없이 듣고 있던 양몽환과 하림은 긴 숨을 몰아쉬며 불상 뒤에서 나왔다.
그때까지 양몽환의 손을 잡고 있던 하림은
「오빠! 그들도 우리를 잡으려고 하죠?」
양몽환은 앞으로 하림과 자기의 앞길에 겹겹이 쌓인 위험과 고난을 깨닫고 그들을 피하여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갈 것만 궁리하고 있었다.
「그렇다. 많은 고수들이 우리를 노리고 있어. 밤이 깊어지면 지체하지 말고 이곳을 빠져 나가지 않으면 위험해」
어느덧 밤도 깊어 쏟아지던 비도 그치고 하늘에는 총총히 별이 뜨고 밝은 달이 떴다.
「심소저! 자, 일어나요. 조금만 더 가면 호남성을 빠져나가 포위망을 벗어 날 수 있어.」
「제 걱정일랑 말고 급히 달려요.」
하림도 명랑하게 말했다.
그들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질풍처럼 달려 순식간에 십여 리 길을 날았다. 비가 내린 뒤라 땅은 젖어 질벅거리고 그들이 내렸다, 날았다 하는 동안 온 몸에 흙탕물을 뒤집어썼다. 양몽환과 하림은 서로 흙탕물이 튄 옷을 보며 웃고 있는 바로 그 찰나.
홀연 ….
뒤에서 여자의 차가운 냉소 소리와 동시에
「휘익!」
하며 검은 물체가 그들의 앞을 가로 막고 서는 것이었다.
양몽환과 하림은 가슴이 철렁하며 화다닥 놀랐으나 낮에 만났던 청의 소녀(靑衣小女)임을 짐작하고 약간 마음을 놓았다.
화안한 달빛에 비치는 청의 소녀의 모습은 낮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얼굴에는 어떠한 악의나 해치려는 얼굴이 아님을 알고 양몽환은 부드럽게 웃으며 청의 소녀 앞으로 다가갔다.
「소저께서는 왜 우리를 추적하십니까? 우리와 소저 사이에는 서로 원수나 적도 아닌데……」양몽환은 앞으로 하림과 자기의 앞길에 겹겹이 쌓인 위험과 고난을 깨닫고 그들을 피하여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갈 것만 궁리하고 있었다.
「그렇다. 많은 고수들이 우리를 노리고 있어. 밤이 깊어지면 지체하지 말고 이곳을 빠져 나가지 않으면 위험해」
어느덧 밤도 깊어 쏟아지던 비도 그치고 하늘에는 총총히 별이 뜨고 밝은 달이 떴다.
「심소저! 자, 일어나요. 조금만 더 가면 호남성을 빠져나가 포위망을 벗어 날 수 있어.」
「제 걱정일랑 말고 급히 달려요.」
하림도 명랑하게 말했다.
그들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질풍처럼 달려 순식간에 십여 리 길을 날았다. 비가 내린 뒤라 땅은 젖어 질벅거리고 그들이 내렸다, 날았다 하는 동안 온 몸에 흙탕물을 뒤집어썼다. 양몽환과 하림은 서로 흙탕물이 튄 옷을 보며 웃고 있는 바로 그 찰나.
홀연 ….
뒤에서 여자의 차가운 냉소 소리와 동시에
「휘익!」
하며 검은 물체가 그들의 앞을 가로 막고 서는 것이었다.
양몽환과 하림은 가슴이 철렁하며 화다닥 놀랐으나 낮에 만났던 청의 소녀(靑衣小女)임을 짐작하고 약간 마음을 놓았다.
화안한 달빛에 비치는 청의 소녀의 모습은 낮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얼굴에는 어떠한 악의나 해치려는 얼굴이 아님을 알고 양몽환은 부드럽게 웃으며 청의 소녀 앞으로 다가갔다.
「소저께서는 왜 우리를 추적하십니까? 우리와 소저 사이에는 서로 원수나 적도 아닌데……」
양몽환의 부드러운 물음에 상냥하게 웃으며
「호호…… 우리라는 말이 매우 친하게 보이는데 그분은 누구시죠?」
「그건 왜 묻소? 이 분은 나의 사매(師妹)요! 우리라는 말이 어떻단 말씀이오?」
그러자, 소녀는 쾌활하게 웃으며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나요? 당신의 사매라는 분 예쁘네요?」
양몽환의 눈빛은 순간 노기를 띠었으나 냉정하게
「우리는 바쁜 사람들이오, 그런 농담할 시간이 없소!」
하고는 하림을 향하여
「심소저! 갑시다.」
하고 돌아서서 몇 걸음을 달려갔다.
그러자 청의 소녀는 흘연! 땅을 박차고 팔보간선(八步?旋) 신법으로 허공을 뚫고 두 사람 앞을 가로 막아서며
「잠깐! 백 리(百?)안에는 많은 고수들이 잠복하고 있어서 뚫고 나간다는 것이 용이 하지 않을 거예요.」
하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노기를 띠우며
「당신이 관계할 바 아니오! 더 길을 막지 말고 비켜 주시오. 만일 안 들으면 그냥 있지 않겠소.」
그러나 소녀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태연하게 서서 양몽환을 노려보며 말했다.
「호호 당신의 말에 제가 무서워할 줄 아세요. 그보다 먼저 이 무영녀 이요홍(無影女李瑤紅)이 누구인지를 아는가요? 호의로 하는 이야긴데 갈수록 야만스럽군요.」
하는 소녀의 눈빛은
(왜 내 사정을 몰라주는가?)
하는 듯 애처롭게 보였다. 양몽환은 소녀의 눈길을 피하며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그러면 내가 오해했소이다. 혹시 천용방주의 영애(令愛)가 아니신지요?」
「어떻게 저를 알아보시는가요?」
하고 놀라운 듯 눈을 크게 뜨는 이요홍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는 것이었다.
그러자 양몽환은 지금 한가하게 이야기 하고 있을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절실히 느끼고는 급히 이 자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아는 것은 당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오. 우리는 급히 가야겠소. 그럼 실례하오.」
내 뱉듯이 말하고는 하림의 손을 잡고 맞은편의 산모퉁이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막 산모퉁이를 꺾어 도는 순간 역시 앞에서 걸어오던 두 명의 도사 차림을 한 여인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말았다.
「누구냐!」
도사 차림의 아름다운 여자가 날카롭게 외치며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한 여자는 옆에 가만히 서 있고 젊은 여자가 쏜살 같이 달려드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러지 않아도 급한 길에 더욱 사태가 크게 벌어지자 분통이 터진 양몽환은 일순 생각하던 미안함도 잊어버리고 마주 장검을 뽑아 들고 그녀의 공격을 피하면서 재빨리 역습해 들어갔다.
이리하여 양몽환은 도사 차림의 여인과 거의 십여 합을 겨누게 되고 말았다.
이때까지 한 옆에 서서 싸우는 것을 보고 있던 또 한 사람의 여도사는
양몽환의 검법(劍法)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 졌다.
(? 이상한 일이군! 지금 저 젊은이가 쓰는 검법은
우리 곤륜파의 추혼십이검법(追魂十二劍法)이 아닌가?
그런데 저 젊은이가 어떻게 추혼십이겁법을 쓸까? 이상한 일이군!)
여기까지 생각하던 도사 차림의 여자는 손을 들어 싸움을 제지시켰다.
「잠깐! 내 말을 들으시오!」
그러자 양몽환과 상대의 여인은 급히 장검을 내리고 몇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실례이오만 젊은 귀공은 어느 파의 제자이신지?」
양몽환에게 묻는 말이었다.
그러자 양몽환은 이마에 땀을 닦으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 후배는 현도관주 일양자의 제자입니다. 그런데 노선배님께서……」
하는 순간 여자는 화들짝 놀라며 양몽환의 말을 가로 막는 것이었다.
「뭐라고? 그럼 첫째 사형 일양자의 제자라는 말이오?」
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오?」
「곤륜산에 셋째 사숙님을 찾아 가는 길입니다.」
「바로 내가 셋째 사숙 혜진자라는 사람이다.」
그러자 양몽환은 장검을 집어 던지고 그 자리에 급히 꿇어 엎드렸다.
「사숙님을 몰라 뵈옵고 죽을죄를 졌습니다.」
진심으로 사죄했다 그러자 혜진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림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때 하림도 양몽환의 뒤에 꿇어 엎드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양몽환은 일양자가 준 편지를 품속에서 꺼내 혜진자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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