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 文>
여기 소개하는 「비룡」은 근대 중국 무협소설계에 명성을 떨치는
와룡생 선생의 원작인 「비연경룡」의 완역 개제이다.
한화일보 지상에 연재했었던 이 「비연경룡」은 기간된 바 있는
수종의 무협소설의 단순한 내용을 탈피하고 광대무비하고
심오한 내용으로 절찬을 받고 있다.
광활한 중국대륙을 종횡으로 휩쓸고 괄창산과 기련산과의 근 일만 여리를
질주하는 20대 남녀 주인공들의 파란만장하고 신출귀몰함은
세속의 번민을 잊게 하고 광활한 구만리의 중국대륙으로 독자를
친히 안내해 줄 것으로 확신하는 바이다.
끝으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원문에 충실을 기하였고
기기묘묘한 수백 종의 수법도 원문을 부기하고 한글로 표기했음을 말해 둔다.
이 한편의 소설이 독자들에게 한중 양국간의 문화 교류가 되고 이해됨은 물론
번잡한 생활에서 즐거움을 얻는다면 더 바램이 없겠다.
玄都觀
劍底奇逢
絶澗千尋
寶?一劍
兩女愛深
飛燕留情
龍霧沈烟
龍馬重山
雪月重光
龍騰虎躍
비연경룡(비룡)
제 1 장 현도관의 사람들 <玄都觀>
때는 도화(桃花)가 만발하는 삼월(三月).
원강(沅江)의 강변 현도관(玄都觀)에는 복숭아꽃이 야단스럽게 피어 마치 꽃수를 놓은 듯
아름답고 봄볕이 따사롭게 내려 쬐는 정원은 한가롭기 그지없는 오후였다.
이때, 복숭아 꽃 가지를 왼 손에 쥐고 오른손으로는 치마 자락을 가볍게 추켜올린 채
가벼운 발걸음으로 강변을 향하여 걸어 나오는 백의(白衣) 소녀가 있었다.
희고 우아한 옷을 입은 소녀의 얼굴은 햇빛에 반사되는 복숭아꽃처럼 더욱 아름다웠고
사쁜사쁜 걷는 걸음과 영롱한 눈 그리고 날씬한 몸매는 마치 목욕을 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
이윽고 강변에 다다른 백의소녀(白衣少女)는 흐르는 강물을 내려 보다가 맑은 눈을 천천히
들어 상류를 바라보면서 입가에 생긋이 웃음을 띠웠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복숭아 꽃 가지를 꺾어 강물에 던졌다.
그러자 꽃은 삽시간에 급류에 휩쓸려 사라지며 홀연 상류로부터
작은 한 척의 고깃배가 쏜살같이 강변을 향해서 달려오는 것이었다.
그 배위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회색 도포를 날리며 뱃머리에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배의 소녀는 배 위의 노인을 바라보면서 가벼운 웃음을 띠우며 교태로운 소리로 말했다.
「사부님!」
소녀가 부르면서 들고 있던 꽃을 강물에 던졌다.
그리고는 땅을 박차며 몸을 공중에 휘날리는가 했을 때에는 벌써
또다시 물위 떠 있는 꽃 위에 두발을 가볍게 살짝 디뎠다.
그리고는 눈 깜짝할 사이 소녀가 또다시 몸을 날려 노승이 서 있는
뱃머리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소녀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노승은 즐거운 듯이 웃으며 말했다.
「다 큰 처녀가 아직 개구쟁이 노릇만 하다니!」
하며 닻을 획! 하고 강변으로 던졌다.
노승의 억센 힘에 화살처럼 허공을 나름 닻이 강변에 파묻히자
급류에 떠내려가던 배는 닻줄이 팽팽히 당겨지며 강변에 멈추어졌다.
이때, 노승은 도포자락을 약간 펴는듯하며 질풍처럼
이장 오륙척(二丈五六尺)이 넘는 수면을 날아 강변에 가볍게 내렸다.
그러자 백의 소녀도 노승의 뒤를 따라 허공을 날아 하늘로 높이 올라갔다가
공처럼 둥글게 꾸부리며 웃음소리와 함께 노승 옆에 사뿐히 내렸다.
「사부님! 제비가 구름을 뚫고 날듯 저의 무공도 상당히 진전했죠?」
「허…허…많이 발전했다. 그러나 아직 익숙하진 못하다.
만일 강적의 협공을 받는다면 그 정도의 재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 말을 들은 백의 소녀는 노승이 칭찬해 주지 않는 것이 무척 섭섭했다.
더구나 그 정도의 재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에는 불쾌하기까지 했다.
노승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만약 계속해서 그녀를 방관한다면 말괄량이가 되겠군.
이 기회에 그의 야성을 없애서 차후 교육에 지장이 없도록 하리라……)
혼자 생각한 노승은 꽃같이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이 우수에 잠긴 듯하고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를 매만지는 모습은 마치 어릴 때
그녀의 어머니와 흡사하여 삼십 년 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것이었다.
노승은 음성을 부드럽게 낮추며
「림(琳)아야! 이리 가까이 오너라!」
하고 다정하게 불렀다.
순간, 소녀는 노승의 부드러운 부름에 고개를 들어 노승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물이 어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노승 앞에 지나치게 재간을 부린 것을 뉘우쳤다.
백의 소녀는 노승의 발에 엎드려
「사부님! 잘못했어요. 앞으로는 절대로 거슬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어요.」
소녀가 용서를 빌었다.
노승은 가볍게 소녀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림아야, 내 말을 잘 들어라.」
하고는 다음과 같이 천천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현도관 주인 일양자 도장(一陽子道長)은 곤륜파(崑崙派)의
세 장로(三長老)중의 한 분이며 분광검법(分光劍法)에 천하무쌍하다.
그래서 나는 너의 무공을 더욱 향상 시키고자
특별히 그와 약속해서 서로 가르쳐 주기로 했다.
그 분은 너에게 분광검법을 가르쳐주는 대신 나는 그의 제자에게
십팔나한장법(十八羅漢掌法)을 가르쳐 주기로 말이다.
네가 차후 무술이 통달하여 적을 무찌를 수 있게 되거든 부디 네 손으로……
원통한 부모의 원수를……갚아야……」
하고는 말을 잇지 못하고 옛 추억이라도 생각하는 듯 눈을 지그시 감는 것이었다.
백의 소녀는 스승의 침통한 얼굴을 잠시 바라보고는
「사부님! 사부님의 말씀을 명심하여 경솔한 행동은 안 하겠어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사부님! 지금 말씀하신 림아의 부모에 대해서 수년 동안 줄 곧
림아의 마음속에 사무쳐 있는 저의 부모님을 사부님은 말씀해 주시지 않는군요.
저를 낳아 주신 어버이가 어떻게 생겼으며 또 무슨 원통함을 당했는지
알 길이 없어 마음이 아프고 하염없이 눈물만 나와요.
사부님! 저의 부모님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백의 소녀의 눈에는 눈물이 뺨을 타고 줄줄 흘러 내렸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소녀의 말을 듣고 있던 노승은 천천히 눈을 뜨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음, 그 이야기는 차후 적당한 시기에 말할 것이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열심히 일양자 사숙에게 분광검법을 배워……」
그 때였다. 갑자기 복숭아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숲 속에서
푸른 두루마기에 짚신을 신고 풍채가 우아하고 당당한 소년이
오솔길을 걸어 나오는 것을 노승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소년은 노승 가까이 와서 허리를 굽혀 공손히 절하며
「저의 사부님께서 등인사백님이 오늘 오실 것이라고
이곳까지 나가보라는 분부였습니다.
하오나 사백께서 이미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노승이 말했다.
「허……허……고맙군. 그러나 우리 림아가 삼개월 동안 귀관에서 폐를 끼쳐
자네 사부의 소양과 자네의 무공 연마에 큰 지장을 줬을 텐데 마중까지 나오다니……」
소년은 황망히
「하림사매(霞琳師媒)는 총명이 절정하며 또 등인사백님의 무학 절기를 이어 받아 사매의
장래는 무한한 서광이 비칩니다마는 제자는 천성이 우둔하여 삼개월 동안 하림 사매와
무공을 연구하여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도리어 폐라고 말씀하시니 몸 둘 곳이 없습니다.」
백의 소녀는 자기를 칭찬해 주는 소녀의 말을 듣고 방금 상심하였던 마음이
얼음 녹듯 녹아 버렸다.
소녀는 미소를 띠우며 고개를 들어 정답게 소년을 응시했으나
소년은 공손히 서 있을 뿐 소녀를 바라보지도 않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노승의 머리에는 무엇인가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재작년. 림아가 그를 한 번 본 후 항상 현도관에 오기를 원한 것은
아름다운 복숭아꽃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청의의 소년 때문이었군.……
그런데 청의의 소년은 본체도 안하니……)
여기까지 생각한 노승은 순간, 자기 스스로가 지나온 옛일 즉, 어릴 때에 사랑이라는
풍파로 황폐한 산골에 백골로 뒹굴 뻔한 일과 천만 다행히도 기인을 만나 위기를 면하여
쟁쟁한 무공을 배운 것 등을 회고하면서 악몽을 치룬 듯 오늘까지도 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더구나 초연한 마음으로 이십년 동안이나 부처님을 모시고 고학을 했어도 밤중 꿈에서
깨어나면 그녀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그 때마다 불연 듯
그녀가 놈들의 손에 숨이 끊어질 때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어린 것을 부탁하던 일을 잊을 수 없었고 복수한다는 결심이 더욱 새로워지기만 했다.
그녀의 유일한 혈육인 림아를 다시 어머니의 뒤를 밟게 하여 일생에 원한을
품게 된다면 나는 구천에 있는 그녀의 어머니를 무슨 면목으로 대할 것인가……
노승은 림아의 정열에 불타는 듯한 아름다운 눈동자와 청의의 소년을 번갈아 보며
(일양자가 제자로 삼은 이 소년은 실로 보통사람과 다르군.
이처럼 아름다운 림아를 못 본채 하는 이 소년은 과연 기남자로군……)
하고 생각했다.
이렇듯 노승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청의 소년은 또 공손히 절하며
「저의 사부님이 지금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백님께서 걸음을 옮기시기 바랍니다.」
하는 독촉에 노승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행은 현도관으로 향했다.
세 사람이 몸을 돌려 서너 걸음이나 갔을까 말까 했을 때,
돌연 어디선가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맹수의 울부짖음처럼 날카롭고 또 처참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분간할 수도 없었고 뒤를 돌아보아도 보이지 않아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외침 소리는 갈수록 점점 가까이 들리고 무기와 무기가 부딪치는 쇠붙이 소리가
들리는 것만으로도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때 청의 소년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이 현도관 밖의 원강 강변은 지금까지 싸움이 없었던 조용한 것으로 어떤 풍파도 없었다.
지금 들리는 소리는 강변에서부터 들려오고 있다.
그렇다면 강도가 나타나 장사치들이라도 강탈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가봐야지.)
마음으로 생각하던 청의 소년은 즉시 걸음을 돌려 강변으로 달려가는 것을 본
림아는 망설임 없이 청의 소년의 뒤를 쫓아가며,
「양사형! 같이 가요!」
하고 외쳤다.
뒤에서 외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청의 소년은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백의 소녀의 귀여운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띠웠다.
바로 그때였다.
잡풀이 무성하게 우거진 숲 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거한이 한 자루의 장검을 들고
뛰어 나오고 그 뒤를 두 노인이 거한을 쫓아 달려 나왔다.
그들은 쏜살같이 두 사람 가까이 오자
먼저 쫓아온 노인이 손을 번쩍 들어 단검을 던졌다.
던져진 단검은 허공을 가르며 한줄기 은빛이 번쩍하며 피투성이 된 채
달려오던 거한이 칼에 꽃인 채 있는 힘을 다하여 달려오다가
청의 소년과 백의 소녀를 발견하고는 있는 힘을 다해 말했다.
「빨리 현도관 주인을……」
뒤쫓아 달려온 두 노인의 네 개의 손에서 노도와 같은 손바람이 일시에 다다랐다.
그러자 거한의 몸은 칠팔 척이나 높이 솟았다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땅바닥에 떨어진 거한의 코와 입 그리고 귀에서는 붉은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손바람의 거센 힘은 주위에 있는 복숭아나무까지 부러뜨려 사방에 복숭아꽃잎이
흩어져 흡사 꽃비가 내리는 듯했다.
청의 소년은 두 노인들의 손바람이 억셈을 깨닫고 깜작 놀랬다.
무시무시한 장법이었다.
그러나 피를 쏟으며 쓰러진 거한이 현도관 주인을 다급하게 부르는 것은
틀림없이 사부님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자
쓰러진 거한의 위기를 구해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순간! 청의 소년은 앞뒤를 돌아볼 사이도 없이 땅을 박차고 일어남과 동시에
몸을 날려 두 노인 앞을 가로 막았다.
그 때 거한은 이미 그들 노인의 수리검과 억센 장풍으로 치명타를 입어
더 이상 피하거나 대적 할 수 없게 되어 시체와 같았다.
그런 시기에 청의 소년이 두 노인 앞을 가로 막고 가자 두 노인은
청의 소년을 향하여 일제히 협공하려고 했다.
이 청의 소년은 이름을 양몽환이라 부르는 현도관 주인 일양자의 제자이다.
일양자는 곤륜파 세 장로(三長老) 중의 한 사람으로 분광검법(分光劍法)과
천강장(天?掌)으로 무술계에서 명성을 떨치는 사람으로서 양몽환은
십여 년 동안이나 일양자 슬하에서 곤륜파의 절학인 무술을 그대로 이어 받은 소년이었다.
양몽환은 두 노인의 험상궂은 얼굴을 똑똑히 보고는 적이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두 노인은 거의 같은 오십대의 늙은이인데도 억세고 놀라운 손바람을 무궁무진하게
불어 일으키는 위력도 그렇거니와 생긴 모습도 기이했다.
동쪽에 떡 버티고 서 있는 노인의 눈은 삼각형으로 찢어지고 눈썹은 팔자 형이며
음침한 얼굴은 반은 희고 반은 검은데다 머리칼이 세치 이상이나 되는 그야말로
괴물 같은 늙은이요,
서쪽에 서 있는 노인은 얼굴은 비록 하얀 편이나 혈색이 없어 흰 종이 조각을 보는 듯
창백하여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처럼 귀신을 연상케 했다.
더구나 턱에 염소수염처럼 대롱거리는 노란 수염이 더욱 그러했다.
두 노인이 입은 옷도 무릎까지 덮는 두라마기를 걸쳤고 맨발에 짚신을 신고 서 있는
형상이 보면 볼수록 음흉스럽게만 보이는 것이었다.
이처럼 기괴한 두 늙은 앞에 양몽환이 가로 막고 버티고 서자
이때까지 양몽환의 뒤에 서 있던 하림은 그들이 합세하여 협공해 오리라는 두려움보다
그들의 생김새에 놀라
「앗!」
하는 비명과 함께 양몽환의 품으로 쓰러지듯 파고들었다.
이때, 흑백 얼굴의 괴인(怪人) 늙은이가 양몽환과 하림을 비웃듯 바라보며 말했다.
「야! 이 벌레 같은 작은 놈들아!
도대체 너희들이 현도관 주인과 무슨 관계라도 있다는 말이냐?
썩 내 앞을 비켜서지 못할까!」
하고 외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몽환의 눈치는 빠르고 예민했다.
비록 남루하고 누추한 옷을 걸치고 있다 하더라도 이 두 괴인은 무술계에서
명성이 높은 도적이 아니면 무술계를 휩쓸고 다닌 건달이 틀림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손바람 정도로써 상대방의 세력을 정확히 단정할 수도 없고 더구나
과격한 행동을 하여 그들과 대적한다 하더라도 이대 일의 승부는 기대할 수 없었다.
도저히 적수가 아니었다.
양몽환은 여기까지 생각한 다음,
우선 말을 걸어 시간을 끌어 보리라 생각했다.
그러면 사부님이 오실 것이다. 그래도 늦지는 않다.
양몽환은 이와 같이 결심하고 옆에 있는 백의소녀 하림에게 낮은 음성으로
「림사매! 빨리 가서 사부님과 사백님을 모셔 와요.」
하림은 고개를 끄덕이고 양몽환에게 다정한 눈길을 보낸 후
몸을 날려 현도관을 향하여 달려갔다.
그러자, 양몽환은 두 괴인을 향하여 정중하게 절하고
「후배는 현도관 주인의 제자입니다.
두 노 선배님의 귀성존명은 누구이신지?
후배는 저희 사부님에게 고하여 두 손님을 맞이할까 하옵니다.」
공손히 말했다.
그러자 두 괴인은 양몽환의 정체와 마음을 안듯 껄껄 웃었다.
그리고는 흑백 얼굴의 괴인이 냉소하듯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너의 약은꾀에 속을 내가 아니다. 작은 놈의 꾀가 이만저만이 아니군.
네 놈은 현도관 주인 일양자라는 말만 들으면 우리가 겁내고 놀래서
도망이라도 갈 줄 아는 모양이지만……」
하자 저쪽에 서 있는 종이같이 흰 얼굴의 괴인이
「큰형! 무얼 하고 있소! 그 따위와 상대하지 말고 속히 물건부터 손에 넣고 봅시다.」
말을 하자마자 땅에 쓰러져 있는 거한을 향하여 덮치는 것이었다.
순간! 양몽환의 머리 속에는 쓰러진 거한의 품에 귀중품이 들어있다는 것과
이 두 괴인은 그 귀중품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양몽환은 숨이 겨우 붙어 있는 거한에게 달려드는 괴인을 볼 때
자기도 모르게 피가 꿇어 오르는 것이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야앗!」
양몽환은 비법중의 비법인 천강장법에서 횡강재두(橫江載斗)의
한 수로 공력을 운행하며 괴인의 가슴을 겨누고 일격을 가하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어느 사이엔가 일격을 가한 양몽환의 몸을 반대 방향으로
오륙 척이나 높이 날렸다.
상상이외로 강한 공격을 당한 괴인은 양몽환의 일격에 서너 걸음 비틀거리다
간신히 몸의 중심을 잡고 섰다.
한편 양몽환은 너무 높이 뛰었다가 내리는 바람에 발을 헛디딜 뻔 했으나
꿋꿋이 땅을 밟고 섰다.
그리고 재빨리 중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는 거한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거한은 전신의 상처를 무릅쓰고 어느 틈엔가 괴인을 피하여
기다시피 몇 걸음 움직이고 있으나 그의 코와 입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두 괴인은 양몽환의 무술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냉소하며
또다시 좌우에서 맹렬히 협공을 가해 오는 것이었다.
「네가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이놈! 아직 여기 이 큰 아버지의 성질을 네가 모르는 모양이지만 원망은 말아라!」
위협하며 양몽환의 몸을 겨누고 노려보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두 괴인이 위협하는 소리를 들으며 협공해 올 때는
언제든지 방어하고 공격하려는 자세로 버티고 서 있긴 하였다.
그러나 방금 횡강재두의 비법으로도 끄덕하지 않는 괴인에게
어딘가 모르게 위압을 당하는 듯한 느낌을 숨길 수는 없었다.
또한 자기의 무술이 날카롭다 하더라도 두 괴인이 합세하여
공격해 온다면 필경 위태로운 사태가 벌어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쓰러진 코와 입으로 피를 쏟고 있는 거한의 몸에 지니고 있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귀중품을 가진 거한이 달려오며,
「현도관 주인을 빨리!」
한던 말로 미루어 보아 그 귀중품은 현도관과 밀접하고 중대한 관계가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목숨을 버리면서라도 거한과 귀중품을 구해야겠다는 일념이 용솟음쳤다
양몽환은 일단 결심하고 생사를 결정한 다음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두 팔을 휘둘러
<휙!>
펼치며 몸에 있는 힘을 모아 괴인을 향해 일격을 가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돌연, 일갈의 짤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아야! 빨리 물러서라! 목숨을 버릴 셈이냐?」
순간, 양몽환은 그것이 사부님의 소리임을 알고 재빨리 발동시켰던 기력을 회수하여
연청십팔번(燕靑十八?)의 신법(身法)으로 급히 아랫배의 진기(眞氣)를 추켜올려
허공을 솟으면서
<휙!>
하고 한 바퀴 돌아 뒤로 날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양몽환의 신법도 화살처럼 빨랐으나
그보다 더 빠른 공격이 있을 줄이야 꿈엔들 알았으랴.
한 줄기의 강한 힘이 전신을 휘감는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양몽환의 몸은 줄 끊어진 연처럼 훨훨 나르고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쏟아지는 듯 아찔하면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후 양몽환의 몸은 황홀하고도 신비한 속으로 빠지는 듯
나른해지며 향기가 진동하는 요람 속에서 따스한 손길로
누가 가슴을 주물러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양몽환이 두 괴인을 향하고 일격을 가하려는 찰나,
그보다 한 순간 빨랐던 괴인들의 합세한 손바람이 양몽환을 향하고
허공을 뚫을 바로 그 시간에 도화가 만발한 나무 뒤에서부터
괴인들의 손바람보다 더 강한 손바람을 일으켜 괴인들의 손바람을 막으면서
사부님과 도사가 두 손을 휘두르며 동시에 벽공장력을 일으켰다.
그러자 괴인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손바람과 허공에서 맞부딪쳐
주위로 산산 조각이 나버리자 사방은 금세 도화 꽃과 잎으로 꽃밭을 이루어 놓았다.
얼마 후, 도사와 사부님이 다가와 아직 비틀거리는 두 괴인 앞에 우뚝 섰다.
현도관의 주인 일양자는 사랑하는 제자 양몽환을 돌아보고 상처가 대단치 않음을
확인한 후 두 괴인을 향해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너의 천남쌍사와 우리 현도관은 서로 범한 일 없이 지내 왔는데
어찌하여 지금 이곳에 와서 무례한 행동을 하느냐!
더구나 악독하고 더러운 수법으로 내가 사랑하는 제자까지 상처를 입혔으니
오랫동안 칼을 씻고 무술계의 시시비비를 불문하는 나로 하여금
다시 칼을 들고 싸움에 나서라는 것이냐!」
하고 대성일갈 했다.
이럴 즈음, 천남쌍사라고 불리는 두 늙은 괴인이 미쳐 대답할 바를 몰라 어물어물 할 때,
거의 시체와 다름없이 숨만 붙어 있던 피투성이의 거한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사부님! 이 장진도를……」
하고 말을 마저 마치지 못했을 때, 어느 틈엔가 흰 종잇장 같은 늙은 괴인이 던진
수리검이 거한의 등과 가슴을 꿰뚫고 말았다.
「앗!」
순간, 마침내 수년간이나 내공의 강력한 공력으로 몸을 닦은 거한도
아홉 치의 단검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끔찍한 사건에 일양자는 두 괴인의 협공을
미리 방지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어 버렸다.
일양자는 괴인의 악랄하고도 비겁한 수법을 증오하며 숨이 끊어진
거한을 흘깃 바라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쓰러진 거한은 일양자 자신이 이십년 전에 추방한 제자 흑수금강 채방
바로 그 제자가 아닌가?
일양자는 그제야 한 줄기의 슬픔이 분노로 변하였다.
활활 타오르는 분노와 복수심을 합해져 두 괴인을 향해 달려들려는 그 순간,
흙색 얼굴의 괴인이 몸을 민첩하게 날려 독수리처럼 채방의 시체를 덮치는 것이었다.
<휘익!>
일양자는 지금까지 모았던 기력을 다하여 손바람을 일으켜 채방의 시체를 덮친
괴인의 손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잡아버렸다.
괴인의 손은 말짱했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것을 본 일양자는 눈썹을 곤두세우며 한 수 풍뢰교격(風雷交擊)으로 억세게 내려쳤다.
그러자 그 옆에 지금까지 가만히 서 있던 등인대사도 치명상을 입은 거한에게 무자비한
독수를 쓰는 무도한 천남쌍사의 악독한 행동에 분노하고 있다가 도포의 소맷자락을
슬쩍 흔들어 한 수 유형무공(流螢舞空)으로 괴인에게 공격을 가하였다.
한편 현도관의 주인인 일양자로 말하면 당대 무술계에서 명성이 쟁쟁한 일류 고수였다.
그가 분노에 가득한 이때 내경(內勁)의 힘을 다해 내려치는 손바람은 보통 무술이나
손바람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만큼 무시무시하고 날카로웠다.
그런즉 흑백 얼굴의 괴인이 채방의 시체를 덮치는 데만 정신이 집중되었다가
갑자기 장풍이 몸 가까이 접근하여 닥쳐옴을 느끼자 할 수 없음을 각오하고
재빨리 오른 손을 위로 뻗어 손바람을 막아 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일격이 워낙 강하여 억센 장풍에 오른 팔이 부러져 나가며,
「으윽!」
하는 신음 소리와 함께 몸은 칠 팔 척이나 먼 곳으로 날아 복숭아나무에 부딪혀
떨어지고 나무가 두 동강이로 부러지며 꽃잎이 눈송이처럼 사방으로 떨어졌다.
또한 일격을 가해 오리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던 등인대사의 일격을 종잇장처럼
흰 얼굴의 괴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비록 두 손을 휘두르며 별것 아닌 도포 자락 바람을 가볍게 막기는 막았으나
자신이 가했던 손바람이 튕겨져 되돌아오는 바람에
「앗차!」
하고 급히 몸을 피하려 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어
천근, 만근이나 되는 철퇴로 가슴을 얻어맞은 듯 털썩,
주저앉으며 외마디 신음소리 토했다.
「으윽!」
이리하여 천남쌍사 음양판관 왕현과 구혼무상 이통이 순식간에 일양자와
등인대사의 일격에 중상을 입고 쓰러져 버렸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중상을 입었다 하더라도 무공에 날쌘 괴인들 이어서
재빠른 동작으로 치명상을 면하고 즉시 벌떡 일어난 음양판관 왕현은
하늘을 우러러 앙천대소한 후.
「현도관주, 등인대사! 오늘 두 분의 일격을 받은 분통함을 오랫동안 간직했다가
잊지 않고 우리 형제가 목숨이 붙어있는 날까지 꼭 이 원수를 갚고야 말겠소!」
하고는 귀신의 통곡소리 같은 괴상하고도 날카로운 소리를 토하고는
허공으로 몸을 날려 복숭아나무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일양자는 제자 양몽환의 상처가 염려되어 더 상대하지 않았다.
또한 등인대사도 살상을 피하려는 마음에서 도망가는 괴인들을
더 추격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일양자는 양몽환의 상처가 별로 대수롭지 않음에 마음을 놓으며
채방의 시체로 발을 옮겼다.
채방의 몸은 암기에 맞아 벌집처럼 상처가 나 있었다.
일양자는 잠시 묵상에 잠겼다가 쓰리고 아픈 추억을 지워 버리듯 길게 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굽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가슴, 그리고 굳어지는 살을 만져보고 일어서려던 찰라
칼에 맞고 숨이 끊어질 무렵 부르짖던 말을 생각했다.
퍼뜩! 일양자의 머리에는 무엇인가 느껴지는 바가 있어
급히 채방의 가슴을 덮고 있는 옷을 헤쳤다.
이윽고 헤쳐진 그의 앞가슴 품속에서 작은 구슬함을 더듬어냈다.
비록 구슬함은 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으나 파손되지 않은 채였다.
일양자는 엉겨 붙은 피를 닦아 내고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과연! 그 곳에선 네모반듯한 흰 손수건이 곱게 접혀져 있었다.
일양자는 손수건을 소중히 집어 펼쳤다.
하얀 손수건에는 글귀는 하나도 없고 다만 풍경을 그린 그림이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일양자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림은 세 개의 높은 산봉우리가 나란히 품자 형으로 그려져 있고
다만 한 산봉우리에서 가운데로 폭포로 쏟아져 내리는 그림이었다.
얼마동안 열심히 관찰하던 일양자는 그림자체가 무슨 뜻인지 해독할 길이 없었다.
일양자는 다시 손수건을 뒤집어 뒷면을 보았다.
그런데 앞면과는 달리 뒷면은 사람의 손이 여러 번 닿은 듯
주름이 잡혀져있었고 그것은 아주 정교하게 바늘로 꿰맨 흔적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손수건은 두 겹으로 되어 있었다.
곧 바늘로 꿰맨 쪽을 가볍게 뜯어보던 일양자는 갑자기 침통해지며
그만 두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일양자는 고개를 숙인 채 채방의 시체를 한참동안 정신없이 바라보다 한숨을 몰아쉬며
「불쌍하다. 너를 이처럼 고생시키다니……비록 너의 소원은 이루지 못하였지만
죽어서라도 사부 곁으로 돌아 왔으니 곤륜파의 문하 제자로 다시 입적 시켜주마!」
이 광경을 처음서부터 지켜보는 등인대사는 무슨 일인가하여 어리둥절 할뿐 아무 말도 없었다.
또 다른 한편에서 양몽환은 쌍사의 억센 손바람을 피할 때 이미 공력을 운행하여 급소만은
지킨 탓으로 중상을 면하고 정신이 혼미하여졌으나 백의소녀 하림의 지극한 간호와
각처의 혈맥과 가슴을 주물러 피를 통하게 하였으므로 곧 일어나게 되었다.
양몽환은 눈을 떠 주위를 살펴보고 일어나려다 가만히 제지하는 손길을 발견하고
그 손이 백의 소녀 하림의 손이며 지금 자기는 하림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당황하여 황급히 일어났다.
하림은 양몽환이 민첩한 동작으로 펄쩍 일어서자
서운했지만 그러나 기쁜 마음으로 말했다.
「양사형! 좀 어떠하신지요?」
다정하게 물었다.
양몽환은 고개를 숙여 사례했다.
「일시 기력이 쇠진되었으나 큰 지장은 없소. 림사매의 도움에 대단히 감사하오!」
했다.
하림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그럼, 저도 마음을 놓겠어요.」
하는 하림의 얼굴은 금세 복숭아 빛으로 물들여지고 말았다.
고개를 수그린 채 옷자락만 만지작거렸다.
양몽환은 그녀가 자기에게 호의와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마음속으로는 감격했으나 그녀 모르게 가만히 한숨을 쉬고 급히 돌아서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앞을 바라보자 피투성이가 된 거한의 시체를 안은 사부님이 자기를 향하여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양몽환은 재빨리 다가서서 말했다.
「사부님! 이 분이 누구시죠? 혹시 사부님의 제자가 아닌지요?」
양몽환의 혈색이 도는 얼굴을 대한 일양자는 조금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러나 나지막하게 말했다.
「음! 나에게 입적한 사형이 되는 채방이다. 속히 큰 절을 해라!」
양몽환은 사부님의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뜨끔해 짐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양자의 문하제자로서는 오로지 양몽환 자기 하나만인 줄 알았고
또한 평소 사부님이 자기 이외의 다른 제자가 있다는 말도 들은바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나타난 거한을 제자라고 한다면 필시 무슨 곡절이라도……
하는 이상함을 느꼈으나 사부님의 기색이 매우 엄숙하여 더 자세히
물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양몽환은 사부님의 분부대로 피투성이의 시체를 향하여
큰 절을 하고 시체를 받아 안았다.
그 다음 일양자는 등인대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먼저 제자의 시체를 매장합시다. 그리고 우리 천천히 이야기나 하십니다.」
잠시 말을 끊었다가 백의 소녀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중요한 일이 있으니 림아는 먼저 대사님을 따라 관으로 돌아가거라!」
등인대사는 일양자의 거동에 어리둥절할 뿐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분간할 수 없어 묵묵히 서 있다가 일양자의 말대로 하림을 데리고
숲을 돌아 현도관을 향해 돌아갔다.
일양자는 양몽환과 함께 채방의 시체를 화장한 후 뼈를 추려
항아리에 넣어 묻고 비를 세웠다.
<곤륜파 일양자 입문제자 채방지묘(崑崙派一陽子入門弟子蔡邦雄之墓)>
큰 글씨로 열다섯 자의 비문을 써서 세웠다.
채방을 묻고 묘비까지 세웠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밝은 달이
동녘 하늘에 떠올라 복숭아나무를 고요히 비치고 있었다.
시체를 묻고 돌아오는 길에 밝은 달을 쳐다보는 일양자의 마음은 한없이 쓸쓸하고 울적했다.
더구나 이미 지나버린 수 십 년 전 옛일이 떠올라 지워버릴 수 없을 만큼
일양자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일양자는 실의(失意)의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환아야! 지금 묻은 시체는 일시적인 실수로 곤륜파 문하의
규율을 범하여 곤륜파에서는 그를 영원히 추방해 버렸었지.
그 후 채방웅은 세 번씩이나 피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문하에 들어 올 것을 애원했다.
어떠한 고행과 난관을 부여해 준다 해도 감수하겠다고 맹세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농담으로
<만일 네가 이 무술계에서 진귀한 보배로 여기는 장진도를 찾아온다면
모르거니와 그 전에는 평생에 돌아와 입적할 생각 말라!>
했는데 채방은 내 말을 진심으로 들었던 모양이다.
그 후 채방웅은 이십년 동안이나 사방으로 헤매면서 장진도를 찾아다닌 모양이다.」
잠시 말을 멈춘 일양자는 추연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잠시 캄캄한 하늘을 응시하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십년 동안 헤매던 끝에 기어이 장진도를 찾아 현도관으로 돌아와
나에게 바치고 곤륜파 문하에 다시 입적하려다가 불행히도 천남쌍사의 추격을 받아
애통히 목숨을 잃었구나.」
다시 말을 멈춘 일양자는 묵묵히 들으며 따라오던 양몽환을 바라보며
「너도 장차 무공을 성취하여 무술계에 나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선량한 사람을 함부로 상해해서는 안 된다.
다만 악당들에게만은 추호의 용서 하지 말라!」
두 사제는 상심된 마음에 달빛만 한 아름 지고 밤길을 걸어 현도관으로 돌아왔다.
일양자와 양몽환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다 지쳐버린 등인대사는
이제야 돌아온 일양자 일행을 바라보고 늦은 이유라도 따지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추연하고도 침통한 얼굴을 대하고는 무슨 곡절인가
걱정스러워 도리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만큼 일양자는 비탄에 빠져 있었다.
한마디의 농담이 한 제자를 이십여 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매장할 수 있다는
이 무시무시한 죄를 일양자도 절실히 뉘우치고 있는 것이다.
방으로 들어온 일양자는 얼굴 표정도 바꾸지 않은 채 탁자에서
붉은 색을 칠한 나무상자를 꺼내 놓았다.
그리고 공손히 절을 했다.
그리고 그는 나무상자의 뚜껑을 열고 한 폭의 그림을 집어 벽에 걸었다.
양몽환은 고개를 들어 그림을 보았다.
그림은 노란색 주단에 도포를 입은 노인상(老人像)을 흰 실로 수놓은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 노인의 등에는 긴 칼을 매었는데 눈이나 코, 입에 모두 광채가 있어
흡사 실재 살아있는 노인처럼 보였다.
주위의 사람들이 그림을 보는 데만 여념이 없는 조용한 시각을 가르며
이윽고 일양자의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환아야! 어서 조사유상에 참배하고 곤륜파의 진산검법을 물려받아라!」
하는 소리가 떨어지자 등인대사는 재빨리 벽의 그림을 향하여
합장하고 절을 한 후, 하림을 데리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양몽환이 조상을 향하여 삼배구례(三拜九禮)를 마치자 일양자는
그림을 차곡차곡 개어 공손히 나무상자에 넣고 정중한 목소리로,
「무술계에서는 곤륜판의 분광검법이 아흔여섯 수뿐인 줄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백 팔 수가 있는데 그 가운데 열두 수가 검술(劍術)의
가장 정화(精華)이니 그를 말해 추혼십이검(追魂十二劍)이라 부른다.
그 변화는 신기하고도 무상하다.
원래 너의 두 사숙(師叔)과 약속이 되어 있어 세 사람이 합의 돼야만
제자에게 이 살인적인 수법을 가르쳐 주게 되어 있다.
그러나 전례(前例)를 깨뜨리고 너로 하여금 사조(師祖)의 유상(遺像)을
참배케 하고 추혼십이검을 너에게 계승시키도록 결심했다.
그러한즉 나는 내일부터 매일 너에게 추혼십이검을 한 수 씩 가르쳐 주겠다.」
하고는 길게 한숨을 몰아쉰 후
「지금 나가서 등인대사 사백님을 모져 오너라.
그리고 오늘 밤은 달도 밝구나. 하림과 무술이나 연마하거라.
방에 들어 와도 좋다고 할 때 까지.」
일양자의 말을 듣고 밖으로 나오며 양몽환은 오늘 사부님이 평소보다
다른 점이 많아 이상하게 여겼으나 채방웅의 죽음 때문이리라 생각하며 밖으로 나왔다.
한편 밖에서는 하림을 상대로 등인대사는 열심히 무술을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양몽환은 얼마 동안 등인대사와 백의소녀의 무술 연습을 구경하다 쉬는 틈을 이용하여
「사부님께서 등인대사님을 뵈옵겠다는 전갈이십니다.」
「음! 그래…… 그럼 그만 할까.」
백의소녀와 양몽환을 번갈아보며 등인대사는 가벼운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등인대사를 상대로 무술을 연습하던 백의 소녀는 늘 사모하는
청의 소년 양몽환과 무술을 연습하게 되었다.
백의 소녀는 다만 기쁘고 즐겁기만 했다.
서로 손바람을 내어 바람이 부딪칠 때마다 시선도 마주 부딪쳤다.
등인대사는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나 일양자는 그때 까지도 구슬함에 담겨있는 흰 손수건의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고 화로에서는 향이 피어올라 방안 가득히 향내가 진동하였다.
그리고 탁자 위의 붉게 타는 두 개의 초(燭)는 낮같이 방안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등인대사는 서서히 일양자 옆으로 가까이 다가가 가만히 그림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그 수건의 그림 위에는 퇴색한 <장진도(藏眞圖)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萬功歸秘元(만공귀비원), 一劍神州寒(일검신주한), 蒼松篩明月(창송사명월 ),
石山流淸泉(석산유청천)이라 써 있었다.
그리고 그 글자가 쓰여 있는 아래로 산봉우리가 험준한 계곡을사이로 그려져 있는가 하면
맨 끝의 산봉우리에 소나무 숲이 우거진 중에서도 유달리 크게 돌출한 큰 소나무가 우산처럼
가지를 펼치고 서 있었다.
밝은 달빛아래 소나무 밑은 별을 산산이 부셔 땅에 깔아 놓은듯한데 그 밑으로 한줄기 밝은
시냇물이 계곡을 흘러 깊은 웅덩이로 모이는 그림이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일양자는 그림에서 눈을 돌려 등인대사를 돌아보며
「등인대사! 여기 있는 이 한 폭의 그림으로 말한다면 우리 무술계의 무수한 인물들이
생명을 걸고 노리는 가장 진귀하고도 값진 보물이오. 수 백 년이래 이 그림을 얻고자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목숨을 버리며 찾아 헤매는지 그 수는 정말 부지기수
그만큼 귀중한 보물을 나는 이제 채방웅이라는 제자의 목숨과 바꾸겠소.」
침울한 표정으로 사유를 이야기하던 일양자는
또다시 채방웅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등인대사는 조용한 음성으로
「그 거한이 채방웅이오니까? 애도를 금치 못하오.
그러나 저는 무술계에서 장진도와 귀원비급에 대한 신비한 전설을
약간 듣기는 하였으나 낭설이 아니면 유언이리라 하여 믿지는 않았소이다.
그러나 곤륜파의 세 장로들은 무술계에서 명장일 뿐 아니라
수십 년 동안 명성을 떨치고 있는 박식한 고수들로서 장진도의 진상을
알고 있으리라 믿소이다. 이제 상세한 말씀을 들려주시면 좋겠소이다.」
일양자는 가볍게 탄식하며
「좋소이다. 먼저 귀원비급으로 말하자면 지금으로부터 삼백년 전
두 기인(二奇人)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소.
이 두 기인 중에 천기진인(天機眞人)이라는 한 분은 귀의삼보(歸依三寶)했으며
삼음신니(三音神尾)는 도를 닦으려고 불문(佛門)으로 들어가 버렸소.
두 분은 모두 절세적인 무공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당대에는
어떠한 무술인이라도 감히 대적할 사람이 없었소.
그리하여 내외공(內外功)이 신화(神化)했었죠.
그러던 차 당시 무술계에 많은 각 문파 중에서도 소림(少林),무당(武當),
두 파의 무술이 가장 강할 뿐 아니라 제자도 많았소이다.
그 다음으로 화산(華山), 곤륜(崑崙), 점창(點蒼), 공동(??), 운산(雲山),
청성(靑城), 아미(峨嵋) 등 일곱 파가 다음을 차지했고 기타의 문파는
비록 독특한 무공이 있어도 위 아홉 문파와는 대적할 수 없는 형편이었소.
그 당시 아홉 파에서는 모두 똑똑하고 용감한 귀재만을 골라
자기 문하의 제자로 양성하였으므로 중국 무술계의 가장 흥성시기(興盛時期)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소.
그리고는 이 아홉 파의 정종(正宗)들은 제각기 자기가 정통의 문파임을 자처하다
결국은 중악 소실봉(中嶽少室峯)이라는 정상(頂上)에서 서로 검술을 겨누기로
합의하고 각 문파는 여기서 무술계의 패권을 결정하기로 했소이다.」
잠시 말을 멈추었던 일양자는 다시 음성을 낮추어 말을 계속했다.
「당대의 영웅들이라고 자처하는 각파의 고수들은 누구나 막론하고
소실봉(少室峯)에서 일전을 불사하여 자기파의 패권 장악을 노리기로 하고 모여 들었소.
그래서 무술이 쟁쟁한 고수들은 생사를 걸고 겨루며 서로 불을 뿜는 싸움이 시작 되었는데
대결한지 칠일 만에 화산, 점창, 공동, 운산의 네 문파는 여지없이 패배하여 물러나고
소림, 무당, 곤륜, 청송, 아미 등 다섯 파만이 다시 대결하기로 되었소.
그러나 칠일 동안이나 무술로 대결한 이들 다섯 파의 고수들은
그중 어느 파의 고수라도 패배하여 죽는다면 그 파는 물론 무술의 한 가지
비법도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소.
그래서 싸움을 주저하기는 하였으나 아직 패권이 어느 편에도 장악되지 않았으므로
결말을 내려고 다시 싸우기도 하였죠.」
일양자가 잠시 말을 멈춘 사이 등인대사는 결투의 결과를 속히 듣고 싶어
그 다음을 재촉했다.
「그래서 어느 파가 이겼습니까?」
일양자는 웃으며,
「허, 허……그 다음이 아주 묘하게 되었소.
만일 그때 승부가나서 고수 몇 사람이 죽고 부분적인 무술이
없어졌더라면 태평세월을 누릴 것을……」
「어찌되었소이까?」
「글쎄, 고수들이 다시 싸우려는 바로 그 때 먼저 말한 두 분의 기인(奇人)중의
한분인 천기진인(天機眞人)이 갑자기 나타나 서로 화친할 것을 권했소이다.
그려. 그러나 이미 시작된 싸움이고 더구나 수 백 년을 두고 각 문파의 서열(序列)을 위해
고민해 오던 대표자들은 이 기회에 결판을 내려고 천기진인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소.
그러자 천기진인은 대노하여 다섯 파의 고수들을 상대로 도전했죠.
사태가 이렇게 되자 소림, 무당, 곤륜, 아미, 청성파의 고수들은
<천기진인이 다섯 파를 무시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고 힘을 합해 그를 공격하게 되였소.
그러나 천기진인의 무공은 상상외로 강하여 오백여 수만에 다섯 파의
고수들을 모조리 물리쳐 버렸소.
그러자 천기진인은 천하제일 가는 무협(武俠)이라는 존칭을 받게 되고
다섯 파의 패권 싸움은 좌절되고 말았지요.」
등인대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그 천기진인은 정말 훌륭한 일을 하였군요.
천기진인이 아니었다면 다섯 파의 원기(元氣)를 보류할 수 없었고
또한 오늘의 무술계가 대성황을 이를 수도 없지 않았겠습니까?」
일양자는 미소를 띠우며
「그렇소. 천기진인이 절대적인 무공으로 다섯 파를 위압하여
중도에서 해산 되었지만 다섯 파의 서열 문제는 해결 짓지 못했소.
그래서 각파에서는 무공을 적극적으로 연마하고 또 제자들을
다른 문파에 침투시켜 그 파의 비법을 훔쳐 배워 차후 두 번째의 대결에 임하려고 하였소.
그러니 각 문파에서는 이와 같이 다시 대결을 위한 준비기간 동안 제자의 선택은
특히 신중을 기하여 정통파의 자손이 아니면 안 되었고 자기파의 비밀은
절대 누설하지 못하도록 엄금하였소.
그렇게 하여 수 백 년 동안 서로 적대시하여 각 파의 대표자들은
절세적인 무술을 자기파의 제자에게 가르치려고 피나는 노력을 하였죠.
그래서 무공은 나날이 진전을 했으나 무술에 뛰어난 제자는
불과 몇 명에 지나지 못했지요 왜냐 하면 무술의 비법을 대표자들도
몇 가지 이상은 모르기 때문이었죠.」
일양자는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더구나 제자 가운데 문파를 대표할 후계자의 선택에는 엄중한 절차를 거치기 때문에
수 백 명 중에서 겨우 한 두 사람을 선출하여 조선(祖先)을 모시고 그들로 하여금
문파를 영원히 수호하겠다는 맹세를 하게한 후에야 비로소 절학(絶學)과 무공을 가르쳤지요.
수 백 년이래 대대로 그러하였으니 소실봉의 대결 이후 비록 무공은 크게 약진했다 하더라도
절학을 아는 사람은 갈수록 적어졌소.」
등인대사는 합장하고 염불을 외운 다음,
「명기(名氣)라는 두 글자가 사람을 크게 해쳤군요.」
하고 조용히 말했다.
일양자는 가볍게 탄식한 후
「우리 곤륜파로 말하면 소실봉의 대결이 있은 후,
몇 대의 장로님들이 고심과 심혈을 다해 분광검법 가운데
가장 정화인 추혼십이검(追魂十二劍)만은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죠.
그래서 지금 곤륜파에서는 나와 사제(師弟),사매(師妹) 이외는
무술계 사람들도 분광검법이 구십 육(九十六)수가 있는 줄로만 알고 있을 뿐
백 팔(百팔)수가 있다는 것은 모르며 제자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 열두 수는
우리 삼 형제가 약속한바 세 사람이 같이 모여 의논한 후 비로소 후계자에게
가르쳐 주기로 되어 있소.
그러나 지금 나는 우리 삼 형제의 약속을 어기고 추혼십이검법을
몽환에게 가르쳐 주기로 결심하였소.
몽환이는 천성이 매우 영리하며 심지(芯智)가 선량하여
십이 년 동안나의 무공을 완전히 이어 받았소.
그래서 몽환이가 추혼십이검법을 완전히 배우면
스승인 나도 더 이상 가리켜줄 것이 없을 것이요.」
그 말을 듣자 등인대사는
「물론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곤륜파 세 장로의 약속을 어기고 추혼십이검을
가르친다는 것은 좋습니다마는 장차 사매, 사제를 만나면 어떻게 말하겠소?」
그러자 일양자는 방안이 쩌렁 쩌렁 울리도록 큰 소리로 웃더니
갑자기 웃음을 멈추며 비장한 얼굴로,
「그것은 염려할 것 없소이다. 바로 이 장진도가 모두 해결해 줄 것이요.
저 소실봉의 대결에서 싸움을 진압시킨 천기진인이 그때 그들에게 차후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더 무서운 무공으로 물리치리라고 경고 했소.
그런데 결국 자신이 한 말이 화근이 되어 죽음을 초래할 줄이야 어찌 알았겠소?」
등인대사는 급히 물었다.
「그분처럼 뛰어난 무공을 지닌 분이 무슨 화근으로……」
일양자는 대답했다.
「세상이 하도 넓으니 신기한 일이 있기 마련이오.
천기진인의 무술이 스승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책에서 배운 것이지요.
또한, 그의 가문과 내력도 아는 사람이 없었지요.
그가 다섯 파를 굴복시키기 전에는 무술계에서 그의 명성을 아는 사람은 없었는데
다섯 파를 물리친 후부터 무술계에 명성이 알려졌고 그때부터 무협인들은
그를 천하에 제일가는 고수로 추대하게끔 되었소.
그러나 그 천하제일의 무공자라는 칭호가 그를 해칠 줄은 정말 몰랐소.」
등인대사는 무슨 소리인지 이상하기만 했다.
「왜 천하제일 무공자란 칭호가 그를 해쳤습니까?」
일양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무술계의 쟁쟁한 협객들은 부귀영화를 헌신짝처럼 여기고 심지어
초연적인 무아지경에서 오정육욕(五情六慾)을 모르고 있으나 공명심만은
버리질 못 하오 비록 천기진인이 맨 주먹으로 다섯 파의 고수를 굴복시켜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살상을 막아 무술계의 원기를 보존시키기는 했으나
사실 그것도 알고 보면 역시 공명심에서 행동한 것이었소.
그 후 그의 명성이 쟁쟁하게 울리자 다른 한 사람이 시기하게 되었는데
이 사람은 여자로서 불문에 귀의한 자이며 그녀의 법명을 삼음(三音)이라 불렀지요.
한 번 불문에 귀의하면 잡념 없는 무아의 지경에서 생활해야 할 것을
역시 공명심에는 눈이 어두웠소.
천기진인이 무공으로 명성을 떨친다는 소식을 들은 삼음 여승은
천리만리 길을 걸어 아미태산(阿彌泰山) 남쪽에 있는
괄창산 종운암(括蒼山?雲巖)으로 천기진인을 찾아가
일대 결투를 벌려 자웅을 정하게 되었죠.
삼음 여승도 무술에는 능통하여 가히 천기진인과 적수가 되어 맞붙었으니
그야말로 용과 호랑이의 싸움처럼 천지가 흔들리며 귀신이 놀랄 정도의 싸움이
밤낮 주야 사흘을 오천 수나 겨뤘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죠.
그래서 나흘째에는 서로 내공(內功)으로 싸운 결과 둘이 다 중상을 입고
기진맥진하여 마주보고 앉고 말았소.
그러나 이처럼 무의 무미한 싸움을 해서 서로 목숨을 잃기보다는
화해하지내기로 합의 하였죠.
그리하여 지금까지 싸우던 천기진인과 삼음 여승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는 사이에 비법을 계승시켜 줄 제자가 없음을 알고
서로의 비법을 기록하여 세 책을 만들어 괄창산에 은닉하여 두기로 하였소.
그리고 그 무공의 비법을 수록한 책을 귀원비급(歸元秘凌)이라 명명하였는데
그것은 천하의 무공이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근본은 한 줄기라는 뜻이오.
그 다음 비급이 완성되자 비급이 있는 곳을 암시해 놓은 장진도를 그려 놓았소.
그 후, 후세의 사람들이 전하는 말이 장진도는 구슬함에 넣어
그들이 싸우던 종운암에 매장한 후 그들은 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요.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삼백 년 전의 일로 오늘 날 무술계에 전하여져 각 문파에서는
서로 그 비급을 찾아낼 궁리를 하고 있었소.
그러던 이 장진도가 지금으로부터 꼭 백 년 전에 무술계의 외다리 강도 괴수가
찾아냈다가 참살을 당한 후부터는 어느 누구도 이 그림을 누가 가지고 있다는
소문만 나면 참살을 면하지 못했지요.
그 후 백 년 동안을 장진도로 해서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도 없군요.
그러던 이 장진도가 어느 누구의 손에 들어갔는지 조차 몰랐는데
채방웅이 이 그림을 찾아 나에게 바치려고 오는 길에 천남쌍사를 만난 모앙이오.
그래서 장진도를 뺏으려고 현도관까지 추격해 온 것이 틀림없는 것 같소.」
말을 마친 후 길게 한숨을 몰아쉬는 일양자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등인대사는,
「그러나 지금 장진도는 당신 손에 들어 있으니 장차 어떻게 하겠소?
물론 귀원비급을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요?」
하고 물었다.
일양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소! 제자에게 추혼십이검법을 가르친 후, 이 늙은 뼈를 괄창산에 묻을 생각이오.
지금 삼백년 내 각 파가 평화롭게 대하고 지내는 것은 모두 이 장진도의 귀원비급을
찾으려고만 하기 때문이오.
어느 문파가 귀원비급을 손에 넣기만 하면 무술계에서는 참살 소동이 날 것이오.
근래에 있어 팔비신옹 문공태(八臂神翁聞公泰)가 화산파(華山派)를 계승한 후
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날로 방대해져서 소실봉의 결투를 한 시도 있지 않고 있는데다가
천용방(天龍幇)은 이십년 동안에 강남 일대에 세력을 뻗쳐 천용방주 해천일수 이창란
(海天一?李滄欄)과 그의 부하 홍(紅), 남(藍), 황(黃), 백(白), 흑(黑)의 다섯 단주(壇主)는
원래 이미 은퇴한 풍진 인물들인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수 십 년간의 수양도 아랑 곳 없이
천용방을 조직하여 무술계에서 파벌이 없는 고수들을 모아 아홉 문파 이외에 한 파를
더 조직했으니 지금 무술계의 형세는 비록 표면에서는 풍파 없이 조용하지만 속으로는
극도로 긴장되어 있어서 제二차의 대결 날이 곧 닥쳐 올 것이요.
지금 이 귀원비급은 무술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만일 정당하지 못한
사람 손에 들어간다면 결과는 극히 비참할 것이오.
그래서 이번에 나는 부득이 괄창산에 가기로 결심했소.
물론 성공여부에 대해서는 예측할 수도 없지만.」
말을 끊고 등인대사를 한참 바라보던 일양자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일을 나 혼자의 힘으로서는 가망이 없소.
그래서 생각 끝에 당신과 함께 가고자 하오 마는 어떠한지요?」
등인대사는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고개를 숙이고 한참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이 일이 무술계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일인데 수 십여 년을 살아온 내가
지금 목숨이 아깝겠소? 다만 하림을 홀로 두고 떠날 수가 없을 따름이오.
하림은 아직 어리고 더구나 부모의 원수를 갚아야 할 몸이기에 걱정이 되오.」
하자 일양자는 웃으며 말을 받았다.
「아! 그 일이라면 벌써 생각해 놓았소.
당신만 원한다면 우리 곤륜파 문하에 입적되게끔 내가 사매 혜진자(慧眞子)에게
편지를 쓸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천남쌍사가 부상을 당해 도망갔으니 장진도 소문은 이미 누설 되 있으리라 생각하오.
그런즉, 곧 이곳을 피하지 않으면 화를 당할까 두렵소.
먼저 몽환이와 림아를 떠나보내고 그다음 우리도 떠나는 것이 어떻겠소?」
하자 등인대사는,
「좋으신 생각이오. 더구나 림아가 곤륜파 문하에 들어간다면 더한 기쁨이 없겠소이다.
그러면 노승도 기쁘게 괄창산에 뼈를 묻겠소이다. 그러면 한 가지 알려드릴 것이 있소이다.」
「무엇인지?」
「다름이 아니라 림아의 어머니가 죽을 때 피로 쓴 유서를 남겼는데
림아에게 이것을 알려 원수를 갚고자 하는 것이오.」
「음……」
「그리고 차후 림아로서 곤륜파에 지장이 있다 하더라도 노승을 꾸짖지는 말아 주시오.」
일양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러면 림아는 난의수사 심사랑(蘭衣秀士沈士郎)의 딸이 아니오?」
등인대사는 펄쩍 놀랐다.
「그러면 당신도 알고 있었소?」
일양자는 가만히 한숨을 쉬며
「십 오년 전에 심사랑 부부가 잠산(潛山)에서 참살 당한 것을 전해 들은바 있소.
그런즉 될 수 있다면 당신은 과거지사를 알리지 않는 것이 좋을까 하오
심사랑 부부를 해친 백보비발 제원동(百步飛?齋元同)은 지금
천용방내 홍기단(紅旗壇)의 괴수인 만큼 복수를 한다 해도 기회를 노려서
일을 처리함이 림아를 살리고 복수도하는 길인가 생각하오. 섣불리 알리지 맙시다.」
등인대사는 광채가 나는 눈을 번적이며
「음-. 그렇다면 이 노승이 나서서 제원동과 싸울 수밖에 없군!」
하는 것을 일양자가 미소를 띠우며 말렸다.
「그야 제원동 한 사람만이라면 모르겠소마는 천용방의 무리가 적지 않소이다.
요사이 해천일수 이창란도 근래 무술계에 돌출한 인물이요
당신도 지팡이 일격으로 사추(四醜)를 무찔렀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오.
사천성의 사추는 운남성과 귀주성 일대에서도 가장 악독한 존재이며
무당, 아미, 청성 등 세파의 제자들이 몇 번 섬멸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소.
그런데 이창란이 귀주성을 지나다 사추와 마주쳐 네 놈을 굴복시켜 천용방에
입적시켰던 일이 삼년 전에 무술계를 떠들썩하게 했소.
그런데 지금 사태로 발전한다면 천용방의 세력이 아홉 문파를 능가할 추세요.
나의 관점이 옳다면 십년 안에 무술계에서는 큰 변화가 생기고 각 문파의
쟁쟁한 고수들이 목숨을 잃을 것 같소.
그런즉 림아의 복수는 급하게 서둘지 마시오.
그렇다고 림아가 우리 곤륜파 문하에 입적하면 곤륜파의 세 장로가
그냥 보고만 있겠소?」
등인대사는 길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감사하오. 원래 나는 세상일에는 초연하려고 했었소.
그러나 한 어린 소녀의 원수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니 사람의 수행이
욕심 없는 지경까지 다다르려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또한 홍진을 피할 수 없는 사람이 어찌 이 세상의 일을 완전히 초연한다 할 수 있겠소?」
여기서 일단 말을 멈춘 등인대사는 이윽고 결심한 듯,
「그럼 지금 차양사(遮陽寺)로 가서 뒷일을 정리하고
이 노승의 뼈를 괄창산에 묻을 준비를 끝내고 사흘 후에 현도관으로 돌아와
나의 절학인 십팔나한장(十八羅漢掌)을 당신의 제자에게 가르치도록 하겠소.」
하고는 말을 끝내자
“휘익!」
일어서는가 하더니 도포 소매를 펄렁거리며 방을 나서 땅을 박찼다.
그런즉 등인대사는 마치 백학처럼 허공을 날아 사라져 버렸다.
삼일 후,
과연 등인대사는 약속대로 돌아 왔다.
그리고 그의 수중에는 선장(禪杖)이 들리워져 있었다.
그날부터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반달 동안 추혼십이검과 심팔나한장을
양몽환에게 가르쳤다.
추혼십이검술은 곤륜파에서는 가장 신비한 무술로 꼽는다.
그만큼 곤륜파의 정화(精華)이다.
그리고 하림은 이미 십팔나한장을 배웠으므로 반 달 동안
가장 바쁜 사람은 역시 양몽환 혼자였다.
낮에는 장법(掌法)을 배우고 저녁에는 검술에 열중했다.
추혼십이검법은 그것이 비록 열 두 수뿐이나 비법(秘法)이 복잡하여
반달을 통해 겨우 배우게 되었다.
한편-, 급히 괄창산으로 떠나려는 일양자는 제자의 검술이
익숙해지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떠날 준비를 마친 일양자는 양몽환과 하림을 불러 세우고
편지 두 통을 양몽환에게 주면서 말했다.
「너는 십이 년 동안 나를 따라 다니며 고생했다.
그런즉 네가 집을 떠나 온지도 십이 년이 되었구나.
이제는 집에 한 번 돌아가 부모님을 뵈올 때가 되었다.
집에 가서 부모님도 뵙고 쉬어라. 그리고 돌아 올 때에는
바로 현도관으로 오지 말고 곤륜산의 금정봉 삼청궁(金頂峯三淸官)으로 가서
이 편지 두 통을 두 사숙에게 전하여라.」
순간, 양몽환은 아득히 잊었던 고향과 부모님을 생각하고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십이 년 동안이나 조석을 같이 하고 무예를 배운 스승님 곁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얼핏 떠오르자 섭섭하고 서글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만나면 헤어지는 법이거든 어찌 요만한 일에 사나이 대장부가 눈물을 흘리느냐!
속히 눈물을 거두어라!」
하고 자상하고도 엄한 일양자 사부님의 말을 듣고 눈물을 씻었다.
이때 옆에 서 있던 등인대사는 양몽환과 나란히 서 있는 림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림아야! 일양자 사백님이 너를 불쌍히 여겨 금정봉으로 보내
곤륜파 문하에 입적해 주시겠다고 허락했으니 차후도 열심히 공부하거라!」
하고는 추연한 빛을 감출 길 없어 먼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심하림(沈霞琳)은 깜짝 놀랐다.
대사님과도 헤어져야 한다는 말인가.
하림은 귀여운 볼에 눈물을 흘리며,
「사부님께서는 림아를 버리려 하십니까?」
등인대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우며,
「어제 너를 버리겠느냐? 너를 위하는 길은 이 길 밖에 없구나.
너는 곤륜파 문하에 입적하여 네 몸과 마음을 닦아라.」
「사부님이 있는 곤륜산에 림아 혼자만 어찌 가겠습니까?」
하고 다시 울었다.
이때 일양자가 나서며,
「사형인 몽환이와 함께 가면 된다!」
그제야 하림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양몽환과 함께라면 가도 좋을 것이다.)
하림은 이렇게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하림은 안심하고 등인대사와 헤어질 뜻을 알아차리자
일양자는 등인대사에게서 흰 보자기를 받아 몽환을 주며 말했다.
「이 물건은 소중한 것이다. 필히 삼사숙(三師叔)에게 전해 드리도록 하라.」
양몽환은 보자기에 싼 물건을 소중히 받아 품안에 넣었다.
「그리고 몽환이 너는 한 달 동안만 집에서 쉬고 곧 곤륜산으로 하림과 함께 가거라.
가는 도중 하림을 잘 돌봐 주고」
양몽환은 하림과 함께 몸을 굽혀 일양자와 등인대사에게 하직을 고하고
그 길로 길을 떠났다.
언제 만난다는 기약도 없이.
양몽환과 하림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고 있던
일양자는 현도관의 모든 뒷일을 도인(道人)에게 부탁하고등인대사를 재촉하여
머나먼 괄창산의 장진도를 목표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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