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59. 고찰마영(古刹魔影)

오늘의 쉼터 2014. 6. 21. 13:31

 

59. 고찰마영(古刹魔影)

 

 

흑옥인마는 상대방을 보자 입가에 한 가닥의 냉소를 흘려 보내며 말했다.

 

"백미개선, 오늘 밤에 이곳에 나타난 목적이 무엇인가? 태도를 분명히 해 주게."

 

백미개선은 이에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 늙은 거렁뱅이는 이번 싸움을 화해시키기 위해 온 걸세."

 

두 사람의 말투로 미루어 보아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 같았다.

이 때 대지선사의 표정은 크게 변해 있었다.

앞서 흑옥인마가 이름을 밝힐 때도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개방삼로 중의 한 사람인

백미개선까지 나타나자 그는 더욱 대경실색을 금치 못한 것이다.

흑옥인마의 질문에 대꾸를 한 백미개선은 곧 위중평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늘 밤의 싸움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상세하게 얘기해 주겠느냐?"

 

백미개선이 위중평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은 왕년에 신주검성을 협공한 사람의 명단을

위중평에게 준 일이 있어 혹시 위중평이 십대 문파에게 보복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위중평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

 

"십대 문파의 장문인들은 철적왕손에게 독살을 당했는데

그들은 한사코 후배의 소행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일이 이렇게 벌어진 것입니다."

 

이어 이곳에 당도하여 목격한 모든 일을 상세하게 얘기해 주었다.

백미개선은 그의 말을 듣고 나서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번에는 대지선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건의 진상은 뻔한 것이네. 철적악손이 만약 아무런 죄도 없다면 왜 도주를 하겠는가?

노부가 보증하겠는데 위소협은 절대 그런 독수를 전개하지 않았을 것이네."

 

대지선사가 그의 말을 받기도 전에 옆에서 있는 철장진삼상이 고개를 내두르며 나섰다.

 

"노선배님이 혹시 경솔한 판단을 내린 게 아닙니까?"

 

백미개선은 당치도 않다는 듯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노부는 남의 거짓말에 현혹될 정도로 망녕은 들지 않았네.

그러니 자네들은 이곳에서 공연히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어서 흉수를 찾아 나서게.

위소협은 청허도장의 사제인데 어찌 십대 문파와 적대시할 수 있겠나?"

 

여기까지 말하더니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현재의 강호는 정의의 깃발이 쇠퇴되고 마의 불길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르고 있으니

이럴 때일수록 힘과 마음을 합치는 것이 중요하네."

 

이 때 윤앙검객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단호하게 말했다.

 

"노선배님께서 다른 분부를 하셨다면 이유없이 복종하겠지만

이번 일만큼은 멍령에 따를 수가 없습니다.

위중평을 죽이지는 않겠습니다.

모든 사실이 분명하게 밝혀질 때까지만 구속하겠습니다."

 

백미개선은 그 말을 듣자 이네 안색이 싸늘하게 변했다.

 

"좋네. 정녕 이 늙은 거렁뱅이의 만류를 듣지 않겠다면 더 이상 나서지 않겠네.

하지만 자네들은 그를 어떻게 하지 못할 걸세."

 

말을 끝내자 그는 즉시 신형을 솟구쳐 담장 위로 올랐다.

이렇게 되자 분위기는 다시 긴장되었다.

흑옥인마가 적시에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분명히 말해 두겠지만 노부가 두 번째로 출수하게 되면

그 때는 절대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강시괴인 가목

또한 홀연 앞으로 뛰쳐나와 심각하게 위중평에게 물었다.

 

"주인님, 만약 이번에 정면 충돌이 생기면 내가 출수해도 되겠소?"

 

위중평이 그의 말에 답하기도 전에 금루선연이 앞을 다투어 외 쳤다.

 

"저런 경우를 따지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사정을 봐줄 필요가 없으니

물론 출수를 해야지요."

 

위중평은 그녀의 말에 절로 눈쌀을 찌푸랐다.

만약 강시괴인과 흑옥인마가 정말 출수를 한다면 십대 문파의 사람들은

영락없이 큰 변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는 위중평으로선 일을 확대시키고 싶지 않아

대지선사 등에게 손을 모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여지껏 말한 것이 모두 사실이니 제발 믿어 주십시오.

만약 당신네들이 끝내 극단적으로 나온다면 나의 친구들도 결국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여기까지 말을 하고 나서 담장 위에 앉아 태연하게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백미개선을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여러분들도 상상할 수 있으리라 믿소.

다시 한 번 심각하게 고려해서 결정을 내려 주시오."

 

십대 문파의 사람들은 비록 숫자가 많았지만 위중평 등과 단독으로 싸워

백 초를 넘길 자신을 갖고 있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특히 흑옥인마와 강시괴인의 얼음장 같이 차가운 표정을 보자

절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한기를 느꼈다.

처음에는 백미개선이 끝까지 중간에 나서서 화해해 줄 것으로 믿고 겉으로는

당당한 태도를 취했던 것인데 백미개선이 화를 내며 물러서자

십대 문파의 사람들은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 때 어디선가 불호를 외우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 오며

이어 뚱뚱하게 생긴 화상이 한 마리 학(鶴)처럼 현장에 내려섰다.

이 뚱보화상은 우선 주위를 한 번 훑어보더니 다시 불호를 외우며 입을 열었다.

"한시도 지체할 여유 없이 사태가 다급해졌는데

자네들은 무슨 일로 이곳에 멍청하니 서 있는가?"

그는 소림의 제자들을 겨냥해 한 말이었다.

그러자 오정선사가 황급히 사람들 틈에서 뛰쳐나오며 공손히 몸을 숙여 인사했다.

 

"제자 오정이 사숙조께 인사드립니다."

 

이어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었다

뚱보화상은 그의 말을 듣고 나서 위중평을 유싱히 쳐다보더니

신색이 대번에 변하여 오정선사에게 무거운 음성으로 호통을 쳤다.

"자네는 나이도 그렇게 적지 않은데 어째서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그렇게 흐리멍텅한가?

저 소시주는 바로 화산 청허도장의 사제이며 나하고도 어깨를 나란히 하여

허무칠성을 상대한 적이 있는데 어떻게 명명주재의 편이 될 수 있는가?"

여기까지 말하고 난 그는 대지선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태가 긴박해졌으니 속히 일부분의 제자를 시켜 철적왕손의 행방을 찾게 하고

나머지는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 만반의 태세를 갖추도록 하세."

 

소림의 현존해 있는 두 장로 중에 한 사람인 그가 나서서 사건을 무마하자

감히 반대 의사를 표하는 자가 없었다.

철장진삼상 여강은 비록 속으로는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감히 겉으로 내색하지 못하고

아까 패배한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철적왕손을 추격한다는 것을 핑계삼아 곧 떠나갔다.

뚱보화상은 그제서야 흑옥인마에게 합장을 하며 예를 취했다.

 

"만약 빈승의 추측이 틀림없다면 시주는 필시 왕년에 강호에서 명성을 날렸던

남북쌍행 중에 흑옥인마 흑대협이 아니오?"

 

흑옥인마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흑옥인마임에 분명하지만 흑대협이란 칭호는 과분한 것이오.

만약 대사가 한 걸음만 늦게 당도했다면 이곳은 아마 일 장의 혈겁이 일었을 것이오.

하하하…"

 

뚱보화상은 다시 나직이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명명주재는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오."

 

위중평은 이제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돼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뚱보화상에게 공수의 예를 취했다.

"대사의 명석한 판단에 후배는 감탄을 금치 못하는 바입니다.

이번 허무대회가 끝나는대로 후배는 전력을 다해 철적왕손을 잡아 모든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밝혀 드리겠습니다."

 

말을 끝내자 일행들과 곧 떠나갔다.

위중평이 떠나자 뚱보화상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명명주재는 각파의 사람들을 상대하기 위해 이미 전력을 동원했네.

그런데 자네들은 적과 친구도 구분 못하고 이곳에서 난장판을 벌이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없네."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일이 이 정도에서 끝났으니 다행이지

만약 내가 조금만 늦게 당도해 싸움이 벌어졌다면

자네들은 아무도 요행을 바라지 못했을 것이네.

그들 중에서 가장 약한 그 소녀도 역시 옥탑무 공을 전수받아

나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장담을 할 수 없는 입장이네."

 

대지선사 등은 뚱보화상의 말을 듣자 모두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변을 당한 장문인의 시체를 간단하게 매장해 준 후 분분히 고찰을 떠났다.

한편 고찰을 떠나 일단의 거리를 달리던 금루선연이 작은 입술을 삐쭉 내밀며

못마땅한 투로 입을 열었다.

 

"그들을 혼내 주지 못하고 그대로 떠나온 것이 후회가 되는군요."

 

위중평은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들이 두려워서 피한 게 아니라 대사(大事)를 놓고 견제해 볼 때 어쩔 수가 없었소.

명명주재가 구양표묘객을 시켜 공공연하게 십대 문파의 장문인들을 살해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미 본성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것이 분명하오,

그런데 우리가 일순간의 감정에 치우쳐 십대 문파의 사람들과 충돌하게 된다면

그것은 명명주재가 바라고 있는대로 되는 것이 아니겠소?"

 

금루선연은 그의 말을 듣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 자리에서 위중평이 옳다는 것을 시인할 수 없어 눈을 곱게 흘겼다.

 

"정말 청산유수같이 이유가 많군요. 좋아요.

그 일에 대해선 더 이상 따지지 않겠어요.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죠?"

 

위중평은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무림 각파의 사람들은 이미 정식으로 명명주재에게 공세를 발출했으니

사건에 치밀한 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오.

그러니 이제 와서 우리가 공개적으로 얼굴을 나타낼 필요는 없을 것 같소."

 

흑옥인마는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강시노괴, 자네는 나와 함께 그 천하제일이라고 자처하는 역대의 흉마,

명명주재를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없나?"

 

강시괴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단지 일진의 으스스한 냉소를 터뜨릴 뿐이었다.

아마 천하 제일이라는 말이 그에게 큰 자극을 준 것 같았다.

만약 흑옥인마가 위중평을 천하제일이라고 말했다면 그는 물론 이러한 반론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것은 삼 년 동안 위중평의 시중을 들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자기 임의대로 결정을 내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위중평은 그의 마음을 케뚫어 보고 즉시 입을 열었다.

 

"만약 노선사께서 이번 일에 흥미를 느낀다면 우리 서로 갈라졌다가 허무대회가

개최되는 날 다시 만나기로 합시다."

 

흑옥인마는 그의 말이 떨어지는 즉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그것 참 좋은 생각이오,

강시노괴, 젊은 사람들끼리 시간을 갖고 싶어하는 것 같으니

우리 늙은이들은 어서 자리를 뜨세. 하하하…"

 

그의 호탕한 웃음 소리는 아직도 허공에서 메아리치고 있었으나

솟구친 신형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졌다.

곧이어 강시노괴도 허공에 한 줄기 붉은 곡선을 그리며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금루선연은 그들이 떠나가자 손으로 입을 가리며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생각했던 것보다 굉장히 풍취가 있는 사람이군요.

그들이 일단 당신 곁에서 떠났으니 이제 명명주재는 적잖은 골치를 앓게 되었…"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위중평은 갑자기 싸늘하게 외치며

몸을 솟구쳐 좌측에 있는 숲 속으로 덮쳐갔다.

그와 동시에 숲 속에선 호탕한 웃음 소리가 들리더니

한 줄기의 인영이 뛰쳐나와 위중평에게 공수의 예를 취했다.

 

"소협, 오해 마시오. 노부는 신투 곡비운이오."

 

곡비운은 바로 광인거(狂人居)에서 마영고루에게 부상을 입어

이미 강호에서 은퇴한 오성(五省)녹림의 총두목이었다.

위중평은 즉시 답례를 하며 말했다.

 

"곡대협이었군요. 그런데 야밤중에 무슨 일로…"

 

곡비운은 대답을 하기 앞서 우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소협에게 한 가지 기밀을 알려 주기 위해 왔소…"

 

위중평은 그의 심각한 표정을 보자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다그치듯 물었다.

 

"대관절 무슨 기밀이오? 혹시 명명주재가 또 무슨 흉계를 꾸민 것이 아니오?"

 

그러더니 냉소를 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허무궁의 몇몇 마졸(魔卒)들로는 이 위중평을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것이오."

 

그러자 곡비운의 안색이 심각하게 변했다.

 

"소협, 이번 허무대회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지 마시오.

명명주재는 이번 대회를 기해 각 문파의 고수들을 일망타진할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소.

동시에 십삼표묘객으로 하여금 전적으로 소협을 상대케 할 작정이오.

노부는 왕년에 자선선배에게 입은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소협에게 모든 사실을 통지하는 것이오.

부디 그들의 허무표묘진법(虛無漂渺陣法)을 조심하시오."

 

위중평은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다시 정중하게 말했다.

 

"곡대협의 뜻에 우선 감사를 드리겠소.

그런데 곡대협은 다시 허무궁으로 돌아갈 생각이오?

아니면 다른 계획이 있소?"

 

곡비운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노부는 오래 전부터 허무궁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써왔지만

이 넓은 세상에는 뜻밖에도 내가 발 붙일 만한 곳이 없구려."

 

위중평은 그의 말을 듣자 무슨 묘안이 떠오른 듯 눈빛을 발했다.

 

"그 일로 고민한다면 아주 간단한 해결책이 있소.

만약 언짢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분간이마나 장백산 백산목장에서 기거하시는 게 어떻겠소?"

곡비운은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해 보더니 홀연 공수의 예를 취했다.

 

"그 뜻은 고맙게 받아 드리겠소. 그럼 이만…"

 

위중평은 애당초 십삼표묘객을 안중에 두지 않았지만 곡비운의 심각한 태도를 보자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금루선연에게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명명주재가 어떠한 수단을 동원하든

우리는 일단 허무궁로 잠입해 들어가 동태를 살피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금루선연은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대뜸 참새처럼 펄쩍 뛰며 맞장구를 쳤다.

 

"정말 잘 생각했어요. 아직 시간이 이르니

우선 조용한 객잔을 찾아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날이 어두워지면 출발하도록 해요."

이어 두 사람은 나란히 몸을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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