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57. 구출

오늘의 쉼터 2014. 6. 21. 12:57

 

57. 구출

 

 

위중평으로서는 평생을 두고 다시 없는 강적을 만난 셈이었다.

동시에 이궁 주인의 드높은 위맹에 압도되어 진퇴 공수하면서도

더욱더 조심하고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절대로 현구보록만은 사용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하여 매 초마다 정진하였으나 횟수가 거듭될수록

그들의 동작은 민첩하여 이젠 인영마저도 분간키 어려울 형편이었다.

금루선연은 옥탑단장인의 진전을 받았으면서도 이번 격투에서는

두 사람의 초식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두어 시진 동안 각각 오백여 초를 격출해 냈다.

가목선사는 백여 년 동안의 무학으로도 결코 이런 애송이 하나 당해 내지 못함을 생각하자

초식이 많이 둔화되었으며 출초도 눈에 보이게 줄어 들었다.

두 사람은 이제까지 익힌 초식이 아마 이제 바닥이 난 모양인지

일 초를 격출할 때마다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초식마다 오묘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그들은 무공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서로 지혜와 상상력을 동원해

상대방을 위압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위중평은 칠품선란실을 복용한 덕분에 금방 다른 초식을 내 놓았지만 가목선사는

꼭 두 배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가목선사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돌연 괴성을 질렀다.

"조심하시오, 마지막 일 권을 내겠소!"

별안간 허공으로 몸을 올리더니 손발 할 것 없이 온 전신을 이용해 돌격해 왔다.

그러나 위중평은 크게 웃고만 있었다.

"하하, 그런 건 나도 할 줄 안다오."

그는 황도에서 배운 몇 가지의 이상한 초식을 전개했다.

양측이 모두 똑같은 초식이라서 각기의 내공 수위를 따져 보아야만 겨우 알 수가 있었다.

가목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아무리 네가 나의 초식을 본따서 배웠다고는 하지만 절대 나의 내력 수위를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마치 하늘을 선회하는 큰 새처럼 공중에서 한 차례 푸드득거리고는

한 모금씩 들이마신 진기의 효과가 없어지자 맥없이 급강하했다.

그 때 위중평이 고함을 쳤다.

"아직도 나에겐 사용치 않은 공력이 얼마든지 있소!"

일순 예리한 바람을 폭사하며 그는 팔구통천지공을 운기하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눈을 부시게 하는 가운데 가목은 꼿꼿한 걸음걸이에 갑자기 힘이 빠지자

뒷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위중평은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서 큰소리로 호령했다.

 

"이것 보시오! 우린 이런 상태로는 절대 승부를 가릴 수 없을 것 같으니

다음 기회에 다시 만나기로 합시다."

 

가목선사는 무표정한 얼굴에 진한 경련을 일으키더니 돌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와황금검이 또 한 번 이궁의 사람에게 졌구나."

 

위중평은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린 아직 승부가 나지 않았잖소?"

 

가목이 별안간 옷소매를 높이 휘두르자

그의 옷소매엔 어느새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질 않은가?

이런 솔직함에 위중평과 금루선연은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금루선연이 별안간 크게 외쳤다.

 

"노선사님,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이 검은 제가 빌려 갔다고만 생각하세요.

나의 복수가 끝나는 날 틀림없이 장변 발룡사로 돌려 들리겠습니다.

그러면 되겠죠?"

 

그러나 가목선사는 한 치의 호전됨이 없이 여전히 무표정한 채

그 자리에 굳어 버린 듯 서 있기만 하였다.

위중평은 가목선사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위중평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혜매, 갑시다."

 

세 사람이 한참이나 앞을 향해 걷는데 문득 강시괴인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주인님! 앞에서 누군가가 싸우고 있는데 그쪽으로 가볼까요?"

 

위중평의 청력도 결코 가목보다 못하진 않았다.

단지 수많은 문제들이 그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기에 다른 곳에 정신을 쓸 여유가 없었을 뿐이었다.

과연 앞에서는 두 사람의 고수가 전력을 다해 승부를 겨루고 있었다.

위중평은 금루선연의 손을 낚아채며 말했다.

 

"우리 빨리 가서 알아봅시다."

 

그들이 이삼십 장 정도의 숲을 빠져 나왔을 때였다.

 

돌연-.

 

한 사람의 괴성이 들렸다.

 

"오늘 너희들에게 자오이화신공(子午離火神功)으로는 평생동안

이 깜둥이를 잡아둘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지."

 

위중평은 깜짝 놀랐다.

 

'그는 늙은 친구 흑옥인마가 아닌가?'

 

그는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가 흑옥인마임을 확인하였다.

혹옥인마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하늘로 치솟아 있었고

살기 등등하게 와도지왕과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다.

동사삼룡 중 두 명은 부상을 입고 땅에 누운 채 호흡을 조절하고 있었다.

위중평은 너무나 황급한 나머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였다.

어느 한쪽을 불러 정신을 흐트리게 한다면 그쪽은 필시 크나큰 피해를 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위중평이 천천히 그들에게 걸어가 말을 붙이려 할 때 갑자기 흑옥인마가 괴성을 토해 냈다.

 

"이봐, 다시 이 깜둥이의 일 장을 받아보는 게 어때?"

 

이어 두 손으로 공중에다 활모양의 반원을 하나 그리고는 천천히 앞으로 밀고 나갔다.

와도지왕도 두 눈을 부릅뜨고 맹렬하게 쌍장을 내놓으며 폭갈을 터뜨렸다.

 

"열 장이면 또 어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네 개의 손이 맞닿자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선 채 내력으로 맞서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각자의 진원을 운공해서라도 상대를 억압하려 했다.

두 사람의 이마에는 점차 구슬같은 땅방울이 솟았고

한 겹의 안개같이 몽롱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위중평이 한 발 늦은 바람에 두 늙은 친구들은 더욱 말리기가 어려워졌다.

이렇게 내력으로 대결할 때는 어느 한쪽이라도 추호의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 때 가목선사와 금루선연이 현장에 도착하였다.

위중평에게 번득하며 머리를 스치는 하나의 생각이 있었다.

 

"노선사님! 우리 두 사람이 합력을 하여 저 사람들을 떼어 놓읍시다."

 

가목은 두 사람의 얼굴을 차례로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떡거리더니

홍포를 번득이며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위중평이 신공을 살며시 운기하자 한 줄기의 자주빛 기체가 아물아물 피어 올랐다.

그 때 가목은 갑자기 귀가 따가울 정도의 소리를 질렀다.

 

"조심들 하시오!"

 

그가 두 손을 좌우로 벌리자 싸움을 하던 사람이 하늘로 붕 뜨더니

각각 쥐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이어 꽈르릉 하고 두 줄기의 잠력이 일제히 위중평이 피어낸 자주빛 기체가 있는 곳으로 떨어졌다.

가목의 이러한 방법은 번개처럼 민첩하고도 쌍방에겐 추호의 피해도 주지 않은 것이라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진원 내력을 너무 많이 사용하여 땅에 내려서자 각기 운기조식하기에 급급하며

누구 하나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위중평은 품 속에서 용호구환단(龍虎九丸丹)을 꺼내 두 사람에게 한 알씩을 나눠먹였다.

때문에 얼마 동안을 지나자 두 사람은 소모했던 진력을 회복하여 다시 손을 털며 일어섰다.

흑옥인마는 위중평의 어깨를 치며 크게 웃었다.

 

"동생, 몇 달 동안 못 보았더니 더 많이 증진되었군.

두 알의 설연자(雪蓮子)와 반 년 간의 두문불출로 이렇게 큰 공력의 성장은 기대할 수 없어."

 

그와 와도지왕은 일갑자(一甲子) 이상의 내공을 구비하고 있었다.

비록 많이 소모되었지만 두 사람의 내력을 합치면 그 힘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런데 위중평이 그들 사이에 끼어서 일 장을 맞고도 끄덕도 하지 않으니

흑옥인마가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위중평은 칠품선란실을 복용했다는 소리를 즉석에서 하지 않고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이 때 와도지왕도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곁으로 다가왔다.

 

"노부도 섬에서 한 달 동안이나 기다렸는데 알고 보니 헛수고를 했구먼…"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심히 책망하는 눈치였다.

위중평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후배, 그곳에 가려고 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석비라는 사람을 만나 하마터면 황천객이 될 뻔하였답니다."

 

이어서 위중평은 쾌속정에서 중독된 경과를 얘기하고

또 방금 전에 은의소녀를 만나 오해가 생긴 것도 모두 얘기해 주었다.

와도지왕은 그 얘기를 듣더니 화를 벌컥 내었으나 일개 섬의 주인답게

그 자리에서는 책망하지 않았다. 단지 담담하게 웃어 넘길 뿐이었다.

 

"그렇다면 노부가 잘못 생각하였군.

훗날 다시 기회가 생긴다면 언제든지 와도에 찾아 오게."

 

이렇게 말한 그는 동사삼룡을 데리고 숲 속으로 사라졌다.

흑옥인마는 그 네 사람이 떠난 후 한참이나 있다가 갑자기 광소를 터뜨렸다.

 

"노부는 오늘로 해서 기쁨을 반쯤이나 맛보았군."

 

위중평은 그가 웃음을 그치자 급히 물었다.

 

"노형! 어디로 가실 생각이오."

 

흑옥인마는 다시 한 차례 웃었다.

 

"온 천하가 다 나의 집인데 일정한 거처가 있겠나?

만약 아우에게 무슨 일이 있을면 내 서슴지 않고 대신해 주겠네."

 

"중원 각 문파들이 허무전에 가서 명명주재에게 따지려 하고 있습니다.

나도 이번에 가서 만약 기회가 생긴다면 명명주재와 한 번 겨루어 보고 싶소만…"

 

"그것 좋지! 노부도 아우와 함께 가서 그 명명주재라는 작자와 한 번 겨루어 보겠네."

 

이렇게 하여 이들은 다시 발길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부드러운 미풍은 뺨을 간지럽게 하였고 제비들도 강남에서 날아온다는

춘삼월의 대지는 봄기운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울긋불긋한 강남의 넓은 들판엔 명승지를 찾아 하루를 즐기려는

팔자좋은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고 모두가 다 구류삼교(九流三敎)인 험상궂고

살기가 감도는 강호인들 뿐이 아닌가.

더욱이 신색이 잔뜩이나 긴장되어 있었으며 먼 여로에 지쳐 있는 듯했다.

필시 강호에 무슨 일이 움트고 있음을 의식케 하는 분위기였다.

그렇다. 수백 년 동안 무림은 지금처럼 무질서하고 긴장된 적은 없었다.

중원 십대 문파의 장문인 등이 납치당한 뒤에 근 반 년 동안이나 아무런 소식이 없는 처지였고

또 무당파는 멸문의 참화를 당하고서도 근 반 년이 넘도록 어떠한 방책도 강구함이 없었다.

금루선연, 흑옥인마, 강시괴인 가목과 함께 계속 남쪽을 향해 내려온 위중평은

이러한 분위기에 새삼 십대 장문인들이 납치당했던 사건이 생각되었다.

'십대 문파의 장문인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닌데 어찌 납치되었을까

그리고 벌써 반 년이나 지났는데 왜 아무런 소식도 없을까?

명명주재가 장문인들을 납치해 간 이유는 진정 무엇일까?'

무림의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바삐 행동하는 것을 보자 위중평은 무엇인가

모의되고 있음을 인실하고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렇게 되면 허무전에 가서 명명주재에게 그 연유를 따지고 물을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닐 듯싶었다.

명명주재의 공력이 웅후함은 이미 온 천하가 다 알고 있는 터지만

모든 각파도 철저한 준비를 하였을 것이니 허무전에서의 상황이 상당히 궁금하였다.

이렇게 이것 저것을 생각하다 보니 자연히 걸음걸이가 늦어지고 말았다.

그들 일행 중 가목선사는 온종일 말 한 마디 없는 상태였으며

흑옥인마도 별로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 별 말이 없었다.

그러나 금루선연은 하루종일 지껄여대다가 위중평이 한참이나

그녀의 얘기에 신경을 쓰지 않자 그녀는 몹시 심심한 듯 위중평을 툭 치면서 말했다.

 

"이것 봐요! 혼자서 뭘 그렇게 사색에 잠기세요. 누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나요?"

 

위중평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십대 문파의 장문인들을 도대체 어디다가 숨겨 놓았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소."

 

"좋아요. 그것 재미있겠는데?

우리 어디 한 번 돌아다니면서 찾아보도록 해요.

그냥 길만 걷자니 흥미가 없어요."

 

금루선연은 세상이 뒤집히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사람이라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흑옥인마도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나섰다.

 

"그저 길만 걸을 것이 아니라 그들을 숨길 만한 곳을 모조리 구경삼아 뒤져 보세."

 

금루선연이 말을 받았다.

"흑노선배님의 말씀이 옳아요.

우리 네 사람이 각기 흩어져서 수색하는 것이 좋겠어요.

그래서 약속한 장소로 모이면 되지 않아요?"

 

그 의견에 따라 즉시 네 사람은 산 속으로 갈라졌다.

어언 사흘이 지났다.

네 사람은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고 백환경에 들어서고 있었다.

위중평은 사방을 수색하고 나가다가 산기슭에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사당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위중평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곳에 저런 사원이 있다니 좀 수상한 데가 있는데…'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돌연-.

 

하나의 인영이 이 사원을 향해 날쌔게 달려가더니 금방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것을 보아서도 이 사원 안에는 무엇인가 비밀이 존재하고 있음을 짐작케 하였다.

사원은 오랫동안 비워 두었는지 아주 조용했으며 대웅전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고

몇 개의 불상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아까 한 인영이 이곳으로 들어간 일이 없었다면 이 절에 사람이 살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대웅전을 지나 정원에 이르렀다.

한데 의외에도 정원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고 두 그루의 고목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정원을 지나자 하나의 동문이 나타났다.

동문에 들어서자 희미한 불빛이 저편의 정사에서 비춰 나오고 있었다.

이 정사는 후원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어 외부의 인사는 좀체로 찾아내기가 힘들게 되어 있었다.

즉시 신형을 날려 고목에 올라 정사의 형편을 살펴보니

그곳에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 사람은 일월성진의 장포를 입은 얼굴이 붉은 늙은이었는데

바로 십삼표묘객의 구양표묘객이었다.

구양과 마주 앉아 있는 사람은 나이가 오십쯤 되어 보이는

몸집이 아주 큰 도장이었는데 삼각형으로 생긴 눈의 눈빛이 사나워

얼른 보기조차 징그러웠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 이십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젊은 도사가 서 있는데

그 도사의 얼굴은 상당이 낯익은 데가 있었으나 누구인지는 좀체로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 때 구양표묘객이 언성을 높여 말했다.

 

"그 열 놈의 장문인이 승낙을 하더냐? 만약 오늘 밤까지 무슨 결정이 나지 않으면

모두 다 요리해 버리고 그들이 지니고 있는 보물들을 빼앗아야 하겠다.

명명주재가 급히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위중평은 정신이 아찔하였다. 반대도인(反大道人)이 공손하게 말했다.

 

"이 일은 나도 무척 신경을 써왔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썼으나

그 열 놈의 영감장이가 고집을 피우고 있으니

저도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구양은 젊은 도사를 향해 말했다.

 

"넌 석뢰에 가서 최후의 경고를 하고 오너라.

만약 그래도 승낙하지 않는다면 이 도승의 만납흡수를 맛보여 주겠다고 일러라.

알겠느냐?"

 

젊은 도사는 공손히 대답하고 몸을 움직여 떠났다.

위중평은 이 때가 십대 장문인을 구할 수 있는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하고는

경공을 전개해 소도사의 뒤를 따라갔다.

그 때 소도사가 손을 들어 둥그런 기둥을 두 번 만지자 가운데 있던 석상이 이동되며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소도사의 뒤를 따르며 위중평은 속으로 생각하였다.

 

'호랑이 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라 하였으니 모험을 하는 수밖에…'

 

굴은 비스듬이 뚫려 있었고 통로를 지나자 바로 넓은 지하실이 나타났다.

안에는 커다란 횃불의 희끄므레한 불빛이 사방을 음산하게 비추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십대 장문들은 모두 얼굴과 전신이 상처투성이었으며

손목이 쇠사슬에 뚫린 채로 열 개의 철기둥에 묶여 있었다.

그것을 본 위중평은 등줄기에 벌레가 지나가는 듯한 오싹함을 느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그는 명명주재가 악랄한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돌연 소도사가 놀란 듯이 소리쳤다.

 

"여러 노사부님! 큰일났습니다.

명명주재가 구양표묘객을 사내에 보내 오늘 밤까지 승낙하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답니다."

 

그러나 십대 장문인의 반응은 정말 생각밖이었다.

공동파의 신루과객이 참담하게 웃었다.

"우리들의 무예가 못나서 사문을 욕되게 하였으니 백 번 죽는다 해도 마땅한 일이다.

다시 조상을 팔아 먹는 그런 일은 진정 꿈도 꾸지 말라고 하여라."

 

이어 소림의 오인장로가 염불을 외웠다.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일찌감치 부처님의 곁으로 가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겠소. 하하하…"

 

그 웃음 소리에는 말못할 울분이 가득하였다.

 

"사부님들, 염려치 마시오. 제자가 여기에 있는 한, 그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는 손에 가득 술을 부어 그들의 앞에 밀어대면서 말했다.

 

"적미 그놈이 나더러 독수를 준비하여 사부님들을 독살시키라 하였는데

제가 벌써 손을 써서 그들이 독수를 마시게 하였답니다. 헤… 헤."

 

오 인은 원래 술을 마시지 않으나 소도사가 정중히 갖다대는 잔이라

차마 사양하지 못하고 단숨에 들이켰다.

오인이 마신 후에 아홉 사람도 차례로 한 잔씩 모두 마셨다.

술잔이 한 바쥐 돈 후에 소도사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구양표묘객의 무공은 천하 무적인데 만약

그것이 약을 탄 술이란 것을 알게 되면 제가 어렵게 됩니다.

그들의 말을 빌자면 여러 사부님들을 살해하고는

여러분이 몸에 지니고 있는 신표를 빼앗을 계획인 모양이었습니다."

"그 점을 우리들이 미리 생각하고 너에게 맡긴 것이다.

우리들의 신물이니 고이 간직하도록 해라.

우리가 만약 화를 당한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헛수고를 시키고 말이다."

소도사는 그 말을 듣고 얼굴에 즉시 기쁜 빛을 띠더니 금세 다시 슬픈 빛으로 변했다.

"사부님께 만에 하나라도 불행이 생긴다면 저는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그 신물들을 각파에 돌려 보내겠습니다."

 

곤륜파의 적송자가 갑자기 눈을 떴다.

 

"우리 열 사람이 일신의 절기를 모두 너에게 전수해 주었으니

네가 십가지장의 신분이나 별 다름이 없다. 빈도들이 한 모금의 숨이라도 남아 있을 때

무슨 의문이 있으면 물어 보아라.

이제부터는 너 혼자서 부딪쳐 나가야 하느니라.

우리들의 소원이라면 네가 좋은 일에 모든 무공을 쓰는 일이라 하겠다.

우리들의 원수를 갚고 안 갚고는 너의 일이다."

 

소도사는 격분한 체하며 옷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사부님께선 염려 마십시오. 제자는 절대로 배은망덕한 놈이 아닙니다.

사부님의 뜻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 입구 쪽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누군가가 들어 왔다.

위중평은 놀란 토끼처럼 급히 돌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그러자 구양과 적미가 실내로 들어섰다.

적미는 삼각눈에 흉광을 번쩍이며 소도사를 노려보았다.

 

"그놈들이 승낙하더냐?"

 

이 때 신루과객이 격분한 듯 소리쳤다.

 

"적미 이놈, 꿈도 꾸지 말아라. 본 나으리들이 너희들의 원을 풀어 줄지 아느냐?"

 

적미가 음산하게 웃으며 번갯불 같은 솜씨로 신루과객의 앞으로 다가가 손가락을

연신 휘두르자 한 차례 처참한 비명과 함께 신루과객은 이마에 커다란 땀방울을 흘리면서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했다.

그렇지 않아도 초췌하고 여윈 얼굴이 더욱 가련해 보였다.

적미가 적송자 앞으로 다가가서 손을 내밀며 막 그에게 만납흡수점혈수법을 전개하려 할 때였다.

 

돌연-.

 

외마디 비명 소리가 들리더니

오인선사의 철공에서 검은 피가 솟아 나오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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