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53. 가목선사(嘉木禪師)

오늘의 쉼터 2014. 6. 21. 11:40

53. 가목선사(嘉木禪師)

 

 

가목선사는 다시 안색을 흐리며 길게 한숨을 뿜어 내었다.

 

"휴… 노승은 일시 생각을 잘못하는 바람에 그 마녀와 부부의 정을 맺게 되어

밀종파의 무공을 포기하고 그 마경을 연마하기 시작했네.

그런데 그 마경에서 제일 무서운 무공을 연마해 낼 때 갑자기 내 몸이 굳어지기 시작했다네."

 

가목선사는 흐릿한 눈빛으로 위중평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렇게 움직일 수 없다가도 매일밤 삼경만 되면 나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있네.

그러나 그 때가 되면 나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려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죽이고 만다네.

그래서 내 처인 그 마녀도 나의 이런 무분별한 행동으로 목숨을 빼앗기고 말았다네."

 

가목선사는 여기까지 말하고 목이 메이는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가목선사의 본성은 그처럼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마공을 연마했기 때문에 만약 자유를 주었다가는 함부로 날띌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위중평은 내심 그를 구해 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당신이 옛날에는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믿고 있소.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그런 힘이 없을 뿐 아니라

또 내 몸 속에 독성이 들어 있어 구해 줄 수가 없소."

 

이 말을 남기고 위중평은 상대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먼저 동굴 밖으로 나왔다.

이 때 위중평의 뒤에서 가목선사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봐, 노승은 이미 천통이(天通耳)의 초식을 연마해 내었으므로 자네가

어디에 숨어 있던 반드시 찾아낼 수 있네.

그러니 오늘 밤 삼경 무렵 노승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게."

 

위중평은 다시 밖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자신이 무슨 극독에 걸렸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석비, 그놈이 대체 내 몸에다 무슨 수작을 부렸길래 이리도 알 수 없는 것일까…'

 

위중평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석비의 이 비겁한 만행에 증오심이 들끓어 올랐다.

도대체 석비의 속셈은 무엇일까.

만약 벽요궁주 때문이라면 이미 포기하겠다고 했는데 끝까지 이럴 필요가 있을까.

위중평은 자신의 처지가 참담하고 한심스러웠다.

자신에게는 지금 천하 제일의 절세적인 무공이 있다.

그러나 중독이 된 지금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휴… 이젠 모든 것이 전부 끝난 마당이다…"

 

목적도 없이 걸음을 떼어 놓는 위중평의 코끝으로 돌연 해맑은 향기가 배어 들었다.

순간 위중평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명 무엇인가 진기한 약초의 냄새같았다.

위중평은 해독약에 대해 매우 조예가 깊었으므로 의식적으로 향기가 나는 곳으로

걸음을 떼어 놓았다.

이 해맑은 향기가 심신을 가볍게 해주는 것으로 보아 필경 영약임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위중평이 그 향기를 따라 얼마간 걸어가자

과연 높은 절벽 위에 그 키가 한 자쯤 되어 보이는 난초(蘭草)가 자라고 있었다.

난초에는 사과만한 연록색의 열매 하나가 달려 있었는데 위중평은

그 난초 잎을 세어 보다가 흥분을 금치 못하고 크게 소리쳤다.

 

"칠품선란실(七品仙蘭實)!"

 

돌연 그의 몸은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그리고…

위중평의 발 끝이 절벽에 채 닿기도 전에,

 

"휘익!"

 

하는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허공에서 한 거대한 물체가 덮쳐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위중평은 허공에서 어떻게 피할 도리가 없어 하는 수 없이 온몸의 진기를 다 끌어올려

그 검은 그림자를 향해 마주쳐 갔다.

 

"펑!"

 

폭음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그 검은 그림자는 꽥 비명을 지르며 허공으로 급급히 솟구쳐 올라갔다.

허공에서 위중평을 덮쳐온 것은 한 마리 괴조(怪鳥)였다.

괴조의 몸뚱아리는 어찌나 큰지

사람만했고 양쪽 날개는 다 펼치면 족히 이 장의 넓이는 되는 것 같았다.

괴조는 위중평의 공격에 뜻밖이라는 듯 놀라 뛰어 올랐다가 다시 허공을 한 바퀴 순회하더니

다시 덮쳐왔다.

위중평은 수중의 무흔검을 움켜쥐고 날아오는 기세를 향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효주퇴일이라는 초식으로 찬란한 검막을 그려 내었다.

괴조는 이미 일 장을 받아 보았기 때문에 위중평의 무서움을 아는 듯 급히 허공으로 올라갔다.

아마 이 괴조의 뜻은 칠품선란실에 있는지 괴조는 허공으로 솟구친 후 거대한 날개로

위중평을 향해 공격하는 한편 주둥아리로는 열매를 쪼아가는 것이었다.

이 한 그루 선란실에 위중평의 모든 생사가 달려 있다.

그런데 위중평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멈춰라! 이 건방진 놈!"

 

위중평은 대갈일성을 내지르며 연속 이검을 시전해 괴조의 날개를 후려치는 것과 동시에

왼손 바닥으로는 괴조의 긴 목을 확 내리쳤다.

그러나 괴조 역시 만만치 않았다.

긴 목을 한 번 획 돌려 피해 내더니

이번에는 한 쌍의 거대한 발톱으로 열매를 잡으러 가는 것이었다.

위중평은 다급한 나머지 영악무비한 내가 진기로 괴조의 가슴팍을 향해 후려쳤다.

그러자 괴조의 입에서는 비명 소리가 터졌고 거대무비한 몸뚱아리는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위중평은 그제야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으며 길게 한숨을 뿜어 내었다.

그러나 괴조는 몸이 막 중간까지 떨어졌을 때쯤 갑자기 날개를 퍼득여 폭풍같은 바람을 일으키더니 다시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는 것이 아닌가.

한편 위중평은 연속적으로 진기를 사용해 체내의 독성이 이미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위중평은 아까보다 더욱 무섭게 덮쳐오는 괴조의 기세를 보자 속으로 크게 소리쳤다.

'앗, 큰일났구나.

속히 저 칠품선란실을 수중에 넣지 않는다면

괴조의 날카로운 주둥아리에 목숨을 잃지 않는다 하더라도 독성에 의해 죽고 말 것이다!'

 

위중평은 눈앞이 캄캄해져 왔으나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오른손의 무흔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노실두래라는 초식으로 자신을 보호하며 왼손으로는 마영은고루를 꺼내 들었다.

괴조는 역시 무지한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튕겨나온 마영은고루를 피해내지 못하고 맞은 것이다.

 

"꽥!"

 

괴조는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위중평은 그제야 정신없이 절벽 위까지 기어 올라갔다.

떨리는 손으로 칠품선란실을 거머쥔 그는 뿌리채 뽑아 열매를 입 속으로 집어 넣었다.

순간 한 줄기 향긋한 향기가 그의 입안에서부터 목구멍 깊숙이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위중평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절벽 아래로 달려 내려왔다.

이미 칠품선란실의 약효는 벌써 위중평의 사지에 있는 백맥을 뚫고 삽입되기 시작하였다.

위중평은 이 신약의 약효가 아주 대단하다는 것을 짐작하고 즉시 운공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백맥의 유통이 완쾌되면서부터 체내에 있던 중독도 제거되었다.

죽음의 순간을 일 각,

일 각 기다리고 있던 위중평은 중독이 풀리자

그 기쁨과 함께 호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위중평은 힘껏 기지개를 펴며 소리쳤다.

 

"아… 드디어 나는 다시 살아났다.

지긍 가서 그 불쌍한 가목선사를 구해 줄까?

아니면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하나?

만약 잘못 구해 주었다가 그가 미쳐 날뛰면 더욱 큰일이 아닐까?"

위중평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본 결과 우선 그냥 내버려 두기로 결정하고는

경공신법을 전개해 즉시 섬의 구조를 살펴보았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마구 자라난 나무하며 기이한 암초와 괴석들 밖에는 없는 것을 보니

역시 이 섬은 태고적부터 고립되어 온 무인도임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위중평은 망망한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절로 초조함을 금치 못했다.

이 섬은 완전히 고립된 섬이라 다시 육지로 돌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주위는 어두워졌고 시간도 점점 삼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황량한 무인도에는 암초를 때리는 거센 파도 소리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위중평은 한 거대한 암석 위에 쭈리고 앉아 홀로 깊은 명상에 잠겼다.

하늘에서 빛나고 있는 달빛은 교교하게 대지를 비춰주고 있었고 찰랑거리는 은물결은

달빛을 받아 아름다운 정취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위중평 자신은 무인도에 갇혀 빠져 나갈 수도 없는 처지에 있으니…

위중평이 하염없는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이야압!"

 

하는 기합 소리가 그의 굇전을 때리고 들려 왔다.

이어 한 줄기 인영이 마치 폭풍같은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위중평은 움찔했다가 즉시 마음 속으로 소리쳤다.

 

'음, 가목선사인가 보구나!'

 

위중평은 거대한 암석 뒤에 몸을 숨기고 고개만 삐죽이 내민 채 동정을 살폈다.

역시 가목선사였다.

가목선사는 미친 듯 섬 사이를 왔다갔다 한참이나 펄쩍펄쩍 뛰더니

갑자기 숲 앞까지 와서는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던 그는 갑자기,

 

"끼얍!"

 

하는 괴성과 함께 수족을 내휘두르며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어 천지를 진동시키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오더니

숲 안에 있던 암석은 가루가 되어 날았고 나무는 뿌리채 뽑혀 쓰러졌다.

위중평은 마음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저것이 대체 무슨 무공이라는 말인가…'

가목선사는 한참 동안 날뛰다가 이번에는 괴소와 함께 허공으로 십여 장 높이나 솟구쳐 올랐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허공에 그대로 뜬 채로 연속 세 번씩이나

굴러 갔다 덮쳐 왔다 하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재주를 부리기도 힘이 드는데 더욱이 허공에서 마음껏 왔다갔다 하니

위중평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사실 가목선사의 이 괴이한 행동은 미친 지랄 발광이 아니라

 일종의 공중 격파술이라는 무공이다.

위중평은 이것을 깨닫자 즉시 정신을 차리고

그의 발놀림과 손놀림 등을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가목선사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허공에 뜬 채로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몸을 날리는 것이었다.

위중평은 보면 볼수록 그의 이런 행동에서 신법의 오묘함을 깊이 느꼈다.

그래서 좀더 자세히 보려는 욕심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중에 걸음을 옮겨갔다

그러나…

위중평이 채 앞으로 두 걸음도 채 내딛기 전에 가목선사는 인기척을 듣고

그대로 질풍처럼 덮쳐오는 것이었다.

가목선사는 비록 온몸이 굳어 두 다리도 빳빳하게 세워진 채였지만

그 행동만은 말할 수 없이 민첩해 한 줄기의 음산한 한풍을 밀어왔다.

위중평은 이것을 보자 급급히 최상승의 경공신법을 전개해 뒤로 다섯 발자국이나 물러났다.

하지만 위중굉이 몸을 가누기도 전에 가목선사의 공격은 벌써 닥쳐오고 있었다.

가목선사는 몸을 빳빳하게 세운 채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가는 손발을 엉성하게 움직이며

위중평의 머리 위로 덮쳐 왔다.

위중평도 칠품선란실을 먹은 후 공력이 크게 증가되었기에 주저하지 않고 조금 전에

가목선사에게 훔쳐 배운 경공신법을 전개해서 마중해 갔다.

위중평의 무학이라면 자기의 목숨보다 아끼고 좋아하는 것만큼 그 터득술도 상당했다.

그래서 가목선사의 공격을 받고서도 아무 어려움없이 대결해 나간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승부를 내기 힘든지 약 한 시진을 더 넘게 교환했다.

그 바람에 주위의 암석은 가루가 되어 날았고 나무는 송두리째 뽑혀 여기저기 마구 쓰러졌다.

문득 시간이 사경으로 접어 들었을 때였다.

 

"끼아악!"

 

가목선사가 괴성을 내지르며 자기가 달려나온 굴 속으로 허겁지겁 도망을 가는 것이다.

위중평은 그것을 보자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위중평이 그 칠품선란실을 복용하지 않았더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를 만큼 가목선사의 공력은 상당했던 것이었다.

하여튼 위중평은 이 일전으로 인해 칠품선란실의 약효를 완전히 체내의 진기와

응합시키는 데 성공했다.

위중평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조금 전에 가목선사와 싸웠던 실전을 회상하며

즉시 신법을 전개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이 동작 저 동작을 되풀이 연습했다.

잠시 후 위중평은 가목선사의 엉성하면서도 괴이한 신법을 전부 다 습득했다.

어느덧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위중평은 공중 격파술을 연마하자 가목선사가 있는 동굴로 돌아갔다.

컴컴한 동굴 안에 웅크리고 있는 가목선사의 모습을 보자

위중평은 그가 몹시 가련하게 생각되었다.

 

"선사, 당신은 어젯밤의 일을 기억하고 있소?"

 

가목선사는 흘낏 고개를 돌려 쳐다보며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어젯밤 내가 밤중에 나가 무공을 연마한 일을 두고 얘기하는 것인가?

그것은 노승이 근 백여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해온 하나의 숙제나 마찬가지라네.

그러나 그 중에 노승이 대체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통 기억할 수가 없네."

 

위중평은 길게 목을 빼고 웃었다.

 

"하하하… 선사, 그럼 내가 얘기해 드리겠소.

어젯밤 우린 한 시진이나 싸웠소.

그리고 나 위모는 당신의 그 이름도 모르는 괴이한 삼 초를 연마해 내었소."

가목선사는 그 말에 크게 놀라 고함을 질렀다.

 

"무엇이라고 자네가 나와 한 시진이나 겨루었다고?"

 

가목선사는 도저히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이십 세도 채 되어 보이지 않는 젊은이가 자신의 근 백여 년이나 되는

공력과 한 시진씩이나 겨룰 수 있었다니…

더구나 그것은 가목선사 자신이 미친 듯 무분별한 상황에 퍼 부었던 공격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젊은이의 무공은 결코 자기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결론이었다.

위중평은 가목선사의 계속 변하는 표정을 쳐다보며 묵묵히 생각을 굴리다가 물었다.

 

"선사, 내 한 마디만 묻겠소.

당신의 몸은 자유를 회복한다 해도 여전히 한밤중에 발광을 하게 되오.

만약 나중에 중원으로 들어가서도 그런다면 무고한 살생만 일어나게 될 게 아니겠소?'

 

가목선사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말했다.

 

"그 점에 대해서라면 절대 걱정하지 말게.

내가 한밤중에 미친 듯 발광하는 이유는 바로 체내의 경맥이 마공의 자극을 받아

발산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네.

그러므로 체내의 혈맥이 정상대로 회복되기만 하면

그 미친 듯한 발광도 완전히 사라지고 마네."

 

일이 이쯤 되자 위중평은 그의 체력을 최복시켜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선사의 체력을 회복시켜 주겠소.

그런데 무슨 방법으로 당신의 그 막힌 혈맥을 뚫어 주어야 하오?

내게 화삼과와 설련으로 만든 용호구환단이 있는데 그것이 도움이 될지…"

 

가목선사는 그 말을 듣자 껄껄 운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지금 자네가 말한 그 용호구환단이 정말 화삼과로 만든 것이라면

한 알만 있어도 나의 혈맥은 충분히 뚫릴 걸세."

 

이어 가목선사는 조급한 듯 급히 재촉했다.

 

"자, 어서 주게, 노승이 완쾌한 후에 약속대로 자네의 시중을 삼 년 간 들어 주겠네."

 

위중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시중은 필요없고 앞으로 영원히 악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만 해주면 되오."

 

가목선사는 길게 탄식을 내뿜었다.

 

"젊은이, 노승은 불문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인데 어찌 함부로 악한 짓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위중평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품 속에서 두 알의 용호구환단을 꺼내 가목선사의 입 속에 넣어 주었다.

 

"한 알 만으론 약효가 부족할지 모르니 두 알을 드시오."

 

용호구환단은 가목선사의 굳어 버린 몸에 아주 적합한 영약이었다.

가목선사가 용호구환단을 복용하자

얼마 있지 않아 머리 위로 희뿌연 안개 같은 것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내가 도와 주겠소."

위중평은 가목선사의 등 뒤에다 손을 갖다대고 서서히 자기의 진기를 불어 넣어 주기 시작했다.

잠시 후…

가목선사의 납덩어리 같이 창백한 얼굴에는 점차 혈기가 돌기 시작했다.

위중평은 그제야 손을 떼고 옆에 서서 지켜 보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가목선사는 천천히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가목선사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위중평을 발견하고는 공손히 입을 떼었다.

 

"소협, 구해 주어서 정말 고맙소."

 

위중평은 얼른 옆으로 비켜 서며 손을 내저었다.

 

"별말씀을…아무튼 우린 빨리 이 섬에서 빠져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하오."

 

가목선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몸을 허공으로 붕 날려서 십여 장 높이의 절벽 위로 올라갔다.

위중평은 호기가 발작해 커다란 기합을 터뜨리며 뒤따라 몸을 날렸다.

놀랍게도 위중평이 한 번 뛰어오른 기세는 십오륙 장은 족히 널었다.

위중평은 전팡석화와 같은 신법으로 가목선사의 뒤를 바싹 따랐다.

가목선사는 한 아름의 나무를 안고 와서 땅바닥에 내던지고 말했다.

"이 나무를 잘라 넝쿨로 묶는다면 아주 훌륭한 뗏목이 될 거요."

이리하여 두 사람은 뗏목을 만들어 일신의 무공으로 무사히 육지까지 돌아왔다.

육지에 도착하자 가목선사는 무엇보다 반룡사의 일이 궁금하여

절로 돌아가 본 후 다시 중원으로 돌아와 위중평을 도와 주겠다고 했다.

위중평은 결코 그의 도움을 바라고 구해준 것이 아니었기에 역시 시원하게 승낙을 하였다.

그리고 위중평은 화산으로 먼저 가서 사형인 청허도장을 만나보기로 했다.

비록 이월이었으나 북쪽의 날씨는 칼로 에이는 듯 차가웠다.

위중평은 한 필의 준마를 타고 한풍의 뼈를 깎는 듯한 추위도 아랑곳없이 북쪽으로 달렸다.

이 때 위중평의 심정은 마치 머나먼 타국에서 고향으로 되돌아 가는 듯

그렇게 기쁘고 들뜰 수가 없었다.

하기야 죽음 직전에서 살아났는데 당연하지 않는가.

이윽고 위중평은 꿈에 그리던 화산파에 도착했다.

그가 산문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여러 도사들은 대거로 밀려나와 열렬한 환영을 했다.

위중평은 이들의 환영에 정말 감격해 마지않았다.

위중평은 산문 밖으로 달려나오는 청허도장에게 다가가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사형, 오랫만입니다.

소제 돌아온다 하면서도 이렇게 늦게 찾아뵈어 정말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청허도장은 웃음을 터뜨렸다.

 

"사제, 그런 말은 말게. 지난번 자네의 세 친구가 와서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우리 화산파는 아마 명명주재에 의해 무림에서 자취를 감추었을 거네."

 

위중평은 그 말을 듣자 피식 웃으며 이렇게 물었다.

 

"사형, 세 사람이라면 혹시 젊은 도사와 한 거랭뱅이 그리고 추혼천녀가 아닙니까?"

 

"맞네. 그런데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가?"

 

위중평은 짐짓 장난스럽게 어깨를 추스리며 구걸하는 모습을 해 보였다.

 

"요즘 저는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거지 행세를 하고 다녔지요."

 

청허도장은 이 소리에 처음엔 영문을 모르고 있다가 즉시 깨닫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제 보니 그 거렁뱅이는 바로 자네가 변장한 것이었군.

그렇다면 그 젊은 도사 역시 자네 여자 친구가 변장한 것이겠지?"

 

위중평은 웃으며 사실대로 얘기를 해 주었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 받으며 대청으로 들어서니

청허도장은 위중평을 위해 특별한 연회석까지 마련하고 있었다.

두 사형과 사제는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그간의 회포를 마음껏 풀었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가자 위중평은 몹시 죄스러운 듯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사형, 노제의 힘이 미약해 본파에 아무런 공헌도 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청허도장은 위중평의 등을 두드리면서 몹시 유쾌해 했다.

 

"하하하… 사제,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지금 무림의 각대 문파는 전부가 명명주재에게 당했는데도

유독 우리 화산파만이 이렇게 자네의 혜택을 입어 건재하지 않는가?"

 

술좌석은 세 시진이 지나서야 끝났다.

위중평은 어지간히 취기가 돌자 객실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뭔가 주체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구나. 화산으로 돌아왔으면 마땅히 고향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야 할 텐데 어째서 가슴이 이처럼 두근거리는 걸까?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건 아닐까…?'

 

위중평은 더 이상 방안에 있을 수가 없어 즉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그가 밖으로 나서기 무섭게 뒷뜰에서 청허도장과 자허도장도 모습을 나타내었다.

청허도장은 달빛을 받으며 그림자처럼 서 있는 위중평을 보자

즉시 다가오며 입을 떼었다.

 

"위사제인가? 자넨 무슨 일로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는가?"

 

위중평은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 입맛을 다셨다.

 

"사형,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아주 기분이 이상합니다."

 

청허도장도 초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기분이 이상해서 나왔다네.

자, 우리 주위를 한 바퀴 산책삼아 돌아보고 나서 잠을 청하세."

 

이렇게 해서 세 사람은 제각기 한 방향씩 수색해 나섰다.

위중평이 채 몇 걸음도 옮기지 않았을 때였다.

냉랭한 코웃음이 귓전을 때리는 것이 아닌가.

위중평은 움찔해서 즉시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틀어 달려갔다.

이때 코웃음을 날린 자는 위중평의 신법이 이처럼 빠를 줄은 몰랐던지

황급히 몸을 뒤로 빼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어 위중평은 벌써 그의 앞으로 다가가 쌍장을 휘두르자,

 

"으악!"

 

하는 처절한 비명이 어두운 밤하늘을 뚫고 길게 울려 퍼졌다.

위중평이 급히 달려가 보니

쓰러진 사람은 놀랍게도 적발교의 호법 한단사신이었다.

위중평은 놀란 마음에 지풍으로 한단사신의 사혈을 찍어 내렸다.

흑도의 대마두는 이렇게 하여 어이없이 죽고 말았다

확실히 위중평의 공력은 정말 옛날과는 조금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번이나 죽을 고비에서 기연(奇緣)을 만나 그때마다 무공이 한 수씩 높아졌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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