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52. 무인도

오늘의 쉼터 2014. 6. 21. 10:49

 

52. 무인도 

 

 

 

한편-.

추혼천녀는 기절을 한 위중평을 안고 무성한 숲 속으로 들어 갔다.

그녀는 주위를 살펴 잔디가 잘 깔린 곳에 위중평을 내려 놓았다.

위중평은 진기를 많이 소모하여 기절을 했으나 추혼천녀에게 안겨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정신을 차리고 가만히 눈을 떴다.

그러고는 자기의 옆에 추혼천녀가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을 보자 길게 탄식을 내뿜었다.

추혼천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의 어깨를 가만히 흔들었다.

 

"이젠 좀 어떠세요?"

 

위중평은 그녀의 측은한 모습에 울분을 느끼고 고개를 저었다.

 

"괜찮소…"

 

위중평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후 품 속에서

한 알의 용호구환단을 꺼내 복용하고 두 눈을 감았다.

이때 추혼천녀가 위중평의 가슴에 왈칵 달려들면서 울부짖었다.

 

"위상공, 이것은 전부 다 저 때문이에요!"

 

위중평은 다시 눈을 뜨고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추혼천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더듬거렸다.

 

"위상공, 저를 증오하나요?"

 

위중평은 해맑은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두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고는 거세게 껴안았다.

 

"아… 아…"

 

어느새 추혼천녀의 얼굴에는 행복에 가득찬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추혼천녀는 이 행복함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듯

위중평의 구리빛 목을 두 팔로 꽉 껴안았다.

 

격동의 시간이 지난 얼마 후-.

 

추혼천녀는 위중평의 몸을 가볍게 밀쳐내며 입을 떼었다.

 

"위상공, 당신은 어째서 절 좋아하지 않는 건가요?"

 

위중평의 얼굴에는 깊은 고뇌로 가득찼다.

 

"내 언제 낭자를 싫어한다고 했소?

추혼… 난 다만 혜매의 그 하늘같은 은혜를 저버릴 수 없을 뿐이오.

내가 옛날 신가보에서 중의 신분으로 기거하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나를 학대하고 구박했지만 오로지 그녀만 나를 항상 돌봐주고 친 혈육처럼 따랐소…"

 

추혼천녀는 갑자기 그의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당신이 처음부터 그녀를 몰랐었다 하고 또 명명주재가 저의 아버님이 아니라면

당신은 절 어떻게 하시겠어요?"

 

위중평은 대답은 하지 않고 묵묵히 있다가 갑자기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휘어잡으며

뜨거운 포옹을 했다.

이것이 바로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추혼천녀의 두 눈에는 어느덧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이윽고-.

추혼천녀는 격동된 마음을 억누르며 위중평의 육중한 몸을 천천히 밀어내었다.

 

"이제 그만… 저는 이제야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었어요.

그러나 현재의 모든 환경은 결코 우리가 맺어질 수 있는 게 아니예요."

 

추혼천녀는 눈물젖은 시선으로 고개를 치켜 올리며 소리쳤다.

 

"위상공, 앞으로 머지 않아 당신은 저의 아버님과 생사의 일전을 겨루게 될 거예요.

그리고 저의 사부 옥탑단장인 역시 아버님을 찾아 원한을 갚겠다고 벼르고 있으니

내 입장만 난처하게 되었어요."

 

추혼천녀는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흐느꼈다.

 

"그러니 저는 정말 어떻게 하면 좋아요! 으흐흑…"

 

위중평은 그녀의 말을 순간 갑자기 온몸이 화끈거렸다.

조금 전에 복용했던 용호구환단의 약효가 발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위중평은 이런 느낌이 들자 재빨리 두 눈을 내리감고 운공조식을 했다.

 

잠시 후…

 

그가 무아지경에서 깨어났을 때엔 모든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러나 추혼천녀의 모습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다만 여인의 못다한 한을 품은 듯한 붉은 손수건만이 곱게 접혀 그의 앞에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위중평이 급히 집어서 펼쳐 보니 손수건 안에는 두 알의 명주와 한 가닥의 머리카락이 들어 있었다.

위중평이 비록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이 사실에 대해서는 너무나 명확하게 잘 알고 있었기에

일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처절하게 소리쳤다.

 

"낭자! 추혼낭자!"

 

그러나 목메어 불러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추혼천녀는 이미 이별의 표시인 붉은 손수건과 출가를 하겠다는

상징인 머리카락을 남기고 갔는데…

위중평은 콧등이 시큰해 오는 것을 느끼며 깊은 상념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추혼천녀…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현실을 도피하려는 것이다.

원수와의 사랑,

그래서 맺어질 수 없는 인연이라면 이 방법 외에 그녀에게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가련한 여인, 박봉한 여인, 얼굴이 너무나 아름다운

그녀늘 결국 출가를 하는 것으로 젊은 청춘을 불사르려는 것이었다.

그가 이러한 상념에 젖어 있을 때 돌연 숲 속에서 커다란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 낭군에게 명주를 돌려 주는 정의(情意)는 정말 자상한지고…"

 

위중평이 움찔해 급히 고개를 돌려 보니 나타난 자는 바로 구주풍인이었다.

구주풍인은 술에 취한 듯 비틀걸음으로 달려오며 소리쳤다.

 

"이놈아! 지금이 어느 땐데 여기서 멍청히 서 있느냐?"

 

위중평은 얼굴을 붉히며 추혼천녀가 출가를 하게 된 경위를 말해 주었다.

구주풍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정이 가는 듯 중얼거렸다.

 

"음, 그녀가 처한 환경에선 확실히 출가하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그러더니 다시 두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이놈아,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느냐?

네놈을 찾기 위해서 대륙의 남단에서 북단까지

그리고 북쪽에서 다시 남쪽으로 거슬러 와서야 겨우 널 찾았다."

 

구주풍인은 단숨에 여기까지 내뱉더니 갑자기 정색을 하며 소리 쳤다.

 

"이놈, 잘 들어라. 이제 네가 복수를 할 기회가 왔다!"

 

위중평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네? 아니 무슨 말입니까?"

 

구주풍인은 한 차례 광소를 터뜨려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명명주재가 무림 각파를 너무 무시한 나머지 무림의 공분을 일으키게 되었다네.

그래서 소림의 장문인 화암상인께서 은퇴한 장로 지통선사와 혜통선사를 불러와

무림 십대 문파와 상의를 해 명명주재를 제거하려고 하네."

 

구주풍인은 눈을 번득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뿐 아니라 봉래야선도 동문의 장로들을 이끌고 복수의 칼을 갈고 있네.

또한 개방 역시 전력을 다해 복수를 하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아마 금년 봄 삼월달엔 허무전을 향한 전면적인 공략이 시작될 것 같네."

 

구주풍인은 한숨을 훅 불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목전 명명주재에게 하늘을 날으는 재주가 있어도

이번 겁난을 피해 내지 못할 것이네."

 

위중평은 이 소식을 듣고도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이 소식은 비록 제게 유리하기는 하나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저 혼자만의 힘으로 명명주재를 쓰러뜨리고 싶습니다."

 

구주풍인은 그 말에 기가 찬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자네는 어찌 그처럼 건방진가?"

 

위중평은 고소를 지으며 씁쓸하게 말을 내뱉았다.

 

"결코 건방진 것은 아닙니다.

노선배님, 무림 각파가 합친 힘으로 비록 허무전을 쑥밭으로 만들 수는 있지만

절대로 명명주재만은 쓰러뜨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후배는 백공상인이 명명주재와 약속을 한 그 날을 택해 그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구주풍인은 위중평의 말에 약간 기분이 나쁜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넨 어쩌면 무림의 각대 문파를 그처럼 무시하는 건가?"

 

위중평은 그 말을 듣자 차갑게 반박했다.

 

"만약 무림 각대 문파 속에 정말 고인이 있었다면 어째서 명명주재가

수십 년 동안 무림을 장악한 것을 그냥 두었겠습니까?"

 

위중평의 이 한 마디에 구주풍인의 얼굴은 금방 홍당무처럼 빨갛게 변했다.

그렇다.

사실은 확실히 그랬던 것이다.

위중평은 구주풍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자

자기의 말이 좀 지나쳤다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미소를 띠며 화제를 돌렸다.

 

"노선배님, 후배 지금 즉시 와도지왕을 만나러 가야겠습니다.

때가 되면 와도지왕 역시 중원에 들어와 이번의 궐기에 참가할는지도 모릅니다."

 

구주풍인은 이 소리에 흠칫 놀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흠, 젊은 놈이 아주 대단한 걸?

무림의 이름난 숙적 와도지왕과도 친분이 있다니

우리로서는 정말 상상조차 못할 일이로구나…'

 

사실 와도지왕는 해외에 기거를 하고 있었지만

그 명성이 결코 명명주재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중원의 무림과는 내왕을 하지 않아 중원에서

그와 교분이 있는 자는 드물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위중평이 와도지왕과 이러한 교분을 지키고 있으니

구주풍인이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구주풍인은 천성이 호탕한 인간이라 즉시 웃음을 터뜨리며 위중평의 등을 쳤다.

 

"으하하하하… 역시 자네다운 데가 있군.

옛날 자네의 부친 신주검성은 와도지왕과 교분을 맺으려다 실패를 했는데

오늘날에 와선 새파란 애송이인 자네가 그 뜻을 이루었으니

정말 감탄을 해야 할 일일세. 으하하하…"

 

구주풍인은 실컷 웃고 나더니 표정을 고치며 말했다.

 

"하여튼 난 다른 곳으로 좀 가보아야겠으니 자네 와도에 가서 일을 잘 처리해 주게."

 

이 말을 남기고 구주풍인은 그 특유의 비틀걸음으로 떠나갔다.

구주풍인이 떠나자 위중평은 묵묵히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지금은 일원이니 무림의 군웅들이 허무전을 공격하는 날과는 약 두 달 남짓 시간이 남았다.

그는 지금 와도에 갔다 와도 늦지 않겠다는 계산 아래 와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림의 정세는 바야흐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위중평이 할 일이라면

그저 아버님의 원수 명명주재를 모든 군웅들을 대신해 처단하는 일인 것이다.

위중평은 마음이 하늘을 날을 듯 가벼운 까닭에 자연 걸음도 빨라졌다.

그래서 그는 상대와 약속한 날짜보다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해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만이 유구한 세월을 더듬어온 영겁 (永劫)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위중평은 상대가 아직 나오지 않은 것을 보자 즉시 몸을 돌려 내일 다시 오려고 했다.

그 순간이었다.

 

"쏴아아…"

 

쾌속정 하나가 하얀 물보라를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쾌속정은 순식간에 해변에 당도했고

그 위에서 은색 경랑을 입은 한 젊은 공자가 나타나며 소리쳤다.

"친구, 걸음을 멈추시오! 친구가 바로 장백파의 위소협이오?"

위중평이 고개를 돌려 보니 상대는 한 번도 안면이 없었던 자였다.

그러나 상대가 자기를 아는 척하며 불러세우자 급히 포권의 예를 취했다.

 

"그렇소. 소생이 바로 위중평이오만 귀하는 누구요?"

 

은의공자는 괴이한 미소를 지으떠 다가왔다.

 

"소제는 와도의 석비(石非)라 하오.

가사 와도지왕의 명령을 받들고 위소협을 영접하러 나왔소."

 

말을 끝낸 그는 옆으로 살짝 몸을 비켜나며 배 위에 타라는 신호를 해보였다.

위중평은 이 갑작스러운 일에 몹시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상대가 자칭 와도지왕의 제자라니 위중평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쾌속정 위에 올랐다.

위중평은 배 위에 올라서며 다시 한 번 포권을 올렸다.

 

"석형께서 이처럼 멀리 마중을 해 주신 데 대해 정말 감사의 말을 금할 길이 없구려."

 

석비는 위중평의 늠름한 전신을 훑어보며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위소협께선 별말씀을 다하시는구려.

오늘 나 석모는 위소협과 같이 명성이 드높은 분을 만나뵙게 되어 정말 영광이라 생각하오."

 

두 사람이 선창 안으로 들어서자 그 안에는 이미 푸짐한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석비는 몹시 공손하게 위중평을 상좌에다 앉히고

즉시 수하들에게 돛을 올려 출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위중평은 요 몇 년 동안 강호를 굴러다닌 덕택에 경험이 예전보다 크게 진보되어 있었다.

그래서 단번에 석비가 겉으로는 몹시 친절한 것 같아도 속마음 어딘가에는

교활함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위중평은 술잔을 입에 약간만 갖다대었을 뿐 절대 마구 마시지 않았다.

석비는 위중평의 이 조심스러운 행동에 즉시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충동질했다.

 

"하하핫… 위형, 우리 강호의 사람답게 기분좋게 큰 잔으로 마셔야 흥이 나지 않겠소?"

 

위중평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평소부터 술을 즐기지 않아서… 석형, 아주 미안하게 되었소."

 

그러나 석비는 속으로 냉랭하게 코웃음을 날렸다.

 

'흥, 교활한 놈 같으니라고, 하지만 어디 두고 보자.'

 

겉으로는 여전히 부드럽게 권고를 했다.

 

"위소협께서 무어라 하든 우리 모처럼 이렇게 만났으니 반드시 커다란 잔으로 다 마셔야만 하오."

 

위중평은 본래 독에 대해서는 조예가 깊어 술을 자세히 조사해 보았으나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 같은 생각에,

 

'설마 이 한 잔을 마신다 해도 큰 탈이야 일어나지 않겠지.'

 

하며 위중평은 술잔을 높이 치켜 들고 단숨에 쭉 들이켰다.

 

술잔은 이렇게 해서 삼 순배나 돌았다.

흥취가 일어남에 따라 석비의 말쑥한 얼굴에도

점점 음침한 기색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핫… 듣자하니 위형의 염복이 아주 대단하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위중평은 미간을 찌푸리며 단호한 어조로 대꾸했다.

 

"나 위모의 복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소.

그리고 본파의 부흥도 아직 착수단계에 있는데 어찌 개인의 일에 대해 언급을 할 수 있겠소?

그건 석형의 지나친 생각일 거요."

 

석비는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흐하하… 과연 그럴까요?

그건 아마 위형의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오.

예를 들어 영사매도 위형에게 깊은 정을 주고 있…"

 

석비는 여기서 말을 잠시 끊었다가 사악한 미소를 띠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가사께서 이번에 위형을 초빙한 목적도 바로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함이오.

위형, 위형의 그 염복은 정말 나 석모로 하여금 탄복을 마지않게 하는구려."

 

위중평은 그의 도전적인 말투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석형, 영사매가 대체 누구이길래 그러는 거요?"

 

석비는 싸늘하게 냉소를 쳤다.

 

"위형, 시치미 떼지 마시오.

벽요궁주가 이미 수 차례에 걸쳐 중원으로 들어간 것은

바로 위형을 만나보고 싶어했기 때문이오."

 

석비는 싸늘한 어조로 힐책하듯 말했다.

 

"위형, 그녀가 바로 장백파에서 마두들의 포위를 뚫어주고

또 화산파에서도 구원의 손길을 내렸으며 끝내 추혼천녀와 그렇게 된 것은 누구 때문이었겠소?"

 

위중평은 이제야 그 은의소녀가 바로 와도지왕의 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귀중평은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마음 속으로 크게 소리쳤다.

 

'아…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이것이 전부 사실이라면 난 처음부터 이 와도엔 오지 말았어야 했다.

만약 그녀가 조사축상을 갖고 청혼을 한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가 만약 여기서 승낙을 한다면

나는 결국 혜매에게 커다란 죄를 짓게 될 거다.

그러나 승낙을 하지 않으면 조사를 볼 낯이 없고…

대체 어떻게 하면 좋다는 말인가…'

 

위중평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당황하여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석형, 속히 뱃머리를 돌려 주시오.

나 위모는 귀도에 가지 않겠소."

 

석비는 그의 말에 일부러 놀란 척하며 물었다.

 

"위형,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왜 스스로 포기하려는 거요?"

 

위중평은 난감한 기색으조 연신 탄식을 뿜어내었다.

 

"나 위모에겐 피치못할 고충이 있으므로 이 길을 중단시켜야겠소."

 

이때 석비가 갑자기 눈앞을 손가락질했다.

 

"저 앞에 보이는 섬이 바로 와도요.

위형께선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마음 푹 놓고 내려가시오."

 

위중평이 잠시 섬을 쳐다보는 순간 쾌속정은 이미 화살처럼 섬을 향해 폭사되어 가고 있었다.

뱃머리가 섬 가까이 당도하자 안개 사이로 섬의 경물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위중평은 쌍방이 황량하기 이를 데 없자 이상하게 생각되어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째서 해변가에는 난잡한 암초들만 즐비하게 늘어서 있을까…'

 

위중평이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섬의 경물에 의심을 품고 있을 때 석비가 소리쳤다.

 

"위소협, 올라가시오."

 

위중평은 비록 의심을 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추호도 내색을 하지 않고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은하성사라는 초식으로 해변가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위중평의 몸이 막 허공을 뜨기 무섭게 체내에서 기혈이 들끓고 경맥이 막히는 느낌이 들자

즉시 몸을 돌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석비! 네 이 죽일 놈! 감히 나 위중평을 암산하다니…"

 

석비는 그의 욕설을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껄껄 웃었다.

"위중평, 미안하다. 네놈이 나 동해소백룡(東海小白龍)의 수중에서

벽요궁주 그 계집을 빼앗아 갔으니 할 수 없이 이 독수를 쓴 것이다. 알겠느냐?"

 

위중평은 분노를 이기지 못해 폭갈을 터뜨리며 쌍장을 위맹하게 휘둘러 쾌속정을 향해 밀어냈다.

 

"이놈! 받아라!"

 

지금 위중평의 공력은 크게 증진되어 있었기 때문에

비록 진기가 원활하게 움직여 주지는 않았지만 뻗어 내는 장력만은

여전히 하늘을 가르고 땅을 울릴만큼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꽝!"

 

섬 전체를 뒤흔드는 폭음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파도가 높이 일며 희뿌연 물보라가

위중평의 전신을 뒤덮었다.

이때 득의에 가득찬 광소가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 이놈아, 힘 좀 아껴라.

함부로 진기를 소모시키면 그만큼 일찍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란 말이다. 으하하하…"

 

그러고는 쾌속정을 몰아 바다 저만큼 나가 버렸다.

위중평은 암석 위에 멍하니 서서 점차 사라져 가고 있는 쾌속정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 아…"

 

위중평은 속으로 크게 탄식을 금치 못했다.

전날에는 빙염에게 크게 혼이 났고 이번에는 석비에게 봉변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자기의 운명이니 원망할 수도 없었다.

다만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중독된 독성을 몸 밖으로 내몰아야만 했다.

위중평이 암암리에 진기를 끌어올려 보니 열두 줄기의 경맥이 거의 다 막혀 있었다.

그리고 막혔던 기세도 점차 온몸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더욱 기이한 것은 위중평 자신이 해독에 대해 조예가 아주 깊은 것에도 불구하고

석비가 도대체 무슨 독을 썼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위중평은 멍하니 넋을 잃고 있다가 마지막 방법으로 자신이 직접 제조한 해독약을 꺼내 복용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섬 중앙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인도-.

 

들짐승도 없을 뿐 아니라 날짐승조차 보이지 않았다.

위중평은 크게 낙담하여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무인도엔 잡아먹을 짐승조차 보이지 않으니 정말 큰일이로구나…'

 

이 때 위중평은 은연중에 싸운 흔적이 있는 한 곳을 발견했다.

그곳은 주위의 커다란 암석들이 전부 다 부서져 있었고 아름드리 야자나무들이

송두리째 뽑혀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는 것이 절정고수들의 혈투가 있었던 듯했다.

위중평은 이것을 보자 반가움에 속으로 크게 부르짖었다.

 

'이 근처에 싸운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돌연 하나의 음산한 괴음이 터져 나왔다.

 

"후후후… 너도 왔구나. 노부가 널 기다린 지 이미 오래다."

 

위중평은 이 뜻밖의 소리에 깜짝 놀라 귀를 기울여 보니

그 음성은 바로 땅 밑에서 나는 것 같았다.

위중평은 마음 속으로 짙은 의심이 들었다.

 

'이 자는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어떻게 날 안다는 말인가?'

 

위중평이 머뭇거리고 있으니 아까 그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얘야, 빨리 오너라. 노승이 너에게 할 말이 있느니라."

 

이번의 음성은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웠으나 아주 분명하게 땅 밑에서 전해 왔다.

위중평은 더 이상 생각해 보지 않고 소리가 난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얼마 후-.

 

위중평은 낭떠러지 아래에서 어두컴컴한 구덩이를 발견했다.

위중평은 그 구덩이를 따라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그러나 절벽으로 내려서기 무섭게 한 줄기 한풍이 뼈를 에이는 듯 갑작스레 불어 오는 것이 아닌가.

위중평은 경각을 느끼며 창급히 오른손으로 검자루를 쥐고 걸음을 떼어 놓았다.

그러나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며 수색을 해보아도 추호도 이상스러움을 발견할 수 없자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분명히 이 근방에서 소리가 났는데 어째서 보이지 않는 걸까?'

 

이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아까의 그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얘야, 바로 여기다. 앞으로 열 발자국, 왼쪽으로 한 걸음 돌아라…"

 

위중평이 그 음성이 이르는 대로 달려가 보니

낭떠러지 아래 하나의 어두컴컴한 동굴이 있었다.

위중평은 동굴을 발견하자 수중의 자옥선을 꼰아쥐고 즉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동굴 안은 칠흑처럼 컴컴해 다섯 손가락도 채 구분할 수 없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위중평은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더욱 음산한 느낌이 들었다.

그 때 동굴 저편에서 강인한 흡인력이 그를 빨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위중평은 재빨리 자옥선을 휘둘러 그 흡인력을 와해시켰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눈동자가 새파란 빛을 발하더니 즉시 말을 전해 왔다.

 

"얘야, 그처럼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노승은 너의 진원이나 열혈을 조금 빌어 오랫동안 굳은 내 신체를 좀 회복시켜 보고 싶을 따름이다."

위중평이 이 소리에 흠칫해 자세히 앞을 바라 보니

동굴 안 거대한 암석 위에 홍색 도포를 입은 한 노인이 눈을 번득이며 송장처럼 버티고 앉아 있었다.

위중평은 즉시 정신을 가다듬고 소리쳐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괴인은 키들키들 웃으며 말을 꺼냈다.

 

"노승은 바로 장변(藏邊)에 있는 반룡사(蟠龍寺)의 방장(方丈) 가목선사(嘉木禪師)다.

나는 이곳에 갇힌 지 벌써 백여 년이 넘는다."

위중평은 이 소리에 깜짝 놀라 속으로 외쳤다.

'이곳에 갇힌 지가 백여 년이나 되었다고?

그리고 반룡사의 방장이 어떻게 이 해외 무인도까지 왔다는 말일까?'

위중평은 아리숭한 생각에 즉시 입을 떼어 물었다.

 

"당신이 장변 반룡사의 방장이라면 어째서 이런 해외까지 나오게 되었소?

그리고 조금 전에 대체 무슨 속셈으로 나를 암산하려고 했소?"

 

괴인은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

 

"얘야, 노승은 분명히 장변 일대의 장문인이다.

그리고 어째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내 조금 있다가 얘기해 주겠다."

 

괴인은 잠시 말을 끊더니 다시 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밀종접인 신공으로 널 빨아들인 것은

너의 진원과 열혈을 빌리고 싶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뜻밖에도 너의 신수가 그처럼 고강하니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위중평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쏘아붙였다.

 

"흥, 남을 해치며 자신을 구하려는 자비로운 승려가 있다니…

그 말을 누가 믿는다는 말이오?

흥, 설사 당신이 정말 불문의 사람이라고 하여도 사악한 마승에 지나지 않을 거요.

그리고 당신은 이곳에서 백여 년 간 앉아 있었다면서 내가 온 줄은 어떻게 알았소?"

위중평은 순간 자신의 온몸이 마비되어 오는 것을 느끼고 암암리에 운공을 하여

독성이 퍼지지 않도록 억제를 하였다.

이 괴인은 위중평의 신랄한 공격을 받고 나자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얘야, 너의 그 질책이 맞다.

하지만 노승은 남의 진원을 전부 다 빼앗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노승은 다만 이 동굴 속에 오래 앉아 있어서 온몸이 음기(陰氣)로 가득차게 되었단다.

그래서 약간의 순양진기(純陽眞氣)를 얻어 체내의 운기를 좀 죽이려는 것이었다.

그러니 네가 노승을 약간 도와 준다면 나도 네게 몇 초의 무공을 가르쳐 주겠다."

위중평은 싸늘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이제 보니 당신은 바로 행동의 자유를 찾으려고 그러는군요.

그 일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소."

 

위중평이 이렇게 대답하자 노인의 두 눈이 더욱 빛을 발했다.

 

"그러나 나의 체내에는 지금 극독이 스며들어 있어 당신을 도울수가 없소.

더욱이 나는 당신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도와 줄 수 있다는 말이오?"

 

가목선사는 금방 안색이 흐려지며 길게 탄식을 뿜어 내었다.

 

"휴… 운명이란 정말 모진 것이군.

얘기를 하자면 이것은 전부 다 노승의 실수로 인해 생긴 것이다.

역시 이 겁난은 인력으로 이겨낼 수 없는 것인가 보네…"

 

위중평은 추호도 동정이 섞이지 않은 투로 말했다.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전부 자기가 저지른 악행을 운명으로 돌리고 있소.

당신 역시 그런 사람들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 테니 나는 그만 물러 가겠소."

 

가목선사는 이 소리에 깜짝 놀라며 크게 소리쳤다.

 

"잠깐, 젊은이! 노승의 말을 다 듣고 난 후 가든지 하게.

젊은이, 자네가 이 노승을 도와 준다면 내 삼 년 동안 자네의 시중을 들어 주겠네.

그러니 이 불쌍한 늙은이 하나 구해 주는 셈치고 어서 결정을 내려 주게."

 

가목선사의 어투도 어느새 변해 있었다.

가목선사는 이렇게 소리치고 난 후 다시 앞뒤가 맞지 않은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젊은이, 자네 역시 무림인이니 반룡사의 밀종파에 대해선 아마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노승은 바로 반룡사의 방장이었는데

그 당시 이궁 주인이라고 자칭하는 어떤 사람이 장변에 와서 본사의 여와낭랑(女蝸娘娘)의

와황금검을 가져갈 것이라고 크게 소문을 내었다네."

 

위중평은 그 소리를 듣자 움찔해서 큰소리로 되물었다.

 

"와황금검?"

 

가목선사는 연신 길게 한숨을 토해 내었다.

 

"그 와황금검은 본사의 진사지보인데 어찌 내줄 수 있겠는가?

그러자 이궁의 주인은 생각을 굴리더니 노승을 초청해 결투를 청했다네."

 

위중평은 어느새 긴장해 그의 말을 주의깊게 듣고 있었다.

 

"결국은… 노승이 패하여 그 금검을 빼앗기고 말았다네.

그 당시 노승은 반룡사의 명성에 지장이 있을까 봐

가짜 금검을 만들어 남의 이목을 속이고 홀홀단신으로

그 금검을 찾으러 강호에 나선 것이지…"

 

가목선사의 얼굴에는 후회와 회한의 빛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그 후 나는 이궁의 주인이 취도(翠島)에 있다는 것을 알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왔는데

어느날 무서운 풍랑을 만나 이 무인도에 표류를 하게 되었다네.

그 때 이 섬에는 한 마녀(魔女)가 살고 있었는데

마침 한 권의 마경(魔經)을 연마하고 있던 중이었네.

그녀의 무공이 어찌나 고강한지 노승과 삼주야를 꼬박 싸웠어도 승부를 가릴 수 없었다네.

싸움에 지친 우리는 서로의 재간을 아끼는 마음에서 서로 화해를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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