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48. 간계

오늘의 쉼터 2014. 6. 20. 20:27

 

48. 간계 

 

  

 

 

한편 봉래야선은 만면에 격분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백공상인 등의 뒤를 따랐다.

위중평은 품 속에서 용호구환단 한 알을 꺼내 봉래야선에게 두 손으로 건네 주었다.

 

"도장께선 상세가 심하시니 우선 이것을 복용하십시오."

 

봉래야선은 그의 손목을 잡으며 몹시 감격해 했다.

 

"고맙소, 소협!"

 

위중평은 가볍게 웃으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보다 명명주재는 무당파의 도장을 닥치는 대로 도살시켰는데 어찌 그의 산하에…"

 

봉래야선은 그 말에 크게 놀라며 다그쳐 물었다.

 

"아니, 소협 그것이 정말이오? 좀더 자세히 말해 주시오."

 

위중평은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그것은 제 눈으로 친히 본 것인데 어찌 거짓일 수가 있겠습니까?"

 

봉래야선은 시선을 하늘로 올리며 비통에 찬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다는 말인가?

그 악독한 놈이 남의 사문을 멸문시켜…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놈을 위해 사문에 커다란 화를 끼치려 했으니

이 죄는 백 번 죽어도 씻을 길이 없구나… 으하하하…"

 

봉래야선은 극도로 비분한 끝에 말의 두서도 없이 내뱉으며 끝내는 울음을 터뜨렸다.

백공상인이 앞으로 나서며 조용히 위로했다.

 

"도장,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그는 꼭 천벌을 받고야 말 것이오."

 

봉래야선은 이를 갈며 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무당파는 수백 년의 전통을 지니고 내려 오면서도

그런 재화는 한 번도 당한 적이 없었는데… 좋습니다.

빈도는 무당의 문하로 기필코 복수를 하고야 말겠습니다."

 

말을 마친 봉래야선은 다시 한 번 백공상인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백공상인과 소협께서 제 생명을 구해 주신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자, 이만 빈도는 가보겠습니다."

 

봉래야선은 양 어깨를 떨쳐 쏜살같이 사라졌다.

봉래야선은 비록 사문에 대해 약간의 불만을 품고 명명주재의 휘하에 들기는 했지만

사문이 커다란 화를 당했다는 소리를 듣자 사문의 복수를 하고 말겠다는 결심을 했다.

백공상인은 사라져 가는 봉래야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쓸쓸한 투로 말했다.

 

"저 사람은 마음이 매우 좋은 사람이야. 다만 그 성격이 괴팍해서 탈이지만…"

 

돌연 백공상인은 급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듣자하니 자네는 두 알의 화삼과를 복용했다고 하더군.

그런데 조금 전 장세를 보니 위맹하긴 했지만 그 정도가 좀 모자라는 듯했네.

아마도 그 화삼과의 약력이 완전히 퍼지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네."

 

백공상인은 위중평에게 다가가 소매를 올려 보고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빈승의 추측대로구나."

 

금루선연이 다가와 보니 정말 위중평의 팔에는 약간 불그스레한 티가 나 있었다.

백공상인은 그들에게 곧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화삼과의 약력이 퍼지지 못했다는 증거다.

만일 천 년 묵은 설련 두 알을 복용하게 되면 공력도 두 배 이상 늘 테지만

억지로 구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음, 나의 생각같아선 이렇게 하면 좋겠네.

지금 자네에겐 큰 볼일은 없으니

천장산(天長山)의 천지(天地)에 가서 반 년 동안 살아보는 게 어떤가?"

 

위중평이 잠시 생각하는 듯하자 백공상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곳에는 설련이 많이 난다고 했으니 인연이 닿는다면 열매를 구할 수 있을 것이네.

혹 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노승이 전해 준 감이교후(坎離交侯)와

연기화신(練氣化神法)으로 혹독한 추위 속에서 반 년만 고행하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위중평은 그가 말끝을 흐리자 황급히 물었다.

 

"하지만 무엇이란 말입니까?"

 

백공상인의 표정은 매우 신중했다.

 

"자네의 신변을 보호해 줄 호법이 없다는 것이네.

노승은 급한 일이 있는 터라 정말 어찌해야 좋을지…"

 

그러자 금루선연과 안미옥이 동시에 대답했다.

 

"저희가 신변을 지키겠어요."

 

백공상인은 기쁜 듯 웃었으나 썩 내키지는 않는지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것도 좋지만…"

 

"하지만 또 무엇이란 말이죠?"

 

금루선연이 붉은 입술을 다물며 되물었다.

백공화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낭자들은 아직 나이가 어려서 만일 다른 생각이 들게 되면 평생을 두고 한이 될까봐

그러는 것이오."

 

이 말에 두 낭자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한참 있다가 금루선연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저와 옥언니가 함께 가는 게 어떻겠어요?

만일 그가 다른 곳에다 마음을 쓴다면 저희가 크게 혼을 내겠어요."

 

하며 잘 익은 사과처럼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위중평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개인의 일 때문에 두 낭자를 그토록 추운 곳에서 고생을 시킬 수는 없소."

 

안미옥이 기분나쁜 듯 눈을 싹 치켜뜨며 쏘아붙였다.

 

"아니, 우리 사이에 정말 그런 것을 가려야 하나요?"

 

말을 해놓고 보니 뭔가 좀 이상스러웠던지 그녀는 급히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백공상인은 길게 탄식을 내뿜으며 품 속에서 옥병 하나를 꺼내 위중평에게 넘겨 주었다.

 

"이것은 노승이 제련해 낸 순양단(純陽丹)이네.

순양단은 혹한을 이겨낼 수 있는 커다란 위력을 갖고 있으니 갖고 가보게.

이번 급한 볼일만 끝나면 노승이 장백으로 찾아갈 테니, 부디 몸조심하게."

 

말을 끝낸 그는 커다란 소매를 펄럭이며 사라졌다.

백공상인이 사라지자 위중평은 일시 말을 잊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 결정은 위중평에게 있어 일생을 결정짓는 극히 중요한 것이다.

더구나 자기 아버지의 원수가 틀림없이 명명주재라면 지금의공력으로써는 대항하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이 길을 택해야만 했다.

그래서 위중평은 항주에 계신 노형 흑옥인마를 찾아 호법을 좀 해 주었으면 했는데

금루선연과 안미옥이 이처럼 열성적으로 나오자 더욱 그 호의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금루선연은 위중평이 일시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기분 나쁜 듯 대꾸했다.

 

"아니 왜 그래요?

가려면 빨리 서둘러야지요.

옥언니와 내가 당신 신변 하나 지켜 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아무 걱정 말고 어서 가요."

 

위중평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어서 갑시다."

 

안미옥은 그를 향해 눈을 흘기더니 이어 금루선연을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자, 어서 가요."

 

세 사람은 즉시 길을 떠났다.

 

위중평은 두 낭자를 대동한 채 북쪽으로 말을 몰아가고 있었다.

세 사람이 노경(魯境)으로 막 진입하는 날이었다.

이제 태산만 넘으면 역성(歷城)에 당도할 수 있다.

일행은 길을 가다가 유난히 눈에 띄인 문사차림의 공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나이는 약 이십오륙 세 정도 되어 보였고,

색깔이 선명한 유삼(儒衫)을 입고 있었으며 허리에는 현적을 차고 있었다.

생김새 또한 매우 준수했지만 미간 사이에는 일련의 은은한 교활함이 내포되어 있어

좋지 않은 자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서생은 위중평이 두 낭자를 대동하고 걸어 오자 만면에 살기띤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곧 웃는 낯으로 회복하며 멀찌감치서부터 손짓을 해 가며 반가운 듯 다가섰다.

 

"여, 위형 어딜 가시는 길이오?

아니 사매도 같이 있구려. 그동안 별 일 없었소?"

 

위중평은 상대가 모조음 철적왕손이라는 것을 알고 내심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상대가 웃으며 다가오자 인사를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형, 정말 오랫만이오.

그래 그동안 어디에 가 있었소?"

 

철적왕손은 매우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탄식을 내뿜었다.

 

"휴- 글쎄 그것을 한 마디로 대꾸하기가 어렵군요."

 

그러더니 금루선연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짐짓 우울하게 물었다.

 

"사매, 아직도 이 사형을 원망하고 있소"

 

금루선연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날렸다.

 

"흥, 그래도 나를 바라볼 낯은 가지고 있군요."

 

그는 몹시 차분한 표정을 지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못난 사형은 비록 사문에 죄를 짓고 나오기는 했지만

사부님께서 피살된 원한을 단 한 번이라도 잊은 적이 없소."

 

그러더니 얼굴을 하늘로 올리며 두 눈에 눈물을 담았다.

 

"몇 년 동안 세상 천지를 찾아 헤매던 끝에 드디어 사부를 죽인 자의 실마리를 찾기에 이르렀지…

그러나 혼자 몸으로써는 워낙 힘이 미약해서 어쩔 수 없소.

더구나 사매는 날 그토록 미워하고 있으니…"

 

모조음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애가 타는 듯 금루선연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사매, 이 우형이 지은 죄를 속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소?"

 

모조음은 그야말로 듣는 이의 콧등이 시큰하리만큼 처절하게 말을 토해 내고 있었다.

발랄하고 꾸밈이 없는 금루선연은 천성이 워낙 선량해 그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전히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흥, 당신이 아직 사부의 원수를 기억하고 있다니 정말 다행이로군요."

 

철적왕손은 길게 탄식을 내뿜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사매, 나는 이미 옛날의 모조음이 아니오.

사부께선 나를 십여 년 동안 키워 주셨는데 내가 어떻게 그분의 은혜를 잊을 수 있겠소?

그런 내가 그분의 복수를 하는 것은 정말 당연한 일이 아니오"

 

금루선연은 더 듣기 싫다는 듯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원수를 찾아냈다는 말이 사실인가요?"

 

철적왕손은 그 질문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말이고 말고. 그러나 이런 중요한 얘기를 길에서 주고받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불편한 일이니 우리 우선 객점을 찾아 갑시다…"

 

이리하여 네 사람은 객점으로 들어갔다.

철적왕손은 온갖 아양과 유치한 행동으로 자기의 잘못을 비호하고 또 속이는 데 성공하였다.

위중평은 워낙 마음이 넓고, 성격 또한 웅후하여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다만 안미옥만은 그렇지 않았다.

시종 모조음에 대한 인상이 호전되지 않았던 것이다.

철적왕손은 그런 안미옥의 신중을 알아차리고 내심 단단히 별렀다.

 

'흥, 네년이 지금은 그리 도도하게 놀고 있지만 이제 머지않아 내 손에 크게 당할 것이다.'

 

객점에 든 철적왕손은 서서히 독계(毒計)를 펴기 시작했다.

그는 식사를 한 뒤 세 사람을 모아놓고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사매, 위형은 우리 신가보에서 어릴 때부터 자라왔지만

또 요즘에 와선 장차 장백파의 장문인이 되는 것 때문에

사부님께서 화를 입으신 것이 아니겠소."

 

그는 위중평에게 시선을 돌리며 아주 정색을 했다.

 

"흉수는 바로 장백파의 장로 흑수신룡이오.

그는 장문인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백방으로 계략을 짜서 신주검성을 죽이려 했던 거요.

그러던 중 흑수신룡은 위형이 신가보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왔지만

위형이 이미 떠나고 없자 홧김에 그만 사부님께 살수를 내리고 만 것이오."

 

철적왕손의 구변 좋고 앞뒤가 맞는 말은 금루선연뿐 아니라 위중평까지 그대로 믿게 만들었다.

그리고 위중평은 전날 독수신룡의 음흉한 무공도 본 적이 있기에 즉시 긴장하여

언성을 높이며 외쳤다.

 

"모형, 지금 그 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었소"

 

모조음은 이들이 점점 자기의 계략에 빠져 들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대꾸했다.

 

"물론이오. 나는 이미 그가 천산의 한 고보(古堡)에 숨어 오음산살장(五陰山殺掌)을

연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소."

 

위중평은 분노가 치밀어올라 의연하게 소리쳤다.

"신보주의 원한이라면 나 위중평이 직접 나서지 않을 수 없소.

자, 우리 지금 당장 쳐들어 갑시다."

 

철적왕손은 속으로 크게 기뻤으나 내색은 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합시다.

위형이 나서준다면 그 도적은 결코 도망치지 못할 것이오."

 

그러나 철적왕손이 속으로 냉소를 날리고 있는 것을 그 누구도 알 리 없었다.

천산은 와룡의 경제 부근에 있는 방대한 산으로 그 길이는 근 천리에 달하며

장백산맥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

철적왕손의 얘기는 전부 거짓은 아니었다.

천산은 분명 흑수신룡의 소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흑수신룡이 장백파의 기반을 얻고자 한 것도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그러는 동안 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자신은 점차 늙어가자 마땅한 제자를 하나 고르고 있었다.

그 제자가 바로 위중평을 가장한 정체불명의 소년이었다.

한편 철적왕손은 위중평 등을 안내해 어두컴컴한 원시의 숲을 지나 고보의 앞에 당도했다.

철적왕손은 조용히 발걸음을 멈추더니 낮은 소리로 입을 떼었다.

 

"저 앞에 보이는 고보가 바로 그 도적의 소굴이오.

그러니 우리는 두 패로 갈라서 갑시다.

위형은 미옥낭자와 같이 앞으로 들어가고 나는 혜매와 같이 뒷문으로 들어가겠소."

 

그들이 이런 상의를 하고 있을 때 그들 등 뒷쪽으로 붉은 그림자가 세 개 나타났다.

하지만 모두들 고보를 응시하고 있었던 까닭에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위중평 일행은 철적왕손의 지시대로 두 패로 나뉘어져 보 안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위중평과 안미옥이 밤고양이처럼 살그머니

보 안으로 숨어 들어가자 보 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고 땅바닥이 푸석푸석한 것이

마치 황혼 위에 건설된 듯 어두운 무덤과도 같았다.

돌연 안미옥이 음성을 낮추어 가만히 말했다.

 

"저 철적왕손 모조음이란 위인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요.

혹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위중평은 무엇이라 달리 말을 못하고 그저 앞으로 걸어가며 대 꾸했다.

 

"우리가 조심을 해야겠소."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보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확 밀려나오는 습기에 안미옥은 숨이 멎는 듯하여 급히 코를 틀어막았다.

그들은 문전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이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아무리 고보라지만 주위의 형태가 마치 긴 동굴 같은 것이 몹시 이상했다.

두 사람이 짙은 의혹을 품고 있을 때였다.

 

"킬킬킬킬… 킬킬킬…"

 

갑자기 음산하기 이를 데 없는 웃음이 터져 나오더니

곧이어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놈, 이곳이 어디라고 감히 스스로 무덤을 파러 들어 왔느냐? 흐흐흐흐…"

 

소름이 오싹 끼치는 이 음성에 두 사람은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긴 것과 동시에 발 밑이 푹 꺼지면서

비밀 장치가 되어 있는 듯한 땅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안미옥은 그제야 앙칼진 음성으로 소리쳤다.

 

"소협, 우린 놈들의 간계에 빠졌어요."

 

그러자 위중평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옥낭자, 발 밑을 조심하시오."

 

소리친 위중평은 허공에서 아래를 향해 두 줄기의 장풍을 쳐내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섰다.

그리고 두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그는 무흔검을 빼들고 휙휙 이리저리 몇 번인가를 쳐내었다.

이 때 안미옥은 크게 놀라 소리치며 장검을 뽑아 들었다.

이제 보니 바닥에는 무수한 독사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황망히 정신을 차리고 사방을 둘러보니

천연적으로 둘러싸인 동굴 속이었다.

이 때 어둠 속에서 새파란 광망이 번득이더니

장풍과 검기에 밀려났던 독사들이 고개를 꼿꼿이 들고 다시 덤벼들기 시작했다.

 

"이놈들, 받아라!"

 

위중평은 대갈일성을 내지르며 독사들을 향해 쌍장을 무섭게 쳐내었다.

 

"소협…"

 

안미옥은 갖가지 형태의 독사들이 눈을 빛내며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것에 크게 놀라

위중평의 어깨를 꽉 깨물고는 머리를 쳐박았다.

위중평은 그녀의 이런 행동에 내심 크게 당황했다.

위중평은 몸을 허공으로 날리며 손에 든 무흔검을 암석에다 쿡 박아 버렸다.

무흔검은 천고의 병기로 금이라도 자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휙!"

 

보검이 암벽에 살을 뚫는 듯 가볍게 박혔다.

그러나 위중평의 등에 업힌 안미옥은 꼭 끌어안은 그의 목을 조금도 늦추려 하지 않았다.

위중평은 그녀를 등에 업은 채 허공에서 날아오는 독사들을 섭선으로 가볍게 날려 버렸다.

그러나 사람의 힘에는 이미 한계가 있는 법,

헤아릴 수를 없을 만큼 줄지어 덤벼드는 독사들을 이리저리 손을 휘둘러 물리치고 보니

위중평의 이마에는 어느새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위중평은 흘러내리는 땀을 닦을 사이도 없이 독사들을 떨쳐 내며 중얼거렸다.

 

"아아… 이것도 역시 방법이 못 되는구나…"

 

이렇게 조금만 더 나아가다간 정말 큰일날 것이다.

안미옥은 위중평의 등에 업혀 매우 미안했다.

안미옥은 자신도 일신의 무공을 지녔으면서 이처럼 위급할 때

제몸 하나 보호하지 못하고 위중평의 등에 업혀 끝까지 방해를 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이란 말인가.

더욱더 위중평이 지쳐 버린다면 정말 큰일이 아닌가.

안미옥은 크게 마음을 먹고 고개를 들어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눈길이 암벽에 박힌 무흔검에가 닿자 그녀는 갑자기 무슨 좋은 묘안이 떠올랐는지

위중평의 등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상공, 이 무흔검은 금이든 옥이든 쪼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니

이 암벽의 구멍을 뚫고 나가는 것이 어때요?"

위중평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움직일 수 없지 않소?"

 

안미옥은 자기의 장검을 그에게 넘겨 주며 말했다.

 

"이 검으로 나르는 독사들을 처치하세요.

제가 구멍을 내볼 테니까요."

 

위중평은 섭선으로 주위에 몰려 있는 독사들을 전부 날려 버리고는

무흔검을 뽑아 그 아래로 내려섰다.

안미옥도 독사들이 달려들까봐 겁이 났지만 생사가 달린 일이라

크게 마음을 먹고 그의 등에서 내려와 무흔검으로 암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두들겨 보아도 아까 무흔검을 박았던 곳에 서만 청랑한 소리가 날 뿐

둔탁하기 그지없었다.

안미옥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금 전에 무흔검을 박았던 곳을 파내기 시작했다.

얼마나 되었을까?

드디어 두껍기 이를 데 없는 암벽이 뚫리고 말았다.

순간 휘익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진한 비린내가 코를 베어 갈 듯 엄습해 들었다.

안미옥은 이런 지독한 비린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소리쳤다.

 

"소협, 이젠 됐어요. 어서 나가요!"

 

두 사람이 구멍을 통해 나가 보니

그곳 역시 음침하기 이를 데 없는 좁디좁은 통로였다

막 통로로 나오기 무섭게,

 

"휙!"

 

하며 검은 그림자가 유성처럼 덮쳐들었다.

두 사람이 움찔해 물러서서 보니 얼핏 보아 호랑이나 사자 따위의 맹수같았다.

안미옥은 독사가 아닌 다른 짐승이라면 결코 겁나지 않았다.

 

"이얏!"

 

안미옥은 맑은 기합을 터뜨리며 일식의 횡소천군(橫掃千軍)으로 단번에

그 짐승의 허리를 두 동강이로 내버렸다.

 

"꽥!"

 

돼지 목따는 거치른 소리와 함께 그 검은 물체는 두 갈래로 갈라지며 선혈을 뿌렸다.

그 검은 물체는 몸집이 매우 큰 커다란 흑곰이었다.

두 사람은 얼굴을 돌려 마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통로 밖을 나서기 무섭게 허공을 가르는 예리한 바람 소리와 함께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수천 갈래의 은빛이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바로 위력을 알 수 없는 암기였다.

위중평은 대번에 대갈일성을 내지르며 조화신공으로 쌍장을 격출해 내었고

안미옥은 무흔검으로 은빛 찬란한 광막을 그려내며 몸을 보호했다.

두 사람의 동작으로 허공을 소나기처럼 덮으며 내리 퍼붓던 은빛은 모두 땅 위로 떨어졌다.

위중평은 그것이 바로 신가보의 독문암기인 칠보추혼침이라는 것을 알고는

 싸늘하게 냉소를 터뜨렸다.

 

"흥, 역시 그놈의 짓이었군."

 

안미옥은 옆에 서서 눈을 흘기며 입술을 내밀었다.

 

"글쎄 애초부터 제가 뭐랬어요?

절대 믿을 수 없는 인간이라 하지 않았어요?"

 

위중평은 잠시 생각을 굴리고 대뜸 암기가 날아온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은 끝을 알 수 없는 통로를 이리저리 헤맨 끝에 드디어 출로를 찾아냈다.

미세한 빛이 스며 들어오는 곳을 보고 무흔검으로 찍어 보니

커다란 바위 하나가 굉장한 소리를 내며 굴러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바로 통로를 커다란 바위로 막아 놓은 것이다.

그곳이 고보의 뒷쪽 산벽이었다.

사실 이 고보는 흑수신룡이 건설한 것이 아니고

옛날 산적들이 납치해 온 사람을 가두기 위해 만들어 놓았던 곳이다.

그런데 독수신룡이 발견하여 이곳에 있는 독물들을 이용해

자기의 오음삼살장을 연마하였던 것이었다.

이것을 본 철적왕손은 교활한 지혜를 발동시켜 이 천연의 적지를 이용해

위중평 등을 없애려고 했던 것이었다.

이제 사실은 명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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