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44. 처절한 싸움

오늘의 쉼터 2014. 6. 20. 18:12

44. 처절한 싸움

 

 

 

위중평이 급히 고개를 돌려 보니 무당파에서 보았던

그 복면인이 추혼천녀를 안은 채 숲 속으로 달려 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위중평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전광석화와 같이 날쌔게 뒤따라 갔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뒤쫓아 갔지만 그 신비의 복면인은 이미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잠시 동안 어찌할 바를 몰라 넋을 잃고 있을 때 그의 굇전에 은은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녀는 이미 애애신공(崖崖神功)에 의해 상해져 있어 지금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노부가 절대 나쁜 뜻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니 안심하거라…"

 

그리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추혼천녀가 납치되어 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비록 복면인은 악의가 아니라고 자부했지만 어찌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있겠는가?

위중평은 이 복면일이 허무전의 사람이 아니면 틀림없이

명명주재일지도 모른다고 내심 생각했다.

그는 주의를 계속해서 수색해 보고 싶었으나 쓰러져 있는 요의소녀가 염려되어

하는 수 없이 제자리 돌아왔다.

그는 용호구환단의 효력을 완전히 믿고 있어 요의소녀가 얼마 안가서 깨어날 줄만 알았다.

그러나 요의소녀는 전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요의소녀를 초가집으로 데리고 가서 금화신공으로서

그녀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더 이상의 번뇌를 초래하고 싶지 않아

잠시 동안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설였다.

이 때 한 노파가 지팡이를 든 채 질풍과 같이 달려왔다.

이 백발의 노파는 요의소녀를 잔세히 들여다보더니

위중평에게 싸늘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네 놈이 이 아이를 상하게 했느냐?"

 

위중평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리자 백발노파는 다시 음험하게 소리쳤다.

 

"네 놈으로선 어림 없겠지. 그럼 누가 상하게 했는지 어서 얘기해라."

 

위중평은 백발노파의 경우에 맞지 않는 태도를 보자 절로 반항심이 생겼다.

그러나 백발노파가 요의소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상

가까운 어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성질을 참고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그는 소생의 친구와 공력을 비교하다가 양패구상을 한 것입니다."

 

"그럼 너의 친구가 누구냐? 어서 말하지 못하겠느냐?"

 

위중평은 상대가 계속해서 경우에 맞지 않은 태도를 보이자

참기가 어려운 듯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이미 어떤 사람이 데려갔소."

 

"네 이놈!"

 

백발노파는 붉은색 지팡이를 내두르면서 위중평을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위중평은 잽싸게 옆으로 피하더니 노갈을 터뜨렸다.

 

"만약 당신이 나이가 많은 것을 참작하지 않는다면 그리 쉽게 되지는 않을 것이오."

 

백발노파가 그의 말에 대노하여 다시 공격하려고 할 때

어디선가 얼음장 같은 차가운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한해독부! 당신은 해외의 일파 종사로서 부끄럽지도 않소?

그 아이가 소혼마장에 의해 상한 것조차도 알아보지 못한단 말이오."

 

백발노파는 급히 지팡이를 거두는 것과 동시에 말한 사람 앞으로 가서 큰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옥탑단장인이 나의 제자를 상하게 했단 말이오?"

 

위중평은 그가 바로 신비의 복면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복면인은 코웃음을 치며 냉담하게 말을 받았다.

 

"그와 싸운 사람은 소생의 딸이오.

그에게도 역시 애애신공에 의해 상했으니 피차 마찬가지 아니겠소.

그런데 나이가 많다고 해서 후생의 안배를 협박하다니 자신이 부끄럽지도 않소."

 

백발노파는 지팡이로 있는 힘을 다해 땅을 힘껏 후려치며 소리 쳤다.

 

"그렇게도 자신 있다면 우리 한 번 겨루어 보자."

 

신비의 복면인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요의소녀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지금 당신이나 나나 모두 사람을 구하는 것이 제일 급하오.

만약 정 원한다면 섣달 여드렛날 밤에 소생 항주 비래봉에서 기다리고 있겠소."

 

백발노파는 싸늘하게 운어댔다.

 

"으하하하…, 듣자하니 너의 호천구사신공이 대단하다고 하던데

노신은 항상 견식해 보고 싶었다. 좋다. 그럼 약속을 정하자."

 

그는 요의소녀를 안아 옆구리에 끼더니 위중평을 향해 물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신주검성의 후인인 위중평이오."

 

"그 애비에 그 아들이라더니 그런대로 젊은 패기가 있군."

 

그러더니 이러 몸을 날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위중평은 백발노파의 신법을 유심히 관찰했으나

어느 파의 신법인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자 신비의 복면인도 사라지고 없었다.

요 근래에 그는 이 세상이 광대하며 기인이 무지하게 많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자신이 비록 여러 집안의 신분을 겸하고 있기는 하지만

무림에서는 한 알의 모래 알과 같이 작게 느껴지기만 했다.

이 때 해는 어느덧 서산마루에 걸려 있었으며 하늘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답게 물들였다.

싸늘한 저녁 바람을 받으며 홀로 황폐한 산을 걷노라니 착잡한 심정 금할 길 없었다.

왜 이렇게 마음이 착잡해지는지는 그 자신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알 수 없는 번뇌가 가슴에 박혀 있는 것을 느끼면서 절로 탄식을 터뜨렸다.

바로 이 때 요란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안미옥과 구주풍인이 달려왔다.

 

"네 이놈!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너는 강호에 경천동지의 일이 터진 것을 알고 있느냐?"

 

위중평은 너무나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순간 구주풍인은 미친 듯이 운음을 터뜨렸다.

 

"명명주재의 화악산 도살이 무림의 공분을 일으켰다.

지금 십대 문파는 무당파와 소림의 이름으로써 각파를 광범위하게 모아서

십일월 칠일에 천대산에서 명명주재와 결판을 내기로 하였다."

 

위중평은 공손하계 물었다.

 

"그럼 화산파도 분명히 참가하겠군요?"

 

구주풍인은 호로병을 들어 을려 한바탕 마시고 나더니 이내 미친 듯이 웃었다.

 

"하하하… 천대산의 대결은 정사 두 파의 대결인데

화산파가 어찌 참가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위중평은 주먹을 불끈 쥐면서 힘주어 말했다.

 

"장백파도 무림의 일맥으로서 역시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풍숙부님! 과거에 아버님께서 협공을 당하셨던 일도 이 기회에 해결해야겠습니다."

 

이 때 안미옥이 서서히 다가서며 다정하게 물었다.

 

"평제! 명명주재와의 약속은 어떻게 되었는지요?"

 

위중평은 고소를 지었다.

 

"옥탑단장인이 임시로 시간을 변경시켰습니다.

이번에 단혼곡에 와서 비단 염원을 달성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화까지 초래하게 되었지요."

 

안미옥은 급히 물었다.

 

"화라니 도대체 무슨 화 말인가요?"

 

위중평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 때 구주풍인이 불쑥 튀어나와서 말했다.

"이녀석아, 나를 여기다 이렇게 세워두기만 할 것이냐?

난 지금 피곤해 죽겠으니 우리 함께 객점으로 가서 쉬면서 얘기하기로 하자."

 

위중평은 급히 대답했다.

 

"그러지요. 객점에 가셔서 어르신네에게 술을 마음껏 마시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내일 천대산으로 가기로 하지요."

 

구주풍인은 입이 벌어지도록 기뻐했다.

 

"암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그러더니 앞장서서 잽싸게 달려갔다.

 

 

뼈를 깎는 듯한 추위가 몰아치는 가운데 달마저 먹구름에 의해

가려져 어두컹컴한 것이 유난히 음산하게 느껴졌다.

구주풍인은 위중평과 안미옥을 데리고 천대산 경대쌍궐로 향했다.

그러나 정오를 밤 삼경으로 잘못 들어 무림 백 년 이래에 없었던

일대 살겁을 일으키게 될 줄이야 감히 누가 알았겠는가?

그들 세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갔으며 이경 무렵에는 천대산 밑에 도착했다.

위중평은 눈앞에 보이는 경대쌍궐을 바라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쳤다.

 

"예감이 이상하군요. 어째서 한 명도 보이지가 않지요?"

 

구주풍인 역시 매우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들은 더욱 속력을 내서 달렸으며 순식간에 봉우리 위로 올라섰다.

봉우리 위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해 숨소리조차 들리지가 않았다.

다만 불길한 야수들의 울음 소리만이 구슬프게 들려올 따름이었다.

이 때 먹구름이 가시고 환한 달이 서서히 그 빛을 나타내 어두컴컴한 봉우리의

경물을 구별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안미옥은 안색이 변하면서 소리쳤다.

 

"큰일났어요. 우리가 너무 늦은 것 같아요.

저게 무엇인지 좀 보세요…"

 

이제 보니 삼면이 절벽으로 되어 있는 경대 위에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으며

그 장면은 더할 수 없이 비참했다.

위중평은 급히 몸을 날려 봉우리 뒤에 있는 쌍궐로 달려갔으나

그 역시 놀라며 소리쳤다.

 

"악마들, 정말 악랄하기 그지없군."

 

구주풍인과 안미옥도 뒤따라 오며 놀라움에 안색이 다시 한 번 변했다.

이곳 쌍궐 내에는 시체가 경내보다 더 많았으며 이것을 토대로 본다면

절벽 밑으로 떨어진 사람은 부지기 수 일 것이다.

구주풍인이 시체를 일일이 검사해 보니 대부분이 십대 문파의 사람들이었고

모두가 다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화산파의 사람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안미옥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정말 비참하군요.

세상에 이렇게 악독한 사람이 있다니 정말 눈뜨고 못 보겠어요."

 

위중평은 주먹을 불끈 쥐었고 두 눈에서는 매서운 살기가 폭사되어 나왔다.

 

"그들이 설사 나와는 원한이 없다고 해도 복수할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구주풍인은 호로에 담아가지고 온 술을 단숨에 반이나 들이키더니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이 미치광이도 파계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군."

 

안미옥은 미간을 찌푸린 채 구주풍인을 향해 소리쳤다.

 

"풍백부님!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으니 그만 가죠."

 

구주풍인은 대답도 하지 않고 봉우리 밑으로 질풍과 같이 달려 내려왔다.

반미치광이에 가까운 구주풍인도 오늘 밤 만은 그 심정이 침울한 것 같았다.

세 사람이 봉우리에서 내려와 막 객점으로 돌아가려 할 때

어둠 속에서부터 염불 소리가 들려왔다.

 

"나무관세음보살… 풍인시주가 아닙니까?"

 

의중평이 급히 고개를 돌려 보니

계곡 밑의 암석 위에 한 승인과 도사가 정좌를 하고 있었다.

승인은 소림의 화암상인이었고 도사는 무당의 천현도장이었다.

위중평은 그들이 아직도 계곡 밑에 남아 있고 거기에다

바위 위에 정좌를 하고 있는 것을 보자

필시 중상을 입고 있음이 틀림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즉시 은하성사의 신법을 전개해 계곡 밑으로 달려 내려 갔다.

그는 두 사람 앞에 내려서더니 공손히 포권의 예를 취했다.

 

"상인과 도장께서 어찌 심야에 계곡 밑에 계십니까? 혹시…"

 

그는 본래 혹시 두 사람이 중상을 입은 것이 아니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두 사람이 모두 당대 무학의 종사인 것을 생각하자

즉시 말꼬리를 흐렸다.

순간 화암상인은 절로 장탄식을 터뜨렸다.

 

"이것은 무림의 각파가 의당히 당해야 할 겁난이며,

사람의 힘으로선 도저히 만회할 수가 없는 것이오.

만약 두 시주께서 한 걸음만 일찍 오셨더라면

이 겁수의 만분의 일이라도 만회했을지도 모르오."

 

이 때 구주풍인도 안미옥과 같이 달려왔으며 미친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겁수는 무슨 겁수요. 만약 각 명문 대파가 미리미리 준비하고

위현질과 같은 후기의 인재를 키웠었다면 어찌 오늘 밤과 같은 참극이 있을 수가 있겠소."

위중평은 급히 품 속에서 두 알의 용호구환단을 꺼내더니 화참상인에게 공손히 건네 주었다.

 

"이것은 화상약과 천 년 묵은 설연으로 만든 용호구환단입니다.

효력이 매우 좋으니 두 분께서는 어서 이것을 복용하십시오."

 

화암상인은 가볍게 염불을 외우더니 공손하게 약을 받아 복용했으며

천현도장도 나머지 한 개를 잽싸게 삼켜 버렸다.

용호구환단은 기사회생의 효력을 지니고 있어 두 사람은 복용한지

얼마 안 되자 상처가 회복된 듯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위중평에게 정중히 감사의 뜻을 표했다.

구주풍인은 이 모든 상황에 웃음을 터뜨렸다.

 

"훗날 위현질은 두 분의 힘을 빌려야 할 때가 많을 테니

이까짓 작은 일에 대해서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우리 객점으로 돌아가 자세하게 상의하기로 합시다."

 

일행이 천대성으로 돌아왔을 때 날은 이미 밝았다.

각 문파와 명명주재와의 결투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천현도장은 장탄식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이오.

우리들은 명명주재의 얼굴조차 보지도 못한 채 옥탑단장인에 의해 태반이 죽어 갔소."

 

위중평은 이 말에 경악을 참지 못하고 재빨리 물었다.

 

"그가 어떻게 명명주재와 한 패가 된 것입니까?

설마 그렇지 않겠지요. 그가 명명주재와 혈투를 분분히 준비했다."

 

위중평은 경대에서 화산파의 사람을 발견하지 못해 내심 걱정이 되어

우선 회단으로 가보기로 하고는 안미옥과 같이 객점을 나섰다.

두 사람이 막 객점을 나섰을 때 화산파의 두 청년 도사를 만나게 되었다.

 

"위사숙께선 여기에 계셨군요. 지금 문수도원에 일이 생겼습니다."

 

위중평은 대경실색하여 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청년도사는 주머니에서 쪽지를 하나 꺼내 주면서 말했다.

 

"현귀보록을 도난당했습니다."

 

위중평이 재빨리 쪽지를 받아보니 그것은 소요공자의 도전장이었다.

 

<화산파 위중평 전…

귀하와 명명주재 사이의 약속이 취소된 이상 나와 생사의 결투를 하기 바라오.

본 공자는 항주 원로사에서 기다릴 것이며 일대 일 단독으로 만나기를 아울러 일러 두겠소.

그리고 현귀보록은 우선 가져가겠소.>

 

"소요공자…"

 

위중평은 검미를 곤두세우면서 말했다.

 

"정말 잘 되었군. 이놈이 수차에 걸쳐 나에게 도전을 해왔는데 이 기회에 없애 버려야겠군.

자네들 먼저 돌아가게. 이곳의 일이 끝나는대로 내 장문사형을 만나러 가겠네."

 

두 도사를 보내고 난 위중평은 즉시 항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안미옥도 굳이 같이 가자고 조르기에 어쩔 수 없이 같이 갔다.

그러나 항주에 도착하자

안미옥은 다시 원로사까지 가기를 고집부렸다.

위중평은 다급해 하면서 말했다.

 

"도전장엔 분명히 일대 일로 만나자고 했거늘 어떻게 같이 갈 수 있겠소."

 

이렇게 되자 안미옥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생각을 먹고 있었다.

즉 명명주재측은 세력이 강하여 위중평 한 사람이 약속을 지키러 가기에는

극히 위험하다고 느낀 것이다.

이경이 가까워지자 위중평은 장삼을 휘날리며 소요공자와 약속한 원로사로 달려갔다.

원로사는 평상시에 유객들이 많기로 소문이 나 있었으나

이상하리만큼 조용했고 사람이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위중평은 뒷짐을 진 채 서서히 절 앞으로 걸어가며 좌우로 살펴보고는

그곳에서 배회하기 시작했다.

그는 순간적으로 많은 것을 생각해 냈으나 이해하지 못할 일이 무수하다고 느꼈다.

그는 당초 자신을 해치려고 하는 사람이 명명주재일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것은 생각리도 않은 소요공자였던 것이다.

소요공자가 무엇 때문에 수차에 걸쳐 자신을 적대시하는 것일까?

그건 추혼천녀와의 관계 외에도 딴 원인이 있는 것일까?

이 일에 대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분명하게 밝혀내야 한다.

그리고 옥탑단장인이 어떻게 해서 경대쌍궐에 나타난 것일까?

혹시 명명주재와 약속이 있었던 것일까?

만약 사전에 약속이 있었다면 거기에는 필시 어떠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 때 멀리서부터 우렁찬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으하하하… 네놈은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의 최후의 날이 드디어 다가왔다."

 

위중평은 소요공자가 나타나자 즉시 날카롭게 소리쳤다.

 

"나 위중평은 너와 아무런 원한이 없거늘

너는 어째서 재삼 재사 나에게 도전하는 것이냐?"

 

소요공자는 가까이 다가서며 음험하게 웃어 보였다.

 

"과거엔 추혼낭자 때문이었지만 이번에는 나의 운명을 위한 것이다.

너에게 솔직히 말해 주지만 만약 네놈을 세상에 남겨 두면

나 소요공자의 직위가 없게 되는 것이다.

알겠느냐그리고 책자는 가지고 왔으니 깨끗이 가져 가거라."

 

소요공자는 현귀보록을 내던지더니 침통하게 말했다.

 

"이런 신외지물(身外之物)은 너나 나에게는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오늘 밤에는 우리 둘 중에 한 명이 죽거나 양패구상할 것이니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꿈에도 생각지 마라."

 

위중평은 현귀보록을 받아들이더니 의아스러운 듯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서 너의 직위를 빼앗았다는 거냐?"

 

소요공자는 싸늘하게 웃어 보였다.

 

"흥! 설사 내가 얘기해 준다 해도 너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차츰차츰 알게 될 것이니 더 이상 묻지 마라.

자, 시간이 없으니 어서 덤벼라."

 

그러더니 다짜고짜 일 장을 밀어내 공격해 왔다.

위중평은 급히 피하면서 소리쳤다.

 

"나는 이유도 모르는 싸움은 하고 싶지가 않다."

 

순간 소요공자의 표정은 말할 수 없이 미묘해졌다.

과거와 같이 건방지고 광교한 태도가 아니라

무엇인가 침통하고 비분에 찬 모습이었다.

 

"위중평! 잔소리는 집어 치우고 어서 덤벼라."

 

그러더니 재차 장력을 밀어내 공격해 들어왔다.

위중평도 참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장력을 밀어내 응수해 갔다.

순간 거센 비명 소리와 함께 소요공자는 뒤로 서너 걸음이나 물러나며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위중평은 이내 쌍장을 가슴 높이까지 올린 채 다음 동작을 취하려고 했으나

웬지 모르게 소요공자가 측은해 보여 동작을 연결시키지 못했다.

바로 이 순간 소요공자는 위중평이 망설이고 있는 틈을 타서

옆구리를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위중평은 상대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해

여지없이 일 장을 얻어맞고 말았다.

살기가 가득 찬 위중평은 있는 힘을 다해 장력을 밀어내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소요공자는 삼 장 밖으로 나가 떨어지면서 즉사해 버렸다.

위중평 역시 비틀거렸다.

보아하니 겨드랑 밑에 맞았던 일 장이 가볍지 않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싸움은 이것으로서 끝났다.

그러나 위험은 그 뒤에 따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싸움이 막 끝나자 괴이한 기합 소리와 함께 왼쪽 나무 위에서부터

괴상한 차림의 노파가 폭사되어 내려왔다.

이와 동시에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위중평을 향해 뻗어 왔다.

위중평은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기습을 받자

뼈를 깎는 듯한 한기를 느끼고는 자연적으로 석 자나 피해 갔다.

이 때 우측에서부터 한 가닥의 청색 광채가 노파를 향해 폭사되고

동시에 지붕 위에서 복면인이 나타나 노파를 향해 일 장을 밀어냈다.

다음 순간 노파는 처절한 비명을 터뜨리더니 일 장 밖으로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순간 붉은 인영과 함께 안미옥이 장검을 든 채 모습을 나타냈다.

안미옥이 나타났을 때는 한 발 늦은 뒤였다.

복면인은 비틀거리는 위중평을 안아 올려 재빨리 서북방을 향해 달려갔으며

이내 종적을 감춰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안미윽은 그래도 위중평이 불쾌하게 느낄까봐 멀리 떨어진 채 서서히 따라 온 것이다.

그런데 소요공자를 처치한 순간 천독성모가 나타나 천독문에서 가장 독한

매개업목을 전개하자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러 위중평을 구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순간 복면인이 나타나 단숨에 천독성모를 처치한 것이다.

너무나 놀라운 공력에 안미옥이 넋을 앓고 있을 때 복면인은 위중평을 데리고 사라졌다.

안미옥은 대경실색하여 신법을 전개해 뒤쫓아 갔으나 복면인은 이미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수월암주를 통해 석항마선공을 터득했으므로 재차 신법을 전개해

단숨에 이십여 리나 달려갔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하지를 못했다.

절로 다급해진 안미옥은 눈물을 흘렸으나 복면인이 위중평을 납치해 간

방향이 서북쪽이라는 것을 알고 계속해서 달려갔다.

위중평은 어떻게 되었을까?

위중평은 소요공자의 일 장을 맞은 데다가 천독성모가 발한 독기가 체내로 스며들어

매우 엄중한 상처를 입었다.

그는 복면인에 의해 안겨 어디론가 달리는 가운데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그는 깨어나자 자신이 매우 따스한 침상 위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막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 누군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한 우렁찬 음성이 들려왔다.

 

"이 아버지가 있는 힘을 다해 너의 소원대로 해주지 않았느냐?"

 

이어서 간드러진 음성이 들려 왔다.

 

"옆에서 지켜 보고 계셨으면서 어찌 이렇게 중상을 입도록 내버려 두었지요?"

 

노인은 호탕하게 웃어댔다.

 

"왜 가슴이 아프냐? 이따 그가 깨어난 후에 이 아버지가 호천구사신공으로서

그를 위해 독을 제거해 주면 될 것이 아니냐?"

 

그 목소리는 매우 귀에 익었다.

조심스럽게 눈을 떠보니 그는 신비의 복면인이었다.

그리고 여자는 추혼천녀였다.

 

'이 복면인이 추혼천녀의 아버지라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는군…'

 

추혼천녀는 복면인을 향해 웃었다.

 

"그럼 소요공자는 어떻게 되었지요?"

 

"이녀석에 의해 처치되고 말았단다."

 

"잘 죽었군요. 그놈은 보기만 해도 치가 떨려요.

며칠 전에 경대쌍궐로 가서 사부를 도와드릴 때, 전 당장 그를 죽이고 싶었어요."

 

노인은 가볍게 탄식을 터뜨렸다.

 

"그놈은 내가 십여 년 동안이나 키워 왔는데…

만약 너를 위함이 아니었더라도 어찌 그가 죽는 것을 보고만 있겠느냐?"

 

"아버지, 듣자하니 과거 신주검성은 아버지가 고수를 모아서 죽인 것이라고 하던데

그것이 사실인가요?"

 

여기까지 들은 위중평은 내심 크게 놀랐다.

그는 온 신경을 곤두세워 복면인의 대답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복면인은 대답 대신 대소를 터뜨리더니 말했다.

 

"저녀석이 깨어났으니 어서 가서 잘 보살펴 주어라.

나는 밖에 나가 보아야겠다."

 

그러더니 이내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가 버렸다.

위중평은 크게 실망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추혼천녀는 이미 침상 가까이와 있었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친절하게 물었다.

 

"응, 전혀 고통스러운 감각이 없소."

 

이렇게 말한 그는 전신의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면서 쓰러졌다.

그러고야 중상을 입었다는 것을 절실히 알았다.

추혼천녀는 위중평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말했다.

 

"지금 평제는 중독이 되어 있으니 잠시 쉬고 있어요.

잠시 후에 아버지가 독기를 제거해 줄 거예요."

 

위중평은 의아스러운 듯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아버지라니… 도대체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명명주재예요."

 

"아, 그럼 명명주재가 아버지란 말이오?"

 

"네! 맞아요. 왜 평제는 그를 증오하고 있나요?"

 

"증오뿐만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은 심정이오."

 

"그것은 무엇 때문이죠?"

 

"그는 나의 아버지인 신주검성을 살해하자고 조종한 원흉이기 때문이오."

 

"평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지요?"

 

"이것은 나의 추측이지만 옥탑단장인이나 적발교주는

그 사실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고 있소."

 

추혼천녀는 날카롭게 입을 열었다.

 

"증거가 없는 일에 대해선 함부로 얘기하지 마세요.

우리 아버지는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예요."

 

위중평은 그녀의 말을 듣고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설사 나의 원수가 아니라 해도 무림의 공적이오."

 

추혼천녀 역시 싸늘하게 말했다.

 

"평제는 이렇게 배은망덕할 생각인가요?

아버지는 평제를 위해 천독성모 손에서 구해졌고 또 잠시 후에 독을 치료해 줄 텐데…"

 

"나는 절대 그런 도움을 받고 싶지 않소…"

 

추혼천녀는 얼굴이 얼음장과 같이 차갑게 변하며 창문 앞을 향해 걸어갔다.

위중평은 암암리에 운공조식을 하여 체내의 독을 제거하려고 했다.

아무리 힘을 써 보아도 효과가 없자 절로 탄식을 터뜨렸다.

추혼천녀가 갑자기 몸을 돌리며 크게 물었다.

 

"만약 아버지께서 정말 평제의 원수라 해도 나를 상대할 것인가요?"

 

위중평은 장탄식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상대방의 은원을 어찌 후세까지 연관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당신은 나의 누님이지만 아마 그 때가 되면 우리는 다시 원수가 될 것이오."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다시 말했다.

 

"이곳이 어디입니까?"

 

"여기는 허무전이에요."

 

"그렇다면 나는 명명주재 손아귀에 든 범인의 신세가 된 것이군요."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요.

아버지는 평제에 대해 매우 신경을 쓰고 있으며

 평제가 소요공자를 죽이는 것도 보고만 있었어요."

 

위중평은 크게 너털웃음을 웃었다.

 

"으하하하…추혼누님! 누님이 무엇이라 해도 나는 그의 정을 받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나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는 나의 적이오."

 

추혼천녀는 그의 말에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흥! 너무 극단적으로 나오지 말아요.

평제에게 이익이 되지 못할 테니까…"

 

위중평은 씁쓰레한 웃음을 지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를 한 번 흘겨 본 추혼천녀는 냉정하게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위중평은 침상 위에 가만히 누워 있자니 더없이 괴로웠다.

추혼천녀가 명명주재의 딸이라니 이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다.

그렇다면 옥탑단장인은 과거에 명명주재와 상당히 깊은 관계였던 것이 분명했다.

만약 추혼천녀와의 관계로 인해 두 사람이 손을 잡는다면

당금무림은 더할 수 없이 어려운 국면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

 

'명명주재가 어째서 나에 대해 이렇게 우대하는 것일까?'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아무런 결론도 얻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호랑이 굴에 들어왔으며 또 중독되어 있으니

이 허무전에서 빨리 빠져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우선 급한대로 명명주재의 도움을 받아 체내의 독을 제거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집이 유난히도 강한 그는 설사 독이 발작해서 죽는다 해도

그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 했다.

이렇게 혼자서 이것저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낮은 음성이 귓속에 전해졌다.

 

"얘야, 어서 오룡반체지법을 이용해 체내의 독을 밀어 내거라.

잠시 후에 내가 너를 호응하러 가겠다."

 

그는 이 음성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아차리고 내심 뛸 듯이 기뻤다.

위중평은 즉시 전음술로 전해준 말대로 오룡반체지법을 전개해

체내의 독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얼마쯤 지나자 아니나 다를까 독이 완전히 제거되었다.

그러자 위중평은 지체하지 않고 침상에서 뛰어내려 막 문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 때 발걸음 소리가 들리며 추혼천녀와 복면인이 걸어왔다.

위중평은 그들이 눈치챌까봐 두려워서 급히 공력을 거두고는 매우 암담한 표정으로 외쳤다.

 

"호의는 고마우나 당신의 치료는 절대 받지 않겠소."

 

추혼천녀는 침상 앞으로 다가와서는 살며시 귀에 대고 말했다.

 

"이 누나의 말을 정말 듣지 않을 참인가요?"

 

"딴 일은 상의해 볼 여지가 있지만 원수에게는 절대로 은혜를 입을 수가 없소."

 

추혼천녀는 눈을 내리뜨고는 비웃는 듯 말했다.

 

"흥! 아마 후회하게 될 거예요."

 

위중평은 그녀의 태도에 노기띤 음성으로 소리쳤다.

 

"후회할 것이 뭐가 있소.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추혼천녀는 다시 다정한 태도로 말했다.

 

"만약 평제가 죽는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괴로워할지 평제는 아나요?"

 

위중평은 복면인을 한 번 바라보더니 이내 말을 받았다.

 

"설사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원수의 구원은 받을 수가 없소."

 

복면인이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너희들끼리 얘기하거라. 노부, 잠시 후에 다시 오겠다."

 

명명주재가 나가는 동시에 위중평은 급히 물었다.

 

"두 부녀는 어떻게 해서 알게 된 것입니까?"

 

추혼천녀는 상세하게 또박또박 대답했다.

 

"요의소녀와 양패구상이 되던 날 아버지에 의해 이곳 허무전까지 오게 되었으며

그 때 나의 아버지라고 직접 말씀하셨지요.

그 당시 나는 믿지 않았으나 소요공자와 함께 천대산으로 가서 사부에게 물어 보고

아울러 사부가 지금 각파 고수들에 의해 협공을 당하고 있으니

우리보고 나서서 도우라고 했지요.

그후 사부에게 사실여부를 물어 보았으나 사부께선 정면으로 대답하지도 않고

또 부인하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진심으로 믿게 된 것이죠."

 

위중평은 아무래도 의심스러운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물었다.

"그럼 추혼누님은 저 아버지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추혼천녀는 우울하게 탄식을 터뜨렸다.

 

"사부께서도 저를 싫어하고 강호인 또한 나를 원수로 생각해요.

다만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은 아버지뿐이니 어떻게 싫어할 수가 있겠어요."

 

위중평은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문득 일어서면서 소리쳤다.

 

<제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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