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42. 무당산의 살겁

오늘의 쉼터 2014. 6. 20. 17:40

42. 무당산의 살겁

 

 

 

"알았어요, 알았어. 그러니 이제 그 얘기는 그만 하세요.

당신의 그 달콤한 몇 마디에 마음의 위안을 얻을 내가 아니예요.

지금 제일 시급한 것은 이 젊은 도사를 치료해 주는 일이에요."

 

그녀는 한쪽에 누워 있는 젊은 도사를 가리켰다.

위중평도 그제서야 급히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상기돼

얼른 등에 업고 의견을 물었다.

 

"조금 전에 내가 해독약을 복용시켰는 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추혼천녀는 이미 울적한 표정을 거짓말처럼 거두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 도사가 당한 것은 홍분은성의 독이므로 일반 해독약으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잠시 침묵을 지키며 생각에 잠기더니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돌연 눈빛을 번쩍 빛냈다.

 

"참, 위상공은 형산홍옥을 가지고 있죠? 그것을 사용한다면 이 도사를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위중평은 젊은 도사와 깊은 친분은 없었지만 자기 때문에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추혼천녀와 말을 듣고 구제할 길이 있다는 것을 알자 몹시 기뻤다.

 

"그럼 여기에서 형산홍옥으로서 치료를 해볼까요?"

 

그러자 추혼천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눈썹을 가볍게 찌푸렸다.

 

"일단, 옷을 벗겨 홍옥으로써 환자의 중정혈(中庭穴)을 안마해 주어야 되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곳은 적합한 장소가 아닌 것 같아요."

 

"그렇다면 우선 마땅한 장소를 찾아야겠군."

 

추혼천녀는 눈동자를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수월암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으니 그리 가기로 해요.

그렇지 않아도 수월암주를 한 번 만나보고 싶던 참이었어요."

 

위중평도 수월암주에게 찾아가겠다고 약속을 했으므로 이내 찬성했다.

두 사람은 신법을 전개해 숲을 뚫고 치달렸다.

날이 밝아올 무렵 그들은 울창한 나무에 둘러싸여진 어느 낡은 암자 앞에 당도했다.

암자 정문 위에는 비록 퇴색된 글씨지만 수월암이라 새겨져 있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추혼천녀는 주위를 살펴보더니 안쪽을 향해 나직이 외쳤다.

 

"암주, 추혼이 뵙고자 찾아왔어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안쪽에서 한 줄기의 인영이 번득이는가 싶더니

묘령의 아가씨가 나타났다.

위중평은 나타난 아가씨를 보는 순간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녀는 다름아닌 장산도주의 딸 안미옥이었기 때문이다.

추혼천녀도 그녀의 출현으로 인해 표정이 멍해졌다.

안미옥은 뜻하지 않게 위중평을 만나게 되자 몹시 반가워하는 표정이었다.

 

"평제, 웬일로 이곳에…"

 

위중평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환급히 말했다.

"지금 심한 독을 당한 친구가 있어 조용한 장소가 필요해 이곳을 찾아온 것이오.

그런데 누님은…"

 

안미옥은 추혼천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상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하며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그들이 암자 안으로 들어가자 선방(禪房)의 문이 열리며 수월암주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위소협, 약속대로와 주었군. 그리고 추혼천녀도 마침 잘왔네. 어서 안으로 들어오게."

 

일행이 자리를 잡고 앉자 위중평은 젊은 도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암주, 상세한 얘기는 나중에 드리겠으니 우선 조용한 곳을 빌려 주십시오.

이 친구는 심한 독을 당해 한시바삐 치료를 요하고 있습니다."

 

수월암주도 젊은 도사의 안색을 살펴보고는 사태가 시급함을 알고

곧 동쪽에 있는 정실(靜室)을 가리켰다.

 

"저 정실을 이용하면 적당할 것이니 어서 가보게."

 

위중평은 즉시 선방을 나서 동쪽에 위치한 정실로 들어갔다.

정실 안에는 침상이 마련돼 있어 들어가자마자 등에 업고 있는 젊은 도사를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총총히 도포를 벗기고 속에 입은 상의를 풀어헤쳤다.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젊은 도사는 남자가 아니라 앞가슴이 풍만한 여자였던 것이다.

허겁지겁 상대방의 가슴을 풀어 헤치던 위중평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 햇살인 비치어 눈부시도록 흰 피부가 시야에 들어오자

금세 심장에서 심한 고동이 일기 시작했다.

그는 얼른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 심호흡을 하며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상대방이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어떻게 행동을 해야 될지 위중평은 난처해졌다.

선방으로 돌아가 수월암주에게 도움을 청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안미옥과 추혼천녀가 있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아녀자의 가슴을 풀어 헤쳤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다.

고심하던 끝에 위중평은 고개를 돌려 침상 위의 여인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 때 그는 다시 한 번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지 않아도 젊은 도사와는 구면인 것 같았는데 막상 여자라고 생각하며 자세히 훑어보자

전에도 자기를 도와준 일이 있는 은의 궁장소녀임을 알게 되었다.

이 때 정체를 알 수 없는 궁장소녀는 독이 전신에 만연된 듯 숨을 미약하게 내쉬었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위중평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게 되자 과감하게 행동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곤란한 점이 있었다. 홍옥을 사용하려면 직접 피부에다 갖다 대어야만

효능을 발할 수 있는데 공교롭게도 중정혈은 바로 돌기된 젖무덤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우선 그녀의 가슴을 가린 은색 가리개부터 풀어야만 치료를 시작할 수 있다.

위중평은 망설이던 끝에 용기를 내어 소녀의 가슴 가리개를 떼어 버리고 홍옥으로

중정혈을 안마해 주었고 한 쪽 손으로는 그녀의 명문혈(命門穴)을 눌러 천천히 자신의 진기를

주입시켜 주었다.

이런 식으로 진기를 주입시켜 주는 일은 전에도 몇 번 해 본 경험이 있어

순조롭게 일을 진행시킬 수 있었다.

그는 다른데 신경이 가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더욱 진기를 주입시키는 일에 열중했다.

약 일 각의 시간이 경과되자 백짓장처럼 창백했던 소녀의 안색이 차츰 불그스름해지며

서서히 깨어났다.

위중평은 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뒤로 물러나 눈을 감아 버렸다.

정신을 차린 궁장소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반신의 싸늘한 느낌에 깜짝 놀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눈을 감은 채 침상머리에 앉아 있는 위중평을 발견하고 대충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았다.

그녀는 얼굴에 새빨갛게 달아올라 우선 다급한 대로 상의의 단추를 잠궜다.

위중평은 그제서야 감았던 눈을 뜨며 차분한 음성으로 나직이 말했다.

"낭자, 지금의 느낌은 어떻소?"

은의 궁장소녀는 매섭게 쏘아붙였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으니 염려 마세요."

위중평은 천천히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럼 우리 밖으로 나갑시다. 수월암주가 기다리고 있소."

그는 이 어색한 상황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어 말을 끝내는 즉시 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은의소녀가 바싹 따라 붙으며 사뭇 심각한 어조로 경고를 했다.

"분명히 말해 두겠지만 오늘 있었던 일을 절대로 입 밖에 내선 안 돼요.

만약 어느 누구에게라도 이 일을 누설한다면 그 때는…"

여기까지 말하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위중평으로선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그만치 여자의 심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자기는 애써 체내의 독을 제거해 주었는데 무엇 때문에 도리어 화를 내며 훌쩍 떠난 것일까?

은의소녀는 평상시 엄한 환경에서 자라 심지어 남자의 얼굴을 보는 일조차 그리 흔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적날한 육신을 외간 남자에게 보였으니…

물론 상대방은 그녀가 마음 속으로 연모하고 있는 대상이긴 했지만 수치심은

분노와 직결된 것이므로 속히 자리를 뜬 것이다.

위중평은 맥없이 선방을 향해 걸어갔다.

안미옥이 선방에서 나오며 그에게 손짓을 했다.

 

"스승님과 추혼낭자는 지금 불학(佛學)을 열심히 논하고 있으니

방해를 하지 말고 이쪽으로 오세요."

 

그녀는 위중평을 어느 조용한 뜰로 안내했다.

뜰에는 기와집 세 칸이 나란히 있었으며 안은 깨끗하게 정돈돼 있었다.

특히 뜰 주위의 작은 화초에서 풍기는 싱그러움은 위중평에게 상쾌한 느낌을 주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안미옥은 뜨거운 차를 대접했다.

"이곳은 아주 조용하고 좋죠?

나는 이미 암주를 스승으로 모셨어요.

최근에는 석가무상선공(釋迦無相禪功)을 연마하고 있는데

삼 개월 후면 완전히 터득하게 될 거예요."

 

위중평은 그녀의 말에 약간 멍해졌다.

그녀가 실종된 후 장산도주와 빙염은 침식을 잃을 정도로 염려했는데

뜻밖에도 암주의 제자가 되어 있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누님이 무사하니 일단 안심이지만 영존과 빙형은 몹시 염려하고 있을 것이오."

 

이어 위중평은 그녀가 실종된 후의 경과를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빙염이 얼마나 애타게 그녀를 보고 싶어하는지에 대해 특별히 강조했다.

안미옥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의 진심은 나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에요.

누가 내 마음을 이해해 주려는지…"

 

하고 말을 끝을 흐리며 원망서린 눈빛으로 위중평을 주시했다.

위중평은 그녀의 눈빛과 접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나

얼른 마음을 가다듬고 일부러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품 안의 형산홍옥을 꺼내 안미옥의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이 홍옥은 석가선공을 연마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니 드리겠소."

 

안미옥은 홍옥을 받아들고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녀의 가슴 속엔 일종의 영문을 알 수 없는 슬픔이 가득차 있었다.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는 아지랑이가 쏟아지는 폭우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린 듯

적막하고도 허전한 심정이었다.

그 허전함은 영원히 메꾸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는 듯

위중평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선방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이 들어오자 수월암주는 미소를 띠며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그 젊은 시주는 완쾌되었는가?"

 

위중평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이미 떠났습니다."

 

추혼천녀는 위중평이 오랜 시간이 경과되도록 돌아오지 않자 은근히 초조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안미옥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들어오는 것을 보자 질투가 치밀어올라

얼굴에 피어져 있던 미소는 싹 사라졌다.

안미옥은 마치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어린애처럼 살그머니

수월암주 쪽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의 그러한 태도는 더욱 추혼천녀의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추혼천녀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짜고짜 밖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멍해진 위중평은 얼른 뒤를 따라가 외쳤다.

 

"추혼낭자, 지금 어디로 가고 있소? 나에게 중요한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추혼천녀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이내 몸을 솟구쳐 연기처럼 사라졌다.

위중평은 귀신에게 홀린 사람처럼 한동안 그 자리에서 있었다.

수월암주는 추혼천녀가 떠난 이유를 대충 짐작한 듯 그녀에 관해선 언급을 하지 않고

우주광인 부부와 두소경의 안위를 물었다.

위중평은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었다.

수월암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심각하게 말했다.

 

"앞으로 무림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염려가 앞서네…"

 

이어 옥탑단장인과 명명주재의 약속에 관해서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는가를 물어보았다.

위중평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대답했다.

 

"그 일은 옥탑단장인이 맡고 있으니 준비가 어느 정도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날 약속에 참석할 사람은 옥탑단장인 이외에 추혼천녀, 금루선연 그리고 저뿐인 것 같습니다."

 

수월암주는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옥탑단장인의 무공은 화경에 달해 있고,

두 낭자의 무공도 대단하지만 현재로서는 다소 미약하다는 느낌이 있네."

 

위중평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불복했다.

수월암주는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그것이 내 생각이라는 것뿐이네.

길고 짧은 것은 직접 보아야 알 것이니 때가 되면 매사를 심사숙고해서 행동하게."

 

말을 끝내고는 눈을 내리감으며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위중평도 곧 몸을 일으키며 작별을 고했다.

수월암주는 그제서야 다시 말처다.

"떠나겠다면 붙잡아 두지는 않겠네.

이번 달 말일에 십대 문파의 장문인들이 무당산 상청궁(上淸宮)에 모여 집회를 열 것이니

자네도 시간이 있으면 가 보도록 하게.

만약, 명명주재가 이 일을 알게 된다면 불상사가 발생할 것이니

누설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게나."

 

위중평은 그의 말을 듣고 옥탑단장인과 약속한 기일이 어느 정도 남았으니

우선 무당산으로 달려가 동정을 알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수월암주와 작별하자 안미옥은 그를 암문 밖까지 전송해 주며 말했다.

 

"만약 여유가 있으면 나도 명명주재와의 약속에 참석하겠어요."

 

위중평은 고개를 내두르며 만류했다.

 

"그 일은 위험이 뒤따를 것이니 될 수 있으면 참석하지 않도록 하시오."

 

말을 끝낸 그는 몸을 솟구쳐 숲 속으로 들어갔다.

일단 무당산으로 달려가야겠다고 결정한 위중평은 길을 재촉했다.

그가 무승관(武勝關)을 지나 곧장 경양(京襄)으로 통하는 관도로 접어 들었을 때였다.

그의 맞은편에서 전신에 검을 옷을 입은 여인이 살려 달라며 질풍같이 달려왔다.

여인의 뒤에는 한 줄기의 우람한 인영이 독수리처럼 허공을 가로질러 추격해 오고 있었다.

위중평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확인도 하기 전에 뒤에서 덮쳐오는 인영은

한 갈래의 웅후한 장풍을 전개했다.

순간 흑의여인은 뾰족한 비명을 지르며 위중평의 품 안으로 뛰어 들어 그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위중평은 졸지에 당한 일이라 우선 날아오는 장풍을 피처다.

상대방은 일격이 빗나가자 사뿐히 땅에 내려섰다.

위중평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땅에 내려선 사람은 다름아닌 우주광인이였다.

우주광인도 위중평을 보자 약간 멍해지더니 곧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자네는 언제부터 저 독부(毒婦)를 알았나?"

 

위중평은 그제서야 자신의 허리를 껴안고 있는 여인이 온랑자라는 것을 알고

눈썹을 찌푸리며 밖으로 밀어냈다.

 

"저는 이 여인과 전혀 모르는 사이입니다."

 

그러자 온랑자는 대뜸 큰소리로 외쳤다.

 

"뭐라구요? 나를 모르겠다뇨?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위중평은 성난 음성으로 호통을 쳤다.

 

"누구인지 모르겠으니 어서 손을 놓으시오."

 

온랑자는 울음을 터뜨리며 고래고래 악을 썼다.

 

"아이구! 남자들은 하룻밤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했는데

내 신세를 망쳐 놓고는 이제와서 시치미를 띨 작정이군요.

남자는 모두 늑대라더니 당신도 마찬가지군요. 아이구…"

 

위중평은 그녀가 파렴치한 어거지를 쓰자 울화가 치밀었다.

 

"닥쳐라! 어서 손을 놓지 못하겠느냐?"

 

그는 호통을 치며 온랑자의 손목을 향해 일 장을 내려치려 했다.

온랑자는 손을 놓을 생각은 않고 도리어 눈을 감아 버렸다.

 

"마음대로 하세요. 차라리 당신 손에 죽는 것이 깨끗할 거예요."

 

실로 거머리 같이 징그럽고 독사보다 더 지독한 여인이었다.

위중평은 아무리 울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해도 아무 저항도 하지 않는 여인에게

손을 쓸 수 없어 도중에 손을 거두었다.

우주광인은 모든 광경을 지켜 보고는

그들 사이에 일종의 미묘한 관계가 얽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위중평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아 곧 큰소리로 외 쳤다.

 

"오늘의 일은 위소협의 체면을 봐서 특별히 용서해 주겠다.

차후에 다시 내 손에 걸리게 되면 그 때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명심해 두어라."

 

말을 끝내자 곧 몸을 솟구쳤다.

위중평은 상대방이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황급히 말했다.

 

"선배님, 잠깐만…"

 

하고 외쳤으나 우주광인의 모습은 이미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때 길옆 대나무 숲 속에서 지극히 차가운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위중평은 즉시 소리쳤다.

 

"어떤 놈이냐?"

 

호통을 치며 온랑자를 뿌리치고 대나무 숲 속으로 뛰쳐 들어갔다.

숲 속은 고요에 잠겨 있을 뿐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위중평이 다시 관도로 달려 나왔을 때에는 온랑자의 모습도 온데간데 없었다.

위중평은 문득 허리 부분에 허전한 느낌이 들어 얼른 더듬어 보았다.

앗차!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자옥선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온랑자는 위중평을 방패로 삼았을 뿐 아니라 그의 자옥선마저 훔쳐간 것이다.

위중평은 울화가 치밀어올라 이를 갈며 만면에 무서운 살기를 띠었다.

그는 즉시 온랑자의 뒤를 쫓아갈 생각이었으나

무당산의 집회가 바로 오늘 밤이라는 사실에 생각을 달리 할 수밖에 없었다.

온랑자가 자옥선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언젠가는 다시 찾을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당산의 집회는 오늘을 넘길 수가 없었다.

그는 곧 신법을 전개해 무당산으로 질주했다.

원래 그의 계산대로라면 좀더 여유 있게 집회에 참석할 수 있었지만 뜻하지 않는

온랑자의 출현으로 시간이 지체돼 무당산 상청궁의 산문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사경이 될 무렵이었다.

막상 산문 앞에 당도하자 위중평은 망설여지기 시작했다.

십대 문파는 자기를 정식으로 초청한 일이 없는데 불쑥 나타난다면

혹시 실례가 되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에 그는 우선 동정을 살피기로 했다.

십대 문파가 집회를 갖는 동기가 무엇이며 어떤 결정이 나오게 될지

그로서는 아직 아는 바가 없었다.

만약 십대 문파가 명명주재와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굴복하자는 합의가 나온다면

그는 아무 말 없이 무당산을 떠날 작정이었다.

생각이 좁혀지자 그는 곧 조싱스럽게 행동했다.

상청궁은 본래 무림의 명문대파로 수백 년 동안 숱한 인재를 배출해 온

무당파의 중심요지로서 물론 경계를 소홀히 할 리가 없었다.

상승신법을 전개한 위중평은 한 줄기 연기처럼 삽시간에 산문 안으로 잠입해 들어가

주위의 동정을 살폈다.

그러던 그는 눈살을 찌푸리게 되었다.

광활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무당의 상청궁이 어둠에 잠긴 채

등불조차 새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주위에는 음침한 분위기만이 가득 메우며 있을 뿐이었다.

표면상으로 위장을 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때 초생달이 먹구름을 뚫고 삐쭉이 모습을 나타냈다.

위중평은 예리한 눈빛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고목나무 아래

두 명의 군사가 엎드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나뭇가지를 끊어 힘껏 던졌다.

파공음이 들리는 가운데 나뭇가지는 고목나무에 격중되었다.

그러나 두 명의 군사는 움직이지 않고 계속 엎드려 있었다.

위중평은 상대방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자

비로소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신법을 전개해 앞으로 날아갔다.

두 명의 군사 앞에 내려선 그는 깜짝 놀랐다.

두 명의 군사는 모두 사혈이 찍혀 숨이 끊어져 있었다.

일종의 불길한 예감에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본 그는 지체하지 않고 대전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대전에는 여러 구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그 시체들을 검사해 보니 일종의 고강한 내가 장력에 의해 심맥이 끊어져 있었다.

위중평은 순간 긴장되었다.

고강한 내가 장력을 지닌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위중평은 경각심을 높이고 앞으로 달려갔다.

그가 가는 곳마다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고 처참하게 죽은 시체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위중평은 이런 광경을 보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금치 못했다.

그는 재빨리 상청궁 구석구석을 뒤져 보았다.

그가 본 시체만 해도 백여 구가 넘는 것 같았다. 모두 무당의 제자다.

무당파의 제자들은 거의 전멸을 당한 것 같았다.

왕년에 신주검성이 조난을 당할 때 백산목장도 역시 이러한 광경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위중평은 피가 거꾸로 용솟음쳐 오르며 전신이 가볍게 떨렸다.

 

"이것은 필경 명명주재의 소행일 것이다.

악랄한 놈, 언젠가는 네놈을 무흔검으로써 토막을 내고 말 테다."

 

위중평은 격동되는 마음을 억제할 수 없어 울부짖으며 오른손을 휘둘러

한 갈래의 막강한 장풍을 격출해 냈다.

울분의 발산인 장풍이 회오리 바람을 대동하고 담벽에 격중되자

흙먼지가 허공으로 흩날렸고 별안간 한 줄기의 그림자가 유령처럼 날아와

다짜고짜 위중평은 공격을 하며 미친 듯이 외쳤다.

 

"무엇하러 왔죠?

그 요망한 계집과 하룻밤의 단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는데…"

 

위중평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몇 걸음 물러나서야 상대방이 추혼천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추혼천녀는 온통 피와 먼지로 범벅되어 무덤에서 나온 귀신 같았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것으로 미루어 극렬한 싸움을 치룬 게 분명했다.

관도에서 온랑자가 벌린 일막을 지켜 보고 오해하는 것 같았다.

위중평은 수치스럽고 한편으론 원망스러워 다급히 외쳤다.

 

"추혼낭자, 잠깐 내 말을 들어 보시오."

 

그러나 추혼천녀는 이미 이성을 잃은 듯 찢어지는 소리로 계속 외쳐댔다.

"이 파렴치한 것! 다시는 속지 않을 거예요.

나는 원래 명명주재와 하등의 원한도 없고 다른 무림인과도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모두 당신 때문에… 그런데 당신은 그 요망한 계집과 놀아나기 위하여…"

 

단숨에 여기까지 외친 그녀는 숨이 가쁜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다시 외쳤다.

 

"이젠 당신 소원대로 됐군요.

십대 문파의 장문인들은 모두 납치당했고 무당파는 이미 와해됐어요.

이 모든 비극이 당신 때문에…"

 

그녀는 계속 외쳐대며 두 손을 닥치는 대로 휘둘렀다.

하지만 기진맥진한 듯 힘이 없었다.

위중평은 돌부처처럼 서서 그녀가 때리는 대로 맞고만 있었다.

추혼천녀는 두 손을 휘젓다가 더 이상 몸을 지탱하지 못하겠는지 울컥 선혈을 토했다.

위중평은 얼른 그녀를 부축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추혼낭자, 진정하시오.

나에게 용호구환단이 있으니 복용하면 상세가 곧 완쾌될 거요."

 

추혼천녀는 그를 밀어내며 연방 코웃음을 쳤다.

 

"이제부터 우리는 남남이니 다시는 내 앞에 얼씬도 마세요."

 

이어 곧장 처마 위로 몸을 솟구친 그녀는 눈 깜박할 사이에 자취를 감추었다.

 

"추혼낭자, 추혼낭자…"

 

위중평도 처마 위로 몸을 솟구쳤으나 그녀가 보일 리 만무했다.

위중평은 넋빠진 사람마냥 멍하니 지붕 위에서 있었다.

조금만 일찍 왔더라면 이번 살겁을 조금이라도 만회할 수 있었을 것이며

추혼천녀도 심한 내상을 입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후회막심했으나 이미 엎지러진 물, 동시에 위중평은 내심 불안했다.

명명주재가 확보하고 있는 세력이 대관절 어느 정도이기에 하룻밤 사이에

무당파를 전멸시키고 또한 십대 문파의 장문인을 납치하 간 것일까.

하늘에 걸려 있는 달을 바라보며 위중평은 극심한 고통에 잠겼다.

추혼천녀가 부상을 당하게 된 것과 십대 문파의 장문인이 납치 당한 일,

그리고 무당파가 소멸된 것도 모두 자기로 인해 비롯된 것만 같았다.

자책감에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막 살겁의 현장을 떠나려는 위중평의 등 뒤에서

얼음장 같이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이것은 너의 책임이 아니다.

설사 네가 한 걸음 일찍 당도했다 해도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위중평은 자지러지게 놀라며 몸을 돌렸다.

약 석 자 가량 떨어진 곳에 흑사로 얼굴을 가린 청포괴인이 유령처럼 서 있지 않는가.

위중평은 내공이 심후하고 청각이 예민해 야밤중엔 십 장 이내에서

낙엽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상대방이 바로 석 자 뒤에 와 있는데도 전혀 깨닫지 못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욱 놀라운 것은 상대방이 자기의 마음을 낱낱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귀신이 아니고서야…

위중평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제하며 즉시 검자루를 움켜 잡고 냉랭하게 외쳤다.

"당신은 누구요? 그리고 이곳에 나타난 목적이 무엇이오?"

괴인은 허옹을 향해 냉소를 터뜨렸다.

 

"네가 이곳에 나타났는데 나라고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는 구태여 너에게 밝힐 의무가 없다."

 

상대방의 빈틈없는 말에 절로 말문이 막힌 위중평은

한참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한 마디 내뱉았다.

 

"어느 모로 보나 당신은 정파의 인물같지 않소."

 

괴인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그럼 너의 생각대로 내가 사파의 사람이라고 해두자.

한 마디 묻겠는데 너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느냐?"

 

위중평은 상대방의 엉뚱한 질문에 일순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라니 누구를 가리켜 하는 말이오?"

 

괴인은 한 자 한 자 뚜렷하게 내뱉았다.

 

"추혼천녀!"

 

위중평은 대뜸 눈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 일은 당신과 하등의 관계도 없을 텐데 무엇 때문에 묻소?"

 

"만약 네가 한 가지 일을 승낙해 준다면 책임지고 그녀와 너를 짝지어 주겠다."

 

위중평은 짜증섞인 음성으로 대꾸했다.

 

"경고해 두겠지만 쓸데없는 일에 공연히 신경을 쓰지 마시오.

나는 지금 당신과 잔소리를 늘어놓을 시간이 없소."

 

괴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번에는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정기가 겉으로 나타나지 않고 태양혈(太陽穴)이 돌기돼 있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생사혈관이 이미 뚫린 것 같군. 어린 나이에 그 정도의 경지에 터득했으니 실로 기특한 일이군."

 

위중평은 상대방의 속셈을 알 수 없어 경각심을 높이며 말했다.

 

"칭찬은 고맙지만 나는 다른 급한 일이 있어 이만 떠나야겠소."

 

하고 말을 끝내더니 발 끝으로 높이 치솟아 허공에서 몸을 한 번 회전시키며

커다란 새처럼 산문 쪽을 향해 날아갔다.

그의 몸이 막 땅에 떨어지자 돌연 눈앞에 검은 물체가 어른거리며 괴인이 앞을 가로막았다.

위중평은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이게 대관절 무슨 뜻이오?"

 

괴인은 복면을 하고 있어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음성을 들어 험상궂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흐흐흐… 우리의 대화는 아직 매듭이 지어지지 않았는데 그냥 떠날 수가 있나?"

 

위중평은 아니꼽다는 듯 냉소를 쳤다.

 

"나는 당신과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소. 설마 아무 원한도 없는 나를 붙잡진 않겠지?"

 

이어 두 번째로 몸을 솟구쳤다.

그러자 괴인도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 몸을 솟구치며 진로를 방해했다.

위중평은 여러 방향으로 돌파구를 물색해 보았으나 괴인이 거머리처럼 따라붙는 바람에

번번히 실패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땅에 내려서자마자 한 갈래의 내가 장력을 뻗어냈다.

 

'이번도 설마 앞을 가로막지 못하겠지…'

 

그의 생각은 빗나가고 말았다.

괴인은 몸을 비킬 생각을 하지 않을 뿐더러 위중평이 전개한 장풍은 괴인에게서

약 한 자 가량 떨어진 지점에 이르자 돌연 방향을 꺾어 땅에 격중됐다.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위중평은 순식간에 다시 쌍장을 교차시켜 십일 장을 격출해 냈다.

괴인이 오뚜기처럼 장풍을 따라 상반신을 전후좌우로 휘청거리는 사이에

위중평이 격출해 낸 십일 장은 그를 격중시키지 못했을 뿐아니라

심지어 옷자락조차 제대로 스치지 못했다.

괴인의 두 발은 뿌리가 박힌 듯 땅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위중평이 질겁을 할 수밖에…

그는 세상에 이런 고인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놀라움보다 당황함이 앞선 그는 더 이상 공격을 전개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망사를 통해 두 줄기의 형형한 눈빛으로 위중평의 얼굴을 주시하며 괴인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장풍으로선 어림도 없으니 이번에는 무흔검을 뽑아 시험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

 

위중평은 사람 위에 사람이 있다는 말을 뼈저리게 느끼며 입 가에 쓴웃음을 띠었다.

 

"그럴 필요는 없소.

이것으로 패배를 시인할 테니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해보시오."

 

괴인은 그의 이런 호방한 성격에 호감이 가는지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솔직해서 좋군.

우선 네가 갖고 있는 포부를 나한테 말해 보아라."

 

위중평은 샌각도 않고 즉시 대꾸했다.

 

"부친의 원수를 갚고 장백파를 부흥시키는 동시에 있는 힘을 다해

강호를 좀먹는 무리들을 소탕하여 무림의 정의(正義)를 바로잡을 생각이오."

 

"너의 부친을 살해한 원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직접 살수를 전개한 자는 홍모음효이며 막후에서 그를 조종한 자는 명명주재라 생각하오."

 

괴인은 그의 말을 듣자 전신에 한 차례 진동이 일였다.

 

"명명주재가 막후에서 조종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느냐?"

 

위중평은 대답을 하기 앞서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를 제외하고는 당금 무림에서 그렇게 많은 고수들을 호령할 사람이 또 누가 있겠소.

동시에 그는 최근에 갖은 방법을 동원해 나를 살해하려고 하니

그것은 후환을 뿌리채 뽑으려는 속셈임이 분명하오.

그것으로서 충분히 증명이 되지 않겠소?"

 

괴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둘렀다.

 

"그것은 너의 추측에 불과하다.

너를 살해하려고 하는 자는 명명주재가 아니라 소요공자이다.

명명주재는 너를 살해하지 않을 뿐더러 도리어 너를 귀중하게 여기고 있다.

그 일에 대해선 너도 나중에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위중평은 한에 사무친 음성으로 단호하게 외쳤다.

 

"그가 나를 아무리 귀중하게 여겨도 부친을 살해한 원수는 기필코 갚고 말 것이오."

 

여기까지 말하자 원한의 불길이 다시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라

주먹을 불끈 쥐며 허공을 향해 마구 휘둘렀다.

그가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괴인은 온데간데 없었다.

위중평이 아무리 흥분했다 해도 눈앞에 있던 사람이 언제 떠났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니

상대방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이 갔다.

괴인의 말투로 미루어 보아 명명주재와 깊은 관계가 있는 사람 같은데

왜 자기를 해치지 않고 그냥 떠났을까?

만약 괴인이 그에게 살수를 전개했다면 위중평은 여지없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괴인은 혹시 명명주재와 대립 상태에 있는 인물이 아닐까?

하지만 괴인은 분명히 명명주재를 옹호하지 않았는가.

그가 명명주재의 부하라면 명명주재의 허무전에는 대관절 얼마나 많은 기인(奇人)들이

도사리고 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위중평은 부친의 원수를 갚는 일이 더욱 암담해지는 것을 느꼈다.

일진의 찬바람이 불어와 그의 생각을 다시 현실로 돌이켰다.

날은 이미 환하게 밝아왔다.

상청궁 안에는 무수한 시체가 늘어져 있으니

계속 이곳에 눌러 있는다면 오해를 받게 될 우려가 있다.

위중평은 공연한 시비에 말려 들고 싶지 않아 곧 피비린내나는 무당산을 떠났다.

일단의 거리를 달린 후 어느 작은 고을에 들어섰다.

온종일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위중평은 시장기를 느껴 가까운 식당으로 들어가

몇 가지 요리를 주문했다.

그는 식사를 하면서도 계속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추혼천녀의 행방을 찾는 것이다.

그녀와의 오해는 제쳐놓고서라도 무당산에서의 상황을 상세하게 물어 보는 것이 중요했다.

명명주재가 대관절 어떠한 고인들을 동원했기에 십대 문파의 장문인을 납치해 가고

하룻밤 사이에 무당파를 소멸시켰는지 우선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설사 추혼천녀의 행방을 찾아내지 못한다 해도 십대 문파의 장문인을 구할 길을 물색해야 한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문득 단장곡으로 갈 날짜가 가까워졌다는 것이 뇌리에 떠올랐다.

다른 일은 다 떨쳐 버리고 우선 단장곡을 달려가기로 결정했다.

옥탑단장인을 만나면 혹시 무슨 소식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마저 생겼다.

위중평이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치룬 다음 막 식당문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문 밖에서 우렁찬 음성이 들려왔다.

 

"무량수불… 시주, 수단이 너무 악랄하다고 생각되지 않소?"

 

위중평은 자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려니 하고 생각하며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문 입구에 네 명의 도사가 나타났다.

그 중에서 머리칼이 희끗한 중년도인이 앞으로 나서며 위중평을 주시한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시주는 오늘 아침에 무당산 상청궁에서 오지 않았소?"

 

위중평은 도인이 앞서 문 밖에서 한 말이 뇌리에 뚜렷이 남아 가슴이 철렁 가라앉았다.

염려했던 대로 오해의 화살이 자기에게 날아온 것이다.

위중평은 거짓말을 할 수도 있지만 워낙 천성이 고지식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소."

 

"그렇다면 자리를 옮겨 얘기를 좀 할까요?"

 

중년도인은 몸을 돌려 다른 세 명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위중평은 누명을 벗어야 하므로 성큼 그들의 뒤를 따랐다.

네 명의 도인은 고을을 벗어나 어느 한적한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역시 머리카락이 희끗한 중년도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빈도는 천통(天通)이라 하며, 천현도장은 바로 빈도의 사형이오."

 

이렇게 자기 소개부터 하고는 얼굴이 길쭉하고 안색이 음침한 늙은 도인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분은 빈도의 사숙인 일진자(一塵子)요. 또 저쪽은 사질 원정(元貞)과 원명이오."

위중평은 형식적인 인사를 하며 정색을 하고 입을 뗐다.

"그런데 도장은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담담하던 천통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며 냉소를 쳤다.

 

"시주는 우리가 찾아온 이유를 뻔히 알면서 구태여 다시 물을 필요가 있겠소?"

 

위중평은 다소 불쾌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도장은 혹시 귀파가 조난을 당한 일로 인해 나를 오해하고 있는 게 아니오?

솔직히 말해 나는 한 발 늦게 당도해 전혀 아는 것이 없소."

 

천통도장은 옆에서 있는 일진자와 눈빛을 교환하더니 호통을 치듯 말했다.

 

"아주 깨끗이 부인을 하는구려. 모든 진상은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니

솔직히 자백을 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오."

 

위중평은 그렇지 않아도 어젯밤의 일로 기분이 상해 있는데

천통도장의 터무니없는 말을 듣자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여러 말 하고 싶지 않소.

내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니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하시오."

 

말을 끝내자 몸을 돌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순간 예리한 금속성과 함께 원정, 원명이 검을 뽑아 들고 길을 막았다.

위중평은 어처구니가 없어 도리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아니, 이럴 수가 있소?

명문정파로 자처하는 무당파가 흑백을 분명하게 가리지 않고 엉뚱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다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통 곁에 서서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일진자가 성큼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그럼 자네의 말을 믿어도 좋단 말인가?"

 

위중평은 다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생각해 보면 자연히 알겠지만 나 혼자의 힘으로서 어떻게 백여 명이 넘는

무당의 제자를 살해하고 명성이 혁혁한 십대 문파의 장문인을 납치해 갈 수 있겠소?"

 

말을 끝내자 소매로 한 갈래의 유풍(柔風)을 전개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두 자루의 검을 진퇴시키며 걸어갔다.

일진자가 뒤에서 급히 그를 불렀다.

 

"소협, 잠깐만 기다려 주게. 빈도는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네."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무당의 장로는 역시 수양이 높아 위중평의 광교한 태도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위중평은 걸음을 멈추고 정색을 했다.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하시오,

나도 역시 할 일이 많아 시간을 낭비할 수 없소."

 

천통도장이 앞으로 다가와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소협은 어느 문파에 속해 있소? 그리고 존성대명을 알고 싶소.

조금 전의 오해를 양해해 주시오."

 

위중평은 상대방이 정중한 태도로 나오자 포권의 예를 취하며 말했다.

 

"저는 장백파의 위중평이오.

피차간에 오해가 있었으니 조금 전의 일은 잊도록 합시다."

 

최근에 위중평의 이름은 널리 강호에 알려져 강호인은

그를 백 년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하는 기재로 일컬었다.

일진자와 천통도인도 그의 이름을 듣자 이내 안색이 변했다.

 

"알고 보니 위중평이었구려. 진작 몰라뵈서 미안하오."

 

천통도장은 재차 공수의 예를 취했다.

위중평은 그들과 오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 얼른 화제를 돌렸다.

 

"내 추측으로 이번 일은 필경 명명주재의 소행인 것 같소.

그러니 도장은 속히 각 문파와 연락을 취해 대책을 세우는 것이 현명할 것이오."

 

천통도장은 비분한 신색으로 말을 이었다.

 

"소협의 말이 맞소. 그럼 빈도 등은 이만 작별을 고하겠소."

 

하고 말을 끝내더니 곧 떠나가 버렸다.

위중평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고는 단장곡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어젯밤 그 괴인을 만난 이후로 명명주재의 세력에 대해 다시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한시바삐 옥탑단장인을 만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단장곡은 사천성(四川省) 안에 있었으므로 이틀 후 골짜기 입구에 당도하게 됐다.

신비스러운 단장곡으로 들어서게 되자

위중평은 금루선연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레었다.

마음씨가 고운 금루선연은 그가 잊지 못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 일진의 거리를 걷자 갑자기 허공에서

눈부신 금광이 번득이는 것을 발견하고 누가 검법을 연마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단장곡에서 검법을 연마하고 있다면 금루선연일 것이다.

위중평은 그녀의 무공이 어느 정도 진전되었는지 알고 싶어 숨을 죽이고

금광이 번득이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허공에서 번득이던 검광이 별안간 한 줄기의 광전(光箭)으로 변해

무서운 기세로 위중평을 향해 날아왔다.

위중평은 상대방이 오해를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황급히 외 쳤다.

 

"혜매, 나 위중평이오."

 

그 외침과 함께 비스듬히 이 장 밖으로 날았다.

다음 순간 빛줄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위에 격중됐다.

위중평의 추측대로 역시 금루선연이었다.

몇 달 동안 보지 못한 사이에 그녀는 더욱 요염해진 것 같았다.

금루선연은 위중평을 보자 입을 삐쭉거리며 눈을 곱게 흘겼다.

 

"이곳에 왔으면 정정당당하게 행동하지 않고 왜 죄진 사람처럼 한쪽에 숨어 있었죠?

저는 나쁜 사람인 줄 알고 하마터면 실수를 저지를 뻔했잖아요?"

 

위중평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그렇게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혜매의 비검참장경(飛劍斬長鯨) 초식을 구경할 수 있겠소?"

 

금루선연은 검을 검집에 거두며 애교있게 웃었다.

 

"공연히 추켜 세우지 마세요. 어지러우니까요."

 

위중평은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덥썩 잡았다.

 

"이모님은 지금 집에 있소?"

 

이모님은 물론 옥탑단장인을 말한 것이었다.

금루선연은 형식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치려 하며 나직이 대답했다.

 

"지금쯤 아마 운공조식을 하고 계실 거예요."

 

"혹시 추혼낭자가 이곳에 오지 않았소?"

 

금루선연은 커다란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아녜요. 전에 한 번 왔을 뿐 그 후엔 전혀 온 일이 없어요."

 

하고 말하더니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굉장히 고독한 것 같아요.

이모님은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더군요."

 

내심 섬뜩해진 위중평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를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글쎄… 그 점에 대해선 잘 모르겠어요."

 

두 사람은 천천히 석동을 향해 걸어갔다.

옥탑단장인은 이미 운공조식을 마치고 돌로 만든 의자에 앉아 손톱을 다듬고 있었다.

위중평은 공손히 몸을 숙여 인사했다.

 

"이모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뜻밖에도 옥탑단장인은 아무 대꾸도 없이 손톱을 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위중평은 뜻하지 않게 무안을 당하자 얼굴이 약간 붉어지며 은근히 울화가 치밀었다.

금루선연은 위중평을 살짝 끌며 앉으라는 눈짓을 했다.

이 순간 옥탑단장인이 느닷없이 냉소를 치며 어깨를 살짝 움직이는가 싶더니

한 줄기의 연기처럼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다.

위중평과 금루선연은 영문을 몰라 표정이 멍해지며 얼른 뒤를 따라 동굴 밖으로 나갔다.

이 때 동굴 밖 절벽 위에 두 줄기의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방금 동굴을 뛰쳐나간 옥탑단장인이 누군가를 추격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위중평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단장곡으로 침입해 들어온 자는 누구일까!

지금 그 자의 경공으로 미루어 보아 결국 무공이 옥탑단장인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위중평은 혼자서 생각에 잠겨 절벽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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