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41. 군마출굴(群魔法窟)

오늘의 쉼터 2014. 6. 20. 17:17

41. 군마출굴(群魔法窟)

 

 

 

묘수선고가 광인 부부를 상대해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되자

홍안노인도 천천히 앞으로 다가와 두소경을 가리키며 징그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두소경, 지금도 늦지 않으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완연한 시체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노부가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니 양자 택일을 해라."

 

남북 개방의 총방주를 마치 세 살 먹은 어린애로 취급하는 거만하기 짝이없는 말투였다.

두소경은 그 소리를 듣고 극도로 치밀어오르는 분노로 인해 머리 끝이 쭈뼛해지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다시는 그 주등아리를 나불거리지 못하게 해주겠다.

 어서 공격을 해보아라."

 

그는 두소경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무표정한 얼굴에 한 가닥의 살기를 스치며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맹렬히 상대방의 열여섯 군데 혈도를 노렸다.

악랄하고 날렵한 솜씨였다.

두소경필 즉시 쌍장을 가슴 앞에 교차시켜 반원을 그리며 십이 성의 공력으로

곧장 격출하자 해산을 무너뜨릴 듯한 거센 광염이 앞으로 휘몰아쳐 갔다.

이것은 그가 전신의 공력을 전개한 것으로서 장풍이

상대방에게 뻗쳐 가기도 전에 주위는 이미 광염에 휩싸여 버렸다.

구양표묘객은 그가 처음부터 정면공격을 해오자 약간 멍해지며 쌍장을 쭉 밀어냈다.

쌍방의 장풍이 허공에서 격돌되자 천지괴변이 이는 듯한 굉음과 함께

두소경은 비틀거리며 연거푸 세 걸음을 물러났다.

구양표묘객도 이를 악물고 몸을 고정시키려 했으나 역시 두 걸음이나 밀려났다.

그리고는 우람한 체구를 날렵하게 날리며 넓은 소매를 닥치는대로 휘둘러

이내 두소경을 무서운 장막 속으로 휘몰아 넣었다.

한편 한쪽에서 있던 상조화가 어쩔줄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우악스러운 외침이 허공을 가르며 들려 왔다.

 

"내 시종을 들어줄녀석을 찾고 있던 중인데 마침 잘 되었군."

 

이어 한 갈래의 경풍이 무서운 속도로 뻗쳐와 상조화늘 상대방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이미 혈도가 찍혀 허공으로 날았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커다란 바윗돌 위에 쓰러져 있었고

옆에는 독각괴걸이 태연히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편 광인 부부는 서로 합세해 묘수선고를 상대하며 이미 삼십여 초식을 교환했다.

우주광인은 내력이 심후하여 초식을 전개할 때마다

주위에 있던 나뭇가지 따위는 진력에 의해 분분히 허공으로 날았다.

건곤일희는 낙영장법(落英掌法)을 전개해 한 마리의 거대한 나비처럼

허공을 나르며 절묘한 초식으로써 납편과 어울려 빈 틈 없는 배합을 형성했다.

그러므로 아무리 불가일세의 무공을 지닌 묘수선고도

짧은 시간 내에 그들 부부에게 손상을 입히지 못했다.

묘수선고는 마음이 초조해지는지 눈동자가 충혈되어

몸을 솟구치는 동시에 나찰음풍장법(羅刹陰風掌法)을 펼쳤다.

그러자 그녀의 백설같이 희디횐 두 손은 홀연 무수한 장영으로 변해

마치 굵은 눈송이가 떨어지듯 광인 부부를 압박해 갔다.

다음 순간 고통스러운 광규(狂叫)가 밤하늘에 메아리치며

우주광인은 비틀거리며 일 장 밖으로 밀려났다.

건곤일희는 대경실색하며 상대방의 진력을 감당해 내지 못해

황급히 이 장 밖으로 몸을 솟구쳐야만 했다.

그녀는 고통을 참으며 미친 듯이 우주광인에게 덮쳐갔다.

우주광인은 원래 성품이 강인해 묘수선고의 강기를

감당해 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면으로 응수를 한 것이다.

그 결과 심한 내상을 입어 입가에 검붉은 피를 흘리며 눈을 감고 있었다.

건곤일희가 그의 곁으로 달려 오자 거꾸로 치솟아 오르는 혈기를 도무지

억제할 수 없어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 내고 말았다.

묘수선고도 때를 맞추어 앞으로 달려 오더니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오늘 밤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죽기 전에 서로 작별의 인사나 나누어라."

 

건곤일희는 일대 여걸로서 비록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조금도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 부부의 실력이 부족한 탓으로 이 지경이 되었으니

죽이려면 속히 살수를 전개해라…"

 

말을 끝내자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이 때 가까운 곳에서 고통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두소경도 구양표묘객에게 일 장을 맞교 피를 토하며

이 장 밖으로 물러나 간신히 몸을 고정시킨 것이다.

건곤일희는 두소경의 고통스러운 외침을 듣고 눈을 번쩍 뜨더니

나직하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묘수선고는 주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아랑곳하지 않고 살기만이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천천히 들어 올린 그녀의 손이 앞으로 뻗쳐지기만 하면

우주광인 부부의 목숨은 영락없이 사라질 것이다.

이 때 흡사 용이 울부짖는 듯한 장소(長嘯)가 허공을 가로지르며 뚜렷하게 들려왔다.

사람들은 느닷없이 들려온 그 소리로 인해 표정이 굳어졌다.

묘수선고는 들어 올렸던 손을 다시 천천히 내렸으며

두소경에게 다가가던 구양표묘객도 걸음을 멈추었다.

지극히 짧은 이 순간에 두 줄기의 인영이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눈 깜박할 사이에 앞으로 날아와 사뿐히 땅에 내려섰다

그들이 수월암주의 귀띔을 받고 달려온 위중평과 그 젊은 도사가 아니고 누구겠는가.

위중평은 형형한 눈빛으로 묘수선고와 구양표묘객을 한 번 훑어보더니

냉소를 치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흉계를 온 천하에 알려 정의의 심판을 받게 하겠다."

 

두 사람이 나타난 기세는 호호탕탕하여 군마들은 처음에 깜짝 놀랐으나

뜻밖에 두 명의 젊은이인 것을 보자 묘수선고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렸던 손을 다시 들어 올렸다.

위중평의 눈에서 예리한 섬광이 번득였다.

묘수선고는 위중평의 눈빛과 접하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한의(寒意)를 느꼈다.

 

'저놈의 눈빛은 왜 그렇게도 날카롭지…'

 

위중평의 내력을 모르는 그녀로선 이상하게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너는 누구의 제자이기에 감히 이곳에서 날뛰느냐?"

 

묘수선고는 위중평의 신분에 대해 은근히 호기심을 느껴 다그치듯 물었다.

위중평은 대답을 하기 앞서 가소롭다는 듯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나의 신분을 알고 싶으면 우선 지니고 있는 잔재주를 부려 보아라."

 

묘수선고는 그의 당당한 기세에 울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놈, 관을 보기 전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모양이구나."

 

일단 흉성이 발작한 묘수선고는 앙칼지게 호통을 치며 한 수에

위중평을 처치해 버릴 심산에 소매를 떨치며 대뜸 나찰음풍장을 전개했다.

위중평은 이미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는 터라

음산한 바람이 앞으로 뻗쳐 오는 것을 느끼자

즉시 오른손을 젖혀 포고뢰문(布鼓雷門)이란 초식을 펼쳐 정면으로 응수했다.

느닷없이 뾰족한 외침이 들렸다.

 

"내가 그를 맡겠다."

 

외침을 토한 사람은 젊은 도사였다.

그와 소매를 떨치며 전광석화와 같이 묘수선고를 향해 다섯 가지 초식을 전개했다.

묘수선고는 졸지에 협공을 당하게 되자

진동에 의해 뒤로 세 걸음 밀려나 안색이 푸르락누르락 변하며

서릿발같이 차가운 음성으로 외쳤다.

 

"네 놈부터 저승으로 보내 주겠다."

 

외침과 행동은 일치가 되어 꽃무늬가 수놓아져 있는 소매가

떨쳐지는 사이에 한 갈래의 막강한 강풍(剛風)을 격출해 냈다.

그러자 젊은 도사는 그녀와 정면으로 장풍을 교환할 생각을 하지 않고

낙엽처럼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번득여 여유있게 상대방의 공격을 피했다.

묘수선고는 그에게 숨돌릴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듯 쉴새없이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나 젊은 도사는 독특한 신법의 잇점을 살려 광염 속에서 비무하며

이따금 예리한 반격을 전개하곤 했다.

두 사람은 수십 초식을 겨루었으나 막상막하를 이루었다.

위중평은 그것을 보자 곧 몸을 돌려 부상을 입은 두소경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그가 맹공을 취하기도 전에 등 뒤에서 미약한 파공음이 들려 왔다.

위중평이 냉소를 치며 몸을 돌렸을 때 손에 불진(佛塵)을 쥔

봉래야선(蓬萊野仙)이 바람처럼 와 있었다.

그의 경공은 선경에 도달해 있거늘 가까이 달려오기도 전에

위중평에 의해 발각이 되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위중평은 상대방이 자기를 비꼬는 것으로 생각해 대뜸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보아하니 오늘 밤에 칠성, 팔선, 십삼표묘객이 전부 출동할 작정이군.

너는 어디에 속해 있는 인물이냐?"

 

봉래야선은 위중평이 다짜고짜 대들자

움푹 파들어 간 두 눈에서 이내 흉광을 번득였다.

 

"이 생쥐같은 녀석, 귀엽게 봐주니까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말을 끝내는 즉시 한 갈래의 막강무비한 도가강기(道家剛氣)를 격출해 냈다.

위중평은 상대방의 강기가 뻗쳐 오자

그 위력이 절대 와도지왕만 못지 않음을 간파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하여 감히 정면으로 받지 못하고 옆으로 석 자 가량 피했다.

봉래야선은 처음 전개한 일격이 빗나가자

수중의 불진으로 무수한 빛줄기를 발산시켜 위중평의 각대 요혈을 노렸다.

위중평도 역시 수중의 자옥선을 펼쳐 겸권서풍(兼捲西風)의 초식을 전개해 공격을 맞이했다.

그 순간 봉래야선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큰소리로 외쳤다.

 

"앗! 자선늙은이가 아직도 세상에 살아 있단 말인가?"

 

위중평은 분노에 찬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럼 너만 살아 있으라는 법도 있느냐?"

 

위중평은 백공상인으로부터 그가 불문에 귀의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대뜸 이러한 말을 내뱉았다.

그러나 봉래야선은 그를 자선마군의 제자로 오인해 불진을 거두며

위엄 있는 음성으로 외쳤다.

 

"손을 거두어라."

 

봉래야선은 비록 성격이 괴팍해 가까이 사귀는 친구가 없지만 자선마군만은 예외였다.

그런데 옛친구의 제자를 만나게 되니 자연히 싸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위중평은 상대방의 속마음을 알 리가 없었다.

도리어 상대방이 자선마군과 모종의 원한이 있는 것으로 생각돼 냉랭하게 외쳤다.

 

"알고 보니 팔선의 무공도 별로 대수로운 점이 없군…"

 

이어 자옥선을 거두고 우주광인 부부에게 달려가 용호구환단(龍虎九丸丹)

두 알을 꺼내 건곤일희에게 내주었다.

 

"이서 그 환약을 복용하시고 운공조식을 하십시오."

건곤일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편과 함께 환약을 복용했다.

그러고는 두소경에게 다가갔다.

두소경이 입은 내상은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스스로 운공조식하여 거의 완쾌된 상태였다.

위중평은 패배로 인해 상심할까봐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운이 좋지 않은 것 같군요. 상세는 좀 어떻습니까?"

 

두소경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독각괴걸 옆에 혈도가 찍혀

쓰러져 있는 상조화에게 시선을 던졌다.

위중평은 그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고는 태연히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가서 상형을 구해 오겠습니다."

 

말을 끝내는 즉시 곧장 몸을 솟구쳤다.

두소경은 그를 만류하려 했으나 이미 때가 늦어 발을 구르며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는 독각괴걸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위중평의 무공이 고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더욱이 자기의 제자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있으니 더욱 안타까울 뿐이었다.

우주광인도 상세가 차츰 완쾌되어 두소경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같이 허명만 지니고 있는 늙은이들은

이제 강호에서 제대로 얼굴을 나타낼 수도 없게 됐소."

 

우주광인은 심리적으로 심한 타격을 입은 것 같았다.

어디 그뿐이랴. 일생 동안 하늘을 찌를 듯한 호기로 살아온

두소경의 심정 또한 비통했다.

그러던 중에 우주광인의 좌절감이 물씬 풍기는 말을 듣자

주먹을 불끈 쥐며 눈에서 예리한 섬광을 번득였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 누구나 죽음을 면하지 못하는 법,

오늘 노부는 이곳에 뼈를 묻겠소."

 

울부짖듯 내뱉으며 앞으로 성큼 뛰쳐나갔다.

그러자 대뜸 폭갈 소리와 함께 구양표묘객이 흡사 한 마리의 거대한 독수리처럼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려 두소경의 앞을 가로 막았다.

 

"승부가 엄연히 결정났는데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겠느냐?"

 

두소경은 죽을 결심을 하고 아무 대꾸도 없이

자신의 진력을 다해 한 갈래의 장력을 격출했다.

구양표묘객은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훤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상대방을 안중에 두지 않고 단지 한 쪽 손을 들어 올려 장력을 격출했다.

쌍방의 장력이 허공에서 격돌되자

고막을 진동시키는 굉음이 들리며 두소경은 비실비실 물러났다.

구양표묘객은 단지 양 어깨를 약간 움직였을 뿐이다.

이렇게 정면으로 장풍을 교환하는 싸움은 결과에 있어 추호의 거짓도 있을 수 없다.

두소경의 공력이 한 수 뒤떨어졌다는 것이 다시 한 번 여실히 나타났다.

그가 신형을 고정시키기도 전에 구양표묘객의 두 번째 공격이 뻗쳐 오자

몸을 피할 사이가 없었다.

설사 피할 사이가 있었다 해도 아마 정면 대결을 했을 것이다.

눈 깜박할 사이가 지나면 두소경은 여지없이 구양표묘객의 일 장을 맞고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 쓰러질 것이다.

 

"앗!"

 

그 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우주광인 부부는 동시에 놀란 외침을 발했다.

아슬아슬한 찰나였다. 느닷없이 붉은 물체가 허공에 이글거리는가 싶더니

한 줄기의 미풍이 주위에 일었다.

그러자 구양표묘객이 독사에게 물린 듯 질겁을 하며 황급히 다섯 자 가량 물러났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당사자를 포함한 주위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래져 있을 때

전신에 붉은 옷을 입은 묘령의 소녀가 하늘의 사자(使者)처럼

두소경의 앞을 가리고 서 있었다.

이 소녀의 출현은 너무나도 뜻밖이었다.

즉 그녀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가를 증명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구양표묘객은 이 소녀가 어디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명명주재는 이런 계획을 진행시키기 위해

비단 팔선, 십삼표묘객을 전부 출동시켰을 뿐 아니라

또한 옥부(玉符)로써 많은 무리의 고수들까지 동원했다.

설사 하늘을 날으는 새라 할지라도 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 소녀는 어떻게 이곳까지 온 것일까?

명명주재가 처음에 노렸던 인물은 우주광인 부부와 개방 방주 두소경이었다.

그들은 모두 강호에서 덕망이 알려진 인물이므로 특별히 묘수선고 독각괴걸, 봉래야선,

그리고 구양표묘객을 직접 동원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위중평과 젊은 도사가 졸지에 나타나 그들을 당황케 하더니

이번에는 무공의 고강함을 추측하기 어려운 홍의소녀가 나타났으니

거듭된 이변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홍의소녀는 단 일격으로 구양표묘객을 진퇴시키자 더 이상의 공격 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하늘을 우러러 볼 뿐이었다.

십삼표묘객은 평상시 적수를 만난 적이 없어 제 나름대로의 궁지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어처구니없이 젊은 계집에게 당하자

수치심이 분노로 변해 싸늘하게 외쳤다.

 

"너는 누구의 부하이기에 감히 명명주재의 일을 방해하느냐?"

 

홍의소녀는 시선을 허공을 던진 채 담담하게 대꾸했다.

 

"추혼천녀다."

 

그녀의 대꾸를 듣은 그는 안색이 변하며 즉시 공수의 예를 취했다.

"알고 보니 궁주(출主)께서 오셨군요.

이번 일은 명명주재가 친히 분부를 내린 것이니

상관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추혼천녀는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음성으로 외쳤다.

 

"닥쳐라. 누가 너희들의 궁주냐?

분명히 경고해 두겠지만 여기 있는 몇몇 사람들에게 손을 쓴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

그녀의 단호한 말에 구양표묘객은 일순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 때 장내에 일성의 폭음이 터지며 추혼천녀의 몸이 시위를 벗어난 붉은 화살처럼

구양표객의 머리 위를 가로질러 날아갔다.

알고 보니 위중평은 추혼천녀가 몸을 날리기 바로 직전에 다짜고짜

폭각괴걸 앞으로 덮쳐간 것이다.

그런데 독갈괴걸은 자신의 신분과 무공을 믿고 위중평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여전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위중평은 그의 거만한 태도가 눈에 거슬려 냉소와 함께 전개하려던

초식을 거두고 일단 상조화의 혈도를 풀어 주려 했다.

그가 몸을 숙이자 잠자코 있던 독갈괴걸은 갑자기 두터운 입술을 앞으로 내밀더니

한 갈래의 주전(酒箭)을 뿜어냈다.

그의 태을신공은 이미 화경(化境)에 도달해 비록 한 모금의 술을 내뿜는 것이지만

그 위력은 한 웅큼의 철사(鐵沙) 암기를 전개하는 것 못지않았다.

위중평은 수중의 자옥선을 살짝 펼쳐 날아오는 주전을 여유 있게 막고

왼손으로는 지풍을 날려 상조화의 혈도를 풀었다.

독각괴걸은 상대방을 너무 과소평가했음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 괴소를 터뜨렸다.

 

"히히히… 노부는 애송이와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네녀석은 굳이 이곳을 무덤으로 택할 모양이구나."

 

말을 내뱉고는 솥뚜껑 만한 손을 내밀어 다짜고짜 위중평을 낚아채 왔다.

위중평은 상대방이 경시할 적수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와 정면 대결을 할 생각은 않고 잽싸게 석 자 뒤로 피했다.

 

"히히히…"

 

독각괴걸의 괴소가 허공에 메아리쳐 퍼지는 가운데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 위중평을 쫓으며 대여섯 가지의 초식을 폈다.

주위는 층층의 장영 속에 휩싸여 무서운 강기가 가까이 뻗쳐 오자

비로소 수중의 자옥선을 떨치며 연거푸 일곱 가지의 초식을 전개했다.

뭉게구름이 유유히 하늘을 노닐 듯 자옥선에서 펼쳐진 냉풍은

상대방의 거미줄 같은 장막을 뚫고 계속 앞으로 밀려갔다.

독각괴걸은 심후한 젊은이의 공력에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눈에서 흉광을 폭사시켰다.

그리고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태을신공을 전신에 산포시켜 폭풍우처럼

일곱 가지 초식을 격출했다.

위중평은 수비태세를 갖추지 못해 뒤로 세 걸음 물러나며 조화신공을 끌어올려

자옥선을 접었다가 다시 펼치며 순식간에 열한 가지의 초식을 한데 묶어 펼쳐냈다.

두 사람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짧은 시간 내에 백여 초식을 교환했다.

막상막하의 실력이었다.

위중평은 별로 놀라운 표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독각괴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강호에 나온 이래 오늘 같이 상대하기 어려운 적수는 난생 처음이었다.

제아무리 태을신공을 극치로 끌어올려 변화무쌍한 초식을 전개해도

자옥선에서 펼쳐진 겹겹의 자무(紫霧)속으로 한 발짝도 뚫고 들어갈 재간이 없었다.

독각괴걸은 이 상태로 싸움을 계속한다면

결국 자신이 불리하게 될 것을 잽싸게 간파했다.

설사 싸움이 무승부로 끝난다 해도 자기는 상대방이 젊은이보다

배분이 훨씬 위이기 때문에 망신을 당하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초식을 거두며 뒤로 일 장 가량 물러나

위중평을 가리키며 징그럽게 외쳤다.

 

"잠깐만, 우리 이런 식으로 싸운다면 결과가 나지 않을 것이니

정면으로 삼 장을 교환하는 게 어떠냐?

네가 만약 노부의 삼 장을 정면에서 받아낸다면

이곳에서 무사히 떠나도록 해주겠다."

위중평은 상대방의 속셈을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두려울 것이 없어

자옥선을 거두면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삼 장이 아니라 삼십 장이라 해도 받아줄 용의가 있다.

여러 소리 말고 있는 실력을 전부 전개해라."

독갈괴걸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왼쪽 손을 들어 올려 비스듬히 원을 그리며

질풍같이 앞으로 밀어냈다.

이 일 장은 겉보기에 평범했지만 사실 무한한 위력이 내포되어 있었다.

위중평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감히 보통의 장력으로서 응수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즉시 천룡장법 중 비각유단(飛閣流丹)의 초식을 전개했다.

비각유단의 초식은 상대방의 장력을 옆으로 유인시키는 효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 효능은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독갈괴걸이 자신있게 전개한 일 장이 비각유단의 초식과 격돌하자

둔탁한 소리를 내며 즉시 방향을 꺾어 좌측으로 비켜 간 것이다.

 

"펑!"

 

무지막지한 장풍이 방향을 꺾어 격중되자 두 자 반원의 구멍을 뚫어 놓았다.

독갈괴걸은 흉성이 발작해 회오리 바람을 동반한 두 번째 장풍을 앞으로 밀어냈다.

 

"얍!"

 

위중평은 맑은 기합을 터뜨리며 난석파운(亂石破雲)의 초식으로 응수를 했다.

두 갈래의 장풍이 부딪쳐 굉음을 조성하며 강기가 사방으로 퍼지는 가운데

쌍방은 제각기 뒤로 한 걸음씩 밀려났다.

독갈괴걸은 거듭 장풍을 전개해도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하자

머리칼이 곤두서며 상처난 야수처럼 광규했다.

 

"마지막 일격을 받아라."

 

그는 사전에 세 가지 초식으로써 상대방을 쓰러뜨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했기 때문에

십이 성의 태을신공을 격출해 냈다.

순간 위중평의 안색은 차츰 황금빛으로 변하였고

양 미간에는 한 겸의 담홍색 기체(氣體)가 나타났다.

극치의 조화신공을 전개하려는 징조다.

아울러 그는 쌍장을 천천히 들어 올려 경도열안(驚濤裂岸)의 절초를 전개했다.

 

"꽝! 우르릉!"

 

천지괴변이 일 듯한 폭음이 중인들의 고막을 진동시킬 때

위중평은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사뿐히 다섯 자 정도 물러났다.

이와 때를 맞춰 추혼천녀가 달려와 그를 부축하며 황급히 물었다.

 

"위상공, 부상을 입었나요?"

 

위중평은 암암리에 진기를 끌어올려 보고는 가슴 부분에 약간의 통증외엔

별로 큰 지장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제서야 추혼천녀의 정이 담뿍 담긴 눈동자를 주시하며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소. 염려해 주어서 고맙소."

 

이 때 독갈괴걸은 비틀거리며 대여섯 걸음 물러났는데

입 가에는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내상을 입은 게 분명하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별안간 상조화에게 덮쳐갔다.

상조화는 뜻하지 않은 기습으로 인해 대경실색하여 수중의 타구봉을 휘둘렀으나

이미 때가 늦어 요혈에 통증을 느끼며 몸이 허공으로 날았다.

독갈괴걸은 비록 내상을 입었지만 역시 날렵한 동작으로 상조화의 혈도를 찍고

옆구리에 끼더니 이내 나뭇가지 위로 올라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졌다.

위중평은 미처 쫓아갈 새가 없어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이 일을 이렇게…"

 

추혼천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덤덤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무공이 뒤떨어지니 누구를 원망할 수 없을 거예요."

 

상조화가 납치당한 것이 당연하다는 말투였다.

위중평은 더 이상 입을 이 않고 몸을 돌렸다.

이즈음 젊은 도사는 여전히 묘수선고를 상대하고 있었다.

위중평은 신경을 집중시켜 그들의 싸움을 주시했다.

젊은 도사와 묘수선고는 이 때 이미 삼백여 초식을 교환한 후였다.

묘수선고는 명성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일개 젊은 도사를 상대해

시간을 오래 지연시키면서도 승부를 가리지 못하자 은근히 초조해졌다.

그리하여 맹렬히 세 가지의 초식을 연거푸 전개해

일단 젊은 도사를 물러나게 한 후 잽싸게 꽃바구니를 높이 쳐들었다.

 

"이놈, 오늘 네놈에게 홍분은성의 맛을 보여 주겠다."

 

그녀의 살얼음 같은 차가운 외침에 젊은 도사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을 발했다.

 

"하하하… 나는 속세를 떠난 몸으로서 육식은 할 수 없는데

어떻게 흥분은성의 맛을 볼 수 있겠느냐?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네 자신이나 맛보도록 해라."

 

묘수선고는 상대방의 능청에 울화가 치밀어 안색이 새파랗게 변해 이를 부드득 갈았다.

젊은 도사는 그녀가 몹시 흥분해 하자 재미가 있다는 듯이 허리를 젖히며 대소를 터뜨렸다.

묘수선고는 눈에 무서운 살기가 번득이는 순간 높이 들어올린 꽃바구니를 힘껏 앞으로 던졌다.

허공은 즉시 붉은 안개와 은색 광채로 덮혀졌다.

젊은 도사는 자신의 실력을 너무 지나치게 믿고 있는지 아니면 홍분은성을 보통 암기로

생각했는지 제자리에서 쌍장을 허공으로 휘둘며 장풍을 전개할 뿐이었다.

물론 일반 암기라면 그의 장풍에 맞아 분명히 땅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홍분은성은 특이했다.

앞서 청의소녀들은 위력이 그리 대단하지 않았지만 묘수선고에 의해 직접 전개되자

판이한 차이가 생겼다.

젊은 도사는 상대방의 암기가 자신의 장막을 뚫고 계속 뻗쳐오자

비로소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몸을 잽싸게 멈추었다.

 

그러나-.

젊은 도사는 향긋한 내음이 체내로 스며들자

전신의 뼈마디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한편 은성은 이미 그의 앞으로 뻗쳐 왔다.

위기일발의 순간 덮쳐오던 은광은 갑자기 파도가 출렁이듯

허공에서 파르르 떨리며 일진의 광염에 의해 옆으로 흩어졌다.

위중평이 자옥선으로 절초를 펼친 것이다.

묘수선고는 뜻하지 않은 방해자가 나타나자 분노한 나머지 대뜸 나찰음풍장을 격출해 냈다.

위중평이 십이 성의 공력으로 홍분은성을 무시하고 묘수선고의 음풍장을 응수한다면

젊은 도사가 목숨을 잃게 될 뿐 아니라 자신도 역시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위중평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약간 사이를 두고 멈칫하는 사이에

두 갈래의 유풍(柔風)이 허공을 가르며 영락없이 묘수선고의 천지(天地), 장문(章門)

두 혈도를 향해 뻗어 가는 게 아닌가?

이렇게 되자 묘수선고는 우선 자신의 안전을 기해야만 했다.

적시에 기습을 전개한 사람은 다름아닌 추혼천녀였다.

묘수선고는 이미 이성을 잃은 듯 상대방이 누구인지도 확인하지 않고

몸을 회전시키며 공격 목표를 바꾸었다.

추혼천녀는 장풍이 약 삼 장의 간격을 두고 뻗쳐 오자

비로소 한쪽 손을 들어 허공에 살짝 원을 그렸다.

그러자 묘수선고가 전개한 장풍은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추혼천녀의 입에서 앙칼진 호통이 터져 나왔다.

 

"다시 한 번 이런 무례한 행동을 한다면 살려 두지 않겠다."

 

묘수선고가 그녀의 호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출수를 하려 하자

구양표묘객이 황급히 그녀에게 달려가 몇 마디를 귀띔해 주었다.

묘수선고는 그의 말을 들으며 안색이 연신 변하더니

끝내 난처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이번 일은 이것으로 끝내야 한단 말인가요?'

 

한편 위중평은 혼미상태에 있는 젊은 도사를 한쪽으로 데려가

해독천방(解毒千方)에 의거해 만든 단약을 복용시켰다.

사실 이러한 단약은 일반 독에 대해선 효능이 있겠지만

홍분은성에 의한 독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추혼천녀는 위중평을 힐끗 쳐다보며 음성을 높여 외쳤다.

 

"이제는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을 것이니 어서 이곳을 떠나도록 하세요."

 

위중평은 그녀의 말을 듣자 지체하지 않고 도사를 품에 안은 채

앞장서서 숲 속으로 달렸다.

우주광인 부부와 두소경도 그의 뒤를 따랐다.

묘수선고와 구양표묘객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추혼천녀의 무공이

두려워서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 있는지 감히 위중평 일행을 가로막지 못했다.

봉래야선 또한 멀리 떨어져 서서 하늘의 달을 바라볼 뿐만 만류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추혼천녀는 위중평 등이 멀리 벗어나자 비로소 냉소를 치더니

몸을 솟구쳐 위중평이 사라진 방향으로 곧장 치달렸다.

그녀의 신법은 워낙 빨랐고 위중평은 한 사람을 품에 안고 있었기에 곧 합류를 하게 됐다.

위중평 등은 비로소 걸음을 멈추었다.

우주광인에게선 평상시의 광교한 태도는 다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울적하게 입을 열었다.

 

"노부는 오늘에야 하늘 위에 하늘이 있고, 사람 위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네."

 

"이제는 도저히 강호에서 활동할 면목이 없으니 이번 기회에 은퇴할까 하네."

두소경도 분연한 표정으로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그것은 당치도 않은 말이오. 노부는 비록 보잘것 없는 힘이지만 마지막 숨이 남아 있는 한 놈들과 끝까지 싸울 생각이오."

위중평은 얼른 나서며 정중하게 말했다

"두선배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지금의 강호는 두 분 같은 정의에 강한 어르신네가 가장 필요할 때입니다. 그런데 만약 어르신네 자신이 먼저 회의를 느끼고 물러난다면 어지럽혀진 강호의 정도는 누가 바로잡겠습니까?"

두소경은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소협의 말을 명심하겠네. 노부는 작별을 고할까 하니 차후에라도 개방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 어디서라도 본방의 제자들에게 연락을 취하게. 노부가 때를 맞추어 달려 가겠네."

말을 끝내자 공수의 예를 취하고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곧이어 광인 부부도 작별을 고하고 떠나갔다.

이제 남은 것은 위중평과 추혼천녀 그리고 정신을 잃고 있는 젊은 도사뿐이었다.

젊은 도사는 정신을 잃고 있으므로 사실 두 사람만 남게 된 셈이다.

추혼천녀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위중평 앞에 나타난 것이다.

교교한 달빛이 살포시 대지를 감싸주고 있었다.

위중평은 추혼천녀의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추혼낭자, 그 동안에 어디에 있었기에 아무런 소식도 없었소?"

 

추혼천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울적하게 말했다.

 

"원래 일정한 거처가 없는 몸이니

바람 부는 대로 발길이 닿는대로 떠돌아 다닐 뿐이에요."

 

위중평은 그녀의 쓸쓸한 표정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일종의 송구스러운 마음이 생겼다.

그녀가 고독해 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도 있는 것 같았다.

 

"추혼낭자, 내가 좀더 보살펴 드리지 못해 미안하오.

사실… 나로서도 어떻게…"

 

그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지금의 심정을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추혼천녀는 표정이 차갑게 변한 채 시선을 먼 하늘로 던지고 유유히 입을 뗐다.

 

"위상공의 입장은 물론 난처할 거예요.

신가보의 아가씨를 돌봐야 하며 더욱이 장산도의 미옥낭자에게도 신경을 써야 하니

자연히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겠죠.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우리는 다정한 사이가 될 수 없어요.

그것은 인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하늘이 정해준 운명인 것 같아요."

 

말을 끝낸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눈동자에 맑은 이슬을 머금었다.

그녀는 비록 살인을 밥먹듯이 하는 마녀지만 가슴 깊은 곳에

뿌리 깊은 고독과 적막함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출신 내력도 모르며 친척 혹은 친구도 없다.

생명같이 의지해 오던 스승님도 이제는 자기를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고독도 달랠 길 없던 차에 요행히 위중평을 알게 되었으나

그녀는 위중평의 마음을 전부 차지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기구한 처지와 운명에 절로 마음이 울적해져 소리없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위중평은 그녀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자 당황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니만큼 위중평은 그녀가 자기에게 그 동안 베풀어준

여러 가지 정의에 대해 깊은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감정을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처지다.

일신의 피맺힌 원한도 아직 갚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장백파의 부흥도 그의 양 어깨에 달려 있거늘

어떻게 남녀간의 사사로운 문제에 신경을 쓸 수 있단 말인가?

동시에 자기에게 접근해 오는 여인은 한두 명이 아닌지라

어느 누구에게 특별히 관심을 보일 수가 없었다.

장산도에선 고의로 추혼천녀를 피했다.

그 때의 상황으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뼈 있는 말을 듣자 위중평은 속으로 심각하게 생각했다.

 

'이 여인의 성격은 워낙 부정적이어서 지금 내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반응을 보인다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그는 다시 추혼천녀의 손을 잡으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추혼낭자, 낭자가 몹시 고독하다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있소.

앞으로는 절대 고독하지 않게 해 드리겠소.

낭자에게 대한 감정은 영원히 변함이 없을 것이오.

그리고 미옥낭자와 혜낭자도 역시 낭자를 무척 존경하고 있소."

 

추혼천녀는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쏘아붙이듯 냉랭하게 외쳤다.

 

 

'무협지 > 무흔검(無痕劍)' 카테고리의 다른 글

43. 양패구상   (0) 2014.06.20
42. 무당산의 살겁   (0) 2014.06.20
40. 독계속출(毒計續出)   (0) 2014.06.20
39. 화산의 격전   (0) 2014.06.20
38. 죽음의 초청   (0) 2014.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