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40. 독계속출(毒計續出)

오늘의 쉼터 2014. 6. 20. 17:15

40. 독계속출(毒計續出) 

 

 

 화옥묘가 멀리 시야에 들어왔을 무렵 젊은 도사가 돌연 길 옆에서 뛰쳐나와

위중평에게 손짓을 했다.

위중평은 상대방의 장난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무공에 대해선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동시에 그의 내력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짙어져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나를 찾는 이유가 대관절 무엇이오?"

 

위중평의 담담한 질문에 젊은 도사는 나직한 음성으로 다른 얘기를 했다.

 

"화옥묘 주위는 이미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져 있으니

각별히 조심을 하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이오."

 

그러고는 몸을 솟구치며 말했다.

 

"어서 나를 따라오시오."

 

하고 외치더니 정면에 있는 소나무 숲을 뚫고 들어갔다.

그리하여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고 화옥묘 뒤에 당도할 수 있었다.

젊은 도사는 화옥묘의 지리와 사방에 설치해 놓은 경계초소와 기관장치에 대해

상세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때 화옥묘 안에는 등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가운데

십여 상의 주석이 푸짐하게 마련돼 있었다.

그리고 청첩을 받고 달려온 군호들은 자리에 앉아 서로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위중평과 젊은 도사는 일단 대들보 위에 몸을 숨기고 동태를 살펴보았다.

광인 부부와 두소경 사도는 동쪽 좌석의 한가운데 마련해 놓은 좌석에는

홍안노인과 허리에 꽃바구니를 찬 부인이 앉아 있었다.

홍안노인은 일신에 달과 별, 그리고 해가 그려져 있는 갈색 장포를 입고 있어

십삼표묘객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지만

꽃바구니를 찬 부인의 내력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젊은 도사가 위중평의 귀에 대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홍안노인과 나란히 앉아 있는 여인은 팔선 중의 묘수선고(妙手仙姑)이니

유사시엔 각별히 조심해야 할 인물이오."

 

위중평은 젊은 도사가 말을 하는 순간 절로 눈쌀을 찌푸렸다.

 

'이미 속세를 떠난 사람에게서 어째 여인이 즐겨 사용하는 향수의 냄새가 풍길까? '

 

그러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역시 나직하게 대꾸했다.

 

"홍안노인도 십삼표묘객 중의 한 사람이니 만만치 않은 인물일 것이오."

 

젊은 도사는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지극히 자연스럽게 옆머리를 쓸어 올리며

위중굉의 귀에 입술을 바싹 대고 나직이 말했다.

 

"우선 가서 얼굴을 씻고 오시오. 그렇게 변장을 하고 있으니 구역질이 나는구려."

 

이어 향수를 뿌린 손수건을 건네 주었다.

그 손수건을 받은 위중평은 다시 한 번 멍해졌다.

 

'정말 요상한 도사로군.

아무리 생각해도 정파의 인물 같지는 않아.

그렇지 않고서야 여인의 손수건을 몸에 지니고 다닐 리가 있겠나?'

 

위중평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앉자 젊은 도사는 살짝 밀며 재촉을 했다.

 

"뭘 꾸물대고 있소? 어서 가서 얼굴을 씻고 오시오…"

 

이것은 완전히 명령투였다.

위중평은 본디 이런 긴박한 상황 하에서 얼굴을 씻을 겨를이 없었지만

유사시 모습을 나타내려 할 때 변장한 채로 나선다면

개방한데 폐를 끼칠 우려가 없지 않아 뒤뜰에 있는 연못에서

얼굴에 묻어 있는 역용약을 씻어 버렸다.

그가 대들보 위로 올라오자 젊은 도사는 그를 향해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 생긋이 웃었다.

활짝 핀 백합같이 화사하고 청아한 느낌을 주는 웃음이었다.

순간 위중평은 어디서 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뚜렷이 기억이 떠오르진 않았다.

젊은 도사의 내력에 대해 원래 궁금하게 여겨 온 위중평이

좀더 깊이 생각을 굴리려는데 대전(大殿) 안에 이미 변화가 생겼다.

꽃바구니를 찬 묘수선고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한 번 훑어보고는

간드러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구사옥부를 받고 때를 맞춰 이곳에 와 주신 데 대해 명명주재를 대신해

우선 여러분들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겠어요."

 

군호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어갔다.

 

"오늘 여러분들을 이곳으로 모신 것은 이 기회를 이용해 술잔을 나누며

피차간의 친선을 도모하는 한편 한 가지 작은 문제를 토론하고자 함이에요."

 

그녀가 말을 하고 있는 사이에 두 명의 장한이 앞쪽에 마련해 놓은

향안(香案)에 커다란 붉은 종이와 붓, 벼루 따위의 물건을 갖다 놓았다.

묘수선고는 생긋 웃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현재 무림은 도처에서 살겁이 벌어지며

제각기 쟁웅(爭雄)을 하겠다는 야망을 갖고 서로 헐뜯어 중상모략이 끊일 날이 없어요.

그래서 명명주재에서 이러한 사태를 동감하고 흑백도대동맹(黑白道大同盟)이라는

조직을 발기했어요…"

 

그녀의 말에 군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한결같이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약간 멈칫하며 장미빛 입술에 침을 발랐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은 모두 일파를 대표할 수 있는 종사(宗師)이며

무림의 명숙(名宿)이니 만약 명명주재의 뜻을 천하 방방곡곡에 알린다면

만인의 호응을 얻게 될 거예요.

그러니 명명주재의 제의를 동의하는 분들은 앞으로 나와 서명을 해 주길 바라겠어요.

그리고 맹주를 선출하는 일은 나중에 여러분들의 고견(高見)을 듣겠어요."

 

그녀의 말이 전부 끝나자 대전 안은 금세 웅성거렸다.

몇몇 사람은 손뼉을 치며 찬성한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과벽지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발언을 했다.

 

"과벽 일파는 전적으로 명명주재의 제의에 찬성하며 제일 먼저 서명을 하겠소."

 

그의 뒤를 이어 구루쌍마 중에 음양거사가 일어나 역시 큰 소리로 말했다.

 

"명명주재의 제의는 실로 훌륭한 것이오.

현재 강호에는 비단 그러한 동맹이 절실하게 필요할 뿐 아니라

맹주의 자리도 역시 명명주재 이외에 다른 사람이 차지할 자격이 없을 것이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우악스러운 외침이 대전 안을 진동시켰다.

 

"잠깐만…"

 

우주광인이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이다.

 

"이번 제의는 도저히 실행할 가능성이 없는 것이오.

흑백 양도는 각기 생각이 다르고 목적이 판이하거늘

어떻게 동맹을 맺을 수 있단 말이오?

그리고 명명주재가 무슨 덕망이 있다고 천하무림을 이끌 수 있겠소?

그가 맹주가 된다는 것은 당치도 않는 말이오."

 

이 때 앞좌석에서 까마귀가 울부짖는 듯한 괴상망측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천만의 말씀, 명명주재를 제외하고는 맹주가 될 자격을 갖춘 사람은 없소.

그의 호천구사신공은 천하무적일 뿐 아니라

구사옥부가 나타나는 곳에 굴복하지 않는 자가 없소.

그러니 설사 그가 맹주로 선출되지 않는다 해도 구사옥부는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할 거요.

그러니 차라리 구사옥부를 무림맹주옥부로 명칭을 고쳐 맹주로 천거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것이오."

 

위중평은 방금 말을 한 자가 다름아닌 백발홍안이라는 것을 알고 내심 욕설을 금치 못했다.

 

'빌어먹을… 어디가나 말썽이군…'

 

이어 그는 시선을 개방 방주인 두소경에게 옮겼다.

두소경은 본래 불그스름한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변해

대뜸 자리에서 일어나 냉소를 터뜨렸다.

 

"광활한 무림에 기사이인(奇士異人)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거늘

어찌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전체 무림인의 뜻을 대표할 수 있겠소.

노부의 생각으로선 차후에 무림 각파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 한 곳에 모인 자리에서

이 일을 상의하는 게 옳을 것 같소.

이곳에서 지금 우리가 서명을 한다 해도 그것이 전체 무림인의 의견을 대표할 수 없을 것이오."

 

두소경은 비록 속으로는 불덩어리 같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제자들의 안전을 위해

우주광인처럼 주관적인 말은 하지 못했다.

사실 명명주재도 이곳에 모인 몇몇 사람의 서명으로 자신의 목적이 달성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다른 데에 있었다.

일단 우주광인, 천산삼로, 개방 방주 그리고 괴벽지호, 구루쌍마 등

흑백 양도의 고수들을 포섭하면 다른 한 가지의 음모를 수월하게 성공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제아무리 괴벽지호, 구루쌍마 등 흑도의 무림들이 적극 호응을 하며 환호성을 질러댔지만

서명을 한 사람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정파의 사람들은 대부분 화제를 돌려 외면하는 태도를 취했다.

묘수선고는 군호들의 그러한 태도에 눈동자를 무서운 살기로 번득였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반응에 불과할 뿐 다시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명명주재는 단지 이번 일을 제의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찬성하든 반대하든 여러분들의 자유예요.

절대 강요는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이번 일로 인해 피차 화기(和氣)를 상할 필요는 없으니

급한 일이 있는 분들은 떠나도 좋아요."

 

우주광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러자 두소경도 냉소를 치면서 그의 뒤를 따랐다.

이 두 풍운의 인물이 떠나자 나머지 사람들도 분분히 자리를 떠났다.

단지 사전의 계획에 의해 배치해 놓은 몇몇 흑도의 흉마만이 좌석에 남아

제각기 음침한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우주광인 등이 떠난 지 얼마 후 화옥묘 안에서 등골이 오싹해지는

웃음 소리와 함께 모든 등불이 일제히 꺼졌다.

위중평과 젊은 도사는 시야가 캄캄해지자

군마들이 필시 밖으로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잽싸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한참 동안 기다려도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젊은 도사는 그제서야 심상치 않은 것을 깨닫고 나직이 외쳤다.

 

"아뿔사, 우리가 속은 것 같소.

저 대전 안에는 필시 밖으로 통하는 다른 통로가 있을 것이니 어서 들어가 봅시다."

 

위중평도 역시 모종의 음모가 숨겨져 있다는 낌새에 예리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안은 어둠이 깔려 있는 가운데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바로 이 때 그의 귓전엔 모기만한 음성이 은은히 들려왔다.

 

"명명주재는 자기에게 불복하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이미 독침(毒針)을 설치해 놓았네.

지금쯤 우주광인 등은 위기에 처해 있을 것이니 동남쪽으로 속히 달려가 보게.

그리고 묘수선고의 꽃바구니를 각별히 유의하게…"

 

비록 가느다란 음성이지만 그에게는 뚜렷하게 들려왔다.

그는 전에 애산(艾山)에서 자기에게 소식을 알려준 동일 인물임을 알았다.

젊은 도사는 그가 멍청하니 서 있자 짜증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같이 긴박한 시기에 무엇을 그리 생각하고 있소?

무림동도들에게 무슨 변이 생겨도 자신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다는 것이오?"

 

젊은 도사는 몹시 못마땅한 투로 말을 내뱉고 나서 입을 삐쭉거리며 고개를 획 돌렸다.

그러한 거동은 여자애가 어리광을 부리는 것과 같아 위중평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방금 나에게 전음술로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신비스러운 음성은 다시 귓전을 간지럽혔다.

 

"어서 출발하지 않고 뭘 꾸물대고 있는가?

빈니는 급한 일이 있어 떠나야 하니 일이 끝나는 대로 수월암으로 들려 주게."

위중평은 그제서야 번쩍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전음술을 전개한 장본인은 다름아닌 남산파를 관장하고 있는 수월암주였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젊은 도사의 소매를 끌며 흡사 날짐승처럼

몸을 날려 곧장 동남쪽으로 갔다.

한편 우주광인 등은 노기충천된 기분을 안고 돌아가는 길을 재촉했다.

건곤일희가 홀연 입을 열었다.

 

"내 생각 같아선 우리에게 곧 귀찮은 일이 닥칠 거예요."

 

우주광인은 노기가 가시지 않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럼 놈들이 우리에게 기습이라도 가해 올 것 같단 말이오?"

 

건곤일희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기습뿐 아니라 아마 우리들의 목숨마저 노리고 있을 거예요.

명명주재는 여지껏 자기에게 불복하는 자를 살려 둔 적이 없으니까요."

 

두소경은 그들 부부의 대화에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내 비록 이젠 늙어서 뼈밖에 남지 않았지만 아직은 그들과 싸울 힘이 남아 있소…"

 

일진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조용한 밤하늘의 정적을 깨며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우주광인 부부와 두소경 사도는 그 비명 소리로 인해 안색이 크게 변해 걸음을 멈추었다.

 

"저 소리를 들었죠? 다른 무림 동도가 우리보다 앞서 변을 당한 거예요."

 

건곤일희의 빈정거리는 말을 뒷바침해 주듯 곧이어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두소경은 짙은 눈썹을 치켜 세우며 이를 갈았다.

 

"어서 달려가 봅시다. 오늘 밤 이 늙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놈들과 사생결단을 내야겠소."

 

우주광인도 커다란 소매를 떨치며 외쳤다.

 

"어서 달려갑시다."

 

외침과 함께 비명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곧장 달렸다.

삽시간에 그들은 어느 소나무 숲 앞에 당도했다.

소나무 숲 맞은편에서 고함 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왔다.

우주광인은 뒤에 있는 세 사람을 힐끗 쳐다보더니 쌍장을 교차시키며 곧 숲을 뚫고 들어갔다.

그러자 요란한 고함 소리 대신 고막을 자극시키는 뾰족한 노랫소리가 들려오며

사면팔방에서 한결같이 일신에 청색 옷을 입고 손에는 꽃바구니를 들었으며

어깨엔 약초를 캘 때 사용하는 호미를 멘 한 무리의 묘령소녀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흡사 산에서 약초를 캐다가 귀가하는 소녀처럼 흥겹게 노래를 부르며

한 걸음씩 네 사람을 향해 접근해 왔다.

때는 사경 무렵인지라 만물은 죽은 듯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이런 야밤중에 아녀자들이 산 속에서 떼를 지어 약초를 캘 리는 만무하니,

청의소녀들은 명명주재가 사전에 안배해 놓은 음모임에 분명했다.

우주광인은 눈을 부라리며 싸늘하게 외쳤다.

 

"너희들은 누구냐? 냉큼 비켜 서지 못하겠느냐!"

 

그러나 청의소녀들은 여전히 노래를 부르며 접근해 오는 기세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그녀들의 당돌한 행동에 우주광인은 다소 당황한 표정이었다.

 

"노부 앞에서 헛된 수작을 부리는 자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외침과 함께 청의소녀들의 머리 위를 가로질러 멀리 떨어져 내렸다.

그는 본래 성품이 고고하여 차마 청의소녀들에게 출수를 할 수 없어 피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신형이 막 땅에 내려서자마자 네 명의 청의소녀는 들고 있던 꽃바구니를

홀연 위로 살짝 떨쳤다.

그러자 금세 일련의 분홍색 광막이 펼쳐지며 무수한 은광이 싸늘한 파공음과 함께

우주광인을 향해 덮쳤다.

그는 뜻하지 않은 기습에 내심 섬뜩해졌으나 일세의 명숙답게 몸을 급속도로 회전시키자

무서운 기세로 뻗쳐 오던 은광은 분분히 사방으로 튕겼다.

기습을 당하게 되자 우주광인의 얼굴에도 대뜸 살기가 띠어졌다.

이 때 건곤일희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냉랭하게 외쳤다.

 

"너희들의 홍분은성(紅粉銀星)은 과연 위력이 대단하구나.

혹시 왕년에 한때 악명을 날렸던 천비파파(千臂婆婆)의 제자들이 아니냐?"

청의소녀들이 아무런 대꾸도 없이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접근해 오자

두소경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보아하니 명명주재에게 훈련을 단단히 받은 모양이군."

 

신형을 앞으로 살짝 미끄러뜨려 쌍장을 들어 올리며 단숨에 여덟 장을 전개했다.

경풍이 세차게 일며 철통 같은 장막은 앞에서 있는 네 명의 청의소녀를 향해 곧장 뻗쳐 갔다.

그러자 노랫가락이 불현듯 중단되며 네 자루의 호미가 허공에 떨쳐져

서로 빛을 교차시켜 일편의 광막을 조성했다.

두소경이 전개한 장막이 무위로 돌아가자 좌우 양쪽에 있던 청의소녀들은

전광석화와 같이 호미를 휘둘러 협공을 해왔다.

두소경은 냉소와 함께 몸을 피하기는커녕 왼손을 갈퀴처럼 구부려

오른쪽에서 공격해 오는 호미를 낚아 잡으면서 오른쪽 손목을 젖혀

한 갈래의 격공장을 격출해 왼쪽에서 날아오는 호미를 격진시켰다.

때를 같이하여 한참 다리를 풍차처럼 회전시켜 연거푸 일곱 가지의 초식을 펼쳤다.

이 몇 가지 동작은 단숨에 이루어진 것으로 신속할 뿐 아니라 대단한 위력이 담겨져 있었다.

과연 남북 개방의 총방주임에 손색없는 절묘한 솜씨였다.

그러나 청의소녀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두소경의 공세가 제아무리 맹렬해도 그녀들은 조금의 흩어짐 없이 나비처럼 몸을 날리며

두소경을 완전히 포위해 버렸다.

두소경은 이내 빗발치는 은색 광채 속에 휩싸여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본 상조화는 스승님의 안위가 염려돼 들고 있는 타구봉(打狗棒)을 떨치며 맹공을 퍼부었다.

개방의 타구봉법은 확실히 독특한 일면이 있어 일진의 눈부신 광채가 이는 곳에 청의소녀들의

은색 광막은 드디어 구멍이 뚫려 상조화는 쉽사리 두소경과 합류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순간의 변화일 뿐 삽시간에 다시 숨막힐 듯한 은색 광채 속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 광경을 본 건곤일희는 안색이 크게 변하여 비로소 청의소녀들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그녀는 두소경이 출수하면 능히 청의소녀들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태가 심상치 않게 변하자 그녀는 대뜸 우주광인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사태가 이렇게 되었는 데도 끝까지 신분만 내세을 생각인가요?"

 

이어 살짝 몸을 움직여 은색 광막을 향해 연달아 이 장을 격출해 냈다.

그녀의 공력은 우주광인보다도 한 수 위였다.

이번에 전개한 이 장은 비록 겉보기에 특이한 점이 없이 평범하지만

사실 무궁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두소경 사도를 협공하고 있던 황의소녀들은 막강한 잠력이 뻗쳐 오는 것을 느끼자

본능적으로 양쪽으로 갈라졌다.

이 틈을 타서 건곤일희는 다시 쌍장을 교차시켜 계속 웅후한 장풍을 격출했다.

흡사 성난 바다를 뒤엎듯 겯겯의 장영이 밀려가는 곳에 뾰족한 비명 소리가 들리며

이미 두 명의 청의소녀가 이 장 밖으로 날아갔다.

청의소녀들은 동료의 죽음에도 전혀 놀라거나 당황해 하는 기색이 없이

즉시 다른 두 소녀가 빈 위치를 보충하며 두소경 사도에 대한 협공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침묵을 지키고 있던 우주광인이 적시에 극지자광장(極地磁光掌)을 전개했다.

흡사 번개가 번쩍이는가 싶더니 가까운 위치에 있는 두 명의 청의소녀가 비명과 함께

숨을 거두었다.

두소경은 은색 광채에 포위되어 숨을 제대로 돌리지 못했으나 이 때 광인 부부가

제각기 바깥 쪽에서 공격을 전개하자 금세 압력이 감소돼 대갈일성을 지르며

정면에 있는 청의소녀를 향해 분노의 일 장을 격출했다.

청의소녀들이 펼친 신법은 거의 완벽한 것이었지만 일단 한쪽 귀퉁이가 뚫리자

자연히 빈틈이 생겼다.

두소경이 전개한 일 장을 맞은 청의소녀는 선혈을 토하며 떨어 졌다.

이렇게 되자 그녀들의 진법은 큰 혼잡을 빚게 되었다.

그러자 나머지 열두 명의 소녀들은 잽싸게 몸을 번득여 질서정연하게

세 사람이 각 일조가 되어 제각기 수중의 꽃바구니를 높이 쳐들었다.

우주광인은 앞서 전개된 홍분은성의 기습을 받은 적이 있고,

건곤일희는 더욱이 홍분은성의 내력을 잘 알고 있어 내심 섬뜩해지며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홍분은성은 오십 년 전 남북쌍마와 함께 명성을 떨쳤던 철비파파의 유명한 독문암기였다.

홍분은 일종의 단사(丹砂)와 미약을 혼합해 만든 것으로 조금만 체내에 들이키면

즉시 정신을 잃고 쓰러지게 되어 해약을 복용하기 전에는 제아무리 무공이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공력을 전부 상실하고 폐인이 된다.

그리고 은성은 수은을 극독에 배합해 만든 것으로 장풍을 뚫고 적에게 날아가는

특수한 효능을 지니고 있다.

일단 한 방울이라도 몸에 묻으면 즉시 중독되어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

천독문의 화골금사보다 더욱 무서운 암기라 할 수 있다.

청의소녀들은 세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동서남북 사면의 위치를 확보하고 네 사람을 포위했다.

그들은 심후한 공력을 지니고 있지만 사면에서 일제히 발해질 홍분은성에 대해서는

감히 경솔한 마음을 가질 수 없었다.

청의소녀들은 홍분은성을 발할 생각은 않고 단지 네 사람을 매섭게 노려볼 뿐이었다.

우주광인 등은 상대방이 모종의 행동을 취하기 전에 감히 경솔한 짓을 할 수 없어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역시 침묵을 지켰다.

쌍방은 이런 상태로 약 차 한잔 끓이는 시간을 대치했다.

그 때 청의소녀들이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 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소나무 맞은편으로부터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오더니

곧 한 무리의 인영이 달려 왔다.

묘수선고를 위시한 홍안노인 등이었다.

그들이 나타나자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청의소녀들은 이내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우주광인은 즉시 묘수선고를 향해 냉랭하게 호통을 쳤다.

 

"이게 대관절 무슨 짓이오? 강호의 이목이 두렵지도 않단 말이오."

 

묘수선고는 그의 말을 듣자 대뜸 간드러지게 웃어 젖혔다.

 

"호호호… 이제 남은 사람은 네 분뿐이니 모든 깃을 솔직하게 털어 놓아도 무방하겠군요.

간단하게 말해 명명주재의 뜻을 어기는 자는 살아 남을 수가 없어요. 이만하면 짐작이 가겠죠?"

 

우주광인은 안색이 싸늘하게 변해 이를 부드득 갈았다.

 

"너희들의 속셈은 벌써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주저할 필요가 뭐 있겠느냐? 어서 출수를 해라."

 

묘수선고의 입가엔 여전히 한 가닥의 미소가 감돌았지만

눈동자엔 무서운 살기가 감돌았다.

그녀는 홀연 앞으로 살짝 미끌어지며 허공을 향해 손을 가볍게 떨쳤다.

이 동작은 흡사 몸에 묻어 있는 먼지를 털 듯 지극히 자연스럽고 부드러웠지만

그 가벼운 동작 속에 무거운 살초가 들어 있다는 것을 우주광인이 모를 리가 없었다.

묘수선고는 명명주재 밑의 팔선 중 한 사람이니 만큼 범상치 않은 무공의 소유자였다.

우주광인은 처음부터 정면으로 대결하는 것을 원치 않아 비스듬히 몸을 피하는 동시에

상대방의 옆구리를 향해 격출했다.

 

"그 정도의 실력으로선 어림도 없으니 부부가 함께 덤비시지."

 

묘수선고는 여유있게 소리를 지르며 몸을 피하더니

건곤일희에게 넌지시 몸짓을 했다.

 

"부부는 동심일체이니 죽어도 함께하는 게 도리가 아니겠어? 뭘 꾸물대지?"

 

건곤일희는 오늘 밤 상대방을 처치하기 전에는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곧 아랫입술을 깨물며 묘수선고의 말을 받았다.

 

"좋다. 철비파파가 왕년에 강호를 진동시킨 절학이 어느 정도인지

이번 기회에 시험해 보겠다."

 

그녀가 청의소녀들과 똑같은 바구니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건곤일희는 그녀를 철비파파의 제자로 생각했다.

묘수선고는 상대방의 입에서 철비파파라는 말이 내뱉아지는 순간 안색이 대뜸 변했다.

 

'혹시 건곤일희는 나의 진짜 내력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그녀가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우주광인이 이미 십이 성의 공력을 끌어올려

극지자광장을 격출해 냈다.

건곤일희는 역시 때를 같이하여 계속 쌍장을 펼쳤다.

왕년 철비파파의 화신인 묘수선고의 무공은 고심막측하여

광인 부부가 협공을 전개하는 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풍과 장영 속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이며 도리어 기선을 먼저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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