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38. 죽음의 초청

오늘의 쉼터 2014. 6. 20. 17:13

38. 죽음의 초청 

 

 

위중평은 나타난 부인을 보자 우주광인의 부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안사를 올렸다.

풍진객도 술잔을 내려 놓고 일어나며 농담을 던졌다.

 

"아주머님께서 이렇게 말을 하시니 광인형도 눈을 크게 떠야겠습니다."

 

그러자 우주광인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나 광인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지만 만약 우리 집사람이 암산에 걸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 부부는 벌써 체내의 진기까지 합쳐 그 마두와 대항하려고 했네."

 

건곤일희는 만면에 교태로운 미소를 띠며 손을 내렸다.

 

"그렇게 서두를 건 없어요. 우리 앉아서 천천히 상의를 해보도록 하죠."

 

그제야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각자의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워져 모두들 술잔을 들고 막 건배를 하려고 할 때

위중평이 갑자기 소리쳤다.

 

"앗, 사람이 이쪽으로 급히 오고 있군."

 

광일거는 오룡하 옆에 있는 작은 산 옆에 건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혀 사람이 내왕하지 않았기에 방안에 있는 사람들은 위중평의 말을 듣자

즉시 정신을 가다듬어 자세히 귀를 기울였으나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우주광인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 아무도 없지 않은가?"

 

다시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 갑자기 두소경이 위중평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보였다.

 

"과연 자네는 이 노규화보다 더 고명하네."

 

건곤일희도 위중평을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었다.

이 때 우주광인도 들었는지 얼굴에는 대번 쑥스러움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소규화 상조화는 방으로 들어온 후부터 한 번도 말할 틈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사람이 온다는 말을 듣자 그제야 자신만만하게 입을 떼었다.

 

"제가 갔다 오겠습니다."

 

상조화는 다 낡아빠진 신발을 끌고 연기처럼 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잠시 후-.

상조화는 다른 한 명의 거렁뱅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들어온 거렁뱅이는 두소경에게 인사를 올린 후 한 통의 서신을 올렸는데

풍진객은 서신을 펴보다가 갑자기 안색이 확 변했고 잡초처럼 난

그의 텁수룩한 수염도 고슴도치처럼 빳빳하게 섰으며 두소경도 서신을 들여다보며

마냥 넋이 빠져 버렸다.

 

방안의 사람들은 모두 궁금했지만 이것은 그의 방 내의 일이므로 물어 보지 않았다.

잠시 후 우주광인이 입을 떼며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내게 말을 해선 안 되는 일인가?"

 

두소경은 노기가 충천하여 으드득 이를 갈아붙였다.

"명명주재간 구사옥부를 보내 나 노규화더러 시월 초하룻날 초경 무렵 화옥묘(華獄廟)로 와서 기다리라는 명령을 내렸소. 나 노규화는 여태까지 그 누구의 지시도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데 감히… 나는 절대 가지 않을 것이오."

건곤일희는 아까부터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 눈초리더니 냉랭하게 입을 떼었다.

"이 일은 너무 그렇게 서두르지 않는 게 좋겠어요. 어쩌면…"

이 때 지붕 위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주광인은 듣거라. 명명주재께서 옥부를 전하시여 네게 할 말이…"

나타난 자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검은 광채가 바람을 가르며 번쩍이자 어느새 구사옥부가 한 차례 파공음과 함께 날아와 아주 단정하게 상 위에 놓여져 있었다.

이처럼 커다란 것이 공중에서 떨어졌어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보아 나타난 사람의 공력이 얼마나 기묘한가를 알 수 있었고 바로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이 옥부를 던지는 순간 위중평은 이미 전광석화와 같은 동작으로 지붕 위를 향해 덮쳐가고 있었다.

나타난 사람은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온통 검은 옷으로 싸고 있었는데 다만 복면 사이로 나타 난 눈에서 두 줄기의 새파란 광채를 밝히고 있는 것이 한 눈에 소름이 오싹 끼치게 만들었다.

흑포사나이는 위중평이 덮쳐오자 아주 가벼운 신법으로 피했으나 위중평은 일신의 무공이 심후한 사람인데 어떻게 그가가 볍게 도망치도록 놔두겠는가?

"흥, 어림도 없다."

위중평은 일진의 냉소를 날리며 순식간에 다섯 초를 격출해 내는 순간 예리한 바람이 앞으로 폭사되어 나가면서 매 초마다 정말 신랄하고 심후하기 그지없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 흑의인도 그처럼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닌 듯 황급히 몇 초를 시전해 내었는데 무슨 신법을 썼는지 모르게 어느새 공격권 내에서 탈출을 하여 가볍게 발 끝으로 지붕을 차더니 땅 위의 내려서는 것이었다.

위중평은 그의 놀라운 신법에 암암리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사람을 잡아 명명주재의 내정을 알아내고 말리라 결심을 세웠다.

흑의인이 막 땅에 내려서자 위중평은 일식의 은하성사(銀河星瀉)를 시전해 덮쳐 내려갔으나 흑의인은 교활하기 그지없었다.

"앗!"

하는 낮고 짧은 기합 소리를 터뜨리는 것과 동시에 갑자기 몸을 땅바닥에 바싹 눕히더니 타구법을 이용해 풍차처럼 이 장 밖으로 굴러갔고 이어 흑의인은 두 손으로 땅바닥을 짚더니 쏜살같이 강쪽으로 달려갔는데 이 한 수는 위중평이 예상하던 것과는 크게 빗나간 신랄한 것이어서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민 끝에 크게 소리쳤다.

"자, 받아라!"

순간 사람의 혼을 빼앗을 듯한 일성의 기합 소리가 하늘을 가르며 터져 나오더니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찬란한 마영(魔影)이 흑의인을 향해 덮쳐갔다.

"으악!"

흑의인은 단번에 처절한 비명을 허공에다 날리며 쓰러졌다.

위중평은 이 때 한 번도 써보지 않았던 마영은고루를 발출해 낸 것인데 이 때 두소경과 우주광인 부부가 한꺼번에 쫓아 나와 이 마영은고루의 위력을 보더니 크게 놀랐다.

은고루는 흑의인의 어깨를 관통시키고 있었는데 이미 기절을 해 버린 뒤였다.

풍진객은 손을 내저으며 명령을 내렸다.

"소규화, 어서 그를 안으로 업고 가거라."

흑의인을 안으로 데리고와 은고루를 빼준 후 약을 발랐다.

이어 그의 복면을 막 벗기는 순간이었다.

"앗!"

사람들은 모두 경악의 외침을 터뜨렸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는데 흑의인은 다름이 아닌 바로 이미 은퇴를 한 화북오성(華北五省) 녹림(綠林)의 총표파자(總標把子) 신유(神兪) 곡운비(谷雲飛)였다.

사람들이 모두 의아한 가운데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신유 곡운비는 이윽고 눈을 떠 사방을 살폈다. 그는 천천히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두소경은 원래 그에게 몇 마디 물어 보려고 했는데 그의 어린 태도를 보자 입을 열기가 미안해 다시 입을 다물었으나 물어보지 않을 수 없어 조심조심 어조를 낮추어 입을 떼었다.

"곡형, 상세는 좀 어떻소? 우리는 어린 친구가 곡형인 줄도 모르고…"

두소경이 여기까지 말하자 곡운비는 갑자기 침상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며 미친 듯이 웃었다.

"하하하… 이런 상처쯤으로 나의 목숨을 가져갈 수는 없다. 너 규화야, 고양이가 쥐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척하는 자비를 베풀 필요는 없다."

풍진객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능글맞게 대꾸했다.

'기것은 정말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주니까 보따리 달라는 식이로군. 자, 내 당신에게 소개해 드리지. 이 사람은 신주검성의 후인인 위소협이오. 아마 당신은 여태까지 못 만나 봤을 거요."

위중평은 즉시 앞으로 나서서 포권의 예를 취했다.

"아까는 실례가 많았으니 널리 이해해 주십시오."

곡운비는 다시 광폭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 나의 무예가 부족해서 그런 것인데 소협을 나무라겠소? 그런데 내 한 가지 묻고 싶은게 있는데 그 은침은 바로 자선마군의 은고루가 아니오?"

위중평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습니다."

곡운비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물었다.

"그렇다면 소협은 바로 그의 전인이겠구려."

위중평은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저는 다만 그것을 우연히 얻었을 뿐 그 어르신네에게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 장백파에 속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화산파의 전인이지요."

순간 곡운비의 얼굴에 한 가닥 경악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화산파?"

그러나 이내 다시 원상태로 회복해 매우 다정다감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듣기론 소협이 이미 명명주재와 일 년 후의 약속을 했다던데 이 일은 보통 일과 커다른 차이가 있는 것이니 매우 조심을 해야 할 거요."

곡운비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비록 옥탑단장인의 공력이 매우 높다고는 하지만 몇 사람의 힘으로 명명주재에게 대항을 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것이나 마찬가지요."

위중평이 싸늘하게 코웃음을 칠 뿐 입을 열지 않자 곡운비는 그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줄로 알고 다시 말을 꺼냈다.

"명명주재의 허무전 안에는 칠성과 팔선 그리고 열세 명의 심복 부하가 있는데 모두들 공력이 심후할 뿐 아니라 바람과 구름을 부를 만큼 신통력이 있소. 그래서 나같은 공력을 지닌 자는 그저 그의 밑에서 심부름을 하는 것뿐이오."

우주깡인은 다시 발작을 시작하려는 듯 크게 웃어 젖혔다.

"으하하하… 축하하오. 생각지도 않게 우리의 곡총표파자께서 명명주재의 잔심부름꾼이 되다니…"

곡운비는 냉소를 날리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흥, 너무 비꼬지 마시오. 난 다만 이 구사옥부를 전하러 왔을 뿐이니까. 시월 초하룻날에 당신이 오든 말든 그건 당신이 선택할 문제요. 난 이만 가야겠소."

곡운비는 방안의 사람들에게 가벼운 인사를 올리더니 즉시 밖으로 나가자 풍진객이 뒤에서 쫓아 나오며 소리쳤다.

"이봐, 늙은 친구, 그냥 가는 거요?"

곡운비는 갑자기 몸을 홱 돌리더니 눈을 부릅뜨면서 노기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렇다면 날 이곳에다 잡아둘 생각이오?"

두소경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오. 다만 내가 알고 싶은 건 화옥묘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오라는 것인지 하는 거요."

곡운비는 냉엄하게 대꾸했다.

"이 일은 내가 가르쳐 줄 성질의 것이 아니오. 당신들 뿐만 아니라 다른 고수들도 많으니까."

그러다가 위중평이 두소경의 옆에 나와 서자 그를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

"소협, 아까 내가 한 말에 대해 신중히 생각하길 바라오. 내가 그렇듯 자세히 말해 준 것은 모두 자선선배님을 봐서 그런 거요. 그렇지 않다면 나는 절대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을 거요."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의 몸은 허공으로 몇 번 톡톡 뛰는 것 같더니 이내 그의 그림자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사람들은 다시 방안으로 들어왔다.

후면협심 풍진객은 의자에 털썩 주저 앉으며 천정을 향해 긴 한숨을 뿜어내었고 우주광인은 그의 그런 태도가 몹시 이상한 듯 다가서며 물었다.

"노규화, 평소에는 호기가 등등해 무슨 일이든 척척 해 내더니 오늘은 어째서 그처럼 풀이 죽었나?"

후면협심은 무엇엔가 회의를 느끼는 듯 침통하게 내뱉았다.

"곡운비는 화복오성 무림에서 쟁쟁한 이름을 떨치던 사람이며 공력은 우리와 별 차이가 없는데 터무니 없이 명명주재의 사자라…"

우주광인은 냉소를 치며 말을 받았다.

"그가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타락시켰으나 말해야 소용이 없는 일이네. 아까 만약 내 뜻대로 그를 제지했으면 강호의 괜한 화를 면할 수 있었을 텐데…"

후면협심은 천정에서 시선을 떼며 급히 고개를 저었다.

"나 노규화는 그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아니네, 다만 내가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그와 같은 고수가 겨우 허무전 안에서 사자라는 직책밖에 못 맡았으니 그 칠성과 팔선이라는 무사들은 얼마나 공력이 높을까, 그거네."

우주광인은 노기가 등등해 갑자기 크게 소리쳤다.

"자네가 그처럼 겁이 난다면 어서 화옥묘로 가서 그의 명령에 따르도록 하게, 나 광인은 절대 가지 않을 테니까."

풍진객도 벌떡 일어서며 눈알을 부라렸다.

"나 노규화가 이 나이까지 강호를 행도했지만 아직 겁이 뭔지 모르고 있었네. 자네는 이 노규화를 그처럼 얕보긴가?"

두 사람이 입씨름을 하는 동안 전혀 개의치 않고 입을 다물고 있던 건곤일희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입씨름을 벌일 때가 아니예요. 저의 생각으론 모두 가는 것이 좋겠어요."

우주광인은 급히 몸을 돌리며 물었다.

"그건 무엇 때문이오?"

건곤일희는 중인의 시선을 모으며 또박또박 입을 떼었다.

"명명주재가 이번에 당신들 같은 고수를 모집하는 건 필경 어떤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그건 아마 일종의 음모를 진행시키는 건지도 모르죠."

건곤일희는 잠시 눈을 깜박이며 생각을 굴리다가 다시 말했다.

"어쩌면 명명주재 자신의 구사옥부가 과거와 여전히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가 시험을 해보는 건지도 모르죠. 어쨌든 우리가 그와 공개적으로 대항한다는 말을 아직 꺼내지 않은 이상 일단 가보는 게 좋을 거요. 가서 기회를 보아 일을 시행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우주광인의 성질은 매우 괴팍스러워 누구의 말도 안 듣는 그였지만 이상하게 자기의 부인 건곤일희에게만은 일종의 경외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어 복종을 하는 편이었는데 그것은 건곤일 희가 일신에 뛰어난 무공을 지리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은 은거하여 강호에서 없지만 한 공문의 노협으로부터 불문비전(不問秘傳)을 전수받아 그 무공이 우주광인보다 한 수가 높았고 사람됨은 매우 꼼꼼하고 신중하여 일단 일을 맡게 되면 그처럼 냉정하고 판단력이 빠를 수가 없었으며 앞날을 예측하는 것이 마치 신과 같아 제갈공명이라는 별호를 얻을 지경이었다.

건곤일희가 이렇게 말하자 우주광인은 즉시 고개를 돌려 두소경에게 물었다.

"자네의 뜻은 어떤가?"

풍진객은 언제 화를 내었나 싶을 만큼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핫하하… 아주머님께선 여제갈이라는 명칭까지 갖고 계시는데 말하는 것이 틀릴 리가 있겠는가? 나 노규화는 아주머님의 뜻을 따라야지."

건곤일희는 유유히 입을 떼었다.

"두대협께선 너무 과찬의 말씀을 하시는군요. 우리 갈 것 같으면 지체하지 알고 가야 해요. 만약 늦어지면 늦는 만큼 시간이 모자랄 거예요."

말을 끝내고 나서 그녀는 위중평에게 시선을 돌렸다.

"위소협의 뜻은 어떤가요?"

화옥묘와 화산파는 아주 가까운 사이인데 이런 커다란 일까지 벌어졌으니 위중평이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그리고 홍옥도 이미 다시 수중에 넣었고 안미옥 또한 한 고인에게 구출되었으므로 당분간 마음을 놓을 수 있으니 가보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후배 역시 명명주재의 동정을 살펴보고 싶지만 선대들과 같이 동행을 하게 되면 불편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암중으로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건곤일희는 생각한 바가 있었는 듯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아무래도 언젠가 우리는 그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해요. 소협은 복장을 약간 바꾸어 그들의 이목을 피하는 게 어때요?"

위중평이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상조화가 그를 밀며 히죽 운었다.

"나와 같이 소규화로 변장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후면협심은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도 상조화를 꾸짖었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 남의 귀한 집 공자를 거렁뱅이로 만들다니…"

위중평이 급히 뒤이어 말했다.

"아니, 전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아무튼 명명주재의 이목을 넘기기만 하면 되니까요."

소규화는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는 듯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하하하… 그럼 날 따라오시오. 내 당신을 나와 똑같이 변장시켜 줄 수 있으니까."

본래부터 변장술은 이들 개방에서 손꼽히는 기술이기에 얼마 있지 않아 상조화는 이미 위중평을 입과 눈이 비뚤어지고 밥을 얻어 먹지 못해 깡마른 것 같은 소규화로 변장시켰다.

위중평은 거울로 자기의 모습을 비쳐 보다가 하마터면 놀라 기절을 할 뻔했는데 변장술은 위중평 자신도 자기인 줄 모를 만큼 기가 막히도록 뛰어난 것이었다.

성질이 급한 우주광인은 이미 떠나기로 결정이 되자 광인 부부는 말을 타고 출발을 하고 위중평은 두소경 사도를 따라 걸어서 길을 떠났는데 사람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단의 거리를 유지하며 달렸다.

소규화와 위중평이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가는 사이 어느덧 화옥묘와 멀지 않은 한 작은 마을에 당도했다.

이날이 바로 구사옥부를 보내 약속한 날의 밤인 것이다.

초경 무렵-.

갑자기 다섯 개의 검은 그림자가 나는 새처럼 현무전(玄武殿)에 내려서고 있었다.

전 내에 들어서던 그들은 갑자기 모두 경악에 가득찬 표정을 지었으나 그 중 헝클어진 머리에 고슴도치 수염을 기른 늙은 거지가 냉소를 날리며 소리쳤다.

"도대체 이것은 정도의 인물이 해야 할 일이 아니오."

그러자 다른 한 노인이 큰소리로 말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냈다면서 어떻게 한 사람도 보이지 않을까?"

노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 밖에서 일진의 깡소가 터져 나오더니 크고 작은 사람들이 들어왔는데 전 내에 다섯 사람이 있는 것을 보자 깜짝 놀라며 그 중의 교활하게 생긴 노인이 앞으로 천천히 나오며 소리내어 운었다.

"하하하… 정말 생각지도 않게 우내쌍광 광인형께서 여기에 와 계셨구려 아, 이분이 바로 건곤여협이시오"

광인 부부는 본래부터 흑도의 인물이라면 달갑게 여기지를 않았는데 더욱이 과벽지호(戈壁之弧) 같은 교활한 인간이 짐짓 친절하게 말을 걸어오자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과벽지호는 이번엔 천천히 노규화의 앞으로 다가가 포권을 했다.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남북 개방 총방주께서도 이곳으로 달려 왔습니까?"

두소경은 천성이 능글맞은 위인이라 웃으며 대답했다.

"알면서도 묻는구려. 오늘 밤 화옥묘에 별다른 뜻이 있어 왔겠소? 모두 구사옥부 때문이지…"

과벽지초는 간사스럽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요. 내가 이 일을 잊어버리고 있었구려."

이들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위중평은 나타난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다.

강호의 경험이 위중평으로 하여금 이 사람들이 강호에 쟁쟁한 인물들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이내 전 안으로 다시 오륙 명의 사람들이 계속 들어왔다.

그들은 명명주재의 이 처사에 불만을 털어 놓기로 했지만 강호의 사람들은 워낙 그 심계가 음흉한 탓에 도대체 무슨 속셈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마음 속으로는 비록 분노를 느끼고 있었지만 누구도 감히 입 밖으로 노출시키지 못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이경이 훨씬 넘었다.

아직 아무런 동정이 없었다.

우주광인이 참지 못하고 막 발작을 하려고 하는데 건곤일회가 뒤에서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 끌었다.

건곤일희의 이런 행동은 우주광인으로 하여금 몹시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으나 이미 어떤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모두 입을 다물었다.

순간 전 안에는 쥐죽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남악쌍웅(南嶽雙雄) 여씨(呂氏) 형제가 참지 못하고 노기를 터뜨렸다.

"우리가 천리 길을 멀다 않고 달려온 것만 해도 자신들의 자존심을 죽이는 일인데 이렇게 사람을 무시하다니…"

그는 소리를 치면서 급히 지붕 위로 몸을 날렸다.

그 때였다.

"이놈!"

하는 폭갈이 터져 나오더니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두 마디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남악쌍웅 형제가 실이 끊긴 연처럼 지붕에서 뚝 떨어졌다. 남악쌍웅은 강호에서 이름을 떨친 지 이미 오래인데 어이없게도 이처럼 비참하게 죽고 만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출수한 사람의 무공이 얼마나 높은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순간 지붕 위에서 싸늘하기가 살얼음을 쪼개는 듯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이제 명명주재의 사자가 곧 도착할 것이니 어느 한 사람이라도 움직이면 안 되오. 그렇지 않으면… 남악쌍웅의 꼴이 될 것이오."

우주광인과 후면협심 풍진객은 모두가 일대의 종사이자 강호를 일생 동안 종횡하던 괴걸들이다.

그런데 어찌 이처럼 사람을 얕보는 소리에 가만히 있겠는가.

두 사람은 분노가 용광로처럼 끓어올라 막 시선을 돌리자 딱 마주쳤다.

"흥!"

두 사람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막 몸을 날려 덮쳐가려고 했으나 건곤일희가 그들을 잡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조금만 더 참으시오."

이 때 위중평과 소규화는 냉엄하게 정세의 변화를 보고 있었다. 그 때 다시 한 차례 폭갈과 함께 어둠을 찢는 참혹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며 달려나갔던 사람들은 모두 땅바닥에 떨어져 그대로 즉사를 했다.

죽음-.

그것은 역시 무서운 것이다.

지붕 위에서 다시 차가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명명주재께서 여러분을 이곳에 초청한 것은 절대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오. 다만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상의하려는 것뿐이오. 만약 당신들이 또 경거망동을 한다면…"

이번에는 극히 부드러운 음성이었으나 싸늘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소름이 끼치게 만들었다.

다시 대전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그 때 누군가 위중평의 옷소매를 끌며 가볍게 입을 떼었다.

"나를 따라 오시오."

위중평은 다만 인영이 번쩍거리는 것만 느꼈을 뿐이었다.

그래서 노규화 등에게 알려 줄 여유도 없이 초음신법을 전개해 눈 깜박할 사이에 뒷담을 넘어 묘 밖으로 나왔다.

이 때 어디선가 네 흑의인이 나타나 앞에 가는 인영을 가로막았다.

"얍!"

위중평은 일성의 고함을 터뜨리는 것과 동시에 흑의인들을 향해 덮쳐갔으나 다시 두 명의 흑의인이 나타나 좌우로 그를 공격해 들어 오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앞서 달리던 인영은 대체 무슨 신법을 썼는지도 모르게 포위망에서 빠져 나와 냉랭하게 소리쳤다.

"받아요!"

그러자 한 개의 시커먼 물건이 위중평의 정면을 향해 곧장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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