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34. 정해파란(情海波瀾)

오늘의 쉼터 2014. 6. 20. 16:40

 

34. 정해파란(情海波瀾)

 

 

 

석양은 완전히 서산마루로 기울어져 대지에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고

아울러 바람도 차가워져 절로 한기를 느끼게 했다.

위중평은 흘연 자기네들이 너무 오랜 시간을 지체했다는 것을 깨닫고 속으로 자신을 책망했다.

 

'정말 내가 정신이 나갔군.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대관절 무엇 하러 이곳에 멍하니 서 있었지?'

그러자 그는 맹렬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한 번 훑어보더니 냉랭하게 외쳤다.

 

"너희들은 어디에서 온 누구냐? 만약 나를 표적으로 삼고 왔다면 어서 출수를 해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이만 떠나야겠다."

 

말을 끝내자 금루선연의 소매를 끌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으나 주위에 있는 흑포괴인들은

여전히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단지 형형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노려볼 뿐이었다.

위중평은 경각심을 높이고 계속 앞으로 다가갔다.

쌍방의 간격은 자연히 단축되어 갔다.

이십 장, 십 장, 드디어 일 장 가량 떨어졌을 때 앞쪽에서 있던 네 명의 흑포괴인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쌍장을 들어 올려 앞으로 밀어냈고 장풍은 즉시 한 갈래의 무지막한

철벽이 되어 곧장 앞으로 뻗쳐 왔다.

위중평은 이미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던 순간이므로 흑포괴인들이 쌍장을 밀어 올리는 것을 보자

 용이 울부짖는 듯한 기합을 토하며 가슴으로부터 쌍장을 쭉 밀어냈다.

이 일 장은 일신의 공력이 내포되어서 위력이 어마어마했다.

장풍이 뻗어 가는 싸늘한 파공음이 들리는 가운데 이어 천지개벽하는 듯한 폭음이 뒤따르며

허공엔 연신 회오리 바람이 일며 땅에는 부러진 나뭇가지가 공중에서 비무를 했고

네 명의 흑포괴인은 흡사 술에 만취된 듯 비틀거리면서 뒤로 연거푸 칠팔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들의 표정을 똑똑히 볼 수는 없었지만 비틀거리는 신형으로 미루어 모두 내상을 입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위중평도 완전히 우세를 차지하지 못하며 전광석화와 같이 뒤로 일 장 가량 물러나

비로소 반탄지력을 제거할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가슴 부분에 은은한 통증을 느껴 황급히 진기를 끌어올려 거꾸로 용솟음쳐 오르는 혈기를 억제하자

 금루선연이 그의 곁으로 날아와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나직이 물었다.

 

"평상공, 괜찮겠어요?"

 

위중평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곧 눈을 감아버렸는데 그의 이러한 행동은 내상을 입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금루선연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한편 마음이 더욱 다급해졌다.

그녀가 곁눈질로 주위를 훑어보니

조금 전에 위중평과 장풍을 교환했던 네 명의 흑포괴인은 이미 온데간데 없고

대신 다른 네 명이 그 자리에서 있었으나 그들도 역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서 있을 뿐이었다.

금루선연은 두뇌가 명석하고 지혜가 뛰어났지만

이번 일에 대해서만은 상대방이 대관절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위중평은 필시 내상을 입고 스스로 운공조식하여 치료를 하고 있을 텐데

이 틈을 타서 만약 상대방이 다시 공격을 가해 온다면 사태는 심상치 않게 변할 것을

염려하여 긴장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염려하는 것과는 달리 흑포괴인들은 차 한 잔 끊일 신간이 경과되도록

계속 돌부처처럼 몸이 굳어져 있었다.

그 즈음, 위중평은 운공조식하여 내상을 완전히 치료하고 번쩍 눈을 떴다.

그도 역시 흑포괴인들의 상식에서 벗어난 침묵에 대해 영문을 알 수 없어 멍해지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이곳에 남아 있을 수도 없는 문제이므로 위중평은 곧 금루선연에게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저들은 우리를 이곳에 붙잡아 둘 심산인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뚫고 나가야겠소."

 

말을 끝내자 금루선연과 함께 몸을 솟구쳐 흡사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빠른 속도로

정면에 버티고 서 있는 네 명의 흑포괴인에게 덮쳐가며 제각기 쌍장을 떨쳤다.

그들 두 사람은 모두 옥탑절학을 지니고 있는 절정의 고수였다.

더군다나 위중평은 여러 문파의 특기를 겸비했으며 내력 또한 심후하기 그지없어

일단 연합공격을 펴자 어떠한 고수라 할지라도 정면으로 맞서기가 어려웠으나

흑포괴인들은 일반 무림인과 달라 괴이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진면목으로 강호에 나타난다면 한결같이 명성이 쟁쟁하게 알려질 인물일 것이다.

그들은 위중평과 금루선연이 일제히 공격을 가해오는 것을 보자

조금도 당황해 하지 않고 네 사람이 서로 손을 교차시켜 장풍을 격출했고

그러자 한 채의 작은 장산(掌山)이 형성되며 싸늘한 파공음과 함께 앞으로 밀려왔다.

위중평은 연거푸 다섯 가지의 초식을 펼쳤으나 한 걸음도 더 앞으로 전진할 수 없었다.

이 때 뒷쪽에서 다시 광염이 일며 으스스한 괴소가 들려 왔다.

등 뒤에 있는 네 명의 흑포괴인이 다시 공격을 전개한 것이다.

위중평과 금루선연은 부득이 몸을 돌려 그들을 상대해야만 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로

위중평은 한 걸음도 앞으로 옮기지 못했다.

흑포괴인들은 전후좌우에서 계속 번갈아가며 공격을 전개했다.

하지만 그들은 위중평과 금루선연을 죽이거나 손상시킬 생각이 없고

단지 두 사람을 붙잡아 두는 데 있는 것 같았다.

위중평은 여지껏 수많은 적을 상대해 왔지만 오늘같은 이런 무서운 적수는 처음인 것 같았다.

그는 장풍으로선 도저히 포위망을 뚫고 나갈 수 없음을 알고 무기를 뽑아 최후의 결단을

내리려 했으나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에 갑자기 일진의 광소 소리가 들려오며

골짜기 안으로부터 바람과 같이 다섯 명이 달려나왔다.

그들은 위중평에게서 약 사오십 보의 간격을 두고 신형을 멈추더니

그 중 한사람이 낭랑하게 외쳤다.

 

"위형, 잠깐 싸움을 멈추고 우리 얘기나 나누지요."

 

이 사람의 음성은 옛친구를 만난 듯 부드러웠다.

위중평은 상대방을 자세히 보자 앞장서서 말을 한 자는 다름아닌 전에 만난 적이 있는

소요공자임을 대번에 알 수 있었고 그의 뒤에 일렬로 서 있는 사람은 홍, 환, 남, 백

제작기 다른 색깔의 장포를 입은 노인이었다.

위중평은 흑포괴인들을 시켜 자기를 붙잡아 둔 장본인이 바로 소요공자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즉시 냉소를 터뜨렸다.

 

"알고 보니 이런 장난을 한 장본인이 바로 너였군.

여러 말 할 필요없이 있는 실력을 전개해라."

 

소요공자는 위중평의 냉랭한 말을 듣고서도 추호의 불쾌한 기색도 없이 도리어 미소를 지었다.

 

"잠깐만, 우선 한 마디 묻겠으니 양심적으로 대답해 주길 바라네.

자네는 한 남자가 몇 명의 아내를 거느려야 옳다고 생각하나?"

 

위중평은 상대방의 뚱딴지 같은 질문에 멍해지고 말았다.

 

"그것을 묻는 뜻이 무엇이냐?"

 

"물론 중요한 이유가 있네. 솔직히 말해 명명주재는 자네의 목숨을 노리고 있지만

그것은 윗세대의 일이니 나하고는 하등의 상관이 없네.

그러나 우리 젊은 사람들 간의 문제는 분명하게 매듭짓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하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네가 묻고 있는 질문에 답변을 해 주겠다.

나는 어디까지나 일부 일처를 찬성하는 사람이다."

 

소요공자는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 말은 옳은 말이지만 생각도 정말 그 말과 일치하는가?"

 

위중평은 상대방이 지금 무슨 꿍꿍이 속을 부리고 있는지를 몰라 절로 울화가 치밀었다.

 

"닥쳐라! 나는 아직 생각과 위배되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소요공자는 위중평을 새삼스럽게 주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잘됐다.

너의 곁에서 있는 낭자는 아마 신가보의 금루선연이겠군?

그녀의 부친은 이미 그녀를 한 남자에게 주기로 결정을 하고

또한 상대방에게 언약까지 했는데 자네는 그녀를 빼앗아 갔네.

그 일로 인해 한 남자는 거의 미치광이가 되어 자네를 찢어 죽이고 싶도록 원망하게 되었네."

 

소요공자는 위중평과 금루선연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하고 별 관계가 없는 일이니 더 이상 얘기하지 않겠네.

내가 자네와 단판을 짓고자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일세…"

 

그의 말이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금루선연은 도저히 더 들을 수 없어 뾰족하게 외쳤다.

 

"듣자하니 못하는 소리가 없군.

내가 언제 누구와 혼약이라도 했단 말이에요?"

 

소요공자는 연신 손을 흔들며 느긋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낭자, 중간에 끼어 들지 마시오.

나는 낭자와 위형이 백년가약을 맺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사람이오.

내가 원하는 것은 위형이 다른 한 여자를 포기하라는 것이오."

 

금루선연은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자연히 신경이 쏠리다가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위중평을 쳐다보았다.

위중평은 비록 몇몇 여자와 사귀고 있지만 그동안은 애정문제에 대해

생각할 심적인 여유가 없었는데 지금 소요공자의 엉뚱한 말을 듣자

검미를 치키며 냉랭하게 외쳤다.

 

"무슨 일인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보아라.

이곳에서 너희들과 쓸데없는 잔소리를 늘어놓을 시간이 없으니까."

 

소요공자는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이 없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는 추혼천녀가 이미 나와 은연중에 백년가약을 맺기로 약속이 돼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그런데 자네가 그녀를 빼앗아 가다니…

이젠 내가 말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는가?

흐흐흐… 목숨이 아까우면 이 자리에서 다시는 추혼천녀와 만나지 않겠다고 나한테 맹세를 해라."

 

위중평은 추혼천녀에 대해서는 단지 우정이 있을 뿐 애정 따위의 감정에 젖어 본 적이 없었지만

위중평이 추혼천녀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 왔고 또한 구명지은까지 입었다.

그 은혜에 보답하려면 자연히 그녀를 만나야 하거늘 어떻게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상대는 현재 옹졸한 마음으로 자기에게 협박을 하고 있지 않은가.

위중평은 곧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이 위중평을 세 살 먹은 어린애로 취급하는 모양이군.

나는 추혼낭자와 단지 우정이 있을 뿐 다른 일은 전혀 없다.

그리고 설사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 해도 도대체 너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냐?

내가 너의 위협에 호락호락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느냐?

어림없는 얘기다!"

 

소요공자는 그의 말이 떨어지자 돌연 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보아하니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모양이구나,

생명은 고귀한 것이다.

약간의 시간을 줄 테니 다시 한 번 신중히 생각해 보아라."

 

홍, 황, 남, 백 제각기 다른 색깔의 장포를 입고 온 네 명의 괴인과 흑포괴인들은

소요공자가 히죽 웃는 것을 보자 살기(殺氣)가 발동되었다는 것을 알고

제각기 공력을 끌어올려 만반의 응전태세를 갖추었으나

그는 일 장의 혈전을 모면할 수 없음을 알고 냉소를 치는 동시에 싸늘하게 외쳤다.

 

"만반의 태세를 갖춘 것 같은데 그럼 이 어르신네가 먼저 출수를 하겠다."

 

이어 허공에 한 줄기의 자색 광채가 번득이는가 싶더니

위중평은 자옥선을 수중에 꺼내들어 살짝 펼치자

차가운 바람이 뭉개구름처럼 표현히 앞으로 뻗어갔다.

소요공자는 그와 때를 같이하여 돌연 큰소리로 외쳤다.

 

"잠깐만, 너에게 또 한 가지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겠다.

명명주재는 일 년 후에 너의 목숨을 앗아가겠다고 장담을 했으니

너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일 년 후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네가 나의 조건을 들어준다면 명명주재에게 간청해 죽음을 삼 년으로

연기해 줄 자신이 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라."

 

그는 어려서부터 명명주재를 따라다녔기 때문에 명명주재가 일단 누구의 죽음을 결정한다면

한 사람도 살아남은 자가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으므로 위중평에게 이런 조건을

제시하는 것을 제딴엔 굉장한 선심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상대방인 위중평이 듣기에는

일종의 지독한 모독이 아닐 수 없었기에 위중평은 울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몸을 솟구치며 싸늘하게 외쳤다.

 

"오늘 밤을 넘기면 그 주둥아리를 놀릴 수 없을 것이니 마음껏 지껄여 보아라."

 

그의 신형이 막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자 오색 무지개가 허공을 그렸고 금루선연도

한 자루의 은광이 번득이는 단검을 꺼내 위중평을 호응해 정면에 있는 네 명의

흑포괴인에게 덮쳐갔다.

이번에는 두 사람 모두 무기를 수중에 들고 있으므로 위력이 전보다 훨씬 커

한 갈래의 자색 화염은 흑포괴인들이 전개한 장벽을 뚫고 곧장 앞으로 뻗어갔고

이어 처절한 비명 소리가 어두운 밤하늘에 메아리쳐 퍼지며 한 명의 흑포괴인은

자옥선의 진력에 의해 몸이 허공으로 날아 이 장 밖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은색 광채가 스쳐가는 곳에 한 명의 흑포괴인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땅에 쓰러졌다.

위중평과 금루선연이 무기의 이점을 살려 연거푸 두 괴인을 죽이자

주위에 있는 나머지 흑포괴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성난 고함을 지르며

협공을 해 왔기에 삽시간에 허공은 완전히 장풍의 권영에 휩싸였다.

위중평은 내심 소요공자의 행동이 괘씸하다고 생각하고 이미 사생결단을 낼 각오를 하고

있었으므로 자옥선을 떨쳐 잽싸게 세 가지 초식을 전개해 흑포괴인들을 일단 뒤로 격퇴시킨 후

즉시 허공으로 삼 장 높이 솟구쳐 허공을 가로지르며 곧장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소요공자를 향해 덮쳐갔다.

소요공자에게서 약 여섯 자 가량 떨어졌을 때 느닷없이 한 갈래의 막강한 기류가 얼굴을 향해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위중평은 몸이 허공에 떠 있으므로 도저히 피할 수가 없어 황급히 수중의 자옥선을 떨쳐

그 반탄의 힘을 이용해 다시 허공으로 일곱 자 정도 치솟아 올랐다가 땅에 떨어졌다.

이 때 소요공자는 여전히 만면에 미소를 띠며 제자리에 서 있었고

홍, 황, 남, 백 네 괴인은 이미 위중평을 표적으로 하여 부채 모양으로 포위망을 구축했다.

그 중에서 앞쪽에서 있는 홍색장포의 괴인은 형형한 눈빛으로 위중평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바로 위중평이냐?

역시 소문대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녀석이군.

노부는 우선 너에게 한 수 가르쳐 주겠다."

 

말을 끝내자 홍포괴인은 한 쪽 손을 들어 올려 천천히 일 장을 전개했다.

이 홍포괴인의 행동은 흡사 장난을 하듯 겉보기엔 조금도 위력이 있는 것 같지 않았으나

위중평의 예리한 눈빛은 벌써 이 네 명의 괴인이 제각기 비범한 무학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기에 감히 경솔한 마음을 갖지 못하고 역시 전력을 다해 일 장을 격출했다.

 

"펑!"

 

쌍방의 장력이 허공에서 격돌되자 요란한 굉음이 들렸다.

순간 위중평은 깜짝 놀랐다. 일단 일 장을 교환했지만 한 번 뻗었던 손을 다시 거둘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홍포노인이 발한 일 장은 일종의 괴이한 흡인력(吸引力)이 담겨 있어

위중평이 뻗었던 손은 허공에서 굳은 듯 앞으로 더 밀 수도 없고 뒤로 거둘 수도 없게 되었던

것이기에 위중평은 스라치게 놀라며 얼른 단전의 진기를 끌어올려 뻗고 있는 손을 통해

상대방에게 위맹한 장력을 전개했다.

홍포괴인은 자신의 심후한 내력을 믿고 위중평과 내공으로써 승부를 가릴 속셈이었는데

상대방은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내공이 훨씬 뛰어나 도리어 막강한 장력이 뻗어 오는 것을 보자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나며 역시 힘을 다해 쌍장으로서 위중평의 잠력과 맞섰고

쌍방이 전개된 내력은 중간 지점을 한계선으로 하여 서로 상대방의 내력을 뚫으려고

팽팽한 각축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것은 즉 생사를 판가름하는 일전이기도 했다.

만약 어느 한쪽이 진력을 지탱하지 못한다면 여지없이 상대방의 힘에 의해 오장육부가 파열돼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최후까지 체내의 진력으로씨 버티는 자가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서로 대치한 상태에서 위중평의 표정은 차츰 굳어져 갔다.

소요공자는 홍포괴인의 이마에서 구슬같은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자

이미 생사를 결정하는 관문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고는 몇 번이고 출수를 하려 했으나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명명주재의 성격이 워낙 괴팍해 일단 자기가 죽이기로 결정한 사람에 대해선

아무도 가해를 하지 못하게 했고 소요공자의 이번 행동도 사실은

명명주재를 속이고 몰래 한 것이다.

그의 원래 뜻은 위중평을 위협해 추혼천녀를 포기하게끔 하는데 있었는데

위중평의 태도가 상상외로 강경해 이런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이 때 그는 간단하게 위중평을 죽이거나 중상을 입힐 수 있었지만

나중에 명명주재의 문책이 두려워 망설이고 있었고

황, 남, 백 세 명의 괴인도 신색이 긴장되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으나

감히 더 이상의 행동은 취하지 못했다.

소요공자가 위중평을 죽일 수 있는 것은 간단한 일이지만

아울러 홍포괴인도 역시 위중평과 같은 운명이 될 것이다.

소요공자는 홍포괴인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황, 남, 백 세 괴인은 위중평을 죽이기 위해 동료마저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한편 금루선연은 위중평이 소요공자를 향해 몸을 솟구친 후 단신 홀몸으로

열두 명의 흑포괴인을 상대하며 수중의 단검을 종횡무진으로 떨쳤지만

도저히 그들의 포위망을 뚫을 수가 없자

갑자기 몸을 풍차처럼 회전시키며 단검에서 폭사되는 은색 광채로 허공에다 커다란 원을 그렸다.

흑포괴인들은 일단 몸을 피하기 위해 분분히 뒤로 물러났다.

금루선연은 압력이 감소된 틈을 타서 옥탑의 절학을 전개했다.

그러자 연거푸 비명 소리가 들리며 이미 세 명의 흑포괴인이 흡사 줄이 끊어진 연처럼 멀리 날아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금루선연의 이 현묘하기 짝이없는 옥탑절학에 놀라 주춤하는 사이에

눈앞에 한 줄기의 흰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느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표연히

몸을 솟구친 것이다.

그녀가 위중평 곁에 떨어졌을 때 황, 남, 백 세 괴인은 이미 위중평에게서

다섯 자 가량 떨어진 거리까지 접근해 왔다.

금루선연은 행여나 그들이 위중평에게 불리한 행동을 취할까봐

수중의 단검을 떨쳐 홍포노인을 겨냥하며 뾰족하게 외쳤다.

 

"더 이상 접근해 오면 이 단검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세 괴인은 대뜸 안색이 변하며 뒷걸음질을 했고 이 때 위중평과 홍포괴인은

이미 생사를 결정하는 순간에 도달했다.

위중평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이마에 땀이 배기 시작했으며 홍포괴인은

이미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고 얼굴에는 심한 경련이 일고 있었다.

소요공자와 세 괴인, 그리고 금루선연은 극도로 긴장되어 모두 두 사람을

떼어 놓을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대치상태는 이미 극도에 달해 있으므로

누가 중간에 끼어든다면 쌍방의 진력이 동시에 사방으로 폭사되어 관여하는 자가

먼저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 긴박한 순간 느닷없이 일진의 부드러운 바람이 일며 위중평과 홍포괴인은 이내 떨어졌다.

중간에서 그들 두 사람을 떼어 놓은 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대단한 실력자임이 분명했다.

만약 전력을 전개하는데 추호의 차이가 있었더라면 위중평과 홍포괴인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이지만 두 사람은 조금도 반진(反震)의 영향을 받지 않고

단지 비틀거리며 뒤로 대여섯 걸음을 물러났을 뿐이다.

위중평은 상대방의 압력이 사라지는 순간 역시 자신의 진력을 거두며 허리를 꿋꿋이 펴

몸을 고정시켰다.

그는 비록 많은 내력을 소비했지만 주위에 강적을 두고 있는이 마당에서 조금도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형형한 눈빛으로 사방을 훑어보았다.

한편 홍포괴인와 반응은 그와 달랐다.

생사를 결정짓는 관문에서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지만

일단 상대방의 압력이 사라지자 즉시 땅에 주저앉아 눈을 감은 채 운공조식을 하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편 주위에 있는 중인들이 느닷없이 생긴 부드러운 바람으로 인해 분분히

뒤로 물러나는 순간 청색 망사로 얼굴을 가린 중년 부인이 표연히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금루선연은 나타난 중년 부인을 보자

눈빛을 번쩍 빛내며 흡사 어린애가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어머니를 만난 것처럼

중년 부인의 품 안으로 뛰쳐들어가 외쳤다.

 

"이모님…"

 

중년 부인은 금루선연의 고운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소요공자를 향해 냉랭하게 말했다.

 

"일 년이란 기한을 이미 약속해 놓고 이게 또 무슨 짓이냐?

명명주재가 너를 이곳으로 보낸 것이냐?"

 

소요공자는 중년 부인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는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뒷걸음질하더니

홀연 몸을 솟구쳐 사력을 다해 도망치자 황, 남, 백 세 괴인도 즉시 홍포괴인을 부축해

일으커 흑포괴인들과 함께 소요공자의 뒤를 따랐다.

중년 부인은 냉소를 칠 뿐 그들을 추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금루선연은 문득 위중평의 진력이 많이 소비되었다는 것이 생각나 중년 부인의 품 안에서

빠져 나오며 고개를 돌렸지만 위중평이 눈을 감고 운공조식을 취하고 있자

금루선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년 부인, 옥탑단장인은 오늘 유별나게 부드러웠다.

그녀는 지극히 염려스러운 음성으로 금루선연에게 물었다.

"그의 내상은 어떠냐? 내가 도와 줘야 할 필요가 있겠느냐?"

금루선연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위중평은 눈을 번쩍 뜨며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이모님. 이제는 거의 완쾌되었습니다."

 

그는 금루선연이 옥탑단장인을 이모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역시 같은 칭호를 쓰자 비록 자연스러운 칭호였지만 옥탑단장인에게 주는 느낌은 컸다.

위중평은 그녀가 평생을 두고 못 잊어 하는 정인의 자식이고 금루선연은

그녀가 사랑하고 아끼는 제자였다.

그들 한 쌍의 젊은 남녀가 다정하게 자기를 이모라고 불러주자 옥탑단장인은

냉막하고 무표정한 얼굴에 한 가닥의 흐뭇해 하는 미소를 떠올렸다.

그녀는 두 남녀를 번갈아 척파보며 다시 부드럽게 위중평에게 입을 열었다.

"너는 내 말을 분명히 명심해 두어라,

명명주재의 약속은 너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무슨 관계가 얽혀 있는지는

차후에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지긍 나는 선연을 데리고 단장곡으로 돌아가

좀더 깊은 무공을 가르쳐 주어야겠다.

그러니 너는 때가 되면 단장곡으로 직접 찾아오도록 해라."

 

위중평은 금루선연과 만나자마자 다시 헤어지게 되자

흡사 무슨 귀중한 보물을 잃은 듯 가슴이 허전해지는 느낌이 들어

금세 울적해지는 표정을 역력히 나타났다.

금루선연의 지금 심정은 위중평보다 더욱 괴로웠다.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나직이 말했다.

 

"이모님…"

 

하고 부르고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옥탑단장인은 이미 경험한 바가 있어 남녀간의 미묘한 심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금루선연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심정을 이해하고 빙긋이 웃었다.

 

"나도 너희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떨어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명명주재와의 약속은 무엇보다도 중요하여

그동안에 좀더 실력을 쌓을 필요가 있어 부득이 떠나야 한다.

내 말을 알아듣겠느냐?"

 

금루선연은 위중평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중평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곧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금루선연과 헤어지는 문제가 아니고

옥탑단장인의 뼈가 들어 있는 말이었다.

옥탑단장인의 무공은 이미 선경(仙境)에 도달해 당금 강호에서

거의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데 왜 명명주재와의 약속을 그렇게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 약속이 자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니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

위중평은 생각을 굴린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명명주재는 필시 옥탑단장인도 두려워하는 불세의 마두일 것이다.

동시에 명명주재는 자기와 어쩌면 일단의 원한이 얽혀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원한은 아버지인 신주검성과 맺은 것일지도…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나중에 꼭 단장곡으로 오세요."

 

금루선연의 꾀꼬리 같은 음성이 바람결에 실려 그의 귓전에 들림으로써

위중평은 비로소 생각을 중단하고 현실로 되돌아 왔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살펴보더니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관도를 따라 앞으로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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