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33. 황발괴인(黃髮怪人)

오늘의 쉼터 2014. 6. 20. 16:40

33 황발괴인(黃髮怪人)

 

 

 

"으하하하… 너희들 같이 쓸모없는 작자들이 나를 심판할 수 있단 말이냐?

가소롭기 짝이없다. 으하하하하…"

천현도장은 더 이상 울화를 참을 수 없었는지 금사불진을 떨치는 동시에

앞으로 걸음을 옮겨 막 출수를 하려 했을 때 그보다 앞서 갑자기 눈부신 청색 광망이

번득이며 현문육준(玄門六俊)의 여섯 자루 장검은 허공을 가로질러 삼면에서 공격을 전개했다.

복면소년은 이미 만반의 웅전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냉소와 함께 한 쪽 손으로 가슴 앞에다

원을 그리며 준마분월(俊馬奔月)이란 초식으로써 정면으로 뻗쳐오는 두 자루의 장검을

격진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귀안화(鬼限花)라는 경공신법을 전개했고 그가 전개한 신법은

귀신이라도 눈이 현혹된다는 뜻이 내포돼 있듯이 현문육준은 단지 눈앞이 별안간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며 이미 상대방의 모습을 잃고 말았다.

현문육준은 무당파 후배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서 오래 전부터 천현도장을 따라다니며

검술에 있어 독특한 조예를 터득했는데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지체하지 않고 다시

검결(劍訣)을 외우고 사방팔방에서 공격을 해갔다.

복면소년의 발은 흡사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검광이 번득이는 방향을 따라 유령처럼

몽을 회전하며 소매를 연신 떨쳤고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리며

육준 중의 막내는 옆구리에 일 장을 맞고 공처럼 떼굴떼굴 멀리 굴러갔다.

복면소년이 어떠한 수법을 전개해 그를 손상시켰는지 똑똑히 본 사람이 없었다.

이어 주위에 회오리 바람이 일며 복면소녀의 몸을 회전시키는 속도는 더욱 빨랐고

인영이 서로 엇갈려 번득이는 사이에 육준 중에 두 사람이 또 부상을 입었다.

이렇게 되자 천현도장은 더 지켜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이를 부드득 갈며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들 물러가라."

 

그 외침과 함께 천현도장은 앞으로 덮쳐나가며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네놈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기 전에는

십대 문파에 인재가 없다고 생각하겠구나?"

 

금사불진에서 전개된 수백 줄기의 가느다란 광채에 곁들여

천현도장은 단숨에 다섯 가지 초식을 전개하는 한편 몸을 풍차처럼 돌렸다.

한편 위중평은 나뭇가지 위에서 자세히 복면소년의 무공 초식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복면소년의 무공은 각파의 무공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뿐만 아니라 어떤 초식은 일반 상식으로선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피이한 것이었고 또 어떻게 보면 소요공자의 무공과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그가 생각을 굴리고 있는 사이에 천현도장은 복면소년에게

선기를 잃고 연신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관전만 하고 있던 십대 문파의 사람들은

체면을 생각할 여지가 없어졌다.

누가 먼저 기합 소리를 질렀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을 신호로 하여 군호들은

일제히 벌떼처럼 복면소년을 향해 덮쳐갔다.

군호들이 일제히 협공을 전개하자

주위는 삽시간에 성난 파도같은 장풍이 일며 도광(刀光)과 검영(劍影)에 휩싸였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각파의 장문인을 비롯해 공력이 심후한 장로들로서

각자 독특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 인물들이었기에 일단 공격을 전개하자

그 기세는 경천동지할 정도였다.

복면소년은 백산목장에서 이미 가벼운 내상을 입었고

지금 거듭해서 현문육준파 천현도장을 상대해 진력이 많이 소비된 상태에서

다시 군호들의 협공을 받게 되자 실로 감당해 내기가 어려웠다.

처음에는 십대 문파가 설마 협공을 하랴 하는 안이한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막상 위기에 처하게 되자 복면소년은 즉시 삼십육계 줄행랑을 생각했다.

그러나 워낙 음독하고 교활한 그는 겉으로 추호도 내색하지 않고

여전히 거만한 태도로 중인을 훑어보며 광소를 터뜨렸다.

 

"진작부터 이렇게 본색을 드러냈어야 옳았을 것이다. 으핫핫…"

 

광소와 함께 그는 몸을 회오리 바람처럼 회전시키며

간혹 한두 가지의 괴상한 초식을 펼쳤다.

알다시피 지금 복면소년을 협공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년간 무림에서 명성을 떨쳐온 고수들로서

풍부한 경험의 소유자들이기도 했다.

그런 연고로 인해 군호들은 복면소년의 내공 수양이

그리 놀라울정도로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복면소년이 현문육준과 천현도장을 격퇴시킨 것은

그 유령같은 빠른 신법과 상식에서 벗어난 무공 초식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간파한 군호들을 경솔한 공격을 삼가하고 제각기 진력을 끌어모아

수비를 위주로 하며 천전히 포위망을 좁혀 들어갔다.

순간 태산을 무너뜨릴 듯한 장품이 사면팔발에서 물밀 듯이 중앙 부분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뻗쳐갔고 군호들의 이 묘한 시도는 과연 효과를 거두었다.

복면소년은 사방에서 뻗쳐오는 웅후한 장풍의 물결을 감당해 내지 못해

그 자리에서 쓰러져 흡사뜨거운 철판 위에 올려 놓은 메뚜기처럼

연신 뒹굴 뿐 도저히 반격을 전개할 재간이 없었다.

군호들은 그에게 숨돌릴 기회를 주지 않고 계속 장풍을 전개하는 상태에서

앞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군호들이 걸음을 옮길 때다다 깊은 구덩이가 파여졌다.

눈 깜박할 사이가 지나면 복면소년은 영락없이 숱한 장풍하에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그 때였다.

한 줄기의 시퍼런 광채가 허공을 누비며 복면소년은 어느새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손에 뽑아들어 휘과퇴일(揮戈退日)의 초식을 전개했다.

군호들이 이 뜻하지 않은 변화로 인해 멍청해 있는 사이에 복면소년은

다시 종횡무진, 신랑귀파(神浪鬼波)의 초식을 연거푸 격출했다.

그가 전개한 세 가지 초식은 모두 월륜검법(月輪劍法)에 수록돼 있는 검초였다.

월륜검법의 위력은 과연 절륜하고 더욱이 뜻하지 않은 반격을 당하자

군호들은 우선 자신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분분히 뒤로 물러났고

한편 나뭇가지 위에 몸을 숨겨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위중평은

소스라치게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는 장백파의 불전지비(不傳之秘)인 월륜검법이 뜻밖에도

복면소년에 의해 전개되자 절로 대경실색을 금치 못한 것이다.

아울러 그는 복면소년의 내력을 추종해야겠다는 결심이 더욱 확고해져 갔다.

이 무렵 복면소년은 이미 원륜검법의 정예를 전부 전개해 순식간에

수세를 공격으로 바꾸자 쌍방은 다시 검을 위주로 한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복면소년은 다시 얼마 동안을 버티었으나 진력은 한계가 있는 법,

시간이 경과 될수록 그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상태로 약간만 더 지속된다면 그에게는 오직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에 포위망을 뚫고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는

지금이라고 생각한 복면소년은 장검을 쥔 손에 바싹 힘을 가하며

돌연 무실루대(霧失樓臺)의 초식으로 허공을 뒤덮는 검영을 전개하는 동시에

옆으로 두 걸음 미끌어져 다시 월락대지(月落大地)의 초식으로 비스듬히

일장차천을 향해 기습을 가했고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중인들의 귓전을

진동시키는 가운데 일장차천의 커다란 오른손은 이미 손목에서부터 절단되어

 주위를 금세 선혈로 얼룩지게 했다.

복면소년의 악랄함은 이 순간 여실이 나타났다.

그는 중인들이 놀라 약간 정신을 소홀히 하는 틈을 타서 손목이 잘라진

일장차천을 향해 잽싸게 왼손으로 오음삼살장(五陰三煞掌)을 격출하자

일장차천은 심지어 신음을 토할 새도 없이 그 자리에 쓰러져 참사를 당했다.

중인들이 정신을 차리고 재차 협공을 가해 갔을 때 복면소년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광소를 터뜨리며 포위망 밖으로 벗어났다.

이 때 애당초 협공에 가담하지 않았던 소림의 화암상인은 우렁찬 목소리로

불호를 외우며 위엄있게 외쳤다.

 

"손에 피를 묻힌 이상 이곳을 무사히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이어 커다란 소매를 휘둘러 한 갈래의 형체를 걷잡을 수 없는 잠력을 격출했다.

복면소년은 자신의 계획이 뜻대로 격중돼 포위망을 벗어나게 되자

득의한 나머지 냉소를 치며 정면으로 장풍을 전개해 화암상인의 잠력을 맞이했다.

 

"펑!"

 

벼락이 내리꽂는 듯한 굉음이 들리며 복면소년은 도저히 몸을 고정시키지 못해

뒤로 연거푸 세 걸음이나 밀려나며 안색이 즉시 백짓장처럼 변한 것으로

미루어 심한 내상을 입은게 분명했다.

사실 그는 화암상인의 잠력을 충분히 피할 여유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심한 내상을 입게 된 것은 득의한 나머지 자신의 분수를 망각한 탓이었다.

그는 비록 최근 일이 년 동안 거듭 기우(奇遇)를 얻어 공력이 급격히 증진되었지만

고전을 겪어 기진맥진해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수십 년 간 수양을 쌓아올린

화암상인과 정면 대결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일격을 교환해 큰 손해를 보게 되자 흉성이 발작해 심한 내상의 고통도

상관하지 않고 빈사 직전의 야수가 울부짖듯 괴성을 지르며 수중의 장검으로써

빗발치는 듯한 공격을 전개했다.

화암상인은 차분한 음성으로 불호를 외우며 즉시 본문의 항마십팔식(降魔十八式) 중에

금강장법(金剛掌法)을 전개해 연달아 삼 장을 격출하자

주위는 글새 광염에 휩싸이며 복면소년이 펼친 검막을 이내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고

이 때 군호들은 다시 달려와 제각기 절예를 전개해 협공을 전개했다.

복면소년의 악랄한 수단을 똑똑히 지켜본 군호들은 조금 전보다 공기가 더욱 가열되었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복면소년은 심한 내상을 입어 이제는 도저히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공동파의 신루과객은 복면소년이 곧 죽게 될 것을 알고 싸늘하게 호통을 쳤다.

 

"네이놈, 이제는 순순히 내력을 밝혀라.

그러면 너의 사부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완전한 시체를 보존케 해줄 용의도 있다."

 

복면소년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교만한 태도가 추호도 수그러지지 않았다.

 

"흥! 내가 세 살 먹은 어린애인 줄 아느냐? 너희들이 득의하기엔 아직 이르다."

 

외침과 함께 복면소년은 최후의 발악을 하듯 마지막 남은 힘을 이용해

두 가지 검초를 전개하는 동시에 왼손으로는 오음삼살장을 격출해 냈는데

이것은 자신이 죽게 될 이 마당에 어느 누구라도 잡아서 죽음을 같이할 속셈이었으나

온갖 풍파를 겪어온 군호들이 그의 수작에 넘어갈 리 만무해 복면소년의 발악적인 일격은

비단 효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더러 도리어 천현도장이 전개한 건원강기(乾元剛氣)의

반탁력에 의해 뒤로 밀려나며 가슴으로부터 한 갈래의 뜨거운 핏줄기가 용솟음쳐 올라

울컥 선혈을 토하며 비틀비틀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이 틈을 타서 오대파(五臺派)의 젊은 검객, 막중천(莫中天)은 공을 세우고 싶은 일념에

번개같이 앞으로 덮쳐가며 수중의 장검을 휘둘러 복면소년의 기문(期間), 장대(將臺)

두 군데의 요혈을 노렸다.

곧 쓰러질 것만 같은 복면소년은 대뜸 눈을 부릅뜨며 찢어지는 고함 소리와 함께

일 초 일출월몰(日出月沒)을 전개해 도중에서 다시 휘과퇴일의 초식으로 바꾸었는데

이 반격은 막바지에 도달한 야수의 발악이었다.

 

"으앗!"

 

처절한 비명 소리가 군호들의 고막을 진동시키는 가운데 막중천의 가슴은

복면소년의 검에 꽂힌 채 일 장 높이 떠올라 얼굴을 땅에 박으며 떨어졌다.

칠공에서 피가 흐르는 것으로 보아 이미 숨이 끊어진 모양이다.

복면소년은 막중천을 죽임으로써 있는 힘을 전부 사용해 더 이상 몸을 지탱하지 못하며

썩은 통나무처럼 벌렁 뒤로 자빠졌다.

십대 문파의 사람들은 복면소년에 대한 한(恨)으로 인해 모두 치를 떨고 있는 차에

그가 쓰러진 것을 보자 즉시 가까이 서 있는 다섯 명이 앞으로 덮쳐가며 일제히 장풍을 날렸다.

그들 중에 단 한 사람의 장궁이 격중되더라도 복면소년은 여지없이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찰나적인 순간, 느닷없이 일진의 강렬한 경풍이 허공을 가로질러 급속도로 뻗쳐 오며

번개인 듯 한 명의 흑포를 입은 괴인이 날아왔다.

이 흑포괴인의 기세가 어찌나 맹렬했는지 그림자가 가까이 날아오기도 전에

한 갈래의 뼈를 깎을 듯한 음한한 장력이 산을 뒤엎고 바다를 흔들어 놓을 듯이 뻗쳐 왔다.

십대 문파의 사람들은 그 막강한 한풍으로 인해 몸을 지탱할 수 없어 분분히 뒤로 밀려났으며

물론 복면소넌을 향해 덮쳐가던 다섯 명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호들이 몸을 고정시키고 정신을 차렸을 때 흑포괴인은 이미 복면소년을 옆구리에 끼고

번개처럼 멀리 몸을 솟구친 후였다.

위중평은 복면소년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거늘

어찌 떠나가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그는 즉시 경공신법을 최대한으로 전개해 흑포인의 뒤를 쫓아갔다.

흑포괴인은 어떠한 신법을 전개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옆구리에 사람을 끼고서도

여전히 바람같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질주했고 위중평이 그의 뒤를 쫓아 삽시간에

십여 리 가량을 벗어나자 어느 산세가 매우 험준한 골짜기 입구에 다다르게 되자

흑포괴인은 갑자기 복면소년을 땅에 내려 놓으며 맹렬히 몸을 돌려 까치가

울어대듯 괴상한 음성으로 외쳤다.

 

"노부는 그렇지 않아도 너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네 발로 스스로 나를 찾아오다니…

이것은 정말 옛말 그대로 천당의 문이 열려 있는 데로 가지 않고

구태여 지옥문을 두드리는 격이구나.

이놈, 단단히 마음의 각오를 해 두어라.

노부는 세 가지 초식을 전개해 이전에 너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괴인이 말을 하는 사이에 위중평은 비로소 상대방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는데

생김새는 한 마디로 말해 추악하고 징그럽기 짝이없었고 벌집을 쑤셔 놓은 듯한

머리칼은 황색이며 얼굴에 굵은 주름살이 얼룩져 있고 사자의 입을 연상케 하는

 양쪽으로 확 찢어진 커다란 입이며 겉에 나타난 톱니같이 뾰족한 이빨은

사람이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악귀(惡鬼)라고 하는 게 어울렸고 더군다나

땅에 질질 끄는 장포자락으로 인해 한층 더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괴인이었다.

위중평은 괴인의 말을 듣고 나서 의아한 표정을 금치 못하며 다그치듯 반문했다.

 

"너는 대관절 누구냐? 우리는 생면부지일 뿐 아니라

하등의 원한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나의 목숨을 노리고 있느냐?"

 

흑포괴인은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징그럽게 웃었다.

 

"흐흐흐…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가서 요동일검과 아복에게

물어 보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위중평은 상대방이 픽시 복면소년의 스승 혹은 윗사람이라고 생각해

곧 냉소를 치며 응수를 했다.

 

"보아하니 너희들은 사제지간인 것 같은데 낯짝을 들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모양이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름을 숨길 필요가 없지 않느냐?"

 

괴인은 그의 조롱섞인 말을 듣자

버럭 화를 내며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이 고약한 놈, 네놈의 눈에는 윗사람이 보이지 않느냐?"

 

호통과 함께 뼈만 앙상하게 남은 다섯 손가락을 갈퀴처럼 뻗어 다짜고짜

위중평의 얼굴을 향해 낚아채 왔으며 위중평은

어깨를 움직이고 걸음을 옮기는 동시에 손으로 원을 그려 정면으로 뻗쳐 오는

경풍을 와해시켰다.

그런데 괴인이 전개한 초식은 돌연 도중에서 변화가 일며 손가락을 위로

젖히는 동시에 왼손으로 번개같이 허리를 향해 후려쳐 왔다.

위중평은 즉시 한 갈래의 막강한 경기(經氣)가 몸 가까이 접근한 것을 느끼고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다시 다그쳐 물었다.

 

"대관절 누구인지 우선 이름을 밝히지 못하겠느냐?"

 

"흐흐흐… 잠시 후에 염라대왕을 만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괴인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별안간 눈빛을 유난히 예리하게 빛내며

몸을 뒤로 솟구치는 동시에 싸늘하게 외쳤다.

 

"어떤 놈이냐?"

 

이어 둔탁한 소리가 들리며 두 줄기의 인영이 합쳐졌다가 이내 떨어졌다.

알고 보니 금루선연이 언제 당도했는지 괴인이 위중평과 맞서고 있는 틈을 타서

살그머니 복면소년에게 다가가 복면을 벗기려 했던 것인데

괴인은 흡사 뒤통수에 눈이 달린 듯 그것을 발견하고 적시에 제지를 한 것이다.

금루선연이 괴인과 잽싸게 일격을 교환하고 뒤로 물러나자

위중평도 허공을 가로질러 그녀의 곁에 떨어졌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혜매, 나는 저 자에게 물어볼 말이 있으니 잠시 출수하지 마시오."

 

한편 괴인은 금루선연과 일격을 교환한 후에야 비로소

상대방이 일개 적은 여자임을 알고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나 그것은 순간에 불과하고 이내 거칠은 소리로 외쳤다.

"알겠다. 너는 아마 옥탑단장인이 최근에 거두어들인 제자인 모양이구나.

마침 잘 왔다. 너희들을 한꺼번에 저승으로 보내주마."

 

말을 끝낸 괴인은 정말 쌍장을 교차시켜 두 사람을 향해 싸늘한 장풍을 전개했다.

위중평은 금루선연을 뒤로 밀치고 한 쪽 손으로 원을 그리며 정면으로 괴인의

장풍을 받으려 했으나 쌍방의 장풍이 부딪치기도 전에 위중평은

돌연 한 갈래의 음산한 기류(氣流)가 체내로 스며드는 것을 느끼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행히도 그의 무공은 마음과 행동이 일치가 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 있어 심상치 않은 것을

경각하는 찰나 잽싸게 신공(神功)을 위용해 진기를 이 성(成)가량 더 끌어올렸다.

 

"꽝!"

 

하는 폭음이 터지는 가운데 쌍방은 제각기 두 걸음씩 물러났고 그 결과 쌍방의 공력이

막상막하라는 것이 증명되었기에 괴인은 잠시 멍해져 있다가 결국 당황함이 자존심을

손상당한 분노로 변해 노란 머리카락을 곤두세우고 야수의 울부짖음을 토하면 연거푸

여덟 가지의 초식을 전개했다.

그가 전개한 초식은 워낙 괴이하여 위중평이 총총히 두 가지 초식을 와해하고

잽싸게 뒤로 다섯 자 가량 물러나자 괴인은 이 틈을 타서 기선을 잡고 다시

눈 깜박할 사이에 광풍폭우처럼 일곱 가지 초식을 펼쳤다.

그러자 주위 일 장 이내는 완전히 그가 전개한 서릿발같이 차가운 광풍이 휩싸였고

위중평은 그동안 수 차례 걸쳐 싸움에 임한 결과 경험과 판단력이 늘어 몸을 피하면서

큰소리로 금루선연을 향해 외쳤다.

 

"금루선연, 이 악귀는 내가 상대할 테니

당신은 복면한 자의 정체를 파악해 보시오."

 

그의 외칟으로 인해 괴인은 안색이 크게 변하며 공세가 약간 늦추어졌고

위중평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세 가지 초식을 한데 묶어 쌍장을 교차시키며 격출하자

쌍방의 장력이 다시 허공에서 맞부딪쳤는데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로 뚜렷한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괴인은 복면소년이 위태롭게 될 것을 의식하고 싸늘한 기합 소리를 발하며

뒤로 몸을 솟구쳐 복면소년 곁에 떨어졌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마침 금루선연도 복면소년 가까이 달려 왔다.

괴인은 그녀가 땅에 떨어져 몸을 채 고정시키기도 전에 징그러운 웃음을 발하며

이 장을 격출해 냈고 금루선연은 상대방과 비교해 아무래도 내력의 차이가 있어

감히 정면으로 괴이한 장풍을 받지 못하고 몸을 살짝 비틀어 옆으로 피했다.

괴인은 아직도 자신의 실력을 믿는지 아니면 또 다른 믿는 바가 있는지 충분히

복면소년을 안고 도망갈 기회가 생겼는데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징그럽게 괴소만 흘렸다.

 

"흐흐흐… 너희들은 지금 멋대로 날뛰지만

잠시 후면 살려 달라고 애원을 하게 될 것이다."

 

금루선연은 대뜸 앙칼진 음성으로 외쳤다.

 

"그것은 차후의 문제이고 지금은 본 낭자의 일 장부터 받아라."

 

외침과 행동은 일치가 되어 흰 손을 들어 올려 가슴 앞에다 교차시키며

천천히 원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비록 겉보기엔 어린애가 장난을 하는 듯한 자세지만

사실 그 속에는 무한한 살기가 내포되어 있었기에 괴인은 대번에 심상치 않은

기미를 알아차리고 맹렬히 진기를 끌어올려 역시 오음삼살장을 전개할 자세를 취했다.

보아하니 그는 금루선연과 단 일 격으로써 생사를 판가름하는 일격을 교환할 작정인 것 같았다.

소슬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릴 뿐 주위는

잠시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때마침 붉은 해는 하루의 일과를 마쳤다는 듯이

서서히 서산마루로 모습을 감추기 시작해 석양의 노을이 곱게 대지를 물들여 주었고

꽃같이 아름답고 마귀처럼 추악한 극히 대조적인 두 얼굴을 비추어 주자

금루선연은 괴인과 대치한 상대에서 차츰 신색이 긴장되어 갔다.

위중평이 금루선연을 만류하기엔 이미 때가 늦었다.

그는 심각한 안색으로 한쪽에 서서 시간이 흐를수록 심장의 고동이 가속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비록 금루선연이 이미 옥탑단장인의 진전(眞傳)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기일이 너무 짧아 과연 천뢰장법의 위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으려는지

의심스러운 데다가 괴인은 오음삼살장을 전개할 자세를 취하고 있고

또 워낙 사공(邪功)에 대해 조예를 갖고 있는 인물인지라 어떠한 변화를 구사할지

예측을 불허해 겉으로는 하등의 동작도 취하지 않았지만 암암리에 이미 조화신공을

잔뜩 끌어올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적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쌍방의 대치는 흡사 바람을 최대로 불어 넣은 공처럼 팽창돼 있었고

더 이상 지체할 여지가 없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갑자기 사면팔방에서 으스스한 괴소가 터져 나왔다.

 

"흐흐흐…"

 

사방에서 동시에 들려 오는 괴소와 함께 한 무리의 흑포를 입은 괴인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검은 망사로 얼굴을 가려 원래의 모습을 숨기고 계속 괴소를 발하며

걸음을 옮겨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

위중평과 금루선연은 동시에 멍해지며 다음 순간,

괴인들의 웃음 소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알고 보니 그들은 웃음 속에 내력을 주입시켜 자신들의 공력을 과시할 심산인 것 같았다.

십여 명이 일제히 음침한 괴소를 발하자 곧 듣는 이의 심혼(心魂)을 진동시키는

마음(魔音)으로 합류돼 위중평과 금루선연의 고막을 괴롭혔지만 다행히 두 사람은

일찍 경각하고 진력을 전신에 산포시켰기 때문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노란 괴인은 이 때 복면소년의 상세가 심하다는 사실이

문득 뇌리에 떠오른 듯 대뜸 몸을 돌려 복면소년을 다시 옆구리에 끼더니

질풍같이 산골짜기 안으로 날아갔다.

금루선연은 끈질긴 추격 끝에 겨우 복면소년을 찾았는데

어찌 그가 떠나도록 지켜만 보고 있겠는가.

그녀는 즉시 뾰족한 기합과 함께 몸을 솟구쳤다.

이 때 계속 들려 오던 괴소가 일순간에 끊어지며 앞쪽에 선 네 명의 흑포괴인이

일제히 손을 모아 멀리서부터 몸을 솟구친 금루선연을 향해 장풍을 전개했고

그러자 네 갈래의 장풍은 막강한 철벽이 되어 무서운 기세로 뻗쳐 왔다.

금루선연은 상대방의 장풍이 가까이 뻗쳐 오기도 전에 벌써 숨이 막힐 듯한

압력을 느껴 자신의 힘으로선 도저히 그 장벽을 뚫고 나갈 수 없음을 알자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켜 우측 방향으로 떨어져 내렸는데

이번에는 등 뒤에서 한 갈래 장력이 밀물처럼 용솟음쳐 오는 것을 느끼자

금루선연은 울화가 치밀은 나머지 몸을 잽싸게 돌리면서

역시 한 갈래의 무형의 잠력을 격출했다.

그녀는 비록 만년옥액을 복용해 내력이 많이 증진되었지만

이런 식으로 정면대결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일이 아니었기에

그것을 본 위중평은 고함을 질러 만류하는 한편 즉시 앞으로 달려나가

그녀의 곁에 떨어지면서 한 쪽 손을 앞으로 밀어냈다.

 

"혜매, 어서 물러가시오."

 

그의 외침이 떨어지자마자 일 성의 폭음이 골짜기를 진동시키며

두 사람이 합력하여 겨우 상대방 네 사람의 공력을 무사히 받아냈다.

금루선연은 아버님을 살해한 복면소년의 뒤를 추격하는 것이 시급해

포위망을 뚫고 나갈 일념으로 다시 우측에 있는 네 명의 흑포괴인에게

덮쳐가려 하였으나 그녀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비교적 침착한

위중평은 즉시 그녀를 만류했다.

 

"혜매, 경솔한 행동은 삼가하시오."

 

금루선연은 그의 외침을 듣자 솟구치려는 몸을 거두고 다시 위중평 곁에 붙어 섰을 때

한편 흑포괴인들의 행동 또한 괴이했다.

그들은 단지 사방으로 갈라져 두 사람을 포위한 채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심지어

앞으로 전진해 올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누가 오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금루선연은 토라진 표정으로 위중평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저 귀신 같은 무리들은 그냥 내버려 두란 말이에요?

왜 내가 공격을 하지 못하게 만류하죠?"

위중평은 골짜기 입구 쪽을 주시하며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소.

오늘 밤 일 장의 치열한 싸움을 면치 못할 것이오.

단지 약간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서 혜매의 행동을 만류한 것뿐이오."

 

이어 위중평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점을 간추려서 얘기해 주었다.

첫째, 복면인과 머리카락이 노란 괴인은 필시 장백파와 밀접 한 관계가 있는 인물일 것이며

장문인의 자리를 탈취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인 것 같았고

둘째, 그들의 배후에는 아마 다른 절대적인 세력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고

셋째, 지금 이곳에 있는 흑포괴인들은 분명히 모종의 목적을 품고 왔을 것이며

태도와 표정으로 보아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금루선연은 그의 분석을 듣고 나서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얘기했다.

 

"내 추측 같아선 복면소년은 틀림없이 당신과 가까운 사람일 것이며

또한 모종의 원한관계가 얽혀 있을 거예요.

그렇지 않고서야 진면목을 숨길 필요가 없을 것이며

또한 무엇 때문에 당신의 이름을 빌려 살인을 했겠어요?"

 

위중평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나직이 물었다.

 

"혜매, 당신은 앞서 내가 바로 영존을 살해한 흉수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해서 나중엔 그겄이 오해라는 것을 알았소?"

 

금루선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애당초 나는 비단 당신을 의심했을 뿐 아니라

또한 이모와 추혼언니의 소행일 가능성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 이유는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무림사강 중의 한 사람인

아버님을 살해할 재간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나중에 아버님의 서재를 자세히 조사해 본 결과 비로소

흉수는 보 내의 상황을 잘 알고 또한 아버님이 매일 밤 내공을 수습(修習)하는

시간도 낱낱이 알고 있어 미리 방 안에 숨어 있다가 암암리에

독수를 전개한 것임을 알았어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비통한 신색을 금치 못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모와 추혼천녀는 무공이 탁월하므로 만약 아버님께 원한을 품고 있었다면

구태여 그런 따위의 비겁한 수단은 전개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평상공의 성품에 대해선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절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금루선연은 말을 하면서 얼굴을 돌려 위중평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자

위중평은 침묵을 지키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더군다나 나의 사형인 철적왕손은 평상공을 그렇게도 모함하려고 했는데도

당신은 그를 용서해 주었잖아요?

그러니 나의 아버님이 설사 평상공에게 지나친 행동을 했다 치더라도

당신은 그런 비겁한 수단을 전개하지 않을 것이란 결론을 내린 거예요."

 

위중평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쑥 물었다.

 

"혜매의 사형은 지금 어디에 있소그는 왜 당신을 도와 함께 원수를 찾지 않소?"

 

철적왕손의 얘기가 나오자 금루선연의 안색이 대번에 변했다.

 

"그의 이름만 들어도 나는 치가 떨려요.

그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에요."

 

이어 철적왕손이 고묘(古廟)에서 자기에게 무례한 행동을 취한 경과를

간단하게 얘기해 주자 위중평은 번쩍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철적왕손에 대해 의혹을 느낀 것이다.

동시에 자신이 객잔에서 갑자기 술에 취해 쓰러진 일도 연달아 뇌리에 떠오르자

더욱 수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석의 행동이 그렇게도 더럽고 치사스럽다면 다분히 보주를

살해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인물이다…'

 

위중평은 비록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으나 겉으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금루선연은 그가 아무 말도 않는 것을 보자 다시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그의 품행이 좋다면 내가 아버님의 원수를 찾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의 나는 원수를 찾아다녀야 하며 또한 보 내의 일도 처리해야 되기 때문에

조용히 생각을 정리할 여유마저 없어요."

 

두 사람은 강적을 눈앞에 두고도 여전히 아무런 일도 없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대화를 주고받았고 흑포괴인들도 이상하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돌부처마냥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도 입을 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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