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32. 조사축상(祖師軸像)

오늘의 쉼터 2014. 6. 20. 16:39

32. 조사축상(祖師軸像)

 

 

요동일검과 아복도 동시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위중평은 탁상 위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십시오."

 

요동일검은 얼른 앞으로 다가갔다.

탁상 위에는 아직 먹물이 마르지 않은 서신이 놓여져 있었다.

그 서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본인은 이미 무학의 대업을 마쳤으니 곧 하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스승님의 명령대로 조사축상(祖師軸像)을 갖고 문파를 관장할 것이니

요동일검과 아복은 속히 장문인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해라.>

 

위중평은 단지 약간 이해가 가지 않은 이외에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그러나 요동일검은 서신을 읽고 나자

이내 안색이 크게 변하여 길게 한숨을 내쉬는 동시에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았고

아복은 격동되는 신색을 금치 못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게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이오? 이게 무슨 변이란 말이오?"

 

위중평은 그들의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자 도리어 어리둥절해 졌다.

 

"그 서신을 남긴 사람은 누구입니까?

만약 본파의 제자 중에서 뛰어난 인물이라면 잘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요동일검은 침울한 표정으로 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그의 말을 받았다.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강호에서 자네로 위장하고 다니는 그 자임에 분명할 것이다.

그런 인물을 지닌 자가 어떻게 장문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의 형편으로선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나."

 

위중평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눈썹을 찌푸렸다.

 

"고숙부님은 본파의 장로인데 구태여 그의 명령에 따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만약 타당치 않다고 생각하신다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요동일검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것은 자네가 모르는 말이네.

본파는 엄한 규율이 있어 조사축상을 지닌 자는 즉 조사가 직접 나타나는 것과 같아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그 자의 명령을 따라야 하네.

그 조사축상은 바로 본파의 제 이대 장문인이 친히 그린 것으로서 원래는

 장문인이 보관하기로 명시되어 있네.

십오 년 전 본파가 조난을 당했을 때 자네의 부친은 살해되고 그 축상도 따라서

행방불명이 된 것이네.

그런데 그 자가 정말 조사축상을 갖고 나타난다면 일은 심상치 않게 벌어질 걸세."

 

위중평은 본래 장문인의 직위에 대해 아무런 미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단지 문파가 다시 부흥된다면 그것으로서 만족할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곧 낭랑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고숙부님, 그 일로 인해 번뇌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버님의 원수를 갚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 자가 정말 본파의 제자라면 장문인인 된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복이 단호하게 외쳤다.

 

"그것은 절대 안 될 말이오.

장문인이라면 지덕을 겸비하고 본파에 대해 공을 세운 자야라면 자격이 있거늘

어찌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에게 그 직위를 맡길 수 있단 말이오?

나는 이 늙은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일을 승낙할 수가 없소."

그의 격동되고 강경한 태도를 보자

위중평은 할 말을 잃었고 요동일검도 역시 침울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이 때 한쪽에서 있던 위장청이 갑자기 나서며 입을 열었다.

 

"아직 진가(眞價)를 분간할 수 없으니 상대방이 나타난 후에 대책을 세우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러자 요동일검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먹으로 탁상을 힘껏 내리쳤다.

 

"우리가 와신상담하여 겨우 이 정도의 기업을 이룩해 놓았는데 어떻게 일개 정체도 알 수 없는

자에게 문파를 건네 줄 수 있겠는가?

상대방이 나타나기 전에 우린 내일 문중대전을 열어 장문인을 결정하도록 하는 게

현명한 처사일 것이네.

 밤이 길면 자연히 꿈도 길어기지기 마련이고 반로 불상사가 또 발생할 우려가 있네."

 

아복은 그의 말을 듣자 손뼉을 치며 찬성했다.

 

"그것 좋은 생각이오.

청아야, 너는 즉시 문중제자들에게 통지해 내일 아침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도록 해라."

 

위장청은 공손히 대답을 하고 즉시 밖으로 나갔다.

위중평은 공연히 일을 서두르는 것 같아 얼른 만류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일방적으로 장문인을 결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좀 더 기일을 두고 기다려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요동일검은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내두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현질, 자네는 안심하게. 모든 일은 저와 아복노제가 책임지고 진행시킬 걸세."

 

백산목장은 돌연 흥청거리기 시작해 근처에 붉은 등불을 걸어 놓고

소와 돼지를 잡으며 축제 분위기에 싸여 있었고 하룻밤을 꼬박 세워

다음날 새벽녘에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다.

대청에는 이미 조사신위(祖師神位)가 안배되었고,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대청에 모였다.

잠시 후면 조사의 신위를 모신 가운데서 정식으로 장문인이 결정될 것이다.

바로 이 때 갑자기 이상한 보고가 들어왔다.

지금 산구(山口)쪽에 많은 축하객들이 당도했다는 보고였다.

이것은 실로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 대전(大典)은 어젯밤에서야 결정을 지은 것이며

어느 문파에게도 알 리지 않았는데 어째서 많은 축하객들이 당도했다는 것일까?

처음에 보고를 듣자 혹시 부근에 사는 죽림동도가 우연히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밖으로 나와 마중을 해보니

요동일검 등은 놀란 나머지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는데

알고 보니 하객 중에는 십대 문파의 장문인을 포함해서 신가보의 금루선연,

화산파의 청허도장, 동사삼룡 그리고 관동(關東) 흑백양도의 인물을 합쳐

모두 오십여 명이 넘는 인원이었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소식을 전해 듣고 달려온 것일까?

요동일검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으나 하객들이 이미 당도한 이상

직접 대놓고 물을 수도 없는 입장이므로 몸을 숙여 일일이 맞이하며 대청으로 안내했다.

하객들이 모두 자리를 잡고 앉자 소림의 장문인 화암상인이 먼저 자리에서 일이나 입을 열었다.

 

"십대 문파가 오늘 장백(長白)으로 온 것은 귀파 장문인의 탄생을 축하하는 한편

전에 있었던 작은 오해에 대해 위소혈에게 사과를 하기 위함이오.

그 일에 대해 우리는 철저한 조사를 한 결과 십대 문파와 적대시하는 것은 위소협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소."

 

요동일검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그 일에 대해 귀파의 오해가 풀렸다는 것은 크나큰 다행이오."

 

요동일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동사삼룡 중에 독룡 역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가지 가르침을 받고 싶은 일이 있소.

본도의 도주는 위소협에 대해 이미 진심으로 친분을 맺고자 하는 뜻을 표했는데

이번에는 어찌 대전 날짜를 통지해 주지 않았소?

본도는 무림의 일분자로서 아직 남에게 이런 멸시를 받아본 적이 없소.

이 번 일에 대해 분명한 답변이 있길 바라겠소."

 

위중평은 그의 말을 듣자 쓴웃음을 지으며 정중하게 대답했다.

 

"이번 일에 대해선 오해를 하지 마십시오.

본파는 어젯밤에 서야 오늘 대전을 개최할 것을 결정지었으며

어느 문파에게도 조사축상통지를 하지 않았습니다."

 

독룡역서는 대뜸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그럼 다른 문파들이 받는 청첩은 하늘에서 스스로 떨어진 것이란 말이오?"

 

말을 하면서 소매를 살짝 치키자

붉은 청첩 한 장이 허공을 가로질러 천천히 위중평에게 날아갔다.

위줌평은 그것을 받아들고 자세히 훈어보다가 이내 표정이 굵어졌다.

그것은 분명히 오늘 날짜로 적혀 있는 청첩이었고 청첩 아래쪽에 사람의 이름이

명시돼 있진 않았지만 뚜렷한 필채로 장백파라고 명시되어 있었기에 위중평은

의문을 금치 못하며 청칩을 곧 요동일검에게 건네 주었다.

역시 생강은 늙은 것이 맵다는 말이 있듯이 요동일검은 청첩을 받아 몇 번 훑어보더니

이미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에 앉아 있는 군호들에게

우선 포권의 예를 취하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본파는 십오 년 전 신주검성이 조난당한 후 원기(元氣)가 크게 손상되어 오늘날까지

고전을 면치 못했소.

이제는 다행히 신주검성의 대를 이을 사람이 나타나 본파를 다시 부흥시킬 것을

 여러분들 앞에 다짐하며 아울러 위중평 현질이 본문을 관장하게 될 것을 선포하는 바이오."

 

여기까지 말하더니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번 일을 추진시키는데 있었던 몇 가지 애로점을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이번에 여러분들이 받은 청첩은 백산목장에서 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바이오.

둘째, 본파는 부디 사전에 여러 동료에게 알려 대전을 개최하는 뜻을 더한층 빛내게 할

계획이었으나 뜻하지 않게 문중에 복잡한 일이 생겨 부득이 대전을 앞당겨 개최하는 한편

최후에 여러분들께 통지할 생각이었소.

이 점에 대해선 너그러운 아량으로 양해해 주시길 바라겠소."

 

말을 끝낸 요동일검은 다시 몸을 회전시키며 여러 동도들에게 공수의 예를 취했다.

이 때 군호들 사이에 약간의 소동이 일었다.

그들은 분분히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모두 심상치 않은 표정이었고

특히 십대 문파의 사람들은 더욱 격동이 있었다.

그들은 이번에 받은 청첩에 필시 모종의 곡절이 담겨져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은 불안한 요소가 많이 내포돼 있었다.

만약 위중평이 발한 청첩이라면 분명히 이름이 명시되어 있을 것이므로

요동칠검의 말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생각컨대 청첩을 발한 장본인은 위중평을 위장해 온갖 만행을 저지른 그 복면소년일 것이다.

만약 군호들의 생각이 격중된다면 복면소년의 속셈은 무엇일까?

금루선연은 줄곧 위중평의 곁에 붙어 있다가 이 때 넌지시 입을 열었다.

 

"여러 문파한테 청첩을 발한 것은 필시 그 복면소년일 것이 예요.

그러니 그가 오늘 이곳에 나타날 확률이 많아요.

저의 아버님을 살해한 흉수는 바로 그 복면인이니

오늘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선친의 원수를 갚아야겠어요."

위중평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복면소년이 바로 조사축상을 지닌 장본인이라면 문제는 복잡하게 변할 것이다.

복면소년이 일단 이곳에 나타나면 십대 문파의 사람들은 영락없이

그에게 공격을 전개할 것이며 금루선연도 목숨을 걸고 그를 죽이려고 할 것인데

정말 조사축상을 꺼내 장백파의 문하들로 하여금 십대 문파의 공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자기는 어떤 태도로 취해야 할까?

군호들이 분분히 의논하고 있을 때 한쪽 어귀에서 냉랭한 외침이 들려 왔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으니 장문인을 계승할 의식을 올리겠습니다."

 

그러자 군호들은 일단 의논을 중지하고 제각기 자리에 앉았다.

대청은 다시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게 변했다.

위중평이 의식에 따라 천천히 걸어나와 사조의 신위를 모신 향안(香案) 앞으로 다가갔을 때

어디선가 느닷없이 싸늘한 웃음 소리가 들리며 위중평과 같은 차림새를 한 복면인이

허공을 가로질러 향안 앞에 사뿐히 내려섰다.

향안 앞에 내려선 복면소년은 다짜고짜 손을 펼쳐 길이 한 자 다섯 치,

 넓이 여섯 치 되는 화폭을 펼쳤다.

그 화폭에는 관을 쓴 중년 서생이 그려져 있으니 바로 장백파의 창시자,

백산검객(白山劍客) 초천장(初天長)이었다.

화폭을 펼친 복면소년은 예리한 눈빛으로 주위를 한 번 훑어보더니 냉랭하게 외쳤다.

 

"장백파의 제자들은 속히 무릎을 꿇고 사조를 참배하지 못하겠느냐 "

 

그의 출현은 너무나 뜻밖이었기 때문에 장내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아연실색을 금치 못했다.

요동일검은 이러한 일을 벌써 예상하고 있었는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곧 아복과 함께 고개를 숙인 채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었으나 심리적으로

가장 격동이 일고 있는 사람은 위중평이었다.

그는 자기를 위장해 수차 흥행을 저질러 온 장본인을 눈앞에 두고서도

상대방이 조사의 축상을 갖고 있으므로 감히 경솔한 행동을 할 수 없었고

그 뿐만 아니라 도리어 상대방에게 무릎을 꿇고 참배를 해야할 입장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위중평이 막 무릎을 꿇자 복면소년은 갑자기 싸늘하게 호통을 쳤다.

 

"냉큼 무흔검을 풀지 못하겠느냐?"

 

위중평은 그 벼락같은 호통을 듣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얼굴을 돌려 힐끗 아복을 쳐다보았으나 아복은 내심 분노를 억제하고 있는 듯

이를 부드득 갈며 상대방의 분부대로 하라는 눈짓을 주었다.

그러자 위중평은 어쩔 도리 없이 허리에서 보검을 풀어 두 손으로 바쳤다.

바로 그 순간 뾰족한 외침이 대청에 메아리쳐 퍼졌다.

 

"잠깐만요! 평상공, 미쳤나요? 그 절세의 보검을 함부로 내주다니…"

 

외침과 함께 금루선연은 중인들의 머리 위를 가로질러 날아갔다.

위중평은 그렇지 않아도 보검을 내줄 생각이 없었는데

금루선연의 외침을 듣자 즉시 손을 다시 거두었다.

복면소년은 위중평이 다시 손을 거두는 것을 보자

잽싸게 몸을 움직여 앞으로 낚아채 갔다.

그와 동시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온 금루선연은 해맑은 기합 소리와 함께

왼손으로 난화불수(난蘭花拂手) 초식을 전개해 곡지혈(曲池穴)을 노리며

오른손으로는 전광석화와 같이 상대방의 복면을 향해 낚아채 갔다.

그녀의 동작은 워낙 빨랐기 때문에 복면소년은 깜짝 놀라며

옆으로 세 걸음이나 미끌어져 신안(神案) 위에 올라 냉랭하게 호통을 쳤다.

 

"너희들은 모두 죽었느냐?

사조께서 면임한 이 자리에서 외부 사람이 날뛰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다니

냉큼 쫓아 버리지 못하겠느냐?"

요동일검과 아복은 비록 마음 속으로는 불복하고 있지만

사조의 축상을 갖고 있는 자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 즉시 몸을 솟구쳐

금루선연의 앞을 가로막았다.

 

"낭자, 어서 물러가시도. 그렇지 않으면 우린 어쩔 수 없이 낭자에게 공격을 전개할 것이오."

 

금루선연은 부친을 살해한 흉수를 눈앞에 두었는데 어찌 순순히 물러날 수가 있겠는가?

그녀는 곧 냉소를 치며 당당하게 맞섰다.

 

"설사 그가 정말 장백파의 장문인이라 할지라도 내 순순히 물러날 수 있겠어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바로 나의 부친을 살해한 흉수예요."

 

이 때 복면소년은 다시 소리 높여 외쳤다.

 

"위중평, 열 초식 이내에 저 계집의 숨을 끊어 버려라. 어서!"

 

금루선연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듯이 대뜸 신형을 날려 다짜고짜 복면소년을 향해

연거푸 다섯 가지치 초식을 전개했고 극노된 상태에서 공격을 전개했으므로

일 초 일 식마다 대단한 위력이 담겨 있어 모두 상대방의 급소만 노렸으나

복면소년의 무공도 역시 만만치가 않아 한 손에 축상을 든 채

여전히 태연자약하게 초식을 펼쳐 싸움권 밖으로 물러나며 다시 싸늘하게 외쳤다.

 

"위중평, 네가 더 지체한다면 스스로 양 손을 절단케 하겠다."

 

위중평은 눈을 부라리며 홀연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계속 나를 강요한다면 나는 나중에 사조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사죄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너를 죽여 없앨 것이다."

 

이제 그는 격동으로 인해 이마에 붉은 심줄이 돌기해 있으며 눈에선 분노에 이글거리는

섬광이 폭사되었다.

복면소년은 그의 격동돼 있는 표정을 보자 약간 멍해진 듯

주춤하며 더 이상 호령을 내리지 않았다.

이 사이에 금루선연은 다시 맹렬한 공격을 시전했다.

그러나 그와 때를 같이하여 별안간 한 줄기의 인영이 번득이며

위중평이 번개같이 몸을 움직여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혜매, 어서 물러나시오.

사사로운 정으로 인해 조훈(祖訓)을 거역할 수 없으니

혜매에게 무례를 끼치는 도리밖에 없을 것이오."

 

금루선연은 그가 앞을 가로막는 것을 보자

흡사 크나큰 억울함을 당한 것처럼 울먹이는 소리로 외쳤다.

 

"좋아요. 이제는 저 악마를 도와 나를 공격할 셈이군요.

분명히 말하겠지만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저놈을 죽이기 전에는

물러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선친의 원수를 눈앞에 두고 이미 이성을 잃은 채 성난 독수리처럼

위중평에게 격렬한 공격을 전개했다.

복면소년은 자기의 목적이 달성되자

연신 득의한 냉소를 치며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 보았으나

한편 주위에 있는 군호들은 다른 문파의 사사로운 문제에 관여할 수 없어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모두 눈을 멀뚱하게 뜬 채 관전을 하고 있을 뿐이었으나

무당의 천현도장이 먼저 무량수불을 외우며 입을 열었다.

 

"각파의 문하를 살해한 원흉은 바로 저 복면인일 것이오.

이곳에는 장백파 사조의 신위가 설치돼 있어 손을 쓸 처지가 못 되니

일단 밖으로 나가 기다립시다."

 

나머지 각파의 군호들도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나갑시다. 밖에서 기다리면 날개가 달렸다 해도 도망가지는 못할 것이오."

 

이어 십대 문파의 사람들은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나 대청 밖으로 나갔다.

복면소년은 그들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자 득의에 찬 광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짤막한 기합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너 한 왜소한 인영이 유성처럼

복면소년을 향해 날아갔다.

이어 복면소년과 차륜(車論)같이 두 번 회전을 하더니 이내 갈라졌다

대청 밖으로 나갔던 군웅들은 이 뜻하지 않은 변화에 다시 안으로 와서 자세히 보니

왜소한 인영은 달덩어리처럼 아름답게 생긴 은색 궁장차림을 한 소녀였는데

이 때 궁장소녀는 이미 복면소년에게서 그 축상을 빼앗아 들고 태연히 한쪽에서 있었다.

한편 위중평은 눈길을 시종 복면인에게서 떼지 않았고 조사의 축상이

복면소년의 손에서 사라진 것을 보자 지체하지 않고 용이 울부짖은 듯한

기합을 발하며 비호처럼 덮쳐갔다.

오랫동안 가슴 속에 쌓아온 울분이 막강한 장풍으로 변해 복면소년을 향해 덮쳐가며

치명적인 살초를 전개한 것이다.

복면소년은 축상을 잃은 놀라움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위중평이 덮쳐오는 것을 보자

대갈일성과 함께 이내 쌍장을 교차시켜 한 갈래의 태산을 무너뜨릴 듯한

음한(陰寒)한 장력을 격출했고 동시에 몸을 비스듬히 날려 궁장소녀를 향해 날아갔다.

물론 그는 자기가 격출한 일 장이 충분히 위중평의 장력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다음 행동을 동시에 취한 것이었으나 그것은 위충평의 공력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그의 몸이 막 허공으로 뜨자 이내 한 갈래의 웅후한 잠력(潛力)이 비스듬히 뻗쳐와

그 진동으로 인해 뒤로 다섯 자 가량 밀려나 비실거리며 간신히 몸을 고정시켰다.

비록 생명의 위험은 모면했지만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복면소년이 내심 크게 놀라며 몸을 돌리기도 전에 위중평은 전광석화와 같은 기세로

가까이 날아와 경리적화(競理摘花)의 초식으로서 가슴을 향해 낚아채 갔으나

복면소년의 솜씨는 역시 범상치 않아 위중평의 장풍이 몸에 닿으려는 찰나

교묘한 보법(步法)을 전개해 옆으로 미끌어지며 도리어 두 가지 반격 초식을 격출했다.

그가 졸지에 전개한 초식은 지극히 괴이하여 일반 무림인으로선 도저히 상상도 못할 것이었고

위중평은 뜻하지 않은 반격을 받자 어쩔 수 없이 일단 뒤로 물러났다.

그가 복면소년의 두 가지 괴초(怪招)를 와해했을 때 상대방은 이미 창문을 통해

처마 위로 몸을 솟구치더니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졌다.

다음 순간 군호들은 분분히 대청 밖으로 뛰쳐나갔으며 금루선연도

물찬 제비처럼 창문을 통해 밖으로 신형을 솟구쳐 추격해 갔다.

위중평은 행여나 금루선연이 일시적인 흥분으로 인해 손해를 볼까봐

막 뒤를 쫓아가려는데 등 뒤에서 앙칼진 소리가 들려 왔다.

 

"잠깐만!"

 

위중평이 몸을 돌리자 조금 전에 복면소년에게서 축상을 빼앗은

궁장소녀가 차가운 안색으로 한 자 한 자 뚜렷하게 내뱉았다.

 

"내 귀파의 사조를 대신해 명령을 내릴 테니 복종하겠느냐?"

 

위중평은 생각할 여지도 없이 몸을 숙이며 공손히 대답했다.

 

"제자가 어찌 사조의 명령을 거역하겠습니까?"

 

"그럼 네가 장백파를 관장하도록 해라.

그리고 이 축상은 내가 당분간 보관하고 있다가 너의 은원이 해결되는 날 돌려 주겠다."

 

궁장소녀는 그 몇 마디를 남기고는 이내 몸을 솟구쳐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복면소년과 궁장소녀가 선후로 해서 떠나자

요동일검은 비로소 길게 숨을 내쉬며 천천히 위중평에게 다가갔다.

 

"현질, 나머지 일은 차후에 논하기로 하고 어서 조사에 대한 향제를 올리게."

 

그러나 위중평은 지금의 심정으로 장문인의 직위를 맡고 싶지 않았고

본래 성격이 호방하여 어떠한 구속도 받기 싫어하는 사람이었기에

조사축상에 관한 추상같은 규칙에 은근히 반감을 느꼈으나

동시에 그는 복면소년과 궁장소녀의 내력을 파악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

한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이곳의 일은 두 분 사숙께서 알아서 처리해 주십시오.

저는 즉시 복면소년을 추격할 것이고 또한 궁장소녀를 찾아 조사축상을 되찾아 오겠습니다."

 

위중평은 흥분으로 인해 이미 진정을 잃고 말을 끝내는

즉시 몸을 솟구쳐 한 줄기의 연기처럼 질주해 갔다.

그의 판단으로선 복면소년이 필시 남쪽 방향으로 내려갔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곧장 남쪽으로 길을 택해 신법을 최대로 전개하니

얼마 후에 십여 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바로 그 때 일진의 기합 소리와 고함치는 소리가 은은히 바람결에 실려 귓전에 들려오자

위중평은 허리를 살짝 비틀어 비스듬히 솟구쳐 가까운 나뭇가지 위에 올라 일단 몸을 숨겼다.

그에게서 약 삼십 장 가량 떨어진 제법 넓은 공터에는 많은 사람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십대 문파의 사람들을 비롯해 군호들은 이미 복면소년을 포위하고 있었다.

복면소년은 교만스레 한복판에 버티고 서서 천현도장을 노려보며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알고 보니 십대 문파는 협공을 하는데 대단한 흥미를 갖고 있군. 목숨이 아깝지 않은 자가 있으면 얼마든지 덤벼 보아라.

내가 만약 너희들의 협공을 두려워한다면 어찌 장백파의 장문인이 될 자격이 있겠느냐?"

천현도장은 수중의 금사불진(金絲佛塵)을 살짝 떨쳐 복면소년을 가리키며 외쳤다.

"이 건방진 녀석, 수 차례 걸쳐 십대 문파를 가해한 너의 흉행은 이미 청천백일하에 드러났다.

오늘 네놈은 정의(正義)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복면소년은 가소롭다는 듯이 즉시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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