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31. 은의소녀

오늘의 쉼터 2014. 6. 20. 16:38

31. 은의소녀

 

 

관동의 넓은 절에 남삼을 입고 장검을 찬 미남의 소년이 먼지가 펄럭이는 관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옷에 먼지 하나 묻히지 않는 것이었고 더욱더 이상한 것은 말을 타지도 않았는데

말을 탄 것보다 더 빠른 것이었다.

그 뒤를 따라 또 남삼의 문생이 달려와 누군가 미행하는 것처럼 매우 신속한 신법으로

눈 깜박할 사이에 앞서 가던 소년처럼 황토 먼지 속에서 사라졌다.

돌연 온몸에 흑의경장을 한 요염한 소부가 등에 철비파를 메고 질풍처럼 달리는 말 위에 타고

뒤에서 쫓아왔다.

그녀는 손으로 햇살을 가리고 앞을 쳐다보더니

말의 배에 힘을 주어 두 소년이 갔던 길로 질주해 갔다.

앞서 가던 소년은 바로 금루선연과 헤어져 장백으로 돌아가서

장백파의 부흥에 대해 의논하려는 위중평이었다.

그는 황혼 무렵 행인이 드문 틈을 타서 초음신법을 전개해 한 차례 달리자

어느새 요양 땅에 도착했고 주막집에 들어가 음식과 술을 주문하여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그는 고기조각을 입에 넣다가 입술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자 냉큼 뱉아내고 품 속에서

옥병을 꺼내 몇 알의 약을 먹었다.

그리고 나선 한 접시의 고기를 침상 밑으로 버리고 큰 대자로 침상 위에 쓰러졌는데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방문이 열리고 현색 경장의 소부가 들어왔다.

위중평은 슬쩍 훔쳐보다가 바로 우주광인이 찾아다니던 온랑자인 것을 알자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늙은 구렁이 천독성모가 와도 무섭지 않은데 네까짓게 도대체

어떤 재주를 부릴 줄 안다고 야단법석이냐.'

 

온랑자가 침대로 다가와서 그의 얼굴에 가린 옷소매를 잡아당기려고 할 때

갑자기 창 밖에서 한 사람이 냉랭히 웃었다.

 

"잠깐만, 나으리가 천리길을 미행한 끝에 이제 수중에 들어온 물건을

어디 함부로 손을 대려고 하느냐?"

 

깜짝 놀란 온랑자는 철비파를 손에 쥐는 동시에 몸을 돌리다가 질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는데 들어온 사람이 가면을 썼을 뿐 위중평과 옷차림이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위중평이 침상에 누워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속아 넘어갔을 것이지만 강호에서 많은 풍랑을 겪었기 때문에 금방 본래대로 돌아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 사람은 천독문의 큰 적인데 귀하가 대신 나서준다 이거요?"

 

복면소년이 냉랭히 대답했다.

 

"당신이 그를 찾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 놓든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오.

그러나 그의 물건은 한 가지도 가지고 갈 수가 없소.

 더욱이 이 무흔검은 꼭 가져가야겠소."

 

온랑자는 너무나 화가 나서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만약 그렇다면 이 철비파의 맛 좀 봐라."

 

철비파를 쥐고 막 공세를 취하려고 할 때 갑자기 문 밖에서

나이가 약 십팔 세 되고 은빛 궁장차림에 마치 그림의 주인공 같은

아름다운 소녀가 들어와 잽싸게 침상 앞으로 가며 위중평을 보호해 주듯

가로막고서 온랑자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돼먹지 못한 비겁한 것 같으니라고. 어서 썩 나가지 못할까?"

 

복면소년과 온랑자는 동시에 경악했다.

온랑자는 너무나 예쁜 이 소녀를 보자 철비파를 손에 쥔 채 뒤로 물러갔고

복면소년은 또 그 미모에 그만 넋을 잃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위중평은 온랑자가 들어온 후부터 슬며시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별안간 자신과 똑같은 차림의 복면소년이 나타나자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이 자가 바로 내 이름으로 십대 문파를 살해한 흉수일 것이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잡아야지…'

 

하고 생각하는데 또 어디서 웬 날씬한 몸매가 자기의 시선을 완전히 가리는 것이 아닌가.

소녀는 그들 둘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또 소리를 질렀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어서 썩 꺼지지 못할까? 죽고 싶으냐?"

 

이 호통은 어여쁜 황영의 목소리처럼 매우 듣기가 좋았지만

그 전면에 깔린 불가침의 위엄은 더욱 대단했기에 호통을 듣자

더욱더 화가 치밀어 올라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손에 든 철비파를 소녀에게 향했다.

그러자 소녀는 독사를 본 것처럼 정색하고 노갈했다.

 

"이곳은 너무 좁으니 밖에 나가서 겨루어 보자."

 

하며 말과 행동을 동시에 거행하였다.

 

동시에 은의소녀는 복면소년에게 소리쳤다.

 

"너는 어째서 그냥 거기에서 있느냐? 어서 썩 꺼지지 못하고…"

 

복면소년은 냉랭히 웃었다.

이 때 침상에 누워 있던 위중평이 갑자기 일어나 은의소녀의 등 뒤에서

뛰어나와 섬궁절계 일식으로 그 소년을 잡아갔으나 소년은 매우 기이한 일 초로

위중평의 초식을 깨뜨리고서는 재빨리 창문 밖으로 달아났다.

위중평은 놓칠세라 즉시 창문으로 뛰쳐나가 소년의 뒤를 쫓아갔다.

앞뒤로 달리던 두 사람이 어느새 백여 장이나 나왔다.

복면소년은 뛰어가다가 홀연히 몸을 돌리고 냉랭히 말했다.

 

"하릇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놈,

내가 너를 두려워해서 달아나는 줄 아느냐…"

 

하고는 잽싸게 달려들어 다섯 초를 공격하고 또다시 십이 식으로 초식을 바꾸는

그 솜씨는 정말 귀신이 곡할 정도로 능숙하고 악랄했으나 위중평도 만만치 않아

바로 그 자리에서 이리저리 막고 공격하여 쌍장을 휘둘러 십일 장이나 공격하자

뜻밖에도 복면소년이 숲 속으로 뛰어들아가 도주해 버렸다.

뒤이어 쫓아갔으나 이미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홧김에 씩씩대며 한참 서 있다가 다시 주막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등 뒤에 누군가 있는 것을 직감하고 잽싸게 몸을 돌리자

조금 전에 자기 방에 있었던 은의소녀가 어느새 자기 등 뒤에 와 있었다.

그 소녀는 위중평이 긴장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일순 자기의 웃음이 자신의 고귀함에 오점을 묻힐까봐

이내 웃음을 그치고 신성불가침의 그런 표정으로 바꾸며 극히 오만스럽게 말을 꺼냈다.

 

"당신이 바로 요 근래 강호에서 떠들어대는 고보교룡인가요?"

 

이 외호는 홍모음효 등이 그를 말할 때 쓰는 것이나 위중평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소생 장백파의 위중평이오. 고보교룡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오."

 

은의소녀는 별안간 호통을 쳤다.

 

"이 멍청한 것 같으니라고. 자기의 외호를 모르고 있다니

위중평은 어떤 내력인지도 모르는 소녀가 불쑥 튀어나와서 자기에게 호통을 치는 걸 보니

몹시 화가 났지만 이내 일개 여자하고 따져 봤자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아 쳐다보지도 않고

뒤돌아섰으나 은의소녀는 위중평을 놓치지 않으려고 다그치듯 소리쳤다.

 

"잠깐만, 매우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위중평은 몸을 돌려서 또박또박 얘기해 주었다.

 

"소생은 비록 무공을 약간 배워 두었지만 자기가 대단하다고 자찬하고 싶지 않소.

아마 그것은 어떤 할 일이 없는 사람이 허풍을 떤 것이겠지요?"

이 교만하고 버릇없는 계집아이 하고 더 이상 아웅다웅하기가 싫어서

그는 다시 몸을 돌렸지만 몇 걸음도 채 못 가 향기로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더니

소녀가 그의 길을 막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낭자는 한 번 겨루고 싶어요."

 

위중평은 준미를 치켜 세우고 광소를 터뜨렸다.

 

"낭자가 이렇게 매달리는 용의가 무엇이오?

그리고 낭자와 난 서로 알지도 못하는데 뭘 보고 나와 겨루겠단 말이오?"

 

"이걸 보고…"

 

하면서 궁장소녀가 돌연 옥수를 내밀어 잽싸게 위중평의 혈기, 기문, 장대, 칠감 등

여러 대혈을 찔러왔다.

위중평도 장을 휘둘러 전신에다 파도가 물결치는 듯한 장염을 뿌려 놓고

소녀가 공격해 오는 공세를 막았다.

 

"꼭 겨루어 보겠다면 소원대로 해주지."

 

그러나 은의소녀는 그의 말에들은 척도 않고 연달아 초식을 전개해 공격했다.

위중평은 자꾸만 자기를 못살게 구는 이 하늘 높고 땅 넓은 줄 모르는

소녀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양보하지 않고

연이어 절초를 펴며 소녀의 절묘무비한 초식과 맞섰다.

그는 아무런 고생도 모르고 자란 부잣집 천금에게 대단한 무공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고 삼사 초 이내로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으나 의외로

소녀의 초식이 일단 한 번 터지자 황하가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신기무비해 섬뜩한 나머지 그는 조금 전에 만났던 복면소년,

그리고 소요공자의 무공이 모두가 자기와 비슷하다는 것을 생각했는데

오늘 또 불쑥 무공이 이토록 신기한 소녀가 나타나자 경악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위중평은 그녀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그도 될 수 있는대로

신비교묘한 초식으로 약 이십여 초나 겨루었다.

돌연 은의소녀의 초식이 변하더니 순식간에 전신의 삼십육대혈을 손아귀에 쥔 채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말아요.

본 낭자는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의 기초적인 공부를 다 내놓게 할 것이니 두고 보세요."

 

위중평 역시 큰소리로 외쳤다.

 

"그렇게는 안 될 것이오."

 

이어서 광풍폭우 같은 위세를 지닌 절초도 그녀의 만천지영을 무너뜨리고 순식간에

현귀보록에 기재된 절학을 십이 식이나 펼쳐 공격했다.

은의소녀는 차가운 얼굴을 하며 그 자리에서 위중평의 십이 초를 완전히 깨뜨리고

교갈소리 중에 다섯 손가락을 일제히 출수하자 다섯 줄기의 절세무비한 경풍이

그에게로 쓸어왔다.

위중평은 그녀와 내력을 겨루고 싶지 않아서 옆으로 삼 척이 나 물러났지만

이것이 그 소녀에게 좋은 기회를 주게 되었다.

그가 한 옆으로 피하자 발이 채 땅에 닿기도 전에 소녀의 소수표향경혼지가

뒤따라 습격해 왔다.

보기에는 연약하고 무력한 이 지법이 실제로는 무서운 위력을 지녔다.

위중평이 기회를 잃자 그녀에게 공격을 당해 연신 다섯 걸음이나 물러갔다.

그는 참고 있었던 울화가 폭발하여 삼 장을 연환(連環)하여 사용했다.

바로 그 삼 장을 내놓은 동시에 소녀가 갑자기 초식을 거두고

한 옆으로 피하면서 교갈을 터뜨렸다.

 

"그 정도 몇 근의 힘이 있다고 해서 으스대지 말아요. 자, 받아요."

 

멀찌감치서 그녀는 일 장을 내놓았다.

이 일 장은 그냥 보면은 마치 애들이 장난할 때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수많은 현기가 숨겨져 있고, 크나큰 무형의 힘이 함께 치밀어 올랐다.

위중평은 안색이 심각하게 변해 상대를 주시하더니

한 손을 허공에다 대고 돌연 후려쳐 나가자

한 차례 폭음 소리가 지나간 후 소녀의 뺨이 노을을 물든 것처럼

붉어졌고 금세 또 절세 무비한 칠 장을 쳐내 상대가 알아차릴 수 없는

부분과 각도로 공격해 갔다.

위중평은 하는 수 없이 선문의 절초인 천룡장법을 쓰게 되었다.

일단 사용하자 빈공등지를 동시에 내놓고 또 곧이어 난석봉운 일 초를 내놓아 곧장 공격했다.

이 장법은 은의소녀의 장법과 일강일유(一剛一柔)로 각기 묘한 데가 있었다.

바로 그 때 은광이 번쩍이더니 소녀가 장을 거두고 물러나며 웃었다.

 

"호호호… 끝내 기초적인 공부를 모두 다 내놓으셨죠.

난 더 이상 기분이 나지 않아서 그만둘래요. 안녕!"

 

눈 깜박할 사이에 새벽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후 위중평이 다시 주막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오경이 가까왔었기에

설친 잠을 애써 들지 않으려고 하며 침상에 앉아서 날이 밝을 때까지 내공을 운기했다.

그는 멀찌감치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하얀 면양(綿羊)들이 넓은 평원에서

노니는 것을 보고 내심 중얼거렸다.

 

'이게 뉘집의 목장인데 이렇게 많은 양들을 키웠지…'

 

그런데 돌연 양떼들 틈에서 붉은 말이 달려 나오더니

위중평을 향해 질풍처럼 달려왔다.

아직 육십 보나 되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말에 탄 사람이 고함을 질렀다.

 

"사숙, 평사숙님 이 돌아오셨습니다…"

 

말이 아직 도착하기도 전에 사람은 어느새 그에게 달려들었다.

위중평은 이미 그가 위장청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몹시 기뻐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할아버지와 고할아버지께서도 안녕하시냐?"

 

위장청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 사숙의 염려 덕분입니다.

매일매일 돌아오실 날만 학수고대하고 계시죠.

그분들께서 평사숙이 돌아오신 것을 아신다면 몹시 기뻐하실 겁니다."

 

하면서 말에 올라탔다.

 

"천천히 오세요. 제가 먼저 가서 알려 드리지요."

 

하고는 나는 듯이 달려갔다.

위장청이 저토록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그는 몹시 감동했다.

위중평은 혼자서 약 일 리쯤 천천히 걸어 가다가 멀리 산 옆에

커다란 울타리가 둘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사방에는 수많은 소와 말이 있고 규모로 보아 웅대한 목장인 것 같았는데

바로 그 때 울타리의 문이 활짝 열리더니 대여섯 필의 말이 선풍처럼 그를 향해 달려왔다.

위장청이 탄 말이 맨 앞에 있고 아복과 요동일검이 나란히 달렸고

그 뒤에 무사차림의 몇 사람이 따랐다.

말이 가까이 오자 아복과 요동일검이 하나는 공자,

또 하나는 현질이라고 부르면서 일제히 말에서 내려와 위중평의 두 손을 잡으며 몹시 기뻐했다.

 

"정말 돌아왔구나. 여기는 만사가 준비되어 자네만 와서 의논할 일만 남았다네."

 

아복이 급히 말했다.

 

"공자께서 먼 길을 오셔서 피곤하실 테니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십시오."

 

일행은 위중평을 가운데에다 두고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 넓다란 광장을 지나

사무를 보는 대청으로 들어갔다.

아복이 연신 술과 음식을 차려오라고 소리를 지르자 위중평은 웃었다.

 

"핫하하… 아복 숙부님, 서두르지 마십시오. 우선 얘기 좀 하고 나서 들죠."

 

아복이 대소를 쳤다.

 

"허허허… 이 늙은이가 나이든 이 때 공자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고

다시 장백파를 부흥하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위중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강호에 나온 지가 이미 이삼 년이 되었는데 여지껏

아버님의 원한도 갚지 못했을 뿐더러 본파의 부흥문제도 지체되었습니다."

 

요동일검이 얘기했다.

 

"현질, 너무 겸손해 하는군. 우리가 이 백산목장을 다시 일으켜서

이 정도의 기업을 가진 것도 모두 다 현질 덕분이 아닌가?"

 

하면서 그들이 백산목장을 경영했던 경과를 상세히

위중평에게 들려 주었는데 얘기는 이러했다.

 

위중평이 강호에 나가자마자 관등의 길에서 육칠십 명의 유명한 명수들을 살해했고,

북고봉에서 사강에게 도전하며 힘으로 삼흉을 물리친 것이 일시에 강호에 퍼져

장백파에서 새로 대단한 인물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기세가 기울어진 장백파는 이 틈을 타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장백파의 사람이라면 강호인들이 색다른 눈으로 보아주고 있는 데다가

고원의 삼흉이 계속 추혼천녀와 자선마군의 표적물을 받고 해서 하는 수 없이

흩어진 부하들을 해산시키자 관동길은 또다시 조용해졌다.

그래서 아복과 요동일검은 상의해서 옛날 장백파에 몸담았던 사람들을 불러들여

다시 백산목장을 일으키기로 했는데 뜻밖에도 순조롭게 일이 잘되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위중평은 즉시 일어서서 요동일검과 아복에게 깊숙이 공수를 했다.

 

"두 분 숙부님께서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소질은 감사드립니다."

 

요동일검과 아복이 동시에 대소했다.

 

"우리들이 무능해서 장문인의 복수를 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운 일인데

오늘 본파를 위해서 이까짓 수고가 또 무엇에 비하겠는가?"

 

위중평은 그제서야 자리에 앉아 얘기했다.

 

"요즘 강호에서 자칭 장백파의 장문인이라고 하는 소년이 있는데 두 분께서 혹시 모르십니까?"

 

요동일검이 건 수염을 매만지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 얘긴 나도들은 적이 있네.

그러나 도대체 누군지 알 수가 없군.

이 사람은 장백파의 무공을 쓸 줄 알 뿐만 아니라 윌륜검법도 사용할 줄 압니다.

두 분께선 혹시 본파 중의 어느 선배께서 월륜검법을 하실 줄 아시는 분이 계신지 모르십니까?"

 

아복이 무릎을 탁 쳤다.

 

"설마 그가…"

 

요동일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또 가로저었다.

 

"말하기가 어려워 이 일은 잠시 내버려 두고 장백팍를 부흥하는 일부터 의논해야지.

 일찌감치 장문인의 명분을 정해 놓고 무림의 동도들에게 알 리면

그런 가짜가 생기는 일은 자연히 사라질 것이다."

 

아복이 찬성을 표시했다.

 

"일을 지체할 수 없으니 어서 착수하고 준비합시다."

 

위중평이 급히 일어섰다.

 

"이 일은 잠시 뒤로 미루고 천천히 하십시오.

첫째로 소질은 원수도 아직 갚지 못하여 장문의 자리를 이어받을 면목이 없는 데다

둘째는 두 분 숙부님께서 계신데 제가 어찌…"

 

요동일검이 얼른 말을 받았다.

 

"현질, 너무 겸손해 하지 말게. 본파의 부흥 문제는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다네.

그리고 이 일로 해서 복수의 일에 절대로 영향이 끼치지 않을 것이야."

 

위중평이 더 사양을 하려고 하자 갑자기 목동차림을 한 사람이 들어와서

요동일검의 귀에다 대고 뭐라고 하자

그의 안색이 돌연 급변하더니 위중평에게 물었다.

 

"와도지왕이 현질하고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가?"

 

위중평은 급히 대답했다.

 

"언젠가 한 번 항주성 밖에서 삼백 초를 겨루어 양쪽 다 크게 다친 적밖엔

아무런 원한도 없습니다."

 

요동일검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와도지왕은 신공이 뛰어나 몇 년 동안이나 줄곧 왕조를 지켜 오면서

여지껏 강적이라곤 만난 적이 없었는데 위중평이 그와 삼백 초를 겨루고

양쪽 다 패했다면 이런 얘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기에

요동일검은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얘기했다.

 

"동사삼룡이 지금 문 밖에서 자네를 보겠다는데 만나겠는가 안 만나겠는가?"

 

위중평이 아직 의사 표시를 하기도 전에

아복이 옆에서 혼비백산하여 대신 손을 계속 저었다.

 

"절대로 나가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서 피해 계시오.

동사삼룡은 무공이 와도지왕보다는 못해도 이름난 사람들이오.

이번에 틀림없이 전번 일로 보복하려고 왔을 것이오."

 

위중평은 돌연 광소를 터뜨렸다.

 

"동사삼룡이 아니라 와도지왕이 직접 왔다 해도 위모가 두려울 게 뭐 있겠습니까?

두 분께선 염려 놓으시고 계십시오.

 제가 가서 만나보고 오겠습니다."

 

하면서 벌떡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자 요동일검과 아복은

미처 막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위중평이 울타리 문을 나서자 동사삼룡이 의젓하게 말을 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위중평이 나오는 것을 보자 일제히 말 위에서 내려와 공손히 예를 올렸다.

위중평도 즉시 답례를 했다.

 

"이 위모를 찾아 백산목장까지 오시다니 무슨 일이십니까?"

 

독룡역서가 즉시 품에서 서찰을 꺼내 두 손으로 바쳤다.

 

"저희 도주께서 우리 세 형제에게 분부하시기를 이 편지를 전하고

소협의 회신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서찰을 받고 뜯어 보자 내용은 이러했다.

첫째, 도주는 명명주재가 위중평이 이궁에서 얻은 보물을 뺏으려는 음모를 짜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몹시 화가 나서 위중평이 약속한 날짜에 직접와서 이 무림의 생사를 쥐고 있는

명명주재와 겨루어 보겠다는 얘기고, 거기에 또 위중평의 출신에 대한 비밀 얘기를

해 주겠다고 했다.

둘째는 장백파의 장문인이 생기는 날에 틀림없이 와서 축하하겠다고 얘기했다.

셋째, 앞서 위중평과의 일 년 지약은 상황을 봐서 명명주재와 결투를 한 후로 미루겠다고 했다.

서찰을 받아 보자 이 와도지왕이 역시 영웅다운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이내 삼룡에게 공수를 했다.

 

"세 분 선배님께서 저 대신 와도지왕에게 전해 주십시오.

첫째, 그가 정말 명명주재와 겨루어 보고 싶다면 소생은 반대하지 않겠지만

저를 도우혀고 그러신다면 감사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여기까지 말한 위중평은 잠시 삼룡을 쳐다보더니 이내 말을 계속했다.

 

"둘째는 본파의 장문인이 선택되는 날이 아직 멀었으니

말씀만 들어도 감사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삼룡은 위중평의 회신을 받자

즉시 말을 타고 달려갔고 위중평이 돌아와서 요동일검과 아복에게 다시 한 번 되풀이 하자

요동일검이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거참 이상하군. 이런 편지를 보내는데 동사삼룡같은 중요한 인물을 보낼 필요가 뭐 있는가?"

 

아복도 뭔가 꺼림칙해서 즉시 입을 열었다.

 

"혹시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위중평은 잠시 생각해 보았으나 아무래도 알 수가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세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청으로 들어섰다가 위중평이 별안간 경악의 소리를 질렀다.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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