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30. 소요공자(逍遙公子)

오늘의 쉼터 2014. 6. 20. 16:36

30. 소요공자(逍遙公子)

 

 

준미공자는 여전히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서 있었으나

적송자의 몸은 허공으로 뜨더니 털썩하고 땅바닥으로 떨어 졌다.

준미공자가 출수하여 적송자를 공격하는 동시에 표잔우사와 수결서생이

그의 곁으로 달려가 매우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아룁니다. 장백파의 그놈은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뿐더러

추혼천녀와 흑옥인마들의 도움으로 천산삼로를 부상시키고 상강쌍영을 죽였습니다.

공자님께선 분부만 내리십시오."

 

준미공자는 오만스럽게 손을 내저으며 그들의 말에 즉시 대답은 않고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흥, 황, 남, 백 네 명의 장한노인에게 물었다.

 

"십대 문파가 옥부의 전달을 듣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떤 형벌에 속하는가?"

 

창색 적삼을 입은 노인이 한 걸을 걸어나와서 공손히 대답했다.

 

"법에 의하면 두 손을 모두 자단(自斷)해야 하는 줄로 아뢰옵니다."

 

준미공자는 또 이를 드러내며 음험하게 웃었다.

 

"그럼 먼저 저 장백파녀석부터 해결하고 나서 다시 이 버릇없는 영감장이들을 처리하시오!"

 

당당 십대 문파의 장문인들이 한낱 영감장이로 불리다니

그들의 목숨이 마치 자신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다는 것 같은 말투였기에

화암상인의 검미가 치켜 올라가더니 우렁찬 언성으로 불호를 외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무림의 각 문파는 각기 규율이 있고 종사가 있는데

십대 문파가 무엇 때문에 꼭 구사옥부의 명령대로 움직여야만 한단 말이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차례 광소가 터지더니

준미공자가 이미 번개처럼 그에게 달겨들었으나 화암상인의 무공은 고심할 뿐 아니라

침착성이 매우 강했기에 이미 이것을 예측하고 말을 하면서도 살며시 공력을 운기했다.

그런데 정말 준미공자가 달려들자 커다란 옷소매를 휘젓더니

한 가닥 부드러운 잠력이 소맷자락 안에서 나왔다.

이 준미공자의 무공은 정말 괴이했다. 눈앞이 흐려지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장풍을 뚫고 앞으로 질주하며 계속 칠 초나 공격해 냈다.

화암상인은 연달아 다섯 가지 다른 검법을 써서야 그 칠 초를 화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이 매우 신속무비하게 구 초를 겨루자

돌연 차갑기 그지없는 가느다란 웃음 소리가 들려 두 사람은

별안간 떨어졌는데 화암상인의 머리 위에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입가에는 두 줄의 검은 피가 흘러내리며 몸도 비틀거렸다.

승부는 이미 났으니 더 이상 계속하지 않아야 만이 도리였으나 준미공자는

어찌나 악랄한지 화암상인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려고 마음먹고는

두 번째로 다시 공격해 가자 돌연 노갈이 터지더니

영, 문, 금, 인 네 고승이 일제히 장을 휘두르며 공격해 왔다.

장풍이 휘몰아치며 하나의 인영이 바람처럼 육박해 들어오더니 비명 소리가 났고

네 고승 중 영광과 인광이 선혈을 토해 내며 쓰러지자

무광과 금광은 겁을 먹고 슬슬 뒤로 물러나 버렸으나 뜻밖에 발이 채 닿기도 전에

또 준미공자의 괴이한 수법으로 인해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준미공자가 극히 짧은 시간에 연신 소림의 다섯 고승을 다치게 하자

장내에 있는 십대 문파 사람들은 모두 찍소리도 못했고 준미공자는

흥이 깨졌는지 어느새 또 위중평의 앞에 가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듣기에 자네가 강호에서 인기를 한 몸에 얻었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위중평은 무표정하고 냉랭하게 대꾸했다.

 

"사실이든 아니든 당신과 무슨 상관이오?

그래, 명명주재하의 어떤 사람인지 이름이라도 대시오."

 

준미공자는 살며시 웃었다.

 

"본 공자는 소면독심 소요공자라고 한다.

강호에 다니면서 이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단 말이냐?

오늘 본 공자가 각별히 자비를 베풀겠다.

너희들이 순순히 나를 따라 명명주재를 만나 뵈러 간다면 잠시 목숨이나 살려 주마."

 

돌연 홍영이 어른거리더니 추혼천녀가 잽싸게 소요공자의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녀는 즉시 출수하지 않고 단지 냉랭히 그에게 말했다.

 

"미리 준비해 두어라. 오늘 밤 본 낭자는 너를 가만 두지 않겠다."

 

소요공자는 추혼천녀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자

즉시 무슨 보물을 얻은 것처럼 대소를 쳤다.

"하하하… 당신이 바로 강호에서 이름을 날리는 추혼천녀요?

본 공자는 그 이름을 들은 지는 오래되었으나 오늘에서 야 그 어여쁜 모습을 보게 되다니

이것도 하늘이 정해준 인연이로군…"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추혼천녀는 이미 출수하여 소요공자의 몸에 있는

일곱 군데의 대혈을 찔렀다.

소요공자도 더 이상 말을 하지도 않고 장삼을 펄럭이며 옆으로 삼 척이나 물러나서 소리를 질렀다.

 

"낭자, 잠시 멈추시오.

이 모든 일은 다 명명주재가 시킨 일이니 저놈만…"

 

그러나 추혼천녀의 신법은 신속무비하여 금세 또 오 초를 공격했고

소요공자가 홀연히 장을 밀어내자 경풍이 밀물처럼 밀려 왔다.

위중평과 흑옥인마가 묵묵히 소요공자의 무공을 살펴보니

색다른 면을 터득한 무학인 듯 괴이한 수법이라 매우 능숙하고 매서웠으나

추혼천녀 또한 완전한 옥탑의 무공을 익혀서인지 빠르면서도

일종의 표현신환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공수진퇴 간에 전혀 빈틈이 없었는데

이것은 많은 싸움을 해 본 경험이 있다는 증거였다.

사람에게는 다 일종의 웅심이 있다고 본다.

그들 두 사람의 신기절학을 보자 위중평은 소요공자와

자기가 겨루어 보는가 상을 해보았지만 자신의 심후한 공력과 변화같은

천룡장법으로 일이백 초 안에 그를 격파할 수 없다고 느꼈다.

시간은 일 분 일 초가 흐르고 장내의 두 젊은 고수는 이미 칠 팔십 초 이상이나

겨루게 되었을 때 홍, 황, 남, 백의 노인은 이미 만면에 음침함을 담고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고 포잔우사와 수결서생도 눈에 살광을 토해 내며 뚫어져라

흑옥인마와 위중평 그리고 금루선연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정세는 매우 명확했다. 만약 소요공자가 조금의 실수로 해서 패한다면

네 명의 노인은 일제히 추혼천녀에게 달려 들고 포잔과 수결 두 형제도

위중평 등의 구원을 막을 속셈인 것이기에 흑옥인마가 괴소를 터뜨렸다.

 

"너희들은 그런 멍청스런 속셈을 품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 인마가 있는 한 절대로 너희들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입으로 얘기를 하면서 지장음공을 운기하고 눈에서는 남광을 폭사하며 네 노인을 노려보았다.

위중평도 추혼누님의 안전을 염려해 허리춤에서 자옥선을 꺼내 손에 쥐었다.

일시에 장내의 공기가 긴장되었다.

두 사람의 승부가 났다 하면 즉시 패거리의 싸움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바로 이 위기일발의 순간에 장외에서 돌연 간들어지고 극히 차분한 냉소가 들려 오더니

한 청사로 얼굴을 가리고 궁장을 한 중년 부인이 유령처럼 날아왔고

그녀의 행동이 너무나 돌연적이고 또 신비스러웠기 때문에 만약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절대로 그녀의 작고 예쁜 발이 한 그루의 나무 위에 올라섰다는 것을 알 수 없었을 것이었다.

부인은 냉소를 치며 소리쳐 불렀다.

 

"천아, 멈추어라."

 

부르는 소리가 크지 않았으나 불가항력의 위력이 담겨 있었는지

추혼천니는 순식간에 몸을 빼내어 뒤로 일 장 오륙 척을 물러섰다.

준미공자는 졸지에 싸우는 상대가 사라지자 엉거주춤했다.

복면부인은 장내로 시선을 돌리다가 포잔우사가 손에 들고 온 구사옥부에 눈길을 멈추더니

냉랭히 웃음을 치며 한 가닥 연기처럼 가볍게 미풍을 날리며

그의 앞에서 어른거리는 순간 구사옥부는 어느새 그녀의 수중에 들어와 있었고

포잔우사는 얼떨결에 옥부를 뺏기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이 부인의 무공이

불가사의하다는 것을 느끼고 전력을 다해서 일격을 공격했다.

왼손의 다섯 손가락은 갈퀴처럼 꼬부려서 옥부를 빼앗으려고 했고

오른손은 장심을 밖으로 내뻗어 한 가닥 강양무비한 내가 진력으로 태풍처럼 휘몰아쳐 갔다.

이 무력한 일격으로 꼭 옥부를 도로 뺏는다는 자신은 없으나 최소한 명명주재에게 뭔가

변명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으나 신형이 가까이 닿자 돌연 미풍이 불어오더니

 마치 탄력성이 매우 강한 물체에 부딪친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이 장 밖으로 굴러 떨어져

즉시 피를 토해 내며 심맥이 끊어져 죽었다.

복면부인은 포잔우사를 죽이고 나서도 여전히 꼿꼿한 자태로 나무에 서서 소요공자를 가리켰다.

 

"돌아가서 너의 아버지 명명주재에게 전해라.

위중평의 일은 이 옥탑단장인이 간섭해야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일 년 후에 다른 면모로 너의 아버지를 만나서 모든 것을 결산하겠다고 말이다."

 

옥탑단장인의 이름이 이미 온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고 또 조금 전에 보여주었던

삼제유공이 가히 불가사의한 경지에 이른 것을 본 장내의 군웅들은

일시에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으며 소면독심 소요공자의 항상 웃던 얼굴에

웃음이 싹 사라지더니 보기 딱하리만큼 창백한 빛으로 변했다.

이어 추혼천녀를 돌아보고 능글맞게 웃더니

홀연히 몸을 돌려 쏜살같이 어둠 속으로 달려가자

홍, 황, 남, 백 네 노인은 비록 불만이 많았지만 소요공자가 이미 멀리 간 것을 보자

즉시 뒤따라 급히 물러갔다.

흑옥인마가 괴소를 쳤다.

 

"이 인마는 오늘에서야 정도 아닌 다른 사도를 위해 일한 것이 시간 낭비였다는 것을 알았다.

삼십 년 동안 어두운 동굴 속에서 고생 끝에 연마한 것이 차이가 이렇게 나다니…"

 

그는 웃고 나서 또 길게 한탄을 하며 위중평의 어깨를 툭툭 쳤다.

 

"소형제, 자네 일은 이제 저 여자가 나서서 해줄 테니까,

이 노형은 이제 별로 소용이 없을 것이네. 우리 다음에 또 만나기로 하세."

 

어느새 신형을 날려 유령처럼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강호에서 악명 높은 흑옥인마가 이 짧은 시간에 위중평과 심후무비한 우정의 담을 쌓은 것이다.

위중평은 그가 감정이 풍부하고 일의 옳고 나쁜 것을 분명히 가리는 됨됨이가 마음에 들었는데

섭섭하게 홀연히 떠나다니 그를 나쁘다고 말한 사람들이 야속하기 짝이없었다.

위중평이 멍하니 정신을 잃고 있을 때 금루선연이 그의 옆에 살며시 다가와서

두려운 듯이 불렀다.

 

"평상공, 그날 제가 잘못한 것을 용서해 주시겠어요?"

신가보에서는 위중평이 그녀에게 신경질을 자주 부려서 이번에도 틀림없이

크게 원망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는 금루선연의 옥수를 쥐고 부드럽게 얘기했다.

 

"걱정마시오. 내가 아무려면 혜매한테까지 화를 내겠소?

난 혜매가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소.

그래서 이번에 내가 화산에서 내려온 목적은 비록 명명주재를 상대하는 데 있지만

혜매에게 내 이름을 빌어 쓴 흉수를 찾기 위해서요."

 

금루선연이 눈물을 글썽이며 자기의 친오빠 같은 느낌이 들어 무한히 기뼜다.

두 사람은 한참 마주보고 있다가 위중평이 갑자기 허리춤에서 와황금검을 꺼내

금루선연의 손에다 쥐어 주었다.

 

"이것은 내가 옥탑에서 얻은 것인데 혜매가 쓰기에 알맞을 것 같아서 주는 것이오."

 

금루선연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이 희귀한 금검을 얻어서 기쁜 것이 아니라 위중평의 마음씀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했기 때문에 미소를 띠며 손을 내밀어 받으려고 할 때

돌연 한쪽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애에게 줄 필요없다. 잠시 동안 내가 가지고 있으마."

 

이 목소리는 옥탑단장인의 목소리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아연실색해 하자 다시 얘기를 꺼냈다.

 

"이 검으로 해서 많은 사람의 탐심을 일으켰고,

또 많은 말 썽이 일어나니 잠시 내가 단장으로 가져 가겠다.

어디 누가 다시 이 물건에 손 하나 까딱하는지 두고 봐야지."

추혼천녀는 위중평과 얘기 좀 나누고 싶었으나

예의상 먼저 사부님을 만나뵈어야 하기에 천천히 걸어가서 살며시 불렀다.

 

"사부님…"

 

그러나 옥탑단장인은 이 때 위중평과 금루선연이 주고받는 말에

온 정신을 다 쏟고 있기 때문에 추혼천녀의 부름은 귀에 들리지 않았는데

여기에 또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그녀가 금루선연에게 무공을 전수하여 준 것은 순전히 위중평을 위해서였고

오늘 그들 둘이 매우 다정한 걸 보니 몹시 기뻤다.

그러나 위중평이 와황금검을 꺼내자

이 검의 이해관계가 너무나도 엄청나서 자기가 보관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나선 것이라는 얘기를 꺼내자 금루선연은 갑자기 일전에

자기가 화를 내며 떠났던 장면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 때 그런 태도로 그녀를 대했으니 자기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분에게

너무 배은망덕하지 않은가 하는 한 가닥 죄스러움이 그녀의 가슴을 깨우쳤다.

 

"이모님!"

 

하면서 그녀는 이미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어머니의 품 속을 파고 들 듯

옥탑단장인의 품 속으로 달려들었는데 누가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금루선연의

이런 어리광에는 즉시 활짝 웃으며 그녀를 품에다 안았다.

 

"얘야, 이모는 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비록 청사로 얼굴을 가렸지만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그녀에 대한 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금루선연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여의고 늙은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어머님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기에 옥탑단장인이 그녀에게 베풀어준 사랑이

마치 어머님의 따뜻한 마음 같은 느낌에 그만 설움이 복받쳐서 눈물을 흘렸고

옥탑단장인도 예전의 그런 냉혹한 표정을 완전히 없애고 극히 자상하게 말했다.

 

"얘야 울지 말아라.

너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는 이 이모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찾아낼 것이니까.

 만약 너 혼자서 외롭다고 느껴지면 이제서부터 평상공과 같이 다니도록 해라."

 

이 두 사람의 넘쳐 흐르는 정을 보고 위중평은 몹시 감동을 해 금검을 손에 든 채

멍하니 쳐다만 보았지만 추혼천녀는 이 때 심정이 착잡하고 마음이 몹시 아팠다.

옥탈단장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녀의 유일한 친척이었으나 언제나 싸늘하고

냉랭하게 대했진 지금처럼 한 번도 자상하게 말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위중평과 금루선연이 다정하게

얘기를 주고받는 그 장면이 바로 그녀가 슬퍼하는 최대의 원인이었다.

거기에다 옥탑단장인이 금루선연더러 그와 같이 동행하라고 하니

그것은 그들 둘의 사이를 좁혀 주는 뜻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녀의 심리가 그렇지 않아도 비정상적인데 이런 자극을 받자 더욱더 침울해져

마치 하나의 석고인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멍하니 서 있었다.

옥탑단장인은 금루선연을 위로하고 나서 위중평의 손에 든 금검을 받으며 냉랭하게 그에게 말했다.

 

"일 년 후 천아와 같이 단장곡으로 오너라.

내가 너를 데리고 명명주재를 찾아가야겠다.

이 일은 너의 일에 관계가 크니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말이 끊어지자 그녀는 이미 수십 장 밖으로 폭사해 나갔다.

지금의 장내에는 다시 세 사람만이 남았다.

금루선연이 손수건을 꺼내 얼굴의 눈물자국을 닦고 위중평에게 활짝 웃음을 보이자

그도 자연스럽게 미소를 띄워 보냈으나 추혼천녀가 쓸쓸히 서 있는 것을 보고

급히 가서 말을 걸었다.

 

"추혼누님,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추혼천녀는 지금 새로운 감정에 만약 위중평이 몇 마디 부드러운말로 위로해 주었다면

아마 마음이 좀 누그러졌을 것이지만 첫마디에 묻는 말이 어디로 갈 생각이냐고 하니

이건 자기하고 같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표시하는 것이기에 추혼천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위중평의 말은 들은 척도 안했다.

오히려 위중평이 민망해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 때 금루선연이 앞으로 걸어나와서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추혼언니, 전번엔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이제야 알았어요. 저의 아버지를 살해한 사람은 언니도 아니고,

 평상공도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에요."

 

"그 사람은 어쩌면 너와 커다란 관계가 있을 거야. 거기에다 저 사람의… 연적이…"

 

추혼천녀는 냉랭히 한 마디를 뱉아내고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위중평은 급히 뒤에서 불렀다.

 

"추혼누님, 추혼누님…"

 

위중평은 그녀가 어째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가 버리는지 몰라 쫓아 갔지만

그녀는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금루선연은 천진난만하여 그런 미묘한 심리를 알아차릴 수가 없어

천천히 위중평에게로 걸어갔다.

 

"평상공, 추혼언니에게 뭘 잘못했나요?"

 

위중평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금루선연은 갑자기 추혼천녀가 조금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나

위중평의 팔을 잡고 흔들며 물었다.

 

"평상공, 조금 전에 추혼언니가 얘기했는데 우리 아버지를 살해한 사람이

어쩌면 당신의 연적이라고 했는데 누군지 아시겠어요?"

 

위중평은 막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연적… 나에게 무슨 연적이 있단 말이오"

 

금루선연은 그가 모르는 것을 보자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모르면 그만 두세요. 제가 이미 신가보의 모든 고수들을 전부 내보냈으니

요 며칠 내로 누군가 꼭 알아낼 것이에요…"

 

금루선연은 위중평이 여전히 정신나간 사람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또 말을 이었다.

 

"평상공, 저와 함께 보로 돌아가서 며칠 놀다 오는 게 어때요?

전 지금 곧 보로 돌아가서 보 내의 일을 처리하고 나서

이 세상 끝이라도 돌아다니면서 꼭 원수를 찾아낼 생각이에요."

 

그녀는 담담하게 얘기했지만 눈에서는 두 줄기의 눈물이 어느새 흘러내렸고

아버지의 원수 얘기를 꺼내자

위중평 또한 별안간 울화가 치밀어 주먹을 휘두르며 큰소리로 외쳤다.

 

"아버지의 원수는 꼭 갚아야 한다.

그러니 혜매는 먼저 보로 돌아가시오.

나도 장백파에 가서 장백파를 복흥할 일을 의논 좀 하고 나서

우리 두 사랑이 강호를 누비며 꼭 원수를 찾아냅시다."

 

"그럼 우리 언제 만날까요?"

 

위중평은 약간 생각을 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내가 장백으로 돌아가면 길어도 삼 개월이면 돌아올 수 있을 거요.

그리고 장산도에 가서 옥누님을 만나보고 나서 신가보로 혜매를 찾으러 가겠소."

 

그는 솔직하고 광명정대해서 자기의 행방과 해야 할 일에 대해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금루선연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요. 미옥언니를 찾으러 가는 거죠?"

 

위중평 역시 미소를 지으며 품 속에서 옥함 하나를 꺼내더니 뚜껑을 열었다.

 

"이건 내가 이궁에서 혜매와 옥누님에게 주려고 가지고 온 선물이오.

하나는 와황금검이고, 또 하나는 이 홍옥인데 이걸 옥누님에게 줄 생각이오."

 

금루선연은 홍옥을 받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놀란 듯이 소리를 질렀다.

 

"어마나…"

 

위중평은 이 홍옥을 가지고 있었어도 한 번도 꺼내서 본 적이 없었다.

금루선연의 비명 소리를 듣자 무슨 일인가 싶어 급히 다그쳤다.

 

"무슨 일이오?"

 

금루선연은 홍옥을 위중평에게 건네 주면서 얘기했다.

 

"손에다 넣고 쥐어 보면 알아요."

 

흥옥을 받아보자 손바닥에 따뜻한 난류같은 것이 경맥으로 통해서

체내로 스며드는 것에 이상하다고 느껴지자

즉시 운기 행공하여 진기로서 이 난류를 인도했다.

일주천을 운행한 후에 이 난류가 내공을 수습하는 데에 있어

크나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얼른 옥합 안에다 넣었다.

 

"역시 혜매는 총명하오.

이 홍옥은 내공을 연마하는 사람에게 크나큰 도움을 줄 거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걸 얻으려고 그랬구려."

 

두사람이 인 홍옥에 대해서 얘기를 주고받고 할 때 숲속에서 복면을 한 소년이 숨어서

그들의 행동을 살펴보고 있었는데 옷차림은 위중평과 똑같았지만 밖에 내놓은

한 쌍의 사기(邪氣)가 영롱한 눈동자에 탐욕스러운 불꽃이 번득였다.

소년은 갑자기 냉소를 치더니 번개처럼 몸을 돌려 달려갔다.

위중평은 홍옥을 소중하게 품 속에다 넣은 후 금루선연과 아쉬운 마음으로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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