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28. 구사옥부(九死王符)

오늘의 쉼터 2014. 6. 20. 16:34

28. 구사옥부(九死王符)

 

 

 

위중평은 화산파의 젊은 도사 두 명에 의해 황급히 숲 속으로 끌려 들어가자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으나 안색이 몹시 긴장된 채

그에게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고 연신 손을 저으며 눈짓을 하는 것을 보니

사태가 틀림없이 심각해진 것을 알고 그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의 이목이 두 도사보다 예민하여 자기가 오던 길에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시력을 집중하여 나무 사이로 내다보자 가벼운 미풍이 얼굴을 스치더니

두 개의 길다란 인영이 질풍처럼 앞으로 지나 갔고 두 사람이 멀리 가자

그제서야 두 도사는 숙연하게 위중 평에게 인사를 올렸다.

 

"제자 일명과 일심이 사숙님을 뵙니다."

 

위중평은 웃음을 머금으며 손을 가로저었다.

 

"무슨 인사까지, 조금 전에 저들이 거동이 매우 황급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들이냐?"

 

일명은 즉시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차더니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기가 어렬습니다.

사숙님께서 산으로 돌아가 장문사백님을 만나 보시면 무슨 일인지

상세히 아시게 될 것입니다."

 

위중평은 급히 말했다.

 

"그럼 어서들 가자!"

 

먼저 앞에서 큰 길을 걸어가자 몇 걸음 가지 못해 일심이 갑자기 위중평을 잡았다.

 

"사숙님, 저를 따라 오십시오."

 

그들 둘은 정말 이상했다.

큰 길을 놔두고 그를 데리고 심산속의 오솔길이나 샛길을 골라서만 가는 것이었다.

위중평은 무슨 일이 있는 것을 느끼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그들을 따라

이경이 지나도록 달리자 그제서야 문수도원의 산문에 도착했다.

그는 관문에 도착하자마자 쏜살같이 청허도장의 정실로 달려 급히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이 청량하고 고요한 도관에는 이미 왕년의 그런 정다운 분위기가 사라지고

대신 어두운 먹구름이 가득 고여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청허도장은 위중평이 이미 산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즉 각 정실에서 나와 그를 맞이하였다.

이 노도장은 비록 걱정이 태산같으나 표면으론 여전히 태연한 채

자상하게 몇 마디 안부를 묻고서 동도들에게 사숙님께서 드실 음식을 준비하고

침실을 청소하라고 분부를 내리자 위중평은 성질이 급하여 청허도장과

잠시 안부의 얘기를 주고받고서는 즉시 그에게 물었다.

 

"사형, 요 근래에 강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계십니까?"

 

하면서 자기가 취도에서 돌아오던 길에서 일어났던 얘기들을 모두다

청허도장에게 들려 주자 청허도장의 안면에 수심이 가득 고여 있었다.

 

"네가 얘기한 이 일은 본관에서 최근에 일어난 일과 비교해 보면

깨알만한 정도의 일밖에 안 돼…"

 

하고는 소매 안에서 넓이가 손가락 세 개를 합친 것과 같고 길이 사 촌쯤 되는

화살형의 현옥을 꺼내 위중평의 손에 건네 주었다.

 

"이게 무엇인지 봐라…"

 

위중평이 그것을 받아 살펴보니 현옥의 화살 끝에 징그럽게 생긴

귀신의 머리와 하얀 이빨같이 생겨져 있고 가운데에 두 개의 백골이 교차되어 있었다.

그 위에 순아자생(順我者生)이라는 네 글자가새겨져 있는데

또 그 네 개 주위에 아홉 개의 죽을 사(死)자가 빙둘러서 새겨져 있었다.

그는 한참을 들여다보았지만 별달리 이상한 점을 찾아볼 수 없자

도로 청허도장에게 돌려 주었다.

 

"이건 아마 어떤 사람의 신물인 것 같은데요."

 

청허도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았어. 그러나 신물도 신물 나름이지.

이 신물은 다름아닌 바로 명명주재의 구사옥부다…"

 

이어서 또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화산파는 아마 하늘의 뜻을 다했나 보다. 이런 호겁을 당해야 하다니…"

 

위중평은 확실한 연유를 몰라서 급히 다그쳤다.

 

"사형,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이 때 도동이 들어와 이미 위중평이 먹을 음식을 차려 놓았다고 알리자

청허도장은 일어나서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먼저 식사부터 하고 난 후에 내가 천천히 얘기해 주마!"

 

그러나 위중평은 밥이 넘어갈 것 같지가 않아 청허도장을 바라보며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자 청허도장은 하는 수 없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최근에 일어난 일을 사실대로 얘기해 주었다.

연유는 이러했다.

요 근래에 취도에서 한바탕 치열한 보물뺏기 격투가 벌어졌다.

그리고 옥탑과 이궁의 수수께끼도 풀어졌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사람이 죽고 또 살아서 나온 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으나 소문에 이궁의 모든 보물을 이미 위중평이 찾았다는 것이다.

보물이란 즉 와황금검과 형산홍옥이었고 이 소식이 어떤 사람에게 전해졌는지는 모르지만

온 강호에 즉시 회오리 바람이 휩쓸 듯이 소문이 확 퍼져

이 일로 쉽게 강호에 나오지 않던 많은 흑도의 마두들과 무림의 은거인들도

서로 강호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이 두 가지의 보물에 대한 추구는 장진도보다 더 간절했다.

그리하여 화산과 문수도원이 군웅들의 이목을 받는 대상이 되었고 뜻밖에도

바로 며칠 전에 청허도장이 갑자기 명명주재의 구사옥부를 받은 것이다.

거기에 적힌 내용은 청허도장더러 한 달 내로 위중평을 찾아서

와황금검과 형상홍옥 이 두 가지의 보물을 바치라는 것이었다.

만약 기한을 어기면 관 내의 모든 도사들을 사살한다는 것이었는데

명명주재의 말은 절대자의 명령과도 같아 그 누구 하나 거역하는 자가 있을 수 없었다.

만약 반대하는 자가 나설 때에는 가차없이 잔혹한 수단을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십오 년 전에 신주검성이 참사한 후에 한 번도 강호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때에 뜻밖에도 명명주재가 나타나니 모두들 예기치 못했던 일이었다.

청허도장은 옥부를 받아본 후로는 마음이 매우 다급했다.

때문에 즉시 뛰어난 문하들을 파견하여 사방으로 위중평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는 명명주재의 수단이 악랄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구사옥부가 전해지자

주위에 이미 부하들을 잠복시켜 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한 번 미행당한다면 아무리 날개가 생겨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해도

꼭 잡아내고야 마는 그들의 수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일명과 일심 등

두 명에게 행동을 각별히 조심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위중평은 청허의 얘기를 다 듣고 난 뒤에 준미를 치켜 세우고

눈에서 정광을 쏘아내며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그 명명주재라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위능을 지녔기에

그렇게도 세도가 당당하게 나온단 말이오.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릴 게 아니라 소제가 지금 당장 찾아가 보겠습니다."

 

청허도장은 급히 막으며 엄중하게 말했다.

 

"뭐가 그렇게 급한가.

아직 시간 여유가 스무날 정도 남았으니

천천히 의논해서 방법을 강구하도록 해도 늦지 않아.

더군다나 명명주재의 행적이 신출귀몰해서 그를 찾으려고 해도 쉽지 않을 것이다."

 

위중평은 그제서야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또한가지 알수 없는 일은 십대 문파의 사람들이 저와는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왜 시비를 걸어 오지요?"

 

청허도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은 공교롭게 되었다.

바로 군웅들이 여기저기서 자네를 찾아 미행할 때에 강호에 연달아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이야.

제일 먼저 곤륜파 장문제자인 소건후,

오대파의 굉법선사, 공동파의 칠절검 주목, 괄창파의 마천장수상이

모두 자칭 장백파의 장문인이라는 복면소년에게 살해당했지."

 

청허도장은 잠시 멈추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이 소년은 장백파의 절기를 할 줄 아는 것뿐만 아니라

또 일종의 음독공부를 쓸 줄 아는데 죽음을 당한 사람들에게서

추호의 상처나 흔적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지.

그가 장백파라고 하고 또 무공이 예측할 수 없어

모두들 자네의 소행인 줄 알고 있네.

그건 과거에 신주검성을 살해했을 때 십대 문파가 모두 참가했기 때문이다."

 

위중평은 그제서야 십대 문파가 자신을 적대시하는 원인을 알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을 했다.

 

"이 일튼 내가 한 짓이 아니지만 설사 내가 했다고 해도 이 건 응당히 해야 할 일인데

무엇이 잘못이란 말입니까?

또 장산도주께서 저에게 그런 태도를 취하실 필요가 뭐 있으십니까?"

청허도장은 즉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일은 너무 악랄한 수단을 썼다 뿐이지 별로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일로 해서 신가보주가 피살당한 일이 연관이 되었어.

그가 입은 상처도 십대 문파의 사람들과 똑같은 상세였지.

네가 신가보에서 컸고 또 신천오와 전에 북고봉에서 충돌이 있었기에

모두들 신천오는 네가 죽였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얼굴에는 그늘이 약간 어려 있었다.

"생각을 해봐 잘대해 주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죽였다면 크나큰 잘못이야.

이 일은 그 누구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위중평은 묵연했다.

동시에 뇌리에 금루선연의 그 비통하고 처절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겨우 열 몇 살의 계집 아이인데 이런 돌발적인 변고가 생기다니,

그 슬픔을 감당할 수가 있을까.

더군다나 협의자가 바로 그녀와 제일 친한 친구라는 사실에 그녀는 더욱더

가슴이 메어질 거다. 만약 내가 명명주재의 일만 아니라면

그녀를 도와서 흉수를 찾아내겠는데…

그녀도 지금 나처럼 홀홀단신으로 누구하나 의지할 사람이 없는데… '

 

그가 혼자서 말도 하지 않고 사색에 잠기자 청허도장은 그가연이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골치를 썩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매우 미안스럽게 생각했다.

때문에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얘기했다.

 

"너무 고민하지 말게. 내가 이미 명령을 내려 밖에서 행동하는 동문들을 모두 불렀다.

이번에 그 악마와 전력으로 싸우기로 결심했다…"

 

위중평은 돌연 시선을 위로 쓸어 보더니 별안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지붕의 처마 밑으로 달려가며 동시에 크게 외쳤다.

 

"감히 누가 문수원에 와서 염탐을 하다니…"

 

곧 팔을 앞으로 내밀어 이내 허공으로 잡아갔다.

이 섬궁절계 일식은 옥탑 중의 절학이라 신기하기 그지없고

보통 강호의 고수들은 절대로 빠져 나가지 못한다.

돌연 광소 소리가 일어나더니 하나의 흑영이 마치 독수리가 먹이를 잡아채는 듯한 자세로

밀려오는 경풍을 뚫고 사뿐히 대전으로 내려왔고 거의 같은 시각에 위중평도

흑영의 맞은편에 내려와 두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청허도장은 위중평이 자리를 박차고 처마 밑으로 달려갈 때에만 해도

속으로는 반신반의했었는데 과연 누가 온 것을 보자

이 사제의 이목이 저토록 영민하다는 데에 탄복을 했다.

바로 이 때 위중평이 흑의난발의 키 작은 영감장이와 손을 마구잡고 대전으로 들어오자

청허도장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자 청허도장에게 소개시켰다.

 

"이분이 바로… 무림에 이름을 떨치신 흑옥인마 흑노선배님이시다."

 

청허도장은 인마의 이름을 듣고 깜짝 놀라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제가 어떻게 이런 흥마하고 친구가 되었지.'

 

그러나 겉으로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상냥하게 대답했다.

 

"아! 흑노선배님이시군요. 이거 몰라뵈었습니다. 실례를 용서하십시오."

 

흑옥인마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찾… 반갑지 않은 손님이라고 탓하지 마시오."

 

하면서 추호의 겸손함도 없이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러자 청허도장과 위중평도 따라 앉았다. 도동은 즉시 그에게 차 한 잔을 따라 주었다.

흑옥인마는 며칠 동안 물구경 한 번 못한 사람처럼 꿀꺽꿀꺽 마시고 난 후에서야

위중평을 가리키며 얘기했다.

 

"나는 너의 일로 해서 이 두 다리가 끊어질 뻔했는데 넌 인사치레로 이렇게 나오기냐.

만약 이 늙은이의 뼈가 딱딱하지 않았더면 하마터면 너의 손에 부러질 뻔했다."

 

위중평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저는 노형인지 몰랐습니다."

 

흑옥인마는 돌연 눈을 부릅떴다.

 

"듣기로는 명명주재가 너의 와창금검을 뺏으려고 한다는데 그것이 사실이냐?"

 

위중평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가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화산파에서는 이미 그의 구사옥부를 받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냐"

 

흑옥인마는 입으로 얘기하면서 눈은 위중평의 허리춤에 있는 금색의 검을 살폈다.

위중평은 고개를 쳐들고 미친 듯이 웃어댔다.

 

"설사 내가 그것을 얻었다고 해도 쉽게 누구에게 바치지 않을 것입니다.

명명주재가 뭔데 감히 이 위모를 이래라저래라 하겠습니까?"

 

흑옥인마가 대소를 쳤다.

 

"좋아! 좋아, 뱃심 좋다. 자! 어디 한 번 와황금검을 구경이나 해볼까?"

 

위중평은 크게 놀랐다.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었던 소검이 바로 와황금검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흑옥인마는 어느새 그의 허리춤에서 금검을 뽑아 들었다.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이 진귀한 검이 일단 뽑혀지자 즉시 금광이 폭사했다.

사방의 벽까지도 금색으로 물들어 싸늘한 냉기 속에 한 자루 삼 촌 정도 길이의 검이

분꽃을 토해 내는 것이었다.

위중평은 그제서야 옥탑에서 무심코 줏어든 것이 바로 와황금검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이 검은 예리하다는 것 빼고는 별로 대단한 것도 없는데 어째서 그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불구하고 이것을 빼앗으려고 할까?'

 

그건 그가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이 와황금검은 절금단옥 이외에도 어떤 은밀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위중평만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혹옥인마와 청허도장도 모르고 있었다.

흑옥인마가 금검을 휘두르며 괴소를 쳤다.

 

"허허허, 이런 물건은 갖다 바친다 해도 사양하겠다. 자! 어서 거두어라."

 

위중평은 이 소검이 바로 그 유명한 와황금검인 것을 알자

더욱더 조심스럽게 허리 안에다 넣어 보이지 않게 했고

모두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자 추옥인마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노부는 자리를 골라 다시 연공을 하려고 했는데 구사옥부간

다시 강호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놀라서 화산에 달려온 것이다.

조금 전에 밖에서 이상한 기미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역시 생각대로 문수도원이 이미 노마의 감시 속에 있군."

 

여기까지 얘기하더니 별안간 광소를 쳤다.

 

"흥, 그 노마가 무림의 생사대권을 차지한 지가 수십 년이 되었는데

노부가 어디 이번 기회에 그 명명주재와 한 번 겨루어 봐야겠다."

 

위중평이 급히 염려에 찬 어조로 말했다.

 

"지금 적은 어둡고 우리가 밝은데 그의 소굴을 찾지 못하면 어려울 것입니다."

 

흑옥인마는 그의 말을 듣자 냉소를 쳤다.

 

"그러니까 방법을 강구해야 하지 않겠나?

그의 주요한 표적이 너니까 내일 그냥 아무 일도 없는 척하고 산을 내려가

너의 이름을 빌려 나쁜 짓을 하는 놈을 찾아라.

내가 숨어서 뒤를 따르겠다.

조무라기들이 틀림없이 미행할 테니 그 때에 가서 하나하나 처치해 버리는 거다.

작은 것을 없애면 큰 것이 나오겠지…"

 

위중평은 무릎을 탁 치며 좋아했다.

 

"좋은 방법입니다.

그럼 내일 그렇게 하기로 결정지었습니다."

 

이 방법은 위중평에게 있어 정말이지 일거양득이었다.

그는 이 기회에 자신의 이름을 써서 행흥하는 자를 찾을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금루선연을 대신하여 흉수를 찾아내 자신의 억 울한 죄명을

씻을 수 있기에 청허도장은 아무런 의사도 표시하지 않고 단지 위중평에게

조심하라고만 당부하며 남의 꾀임에 빠져 들지 말라고 거듭 주의시켰다.

그리하여 위중평은 갈 길이 결정되었고 위중평이 다시 화산에 돌아왔을 무렵

염탐을 하고 있었던 조무라기들은 이미 이 소식을 명명주재에게 전해 주었으며

위중평을 추격했던 수많은 강호의 인물들은 명명주재가 두려워서

화산의 경계에까지 오자 돌아가기 시작했다.

때문에 위중평이 화산을 떠날 때 명명주재의 조무라기들만 뒤를 따랐을 뿐

다른 사람이 미행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가 화음을 지나 동관을 통과해서 풍령의 부두사에 도착했을 때

돌연 뒤에서 남삼에 붉은 신발에다 철적을 허리춤에다 찬 사람이 달려왔다.

그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히 담고 있었다.

 

"위형, 오랜만이오. 그렇게 바삐 어디로 가시는 길이오?"

 

위중평이 고개를 돌려 보니 그는 다름아닌 바로 철적왕손 모조음이었다.

이 간사스러운 자를 그는 마음 속으로부터 혐오했다.

그러나 상대가 웃는 낯으로 대하는데 모르는 체할 수도 없어 그냥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난 지금 여량산 신가보에가 보려는 것이오!"

 

철적왕손 모조음은 반가운 듯이 소리쳤다.

 

"그럼 잘됐군요.

나도 신가보에 가는 길인데 우리 짝지어서 갑시다.

그러면 가는 도중의 적막함을 덜 것이오."

 

그러나 그는 이미 신가보에서 쫓겨난 지 오래였다.

그가 위중평과 동행을 하려고 그러는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였다.

위중평은 원래가 매우 고지식글 사람이라

철적왕손이 옛날의 사소한 감정 따위를 다 잊고 자기와

다시 화해하려는 것을 보자 몹시 기뻤다.

 

"내가 신가보에 가는 것은 한편으로는 혜매와 오해를 풀고

동시에 그를 도와서 신가보주를 살해한 흉수를 알아내기 위함이오.

이제 모형과 동행하게 됐으니 정말 다행이오!"

 

철적왕손 모조음은 얼굴에 별안간 기이한 표정이 스쳐갔다.

한 가닥의 살기가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진 것이다.

 

"혜매는 형씨와 사이가 좋은데 오해는 무슨 오해가 있겠소?"

 

위중평이 별안간 화를 버럭 냈다.

 

"어떤 잔인무도한 놈이 신가보주를 살해하고서

그 죄명을 이 몸의 머리 위로 올려 씌우려고 하다니

만약 그 사람을 알아내면 이 위모가 어느 정도 무서운지 보여 줄 테다!"

 

원래 무심코 화풀이를 한 몇 마디의 말이 철적왕손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그는 즉시 말머리를 돌렸다.

 

"위형은 정말 와황금검과 형산홍옥까지 얻었다는데 그게 정말이오?"

 

위중평의 사람됨은 정직해서 원래 거짓을 몰랐다.

그리고 철적왕손과 보 내에서 같이 자라났기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대답했다.

 

"옥탑 위에 기재되었던 무학은 이미 누군가에게 지워져서 보지 못했지만

금검을 한 자루 얻기는 했소. 난 그것을 혜매에게 선물로 줄 생각이오!"

 

그들 두 사람은 각기 마음이 달라 철적왕손은 이 말을 듣자

얼굴에 괴이한 웃음을 띠우고 입을 다물고 더 이상 묻지 않았는데

그 날 밤 두 사람은 영제현에 있는 조그만 주막집에 투숙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철적왕손이 크게 웃었다.

 

"위형, 우리 서로 오래 헤어졌다가 오늘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으니

축하술 한 잔 마셔야 되지 않겠소?

그리고 밤에는 한 이불 속에서 지난 얘기를 해가며 웃어 보기로 합시다.

어떻소? 하하하…"

 

위중평은 비록 술 마시는 것은 즐겨하지 않지만 남의 성의를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서

그가 음식을 시키고 차리는데 내버려 두었고 철적왕손이 간사한 웃음을 띠며

계속 술을 권했으나 위중평은 주량이 작아서 세 번째 잔이 비워지자

얼굴이 붉어져 더 이상 권해도 마시지 않자 매우 정성스럽게 잔에다 가득 부어 놓고

손가락을 살짝 한 번 튕기고 나서 술잔을 들어 그에게 권했다.

 

"위형이 더 안 마시겠다면 이 한 잔만 비우고 나서 식사를 합시다."

 

위중평은 사양하기가 어려웠다.

동시에 술 한 잔 마시는 게 뭐 대단한 거라고 시원스럽게 쭉들이켰다.

그는 이 술에 술아닌 다른 것이 들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철적왕손은 그가 술잔을 비우는 것을 보자 희심의 미소를 짓고는

그에게 닭다리 하나를 집어 주며 일부러 놀란 척했다.

 

"위혈, 술이 취했나 보구려. 자! 침상에 가서 누우시오!"

 

냉큼 일어나 앞으로 가서 부축하는 동시에 오른손 다섯 손가락으로

슬그머니 등 뒤에 있는 봉미, 정촉 두 사혈을 눌러갔는데

손가락이 막 그 부분에 닿으려는 순간 손가락이 한 옆으로 미끌어졌다.

위중평의 몸에서 은은히 한 가닥의 잠재적인 탄력 이 솟아나 가슴이 섬뜩하자

잽싸게 손을 오므리며 그를 살며시 침상에다 뉘이고는 침상 가까이에 가서

두 눈을 부릅뜨고 이 미약에 취한 연적을 노려보며 멍하니 있었다.

 

'설마 그 동안에 벌써 금강불괴의 몸으로 연마했단 말인가…'

 

그러나 이건 그의 쓸데없는 염려였다.

위중평은 비록 여러 가지 무공을 몸에 익히고 있지만 아직 그런 정도까지 도달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어렸을 때부터 현문의 정종내공을 연마했고 또 연이어 영약을 복용하여

공력이 매우 심후한 데다가 요 근래에 또 조화신공을 연마하자

진기가 온몸에 퍼져 있어서 외력이 침입해 오면 자연의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었는데

철적왕손은 그것도 모르고 겁을 먹고 침상 앞에서 정신이 나간 채 잠시 서 있다가

별안간 냉소를 치며 잽싸게 자기의 방으로 돌아갔다.

이 때 위중평이 마신 약의 효과가 크게 발작을 해 대자로 침상에 누워서 인사불성에 빠졌다.

돌연 창문 밖에서 바람이 한 차례 스쳐가더니 복면을 한 소년이 들어왔다.

옷차림은 위중평과 똑같았다.

이 소년은 방에 들어오자 위중평이 마약에 중독된 것을 미리 아는 것처럼 태연하게

앞으로 걸어와서 냉랭히 말했다.

 

"아무리 네가 하늘을 열 번이나 올라갔다. 내려와도 오늘은 본 나으리의 오음살장을

피하기가 어려울걸…"

 

하면서 손을 수평으로 내밀고 한 차례 무형의 음한 경풍을 펼쳐내며 서서히 위중평의

가슴으로 내리치는 바로 이 위기일발의 순간에 돌연 폭갈이 터져 나오더니

흑의에 난발한 영감장이가 마치 귀신처럼 방으로 날아 들어왔는데

사람이 아직 들어오기도 전에 장력이 먼저 밀려와 한 가닥의 먹처럼 새까만 음풍이

소년의 머리 위로 압박해 갔다.

소년은 졸지에 공격을 받자 위중평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발을 미끌어뜨려 비스듬히 피해가며

동시에 전광석화와 같은 빠르기 그지없는 솜씨로 영감에게 삼 초를 공격했다.

이 초식은 괴이하고 악랄했다.

정말 보기드문 솜씨였다.

이 위중평을 구하려는 노인은 바로 흑옥인마인데 그의 무공으로도

 일시에 어찌 할 바를 몰라 잠시 주춤하다 보니

소년은 이미 창문으로 달아난 후였고 화를 버럭 내며 뒤따라 나가 지붕 위로 올라가자

하늘에는 밝은 달이 떠 있고 수많은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을 뿐 시선을 집중시켜

멀리 바라보았으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위중평이 마음에 걸려 오래 지체하지 못하고 즉각 방으로 돌아와 그에게로 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그의 호흡 소리는 균형적이고 입에서 나오는 술냄새가 코를 찔렀다.

흑옥인마는 냉큼 미약같은 약에 중독된 것임을 알고 즉시 상에 있는 물주전자를 들어

그의 얼굴에 뿌렸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위중평이 차츰 깨어나기 시작했다.

두 눈을 뜬 그는 흑옥인마가 곁에 앉아 있는 것을 보자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는데 흑옥인마가 무섭게 꾸짖었다.

 

"큰 적을 눈앞에다 두고 이렇게 정신없이 술을 마시고 주위에 소홀하다니,

어서 운공조식부터 하지 뭘 하고 있느냐!"

 

위중평은 그의 책망의 말을 듣자 자신이 몹시 부끄러워졌다.

그가 급히 진기를 운행하고 있는데 이 때 철적왕손이 앞방에서 점잖은 걸음으로 들어왔다.

 

"위형, 술이 깨었소?"

 

일순 흑옥인마의 예리한 눈이 돌연 크게 떠지더니

두 줄기의 번쩍거리는 시선이 마치 예리한 검처럼 철적왕손의 얼굴을 뚫어져라고

노려보며 깜박거리지도 않았다.

한참 후에야 밤에 우는 새처럼 괴소를 울려냈다.

철적왕손은 도둑이 제발 저리듯이 그의 시선에 몹시 안절부절 못하여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다행히 이 때 위중평이 이미 깨어나 급히 철적왕손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이분이 바로 삼십 년 전에 강호에서 이름을 떨친 남북쌍마 중의 한 분이신

혹옥인마 흑노선배님이시오."

 

철적왕손은 또 한 번 놀랐다.

그리고는 내심 생각했다.

 

'알고 보니 이 마두였구나. 어쩐지 좀 매섭다 했지. 약간 조심해야겠는데… '

 

그는 얼굴에 즉시 아첨의 웃음을 머금고 인사를 올렸다.

 

"아, 흑노선배님이시군요. 후배 철적왕손 모조음이 인사드립니다."

 

흑옥인마는 그 예리한 시선을 갑자기 철적왕손의 겨드랑이 밑으로 던지더니

또 한 차례 냉랭한 냉소를 쳤다.

철적왕손이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어 겨드랑이 밑을 만지니

장삼의 단추가 반 이상이나 채워지지 않았었다.

안색이 변한 그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영감이 정말 무서운데 흥… 이 철적왕손은 네가 하나도 두렵지 않아.

잘하면 한 번 이 노마와 겨루어 봐야겠는데…'

 

이 때 흑옥인마가 또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소형제, 이 시각에 올바르지 못한 친구는 사귀지 않는 것이 좋아…"

 

위중평이 말을 받아서 대답하기 전에 그는 또 이었다.

 

"밖에서 많은 친구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으니

조금 있다가 이 형이랑 둘이서 저 우귀사신들과 한바탕 기분 좀 내자꾸나…"

 

위중평이 바보가 아닌 이상 흑옥인마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할 린가 없었다.

철적왕손이 전에도 그에게 썼던 여러 가지 비열한 수단을 돌이켜 보고

또 오늘 술취한 일을 생각하니 매우 의심스러운 데가 많았다.

그래서 철적왕손에게 공수를 취했다.

 

"모형, 내일 아침 혼자서 길을 떠나시오!

난 흑노선배님과 다른 할 일이 좀 있어서 동행할 수가 없겠소이다."

 

철적왕손은 비록 속으로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은 듯 급히 공수했다.

 

"위형이 바쁘시면 마음대로 하시오. 난 방으로 돌아가서 잠시 쉬어야겠소!"

 

하면서 흑옥인마에게 공수의 예를 취하며 즉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흑옥인마에게 철적왕손은 뒷모습을 보이며 돌연 두 눈을 크게뜨더니

창문밖을 내다보며 싸늘하게 외쳤다.

 

"밖에 그 뉘신데 이렇게 광명정대하지 못하게 도둑놈처럼 숨어서 행동을 하시오.

그래가지고도 영웅이라고 할 수 있소?"

 

위중평은 이 소리에 참지 못하고 몸을 쏜살같이 창 밖으로 날려 지붕 위에 올라섰다가

그만 깜짝 놀랐다.

짧은 시간에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모였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명성이 쟁쟁한 천산삼로인 팔괴신수, 철괴선옹, 추풍축일이었고

멀리서 구변경에서 달려온 과벽지호인 구루쌍마, 백공홍안,

그리고 음양거사 부부들도 있었고

또 최근 강호에 이름이 떠들썩한 젊은 고수들과 인면갈 오행, 온랑자 매려, 상강쌍영,

그리고 도문호객 등이었으며 한 옆에서 있는 사람은 무림의 십대 문파 사람이었다.

소림파 장문인 화암상인에다 무당파의 장문인인 천현도장들이 직접 출도한 것을 보아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위중평은 군웅들을 쓸어본 후에 광소를 쳤다.

 

"여러분께서 이 위모를 그렇게 높이 봐 주시니

여기에 온 목적이 보물을 뺏으려는 것이든 아니면 복수를 하러 온 것이든 막론하고

여러분께 실망을 안겨 드리지 않겠소이다."

 

바로 그 때 흑옥인마도 지붕 위로 올라왔다.

 

"노부는 이미 삼십 년 동안 기분 나는 싸움을 안해 봤는데

오늘은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고현들께서 해주셨으니…

자, 넓은 자리를 찾아서 통쾌하게 싸워보자."

 

하면서 이미 연기처럼 교외로 달려갔고 그리하여 위중평과 장 내에 있던 군웅들은

모두 신형을 날리며 흑옥인마를 따라 넓다란 잔디밭에 도착했다.

흑옥인마는 그들이 도착하자 또 괴소를 쳤다.

 

"헛허허… 좋아! 좋아! 여기가 적당하겠군,

 한꺼번에 덤벼들 테냐? 어서 덤벼라!"

 

그의 괴소를들은 군웅들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리고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흉마가 오랫동안 강호에 나타나지 않다가 어째서 이놈과 친구가 되었지?'

 

자기들도 모르게 일제히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오륙 장 밖에서 세운 채

앞으로 더 이상 나가지 못했다.

화암상인은 손으로 신호를 하면서 천천히 위중평에게로 갔다.

 

"내 먼저 설명해 둘 것은 십대 문파의 사람은 절대로 너의 보물이 탐나서 이러는 게 아니다.

다만 한 마디 묻겠는데 십대 문파는 너와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어찌하여 누차 본파의 밖에서 행동하는 동문들을 독살시켰느냐?"

 

위중평은 냉랭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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