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21. 삼각관계

오늘의 쉼터 2014. 6. 20. 16:16

21. 삼각관계

 

 

장백파의 신임장문 위중평이 사강의 우두머리인 적발교주은 대웅에 도전한다는

소문이 회오리 바람처럼 말 많은 강호에 나돌아 또 하나의 새로운 구경거리가 되었다.

홍모음효는 흑도 중에서도 그 위명이 하늘을 찌르고 그 외에도 이름 높은 고수들이

수두룩하였다.

보통 무림인들은 감히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하는데 위중평이 강호에 발을 들여 놓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입장으로 공개적인 도전을 하였으니 그 용기만 가지고도 탄복을 할 만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완성(完省)의 경내는 많은 무림인이 천 리가 멀다 하지 않고 서로 시합을

구경하러 달려오는 바람에 다시 한 번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한편 위중평은 수월암을 떠나

홀홀단신으로 완성의 경내로 달려왔다.

그는 구월 구일 중양절 이전에 곽산에 도착해야만 했다.

시일을 계산해 보니 아직도 십여 일이 남아 있어 큰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때문에 그는 천천히 걸으면서 생사의 대결을 위한 사전 계획을 세우기로 하였다.

그는 길을 걸을 때 시간을 절약키 위해 일부러 지름길인 산길로 걸어갔다.

위중평이 구화산을 넘어 완산 산맥에 들어설 때 갑자기 자기를 미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처음에는 적발교의 조무라기들인 줄 알았으나 얼마쯤 가다 생각하니

이 사람들은 무공이 뛰어난 듯하였으며 아무리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그의 종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화가 난 그는 순간적으로 초음신법을 전개하여 단숨에 백여 리를 달려와 걸음을 멈추고

커다란 나무 위에 올라가 몸을 숨겼는데 어떻게 생긴 놈인지 낯짝이나 보자는 심산이었다.

바로 그 때 수풀 속에서 노란 꽃사슴 한 마리가 크게 튀어 놀란듯 나왔고 이 때 한동안이나

괴이한 웃음 소리가 일더니 그 노루는 무엇엔가 맞은 듯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전신에 검은 옷을 입은 작은 괴인이 길가에서 뛰어나오더니

한 손으로 노루 목을 잡고 살며시 비틀자 노루의 목이 댕강 부러졌다.

이어서 그는 큰 입을 노루의 입에다 대고는 꿀꺽꿀꺽 피를 빨아먹는 것이었다.

입가에 흘러내리는 선혈을 본 위중평은 나무 위에서 하마터면 토할 뻔했지만

한 가닥의 호기심이 그를 여전히 아무 소리 없이 그 자리에 잡아두고 있었다.

약 차 한 잔을 마시는 동안 그 괴인은 노루 피를 모두 마시고는 고개를 쳐들더니

두 눈에서 섬광을 번쩍거리며 위중평이 숨어 있는 나무를 흘낏 쳐다보고는

한 차례 괴소를 쳤다.

 

"꼬마야, 너도 먹고 싶으냐"

 

이어 손바닥을 나무 위로 향해 슬쩍 밀어내자

노루의 몸뚱이가 가벼운 깃털처럼 위중평을 향해 날아왔다.

위중평은 이미 자신의 행적이 남에게 발각되었음을 알고 나뭇가지를 밟으며

가볍게 허공을 날아 괴인 앞에 내려앉았다.

그 괴인은 피투성이가 된 입을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네가 바로 그 무슨 조모교주(鳥毛敎主)에게 도전한다는 꼬마녀석이구나.

과연 좋은 체격이군."

 

위중평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얼굴을 붉히며 큰소리를 쳤다.

 

"그렇소. 내가 바로 장백파의 문하이고, 지금 홍모음효에게 가고 있는 길이오.

당신은 누군지 이름을 대시오."

 

괴인은 고개를 쳐들고 숫오리 같은 태도를 지었다.

 

"건방진 놈! 감히 이 흑옥인마(黑獄人魔)를 몰라보다니.

너의 사부가 너에게 이야기 하지 않았단 말이냐?"

 

위중평는 냉랭히 웃음을 날렸다.

 

"당신이 무슨 인마이든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고 단 묻고 싶은 건

요 며칠 나를 미행한 이유가 뭐요?"

 

이 흑옥인마는 삼십 년 전에 자선마군과 이름을 날렸던 남북의 쌍마인데

갑자기 실종되자 강호인들은 그들이 벌써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뜻밖에도 자선마군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흑옥인마도 따라서 강호에 나타난 것이니

위중평은 그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알 까닭이 없어서

이렇게 거칠고 난폭한 언어를 사용한 것이다.

만약 위중평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는 벌써 흑옥인마의 독수을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흑옥인마는 다른 날과 조금 다른 데가 있었다.

위중평의 고집이 흑옥인마의 마음에 썩 들었기에 화를 내기는커녕

허허, 하고 광소를 터뜨리기까지 하였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네놈이 감히 이 어르신네에게 달려드니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나. 사실 나에게 급히 제자 한 사람이 필요하다.

정말 이런 사정이 아니었다면 너는 벌써 나의 밥이 되었을 것이다."

 

위중평은 큰소리로 웃었다.

 

"옳아! 나를 미행한 속셈은 나를 제자로 삼으려 했던 것이구나.

가서 거울이나 들여다 보시지요. 자격이 있나 없나를…"

 

흑옥인마는 얼굴을 굳히고 정색하였다.

 

위중평이 그렇게 거칠게 나오면 나올수록 그는 속으로 기쁨을 참지 못했다.

그는 품 속에서 백견지도와 금광이 찬란한 열쇠를 꺼내보이며 말했다.

 

"이놈!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옥탑장진도와 이궁금약은 북고봉에서 한 번 본 일이 있는 터라

위중평은 그걸 모를 까닭이 없었다.

위중평은 그것을 본 순간 가슴이 섬뜩함을 느꼈다.

 

'이 두 가지 물건은 벌써 북고봉의 고목나무 밑의 동굴에서 잃어버린 지가 오래되지 않았는가.

어찌 그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혹시 그가 쪽지를 남기고 간…"

 

그의 추측이 맞아 들어갔다.

 

흑옥인마는 그의 지장음공을 연마하기 위해 자기를 캄캄한 그 동굴에 가둔 지가

약 삼십 년이 되었는데 마침 그날 모두 연마를 완성하고 동굴을 나오려고 할 때

공교롭게도 옥탑단장인이 장진도와 금약을 고목 안으로 던진 것이어서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 두 가지 보배를 손에 넣은 것이었다.

위중평은 이렇게 의문의 꼬리를 풀어 가면서도 겉으론 대수롭지 않는 듯이 냉소를 쳤다.

 

"이런 불길한 물건은 나에게 필요치 않소."

 

흑옥인마는 그가 이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깜짝 놀랐다.

 

"꼬마야!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지! 노부는 시월 소양춘 그 날 바다에 나가 보물을 찾아야 하는데

혼자로서는 힘이 모자라서 그런다. 만약 나를 스승으로 따르겠다면 그 때 꼭 너를 데리고 가지."

 

말끝마다 위중평을 제자로 삼겠다는 소리에 기분이 나빠진 그는 점점 화가 치밀었다.

 

"비켜! 나으리는 아직 갈 길이 멀어 너하고 입씨름할 시간이 없다."

 

초음신법을 이용하여 그의 옆을 지나 곧장 안으로 달려나갔으나 돌연 괴소가 다시 일어나고

흑영이 어른거리더니 흑옥인마가 이미 그의 갈길을 가로 막았다.

 

"잠깐! 우리들의 타협이 아직 결정나지 않았는데 가긴 어딜 가는 거냐?"

 

위협으로는 굴복하지 않고 보물로 유혹해도 들은 척하지 않는 위중평의 든든함에 흑옥인마는

더욱 마음이 끌려 꼭 그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화가 난 위중평은 돌연 일 장을 격출했다.

그 일 장은 그가 홧김에 내놓은 것이라 급하기도 하고 매섭기도 했다.

마치 광풍노도가 휘몰아치는 듯하였다.

흑옥인마는 몸을 굽혀 장풍을 피하면서 말했다.

 

"됐어! 됐어! 이 일 장은 족히 천 근의 힘이 되겠는데…

그래서 네가 이렇게 거칠게 나온 모양이구나. 자! 그럼 강요하진 않겠다.

그러나 난 여전히 네가 볼 일을 보고는 나와 같이 가기를 바란다.

동시에 우리는 평생을 살아가면서 좋은 친구로서 대하는 것이 좋겠군."

 

삼십 년 동안 검은 동굴에서 연마한 흑옥인마는 이미 그 당시의 오만과 난폭한 성격을

버린 것 같았다.

위중평의 계속적인 불손한 태도에도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의 요구를 들어 주기로 하자

위중평은 몹시 난감하였다.

잠시 생각하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진작 그렇게 말했으면 서로 의논할 여유가 있었지 않겠소.

지금 정말이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소."

 

흑옥인마가 크게 웃었다.

 

"소제, 정말 더 이상 날 부끄럽게 만들지 말게.

그 무슨 조교주라고 하는 너의 원수를 내가 대신 처치해 주지."

 

위중평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안 되오. 원수는 꼭 이 두 손으로 갚아야 합니다.

더구나 그와 약속이 되어 있으니 어찌 되든 간에 난 꼭 가야 합니다.

당신의 요구에 승낙한 것은 만약 내가 죽지 않으면 꼭 당신의 제자가 되어 주겠소.

하나 미리 말해 주지만 난 절대로 장진도와 금약이 탐나서 도와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 두시오."

 

혹옥인마가 두 손을 마주치며 크게 웃었다.

 

"좋아, 좋아. 나도 솔직히 말해 두지만 일이야 되든 안 되든 친구로 맺어진 것이니

훗날 무슨 곤란한 일이 있으면 이 인마는 그냥 보아 넘기진 않겠다."

 

위중평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소. 그럼 다음에 만날 장소를 정합시다."

 

"시월 십일 항주의 영은사 안에서 만나세."

 

일순 몸을 획 돌리는가 싶더니 벌써 보이지 않았고 위중평은 그 자리에서 생각해 보았다.

이번 일만은 절대 성공해야지 실패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서

그는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홀연 그도 신법을 전개해 마치 유성이 흐르듯 순식간에 깊숙한 산 속에 파묻혔다.

한편 곽산 적발교의 총단에 있는 홍모음효은 위중평과 삼월의 약속을 해놓고는

계속 전전긍궁하고 있었다.

말을 할 것 같으면 상대는 젖비린내 나는 꼬마인 것이지만 문제는

그 꼬마의 무공으로 보아 자신에게 조금치라도 승산이 없다는 것이다.

수하의 몇 명 당주 뜻에 따라 기한 안으로 그를 처치하기로 한 것이지만

그 계획도 이내 실패하고 말았다.

혁연강이 이끌고 간 한 패가 참패하였고 일곱 향주 중에서 이미 네 명이 손실되었다.

그 때 운괴쌍괴 중의 제 이괴가 두 번째의 방법을 제안했다.

위중평이 산에 오르면 겹겯이 싸서 그와 상대케 하여 그의 진력이 어느 정도 소모한 뒤에

교주가 나서서 싸운다면 승산이 크다는 것이었지만 화산파의 청허도장은 한 수가

더 높아서 벌써 이러한 소식을 전 강호에 퍼뜨렸다.

그러니 홍모음효로선 체면 때문에 그 음모를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하늘이 높고 바람이 시원한 구월 구일 중양절에 유람하러 온 사람들이 끊임없이 줄을 이어

곽산 백장애(百丈崖) 앞의 불약이동(不約異同)으로 많은 무림인들이 모여들었고

소림사의 방장 화암상인, 무당파의 천현도장(天玄道長), 또 천독문의 천독성모,

장산도의 안도주(顔島主) 등 다른 파의 인물들도 속속 도착하였다.

이 사람들이 모인 것은 다름아닌 홍모음효와 위중평의 생사 격투를 구경하기 위함인데

소림의 화암상인과 무당의 천현도장은 평소엔 대문도 출입하지 않았던 분이었는데

이 두 사람은 어찌 된 일인지 단 한 번 위중평에게 마음이 끌려 천 리가 멀다 않고 직접 나와서

응원하기로 한 것이다.

여러 사람이 백장애에 도착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홍모음효가 벌써 군웅들을 데리고

위세가 당당하게 당도하여 웃음을 가득 띤 채 손을 모으고 장내를 한 바퀴 빙 돌았다.

 

"여러 고현들께서 이렇게 먼곳까지와 주셨으니 정말 영광입니다.

제가 대접이 좀 부족하더라도 넓으신 아량으로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잠시 멈추었다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주인공이 도착했는지 모르겠는데…"

 

이 때 절벽 밑에서 말을 받는 사람이 있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증인만 왔고요."

 

하면서 화산파의 청허도장이 화양의 십이도사를 데리고 날으는 새처럼 달려왔다.

흥모음효는 그를 이가 갈리도록 미워했다.

 

"만약 그놈이 오지 않으면 중인은 무슨 낯으로 이 많은 군중들을 대할 것인지 모르겠군."

 

청허도장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런 염려는 마십시오. 만약 위중평이 정말 때맞춰 오지 못한다면

이 중인이 실망시키지 않도록 대신 상대해 주겠소."

 

홍모음효가 음산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더욱 좋지."

 

청허도장은 더 이상 그와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아서 곧장 장산도소주 곁으로 갔다.

모두들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돌연 절벽 밑에서 소리가 들리더니

구주풍인과 안미옥이 달려오고 있었다.

안미옥은 당도하자 곧장 나비처럼 장산도주의 품 속에 뛰어들었으나

구주풍인은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않고 등에 있는 붉은 호로박을 내려 입에다 대고

꿀꺽꿀꺽 마셔댔다.

안미옥은 얼마 전 위중평에게 대해 오해를 품고 있으면서도 어찌 이 먼길을 달려온 것일까?

알고 보니 바로 그날 안미옥이 급히 동굴 안으로 들어갔을 때 구주풍인은 밖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얼마 안 있어 안미옥이 울면서 뛰어나와 달려가자

구주풍인은 무슨 일이 있었나 하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한다.

얼마를 달린 후에 안미옥을 찾아 연유를 캐묻자 그녀는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까닭을 들은 구주풍인은 미친 듯이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이런, 맹추같으니라구. 넌 성질이 너무 급해서 탈이야.

무슨 일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이렇게 성질만 내고 있으니 일을 망쳐 버릴 수밖에…"

 

안미옥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이 말했다.

 

"일이 그렇게 되었는데 뭐 달리 변명할 것이 있어요?"

 

구주풍인은 꿀꺽, 하고 술을 마시고는 다시 정색을 했다.

 

"그놈이 열염흉승의 일 장을 맞은 것이 가볍지가 않았어?"

 

"전력을 다한 일격이었는데 무사할 수가 있어요?"

 

"그러면 됐어. 삼양마화장은 보통의 장력이 아니다.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순음지기가 있어야 완쾌될 수가 있지.

네가 보기에는 그 마녀가 틀림없이 진력을 소모하여 위중평을 구해준 것 같구나.

그리고 상세가 회복되었을 때 그 마녀는 힘에 겨워 쓰러졌는데 은혜와 원한을

분명히 하는 사람으로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

 

안미옥은 한참이나 생각해 보다가 구주풍인의 말이 옳음을 알고는 즉시 후회하기 시작하였다.

아무튼 애정에 빠져든 사람은 만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용서해

주는 법이었고 구주풍인은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키워서 그녀의 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알기에

구주풍인은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그녀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이 맹추야, 너도 여기서 애만 태우지 말고 곽산으로 가자. 위중평과 홍모음효의 약속기간 안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안미옥은 부끄러운 듯이 몸을 비꼬며 말했다.

 

"누가 그 사람을 만나러 간대요?"

 

"정말이냐?"

 

안미옥은 깔깔대며 구주풍인의 손을 잡고 곧장 달리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구주풍인과 안미옥은 시간에 조금의 차이도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안미옥은 아버지의 품에 안겼을 때 갑자기 흑심수사가 홍모음효의 등 뒤에서 있는 것을 보고는

안색을 급변시키며 검을 뽑아들고 장내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흑심수사, 이리 썩 나오지 못하겠느냐?

일 장의 원수는 오늘 본 낭자가 기필코 청산하고 말겠다."

 

이 한 마디는 정막한 산골에 불을 지른 듯 모든 군웅들이 웅성대기 시작하였다.

그 때 구주풍인이 광소를 쳤다.

 

"하하하… 좋아, 좋아! 암 그 빚은 꼭 갚아야지."

 

흑심수사는 살짝 홍모음효의 눈치를 살피더니 장내로 걸어나와 큰소리로 외쳤다.

 

"이 죽지 못한 귀신 같은 놈! 싸울 용기가 있느냐?"

 

말이 아직 끝나기도 전에 돌연 안미옥은 장산도의 진산진보인 청조검법을 전개했고

순간 검기가 하늘을 뒤덮고 바람이 마치 예리한 칼날처럼 흑심수사를 휘두르는 검날 아래

잡아 묶었다.

흑심수사는 약 삼 개월 동안 안미옥의 공력이 이렇게 급진전한 것을 보자 몹시 놀랐다.

장산도주는 자기의 사랑스런 딸의 무술이 점점 늘어나고 진법이 마치 큰 바다처럼

무한한 경지에 도달한 것을 보자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론 가상하기도 하여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웃음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한편 홍모음효는 제일 아끼는 제자 흑심수사가 자신의 무공을 태반이나 익혔으니

장산도주와 싸워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마음이 든든하였으나 고개를 돌려

장내를 본 후에 그는 이마를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운괴쌍괴는 누구보다도 교주의 성질을 잘 알고 있는 터라 교주의 이런 표정을 보자

그 뜻을 알아차리고 형제들에게 눈짓하여 함께 장내로 들어갔다.

이런 거동이 장산도주의 눈길에서 벗어날 리가 없었다.

이 때 팔도(八島) 어부들은 두 패로 갈리어 운괴쌍괴의 행동을 아주 면밀히 감시하기 시작하였다.

홍모음효의 옆에 있던 복수당주 혁연강이 이런 정경을 보고는 냉랭한 웃음을 터뜨렸다.

 

"저게 무슨 짓이냐? 어디서 덤벼들라고…"

 

이어 몸을 한 번 세차게 날려 장내로 들어왔다.

쌍방이 모두 검을 뽑아들고 막 싸움이 벌어지려는 순간 장내에 비참한 비명 소리가 울렸다.

안미옥의 해저동교(海底瞳蛟) 일 초가 흑심수사의 팔에 커다란 상처를 내자 선혈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흑심수사는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안미옥은 더 이상 추적하지 않고 검을 거두며 장산도주의 곁으로 돌아왔다.

이 많은 천하무림의 군웅들 앞에서 당당 적발교주가 한낱 연약한 여자에게 당하다니

적발교는 솟아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어 큰소리로 외치며 대여섯 명이 앞으로 달려나왔다.

갑자기 멀리서 매우 처량한 휘파람 소리가 들리자 군웅들은 모두 놀랐다.

이 때 홍모음효가 대갈하였다.

 

"주인공이 도착할 테니 빨리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할까?"

 

또다시 두 번째의 커다란 웃음 소리가 절벽 밑에서 들려 왔다.

마치 용이 몸을 치고 하늘에 오르듯 몇 번 뜀박질을 하자 절벽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강한 바람이 몰아치더니 청아한 소년이 멈춰 섰는데 그가 바로 위중평일 줄이야…

잠시 후, 장내에 내려온 위중평은 군웅들에게 예를 차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도중에 들개들이 너무나 많아서요."

 

두말 할 것도 없이 들개란 물론 적발교의 조무라기를 가리키는 말이었기에

수많은 적발교도들은 불만이 가득하여 큰 소동이 일 듯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였으나

그는 이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홀연히 홍모음효를 향해 노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홍모음효! 그래도 할 말이 있느냐? 어서 목이나 내놓아라."

 

이런 단도직입적인 말에 홍모음효는 화가 치밀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른다더니 내가 널 두려워할지 알고 그러느냐?

노부는 단지 이 일에 오해가 있을까 두려워서 찾아 왔는데 오늘 더 이상 할 말은 없고

어서 솜씨나 좀 보자."

 

그는 또 말을 이었다.

 

"노부는 지주이니 귀빈께서 먼저 시작해 보시지."

 

위중평은 원수를 보자 화가 치밀어 정서가 심히 격동되어 충혈된 두 눈에선 당장에라도

불길이 튀어나을 듯했다.

그는 되도록 흥분을 가라앉혀 진기를 모으고 큰소리로 외쳤다.

 

"받아라!"

 

순간 일 장이 곧바로 격출해 나갔디.

이 일 장은 팔 성의 공력을 쓴 것이라 한 가닥의 급한 광풍노도한 파도처럼 휘몰아쳤다.

홍모음효는 수십 년 동안 정수해 온 내력이 대단히 심후했지만 그래도 그 소년의 공력이

어떠한지 알아볼 셈으로 장풍이 밀려올 때 손을 들어 막아보았으나 경력이 폭발하여

세차게 맞부딪쳐 폭음과 함께 먼지가 일어나는 가운데 양측은 모두 뒷걸음질을 시작하였다.

쌍방은 모두 이번 일 장을 통하여 훌륭한 적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위중평은 쉴새없이 손을 뒤집어 단숨에 이십여 장을 내놓았다.

홍모음효는 위중평이 이십여 년에 벌써 이렇게 웅후한 공력을 가졌다는 사실에 몹시 놀라

잠시 멍하고 있을 때 위중평의 미친 듯한 장력이 다시 몰아쳤다.

홍모음효는 위중평이 미친 듯이 전력을 다해 싸우는 것을 보고 속으로 냉소를 쳤다.

 

'좋다. 있는 대로 발광을 해봐라.

때가 오면 이 노부가 따끔한 맛을 보여 주지.'

 

하고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것을 피하여 오른쪽 왼쪽으로 살살 날아다니며

유투(遊鬪)를 시작하였다.

위중평은 노기충천하여 한시바삐 원수의 피를 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장내에

들어서자마자 일 장을 내놓을 때마다 십 성의 공력을 다했다.

연 수십 장을 격출하고 나서야 어느 정도의 진정을 되찾은 후에 비로소 상대방이

유투의 수단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교활한 늙은 여유같은 놈! 내가 아직 어린앤 줄 아느냐?"

 

복수의 일념으로 가득찬 그가 어찌 속아넘어 갈 것인가?

홀연히 신법을 바꾸어 초음신법으로 마치 날아다니는 것처럼 홍모음효를

가운데에 두고 빙글빙글 돌았다.

이러한 광경에 모든 군웅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구주풍인이 이번엔 욕을 해댔다.

 

"죽고 싶어서 저러나, 저놈이 환장을 했구먼…"

 

그러고는 계속 고개를 쳐들고 꿀꺽꿀꺽 숨을 마셨다.

장산도주는 발을 구르며 가벼운 탄식을 연발했다.

 

"에이 참! 이 애가…"

 

안미옥은 더욱 마음이 초조했다.

소리를 질러 경고를 하려 했지만 장산도주가 막았다.

 

"그를 죽이고 싶으냐?"

안미옥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눈물만 글썽일 뿐 아무 소리도 못했다.

모두들 초조하게 걱정하고 있을 때 위중평이 공격의 형태를 바꾸자 마음을 놓았다.

상대적으로 홍모음효는 자신의 생각과 빗나가자 초조해져 하는 수 없이

열부장으로 최후의 결판을 내려고 하였다.

이 열부장은 그 위력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도화신공과 같이 만약 십 성의 경지로

끌어올리지 못하면 사용할 때 너무 많은 진력이 소모된다는 것에서 결점이 많은

공력이었기에 최후가 아니면 좀체로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었으나 홍모음효는

이 때 생사의 최후 단계에 있어 더 이상의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어 전신의 공력을

집중시켜 이 장을 후려치고는 즉시 두 팔을 위로 쳐들자 전신이 별안간 폭음을 내면서

두 팔의 속도가 상당히 둔해졌다.

위중평은 벌써 그의 열부장이 무섭다는 것을 알고 수시로 경계하고 있었다

바로 홍모음효가 운공을 하는 순간 그도 조화신공을 운기하자 갑자기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며 매우 엷은 홍광이 은근히 전신을 뒤덮자 동시에 가슴마저 두근두근하였다.

싸움이 금방이라도 사생결단이 날 것 같자 장내의 공기는 한층 긴장감이 돌았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모두 두 주먹을 꼭 쥔 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핏발을 세우며 일거일동을

주시했다.

바로 이 때 절벽 아래선 한 사람의 남자와 여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남자는 유삼을 걸치고 빨간 신발에 허리엔 첨석을 달았고 여자는 금빛으로 단장해

온몸이 번쩍거렸다.

이 두 사람은 위중평과 제일 밀접한 관계를 지닌 천적왕손 모조음과 금루선연 신혜연이었다.

그날 안미옥에게 패하고는 그냥 보로 돌아왔으나 결코 위중평을 잊지 못하였다.

아무리 철적왕손이 잘 대해 주어도 그녀의 마음만은 사로잡지 못했다.

금루선연은 성격이 매우 교만하고 말괄량이었기에 위중평을 사모하고 있다는 사실과

평생 동안 그를 잊을 수 없다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 놓았다.

이 말을들은 철적왕손은 미칠 듯이 펄쩍 뛰었다.

 

"네가 위중평을 찾는다면 찾아라. 언젠가 내가 그놈을 잡아 없앤다면 그 땐 할 수 없이

다시 나를 찾아 오겠지."

 

마침 강호에서 위중평이 흥모음효에게 도전한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 두 사람은

급히 곽산 적발교의 총단을 향해 살려온 것이다.

그들이 도착할 때가 바로 위중평과 홍모음효가 최후의 격렬한 일전을 벌이고 있는

참이었는데 철척왕손은 전번 고묘 앞에서 그와 위중평이 겨루었을 때 금루선연의

소리에 정신이 흐려 자신에게 옷소매가 뚫린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이번이 그를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그 때 일부러 놀란 척하며 금루선연에게 말했다.

 

"큰일났어. 적발교주가 열부장을 시전하려 하는데 소리쳐서 위중평에게 알려줘야겠는데…"

 

금루선연은 이제 나이 열네 살,

그리고 위중평에게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판이라

철적왕손의 말엔 추호의 의심도 없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소리를 쳤다.

 

"상공! 평상공, 빨리 피하세요. 그가 열부장을 쓰려고 해요."

 

위중평과 홍모음효는 막 운공하여 수탉처럼 상대를 뚫어지게 노려보면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금루선연의 소리를 듣자 깜짝 놀란 위중평은

그로 인해 힘껏 끌어올린 진기가 갑자기 확 풀려나감을 의식할 수 있었다.

홍모음효가 어찌 이 기회를 놓칠 것인가?

그 틈을 이응해서 석파천경(石破天驚)의 일격을 격출해 냈다.

살이 닿기만 해도 갈라질 듯한 강풍이 그에게 휩쓸어 갔다.

위중평은 졸지에 장을 휘둘러 막았으나 꽈르릉, 하는 폭음과 함께 뒤로 대여섯 걸음을 물러섰다.

그는 단지 전방에만 신경을 쓰느라 뒤의 삼 척도 못 되는 곳에 바로 절벽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을 때 노인네들은 그대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있었으나 금루선연과 안미옥은

무엇에 끌리는 것처럼 일제히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뒤… 뒤를 살펴보세요."

 

"절벽이에요!"

 

말투에는 관심과 애정의 빛이 역력했다.

위중평은 홍모음효의 일격을 막아냈으나 속으론 상당한 부상을 입었기에

살며시 운공조식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소리를 듣자 섬뜩해진

그는 누가 뒤에서 습격해 오는 줄 알고 고개를 돌렸을 때 홍모음효의 제 이 장이

틈을 타서 다시 공격해 왔다.

장풍이 일며 들려 오는 파공음 소리에 위중평의 심장은 갑자기 멎은 것 같았으며

그는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마치 별똥이 떨어지듯 천길의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다음은 생사의 의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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